원문서지: Elizabath Grosz, “Deleuze’s Bergson: Duration, the Virtual and a Politics of the Future”, (eds.) Ian Buchanan & Claire Colebrook, Deleuze and Feminist Theo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0, 214-234
들뢰즈의 베르그송-지속, 잠재성 그리고 미래의 정치학
저자: 엘리자베그 그로스
번역: 박주영(박준영
_수유너머 104, nomadia@naver.com)
I. 과거와 미래
변화와 혁신, 미래를 향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페미니즘 정치학에서는 현재 어떤 역설적인 욕망이 있다(그리고 ‘페미니스트’의 의미를 탐색하는 어떠한 정치학도 이것을 최소 규정 조건으로 가져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새로운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에 관한, 광범위하게 유표되어 있는 것, 친숙한 것, 자기-동일적인 것에 관한 몇몇 실행과 활용을 야기한다. 새로운, 급진적 또는 혁신적인 것으로 판별될 수 있는 어떤 것의 항목들은 몇몇 반복, 그리고 몇몇 오래된 것의 재인(recognition)을 담고 있어야 하고, 그와 같은 것에서 이 새로운 것이 출발하는 것 같다. 어떻게 새로운 것, 급진적인 것, 횡단적인 것 - ‘포스트-페미니즘’적인 것 – 이 무언가로부터, 따라서 그 무언가와 관계 하에서의 출발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이해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어떠한 정치적 변형이나 대격변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제기이며, 가장 특별하게도, 페미니스트, 반-인종주의자 그리고 다른 소수자들의 투쟁이 향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어쨌든지 간에 새로움을 생성시키는 것이란 오래된 것을 배제하거나 그것과 전반적으로 단절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존의 문제들, 그 억압과 갈등 또는 투쟁을 극복하는 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이 물음은 그것이 담고 있는 최신의 페미니즘 역사에 속한 일련의 항목들로 손쉽게 재번역될 수 있다. 즉 새로움의 생산, 즉 혁명에 관한, 미래 페미니즘적 격변/가부장제의 전복에 관한 질문으로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혁명이라는 개념, 즉 1960년대의 열광 안에서 풍성해진 것으로 보이는 어떤 항목들은 어떤 오래된 관념, 새로운 것에 관한 도발로서, 그것의 예언적 담론(heralding discourse)으로서 ‘혁명적’이지 않은 관념으로 일단 드러난 것인가? 그것은 사실상 혁명이나 격변에 대한 어떤 빙퉁그러진 자의 휘갈겨 쓴 공식인가? 다시 말해 그러한 혁명이란 예측가능한 이행, 어떤 선규정되거나 유도된 목표(프롤레타리아트의 통치, 자율적인 자기-규제, 사회조직에서 여성의 동등한 몫)를 따르는 이행, 다시 말해 통제되고 규제된 이행인가? 또는 혁명이나 격변이란 불가예측적인(unpredictable) 이행에 있어서 보다 허를 찌르는 생각, 어디로 나아갈지 알려질 수 없고 그것의 결과가 본래적으로 불확실한 장들에서의 변혁인 것인가? 이것은 확실히 위험하고 당황스러운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는 혁명이 상황 장악력을 증진하고, 존재하는 조건들을 개선하거나 현재 존재하는 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제공한다는 그 어떤 보장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실행가능한 대안들의 결여를 빌미로 전세계적인 가부장제의 구조와 보다 실용적이고, 편리하고 내적인 관계를 수용하도록, 그 안에서 일하고 그들과 투쟁할 때 그것의 조건들을 받아들이면서, 자본주의, 국제적인 인종주의 또는 지방정부의 규율과 협력하도록 강제되는가? 페미니즘을 새로움으로 방향잡는 대신, 아마도 우리가 현재 거주하는 이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구조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그리고 그것을 통과해 우리의 길을 협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인가? 페미니스트들은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에 관한 들뢰즈의 독해에 따라 제공되는 몇몇 전략들을 따름으로써 심층을 탐사하고, 보다 많은 추진력과 에너지를 도래할 것들의 개념을 주창하는데 부여하면서, 연합된 정치적 투쟁들을 둘러싼 지루한 담론들, 그리고 제의적 실천들과 떨어져서 그러한 것과 씨름해야 하는가? 미래라는 관념은 유토피아나 비유토피아적인(autopian) 것과의 직접 연결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 유토피아적인 것(the utopic)이란 (정의상) 어떤 장소, 뚜렷한 형태와 특성을 가진 하나의 공간이다. 이 반대의 것, 비유토피아적인 것은 뚜렷한 장소가 아니라, 비-장소, 미규정적 장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소이며 공간이다. 들뢰즈와 베르그송이 자극과 해석을 통해 주는 것은 그것의 공식화, 즉 지속과 시간의 흐름에 가장 적합한 개념에 따라 미래를 개념화하는 어떤 방식이다. 새로움, 미래, 아직 오지 않은 것은 페미니즘의 정치적 투쟁들, 그리고 세계 내 행위에 관한 화용론에 가장 접근된 담론들, 둘 모두의 상호 지평이다. 이것은 힘과 유효성(effectivity)의 철학, 윌리암 제임스, 존 듀이, 베르그송, C.S. 퍼스 그리고 들뢰즈라는 전통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다.
현재의 지향성과 과거 간의 선택을 가지는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으며, 이것은 고정되고 내적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실천적 요구들과 행위들을 기초짓고 틀지우는 것을 향해 이끌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희망이나 바람, 예측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우리의 요소들 바깥에 늘 있는 미래로의 지향은 우리가 살 수 없고 살지 않는 곳이다. 그곳은 우리들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 진입하지 않은 곳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새로움, 미래, 거기서부터 미전개된 잠재성들의 현행화에 대한 물음에 너무나 강력하게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범주들, 개념들, 항들이 사유되어야 하고 새로움이 전개될 수 있어야 하는 조건들을 제공할 필요가 있는 일상의 투쟁들에 관한 시야를 놓쳐 버릴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일상적인 투쟁들의 실용성에만 이끌린다면, 그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틀 안에 갇힌 채로, 그것들을 대체하거나 그것들 너머로 적절하게 넘어갈 수 없게 될 것이며, 무언가 다른 것, 무언가 더 나은 것에 관한 그 어떤 영감이나 요구들도 없이 현재의 즉물성에 끼여 있을 것이다. 새롭고 신선한 미래에 관한 몇몇 개념도 없이, 현재의 투쟁들이 수행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확실히 효과 없는 것으로 남는다.
들뢰즈는 전혀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교설에 대해 대안적 독해, 입장들 그리고 목표들을 제공하고 경합하면서 새로운 것을 사유하고, 미래에 관한 질문에 대해 지식과 사유를 열어 놓는 임무를 수행했던 극히 드문 철학자들 중 하나임이 입증될 것이다. 그의 글을 통틀어 베르그송은 예언적인 주장을 한 인물로 드러나는데, 여기서 베르그송은 현재적인 분화의 잠재성들을 열어 놓는 미래적인 것의 개념과 더불어 살고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몇몇 조건들을 제공하도록 돕는다.[1] 이는 미래의 질문와 생산성에 대해 들뢰즈가 가지는 지속적인 관심을 확증한다.
