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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연속성에 반대한다-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_7장

by Nomadia 2021. 2. 10.

*원문서지: Arjen Kleinherenbrink, Against Continuity: Gilles Deleuze’s Speculative Realism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9), chap. 7

 

7장 기계와 변화

 

[Kleinherenbrink 2019, chap.7, 188]연결적 종합(connective synthesis)은 각 관계가 현행적인 것으로 응축되는 한 기계(또는 기계들)와 한 신체(하나의 관점)의 관계, 즉 우발적 표명이다. 이접적 측면은 그와 같은 사물/사태가 그와 같은 사실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것은 이념들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하는 한 신체의 특이성이나 힘들로서 함축한다. (...) [189]이접적 종합은 우리에게 관계가 여타 기계들이 현행성으로 응축되는 것만은 아니고, 기계의 힘의 어떤 활동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191]기계들 사이의 모든 연결은 이접적이다. 다시 말해 본질들에 환원불가능한 채 남아 있는 잠재적 본질의 국지적 표명인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193]조우한다는 것(to encounter)은 타자들을, 서로 간에 이 관계를 가지는 타자들 없이, 당신과의 관계 속에 끌어 모은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의 시민이지만, 나는 당신의 시민은 아니다. (...) 존재론적으로 나와의 조우로 응축된 어떤 것은 나의 부분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기계가 다른 기계들에 의해 생산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라. 그리고 그것이 한 번 발생하면, 구성 부분들로 즉각 환원불가능하다는 것도 상기하라.

 

[Kleinherenbrink 2019, chap.7, 194]생산한다는 것은 전체 네 겹(four fold)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즉 부분 대상들과 흐름 또는 질화된 감각-사건들의 측면에서 기관 없는 신체와 특이성들인 기계를 생산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어떤 부분대상과의 어떠한 관계는 기계의 코드, 욕망 또는 특이성들의 증가, 감소 또는 대체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이 응축의 적절한 의미이다. 우리가 앞서 인용했던 바, 하나의 식물은 , 대지, 질소, 탄소, 염화물 그리고 황산염을 응시[응축, comtemplates]하며, 그것은 이러한 것들을 그 자신의 개념을 획득하기 위해, 스스로 충족하기 위해(쾌락) 응축한다(contracts).” 우리가 여기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식물이 궁극적으로 이런저런 그 부분들에서 응축하는 것이 그것의 관점을 부여 받은 바로 그 코드라는 점이다. (...) 예를 들어 내가 불어 학습을 하는 동안 많은 기계들이 응축된다. 여기에는 교과서, 알파벳, 강의, 흥미로운 샹송, 다른 언어적 요소들, 라틴어에 대한 희미한 기억 등등이 있다. 내가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동안, 나는 그렇게 나의 역량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계들에 접속하기 위해 치르는 대가는 그것들이 나의 잠정적인 부분들이 된다는 것, 다시 말해 그것들이 나의 능력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새로운 언어를 배울수조차 없을 것이고, 그 어떤 성채도 대포 공격을 견디기 위해 변형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어떤 허리케인도 소들을 탈영토화하기 위한 충분한 힘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195]어떤 기계가 연결을 겪고 기계들을 만남으로 응축하는 동안, 그것은 또한 바로 그러한 내적 물질, 즉 이 연결을 떠받치는 물질 안에서 변형을 겪는다. 아마도 이때 이러 저러한 기계들과 새로운 연결적 종합을 허용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고의 논리와 들뢰즈의 또는... 또는에 대해 썼던 모든 것은 이 생각에 의해 강화된다. 가장 중요하게도, 이것은 한 기관없는 신체가 그 물질을 적합한 개별체들에 의해 모아지거나 대체되는 방법, 그리고 이러한 적합함일 관계들의 어떤 구조적 형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197]기계적인 네 겹이 기계들에 의해 생산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마주치게 되는(encountered) 기계가 분명히 마주치는(encountering) 기계의 능력들의 생성에 참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때 후자는 전자를 함축한다. 제한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내가 수영하고 있는 물이 내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 어떤 연결적 영향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동시에 그것은 이접적 영향을 가짐에 틀림없다. 경험 안으로 바다에 속한 파도들이 응축됨에 따라, 그것들은 나의 일부가 되며, 나의 어떤 일부는 내 특이성을 변경하려는 시도를 한다. 잠재적인 물은 내가 그것과 만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코드가 그것을 만나는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생성자들(generators) 중 하나가 됨으로써 내 코드에 영향을 미친다. 이 간접적인 이접적 기입과정을 통해, 파도들은 마침내 그것들이 수영하는 신체에 의해 경험되는 방식에 있어서 임무를 수행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199]결국, 기계의 모든 감각-사건은 그것의 잠재적 본질의 표현이다. 사실상 핵심은 분명하다. 마주치는(encountering) 기계는 그것이 다른 배치를 만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어야 하지만, 이 다른 배치는 그것이 마주치는 기계에 의해 마주치게 될(encountered)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마주치게 되는 기계는 사건을 규정하는 것에 참여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과정을 부차-모순’(vice-diction, DR 189)이라 부르고 그것이 두 가지 과정을 가지는데, 그것은 문제의 조건에 대해 결정하는 데에, 그리고 해(solution)에 경우를 상관적으로 생성함에 있어서도 개입한다. 첫 번째 경우에, 이러한 것들은 부차적 장의 특수화이며, 두 번째 경우에는 특이성의 응축이다라고 언급한다.

