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코뮨주의』, 그린비, 2010
서문: 다시 도래할 실패를 기다리며
1.
(5)코뮨주의commune-ism는 공산주의communism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산주의로부터 나왔다. 그것의 실패로부터. (...)그것은 하나의 공산주의를 수많은 코뮨주의들로 대체할 뿐 아니라, 거꾸로 지금까지 존재해 온,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코뮨들을 가시화해 줄 것이다. 우리에게 갈 길은 하나가 아니라 수도 없이 널려 있었던 것이다!
(6)실패를 통해 열린 수많은 가능한 형상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7)코뮨주의란 그 끝없는 실패로 인해 영원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반복의 긍정이다. (...) 그 실패가 되돌아올 때마다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그 영원한 실험의 장을 기꺼이 긍정하는 것이다. 메시아로서 도래할 어떤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라기보다는, 도래할 또 한 번의 실패를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다가올 실패를 사전에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최소한을 말하는 신중함보다는, '결국은' 다시 실패로 귀착될지라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긍정할 수 있는 최대한을 말하는 과감함의 편에 서고 싶다.
(8)코뮨주의는 존속하는 만큼 성공인 것이다. (...) '실패로 끝난' 100년이란 사실은 100년간의 성공을 뜻하고, '실패로 끝난' 20년이란 20년간의 성공을 뜻하는 것이다. 더구나 코뮨이 삶 그자체인 한, 그것은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2.
(8)잠재성은 현행적인 실행 없이는 막연한 철학적 위로를 벗어나기 어렵다. 현행적인 실행을 통해서만 잠재성은 잠재적 실존을 획득하며, 그것에 담긴 공동성은 실재성을 얻게 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원인이 결과 이전에 미리 존재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결과를 통해서만 원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고, 결과를 이미 함축하고 있는 조건이란 점에서 결과의 결과가 아니라 분명히 원인이다.(...) (9)따라서 어떻게 가동시킬 것인가 하는 현행적 질문 없이는 코뮨에 대해 제대로 사유할 수 없다.
(9)어떤 코뮨도 자본주의와, 또한 가치법칙과 대결하지 않고선 존속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혹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그러나 보이지 않는 코뮨주의
코뮨주의
(10)휴머니즘이나 인간학적 사유의 틀을 넘어서지 않고선 이 존재론적 코뮨주의도, 코뮨적 정치학이나 경제학도, 나아가 코뮨주의의 실제적 구성도 충분히 나아갈 수 없다. (...) (11)[그러나] 휴머니즘은 단지 이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현실적 삶 속에서 현행적으로 가동되는 것이(다.) (...) 휴머니즘을 넘어선다는 것은 넘어지면서 다시 넘어서려고 하는 그 매번의 시도로서만 존재하는 것일 게다.
코뮨주의는 이전의 목적론적 '메시아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수많은 형상들을 하나로 수렴케 하는 어떤 단일한 귀착의 논리를 갖지 않기 때문이고, 역사를 인도할 임무를 자임하는 어떤 약속의 내용을 구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며, 거꾸로 새로운 사유의 실험들, 새로운 실천의 실험들을 자극하는 하나의 촉발이 되기를 시도하려 하기 때문이다.
(12)(일반화된 코뮨주의에서) '일반성'이란 보편성의 동의어가 아니라, 반대로 보편성의 이름을 주어지는 모든 척도를 제거함으로써 모든 것들이 하나로 묶이는, 그리하여 어떤 위계나 심연 없이 하나로 만날 수 있는 평면화의 결과일 뿐이다. (...) 따라서 일반화된 코뮨주의란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나 생명은 물론 먼지 같은 사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주적 스케일의 존재론적 공동성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이 '하나'임을, 하나로 묶일 수 있음을 보려는 시도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 그 하나로 묶인 것을 넘나들 수 있는 장의 이름을 뜻한다. (...) '일반화'란 상이한 것들을 묶어 주는 하나의 공통성을 찾는 진중하지만 거친 판결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 연결하는 이런저런 작은 선들을 찾아 서로가 만나면서 새로운 공동성을 형성할 수 있는 (13)방법을 찾는 가볍지만 세밀한 탐색이다. (...) [따라서, 코뮨주의는] '공동체'라는 말을 인간이라는 '특별한' 존재자들로 제한해서 사용하는 '특수한' 코뮨주의가 아니라, 인간 아닌 모든 요소들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능동적 요소임을 보는 '일반화된' 코뮨주의. 코뮨의 구성이란, 혹은 코뮨주의란 인간 간의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는 것일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 나아가 인간과 사물의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고, 그것들과 살아가는 다른 삶의 방식이다.
1부 존재론과 코뮨주의
1장 코뮨주의적 존재론과 존재론적 코뮨주의
1. 공동체의 불가능성?
(18)(공동체의 형상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되돌아오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좀더 나은 삶에 대한, 살아 있는 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의 이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결코 완성될 수 없고 완결될 수 없는 불가능한 꿈이기 때문일 것이다.
(20)공동체는 부재하는 게 아니라 항상-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21)옆에서 죽어가는 타인을 볼 때,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 사람들이 함께-출현(출두)하게 될 때, 죽음이라는 공동의 사건 앞에서 존재의 유한성을 분유하게 될 때, 그리하여 죽음 앞의 수동성을 통해 주체가 소실되고 모든 계획이나 '유위'가 해체될 때, 공동체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굳이 만들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존재론적 운명 같은 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 합일이나 합치의 이념 속에서 공동체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공동체란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그것은 공동체란 공동체를 만들려 하지 않는 곳에만 존재함을 뜻한다. 공동체를 원한다면 공동체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21)현실적인 공동체의 실패가 개인주의의 승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런 관심이나 욕망이 있다고 해도 어떤 목적으로든 현실적인 공동체를 만들려 해선 안 된다는, 다만 분리와 균열, 타자성에 열린 태도를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윤리적 교훈을 준다.
(22)"공동체를 철학적 진리의 이름으로 가동시키는 것은 치명적인 정치적 재난을 야기할 것이다"(바디우, 『조건들』, 302-306). 그것은 해방의 정치를 오도할 것이다. (...) '우리'에게 '공동체'란 바디우 말대로 어떤 이념이나 당위의 산물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필요' 내지 '욕망'의 산물이다. 공동체란 단순히 공동성의 이념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현실적인 요구이다.
