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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컴의 필사적(筆寫的) 도망

<개념무기들-들뢰즈 실천철학의 행동학>(조정환, 갈무리, 2020)

by Nomadia 2021. 2. 3.

조정환 지음, 개념무기들-들뢰즈 실천철학의 행동학, 갈무리, 2020

 

[40]

 

[47]자본주의의 내재성에는 세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첫째 측면은 노동과 생산의 탈코드화된 흐름들 사이의 미분적 관계에 기초하여 인간의 잉여가치를 추출해 내면서 중심에서 주변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둘째 측면은 과학적, 기술적 코드의 흐름들의 공리계에 기초하여 기계의 잉여가치를 추출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측면은 이 두 가지 잉여가치의 유출을 보증하고 생산 장치 속에 반-생산을 항구적으로 투입함으로서 흐름의 잉여가치의 이 두 가지 형태를 흡수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첫 번째 측면은 노동자가 지불받은 가치(즉 임금)와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 차이의 차이, 즉 미분적 관계이다. 잉여가치는 양자 사이의 차이에서 추출된다. 두 번째 측면은 기술적 발전과 과학적 발전을 생산에 응용함으로써 특별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측면은 생산 내부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위치를 지시한다.

 

[48]자본주의는 결코 절대적인 탈영토화가 아니다. 탈영토화가 이루어진 이후, 혹은 이에 덧붙여서 모든 탈영토화가 재영토화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 들뢰즈는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방식의 재영토화가 공리계의 형태를 취한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공리계는 낡은 코드화와 덧코드화를 대신하여 이윤축적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서, 노동과 생산의 탈코드화된 흐름들이나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코드의 흐름들을 조직하는 결합접속적 종합의 논리이다.

 

[56]통합된 세계 자본주의가 국가형태가 아니라 세계 질서를 받아들인 전 지구적 전쟁기계에 상응하게 되면서 전 지구적 전쟁기계는 그 어떤 전쟁보다 무시무시한 평화와 더불어 매끈한 공간을 지배하는 공리계의 행위자가 된다. 이렇게 현대 자본주의의 공리계가 내재성의 평면에 터를 잡으면서 동시에 무시무시한 억압을 조합한다는 사실에서 그 공리계를 가짜 내재서 [57], 억제되고 제한된 내재성으로 볼 필요성이 대두된다. (...) 들뢰즈의 다양한 철학적 모색은 이 가짜 내재성, 상대적 내재성의 힘과 운동을 넘어서는 진정한 내재성과 절대적 내재성을 사유하기 위한 노력의 표현이다.

 

[63]오늘날의 노동은 점점 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 노동과정 그 자체가 직접적인 사회적 과정으로 됨으로써 사회 자체가 직접 사회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는 의미에서의 질화된 사회적 노동이 더욱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 결과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는 것은 합산과 평균 그리고 배분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구성할 노동의 지속시간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생산적인 사회적 노동 자체이다. 상품들은 여전히 노동에 의해 생산되지만 더 이상 물화된 노동시간이라고 하기 어려우며 사회적 삶에서 직접적으로 기능하는 삶형식 자체로 되어간다.

 

[69]첫째로는 생산과정 자체가 교환을 통해 매개되어야 할 분산된 직접적 노동에 의한 생산물의 생산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삶을 직접적으로 생산하는 생산과정으로 되는 것, 둘째 사회적 생산자들이 직접 사회적으로 연합하여 그 사회적 생산과정을 직접 통제하는 것. (...) 이 두 가지 조건이 동시에 갖추어질 때만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이 [70]생산하는 잉여가 자본축적의 원천에서 삶의 자유의 원천으로 전환될 수 있다 (...) 이때야말로 삶을 노동에 묶어 놓는 척도시간의 경첩이 풀리는 때가 아닐까? (...) 노동시간과 가처분시간의 변증법을 넘어서 삶시간 그 자체의 잠재력이 열리는 때가 아닐까?

 

[71]들뢰즈는 삶시간을 결과의 자리가 아니라 출발의 자리에 놓고 노동시간과 동시에 삶시간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실재화한다는 점에서 맑스의 관심과 적극적으로 연결된다.