사유의 실증적 생산성에 관한 들뢰즈의 이해는, 문제들이 사유의 도발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문제가 택하는 것에 대해 응답하는 여러 형식들 안에서 표명되는 사유이기 때문에, 언제나 문제들에 의해 생성된다(이러한 것들은 언제나 또는 심지어 보통은 형식에 있어서 개념적이지는 않다). 문제들은 회화적으로(시각 예술에서), 리드미컬하게(음악이나 시에서), 공간적으로(건축에서) 뿐 아니라 도식적으로(과학에서) 그리고 개념적으로(철학에서) 드러날 수 있다. 급진적인 정치학 만큼이나 고유하게 혁신적인 그러한 사유는 잠재적인 것의 힘에 박차를 가하는 작용을 포함한다. 들뢰즈의 잠재성 개념은 미래의 관념과 연결될 것이고, 따라서 윤리학과 페미니스트 혁명의 정치학 또는 역동적 변화에 관한 물음이다. 혁명, 변형, 그리고 급진적인 미래들에 관한 질문은 페미니즘 정치학의 알려지지 않은 핵심으로 보인다. 페미니즘 정치학은 극복과 변형의 형식으로서 외에는 그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으며, 바로 그 변화의 논리학, 어떤 변화의 화용론을 개시하는 능력이야말로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실천으로서 페미니즘의 공식화에 있어서 중심이다. 문제는 대략적으로 말해도 그토록 많은 시간, 기억 그리고 역사에 관한 질문에 있어서, 시간과 미래성에 대한 질문에 대해 페미니즘 이론의 지원 하에 이루어진 것이 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페미니즘 이론은 만약 근본적으로 미래의 상태로 향하는 질문들이 오로지 과거의 상태와 형식들과 관련하여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면, 지속과 생성에 관한 새로운 개념들을 통해 미래의 급진적인 개방성을 사유하는 보다 더 적합한 원천들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베르그송의 지각과 과학적 지식의 화용론과 공간의 휘말림, 그리고 그것의 지속으로부터의 이접과 미래의 당김은 들뢰즈식 독해의 핵심이며, 이 책의 바로 이 장을 위한 논의 대상이 될 것이다. 지속에 관한 그의 개념은 힘과 미래의 당김을 우선적으로 만드는 시간의 페미니즘적 재배치를 위해 일련의 보다 날카로운 도구들 제공할 것이다.
II. 지각과 활동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핵심 텍스트들, 일차적으로 『물질과 기억』(Matter and Memory, 1988), 『창조적 진화』(Creative Evolution, 1944) 그리고 『창조적 정신-형이상학 서론』(The Creative Mind: An Introduction to Metaphysics, 1992)에 집중한다. 여기서 베르그송은 철학사에서 하나의 입장, 즉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물질과 의식, 공간과 지속 간의 관계를 재배치하는 특유한 입장을 전개한다.[2] 러셀과 화이트헤드로부터 시작되는 과학철학적 전통에 의해 환영받지 못한 형이상학자로 통상 알려지고, 20세기 후반에 광범위하게 무시되었지만, 베르그송은 그의 저작을 적확하게 분류하기 어렵게 만든 바, 생기론적 현상학, 과학적 실용주의 그리고 생리심리학적인 관심의 특이하고 예기치 않은 조합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들뢰즈의 베르그송 독해는 이 장의 목적에 따라, 세 가지 핵심적인 구성 사항으로 구별된다. 첫째, 베르그송의 물질에 관한 이해와 그것의 기억과의 관계, 둘째,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관계들에 관한 그의 생각, 셋째 잠재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 간의 구별에 대한 그의 이해가 그것이다.
『물질과 기억』의 도입부에서 베르그송은 물질을 이미지들의 총체 또는 계열들로 정의하면서, 철학적 관념론과 유물론 양자와의 구별을 명확하게 만든다. 그의 입장은 동시에 두 가지 입장의 구성인자를 잘 보존하는 것이다.
물질이란 우리의 관점에서 ‘이미지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이미지’로써 우리는 관념론자가 재현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많지만, 실재론자들이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더 적은 어떤 존재를 의미한다. 즉 이것은 ‘사물’과 ‘재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 대상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 대상은 그 자체, 내가 그것을 지각하는 바, 회화적이다. 그것은 이미지이지만, 자존적 이미지다.(Bergson 1988: 9-10)
물질은 이미지들의 다양체 또는 총체이다. 이것은 실재론(대상이 관찰자와 독립해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한)이며 관념론(물질이 그것의 다양한 이미지와 일치하고 닮은 한)이다. 베르그송은 기억에 대한 질문으로 가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정신과 물질의 교차 지점에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각과 기억을 가동적(operational)이거나 실리적인(pragmatic) 측면에서, 정신의 핵심 속성들, 현재와 과거로 접근하는 우리의 방식들로 정의한다. 즉 현재는 활동중인 것이지만, 과거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Bergson 1988: 68). 지각은 맹아적이거나 징후적인 활동, 즉 잠재적 활동(action-in-potential)과 연결된다. 지각은 통상적으로 추측되듯이, 기억을 생산하기 위해 과거로 사라지거나 퇴각하지 않는다. 그보다 기억은 근본적으로 지각과 본성상 다르다. 지각이 언제나 즉각적인 미래에 현재를 연결하는 방식인 반면, 기억은 관념표상적이며(ideational), 불활적이고(inactive), 잠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과거는 오직 관념이고, 현재는 관념-운동(ideo-motor)이다”(1988: 68).지각은 우리를 실재적인 것을 향해, 공간으로, 대상으로, 물질로, 미래로 몰아간다. 반면 기억을 우리를 의식을 향해, 과거로, 그리고 지속으로 가게 압박한다. 만약 지각이 우리를 활동으로, 따라서 대상들로 인도한다면, 그런 한에서 대상들은 나의 신체가 그것들에 대해 행위할 가능성을 반영한다.
만약 물질이 자기-존립적인(self-subsisting) 이미지들의 총체라면, 물질의 지각에 있어서 어떤 보다 높은 질서를 가진 이미지, 즉 이미지의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내 신체의 이미지에 속한 조직화하는 힘을 향해 지향된 동일한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물질과 지각 간의 차이는 대상과 주체 간의 차이가 아니라(이는 단순히 그러한 차이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주체가 어떤 특유한 종류의 객체로, 잔여적인 물질을 틀지우면서 신체의 중심적인 조직화하는 위치와 연결되는 그런 객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의 신체는 세계를 구성하는 다른 모든 신체들 가운데 하나의 물질적 객체이다. 우선 나의 신체를 다른 객체들과 차이짓는 것은 나의 신체인 이미지가 행위와 특유하게 특권적인 관계를 가지는 방식이다.
나는 물질을 이미지들의 총체라고 부르며, 물질의 지각은 이 동일한 이미지들로서, 하나의 특수한 이미지, 즉 나의 신체에 관한 궁극적인 행위에 적용된다. (Bergson 1988: 22)
나의 신체는 다른 객체들과 구분되는데, 그것이 나의 의식 안의 특권적인 장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객체들에 대해 주요 변화들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송 자신이 언급했다시피, 나의 지각을 구성하는 이미지들, 그리고 우주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은 다른 지향을 가진 동일한 이미지들이다. 우주를 조직화하는 그것들은 서로 간에 그들 자신의 무차별성으로 존속한다. 반면 신체를 조직화하는 이미지들은 서로 밀착하고 다른 것들을 조직화한다. 베르그송의 저작들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관건적인 것이다. 즉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이미지들, 즉 우주와 신체, 생명 없는 것과 생명 있는 것은 공존하는가? 어떻게 해서 같은 이미지들이 이러한 두 가지 완연히 다른 체계, 즉 하나는 중심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중심이 없는 유형 내부에 속하고, 기능할 수 있는가? 달리 말해 정신과 물질 간의 관계는 무엇이고, 그것들의 공현존의 방식은 무엇인가?