(23)나는 '소피즘'(궤변)이란 말을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소피아'sophia로 이해한다. (...) 삶이 요구하는 현실적 필요와 '존재'를 다루는 철학적 진리의 영역이 바디우나 플라톤의 생각처럼 분리되어 있다고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 존재론적 차원에서 공동체를 사유하는 것은 공동체를 현실적으로 저지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것을 촉발해야 한다. (...) 합일적인 통합체로서 공동체라는 현실적, 경험적 우려를 넘어서 공동체를 구성할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존재론적 차원의 입론이 아무리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해도, 현실적인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정치적 태도로서 코뮨주의를 유효하게 작동시킬 순 없을 것이 분명하다. 이로써 나는 되돌아오는 공동체에 대한 욕망,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따라 '정치'라고 불리는 현실 속으로 공동체가 다시 되돌아오도록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2. 개체의 자연한, 혹은 코뮨적 개체
1) 개체와 공동체
(25, 주 14)우리는 개인이란 개념에 포함된 인간이란 의미뿐만 아니라 유기체라는 의미를 벗어나서,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양태 일반의 차원에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28)[생물학에서] 근본적인 '개체'에 도달하려는 시도들의 이러한 실패들(은) (...) 거꾸로 '개체'의 본성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즉 개체란 어느 층위에서 설정되든 간에 그것을 구성하는 하위-개체sub-dividual들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 모든 층위에서 '개체'란 분할불가능한 최소단위가 아니라, (29)분할가능한 것들(the dividual)의 집합체란 점에서 (multi-dividual)이다. 즉 모든 개체는 그 자체로 무리지어-사는(衆-生) 집합체란 의미에서 '중-생'이다. 이런 의미에서 분할불가능한 개체는 없다. 오직 분할가능한 것들로 구성된 '공동체'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모든 개체는 항상-이미 공동체적 존재다."
(29)이러한 집합체 [즉,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개체]는 유기체 개념에 함축되어 있는 하나의 '목적' 개념을 전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생명이라는 '목적'을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는 전체 속의 기관이란 지위를 필연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 따라서 유기체론이나 전체주의와 다른 종류의 집합체 개념이 가능하게 된다. 구성요소들이 더해지거나 빼지면서 존속하는 집합적 개체. 물론 더해지거나 빼지는 것이 특이성에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라면, 더해지고 빼질 때마다 변이를 수반하는 그런 집합적 개체.
(31)[목적론적, 전체적이 아니라] 가변적인 집합체 (...) 상이한 개체화에 대해 열려 있는 개체 (...) 개체주의(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양극성을 가로지르는 집합적 개체로서 중-생의 개념은 물리학적 수준에서 생물학적 수준, 나아가 생태학적 수준이나 사회학적 수준에서 일반화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중-생"이라는 존재론적 명제로까지 밀고 나갈 수 있다. 개체도 아니고 전체도 아닌 집합적 개체로서 중-생은 존재론적 일반성을 갖고 있으며, 이는 모든 개체가 사실은 항상-이미 하나의 공동체임을 뜻하는 것이다. (...) "존재하는 것은 모두 공동체다."
2) 자연주의와 기계주의,
(31)개체의 단일성은 그 구성요소의 동질성이나 (32)균질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서 구성된 것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가령 생태계라는 거대공동체는 생물들만이 아니라 물과 무기물, 흙과 바위 같은 아주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로 개체화된 것이다. '대장장이'라고 불리는 개체는 망치와 모루, 불과 장작, 그리고 화로와 옷 등의 이질적이 요소들이 인간과 결합하여 구성되는 것이다.
(32)코뮨은 마치 사람들로만 구성되기라도 하는 양, 사람들 간의 관계만으로 이해되면서 그것을 구성하는 사물이나 건물들의 요소들은 쉽게 망각되고 지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코뮨을 구성하는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의 관계에는 지극히 관심을 기울이지만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 사물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등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33)자연에 대한 존중과 기술이나 기계에 대한 비판, 이러한 대립 속에서 '자연'이란 기계화되지 않은 것, 인위적으로 변형시키지 않은 것을 뜻한다. (...) [그러나] 인간이 자연 안에 있는 만큼 기계 역시 자연 안에 있는 것이고, 그런 만큼 자연의 일부다. 손대지 않은 자연과 손댄 비-자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가 말했던 것처럼 '만들어내는 자연'natura naturans과 '만들어지는 자연'natura naturata이 (34)있을 뿐이다. (...) 이런 의미에서 자연주의란 이 모든 것을 '기계'라고 부를 수 있는 한 '기계주의'와 정학하게 동일한 외연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일의성'을 잊는다면, '자연주의'란 자연과 기계, 생명과 비생명, 인간과 사물, 좀 더 근본적으로는 목적과 수단이라는 식으로 만들어진 흔한 선험적 위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따라서] 코뮨주의는 (...) 그것이 '자연물'이든 '기계'든 간에 새로운 '공동적'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 (...) [그러나] 자연과의 긍정적 관계를 구성하는 것, 절대적 상생이 불가능한 만큼, 절대적인 (35)긍정적 관계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불가능성은 그리 나아가려는 반복적인 시도 속에서 되돌아오며, 그때마다의 현재적 관계를 넘어서 다시 한 번 나아가게 만드는 불가능성이고, 그렇기에 끊임없이 다른 형태의 관계로 되돌아오는 불가능성이며, '다시 한번'의 무한한 반복을 야기하는 불가능성일 것이다.
3. 존재론적 공동성
1)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
(35)모든 개체는 항상-이미 공동체다. 중생적 공동체, 그것은 모든 양태, 모든 '존재자'들을 특징짓는 것이다.
(37)모든 개체는 존재자들의 무한한 계열 전체에, 즉 각자마다의 '우주' 전체에 기대어 존재한다. (...) 무한한 사물들의 상이한 계열, 그것은 상이한 우주이다. (...) 개체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우주들이 동시에 존재한다. 또한 그 많은 개체들의 수없이 많은 과거와 미래만큼이나 많은 우주들이 존재했으며 또한 존재하게 될 것이다. (...) 개체들은, 그것이 단일한 '개체'로서 파악되는 경우에조차 항상-이미 코뮨적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
(39)다른 한편 개체들을 존재하고 하고, 그렇기에 개체마다 짝을 이루는 이 우주가 모든 요소들이 조화로운 합일의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아주 잘못된 것이다. (...) 기대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런 목숨을 건 전쟁 같은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다.개체들을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우주, 거기에는 '합일'만큼이나 갈등과 대결, 혹은 적대와 전쟁이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 사실은 이 통찰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다. 코뮨주의가 현실화되려면 여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과연 이 전쟁상태의 우주, '파국'의 우주를 어떻게 할 것인가?
(40)상생만이 존재하는 공동체는 없다. 상극과 상쟁이 없는 공동체, 그런 개체, 그런 우주는 없는 것이다. 상생과 조화, 합일만이 존재하는 그런 존재론적 공동성은 없다. 그러기에 역으로 사람들은 언제나 상생적인 세계에 대한 꿈을 반복해 온 것이고, 존재론적 공동성이나 코뮨주의적 존재론은 좀더 상생적인,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일 게다. 존재론적으로 코뮨적 존재임에도 코뮨주의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2) 존재자의 세계성, 혹은 죽음의 존재론
[하이데거와의 근본적 차별] (41)사방세계를 동시에 모아들일 때, 사물은 비로소 사물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물은 와 닿는 것을 뜻하는 res도 이쪽에서 세워진 것으로서의 ens도, 근대적으로 표상된 대상도 아니다. 사물은 단지 사물로 되는 한에서, 즉 사방을 모으는 것인 한에서만 사물이다. (...) 세계가 깃든 사물과 그렇지 못한 사물이 구별된다. (...) [그런데] 하늘과 대지, 신들을 불러 모으는 것에만 세계가 깃들어 있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온통 담기는 쓰레기통에도, 도시를 메운 자동차들에도,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거대한 방조제에도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가, 우주가 머물러 있다. 그것들 또한 세계를 불러들이고 있다.
