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이 발췌의 대제목들과 소제목들은 발췌자의 것임. 이 발췌는 발췌문들을 대제목의 주제들에 따라 재구성한 것임.
1. 철학이란 무엇인가
인간 존재의 왜소함
[하만 2019, 4장, 117]우리 인간이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흥미롭든 간에 분명한 것은 우리가 우주적 드라마의 주연이 될 리 없고, 고만고만한 태양 근처의 평균 크기 행성 위에 내버려져 있으며, 우주의 역사에서 아주 작은 자리만을 차지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명백한 사실이 우월한 엄밀함이라는 이름 아래,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철학과 그 계승자에 의해 희생된다.
철학의 평등주의
[하만 2019, 3장, 90]우리는 항상 다음과 같은 리트머스 시험을 준수해야 한다. 즉, 철학이 모든 관계를 똑같이 관계로 다루지 않는다면 어떤 철학도 세계를 공정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이다.
철학은 단순성을 추구한다.
[하만 2019, 5장, 143]철학자는 세계에서 작동하는 몇 가지 기본 요소를 결정하기 위해 경험적 세부 사항을 샅샅이 뒤지지는 않는다. 대신, 철학자는 기본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구조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단순성의 전문가다. 그러나 사물들은 다 함께 있을 때는 단순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철학은 다른 분과의 주인이 아니라 시녀일 뿐이다.
철학은 이해의 학문이지 기하학처럼 추론의 학문이 아니다.
[하만 2019, 4장, 118]철학이란 기하학이 아니[다.] (...) 첫 번째로 철학적 지식의 단계들이 선구자와 계승자들로부터 더 많은 자율성을 갖는 데 반해, 기하학에서 하나의 오류 연역은 증명의 전체 연쇄가 틀렸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원리에서 심각한 오류를 찾을 수 있겠지만, 여전히 이들이 이끌어주는 통찰로부터 이점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철학이 전체로서, 우주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데 반해, 기하학은 다양한 점과 선, 형태의 본성에서 추론을 끌어내려 할 뿐이다.
2. 철학자(사) 평가
철학자들을 대하는 태도-한계 너머로 밀어 붙이기
[하만 2019, 6장, 168]우리가 사상가들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경의는 저마다의 체계가 갖는 중심 개념을 파악해서 그 이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 [169]우리는 우리 자신이 멈출 이유를 더는 누리지 못한 지점에서 그들이 멈췄음을 발견할 것이다. (...) 우리가 우리의 선조들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대단한 찬사는 그들의 말과 몸짓을 끝없이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른 무언가의 선구자로 바꾸는 것이다.
철학사 안의 4중 구조
[하만 2019, 5장, 144]철학의 역사에서 몇 가지 4중 구조 (...) 이 4중 구조는 항상 한 명의 사상가로부터 그 다음에 이르기까지 크고 다양하게 펼쳐지는 두 이원론이 교차한 결과다. 4라는 수는 철학에서 막강한 수다. 4중 구조는 대립물의 투쟁에서 이원론적 통찰을 보존하는 한편, 투쟁을 두 번째 축으로 확장하고 세계의 네 극점 사이의 풍부한 긴장을 창조함으로써 이러한 투쟁의 내재적 지루함을 피한다.
실재론 vs. 인간접근철학
[하만 2019, 4장, 113]철학적 실재론에 대한 저항은 (...) 인간 접근 철학Philosophy of Human Access이라 불릴, 지금까지 이어지는 철학적 전통의 암묵적 혹은 명시적 신조다.
경험론과 관계주의-상부채굴
[하만 2019, 1장, 38]이 모든 입장[경험론과 관계주의(화이트헤드, 라투르, 미국 실용주의자들)]은 객체를 직접적 현시manifastation로 손쉽게 대체되는 쓸모 없는 기체substratum로 취급함으로써 객체를 상부채굴한다. 우리가 객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할지라도, 객체는 실제로 감각할 수 있는 성질 그 이상의 것이 아니고 다른 사물에 대한 효과이거나 마음속 이미지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 맺는 데는 문제가 있다. 단적으로 전체 세계가 현재의 소여giveness로 전부 규명되더라도 그 어떤 것도 달라질 이유가 없다.
유물론-상하부채굴: 객체는 물리적 요소보다 깊기도 하도 얕기도 하다.
[하만 2019, 1장, 40]유물론을 특별한 적수로 만드는 것은 유물론이 객체를 단순히 하부채굴하거나 상부채굴하지 않고도 이런 책략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유물론은 객체 지향 철학의 오랜 정적이다. (...) [41]유물론은 객체를 실제적으로 성질의 집합에 불과한 궁극적 요소로 취급함으로써, 하부 채굴과 상부 채굴을 동시에 수행한다. 이런 측면에서 유물론은 제1범주로서의 객체를 거부하는 모든 철학의 기본적 몸짓을 단순히 반복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사실상 하부 채굴하는 모든 철학은 일종의 보충물로서 상부 채굴하는 구성요소를 필요로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 [43]유물론에는 정확히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유물론은 훨씬 큰 창발하는emergent 존재자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 둘째, 실재 객체가 하향 환원[하부채굴]될 수 없는 것처럼, [실재 객체가] 감지할 수 있는 성질로 상향 환원[상부채굴]될 수 없[다.] (...) 물리 입자는 객체를 하부채굴하는 동시에 상부채굴하려 애를 쓰지만, 결국 제 무기의 희생양으로 전락해 버린다. 객체는 물리 요소보다 더 심원하기도 하고 더 얕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형적 실재론자와 관념론자-비약의 오류
[하만 2019, 2장, 66]전형적 실재론자와 전형적 관념론자가 공유하는 것은 객체의 중간 단계를 완전히 뛰어넘고자 하는 경향이다. 그들은 모든 객체를 설명하는 자연적 요소의 기본층위가 있다고 말하거나, 객체란 관찰자에게 직접적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특성의 다발일 뿐이라고 말한다.
플라톤과 후설-숨은 실재성
[하만 2019, 7장, 182][플라톤과 후설은] 객체가 세계의 표면에서 다수의 형상적 특징들을 통일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특징들을 깊은 곳에 놓는[다.] (...) 인간의 경험으로는 결코 접근할 수 없는 것 (...) 숨어 있는 실재 사물들에서 진행되는, 통일된 실재 객체와 그것의 숨은 실재 특징의 다수성 사이 대결 (...)
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의 기여
[하만 2019, 1장, 44]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나긴 퇴폐의 망각 속으로 빠져버리는 동안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유가 존재의 신비를 지켜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과 반대로, 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철학을 진리의 길에 올려놓았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 [45]소크라테스는 세계의 제1의 요소들을 그것들의 벌거벗은 순수성으로 기술하고자 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시도들을 거부하면서, 사물이 내재적으로 제 특성보다 심오하다는 것을 주장했으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는 객체와 성질 사이의 도전적 균열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 객체가 반으로 분리되는 것에 대한 [플라톤주의의] 인식은 기본적인 철학적 진보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 오직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개별 객체는 처음으로 철학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다. (...) [거기에는] 객체 자체의 한복판에서 진행중인 대결duels이 존재한다. 개별적 고양이와 그것의 덧없이 우연적인 특징 사이의 대결, 혹은 고양이와 그것의 본질적인 성질 사이의 대결이.
기회원인론은 경험론에서 전도된 채 유지된다
[하만 2019, 5장, 34]전도된 혹은 거꾸로 뒤집힌 기회 원인론 (...) 흄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경험론 철학 혹은 회의주의 철학 (...) 기회원인론이 실체가 관계할 수 있음을 부정하면서도 실체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경험론은 그와 반대되는 책략을 수행해 관계가 필연적으로 독립적 실체를 수반한다는 것을 부정하면서, 관계만 가지고 논의를 펼친다. (...) 두 학설 모두 관계에 있어서의 독점권을 단일한 존재자에게 부여한다 (...) 오늘날 모든 관계가 신을 거친다고 말하는 기회원인론자를 비웃기는 쉽지만, 모든 관계가 인간의 경험을 거친다고 말할 때는 누구도 비웃지 않는다. (...) 우리 모두는 인간 경험에 대한 직접적 접근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결국 그것은 단 하나에게만, 종교의 전능한 신 혹은 인간으로 알려진 전능한 경험론적 신에게만 위선적으로 허용된다. 이런 관점에서 기회원인론적 문제는 실제로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칸트의 인간중심주의-반코페르니쿠스주의
[하만 2019, 3장, 88][칸트의] 반코페르니쿠스 (...) 칸트의 입장에서 진정으로 독특한 것은 인간-세계의 관계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점이다.
칸트와 객체의 소멸
[하만 2019, 4장, 117]우리 인간이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흥미롭든 간에 분명한 것은 우리가 (...) 우주의 역사에서 아주 작은 자리만을 차지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명백한 사실이 우월한 엄밀함이라는 이름 아래,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철학과 그 계승자에 의해 희생된다.
후설-객체지향 관념론자
[하만 2019, 한국어판 서문, 12]나는 후설을 관념론자라고 부르는 비평가들에 동의한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후설이 가장 위대한 객체 지향object-oriented 관념론자이며, 객체가 그 모든 특징이 끝없이 변동하는 와중에도 어떻게 동일하게 남아 있는가에 관한 문제에 깊이 관련된 사람이라는 점을 놓친다.
‘우연으로 둘러쌓인 본질적 중핵’
[하만 2019, 2장, 51]후설은 객체 지향object-oriented 관념론자다. (...) [52]우리가 마주하는 나무와 찌르레기는 마음 속에 있는 특정한 성질 다발의 세부적 표상presentations이 아니다. 그 대신 지향적 객체는 소용돌이치는 우연의 표면으로 둘러싸인 통일된 본질적 중핵을 가지고 있다.
‘감각 객체는 외관의 총합이 아니다’
[하만 2019, 2장, 66]후설을 관념론자 가운데 매우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현상적 영역 안에서 객체를 발견했다는 점이다. 후설은 관념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이 그가 이미 언급했던 것 외에는 다른 실재가 없을 것이라고 종종 가정하는 정도만큼만 그는 실재론자처럼 느껴진다. 후설은 사실상 첫 번째 객체 지향 관념론자다. (...) [67]후설에게 (...) 감각 객체는 현재의 관찰 가능한 특징이나 가능한 외관의 총합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통일된 객체와 감각 객체의 구별
[하만 2019, 2장, 59]우리가 통일된 객체와 그것의 변하는 다수의 특징 사이에 있는 감각적 영역에 대한 그의 혁명적 구별을 무시한다면 후설이 철학에서 시도한 돌파구는 완전히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통일된 객체의 특징은 인공위성이 지구의 중력에 종속되어 있는 것만큼이나 그 객체에 종속된다.
