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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컴의 필사적(筆寫的) 도망

<종교의 철학적 의미>, 마이클 피터슨 외 지음

by Nomadia 2021. 2. 11.

_서지사항: 『종교의 철학적 의미, 마이클 피터슨, 윌리엄 해스커, 브루스 라이헨바하, 데이비드 베싱어, 하종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5

_ 아래 정리 노트에서 '< >' 안의 내용은 Nomadia의 주석임.

 

 

|차례

 

서론

1| 신에 대한 사색 : 절대자를 찾아서

2| 종교적 경험 : 신과의 만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신앙과 이성 : 서로 어떤 관계인가?

4| 신의 속성 : 신은 어떠한 모습인가?

5| 유신론의 논변들 : 신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가 있는가?

6| 논증 없이 신을 알기 : 유신론은 논거를 필요로 하는가?

7| 악의 문재 : 신의 존재에 대한 반론

8| 신의 역사 : 신은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

9| 기적 : 신은 속세의 일에 개입하는가?

10| 내세 : 소망할 이유가 있는가?

11| 종교 언어 : 우리는 신에 관해서 어떻게 의미있는 발언을 할 수 있을까?

12| 종교와 과학 : 양립가능한가, 불가능한가?

13| 종교적 다원성 : 우리는 종교들 간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14| 종교 윤리 : 신과 도덕성의 관계

15| 계속되는 물음 : 신과 인간의 모험

 

 


1| 신에 대한 사색 : 절대자를 찾아서

(20) 종교적 믿음들

삶의 곤경(고통)에 대한 믿음

삶의 곤경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믿음

초월자에 대한 믿음

초월자에로의 접근 가능성과 그 방법에 대한 믿음

구원(해탈)을 위해 반드시 해야할 것에 대한 믿음

 

<이 책에서는 불교를 무던히 유신론의 범주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특히 이것이 초기 불교(아함부 경전을 중심으로 한)에 대해 지칭될 경우 그것은 거의 무지에 가까운 오류라고 할 수 있다. - 초기불교의 무신론적, 유물론적 경향: 마쓰다마 후미오(아함부 경전의 인간적 특성, 오직 인간적 종교로서의 불교), 여익구 등의 민중불교, 동남아시아 사회주의 불교들>

 

(28)Bertrand Russell의 무신론: “사람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원인들의 산물이라든지, 사람의 출생, 성장, 그가 가지고 있는 희망과 두려움, 그의 사랑과 믿음은 단지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든지 인류의 업적을 자랑하는 전당도 이 우주가 파멸하면 어쩔 수 없이 분토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말들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더라도 너무나 확실해서 어느 철학도 그것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영혼의 거처는 차후에 이러한 진리들을 발판으로 할 때에만, 돌이킬 수 없는 절망에 기초할 때에만 안전하게 세워질 수 있다.”(Why I am Not a Christian and Other Essays on Religion and Related Subjects, ed. Paul Edwards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57), p. 107)

 

2| 종교적 경험 : 신과의 만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2)종교적 경험: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이사야 6:1-3, 5)

 

(34-5)종교적 경험과 종교적 통찰은 다르다. 종교적 경험이 종교적 통찰의 원천이 될 수는 있다.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에서 부딪치는 사건에서 신을 경험하거나 경험했다고 믿지 않더라도,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 상태나 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물론 종교적 경험이 종교적 통찰의 원천이 될 수는 있다. 이사야와 아우구스티누스는 둘 다 신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 신의 본성과 자신의 죄성을 알게 되었노라고 고백했다. 요컨대 우리가 신을 체험하지 않거나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서도 종교적 통찰을 가질 수 있는 반면에, 종교적 경험을 하기 위해{35}서는 신이나 초월적 실재자가 그 경험의 대상이 되거나 대상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문제는 그것을 종교적 통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보편적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통찰일 수도 있고, ‘인식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감각의 혼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유신론적 배경을 가지지 않은 유교나 도교, 불교에 있어서 이러한 것은 다른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이를테면, 格物致知坐忘見獨 또는 일 수 있다>

 

(35-40)Richard Swinburne종교적 경험 유형 구분(The Existence of God(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9), pp. 249-52): 상호배타적인 특성을 지닌 구분.

1. 흔한 공적인 감각 대상을 통해서 전달된, 신이나 궁극적 실재자에 대한 경험.

ex) 성상(聖像), 일몰, 큰 바다

2. 흔치 않은 공적 감각 대상을 통해서 전달된 신이나 궁극적 실재자에 대한 경험.

ex) 성모마리아의 현신, 불타는 떨기나무 등

3. 정상적인 감각 언어로 서술될 수 있는 사적인 감각을 통해 전달된 신이나 궁극적 실재자에 대한 경험.

ex) 꿈과 환상을 통해 드러난 신, 베드로의 환상(사도행전 10:10-16), 방언

4. 정상적인 감각 언어로 서술될 수 없는 사적 감각을 통해서 전달된 신이나 궁극적 실재자에 대한 경험.

ex) 성 테레사의 경험

5. 어떠한 감각에 의해서도 전달되지 않는 신이나 궁극적 실재자에 대한 경험.

ex) 신에 대한 직관적 인식-신비주의자들: 쿠자의 니콜라스, 흰두교와 불교의 명상체험

“(일반적으로 제4유형이나 5유형으로 분류되는) 신비적 경험은 종교적 경험의 한 부류를 이루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적 경험이 신비적인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39)

 

(40-41)종교학자들의 종교적 경험에 대한 논의들1-정서적 느낌으로서의 종교적 경험

*Friedrich Schleiermacher(1768-1834): “이 세계와는 다른 근원이나 힘에 대한 절대적이거나 온전한 의존의 정서”(The Christian Faith (Edinburgh: T. & T. Clark, 1928), p. 17) 뒤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줌.

 

*Rudolf Otto(1869-1937): “전율하는 신비의 느낌은 때때로 부드러운 밀물처럼 밀려와서 마음을 평온하게 하며 가장 깊은 찬양으로 가득 채운다. 그러면서 한층 단호하고 지속적인 영혼의 태도로 서서히 전환한다 때로는 그 느낌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 갑작스럽게 복받쳐 오르면서 이상스런 흥분과 열광으로 도취시키고 황홀경으로 빠져 들게 한다.”(The Idea of the Holy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58), p. 12)

오토의 신성의 경험삼 유형: 의존의 느낌(피조물이라는 느낌) 종교적 경외감(공포감) 초월자에 대한 갈망

 

*William James(1842-1910): “정서적인 느낌이 종교의 한층 깊은 근원이므로 직접적인 종교적 경험이 말하는 바가 옳다는 것을 순전히 이지적인 과정에 의해서 증명하려고 시도해봤자 완전히 헛수고일 뿐이다”(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New York: New American Library, 1958), p. 329)

 

Objection: 종교적 경험을 정서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비인지적인 느낌에서 인지적인 종교적 진리 진술들 - 이것들은 신학과 종교 철학에서 발견된다 - 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아 내기가 어렵다.

개념은 부분적으로 정서적이므로, 종교적 경험이 완전히 비인지적이라고 하는 것은 정서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 이에 대한 반론 - 이는 종교적 경험의 인지적 측면만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

 

(43-48)종교학자들의 종교적 경험에 대한 논의들2 - 지각 경험으로서의 종교적 경험

*William Alston(1921- ): 신에 대한 경험이 인간의 지각 경험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신에 대한 경험이 감각적인 것과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각의 내용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Objection: 신에 대한 경험에는 현상적 개념이 부재한다. 그렇다면 이 경험이 과연 지각 경험일 수 있는가?

지각 경험은 일관성이 있어서 검증이 가능하지만 종교적 경험은 매우 다양하다. 기독교적 경험과 불교적 경험은 현격하며 같은 경험이라고 볼 수 없다.

 

(48-51)종교학자들의 종교적 경험에 대한 논의들3 - 종교적 믿음에 근거한 해석으로서의 종교적 경험

*Wayne Proudfoot(1939- ): 종교적 경험은 지각경험일 필요가 없다. 지각 경험은 지각주체와 함께 지각 대상의 존재를 가정해야 한다. 이렇게 될 경우 종교적 경험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종교적 경험을 정당화하는 난점이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프라우드풋은 하나의 경험이 종교적 경험이 되는 이유란, 그것이 종교적인 내용을 가져서가 아니라, 즉 지각 경험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이 자신의 경험에 대해 적용시키는 믿음의 구조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때 중요한 것은 개념과 믿음이다.

경험 주체가 자신의 경험을 확인할 때 준거하는 개념과 믿음들이 바로 그 경험의 종교성 여부를 결정지으므로, 그 주체가 그런 특정 개념과 믿음들을 사용하는 이유를 우리가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 주체가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유독 특정 부류의 방식을 대면하게 된 이유와 그가 사용한 방식을 채택한 이유를 우리는 설명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역사적이거나 문화적인 설명이다”(Religious Experience, p. 223).

 

(53-54)종교적 경험과 종교적 믿음1 - 종교적 경험은 종교적 믿음을 정당화하는가?

1. 프라우드풋의 관점: 종교적 경험이 종교적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 체계가 그 경험을 종교적으로 만든다. 즉 초자연적인 존재는 경험에서 정당하게 추론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의 전제조건이 된다.

2. 알스턴의 관점에의 접근: 종교적 경험이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설득력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많아질수록 그러한 설명방식이 옳다고 믿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적 경험은 믿을만한 지각 경험으로 간주될 수 있다.

 

(54-58)종교적 경험과 종교적 믿음2 - 경신(輕信)의 원리(Principle of Credulity)

*Richard Swinburne의 경신의 원리: “어떤 사람이 모종의 대상에 대해서 그것이 어떠하다고 여길 때에는, 그 주장을 약화시키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The Existence of God, p. 254).

(55)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경험에 대한 믿음이 다른 정당화된 믿음(예를 들어, 신의 비존재에 관한 믿음)들과 상충한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지각 기관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주어지지 않는 한, 신에 관한 믿음을 가질 자격이 있다.

 

Objection: Michael Martin -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Atheism: A Philosophical Justification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1990), p. 166). 신의 존재에 대한 지각 경험과 마찬가지로 신의 부재에 대한 지각 경험도 있다는 것. 소극적 경신의 원리.

C. B. Martin - “종교인이 나는 193956일 오후 637분에 신을 직접 경험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다른 [지각 경험] 문장들이 경험적인 것과 같은 식으로 경험적이지는 않다”(Religious Belief (Ithaca: Cornell University, 1959), p. 67) 즉 종교적 경험은 검사될 수 없으므로, 그것에 근거한 지식은 설득력이 없다.

: (56)따라서 종교인들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종교적 경험에 근거한 주장들이 의심불가능하되 (신과 같은) 대상이 아니라 현상에 관한 주장에 불과하든지, 아니면 신에 관한 주장이되 검증불가능하든지 둘 중 하나인데, 어느 경우더라도 종교적 경험을 가졌다고 해서 신의 존재와 성품에 관해서 안다고 결론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Objection:*William Wainwright(1935- ) - (56-7)신은 우리가 정상적으로 지각하는 감각 대상들과 다르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신을 지각하거나 신에 대한 경험이 검증가능한 예측을 제공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다른 검사 방법들이 있다. 비판적 합리주의자는 하나의 논변이 정당화의 증거를 제공하려면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또한 증거는 다른 방면에서 제출될 수도 있다. 즉 종교적 경험이 신앙인들을 위해서 덕스러운 삶을 산출하는지, 신앙인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미치는 영향, 신앙인의 말이 갖는 심오함, 정통적인 종교 교리의 정합성, 다른 사람들의 경험들과의 정합성, 권위의 표방등이 그것이다(Mysticism, pp. 86-7).

*William Alston - 우리의 지각 경험은 첫 번째의 단순한 지각으로 확인되지 않고 두 번째 감각 경험의 보증이 필요하다. 이러한 보증의 연쇄는 필연적으로 무한퇴행에 빠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검사대상이 되는 믿음의 원천인 감각 경험 위에 구축된 우리의 일반적인 배경적 믿음 체계를 타진함으로써 우리의 경험들을 확인한다(Perceiving God, p. 211, Mysticism, pp. 104-5 참조) (58)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의 종교적 경험을 확일할 때에는 바로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의 종교적 경험들로 구성된 배경 체계에 의거한다. 감각 기관에 의한 지각에 대해서는 이러한 관련 경험의 배경을 허용하면서 종교적 경험에 대해서는 허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중적인 잣대를 적용하는 셈이 된다.

 

(59-60){종교적 경험에 대한}상충하는 주장에 근거한 반론이 효력을 가지려면 조심스럽게 표현되어야 한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경험에 근거한 종교적인 주장들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첫째로, 사람들이 상이한 경험들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일상적인 지각 경험은 매우 다양하거니와 사람들은 상이한 경험을 가지거나 동일한 대상을 상이한 각도에서 경험하기 마련이다. 둘째로, 경험된 대상이 상이하게 묘사된다고 해서 그로 인해 정당화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60]즉 그 반론이 성립하려면 한 사람이 경험한 궁극적 실재가 다른 사람이 경험한 궁극적 실재와 단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서 그쳐서는 안되고 그 실재들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61)종교적 경험의 공통성: Walter T. Stace, Mysticism and Philosophy (New York: Macmillan, 1960), pp, 131-2)

1. 단일한 의식; 일자(一者), (); 순수의식

2. 비공간적, 비시간적

3. 객관적이라는 느낌이나 실재적이라는 느낌

4. 행복, 평화 등

5. 신성한 존재에 대한 느낌

6. 역설성

7. 신비주의자들이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 주장함

 

Objection: Steven T. Katz - 개념과 믿음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경험이란 없다

이 모든 유태의 사회, 문화적 믿음과 관행들은 분명히 유태 신비주의자가 세계와 그 세계를 창조한 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이 신에 접근하는 방식과 우리가 마침내 이 신에 다가섰을 때 예상되는 바에도 영향을 비친다. 즉 어릴 때부터 심상과 개념과 상징과 이데올로기적인 가치와 종교 의식 상의 행동이 그 유태 신비주의자의 전 생에에 배어 있는데 이것들이 그의 경험에 아무 작용도 가하지 않는다고 믿어야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심상과 믿음과 상징과 의식들은 그가 갖기를 원하고 이어서 갖게 되는 경험이 어떠할지를 미리 정의한다”("Language, Epistemology, and Mysticism," in Steven T, Katz, ed., Mysticism and Philosophical Analysi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8), p. 33)

 

 

3| 신앙과 이성 : 서로 어떤 관계인가?

(72-9)강한 합리주의(strong rationalism): 종교적인 믿음 체계가 올바르고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 믿음 체계가 옳다는 것이 입증될 수 있어야만 한다.

Richard Swinburne

 

Objection: 신앙이 합리적인 것을 넘어선다는 관점에서, 이러한 강한 합리주의는 신앙에 대한 올바른 접근법이 될 수 없다.

