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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연속성에 반대한다-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_6장

by Nomadia 2021. 2. 5.

*원문서지: Arjen Kleinherenbrink, Against Continuity: Gilles Deleuze’s Speculative Realism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9), chap. 6

 

6장 기계의 안쪽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48]만약 형상(the Figure)이 기계가 존재하는 바 그것이고, 현행적 표현들이 기계들이 활동하는 바 그것이라면, 욕망은 그것들이 가지는 바 그것이다. 욕망은 잠재적 두 겹의 두 번째 부분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과들의 측면에 놓인다. 욕망은 관계적 표현들 뒤에 있는 동력이다. 욕망은 현행성의 표현 내용의 뒤에서 작동하는 잠재적인 숨은 내용’(latent content)인 것이다(LS 263). 이것이 기계가 욕망하는-기계로 정의되는 이유이다(BSP 132).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49]이 존재, 즉 기관 없는 각각의 신체를 채우는것이 바로 욕망이다. 욕망은 작동하는 어떤 기계의 부분들처럼 기능하는, 응축되고 만나는 부분 대상들이다. 욕망은 그와 같은 표현들과 본질적으로 언제나 차이화하는 반면, 현행적으로 기계적 표현들을 야기한다. 욕망은 그러므로 초월적(transcendental)이다. 이것은 어떤 기계에 현행성을 부여하지만, 현행성 그 자체는 아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50]외재성이 유지되려면, 개별체들에 관한 것은 관계 바깥에 존재해야만 한다. 이것은 단지 그것들의 통일성이나 단순성(신체나 형상)일 수 없으며, 그래서 반드시 두 번째 잠재적 면이 존재해야만 하는데, 이것은 기계적 존재자들에게 그 개별적 특성을 부여한다. 이것이 바로 욕망으로서, 들뢰즈가 사실상 아분자적(submolecular), 비정형적 물질’(ATP 503; cf. K6) 또는 원초적인 계보학적 재료’(AO 96)라고 정의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욕망이 그저 미세한 사물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 그보다 욕망은 기계에 내재하는 물질이고, 그 현행성이라는 폭풍의 방어막으로 감싸여 있으면서 다른 사물/사태와의 직접 접촉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50]들뢰즈적인 유물론은 모든 것이 그 구성요소가 자기-규정적인 실재의 궁극적인 층 위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아니다(환원적 유물론). 그것은 사물/사태의 바로 그 본질 안에 모순이 존재하는 이론이 아니다(변증법적 유물론). [151]그것은 물질적 삶의 생산양식이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지적 실존을 좌우하며, 이것이 제 차례에 와서 의식을 좌우한다는 이론도 아니다(사적 유물론). 이것은 몇몇 또는 모든 사물/사태들이 어떤 단순한 창조적 힘에 의해 작동된다는 이론도 아니다(생기적 유물론). 정신적 상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활동이 존재한다는 이론도 아니다(소거 유물론eliminative materialism). 물질이 기능에 대해 부수현상적이라는 이론도 아니다(개별사례 유물론token meterialism). 그리고 이것은 나 자신이 나로 인해 구성되는 그림 안에 포함되는 것에 의한 반성적인 비틀림으로 정의되는 그런 유물론도 아니다(Žižek 2006: 17).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51]욕망은 두 기계들이 비록 그것들이 그밖의 다른 모든 것에 의해 동일한 단순 사물/사태로서 조우한다 해도, 상이하게 존재하는 이유이다. 마치 개별적인 라이프니츠의 모나드가 그것의 내적 질들을 가지는 것처럼, 그와 같이 들뢰즈적 기계도 그것의 욕망을 가진다. 기관 없는 신체가 언제나 욕망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cf. ATP 165).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51]질 없는 연장은 있을 수 없고, 물질 없는, 즉 욕망 없는 신체는 있을 수 없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53]기관 없는 신체, 형상(Figure), 기계에 속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기계는 비-관계적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56]특이성들은 유목적 공간에 거주한다(DI 143). 그것은 (...) ‘유목과 더불어 항상 기계를 의미하고 있다. (...) 