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철학》
프리도 릭켄 지음/ 김성진 옮김/ 서광사, 2000
차례
옮긴이 서문
서문
한국어판에 부치는 서문
약어표
제1장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
I. 철학과 신화
1. 그리스 철학의 역사적 시원에 관한 문제
2. 헤시오도스
II.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전래 과정
III. 밀레토스 학파
1. 탈레스
2. 아낙시만드로스
3. 아낙시메네스
IV. 크세노파네스
V. 피타고라스
VI. 헤라클레이토스
VII. 엘레아학파
1. 파르메니데스
2. 제논
VIII. 파르메니데스 이후 그리고 소크라테스 이전에 등장한 철학의 체계들
1. 엠페도클레스
2. 아낙사고라스
3. 원자론자들
제2장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I. 소피스트
II. 소크라테스
제3장 플라톤
생애와 저작
I. 대화형식
II. 이데아
1. 소크라테스적 대화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이데아
2. 이데아의 기능
3. 의미로서의 이데아
4. 원형으로서의 이데아
5. 플라톤의 존재개념
6. 참여 또는 분유(Methexis)
7. 《파르메니데스》에서의 반론들
a) 논증
b) 전제조건
c) 술어의 자기 서술(Selbstprädikation)과 사도 바오로 식의 서술(Paulinische Prädikation)
III. 인식과 지식
1. 선분의 비유가 제시하는 구별들
2. 플라톤 철학의 기본 범주로서의 그림
3. 속견
4. 수학적 인식
5. 변증법
a) 초기 대화편의 논쟁(Elenchos)
b) 《파이돈》의 가정(Hypothesis) 추론
c) 《파이드로스》의 ‘함께 보기’와 ‘나누기’
e) 《국가》편의 전제 없는 출발점
IV. 영혼
1. 영혼의 세 기능에 대한 《국가》의 이론
2. 사랑(에로스)
3. 불멸성
4. 자결권과 책임
5. 세계영혼
V. 국가
1. 《국가》(Politeia)의 이상형
2. 법률에 의한 지배
VI. 문자화되지 않은 사상
VII. 구아카데미아
제4장 아리스토텔레스
생애
I. 저작
1. 전래과정
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발전론적 이해
3. 저작들
a) 오르가논(Organon)
b) 자연철학, 생물학 그리고 심리학에 속하는 저작들
c) 《형이상학》
d) 윤리학과 정치학에 속하는 저작들
e) 수사학과 시학
f) 단편들(Fragmente)
II. 제1철학
1. 존재의 복합적 의미
2. 존재로서의 존재에 관한 학문
3. 우시아(Usia)
4. 형상의 원인적 성격
5. 가능태와 현실태
6. 부동의 동자
7.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전체적 의미
III. 훌륭한 삶을 위한 학문
1. 윤리학의 과제와 전제조건, 그리고 그 한계
2. 행복에 관한 물음
3. 인간의 활동과 업적
4. 덕
a) 윤리적 덕
b) 추론적 덕
5. 관조적 삶과 실천적 삶
IV. 페리파토스
제5장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I. 스토아
대표적 철학자들과 원전 문헌들
1. 논리학
2. 물리학
3. 윤리학
II. 에피쿠로스
생애와 저작
1. 규준론
2. 물리학
3. 윤리학과 종교철학
III. 회의주의
1. 퓌론의 회의주의
2. 아카데미아의 회의주의
제6장 신플라톤주의
I. 중기 플라톤주의
II. 플로티노스
생애와 저작
1. 플라톤 철학의 해석자
2. 미의 형이상학
3. 정신
4. 일(하나)
III. 플로티노스 이후의 신플라톤주의
1. 형이상학적-사변적 경향
a) 플로티노스 학파
b) 시리아 학파
c) 아테네 학파
2. 종교적-신기 주술적 경향
3. 학문적 경향
a) 알렉산드리아 학파
b) 서구 라틴어권의 신플라톤주의자들
문헌목록
일차문헌
이차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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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서문
서문
한국어판에 부치는 서문
약어표
DK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griech./dt. hg. von H Diels / W. Kranz, Berlin Bd. 1 1951, Bd. 2 u. 3 1952
DL
Diogenes Laertius, Leben und Meinungen berühmter Philosophen, übers. u. erl. von O. Apelt, Hamburg 1967
GK
Grundkurs Philosophie, Stuttgart 1982 이후
M
Sextus Empiricus, Adversus mathematicos
PH
Sextus Empiricus, Grundriβ der pyrrhonischen Skepsis(Pyrrhoneae hypotyposes), übers. von M. Hossenfelder, Frankfurt 1968, 1985
RE
Paulys Real-Encyclopädie der klassischen Altertumswissenschaft. Neue Bearbeitung, begonnen von G. Wissiwa, Stuttgart 1894 이후
SVF
Stoicorum veterum fragmenta, ed. H. von Arnim, 4 Bde., Leipzig 1903~1924(zitiert nach Band und Fragment)
제1장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
I. 철학과 신화
1. 그리스 철학의 역사적 시원에 관한 문제
2. 헤시오도스
[26]뮤즈들은 헤시오도스에게 “미래에 있을 일들과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며 지복을 누리는 종족을” 찬양하라는 임무를 부여한다(V, 32 이하). 《신통기》는 하나의 포괄적 주제 밑에서 이 주제가 요구하는 임무를 수행해내려고 한다. 즉 그것은 존재를 그 전체에 있어서 서술하고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 구절에서 그리스 철학의 근[27]본적 물음, 즉 “존재란 무엇인가?”(Met. VII 1, 1028b4)라는 물음의 첫 징표를 보아도 좋은 것이다. 여기에서 존재는 시간과 함께 생각되고 있다. 즉 시간의 범주들은 존재의 존재론적 위상을 규정하는 기능을 가진다.
1. 여기서 릭켄의 관점이 하이데거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본다면 무리인가?
II.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전래 과정
III. 밀레토스 학파
[33]버넷(J. Burnet)에 의해 고전적으로 대변되었다고 보아야 할 그 해석은 신화에 대한 결별을 특히 강조한다. 즉 바로 이 이오니아인들과 함께 유럽의 자연과학이 시작되었으며, 그것의 본질적 특징은 관찰과 실험이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더 나아가서 이 밀레토스인들은 종교적 전통에 결별을 고한 계몽주의자들이었으며, 그래서 “이오니아에서의 과학의 발생을 그 어떤 신화적 세계관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이 해석에 대하여 가장 단호하게 반대의견을 제기한 사람은 아마도 콘퍼드(F. M. Cornford)일 것이다. 즉 고대 그리스의 의학과는 달리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은 실험을 알지 못했으며, 그들의 주장은 단지 사변적인 도그마들로서 관찰을 통하여 검증될 수 없는 성격의 것들이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콘퍼드에 의하면 이 밀레토스인들은 우주 발생 신화들이 제기한 것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으며, 그 신화들이 제시한 대답과 본질적으로 같은 대답을 수용하였으며, 단지 그들이 사용한 언어의 추상성에 있어서만 신화들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 두 반대 입장의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은 예거(W. Jaeger)이다. 그는 이오니아인들의 합리적이고 경험주의적인 태도는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 외에도 그들이 품었던 신학적 동기와 관심사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됨을 강조한다. 즉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와 탈신학화(Enttheologisierung)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예거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게서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신학(philosophische Theologie)의 시초를 본다.
1. 탈레스
[36]탈레스의 물 개념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한 물질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원시적 사고 방식은 물질, 생명, 운동, 영혼 등을 구별하는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물질”은 살아 있으며, 동시에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다. 바로 이 점에서 탈레스는 예를 들어 나일 강이 바로 생산력의 근원이라는 생각과도 연계시킬 수 있었다. 이 밀레토스인들은 흔히 “물활론자”(Hylozoisten, ὕλη=물질: ζωή=생명)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것은 물질 자체가 살아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오히려 당시의 사고방식이 물질과 생명을 아직 구별하거나 분리시킬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2. 아낙시만드로스
[38]1)“아페이론”은 공간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헤시오도스의 “카오스”처럼, 다른 모든 것들을 “그 안에 둘러싸는” 공간을 지칭한다(DK 12A15, 85면 18행: A11, 84면 2행). 그것은 그러나 텅 빈 공간이 아니라, 물보다는 옅으나 공기보다는 더 진한 물질로 이루어진 일종의 물체로서 생각되었다(아리스토텔레스, De caelo 303b10~13). 다시 말하면 당시에는 물체와 공간은 아직 구별되지 않았었다.
2) 이 “공간-물체”는 다함이 없는 무진장의 것으로서, 그로부터 만물이 형성된다. “그는 그래서 왜 그것이 무한한지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생성이 (앞으로도) 결코 중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A14).
