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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연속성에 반대한다-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_5장

by Nomadia 2021. 2. 3.

*원문서지: Arjen Kleinherenbrink, Against Continuity: Gilles Deleuze’s Speculative Realism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9), chap. 5

 

5장 기계들 간의 관계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15]신체[물체]는 하나의 관점이다. 각각의 기계는 그 자신의 능력들에 따라 관계들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기계의 관계들은 그러므로 그 첫 번째 기계가 할 수 있는 것에 따라, 그것의 관계들이 강제됨에도 불구하고, 다른 기계들의 수축[응축, contraction]을 현행화한다. 각각의 개별체는 응축 기계이다(DR 73). 각각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응축이다(LS 225). 다른 기계들과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단일한 것의 연속적인 현상 안에 분기하는 계열이 다양체를 응축하는 것이다(LS 175). (...) 응축[수축]은 단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경험이 결코 기계로서의(qua) 기계를 경험하지 않는 방식이 아니라, 기계를 어떤 특정한 관점에 기초한 현행화 안으로 데려가는 경우를 가리킨다. (...) [116] [따라서] 관계는 응축[수축]이다. (...) 존재론적으로 모든 관계는 응시(comtemplation) 또는 응축 심지어 이완에 속한 실존론적 사례들이다(DR 75). (...) 종합하기, 응시하기 그리고 응축하기는 다른 개별체들을 경험으로 밀어 넣는다. 모든 관계들은 그것의 신체가 아니라, 기계의 응축된 표현과의 간접 접촉이다. 따라서 아무 것도 다른 기계들을 형성하는 기계들의 [이런] 방식을 대체하지 않는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17]다양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응축을 경유해서 다른 개별체들을 모은다는 것이지만, 그것들 각각은 또한 제 차례에 와서 어떤 응축하는 개별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18]응축은 세계의 접착제이다. 실재는 오직 다른 기계가 기계들을 인접한 계열들이나 어떤 단일한 것으로 취급할 수 있기 때문에 활동하게 된다. 그와 같은 인접성과 균열은 심지어 단일한 객체만의 관계에서도 작동한다. 이것은 어떤 관계에 진입하는 것이 연장되어진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며, 어떤 객체도 언제나 그 공간-시간적 맥락에서 인접하기 때문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19]경험이란 인간은 물론이고 비인간에게 언제나 하나의 어떤 흡입공간(plenum)이다. 관계가 개별체들을 그 잠재적 신체들로부터 표현[표명]으로 밀어낸다는 것은 존재론적 사실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19]존재는 그것의 조건에 따라 개별체들과 조우할 수 있을 뿐이며, 기계의 관계는 조우되는 것 안으로 공통관념을 도입함으로써 이념적 연속성이나 인접성이 모든 관계의 고유한 특성이 되는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21]모든 관계는 다른 기계와의 연결접속이다. 연결접속[연접]은 다른 개별체들이 어떤 현행적 표현으로 응축되는 것이다. 신체적 기게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는 들뢰즈가 의미라고 부른다. (...) 들뢰즈는 의미를 기계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계들과 관계 맺을 때 기계가 작동한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 의미는 발생하게 됨에 틀림없는 어떤 것이며, 그것이 들뢰즈가 사건을 의미의 동의어로 사용하는 이유다. (...) [122]의미와 사건은 기계가 관계에 진입할 때 표명되는 현행성이라는 것에서 동의어이다. 이 두 개념은 관계의 두 가지 본성에 대한 상이한 이론을 함축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기계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 동일한 이론을 내포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22]형식적으로 각 관계는 한편으로 기관 없는 신체, 다른 한편으로 감각-사건을 가진다. (...) [123]기관 없는 신체가 잠재적인 것이며 기계의 비-관계적 통합체(unity)인 반면, 감각-사건은 현행적이며 관계적인 통합체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24]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당신과 관계하는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이다. 반대로 감각-사건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언가와 연결한다는 것이다. 파악은 인접적이며, 그것은 기계들의 복수성과의 관계를 품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바, 여기서 기계들은 이 서로 간의 동일한 관계를 품지는 않는다(기계를 파악한다는 것이 그렇다고 이러한 관계를 스스로 품는 것도 아니다). (...) 당신은 지금 이 책을 읽고 있고, 이것은 당신이 이 책의 페이지들과 단어들을 하나의 감각-사건으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을 우리는 당신의 독서라고 부를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당신은 그것을 파악하는 유일한 기계는 아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다른 많은 방식으로 파악하며, 그래서 당신이 책을 구석에 처박아 놓고 몽땅 잊어버린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25]의미는 질이나 감각적 소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감각-사건은 사과의 붉음, 달콤함 그리고 둥긂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사과라는 존재와 관련된다는 난폭한 그 사실이다. 이는 그것의 많은 질들 너머 그리고 그 위에 어떤 통합된 개별체이다. (...) [126][또한] 매우 명백하게도, 기관 없는 신체 자체는 현행적인 질과 같은 것을 떠받치는 통일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신의 잠재성 안으로 물러난 채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의미만이, 현행성 안의 기계의 통일체로 있으면서, 이 기능을 충족시킨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26]의미는 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상호관련이고, 이 상호관련은 잠재성이 아니라, 기계의 현행적 표현이다. 감각-사건은 그러므로 관계들 안에 내속’(inheres) 또는 존속’(subsists)한다(LS 19; cf. 5, 34, 94). (...) [127]의미는 인격적이지도 집합적이지도 않다. 왜냐하면 인접성과 균열의 규칙이 그것을 하나나 많은 경험적 신체들의 의미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의미는 언제나 모든 관계들 안에 있다. 의미는 현행성 안의 형식적 통합체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33]따라서 기계들이 오직 부분 대상들[객체들]과 조우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만, 마찬가지로 각각의 기계가 오직 어떤 흐름(flow)의 연속성을 만난다고 할 수도 있다. 기계는 결국 그것이 조우할 능력이 있는 것과 조우할 수 있을 뿐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35]현행성은 두 겹이다. 한편으로는 감각-사건, 연장, 부분 대상 또는 기계에 관해 이해된 존재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질, 특유성, 기계의 흐름이 있다. 후자는 언제나 전자에 접붙여진다. (...) 개별체의 현행성이 결코 단순히 거기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결코 세계 안에 또는 실재 그 자체 안에 단순히 전체적으로 있지 않다. 모든 현행성은 특유한 관계들에 내재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36]세 가지의 에너지 유형 (...) 리비도(Libido), 누멘(Numen) 그리고 볼룹타스(Voluptas) (...) 리비도는 연접적(connective) 종합 자체이며, 언제나 발생한다. 이것은 (...) 기관 없는 신체가 생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각각의 기계는 언제나 이미 잠재적 신체들의 현행화로부터 부분대상들과 질화된 흐름들이라는 두 겹의 연장들 안으로 무언가를 끌어 오는 리비도적현행성에 포함되어 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37]각각의 기계는 네 겹이다. 그 각각은 비-관계적 존재에 속하는 두 겹의 잠재적 표면이며, 또한 관계적 존재에 속하는 두 겹의 현행적 표면이다. 이 두 겹들은 필수적인데, 왜냐하면 잠재적이고 현행적인 존재는 둘 다 통합되어야 하고, 단일할 뿐 아니라 다양하며, 질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행성 안에서, 기계들은 질화됨에 틀림 없는 바, 그렇지 않으면 차이나는 조우들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통합됨에 틀림 없는 바, 질들이 질에 속하는 질들이 아니라, 무언가에 속하는 질이기 때문이다. 잠재성에 있어서, 기계들은 외재성을 보증하기 위해 통합되어야 하지만, 오직 어떤 개별체와의 관계가 그 개별체와의 관계에 대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37]아무 것도 결코 충분하게 어떤 다른 것 안으로 통합되어지지 않는다. 균형상태와 조화는 오로지 획득되고 유지될 뿐이지, 결코 예정되거나 주어지지 않는다. 모든 정지는 운동의 최소한일 뿐이다. 모든 평화는 긴장의 최소한일 뿐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5, 137]외재성은 두 신체들이 직접 만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모든 관계들은 일방적이며 비대칭적이다. 신체는 오직 다른 기계들의 현행적 표면에만 관계한다. (...) 모든 관계들은 우발적 종합이다. (...) 세 가지 종합, 즉 연접(connection), 이접(disjunction) 그리고 통접(conjunction)은 분리상태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세가지 모두는 모든 관계들의 구성요소이다. (...) 연접-응축은 우주의 접착제이며, 균열-인접성은 모든 연접적 노고의 이중적 본성이다.

