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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컴의 필사적(筆寫的) 도망

<고대사회와 최초의 철학자들>(조지 톰슨 )

by Nomadia 2021. 2. 7.

서지사항: 조지 톰슨 지음, 조대호 옮김,고대사회와 최초의 철학자들, 고려원, 1992.

 

세계사에서 원시공산제를 다루는 장은 모든 민족에 공통된 그 발전의 기본 특징들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 토대인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가 명확하게 제시되어야 하고 그와 동시에 그것을 사회주의적 소유와 구별짓는 점으로서 이 체계에 내재된 한계들을 설명해 내는 일이 필요하다(11).

 

석기뿐만 아니라 청동기도 제작되었던 금석병용기chalcolite에 이르러 우리는 나일강 계곡,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인더스 강 유역에서 엄청난 진전들을 목격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최초로 원시공동체의 해체, 노예제와 계급투쟁의 성장, 국가의 형성을 보게 된다(11-2).

 

노예제 사회의 성장은 초기의 성숙기와 두 단계로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초기단계의 노예제는 가부장적이었고 상품생산보다는 직접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무역의 발전은 저조했다. 빚 때문에 노예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상당수의 소생산자 계급이 있었는데 이들의 주축은 아직 토지에서 쫓겨 나지 않은 농민들이었다. ... 성숙기에 이르면 더욱 발달한 생산력에 힘입어 노예제는 상품생산을 지향하고 주요 생산영역에서 자유노동이 노예노동으로 대체된다. 사적으로 소유되는 노예의 수가 증가해서 다른 계급의 인구수를 능가한다. 두드러진 국가 형태는 도시국가polis로서 이것은 노예제 민주정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문화의 발전이 급속해서 명실상부한 의미에서의 지식이 발생한다. ... 우리가 전형적인 예로써 인용할 수 있는 것은 초기에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이고, 성숙기에서는 솔론 이후의 아테네이다.

 

화폐는 계속해서 낡은 조건들을 해체시켜 나갔고 그에 따라 토지소유 귀족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솔론 자신은 무역으로 눈을 돌린 귀족이었고 ... (252)

 

세 파벌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

세 파벌이 있었다. 하나는 알크마이온의 아들인 메가클레스 휘하의 연안파parálioi인데, 이 인물은 중간계급의 공화국을 지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하나는 평원파pediakoí로서 과두정에 뜻을 둔 리쿠르고스가 이끌었다. 셋째는 고원파diákrioi로서, 가장 민주적으로 보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이끌었다. 이 마지막 인물 주변으로는 채무상의 소실로 파산한 사람들과 불순한 출신성분이 고민거리였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것은 참주정이 전복된 이후, 많은 무자격자들이 시민권을 소유했다는 이유를 들어 인구 등록을 위한 법령이 통과되었다는 사실을 보아 알 수 있다. 각 파는 그 구성원들이 경작하는 토지가 있는 구역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252)

 

아드콕크의 고원파에 대한 견해

고원파는 평원파의 번창한 농경에 관여할 수도 없었고 연안파의 상업적 발전에 관여할 수도 없었다. 구절양장의 협곡에는 양치기, 목동, 소작인들이 살았는데, 말할 것도 없이 이들 대다수는 솔론에 의해 자유를 얻었지만 토지는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사항들을 관철시키려는 의지와 자신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지도자로 삼아 실패와 추방 때에도 굳건히 그를 신임했다”(254).

이러한 추종자들이 있었다면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산적 두목은 될 수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들의 충성심이 아무리 지극했다고 하더라도 아테네의 통치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양치기들이나 소작인들은 인민의 전분야에 걸쳐 흙의 아들로 가장 강력하게 자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일 것인데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앞서 인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는 이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가 말하는 사람들은 반외국인들과 파산한 화폐 대부자들이다. 이러한 분자들이 구절양장의 앗티카의 협곡으로 몰려들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그들은 노동에 대한 수요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어의 견해를 따라,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떠받들었던 이들 고원인은 메탈라에 즉 채석장과 광산에 고용된 사람들이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케피시아와 마라톤 사이에 있는 펜텔리코스 산과 아테네 동부의 히메토스 산에는 대리석 채석장이 여러 곳 있었다. 그리고 수니온의 바위곶에서 바다와 맞닿아 있는 라우리온의 고원지대에는 은 광산들이 있었다. ... 이 시기에 채석장과 광산은 파산한 소농들과 인근 황무지에 무단 이주해 정착했던 외국 이주민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이 산사람들의 이익을 옹호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대규모로 집중되어 있던 노동인력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255-6).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앗티카의 은 광산들은 국가소유로 넘어갔고 거의 대부분은 노예노동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노예들은 사노예들이었다. 그리하여 니케라토스의 아들인 니키아스는 광산의 작업을 위해 트라키스식 이름을 가진 소시아에게 1000명의 노예들을 임대했다. 아마 이 소시아 자신도 공공사업의 청부인으로 국가가 고용한 노예였을 것이다. 위에서 검토한 증거를 통해 우리는 페이시스타라토스의 치하에서 광산들은 국가의 손으로 넘어갔으며, 같은 시기에 노예노동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258).