강한 합리주의에 의한 논변이 역사적으로 이성적인 사람들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사실.

이성의 중립성에 대한 강한 합리주의의 주장은 납득되기 어렵다. 즉 우리의 믿음 체계들에서 기존의 확신과 편견들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목표가 달성될 수 없다면, 강한 합리주의의 접근법은 성립하기 어렵다.

증거주의의 반론:

*William K. Clifford - “불충분한 증거에 근거해서 어떤 것을 믿는다는 것은 어느 경우이건 간에, 그리고 누구이건 간에 언제나 잘못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릴 때 받은 가르침으로 인해서, 또는 자란 후에 설득되어서 어떤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후에 그 믿음에 대하여 마음 속에서 생기는 의문들을 계속 억누르고 물리친다면 그리고 그 믿음을 위태롭게 하는 물음들을 불경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인류에 대한 죄악이나 다름없다 어떤 교리의 증거를 탐구하는 것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최종적으로 결말이 나지도 않는다. 의심을 억누르는 것은 결코 합법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기존의 탐구에 의해서 그 의심에 대한 답변이 정직하게 주어지거나, 아니면 그 의심은 그것에 대한 탐구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The Ethics of Belief," The Rationality of Belief in God, ed., George I. Mavrodes, (Englewood Cliffs: Prentice-Gall, 1970), pp. 159-60). 이성적인 사람은 종교적인 믿음을 거부한다는 생각.

 

(79-86)신앙주의(fideism): 종교적인 믿음 체계들은 합리적인 평가를 받지 않는다. 신실한 종교인에게는 가장 근본적인 가정들이 그 종교적 믿음 체계 자체 내에서 발견된다. Paul J. Tillich(1886-1965)궁극적 관심’,

*Kierkegaard - “모험이 없이는 신앙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믿어야만 한다”(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rans. David F. Swenson and Walter Lowrie (Princeton: Princeton Universtity Press, 1941), pp. 178-79).

당신은 자신을 내맡기고 신앙의 비약을 감행해야 한다. 즉 당신의 믿음이 참임을 보여주는 이유나 증거를 갖지 않고서(또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서) 믿어야 하는 것이다.”

Karl Barth(1886-1968)Rudolph Bultmann(1884-1976)신정통주의신학에 영향.

 

Objection:

(85-6)실제로 믿음 체계들을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을 피하기는 매우 어렵다. 종교인들과 대화해 보면, 자기네가 이용하는 논변들이 타당할 경우에는 그것들을 꽤 즐겨 사용하다가, 논증을 하는 것이 자기네에게 불리해지면 그 때부터 순수한 신앙을 들고 나오기 시작한다. 세련된 신앙주의자들조차도 이러한 점에서 일관성을 결여한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이 타당함을 증명하려도 하지는 않으면서도 다른 경합하는 믿음 체계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거나, 부적절하거나, 또는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면 이를 지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믿음 체계 안에 들어 있는 그러한 결함들로 인해 그 체계에 대해서 의심을 품게 된다면, 우리 자신의 믿음 체계에서 유사한 결함이 지적될 경우 그것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우리는 공정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한 도전들을 단지 무시해 버릴 때에는,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가지고 있는 믿음들을 막무가내로 고수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확신에 대해서 비판이 제기되면, 이 비판에 응수할 것이 요청된다. 즉 우리의 신앙에 대한 반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든지, 심각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보여 주든지, 또는 신앙의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우리의 믿음들 주 사소한 부분들{86}을 고침으로써 그 반론이 극복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할 경우 종교적인 믿음 체계들을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에 관여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신앙주의자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86-93)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 종교적인 믿음 체계들에 대한 결정적인 증명이 불가능하더라도 그러한 믿음 체계들이 합리적으로 비판되고 평가될 수 있으며, 또 그러해야만 한다.

종교적 믿음들을 참이라고 단번에 결정하는 것에 반대하고 그 믿음들을 비판적 평가에 맡기는 이성의 기능을 강조한다.

비판적 합리주의는 이성에 대한 관점 자체에 대해 비판적이다. 즉 강한 합리주의의 지나친 낙관주의를 경계한다. 이성의 제한된 능력을 인정한다.

비판적 증거주의자들(critical evidentialists)비판적 반증거주의자들(critical anti-evidentialists)

 

Objection: (91)비판적 합리주의자는 신앙주의자나 강한 합리주의에 비해 더 공격에 노출되는 입장에 처한다. ‘신앙의 비약을 감행함으로써 합리적인 정당화의 문제들을 무시할 수 있는 신앙주의자와는 달리 비판적 합리주의자는 종교적 믿음들을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강한 합리주의자와는 달리 비판적 합리주의자는 적절히 절차를 밟아서 어떤 입장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신앙주의자나 강한 합리주의자와는 달리 비판적 합리주의자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들의 진리성과 정당성에 관한 논의가 궁극적인 결론에 도달했노라고 최종적으로 결정하지는 못한다.

 

4| 신의 속성 : 신은 어떠한 모습인가?

(99-103)숭배받기에 합당하고 완전함

*Anselmus(1033-1109) - “주님은 그 이상 더 숭고한 존재자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자라고 우리는 믿습니다완전한 존재자의 신학

 

Objection: (101)비록 완전한 존재자로서의 신 개념이 강한 직관적인 호소력을 갖더라도, 신의 속성들에 대한 개념 둥 어느 것이 신을 다른 것보다 더 완전한존재자로서 묘사하는 효과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심지어 같은 종교 전통에 속한 신학자들) 사이에서 언제나 의견이 일치할 것 같지는 않다.

 

(103-6)필연적이고 자존적임 - (104-5)만일 신 외에 필연적이고 자존적인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일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을뿐더러 그런 종류의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좀 더 강한 의미: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존{105}재자는 그것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존재가 될 테고 그것의 비존재는 모순을 범하면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존재자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신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라면, 그것은 바로 앞에서 설명된 의미에서의 필연적이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신은 자존적이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필연적이되,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는 않을 수 있는 것이다.

(106)만일 신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라면 이것은 신을 다른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과 구별 짓는 탁월한 속성들 중의 하나이며 신의 완전성으로 간주될 것이다. 반면에 신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 않다면, 신의 존재가 반드시 필연적이어야만 한다는 말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필연적 존재는 완전성으로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내고 신에게 귀속시키는 논리적으로 부정합한 많은 속성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106-10)인격적이고 자유로운 창조자 - 유신론의 관점에서 인격성은 분명 신의 완전성을 위해 필요하다. 사랑, 지성, 창조성, 도덕적 신과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좋은 속성들 중 많은 것들이 사람들에게만 속하는 속성이며, 만일 신이 인격체가 아니라면, 그는 이처럼 탁월한 속성들을 지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유신론에서 신 이외의 다른 것들이 존재할 경우 신은 그것들의 창조자여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자라는 개념에 본질적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 신은 유한한 사물들의 주관자이기도 하다. 이것은 피조물들이 매순간마다 그들의 존재를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신이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은 신이 그 자신 외의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강요되거나 규제되거나 조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에, ‘존재할 권리를 가진 피조물이라고는 전혀 없거니와. 필연적이고 불가피해서 신이 어쩔 수 없이 창조함으로써 그가 더 숭고해지고 선하게 되는 법은 없다. 따라서 창조의 결정 자체는 신의 편에서 이루어진 자유롭고 관대한 선택이었다.

 

*Alfred North Whitehead(1861-1947): “신은 숭고한 동료요, 고통을 함께 나누고 이해해 주는 친구다”(Process and Reality)

신이 세계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이고, 세계가 신을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이며, 세계가 신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이다”(Ibid.)

전통적인 유신론과 같이 신의 인격성을 인정하지만, 신과 인간, 신과 우주의 관계를 다르게 본다.

 

(110-6)전지전능하고 완전하게 선함 - 전능성(Omnipotence): 신은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으면서 신의 본성과 일치하는 모든 행위를 수행할 수 있다.

*돌의 역설 - 신은 자기가 들어 올릴 수 없는 돌을 창조할 수 있는가? 창조할 수 없다고 하거나 창조할 수 있다고 하거나 둘 모두 전능성에 위배된다.

신은 정의대로 하자면 어떠한 크기의 돌이라도 들어 올릴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신에게 부여된 임무는 어떠한 크기의 돌이라도 들어 올릴 수 있는 존재자가 들어 올리지 못할 만큼 큰 돌을 창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둥근 사각형을 만드는 일처럼 명백히 자기 모순적이다. 전능성은 자기 모순적인 일을 하는 능력을 포함하지 않으므로, 신이 들어 올릴 수 없는 돌을 신이 창조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의 전능성에 대한 주장이 궁지에 몰리지는 않는다.

전지성(Omniscience): 여하한 시점에서도 신은 바로 그 시점에서 참인 모든 명제들을 안다.

임의의 시점에서 신은 바로 그 당시 참인 모든 명제들을 알며, 그 시점에서 신이 갖는 그 명제들에 대한 지식은 논리적으로 가능하고, 신은 결코 거짓된 것을 믿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선함

 

Objection

*Spinoza: “지성도 의지도 신의 본성과는 관계 없다신과 인간의 속성 간의 대응 관계는 큰개자리라는 별자리와 멍멍 짖는 개 사이의 대응과 같을 뿐이다. 즉 선과 악은 신과 관계 없다.

*과정신론: *Charles Hartsorne(1897-2000) - 신의 전능성이 오류인 이유는 신이 창조시에 피조물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제력을 발휘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신의 능력은 강제적이지 않으며, 언제나 설득적이다. 신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다. 신은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신의 의도를 따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그리고 최상의 가능성을 그들에게 펼쳐 보임으로써 유혹한다.’(Whitehead) 강제력보다 설득력이 도덕적으로 선한 신에게 더 알맞다.

 

(116-9)영원한 신 - 무시간적인가, 영존하는가?

무시간인(timeless) : *Augustine - “주님은 시간에 따라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선행하는 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께서는 모든 시간들에 선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과거에도 영원한 숭고성에 의해서 모든 것에 선행하셨고 모든 미래도 초월하십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것들이 도달하면 그것들은 과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연수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연수는 한 날이고 당신의 날은 하루가 아니라, 오늘입니다. 오늘 당신과의 만남은 내일로 바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제를 대신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영원입니다”(The Confessions)

이 입장에 따르면 신은 유한한 인간들이 하는 것처럼 세계를 한 순간, 한 순간씩 경험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렇기는 커녕 신은 세계의 역사를 단번에 경험한다고 본다. : 신플라톤주의

 

영존하는(everlasting) : 시간과 역사 속에서 활동하는 존재로 묘사하는 유신론적 종교들의 경전과 일치한다. Nicholas Wolterstorff, "God Everlasting" in God and the Good, ed. C. Orlebeke and L. Smedes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1975)

 

 

5| 유신론의 논변들 - 신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가 있는가?

(124-5)유신론자들이 신의 존재(또는 무신론자들이 신의 비존재)를 증명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신론자들에게 신의 존재를 주장하기 위한 근거나 증거를 제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주장은 명백한 진리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125-30)존재론적 논변

*Anselmus(1033-1109)

1. 사람들은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에 대한 관념을 갖는다.

2. 가장 위대한 존재자가 마음 속의 관념으로서만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3. 실재하는 존재자는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보다 더 위대하다.

4.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보다 더 위대한 존재자, 즉 실재하는 존재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5. 그런데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보다 더 위대한 존재자는 없다.

6.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는 실제로 존재한다.

 

Objection

Gaunilo - a. 첫 번째 전제가 틀렸다. 우리는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를 생각하거나 실제로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존재자는 다른 어떠한 실재와도 다르기 때문이다.

안셀무스는 신의 본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는 적어도 신이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여야만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는 것이다.

b. 다른 어느 섬보다도 더 훌륭한 섬, 즉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풍요롭고 즐거움을 주는 섬을 내가 생각한다고 가정해 보자. 실재하는 것은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보다 더 훌륭하므로, 이 섬은 존재한다. 이런 식의 논변은 온갖 허구적인 것들의 존재를 부당하게 증명할 수 있게 한다.

Anselmus: 자신 논변은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다고 한다. - 이러한 반론은 적절치 않다.

전제 3에 대한 반론 - Norman Malcolm(1911-1990): “존재가 완전한 것이라는 교설은 매우 미심쩍다 어떤 왕이 차기 재상은 지식과 재치와 결단력을 지니기를 원할 수 있다. 하지만 왕이 원하는 바는 존재하는 재상을 갖는 것이라고 부언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예를 들어 AB라는 두 충복이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재상에 대해서 각각 서술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에 그들이 써낸 목록은 모든 면에서 같은데 다만 A의 목록에는 존재가 들어 있고 B의 목록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동일한 사람이 이 두 목록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 좀 더 적절히 말하자면, A의 목록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B의 목록을 만족시킬 것이고, 그 역 또한 같다”(Anselm's Ontological Argument," in The Many Faced Argument, ed. Hick and Mcgill, pp. 305-5).

 

(130-2)현대판 존재론적 논변

1. Charles Hartshorne(1897-2000) - 비록 존재 자체는 속성이 아니더라도 필연적 존재는 속성이므로, 임의의 두 대상들 중 어느 하나는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면(즉 우연적으로 존재한다면) 전자가 후자보다 더 위대하다. 만일 신의 존재가 우연적이라면 그가 존재하게 된 것은 우연이거나 어떤 원인으로 인한 것이어서 신은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가능 존재자로서의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신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이거나, 아니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신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으므로, 그것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다. 그런데 이 논변은 신이 필연적인 존재임은 입증하지만 신의 현존성 또는 구체성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존재론적 논변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지만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가 없다.

안셀무스의 프로슬로기온에 있는 논변을 이용함.

 

*John Hick(1922- ) - 안셀무스에게 필연성은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논리적 필연성이 아니라 사실적인 필연성을 의미한다. 그러한 필연적 존재는 그것의 존재를 위해서 다른 어느 존재자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는 자기 자신에게서 확보하기에, 그것은 생겨나지도 않거니와 사라지지도 않는다("A Critique of the 'Second Argument,'" in The Many Faced Argument, ed., Hick and McGill, pp. 345-6) .

 

(133)우주론적 논변 - 인과 조건들의 무한한 연쇄로는 경험적 사실을 적합하게 설명할 수 없으므로 어떤 필연적인 존재자나 제일 원인, 또는 인격적인 작인이 존재해야 한다.

제일 원인에 의한 논변 - Thomas Aquinas(1224-1274), Frederic C. Copleston(1907-1994), Richard Taylor(1919- )

 

칼람(kalām) 논변 - al-Kindi, al-Ghazali(1058-1111)William Craig(1945- )

 

(133-9)칼람 우주론적 논변

1. 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것은 그것의 존재 원인을 갖는다.

2. 우주는 존재하기 시작했다.