 

[73]들뢰즈-베르그손에 따르면 부동의 순간들로부터 변화의 시간이 구성되지는 않는다. 순간들은 죽은 시간일 뿐이며 그것들을 아무리 많이 합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에서 실재하는 시간이 생성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부동의 순간들의 연쇄를 따라가면서 언젠가 생성할 실재적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불면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귀착된다. 실재적 시간을 미래로 돌리는 이 대기주의적 유혹을 뿌리치고 단번에 시간의 평면, 내재성의 평면에서 시작하는 것. 이것이 들뢰즈의 근본적 기획이다. 그는 상품에서 시작해서 코뮤니즘적 삶의 출현을 찾으려 한 맑스주의 변증법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즉 단번에 내재적 삶에서부터 시작하면서, 그 삶을 결코 떠나지 않는 다른 여정을 시작한다.

 

[91]아이온의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허상의 체계는 기초개념들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재현의 범주들과는 다르다. 들뢰즈는 그것들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 강도들이 조직되고 있는 깊이, 공-간; (2) 강도들이 형성하는 불균등한 계열들, 이 계열들이 그려내는 개체화의 장들; (3) 계열들을 서로 소통케 하는 ‘어두운 전조’[애매한 전구체]; (4) 그 뒤를 잇는 짝짓기, 내적 공명, 강요된 운동들; (5) 체계 안에 서식하게 될 수동적 자아와 애벌래-주체들의 구성, 그리고 순수한 시공간적 역동성들의 형성; (6) 체계의 이중적 분화를 형성하고 개체화 요인들을 뒤덮게 될 질과 외연들, 종과 부분들; (7) 개봉된 질과 연장들의 세계 안에서 이 개체화 요인들이 여전히 끈질기게 항존한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봉인의 중심들.


[93]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실체를 베르그손의 지속에 겹치고 다시 그것을 니체의 영원회귀에 비추어봄으로써 존재의 문제를 시간의 문제로 전위시킨다. 존재는 시간이며 시간은 습관과 기억을 통해 자신을 반복하는 차이 그 자체이다. 그것은 무한히 다양하게 생성하는 삶의 내재적 약동이다. 이 평면에서 노동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운동이 실재하는 지속의 움직이는 단편이고 양태가 속성을 통한 실체의 표현이듯이 노동은 삶의 약동의 표현이다. 그것은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활동이다. 그것은 결코 인간의 활동에 국할될 수도 없고 물질적 형태의 활동에 국한될 수도 없다. 인간의 활동은 물론이고 비인간의 생명활동도, 여러 유형의 물질적 활동은 물론이고 다양한 유형의 비물질적 활동들도 삶의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활동들이다.

 

[113]개체화된다고 해서 전개체적인 것의 이질성, 다중성, 준안정성, 다성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변환의 개념은 개체화 과정에서 서로 다른 불균등한 정보적 특질들이 마주쳐 서로 상호작용함으로써 존재론적으로 새로운 것, 새로운 정보적 구조를 생산하는 발생적 과정을 지칭한다. 변환은 해당 영역들의 긴장 장체로부터 문제 해결이 구조를 가져온다. [114]변환은 긴장된 영역들에서 특이한 것을 제거하고 공동적인 것만을 보존하는 수학적 정보화의 방법과는 다르다. (...) 변환은 대립과 차이를 보존하여 통합하면서 바로 그 대립과 차이 때문에 가능해지는 구체적인 연결망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자 방법이다.

 

[118]스피노자는 우리가 어떤 명료한 관념을 형성할 수 없는 정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119]즉 우리가 어떤 마주침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정보와 정서를 적합한 원인에 따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고 정서이 수동성을 극복하고 능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시몽동이 변환이라고 불렀고 들뢰즈가 우화짓기라고 불렀던 방법일 것이다. 이 방법은 개체적 차원을 벗어나 특이한 것들의 지평에서 미지의 적합한 관계를 발견하고 공통적인 것을 발명하는 실천이다.

 

[171]민중은 죽음, 굴종, 치욕과 수치에 저항하면서 자신에게 없는 민중을 불러내는 예술처럼, 자신에게 없는 민중을 창조하는 자, 꾸며내는 자이다. 꾸며내기fabulation는 이런 의미에서 예술과 민중이 공유하는 주체화의 기술이다.