베르그송은 이러한 관계를 상호 지배적인 어떤 것으로 본다. 물질 세계를 구성하는 이미지들과 연결된 체계에 전반적으로 산재되어 있는 것은 생명 체계들, 활동[행위]의 중심들, 미규정성의 지대다. 여기서 이미지들은, 다른 이미지들을 변화와 흐름들에 종속시킴으로써 행위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위치와 전망의 변화들은 이러한 활동의 중심들에 의해 제공된다. 생명은 반응을 통해 어떤 자극을 연장할 필요성에 따라 물질과의 본성적인 차이를 통해 정의될 수 있다. 생명의 형식이 더 단순해질수록, 자극과 반응 간에 더 많은 자동적 성격이 생겨난다. 원생동물의 경우, 지각 기관들과 운동 기관들은 하나이며 같다. 반응은 어떤 기계적 운동과 같이 보인다. 하지만 보다 복잡한 생명 형태들의 경우, 지각적 반응과 운동 반응 사이에 어떤 지연, 불확실성이 존재한다.[3] 그리고 잠재적으로 예상되거나 유기체를 위협하는 지각대상들의 점점 확장되는 원환이 존재하며, 따라서 이것은 유기체의 ‘이해관계’[이익]에 속하는 것이다.
조직화하는 핵 주위에 이미지들의 조직화로서 그리고 자극과 반응 안의 시간적 지연의 삽입으로서 생명, 정신 그리고 지각에 관한 관념은 베르그송의 입장과 어떤 인간주의 또는 신인동형론의 형식을 구분한다. 정신 또는 생명은 특별한 실체들이 아니고, 물질과 본성적으로 다르지 않다. 오히려 정신 또는 생명은 물질과 함께 하며, 물질로서 그리고 그 안에서 산다. 물질은 그것의 비유기적인 것 안에서 그리고 유기적인 형식들 안에서 다르게 조직화된다. 이러한 조직화는 생명이 물질의 관성에 관계하여 전개되는 미규정성의 수준에 의존한다. 아마도 베르그송이 그의 가장 놀랄만한 가설 중 하나를 전개한 것은 바로 이 이유일 것이다. 두뇌는 인간을 동물보다 더 지성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뇌는 관념들, 정신, 자유 또는 창조성의 저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저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조직하지 않는다. 하지만 뇌는 자극과 반응, 지각과 행위 사이에 어떤 지연을 삽입하기 위한 메커니즘인 한에서, 경로 재조정과 재조직화의 능력에 대한 배경인 한에서 여전히 혁신, 창조성 그리고 자유의 가능성을 위한 근거의 한 부분이다.
우리 견해에 의하면 [...] 뇌는 일종의 중앙 전신교환국일 뿐이다. 즉 뇌의 업무장소는 소통을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지연시킨다. 뇌는 그것이 수용하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부가하지 ㅇ낳는다. [...] 다시 말해 신경 체계는 재현을 직조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예비하는데 기여하는 어떤 장치가 결코 아니다. 그것의 기능은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운동 장치를 제공하는 것이며, 또한 주어진 자극에 이러한 장치들의 가능한 가장 큰 수를 제시한다. 뇌가 더 많이 발전할수록, 보다 복잡한 운동 메커니즘들과의 관계를 야기하는 공간의 점들은 더 많아지고 더 멀어진다. 이런 식으로 그것이 우리의 행위에 허용하는 범위는 확장된다. 즉 그 점진적인 완결성은 그 밖에 다른 것으로 구성되지 않는다(Bergson 1988: 31).
두뇌는 지각적인 입력물들을 경로 변경하고 운동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개입한다. 그것은 한 종류의 운동(감각 또는 지각)과 다른 종류의 것(운동력)을 연결하거나 연결하지 않는다. 뇌는 개념적으로 이미지들을 생산하기 위해서 또는 그것들을 반영하기 위해 기능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미지들을 다른 어딘가로부터 행위의 맥락으로 정향하기 위해 기능한다. 이는 자동적인 행위로부터 지각을 탈구하기 위한 것이다. 유기체가 더 많이 발전될수록, 자연에서 지각적 또는 감각적 입력은 더 광범위해지고, 유기체의 행위 범위를 구성하는 객체들의 영역은 더 넓어진다. 뇌는 유기체가 (지각 또는 변용affection을 통해) 수용하는 것과 그것이 행위하는 방식 사이의 다양하고 미결정적인 연결들을 가능하게 하면서, 예측가능성으로부터의 어떤 진정한 자유를 가능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정확히 유기체를 객체들과 그것의 상호작용의 즉각성으로부터 상승시키는 지연 또는 간격이다. 이로써 객체는 주체를 위한 그것들의 이익, 유용성 또는 편의와 관련해 접근되고 기여하는 지각 이미지들을 받아들이는 어떤 거리를 수립한다.[4]
객체는 실재 행위[활동], 즉 무엇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든지 간에 그것의 다양한 특성들에 속한, 그리고 그것과 인과적인 연결에 들어가는 무차별한 행위[활동]와 잠재적(virtual) 행위[활동], 즉 존재하는 것이 추구하거나 그것에 관심을 기울일 만한 종류의 어떤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해 특정 효과들을 발휘하는 잠세적인(potential) 행위[활동] 둘 모두를 포함한다고 이해될 수 있다. 이 두뇌 지연(delay)은 객체의 세계에 대한 무차별한 행위들이 미결 상태로 있도록 하며, 살아 있는 존재가 오직 특정한 객체의 요소들을 이해하도록 한다.
잠재적인 것에서 현행적인 것(the actual)으로의 이 전환을 이루기 위해, 객체를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몇몇 측면들을 감추고, 그 자체의 보다 큰 부분을 가지고 그것을 축소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사물로서 그 주위 안에 감싸여지는 존재 대신에, 잔여적인 것(remainder)이 어떤 그림으로서 그러한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내어야 한다. [...] 여기에는 그 어떤 확증적인 것도 없으며, 이미지에 부가되는 것도 없고, 새로운 것도 없다. 객체들은 단지 그것에 대해 살아 있는 존재의 잠재적인 영향을 드러내기 위해 그것들의 실재 행위의 어떤 것을 포기한다.(Bergson 1988: 36–7)
생명에 의해 우주에 도입된 ‘미규정의 지대들’은 일종의 체(sieve)나 필터를 생산하는데, 이는 잠재적 효과들을 펼쳐 놓기 위해 세계 안의 객체의 실재 효과들의 충만한 확장을 축소시킨다. 이 뇌 간격을 채우는 것, 즉 이 ‘미규정의 지대들’은 생명의 지표로서, 스스로를 감각과 행위 사이에 삽입한다. 그리고 이는 감응, 신체-기억(또는 습관-기억) 그리고 순수 상기(지속) 둘 모두를 풍부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그러한 삽입에 따라 미규정의 지대들은 활기를 띄게 되고 그 타성으로부터 빠져 나와, 발생중인 행위들과 연결된 채 존재할 수 있게 된다.
