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과학사상사》 G. E. R. 로이드 지음, 이광래 옮김, 지성의 샘, 1996
_ '☞'는 발췌자의 주석임.
G. E R. 로이드(Sir Geoffrey Ernest Richard Lloyd, 1933~ ): He is a historian of Ancient Science and Medicine at the University of Cambridge. He is the Senior Scholar in Residence at the Needham Research Institute in Cambridge, England.
Lloyd was raised in London and Wales. His father, a Welsh physician, specialized in tuberculosis. After a nomadic early education in six different schools, he obtained a scholarship to Charterhouse, where, despite an indifferent academic culture, he excelled in mathematics, and learned Italian from Wilfrid Noyce. The curriculum was biased to classics, which he was advised, misleadingly in his later view, to pursue. On obtaining another scholarship to King's College, Cambridge he came under the influence of the pre-Socratics specialist John Raven. He spent a year in Athens (1954-1955) where, apart from learning modern Greek, he also mastered the bouzouki
A keen interest in anthropology informed his reading of ancient Greek philosophy, and his doctoral studies, conducted under the supervision of Geoffrey Kirk, focused on patterns of Polarity and Analogy in Greek thought, a thesis which, revised, was eventually published in 1966. He was called up for National Service in 1958 and was posted to Cyprus after the EOKA insurgency. On his return to Cambridge in 1960, a chance conversation with Edmund Leach stimulated him to read deeply in the emerging approach of structural anthropology being formulated by Claude Lévi-Strauss. In 1965, thanks to the support of Moses Finley, he was appointed to an assistant lectureship. A recurring element of his approach was the consideration of how political discourse influenced the forms of scientific discourse and demonstration in Ancient Greece.
After a visit to lecture in China in 1987, Lloyd turned to the study of Classical Chinese. This has added a broad comparative scope to his more recent work, which, following in the wake of Joseph Needham's pioneering studies, analyses how the different political cultures of ancient China and Greece influenced the different forms of scientific discourse in those cultures. In 1989 he was appointed Master of Darwin College, where he remains as an Honorary Fellow. Presently he spends a part of each year in his other home in Spain,[citation needed] where much of his writing is now done.-from Wikipedia
- 출처: en.wikipedia.org/wiki/G._E._R._Lloyd
차례
옮긴이의 말
머리말
1장 배경과 기원
2장 밀레토스 학파의 학설
3장 피타고라스 학파
4장 변화의 문제
5장 히포크라테스전집의 저자들
6장 플라톤
7장 기원전 4세기의 천문학
8장 아리스토텔레스
9장 결론
부록: 그리스 수학 이야기
참고문헌
용어찾기
인명찾기
옮긴이의 말
머리말
1장 배경과 기원
[24]그들[밀레토스 학파]의 탐구는 매우 좁은 범위의 주제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순수한 ‘과학적 방법’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갖고 [25]있던 문제를 ‘질료’와 ‘실체’ 같은 개념을 쓰지 않고 정식화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이와 같은 뜻의 그리스어는 기원전 4세기까지 명확히 정의되기는커녕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레토스 철학자들의 사색을 그리스이든 아니든 간에 이전 사상가들의 사색과 확실히 구별해 주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하나는 자연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 하나는 이성적인 비판과 논쟁의 실천이다.
☞로이드의 이 말은 아예 단어 자체가 없었다는 뜻으로 새기면 안 된다. 단어의 함축이 철학적, 과학적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ousia는 철학 용어로 ‘실체’ 또는 ‘존재’의 의미를 가지지만 자연철학자들 이전에는 명확하게 그런 의미가 없었고 단지 ‘재산’이란 의미의 일상어로 상용되었다.