그렇다면 그 꾸며내기란 무엇일까? 베르그손은 꾸며내기를 부정적 뉘앙스로 묘사했다. 즉 사람들이 어떤 사건을 자연현상이나 신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자발적 환상을 창출하는 [172]환영적 소질로 정의했다. 들뢰즈는 이 꾸며내기의 그 환영적 소질을 오히려 적극적인 것으로 재해석한다. (...) 예술은 (...) 감각을 기념비화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기념비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에 그 사건을 기념할 만한 구성물을 제공하는 현재의 감각들로 이루어진 회집체이다. 그러므로 기념비는 기억이 아니라 꾸며내기이다. (...) 꾸며내기는 기억 속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감각들 속에서 재료들을 발견하면서 아이로, 비인간으로, 그리고 민중으로 되는 생성 그 자체이다. 들뢰즈는 이 꾸며내기가 (...) 타자가 되는 과정이며 그것에 고유한 민중이 창안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173]소수자 민중은, 지각과 정동을 통해 타자로 되는 예술가처럼, 생성하며 타자로 이행하는 주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철학이란 무엇인가, 시네마2참조]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적 주체성이다. (...) 첫째로 소수자 주체성은 다수자 지배에 갇혀 있기 때문에 강한 탈영토화율을 지닌다. 둘째로 소수자 주체성이 놓인 갇힌 공간이 협소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아주 사소한 것이나 개인적인 것을 막론하고 모든 것이 정치적 성격을 띤다. 셋째 특징은 발화가 집단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소수자 주체성에서는 개인이 거장적 발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집단적 성격을 띤다. 심지어 한 개인의 발화조차도 그 자체로 집단적 행동으로 되고 그것이 잠재적인 다른 공동체를 표현할 수 있다.

 

첫째, 유목민은 영토를 갖고 있고 관습적인 궤적을 따라 이동하지만 이 영토와 궤적, 그리고 거주지는 정주민의 그것들과 달리 중계점, 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유목민의 궤적은, 인간들에게 몫으로 지정되는 부분공간 혹은 닫힌 공간을 배분한 후 이들을 잇는 교통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176]아니라 인간들과 짐승들을 무규정적이며 교통하지 않는 열린 공간 속으로 분배한다. 셋째, 유목민은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동하지 않고 앉아 있다. 즉 유목민은, 경로와 함께 지워지면서 방향을 바꾸며 이동해 나가는 특정 선에 의해서만 구분되는 매끈한 공간 위에 자신을 분배하고 점유하고 거주하며 그것을 보존한다.

유목민은 외연적이고 상대적인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포적이며 절대적인 운동, 즉 속도를 갖고 있다. 유목민은 갇힌 상황 속에서 그것을 벗어나려는 소수자가 그렇듯이 탈영토화되어 있다. 유목민이 국지적으로 재영토화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탈영토화의 한 중계점,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자가 모든 것에서 정치적이듯이 유목민도 모든 면에서 정치적이다. 유목민의 정치성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전쟁기계의 발명자라는 데에 있다. 전쟁기계는 내부성의 형식인 국가장치 외부에 있다. (...) 국가가 군사제도와 군대를 보유하는 경우에도 국가는 전쟁을 법률적으로 통합하고 군사 기능을 조직화할 뿐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국가 장치로 환원 [177]불가능하며 주권 외부에서 국법에 선행한다. 들뢰즈가 전쟁기계는 국가장치와는 다른 종류, 다른 본성, 다른 기원을 갖는다”[천의 고원]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83]들뢰즈는 이들 첨단기술과 무술을 새로운 유형의 직공이나 전사집단을, 요컨대 새로운 전쟁기계-주체성을 결합시킬 가능성으로 이용하자고 제안한다. [184]이 작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유목민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무기를 발명했는가를 참조해야 한다. 유목민은 최초의 가장 중요한 이주자인 장인을 자신과 연결접속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무기를 발명한다.

 

[222]우리가 코뮤니즘을 생각할 수 있는 평면은 바로 이곳일 것이다. 그것은 결코 물질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성일 수 없다. 그것은 사건들 혹은 효과들의 통일성으로서 물체들의 통일을 따라다니면서도 그 평면 외부에 있는 시간이다. 그것은 언젠가 도달할 시간이 아니라 삶의 매순간 어느 곳에서나 움직이고 [223]있는 내속하는 시간이다. 코뮤니즘은 이런 의미에서의 사건, 즉 우발점에서 특이점으로의 이행을 표식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혁명과 예술과 철학에서 발견된다. 이 카이로스의 사건은 위대한 정치의 시작이다.