(42)모든 존재자는 그것이 존재하게 만든 나름의 우주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본래적'이고, 그런 점에서 모두 평등하다. 존재론적 평등성. (...) [하지만] 세계는 그 안에 항상 분열과 대립, 적대와 전쟁마저 포함하고 있다. (...) 상생과 상극, 조화와 대립, 합치와 분열이 공존한다.
(43)분열과 대립, 억압과 분쟁이 없기를 바라는 순간, 공동체란 실재하는 분열이나 억압을 보이지 않게 하는 또 하나의 환상적 억압에 사로잡히게 되거나, '퇴락한 사물'처럼 기피하고 멀리해야 할 니힐nihil한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 그러한 분열과 대립마저 긍정하고, 그것을 충돌시키며 넘어가거나 그게 아니면 그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43)우리가 말하는 존재론적 공동성의 사유는 죽음을 통해 존재론적 공동성을 사유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45)죽음을 특권화하는 사유가 어떻게 해도 인간이란 존재자를 특권화하는 것에서 벗어날 길을 없어 보인다. 그것은 어떻게 보아도 인간중심주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죽음'도 사건을 사유하게 하고, 그로부터 공동성을 사유하게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의 죽음은 있지만, '나'의 죽음은 없기 때문이다. 즉 '나'는 '우리'의 죽음 밖에 보지 못하고, 겪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카타스트로피 중에서 공동성을 확인하게 하는 것 중 하나다. 단, 죽음은 '사유할 수 없으므로'가 아니라 나의 겪음의 대상이 아니므로 그것의 공동성은 이야기성의 허구가 충분히 가미된다. 죽음의 공동성, 이에 대한 보다 섬세한 사유.
(46)전쟁이란 인간의 존재론적 공동성이, 현실적인 공동체 간의 적대와 대결에 의해 와해되는 사건이다. (47)함께-나누는 죽음, 공동성을 확인하는 죽음이란 이미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 죽음이다. 이 죽음에서 공동성은 이미 하나의 공동체의 형태로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48)나는 특정한 사물을 특권화시키는 것만큼이나 특정한 존재자의 죽음, 특정한 종류의 죽음을 특권화하는 그런 사유를 통해 존재론적 공동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4. 코뮨주의와 시간
1) 시간과 공동성
나는 이러한 시간이나 시간성[즉, 하이데거의 시간성-'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감']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50)그것은 코뮨주의적 존재론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인간 개인을 절대적으로 분리된 개체로 다루는 실존론적 사유의 지평이고, 그렇기에 개체성을 넘어서 함께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을 다루는 경우에조차, 코뮨적 존재론과는 반대로 개체주의적 지평 속에 사유를 가두는 시간관념이기 때문이다.
(51)시간이란 집합적 구성체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이 하나처럼 움직이고 하나처럼 신체를 이루며 개체화되는 리듬적인 공조현상이다. 리듬 속에서 구성요소들이 하나처럼 동조될 때, 시간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개체화되는 구체적인 존재자들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할가능한 요소들이 모여 집합적으로 개체화될 때마다, 집합적 구성물이 존재하게 될 때마다 (52)시간은 생성되고, 그러한 생성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마다, 개체화하는 리듬적 공조가 발생하는 범위마다 각각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53)시간이란 어떤 집합적 '개체'들이 분할 가능한 그 구성요소들로 해체되지 않은 채 하나의 '개체'로서 존속할 수 있게 해주는 종합의 형식이다. (...) 따라서 시간성이란 복수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코뮨적 존재로서 결합되어 존재하고 존속하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이다. 시간이란 이러한 집합적 구성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집합체와 더불어 존속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은 공동성의 작동형식이다.
-> 나는 시간성이란 공동성의 기능부전이라고 본다. 시간은 기본적으로 '덜그덕거린다.' 그것은 칸트적인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2) 실존론적 시간성과 코뮨주의적 시간성
(55)[하이데거의] 도래가 본질적으로 실존론적 시간으로서,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보는 결단성을 통해서 도래하는 가능존재를 의미하는 한, 따라서 가능존재마저 미리 달려가 보는 죽음을 통해 정의되는 한, 도래란 죽음이라는 철저하게 개별적인 분리를 야기하는 시간성에 귀속된다.
(57)코뮨주의적 시간성은 [하이데거의 철저한 죽음-각자성의 시간성과 달리] 개별자 자체를 언제나 다른 개별자와 함께 사는 존재로서 묶어 주는 삶의 시간성이고, 개체를 개별화하는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게 하여 고독하고 비장하게 만드는 시간성이 아니라 이웃한 타자들과 함께 삶을 구성하게 하는 음악적인 즐거운 시간성이고, 죽음에 대한 고독한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시간성이며, 죽음마저 삶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성이다.
5.코뮨주의의 공간성
(58)함께 집합체를 구성하는 이웃들을 내부자만으로 한정하는 태도 (...)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경우 '내부성'이 중요한 공간성으로 설정된다. 반면 외부성이란 자신과 친숙하지 않은 것,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고, 자신과 이질적인 요소들을 뜻하는 '타자'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며, (59)신념이나 이념 등에 대한 동조나 동일시 없는 외부적 요소들이 출입하고 소통할 수 있게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60)[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에서의 '내부성'과 달리] 외부성이란 친숙하지 않은 것, 자신과 구별되지 않기는 커녕 확연하게 구별되는 존재로서 타자들에게 내부를 여는 것이고, 그들과 함께 거주하기보다는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을 바꾸어 가는 것이다(물론 그들 역시 바뀌어 갈 것이다). 따라서 외부성이란 경계의 어떤 바깥은 지칭하거나 바깥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내부와 외부의 관계에 대한 특정한 태도, 경계를 설정하는 경우에도 그 경계를 폐쇄하지 않고 외부를 끊임없이 내부화하며 그것을 통해 내부를 끊임없이 외부화하고 변이시키는 태도로서 공간성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또한 코뮨적 존재로서 개체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외부적 조건을, 뜻하지 않은 사건을 다가오는 그대로 긍정하려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61)내부성에 안주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공동체를 구성하거나 코뮨적 구성체를 형성하려는 운동에서 가장 빈번하게 만나고 가장 쉽게 빠지는 위험이다.
(64)거기에 머무는 순간, 그것은 곧 내부자와 외부자를 가르고, 익숙한 것, 친한 것, 내부적인 것에 대해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며 외부적인 것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64)무능력하기에 더욱 더 방어 메커니즘의 강도와 문턱을 높이게 되고, 그것은 더욱 무능력한 신체를 만드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더불어 외부적인 것에 대한 경계심과 적대감 또한 높아갈 것이다. 이것은 결국 배타적인 집단, 종종 외부에 대해 공격적인 집단으로 귀착된다. 심지어 내부에서 발생하는 차이와 갈등에 대해서도 적대와 공격을 하게 되기도 한다.
6. 존재론적 코뮨주의?