 

귀족충의 종교적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서 그는 디오니소스의 평민 제의들을 공인했으며, 그의 아들들은 이제 국가의 통제 밑에 들어 온 엘레우시스 제전 참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대회당을 건립했다. 그는 디오니소스제를 연극제로 개편하고 호메로스 시의 공개 낭송회를 제도화했다(259).

 

참주정의 기능은 과도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토지 귀족의 지배에 강제로 균열을 조장함으로써 중간계급으로 하여금 민주혁명의 최후단계에 대비한 힘을 강화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참주정 자체의 전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리스의 전승 속에서 그것이 거의 이구동성으로 비난의 표적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과두론자들은 진보적이라는 이유에서 그것의 선진성을 거부했는가 하면 민주론자들은 이미 반동적이 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그것의 퇴생성을 거부한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경우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간진한 일반적 전승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그의 통치기는 크로노스의 황금기로의 귀환이었다(259-30).

 

히피아스의 전복은 그 아버지의 정적의 아들인 클레이스테네스와 사리를 도모하고 있던 메가클레스 그리고 약화되는 참주정 속에서 반혁명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추방당한 과두론자들이 공동으로 대응한 결과였다. ... 두 말할 것 없이 스파르타인들의 생각은 히피아스의 전복 다음에는 마땅히 과두정이 복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클레이스테네스는 자신의 위치 확보를 겨냥했으며, 이것이 분명해지자 과두론자의 지도자인 이사고라스는 스파르타에 제2차 개입을 요청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인민에게 호소함으로써 그에 대응했다. ... 스파르타왕이 앗티카에 다시 나타나 자신의 밀정 노릇을 하는 이사고라스와 합세하여 구정권을 복구했을 때, 그는 자신의 군대와 함께 아크로폴리스에 감금되었으며 더 이상의 개입을 단념하기로 서양한 다음에야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이것은 인민을 위한 위대한 승리였다(261).

 

솔론과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해 추진된 상업적 팽창 정책으로 말미암아 상당수의 수공업자들이 앗티카에 정착한 상태였으며, 프라트리의 소속자격을 씨족만이 아닌 사람들에게 개방시켜야 한다는 법이 이미 통과된 뒤였다. 그러나 과두론자들이 이러한 조처의 목적을 저지하는 데 상당한 성공은 거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지지자들 중에는 프라트리에서 배척당했거나 아니면 거기서 쫓겨 나는 것을 두려워했던 많은 이주민들이 포홤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급이 참주정에서 얼마나 큰 혜택을 받았는지는 참주정이 몰락하면서 이사고라스가 취한 최초의 조처들 중의 하나가 순수한 아테네인의 혈통을 증명할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보아 알 수 있다(262).

 

한동안 아르콘이 될 수 있는 자격은 하층계급을 베제시키는 재산규정에 묶여 있었다. 그 혁명의 중간계급적 성격을 보여 주는 이러한 제한은 처절한 투쟁을 거친 다음인 BC. 456년에야 비로소 철폐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상 최초로 모든 시민이 국정 운영에 참가할 수 있는 정체가 만들어졌다(264).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민주혁명은 이러한 외관과 정반대였다. 민주주의자들은 승리를 얻었고 그들의 희망은 성취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들이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였다. ... 민주정의 슬로건인 이소노미아isonomía, 시민권의 평등은 그 지지자들에 의해 모든 이름 중의 가장 공평한 이름으로 환영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의 이름일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후대의 그리스 역사가의 말대로 재산의 평등 없는 법 앞의 평등은 겉껍데기이고, 상품의 사적 소유권에는 어떠한 평등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투쟁이 해소되기는 커녕 심화되었다. 인간 공동체의 전체를 이루었던 귀족과 평민들 사이의 낡은 갈등을 대신해 인간공동체의 전체를 이루었던 귀족과 평민 사이의 낡은 갈등을 대신해 노예소유자와 노예 사이의 갈등이 출현했으며, 노예는 사회로부터 배제된 자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부의 생산자였다. 이러한 모순은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열어 놓는 한편 민주정을 파괴하고 사회와 개개인 속에 근본적인 간극을, 즉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극 및 사유와 행위 사이의 간극을 만들어냈던 것이다(265).