3) 만물의 근원은 공기, 물, 불 등의 원소들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것은 동시에 탈레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원소들은 서로 다른 것을 없애버리는 투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 중 하나가 무한하다면, 다른 원소들은 이미 소멸해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A16, 86면 1~3행).
4) “아페이론”(무한정자)은 우주의 모든 변화 과정을 조정한다. 그것은 불사불멸한 존재이다. 그래서 아낙시만드로스는 그것이 신적 존재라고 가르쳤다(A15, 85면 18~20행).
[40]문자 그대로 온전히 전해지고 있는 그리스 철학의 명제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아낙시만드로스의 것으로서 다음과 같다. “그로부터 모든 사물들의 생성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것에로 만물은 정해진 법도에 따라 다시 소멸되어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간의 질서가 정한 바에 따라 서로간에 행한 불의에 대한 처벌과 보상을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B1). (...) [41]여기서 아낙시만드로스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낮과 밤 및 여름과 겨울의 교체, 그리고 여러 원소들의 순환 운동과 상호 충돌 등과 같은 현상들이다. 그들은 상호간에 서로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거나 다른 것을 소멸시킴으로써 생성되며, 바로 그러한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그들 각각은 한번씩 현존재로의 생성 기회를 가진다. 그러한 현존재로의 생성 가능성들은 서로간에 제약을 가하고 서로 제한한다. 여기에서 각각의 존재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에 대해서 정의로운 질서를 제시하고 확정하는 것은 시간이다. 그 밖에도 위의 명제는 자연적 사건들의 변화 과정이 일정한 법칙성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말할 뿐 아니라, 인간 존재의 덧없고 무상함으로부터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서도 대답을 제시하려 한다. 그래서 아낙시만드로스이 이 명제는 최초의 철학적 변신론(辯神論, Theodizee)이다(Jaeger 1953, 48면).
3. 아낙시메네스
[44]아낙시만드로스의 경우 그러했듯이 아낙세메네스도 근원을 무한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여기서의 “무한”은 단지 공간적이며 시간적인 연장성의 의미로서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근원은 특정한 성질을 가진 물질, 즉 공기였다. (...) 농축화 과정 (...) 희박화 과정 (...) 이 변화 과정들은 공기가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즉 영원한 운동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된다(A5).
IV. 크세노파네스
[49]독소그라피의 전통은 크세노파네스가 엘레아 학파의 창시자였으며 파르메니데스의 스승이었다고 주장한다(A2; A31). 이 전통은 크세노파네스의 유일하며 운동이 없는 신 개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하나이며 불변인 존재에 대한 이론의 출발점으로 본다.
[50]크세노파네스의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탐구자세는 인간의 인식활동에 대한 그의 진술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의 단편 B38은 우리의 감각 경험이 내리는 특정한 판단들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 [51]크세노파네스는 그가 탐구의 과제로 삼고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직접 (눈으로) 보는 것(das Sehen)에 기초하는 지식이 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인간은 단지 상황이 그러하리라고 가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그러나 회의주의의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가정을 뒷받침하는 원인들이 있고, 이 원인들에 의거하는 한, 그것의 개연성에 대한 진술은 가능하기 때문이다(B35 참조). 결국 크세노파네스는 인간 지식의 진보를 지지하는 입장이다(B18).
V. 피타고라스
VI. 헤라클레이토스
[56]문제는 이 격언들이 그 전체적 배열 순서에는 의미를 둘 필요가 없는 (따로따로의) 경구들인가, 아니면 그것들이 본래는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해 하나의 전체로서 [57]제작되었으나, 단지 전래 과정에서 그 순서를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딜스(Dies)는 첫 번째 경우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이에 반하여 예를 들어 칸(Kahn 1979)은 그것이 원래는 하나의 전체적 구성을 가진 작품으로 제작되었다는 논지를 대변한다.
[59]인식의 두 단계인 감각 경험과 이해는 헤라클레이토스에게는 실재의 두 층에 상응한다. 실재의 진정한 본질 또는 실재의 근본 법칙은 현상의 배후에 숨겨져 있다(B123 참조). (...) 사물들의 본질, 그 감추어진 ‘퓌시스)(Physis) 역시 꼭 알아듣도록 말해주지도 않으며, 또 자신을 감추지도 않는다. 단지 징표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할 뿐이다.
실재의 본질은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면 서로 반대되는 대립자들의 통일이다.
[63]이 ‘로고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가르침이다. 동시에 그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서 서술된다. 그것은 반대자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그 관계 상황이며, 또 그 반대자들의 분리와 교체를 지배하는 법칙이며, 모든 생성과 변화를 규정하는 역동적 질서의 위대성이다. 모든 인간은 이 로고스에 참여한다. 자아에 대한 탐구는 인간을 로고스로 인도한다. (...) 바로 이 로고스를 따르라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윤리학이 요청하는 중심과제이다. 후에 스토아 학파에 의해 대변되는 도덕적 자연법 사상의 연원은 결국 헤라클레이토스에게로 소급된다. 오직 (모두에게, 그리고 모든 것에) 공통적인 로고스만이 인간들 사이에 공통의 연대(Gemainsamkeit)를 만들어낼 수 있다. 법이 없이는 어떤 인간 공동체도 존속할 수 없다(B44 참조). 그러나 모든 인간 사회의 법들은 그 어떠한 유보조건도 없이 유효한 법, 즉 “유일한 신의 법에 의해 양육된다”(B114 참조)
VII. 엘레아학파
1. 파르메니데스
[64]존재론의 역사는 파르메니데스와 함께 시작된다. (...) 비록 그 이후의 그리스 철학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에 아무리 반대하고 나섰다 할지라도, 그리스 철학은 종국적으로는 그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한다.
[고대철학에서 생성소멸하지 않는 불변하는 일자로서의 존재는 이후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중세철학의 ‘신’ 그리고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준다.]
(...) 그는 한편으로 우리의 오관이 매개하는 경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진리 해명의 유일한 수단인 ‘로고스’를 통한 인식, 이 양자 사이의 구별을 헤라클레이토스보다 더 강조한다.
[67]제1부의 논지는 이것이다: 존재는 있다. 더욱이 그것은 필연적으로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없을 수 없다(B2).
이로부터 존재에 대한 다음의 명제들의 단편 B8에서 추론된다:
1) 존재는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5~21).
2) 그것은 하나이며 연속적이다(22~25).
3) 그것은 불변적이다(26~31).
4) 그것은 완전하다(32~49).
2. 제논
VIII. 파르메니데스 이후 그리고 소크라테스 이전에 등장한 철학의 체계들
1. 엠페도클레스
2. 아낙사고라스
3. 원자론자들
[83]원자 개념의 문제점은 연장성(크기)과 분할 불가능성을 연계시킴에 있다. (...) 이 문제가 제기하는 어려움은 데모크리토스는 알고 있었고, 수학적 고찰방식과 물리학적 고찰방식을 구별하였으며, 그래서 그는 분할 불가능한 물체의 단위를 받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수학적 의미에서 잠재적으로 무한한 분할 가능성을 승인할 수 있었다. (...) 분할 불가능한 물체의 개념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수학적 의미의 분할 가능성의 한계는 연장성이 없는 점이며, 그러나 이 점들은 연장성을 가진 물체의 [84]마지막 구성 요소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제2장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I. 소피스트
[88]긍정적인 시각은 다른 누구보다도 헤겔과 젤러에 의해 제시되었다: 즉 소피스트들의 활동에 힘입어서 주관성의 원칙이 유효함을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전래된 전통적 가치 그 자체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렸으며, 스스로 검토하여 확인하지 않은 것은 더 이상 참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소피스트들이 아니었더라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소피스트들의 계몽정신, 그리고 그들의 비판적인 물음과 문제제기를 철저화시킴으로써 도덕의식의 새로운 기초를 세우려 하였다.
II. 소크라테스
제3장 플라톤
생애와 저작
[103]오늘날에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
초기대화편들: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ia), 《크리톤》(Kriton), 《라케스》(Laches), 《뤼시스》(Lysis), 《카르미데스》(Charmides), 《에우티프론》(Euthyphron), 《소 히피아스》(Hippias min.), 《대 히피아스》(Hippias maj.)(위작?),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고르기아스》(Gorgias), 《이온》(Ion).
중기대화편들: 《메논》(Menon), 《파이돈》(Phaidon), 《국가》(Politeia), 《향연》(Symposion), 《파이드로스》(Phaidros), 《에우튀데모스》(Euthydemos), 《메네크세노스》(Menexenos), 《크라튈로스》(Kratylos).
후기대화편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테아이테토스》(Theaitetos), 《크리티아스》(Kritias), 《필레보스》(Philebos), 《법률》(Nomoi).