(65)코뮨적 세계란 근대 이전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지금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는 근대 내지 자본주의적 세계에서조차 항상-이미 존재하는 세계고, 어디서나 존재하는 세계며, 여러 층위에 걸쳐 존재하는 세계다. 작은 세포나 세포소기관에서붜 가장 눈에 잘 띄는 우리의 신체 자체, 우리와 함께 생존의 그물을 직조하고 있는 생태적 관계나 사회적 관계, 그리고 지구 전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자들은 항상-이미 코뮨적 존재다. 따라서 코뮨적 존재, 혹은 코뮨주의는 공상 속에 부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항상-이미 존재하는 세계라고 해야 한다. 모든 존재자들은 코뮨적 존재인 것이다. (...) [코뮨주의는]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하게 하는 거대한 우주 그 자체다. (...) 모든 존재자가 코뮨적 존재로서 존재함으로 보려는 이러한 입장을 우리는 코뮨적 존재론, 혹은 코뮨주의적 존재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66)코뮨주의는 이중의 의미에서 유토피아주의와 다르다. 첫째, 유토피아는 장소를 갖지 않는 다시 말해 부재하는 세계임에 반해, 코뮨적 존재란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물론 먼지 하나에 이르기가지 항상-이미 현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유토피아주의가 부재의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를 그리고 있음에 반해, 코뮨적 존재론은 공동의 존재, 공동성의 존재론 안에도 항상 적대와 분열이, 혹은 억압이 있을 것임을 보기 때문이다.
적대와 분열이 사라진 이상적 상태를 꿈꾸기보다는 (67)그것이 출현할 때마다 그것과 냉정하게 대면하고 그것을 좀더 쉽게 넘어서는 방법을, 혹은 그것을 긍정적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방법을 창안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67)[적대와 분열은] 외부에서 오기 전에 내부에서 온다. 내부성의 벡터가 작동하여 공동체를 동질화하고 익숙한 것으로 제한하거나 거기 머물고자 할 때, 그것과 다른 것, 이질적이고 외부적인 것들은 공동체의 안정과 평화를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되고, 그것을 배제하기 위한 적대의 힘들이 작동하게 될 것이다.
코뮨주의적 존재론과 구별하여 '존재론적 코뮨주의'가 정의될 수 있다. 그것은 존재론적 공동성을 사유하는 코뮨적 존재론에서 시작하여 그 공동성을 통해서 삶을 사유하고 그 공동성을 새로운 삶의 조건으로 확장하거나 변환시키려는 윤리적 실천이고, (68)그러한 공동성 속에 존재하는 적대와 분열을 넘어서, 그것을 긍정하는 새로운 집합적 관계를 창안하고 구성하려는 사회적 실천이며, 그러한 관계의 구성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대결하고 그러한 구성의 실험 속에서 출현하는 적대와 분열을 넘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정치적 실천이다. (...) 전자가 모든 기원 이전의 기원이라면, 후자는 결코 달성될 수 없는 목적, 끊임없는 실패 속에서 영원히 되돌아올 목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69)우리를 존재하게 해주는 그 공동성이기에 또한 피할 수 없는 그 적대와 분열을 넘어서, 적어도 그것이 극소화된 상태를 꿈꾸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코뮨주의적 존재론이 그것에 머물지 않고 존재론적 코뮨주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것이 수없는 실패 속에서도 공동체를 만들려는 시도들이 역사 속에서, 혹은 삶의 과정 속에서 반복되어 되돌아온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2장 코뮨주의에서 공동성과 특이성
1. 잠재적 공동체와 현행적 공동체
(72)잠재적 공동체, 그것은 유토피아와 같은 공상적인 어떤 세계, (73)비현실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현실로 존재하는 공동체를 뜻한다. (...) 가시적 결과로 국한되지 않는 공동체 (...) 그렇기에 그 현행적인 형태가 사라진 경우에도 결코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공동체 (...) 이런 점에서 잠재적 공동체는 구체적인 현행적 형태와 다른 차원에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며, 다른 '지속'의 양상을 취한다.
(73)현행적인 것이란 이미 존재하던 잠재적인 것이 펼쳐지거나 나타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는 인식은 확실히 안이하다.
(74)잡다할 정도로 다양하고 상충되기까지 하는 상이한 방향을 취하는 욕망들, 그것은 '도래할' 공동체의 질료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공동체적'이라고 부를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현행적인 형태가 주어졌을 때, 그러한 욕망들 가운데 일부가 그 현행적인 것으로 '불려나간다'. 그리고 채 답하지 못한 것들이 그 현행적인 것 주위를 배회한다. 뒤늦게 합류하기도 하고, 망설이고 주저하면서 계속 맴돌기도 하고, 들어 갔다 나왔다 하기도 하며, 이건 아니야 하며 등을 돌리고 떠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 그 공동체에 속하는 욕망과 그것에 속하지 않는 욕망이 비로소 구별된다.
(75)우리는 오직 현행적으로 규정하고 현행적인 것으로 불러내는 한에서만 그 잠재적인 것의 존재를 알고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현행적 공동체에 의해 구성되는 원인, 그것이 잠재적 공동체다. 따라서 현행적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 없이 잠재적 공동체나 잠재적 공동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다.
(76)[아마존이나 알라딘의 자발적 서평에서] 잠재적 코뮨적 관계는 자본주의적 형태로 현행화되는 방식으로 불려나오고 자본에 의해 착취당한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관계로 나아가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77)인터넷 쇼핑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용자의 후기나 평가를 올리면 인센티브를 받는 것이 그것인데, 이로써 이제는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후기나 사용기를 올리게 된다. 그것은 올리는 활동 자체가 이미 교환관계에, 자본주의적 관계 속에 있음을 뜻한다. (...) [파일공유사이트들의 코뮨에서 자본주의로의 변환 모습들]
(77)어떤 현행적 형태로, 어떠한 현행적 관계로 불러내는가에 따라 잠재적 차원의 코뮨적 관계는 마치 원래 달랐던 것처럼 다른 형태의 잠재적 관계로, 자본주의적 관계로 존재하게 된다. 결과가 원인을 규정하고, 현행적인 것이 잠재적인 것을 규정하는 것이다.
(78)자본은 항상 '순환의 이득'을 생산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노리고 있으며, 역으로 코뮨적 관계나 활동은 항상 자본의 이런 착취에 노출되어 있다. 공동체가 존재론적 차원의 것인 한, 혹은 잠재적 층위의 현실인 한 어디에나 현존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소한 것은, 그리하여 지금 시대를 공동체가 불가능한 시대라고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2. 개체화와 공동성
(79)문제는 현행적인 공동체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잠재적 공동체를 불러내고, 현행적 공동체의 작동을 통해 잠재적 공동성을 재형성하는 것이다.