3. 그러므로 우주는 그것의 존재 원인을 갖는다.

(William Craig, The Kalām Cosmological Argumanet (New York: Barnes & Noble, 1979), p. 63).

 

전제 1: Objection - 양자역학에 의한 반론 Craig - 현대 물리학에서의 진공이란 무가 아니라 최소 에너지 상태이므로 전자들은 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전제 2: a. 이를 지지 하기 위한 크레이그의 선험적 논변

4. 현실태적 무한(actual infinite)은 존재할 수 없다.

구성요소들의 수가 증감하지 않는 무시간적 전체(timeless totality)인 현실태적 무한은 부당한 결과에 이른다. ex) 무한한 수의 책들을 소장한 도서관 - 무한 수의 붉은 책과 무한 수의 검은 책.

 

5. 사건들의 시간적 연속으로서 시초가 없는 연속은 현실태적 무한이다.

출발점이 있고 사건들이 이 출발점에 보태지거나 감해진다면, 우리는 새로운 원소들을 보탬으로써 시간을 통해 증가하는 가능태적 무한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시초가 없는 과거는 그런 출발점을 가지지 않으므로 그 무한은 가능태적 무한이 아니라 현실태적 무한이다.

 

6. 그러므로 사건들의 시간적 연속으로서 시초가 없는 연속은 존재할 수 없다.

 

b. 후험적 논변 - 천체물리학에 기댄 논변: 빅뱅에 따른 두 가지 우주 모델(진동 우주 모델무한팽창 모델)

Objection: 우주는 무로부터 출발한다. 즉 원인 없이 생겨났다.

 

(139-41)대폭발에 근거한 무신론적 논변

*Quentin Smith(1952- )

1. 신이 존재하고 우주의 최초 상태가 있다면, 신은 그 최초 상태를 창조했다.

2. 신은 전지전능하고 완벽하게 자비롭다.

3. 생명이 있는 우주는 그렇지 않은 우주보다 더 낫다.

4. 그러므로 신이 그 최초 상태를 창조했다면, 그것은 생명을 담고 있거나 궁극적으로 생명체가 있는 우주로 귀착되어야 한다.(13에서)

5. 우주의 최초 상태가 있는데 그것은 대폭발이라는 유일한 사건이다.

6. 우주의 최초 상태는 무한 온도, 무한 만곡, 무한 밀도처럼 생존에 불리한 조건들을 포함한다.

7. 대폭발 사건은 본래 예측할 수 없고 무법칙적이어서 생명체가 있는 우주로 귀착되라라는 보장이 없다.

8. 그러므로 우주의 최초 상태가 생명을 낳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9. 그러므로 신은 바로 그 최초 상태를 창조할 수 없었을 것이다.(48)

10.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19)

(Craig and Smith, Theism, pp. 200-1, 219 참조)

 

Objection(전제 4에 대한 반론): 신이 생명체를 가진 우주를 반드시 창조해야 하는 이유는 전제 3에서 확인되지만, 이때 신이 최상의 가능 세계를 창조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지 의문이다. 즉 최상의 가능세계라는 개념은 정합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신에게 있다 하더라도 신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Bruce Reichenbach, Evil and Good God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82), chap. 6, Robert M. Adams, The Virtue of Faith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chap. 4 참조).

신은 후속적인 개입을 통해 생명체가 있는 우주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처음부터 생명체를 나타나게 해야 할 논리적인 필연성은 없다.

Smith: “{그것은} 무능한 계획의 표시가 될 것이다 차라리 그 자체의 법칙적인 자연에 의해서, 생명을 산출하는 우주로 귀착되는 어떤 상태를 창조하는 것이 합리적이다”(Craig and Smith, Theism, pp. 202-3)

Thomas Von Morris: “효율성은 언제나 목적과 의도에 상대적이다. 어떤 사람이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는지를 알기 전에, 우리는 그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떠한 목표와 가치가 그의 활동을 지배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세계를 맡고 있는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엄청나게 비효율적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세계와 같은 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할 때에 작용하는 신의 모든 관련 목표와 가치들에 관해서 우리가 알아야만 한다”(The Logic of God Incarnate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86), pp. 77-8). - , 효율성을 신의 속성으로 생각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것.

 

(141-6)탈시간적(atemporal) 우주론적 논변 - 이 논변은 제일 원인이 아니라 어떤 유지하는 원인을 입증하고자 한다.

1. 우연적인 존재자가 존재한다.

2. 이 우연적인 존재자는 원인을 갖거나 그것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갖는다.

3. 그것의 존재원인이나 설명은 그 우연적인 존재자 외의 어떤 것이다.

4. 이 우연적인 것의 존재를 야기하거나 설명해 주는 것은 다른 우연적인 존재자들이거나, 아니면 비우연적인(필연적인) 존재자를 포함해야 한다.

5. 우연적인 존재자들만으로는 우연적인 것의 존재를 야기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6. 그러므로 이 우연적인 존재자의 존재를 야기하거나 설명해 주는 것은 비우연적인(필연적인) 존재자를 포함해야 한다.

7. 그러므로 필연적인 존재자가 존재한다.

 

Objection 1(전제 2): 인과율이 우리가 세계를 아는 방식에 대한 서술들에 적용된다고 해서,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그 원리가 서술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고의 원리는 실재의 원리들을 반영할 필요가 없다.

↔ ① 실재에 대한 인과율의 적용은 역사적으로 성공해 왔다. 만일 이 원리가 실재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무수한 모순에 부딪쳤을 것이다.

사고와 실재 간의 이러한 회의주의는 세계의 실상에 대한 근본적 회의주의로 귀착되고 만다.

Objection 2(결론 7): *Immanuel Kant(1724-1804) - 여기서 말하는 필연적 존재란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자의 존재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자는 바로 존재론적 논변의 그 존재자이다. 존재론적 논변 자체가 의심스러우므로, 이 논변도 마찬가지로 의심스럽다.

칸트가 말하는 필연적 존재자는 논리적 존재자이며, 여기서 논증하고자 하는 필연적 존재자는 존재론적, 사실적 필연성을 가지는 존재자다. 즉 필연적 존재자란 자기 충족적이고 자립적(self-sustaining)이다. 만일 그것이 존재한다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목적론적 논변: 목적론적 논변의 고전적 판본은 아퀴나스의 것이 있다. 우주에서 발견되는 목적(telos) 구조를 향한 수단이나 질서를 강조한다. 현대적 판본은 유추론, 인류발생론, 지적 설계론이 있다.

 

(146-9)유비에 의한 목적론적 논변: *William Paley(1743-1805): “시계에서 나타나는 모든 고안과 설계는 자연의 세계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자연에서는 계산을 초월할 정도로 더 위대하고 더 풍부하다는 점이 시계와 다르다”(Natural Theology (Charlottesville: Ibis Pub., 1986), chaps. 1. 3).

 

Objection: *David Hume(1711-1776) - 유비되는 두 대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기계와는 달리 이 세계는 유기적 생물들을 포함한다.

기계 제조의 원리에 비해 자연의 원리는 무수히 다양하다. 제한된 영역을 지배하는 원리를 전 우주로 투사할 수 없다.

우주의 질서를 설명하는 정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 정신에 대해서도 인과율이 적용될 수 있다. 즉 이 정신의 원인도 있다. 이런 식으로 무한퇴행에 빠진다. 이것을 피하려면 인과율을 부정하거나, 인과율을 인정하되 각 영역 - 정신적인 영역이든 물리적인 영역이든 간에 - 은 스스로 조직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허용하든지 해야 한다.

*Charles Darwin(1809-1882): 유전적인 변이와 자연선택은 엄밀하게 자연적인 과정이며, 그것들이 작용하기 위해 신의 마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149-52)인류발생론에 근거한 목적론적 논변(Anthropic Argument)

*John Leslie: “대폭발이 다른 비율로 전개되었다면, 생물은 진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에 수백 만분의 일의 축소가 발생했더라면, 기온이 1만도가 떨어지기 전에 재붕괴가 초래되었을 것이다. 초기에 백만분의 일의 증가가 있었더라면, 은하계와 별들과 행성들이 증가하지 못했을 것이다”(“The Anthropic Principle, World Ensemble, Design,"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19 (1982): 141).

*Stephen W. Hawking: “전자의 전하가 약간만 달랐어도, 별들은 수소와 헬륨을 연소시키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폭발하지 않아서화학 원소들이 지금보다 더 무거워졌을 것이다(A Brief History of Time (New York: Bantam, 1988), p. 125). 호킹은 인류발생적 원리는 받아들이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다른 결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L. Stafford Betty with Bruce Cordell: “만일 원자핵들을 결합시키는 강한 상호 작용이 더 강해졌더라면, 헬륨 핵들이 우주를 지배했을 것이고, 수소는 전혀 남지 않을 것이다. 수소가 없으면 물도 없을 것이고따라서 생명체도 없을 것이다("God and Modern Science: New Life for the Theological Argument," International Philosophical Quarterly 27(1987): 415).

 

우리의 우주가 생성될 확률은 백억의 124승 분의 1이라고 한다. 여기서 또한 인류가 발생할 확률은 더 낮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물리적인 필수 사건들의 발달을 자연스럽게 서술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사건들이 어쨌든 발생했고, 그것도 생명체를 진화시키는 데에 필요한 패턴과 좁은 범위 안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의식적인 설계자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러므로 의식적인 생명체를 산출하는 우주의 존재는 창조자의 의도적인 활동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낫다.

 

Objection: *무한우주론(약한 인류발생론적 원리) - 우주는 무한수의 우주이다. 이 우주들은 서로 무관하면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각각의 무한한 우주 중에서 인류가 발생할 것은 거의 확실하다.

*Stephen Jay Gould(1941-2002) - 비록 임의의 주어진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할 선행 확률이 낮더라도 어떤 것이 발생해야만 하기 때문에 이 논변은 결함이 있다. 예를 들면 당신과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이 바로 지금 그 위치에 있게 될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생각해 보라. 비록 이미 발생한 사건은 놀랍더라도, 무언가가 발생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며, 그 사실에 대한 특별한 설명이 주어질 필요도 없다. 자연적인 설명만으로 충분하다.

*Swinburne - 무언가가 발생해야만 한다고 해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의 특이성을 설명할 필요성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ex) 광인의 카드 뽑기 기계의 예.

 

(153-8)지적 설계에 근거한 목적론적 논변(Intelligent Design Argument)

*Michael Behe(1952- ): ‘환원불가능하게 복잡한 체계’(예를 들면, 섬모)는 어떤 기능적인 부분이 결여될 경우 비기능적이 되어 버린다. 또한 따로따로 기능하는 부분들이 함께 작용해서 하나의 체계로 합쳐지는 과정조차 이러한 복잡한 체계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 과정은 이미 기능하는 복잡한 체계를 가지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계는 하나의 통합된 단위로 생겨나야 하고, 이것은 목적을 가지고 각 부분들을 배열한 지적행위자에 의해 구성된다. 진화론의 거부

*William A. Dembski(1960- ): ‘특정된 복잡성’(specified complexity) - 발생확률이 매우 낮아 우연으로 돌리기 어려운 복잡성. 10150분의 1 확률(입자가 경험하는 초당 변화수). ex) DNA 단백질 합성에 있어서의 정보전달의 원인

*Stephen C. Meyer: “적합한 결합과 광학적인 이성질체를 얻을 확률에서 인수분해하면, 다소 짧은 기능적인 단백질을 임의로 구성할 확률은 너무 작아서 사실상 0(1/10125도 안 된다)이 된다. 이것은 수십억 년의 나이를 가진 우리의 우주가 전제되더라도 매한가지다”("World Games," in Signs of Intelligence: Understanding Intelligent Design, ed. William A. Dembski and James M. Kushiner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2001), pp. 110-115). 그러므로 정보는 처음에 자연적인 원인들 밖에서 지적 행위자에 의해 주입되어야 한다.

 

Objection: a. 특정된 패턴은 그 사건의 발생 후나 환원불가능하게 복잡한 체계가 존재한 후에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살이 꽂힌 후에 과녁을 그리는 것과 같다. 그러한 구성은 사건과 독립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b. 지적 설계에 대한 경험적 시험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확증도 반증도 될 수 없다.

Dembski: 지적 설계는 정당하게 구성된 가설이다. 우리는 정당한 연산방식을 통해 한 이론의 수용 가능성 여부를 정할 수 있다.

*Kenneth R. Miller(1948- ): 지적 설계 논변은 기계론적 유비와 비슷한 문제점을 가진다. 첫째, 환원불가능하게 복잡한 체계들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둘째, 생체조직이나 세포의 구성 요소들이 자기네 기능을 바꾸거나, 아니면 유사하거나 아주 다른 기능을 가진 생체 조직에서 중요 부분들을 차용할 수 있다. 진화된 조직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목적에나 유용할 법한 생체 조직이 변형됨으로써 자주 발달이 이루어진다.

 

(158-61)도덕적 논변 - I. Kant, C. S. Lewis(1898-1963), Adams.

*C. S. Lewis: 도덕적 상대주의 비판 - 객관적인 도덕률이 없는 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도덕적인 행동이나 이념들을 비판할 수 있는 관점을 결여한다.

도덕적 상대주의가 옳다면 도덕적 진보는 있을 수 없게 된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다양한 문화 사이에서의 실질적인 합의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간과한다.

객관적인 도덕률이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정당화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무언가에 근거해야만 한다. 두 가지 가능한 근거가 있는데, 하나는 인간 경험의 사실적인 실재(factual reality), 물질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다. 그런데 객관적인 도덕률은 과학적인 사실적 실재, 물질에 근거할 수 없다. 자연법칙은 도덕법칙과 다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음에 근거해야 한다. 그런데 도덕률은 개인의 삶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성립해야 하므로 이 마음은 한 인간의 마음일 수 없다. 따라서 우주의 배후에는 어떤 힘이나 마음이 있고, 이것이 나로 하여금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촉구하고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할 때에는 책임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마음에 더 가까운 것이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것이란 물질 뿐인데 물질이 지침을 준다고 생각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Mere Christianity (New York: Macmillan, 1943), p. 34)

 

(161-5)누적사례 논변과 신

*Michael Martin(1932- ): 무신론 옹호를 위한 유신론 비판 - 유신론적 논변들 각각은 유신론적 믿음을 보증해 주지 않는다. 설령 보증해 준다 하더라도 기독교나 유대교, 또는 이슬람교적인 유신론의 신에 대한 믿음을 지지하지 않는다(Atheism: A Philosophical Justification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1990), pp. 97, 100, 152).

 

Objection: 누적사례 논변 - 유신론자는 하나의 논제를 단 하나의 논변에 근거해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각각의 논변을 독립적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논변들은 유신론을 옹호하기 위한 누적사례의 일부분이다. 이들은 유기적인 조력을 통해 신 존재에 대한 정당성을 옹호한다.