2장 밀레토스 학파의 학설
[41]그[아낙시메네스]가 생각하는 근원적 실체는 공기이기 때문에 얼핏 보면 그것은 [아낙시만드로스에 비해] 사고의 역행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낙시메네스는 보다 상상력 풍부한 [42]가정을 한 후에 탈레스의 물같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제1실체로 되돌아 간 것이다. 단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낙시메네스가 사물이 유래하는 근원적인 실체에 대한 학설을 그 사물들이 어떻게 그것에 유래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생각, 즉 희박과 농후의 과정에 의한다는 견해와 연관시켰다는 점이다. (...) 세계가 무차별적인 ‘한정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성장한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재기 넘치면서도 자의적인 생각과는 달리 아낙시메네스의 학설은 자연현상에서 작용하는 관찰 가능한 과정들에 대한 언급이었다.
☞로이드의 의견과 유사한 다음 의견 참조: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은 우리의 경험에 낯설고, 묘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를 우리가 제시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더구나 우주의 산출(발생)에 대한 설명에서 대립자들의 산출과정은 기원이 모호한 어떤 것(‘산출자’)에 의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아낙시메네스의 공기가 아페이론보다 우수한 원리이다. 변화의 원리를 포함하는 단일 실체로서의 공기는 우주 내 사물들의 폭넓은 다양성을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산출해 낸다.”(『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2005, p. 695)
3장 피타고라스 학파
4장 변화의 문제
[65]엠페도클레스는 근원적이면서도 단일한 실체들에 대한 생각을 이전의 저술가들보다 더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어로 원소를 나타내는 전문용어가 된 ‘스토케이온(stoicheion)’을 쓰지 않는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플라톤이다- 그러나 그는 흙, 물, 공기, 불에 대해 명확히 정의된 의미로 ‘rhizomata(뿌리)’를 사용한다. 첫째, 뿌리 그 자체는 생성하지 않고 영원하며 무에서는 창조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원래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원소적이다. 둘째, 세상에 존재하는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뿌리의 혼합, 분리의 원인이 되는 ‘사랑’과 ‘투쟁’과 더불어 생겨나게 된다. 특히 엠페도클레스는 합성물과 합성물을 만들어 내는 성분을 확실히 구별했다.
(...)
[66]구성요소라는 생각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어떤 철학자에 의해서보다 엠페도클레스에 의해 더욱 명확하게 파악되고 있다. 그의 네 가지 뿌리는 영원하며 단순하기도 하다. 다른 것들이 이것으로 분해될 수 있지만 이것들은 더 이상 다른 것으로 환원불가능한 구성요소이다.
5장 히포크라테스전집의 저자들
[81]《의사의 마음가짐(잠언, Precepts)》이라는 제목의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 이 논문은 의사들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쓸데없는 걱정을 시킬지도 모르므로 보수에 대해서는 환자와 신중히 논의할 것. 그리고 보수를 정할 때 의사는 환자의 재산을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무료로 치료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것.”
☞당시의 소피스트들이 때로는 거액을 받고 수업을 했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이들은 일찍부터 연구윤리가 무엇인지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88]질병의 원인에 대한 문제는 인체의 구성요소의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바로 의사의 관심이 자연철학자의 관심과 중복된다. 또한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문제를 연구하는 바른 방법에 대해서도 논쟁하게 한다. 《고대 의술에 대하여》의 저자는 특히 철학자의 방법을 의술에 [89]적용한 사람들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한다. 그가 누구보다도 비난한 사람은 ‘열’, ‘냉기’, ‘건조’, ‘습기’ 같이 ‘히포테시스(hypothesis)’-가정 또는 상정-라고 부르는 것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이론을 세우는 이들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러한 이론이 ‘질병의 원인에 대한 원리를 짜내고 있다’고 비판한다. 의술은 기술 ‘techne’이며 훌륭한 의사이건 그렇지 못한 의사이건 모두 기술자라고 그는 제1절에서 말하고 있다. 환자에 대한 치료는 그럭저럭 요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경험을 요하는 것이다. (...)[90]사실상 이것은 과학이론에서의 검사의 필요성에 대한 진술이다. 검증가능성에 대한 저자의 기준에 의하면 천상이나 지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사색은 적어도 검증불가능하기 때문에 가치가 없는 것이다. (...)[94]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많은 중요한 생물학상의 학설에 대해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종자의 구성 문제에 관해 기원전 5세기 말과 4세기에 제기된 중요한 아이디어의 대부분은 임상의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특히 처음엔 데모크리토스,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이 제공한 것이다.