-> 참으로 이것이 문제다. 이 문제는 해석학적 차원, 언어적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80)구성요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동성은 개체가 갖고 있는 어떤 성질/소유물property을 뜻하는 '공통성'과는 다르다. (...) 공동성의 생산이 지속되는 한에서만 그것(복수의 이질적 요소들)은 개체로서 존재한다. 공동성의 생산이 중단될 때, 그 개체화는 중단되고, 그것은 더 이상 하나의 개체이기를 그친다. 공동체가 공동성을 갖는 게 아니라 공동성의 생산이 공동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문제는 공동성을 만들어내고 반복하여 유지하는 실천 내지 작동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공동성을 생산할 것인가, 어떤 공동성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83)공동성의 생산이란 하나의 개체가 살아서 존재하기 위한 활동이다. 이는 구성요소들의 '개체적' 독립성을 넘어서 그것들이 모여 함께 만드는 공동체로 결합하는 것인 동시에, 그렇게 만들어진 공동체의 개체적 경계를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으로 막이나 공간적 경계, 혹은 이름 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계로 환원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3. 공동체와 특이성
(83)하나로 묶이는 이질적 요소들의 관계, 그것들의 분포양상이 그 개체의 특이성singularity을 규정한다. (...) (84)특이성에 참여하는 성분이란, 그것을 더하거나 뺌으로써 특이성 전체가 달라지는 것을 뜻한다. 이런 성분을 '특이점'singular point라고 정의하자. 그렇다면 특이성이란 특이점들의 분포에 의해, 혹은 특이점들의 경합양상에 의해 정의된다.
(85)(1)특이성은 외부성을 그 요체로 한다. (...) 무엇이 외부에서 추가되거나 제거되는가에 따라 특이성 자체가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뀐다. (그래서 '고유성'이 아니다.) (...) (2)특이성은 결코 '단독적'이지 않다. (...) 항상-이미 집합적이다. (...) (3)특이성은 현행적으로 그것을 만드는데 유효하게 작동하는 한에서만 어떤 성분을 특이점이 되게 만든다. (...) (즉) 특이점이 특이성에 의해 규정된다.
(86)[특이성이] 다른 성분[특이성]과 함께 개체화과정에 들어가서 [또 다른] 특이성을 구성할 때, 그 특이성은 그대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다른 성분과의 결합에 의해 특이성을 구성하는 성분으로서만 작용한다. 따라서 그 자체로 하나의 특이성이기도 한 한 성분이 특이성에서 특이점으로 되는 것은 상대적인 잠재화의 선 위에 있다고 한다면, 특이점이 특이성이 되는 것은 현행화 속에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86)개체를 하나의 결과를 산출하는 복수의 성분들의 (87)집합으로 정의하는 한, 특이성은 모두 개체의 특이성이다. 물론 그런 개체적 특이화를 구성하는 특이점은 '전개체적'pre-individual이다(『차이와 반복』, 524-526 참조). (...) (88)전개체적 특이점은 아직 특정한 특이성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개체화에 참여하는 다른 특이점들[즉, 다른 유전자, 단백질 구조, 발생적 특이화 등등]에 의해 상이한 특이성을 형성하게 된다.
(88)특이성을 구성하는 특이점들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특이성을 갖는 개체화의 산물이다. 그것은 개체화에 말려-들어감으로써 '상위'의 특이성의 구성에 참여하지만, 그 특이성으로 귀속되지 않으며 다른 특이점들에 종속되지도 않는 독자성을 갖는다. 그것은 '상위'의 특이성 속에서 규정될 때조차 다른 요소들에 대해 '어트렉터'(attractor)로, 혹은 '질점'으로 작용한다. 즉 다른 요소들을 끌어들이는 힘을, 혹은 다른 요소들에 작용하는 힘을 갖는다. 종종 그것은 같이 개체화에 참여한 다른 특이점과 상충되기도 하고 반발하기도 하며 충돌하여 분리되기도 한다. 이는 특이적 개체화에 참여한 경우에조차 특이점들 사이에 거리와 간격이 항상 있음을 뜻한다. 그 거리나 간격이란 직접적인 공간적 공백이 아니라 특이성에서 특이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탈영토화의 지대고, 새로운 성분들과 (89)결합할 수 있는 재영토화의 지대, 새로운 접속가능성의 지대다. 이는 개체화를 통해 형성된 특이성 내부에, 그 특이점들 사이에 항상-이미 분리 가능한 거리가, 혹은 새로운 성분이 끼어들 여백이 존재함을 뜻한다. 그것은 특이성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 공동체 내지 개체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이 언급들의 들뢰즈의 본래 논의와 더불어 '해석학'의 개념들에 존재론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소격화', '귀속', '이해'와 '설명', '전유' 등등...
(89)[특이점들 사이의] 거리 내지 여백은 개체화된 공동체에 대해 위험과 기회라는 이중의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먼저 그것이 기회일 수 있는 것은, 그 거리 내지 여백으로 인해 새로운 성분, 새로운 특이점들이 끼어들거나 빠져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은 공동체에 변화와 갱신의 기회를 제공한다. 역으로 개체화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특이점들에게 그것은 출구를 제공할 것이며, 주어진 공동체의 상태에 거리감을 느끼는 성분에게는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 동일한 이유에서 그것은 '위기'의 이유가 된다. 기존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입장에서는 뜻하지 않은 외부적 요소가 끼어드는 거리나 여백이란 원치 않는 변화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 이 부분은 해석학과 정치를 이어준다. 이진경의 이 책에서 2장의 존재론적 논의는 내게 일종의 '우회'의 정교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다.
(90)변화란 지속의 조건이다. 그렇지만 변화가 개체의 분리나 분할로 귀결될 경우, 개체성을 사실상 해체하는 것이 된다. (...) 공동체에 관련된 결정적인 분기점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도 외부성을, 가변성을, 극대화하려는 방향이 그 하나라면, 반대로 그것의 유지를 위해 외부성과 가변성을 극소화하려는 방향이, 내부성과 안정성, 동일성(identity)을 극대화하려는 방향이 다른 하나일 것이다.
(91)근대 이전의, 공동체나 '공동체주의'적 공동체, 요컨대 내부성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공동체'라는 말의 전통적 용법과 구별하여 외부성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의미로 '코뮨'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런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입장을 지칭하여 '코뮨주의'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92)반복하여 등장하는 내부성의 경향을 주시하고 그것과 대결하려는 긴장이 없다면, '코뮨'이란 이름을 달고 내부성의 공동체가 되는 것은 쉽다.
4. 공동성과 '공동체'
(92)특이성을 구성하는 특이점들은 전개체적 수준의 독자성을 갖고 있으며, 이로 인해 특이점들 간에는 분할 불가능한 거리와 간격이 있따. 개체화 혹은 개체적 특이화는 이 간격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 이 상이한 특이점들을 하나로 묶을 때에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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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일반적인 구성요소는 물론 독자적인 상이한 특이점들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현실적인 특이성이 되게 만드는 것은 공동성이다. 혹은 공동성을 산출하고 유지하는 공동활동이다. 이러한 공동성이 없는 한, 특이점들은 수많은 방향을 갖는 모호한 잠재성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92)(특이점들로) 구성된 공동의 특이성은 이후의 공동활동에 작용하는 포텐셜이 지속된다. 그 공동활동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뒤섞이며 변환되는 잠재성이 된다. 공동성이란 현행적인 공동활동을, 동시에 그 공동활동을 통해 형성되며 다음의 공동활동을 규정하는 그 잠재성을 뜻하기도 한다.