Martin: 첫 번째 반론 - 소극적 무신론: 무신론 또한 누적 사례가 존재한다. “소극적 무신론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논변을 펼칠 수 없더라도, 신에 대한 믿음은 이유에 근거해야 한다. 그런데 전지전능하고 완전하게 선한 존재를 믿어야 할 이유가 모두 부적합하다는 것을 올바르게 주장할 수 있다면, 좁은 의미에서의 소극적 무신론은 우리의 현재 지식과 관련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 만큼이나 미래에도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Atheism, p. 39)

적극적 무신론: 신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를 제공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했어야 하는 종류의 개체이다. 하지만 그런 증거는 없다. 특히 악의 존재는 무신론에 유리한 강한 논변을 제공한다.

두 번째 반론 - 유신론의 논변들이 가리키는 필연적이고 목적을 가진 존재가 종교의 신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즉 성경이나 코란에 나오는 신은 그러한 신이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철학자들의 신이 종교인들의 신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상호관계법(methode of correlation)을 통한 반론: 철학적인 필연적 존재자의 속성들을 특정 종교 전통의 신이 가지는 속성들과 짝짓는 방법

1단계 - 필연적 존재자의 특징을 결정한다.

2단계 - 특정 종교 전통 내에서의 궁극적 실재가 어떻게 묘사되는지 살핀다.

3단계 - 이 두 목록을 비교하고 일치와 불일치, 중복 등을 살핀다. 일치할 경우 그것들은 동일한 존재자를 묘사하는 것이고, 불일치할 경우에는 좀 더 많은 숙고를 요한다.

 

6| 논증 없이 신을 알기 - 유신론은 논거를 필요로 하는가?

*Simon Weil(1909-1943): “강렬한 신체적 고통을 느끼는 순간, 나는 거부할 수 없는 - 또 감히 무엇이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 사랑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 동안 신비주의자의 저술이라고는 전혀 읽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인간의 존재보다도 더 인격적이고 더 확실하고 더 실재적인 존재를 체험하였다. 하지만 그 존재는 감각기관이나 상상력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였다”(Waiting for God, tr. Emma Craufurd (New York: Harper, 1973), p. 24).

신의 실재성을 계시 받은사람이 신의 존재에 대해 갖는 확신은 철학적 논변에 의해 방해 받지 않는다는 것.

베이유의 체험은 순전히 주관적인 체험이므로 확증되지 않는다.

 

(171-2)증거주의(evidentialism):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다양한 논변들의 힘을 평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신론에 대한 반론뿐만 아니라 악에 근거한 논변의 힘을 평가하고 나서, 이것들을 서로 견주어 보면서 신에 대한 믿음이 온당한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Objection: 개혁주의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 - 종교적인 믿음을 지지해주는 증거가 없더라도 그 믿음들은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충실하게 정당화될 수 있다. ex) 개신교 개혁파, Calvin주의의 일부 사상. Alvin Plantinga(1932- ), Nicholas Wolterstorff(1932- ), William P. Alston(1921- )

신앙주의와는 다르다. 즉 이들은 합리적인 평가를 받아들인다.

 

(173-7)증거주의에 대한 비판

*정초론(foundationalism)자들의 믿음: 추론된 믿음(derived belief) - 다른 믿음들이 증거가 되어 지지해 주는 믿음.

기초적 믿음(basic belief): 다른 믿음의 지지를 받지 않고도 받아들여지는 믿음 우리의 믿음과 지식의 전체 구조를 최종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기반’ - 증거 없이 믿어도 합당한 믿음을 정확히 기초적인 믿음(properly basic belief)이라고 부른다.

개혁주의 인식론자들 자신이 특정한 종류의 정초론자들이다.

 

*강한 정초론에 근거한 증거주의: 우리가 임의의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자명하거나 교정 불가능하든지, 아니면 자명하거나 교정불가능한 믿음들에서 논리적으로 추론되든지 해야 한다.

 

Objection: 강한 정초론은 자기 파괴적이다. 자기지칭적으로 부정합하다.’ 강한 정초론의 그 진술문 자체가 스스로에게 충족적이지 않다. 만일 강한 정초론이 옳다면 어느 누구도 강한 정초론을 받아들일 때 합리적일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강한 정초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이 오류가 된다.

 

*비고전적인 정초론에 근거한 증거주의: Plantinga - 좀 더 넓은 범위의 믿음들이 정확히 기초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허용하는 비고전적인 정초론. 증거주의.

 

*정합론적인 증거주의: 기초적 믿음과 추론된 믿음의 구분을 거부하고, 우리의 모든 믿음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른 믿음들과 정합’(일관성 있고 잘 통합된 체계와 꼭 들어맞는)함으로써 정당화된다.

 

(177-87)정확히 기초적인 믿음에 대한 플란팅가의 입장

*개혁주의 인식론자들은 강한 정초론을 비판한다. 이들 자신이 특정한 정초론을 받아들인다.

*Alvin Plantinga: Roderick Chisholm(1916-1999)에 따르면 강한정초론이 하는 식으로 일반적인 요구 조건을 미리 설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일상인들이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을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지식은 그 자체로 기반적인 믿음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믿음도 그러한 기반이 되는 믿음이 될 수 있다. 어쨌든 유신론자들은 그렇게 한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뭐가 어떻단 말인가? “신이 존재한다라는 믿음이 정확히 기초적인 믿음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있는가? 이 믿음이 정확히 기초적이라면, 유신론자들이 신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증명이나 논변을 만들 필요가 없다.

 

Objection: 하나의 믿음이 정확히 기초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참되다는 보장이 없다. ex) 옆방에서 나는 피아노 소리의 예.

Gary Gutting(1942- ): “자신의 믿음에 대한 어떠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는 인식 주체가 자신이 그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정당하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종교적인 믿음에 관해서 많이 생각해 오면서도 신에 대한 믿음을 정확히 기초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정직하고 지성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철학자로서 우리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경우들만을 명백한 경우로 간주해야 한다. 어떤 주장에 관해서 의견 차이가 너무 크고 양측의 입장이 백중세일 때에는 그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이건 부인하는 사람이건 간에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상식이 아니겠는가?”"the Catholic and the Calvinist: A Dialogue on Faith and Reason," Faith and Philosophy 2 (1985): 241).

 

Plantinga: “정확한 기초성의 기준들은 적합한 사례들에 의해서 논증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 사례들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하리라고 미리 전제해야할 이유는 없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신에 대한 믿음이 전적으로 정당하고 합리적이라고 전제한다. 그가 이 믿음을 다른 명제들에 근거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믿음이 그에 대해서 기초적이되 정확히 기초적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러셀과 오헤어의 추종자들은 이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의 기준들이나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의 사례들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을 뿐 러셀이나 오헤어의 추종자들이 제시한 사례들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Reason and Belief in God," in Faith and Rationality, ed. Plantinga and Wolterstorff, p. 77)

- ‘보편적합리성에 대한 거부. 개혁주의 인식론자가 되려면 이 합리성을 희생해야 한다.

 

호박귀신 반론

Plantinga: 분명히 호박귀신에 대한 믿음은 개혁주의적 인식론자들이 제시한 기초적 믿음이 아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정확히 기초적인 믿음이라고 결론지어야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Philip Quinn(1940- ): 정확히 기초적인 믿음을 결정하기 위한 플란팅가의 절차에 따라 호박귀신을 믿는 사람 자신이 호박귀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정확히 기초적인 믿음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으로 합리적이고 올바르게 결론 내릴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얼마든지 많은 사람들이 벌일 수 있는 게임이라는 점이다. 모하메드의 추종자들, 부처으 추종자들, 그리고 심지어 문선명 목사의 추종자들고 이 게임에 끼어들 수 있다”(“In Search of the Foundation of Theism," Faith and Philosophy 2 (1995): 473).

 

Plantinga: “물론이다. 하지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 방법을 사용하는 서로 다른 철학자들이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적용되지 않는(인식 기준에 도달하기 위한) 실현 가능한 철학적인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알고 있는가? 십인십색의 결론은 철학에서 으레 있기 마련이다”(The Foundation of Theism: A Reply," Faith and Philosophy 2 (1985): 473).

 

Quinn: 여러 반론에 직면한 신앙인들은 신에 대한 믿음을 완벽하게 정당화하기 위해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 - 일종의 자연신학 - 가 필요하다. 그래서 신에 대한 믿음이 정확히 기초적일 수 있는 반면에 대부분의 현대 종교인들에게 그것은 정확히 기초적이지 않다.

 

Plantinga: 자신이 신의 현존과 활동을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비롯해서 신에 관한 여타의 믿음들을 기초적인 방식으로 정당화하고 합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다. Alston

 

 

(187-91)얼스턴과 신에 대한 지각

*William Alston: “신에 대한 경험적인 인지 - 나는 이것은 신에 대한 지각이라고 부른다 - 는 신에 관한 믿음들 중 특정한 종류의 믿음들을 인식적으로 정당화해 줄 수 있다. 나는 그런 믿음들을 ‘M-믿음들’(여기서 ‘M’은 현시를 뜻한다)이라고 부른다. 신이 그 믿음의 주체에 대해서 뭔가를 수행 - 강하게 함, 인도함, 메시지를 전함 등 - 한다는 것을 믿는다든지, 신은 지각 가능한 속성 - 선함, 능력, 인자함 등 - 을 갖는다고 믿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Precise of Perceiving God," Symposium on Alston's Perceiving God, 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54 (1994): 863).

믿음의 관행(doxastic practice): 사회적으로 형성된 믿음의 관행이 인정되듯이, 신에 대한 경험적 인지에 근거해서 신에 관한 믿음들을 형성하는 사회적으로 확립된 관행이 존재한다. 이러한 믿음의 관행은 그것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 입증될 때까지 또는 입증되지 않는 한, 신빙성을 갖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 믿음들이 거짓이라고 생각해야할 강력한 이유가 없는 한, 그것들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Objection: 종교적 경험은 감각 경험과는 달라서 지각적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적 경험이 유신론적 종교와 다른 형태로 다른 종교들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Alston: “박식하고 생각이 깊은 기독교인들은, 세계적인 종교들 간의 결정적인 차이점들을 판정하기 위한 공통의 근거를 찾고, 경합하는 종교들 중 어느 것이 옳은지를 순환 오류에 빠지지 않고서 보일 수 있는 길을 찾느라 실현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노력이 어떤 성공을 거둘지에 대해서 예측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의 배후에 있는 진리에 대한 더욱 철저한 통찰력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아마도 신의 시대에서나 가능할 것이다”(Perceiving God, p. 278).

 

(192-6)보장과 지식에 대한 플란팅가의 관점 - 플란팅가의 후기 관점은 보장의 문제로 집중된다. 이것은 유신론자(특히 기독교인)들이 신이 있다는 믿음(그리고 다른 중요한 종교적인 진리들에 대한 믿음)을 기초적인 방식으로 가질 때 진정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요소가 보장이다.

 

*보장(warrant): 우리의 믿음을 산출해 내는 인지 기능의 신빙성. “어떤 믿음이 S라는 사람에게 보장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목표로 삼는 설계에 따라 정확히 기능하는(어떠한 기능 장애도 겪지 않는) 인지 기관들에 의해서 S에게서 산출되어야 한다. 이때의 인지 상황은 S의 인지 능력에 부합해야 한다”(Warranted Christian Belief, p. 156).

 

Q. 신에 대한 믿음이 기초적인 방식으로 믿어질 때 그 믿음은 보장될 수 있는가?

A. Plantinga: 그렇다. 신에 대한 믿음을 산출하도록 명확히 설계된 인지 장치적 요소가 우리 각자에게 있다. 그것을 신성감(sensus divinitatis - Calvin)이라고 한다. 이 감각이 제 역할을 하고 또한 규칙적으로 믿음을 산출한다면 그 감각은 신빙성이 있다. 그 믿음이 충분히 확고부동하게 고수될 경우, 그 믿음의 주체는 신의 존재를 안다고 말해질 수 있다.

 

Objection: 플란팅가는 철학적인 토론에서 신의 존재를 당연시하고 있다.

Plantinga: 물론 신에 대한 믿음이 신에 대한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기독교인이나 여타의 유신론자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종류의 신이 존재한다면, 신에 대한 믿음은 십중팔구 보장되고 지식을 구성할 수 있다. 즉 신이 존재한다면, 신에 대한 믿음은 보장의 방식으로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신성감의 보장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신의 존재다.

P: 그렇다. 나는 신이 존재한다거나 기독교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 그리고 모든 합리적인 사람들을 설득할 만한 논변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는 확실히 주장할 수 있다.

신이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지도 못한 채 신에 대한 믿음이 불합리하다거나 보장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증거주의자들은 틀렸다. 우리는 하나의 종교적 믿음이 거짓이라는 것을 입증합으로써만 그 믿음이 불합리하고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우리는 신에 대한 믿음을 지지하기 위한 어떠한 논변도 갖지 않더라도 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정당화되고, 보장되며, 심지어 지식을 구성할 수도 있다.

 

 

7| 악의 문제 - 신의 존재에 대한 반론

*Eugene Borowitz: “유대인 대학살을 용인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서 침묵하며, 학살이 계속되는 동안 얼굴을 가리는신이라면 그 신은 믿을 가치가 없다”(The Mask Jews Wear (New York: Simon & Schuster, 1973), p. 99)

*Hans Küng(1923- ): 악의 문제는 무신론의 암초.

 

- 악은 두 범주로 나뉜다. 도덕적 악자연적 악.

- 악의 문제는 논리적 문제증거상의 문제로 나뉜다.

 

(203-9)악의 논리적 문제

*John Mackie(1917-1981): “여기서{악의 문제에서} 종교적인 믿음들이 합리적인 지지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믿음들이 단연코 비합리적이요 본질적인 신학 교리의 여러 부분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된다”("Evil and Omnipotence," Mind 64 (1955): 200). 유신론자는 다음 두 가지 모순된 주장을 한꺼번에 한다. ,

1. 전지전능하고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선한 신이 존재한다.

2.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한다.

만일 신이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고 악을 제거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악이 필연적이지 않다면, 어떠한 악도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Objection: *Plantinga - 자유의지옹호론(Free Will Defence): “(악한 행위보다 선한 행위를 더 많이 자유롭게 수행하는) 매우 자유로운 피조물들로 이루어진 세계와 자유로운 피조물이 전혀 없는 세계를 놓고 볼 때에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전자의 세계가 더 가치 있는 세계다. 이제 신은 자유로운 피조물들을 창조할 수 있지만, 그들로 하여금 오직 올바른 일만 하도록 결정하거나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신이 그렇게 할 경우 그 피조물들은 전혀 자유롭지 않거니와 그들은 올바른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으로 선할 수 있는 피조물을 창조하기 위해서 신은 도덕적으로 악할 수 있는 피조물을 창조해야만 한다. 그리고 신은 이러한 피조물들이 자유로이 악을 행하도록 내버려 두는 동시에 그러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없다. 신은 실제로 충분히 자유로운 피조물들을 창조했지만 그들 중이 일부는 자유를 행사할 때 옳은 길에서 벗어났다. 이것이 도덕적인 악의 근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로운 피조물들이 때때로 잘못 행동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신의 전능성과 도덕적 선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도덕적 선의 가능성을 발휘함으로써 도덕적 악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The Nature of Necessity (Oxford: Clarendon Press, 1974), p. 165).