철학으로부터 자연의 배제-관념론
[하만 2019, 2장, 54]후설은 독립적 자연세계를 철학 바깥에 놓음으로써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자연 세계를 괄호 치는 것은 난폭한 관념론적 몸짓이다.
객체의 의식 종속성
[하만 2019, 2장, 69]그럼에도 후설은 관념론자로 남는다. (...) [후설에게도] 객체는 사실상 의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그의 객체는 순수한 감각적 다양체로서, 정신의 영역을 넘어선 자율적 실재나 행위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객체-부여 행위다.
[하만 2019, 2장, 59]후설에게 의식은 (...) [60]객체-부여 행위로 구성된다. (...) [하이데거와는 달리] 후설의 논의에서 우리는 객체가 인간의 접근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경박한 장식과 표면-효과로 지나치게 꾸며진 것임을 발견한다.
지향적 영역의 비실재성-관념론의 입구
[하만 2019, 2장, 54]후설의 지향적 영역은 아무런 실재도 갖지 못하며, 관찰자로부터 독립된 어떠한 자율성도 갖지 않는다. (...) [55]후설은 의식 안에서 지향된 베를린과 세계에 존재하는 베를린이 하나이자 동일하다는 유명한 주장을 했으며, 이러한 태도는 그가 수년 동안 관념론으로 향하도록 길을 터주었다.
[하만 2019, 10장, 244]문제는 지향성의 객체가 실재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현상학은 객체 자체를 감각 객체에 제한하고 실재 객체에는 어떠한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관념론적이며, 세계에 대한 고유한 관점을 위협할 때 발생하는 어려움을 ‘사이비 문제’라고 일축해버리는 것을 모면할 수 없다.
하이데거-부재의 사상가
[하만 2019, 3장, 73]후설이 현존presence의 철학자라면 하이데거는 부재absence의 사상가다.
도구-분석과 사변철학
[하만 2019, 3장, 75]도구-분석은 아마도 지난 세기의 철학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 하이데거가 결코 시도하지 않았던 강도로 이 [현존을 소탕하는] 전투를 밀어붙인다면, 우리는 곧 이 위대한 사상가에게는 차단되었던 사변철학speculative philosophy의 경계선에 도달하게 된다.
실재 객체의 분극화
[하만 2019, 2장, 52]우리는 하이데거의 도구-분석에서 인간의 직접적 접근으로부터 물러난 실재 망치와 송곳을 발견한다. 후설이 우리에게 우연과 지향적 성질 사이에서 분극화된 지향적 객체를 선명하게 제공해 준다면,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실재 객체에 대한 이 같은 동일한 분극화를 은밀하게 제공해준다.
현존재의 비인간성과 실재 객체
[하만 2019, 2장, 70]하이데거가 존재Sein와 현존재Dasein를 영구적이고 상호적으로 의존적인 짝으로 남겨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것이 존재가 인간에게 현시를 통해 규명된다는 점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하이데거에게는 감각 객체와 동행하는 실재 객체가 있기 때문이다.
도구존재와 물러난 객체의 통일성
[하만 2019, 3장, 75]하이데거는 우리가 씨름하는 사물 대부분이 명백히 마음에 현존하지 않으며, ‘용구’ 혹은 손안에 있음의 존재양식을 갖는다는 것에 주목한다. (...) [76]이를 의식적으로 자각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사소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대개 객체는 우리의 의식적 행위를 지원해주는 흐릿한 지하 세계로 물러나는 한편, 시야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또한 이 차단된 지하 세계가 자율적 객체의 [단순한] 모음이 아니라 통일된 체계라고 빈번하게 주장한다. 엄밀히 말해, ‘하나의an’ 용구 같은 것은 없으니, 도구란 상호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스스로의 상호 지시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 하이데거는 망치, 칼, 포크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분석한다. 모든 존재자는 마음 속에서 나타나기보다 수수께끼 같은 배경에 거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객체의 물러난 실재성과 왜곡
[하만 2019, 3장, 84]어떤 사물이 마음에 의식적으로 있는 데 반해, 다른 사물은 무의식적으로 쓰인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도구-분석의 기본적 대립항은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사이에 있지 않다. 그 대신 진정으로 중요한 균열은 객체의 물러난 실재성과, 이론과 실천 모두에 의한 객체의 왜곡 사이에 놓여 있다. 망치를 쳐다보는 것은 그 존재를 규명하는 것도 아니고 이용하는 것도 아니다.
도구의 상호관계성은 실재가 아니다.
[하만 2019, 3장, 86][하이데거에 대한 관계론적 독해는] 기계의 서로 다른 부품이 또 다른 것을 지시하고 상호적으로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상호관계가 이러한 부품의 실재를 규명해주지는 못한[다.] 도구가 체계에 속하는 한, 도구는 눈앞에 있음으로 환원되는, 그것들의 캐리커처일 따름이다.
도구는 사용되지 않는다.
[하만 2019, 3장, 86]도구가 ‘사용되는’ 한에서 도구는 의식 속의 이미지 못지않게 눈앞에 있다. 그러나 도구는 [도구의 입장에서는-발췌자] ‘사용되지’ 않는다. 도구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도구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한에서 도구는 인간의 이론 혹은 인간의 실천과의 관계에 의해서는 규명되지 않는다.
실재와 관계는 다르다.
[하만 2019, 3장, 88]하이데거가 (...)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실재와 관계 사이의 기본적 차이다.
순간의 실재성에 주목한 형이상학자
[하만 2019, 4장, 99]하이데거는 [시간의 철학자가 아니라] 고립된 순간의 철학자이[다.] (...) [100]하이데거는 (...) 실재를 인간 현존재의 접근 가능성으로 환원하는 사상가가 아니라 특정한 순간의 애매한 상태에 강렬하게 집중했던 실재론적 형이상학자[이다.]
‘이원론으로의 몰락’
[하만 2019, 4장, 112]하이데거 철학의 거의 모든 것은 손안에 있는 것과 눈앞에 있는 것 혹은 도구와 망가진 도구 사이의 반복적인 이원론으로 함몰된다. (...) [113]현존과 부재의 교대에 대한 이와 같은 강박 (...)
후기철학의 중요성-4중 세계
[하만 2019, 4장, 113]하이데거의 사유에 있어 두 번째 축 (...) 후기 철학에서 발견되는 신비한 4중 (...)
[하만 2019, 6장, 152][하이데거의 1949년 브레멘 강연-‘4중에 대한 강연’에서]땅, 하늘, 신들, 사멸하는 자들은 늙은 현자의 단순한 시적 혼란이 아니라 하이데거 사유의 기나긴 여정의 궁극의 도착지인 것이다.
[하만 2019, 6장, 156]4중이 하이데거에게서 얼마나 핵심적인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49년 브레멘 강연은 이미 언급했듯 그의 모든 후기 저작에서 핵심이다. 「사물」과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과 더불어, 브레멘 강연의 또 다른 후속작은 저 숭앙받는 「기술에 대한 물음」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언어에 관한 하이데거의 모든 후기 명상록은 4중으로 충만해졌다. 언어는 사물과 세계의 상호작용이고, 이것은 4중의 구조를 갖는 것으로 판명된다. 하이데거가 4중에 관해 완전히 진지하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늘’의 가시성과 ‘땅’의 물러남
[하만 2019, 6장, 158][하이데거에게] 땅과 신들은 모두 은폐의 용어[이다.] (...) 사멸하는 자들은 뚜렷한 가시성에 대한 ‘로서-구조’(as-struccture)와 연결된다 (...) 하늘은 땅의 끊임없는 물러남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명확히 가시적인 존재자에 해당한다.
초기 4중과 후기 4중
[하만 2019, 6장, 159]4중은 존재론적 차이의 상관적인 동시에 변형된 두 의미 즉 은폐된 것 대 탈은폐된 것, 일자 대 다수의 교차로처럼 보일 수 있다.
49년 이후 객체성의 약화
[하만 2019, 6장, 165]1949년의 하이데거가 시적인 힘을 얻는 동안, 객체의 철학자로서의 그는 한 급수 떨어진다.
지젝의 반실재론
[하만 2019, 4장, 114]반실재론적 논변의 단호한 지지자인 슬라보예 지젝 (...) “(...) 유일하게 지속적인 유물론적 입장은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Slavoj Zizek and Glyn Daly, Conversation with Zizek, p. 26, Cambridge, UK: Polity Press, 2004) (...) [115]나는 사상가로서 지젝이 갖고 있는 순수한 동물적 열정gusto을 존경하지만, 방금 기술했던 지젝의 입장[전칸트적 실재론에 반대하고 칸트 이후의 반실재론을 옹호하는 입장]은 진리에 대해 정반대의 자리에 놓인다. (...) 이와 같은 입장은 ‘폐쇄 공포증적 미인계’[이다.]
연역과 객체 제거
[하만 2019, 4장, 116][반실재론적 입장에서는] ‘집과 산과 강’으로 채워진 거대한 왕국은 연역의 재단에서 부자비하게 도륙된다. (...) [하지만] 우월한 연역적 엄격함superior deductive rigor (...) 소위 엄격함이라고 하는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117]판명된다면, 그것은 〔인간접근 철학에〕 유리하게 작동하는 것을 거의 갖지 못한다.