(93)특이성이 개체화를 통해 구성되는 개체성의 '표현'이라면, 공동성은 개체화과정을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신체적 '내용'이다. 즉 특이성과 공동성은 개체화를 통해 구성되는 하나의 집합적 개체가 갖는두 가지 '속성'(이다.) 여기서 표현이 내용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양자가 서로 상관적임에는 틀림없지만, 어떤 대응성을 갖는다고는 할 수 없다. 공동성은 강해도 특이성은 약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를 상기하면 충분할 것이다.
(93)특이점들 그 자체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힘이나 성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특이점이 작동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다른 종류의 힘인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신체를 형성하는 힘이다. (...) (이 힘에 대해 말하자면) 공동성은 복수의 요소들의 공동활동(공동의 작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감응affect이고 그런 감응에 의해, 그리고 그 감응의 전염을 통해 형성되는 공동체의 포텐셜이다. (...) (94)공동성은 기쁨의 감응을 통해 형성(된다.) 슬픔의 감응이 슬픔을 야기한 대상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욕망을 산출한다면, 기쁨의 감응은 그것을 야기한 대상과 공존하려는 욕망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코뮨에서 기쁨과 웃음이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 감응이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신체, 서로 다른 스타일 사이에 인력을 만들어 내고 그것들이 서로에게 맞추어 가며 뒤섞이고 서로의 활동에 가담할 수 있게 한다. 강제력 없는 코뮨이 공동체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일차적인 힘은 이 기쁨의 감응이다. (...)
(두 번째로 이 힘에 대해 말하자면) 단지 감응의 차원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동활동을 한다는 것은 각자가 갖고 있는 상이한 속도와 강도, 위치와 방향 등의 성분이 서로에게 맞춰 가며 하나의 움직임, 하나의 활동을 집합적으로 산출함을 뜻한다. (...) 신체적 움직임의 공동성, 사유의 리듬의 공동성이 만들어질 때에만 가능하다. (...) (95)(들뢰즈의 말처럼) 리듬이란 박자와 달리 차이화하는 반복이고, 공-조된 움직임 사이에 차이의 여백을 남여 두는 연계이며, 그렇기에 새로운 차이가 끼어들거나 발생할 수 있는 방식의 연결이고, 그렇게 끼어들거나 새로이 발생한 차이에 의해 전체가 전혀 다른 것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결합이다. (나치 행진곡에 북소리를 끼워 넣음으로써 그것을 춤곡으로 만든 (양철북)의 유명한 장면)
-> 내 생각에 '리듬의 공동성'이란 개념은 '차이'라는 결정적인 개념이 없다면 곧장 '전체주의'와 이어진다.
(95 주 23)스피노자의 사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여기서(공-조에서-한문 '공조'와 다름, 텍스트에 확인 요) '공통관념'(common notion)이란 개념을 떠올리겠지만, 관념의 공조보다는 신체적 리듬의 공조가 좀더 일차적이라는 점에서 '관념'(notion)이란 말과는 거리가 있고, 그리고 공유하고 있는 어떤 공통의 성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공동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란 점에서 '공통'이란 말과는 거리가 있음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96)공동성은 (...) 공통성과 전혀 다른 것이(다.) (...) (공동성은) 공통성을 특별히 전제하지 않는다. 공통성이 있다는 것이 공동성의 형성을 용이하게 하는 조건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 공통성이 있어도 공동성이 형성되지 않는 경우만큼이나 공통성이 없어도 공동성이 형성되는 것은 결코 예외적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을 다소 다르게 본다. 공통성은 오히려 공동성이 아니라 전체주의를 형성하게 하는 벡터일 경우가 더 많고, 그래서 '용이하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 '방해하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공통성은 차이와 여백으로 인해 끊임없이 분열되어야 한다.
(98)특이성만큼이나 공동성 또한 '공동체'로 환원되거나 귀속되지 않는다. 공동성은 '공동체'의 경계에서 항상 벗어난다. 즉 공동성은 '공동체'의 외연에 대해 과소하거나 과대하다. 이는 복수의 공동성들이 하나의 명칭을 갖는 '공동체' 주변을 배회하고 있음을 뜻한다. 명시적 '공동체'의 이 공동성들은 그때마다 다른 외연을 가지며, 필경 서로 간에 상이한 폭으로 겹치거나 포개진다. 겹침이나 포개짐에서 만들어지는 공동성들의 인접성이 이 공동성들의 혼합 내지 '소통'을, 즉 공동성의 공동성을 산출한다. 각각의 공동성들은 이러한 공동성의 공동성에 의해 일종의 가족유사성을 갖는다. 이 가족유사성이 '공동체'에 상응한다고 간주되는 공동성의 모호한 경계를 구성한다. 달리 말하면 '공동체'란 이 복수의 공동성들이 상이한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분배되는 명시적 장이 되는 셈이다.
(99)공동성들 사이에 분리의 경향이 반복될 때, 반복적으로 분리되는 공동성의 차이는 공동체의 분할로 이어질 것이다. 공동성들 간의 차이가 공동체의 분할로 귀착되지 않게 하기 위해선, 공동성 간의 혼합 내지 소통을 야기하는 활동을 통해 공동성의 공동성을 산출해야 한다. 공동성의 외연의 합의 최대치를 향햐 열린 전체모임 같은 것이 그런 경우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시 '내부화'의 위험에 대해 말해야 한다.
(99)이질적 요소, 새로운 요소의 출현 자체가 기쁨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항상 어색함과 불편함, 낯섦이라는 장애를 수반한다. 이런 장애를 피하여 익숙한 기쁨의 감응에 안주하려는 경향은 매우 빈번하게 발생한다.
(100)서툰 리듬, 느린 속도의 리듬에 맞추어 움직여 주면서 같이 움직이는 공동성을 통해 리듬에 맞춰 강도를 끌어 올리도록 하기보다는, 모두의 발목을 잡는 장애로 간주하여 떨구어 내려는 태도가 출현하기 쉽다. 공동체를 운영하고 일을 하려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훨씬 쉽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공동체가 성장하여 활동의 규모가 확대되고 요구되는 일의 양이나 속도가 증가한 경우에 아주 쉽게 발생한다.
(몇 가지 내부화의 구체적 양상들)
(100)맞지 않는 성분이나 활동을 배제하련누 경우 (...) 인접성이 충분하지 못한 공동활동을 방치하는 수동적인 방식 (...) '공동체'의 '고유성'에 관련된 명시적 관심사에서 벗어난 '쓸데없는 것'이나 (101)'사소한 것'으로 비난하는 형태, (...) 공동체의 어떤 문제를 드러내고 지적하는 것을 '유해한 것'으로 간주하여 배제하는 형태 ...
(101)중요한 것은 그 자체로는 통상 '쓸데 없다'고 간주되는 것이 쓸모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무용'한 것이 '유용'한 것이 되어 작동하게 하는 것이며, '무능하다'고 간주되는 요소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관계, 그런 배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코뮨 내지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101)'공동성'은 '공동체'로 환원되지 않는다. (...) 상이한 공동성의 현행적 구성을 통해 공동체를 끊임없이 가변화시키는 것, '공동체'의 경계를 넘너드는 수많은 공동성의 생산을 통해 '공동체'의 통일성을 끊임없이 와해시키는 것, 그리하여 외부자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공동성의 장을 향해 밀고 가는 것, 그것 없이는 내부성의 공동체에 안주하려는 경향은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분명하(다.)