 

세 사람[솔로, 아낙시만드로스, 탈레스] 모두 청동기 시대부터 계승된 전통들을 간직한 유서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이 가문들은 상업적 활동에 발을 들여 놓음으로써 상업귀족mercantile aristocracy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계층으로 발전하여 토지 소유자들로 이루어진 소수 지배계급과 인민대중 사이의 중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원시적 사유 안에서는 사회와 자연은 하나였다.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는 자연을 사회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외적인 실재로 제시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솔론은 사회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는데 성공했고 그것을 인간 특유의 제반 의무에 기초한 도덕적 질서로서 제시했다. 달리 말하자면 아낙시만드로스가 자연을 대상화했던 것처럼, 솔론은 사회를 대상화했던 것이다(267).

 

그렇다면 어째서 시민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에 어긋나는 행위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일까? 내란을 종식시키려는 솔론의 제 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그에게 들이닥친 이러한 의문에 직면하여 솔론은 자신의 계급적 관점에서 본 고대 민주정의 기본 모순을 토로한다. 그는 불법에는 한도를 설정했으면서도 부에는 한도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법 앞의 평등isonomia은 확립했지만 재산의 평등isomoiria은 확립하지 못했다. 그와 반대로 그는 토지 재분배에 대한 소농들의 요구들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더욱이 재산의 등급에 따른 공직 배당을 용인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통제의 한도를 벗어나 있다고 인정한 바로 그 요소에 비례하여 등급이 나뉘어진 정치 권력을 부유한 자들에게 보상해 주었던 것이다(270).

 

디케(Dike)1)2)관습 3)복수 또는 처벌 4)판단 5)정의의 여신 6) 정의라는 추상적 관념으로 발전해 왔다(272).

 

디케는 인간 만사에 개입하여 악행을 처벌하는데, 그의 개입은 공동체 전체에 두루 미쳐 생명을 앗아간다. 이 모든 점에서 그녀는 에리뉘에스와 같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 그녀가 몰고 오는 질병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 그것은 역병이나 기근이 아니라 억압과 내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리뉘에스가 과거의 것을 수호한다면, 디케는 새로운 질서를 수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에리뉘에스가 모이라를 위반한 행위를 처벌하는 것과 똑같이 디케는 메트론Metron을 위반한 행위를 처벌한다(273).

 

그리하여 모이라가 각 사람의 생득권birthright을 구성하는 동등한 share’을 가리켰다면, 메트론은 각자에게는 넘어서서는 안 될 제한된 척도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귀족주의적 관념이었던 것이다(273).

 

우리는 민주적 사고 안에서 세 가지 주된 흐름을 구별할 수 있다. 첫째는 밀레토스의 아낙시만드로스와 아테네의 솔론에 의해 대표되는 것으로, 이것은 새로운 상인계급과 운명을 같이했던 귀족의 일파에 의해서 수정, 발전된 낡은 귀족적 전통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이미 논의한 바와 같다. 둘째는 파산한 소농층의 전통과 열망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것에 있어서는 사정의 본성상 대표자가 될 만한 어떤 유명한 인물은 없지만, 오르페우스라는 신화적인 인물과 관련된 신비적인 제의를 통해 연구해 볼 수 있다. ... 셋째는 다른 두 흐름의 종합으로 볼 수 있는 피타고라스 철학이다(276).

 

그 운동[오르페우스 운동]이 소농층 사이에서 시작되었다는 가설은 오르페우스교 문헌을 헤시오도스의 시들과 비교해 보면 한층 더 굳건해진다. 오르페우스교 저술가들은 호메로스에게는 힘입은 바가 거의 없지만 헤시오도스에게는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점인데, 그 까닭은 그 자신이 소농이었던 헤시오도스가 주로 소농층을 겨냥해서 자신의 시들을 지었기 때문이다(278).