I. 대화형식
II. 이데아
1. 소크라테스적 대화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이데아
2. 이데아의 기능
3. 의미로서의 이데아
4. 원형으로서의 이데아
5. 플라톤의 존재개념
[119]소크라테스는 “너는 덕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Men. 71d5), 또는 “너는 경건함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Euthyphr. 5d7)라고 묻는다. 여기에서 물음의 내용을 가리키는 부문장(“... 라고”의 그리스어 표현은 존재동사의 부정형(εἶναι)을 통하여 함께 구성된다. 그래서 결국 소크라테스는 덕의 존재를, 그리고 경건(함)의 존재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X인 것”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외적 형식이다. 즉 “X는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X는 그것으로서(X로서) 존재하는 것이다”가 된다. 이 형식을 ‘우시아’(ousia) 개념이 대신할 수도 있다(Men. 72b1; Phd. b5. d13);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담고 있는 부정형 존재동사가 명사화될 것이다. 바로 이 존재 또는 ‘우시아’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소크라테스적 대화의 과제이다(Phd. 78d1).
6. 참여 또는 분유(Methexis)
7. 《파르메니데스》에서의 반론들
a) 논증
b) 전제조건
c) 술어의 자기 서술(Selbstprädikation)과 사도 바오로 식의 서술(Paulinische Prädikation)
III. 인식과 지식
1. 선분의 비유가 제시하는 구별들
2. 플라톤 철학의 기본 범주로서의 그림
[136]플라톤의 대화편들은 도처에 그림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단순한 비유로부터 시작하여 우화들을 거쳐 여러 형태의 신화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그림들을 활용하고 있다. 철학적 언어에서의 그림의 사용은 실재 세계의 구조에 대한 특정 견해를 통하여 정당화될 것이지만, 그러나 그림들은 그 자체의 설명적 가치를 통하여 스스로를 입증해야 한다. 그림들의 사용은 특히 개념적 언어가 그 적용에 있어 상위에로의 한계, 그리고 하위에로의 한계에 부딪힐 때 특히 불가결한 것이 된다. 상위의 한계 너머에는 선의 이데아가 있으며, 하위의 한계 너머에는 변화하는 실재들의 영역이 있다. (...) [137]이 텍스트[Tim. 29cd]에 두 번 등장하는 “그럴듯한”(είκώς)의 그리스어는 “그림”을 뜻하는 “είκών”과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것이다.
[138]
3. 속견
[141]선분의 비유는 오직 불변적 존재와 수학적 대상들, 그리고 이데아에 대해서만 지식이 가능함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변화할 수밖에 없으며 우연적 사태들의 집합인 경험적 대상 영역에 대해서는 오직 속견만이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서 오늘날의 지식 개념은 우연적 진술에 대해서도, 예를 들면 카이사르는 기원적 44년 3월 15일에 암살당했다는 진술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것을 안다고 말함을 용인한다. 플라톤의 지식 개념과 현대 지식 개념의 차이는 바로 증명의 개념에 놓여 있으며, 바로 이것이 지식 개념을 위해서 핵심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입증된다. 오늘날 우리는 우연적 진술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들을 가지고 있음을, 예를 들어 역사학과 같은 학문들이 있음을 인정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의 증명 개념은 보편적 진술과 필연적 진술의 영역에만 제한적으로 [142]적용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범주론]과 [명제론]에는 릭켄의 이말이 적용이 되지만 [분석론]과 [변증론]에 나오는 개연적 진술에 대한 증명은 이와는 다르지 않은가?
4. 수학적 인식
5. 변증법
a) 초기 대화편의 논쟁(Elenchos)
b) 《파이돈》의 가정(Hypothesis) 추론
c) 《파이드로스》의 ‘함께 보기’와 ‘나누기’
[149]《파이드로스》에 따르면 우리가 한 술어 개념을 구성하는 것은 다수의 개별적인 감각 경험들을 한 보편 개념의 단일성에로 종합시키는 방식에 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합, 또는 ‘함께보기’는 그러나 개별적 경험의 보편화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직 선험적 지식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것을 ‘다시 기억해 냄’, 즉 상기(想起, ἀνάμνησις)라고 칭한다. 보편자에 대한 지식은 잠재적이며 선험적인 지식이다. 그것은 감각 경험을 통하여 일깨워지지만, 감각 경험으로부터 추상화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의 감각 경험과 보편 개념은 서로 다른 인식 구조에 속한다. (...)
[150]이러한 종합과정(συναγωγή)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파이드로스》(266b)에서는 ‘나누기’(διαίρεσις)의 과정이 수행되는데, 이것은 보편성이 큰 술어 개념으로부터 더 세부적인 개념들을 분류해 내도록 하는 방법이다. (...) 플라톤은 개념들이 분류를 위해서 이분법(Dichotomie)의 방식을 사용한다. (...) [151]이분법에 따라 나누는 작업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마지막 개념에 도달할 때까지 지속된다(Phdr. 277b; Soph. 229d).
e) 《국가》편의 전제 없는 출발점
IV. 영혼
1. 영혼의 세 기능에 대한 《국가》의 이론
2. 사랑(에로스)
[162]에로스(사랑)의 본질은 한 신화를 통하여 서술되는데, 그것은 에로스를 철학자로 묘사한다. 플라톤은 에로스에게 소크라테스의 특성들을, 즉 자신의 무지함을 알며, 그렇기 때문에 지혜를 추구하고 사랑한다는 특성을 부여한다. 성애적 사랑과 철학의 지적 탐구는 동일한 근본적 충동의 서로 다른 발현 형태들이며 또 서로 교호적이다. 성애적 체험은 변증법의 동인이 되며, 오직 변증법을 통해서만 그것은 완성에 이른다. 이 양자는 절대자를 직관함에 이르러 완성되며, 여기에서 인식과 사랑의 차이는 지양된다. 지적 상승을 향한 정신적인 노력의 근원이 성애적-미학적 체험에 있다고 보는 이유과 동기는 아름다움의 특별한 본성을 통하여 설명된다. 그것이 (아름다움의) 이데아라는 점에서 그것은 지적 존재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감각 지각을 통해서도 파악되고 인지되는 유일한 이데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눈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에게서 나타나 보여지기 때문이다(Phdr. 250cd). 아름다움의 이데아는 가시적 존재영역과 가지적 존재영역의 분리를 해소시켜 버린다; 실재의 기초적 영역과 최고 영역은 미의 이데아를 통하여 하나의 통일체로 연결된다.
* 이 부분의 릭켄의 논변은 헤겔의 논변을 따르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과연 플라톤의 에로스가 이렇게 이해되는 것은 정당한가?
3. 불멸성
[165][영혼불멸성에 대한] 첫 번째 증명[모든 것이 반대로부터 생성한다는 것에 기초한 증명]을 제외한 다른 증명들은 모두 이데아가 존재[166]한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이 가정은 대화의 참여자 모두에게 공통적이며 논란의 여지가 없는 기초이다. 특히 세 번째 증명은 인간과 지식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을 힘주어 대변하고 있다. 인간의 몸은 다수성과 변화와 일시성의 존재 영역에 속하는 반면, 영혼은 단일하고 불변적이며 영구적인 존재와 동질적이다. 감각 지각과 이성적 인식은 서로 엄격히 구별되며, 감각 지각과 신체는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된다. 정신적 인식에게는 신비주의적 특성이 부여되며, 두 번째 증명 과정에서 경험적 인식의 선험적 가능 근거였던 이데아는 세 번째 증명에서는 신학적 개념을 통하여 서술된다. 이데아의 인식은 윤리적 정화를 동반하는 완전한 존재와의 만남이다.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는 이데아와의 직접적인 직관은 윤리적 삶의 대가로서 주어지는 신적 존재들과의 만남이다.
4. 자결권과 책임
5. 세계영혼
[169]자연의 운동은 오직 수학적 법칙을 인식할 수 있는 원인을 통해서만, 즉 정신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견해에 따르면, 정신은 항상, 그리고 오직 영혼 안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 세계창조신화에게 출발점이 되는 기본 입장은 결코 생성하지 않는 항상적 존재(das immer Seiende)와 결코 존재하지 않는 항상적 생성(das immer Werdende)을 서로 구별하는 존재론적 이분법이다(27d). 세계영혼은 그러면 이 두 존재 영역 중 어느 곳에 속할까? 겉보기에는 《파이드로스》가 세계영혼을 “생성되지 않은 것”(245d1)으로 지칭함으로써 항상적 존재에 포함시키는 듯이 보이는 반면 《티마이오스》는 세계영혼이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만들어지도록 함으로써 생성에 포함시키는 듯하다. 이 모순의 해답은 다음에 있다; 즉 영혼에게는 이러한 이분법[170]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혼은 양쪽 영역 모두에 참여한다. 데미우르고스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영혼에 의한 제작(창조)은 불가분적이며 불변적인 존재와 생성하며 변화하는 존재 모두를 구성요소로 하는 혼합과정을 통하여 서술된다(35ab). 《법률》 제10권은 세계영혼과 고대 그리스의 종교적 신 개념 사이의 연관성을 이루어낸다. 플라톤은 신들의 존재를 부정함에 반대하며, 신들이 인간을 돌보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주장에 반대하며, 신들이 매수될 수 있다는 주장에도 반대한다. 세계 안의 모든 것을 우연과 필연의 결과로만 보는 유물론적-기계론적 이론들에 반하여 플라톤은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월한 지위를 증명하려 한다. (...) 플라톤은 세계영혼을 신적 존재와 동일시한다(899b).