III. 기억과 지각
베르그송 두 가지 상이한 종류의 기억에 대해 말한다. 하나는 신체적인 습관들에 묶여 있고, 따라서 그것이 행위의 생산을 목표로 하고 거기 거주하는 한 본질적으로 전진적이다. 다른 하나는 고유하게 과거와 묶여 있다. 습관-기억은 습관적 목표나 목적들의 달성에 대한 것이다(차 운전하기, 타이핑, 신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기억’하는 행위들). 그것은 관성적인 과거로부터 가장 행위-지향적이고, 가장 현재-추구적이며 미래-추구적이기 때문에 지각과 행위 사이의 두뇌 간격 안에 있는 일종의 ‘자연적’ 장소를 가진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습관-기억을 상기나 적절한 기억과 구분하는데, 그에게 적절한 기억은 언제나 자발적이며, 탁월하게 특유한 장소, 날짜 그리고 상황에 묶여 있어서, 반복불가능하고 특이하며, 그 자체로 완벽하다(발전하지 않는다).[5]만약 습관-기억이 미래-지향적이라면, 적절한 기억은 언제나 그리고 오직 과거만을 향할 것이다. 습관-기억이 신체-도식을 감각과 행위 사이에 삽입하는 곳에서, 적절한 기억은 어떤 관념을 향해 정향된다. 만약 두뇌 간격이 불확정적으로 연기될 수 있다면, 베르그송은 정확하고 구체적인 기억-이미지가 그 불이행을 채우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정확히 잠을 잘 때 발생하는 것으로서, 행위로부터 지각을 잘라내고, 보다 쉽게 기억-이미지의 삽입을 수용한다. 운동과 행위는 기억-이미지를 떠나 보낸다.
만약 기억이 행위로 이어지는 경로를 따라 운반될 수 있다면, 베르그송에 있어서 우리가 또한 반대 방향으로, 즉 운동과 행위로부터 기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운동은 객체의 ‘완전한’ 지각에 요구되는 것으로서, 지각과 행위를 위한 어떤 지점에 기여하기 위해 실재적으로 다양한 연결들을 떼어냈었다. 지각은 기억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따라서 결코 현재 안에 완전히 착근되지(embedded) 않는다. 만약 다른 것들을 질화하는 지각과 기억 간의 어떤 생산적 순환상이 발생한다면, 다시 말해 만약 어떤 반성적 지각이나 규제적인 상기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기억의 다양한 순환들로부터의 운동이 발생해야 한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순환을 대상들로부터 점차적으로 응축되거나 팽창되는 원환들 안에서의 상기로 회귀 운동과 관련하여 생각한다. 기억은 근본적으로 유동적이다. 즉 이것은 이런 저런 정도에서 응축되거나 팽창된 상태에서 존재할 수 있다. 기억 전체는 동심원적인 집중도에 속한 각각의 순환 안에 함축되어 있다.[6]
IV. 과거와 현재
현재는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이며, 행동 상의 어떤 즉각적인 미래를 예견하는 기능을 한다. 현재는 임박한 행위의 형식이다. 과거는 더 이상 행위가 아니지만, 그것이 비록 그림자로 그리고 부유하는 실존으로 살아간다 해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실재다. 과거는 습관-기억의 형식에서 운동 메커니즘으로 또는 보다 정당하게는 이미지-기억들의 형식 둘 중 하나로, 상기의 형태로 접근가능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기억들은, 베르그송에 의하면 과거가 현재의 조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지각의 조건이다. 과거 자체가 무력한 곳에서는 만약 그것이 현재의 지각과 연결될 수 있다면, 과거는 행위로의 충동을 따라 이끌려 나올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는 그 자체 순수하게 자족적인 것이 아니고, 과거와 미래 둘 사이에 걸쳐 있으면서, 그것의 전제조건으로 과거를 요청하고, 그러는 동안 막 일어나는 미래 쪽으로 지향된다. 지각은 사물에 대한 잠재적 행위의 척도다.
과거는 재현을 돕고 그것이 우리에게 유용하도록 만드는 기억-이미지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 그보다 그것은 기억 안에서만 스스로를 현행화할 수 있는 씨앗이다. 기억은 과거로 접근하는 현재의 양태[방식]이다. 과거는 시간 안에 보존되지만, 기억-이미지, 그 이미지들 또는 요소들 중 하나는 현재의 관심에 따라 선별될 수 있다. 마치 지각이 나 자신의 바깥과 공간 안에 있는 객체들이 존재하는 곳으로 나를 이끌 듯이, 그리고 내가 (들뢰즈가 강도라고 지칭한) 감응을 그것이 발생하는 내 신체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하듯이, 나는 나 자신을 기억이 존속하고 있는 과거의 영역 안에 정립함으로서만 상기한다. 기억, 즉 과거는 따라서 역설적으로 우리 안에 있지 않다. 이는 마치 지각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지각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바깥으로 이끌어 가는데, 그곳은 객체들이 (공간 안에) 존재하는 곳이다. 기억은 우리를 과거가 존재하는 곳(지속 안에) 데려 간다.
베르그송은 현재와 과거에 관한 우리의 개념을 고려하면서 그 가설들 전반을 문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현재가 다소 소진되거나 과거로 미끌어져 들어가는 그 현행의 힘이 고갈될 때, 그것이 기억의 형태로 저장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 가정에 반하여, 베르그송은 만약 오래된 현재가 그것이 여전히 현재인 반면 지나가지 않는다면, 어떤 새로운 현재가 결코 오래된 것을 대체할 수 없다고 논한다. 만약 과거가 그것이 과거인 바 그 현재와 공존하지 않는다면, 과거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의 동시성(simultaneity)에 관한 베르그송의 요청으로 이끈다. 과거는 그것이 존재해 왔던 현재와 동시적이다. 그것들은 ‘동일한’ 시간에 존재한다. 과거는, 만약 그것이 과거인 바 현재와 공존하지 않는다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는 두 가지 연속적인 순간들이 아니라 두 가지 공존하는 요소들을 의미한다. 하나의 현재로서, 지나가기를 멈추기 않는 것이고, 다른 것은 과거로서, 모든 현재가 지나가는 것을 통해서만 멈추지 않는다. [...] 과거는 현재를 따르지 않지만, 반대로 그것이 지나가지 않는 순수조건으로서 그것에 의해 전제된다. 다시 말해, 각각의 현재는 과거로서의 스스로에게 돌아 간다.(Deleuze 1991b: 59)
베르그송은 과거는 만약 우리가 그것에 대해 오로지 현재와 그것의 지나침을 통해서만 접근을 보장할 수 있다면, 한꺼번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논증한다. 우리가 과거에 대해 가지는 유일한 접근은, 과거 자체 안으로 들어서는 운동을 지나, 잠재성 안으로 도약하는 것을 통해서일 뿐이다. 이때 우리는 과거가 우리 바깥에 있으며, 그것이 우리 안에 위치해 있다기 보다 그것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 과거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숨어서 또는 잠재성의 상태로 있다. 만약 우리가 상기, 기억-이미지들을 가진다면, 우리 자신을 그것 안에 위치시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두 가지 운동 또는 단계에서 이것을 행한다. 우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일반적인 과거 안에 정립하며(이는 오직 현재의 즉각성으로부터의 어떤 이탈을 통해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후 과거의 특정 영역 안에 위치지운다. 베르그송은 과거를 일련의 평면들 또는 절편들과 관련해서 파악하는데, 이 각각은 어느 정도 응축된 형태로 전체 과거를 재현한다.[7]
각각의 절편은, 각각이 그 자신 안에 전체 과거를 담고 있다 해도, 그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가진다. 다양한 층위로부터 이끌어내어진 기억은 특이한(idiosyncratic) 점들, 즉 베르그송이 묘사한 바에 따르면 ‘기억의 빛점들(shining points)’ 주위로 뭉쳐질 것이다. 이 점들은 기억이 팽창되는 한에서 다양화 된다(Bergson 1988: 171). 우리가 무언가를 탐색하면서 상기에 기댈 때, 어떤 특정한 절편 안으로 도약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다른 기억의 지점으로 움직이기 위해 다른 도약을 감행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다른 도약을 만들기 위해 현재로 되돌아가야 할지라도, 만약 상기가 어떤 응답도 주지 않으려 하고, 그 자체를 어떤 상기-이미지 안에서 실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된 영역으로 도약해야 한다”(Deleuze 1989: 99). 들뢰즈에 의하면 이것은 다른 이미지들의 체계와 우리의 관계들에 관한 베르그송식의 이해를 위한 모델(또한 그러므로 들뢰즈의 영화 분석에 있어서 베르그송의 적합성도)을 제공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언어적 발화들을 이해하기 위해 또는 개념적 연관을 만들기 위해 현재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어떤 유사한 구조를 통해서일 뿐이다. 시간-이미지의 구조는 또한 언어 이미지의 구조와 사유 이미지의 구조를 담고 있다. 우리가 어떤 발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을 전체적으로 언어 안으로, 일반적인 의미의 영역 안으로 던져 넣음으로써이다. 이는 우리가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란 오로지 이념들의 영역으로 도약함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8] 세 가지 경우 모두에서 이러한 도약은 과거, 언어 또는 사유의 상이한 응축들 안에 내려앉는 지점을 갖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안에 팽창 또는 강도의 상이한 등급에 있어서 전체성 또한 담고 있다.