5. 불가능한 코뮨주의
(101)잠재적 공동체 (...) 어느날 뜻밖의 시간에 우리에게 '도래할' 그런 공동체가 저기 어딘가 존재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행적으로 불러내는 (102)방식에 의해 규정되는 잠재성으로서, 우리가 불러내려는 것을 구성하는 질료로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현행적인 것으로 불러내지 않으면 도래하지 않는다. 아니, 우리가 불러내지 않아도 누군가 불러내는 것에 이끌려 도래할 것이다. 때로는 자본에 포섭된 당혹스러운 방식으로 도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물론 그것은 우리가 불러내는 형태로 도래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불러내는 시간이나 공간과 아주 다른 것으로 도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102)우리는 "공동체란 공동체가 없는 곳에만 존재한다"는 멋스러운 역설을 믿지 않는다. 현행적인 공동체를 등지고 있는 공동성이란, 공동성의 세계를 우리가 보아온 재난의 형상으로부터 분리하여 현실의 문 저편에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철학적 사유의 산물 이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재난(보편적 개별성)안에서, 재난을 응시하며, 재난을 넘어서서 사유하고 행동하기, 이것이 코뮨의 윤리학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103)앞의 역설적 문장은 "존재론적 공동성이란 심지어 공동체가 없는 곳에도 존재한다"는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 (...) 존재론적 공동성이란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과 다르지 않다. (...) (하지만) 현행화하려는 시도만이 그와 결부된 능력의 존재를 알게 해(준다.)
(103)현행적인 공동체를 만들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필경 실패할 것이다. (...) 시인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자고, 철학자란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려는 자인 것처럼, 코뮨주의자란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려는 자,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자 반복하여 시도하는 자(이다.)
II부 생명과 생산의 추상기계
3장 맑스주의에서 생산의 개념: 생산의 일반이론을 위하여
1. 생산력과 생산성
(109)공리주의는 벤담Jeremy Bentham이란 사람의 악명 높은 기이한 이념일 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념'(!)이요, 무의식적 '에피스테메'인 것이다.
(110)역사나 진보라는 관념은 생산성이란 근대적인 이념 안에 갇혀 있다.
(110 주 4)테일러주의에 대한 레닌이나 대다수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은 공산주의로의 이행기로서 사회주의에서 생산력에 대한 관념이 사실상 생산성 개념과 동일한 외연을 갖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Vladimir Lenin, "A Socientific System of Sweating" 참조.
(112)생산성과 구별되는 생산력 (...) 맑스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로 정의된다. (...) 생산성(노동량에 따른 사용가치 생산)은 생산력이라는 관계가 드러나는 하나의 지표에 지나지 않는다.
(112 주 5)맑스는 생산과정을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으로 구별하며, 전자를 "인간과 자연 사이의 대사과정"으로 정의한다(칼 맑스, (자본론) I권(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5, 235쪽). 이렇나 대사과정에서 형성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생산의 '첫번째 측면'이며, 이것이 생산력을 정의한다. "최초로 확인되어야 할 사실은 이 개인들의 신체적 조직과, 그것을 통해 주어지는 여타 자연에 대한 그것의 관계다. (...) 모든 역사 서술은 이 자연적 기초들 및 역사 진행 속에서 인간들의 행동에 의한 이 자연적 기초의 변모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독일이데올로기) 최인호 역, 선집 1권, 1990, 197쪽, 번역수정). 반면 생산관계란 가치형성과정과 결부된 것으로, 생산과 결부된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지칭한다. 물론 맑스에게서 이러한 개녀들이 명료하고 뚜렷하지 않은 것은 분업이나 소유처럼 양자 모두와 결부된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렇지만 맑스가 생산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하기 시작하면서 그 생산의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생산에 관여된 다양한 관계들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려 했다는 점,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생산의 일차적 측면이 생산력이라는 개념의 정의구역을 형성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113)생산력이란 개념은 맑스주의 역사이론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것이면서도 가장 사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하나의 공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맑스주의자들이 공리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비판적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언제나 공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역사,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결정적 단면일 것이다.
2. 생산의 경제학, 생산의 자연학
(114)생산력이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라고 하지만, 휴머니즘은 그 관계를 언제나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획일화하며 자연이나 사물을 인간이라는 주체에 의해 사용되는 대상 내지 연장으로 고정한다.
(115)근대과학과 휴머니즘만큼이나 공리주의와 휴머니즘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근친적이다. 휴머니즘이 세상을 인간과 대상, 인간과 자연으로 나누고 그 관계에 목적과 수단의 위치를 할당한다면, 공리주의는 그런 목적과 수단 간 관계의 효율성을 계산케 하고 효율성의 극대화를 향해 그 관계를 밀고 가는 것이다.
(115)인간의 생산활동이나 인간의 노동을 넘어서 생산을 정의해야 한다. 스피노자 식으로 표현하면, 인간의 활동으로 제한된 생산의 개념을 넘어서 (116)'능산적인 자연'의 활동 일반으로 나아가야 한다. (...) (116)인간의 노동을 넘어서는 범위에서의 생산과 착취가 점차 중요하게 부상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 (117)생명활동 자체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활동으로 변형되고 있으며, 자본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착취하고 있다.
(117)생명체들은 가장 결정적인 생산자로서 활동함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학 안에서 그것의 생산은 그것을 변형하거나 채취한 인간의 생산으로 나타나고, 생명체의 생산능력은 그것을 채취하는 인간의 생산능력으로 나타난다. (...) 그들에 대한 착취도 '인간의 노동'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다.
(118)생명활동 내지 생명력 자체가 중요한 착취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는 현재의 사태는 지대이론 자체를 좀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즉 (차액)지대란 단지 '토지'의 비옥도 차이에 다른 노동생산성의 차이를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자연적 생명력 자체의 생산능력에 대한 일반이론으로, 따라서 인간의 노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자연적 생산능력 자체와 그것의 착취에 대한 일반이론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이로써 '정치경제학 비판'은 이들 생명체의 생산활동과 그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사유하고 개념화해야 한다. '생산의 자연학'을 통해 '생산의 경제학'이 다시 사유되어야 한다.
(118)자연과 인간의 대립은 물론 자연과 기계, 생명과 기계의 대립을 넘어서 생산을 개념화할 것을 요구한다.(생산이 일반이론)
(119)공리주의와 휴머니즘을 넘어서 생산의 일반이론을 구성하기 위해선 정치경제학 비판뿐만 아니라 생태학 비판 또한 필요한 것이다. 생산의 자연학과 생산의 경제학을 넘나드는 (120)횡단적 일반성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3. 생명의 생산
(121)'협업'이 관계의 사회성을 표현하는 개념이면서도 '생산력'에 속한다고 보는 맑스의 생각은 생산력을 생산성과 달리 하나의 관계로 보려는 태도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그것을 자연적 관계에, 생산관계를 사회적 관계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며 대립시키는 통상적인 이해방식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고 있다.
