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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연속성에 반대한다-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_4장

by Nomadia 2021. 1. 31.

*원문서지: Arjen Kleinherenbrink, Against Continuity: Gilles Deleuze’s Speculative Realism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9), chap. 4

*이 번역은 발췌번역이다.

 

4장 기계적 신체

 

[Kleinherenbrink 2019, chap. 4, 87]신체는 기계들 간의 관계에 대해 외재적으로 남아 있다. 모든 것이 기계인 것과 같이, 모든 것은 신체이다. 신체는 어떤 동물, 소리, 정신, 관념, 언어, 어떤 사회, 사람들의 그룹 등등일 수 있다(SPP 127; cf. AO 372). (...) 모든 것은 그 자신의 신체에서 기계이며, 이것이 어떤 기후, 바람, 계절 [그리고] 시간이 사물들, 동물들, 또는 유명한 사람이 아닌 다른 본성에 속하지 않는이유이다(ATP 263).

 

[Kleinherenbrink 2019, chap. 4, 87]신체는 대체로 스스로 자질이 부여될 수 없다. 외재성은 모든 개별체들인 형식적으로 신체를 가진다는 것에 일치하기를 요청한다. 신체는 어떤 초월론적인 단위로서, 역사, 가능성, 구성, 경험적 특질, 사용자 그리고 기능들로 환원될 수 없다. 어떤 주어진 기계에 있어서, 신체는 당신이 모든 것을 떠날 때 남아 있는 것이며, 그것이 들뢰즈가 신체를 기관없는 신체라고 부른 이유이다(ATP 151).

 

[Kleinherenbrink 2019, chap. 4, 88]신체는 어떤 것 안에 공간적으로 확장되지도, 무언가에 대해 시간적으로 현전하지도 않는다(C2 189). 부분전체적,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 의미에서, 기관 없는 신체는 따라서, 기계가 그 안에 있는 바도 아니고, 그것이 기계 안에 있는 바도 아니다. 각각의 기계의 그 면(aspect)은 무(nothing), 그리고 무가 들어서는 그것으로 들어간다. (...)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신체를 통해 그것은 부분들 또는 기관들로서 이것(this)을 가지는 어떤 기계의 존재 안에 있지도 않고, 저것(that)의 부분 또는 기관도 아니다. 내가 실존적으로 나의 기관에 의존한다 해도, 나는 그것들에 존재론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이것이 들뢰즈의 만트라(mantra), 입도 없고, 혀도 없다. 이빨도 없다. 후두도 없다. 식도도 없다”(AO 19)라는 주문의 핵심이다. 우리는 언제나 내적 구성물들과 연관하여 또는 어떤 환경과의 관련으로 개별체들을 재빨리 기능적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기관없는 신체는 그 모든 관계들 바깥에 남으며, 이에 따라 조직화와 유기체에 대한 상식적 전망과 대결한다(ATP 30).

 

[Kleinherenbrink 2019, chap. 4, 88]기계는 언제나 특정 시간, 공간 그리고 관계 안에서 다른 기계들과 연루된다. [89]하지만 그것들은 동시에 결코 그와 같은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 각각의 기계는 모든 관계성들, 즉 권력, 언어, 경험, 역사, 구조, 구성물, 텍스트, 대화, 재료 등등으로부터 추상된 이후에만 시야에 잡히는 어떤 신체를 가진다. 그때에만 우리는 단순한 사물/사태또는 단순히 개별체를 발견한다(ATP 151).

 

[Kleinherenbrink 2019, chap. 4, 90][자기 원인도 아니고 자족적이지도 않은]그러한 기계들은 관계들 너머의 실재성을 가지는 바, 존재하기 위해 어떠한 관계도 필요하지 않다는 함축을 가진다. 반대로 신체는 전체의 잔여물이 아니고, 그래서 다른 이산적(discrete) 배치들로부터 구성되어짐에 틀림없다. 그것은 발생되지 않는’(unengendered) 것일 테지만, 비생산적일 수는 없다. (...) ‘발생되지 않는이란 정확히 말해 종이나 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다시 다양체의 환원불가능성을 간력히 지칭한다. (...) 개별체가 존재하게 되는 어느 때든 그리고 어디에서든, 그것은 즉시 그것의 환원불가능성을 보증하는 기관없는 신체를 가진다. 기계가 분자적 물, 결혼, 지각, 집 또는 붉은 팬더를 생산하는 그것의 힘들과 결합할 때마다, 기관 없는 신체는 등장한다. (...) 들뢰즈는, 관계는 어떤 것을 위해 전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개별체들 간의 사건들, 작동들, 과정과 만남들을 강조하는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4, 93]모든 경험은 유기적이고, 관계적이며, 이에 따라 여러 기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것과 결합된다고 말해진다. 그와 같은 경험 안의 현전에는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들 여지라곤 없다. 이것이 기관 없는 신체에 대한 접근이 모호한이유이다(FB 47). (...)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들뢰즈 분석의 전체 핵심은 감각이 궁극적으로 비생산적, 비획득적, 불가분적인 불모의 기관 없는 신체에 뿌리박고 있으며, 정확히 말해 질적이거나 질화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4, 94]따라서 들뢰즈가 베이컨의 그림으로부터 이해하는 파악하는 것은 신체들이 언제나 그것들로부터 일그러지고 미끄러지는 환경과 기관들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물질의 중심은 늘 직접 접촉으로부터 신체들의 물러남(withdrawal)이고, 이 물러남이 정확히 어째서 명료함(clarity)이 끊임없이 모호함으로 추락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FLB 36). (...) 예컨대 축구공은 그것의 가죽 구성물과의 관계를 가지고, 안과 밖에서 공기와 연관되며, 팔다리와 연결된다. 그리고 구경꾼들과도 관련된다. 하지만 그것의 기관없는 신체는 결코 그러한 관계들과 일치되지 않는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다른 방법은 들뢰즈의 바로크 건물이다. 이것은 하나의 공용실과 하나의 닫힌 개인실로 구성된 개별체로 파악된다(FLB 4).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개인실은 창문 없는 밀실이며, 이것은 공용실에서 바깥 없는 순수한 안으로서, 무게 없는 것, 닫힌 내부성으로서, 폐쇄된채로 남겨진다(FLB 32).