과거의 온전한 전체와 현재의 각 순간들의 공현존 또는 동시성을 따라 베르그송의 역설적 사유의 다른 함축들이 있다. 각 순간은 그와 더불어 어떤 잠재적 과거를 싣고 있으며, 각각의 현재는 말하자면 과거 전체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인 과거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즉 과거는 과거가 존재하기를 멈춘 후에 도래하는 것도 아니고, 현재가 과거 속으로 얼마간 이동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현재의 조건이 과거이며, 그것은 오로지 현재가 도래하는 선-재(pre-existence)를 통해서만 있게 된다. 베르그송은 연속성, 즉 하나의 현재가(그리고 과거가) 다른 것을 대체한다는 것을 거부하고자 한다. 오히려 그와 같은 실재적 또는 현행적 연속은, 과거와 현재의 잠재적 공현존, 현재의 각 순간에서 과거의 모든 것이 잠재적으로 공현존하기 때문에 발생가능할 뿐이다. 이것은 각 절편들 간에 반복의 관계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각각의 절편 또는 응축/팽창의 수준은 다른 것의 잠재적 반복이지, 확실히 동일한 것의 반복은 아니며, 오직 변형인 것이다. 절편들을 차이화하는 응축 또는 팽창의 수준들은 차이나는 반복의 양태들을 형성한다.[9]
V. 현행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베르그송은 주체적인 것과 객체적인 것(또는 같은 것이지만, 지속과 공간성) 사이의 구분이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 사이의 구별이라는 측면에서 공식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객체, 공간, 생명 없는 세계는 전체적으로 현행적이다. 이것들은 아무런 잠재적인 요소도 갖고 있지 않다. 만약 물질에 관한 모든 것이 실재적이라면, 만약 그 어떤 잠재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것은 객체의 존재가 공간적이라는 의미이다. 객체는 그것이 지속 안에 존재하는 한, 즉 그것이 변화하는 주체인 한, 시간 안에서 더 많은 것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것은 “그것이 어떤 주어진 순간에 우리에게 현전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반대로 지속, 기억 그리고 의식이 세계에 야기시키는 것은 접혀 있는, 어떤 서사, 어떤 머뭇거림의 가능성이다. 모든 사물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물질은 현행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쪽에 놓일 수 있으며, 정신, 생명 또는 지속은 잠재적인 것 쪽에 놓일 수 있다. 생명(지속, 기억, 의식)이 세계에 가져 오는 것은 새로운 것, 잠재적인 것의 현행적 운동, 지속의 실존이다.
따라서 생명있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지속을 가진다. 그것은 정확히 지속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 하기 때문에 그리고 탐색이 없이는 그 어떤 새로움의 창조도 없고, 암중모색 없이는 탐색도 없기 때문에 지속을 가진다. 시간은 바로 이런 머뭇거림이다.(Bergson 1992: 93)
들뢰즈는 베르그성의 두 대립자들 간의 구별, 즉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 그리고 가능한 것과 실재적인 것의 구별에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잠재성/현행성 그리고 가능성/실재성 짝에서, 가능성은 실재적인 것이 결코 될 수 없지만, 현행적인 것을 될 수 있다. 잠재적인 것은 현행적인 것을 사전에 배제하지만,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가능성은 (미래에) 실현된다. 반면 잠재성은 (과거 안에서) 실재적이며 현재 안에 현행화될 것이다. 가능성/실재성 짝을 잠재성/현행성 짝을 위해 거부하는 베르그송처럼, 들뢰즈는 현행화 과정에서 개방되는 실재화의 과정 안에 어떤 닫힘이 존재한다고 논한다. 잠재성에서 현행성으로의 과정은 오로지 지속의 장 위에서만 발생한다. 또 다른 용어로 하자면, 잠재성에서 현행성으로의 그 과정은 따라서 ‘생성’으로 불리워질 수 있다.
실재화란 두 가지 원칙들에 의해 지배되는데, 유사성과 한정(limitaion)이 그것이다. 실재적인 것은 가능성과 닮은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또는 실재성의 범주가 추가된 것으로서, 하나의 정확한 이미지이다. 다시 말해 개념적으로 실재성과 가능성은 동일하다(왜냐하면 칸트가 논증했다시피, 존재는 어떤 질이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재화는 가능성으로의 협소화로서의 한정을 포함하며, 따라서 몇몇은 거부되고 다른 몇몇은 선별된다. 가능성의 장은 실재성의 장보다 더 넓다. 들뢰즈는 이러한 개념의 짝짓기에 포함된 것이 어떤 수행성주의(preformism)라고 주장한다. 즉 실재성은 이미 가능성 안에 수행된다는 것이다. 가능성은 한정을 통해, 여타 가능성들을 도태시키면서, 실재성 속으로 들어간다. 유사성과 한정을 통해 실재적인 것이 주어진 것으로 보여지게 된다.