레비나스, 낭시-상부채굴/들뢰즈, 리오타르-하부채굴
[하만 2019, 1장, 32]오직 인간의 의식만이 조각조각으로 부숴버릴 수 있는 그저 있음il y a을 이야기 하는 에마뉘엘 레비나스, 모든 특정한 존재에 선행하는 무정형의 ‘그 어떤 것whatever’을 논하는 장-뤽 낭시가 (...) 갖는 문제점은 만일 모든 것이 참된 일자라면 그것이 파편으로 흩어져야 할 이유가 거의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 [33]일자의 철학[고대 그리스에서 낭시까지]이 수많은 사물의 출현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원론자의 철학[아낙사고라스에서 마누엘 데란다까지, 전개체성이나 이질적인 잠재성을 주장하는 철학]은 사물의 상호관계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 [34]차이의 철학[아마도 데리다, 들뢰즈, 리오타르 등-발췌자]은 사물이란 동일성을 갖지 못한 채 그 자체와 항상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객체가 스스로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비행기, 당근, 송전탑, 장벽, 인간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와 다르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없다. 차이의 철학은 부정negation과 관계성이 가미된 흐릿한 존재자를 우리에게 제공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존재자다. (...) [35]이 모든 것은 객체가 자신의 실재성을 다른 무언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환원주의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이 모든 비판의 형식은 허무주의 정신으로 개별 객체를 바라보며 보다 근본적인 것을 찾기 위해 불도저로 객체를 파괴해 버린다. 하부채굴 전략은 객체가 우주의 근본적 실재가 되기에는 너무 얄팍하다shallow고 본다.
바디우의 인간주의
[하만 2019, 9장, 227]바디우는 인간이 그와 같은 사건[진리-사건truth-event]의 주체가 되도록 허용하지만, 무생물적 객체가 사건의 주체가 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새로운 현상학(마리옹?)의 논점 이탈
[하만 2019, 10장, 244]어떤 사람은 인간 주체가 우주의 절대적 조물주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무언가의 수동적 수취인에 불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현상학을 구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이같은 해결책은 요점을 놓치고 있다. 현상학의 주요 문제는 결코 자아ego의 구성의 역할이나 세계에 반하는 그 불충분한 수동성에 있지 않다. 그보다 문제는 인간과 세계가 이 철학에서 유일한 두 극점이며, 그것들 모두가 누구든 이야기할 수도 있는 모든 상황의 참여자가 된다는 데 있다. 현상학에서 객체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상관주의 정식(메이야수)
[하만 2019, 10장, 240-241]“상관주의는 단순한 만큼 강력한 한 가지 논변에 의존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다. X의 소여 없이는 어떠한 X도 없고, X의 가정 없이는 X에 관한 어떤 이론도 없다. 당신이 무언가에 대해 말한다면,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지고 당신이 상정한 무언가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Qentin Meillassoux, ‘Speculative Realism: Ray Brassier, Ian Hamilton Grant, Graham Harman, Quentin Meillassoux’ In Collapse vol. III., 409)
칸트적 주객관계의 객객화
[하만 2019, 10장, 245]약한 형태의 실재론은 (...) 상관주의에 대항할 수 없[다.] 보다 더 중요한 원리는 객체-객체 관계를 주체-객체 관계와 정확히 동일한 토대 위에 놓는 것이다. (...) 우리는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 통해서만 칸트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역전시킬 수 있다.
유물론(신유물론?) 비판
[하만 2019, 10장, 245]과학적 유물론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과학적 유물론이 실재의 어느 한 단계에서 작동하는 뉴런과, 또 다른 것에 대해 작동하는 전체로서의 의식을 허용하지 않은 채 주체-객체 관계를 두뇌와 훨씬 더 작은 존재자와의 객체-객체 관계로 환원하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두 번째 문제는 객체-객체 관계에 대한 유물론의 개념이 충분히 실재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과학적 유물론은 존재자들의 실재가 세계의 황혼 속으로 영원히 물러난다고 했을 때, 두 존재자가 어떻게 관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정한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존재론, 자연철학
존재학
[하만 2019, 9장, 218]존재학(ontography) (...) 객체의 우주의 기본적 주요 지형과 단층선이 담긴 지도를 그리[는 분야].
최신의 객체 지향 철학은 원리가 아니라 분극화를 옹호한다.
[하만 2019, 1장, 46]객체 지향 철학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와] 같은 계보에 있는 최신 이론이다. 그러나 여기서 제안한 이론은 더욱 특이한데, 객체 지향 철학은 전통적으로 실체에 귀속되는 많은 특징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 [47]객체는 [전통적인 실체 귀속성과 달리] 자연적인 것이거나 단순한 것이거나 파괴될 수 없는 것일 필요가 없다. 대신 객체는 스스로의 자율적 실재성에 의해서만 규정될 것이다. 그것은 분명 서로 다른 두 방향에서 자율적이어야 한다. 즉 부분적으로는 스스로를 다른 존재자와 관계 맺지 못하게 하는 한편, 스스로의 편린을 넘어선 무언가로서 출현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실재를 입자이건 아페이론이건 마음 속에 맺힌 상이건 성질의 다발이건 실용적인 효과이건 간에 더욱 기초적인 근본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급진적 시도와 달리, [48]객체는 환원될 수 없는 두 부분으로 분극화된polarized 것으로 드러난다. 이 책은 객체가 우연, 성질, 관계, 계기를 갖는다는, 고전적으로 들리는 주장을 지지하는 한편, 또한 객체가 이러한 조건을 갖기도 하고 갖고 있지 않기도 하다는 역설을 주장할 것이다.
모든 것이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객체다.
[하만 2019, 서론, 23]나는 절대로 모든 객체가 ‘동등하게 실재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 그것[모든 객체]이 동등하게 객체라는 것이다.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 모두를 설명하는 더욱 포괄적 이론에서만 픽시, 님프, 유토피아를 [24]돛단배, 원자와 동일한 언어로 다룰 수 있다.
객체지향 이론은 철학사에 이미 있다.
[하만 2019, 1장, 44]객체 지향 이론object-oriented theory에 대한 요청은 비록 그 강렬함을 갱신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저 철학사에서 이미 존재하는 경향을 추구할 따름이다.
객체와 사물을 구별하지 않는다.
[하만 2019, 서론 24] (1) 나의 모델에 따른 객체는 하이데거에게서 이끌어낸 4중 구조(즉 ‘사방Geviert’)를 갖는다. (2) 나는 비인간 객체 사이의 인과 관계를 그것에 대한 인간이 지각과 다르지 않게 취급한다. 그러나 내가 ‘객체’(하이데거는 부정적으로 사용한다)와 ‘사물’(하이데거는 긍정적으로 사용한다)에 대한 하이데거의 구별을 채택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주객관계는 객객관계와 동일하다.
[하만 2019, 서론 25]나는 사람과 객체 사이 관계의 단일한 틈새에 사로잡힌 포스트칸트주의를 거부한 채, 목화와 불의 상호작용이 목화와 불에 대한 인간의 상호작용과 동일한 발판 위에 귀속한다고 주장한다.
‘지향성’ 대신 ‘감각 객체’
[하만 2019, 2장, 60]현상적 영역은 단순히 외부 세계에 대한 접근으로부터 단절된 관념론적 감옥이 아니다. 그보다 현상적 영역은 지향적 객체와 그것이 변화하는 성질 사이의 긴장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향적’이라는 용어에는 멸균성이 강해, 나는 그 대신 동의어로서 이를 감각 객체라 부르자고 제안한다. (...) [지향적 객체라는] 이 유명한 용어 때문에 너무나 많은 혼동이 일어났다. (...) ‘감각 객체’라는 어구는 우리가 여기서 인간의 접근을 넘어선, 오로지 실재 객체만 속할 뿐인 실재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더욱 효과적이다.
객체는 진공 속에 있다.
[하만 2019, 3장, 91]객체를 제대로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의 실재성이 모든 관계에서 해방된 것이고 모든 호혜성보다 더 심오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객체는 자기만의 진공 속에서 베일로 덮인 검은 수정이다. [92]객체는 그 자체의 조각으로도,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물들과의 외적 관계로도 환원될 수 없다.
객체는 하부, 상부와 단절되어 있다.
[하만 2019, 8장, 200]지하세계의 망치는 우주의 그 어떤 궁극적 기반이 아니다. 비록 망치가 다른 객체가 망치에 대해 가질 법한 그 어떤 관계보다 더 심오한 게 확실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한 그 자체의 관계로 형성된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객체가 두 형태로, 첫째, 그 자체로[하부채굴], 둘째 어떤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존재한다고 생각[상부채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 객체는 그 두 방향 모두에서의 관계와는 다른, 벽으로 둘러싸인 섬이다.
객체의 형상적 특징-물러남
[하만 2019, 2장, 62]객체의 형상적 특징[후설-발췌자]은 결코 지성을 통해서는 접근할 수 없고, 예술이나 과학이 하는 것처럼 암시allusion를 통해 간접적으로 [63]우리와 닿을 수 있을 따름이다. (...) 양성자와 화산은 다양하게 구별되는 속성을 가져야만 하며, 이러한 속성은 양성자와 화산 그 자체만큼이나 우리에게 물러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실재 성질들과 함께 하는 감각 객체의 특이한 경우를 본다.
객체의 물러남-관계의 영원한 부적합성
[하만 2019, 3장, 87]모든 관계는 스스로와 관계되는 것들을 번역하거나 왜곡한다 (...) 목화-존재는 현상학자와 직물 노동자뿐만 아니라 목화-존재와 접촉하는 모든 존재자에게서도 은폐된다. 다시 말해, 객체의 물러남은 단지 인간과 지능을 가진 동물만을 괴롭히는 인지적 외상이 아니라 모든 관계의 영구적 부적합성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물러남의 이론-사변적 형이상학
[하만 2019, 3장, 90]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이제 바위가 창문으로부터 물러나는 것 못지 않게 인간의 이론과 실천으로부터 물러나는 이론을 갖는다는 것이다. [91]그러한 이론은 확실히 사변적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을 가질 만하다.
손 안의 존재가 더 독립적이다.
[하만 2019, 4장, 100][널리 통용되는 것과는 반대로] 손 안에 있는 것이 항상 독립적이고, 눈 앞에 있는 것이 의존적[이다.] 도구-존재에게 의식 속의 이미지보다 더 큰 존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이는 도구-존재가 인간의 현존재에 더욱 의존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게는] 객체를 우리에 대한 접근 가능성[눈 앞의 존재]으로 환원하는 어떠한 방식도 객체를 눈 앞에 있는 것으로 환원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피해야 할 일이다.
눈 앞에 있음의 부적합성
[하만 2019, 4장, 102]현상을 단순히 눈앞에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현상이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인데, 후설이 이것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데 반해, 하이데거는 그것을 끔찍한 악덕으로 간주한다.