☞최근의 ‘지적 사기’ 논쟁이 떠오르는 구절이다. 고대의 과학과 철학 간의 논쟁이 지금의 구도와 다른 점은 철학이 먼저 자연에 대한 개념을 제기했던 고대와는 달리 지금은 과학이, 특히 현대물리학과 생물학이 새로운 개념들을 무더기로 제공한다는 점이다. 철학은 그러한 개념들을 ‘전용’한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먼저 발끈하는 쪽은 과학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소위 ‘지적 사기’ 논쟁에 대해서는 위키에 아주 잘 설명되어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C%86%8C%EC%B9%BC_%EC%82%AC%EA%B1%B4
이 희대의 사건의 주인공인 앨런 소칼의 저서는 이미 2000년에 번역되었다. 번역되기 전부터 학계에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96]몇몇 이론적 문제들에 관해서는 그들[철학자와 의사]의 관심사가 같았지만 우주론자들의 견해를 비판할 경우 몇몇 의사들은 의학과 철학의 관계에 관해서나 논의중인 문제에 대한 올바른 연구방법에 관해서 광범위하게 이의제기를 하기에 이르렀다. (...) 이러한 논쟁의 성과 가운데 하나는 방법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의술서의 저자들과 철학자를 분리시키는 한 가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 그들의 기본적인 탐구 동기에 있다. (...) 우선 의사는 철학자와 달리 결국 실제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 의술은 훌륭한 개업의와 그렇지 못한 개업의 모두에게 공통되는 하나의 기술이다. 의사들이 염두에 두고 있던 궁극적인 목적은 사실상 환자의 치료였던 것이다.
☞플라톤이라면 의술 ‘자체’는 존중했겠지만, 그것의 기술적 사용은 경멸했을 것이다. 과연, 이런 측면에서 철학적 관념론이 땅을 딛고 섰으면서도 그 땅의 ‘더러움’을 경멸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방면에서 수많은 소재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당시나 지금이나 더 진지한 쪽은 과학자들이다. 철학자들은 마땅히 ‘진지함’보다는 다른 쪽에서 더 탁월한 윤리적 가치를 발휘할 것이지만 말이다. 즉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철학자들이 시큰둥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철학의 임무는 그런 것이 아니니까.
6장 플라톤
[114]그[플라톤]가 감각이나 관찰보다도 이성을 선택한 것은 자연연구의 관점에서 볼 때 유익하면서도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것일 수 있다. 자연현상에 대한 그의 연구방법은 몇 가지 점에서 그보다 더 경험주의적인 동시대인들 특히 의학서 저작자들의 그것과 불리하게 대비될지도 모른다. 모든 원인에 대한 그의 설명과 관련하여 경험에 의존하는 자세한 탐구를 시도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때때로-예를 들어 해부학에서-그렇게 했다면 많은 것을 얻어냈을 것이다. 감각의 사용을 모욕하는 그의 도발적인 갖가지 말들은 관찰이 전혀 무가치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관찰이 추상적인 사고보다 못하다는 것을 암시할 뿐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은 몇 가지 점에서 역시 경험적인 연구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플라톤의 적극적인 면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자의 연구는 경험적인 데이터의 배후에 있는 추상적인 법칙을 발견하[115]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옳았다. 우주의 수학적 구조에 대한 그의 신념-피타고라스 학파로부터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이나 이상적, 수학적 천문학과 물리학이라는 그의 개념은 그가 이루어낸 가장 중요하고도 결실 있는 아이디어였다. 우리가 오늘날 이 두 가지 아이디어를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고대에서 그것들의 가장 강력한 대변자로서 이룩해 낸 플라톤의 업적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이는 것이다.
이 책 전체에 걸쳐서 로이드는 고대 철학을 현대과학의 기준에서 헛되게 비판하거나, 현대과학과 고대철학의 엉뚱한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경계한다. 플라톤에 대한 이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문학이나 생물학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유지된다.