V. 국가
1. 《국가》(Politeia)의 이상형
[176]플라톤은 인간은 본래부터 서로 다르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국가》의 정의 개념은 비례적 평등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각자는 모두 능력에 따라 자기 실현을 도모해야 할 것이며, 또 자신에게 합당한 만큼 받아야 한다. (...) 그렇다면 플라톤은 타고난 재능의 차이로부터 정치적 권리의 불평등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닌가? (...)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절제의 덕에 대한 진술에 얼마나 큰 비중을 부여하는가에 좌우된다. 그것은 통치에 대[177]한 피통치자들의 합의가 국가의 본질적 요인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타고난 재능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정치적 권리의 평등은 이들이 통치에 대하여 합의하거나 아니면 통치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호의적 해석의 경우에도 인정되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합의가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제도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지식인 본위의 절대주의를 옹호했다는 비난은 쉽게 물리쳐질 수 없다.
2. 법률에 의한 지배
VI. 문자화되지 않은 사상
[181]플라톤 철학은 18세기까지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밑에서 해석되었다. 그의 대화편들은 한 철학적 체계를 문학적으로 옷 입혀 놓은 것이며, 그 체계의 중심에는 존재론과 철학적 신학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전통에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1804)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는 대화편의 문학적 형태와 철학적 내용이 상호불가분적 관계에 있음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가능했다. 즉 그는 모든 문장들은 [182]“오직 플라톤 자신이 그것에 부여해 준 그 위치와 연관성과 제한성 안에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 슐라이어마허의 지속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신플라톤주의적 해석은 최근까지도 항상 다시 대변되곤 했다. (...) 플라톤 자신이 원래 의도했던 가르침을 그의 대화편 그 어디에도 명시적으로 담아놓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는 그것을 그의 아카데미아에서 구도로만 전개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184]신플라톤주의의 근원이 플라톤에게서 찾아져야 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그것의 전개와 발전은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 제기된 주제 영역을 협소화시킴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문자화되지 않은 사상에서 플라톤 철학의 전체적이며 본래적인 모습을 보려 한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로 협소화의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해석원칙은 오늘날까지도 그 정당성을 잃지 않고 있다.
VII. 구아카데미아
제4장 아리스토텔레스
생애
I. 저작
1. 전래과정
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발전론적 이해
[191]1. 아카데미아 시기[플라톤 추종기] (...) 2. 편력시기(347~335): [플라톤 비판기] (...) 3. 학원장시기 또는 제2의 아테네 시기: [독자적 사상형성기-경험적 연구, 개별실체 중시]
3. 저작들
a) 오르가논(Organon)
b) 자연철학, 생물학 그리고 심리학에 속하는 저작들
c) 《형이상학》
d) 윤리학과 정치학에 속하는 저작들
e) 수사학과 시학
f) 단편들(Fragmente)
II. 제1철학
1. 존재의 복합적 의미
2. 존재로서의 존재에 관한 학문
3. 우시아(Usia)
[218]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우시아”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의미들을 구별한다(VII 3).
1. 본질로서의 무엇(das Wesenwas; τὸ τί ἦν εἶναι)
2. 보편자(das Allgemeine)
3. 종(das Genus)
4. 기체(das Substrat; ὑποκείμενον)
[219]“형상”(Form, εἶδος)이라는 말 대신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부러 지어낸 표현인 “τὸ τί ἦν εἶναι”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220]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것이 무엇이었던 그것”(das Was-es-war-zu-sein)을 뜻한다(Bonitz는 이것을 “본질로서의 무엇”[=“das Wesenswas”]로 번역한다). 《토피카》 제1권 제5장 101b21, 38에 의하면 이 표현은 한 정의의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다.
4. 형상의 원인적 성격
[222]“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생성되는가?”라는 물음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VII 7, 1033a5~23). 다음의 예들을 고찰해 보자.
(1) 돌로부터 공이 만들어진다.
(2) 환자가 건강해진다.
(3) 이 공은 돌로 만들어졌다.
(4) 그 사람은 건강해진다.
이들 중 (1)과 (2) 문장이 서술하는 변화의 초기 상태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결여상태”(Privation, στέρησις; 문자 그대로의 뜻은 ‘박탈당함’)라고 부른다. 그것의 본질은 어떤 것이 (2)에서처럼 마땅히 가져야할 것이거나, (1)에서처럼 가질 수도 있는 완전성이나 규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Met. V 22 참조). 반면 (3)과 (4)는 작용이 일어나 변화가 일어나거나 이미 변화가 일어난 상태에 있는 질료에 대하여 언급한다. “무엇으로부터 그것이 생성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본래적 대답은 결여상태이다.
*따라서 최초의 운동은 ‘결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때 결여는 어떤 질료적으로 ‘꽉 찬 결여’다. 난 이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227]하나의 사실은 술어적 구조를 가진다: 즉 어떤 것이 어떤 것에 귀속된다. 이때 설명을 요구하는 물음이 의미 있게 되기 위해서는 이들 두 개념은 서로 구별되는 것이어야 한다. 동어 반복(Tautologie)은 아무런 설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왜 인간이 인간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원인에 대한 물음이나 설명을 요구하는 물음은 다음의 형태로 제기되어야 한다: 왜 어떤 것에서 어떤 다른 것이, 즉 그것과 구별되는 어떤 것이 연결되거나 귀속되는가?
5. 가능태와 현실태
[230]각각 가능태로서 존재하는 것(가능적 존재자)에 대한 현실태로서 존재하는 것(현실적 존재자)의 관계가 놓여 있다. 이 관계는 그러나 단일한(univok) 의미의 관계가 아니라 유추적(analog) 의미의 관계이다. (...) 두 가지 서로 다른 형태가 확인된다:
[231]1. 능력과 활동의 관계. 이 관계가 말하는 능력은 시각 능력과 건축기술이며, 이에 상응하는 활동은 보는 활동과 집은 짓는 행위이다.
2. 질료와 형상의 관계. 이 관계는 나무토막이 조각되어 만들어진 조상을 통하여 설명되고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합성체인 우시아(동물), 형상(동물의 영혼), 질료(동물의 육체)를 서로 구별한다. 그리고 형상은 현실태(ἐντελέχεια; Entelechie)와 동일시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형상은 제1의 현실태이며, 이것은 제2의 현실태와 구별된다. 눈의 제1현실태는 시각능력이며, 제2현실태는 실제로 행해지는 시각활동이다. (...) 결국 형상, 또는 제1현실태는 식물이나 동물에 있어서 그들의 제2현실태인 자신의 생명활동(삶)을 수행하는 (잠재적) 능력이다. 형상이 활동수행을 위한 능력이라는 것은 그것이 질료에 대해서 가지는 존재론적 우위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보여준다.
* 즉 ‘잠재태’라는 말의 유래는 여기에 있다.
[233]실체론의 주요 권들(VII~IX)에서의 탐구는 제9권 제8장의 논지, 즉 현실태는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가능태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논지와 함께 끝을 맺는다.
a) 개념과 인식의 측면에서.
어떤 특정한 능력이나 특정한 가능성의 개념은 그에 상응하는 활동(행동)과 현실성의 개념을 전제한다. (...) 어떤 것을 볼 수 있다거나, 또는 어떤 것이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을 실제로 보거나 또는 실제로 보여짐에 비추어서 비로소 인식되는 것이다.
b) 시간적 측면에서.
우리가 개체들이나 또는 개별적 활동들을 고찰할 때에는 가능태로서 존재하는 것이 현실태로서 존재하는 것보다 앞선다. (...)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연주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즉 능력은 실제 행동보다 시간적으로 먼저이다. 그러나 그는 그 능력을 오직 연습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행위를 실제로 행사하는 사람으로부터만 획득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볼 때 활동(실천)은 능력보다 시간적으로 먼저이다.
c) 우시아의 측면에서.