신은 전능하지만, 도덕적 선은 가지되 도덕적 악은 가지고 있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그의 능력 밖이다.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피조물들의 세계를 신이 창조할 것이다.

 

Mackie: 신이 전능하다면, “왜 사람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선만을 선택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는가?”("Evil and Omnipotence," p. 209).

 

- 전능성은 논리적으로 자기 모순적이라고 묘사되지 않는 어떠한 사태도 발생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Plantinga: 그 자체로(즉 본래적으로) 가능하지만 신이 발생시킬 수 없는 사태들이 있다. 세계에 있는 모든 자유로운 피조물들은 그들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거들어야만 한다. 신은 자유로운 사람들의 행위를 결정할 수 없다.

 

Mackie and Flew: 플란팅가의 주장은 자유에 대한 양립불가론이다. 즉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양립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양립가능론은 어떤 사람이 지금 행동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로 선택했다면, 그는 달리 행동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자유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자기가 행했던 방식을 택하도록 결정되었다고 말한다. 즉 신은 도덕적인 선만 있고 도덕적인 악은 없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비록 그들의 선택이 결정되어 있더라도 오직 올바른 행동만을 수행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Plantinga: 자유의지는 어떤 형태의 결정론과도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오직 도덕적 선만 있고 도덕적 악은 없는 세계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세계의 존재 여부는 신이 아니라 그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자유로운 피조물들에 달려 있다.

 

(209-16)악의 증거상의 문제 - 유신론은 내부적으로 일관성을 결여한다기보다 아예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다. Edward Madden(1925- ), Peter Hare(1935- ), Michael Martin(1932- ), Wesley Salmon(1925- ), William Rowe(1931- ).

 

*Salmon: 통계를 통해 보면 우주 안에 있는 명백히 무의미한 악은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존재를 추정하지 못하게 막는다. 따라서 악의 증거는 신이 존재할 확률을 낮춘다. 악의 확률론적 문제.

 

Plantinga: 확률론은 강력한 논변을 구성하기 어렵다. 즉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전제로 하여금 선행확률을 할당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성향(예컨대, 유신론의 신이 이 세상에 있는 악을 담고 있는 어떤 세계를 창조할 선행 확률에 대한 평가) 뿐만 아니라, 현대의 확률에 일반적으로 내재해 있는 난제(즉 다른 서술문에 근거해서 하나의 서술문에 대하여 확률을 할당하기 위한 분명한 기준의 결여)를 해결하기 못한다.

 

그러나, 악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더 합리적임을 충분히 보여준다.

 

*Rowe

1. 전지전능한 존재자가 더 위대한 선을 잃지도 않으면서, 또는 똑같이 나쁘거나 아니면 더 나쁜 악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막아 낼 수 있었을 법한 강렬한 고통의 사례들이 존재한다. (사실적 전제)

2. 전능하면서 완전하게 선한 존재자라면, 더 위대한 선을 잃거나, 또는 똑같이 나쁘거나 아니면 더 나쁜 악을 허용하지 않고서는 강렬한 고통의 발생을 막을 수 없지 않는 한, 그런 고통의 발생을 막을 것이다. (신학적 전제)

3. 그러므로 전지전능하고 완전하게 선한 존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론)

("the Problem of Evil and Some Variety of Atheism,"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16 (1979): 336)

- ex) 산불에 고통을 당하다 죽은 새끼 사슴의 사례, 엄마의 술주정뱅이 남자친구에게 끔찍하게 학대당하다가 마침내 폭행당해서 죽은 다섯 살 짜리 소녀의 사례.

 

신정론(theodicy)

*Stephen Wykstra(1949- ): 신의 지식은 인간의 지식보다 훨씬 더 고차적이다. 만일 신이 주어진 악을 정당화하는 선을 가질 경우 우리가 그것을 알거나 그것이 우리에게 분명한 것처럼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즉 악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어 보이지않는다고 해서 악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Michael Peterson: 사실적인 전제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신학적인 전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유신론적 세계관에서도 무의미한 악은 허용된다. 즉 피조물들에게 입수 가능한 자유로운 선택의 범위가 사소하지 않고 실제로 중요하다면, 피조물들은 가장 끔찍한 악뿐만 아니라 최고의 선을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신이 매우 심각한 악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은 곧 중대한 선들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의미 있는 자유는 전적으로 없어도 무방한 악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 - 이것은 인류를 위한 신의 프로그램에 내재해 있는 모험이다 - 을 포함한다.

 

(217)증거상의 논변들에 맞춰진 방어전략은 유신론의 개연성이 낮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런 전략들은 유신론의 입장에서 고통과 악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체하지는 못한다. 이와 더불어 악에 대한 방어를 넘어서는 신정론은 매우 힘겨운 작업이다.

 

(220-7)신정론의 주제들

*징계이론: 악을 죄나 잘못된 행위의 징계론 본다. 욥의 친구들의 논변. 이 이론은 순진무구한 유아들의 죽음이라든지 마을의 전 주민이 비극적으로 몰살당하는 것가 같은 경우에 그 부당성이 드러난다.

 

*최상의 가능세계 이론: 이 세상보다 악을 적게 가진 다른 가능 세계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세계에서는 선과 악이 최적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최상의 세계에 필적한다. Leibniz(1646-1716)

 

Objection: 가장 큰 가능한 정수라는 개념이 논리적으로 비정합적이듯이 최상의 가능 세계라는 개념도 논리적으로 비정합적이다. 정수의 체계에는 끝이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최상의 가능세계가 있다고 생각할 이유가 무엇인가?

라이프니츠의 세계는 발전하지 않는 세계로 정체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반한다.

세계가 이처럼 많은 고통을 가져야만 한다면 선한 신이 왜 세계를 창조하기로 결정했겠는가? 아예 어떤 세계도 창조하지 않았어야 한다. 만일 네가 신이라면, 이 세계를 창조할 경우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옥외 변소에서 어린아이가 고문을 당하면서 ! 주님하고 울부짖을 때 흘리는 보상받지 못하는 눈물을 허용하게 된다고 하면 과연 너는 이 세계를 창조하는 데 동의했겠냐?”(이반 카라마조프) ... “아니, 나는 동의하지 않을 거야”(알료사).

 

*궁극적인 조화(ultimate harmony) 이론:

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의 만사가 다 만족스럽다. 신의 전지성

만사가 종국에 가서는 만족스럽게 될 것이다. 신의 도덕적 완전성

인간의 도덕 판단의 근간을 부정한다. 즉 신의 방식이 인간 보다 우월하다는 것.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이사야 55:8-9)

 

Objection: 의 경우 - John Stuart Mill(1806-1873) - 신정론은 인간의 심층적인 도덕적 확신을 왜곡시켜 우리를 도덕적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일상생활에서 나는 무엇을 옳은 것이라고 하고 무엇을 그른 것이라고 해야 하는지를 안다. 왜냐하면 나는 분명히 그것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만일 내가 일상적으로 인간의 행위에서 그릇된 것이라고 보는 것을, 신이 자기가 그렇게 행동하니까 나보고도 옳은 것으로 보라고 요구한다면, 또는 내가 일상적으로 잘못된 행동이라고 보는 것을 자기는 옳은 것으로 보니까 나보고도 옳은 것으로 보라고 요구한다면, 그리고 이 요구를 거부할 경우 나를 지옥에 보내겠다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지옥에 가겠다”(An Examination of Sir Hamilton's Philosophy).

 

의 경우 - 현재의 악과 연결되어 있는 미래의 선들이 있을 수 (또는 없을 수) 있는 반면에 어떻게 그와 같은 미래의 선들이 현재의 악의 발생을 정당화시키는지 분명치 않다. 그러므로 이것은 악을 능가하는 선의 개념으로부터 악에 대한 보상 개념으로 어떤 매개도 없이 넘어가는 개념상의 비약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인간의 무지를 통해 변호하려는 것은 매우 무책임하다 할 것이다.

 

*플란팅가와 신정론: 플란팅가의 방어전략은 자유 의지에 따라 도덕적인 악을 선택한 사람들을 신이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에 근거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유 의지에 의한 신정론은 좀더 공격적인데, 악을 행하는 상당히 자유로운 존재들을 신이 창조했다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실이라고 단언한다.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들이 악을 의도적으로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신이 알았더라도, 충분한 선택권을 가진 자유로운 피조물을 사는 세계가 자동인형들이 사는 세계보다 더 가치 있기에 신은 자유의지를 허용했다고 본다.

 

(227-34)포괄적인 주요 신정론들 - 악의 문제에 직면하여, 여러 주제들을 엮어 좀 더 폭넓게 설명하는 방식.

 

*아우구스티누스적 신정론: Augustinus(354-430) - 신은 오직 선한 것만을 창조하며,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본질상 선하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의 개체가 아니다. 그것은 선의 결핍이다. 좌나 악이 인간의 경험에 들어오게 된 것은 자유의지를 오용했기 때문이다.

 

Objection: 최초에는 선하고 자유로운 피조물이 어떻게 범죄할 수 있는가?

이런 반론에 부딪혀 아우구스티누스는 유한한 자유의 신비로 후퇴한다.

 

*이레니우스적 신정론: Bishop Irenaeus(130-202, 동방 기독교) - 아담을 비롯한 최초의 창조는 무죄하고 미숙하다. 그러나 이들이 신과 주위의 피조물을 사랑함으로써 선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최초의 무죄가 최초의 완전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도덕적으로 성숙해지려면 세월이 흐르면서 유혹을 경험해 보고 죄악을 실제로 겪어 봐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은 오염되지 않은 순결하고 선한 상태에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점진적인 진화 과정에 있는 불가피한 단계이다. 영혼 형성 신정론(soul-making theodicy, John Hick, 1922- )

 

Hick: 이 세계는 마치 신이 없는 것처럼 보여지는데 이것조차 중요하다. 이 세계가 잠재적으로 무신론적으로 보임으로써,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 인식적인 간격이 생겨나고 진정한 신앙과 신에 대한 신뢰가 들어설 여지가 만들어진다.

 

Objection: G. Stanley Kane(1938- ) - 힉이 언급한 방식의 악이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간격은 충분히 발생한다.

세계가 영혼을 형성해 가는 프로그램은 경험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 현세의 삶에서 많은 실패를 겪다보면 과연 영혼을 형성해 가는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냐는 회의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인격이 성숙하기는커녕 망쳐진 사람들도 많다.

 

*과정신정론: Whitehead의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을 기반으로 한 신정론이다. 여기서는 실재를 존재(being)보다는 생성(becoming)으로 본다. 여기서 신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그의 원초적 성격(primordial nature)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결과적 성격(consequent nature)이다.

신의 원초적 성격은 피조 세계가 진보할 수 있기 위한 모든 영원한 가능성들을 담고 있다. 신의 결과적인 성격은 피조물들이 그 가능성들 중 어느 것을 그들의 삶 속에서 구현할지를 선택할 때 피조물들이 겪게 되는 경험과 반응들을 담고 있다. 신의 결과적인 성격은 피조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응해서 변하기 때문에 신 역시 변화하며 과정 속에 있다. 신의 전능성에 대한 고전적 정의 부정

피조물들은 자유롭다. 즉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있다. 따라서 신의 능력은 피조물들의 실제적인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 신은 피조물들로 하여금 악을 멀리하고 선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할 수 있지만 선을 선택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Objection: 신의 능력에 대한 과정 개념은 순전한 희화에 지나지 않는다.

 

(234-7)끔찍한 악과 유신론에 대한 평가

*악에 근거한 유신론과 무신론 논변의 공통전제: (전지전능하고 완전하게 선한) 신은 더 중요한 선에 필요하지 않은 어떠한 악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Marilyn Adams: 끔찍한 악(horrendous evil) - 일개인의 삶의 의미를 너무나 파괴해서 그 삶이 당사자에게 중요한 선이 못 되게끔 하는 악.

- 기도교의 성육신 교리는 고통을 포함한 인간의 조건과 신의 밀접한 동일화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은,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든 간에 이미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신은 이런 고통 중에 있는 유한한 인간을 결국 구원할 것이다.

 

Objection: 이 논변은 성육신설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8| 신의 역사 - 신은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

*신이 인격적이라고 여겨질 때에만, 신의 역사가 의미심장해 진다. 비인격적이고 범신론적인 신성은 세상만사의 배후에 있는 힘은 될지언정 특정한 행위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242-5)신은 어떤 종류의 능력을 발휘하는가?

*과정신론의 사상: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한한 개체들은 어느 정도의 자유를 부여 받았다. 자유와 창조성은 모든 단계에 존재하므로 진정한 결정론이란 자연계 안에서는 어디에도 없다.

세계 내에서의 신의 역할은 모든 개체에 대해서 이 순간에 그것의 최상의 상태를 나타내는 최초목적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최초목적은 바로 그 순간에 그 개체에 대한 신의 이상적인 의지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 개체가 실제로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는 주관적 목적이 있는데, 이것은 그 개체 자신이 내려야 한다. 신은 언제나 설득하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신은 일방적으로 개입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신의 설득에 저항할 경우, 그것에 대해 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악과 고통을 방지하기 위해 신이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245-9)신은 어떤 종류의 자유를 부여했는가? - 양립가능론 과정신론

*양립가능론의 조건: 행위의 직접적인 원인은 행위자에 내재하는 욕구나 소망이나 의도여야 한다. 강제적으로 행위를 수행하게 하는 외부 사건이나 상황이 있어서는 안된다. 행위자는 자기가 원했으면 다르게 행동했을 수 있어야 한다.

 

Objection: David Basinger - “A를 수행하는 것을 선택하거나 A를 수행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능력이 그에게 있어야 한다. A를 하는 것과 A를 하지 않는 것이 모두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데, 어느 것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냐는 것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Middle Knowledge and Classical Christian Thought," Religious Studies 22 (1986): 416)) 자유주의적 자유의지론

 

*John Calvin: 문제의 행위가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고,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더라도 그 행위는 자유롭다. 양립가능론(신학적 결정론)

 

Objection: 모든 것을 미리 결정해 놓는 신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와는 양립할 수 없다.

신과 인간 사이의 그러한 관계는 인생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악의 문제는 신학적 결정론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것은 만사형통의 논변으로 머문다.