모든 것이 이미 완결적으로 주어진다. 다시 말해 이 주어진 것은 이미지 안의, 가능한 것의 유사-현행성 안의 실재적인 모든 것이다. 이 교묘한 과정이 분명해진다. 즉 만약 실재적인 것이 가능한 것을 닮는다고 알려지면, 사실상 이것은 실재적인 것이 그 자체에 의해 발생되리라, 그것의 허구적 이미지로 ‘역으로 투사’되리라 기대되기 때문에 또한, 그것이 발생하기 전 어떤 시간에 가능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 아닌가? 사실상 이것은 가능성을 닮은 실재성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성을 닮은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일단 만들어진 실재성으로부터 추상되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불모의 이중체처럼 실재성으로부터 부수적으로 끌려나온다.(Deleuze 1988: 98)
가능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다. 그것은 실재적인 것이 분기하는 효과들을 한정하면서, 여러 가능한 것들로부터 선별하는 한 그 이상이다. 실재화는 창조성과 생산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어떤 과정이며, 따라서 진화적인 변화를 표시하는 혁신과 창조성을 이해하기 위한 적합한 모델을 제공할 수 없다. 가능성을 실재적으로 만드는 것은 단순히 그것의 개념을 부가하거나 변형하는 것 없이 존재를 부여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가능한 것이 실재적인 것을 생한하는지 또는 실재적인 것이 가능한 것을 생산하기 위해 스스로를 역으로 투사하는지에 대해 묻는다. 실재화를 구성하는 유사성과 한정의 과정은, 베르그송에 따르면 충만하기보다 텅 빈 이념 안에 더 적게 존재하는, 질서보다 무질서의 개념 안에 더 적게 존재하는 믿음을 구성하는 철학적 환영에의 종속이다. 사실상 여기서는 무와 무질서의 이념은 존재와 질서의 이념보다 더 복잡화된다. 가능한 것을 어떤 선-재하는 유령적(phantom-like) 실재로 환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새로움을 사유하고 열린 미래, 즉 현재에 얽매이지 않은 미래를 사유할 가능성을 줄인다.
그 실재성으로 진행하지 않는 그것의 가능성은 한번은 실재성이 등장했던 그것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성은 과거 안의 있는 현재의 신기루이며, 우리가 알다시피, 미래는 궁극적으로 현재와 그 신기루 효과에 의해 구성되고, 그것은 계속해서 생산된다. 우리는 내일의 이미지가 이미 우리 현행적 현재에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 현재는 우리가 그것을 붙잡고자 애쓴다해도, 내일이면 과거가 될 것이다.(Bergson 1992: 101)
『차이와 반복』(1994a)에서 들뢰즈는 잠재성이 세 가지 이유에서 가능성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잠재성보다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존재의 위상이 더 의문스럽다. 가능성에 따른 실재성의 획득으로서의 존재는, 설명불가능한 분출이자 모든 것의 체계이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실재적일 경우에 존재를 ‘가지’거나 단지 가능할 뿐일 경우에 존재를 ‘결여’한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맞다면, 가능성이 존재의 모든 특성들을 가진다고 이해할 때, 차이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힘들다. 존재는 일반적으로 한정된 상황이나 맥락에서 공간과 시간 안에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주어지면, 실재성은 절대적으로 그 출현의 맥락과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그 특수한 맥락과 출현의 시공간에서 존재를 생산하는 것은 오로지 잠재성의 실재성 뿐이다. 현행적인 것은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우발적으로 생산된다.
둘째, 만약 가능성이 잠재성 쪽에서 사유된다면, 차이는 단지 제한으로 이해될 수 있고, 가능성과 실재성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일 뿐 본성적 차이는 아니게 된다. 가능성은 잠재성이 문제화하는 동일성 관념, 즉 이미지의 자기-동일성 관념을 함축하며, 이는 가능이든 실재든 똑같이 남는다.
셋째 가능성은 이미 논의된 바, 유사성에 기대어 생산되는데, 반면 잠재성은 결코 그것이 현행화하는 실재적인 것과 유사하지 않다. 현행화가 미분화 운동, 분기와 혁신을 대체하는 동일성의 논리와 유사성의 논리 둘 모두에 저항하는 창오의 과정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Deleuze 1994a: 211–12 참조).
가능성은 이러한 규제적 이해의 초과로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능한 것에 조응하는 어떤 실재성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실재성의 역투사가 과거의 양상으로 되도록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10] 보다 긍정적 의미로 차이는 창조성과 생산성의 차원을 부가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능한 것과 실재적인 것으로부터의 이러한 부드러운 이행을 요구받는다.
현행화는 고유한 창조성과 혁신의 과정, 특이성과 개체화의 생산 과정이다. 가능성/실재성 관계가 유사성과 한정에 의해 규제되는 곳에서 잠재성/현행성 관계는 차이와 창조의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 현행화하는 잠재성 때문에, 그것은 현행화를 위한 조건들을 창조해야 한다. 현행적인 것은 잠재적인 것을 결코 닮지 않는다. 오히려 현행성은 잠재성으로부터의 분화 방식을 통해 생산된다. 현행화는 현행화의 선들이 분기하기 때문에, 다양체들(multiplicities)과 변양들(varieties)을 창조하는 이질적인 항들의 창조를 포함한다. 이것은 어떤 잠재적 통일성으로부터의 다양성의 발산 운동이고, 상이한 계열들과 방향들 안에서의 다양한 발전 경로들이다.
어떤 잠재적 통일성으로부터 현행적 다양성으로의 운동은 혁신이나 창조성, 놀라움의 도약을 요청한다. 실재화(realisation)는 선-재하는 계획이나 프로그램의 구체화이다. 반대로 현행화(actualisation)는 그것에 일어나는 것에 대한 잠재적인 것의 개방이다. 사실상 이것은 생명, 즉 생명의 도약이 필연성에 속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에 대해 닥쳐온 우발성들의 조명 하에 잠재성들의 분화 운동인 것이다.
만약 어떤 잠재적 통일성, 즉 현행화 과정 안의 상이한 수준들에 응축된 전체 과거의 통일성으로부터 분화 운동이 존재한다면, 들뢰즈는 (이 점에서는 베르그송과 다르게) 그것을 기초 짓는 잠재적인 것의 현행적 다양성으로부터 오는 부가적 운동 또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실재성은 자연적인 절합들 또는 본성적 차이를 따라 만들어지는 것만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동일한 이념적 또는 잠재적 지점을 향해 수렴하는 경로를 따라 다시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Deleuze1988: 29). 이 수렴의 지점은 잠재적인 것의 현행화 과정을 만들어 내는 분기와 분화 운동을 재배치하는 것으로서, 기억이 지각 안으로 재삽입되는 지점, 현행적 객체가 그 잠재적 대당을 (다시) 만나는 지점이다.[11]
시간, 물질, 역사, 변화 그리고 미래가 이러한 베르그송적인 무질서에 비추어 재검토될 필요가 있는 한에서, 아마도 잠재성 개념의 개방성은 초월적, 급진적 미래, 즉 직면한 정치적 미래의 개념을 재활성화하는데 있어서 중심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가능성들(뒤따르는 계획들)의 실현에 그것을 묶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잠재성의 예측불가능한 현행화와 연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초기의 행위를 위한 추진력으로 잠재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역동적인 개념, 즉 페미니스트, 반-인종주의자 그리고 다른 정치적 운동들에 기여할 만한 그러한 개념이다. 이는 새로움이 그것과 수반되어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와 같은 도약을 개시하기 위한 정치학의 목표라는 것, 정확히 말해 그 어떤 의식적으로 분명한 계획도 없는 어떤 도약, 어떤 비예측성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 준다. 지각과 행위 간의 바로 그 간격과 같은 이러한 도약은 분화와 분기의 경로들, 즉 현행적인 것 내의 잠재적인 것들의 추진력이 새로움을 야기하는 운동이다. 이 도약은 페미니즘, 그리고 변화를 촉구하는 어떤 정치적 담론이 고무하고 이론화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의 비상한 난해함 – 미래보다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는 의미에서 – 은 미래에 개방될 필요가 있는 이론적 원천들이 신중하게 선택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베르그송과 그를 따르는 들뢰즈는 살아 있는 질문, 즉 어떤 문제에 대해 미래에 제기하는, 그게 아니면 정치학이 표명하고자 하는 문제들에 대해 몇몇 보다 미묘하고 복잡한 도구들을 제공한다.