7장 기원전 4세기의 천문학
*에우독소스(? ~ BC. 355)의 천문학
☞에우독소스의 천문학을 설명하는 그림들
☞에우독소스(Eudoxus of Cnidus, 410 or 408 BC – 355 or 347 BC) 관련해서 두 개의 인명사전:
http://www-groups.dcs.st-and.ac.uk/~history/Biographies/Eudoxus.html
http://en.wikipedia.org/wiki/Eudoxus_of_Cnidus
*칼리포스의 천문학
☞칼리푸스(370 BC – ca. 300 BC) 관련 인명 사전 링크:
http://en.wikipedia.org/wiki/Callippus
http://www-history.mcs.st-andrews.ac.uk/Biographies/Callippus.html
‘칼리푸스 주기’ 네이버 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150778
*헤라클레이데스의 천문학
[134]“지구는 중심에 있으면서 회전하고 있으며 하늘에 정지해 있다. 헤라클레이데스는 이러한 가정에 의해서 현상을 해석하려고 생각했다.”[심플리키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천체론 주석》 중] (...) 이 가설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가정될 수밖에 없었던 천체운동수가 상당히 절감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학설은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BC. 310~230)의 태양중심설과 마찬가지로 고[135]대에는 거의 지지받지 못했다. 그 이유도 또한 비슷했다. 고대의 천문학자들은 지구가 어떤 움직임이든 간에 공간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낙하하는 물체의 움직임과 구름의 움직임에는 확실한 영향이 나타나야 할텐데 실제로 어떠한 영향도 관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헤라클레이데스 관련 인명 사전 링크:
http://www.britannica.com/EBchecked/topic/262434/Heracleides-Ponticus
http://en.wikipedia.org/wiki/Heraclides_Ponticus
[138]기원전 4세기 천문학의 가장 큰 중요성은 관측방법의 진보에 있는 것도 아니며 경험적 데이터의 수집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수학적 방법을 복잡한 자연현상에 적용하는 것을 성공시킨 데에 있다. 어찌보면 그러한 방법을 적용시키려는 자극은 철학에서 얻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천문학을 엄밀과학으로서 다루어야 한다고 제일 먼저 주장한 사람은 플라톤이었다. (...) 따라서 에우독소스와 헤라클레이데스가 플라톤과 연관된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는 할 수 없다.
8장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문학과 물리학
[150]얼핏 보기에 물질의 궁극적인 구성요소에 관한 그의 이론은 실망스러울 만큼 퇴보한 것처럼 보인다. 원자론자나 플라톤의 양적, 수학적 이론이 나온 뒤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양적 이론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다른 모든 실체는 흙, 물, 공기, 불같은 네 가지 단순물체가 합성된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그것들은 각각 흙은 냉기(cold)와 건조(dry), 물은 냉기(cold)와 습기(wet), 공기는 열(hot)과 습기(wet), 불은 열(hot)과 건조(dry)라는 네 가지 기본적인 상반된 성질들 가운데 둘씩 조합시킨 것으로 취급된다-하지만 그리스어의 ‘hygron’과 ‘xeron’은 영어의 ‘wet’와 ‘dry’보다도 넓은 의미를 갖고 [151]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hygron’은 액체와 기체로도 형용할 수 있는 말이며, 특히 ‘xeron’은 고체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 도식:
[153]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지구상의 모든 물질은 흙, 물, 공기, 불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천체는 전혀 다른 실체, 즉 제5원소인 ‘aither’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 학설은 아마도 고대 이래 다른 어떤 과학이론보다도 많은 비판이나 조소를 받았을 것이다. (...) 문제가 되는 것은 천체의 영원하고도 변함없는 원운동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 우리는 천체가 영원불변한 운동을 한다고 가정한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154]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연히 원운동하는 것은 지상의 구성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일 수도 없고 그것들의 복합일 수도 없다. 지상의 요소의 자연적 운동은 상승하든가 하강하든가 둘 중 하나이기 때문에, 만일 그것이 원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마치 돌이 돌던지기 기구같은 인위적인 힘이 가해져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그 운동은 강제된 것이 된다. 따라서 거기에는 자연히 연속적으로 원운동하는 그 무엇인가가, 즉 제5원소가 없으면 안 된다.