 

[Kleinherenbrink 2019, chap. 4, 95]관계는 항에 외재하고, 항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떤 개별체이며, 모든 개별체는 기계이고, 각 기계는 네 겹[4]의 배치이며, 각각의 네 겹은 두 개의 두 겹[2]들로 구성된다. 하나의 두 겹은 현행적이며 관계적이고, 다른 하나는 잠재적이며 물러남(withdrawn)이다. 잠재적인 두 겹의 면은 기관 없는 신체이고, 이 신체는 다양체의 잠재적 단위[통일체]이며, 이 잠재적 단위는 모든 융합, 환원 또는 관계로의 적분에 저항한다. (...) 만약 모든 것이 관계로 환원될 수 없다면, 아무 것도 본성적으로 어딘가에 위치되거나 어떤 것을 행위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은, 무작위의 힘들이나 부정직한 행위주체들이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신성한 것들을 비뚤어지게 할 때, 완료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싫어하는 것도 파괴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나 완강한 저항이 상황을 더 낫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경우들에서, 모든 것은 노고를 요청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4, 95]“소통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비-소통적인 관들 사이에 있다. 열려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닫힌 상자들 사이에 놓여있다”(TRM 39; cf. PS 117).

 

[Kleinherenbrink 2019, chap. 4, 97]비록 신체가 관계적 표현(manifestation)으로 환원불가능하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잠재적 신체들]그것들의 표현이다. 닫혀진 관임에도 불구하고, 잠재적인 두 겹은 세계의 사건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다. (...) 만약 신체가 정말로 관계-외적이라면, 그때 다른 기계와 관계 맺는 모든 방식들은 기껏해야 완벽하게 믿을 만한 기술 정도거나 그것을 시험삼아 조율해 볼 만한 방식들이다. 하지만 그것들 중 아무 것도 신체를 현전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그 문제적 신체가 오직 문제적 형식 안에서 현전될 수 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DR 169).

 

[Kleinherenbrink 2019, chap. 4, 98]‘()-존재‘?-존재라는 어색한 공식은 그래도 개별체의 문제적이지만 실재적인 면과 조응한다(DI 25). 이 공식들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바에 대한 어떤 사태와 대립하지는 않고, 오히려 관계적 측면에 관한 그것의 비-관계적 측면에 대립한다. (...) [이와 같은 공식들은] 기계를 위한 우리의 통상적인 기술들과 명칭들이 어떻게 그것들의 존재보다 뒤얽힘(entanglements)을 지칭하는지를 명확하게 가리킨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4, 99]예컨대 어떤 꽃도 씨 안에 함축되어 있지 않다. 만약 햇빛, 곤충들 그리고 흙 안의 영양소들과의 특유한 교차작용이 실현된다면, 어떤 특정한 기계가 꽃 속으로 전개될 뿐이다. (...) 이와 비슷하게 인간 본성에 속하는 이성애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버의 댐은 나무 조각 속에 함축되지 않는다. 등등. 이것은 모든 다양체들이 그들의 현행적 참여가 근본적으로 물질인 바, 존재론적으로 비기의적이며 비주체적[비종속적]’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체가 언제나 각 기계의 어떤 형상이므로, 그와 같은 참여는 결코 살아 있음을 멈추지 않는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4, 99]‘일관성의 평면’(Plane of consistency)은 기계가 언제나 그것과 관련되는 그 실존의 사건들을 겪어 나가는 많은 관계들을 의미하며, [100]그것은 사건들이 남은 흔적이 보관소가 될 것이다. ‘탈주선은 신체가 현재 관계들과 단절될 가능성을 위한 충분이유이다. (...) 오직 기계인 경우에 한에서 기계D가 생산된다 할지라도, AB는 기계C에 의해 야기되는 특유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게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서 기계들은 기계D와 관계해야만 하고, 필연적으로 A, B 또는 C와 관계하는 것은 아니다.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환원불가능’(irreducible)이란 영향받지 않음’(immune)과 동의어가 아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4, 100]하나의 노마드(nomad, 유목)로서, 각각의 기계는 끊임없이 두 가지 활동들에 연루된다. 한편으로 그것이 관계들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나 그것에 대한 이런 미통합된 면이 남는다. 기계의 노마디즘(nomadism, 유목주의)은 그것의 운동들 안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모든 관계들, 운동들 그리고 위치들을 넘치는 그 근본적인 과잉 안에 놓여 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4, 102]모든 기계는 크기에 상관 없이 다른 기계들에 의해 발생된다. 이런 측면에서 단어의 발화는 태양계의 탄생과 다르지 않다. 어떤 기계도 다른 기계들과 분리하고 낯설게 만드는 그것의 발생장치나 부품과 일치하지 않는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4, 101]분열증은 보편적 조건이다 (...) 분열증적으로 생각하자면 (...) 실재 안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연속적인 기계음’(AO 12) 뿐이다. 이것은 잘못된 깊이와 높이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실체 또는 영혼을 바위들, 금속, 물 그리고 식물들을 위해정립하는 것이다(AO 12). 이것은 불변항, 패턴들, 법 그리고 과학에 의해 발견된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분열증적 입장은 단지 기계들이 그들의 많은 관계들을 넘어 개개의 실재성을 가진다는 것, 기계들을 다른 것들의 조합 안에서 조차 유일하게만든다는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4, 102]단어의 발화는 태양계의 탄생과 다르지 않다. 어떤 기계도 다른 기계들과 분리하고 낯설게 만드는 그것의 발생장치나 부품과 일치하지 않는다.