VI. 페미니즘의 미래?
역사적 탐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고 그것에 따라 반성함으로써 현재를 증진시킬 수 있는 믿음에 기초한다. 과거는 근본적으로 현재와 비슷하고, 이 유사성이 지속되는 한, 과거는 당대의 문제들에 관한 해법을 위한 탁월한 원천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가 더 많이 그리고 더 나은 식으로 과거를 이해할수록, 상당 부분 역사적 사건들의 재현 또는 재구성 – 논지의 변화(예컨대 가부장제의 연속성) - 인 어떤 미래에 직면하기 위한 더 많고 훌륭한 무장을 할 것이다. 이것이 기억이 예술로서 계발되어 온 이유이며, 그리고 학문이 과거를 기념하기 적합한 이유이다.
이는 정확히 베르그송이 문제화한 것, 그리고 들뢰즈의 그에 대한 독해에 부합하는 관점이다. 그와 같은 역사적 관점은 기껏해야 현재를 실재화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며, 미래를 현재의 경향과 속성에 따라 이애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미래는 오로지 현재에 관한 전망적 투사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미래는 현재가 여전히 스스로를 인지하수 있는 어떤 것이지, 우발성과 변형에 열린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기념비적 역사의 장소에서 요구되는 것은 특이성의 역사에 관한 이념이며, 특히 반복가능성 또는 일반화를 거스르는 역사이다. 오직 그와 같은 역사만이 변화의 화용론으로 곧장 다다르는 어떤 정치학에 적합하다. 그 반복들과 흔적들을 통해 그러한 역사는 공명들, 구조들 또는 역사적 과정과 사건의 규칙들을 산출함으로써가 아니라, 잠재성들, 즉 현재가 아니면 어떤 것도 아닌 미래의 잠재성들을 야기함으로써 활성화된다.
베르그송의 지속에 관한 이해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어떻게 미래가 현재와 과거만큼이나, 생명, 투쟁 그리고 정치의 운동과 힘에 결속되어 있는지에 대한 이해다. 지속이 현재와 과거의 공존을 수반하는 반면, 그것은 또한 새로운 것의 지속적인 생성, 즉 사람들에게 닥치는 것에 있어서 사태(생명도 포함하여)의 개방성을 만들어 낸다. 만약 그것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이는 단순힌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고, 객체들에 대한 객체들의 인과적 효과도 아니며, 불확실한 것, 새로움의 펼침과 출현이다.
시간은 모든 것이 단숨에 주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체시키거나, 오히려 그것이 지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교한 조작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이것은 창조과 선별의 운반체가 아닌가? 시간의 실존은 사태 안에 불확정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시간은 그 불확정성 그 자체가 아닌가?(Bergson 1992: 93)
들뢰즈를 통과한 베르그송이 보여주는 것은 생명과 지속이며 따라서 역사와 정치인데, 이는 결코 이미 청사진을 만들어낸 펼쳐진 물질도, 또는 단계적으로 또는 오랜 시간 동안 조각난 채로 발전하는 질적인 것들의 점진적인 통합도 아니다. 지속은 정보들의 집적을 통해서도 지식의 증가하는 취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분리, 분기, 분해를 통해, 즉 우리를 놀라움으로 데리고 가는 느닷없고 예측불가능한 변화를 통해 나아간다. 물질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반면, 지속은 그 자신과 다르다. 운동을 생산하는 것은 물질 속으로 지속의 삽입니다. 행위를 위한추진력을 생산하는 것은 그것의 장애물로서 물질을 수반하는 지속과의 조우다. 또한 이것은 혁신과 변화, 진화와 발전을 위한 추진력이기도 하다.
지속에 관한 이러한 다소 추상적인 반성이 페미니즘 이론과 가지는 관련성은 무엇인가? 그러한 반성들은 (적어도) 하나의 주요한 함축을 가진다. 그것은 만약 페미니즘 이론이 지성적인 것과 그것이 기반하는 정치적인 원천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현재를 미래로 밀어붙이기 위한 힘을 생산하는 이러한 원천들의 잠재성이 전반적으로 그것에 따라 함축되지 않으면, 그것은 미래보다 과거에 더 적합한 정치적 전략들과 개념적 딜레마에 긴박되는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그것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휘말려 있는 그 방식에 대한 신중한 고려를 포함하여, 시간과 생성의 복잡성을 사유할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미래의 정치학으로서 실천적인 효과를 상실해 버릴 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들뢰즈의 저작 안에서 심사숙고되고 발전된 일련의 베르그송주의는 물질과 정신, 시간과 생성, 역사와 미래의 뒤얽힘(intrications)에 관한 보다 섬세하고, 미묘한 이해를 전개하는 페미니즘 이론을 위해 어떤 중차대한 지도원칙을 제공할 것이다.
[주석]
[1]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에 대한 탐구를 신중하게 취급하는 저자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특별히 로널드 보그(Ronald Bogue, 1989)의 『들뢰즈와 과타리』, 폴 더글라스(Paul Douglass, 1992)의 「베르그송의 들뢰즈-베르그송의 복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1993)의 『질 들뢰즈-철학에서의 배움』, 그리고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 1992)의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을 위한 사용자 가이드-들뢰즈와 과타리로부터의 일탈』
[2] 들뢰즈의 베르그송 독해는 특별히 그에 집중하는 『베르그송주의』(1991b)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종종 잠재성과 관련하여 그리고 『시네마2: 시간-이미지』(1989), 『차이와 반복』(1994a) 그리고 펠릭스 과타리와의 공저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의 직관들가 관련하여 여기저기 산재되어 있다.
[3] 베르그송의 주장은 생명의 형태가 보다 복잡해질수록, 더 예측불가능한 응답이 있고, 더 많은 연기(delay)와 간격이 삽입된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해서, 반응이 더 즉각적으로 나오도록 할수록, 더 많은 지각이 어떤 단순한 접촉과 닮아야 한다. 그리고 지각과 반응의 완결된 과정이 필연적 움직임에 의해 나오는 어떤 기계적 충동과 거의 구분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반응은 보다 불확실해지며, 미결정을 위한 보다 많은 여지가 허용되며, 동물이 그것에 관심을 주는 바 행위에 대해 민감해지는 거리는 증가한다. 보는 것에 의해, 듣는 것에 의, 그것은 어떤 보다 더 막대한 수의 사물들과 관련을 맺기 시작하고, 점점더 영향을 주는 거리에 종속된다. 또한 이러한 객체들이 이익을 기약하거나 위협을 가하거나, 그것들의 만족의 날로 그러한 기약과 위협을 연기시키거나 한다. 살아 있는 존재가 지배하는 독립의 정도 또는 우리가 말할 바와 같이, 이때 그 능동성을 둘러싼 독립성의 지대가 그것이 관련되는 사물들의 수와 거리를 선재적으로 추산하는 것을 허용한다.”(1988: 32)
[4] 확인을 거쳐 베르그송은 이러한 행위의 원리가 지각이 그것의 지향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인식 요소라는 것, 즉 그것이 운동과 변화의 방식으로만 지식을 제공하고, 보존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만약 신경체계가 이에 따라 동물의 말단으로부터 일련의 다른 것으로 구축된다면, 점점 더 필요 없어지는 행위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그 진보하는 것이 신경체계의 그것에 의해 규제되는 바, 지각이 마찬가지로 전반적으로 행위를 향하는 것이지, 순수한 인식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Bergson 1988: 31).