[160]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에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거듭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분야를 개척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만일 과학적 문제 전반에 대한 그의 방법과 연구방법에 간해서 그의 물리학의 이 분야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이론을 정립하는데 아프리오리한 원리에 따라 관찰된 사실을 마음대로 무시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이 다소 피상적인 관찰에 근거하여 성급하게 일반화되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
[164][생물학에서] 그가 이끌어낸 결론은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의는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장점을 갖고 있다. 첫째는 문제 그 자체를 정식화할 때의 명확함이고 둘째는 그 어떤 논의를 전개하고 분석할 때의 교묘함과 날카로움이다.
․판게네시스(pangenesis)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과학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os, BC373~BC287): 그리스의 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구이자 제자이며, 그의 학교 리케이온(Lykeion 혹은 Lyzeum)의 후계자이다. 스승의 학설을 발전시킨 많은 저작이 있지만 일부분밖에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그가 그의 『형이상학』 속에서 스승의 경험론적인 경향을 발전시켜 스승의 목적론적 고찰 방식에 비판을 가하고 목적 원인의 적용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 것은 중요하다. 그는 『식물학』, 『식물의 여러 원인』을 통해 식물학의 시조로 알려졌으며 또한 『윤리적 성격들』에서는 각종의 인간 성격을 뛰어나게 묘사하였다. 철학사의 자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연학의 역사에 관한 저작도 남아 있다. - 『철학사전』, 중원문화
※ 아주 상세한 ‘위키 사전’도 참고: http://en.wikipedia.org/wiki/Theophrastus
☞스트라톤(Straton, Physius, ?~BC269년경): 랑부사코스 사람으로, 테오프라스토스에 이어 페리파토스파(Peripatetics)를 지도하였다. 데모크리토스의 영향 아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개조하여 유물론적 세계관에 도달하였으며, 세계는 따뜻하고 찬 두 가지 성질을 지닌 분할 가능한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자연학자'(physikos)로도 불려지며,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의학, 천문학, 기계학 등에 영향을 미쳤다.- 『철학사전』, 중원문화
※ 마찬가지로 ‘위키’ 참고: http://en.wikipedia.org/wiki/Strato_of_Lampsacus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171]자연과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부분의 작업은 그의 스승 플라톤과 공유하고 있던 기본적 가정을 특징으로 한다. 두 철학자 모두 세계는 이성적 기획의 산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철학자가 연구하는 것은 형상과 보편이지 개별이나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지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확실하며 반박가능한 것 뿐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 관점을 달리하면 자연과학에 대한 태도를 반영하는 몇 가지 점에서 그들의 의견은 아주 달랐다. 플라톤이 이데아는 개별적 사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부정하여 형상과 질료는 사고에서는 구별할 수 있지만 우리를 둘러싸는 세계 속의 사물에서는 실제로 구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 또한 플라톤이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감각의 역할을 무시한 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찰이라는 것을 복권시켰다. 그들은 우리가 과학자라고 부를 만한 중요한 공헌을 했지만 그 공헌의 성격에서는 아주 다르다. 플라톤은 주로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를 위해 수학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룩한 근본적이고 영원한 공헌 가운데 하나는 자세한 경험적 탐구를 이론상으로 주창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수행해 보인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과학의 비교에 관한 잘 된 요약문: http://www.wisdomworld.org/additional/ancientlandmarks/PlatoAndAristotle.html