 

[283]나는 맑스주의라는 용어를 하나의 특정한 경향성에 붙이는 이름으로 사용한다. 요컨대 맑스주의는 코뮤니즘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그것의 실제적 가능성을 규명함으로써 그때그때의 코뮤니즘적 주체성의 구성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참여하는 이론적 및 정치적 실천들이다. (...) 맑스주의가 기억의 정치학이 아니라 미래에서 영감을 얻는 혁명적 실천인 한에서 맑스주의에 정통’orthodox이란 있을 수 없다. (...) 맑스주의는 다시 말해 과거의 혁명적 기억들까지도 도래할 가능성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재조명하여 현재의 속에 합류시키는 방식으로 과거 기억과 관계 맺는 태도이다. 요컨대 맑스주의는 [284]가능성을 중심으로 잠재성과 현실성의 이중운동 혹은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펼쳐짐explication과 현실성에서 잠재성으로의 감싸임implication을 사유하고 실천하는 운동이다. (...) [과도한 잠재성으로 흐르는] 경향은 (...) 그 잠재성을 현실성과 연결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코뮤니즘을 부정하는 반맑스주의로 흐르거나 코뮤니즘을 신비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럴 때 잠재성은 현실의 주변이나 구멍 혹은 초월적 영역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잠재성과 현실성이 서로 대립적으로 이해되곤 하기 때문에 가능성에 대한 맑스주의의 강조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가능성은 현실적 잠재성이자 잠재적 현실성이며 [285]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의 이행의 장이기도 하다. 가능성은 두 수준 사이의 발생공간이자 생성의 표면이다. 따라서 가능성의 존재론으로서의 맑스주의는 잠재력potentiality이 현실의 구성력constituent power으로 나타날 가능조건에 대한 탐구이다.

 

[291]가능성은 결코 현실성의 단순한 전사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강도적 특질, 특이성, 표정 등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가능태를 미적 범주로 확정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기보다 구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 [292]들뢰즈가 강도, 특이성 표현, 분화, 극화의 개념을 통해 가능성, 가능태, 가능한 것을 사고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가능성-현실성의 쌍을 대체하는 잠재성-현실성의 쌍을 통해서 우리는 분리된 두 범주를 확인하는 것에 머문다. 이 양자가 서로의 반쪽이라고 말해도 사태는 [293]마찬가지이다. 문제는 강도, 특이성, 구성으로 나타나는 가능성의 장을 통해 잠재성과 현실성의 교차와 이행을 확인하는 것이다. 가능성의 장이야말로 들뢰즈의 초험적 경험론의 주제 공간이며 네그리의 맑스주의적 유물론의 주제공간이다.

 

[300]들뢰즈가 소통과 공통성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 [301]그에게서 소통불가능성은 실제로는 재현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소통의 실존양식에 대한 비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이러한 독해를 뒷받침하는 것은, 들뢰즈가 도주선들은 서로 연결됨으로써만 블랙홀로 빠져들지 않는다고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가, 공통성들의 실존형식들을 비판하는 한편에서, 특이성들의 공통적 조직화의 가능성과 그 필요성을 긍정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303]네그리에게서 문제는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던져지고(분화와 극화, 밖주름운동) 다시 현실성에서 잠재성으로 떨어지는(미분화, 안주름운동) 주사위 놀이, 영원회귀의 운동이 아니다. 그가 파악하는 존재에게 영원회귀의 [304]원환운동은 없다. 실재하는 것은 잠재성에서 가능성으로의,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의 부단한 이행운동이다. 생산된 현실성은 이 운동의 종착점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이행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구성하므로 이 운동은 직선으로 진행되는 회귀하지 않는 시간이다. 이것은 날아가는 화살촉의 시간, 즉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불려진다. 들뢰즈가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아이온의 시간을 구별하고 아이온의 선차성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둔다면 네그리는 아이온의 시간의 선차성에 대한 인정 위에서 아이온이 크로노스를 향해 이행하는 시간인 카이로스의 시간을 관심의 중심에 놓는다. (...) 가능성은 존재가 힘으로 나타나는 평면, 즉 역사적 경향의 평면이다. 이 평면에서는 힘들의 적대가 움직인다. 맑스의 추상 개념은 가능성의 평면에서의 이 적대를 드러내 보여 준다.