 

[Kleinherenbrink 2019, 5th.Inter, 200]역설적이게도, 하먼은 아마도 다른 어떤 객체-지향 사상가보다, 더 들뢰즈의 기계 존재론에 가깝다. (...) [201]그도 마찬가지로 이 외적-관계성이 객체들에 관한 우리 경험의 부분이 아니라, 객체들 그 자체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해, 다른 객체들도 인간 주체들 못지 않게 망치의 내적 존재에 접근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외재적-관계성의 존재론적 주제화에 있어서, 그는 들뢰즈와 똑같은 논증에 의존한다(23절 참조). 즉 만약 개별체들이 다른 개별체들과의 관계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면, 어떤 것이 그것의 현재의 소여 안에서 소진될 수 있는 모든 것 때문에, 그 어떤 것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Harman 2011a: 12).

 

[Kleinherenbrink 2019, 5th.Inter, 201]들뢰즈가 이러한 면들[객체의 관계적 비관계적 면들]을 신체와 어떤 기계의 특이성들이라고 부르는 반면, 하먼은 그것들을 실재 객체(Real Object)와 객체의 실재 질들(Real Qualities)이라고 지칭한다. 들뢰즈와 마찬가지로 하먼도 다른 객체들에 대한 객체들의 관계적 현전이 두 겹이라는 것을 수립하기 위해 후설을 가져온다(Harman 2011a: 11; cf. 2005: 21-32). (...) [하먼에게] 질은 실재 객체가 아닌 어떤 통합된 객체의 질로서, 그것의 소여에 총체적으로 내재한다. 들뢰즈는 이것을 부분 대상[객체]라고 부르며, 하먼은 이것을 감각 객체라고 지칭한다.

 

[Kleinherenbrink 2019, 5th.Inter, 202]이러한 [하먼의] 간접 인과(vicarious causation)(내 생각에) 들뢰즈의 이접적 종합과 완전히 대응한다.

 

[Kleinherenbrink 2019, 5th.Inter, 202]하먼과 들뢰즈의 철학은 변화가 발생하는 시간에 관한 그들의 관점이 비교될 때 불화한다. 들뢰즈에 관해 하먼은 어떤 개별체에 있어서 실재 질들의 이분(dyad, 들뢰즈에게서는 특이성들)과 실재 객체(들뢰즈의 신체)는 변형가능한(malleable) 본질이다. 하지만 하만에게 있어서, 본질의 변경은 다른 것들과 어떤 개별체의 조우[만남]에 달려 있는 것으로서, 급격하게 일어나거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다.

 