 

*신학적 결정론자들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면, 신과 악의 관계가 불가해하다고 인정하면서, 우리 인간들은 그런 문제들이 신의 의지의 신비 속에서 해결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제한된 인간의 지성으로 이런 신비를 이해하려고 잘못 시도하다가 신의 위엄과 주권을 부인하게 되면 이는 용납될 수 없다는 말을 그들은 덧붙인다.

 

(249-56)신은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인지를 알까? - 신의 지식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한에서, 신은 인간의 의사 결정을 일방적으로 통어할 수 없다. 신은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거나 아니면 인간의 의사결정을 통어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할 수 있지, 양자를 한꺼번에 할 수는 없다. 반면 신학적 결정론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본다.

 

*Molinism: 신의 중간지식(middle knowledge) 이론 - 예수회 신학자 Luis de Molina(1535-1600)

신은 자기가 창조한 각각의 자유로운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이 자유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선택 - 비록 실제로는 그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 을 했을 것인지를 안다. 자유의 반사실문

당신을 창조할 것이냐 말 것이냐로 고심할 때 신은 마음 속으로 당신의 미래에서 벌어질 모든 가능한 시나리오를 펼쳐 볼수 있고, 각각의 가능한 상황에서 당신이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확실히 안다.

이 세상에 자유로운 사람들이 살고 그들의 행위는 신이나 외적인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인과적으로 결정되지 않더라도, 중간지식으로 말미암아 신은 세상사에 대해 고도의 통제력을 가질 수 있다. 즉 피조물들의 선택은 자유변항이 아니라, 그 계획 자체에 통합된다.

신은 실제로 발생하는 악의 각 사례들을 의도적으로 계획했다. 가장 심각한 난점.

만일 유다가 범죄한다면, 이는 신이 그로 하여금 죄를 범하는 환경에 고의로 처하게 한 것이고, 또 그가 선하게 행동할 법한 상황에는 처하지 않도록 의도했기 때문이다”(Thomas P. Flint, Divine Providence(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8), p. 118)

 

(256-65)신은 사실상의 미래를 알까?

*단순 예지론: 신은 사실상의 미래를 완전히 안다.

Objection: 신이 2000년에 투시하는 2020년의 세계는 2020년의 현실세계라고 가정하다. 그렇다면 신이 2000년에 뭔가 조치를 취한 결과 그가 투시하는 세계가 2020년의 현실 세계가 안 된다고 상정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결론적으로 신은 2020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를 앞서 내다보기전에 2000년에 자기가 하려는 일을 먼저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신이 세계를 지배할 때에 취하는 행위를 결정하기 위해 그의 예지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신이 미래에 대해 무시간적 지식을 갖는다고 해서, 그가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만 아는 경우에 비해 세계를 지배하는 데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261-5)미래가 진정 열려 있다면 어떻게 될까?

*열린 유신론(open theism), 개방 신론(the openness of God) - 중간지식과 단순예지를 모두 거부. 신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확실히 알 수 없는 면이 미래에 있다. 이것은 신의 지식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불확정성이 바로 미래의 고유한 성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것을 신이 확실하고 확정적인 것으로 안다면, 그의 지식은 완전하지 않다.

캘빈주의와 달리 열린 유신론은 신의 일방적인 통어를 주장하지 않으며, 자유의지 변론을 주장하지도 않고, 몰리니즘을 따르지도 않는다. 여기서 신은 이 세상의 악에 대해서 진정으로 마음 아파하며 분노하고 실망하지만, 그는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악을 극복할 것이다. 악의 문제에 있어서 더 우위에 선다.

 

 

9| 기적 - 신은 속세의 일에 개입하는가?

(274-9)역사적 사건으로서의 기적

*Flew: 우리는 현행 법칙들에 대한 반복될 수 없는 반례가 발생했다는 보고 - 예를 들어,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주장 - 를 들었을 때, 그 보고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그것이 부정확하다고 거부해야할 이유보다 더 나을 바가 없다. “그 증언이 얼마나 인상적이든 간에, 역사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호의적인 판결은 불가지론적인 판결로서, ‘증거불충분이라는 인색한 판결임에 틀림없다

 

증거주의에 대한 반론(7)

 

(279-84)설명할 수 없는 사건으로서의 기적

*Swinburne: 만일 자연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 사건들은 영구히 설명될 수 없는 사건들로 정당하게 간주될 수 있다.

 

(284-8)신의 역사로서의 기적

*Grace Jantzen(1948- ): “완벽하게 잘 확립되고 잘 이해된 법칙에 대한 단일한 예외가 있고 이 예외가 신의 개입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을 경우에는, 회의적인 답변이 부적절해질 것이다”("Hume on Miracles, History and Politics," Christian Scholar's Review 8 (1979): 325).

 

*Robert Larmer: “신의 능력으로 병이 치유되는 기적을 수행하노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우리가 보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 사람이 기도를 한 직후, 나병으로 인해 문드러졌던 손가락들이 금방 원래의 형태와 길이대로 커지는 사건과 염산에 심하게 화상을 입은 눈이 즉시 시력을 회복하는 사건들을 우리가 녹화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나 상처도 치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것(대상이나 능력)도 그의 명백한 치유능력을 간섭할 수 없다고 가정하다. 또한 먼 외국에 있는 환자들도 이 사람이 기도하면 극적으로 치료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능력은 분명히 거리와도 무관하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에 가장 합리적인 반응은 신의 개입을 인정하는 것이다("Miracle and Criteria," Sophia 23 (1984): 4-10).

 

Objection: 그 사건이 함축하는 바가 모두 전제될 때, 신을 원인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한 설명인가?

 

주어진 사건이 신의 직접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 한, 그 사건은 신의 직접적인 행위로 봐야 한다.

 

절대적으로 신이 그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건이 신의 직접적인 역사가 될 가능성이 그렇지 않을 가능성보다 높다는 믿음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289-95)실제적인 고찰 - 부활사건의 예

*예수의 생존과 십자가 처형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부활이 그런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 이야기가 기독교 발생 직후 전통에 삽입되었다고도 한다. 이 이야기가 언제 신앙의 핵심요소가 되었는지를 입증해 주는 증거가 우리에게는 없다.

부활에 대한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미흡하다.

제자와 신도들의 순교가 부활의 확률을 높이는 것은 아니다.

부활과 관련된 독자적이고 공평한 목격자들이 없다.

결국 부활이 확고한 사실(또는 납득할 만한 정도의 개연성을 갖는 사실)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타당한 역사적 근거가 없으며, 증명의 부담은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다.

 

*Davis: 예수가 실제로 부활했느냐의 여부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결국 우리의 기본적인 세계관 - 실재의 본성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 - 으로 귀착된다.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 모두 합리적인 사람들이 고수할 수 있는 입장들이라서, 부활 사건의 역사성에 대한 합리적인 관점들이 서로 달라지는 것은 허용되어야 한다.

 

*Martin: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의 원인이 신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인간이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법칙이 숨어 있을 수 있다거나, 이 사건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10| 내세 - 소망할 이유가 있는가?

(314-6)영혼 개념에 대한 비판

*심적과정들이 두뇌의 특정 부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하게 보여 주는 꽤 많은 심리학적 및 생리학적 증거가 있다. 영혼은 이와 상충한다.

영혼의 병으로 알려진 장애들은 유전적인 요인을 가진다. 그것은 염색체 이상이다.

두뇌손상은 인지, 의식, 기억, 개념 능력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정신적 능력들은 두뇌 안에 위치한다.

이러한 반론들이 즉각적으로 신체-영혼 이원론을 거짓으로 입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원론자들의 주장이 견지되기 어렵다는 것은 확실하다.

 

(316-9)심리물리적 단일체로서의 자아

*심신동일론: 인간은 물리적인 유기체이며, 심적 상태는 두뇌과정이나 두뇌 상태, 또는 중추신경 내의 과정이다.

 

Objection: 범주교차적 동일성(cross category identity)을 충족시키는가? 즉 심적 사건과 두뇌 사건의 동일성이 확보되는가?

 

*제거주의적 유물론: Douglas R. Hofstadter - 심적 현상들은 신경물리적 현상으로 환원된다. 신경과학이 인간의 정신능력을 설명한다. 자아란 그것이 진화함에 따라 세계를 반영하기 위해 조직화된 구조들의 적극적이고 자기갱신적인 집합이다.

 

Objection: ‘하향적 인과의 증거가 존재한다. 심적 사건들이 생리적이거나 신경적인 사건들의 진짜 원인들처럼 보인다는 것. 이를테면 실인증(失認症)에 걸린 사람들은 시각적인 자극을 받더라도 자기가 보는 것(이를테면 얼굴)을 인지할 수 없는 반면, 다른 감각을 통해 전달된 자료에 근거해서는 그것을 인지할 수 있다.

 

*John Searle: 심적 현상들은 생리학적 미시 요소들에서 창발하며 여타의 속성들 못지 않게 실재적인 속성들이다.

 

*Jaegwon Kim: 심적 속성들은 물리적 속성들에 수반한다. 즉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들을 통해서 작용한다.

 

*Baker: 인간은 몸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의해 구성된다.

 

(319-27)재창조와 시공간적 연속성 - 만일 우리가 내세의 삶을 경험한다면, 우리의 자아와 동일시되는 물리적인 것이 인과적으로 지속해야만 한다.

 

*Peter van Inwagen(1927- ): 사람이 죽는 순간에 신이 나중에 그 사람을 다시 만들 때 사용하게 될, 바로 그 사람이 되게 해주는 본질적인 물질을 신이 보존한다. 껍질을 벗긴 중핵’(naked kernel), 중핵인간(the core person)

 

*Kevin Corcoran(1964- ): 우리가 죽기 직전에 신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단순 요소들을 분열시켜 (둘로 나눠서), 인과적으로 관련된 단순자들로 이루어지되 공간적으로 분리된 집합들이 되게끔 한다. 한 집합은 시체가 되는 반면에, 다른 집합은 다른 어떤 영역에서 계속 존재하게 한다.

 

(327-31)내세의 삶에 대한 후험적 논변들

죽음 체험을 한 사람들.

유령이나 심령적 현상들

부활에 대한 주장들. “만일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면, 우리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살아날 것이다”(고린도 15:12-23)

 

(332-33)내세의 삶에 대한 선험적 논변들

*Aquinas(1224-1274):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의 달성을 위해서, 신은 인간에게 내세의 삶을 부여했음에 틀림 없다.

우리가 이 생에서 행복을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Kant(1724-1804): 최고선의 명령은 이 생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우리가 도덕률에 따라 살아야 한다면 죽음 이후에도 살 수 있어야 한다. 내세는 도덕률의 요청이다.

왜 우리는 최고선을 추구하라는 명령에 따르기 위해서 최고선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도덕적 의무에서 출발해서 수행가능한 것으로 논증하는 대신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서 출발해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으로 논증해야 한다. 우리가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그것을 해야만 하는 의무가 없다.

 

*Plato(BC 428-347): 영혼은 분할되지 않고 단순하므로 파괴되지 않고, 파괴되지 않으므로 불멸하며, 불멸하므로 불사적이다.

 

 

11| 종교언어 - 우리는 신에 관해서 어떻게 의미 있는 발언을 할 수 있을까?

(341-5)고전적 유비이론

*Aquinas: ‘정의롭다와 같은 하나의 낱말이 피조물과 신에게 똑같이 적용될 때 그 낱말은 두 경우에 일의적으로 (즉 정확히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의적으로 (완전히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것도 아니다. 신의 성질과 인간의 성질 간에는 유사성이 있으며, 신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 간에도 연관성이 있다. 이의적으로 사용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유사성 때문이며, 일의적으로 사용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과 신과의 차이 때문이다.

 

*James F. Ross: ‘적절한 비례의 유비’ - 신과 피조물은 그들 각자의 존재 양식 - 무한과 유한 - 에 비례하는 특질을 갖고 활동한다. 그래서 신은 지혜롭다소크라테스는 지혜롭다는 말을 하되, 그 두 문장의 맥락 사이에서 의미가 전이되는 것을 조정한다. 소크라테스는 유한한 피조물에 맞게 지헤로우며, 신은 무한한 존재 양식에 적합한 방식으로 지혜롭다.

 

Objection: Frederick Ferré - 유비 이론은 그 자체의 공식에서 주어진 것들을 설명하지 못하거니와, 그것들이 의존하는 독립된 비유비적인 지식의 가능성을 설명하지도 못한다.” 이런 종류의 유비에는 미지의 사항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의 지혜와 신의 무한한 성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 어떠한 긍정적인 지식도 가질 수 없다("Analogy in Theology," in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1 (New York: Macmillan, 1967), pp. 94-5).

 

Ross: 페레는 종교언어와 일상언어 사이에 엄격한 수학적 관계를 설정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아퀴나스가 의도하였던 바는, 종교 언어의 모든 뉘앙스와 여러 의미를 보존시키면서, 동시에 종교 언어와 일상 언어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함으로써 종교 언어의 유의미성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유비이론은 신의 속성들의 구체적인 성격을 상세히 설명하는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신에게 적용되는 술어들이 어떻게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유비이론을 수학적인 모델에 준거하는 것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다른 반론이 가능하다. 만약 유비이론이 로스의 방식대로라면 우리는 신의 속성을 짐작할 수가 없다. 즉 신의 지혜나 무한성은 우리의 개념의 그물을 항상 빠져 나간다.

 

(346-52)검증과 반증의 문제

*검증가능성의 원리: 한 명제가 진정한 사실적 명제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그 명제가 참이거나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 줄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사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 A. J. Ayer를 비롯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신학적인 언어가 검증가능성의 경험적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인지적(cognitive)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즉 유신론적이든 무신론적이든 그러한 주장들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것.

 

Objection: 인지적 유의미성의 검증 원리 자체가 그것이 표방하는 의미의 경험적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자기지칭적인 부정합성

이 원리에 따르면 모든 과학이 무의미해져 버린다. 여러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명제를 완전히 유의미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의 엄밀한 검증 조건을 전혀 명시하지는 못한다. ex) 빛의 파동설과 입자설 간의 논쟁

 

*반증(falsification) 원리: 사실에 관한 주장이 발언될 때 발언자는 그 주장이 거짓이 될 법한 조건들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 Anthony Flew(1923- ): ‘두 탐험가의 예는 종교적 담론의 반증 불가능성을 예증한다. 즉 종교인들은 자기네 주장이 반증되지 않게 하기 위해 계속 그 주장을 수정하고 조건을 첨가함으로써 어떠한 반론도 허용하지 않는다("Theology and Falsification," in New Essays in Philosophical Theology, ed. Anthony Flew and Alasdair MacIntyre (New York: Macmillan, 1955). p. 96).

무슨 일이 일어나야 당신은 신의 사랑이나 존재가 반증되었다고 보겠는가?”(ibid. p. 99). 종교인들은 수많은 제한 조건을 첨부함으로써 자기네 주장을 스스로 무력화시킨다.

 

- R. M. Hare(1919- ): 신앙인들의 언설은 반증불가능하므로 사실에 대한 직접 서술문이 아니다.