9장 결론
*초기 그리스 과학의 경제적 배경
[174]과학적 탐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무엇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는지에 대해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보완적인 해답이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즉 (1)독립적인 수단, (2)의술이나 교수 활동 같은 보수가 있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 (3)사람들로부터의 후원 등 세 가지이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인 독립적인 수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재산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 [175]비교적 큰 도시국가의 많은 시민들이 자연에 관한 탐구 이외에 많은 문화적 생활 뿐만 아니라 정치적 모략과 법정 소송 같은 비교적 비생산적이고 반생산적인 활동에 많은 시간이나 에너지를 소비할 수 있을 정도로 금전적인 걱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과학 그 자체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 과학 사상의 발전에 대해 너그러운 의미에서 직업이라고 불러도 될 듯한 일, 특히 의술이나 교수활동을 함으로써 돈을 번 사람들이 이룩한 몇 가지 중요한 공헌이 있다. (...) [176]의술이라는 ‘직업’의 유행이 그리스 과학에서 중요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개업의(開業醫)로서 과학에 종사한 사람들: 헤로필로스(Herophilos), 에라시스트라토스(Erasistratos), 페르가몬의 갈레노스(Galenos: AD. 129?~199?)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경제적 하부구조를 알기 위해서는 조지 톰슨(George Thomson), Studies In Ancient Greek Society V2: The First Philosophers (『고대 사회와 최초의 철학자들』, 조대호 역, 고려원, 1992)이라는 책이 매우 중요하다. 이 책은 철학과 과학 그리고 정치와 경제가 뒤얽힌 그리스 사상의 이면을 매우 철저하게 파헤치는 역작이다.
그 중 일부를 인용하자면,
세 사람[솔로, 아낙시만드로스, 탈레스] 모두 청동기 시대부터 계승된 전통들을 간직한 유서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이 가문들은 상업적 활동에 발을 들여 놓음으로써 상업귀족mercantile aristocracy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계층으로 발전하여 토지 소유자들로 이루어진 소수 지배계급과 인민대중 사이의 중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원시적 사유 안에서는 사회와 자연은 하나였다.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는 자연을 사회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외적인 실재로 제시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솔론은 사회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는데 성공했고 그것을 인간 특유의 제반 의무에 기초한 도덕적 질서로서 제시했다. 달리 말하자면 아낙시만드로스가 자연을 대상화했던 것처럼, 솔론은 사회를 대상화했던 것이다(267)
우리는 민주적 사고 안에서 세 가지 주된 흐름을 구별할 수 있다. 첫째는 밀레토스의 아낙시만드로스와 아테네의 솔론에 의해 대표되는 것으로, 이것은 새로운 상인계급과 운명을 같이했던 귀족의 일파에 의해서 수정, 발전된 낡은 귀족적 전통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이미 논의한 바와 같다. 둘째는 파산한 소농층의 전통과 열망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것에 있어서는 사정의 본성상 대표자가 될 만한 어떤 유명한 인물은 없지만, 오프페우스라는 신화적인 인물과 관련된 신비적인 제의를 통해 연구해 볼 수 있다. ... 셋째는 다른 두 흐름의 종합으로 볼 수 있는 피타고라스 철학이다(276).
그 운동[오르페우스 운동]이 소농층 사이에서 시작되었다는 가설은 오르페우스교 문헌을 헤시오도스의 시들과 비교해 보면 한층 더 굳건해진다. 오르페우스교 저술가들은 호메로스에게는 힘입은 바가 거의 없지만 헤시오도스에게는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점인데, 그 까닭은 그 자신이 소농이었던 헤시오도스가 주로 소농층을 겨냥해서 자신의 시들을 지었기 때문이다(278).
파르메니데스는 모이라, 디케, 아낭케에 똑같은 속성을 부여한다. 한 세기 뒤에 플라톤의 [국가]에서 아낭케는 모이라의 지위를 빼앗고 그녀의 방추 장비까지 갖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호메로스 이래 그리스 문헌 전체에 걸쳐 아낭케, 즉 ‘강제’와 둘레이아douleia 즉 ‘노예신분’의 관념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전자는 항상 노예의 지위와 노예들이 겪는 가혹한 노동과 고통을 함께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282).