[Kleinherenbrink 2019, 5th.Inter, 204]하먼의 변화에 대한 생각은 두 가지 위험들을 회피하면서 설계된다. 1) 개별체들은 변화할 수 없다. 2) 개별체들은 생성의 항구적인 흐름이다. 하먼은 (1)을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것으로는 어떤 것이 발생할 수 있는 방식과 어떤 것이 존재하는 방식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그는 (2)를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만약 개별체들이 원리적으로 언제나 그들의 만남들로 인해 변경될 수 있다면, 이것은 결과적으로 모든 개별체들이 그들의 관계들로 축소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그래서 외재성 테제를 거스르게 된다.) 이것은 단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들뢰즈에 의하면 힘과 특이성들이 그것들로부터 발생하는 현행성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정의에 따른다는 것을 상기하라. 이 기본적인 사실은 이미 개별체가 그것의 관계들 속으로 해소되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 원리적으로 개별체 안에서 변화의 빈도와 강도는 가능하며, 현행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이 경우에 달려 있다. 달리 말해, 그것은 어떤 기계가 대면하는 우발적인 만남들, 그것의 현재적인 특이성들이 그러한 만남들에 저항하거나 공명하는 방식, 개별체들 주위를 감싸는 힘들(powers)이나 실재적인 질들에 의해 작동되는 그 힘(force) 등등에 달려 있을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5th.Inter, 205]하먼은 예컨대, 어째서 느리고, 증대하며, 그리고 다른 객체들과의 일련의 만남들을 통해 어떤 객체의 실재적 질들의 시간 너머에서 다소 지속되는 구성 각각(어떤 소수적 경향을 추동하는 각각)이 삶/생명을 변화시키는 사건과의 단 한번의 충돌에 따라 변형되고 있는 본질적인 차이일 수 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관계들의 두 가지 상이한 유형들에 관한 이론을 요청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하나는 객체들의 내부를 변경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원리적으로 그러하다. 여기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은 들뢰즈의 기계 존재론은 우리가 그와 같은 이론에서 찾아야만하는 지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206]기계적 네 겹과 그 종합은 어떤 특정하게 아프리오리한 관계들을 수립하지 않는다. [207]이것은 한 객체의 모든 존재적 관계들로 하여금 무엇이 객체의 본질을 생성시킬 것인지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한다. 반대로 우주의 깊이와 높이에 관한 환원주의적 체계에서는, 존재적 사건에 기반한 변화란 결코 본질적이지 않으며, 모든 것들은 어떤 원천과 그것들의 원초적인 관계에 내적인 것으로 남는다. 하지만 기계 존재론에서 모든 것은 적어도 단번에 이루어진다(has a shot). (...) 하지만 단번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발생된 코드는 그것의 발생요소들과 닮지 않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자주 주장하듯이, 되기[생성]란 흉내내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 되기는 현행적인 거으로부터 그것과 닮지 않은 잠재적인 것으로 움직여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성이란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절대적 탈영토화를 의미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209]이 단순한 구분은 몇몇 이상한 결론을 도출한다. 이를테면, 그리스의 중장밀집보병이 있다. 아주 중요한 의미에서, 이 밀집보병은 그 부분들로 스스로를 취한다. 결과적으로 그 코드에 기반하여 그 자체의 구성원들로 다른 기계들을 포함하는 것이 바로 이 중장밀집보병이다. 각 기계는 그 자신의 부분들로부터 생성되어 나올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개별적인 보병들은 서로 간에 비대칭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관계한다. 각각은 그 자신의 잠재적 관점으로부터 현행적인 타자들을 경험한다. 각각의 보병들은 그의 왼편에 있는 다른 보병들을 방어하기 위해 그의 방패를 사용하지만, 이 다른 보병들에 대해 외재적으로 남는다. 그러나 밀집대형의 경험에서, 보병들은 균열과 인접성의 규칙에 따라, 대칭적이자 연속적으로 만나게 된다. 잠재적인 밀집대형은 정말로 보병들을 하나의 단위로 경험한다. [210]게다가 동일한 기계는 물론 기술적인 것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다. 예컨대 일률적인 시간을 재기 위한 기술적 기계로서의 시계와 도시에 표준적인 시간을 재생산하고 질서를 담보하기 위한 사회적 기계로서의 시계가 있다(AO 165).

 