휴면상태의 객체
[하만 2019, 8장, 213]모든 객체가 항상 지각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객체는 잠을 자거나 휴면한다. (...) 죽은 객체는 실재적이지 않은 반면에, 휴면하는 객체는 실재적이지만 단지 관계가 없을 따름이다. (...) [214]휴면하는 객체는 우리가 탐구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종류의 객체다. 휴면하는 객체는 전적으로 혼자인 것은 아닌데, 〔그것을 구성하는〕 구성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다른 무언가의 구성 부분이 아니기에 지각하지 않는다. 원리상 어떤 객체는 영원히 휴면하는 상태로 남을 수 있다.
‘형상적 성질은 처음부터 물들어 있다’
[하만 2019, 2장, 63]감각 객체는 객체의 형상적 특정을 갖기도 하고 갖지 않기도 한다. 객체는 항상 그 자체의 특정한 방식으로 푸르거나 단단하거나 매끄러우며, 객체는 이러한 특성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형상적 성질은 우연적 성질과 마찬가지로, 형상적 성질이 귀속하는 실재나 객체 스타일로 처음부터 물들어 있다.
성질은 항상 개별적이다.
[하만 2019, 2장, 65]후설은 실재 성질들을 일반적 용어로 이야기한다. (...) 이와 대조적으로 (...) [하먼 자신이 기술하는] 성질은 그것이 귀속하는 객체에 의해 항상 개별화된다. (...) 어떤 경우든 감각 객체는 단순한 관념론적 환영이 아니라 우주의 핵심적 분극화의 자리다.
분극화-감각객체와 감각성질/실재성질
[하만 2019, 2장, 64]모든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두 개의 분극화의 자리가 된다. 감각 객체는 결코 그것의 감각 성질이 아니다. 이 여분의 추가적인 것[감각 성질]은 근간이 되는 감각 객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도 문질러져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감각 객체 또한 결코 그것의 실재 성질이 아니다. 감각 객체가 특정한 방식으로만 실재 성질들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경험을 통해 반씩 결합된 감각 객체와 그것의 감각 성질들을 갖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특정한 앵무새를 그 자체로 만들어주는 것을 분절articulate하기 위해서는 실재 성질의 분석이 요구되는데, 실재 성질은 적나라하게 현존하지 않아도 지성을 통해 넌지시 혹은 간접적으로 암시될 따름이다.
감각객체의 긴장
[하만 2019, 2장, 68]야자수 나무 자체가 우리가 보는 것과 닮지 않은 것처럼 야자수의 실재 성질도 이런 성질에 대한 우리의 목록과 닮지 않았다. 실재 성질은 실재 객체가 하는 것 못지 않게 직접적 접근으로부터 물러난다. 감각 객체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주의 중요한 두 가지 긴장으로 들어서는 갈림길 역할을 한다. 즉, 감각 객체 대 그것의 감각 성질들, 감각 객체 대 그것의 실재 성질들이 그 갈림길이다.
[69]
바닥 없이 표면만 있는 우주
[하만 2019, 8장, 213]우주에 바닥은 없지만 표면은 있다. 무한 퇴행은 있을지라도 무한 진보는 없다. 즉 우주라고 불릴 수 있는 최종적이고 포괄적인 객체는 없다.
객체 부정의 철학-상부채굴과 하부채굴
[하만 2019, 서론, 25]객체가 철학이라는 건물의 벽돌임을 부정하는 이들은 기본적인 두 대안만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객체란 심층적 힘의 단순한 표면 효과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객체는 ‘하부채굴된다’(undermined). 다른 이들은 객체란 아주 명백한 성질 혹은 관계와 비교했을 때 쓸모없는 미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객체는 ‘상부채굴된다’(onvermined).
하부채굴 철학
[하만 2019, 1장, 42]하부채굴 철학은 인간이 겪는 경험의 더욱 피상적 층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부 채굴 철학은 단지 경험에 2차 등급의 실재를, 보충적이거나 어둑한 존재를 부여할 뿐이다. 그러나 두 극단을 설명하는 동안 하부 채굴 철학은 현실적으로 개별적이기도 하고 또는 모든 지각으로부터 자율적이기도 한, 자율적 객체라는 중간층을 완전히 건너뛰어 버린다. 객체를 상부채굴하는 정반대편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 칸트는 경험에 유령과도 같은 물자체를 보충해주며, 물자체는 대체로 그 이상의 논의에서는 배제된다. (...) 객체에 대한 상부채굴 철학은 여전히 직접적 접근을 넘어 우주의 무형의 [43]1차적 층위 같은 것을 인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하부채굴 철학에서 발견한 패턴의 역전된 판본만을 얻게 된다. 즉 자율적 객체가 다시 한번 철학의 적절한 주제에서 배제되는 동안 하나의 극단에서 또 다른 극단으로의 도약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존재학의 지도-긴장, 방사, 접합
[하만 2019, 10장, 250]4중의 모델은 (...) 인간의 영역 뿐만 아니라 무생물적 인과관계에도 비춘다. 마음의 안팎에 있는 모든 것은 성질을 갖는 동시에 갖지 않는 객체다. (...) 존재학의 네 가지 긴장, 세 가지 방사, 세 가지 접합은 (...) 우리에게 우주에 대한 강력한 지도를 제공해줄 것이다.
객체의 무한성-실재객체와 감각객체
[하만 2019, 3장, 94]우주에 객체들의 무한성이 있을 수 있다면 이것들은 두 종류에만 해당된다 모든 경험으로부터 물러나는 실재 객체와, 경험 속에서만 존재하는 감각 객체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객체들과 더불어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성질이 있다. 모든 경험에서 발견되는 감각 성질과, 후설이 말하듯 감각적 직관을 통하기보다 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실재 성질이 그렇다. 이것은 우주에 서로 구별되는 네 극점을 산출한다. (...) 여기에는 단지 네 가지 짝만이, 즉 실재 객체/실재 성질, 감각 객체/감각 성질, 실재 객체/감각 성질, 감각 객체/실재 성질만이 있다.
[하만 2019, 3장, 95]감각 객체와 감각 성질이라는 짝[시간]은 후설의 첫 번째 위대한 발견으로, 거기서 감각 객체들은 완전하게 현존하지만 항상 우연적 특징과 외관이라는 안개로 둘러싸여 있다. 그의 두 번째 위대한 발견은 감각 객체와 실재 성질의 결합[형상eidos]이다. 통일체의 극점[감각 객체와 실재 성질이라는 극점]이 규정적 성격을 갖지 못한다면, 그리고 실재 형상의 성질들, 즉 오로지 지성적 직관의 목표일 뿐 결코 감각적 직관의 목표가 될 수 없는 성질들로 구성되지 못한다면 의식에서의 현상은 통일체의 공허한 극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96]실재 객체와 감각 성질의 짝[공간]은 하이데거의 도구-분석의 주제이며, 거기서 은폐되어 있는 지하의 망치는 사유 혹은 행위에 접근할 수 있는 표면에 의해 어떻게 해서든지 감각적 현존으로 번역된다. 마지막으로 실재 객체와 실재 성질의 짝[본질]은 실재 객체를 아무런 규정적 성격을 갖지 못한 공허한 통일된 기체가 아니라 [다른 객체들과] 서로 구분되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관계는 왜곡이다.
[하만 2019, 4장, 103]어떤 관계도 그 관계의 용어에 대한 번역이나 왜곡[이다.]
관계와 객체의 형성
[하만 2019, 8장, 205]모든 관계는 직접적으로 새로운 객체를 생성한다. (...) 어떤 구성요소들이 자신들을 초과하는 사물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객체가 이러한 구성 요소의 변화를 견딜 수 있는 방식으로 배열된다면, 구성 요소들은 또 다른 감각적 외관을 깨지 않고서도 각각의 실재 객체와의 진정한 관계로 진입한다.
분류의 오류를 피한 관계-불화(?)
[하만 2019, 8장, 208]객체 지향 존재론은 인간-세계 관계가 전혀 특권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 나무와 집이 시를 쓰고, 신경쇠약증을 겪으며, 자신이 실수로부터 배운다는 증거는 없다. 문제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처럼 명백한 차이가 기본적인 존재론적 균열로 간주될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 [209]핵심은 기본적인 존재론적 분리가 특정한 종류의 존재자와 동일시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분류의 오류를 피하는 데 있다. 그보다 우주의 기본적인 균열은 일반적으로 객체와 관계 사이에, 모든 관계의 외부에 있는 자율적 실재와 다른 객체들의 감각적 삶에서의 캐리커처화된 형태 사이에 놓여 있다. (...) 모든 것은 감춰진 객체와 그것이 다른 객체에게 나타나는 뒤틀린 형태 혹은 번역된 형태 사이의 불화에서 나타난다.
관계가 아니라 분극화
[하만 2019, 5장, 129]부분적 자율성 (...) 객체들이 접촉하도록 완전히 되돌려지지는 않는다는 것 (...) 우리는 세계를 단지 관계의 체계로만 전환함으로써 객체와 관계의 역설을 제거하려는 것 대신에, 객체 그 자체에서 작동하는 분극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두 객체 각각의 분극화
[하만 2019, 3장, 92]가장 중요한 점은, 실재 객체와 감각 객체 모두 두 종류의 성질로 분극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 객체가 모든 순간에 순수하게 우연적 감각 성질로 그 외형을 만드는 한편, 감각 객체 아래에는 형상에 속하는 더 주요한 실재적 특징이 잠겨 있음을 보았다. 두 개의 동일한 분극성을 실재 객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로 실재 망치는 존재 그 자체로 물러남에도 불구하고, [93]감각 성질들을 현존의 영역으로 발산한다. (...) 실재 망치는 단순히 공허한 단위가 아니라 그 자체로 다수의 실재 성질들을 갖는다.
분극화와 고전적 문제틀
[하만 2019, 5장, 130]일자와 다수에 대한 고전적 문제 (...) 심신 문제 (...) 이 모든 문제는 객체와 다른 네 용어 중 하나 사이의 분극화를 수반한다. 그 네 용어란 우연, 관계, 성질, 순간이다.