특이성은 공간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나 특이성이 분배되는 유목적 분배에 속한 하나의 공간안에 있다(강조는 인용자). 각각의 기계는 그것의 욕망이거나 힘을 가지며, 따라서 각각의 개체는 일정 수의 특이성들을 감싸고 있다”(DI 102).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57]특이성은 기계의 표명이 아니라, 현행적인 것들이 표명인 그런 내적 특성들이다. (...) 만약 내가 해외에서 단기 언어코스를 배우고 집에 돌아와 내가 프랑스어를 말하는 것을 당신이 듣는다면, 그때 그것은 내가 새로운 특이성들(내 욕망을 변경함으로써, 나이 힘이나 능력들을 증가시킨 것)을 얻었다는 신호다. 따라서 특이성들은 정확히 말해 현행화가 그 주위를 도는 전환점이다. 물이 끓기 시작하고, 어떤 사람이 울기 시작하며, 또는 어떤 철학자가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특이성이 현행화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57-8]특이성은 연장적 공간에 거주하지 않고, 오히려 어떤 위상학적 공간또는 순수 자리’(pure spatium)에 있다(DI 174).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58]‘-개체’(DI 87)는 많은 잘못된 독해의 원천이다. 이것은 심지어 들뢰즈가 모든 사물/사태의 아래에 놓이거나 그것에 스며 있는 어떤 보편적 잠재력, 영역, 과정 또는 차원을 정립한다는 널릴 퍼진 생각의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 [159]각각의 준-안전적 체계가 -개체적 존재로 정의되며, 이것이 특이성들을 완전히 잘 부여하는 것이다”(DI 87; cf. DR 246).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59]특이성과 마찬가지로, 코드들은 미세한 사물/사태가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클레어 콜브룩(Claire Colebrook)이 코드를 DNA 그리고 화학적 요소들과 등치시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2002: 142). 이것도 마찬가지로 코드를 어떤 관계적 개념으로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코드화’(Coding)는 확실히 관계적인데, 그것이 다른 개별체들에 대한 힘의 행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드’(code)는 그렇지 않다. 이 두 가지는 반복되는 행위들은 코드이다”(Massumi 1992: 51)라는 주장을 이끌어내면서 쉽게 혼동된다. 하지만 들뢰즈는 코드들 코딩 과정과 탈코딩”(ATP 54, 강조는 필자)이라고 할 때처럼 코드와 코딩이라는 작동방식을 조심스럽게 구분한다. (...) [160]코드눈 어떤 현행성에 의해서도 소진될 수 없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0]코드라는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 힘들이 사물/사태의 가장 핵심에 각인되어 있다고 제안한다. (...) 코드는 (...) ‘덧코드로도 쓰일 수 있다. (...) 내가 단순히 강을 바라본다면, 이것은 코드화이다. 즉 나는 그 능력, 힘 욕망 또는 내가 가진 코드 때문에 내가 행위할 때 그 강을 지각한다. 그 강 자체는 내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의식하지 못한채 남아 있다. 하지만 내가 댐을 건설하고, 나루터를 만들고, 다른 기계로 그것을 길들이려고 시작할 때, 그것은 덧코드화된다. 나는 여전히 그 강을 내 자신의 코드와 관련해서 만나지만, 나는 또한 나 자신의 힘 등을 가동하여 그 강이 작동하는 바를 바꾼다. [161]덧코드화가 인간의 특권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라. 경제적으로 면(wool)에 의존하는 지역이 양에 의해 덧코드화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양이 없이는 그러한 경제를 실현할 수 없으므로,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환경을 울의 지속적인 생산에 맞춘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1]어떤 신체가 욕망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문제가 그것의 이념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2]그것이 기관없는 신체에 따라 특이성들의 분배와 동일하기 때문에, 기계의 이념은 그것의 전-개체적인 내적 실재성이다. 그것은 이념 안에 분배된 전-개체적 특이성들에 관한 질문이다. 그것은 개체에 대해 알지 못한다”(DR 247).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3]각각의 기계는 마찬가지로 다양체(multiplicity)라고 불리운다. 다양체는 특이성들의 앙상블이다.[28] 따라서 그 용어는 기계들의 잠재적 면을 강조한다. (...) 