[234](...) 첫째는 현실태로서의 존재는 모든 존재자들의 목적임을 보여주며, 둘째는 불변적이며 필연적인 것은 오직 현실태로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235]건축 활동은 그 자체와도 구별되며, 건축가와도 구별되는 생산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활동이다. 건축가는 활동이나 변화를 야기시키지만, 새로운 존재를 야기시키지는 않는다. 그의 활동은 그 자신과는 다른 제1현실태를 목적으로 가지는 것이다: 즉 질료 안에서(질료와 함께) 현실화된 집의 형상이다. 이런 종류의 활동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 또는 변화(κίνησις)라고 지칭한다. 이와는 다른 종류의 (...) 활동은 그 자신과 다른 어떤 목적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 시각행위는 (인지행위와 달리) 그것의 매순간마다 그 전체로서 주어진다. 시각 행위에는 아무 단절된 과정도, 또 그 자신과 구별되는 목적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빨리 진행되거나 또는 천천히 진행될 수도 없다. 바로 이 점에서 그것은 무시간적(zeitlos)이다. 이러한 종류의 활동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좁은 의미의 활동(ἐνέργεια)이라고 부른다.
6. 부동의 동자
[241]존재(Sein)는 결코 사물이나 물성(物性; Dinglichkeit)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존재는 현실태이며, “현실태”(Wirklichkeit) 개념은 (현실화로) “작용함”(Wirken), “작용 중에 있음”(am Werke sein)으로부터 형성된 말이다. 한 도구의 완성되고 충만한 현실태는 바로 그 도구의 “작용 중에 있음”이다. (...) “형상”(Eidos)라는 말은 플라톤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도 존재 개념이 “보다”(시각)의 개념으로부터 생각되었음을 시사한다. 존재자가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은 자기를 보이기 위해서이다. 형상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볼 수 있다는 것에서 ‘볼 수 있다’의 의미는 존재자의 본래적 의미는 아니다. 볼 수 있음은 보여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 가능성은 그 존재자가 실제로 보여짐으로써, 즉 그것의 형상이 인식됨을 통하여 비로소 실현된다.
[242]“(...) 정신에게는 자기 자신이 사고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정신은 [사고 대상들을] 만나고 생각하면서 예지적 존재가 되며, 그렇게 해서 정신과 사고 대상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고 대상과 우시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이 그들을 소유할 때, 정신은 능동적이다”(XII 7, 1072b19). 정신의 현실태는 다름 아닌 바로 정신에 의해 생각된 형상의 현실태이다. “질료가 배제된 [순수 형상들]에 있어서는 생각하는 존재와 생각되는 존재는 서로 동일하다”(De anima III 4, 430a3). 정신은 오직 자신의 대상과 함께 있음을 통해서만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다. 관념론(Idealismus)과 실재론(Realismus)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결코 배제하는 입장들이 아니라, 오히려 필연적으로 서로를 보완하는 입장들이다. 왜냐하면 생각된 것으로서의 실재가 비로소 현실적이며, 사고는 실재와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능동(활동)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7.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전체적 의미
[244]철학적 신학의 역사를 위해 결정적 기여를 한 [245]형이상학의 업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의 개념을 생각함에 있어서 존재 개념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신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존재신학(Onto-Theologie)이다: 즉 “존재하자”라는 말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신의 개념에 도달한다. 제12권(Lambda)이 말하는 신은 필연적 존재(ens necessarium), 완전한 존재(ens perfectissimum), 그리고 무원인적 존재(ens a se)이다. (...) 자기 스스로를 생각하는 정신의 개념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의 형이상학과 신비주의 이론으로부터 출발하여 신에게 도달하는 길을 열어 놓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적) 논리학(Theologik)은 형이상학, 즉 초월적 물리학(Meta-Physik)이다: 다시 말해서 물리학(자연학, 변화와 운동에 관한 이론)의 완성이다. 바로 여기에 형이상학의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전제와는 무관하게 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으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III. 훌륭한 삶을 위한 학문
1. 윤리학의 과제와 전제조건, 그리고 그 한계
2. 행복에 관한 물음
3. 인간의 활동과 업적
[253]“덕”(德)은 그리스어의 “아레테”(ἀρετή)에 대한 불충분한 번역이며, “아레테”의 사용범위는 도덕적 언어의 영역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도구들이나 수공 기술자, 그리고 신체기관들도 인간 자체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아레테”를 가질 수 있다. 이 개념은 능력의 개념과 연관된다.
능력을 가진 어떤 것은 이 능력의 관점에서 볼 때, 좋은 상태에 있을 수도, 또 나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따라서 그 능력이 수행하는 작업을 완전하게 해 내거나, 아니면 불완전하게 수행한다. 바로 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이 상태(εξις)를 아리스토텔레스는, “Arete”의 일반적 의미가 문자 그대로 옮겨질 수 있는 바와 같이, 탁월함 또는 열등함(κακία)이라고 지칭한다(Met. V 20, 1022b10).
4. 덕
[257]이성과 의지는 서로 구별되어야 하지만 (...) 의지 기능 자체가 전적으로 비이성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비록 그것이 스스로의 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마치 (...) 한 친구가 다른 친구의 충고를 받아들이듯이, 이성의 가르침과 지시에 따를 수 있다. 이러한 이성 능력과 의지 능력의 구별에 상응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추론적 덕과 윤리적 덕을 구별한다.
a) 윤리적 덕
[259]습관은 임시적 단계이다; 그것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내리는 윤리적 판단력의 차원에까지 도달함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덕을 갖춘 사람이 자율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선이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 자기가 내린 결정에 대하여 책임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 이론은 그러나 윤리적으로 온전한 공동체로서의 국가(폴리스)를 전제조건으로 가진다. 잘 교육받지 못한 사람의 윤리적 판단과 책임의식에 대해서는 그러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b) 추론적 덕
[261]《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의 중심주제는 “프로네시스”(Phronesis)이다. 우리는 이 말을 “현명함”, “윤리적 인식”, “윤리적 지혜”, “실천적 이성”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그때그때의 문맥에 의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
[266]윤리적 지혜(프로네시스)는 인간으로 하여금 올바른 윤리적 결정이나 올바른 행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덕이다. 이 지혜의 본질적 특성을 보여주는 숙고 과정에 대한 서술은 그것이 순수한 선험적 지식에 기초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많은 경험과 연륜을 전제한다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강[267]조한다(EN VI 8, 1141b15; 1142a11; VI 12, 1143b11). 동시에 그것은 윤리적 덕과 연관되며, 그래서 윤리적 실천과도 관련된다. 실천을 위한 숙고는 어떤 원칙이나 목적을 전제하며, 이것은 오직 윤리적 선(善, 좋음, 가치)에 의해서만 인식된다(EN VI 5, 1140b11; VI 13, 1144a29; 1145a4) (...)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학문적 인식과 마찬가지로 실천적 인식도 직관적 이성에 의존한다. 학문적 인식에 있어서 직관적 이성의 임무가 필연적 원리들을 파악하는 것이라면, 실천적 인식에서 직관적 이성의 인식 대상은 개별적인 것들이다; 즉 그것의 과제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능한 행동의 대안들 중 어느 것이 옳은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268]실천적 숙고가 맡아야 할 과제는 올바른 수단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모델은 한편으로는 행위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제기한다. 만약 한 행위자가 내리는 결정이 그의 성격에 의해 좌우된다면, 그리고 그의 성격은 다시금 교육과 사회적 상황들의 영향하에 형성된다면, 어떻게 그 행위자는 자기의 결정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다른 한편으로 제기되어야 할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산활동에서 얻어진 수단과 목적의 개념적 구별을 부당하게 윤리적 행위에 전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는 생산활동과는 달리 윤리적 행위에서는 그 행위와는 분리된 어떤 목적이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여러차례 지적한 바 있다; 우리가 윤리적으로 선하게 행동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올바른 행위를 그 행위 자체 때문에 행하는 경우일 뿐이다(EN, II 3, 1105a32; VI 5, 1140b4; VI 13, 1144a16).
5. 관조적 삶과 실천적 삶
[271]우정(우애)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의 불완전한 형태 두 가지와 완전한 형태 한 가지를 구별한다(EN VIII 3 이하). 친구들 사이에서는 서로를 위해서 좋은 것을 원하며, 또 이러한 태도를 상대에게 숨기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우정의 관계에 있어 공통적이다. 단지 우정의 형태들을 구별시키는 것은 상대에 대해서 가지는 호의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통해서이다. 상대에 대한 호의의 동기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유용하다는 것이거나, 아니면 상대가 나를 유쾌하게 만들고 호감이 가며 매력적이고 선하고 훌륭하기 때문일수도 있다. 오직 윤리적으로 선한 사람들 사이의 완전한 우정에 있어서만 상대에 대한 호의는 그 상대자 자신을 위해서 발휘된다. 이러한 완전한 우정은 불완전한 우정의 두 가지 형태가 누리는 좋은 점들도 동[272]시에 포함한다. 선한 사람이 다른 선한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은 성격의 비슷함 때문이다. (...) 선한 사람들 사이의 우정은 그 자체로서 본질적으로 일반적 정의와 특수적 정의 모두를 포함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이들 두 가지 형태의 정의 그 이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인간들의 공동생활과 인간 상호간의 호감(교감)의 의미를 강조한다(EN VIII 6). (...) 우정이 실제로 실현되는 것은 그들이 매일매일의 삶을 함께 나눌 때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들이 서로의 교제에서 기쁨을 체험할 때에만 가능하다. 완전한 활동과 실천으로서의 행복은 다른 사람들 없이는 불가능하다(EN IX 9). 마음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함께 일함으로써 나 자신의 삶의 지속성과 체험의 강렬함은 더해진다.