순간의 애매함
[하만 2019, 4장, 104]하이데거의 비판은 바로 이 순간이 항상 애매함으로 불타올라 3중의threefold[3겹의] 방식으로 산산이 찢긴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순간을 실제로 구해낸다. (...) [105]그에게 시간성의 구조는 [베르그송처럼] 지금-지점을 시간의 비단 같은 흐름으로 전환시키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고립된 순간을 이전보다 훨씬 애매모호하게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과 깊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성-피투, 기투, 애매한 순간
[하만 2019, 4장, 106]내가 마주하는 사물들은 다른 피조물들의 가능성과는 구별되는 나만의 가능성이라는 쪽으로 피투된다projected. (...) 사물들은 (...) [현재의] 상황보다 앞서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이 나만이 특정한 잠재성과 관계함으로써 스스로의 의미를 획득한다. 이러한 던져짐[피투]과 기투projection라는 두 가지 순간이 정확히 하이데거가 ‘과거’와 ‘미래’라고 가리킨 것이다. 후자는 실제적인 과거와 미래와는 관련이 없는데, 그것이 전적으로 현재에 자리잡은 요소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 [107]하이데거의 시간성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 발견된 애매성을 우리에게 그저 경고할 뿐이고, 그 용어의 통상적 의미에서의 시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파의 시간성
[하만 2019, 4장, 108]하이데거의 철학의 다른 여러 주제는 ‘시간’이라는 이름 아래 가장된 애매한 3중 구조 속에서 붕괴된다. (...) [109]상황이 주어지지만(과거), 존재자가 해석을 하고 있는 것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며(미래), 이 두 가지는 새롭고 애매한 현재의 모델로 결합한다. 하이데거의 방법은 항상 이러한 3중 구조에 호소함으로써, 일반적으로 확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내파하는 것[이다.]
존재의 열가지 연결-순열
[하만 2019, 5장, 142]실재 객체로서의 내가 감각 성질 사이 다리로 기여하지 않는다면, 다른 실재 객체가 다리로 기여한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망치의 다양한 성질들은 내가 바라보는 감각 망치에서만 발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망치의 성질은 모든 접근을 넘어선 깊숙한 지하세계로 물러난 실재 망치에서도 발산한다. 감각 성질은 동시에 두 행성을 도는 달처럼 두 주인에게 기여한다. 하나는 눈에 보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다. 유사한 상황이 다수의 실재 성질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어떤 의미에서 실재 성질은 모두 동일한 실재 객체에 귀속된다. 그러나 동시에 다수의 실재 성질 역시 그 형상의 부품으로서 [143]감각적 망치, 개, 혹은 나무에 속한다.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두 종류의 객체들과 두 종류의 성질에 대한 열 가지 가능한 순열의 지도 작성법이다.
[하만 2019, 5장, 142]
이원론의 거부과 두 얼굴 이론
[하만 2019, 8장, 198]우리는 이원적 세계론에 반대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단일한 내재성의 평면으로 납작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199]객체와 관계란 지도상에 고정된 두 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 모든 존재자는 두 측면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원적 세계 대신 두 얼굴 이론two-face theory 즉 야누스라는 널리 알려진 기호 아래에서 태어난 철학을 말해야 할 것이다.
RO, RQ, SO, SQ / 시간, 공간, 본질, 형상
[하만 2019, 한국어판 서문, 12]세계를 이루는 네 개의 사분면은 ‘실재 객체’RO ‘실재 성질’RQ ‘감각 객체’SO ‘감각 성질’SQ이라고 약칭된다. 그리고 성질을 갖지 않는 순수한 객체란 없으며, 객체 없이 자유롭게 유동하는 성질도 없기 때문에 우주에는 만물에 대한 네 가지 가능한 순열, 즉 감각 객체-감각 성질, 실재 객체-감각 성질, 실재 객체-실재 성질, 감각 객체-실재 성질이 있다. 이 책에서는 이들을 각각 ‘시간’ ‘공간’ ‘본질’ ‘형상’eidos이라고 정의했다.
긴장과 방사와 접합의 삼중 구조
[하만 2019, 9장, 224]열 가지 가능한 형태의 긴장의 지도 (...) [예컨대 카드의] 색을 뒤섞는 방식의 긴장은 우리가 시간, 공간, 본질, 형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붉은 색 짝 혹은 방사radiations는 발산, 축소, 이중성이라 불린다. 그리고 검은 색 짝 혹은 접합junctions은 물러남, 인접, 진정성이라 불린다.
긴장-시간, 공간, 본질, 형상
[하만 2019, 5장, 146-7]극점들은 정태적 고립과 나란히 있지 않다. (...) 극점들은 긴장상태에 놓여 있[다.] (...) 극점들은 한 번에 두 개씩 다양한 순열 속으로 들어서며, (...) 용어의 열가지 가능한 조합이 있[다.] (...) 여기에는 네 가지 짝이 있다. 세계에 있는 네 가지 분극화가 그것이다.
[하만 2019, 7장, 177][후설을 따르면] 감각 객체는 그 자체의 변동하는 우연적 표면과 다른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감각 객체가 그 자체로 남는 데 진정으로 필요한 성질의 다수성과 다르다. [178]그러나 이러한 성질들이 바로 객체의 실재 성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각 객체가 파괴되지 않고서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 [하이데거를 따르면] 실재 객체와 감각 성질 사이에는 그 이상의 긴장이 있다. 물러난 혹은 지하 세계에 있는 망치는 은폐된 단위지만, 그것은 감각성질을 현상적 영역을 향해 발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러난 실재 객체들은 그저 통일된 덩어리가 아니며, 저마다 본질적 특징들을 갖는 한에서 서로 다른 것이다. 통일된 사물로서의 실재 사물과 그것의 다수의 성질 혹은 기색 사이의 긴장은 (...)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에서 (...) 사비에르 수비리(Xavier Zubiri)의 저작에서도 발견된다. (...) 우리는 여기서 네 가지 긴장에 선사할 도발적 이름을 제공할 것이다. 후설이 음영에 해당하는 시간time(감각 객체-감각 성질), 하이데거의 도구-분석에 해당하는 공간space(실재 객체-감각 성질),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에 해당하는 본질essence(실재 객체-실재 성질), 후설의 형상적 직관eidetic intuition에 [179]해당하는 형상eidos(감각 객체-실재 성질)이 그것이다.
[하만 2019, 9장, 226]
우리가 찾은 것은 우리의 두 짝(시간을 산출하는 감각 객체-감각 성질 짝과 형상을 산출하는 감각 객체-실재 성질 짝)은 이미 일상의 경험과 붙어 있는 데 반해, 다른 짝(본질을 산출하는 실재 객체-실재 성질 짝과 공간을 산출하는 실재 객체-감각 성질 짝)은 그것들 간의 연결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통일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간과 형상의 평범한 상태를 이와 같다. 즉 객체와 성질은 하나의 단위로 압축되는 것처럼 보이며, 단지 특별한 경우에만 이것들은 명백한 갈등을, 우리가 말했듯 분열을 드러낸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본질과 공간에 적용되는데, 실재 객체의 감각 성질과 실재 성질이 융합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것들〔본질과 공간〕에서 실재 객체는 [227]그것의 감각 성질과 실재 성질과 결코 대치되지 않는다. 공간이 우리가 부단히 경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실재 객체 또한 분명한 본질을 갖는 것은 아니다. 실재 객체의 본질은 잠깐 사이에 단 한 번만 산출되기 때문이다.
네 가지 긴장과 자연주의의 기각
[하만 2019, 7장, 183]시간, 공간, 본질, 형상의 상호작용은 네 가지 분리된 힘의 작용이 아니라,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모든 객체에 영향을 미치는 네 가지 긴장의 작용인 것이다. (...) 그와 같은 긴장은 이미 실재적이고 허구적인 존재자를 포함하고 있[다.] (...) 환원주의와 과학을 맹신하는 자연주의는 절대로 이러한 위엄을 완수하거나 평가조차 할 수 없[다.]
시간-감각객체와 감각성질 사이의 긴장
[하만 2019, 7장, 180]시간 속에서는 감각할 수 있는 객체the objects of sense가 움직임이 없고 고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 변동하는 특징으로 뒤덮여 있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경험은 각 순간마다 불연속적 감각의 끊임없는 만화경 속으로 퇴락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크든 적든 지속성을 가진 감각객체가 있는 듯하다. 시간은 감각 객체와 그것의 감각 성질 사이의 이와 같은 긴장에 대한 이름이다.
공간-관계와 비관계의 위치
[하만 2019, 7장, 181]공간은 단순히 관계의 위치가 아니라, 관계와 비관계의 위치이[다.] (...) 그 도시가 내게 드러내는 감각적 측면이 무엇이든, 심지어 아주 가까이까지 접근했다 하더라도, 이 도시의 외관은 존재의 어둠 속으로 영원히 물러나는 실재 오사카와 다를 것이다. 관계와 비관계의 이런 상호작용은 정확히 우리가 공간을 말할 때 의미하는 바이고, 이러한 관점에서 하이데거의 도구-분석은 현실적으로 공간에 관한 것이지 그가 잘못 논증했듯이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다. 공간은 은폐된 실재 객체와, 그것들에 연결된 감각 성질 사이의 긴장이다.
실재와 감각의 이종교배
[하만 2019, 7장, 188]성질은 그와 동일한 종류의 객체와 결합할 필요가 없다. (...) 그러나 (...) 실재 객체는 자신의 접근 가능한 표면 특성의 이면에 숨어 있다는 점에서 감각 성질과도 연결[된다.] (...) 감각 객체는 실재 성질을 갖는[다.] (...) [189]감각 객체가 진정한 실재 성질로 구성된 형상을 갖는다[후설]. (...) 우리는 충격적이게도 실재적 영역과 감각적 영역 사이에서 이종교배가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마치 형이상학이 럼주, 앵무새, 화산에 의해 객체들 사이의 고유한 관계가 오염되어버린 카리브해 지역인 것처럼 말이다.
매혹과 융합
[하만 2019, 7장, 189]실재 객체들이 그것들의 감각 성질들(우리는 그것들 사이의 거리를 공간이라고 불렀다)과 고유하게 결속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 [190]수박 그 자체는 보이는 각도나 거리, 혹은 그것을 가리는 오후의 어둑한 그림자의 정밀한 각도와 전혀 관계가 없다. 이러한 감각 성질이 유령처럼 물러난 수박 주위의 궤도에 놓일 때(매혹), 이것은 순수하게 일시적인ad hoc 토대 위에서 발생하며 수박은 그것이 진실로 정서적 피조물인 듯 다뤄지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이미 달라붙은 극점들의 분열이라기보다 이전부터 분리된 극점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형태의 융합인 것이다.