블릭’(blik) 가설: 사실적 언설과 구분되는 종교적 언설을 블릭이라고 한다. 종교인은 신이 존재하며 특정한 종교적인 삶의 방식이 옳다는 블릭을 가지며, 어느 것도 그 확신을 바꿀 수 없다 ex) 모든 옥스퍼드의 교수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블릭을 가지고 있는 정신병자의 비유.

이러한 예를 통해 본다면, 종교적 언설들이란 경험적인 관찰에 의해 쉽사리 뒤집어질 수 없는 세계에 관한 깊이 신봉되는 해석적인 믿음이나 전제들을 표현한다. 이런 믿음이나 전제들은 인간의 자유의지타자의 마음에 관한 주장들에도 존재한다.

 

- Basil Mitchell: 자신이 레지스탕스편이라고 얘기하는 방문객의 예. 다양한 상황에서 믿음이 결정적으로 반증되지 못하는 데에는 신뢰와 위탁(commitment)이 한몫 한다.

 

- John Hick(1922- ): 종교적 언설들의 구체적인 반증 및 검증 조건들은 탐색될 수 있다. 두 나그네의 예. 이 중 한 사람은 그 길을 계속 걸어가면 거룩한 성에 이른다고 믿는 반면, 다른 사람은 아무리 가봤자 종착점이 없다고 믿는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 그 두 나그네들 사이의 문제는 실험과 경험적인 관찰에 의해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서기만 하면 그들 중 한 사람은 내내 옳았고 다른 사람은 틀렸었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검증과 반증이 관련되는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다. 그들 사이의 쟁점은 실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실제적인 쟁점이었다”("Theology and Verification," Theology Today 17 (1960): 260-1).

 

힉이 검증과 반증에 입각한 반론의 논리를 기술적으로 만족시켰을지 모르지만, 현재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내세와 같은 곳에서의 실제적인 검증이나 반증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않는다.

 

많은 종교인들은 검증적인 분석이나 반증적인 분석으로는 올바르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적인 차원이 종교 언어에 있다고 생각하며, 이는 정당하다. 실증주의를 거부하고 나면, 어떻게 우리가 그런 서술문들의 사실적인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지는 두고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의미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를 논리실증주의자들처럼 혼동해서는 안 된다.

 

(352-7)종교적 담화의 기능

*R. B. Braithwaite(1900- ): 종교적인 발언들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진술문으로 기능한다. 그 이야기들이 참일 필요도 없거니와, 주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참인 것으로 믿어질 필요도 없다.

 

이것은 논리실증주의에 필적하는 환원주의가 아닌가? 도덕주의적 환원주의.

 

*Paul van Buren(1924- ): 오해가 발생하지 않는 명확하고 규칙이 지배하는 중심에서 종교 언어가 멀리 떨어져 있다. 종교 언어는 언어의 가장자리에 있다. 종교적 언어행위들은 우리가 언어를 가지고 정상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려고 하고, 그 언어 행위에서 사용되는 낱말들의 용법이 일상적인 용법을 넘어서서 거의 무의미에 가까워진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하지만 이 언어는 중심 영역의 빈곤함을 극복한다. 종교 언어는 인간성의 여러 면 중에서 특정 면을 표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라는 낱말은 종교인이 자신의 관심 대상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바의 최종적인 한계에 직면하는 지점을 나타낸다”(Edges of Language, pp. 135).

 

Objection: 종교언어의 기능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추면 정보적인 차원이 간과된다. 이것은 마치 기능적 분석가들이 종교 언어가 인지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비판에 항복하고서 종교 언어가 유의미할 수 있는 길을 다른 곳, 즉 기능적 유의미성에서 찾는 것과 같다.

종교언어의 복합적인 구조가 형이상학적, 윤리적, 역사적 진술들 - 종교인들이 이런 진술을 할 때에는 단지 형이상학적, 윤리적, 역사적 발언을 하려고 할 뿐이다 - 을 포함한다는 점을 간과한다.

 

(357-61)상징으로서의 종교 언어

- 종교언어는 축어적이지 않다.

*Paul Tillich: 신에 관한 담화는 상징적인 담화다. 왜냐하면 신은 초월적이고, 무한하고, 창조된 존재 구조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신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이므로, 신에 관해 문자 그대로 말하려는 것은 금지된다. 그럴 경우 신은 여러 개의 존재자들 중 단지 하나의 별개의 존재자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종교적 상징은 계시의 한 방편이다. 그것은 궁극적 관심에 초점을 맞추는 수단이고, 신을 만나는 기회인 것이다. 그래서 상징은 기호와 다르다. “기호와 상징의 근본적인 차이는, 기호가 그것이 가리키는 실제와 실재의 힘에 어떠한 식으로도 관여하지 않는 반면에, 상징은 비록 상징되는 대상과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의 의미와 힘에 관여한다는 데에 있다. 상징과 기호의 차이는 그 상징의 성격을 규정하는 상징화된 실재에 관여한다는 것과, 기호의 성격을 규정하는 지시된실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의 차이다.”(Paul Tillich, "The Nature of Religious Language," Christian Scholar 38 (1955): 189-97).

모든 상징은 비상징적인 언어가 부적합해지는 실재의 수준을 열어 놓는다. 예술적인 상징들이 좋은 예다. 실재의 가장 깊은 수준을 열 때에 종교적 상징들은 실제로 인간 영혼에서 경험의 가장 깊은 차원을 열어 놓는다. 하지만 신은 자신의 모든 구체적인 상징을 초월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종교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와 같은 상징들(로터스의 열매, , 십자가 등)은 중요하다. 종교적 상징들이 갖는 엄청난 힘과 완고함은 그 상징들이 그것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관계를 인간의 마음에 새긴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된다.

 

Objection: 틸리히는 종교언어의 상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그것은 해석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해석이야말로 축자적으로 종교언어를 대하게 하는 것이다. 신에 관한 축자적 담화를 우리는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361-6)페미니즘과 남성적 신 담화

*신은 물리적인 존재도 아니요, 남성도 아니요, 여성적이기보다 남성적이라고 봐야 할 이유도 없다. 신의 남성적인 상을 축자적으로 해석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신에 대한 여성적 표현들: “이제 해산하는 여자처럼 내가 울부짖노라, 헐떡이노라, 숨이 차도다”(이사야)

 

*신에게는 초월보다는 내재, 권위보다는 양육, 통제보다는 관계의 속성이 더 강하게 존재한다.

 

Objection: 전통적인 기독교 유신론에서 신을 남성으로 본 적은 없다. 신은 언제나 무한한 인격적 영혼으로 상정되었다.

남성적 은유가 가부장성을 강화시켰다.

페미니스트들은 신에 대한 남성적 담화가 갖는 특권적인 지위를 제거하기 위해 인간과 신 사이의 형이상학적인 간격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불가지론으로 치닫는다.

 

(366-73)신에 대한 담화는 축자적일 수 있는가?

*William Alston(1921- ): 신에 대한 담화는 축자적일 수 있다.

인간의 언어는 주어-술어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신의 본질에는 그런 구분이 없다. 그러므로 언어는 신적인 실재를 충분히 포착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술어를 신에게 축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 피조적인 특징들을 갖는다고 해서 사랑, 지식, 능력, 행위 등의 개념들이 피조적인 조건들을 반드시 포함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이런 개념들이 갖는 의미의 핵심이 신에게 축자적으로 귀속될 수 있다.

신에 대해서는 인격적 술어(personalistic predicate)가 귀속될 수 있다. 비축자주의자들은 신의 극단적인 타자성’(otherness) 때문에 인격적 술어들이 신에게 축자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타자성은 다음과 같은 등급으로 나눌 수 있다.

A. 무형적 존재성

B. 무한성. 이것은 다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B1. 각각의 완전성의 무제한적인 실현

B2. 모든 완전성,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나은 모든 것의 예화.

C. 무시간성.

D. 절대적 단순성.

E. 하나의 존재가 아님(신은 존재 자체).

신의 타자성에 대한 입장에 있는 사상가들은 이 목록 중에서 저마다 다른 항목들을 강조한다. 그런데, A. 유형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것이 인격적 술어들과 양립할 수 없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격적 술어들(P-술어들)심적 술어(M-술어)행위 술어(A-술어)로 나눌 수 있다. M-술어의 의미는 행동상의 현시를 통해서 정의되지 않지만, 내적 경험이나 내성을 통해서 알려진다. 이러한 심적 상채를 갖는 무정형적 존재를 생각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적 상태들이 신체 행동들과 연결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적 패러다임이다.

문제는 A-술어에 있다. 많은 사상가들은 신 개념은 외적인 행위 수행 능력을 배제한다고 한다. 그러나 외적 행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유형적 존재들에 의한 신체 운동들을 명시할 것을 요구한다고 전제하는 것은 순환적이다. 행위 개념은 신체적 운동을 개념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즉 기초적 행위(basic action)는 다른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또는 다른 행위를 수행할 때 (동시에) 수행되지 않는 행위다. 비기초적 행위는 다른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또는 다른 행위를 수행할 때 수행되는 행위다. 다시 말해 인간의 A-개념 중 어느 것도 신과 같은 무형적 존재에게는 축자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지, 어떠한 A-개념도 일체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즉 신의 경우 그가 빛을 창조한다든지, ‘홍해를 가른다든지, ‘미역국을 만든다든지 하는 것은, 신의 직접적인 자발적 통제 하에 있으면서 신이 다른 것을 먼저 할 필요 없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기초적 행위들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고찰은 본래적 술어들을 축자적으로 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심적 술어와 행위 술어들을 무형적인 존재에 대해 적용할 때 개념적인 불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12| 종교와 과학 - 양립가능한가, 불가능한가?

*Ian Barbour(1923- ): 종교와 과학은 네 가지 기본적인 모델로 관계 한다. 상충, 독립, 대화, 통합이 그것이다.

 

(380-5)종교와 과학은 상충하는가?

- 과학적 유물론(ex. 논리실증주의)과 성경적 직해주의(biblical literalism)는 종교와 과학이 전적으로 상충한다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감각적인 입력이 과학의 의심할 수 없는 출발점은 아니다.

 

*Carl Sagan(1934-1996): “과거, 현재, 미래에 우주말고 다른 것은 없다”(Cosmos (New York: Random House, 1980), p. 4) 과학적 유물론

 

*Augustinus(354-340): 성경의 특정 구절이 기존의 과학 사상과 상출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그 구절을 은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1920-2005): “우리가 다른 등급의 지식에 적합한 방법들을 좀더 정확하게 인식한다.” 종교과 과학을 모두 인정함.

 

*성경적 직해주의, 개신교 근본주의, 근본주의: 미국 개신교파들. 진화론에 대한 저항.

ex) 1925년 스콥스의 원숭이 재판 사건, 1981년 아칸소주 창조론 교육 심리.

 

*과학적 창조론: 과학과 성경적 직해주의를 절충.

 

(385-8)종교와 과학은 독립적인가?

*중세적 전통: 초자연과 자연의 이원론. 초자연적 영역은 계시에 의해서만 충분히 알려질 수 있는 반면, 자연계는 인간의 합리적인 탐구에 적합한 기술에 의해서 알려진다. 물론 자연신학적으로 영적 영역이 물질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도 가능하다.

 

*Karl Barth(1886-1968): 그리스도 중심성. 계시의 우위.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의 자기 계시를 다루므로 인간의 지식 능력을 넘어서 있는 종교 지식의 원천을 제공한다. 인간의 이성은 죄로 말미암아 신에 대한 지식에 가려져 있으므로 신이 그 간격을 메우고 우리에게 그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종교의 목적은 신과 인간이 인격적인 접촉을 이루는 것인 반면, 과학은 관찰, 실험, 합리적인 추론 등을 사용해서 자연계에 대한 지식을 추구한다.

 

*Nietzsche(1844-1900), Sartre(1905-1980)등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 신에 준거하지 않고도 의미를 성취할 수 있다.

 

*Martin Buber(1878-1965): 사람과 물질의 관계는 나(Ich)와 그것(Es)의 관계이지만, 신앙인과 신의 관계는 나(Ich)와 당신(Du)의 관계이다. 인간성의 완전한 실현은 신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인격체로서의 신은 인격적인 삶을 부여한다. 신은 인간으로서의 우리로 하여금 그를 만날 수 있게 하고 우리가 서로를 만날 수 있게 한다”(I and Thou)

 

*언어분석철학: 종교와 과학은 두 개의 구별되면서도 동등하게 정당한 언어 놀이이다.

 

(389-98)대화는 가능한가?

*Ian Barbour: 두 분야는 의미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한계 문제들(boundary questions)과 관련된 논의에서, 그리고 방법론적인 평행(methodological parallel)에 관한 논의에서 그러하다. 전자의 예로는 물리적인 자연이 실제한다는 전제가 있다.

 

*E. L. Mascall: “기독교의 신이 창조한 세계는 우연적이고 규칙적이게 될 것이다. 세계의 창조자는 합리적이기에 세계는 규칙적이고 패턴화한다. 그러나 세계가 구현할 특정한 규칙성과 패턴들은 신이 자유롭기 때문에 선험적으로 예측될 수 없다. 즉 그 규칙성과 패턴들은 검사에 의해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유신론의 세계관에서 보자면 세계는 관찰과 실험이라는 과학적 방법이 적용되기에 이상적인 장이다”(Christian Theology and Natural Science (New YorkL Ronald Press, 1965), p. 132)

<과연 이 관점과 전제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 외에도 과학과 종교의 유사성은 한계 문제나 방법론적 유사성에 찾는 많은 시도들이 있다. 핸슨, 툴민, 쿤과 같은 철학자들은 이러한 시도에 좋은 단서를 제공한다. 과학혁명과 신학혁명의 유사성은 이로부터 도출된다. 그리고 바버같은 학자는 과학이 직접 관찰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을 돕기 위해 은유와 모델들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종교도 그것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들이 이 둘의 목적이나 근거, 전제 또는 그 과정을 돌아 볼때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과학은 가설에 근거하지만 종교는 확신에 근거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불일치는 유사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들에 암초와 같은 것이 아닐까?>

 

(399-402)통합에의 시도

- 바버는 세 가지 통합 형태를 말한다. 자연신학, 자연의 신학, 체계적 종합이 그것이다.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우주의 존재와 자연 내부의 설계에 대한 증거에서 신의 존재로 추론한다(5). 인류발생론적 원리

 

*자연의 신학(theology of nature): 과학의 내용을 자연신학과 같이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데에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신학 교리들을 교육, 재구성, 재해석 하는데 사용한다.

 

*체계적 종합(systematic synthesis): 통합적인 세계관 아래에서 핵심적인 종교적 주제들을 기본적인 과학적 통찰과 종합하려는 시도.