이념 없는 신체와 같은 사물/사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4]현상적으로 보면 다양체는 다자와 일자의 조합이 아니라, 오히려 다자 자체에 속한 어떤 조직화이다. 다양체는 일자(또는 다자)가 아니라, 본질(substance)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4]각각의 기계는 특이한(singular) 동시에 다양한 내적 실재성을 가진다. 특이하다는 것은 각 기계가 그 신체, 문제 또는 형상으로 인해 이 체계이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다양하다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욕망, 힘들, 특이성들 또는 이념을 가지기 때문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4]다양체는 하나이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그 구성요소들이나 구성원들로 환원불가능한 단일한 체계이다. 그것은 현행적 단위로 환원될 수 없지만, 단순성에 의해 특성화되어 존재한다(B 43). (...)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이성이나 기계의 이념은 그것의 내적 다양성, 이질성으로 이루어져 있다(B 43). (...)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그의 다양체를 리만적인 다양체(manifold)로 사용하는 이유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5]만약 관계들이 항들에 외재적이라면, 각각의 개별체 또는 기계는 그 관계들 너머 그리고 이상으로 초과한다. 이러한 초과는 특이한 것임에 틀림없고, 따라서 각각은 하나의 신체이다. 이러한 초과는 차이화되어야(differentiated) 하는데,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단지 하나의 사물/사태만 남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기계는 다양체이다. 즉 그것은 무언가의 통일적 단위로 존재하지 않는 특이한 것이며 사물/사태의 다양성으로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것이다. 이러한 잠재적 두 겹은 기계를 산출하거나 기계가 산출하는 것으로 환원불가능한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6]따라서 우리는 들뢰즈가 본질에 대한 실재론자가 아니라는 데란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Delanda 2002: 3). 앙띠오이푸스는 욕망을 적어도 두 번 본질로 부른다(AO 342, 383). 그리고 욕망은 본질과 물질 자체로 불리워진다(cf. D 78). 다른 곳에서 들뢰즈는 이 이념적 실재, 이 잠재성은 본질이다”(PS 61; cf. 41, 89)라고 쓰며, 본질은 물러난, -관계적인 어두운 지역에 거주하는것으로 발견되는 숨겨진 것이라고 쓴다(PS 47, 100). 그리고 깊이 안의 특이성들은 개별적 본질들의 구성체라고도 말한다(DI 102).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6]본질은 단순한 사물/사태거나 경험적 객체가 아니라, 신체의 내적 실재성이다. (...) [167]본질은 순수하게 잠재적이다. (...) 본질은 현재에 만들어질 수 없다. (...) 들뢰즈의 본질 개념은 어떤 특정한 미결정적 힘에 속한 그것과 더 가까우며, 스스로를 표현하게 된다. 이것은 활력(puissance), 특이성, 욕망 또는 이념이라고 불리워진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70]들뢰즈에게 초월적’(transcendental)이란 것은 칸트적인 초월적 주체나 후설적인 초월적 자아 또는 심지어 의식의 비인격적 자발성으로서의 사르트르의 초월적 장(Sartre 1960: 98)을 가리키지 않는다. 들뢰즈에게 초월적이란 기계의 잠재적 면이다(cf. AO 132). 문제-이념 자체가 초월적인 것의 사례다(DR 164). (...) [그런데] 카프카에서 들뢰즈는 특히 기계에 대해 초월적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K 39, 43, 47, 52, 59, 61, 72, 73, 84, 86, 87, 88). 하지만 이 책의 번역자들은 우리를 잘못 인도한다. 그들은 transcendante(초재적)‘transcendant’가 아니라 ‘transcendental’로 번역한다. 카프카에서 들뢰즈는 그릇된 초재적 깊이와 높이에 반대하여 논증하는 것이지, 결코 초월적인 것(the transcendental)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잠재적인 것의 초월적 지위는 기계 존재론의 핵심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7]각각의 기계는 단순히 기관없는 신체가 아니다. 이 신체는 유동적인 내적 속성들로 가득 차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9]각각의 기계는 신체와 욕망, (-)존재와 잠재적인(potential) 존재, 형상과 이념이라는 잠세적(virtual) 두 겹을 가진다. (...)