객체의 특정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만 2019, 8장, 197]실재 객체에서 특정한 영역이란 없으며, 감각 객체 역시 마찬가지[다.] 감각적인 것은 지각하는 자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하고, 실재적인 것은 그것과의 관계에서 물러난 모든 것[이다.]
실재 객체와 성질의 관계는 외부적이고 비본질적이다.
[하만 2019, 7장, 190]실재 객체는 그 자체의 실재 성질과 맺고 있는 연관성이 실재 객체에 귀속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감각 성질과의 연관성보다 더 밀접한 것은 아니[다.] (...) 일시적으로 지금과 그때에만 발생하는 관계인 것이다. 바꿔 말해, 객체와 객체 자체의 성질 사이 관계(우리는 이것을 본질이라 부른다)는 외부의 존재자에 의해 생성된 관계다. (...) [즉] 실재적이고 숨어 있고 본질적인 것이 무척 많이 존재하지만, 오로지 비실재적이고 명백하며 비본질적인 것을 경유해서만 소통한다 (...) [191]실재 객체는 실재적이며 또한 규정적 성격을 지니지만, 그것의 본질은 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외부에서 처음 생산된다.
[하만 2019, 7장, 190]
두 극점의 분열과 긴장을 통한 융합
[하만 2019, 7장, 192]네 가지 긴장 모두가 지닌 공통점은 모든 것이 객체-극점과 성질-극점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 첫 번째 요점은 두 가지 긴장은 지극히 평범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고, 반면에 다른 두 가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감각 객체는 소용돌이치는 분위기의 감각 성질과 핵심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실재 성질에 항상 수반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에서 객체-극점과 성질-극점 사이의 긴장은 둘 사이의 일종의 분열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분열을 통해 객체-극점과 성질-극점은 마치 따로 또 같이처럼 나란히 붙어 있다. 그것은 실재 객체를 포함하는 두 긴장과는 상당히 다르다. [193]여기서 실재 객체는 융합을 통해 성질과 묶이는 까닭에, 감각객체보다 실재 객체와 관련될 때 실제로 지극히 평범한 상태의 긴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방사-발산, 축소, 이중성
[하만 2019, 9장, 220]감각 객체는 진정으로 자율적인 무언가가 결코 아닌 한에서, 감각 성질과 긴장(시간)과 실재 성질과의 긴장(형상)을 제외하고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 (...) [222]감각 성질의 경우, 저 유명한 신플라톤주의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감각 성질은 동일한 감각 객체에서 함께 발산되는emanate 한에서 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실재 성질이 감각 객체와의 연결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을 보았다. [223]그러나 이는 발산으로 기술될 수 없다. 이 성질이 더는 시야를 향해 내뿜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 객체와 연결되어 있는 실재 성질에 대한 보다 저 적절한 용어는 니콜라우스 쿠사누스가 제안한 것으로 유명한 축소contraction[응축]일 것이다. 남은 짝인 실재 성질-감각 성질은 (...) 다시 말해 나무는 언제든 실재 성질과 감각 성질을 갖는데 이것들은 서로 상당히 다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실재 성질-감각 성질 짝은 이중성duplicity이라는 이름으로 알 수 있다.
[하만 2019, 9장, 231]
[하만 2019, 9장, 232]실재 개dog에는 어째서 수없이 다른 실재 성질이 있는가? 내가 제안하는 대답은 실재 객체 혹은 감각 객체가 다수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이 요소들이 문제의 그 객체를 형성하기 위해 함께 모일 때, 상호작용에서는 필요하지 않게 된 부분의 초과된 특질이 객체를 둘러싼 성질의 가스 혹은 잔향으로, 객체가 제조되는 과정에서 나온 산업 폐기물로 남는다. 동일한 것이 다른 방법으로 실재 객체와 실재 성질 사이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설령 실재 객체가 감각 객체와 동일한 방법으로 다수의 성질에 달라붙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성질은 이후 가능한 용도로 쓰일 수 있도록 실재 객체를 통해 걸러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접합[번역 수정: 통접conjunction]-인접, 물러남, 진정성(성실성)
[하만 2019, 9장, 223]두 실재 객체 사이 결속에서 객체 지향 철학의 근간이 되는 원리는 그러한 객체에는 그 어떤 것과의 직접적 연결이 없다는 통찰이다[인접]. (...) [224]두 감각 객체가 인접된 것보다 더 나은 것이 결코 될 수 없다면, 실재 객체는 상호 관계가 전혀 없는 물러남withdrawal의 방식으로 공존한다. 대리 인과vicarious causation에 대한 형이상학적 전제는 이러한 논제에 도움을 주기 귀해 고안된 것이다. 이제 실재 객체-감각 객체 짝만이 남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즉각적 접촉의 진정성sincerity[성실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여기서 실재 객체로서의 경험자는 감각 객체와 직접적으로 접촉한다.
[하만 2019, 9장, 234]
성질-흑색소음
[하만 2019, 9장, 225]성질 (...) 객체로부터 발산되는 ‘흑색 소음black noise’ (...)
[하만 2019, 9장, 229]내가 객체의 이른바 성질에 주목한다면 내가 찾은 것은 그 이상의 객체이지 날것의 감각질qualia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성질은 혼돈스러운 백색 소음이 아니라 어떤 감각 객체의 조각을 구성하는 객체에서 유래한 ‘흑색 소음’인 것이다. (...) 감각 객체들의 평범한 상태는 감각 객체를 경험하는 행위자와 인접하거나 연결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미리 서로 단절되어 있는 존재 양식을 가진 실재 객체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즉 우리는 한 극점과 또 다른 극점 사이 평범한 연결이 경험에서만 발견될 뿐 물러난 진정한 실재에서는 발견되지 않음을 본다.
진정성에는 매개자가 없다.
[하만 2019, 9장, 233]진정성sincerity[성실성]은 분열에 종속될 수 없다. 진정성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것을 끝내는 것 뿐이다. 즉 잠 혹은 완전한 죽음처럼 새로운 진정성으로 대체하거나 어느 것으로부터 대체할 수 없거나 둘 중 하나다. 진정성이 중단될 때, 어떠한 매개자도 이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 현존하지는 않으며, 그래서 진정성은 그저 우주에서 사라진다. 진정성에 대한 두 번째 목격자는 없다.
실재객체-실재객체의 문제
[하만 2019, 9장, 234]실재 객체-감각 객체 짝이 직접적 접촉이라면, 실재 객체-실재 객체와 같은 종류의 짝은 직접적이지도, 매개적이지도 않으며, 전혀 발생하지도 않는데, 그것이 바로 대리 인과가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이유다. 대리 인과는 우리에게 세 가지 접합에서 가장 쉬운 경우를 남겨준다. 그것은 감각 객체-감각 객체 사이의 접촉으로, 우리는 이미 그와 같은 접촉이 감각 객체와 동시에 마주하는, 경험하는 실재 객체에 의해 매개됨을 보았다. (...) [235]실재 객체-실재 객체 짝은 직접적으로도, 단거리를 통해서도 발생될 수 없으며, 합성 객체compound object의 발현을 고려했을 때만 발생됨에 틀림 없다. 그것은 훨씬 더 많이 매개된 방식으로 혹은 훨씬 더 많이 복잡한 방식으로 발생함에 틀림 없다. (...) 실재 객체와 실재 객체는 대리적 형태로밖에는 서로 접촉할 수 없다 (...) 그러나 어째서 실재 객체가 감각 객체와 접촉하는지에 대한 질문[사변적 실재론의 핵심질문]이 남아 있다.
4. 인식론 / 언어철학 / 철학적 방법론
객체의 철학이면서 분극화의 철학
[하만 2019, 10장, 246]이 책에서 제시하는 철학은 객체의 철학일 뿐만 아니라 분극화의 철학이기도 하다. (...) [248]이 책은 엠페도클레스의 체계와 비슷한 체계를 제공한다. (...) 각각[의 요소]은 분열과 융합으로 혼합된다. (...) 분명한 차이는 4종의 객체the quadruple object의 네 가지 용어가 물리적 요소가 아니며 (...) 모든 가능한 크기의 객체와 성질이라는 점이다. 객체 지향 철학은 상관주의자, 자연론자, 현상학자 혹은 고전적 실재론자의 환원주의적 입장을 포용하는 대신, 네 입장 모두에서 발견되는 진리의 낱알을 수확한다.
비환원주의
[하만 2019, 10장, 248]이 철학의 분명한 미덕 중 하나는 지식의 다양한 형태를 상대적으로 민주화하는 데 있다. (...) [345]이 세 가지[중성자, 뽀빠이, 일각수] 모두 감각 객체이지 실재 객체가 아니다. (...) 우리는 물리적 영역을 인간적 영역과 단순히 동일시 하지 않는다 (...) 우리의 목표는 단지 인문학이 물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질학과 화학 또한 물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데 있다. 각 영역은 저마다의 실재를 가지며, 이것들은 자기가 유래하는 곳으로 환원될 수 없다. 객체 지향철학은 환원하지 않기에 (...) [과학을 위해] 인문학을 거부하는 강의[도] (...) [인문학을 위해] 과학을 거부하는 강의 또한 제공하지 않는다.
비판이 아니라 진정성
[하만 2019, 1장, 30] 비판적 사고는 이렇게 존재자로 가득 찬 동물원을 받아들이는 것 대신, 객체를 [중심에 놓는 사고가] 틀렸다고 주장하고 그것의 자율성을 부정한다. 객체는 마음의 허구나 더 작은 물리적 조각의 총합이라는 점에서 기각된다. 그러나 이 책이 취하는 태도는 비판이 아니라 진정성이다.
경험
[하만 2019, 9장, 233]경험이라는 것은 경험을 하는 실재 객체가 감각 객체와 대면하는 것 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경험은 통일된 객체의 경험이다.