 

[313]소수정치는 현실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을 미분하는 정치로 나타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잠재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으로 운동하는 잠재화의 정치학이다. 그것은 [314]‘기관 없는 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의식에 의해 이끌린다. (...) 소수정치적 역행involution은 현실적인 것에서의, 갇힌 상황으로부터의, 지층들로부터의, 체제로부터의 도주이다. 소수정치에서 민중은 없다. 오히려 민중은 창조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자신이 고유한 선을 따라, 주어진 여러 항들 사이에서’, 할당 가능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는 일이다.

 

[318]민중이 창조되는 곳은 두뇌가 카오스와 관계하는 지점이다. [319]그것은 철학, 예술, 과학에 자신의 힘을 나눠주는 카오스-민중이자 두뇌적-민중이다. 그것은 결정할 수 없고 구별할 수 없는 영역에서 일종의 그림자 존재로서, 잠재력으로서 생성된다. 철학, 예술, 과학은 이 잠재력을 분유하며 수행하는 평면들이다. 카오스-민중이자 두뇌적-민중인 이 생성의 민중은 개념 상에서 척도 바깥의 것이자 척도 너머의 것인 네그리의 다중과 많은 점에서 겹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있다. 들뢰즈의 두뇌적-민중은 사유하는 정신적 주체성으로 나타남에 반해 네그리의 다중은 노동하는 사회적 주체성으로 나타난다. 네그리에게서 철학, 예술, 과학은 탈근대적 다중지성의 조건하에서 작용하는 비물질노동의 형태들임에 반해 들뢰즈에게서 이것들은 결코 노동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네그리에게서 다중이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힘들의 연결로서, 즉 가능성의 수준에서 정의되고 있음에 반해 들뢰즈의 생성하는 민중은 예술, 철학, 과학에 자신의 힘을 나눠주는 잠재성의 수준에서 정의된다. 네그리에게서 다중의 공통성은 산 노동 속에서 발생하고 발저하는 협력임에 반해 들뢰즈에게서 그것은 두뇌적-민중들(과학, 예술, 철학) 속에서의 내재적 간섭으로 나타난다. 들뢰즈에게서 새로운 민중은 정신적이다. 그에게서 사유하는 것은 바로 두뇌이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두뇌의 결정체일 뿐이다.”

 

[323]이들[들뢰즈와 네그리]은 실질적 포섭의 시대를 비관적으로 전망했던 비판이론들과는 다른 혁신의 정치학을 제시한다. (...) 소수정치는 삶정치의 적극적 구성요소로 이해된다. 소수정치는 지배적 현실의 해체와 파열,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도주를 함축하며 좀 더 적극적인 경우에는 그 파열선과 도주선의 블록화(즉 네트워킹과 공통화)를 의미한다. (...) 이런 전제 위에서 노동거부는 새로운 삶의 공통적 생산의 한 계기이며, 프롤레타리아트와 다중은 삶의 공통적 구성능력에 붙은 이름이고 코뮤니즘은 삶의 공통되기의 과정 자체이다. 자율은 갇힌 공간으로부터 독립된 어떤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들이 어떤 초월적 매개도 없이, 아니 그러한 매개의 거부 위에서 공통체적 주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을 일컫는 이름이다.

 

[343]분열자는 분해할 수 없는 거리들을 따라가는 외적인 지리적 여행을 할 뿐만 아니라 이 거리들을 감싸고 있는 내공(강도)들을 따라가는 내적인 역사적 여행을 하는데, 전자가 운동이며 후자가 속력이다. 운동은 이동에 의해 표시되지만 속력은 이동과 직결되지 않는다. 정지, 대기, 긴장 등도 속력의 성분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전자를 과정processus으로, 후자를 경과procès로 부른다. 들뢰즈가 가속하라고 한 것은 전자(과정)가 아니라 후자(경과)이다. 다시 말해 상대운동의 가속이 아니라 절대운동인 [344]속력의 가속을, 탈영토적 흐름의 가속을 요구한 것이다.