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어떤 것으로 통합하는 것의 무능력은 모든 운동, 변화, 개선, 가지하락, 놀라움, 억압, 공포, 사랑, 구축, 붕괴, 느림, 속도, 안정성, 불규칙성 등등을 위한 조건이다. 관계들이나 배치들의 현전(presents)은 언제나 그것들의 내적 실재성보다 적다. 모든 것은 감싸여 있다. (...) 각 사물/사태의 심장부에는 불타는 물질이 있으며, 그것은 언제나 현행성의 투과불가능한 변덕스러운 표면에 여전히 감싸여 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5]기계는 그것의 힘들에 마땅한 것들과 조우함으로써 환원불가능한 것들의 이질적인 실재들을 통합한다. 나의 욕망은 다른 것들과의 조우가 아니라, 조우의 조건이다. 욕망은 개별체들의 각각의 실재성이며, 이런 의미에서 유일한 주체는 기관 없는 신체에 있어서 욕망 그 자체다”(AO 90). 이 내적 실재는 어떤 기계에 속한 물질, 그것의 실체 그리고 본질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9]모든 기계는 그 발생자들과 발생들을 가진다. 이것은 결코 둘 중 하나로 환원될 수 없다. 이것이 궁극적인 평형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AO 175), 긴장(tension)은 실재의 기초적인 형상이 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69]현행성은 언제나 정확히 언제 어디서 존재하는지이다. 그것인 이것 혹은 저것의 관계이다. 나의 키보드는 내 손 아래에 있으면서 내 책상 위에 있다. 기관은 어떤 유기체 안에 있다. (...) [170]하지만 그것들의 본질은 결코 관계 안에 잇지 않다. (...) 본질은 그것의 기계가 어디에 또는 언제 있는지가 아니다. 본질은 에레혼(Erewhon)이며 때이른(untimely) 것이다. 잠재적 물질은 결국은 외연이라기보다는 강도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70]들뢰즈에게 초월적’(transcendental)이란 것은 칸트적인 초월적 주체나 후설적인 초월적 자아 또는 심지어 의식의 비인격적 자발성으로서의 사르트르의 초월적 장(Sartre 1960: 98)을 가리키지 않는다. 들뢰즈에게 초월적이란 기계의 잠재적 면이다(cf. AO 132). 문제-이념 자체가 초월적인 것의 사례다(DR 164). (...) [그런데] 카프카에서 들뢰즈는 특히 기계에 대해 초월적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K 39, 43, 47, 52, 59, 61, 72, 73, 84, 86, 87, 88). 하지만 이 책의 번역자들은 우리를 잘못 인도한다. 그들은 transcendante(초재적)‘transcendant’가 아니라 ‘transcendental’로 번역한다. 카프카에서 들뢰즈는 그릇된 초재적 깊이와 높이에 반대하여 논증하는 것이지, 결코 초월적인 것(the transcendental)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잠재적인 것의 초월적 지위는 기계 존재론의 핵심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71]초월적 장은 잠재적인 두 겹이다. (...) “초월적 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객체도 주체도 지칭하지 않는 한에서 경험과 구분될 수 있다”(TRM 384) (...) 기계들의 존재는 어떤 가능한 상관주의적 도식도 빠져나간다. 기계의 내적 실재성은 모든 현행성, 모든 가능한 주체들의 모든 가능한 경험 안에 있는 모든 가능한 객체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 “초월적인 것은 더 이상 인격적이지 않은 것과 같이 개별적[개체적]이지도 않다.(...)”(LS 99) 어째서 초월적 장의 표면적 조직화는 우리가 단일하고 보편적인 잠세적 힘 또는 장을 세우는 것을 차단하는가? 왜냐하면 개별체들이 그 자신의 현행성 안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다. 신체는 다른 기계의 잠재성과 직접 상호작용할 수 없다. 경험의 세계는 기계가 작동 중인 활력(puissance)에 따르는 현행적 표명들만을 담고 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72]한편으로 기계는 실재적이며, 현행적이고 관계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실재적이고, 잠재적이며, 비관계적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철학사에게 이것을 시도했던 유일한 사람들이다. (...) [173]모든 것은 기계이며, 모든 기계는 관계에서의 그 표명으로 환원불가능하다. 모든 기계는 잉여-관계적 비-존재를 가지며, 이것은 힘들(욕망, 특이성, 이념, 코드)을 가진 어떤 신체(문제, 형상, vessel)를 말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6, 174]이것은 균열과 우발성의 보편적 과정을 사유한다. 즉 비교불가능한 기계들은 현행적으로 표명되게 이루어지며(감각과 질의 두 겹, 또는 부분 대상들 그리고 흐름들), 따라서 여기에 세 번째기계가 서로 간에 이러한 관계를 가지지는 않는 다른 기계들과 관계를 가진다.