[하만 2019, 1장, 36] 경험의 객체란 성질의 다발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널리 퍼져 있는 경험론자의 견해 (...) 이는 순전히 허구다. 우리가 경험에서 마주치는 것은 통일된 객체이지 성질의 고립된 요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관계는 실제로는 거꾸로 진행되는데, 사물의 개별적 성질은 이미 사물 전체의 양식style이나 느낌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표상 대신 객체-부여 행위
[하만 2019, 2장, 67][후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표상 대신 객체-부여 행위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내면의 불변하는 핵심으로서의 감각 객체와, 감각 객체의 무수히 많은 현시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적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나무와 켄타우로스는 단지 나무이고 켄타우로스일 뿐이지, 그것들을 항상 마주치게 하는 [68]과도한 세부사항과는 관련이 없다.
철학적 체계의 방법
[하만 2019, 4장, 119]“철학의 체계는 결코 논박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포기될 뿐[이다.] (...) 합리론적 계획의 검증은 제1원리의 고유한 확실성이나 초기의 명확성이 아니라 일반적인 성공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 형이상학적 범주는 분명한 것the obvious에 대한 교조적 진술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궁극적 일반성에 대한 잠정적 정식화다”(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p. 6). (...) [120]화이트헤드의 요점은 본격적 ‘논변arguments’이 아니라 접근 철학에 있어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를 드러내는 데 있다. (...) [121]다시 말해 많은 사람은 “사유 없이는 존재도 없다”라고 말하는 게 부당하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그렇게 말하는 이들은-발췌자] “사유 없이는 사유도 없다”라는 겉으로만 더욱 엄격한 테제로 후퇴할 뿐이다. 나무를 사유한다는 것은 사유 외부에 나무가 없음을 증명해주지는 못하지만 사유 외부에 나무에 관한 어떤 사유도 없음을 증명하며, 이런 방법으로 철학은 여전히 사유의 순환 논법에 갖혀 버린다. 나는 이와 같은 책략을 거부하면서 “사유 없이는 사유도 없다”라는 구절이 무해한 동어반복이 아니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 이 구절은 동어반복을 넘어선 교묘한 암시를 하기 위해 동어반복을 사용한다. (...) [122]약한 접근의 입장은 내가 ‘나무가 사유되지 않는 한에서 나무를’ 지시할 때 이것이 그 자체로 사유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수반되는 것은 내가 (a) ‘나무가 사유되지 않는 한에서 나무’라고 말할 때 내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b) ‘나무가 사유되는 한에서 나무’라는 것이다. 그것은 (a)가 이미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 두 진술문은 동의어로 취급된다. 즉, 약한 접근 철학자는 ‘사유되지 못한 나무’를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 [124]그러나 이상한 점은 접근 철학자가 놀랍게도 『메논』의 것에 두드러지게 익숙한 주장을 한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은 입장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a) 당신은 사유되지 못하는 것을 사유하는 동안 그것을 사유할 수 없다(그것이 바로 사유이기 때문에). 그리고 (b) 또한 당신은 사유되지 못하는 것을 사유하지 않는 동안 그것을 사유할 수 없다(이유는 명백하다). 그러므로 (c) 사유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사유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사유’는 두 경우에서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사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마음에 현존하게 만드는 것인 동시에, 그것이 마음에서의 현존 너머에 있는 한에서 그것의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분석철학의 가장 위대한 저서 중 하나인 솔 크립키의 『이름과 필연』의 곳곳에 나온다. (...) [125]선택은 단지 무언가에 대해 적절히 말하지 않고서도 그것에 대해 말할 줄 안다. 이를테면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암시한다allude는 것이다. 암시는 말할 때만큼이나 생각할 때에도 발생한다. (사유 외부에 있는 나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실재가 될 수 있지만 온전히 있을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암시다. 그리고 이것이 철학이란 지혜 그 자체라기보다 필로소피아philosophia, 지혜에 대한 사랑인 이유다.
알지 못하지만 지식은 있다.
[하만 2019, 8장, 198]우리가 모든 피조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인 반면, 우리는 또한 망치, 버섯, 혹은 중성자라는 지하세계의 실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런 사물들에 관한 모든 지식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마음은 객체이며 더 큰 객체 안에서 다른 객체와 대면한다.
[하만 2019, 8장, 203]마음은 부분과 전체 모두로서 동시에 기여할 수 없다. 그보다 마음과 객체 모두 더 큰 무언가에 의해 포괄된다. 다시 말해, 그 둘 모두는 나와 실재 나무 사이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 객체의 내부에 존재하는데, 그것은 일상에서 발견되는 나무와는 꽤나 다를 것이다. (...) [204]물리적 사물과 마음 모두 객체[다.] (...) 객체인 둘 모두 모든 관계로부터 물러나 있으며, 그것들 자체인 일을 수행할 따름이다. 그것들이 다른 사물들과 관계 맺는 한에서, 그것들은 특권화된 정신적 행위자로서의 그것들 스스로에 내재하는 객체와 대면하기보다는 그것들이 그 일부로 들어가 있는 더 큰 객체들에 내재하는 객체와 대면한다.
인간의 의식은 ‘실재의 중간층을 파고든다’
[하만 2019, 8장, 202]존재자와 우리의 관계는 그 자체로 우리 자신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자들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물러나는 통일된 객체가 될 수 있다 (...) [하지만] 이와 같은 연관을 암시한다고 해서 결코 참여자들에게 완전히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의식은 우주를 초월하거나 중립적인 과학적 공백void에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실재의 중간층을 파고든다.
심신론이 아니라 객체론
[하만 2019, 8장, 206]이중성은 불가피하다. 실재 객체가 감각 객체를 그저 어루만지기만 할 뿐인 비추이적non-transitive 접촉이 항상 존재한다. (...) 그러므로 참된 이중성은 마음과 몸이 아니라 실재 객체와 감각 객체 사이에 있다.
감각객체(와 접촉하는 실재객체)
[하만 2019, 5장, 137]설령 우리가 결코 실재 객체와 접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감각 객체와는 접촉한다. (...) 우리가 갖게 된 것은 감각 객체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실재 객체다. (...) 실재 객체는 서로에게서 영원히 물러나 세계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138]감각 객체는 둘 모두를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실재 객체를 통해 서로에게 인접해 있을 뿐이[다.]
감각경험의 소급효과
[하만 2019, 5장, 138]만약 실재적인 것의 영역에서의 접촉이 완전히 불가능하고 감각적 영역에서의 접촉이 절대적 선결조건이라면, 분명히 경험의 감각적 영역은 모든 인과가 촉발되는 곳임에 틀림없다. 모든 접촉으로부터 물러난 실재 객체는 어느 정도는 그 자체에 대한 감각적 캐리커처로 번역되어야 하며, 이런 과장된 외관은 은폐되어 있는 실재적인 것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인과관계를 위한 연료로 제공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여하튼 감각적 영역에서 발생한 사건은 모든 경험의 외부에 놓인 실재에 대해 소급 효과를 가질 수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 해도] 모든 경험이 인간적인 혹은 동물적인 종류의 것[은 아니다.]
경험의 비대칭성
[하만 2019, 5장, 139]감각 객체는 다른 감각 객체와 접촉하지는 않지만,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로 기여하는 단일한 경험에서 인접하는 것으로만 존재한다. 이런 이유로 유일하게 가능한 종류의 직접적 접촉은 실재 객체가 경험하는 감각 객체를 실재 객체가 접촉함에 따라 비대칭적이다. (...) 내가 나무를 지각한다면 어쩌면 나무도 그에 반응해 나를 지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일한 것의 역전된 측면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관계의 부분으로서 발생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과잉의 물질성-지각
[하만 2019, 7장, 184]매 순간 변동하는 과잉의 물질적인 면면 (...) 이것이 지각의 진정한 본성이며 (...) 아무런 생각이 없는 존재자들의 가장 낮은 영역에서조차 원초적 지각이 발견된다 (...)
다심론polypsychism-객체의 지각
[하만 2019, 8장, 212]나는 경험을 하는 존재자들의 명부가 모든 존재자로 확장되지 않고서도 기존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는 풍선이 되어야 함을 주장하고자 다심론polypsychism을 이야기할 것이다. (...) 우리는 항상 ‘지각한다’는 용어와 ‘비지각한다’는 용어를 특정한 종류의 존재자 가운데 배분하지 않음으로써 분류의 오류를 피해야 [한다.] (...) [지각과 비지각은] 객체의 유형이라기보다 존재의 양식이다. (...) 객체가 존재하는 한에서 객체가 지각하지 않는다 (...) 객체가 관계하는 한에서 객체는 지각한다. 지각한다는 것은 더 큰 객체의 내부에 있는 감각 객체와 마주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실재적 존재자는 그것을 보다 [213]포괄적인 객체의 구성요소component로 만들어주는 관계 덕분에 그와 같은 〔객체의〕 내부에 자리 잡게 된다
객체 간의 간접적 접촉
[하만 2019, 8장, 210]아마도 불은 자기가 태우는 목화에 관해 생각하지 못할 것이고, 자신이 맹렬한 행동에 대해 죄책감이나 동정심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불은 여전히 목화와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접촉하고 있[다.] (...) [211]보다 논쟁적으로 말해서, 무생물 객체의 감각적 세계가 성질의 다발을 마주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는 것 못지않게 감각 객체와 〔사물의〕 음영 사이 후설식 균열과도 대면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직접적 접촉: 감각객체와 실재객체
[하만 2019, 5장, 140]우리가 알고 있는 한 직접적 접촉의 유일한 형태는 세계를 경험하는 실재 객체와, 그것과 마주하는 다양한 감각 객체들 사이에 있다. [141]거기서 그것들은 내 앞에 있다. 즉 나는 감각 객체들의 실재에 사로잡힌다. 여기에는 어떤 다리도 필요하지 않다.
실재객체로서의 ‘나’는 감각성질과 직접접촉할 수 없다.
[하만 2019, 5장, 141]실재 객체로서의 나는 다수의 감각 객체를 잇는 다리로 기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감각] 성질들을 연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예상할 수 있듯이 오류로 판명된다. 경험론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각 성질과 결코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는다.