[273]지혜는 그것의 실제적 유용성은 배제하고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을 위해 의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의 별들과 전 우주를 바라보면서 그 모든 것의 원인을 묻게 만드는 경이감의 체험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완성된 학문의 차원에서 지혜를 추구함에 헌신한다는 의미의 관조적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모두가 자연적 소질로서 타고난 지혜 추구나 형이상학에로의 경향을 이것과는 구별해야 하며, 따라서 이러한 경향은 아마도 실천적 삶에 있어서도, 만약 그것이 진정코 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면, 여러 가지 다른 정도의 의식성과 완성도를 가지고 실현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IV. 페리파토스
제5장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I. 스토아
대표적 철학자들과 원전 문헌들
1. 논리학
[288]인식론은 진리의 기준에 대해서 묻는다. 그것은 특정한 관념 또는 표상(φαντασία; Vorstellung)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첫째로 이 개념이 설명되어야 한다(DL VII 42). 디오클레스(Diokles)(DL VII 49~53)는 표상을 다음과 같은 관점들에 따라 구별한다:
a) 관념의 소유주체에 따르는 구별. 이성이 없는 생명체들의 관념이나 표상은 비이성적이지만, 인간의 관념은 이성적이며, 그래서 생각이라고 불린다; 오직 이들만이 앞으로의 고찰 대상이다.
b) 관념(표상)의 발생 근원에 따르는 구별. 감성적 관념(표상)들은 감각기관들로부터 형성된다. (...) 비감성적인 관념들은 이성이 감성적 관념(표상)들로부터 출발하면서 시행하는 여러 가지 처리 작용들을 통하여 형성된다. (...) 감각 경험을 초월하면서 (비물질적인) 의미의 개념이나 장소의 개념을 형성한다. (...)
c) 관념들의 인식적 가치에 따르는 구별. 여기에서 디오클레스는 거짓 관념들로부터 참인 관념들을 구별하며, 이것은 스토아의 용어로는 (직접) “감지되는”(καταληπτικος) 지각의 관념(표상)이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야기된 인상이다. “감지되는” 지각의 관념(표상0이 진리의 기준이다.
[키케로에 따르면(Acad. post. I 40~42, II 144; SVF I 60, I 66)] (...) 우리의 마음은 관념이나 표상을 통해 촉발되는데, 이 표상 자체는 그것이 어떤 실재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생겨난 것임을 스스로 보여준다. (...) 우리는 이 표상[감지되는 표상] 가지는 신뢰성 때문에 자발적으로 이 표상에 동의한다. (...) [제논에 따르면] 지각하는 표상은 납작하게 펼쳐진 손에 해당되며, 표상에 대한 동의는 손가락을 구부려 모으는 것에 해당되며, 파악(함)은 그 대상을 붙잡아 쥐는 주먹과 같다. (...) [290]그들은 참인 경험적 판단과 지식을 구별하였다. 제논은 주먹 쥔 오른 손을 움켜 잡는 왼손을 가지고 지식(앎)을 예시한다. 우리가 지식을 가지는 것은 경험적 판단이 그 어떤 논증을 통해서도 논박될 수 없을 때, 다시 말하면 경험 판단이 포괄적인 증거들의 연계 속에 종합적으로 입증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참인 경험판단은 지식(Wissen)과 무지(Nichtwissen) 사이에 위치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의 출발점인데, 왜냐하면 그로부터 개념들과 원리들이 얻어지기 때문이다.
[291]사태들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플라톤적 실재로서 존재하지도 않는다. 스토아의 철학자들은 개념 실재론적 입장을 취한다: 의미들(Lekta)은 오직 인간의 정신(이성) 안에서만 존재한다(SVF II 166; DL VII 63). 의미들을 구분하는 최상위의 기준은 언어적 표현이 불완전한가, 아니면 완전한가이다. (...) 결국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술어적 표현이나 진술함수의 의미로 [292]이해하는 바로 그것에 상응한다. (...)
[293]스토아 학파는 삼단논법의 다섯 가지 기본 형태를 받아들였으며, 이들의 정당성을 입증한 증면은 필요치 않다고 보았다. 그들은 다른 어떤 전제가 추가됨이 없이도 이들 기본 삼단논법에로 환원될 수 있는 모든 추론들을, 그리고 오직 그러한 추론들만을 정당한 추론으로 간주했다. 이 기본 삼단논법들은 다음과 같다.
(1) 만약 p이면, q이다; 그런데 p이다; 그러므로 q이다.
(2) 만약 p이면, q이다; 그런데 q가 아니다; 그러므로 p가 아니다.
(3) p도 아니며 또 q도 아니다; 그런데 p이다; 그러므로 q가 아니다.
(4) p 또는 q이다; 그런데 p이다; 그러므로 q가 아니다.
(5) p 또는 q이다; 그런데 q가 아니다; 그러므로 p이다.
2. 물리학
[294]스토아는 우주의 두 가지 원리를 구별하였다: 하나는 능동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동적인 것이다. 그들은 피동적인 것을 아직 특정한 속성이 없는 질료와 동일시하였다. 퓌시스와 로고스는 수동적으로 작용과 영향을 받기만 하는 질료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원리라는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 그러나 고찰방식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 퓌시스는 유기체를 그것의 씨앗 안에 이미 각인되어 있는 계획도(σπερματικὸ λόνος; DL VII 148)에 따라 발전시킨다. 그러므로 퓌시스 개념은 운동의 근원(발원)을 내세우는 반면, 로고스 개념은 그 운동(변화)의 과정과 경로를 이끌어 가는 정보를 강조한다.
[297]첫째 범주는 기체(基體, Substrat; ὐποκείμενον)이다; 이것은 질료와 동일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나머지 세 범주들은 능동적 원리의 발전 단계들의 구별에 기인한다. 질료는 첫 단계에서는 “개별(개체)화시키는 성질”(individuierende Qualität; ἰδία ποιὀτης)을 통하여 한 개체(개별자)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고유명사(예를 들면 “소크라테스”)를 가지고 지칭한다. 개체화시키는 성질과는 달리 “공통적 성질”(gemeinsam Qualität; κοινὴ ποιὀτης)이 동일한 두 번째 범주 내에서 구별된다; 이것은 예를 들어 “사람” “말” 등과 같은 “호칭”(분류 명칭)을 통하여 지칭된다(DL VII 58). (...) 유(類; εἶδος)와 종(種); νἐνος)의 의미(Lektá)로서가 아니라 언어적 기호들과 함께 취급된다는 사실(DL VII 60)은 스토아의 철학자들이 유명론적인 입장을 대변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여하튼 개체화시키는 성질이 존재론적으로 더 우선한다. 처음의 두 범주들이 개체를 구성하는 원리라면, 세 번째 범주는 개체 자체에 귀속되는 여러 가지 변화 가능한 성질들을 모두 함께 규정하고 파악하는 것이다. 이 “상태적 규정성”(zustäncliche Bestimmtheit; πώς ἔχον)의 범주 밑에 스토아의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속성들, 그리고 고대의 비판가들이 비난한 것처럼, 서로 합치될 수 없는 속성들, 예를 들어 양, 시간, 장소, 성질 등을 함께 포함시켰다(SVF II 399 이하). 네 번째 범주인 “관계적 규정성”(relative Bestimmtheit; πρὀς τί πως ἔχον)에 속하는 것은 한 개체가 다른 것들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들, 예를 들면 “ … 의 아버지이다”, “…의 오른쪽에 있다”와 같은 것들이다(SVF II 402~404).
[298]클레안테스는 신의 관념이 인간의 마음 속에 각인시켜지게 된 원인으로서 네 가지를 언급했다고 한다;
[299]1.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예감, 2. 기후와 대지의 생산력이 인간에게 베푸는 이로움의 체험, 3. 자연적 재닌과 대면할 때 인간을 엄습하는 공포, 4. (가장 중요한 원이느로서) 천체들의 질서 있는 운동으로부터 주어지는 미적 체험.