 

[Kleinherenbrink 2019, 2nd.Inter, 104]문제는 모든 사람들, 권력자들까지 포함하여, 그 해석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는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적 결론이 진보적 좌파 정치학이 아니라,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진영에 모두 속하는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2014a: 3). (...) 과학과 역사는 시야에서 벗어나고 정치학은 마키아벨리적, 유아론적 외침의 경기로 변질된다.

 

[Kleinherenbrink 2019, 2nd.Inter, 105]페라리의 요점은 실재가 존재하기 위해 인간적 개념들을 요청하지 않는 개별체들로 넘쳐 흐른다는 것이다. 그것들(개별체들)은 개념들로 환원될 수 없다. (...) 그 결론은 (...) 객체가 변경불가능(unamendable)하다는 것이다(2014a: 35). 변경불가능성이란 객체가 변화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객체가 다른 객체가 그것에 관계 맺는 바로 환원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 인간 정신은 객체들을 구성하고 유지하지만, 그것은 그것의 존재가 그와 같은 생성자와 동일시되는 것에 따르지 않는다. (...) [106]이 동일한 객체의 변경불가능성은 페라리스 존재론의 첫 번째 실증적 특성을 구성한다. 우리가 직면하는 사실은 개념적 도식의 단순한 사용에 의해 개정되거나 변화될 수 없다”(2014a: 34). (...)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변화란 만약 객체가 우리 자신의 항구적으로 변화하는 세계 경험으로 환원될 수 있다면,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변경불가능성은 정확히 그 반대를 함축한다. 만약 어떤 객체도 다른 것들이 현재 그것과 관계하는 방식들로 환원불가능하다면, 그때 그것은 객체와 우리의 관계 둘 모두에 있어서 변화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따라서] 변화와 해방은 객체가 그들의 현재 소여(giveness)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가능하다.

 

[Kleinherenbrink 2019, 2nd.Inter, 106]‘변경불가능’(unamendable)이란 미결정’(undetermined)을 의미하지 않는다. 변결불가능성의 요점은 객체가 인간의 기획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텅 빈 진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변경불가능성은 해석에 대한 저항(resistance)이며, 이것은 객체가 그것들 자체의 특성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107]객체가 우연적(random) 해석과 처분에 저항한다는 사실은 몇몇 해석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정밀할 가능성을 위한, 그리고 그것을 알기(knowing) 위한 조건(예를 들면 반복되는 과학적 경험 같은 것들)이다. 따라서 변경불가능성은 세계에 대한 우리 이해에서의 진보(progress)를 받아들인다.

 

[Kleinherenbrink 2019, 2nd.Inter, 107]페라리스의 변경불가능성 개념과 들뢰즈의 기계적 신체들 사이의 유사성은 분명하다. 들뢰즈의 신체들도 관계 안에서 생성하는 현재로부터 물러나고, 그래서 개별체가 언제나 우리가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 (...) 페라리스에서처럼 바로 이 개별체의 환원불가능성이야말로 변화, 해방, 확실성 그리고 진보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으로 제공된다고 간주됨에 틀림 없다. 또는 들뢰즈의 개념으로 말하면, 기계들이 우리의 그것들에 대한 기획으로의 환원불가능성이란 새로운 연결접속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다(BSP 121). 우리는 오직 세계 안에 있는 사물/사태를, 그것들이 그 현재 전개양상보다 더 많기 때문에, 변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개별체들이 그 자신의 어떤 존재를 가지는 한에서 해석이 그것에 대해 보다 정밀하다는 의미에서 지식을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