 

[Kleinherenbrink 2019, 4th.Inter, 179]데란다는 자주 초기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수용했던 잠재영역형이상학을 참조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들뢰즈가 이 초기 형이상학을 분명히 포기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고전적인 높이와 심지어 원리적인 깊이를 향해우리를 이끌어 (...) 가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데란다는 종종 천의 고원을 인용하면서, 다이아그램과 우주적 평면(cosmic plan)을 방어한다. 하지만 그 지점에서, 나는 데란다가 인식론적 발견학(heuristics)과 존재론적 실재들을 혼동한다고 논한다. 우주적 평면과 다이아그램에 대한 언급들은 우리가 평면 존재론을 생각하도록 돕는 도구인데, 이것은 모든 개별체들이 똑같이 실재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모든 존재자들이 사건들의 어떤 폭넓은 집합체를 고려하는 인과적으로 효과적이지만 각각의 내적 요소들임을 파악할 수 있게 돕기도 한다. 여기서 사건들은 수 천년 이상 동안 덧없이 흘러가거나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이라는 두 권의 책 중심에 여전히 존재하는 외재성 테제의 명백한 위반과 같다는 이유로, 들뢰즈가 이미 1960년대 후반에 철회했던 바로 그 잠재적 영역을 재도입하지는 않는다. (...) 데란다는 들뢰즈의 작품을 차이와 반복에서 제안되었던 형이상학의 전망에 따라 읽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우리는 이러한 것이야말로 정확히 피해야할 독해법이라고 논했다. 적어도 들뢰즈 자신의 사유의 궤도가 적합하게 이해되려면 말이다.

 

[Kleinherenbrink 2019, 4th.Inter, 180]배치들(Assemblages)은 다른 배치들과 만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장면 뒤에 모든 것은 동일한 연속적이고 통일된 우주적 평면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 어떤 배치도 이 배치[우주적 평면]로서 환원불가능한 개별체가 될 수 없다. 기껏해야 배치는 단순히 그것이 현행적으로 다른 배치들과 맞물리는 방식으로 환원불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총체적으로 무관계적인데, 왜냐하면 우주적 평면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끌어 당기기는 줄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이미 이전 장에서 길게 논의했던 모든 문제들을 재도입할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4th.Inter, 181]여기에 뭔가가 남아도는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 우주적 평면은 상호간에 실재효과를 가지는 실재 존재자들이 존재하기에 충분한 여유를 가진 배치들을 남기는 어떤 저 쪽이거나, 또는 배치들이 어떤 영원한 현재의 몇몇 형태 안에서 총체적으로 통일되고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강도적인 잠재적 영역 위의(그리고 거기 속한!) 가상적인 전망일 것이다. 아마도 후자처럼 보이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것이 외재성의 테제와 기계 테제를 단적으로 위반한다고 볼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4th.Inter, 182]이 다이아그램들로 배치들을 보충하는 것과 우주적 평면은 어떤 근원적인 차이를 형성한다. 대체로 데란다의 독자는 어째서 다이아그램과 우주적 평면(의 영역들)이 인간 사유의 공간 바깥에 있는 실재 존재로 이루어진 구조들이라기 보다, 우리가 실재를 생각하도록 도와야 하는 단순한 이론적 구성물이 아닌지 의문스러운 채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