 

[Kleinherenbrink 2019, 3rd.Inter, 141]가브리엘(Marcus Gabriel)의 의미장(field of sense)의 관계적 존재론이 가진 첫 번째 문제점은 그것이 동일성과 변화를 고려할 수 없다는 것이다. (...) 가브리엘의 말에서, 대상[객체]들은 의미들의 다발로 정의되는데, 우리는 무엇이 그 다발을 유지하게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2015: 231). (...) 따라서 가설적으로, 어떤 지배적 의미 X가 있을 것인데, 이것은 슈왈제네거를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배우이자 정치인으로 정의한다. 이 의미는 슈왈제네거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의 계측가능성(commensurability)(전주지사, 자선가 등등)과 그가 아닌 것에 관한 계측불가능성(스웨덴 여성 성노동자 - 가브리엘의 예시)을 규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가브리엘이 필요로 하는 것을 그에게 주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그의 존재론이 사소한 점, 즉 개별체들이 어디에서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언제나 결정되어 있다는 식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을 내세울 뿐이다. (...) [142]가브리엘의 존재론은 또한 변화를 고려하는데에서도 실패한다. (...) 만약 사물/사태가 그것들의 지금의 현재에서 전개되는 방식 너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변화는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약 모든 것이 현재적으로 결정되어 끝나버리는 식으로 존재한다, 거기에는 다른 방식으로 될 어떤 것의 여지가 전혀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기에는 어떤 개별체가 다른 의미장으로 움직이는 것을 금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나의 지배적 의미가 그것을 금지하지 않는다면, 나는 원리적으로 내 주방으로 걸어갈 수 있고, 이에 따라 그 의미장 안에서 특성화되기 시작한다. 문제는 비록 아무것도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해도, 가브리엘의 존재론에 따르면, 거기에는 마찬가지로 그것을 허용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143]문제는 특수한 특성이 개별체를 저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결정할 의미장을 요청한다는 것인데, [144]이는 그것을 특성화하는 다른 여타 장으로 무한하게 연기되며, 따라서 가브리엘의 존재론은 어떤 것이 하나의 의미장으로 정말로 기능하기 위해 요구되는 무엇임(본질, quiddity)을 어떻게 획득할지에 대해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