반란이 일어났던 BC. 2세기 말엽 이 광산에 고용된 노예의 수는 수만명을 육박했다. BC. 6세기에는 노예와 자유민을 합친 작업 인구가 더욱 줄어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BC 1세기 이집트의 금광에 대한 디오도로스의 설명을 통해 노동조건을 어느 정도 머리 속에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284). ... 차안과 피안에 대한 오르페우스교의 수많은 비유들 - 어린아이 적부터 손발이 쇠사슬에 묶여 전혀 햇볕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갖혀 있다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물과 진창과 불과 유황으로 뒤범벅된 지하 미로들이 있다는 타르타노스에 대한 지형 묘사나 또는 정의로운 자들의 영혼들이 안거하고 있다는 맑은 하늘 아래의 상층계에 대한 묘사 - 의 밑바닥에 놓인 상상을 최초로 자극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실상들이었다(286-7).
(...) 가르치는 일은 그리스 과학의 발전에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중요했거나 중요해졌다. 첫째 이것은 의술과 마찬가지로 생활의 양식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며 둘째, 아카데메이아와 리케이온 같은 학술기관이 연구 조사를 하는 데 공동작업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 아카데메이아는 수학이 더 강하고 생물학은 비교적 약했던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 시대의 리케이온은 그 반대였다. 하지만 이소크라테스학교 같은 기원전 4세기의 다른 학교에서 과학은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또한 재정면에서도 학교마다 달랐다. 아카데메이아는 적어도 처음에는 예외였는지 모르지만 보통은 학생이 청강료를 내거나 (이에 덧붙여서) 학교의 전반적인 유지를 위해 기부금을 내야 했다. 아무튼 (...) 가르치[178]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거나 보조적인 수입원이었음이 분명하다.
[178]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히 기원전 342년에 필립포스왕에게 선택되어 알렉산드로스(Alexander: BC. 356~323)의 스승이 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기원전 342년)에나 그 이후(기원전 335년)에 아테네에 돌아왔을 때마다 마케도니아의 호의와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179]만 그의 학교가 알렉산드로스로부터 또는 그 섭정자인 안티파트로스(Antipatros)로부터 직접적인 원조를 받은 것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 강력한 지배자의 후원이 그리스 과학자의 작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은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의 청설(기원전 280년 경) 이전에는 없었다.
*실용적 지식과 과학
*요약
[196]우리가 고찰해 온 시기의 끝 무렵(리케이온의 설립 이후)에서도 과학은 소수의 개인적 관심사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테네가 아닌 다른 곳과 우리가 다른 시기 이외에는 실제로 과학자의 존재가 아주 희귀했다는 것을 밝혀 두어야 할 것이다. (...) 과학 그 자체가 국가의 지원을 받은 적도 없었다. (...) 과학이 물질적인 진보의 핵심이라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지배적인 생각이 고대에는 전혀 없었으며, 바로 그러한 생각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그들의 과학적 활동의 범위도 보잘 것 없었던 것이다. 이 연구에서 논의해 온 과학자 모두를 합쳐도 오늘날 대학에서 과학을 담당하고 있는 교원 수에 못 미칠 것이다.
☞‘국가의 지원’을 현대의 기준으로 놓고 본다는 건 하나마나한 소리가 되겠다. 하지만 로이드는 당시 철학과 과학의 주체들이 대개 귀족 가문 출신들이었으며(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은 물론이고) 아테네 도시국가 자체가 노예제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 즉 국부의 대부분이 국가 생산력의 상당한 주체(노예 노동)에 의해 담당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방면에서는 George Thomson이 훨씬 유능한 판단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198]가장 중요한 업적은 (1)자연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수학을 적용하였다는 것과 (2)경험적인 탐구를 하려는 의도로 방법론상 주요한 두 가지 원칙[가설적 모델의 구상과 경험적 관찰]을 전개한 것이다. (...) [199]이 두 가지 원칙은 우리에게는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상도 가능할 것이다. 설계(design, 히브리적 창조의 원관념)와 제작(demiurge, 헬라스적 창조의 원관념)의 이상은 애초에 어떤 매개를 필요로 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경험’과 ‘관찰’이었다고 말이다.
부록: 그리스 수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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