3. 윤리학
[303]만약 우리가 스토아의 윤리 사상을 비-자연주의적 이성윤리로 해석하려 한다면, 이때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은 이성의 의미를 인간적 이성으로 제한시키지 않는 것이다. 선한 행위를 위해서는 인간은 우주이성(Allvermunft)이 어떻게 비-이성적 자연 안에서 스스로를 현시하는지를 깨닫고 그것을 행동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그가 항상 자신의 신조로서 유념해야 할 것은, 비록 그가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추구하는 목표를 자신의 잘못 없이도 달성하지 못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반이성적 행위로 그에게 악이나 손해를 입히는 경우에도 우주이성은 모든 것이 그를 위해서 최선의 것이 되도록 섭리한다는 것이다(클리안테스의 ‘제우스 찬가’, SVF I 537 참조). 우리는 스토아 윤리학을 신학적 이성 윤리라고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304]모든 생명체는 출생의 첫 순간부터, 그리고 아직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기 전부터 자신과의 관계(자기관계)를 가진다. 여기서의 관계 대상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기 자신의 존립과 존속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를 위한 “[그에게 속하는] 일차적 자기 소유”[πρωτον οἰκιον; 스토아 윤리학의 출발점이 되는 이 명제는 그래서 “자기 보존적 욕구의 이론”(Oikeiosis-Lehre)으로 불린다.] 생명체는 자기의 존재를 사랑하며, 자신의 파멸을 두려워한다.
[305]윤리적인 것의 본질은 자기애로부터 출발하면서 자기애를 넘어서려는 노력이다. 인간이 반드시 본능적 충동을 따라서 행동하도록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본능을 따를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또 그는 서로 상충하는 여러 가지 욕망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도덕적으로 선하기 위해서는 이 선택은 특정한 동기로부터 내려져야만 한다. (...) 도덕적으로 선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총체적 자연 자체의 목적론적 질서 구조를 자신의 행위 동기로 택하는 사람이다. 자연적 욕망과 욕구를 충족시킴은 인간이 이를 통해서 총체적 자연에 복종하게 됨을 인식할 때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가 된다. 자연(전체적, 총체적, 우주 자연)과의 (조화로운) 합치(ὁμολονία; convenientia)는 인간을 위해서는 유일한 선이며, 또 [306]그 자체 때문에 추구될 만한 가치가 있는 선이다.
[307]가치중립성(Adiaphora) 테제는 스토아 철학의 행복 개념으로부터 야기된 것이다. 행복은 자연적 욕구와 충동을 만족시키는 것과는 무관하다. 바로 이 점에서 스토아의 행복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는 구별된다. 스토아의 철학자들은 행복을 도덕적 목표와 동일시한다; 그들의 이상은 모든 외적 여건들에 얽매이지 않고 이로부터 독립적인(초연한) 현자이다(De fin. III 26). “오직 도덕적인 것(honestum)만이 선(bonum)이며,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덕스럽게 삶을 뜻한다”(앞의 책 29).
가치중립성 개념은 도덕적인 선(καλόν; honestum)과 다른 좋은 것들(재물, 건강 등)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키케로는 네 개의 주사위를 가지고 수열 1, 3, 4, 6을 차례로 던져야 하는 놀이와의 비교를 끌어들인다(De fin. III 54). 우리는 이러한 주사위 던지기를 (완전히) 성공하든가, 아니면 실패할 뿐이다; 우리가 던진 주사위가 이 수열에 얼마나 가까워지는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의 관계는 “선택(선호)되는 대상들”, 그리고 도덕적 선에 있어서[308]도 적용된다. 비도덕적 (영역에 속하는) 선(도덕과는 무관한 좋은 것들)도 도덕적 목표의 실현에 관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도덕적 선을 얻으면서 도덕적 목표의 달성에는 실패할 수 있으며, 또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311]도덕적 가치개념은 어떤 행위의 좋고 나쁨이 그 행위자에 달렸다는 것을 전제한다. 덕스러움과 부도덕함은 인간 각자의 책임 영역에 속한다. 칭찬과 비난, 명령과 금지, 형벌과 명예 등은 애초부터 모든 행위자가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SVF II 984). 그러나 이제 스토아의 철학자들은 모두 예외 없이 모든 사건들을 연결하는 인과적 연계성을 가르친다. (...) [312]운명에 관한 가르침은 도덕적 행위의 가능성을 파기시키지 않는가? 크뤼시포스는 원인을 두 가지 종류로 구별함으로써 이 문제점을 해결하려 했다(Cicero, De fato 39~43). 그는 이것을 롤러의 예를 통하여 설명한다. 롤러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힘의 작용을 받았을 때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하는 것은 롤러의 구조에 의해 이미 결정된다. 이때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충격은 직접적이며 운동을 유발시키는 원인(causae adiuvantes et proximae)에 해당되지만, (롤러의) 구조나 본성은 완전하며 본원적인 원인(causae perfectae et principales)에 해당된다. 오직 직접적이며 운동 유발적 원인만이 필연적인 인과적 연관 관계에 속한다. 이 구별이 행위에 적용될 때 가지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직접적 원인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인상이나 자극 또는 느낌이다. 우리가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동의하는가, 또는 동의하지 않는가 하는 것은 완전한 원인에 의해 좌우되며, 이것은 우리의 도덕적 성품이다. - 이 구별이 일차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은 단지 우리가 행위를 행위자에게 귀속시킬 수 있다는 것뿐이다; 인과적 요인들 중의 하나는 행위하는 인간의 성품(성격)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성품도 그 행위자에게 귀속시킬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행위자가 자기의 성품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크뤼시포스는 인과의 필연적 연관망으로부터 성품(성격)을 배제시킨다. 그러나 스토아의 이원론은 이러한 이원론을 허용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다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즉 그 누구보다도 칸트가 그의 가지적 성격에 관한 이론(Lehre von intelligiblen Charakter)에서 대변하고 있는 두-세계-이론(Zweiweltenlehre)이 자[313]유의 문제에 대한 견고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II. 에피쿠로스
생애와 저작
1. 규준론
[316]에피쿠로스는 진리의 세 가지 기준을 말한다(DL X 31): 1. 감각(αἰσϑησις); 2. 예비적 개념(προλήψεις); 3. 감정(πάϑη). 감정은 가치판단을 위한 기준이 된다; 그래서 그것은 윤리학을 다루는 장에서 취급된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인식의 기초는 감각이다. 감각은 그 자체로서 확실성을 가진다; 감각이 확인되기 위해서는 사고도 기억도 필요치 않다. 그것은 그 어떤 심급에 의해서도 부정되지 않는다. (...) [317]이성을 통해서도 부정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성은 감각에 의존하고 감각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 고통이 나에게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는 바로 그만큼, 감각도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다(DL X 31 이하; KD XXIII 참조).
예비적 개념(Vorbegriff; “미리 앞지름”, “선취”)은 일반 명사(술어)의 의미를 가리킨다. 그것은 동일한 대상으로부터 반복적으로 얻어진 감각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보편 개념에 해당된다. 우리는 예비적 개념에 힘입어 우리의 “견해” 또는 “가설”을 형성하며, 이것은 진리치를 가지는 진술로 나타난다. 결국 예비적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감각에 대하여 말할 수 있도록 만든다. (...) 판단의 오류는 우리가 어떤 진술에 대해서 그것을 확인해 주거나 반박해 줄 수 있는 분명한 감각 경험을 기다리지 않은 채 그 진술에 동의할 때 [318]일어난다.
2. 물리학
[320](1) 아무것도 비존재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 (...) (2) 아무것도 비존재로 소멸하(되)지 않는다. (...) (3) 우주는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것과 같이 과거에도 항상 그렇게 존재했으며, 미래에도 항상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 빈공간은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운동의 현상이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321]에피쿠로스는 초기 원자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에 근거하여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두 가지 점에서 더 발전시킨다. - 데모크리토스에 있어서는 (물체의) 물리적 가분성과 수학적 가분성 사이의 관계가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에 대해서 에피쿠로스는 잠정적으로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는 의미의 수학적 개념을 거부함[322]으로써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즉 원자는 물리(학)적으로는 분할 불가능하나, 수학적으로는 분할 가능하다. (...) 그러나 원자의 부분들은 수학적으로도 분할 불가능하다; 우리는 최소한의 크기들(Minima)을 전제해야만 한다. 이에 대하여 가장 명확한 논증을 제시한 사람은 루크레티우스 I 599~634(An Her. 56~59 참조)이다. (...) [323] 오직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진 원자들의 파괴불가능성만이 경험적 세계의 다양성을 설명할 수 있다.