 

오르페우스의 교의에 따르면, 삶이란 티탄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인간이 받는 형벌이다. 인간의 영생불멸하는 부분은 가멸적인 부분 안에 갇혀 있다. 다시 말해서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다.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다. ... 영혼은 사후에 심판받는다. ... 이것은 플라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론이다. ... 이러한 이원론은 그리스 사상에 있어 새로운 것이다. 밀레토스 철학이나 호메로스의 시 어디에서도, 영혼은 일반적으로 육체와 다른 것이라는 관념, 즉 하나의 순수하고 다른 하나는 불순하며 하나는 신적이고 다른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관념에 상응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280-1).

 

아낭케Ananke ... 보통 필연성necessity이라고 번역되며 ... 그러나 그 본뜻은 보다 구체적인 것으로 강제compulsion’ 또는 강요coercion’을 뜻한다. 문헌으로 볼 때 아낭케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저술 속에서 최초로 등장하는데, 이 둘은 모두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헤클레이토스는 아낭케와 모이라를 한 쌍으로 짝지워 그것들을 사실상 하나의 존재로 취급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모이라, 디케, 아낭케에 똑같은 속성을 부여한다. 한 세기 뒤에 플라톤의 [국가]에서 아낭케는 모이라의 지위를 빼앗고 그녀의 방추 장비까지 갖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호메로스 이래 그리스 문헌 전체에 걸쳐 아낭케, 강제와 둘레이아douleia 노예신분의 관념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전자는 항상 노예의 지위와 노예들이 겪는 가혹한 노동과 고통을 함께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282).

 

반란이 일어났던 BC. 2세기 말엽 광산에 고용된 노예의 수는 수만명을 육박했다. BC. 6세기에는 노예와 자유민을 합친 작업 인구가 더욱 줄어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BC 1세기 이집트의 금광에 대한 디오도로스의 설명을 통해 노동조건을 어느 정도 머리 속에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284). ... 차안과 피안에 대한 오르페우스교의 수많은 비유들 - 어린아이 적부터 손발이 쇠사슬에 묶여 전혀 햇볕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갖혀 있다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물과 진창과 불과 유황으로 뒤범벅된 지하 미로들이 있다는 타르타노스에 대한 지형 묘사나 또는 정의로운 자들의 영혼들이 안거하고 있다는 맑은 하늘 아래의 상층계에 대한 묘사 - 의 밑바닥에 놓인 상상을 최초로 자극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실상들이었다(286-7).

 

오르페우스교를 그리스 사상에 있어서 퇴보로 간주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이유에서 잘못된 일일 것이다. 첫째로 오르페우스교는 유서 깊은 귀족주의적 도덕률에 대해 도전장을 내밀었다. 희망은 위험하고, 사랑도 위험하다. 지나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신을 본받으려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매사에 척도를 지키고, 네가 가진 것에 만족해라. 오르페우스교는 이렇게 소심하고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거짓말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그들의 희망은 그들의 욕망처럼 끝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삶은 불화와의 투쟁이었으며 만일 용기를 가지고 이 경주에 주력하기만 한다면 비참과 타락에 처하기보다는 오히려 영광된 승리를 얻고 신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모든 점에서 오르페우스교는 - 앞뒤가 바뀐 신비적인 형태로서 - 민주화 운동의 객관적인 잠재력을 들추어 냈으며, 아울러 그것은 인민에게 무기력 상태를 털고 일어나 그들의 신비사상을 행동으로 바꾸는 일을 남겨 주었다.

둘째로 오르페우스 사상은 원시적 신화와 예식에서 유래한 많은 요소들을 거의 아무런 변화 없이 간직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시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밀레토스 철학에 못지않게 원시사상에서 발전해 나왔지만 그 방향은 정반대였다. 밀레토스 철학에서는 낡은 내용이 새로운 형식 안에서 제시되는 반면, 오르페우스 신비사상 속에서는 낡은 형식이 새로운 내용을 떠맡았던 것이다. ... 밀레토스의 철학자들이 자연을 인간과 독립적인 존재로서 제시하는 가운데 주체를 배제했다면 오르페우스교는 인간을 자연과 독립된 존재로서 제시하는 가운데 객체를 배제했던 셈이다. 한 흐름으로부터는 객관적 - 결정론적 - 유물론이 출현했고, 다른 한 흐름으로부터는 주관적 관념론이 출현했다(288).

 

첫째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통치기는 주조 화폐의 도입시기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피타고라스 학파가 대변한 계급은 부유한 제조업자들과 상인들로 이루어진 신흥계급이었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