- Whitehead(1861-1947)의 과정신론: 종교와 과학의 목표들은 더 크고 포괄적인 목표에 관계한다. 즉 형이상학적인 비전에 유착한다. 실재에 대한 통전적(holistic) 개념은 모든 형태의 이원론을 무효로 만든다. 따라서 자연을 왕국으로 보는 중세적 관점과 자연을 기계로 보는 뉴턴적 관점은 자연을 공통체로 보는 관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현실적 발현(actual occasion)으로서의 모든 개체들은 의식 경험의 중심으로서, 각각은 다른 모든 발현에 영향을 미치면서 실재를 상호의존적이고 생태적으로 만든다. 이런 식으로 전자와 같은 낮은 수준에서 세포와 같은 높은 수준으로 통합과 위계가 형성된다. 신은 이러한 세계 질서의 궁극적인 근거이고, 사건들의 진전 방식을 위한 모든 가능성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신은 사건들로부터 영향도 받는다. 신은 현실적인 결과들에 반응하고 거기에 적응하면서 언제나 사물들을 위한 자신의 이상적인 목적들을 향해 사물들을 유혹한다. 신과 세계는 상호의존적이다.

 

 

13| 종교적 다원성 - 우리는 종교들 간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 종교적 다원성에 대한 접근에는 배타주의, 다원주의, 포섭주의가 있다.

 

(410-3)배타주의(exclusivism)

- 구원, 해방, 인간성의 완성을 비롯한 종교의 궁극적 목표라고 간주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오로지 하나의 특정 종교에서만 찾을 수 있다.

배타주의자들은 각 종교에서 진리라고 내세우는 주장들이 양립할 수 없다는 데에 근거한다. 즉 양립할 수 없는 진리 둘 중 하나는 거짓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교리적 배타주의.

 

*Karl Barth: 종교는 인간의 오만이며 신앙과 배치된다. 종교는 우상으로 신을 대체한다.

다른 종교들도 나름의 가치와 높은 도덕적 이념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가 참된 종교의 중심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신과 인간이 화해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계시한다. 이때 계시는 종교를 파괴할 뿐 아니라 참된 종교를 창출한다.

 

*이슬람교: 마호메트의 가르침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신에 관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 바로 메호메트이다.

 

Objection: 구원의 필수 요건을 들은 적이 없거나 이해하지 못한 사람을 신이 책망한다면 이는 불공평하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사랑하고 숭배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신이 그의 계시를 오로지 특정 시점에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인이나 특정 공동체, 또는 특정 문화에 대해서만 좁게 국한하지는 않을 것이다.

 

Plantinga: 신앙인들은 종교적 다원성에도 불구하고 배타주의적 신념을 유지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그 믿음은 기초적이기 때문이다(6). 우리는 종교적 주장들 중 어느 것이 옳은지를 판정하기 위한 중립적인 기준을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신앙인들이 자신의 신앙과 상충하는 믿음들에 직면했을 때에도 그들의 믿음을 버릴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은 견해는 오만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합하는 다른 견해들도 마찬가지 처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실제로 오만할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사악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플란팅가의 이런 면은 공격받아야 하고, 교정되어야 하고, 폐기되어야 한다. 이런 주장은 어린애가 떼쓰는 방식이거나, 정신적인 미숙인이 환상 속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의 사악한 상대주의도 플란팅가의 배타적 신앙주의보다 선하다.>

 

*Paul J. Griffiths(1947- ): 종교공동체는 그들의 교리 뿐 아니라 다른 요소들로 구성된다. 이들 요소들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그들의 믿음을 쉽사리 포기하거나 약화시킬 수 없다.

 

(417-20)다원주의(pluralism)

*Hick의 다원주의:

인간은 궁극적 실재를 표현하기 위해 해석적인 개념들을 사용한다. 궁극적 실재는 비이원적이고 서술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해석적 개념과 은유와 심상의 집합은, 궁극적 실재를 인격적인 존재로 보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집합과 다르다. 궁극적 실재가 다양한 방식으로 서술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 코끼리를 만지는 맹인들의 예.

성육신은 하나의 신화다. 이 신화에서 기독교인들은 궁극적 실재 중심의 삶으로 충실히 변화한 사람(예수)를 본다. 그러나 이런 묘사는 다른 위대한 종교 창시자나 성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Objection: 다원주의자들이 선, 사랑, 정의를 궁극적 실재에게 귀속시킬 수 없는 한, 배타주의에 대한 그들의 반론 - 이런 속성들을 지닌 신은 자신의 계시와 구원 사역을 특정 문화나 종교에 국한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 - 은 실패하고 만다. 배타주의의 일관성에 대한 이런 비판이 성공하려면, 궁극적 실재에 적합한 술어들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 즉 다원주의자들에게 궁극적 실재란 무엇인가? 우리가 분명한 신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즉 신이나 궁극적인 실재에 관해서 별로 할 말이 없다면, 우리의 종교적 믿음은 불가지론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그리고 다원주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교리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성육신 교리는 기독교에 있어서 신화가 아니다.

 

(425-8)다원적 구원관으로서의 다원주의

*S. Mark Heim: 힉은 은폐된 포섭주의자다. 종교적 전통들 간에는 실재로 차이가 있으며, 각 종교는 본질적으로 배타주의적이다. 각 종교는 자신들의 구원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 정향적 다원주의(oriental pluralism): 상이한 종교적 관점을 견지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정당화된다고 해도, 다른 종교들의 결론들이 참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즉 한 사람이 어떤 종교나 관점을 신봉하는 것은 정당화되면서도 여전히 틀릴 수 있다.

구원은 많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자기를 포기함으로써 해방(해탈)을 경험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해 개인적인 불멸을 경험할 수 없다거나 유교의 덕을 제도화한 결과로 사회적인 조화를 이룬다는 주장이 틀리다고 말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로 다른 구원에 이를 수 있다.

 

(428-434)포섭주의(inclusivism)

- 구원의 절대적인 길이 오직 하나의 종교에만 있다고 보는 점에서 배타주의와 일치한다. 반면, 다양한 종교들을 통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신을 만나게 되고 그의 은총도 그렇게 현현한다고 보는 점에서 다원주의와 공통된 점이 있다.

구원을 초래하는 특정 사건이 구원을 위해 존재론적으로 필요(구원은 그 사건 없이는 발생할 수 없다)하지만, 인식론적으로는 불필요하다(우리는 구원받거나 해방되기 위해 그것에 관해 알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Karl Rahner(1904-1984): ‘익명의 기독교인들

 

Objection: 만일 사람들이 특정 종교의 전통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왜 그들을 개종시키려고 하는가?

 

다른 종교 신봉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의 참된 기초를 알게 해주는 것이 그들의 기독교적 정신을 발전시키는 한 단계이다.

 

각자 자기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어느 종교가 진짜인지를 어떻게 결정하는가?

(다음 절)

 

(434-7)종교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

*Keith E. Yandell(1938- )의 기준:

1. 그 종교의 본질적인 명제들은 상호 일관성이 있어야만 한다.

2. 그 종교 체계가 참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그 체계가 참인 것은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 체계가 참될 경우 그 체계가 참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면 (예를 들어 중관파 불교처럼 모든 생각은 거짓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그 종교의 진리성을 의심해야할 이유가 된다.

<여기서도 이 책 전체, 아니 기독교 철학자들 전체의 불교에 대한 오해가 드러난다. 어째서 이런 식의 가당찮은 오해가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이들의 부주의는 어떤 오만에서 비롯되는가?>

3. 종교 체계의 진리는 그 체계가 참되기 위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것과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궁극적인 실재에서는 어떠한 구별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이것을 단언하는 종교적 진술문들이 참되고 거짓이 아니라는 주장과 양립할 수 없다.

4. 종교 체계를 제공하는 유일한 이유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해 준다는 것인 반면에 실제로는 그 종교 체계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체계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종교 체계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되었지만 이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그 종교 체계를 옹호해야할 이유가 없다.

5. 종교 체계의 본질적인 진리들은 과학이나 심리학에서 잘 입증된 자료들과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6. 종교 체계와 상반되는 증거를 피하기 위한 억지 가설들은 그 종교 체계에 불리하다.

7. 하나의 체계는 인간의 경험을 폭넓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Religious Experience and Rational Appraisal," Religious Studies 8 (1974): 185-6)

얀델의 기준에 한 가지 덧붙인다면,

8. 종교 체계는 기본적인 도덕적 직관과 미적 직관을 만족시켜야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더 민감하고 책임성 있는 삶을 영위하도록 해야 한다.

 

 

14| 종교 윤리 - 신과 도덕성의 관계

(442-7)종교 윤리적 진리의 근원

*Robert Adams(1937- ): 윤리적인 진리의 원천과 신의 의지를 결합하고 싶어하지만, “신의 의지라는 이유만으로 종교인이 신의 의지를 수행한다는 것은 아니다. 즉 신이 명령한 것을 신의 명령이라는 이유만으로 유신론자가 수행할 것을 언제나 요구받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잔인한 행위를 하라는 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유신론자가 그대로 행하지 않더라도 잘못이 아니다. 그 이유는 신의 명령은 일정한 조건이 전제될 때에만, 즉 우리가 신의 속성이라고 생각하는 속성, 이를테면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속성을 신이 갖는다는 것이 전제될 때에만순종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A Modified Divine Command Theory of Ethical Wrongness," in Louis Pojman ed., Philosophy of Religion (Belmont: Wadsworth, 1987), p. 527, pp. 533-4).

 

(447-1)종교윤리적 진리의 권위적 기초

- 신에게 기원을 두는 도덕률이 그 권위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Alasdair MacIntyre: “어떤 사람이 신의 [윤리적인] 믿음들을 권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들은 무엇인가?”("Which God Ought We Obey and Why?" Faith and Philosophy 3 (1986): 359). 유신론자들이 신을 완벽하게 선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을 경우에는 신에게 그 기원을 두는 도덕률을 궁극적인 도덕기준으로 정당하게 볼 수는 없다.

 

- 신의 선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는 무엇인가?

 

*Kai Nielsen(1925- ): 유신론자들은 신의 선이 사실적인 또는 증거상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전혀 쓸모없다. 즉 신의 행위들에 근거해서 신이 선하다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신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선의 기준을 이미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도덕률이 궁극적으로 신을 기원으로 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유신론자들의 또 다른 방안은 신은 선하다라는 서술문을 정의상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선이 신의 필연적인 특성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무슨 근거로 그들이 숭배하는 존재자를 이라고 부르는가? 즉 유신론자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고서 받아들인 도덕률을 자기네에게 준 존재자가 실제로 신이라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아는가?

결론적으로 유신론자들이 도덕률의 근거로 취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윤리적 직관일 뿐이다.

 

Objection: 닐센의 비판은 윤리적 진리의 기원이 전적으로 신 - 예컨대 신의 본성 - 에게만 있다고 주장하는 유신론자들에게만 적용된다. 건전한 유신론자들은 자신의 도덕감의 신적기원을 긍정함으로써, 신의 선을 자신의 윤리적 기준에 의해서 판단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 자신이 개인적으로 형성한 윤리적인 기준이 최종적인 윤리적 권위를 갖는다는 것은 정당하게 부인할 수 있다.

 

(451-8)종교에 근거한 윤리적 진리의 획득

- 유신론자들은 어떻게 해서 신이 윤리적 진리의 기원이라는 통찰을 획득하게 되는가?

유신론자들은 신이 일정한 형식의 씌어진 계시(예를 들어 성경이나 코란)를 통해서 윤리적 진리들을 말해 줬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성이 신의 윤리적 진리를 발견한다. Aquinas의 자연법 전통.

신의 윤리적 진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본유적이다. 신의 형상대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의미 속에는 신의 윤리적 형상도 포함된다는 것.

일부 윤리적 진리가 생득적이라고 주장하는 유신론자들은 문화적 조건화(cultural conditioning)를 강조한다. 기본적으로 각 사람이 신의 도덕률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과, 그러한 이해가 지배적인 것으로 언제나 의식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라는 것.

 

(458-64)종교에 근거한 윤리적 진리의 의미

- 윤리적 진리의 근원이 신이라는 주장이 무신론자들에게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

*유신론자들은 비록 무신론자들이 자기네의 기본적인 윤리적 믿음들의 신적기원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서로 의미 있는 윤리적 담화를 나눌 수 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윤리적 근거를 인간에게 둔다. 즉 근본적인 차이를 노정한다: Sartre -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Jean-Paul Sartre, "The Humanism of Existentialism," in Philosophy: A Literary and Conceptual Approach, ed. Burton Porter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4), pp. 70-1)

 

*Hans Küng(1928- ): “인간이 신을 부정하면 실재의 궁극적인 이유와 지지와 목적을 거스르는 판정을 내리는 셈이 된다”(On Being a Christian, p. 75)

그러나 여전히 증명의 부담은 유신론자들에게 있다. 즉 유신론자가 입증해야 하는 것은, 우주적 의미를 부인하지만 여전히 개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노라고 주장하는 비유신론자들이 이러한 입장을 주장할 경우에는 정당화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우주적인 의미를 부인하더라도 개인적인 의미를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논변을 유신론자들은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464-71)현행 쟁점들

*덕의 윤리학(virtue ethics): MacIntyre - 넘어진 할머니를 도와 준 팀과 빌의 각각 다른 사례. 이 두 사례에서 우리는 윤리적 출력(ethical output)에는 만족스러워 하지만, 윤리적 입력(ethical input)에 대해서는 다른 평가를 내릴 것이다. 윤리적 입력에서의 이런 차이를 논할 때 의무나 덕의 견지에서 논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즉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이유는 그런 의무가 덕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런 시각에서 덕윤리학은 종교윤리를 좀 다르게 본다. 그것은 더 이상 윤리적 행위를 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우리에게 원하는 유형의 인간이 되는 견지에서 생각한다. 즉 윤리적 삶의 본질은 종교적이 되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종교적이게 되면, 우리는 올바른 종교적인 방식대로 행동할 것이다. 우리의 종교성 개발은 종교적인 의무의 실현에 앞서 발생한다.

악의 존재에 대해 기독교인이 대답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오류다. 악은 해답을 필요로 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답변을 요구하는 실천적인 도전이다. 이 악을 없앨 수 있는 관심의 공동체가 필요하다(Stanley Hauerwas)

 

*페미니스트 윤리학: 여성의 도덕적 경험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험들이 이전에 인식하지 못했던 윤리적인 쟁점들을확인시켜 주고, “기존의 윤리적인 쟁점들에 대해 신선한 관점을 도입하며 여성을 완전한 도덕적인 행위자로서 보기보다는 어린아이나 원시 상태에 가까운 존재로 보는 전통적인 관점에 대항하기 때문이다(Alison M. Jaggar)

종교적인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중심적인 전통적 신학 윤리를 해체하고 완전히 새로운 종교 윤리 - 여성의 경험들에서 나온 개념과 언어에 근거한 윤리 - 의 창안을 목표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