둘째로, (...) 원자들이 정해지지 않은 시간에 정해지지 않은 장소에서 아무런 원인 없이 하락의 수직선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Lucretius II 216~224). 그는 이러한 수직선으로부터의 일탈을 통하여 의지의 자유도 설명한다(앞의 책 251~293). 이 일탈은 원자들을 서로 부딪히게 만든다. (...) 충돌과 밀어냄은 원자들을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상태에 머물게 만든다.
3. 윤리학과 종교철학
[325]결국 그는 감정의 분류 도표에서 쾌락과 고통 사이에 제3의 중립적 상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개념의 의미 규정의 근거는 (...) 우리는 우리의 고통 체험을 배경으로 할 때, 고통 없는 상태를 자동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이유이다. 이 정지 상태의 쾌락은 쾌락의 최상의 형태이며 우리의 삶의 목표이다. (...) 이 점에서 에피쿠로스는 역학적 쾌락을 최고선으로 보는 퀴레네 학파와는 구별된다(DL X 136). 육체적 고통보다 더 나쁜 것은 영적(마음의) 고통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에피쿠로스는 자기의 규준론을 따른다. 모든 영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과 연관된다; 영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에 대한 기대이거나 그 기억이다(DL X 137; Cicero, De fin. I 41). 육체적 고통에 대한 예측이나 기대가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질 때, 영적 고통은 사라진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죽음을 앞에 두고 일어나는 공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반론을 편다: “모든 선과 악은 본질적으로 감정이나 느낌의 (실제) 체험에 기인한다; 그러나 죽음은 (이러한 모든) 감정의 체험을 상실하는 것이다”(An Men. 124).
[329]에피쿠로스의 신 관념은 특정한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 유사하다. 양자 모두에 있어서 신은 이 세계의 운행에 개입하지 않는다. 신은 지복의 존재이며, 모든 인간의 감정은 그러나 그와 무관하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신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이상이다. 인간이 신의 불멸성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인간은 현재에 살면서 그 자신의 방식으로 거기에 참여할 수 있다(An Men. 124; KD XIX 이하). 메노이케우스 앞으로 씌어진 편지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만약 당신이 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당신은 인간들 사이에서 신과 같은 삶을 살 것이다. 왜냐하면 불멸의 선과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은 다른 가사적 존재들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III. 회의주의
1. 퓌론의 회의주의
[335]퓌론주의자들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실재들의 존재를 학문의 방법을 가지고 증명하려는 철학적 체계들에 반대한다(PH I 16). (...) 그러나 퓌론주의자들은 사물에 속하는 여러 가지 속성들에 관한 생활 세계적 진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반대 입장을 취한다. (...)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놓고 퓌론주의자들이 어떤 이론을, 예를 들면 현상주의나 또는 지식의 불가능성을 증명하거나 주장하는 인식론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자기모순을 범한다는 비판을 가지고 퓌론주의에 대응할 수는 없다. 퓌론의 회의는 모든 (적극적인) 주장을 자제하고 피해가는 기술이다. 회의주의자는 앞서 말한 양태들이 무엇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PH I 35). 그들의 표어나 슬로건을 사용하면서도 그들은 결코 그것이 어떤 진리로 받아들여질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2. 아카데미아의 회의주의
[339]소크라테스는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주장했었다. 아르케실라오스는 말하기를, 우리는 그것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 (...) 즉 현자는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동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Acad. I 45; II 60; 76).
제6장 신플라톤주의
I. 중기 플라톤주의
[344]아카데미아의 철학적 경향은 아르케실라오스 밑에서는 회의주의로 기울었었다. 그러나 대략 기원전 130~68년까지 살았으며 팔레스티나 지방의 아스칼론 출신인 안티오코스(Antiochos von Askalon)는 아카데미아를 다시 본래의 도그마티즘(교조주의)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에게서는 스토아 철학, 특히 스토아 물리학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아마도 이데아가 신의 생각이라는 이론도 그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안티오코스는 중기 플라톤주의의 실질적 설립자로 인정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서는 후기 플라톤과 구아카데미아의 원리론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원리론을 이어받은 사람은 약 기원전 25년에 사망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에우도로스(Eudoros von Alexandrien)이다. 그는 플로티노스의 일원론과 근본실체 이론의 출현을 예비한 사람이다.
[344]알비노스의 《플라톤 철학 요강》(Didaskalikos)은 플라톤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 철학의 이론들과 결합시킨다. 그는 두 가지 ‘삼체일조’(三體一組, Triade)를 말한다. 첫째로 질료, 이데아, 그리고 《티마이오스》[346]의 데미우르고스에 해당하는 제1의 신이다; 둘째는 그에 대하여 이름을 붙이기도 설명하기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강조되는 제2의 신, 정신, 그리고 세계영혼이다. 알비노스는 이데아 개념의 두 가지 의미를 구별한다. 비물질적인 (플라톤의) 이데아는 신의 생각이다; 이 이데아의 모방이며 질료와 결합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다. 아풀레이우스의 저작 《플라톤의 교설에 관하여》(De dogmate Platonis)에 나오는 삼체일조(“제1의 신, 정신과 형상, 영혼”)를 알비노스의 경우보다 더 분명하게 모방한 것은 플로티노스의 근본실체 이론이다. 플로티노스에서처럼 아풀레이오스의 경우 (사물의) 원형인 이데아들은 분명히 제2의 원리로 채택되고 있다.
II. 플로티노스
생애와 저작
1. 플라톤 철학의 해석자
[351]그러나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을, 특히 그의 정치학적 차원을 배제시킴으로써,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포르퓌리오스를 통하여 주어진 플로티노스에 대한 인물 평가는 그가 일차적으로는 종교철학자임을 보여준다. 우주론도 심리학도 정신철학도 모두 그의 종교철학적 관심으로부터 추진되었다; 그리고 윤리학은 인간의 내면적 정화를 위한 이론이었다. 플로티노스는 “완전 타자에 대한 동경심”(Sehnsucht nach dem ganz Anderen)의 형이상학을 발전시켰으며, 그것의 근본 개념은 존재 개념이 아니라 미와 선의 개념이다. 그의 전기로부터 그의 철학의 두 근원이 분며히 드러난다; 하나는 플라톤 철학의 전통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신비주의적 체험이다.
2. 미의 형이상학
[354]경험가능한 실체는 형상에 근거하여 존재하며 또 어떤 것이다; 즉 “그것은 형상의 아름다움을 나누어 가지는 한, 그리고 그 형상에 더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그것은 완전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름다울 때에는 그것은 (그만큼) 더 존재(우시아)이기 때문이다.” 실재는 단지 이론적 개념이거나 존재론적 개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미학적 체험은 존재에로 인도하는 근원적 접근(통로)을 가능케 해준다. 존재는 동시에 그리고 항상 욕구의 대상이다. (...) [355]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바로 그만큼 존재한다는 진술은 아름다움을 실재계 전체의 질서체계 안에 그것의 지위와 위치를 배속시켜 주는 것이다. 미학적 존재만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미적 경험의 대상은 동시에 존재론적 언어를 통하여 서술될 수도 있다. 미학적 진술은 존재론적 진술을 통해서 정당화될 수 있다.
(...) 아름다움 또는 형상에 대한 인식은 영혼의 가장 고차원의 능력이 수행하는 업적이다. 그러나 이 인식과정은 오직 이성적 능력에 의해서만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정서)적 능력에 의해서도 동시에 수행되는 과정이다.
3. 정신
[358]예술가는 맞추어 짜거나 구성하지 않는다. 전체는 부분들에 앞서 이미 존재한다. 예술가의 인식은 논증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직관적이다. 직관은 하나의 통일체로서, 예술작품을 그 마지막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각인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플로티노스는 예술과 학문의 차이를 본다. 학문의 작업 방식은 전체와 결론을 통하여 수행되는 것이다. 예술가의 직관적 인식은 학문적 사고보다 더 근원적이며, 학문적 사고는 단지 한 근원적 직관을 발전시키는 데에 그칠 뿐이다.
4. 일(하나)
[361]일은 어떤 것도 아니며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양의 범주에도 또 질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지해 있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공간 안에 있지도 않고 시간 안에 있지도 않다. 그것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그 자체로서 어떤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그 일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것이 “일”이라고 말할 때, 이로써 우리는 단지 그것의 다수성과 분할 가능성을 부정할 뿐, 우리는 그 단일성마저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III. 플로티노스 이후의 신플라톤주의
1. 형이상학적-사변적 경향
a) 플로티노스 학파
b) 시리아 학파
c) 아테네 학파
2. 종교적-신기 주술적 경향
3. 학문적 경향
a) 알렉산드리아 학파
b) 서구 라틴어권의 신플라톤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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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무기들-들뢰즈 실천철학의 행동학>(조정환, 갈무리, 2020) (0) | 2021.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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