[5] 베르그송은 예컨대 잠재적으로 즉각적인 효과를 가지는 습관-기억과 묶이면서 개에 관한 완전한 의미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개는 또한 기억-이미지, 즉 ‘순수 기억’에 접근할 테지만 창조적 사용을 위해 그것의 즉각적인 현재로부터 떼어낸 동물을 아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개가 짖고 꼬리를 흔들면서 주인을 반길 때, 그 개는 주인을 확실히 인지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지란 과거 이미지의 환기와 그 이미지를 현재의 지각과 비교하는 것을 포함하는가? 그것은 오히려 그의 신체에 의해 채택된 어떤 특정 태도에 관한 그 동물의 의식을 구성하지 않는가?그러한 태도는 점차적으로 그의 주인과의 친숙한 관계에 의해 만들어져 왔던 것, 그리고 지금 현재 그의 안에 기계적으로 불러 일으켜지는 주인에 관한 단순한 지각이지 않은가? 우리는 더 이상 멀리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 동물에게서도 과거에 관한 막연한 이미지가 현재의 지각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는 그 전체적인 과거가 잠재적으로 의식 안에서 지목되고 있다고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거는 동물이 매혹적인 현재로부터 그것을 떼어내기에 충분하다는 것과는 관련이 없으며, 그 인지는 사유라기보다는 오히려 생존에 가까운 것임에 틀림없다.”(Bergson 1988: 82)
[6] Figure 1 from Bergson 1988: 105 참조.
[7] 현재는 과거의 무한하게 응축된 순간과 같은 모델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순간에 과거는 가장 직접적으로 신체와 교차한다. 현재가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8] “이 시간-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언어-이미지, 그리고 사유-이미지로 확장된다. 과거가 시간이라는 것은 곧 감각이 언어라는 것이며 관념이 사유라는 것이다. 언어의 과거로서 감각은 그 선재적인 것의 형식이며, 우리 스스로를 문장들의 이미지를 이해하고, 단어들의 이미지를 구별하며 심지어 우리가 듣는 현상들을 구별하기 위해 단숨에 거기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가 혼잡한 방식으로 파악되는 현행적인 청각 기호들을 따라 선택하는 공존하는 순환들, 층들 또는 영역들 사이에서 조직화된다. 우리는 실재적인 탐색에 반응하는 이미지들을 현성하기 위해, 그 순환들 중 하나에 뛰어든다”(Deleuze 1989: 99–100).
[9] 들뢰즈의 독해에서 베르그송은 보다 통상적, 일상적인 이해에 맞서 과거와 현재와 관련하여 체계적으로 일련의 역설들을 전개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스스로를 단순에,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과거의 존재론적인 요소 안에 위치시킨다(도약의 역설). 2. 현재와 과거 사이에는 본성적 차이가 있다(존재의 역설). 3. 과거는 그것이 존재했던 바 현재를 따르지 않지만, 그것과 공존한다(공존의 역설). 4. 각각의 현재와 공존한다는 것은 전체 과거가 통합적으로 응축과 이완(détente)의 여러 수준에 있다는 것이다.”(Deleuze 1988: 61–2) 들뢰즈가 주장하길, 이러한 베르그송주의의 역설은 만약 지속이 공간의 모델에 재현된다면 단지 역설적인 것인데, 이 모든 것은 기억에 대한 보다 평범한 이론들에 관한 비판이다. 이에 관한 명제들은 다음을 포함한다. (1) 우리는 과거를 현재와 함께 구축할 수 있다. (2) 우리는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 점진적으로 지나치며, (3) 그 순간들은 이전가 이후로 구분된다. 그리고 (4) 정신의 작용은 (수준의 변화, 본성적인 도약, 체계들의 재구성이라기 보다) 요소들의 부가에 의해 수행된다.(Deleuze 1988: 61–2)
[10] 베르그송에 따르면, “우리는 마찬가지로 육체와 피를 가진 인간이 거울에 보이는 자신의 이미지에 관한 물질화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실재 안의 모든 것이 이 잠재적 이미지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며, 게다가 거기에는 접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견고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실재적인 것에 필수적인 것보다 잠재적인 것을 함축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이, 그 사람 자신 보다, 그 사람의 이미지에 더 많은 것이 여기에 요구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이미지는, 만약 그 사람이 처음으로 생산되지 않으면, 그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게다가 우리는 거울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Bergson 1992: 102)
[11] 들뢰즈는 이러한 수렴의 순간을 그가 영화적인 시간-이미지의 ‘결정 구조’(crystal structure)라 부르는 것에 관한 이해에 중심으로 삼길 원한다. 이 결정-이미지(crystal-image)는 어떤 현행적 이미지가 ‘그것의’ 잠재적 이미지와 융합되는 것으로서, 양면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의 한 쪽은 지각이며, 따라서 현재, 즉 현행성을 직접 향한다. 반면 다른 쪽은 상기(recollection) 속에, 과거, 즉 잠재성 속에 잠겨 있다. “결정-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시간의 작동인자다. 왜냐하면 과거란 현재 이후가 아니라, 그것과 동시에 구성되며, 시간은 각각의 순간에 서로 본성적으로 다른 현재와 과거로 스스로 쪼개져야하기 때문이다. 또는 같은 말이지만, 그것은 두 개이 이질적인 방향 안에서 현재를 쪼개야 한다. 하나는 미래 쪽으로 행햐 출발하고, 반면 다른 하나는 과거 속으로 떨어진다. [...] 사실상 결정성(the crystal)은 항구적으로 두 구분되는 이미지들을 교환하면서, 지나가는 현재의 현행적 이미지와 보존되는 과거의 잠재적 이미지를 구성한다. 즉 이는 구분되지만 아직 분별불가능한데, 이는 우리가 어느 쪽이 과거며 어느 쪽이 현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Deleuze 1989: 81) 현대 영화의 중심적인 기계론인 결정-이미지는 시간의 바로 그 본질이다. 즉 모든 이미지를 현행적이고 실재적인 것의 이원성으로 나누는 것은 지속 자체인 것이다. 창조되는 것으로서의 각각의 이미지가 동시적으로 시간(지속) 안에 그리고 공간(현재) 안에 놓여진다는 그 사실, 이 이미지의 이원성이야말로 그 시간적 실존의 바로 그 표식인 것이다. 과거는 이런 의미에서 팽창된 현재로 보여질 수 있다. 반면 현재는 어떤 근단적으로 응축된 기억의 형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현행적인 것은 잠재적 상태들을 그 자체 안에 응축하며, 이와 비슷하게, 잠재적인 것은 현행적인 것을 팽창시킨다.(Massumi 1992: 63–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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