[Kleinherenbrink 2019, chap.7, 210]배치로 있다는 것은 다른 것들과의 만남에서 나온 특이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 “하나의 배치는 정확히 필연적으로 그 연결들을 확장하는 본성적 변화들인 다양체의 차원들에서의 이 증가다”(ATP 8). ‘다양체는 모든 개별체들의 내적 실재성인 잠재적 두 겹을 강조한다. ‘배치는 신체들의 환원불가능성과 그 코드의 잉여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기계들이 항상 생성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보았다시피, 모든 만남은 특이성들의 배치에 참여할 때 단 한번’(shot) 이루어진다. 기계의 내적인 코드 연결은, 그것이 그 모든 것들과 본성적으로 다르다 해도, 많은 것들의 결과로 존재할 수 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211]우리는 각각의 기계적 배치가 어떻게 외부자’(outsider)이면서 변칙적’(anomaly)인지를 계속 강조해야 한다. (...) 따라서 아마도 agencement에 대한 더 나은 번역은 ‘operation’일 것이다. 왜냐하면 ‘assemblage’는 어떤 고정된 일련의 구성요소를 제안하기 때문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212]모든 것들은 존재하는 힘들을 상응시키는 특수하고, 우발적인 만남들에 의존한다. 예컨대 EU는 시민들, 법들, 무역 협정 등등을 배치하고 응축할 수 있지만, 그것이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불가능하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212]현행적 현재들을 그러한 현재들과 본성적으로 구별되는 순수 과거로 응축하는 것은 망각이 실재성의 기초적인 속성이라는 것은 보증한다. 따라서 이접은 욕망의 계보학이 추정하는 형태이다”(AO 25). 배치의 생성에 관한 그와 같은 계보학은 어떤 면에서 역사 없이존재한다. 개별체의 역사는 전반적으로 관계적이다. 그것은 다른 것들이 어떻게 그것에 드러나고 또 그것이 어떻게 다른 것들에게 드러나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213]관점의 잠재성은 그것이 자신 그 자체로 경험한 현행성으로 결코 통합될 수 없다. 동시에 잠재적 두 겹은 언제나 그것의 현행적 객체들과 무한하게 떨어져 있는 바, 그 둘의 본성적 차이로 인해 그러하다. 하지만 현행적 객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잠재적인 것에 대해 현행적이기 때문에, 그것에 극단적으로 가까운 다른 의미 안에 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213]들뢰즈가 분열증적’(schizophrenic)이라고 부르는 것 (...) 또한 그가 착란적’(delirious)이라고 부르는 것은 (...) 현행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사이의 문턱을 가로질러 가는 것으로서, 이에 따라 기계의 강도적 물질이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마찬가지로 관계들의 내용인 현행적 개별체에서의 이동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착란은 따라서 욕망-기계들의 생관 과정에 의해 구성되는 기록과정의 명칭이다(AO 34).

 

[Kleinherenbrink 2019, chap.7, 214]나는 다른 것들이다. 왜냐하면 내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와 전혀 다른 개별체들과의 만남들로부터 배치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란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나의 특이성 또는 욕망은 매번 다양하게 전개된다. 그런데 이것이 정확히 존재가 언제나 위험한 이유이다. 즉 어떤 만남은 우리의 코드나 이념이 수용할 수 없는 어떤 변경을 이끌수 있고, 그 결과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나의 잠재적 자기(self)에 접근할 수 없으므로, 다른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 내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현행성이며, 따라서 나의 본질과 본성적으로 다른 변형이다. 더 나아가 (...) 나 자신에 관한 각각의 이미지는 내가 아닌 다른 기계들에 의해 묶여지고, 형성될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214]감각-사건들이 문제들에 대한 국지적 해결인 반면, ‘순수또는 이념적사건들은 특이성들 자체와 관련된다(LS 52-3, 100, 103, 178; DI 100; TRM 399; WP 156). 이념적 사건은 그 만남 가운데 기계의 잠재적 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또한 우리는 진정한 개별체들은 사건들이다또는 개별체=사건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D 66).

 

[Kleinherenbrink 2019, chap.7, 214]되기의 이접적 종합은 반-현행화(counter-actualisation)를 포함하는데, 이것은 그것이 아닌 것으로 되기라고 말해야 한다. [215]순수 사건이 매번 그것의 현행화 안에 영원히 갇히는 한에서, -현행화는 그것을 해방한다”(LS 161).