감각적 장에 실재 객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만 2019, 7장, 185]감각객체가 그것의 성질과 미리 결합되는 반면에, 실재 객체는 감각적 장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재 객체와 감각 성질들은 융합될 때만 만나게 될 것이다. (...) 객체의 그 비가시성이 객체와 감각 성질을 따분한 일상에서 종종 겪는 것과 같은 맛없는 퓌레로 압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은 융합은 예컨대 모든 종류의 예술 작품에서 발생하는데, 나는 그 이상으로 하이데거의 ‘망가진 도구’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예술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미학적 효과를 갖는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통일된 감각객체의 풍경’
[하만 2019, 5장, 146]우리는 성질의 느슨한 화소와 마주하지 않으며, 그것을 습관의 단순한 힘을 통해 엉성하게 통일된 덩어리로 압축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저마다 다른 때에 각기 다른 성질을 발산하거나 방사하는 통일된 감각 객체의 풍경을 마주한다.
[하만 2019, 7장, 190]
대면-생명적, 비생명적 인지과정
[하만 2019, 7장, 185]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한 감각 객체에서 곁에 있는 것으로 돌릴지도 모른다. 딸기에서 그 씨앗으로 혹은 어쩌면 전체로서의 딸기 조각으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때 감각 객체와 그것의 성질 사이에는 이전 균형의 순간적 붕괴가 발생하는데, 여기서 객체는 그것의 성질을 꼭두각시처럼 조작하는 통일된 중추로 잠시 나타난다. 이런 사건은 인정recognition 혹은 승인acknowledgment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이 용어는 아마도 더 진보한 동물 존재자에게 제한될 복잡하고 인지적인 과정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인간 뿐만 아니라 바위와 전기의 원초적 영혼psyches에도 적용될 수 있는 용어다. 나는 그 과업에 대한 충분히 폭넓은 것으로서 대면confrontation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매혹
[하만 2019, 7장, 186]우리는 물러나 있는 실재 객체와 접근 가능한 표면 성질과의 융합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로서 매혹allure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 나는 그 용어를 “매혹이란 사물의 통일성과 (특이한 성질의) 다수성 사이의 친밀한 결속이 다소 부분적으로 해체되는 특별하고 간헐적인 경험이다”라고 정의한 바 있다.
[하만 2019, 7장, 188]실재 객체는 그것의 감각 성질과 접촉하지 않으며, 매혹을 통해서만 감각 성질과 이어진다.
이론
[하만 2019, 7장, 187]그것[감각객체]은 항상 그 자체의 형상과 미리 융합된다. 단지 이론적 과업만이 그것 사이의 결속을 분해하거나 역설계할 수 있을 뿐이다. 이론theory이라는 단어는 실재 객체에서 통일된 감각 객체를 분리해내는 분열에 대한 우리의 용어로 쓰일 수 있다(통일된 감각 객체가 그 자체가 되는 데에는 실재 성질을 필요로 한다). (...) 이론은 감각 객체와 감각 객체의 다수의 실재적 특성 사이에 발생한 일종의 분열[이다.]
인과
[하만 2019, 7장, 188][매혹의 작동과 비슷하게]실재 객체와 그것의 성질은 분리되어 존재해야 하는 필요에 따라 미리 존재하는pre-existent 결속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융합fusion을 통해, 즉 매개하는 용어를 통해 합쳐짐에 틀림없다. (...) 심미적 경험의 매혹과 유사한 이 과정은 인과causation라고 불릴 수 있다.
실재객체와 실재성질은 접근으로부터 물러난다.
[하만 2019, 7장, 187]실재 객체와 실재 성질들 사이의 긴장 (...) 이러한 관계는 결코 어떠한 경험에도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실재 객체와 실재 성질들의] 극점 모두가 모든 접근으로부터 물러나 있기 때문이다.
5. 주체론
‘사물과 마음은 모두 객체다’
[하만 2019, 8장, 203]마음은 부분과 전체 모두로서 동시에 기여할 수 없다. 그보다 마음과 객체 모두 더 큰 무언가에 의해 포괄된다. 다시 말해, 그 둘 모두는 나와 실재 나무 사이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 객체의 내부에 존재하는데, 그것은 일상에서 발견되는 나무와는 꽤나 다를 것이다. (...) [204]물리적 사물과 마음 모두 객체[다.]
의식-실재의 중간층
[하만 2019, 8장, 202]인간의 의식은 우주를 초월하거나 중립적인 과학적 공백void에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실재의 중간층을 파고든다.
비대칭성과 진정한 이중성
[하만 2019, 8장, 206]나와 나무의 관계가 새로운 객체를 형성한다면, 그 객체의 실재적 조각으로서의 나는 새로운 객체의 내부에서 다른 요소의 단순한 이미지와 대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재적 나와 감각적 나무 사이에, 객체의 내부에 비대칭성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중성은 불가피하다. 실재 객체가 감각 객체를 그저 어루만지기만 할 뿐인 비추이적non-transitive 접촉이 항상 존재한다. (...) 그러므로 참된 이중성은 마음과 몸이 아니라 실재 객체와 감각 객체 사이에 있다.
인간-세계 관계의 비특권성과 분류의 오류
[하만 2019, 8장, 208]객체 지향 존재론은 인간-세계 관계가 전혀 특권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 나무와 집이 시를 쓰고, 신경쇠약증을 겪으며, 자신이 실수로부터 배운다는 증거는 없다. 문제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이처럼 명백한 차이가 기본적인 존재론적 균열로 간주될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 [209]핵심은 기본적인 존재론적 분리가 특정한 종류의 존재자와 동일시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분류의 오류를 피하는 데 있다.
무생물 객체의 감각적 세계
[하만 2019, 8장, 211]보다 논쟁적으로 말해서, 무생물 객체의 감각적 세계가 성질의 다발을 마주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는 것 못지않게 감각 객체와 〔사물의〕 음영 사이 후설식 균열과도 대면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6. 윤리학, 도덕철학
7. 정치철학
8. 미학
미학적 효과-실재 객체와 감각 성질들의 융합
[하만 2019, 7장, 185]감각객체가 그것의 성질과 미리 결합되는 반면에, 실재 객체는 감각적 장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재 객체와 감각 성질들은 융합될 때만 만나게 될 것이다. (...) 객체의 그 비가시성이 객체와 감각 성질을 따분한 일상에서 종종 겪는 것과 같은 맛없는 퓌레로 압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은 융합은 예컨대 모든 종류의 예술 작품에서 발생하는데, 나는 그 이상으로 하이데거의 ‘망가진 도구’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예술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미학적 효과를 갖는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9. 기술/과학철학
하이데거 기술철학의 미비함
[하만 2019, 4장, 111]기술technology에 관한 하이데거의 이론은 많은 관찰자에 의해 매우 부당하게 칭송받았다. (...) 하이데거의 문제는 기술에 대해 너무 가혹하다는 것만큼이나 그에 관한 상세한 언급을 충분하게 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 그는 인간과 다양한 종류의 [112]동물 사이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기술적 인공물 사이 차이 또한 구별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제공해준 것은 기술에 관한 만개한 이론이 아니라, 눈앞에 있음에 관한 또 다른 불평인 것이다.
10. 신학
11. 자기평가
[하만 2019, 영어판 서문, 19]이 책은 지난 20년간 나를 사로잡았던 익숙한 사유와, 앞으로 20년간 나를 사로잡을 준비가 된 익숙하지 않은 사유 모두의 완벽한 정수다.
[하만 2019, 6장, 165]이 책이 지지하는 4중 모델은 감각객체를 향할 때는 후설을 따르고 실재 객체를 따를 때는 젊은 하이데거를 따른다. 1949년의 하이데거가 시적인 힘을 얻는 동안, 객체의 철학자로서의 그는 한 급수 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기이학 해석
[하만 2019, 6장, 168]객체의 형이상학은 이보다[후설과 하이데거보다] 더 깊은 근원을 갖는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에 대한 더욱 기이한 해석을 제공[한다.]
상관주의
[하만 2019, 10장, 239]상관주의는 영어권에서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으로 알려진 새로운 철학적 운동에 대한 촉매로 기여했다.
객체지향철학
[하만 2019, 10장, 240]지적인 단층선은 처음부터 그룹 안에 있었고, 나를 제외한 원년 멤버 중 누구도 이제는 그와 같은 용어의 의미에서 ‘객체 지향 철학자’로는 불릴 수 없게 되었다.
칸트와 화이트헤드
[하만 2019, 10장, 241]내가 독일 관념론이 칸트의 물자체를 포기한 것을 한탄하는데 반해, 사실 메이야수는 알 수 없는 물자체를 절단하는 것이 합리주의 철학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이라고 찬양한다. (...) 내가 칸트에 대해 가진 불만은 그가 물자체 개념을 유지했다는 점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보다 일반적 의미의 합리성이 아니라 홀로 맴도는 인간의 지식으로 간주했다는 점에 있다. 나는 화이트헤드와 마찬가지로 물자체는 실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이 실재가 인간 주체에 의해서와 마찬가지로 무생물적 인과 관계에 의해서도 도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실 인간의 지각으로부터 물러난 목화-그-자체와 마찬가지로 불로부터 물러난 목화-그-자체도 있기 때문이다.
12. 시니컬, 경구
[하만 2019, 3장, 91]객체는 자기만의 진공 속에서 베일로 덮인 검은 수정이다.
[하만 2019, 3장, 75]현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궁정반란 (...) 하이데거의 철학은 현존을 소탕하는 전투였다.
[하만 2019, 4장, 103]어떤 관계도 그 관계의 용어에 대한 번역이나 왜곡[이다.]
[하만 2019, 4장, 113]하이데거의 사유에 있어 두 번째 축 (...) 후기 철학에서 발견되는 신비한 4중 (...)
[하만 2019, 4장, 116][반실재론적 입장에서는] ‘집과 산과 강’으로 채워진 거대한 왕국은 연역의 재단에서 부자비하게 도륙된다.
[하만 2019, 5장, 146]우리는 저마다 다른 때에 각기 다른 성질을 발산하거나 방사하는 통일된 감각 객체의 풍경을 마주한다.
[하만 2019, 8장, 201]무한 퇴행이 ‘내내 거북이를 따라가는’ 이론이라[면] (...) 유한퇴행은 최종적인 전능한 거북이를 숭배할 뿐이며, 어떤 퇴행도 없다는 이론은 거북이 없이 거북이 껍질 위에서 쉬고 있는 세계를 옹호하는 셈이다.
[하만 2019, 10장, 244]전투의 함성인 ‘실재론’이 존중받을 만하[지만] (...) [245]우리를 구해주는 데는 충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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