 

[357]들뢰즈는 탈영토화가 상대적인가 절대적인가 하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탈영토화의 본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면서, 탈영토화가 겉지층들과 곁지층들을 구성하고 분절된 절편들을 따라 나아가느냐, 아니면 고른판의 웃지층을 그리는 선, 절편으로 분해할 수 없는 선을 따라 하나의 특이성에서 다른 특이성으로 도약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탈영토화의 가속은 그 자체로 평가될 수 없고 탈영토화의 성질에 의해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속 그 자체가 능사가 아니며 특이성들을 중계해줄 수 있는 가속, 특이성들의 공통되기를 가져올 수 있는 가속만이 진정한 가속인 것이다.

 

[362]위험에 대한 지각과 신중함을 갖는 태도 (...) 생성은 가속운동이고 운동은 절대속도라는 점에 변함은 없다. 단지 생성이 이 절대 속도의 가속운동에서 근방역, 식별불가능성의 지대, 아무도 아닌 자의 땅, 인접한 점 사이의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멸을 막기 위해 최소한의 지층, 최소한의 형식과 기능, 최소한의 주체를 남겨 두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화음의 수직선과 선율의 수평선 사이를 지나가는 사선 위에 하나의 음의 블록’, 탈영토화된 리듬의 블록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 특수한 재영토화 없이 탈영토화가 있을 수 없고 그램분자적 성분들을 동반하지 않고서 분자되기가 가능하지 않다. 지각 불가능한 과정을 위해서도 지각 가능한 통로가 있어야 한다. 예컨대 정치적 좌파가 대중운동의 위치를 밝히고 진로를 제시한다고 할 때 그 좌파는 대중의 분자적 운동을 지각 가능하게 만드는 통로의 역할을 한다.

 

[383]공통적인 것의 통화는 자본에 의해 노동에 부과된 척도에 대한, 사장에 의해 부과된 잉여노동 위계에 대한, 자본주의 국가에 의해 부과된 소득의 일반적, 사회적 분배에 대한 공격을 함축한다. 이런 관점에서 노동거부도 현대적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데, 그것은 알고리즘적 자동화가 낳은 생산성에 대한 포착, 노동시간의 축소, 실질적 봉급인상, 기본소득, 그리고 삶의 기쁨의 증대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명령과 주권에 대항하여, 열정을 치열한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주체성을 생산하는 활동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수직적 국가명령을 구축하지 않으면서 지식과 생산적 능력의 네트워크로 수렴하고 탈자본주의적 코뮤니즘 제도들을 발생시키는 투쟁의 계획화를 생산의 계획화보다 우선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387]특이성들을 중계해줄 수 있는 가속, 특이성들의 공통되기를 가져올 수 있는 가속만이 절대적 도주선을 그릴 수 있는 가속이다. 이러한 가속, 즉 특이성들의 중계를 가져올 수 있는 가속을 위해서는 다선적 체계가 필요하다. 이것은 선들의 타협이나 평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들이 중간을 뚫고 나가는 사선들의 내재적 블록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완전자동화라는 가속주의적 대안도 그것이 전제하고 또 진입하는 사회적 배치물이 무엇인가에 따라 먼저 평가되어야 한다. 그것이 노동기계(의 도구)로 기능하지 않고 전쟁기계(의 무기)로 기능하게 할 수 있는 [388]배치에 대한 사유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388]좌파의 가속주의 정치학에 가장 크게 결여된 것이 바로 이 대안적 주체성에 대한 사유이다. 기술적 플랫폼이 노동으로부터의 실제적 해방과 자유로운 미래를 발명할 장치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기본소득만으로는 부족하고 가속주의 정치학이 기술정치를 사유하기 위해 괄호 치고 있는 다중정치folk politics, 즉 주체성의 정치를 기술적 플랫폼에 대한 사유와 긴밀히 결합시키지 않으면 [389]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그리고 이것만이 기술의 잠재력에 대한 인식 위에서 이행의 기술과 집단적 자치의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가속주의 정치의 기본 취지를 올곧고 충실하게 실천하는 방식일 것이다.

 

[409]나는 또 속력에서의 가속의 중요성을 고려한다고 해도 들뢰즈는 그것이 블랙홀로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도 동시에 고려한다고 서술한다. 그것은 탈영토화된 리듬들의 블록화다. 이 블록화는 특이성들의 탈영토적 가속화의 위험을 그 탈영토적 흐름들의 공통되기를 통해 보충하려는 이론적 장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