 

[Kleinherenbrink 2019, chap.7, 215]개별체의 본질들은 시-공간적 만남의 동력학을 결정한다. 그리고 정확히 상이한 개별체들이 다른 이념들을 가지기 때문에, 모든 기계들이 다른 것들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기계들이 모든 만남들에서 살아 남는 것도 아니며, 모든 기계들이 심지어 다른 것의 실존을 등록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216]만약 기계들이 이해되어진다면, 그때 그 총체적 개념은 [...] 개체-/분화(indi-diffrent/ciation, 개체--/분화indi-drama-diffrent/ciation)이다”(DR 246). 이 길고 난해한 개념은 이제 분석될 수 있다. ‘개체’(indi-)는 우선, 기관 없는 신체의 무관심성[무차별성, indifference]을 가리킨다. 내적 실재성이나 현행적 표면들에서 무엇이 발생하든지 간에, 신체는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불가능한 상태로 남는다. 두 번째로 개체(indi-)는 우리가 이미 보았던 개체화(individuation)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어떤 개별체의 특이성이나 이념이 그것에 의해 현행적 표현으로 응축되는 계기이며, 다시 말해 감각과 질들의 두 겹 객체(흐름에 수반하는 어떤 부분대상)이다. 미분화(Differenciation)는 다른 개별체와 만남으로써 표명되는 것이며 잠재적 내용의 현행화이다. 그것은 개체화를 전제한다. “모든 미분화는 선행하는 개체화의 강도적 장을 전제한다”(DR 247). 이것은 단지 개체화와 미분화 양자가 현행화와 관련되지만, 전자는 잠재적 이념의 관점에서 그러하고 후자는 현행적 감각-사건의 관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을 말한다. 분화(Differentiation)이념의 잠재적 내용의 결정”(DR 207)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그 만남의 결과로서 배치 코드의 생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이 여러 시간에 걸쳐 다양화 하기 때문에, 분화는 이념에 내재하는 차이이다(DR 26). 이 다른 본질은 모든 현행화의 기초 혹은 원인이다. 이 현행화는 잠재적 객체와 본성적으로 구별된다. 분화는 따라서 미분화이다. 스스로를 미분화하는 미분화소(differenciator)”인 것이다(DR xix). 모든 개별체는 그 자신의 현행적 표면들에 의해 감싸인 채로 남는다. 달리 말해, 그것은 그 자신으로부터(그 잠재성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는(현행적으로 생성하는) 어떤 것이다. (...) 각각의 개별체는 1)모든 다른 개별체들로 환원불가능하며, 2)분화하는 본질을 가지는 바, 3)그것은 그 자신의 현행화들과 본성적으로 다르다. 이와 같은 것을 바로 차이 그 자체’(difference in itself)라고 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217] 첫 번째로 그 생성이 어떻게 다른 현행적 개별체들이 언제나 그것의 내적 욕망을 생성한다는 것을 도출하는지, 즉 어떻게 후자가 전자와 본성적으로 구별되는지. 두 번때로 어떻게 그 모든 관계들이 그것의 현행화들에 영향을 주는지. 이 두 가지 변형의 방향은 들뢰즈에 따르면 영원회귀이다(cf, NP xviii, xix, 23-4, 46, 47; DR 6, 11) 그가 쓴 바와 같이, “영원회귀에서 반복은 [...] 차이에 기반한 동일성을 품고 있다”(DR 410. 기계의 실존에 관한 전체 드라마는 이러한 차이 자체와 반복의 선을 따라 작동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7, 218]감각-사건과 그 질들은 두 겹의 현행적 표현을 현성한다. 첫째, 연결적 종합(습관, 응시[성찰], 응축, 생산)은 연결이 무엇인지 기술한다. 관계, 즉 균열과 인접성의 결합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될 수 없는 기계들을 다른 기계에 관한 현행적 경험으로 모은다. 둘째, 이접적 종합(기록하기, 등록하기 또는 기입)은 관계가 뿌리박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기술한다. 어떤 관계는 배치의 본질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제나 그 관계들의 총계를 넘어서는 잉여를 유지한다. 본질 자체는 기계의 내적 물질로서, 다른 개별체들의 응축 덕분에 등록되거나, 기입되거나 함으로써 변경가능하다. 들뢰즈가 생성’[되기]라고 부른 것은 정확히 말해 결코 항구적이고 극도로 활동적인 변화와 같지 않다. 대신에 기계의 본질에서의 변화는 그것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난 관계의 본성과 강도에 의존한다. (...) [219]세 번째 종합은 (...) 기계들 각각의 관계가 마찬가지로 어떤 기계인 것이며, 기계들은 그들 자신 가운데에서 기계들이 다른 기계들을 생성시키는 매개인 것이다. 기계들로 존재하기, 즉 관계들은 현행적인 표면으로 감싸인 채, 그것들의 잠재적 신체와 활력(puissance)억압하는환원불가능한 개별체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