(122)의식이 개입된 활동, 혹은 합목적적 활동으로서 '노동'은 생산의 세 가지 계기들(생존, 욕구, 생식) 이후에야 가능하다. 따라서 노동과 생산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며, 노동보다 생산이 일차적이고 더 넓은 외연을 갖는다. 즉 노동은 생산의 한 요소일 뿐 아니라, 특정한 조건 속에서 생산이라는 활동이 취하는 특정한 형태다.
우리는 일반화된 의미에서의 생산을 다음과 같이 정이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과 생식을 위해 '자연'을 (123)자신이 영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변형하는 활동.
(123)인간이 협업에 의해 생산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의 다른 생명체 역시 상호의존 속에서, 거대한 상호의존의 그물망 속에서 생산한다. (...) 협업이란 개념을 인간으로 한정하는 습관을 벗어나서 본다면 (...) 협업은 단지 인간의 노동에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자연적 생산 전반에 속하는 일반적 특징이다.
(123)협업은 언제나 상호의존된 개체들의 집합체로서 '공동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협업이나 공동체는 '사회적 관계' 이전에 존재하는 (124)'자연적 관계'(이다.) (...) 생물체 간의 경쟁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라곤 해도, 그것은 이 거대한 상호의존적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국지적이고 부분적인 사태에 지나지 않는다.
(124)어떠한 개체도 '공동체'라는 이웃관계 속에서 특정 개체로 '개체화'된다. 즉 하나의 개체가 '무엇인가'는 그를 둘러싼 이웃관계에 의해, 그가 이웃한 것들과 어떠한 관계 속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 '역사유물론'이 탄생했던 것이 바로 그 지점(이다.) (...) 맑스가 "방적기는 방적기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임노동과 자본))고 했던 것처럼 (...) '생태적 세계' 역시 정해진 어떤 자연적 본성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이웃관계에 따라, 외부적 조건에 따라 그 본성이 달라지는 역사유물론의 작동지대(이다.)
4. 생산력, 혹은 생산능력
(127)어떤 생산자의 생산능력, 즉 생산력이란 부재하는 힘, 부재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이렇게 유입된 에너지를, 혹은 그것의 변형된 산물을 자신들이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혹은 이용하기에 좀더 유리한 형태로 변형시키는 능력이다. (...) 이런 점에서 보자면, 어떤 생산자의 생산능력은 그의 변형능력이고, 그 생산능력의 '정도'degree는 일단, 변환의 속도와 '농축'의 강도를 결정하는 (128)힘의 크기, 즉 그러한 능력의 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공리적 계산이 개입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일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이 변환능력의 강도를 표시하는 하나의 지표임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강도 자체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란 점을 잊지 말자. 예컨대 변환을 위해 사용한 에너지의 경우에도 단지 칼로리나 줄 등으로 표시되는 양보다는 차라리 그 에너지를 응축하는 능력이 '능력의 강도'에서 더욱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
(128)다른 한편 생산능력은 생산에 투여되는 요소들을 결합하는 능력이다. (...) 생산력이란 개념 자체에 협업이 결정적인 요소로 포함되어 있었음을 지금 다시 상기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129)생산능력이란 이처럼 자연이나 '기계'에 속하는 요소들과 결합하여 작동하는 능력이다. 그러한 능력에 강약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는 그러한 요소들과 결합하여 작동하는 협조의 강도, 결속의 강도다. (...) 다시 말해, 외부적 요소들과 리듬을 맞추어 협-력을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 결합은 어떤 경우는 의식적이지만, 다른 경우는 무의식적이며, 어떤 경우는 호혜적이지만 다른 경우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처럼 '적대적'일 수도 있다. (...)
(133)(변형능력)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강도' 자체가 결정적이지만, (결합능력)의 경우에는 대상들을 탈영토화deterritotialization하고 재영토화하는 능력이 결정적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어떤 노동조차도 다른 요소들과의 결합 없이는 불가능함을 안다면 (...) 개별적인 노동의 강도조차 사실은 그런 요소들이 '하나처럼' 움직인 결과고, 그렇게 하여 이끌어낸 협-력의 강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133)생산능력은 잠재적인 능력(이다.) (...) 조건이 주어지면 현재화할 수 있는 현실적인 능력(인 것이다.) (...) 잠재력으로서 생산능력의 크기는 이 경우 그 생산자가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의 폭, 생산자가 결합하여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대상의 이질성의 폭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수용능력capacity이다. 강도로서의 생산능력조차 이런 협-력을 구성하는 능력의 발현이다. 어떤 생산자가 연장이나 대상을 재영토화하고 탈영토화할 수 있는 능력으로 생산능력을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5. 생산력과 생산관계
(136)생산수단의 소유/비소유가 발생하는 것은 생산된 잉여가 저장되어 직접적인 소비, 소모나 생식 등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을 대다. 이를 '스톡'Stock이라고 정의하자((천의 고원), 13장 참조). 비축된 스톡이 누군가에게 귀속될 때 (137)그것을 '소유'라고 명명한다. (...)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비축되어 이용되는 스톡을 '일차스톡'이라 하자. (...)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특정한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비축되어 사용되는 스톡을 '이차스톡'이라고 할 수 있(다.) (...) 잉여생산물이란 이차적 형태의 스톡에 대응한다. (...) 영유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서의 스톡(생산수단)은 잉여생산물의 추가적인 영유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에 다른 잉여생산물의 스톡은 점점 더 큰 규모로 증가할 가능성을 갖는다.
(137)스톡의 소유자(비-생산자)와 생산자가 결합되어 (138)생산과 결부된 하나의 관계를 구성할 때, 그 관계가 생산의 양상이나 생산물 영유의 양상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생산관계'라고 명명한다.
(138)생산은 하나의 공동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사람만이 아닌 많은 생산자들이, 그것들의 공동체가 모든 생산에 관여되어 있다. (...) (139)이 공동체는 에너지와 물질의 상호적인 순환을 통해 존속하는 하나의 군집이란 점에서 하나의 '순환계'를 구성하고 있다. 각각의 개체들은 그 순환계 안에서 순환되는 물질과 에너지를 통해 '순환의 이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139)순환계 안에서 어떤 개체가 확보하려는 순환의 이득이 순환계를 유지할 수 없는 한도로 확장될 때, 그 순환계는 파괴된다. (...) 그 지점이 '이득의 한계지점'일 것이다. 그 한계 안에서 순환의 이득이 유지될 수 있을 때, 통상 말하는 '지속가능성'이 정의될 수 있(다.)
순환적 공동체에 비-생산자인 소유자가 끼어들어 자신이 소유한 스톡을 기반으로 생산의 양상을, 즉 생산량이나 생산방법 등에 개입할 때, '지속가능성'은 본질적으로 위협에 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순환계 외부에서 오직 그때그때 잉여생산물의 최대치를 척도로 관여하기에 순환의 지속가능성이나 순환계의 유지에는 직접적인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생산과정에 대한 소유자의 영향력이 공동체 전체의 힘을 능가할 정도로 확대되고, 소유자의 관심이 이윤이라는 오직 하나의 대상으로 (140)집중되는 근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140)생산수단의 소유자는 이렇게 분리된 생산요소들, 그리고 복수의 생산자들을 화폐적 형식으로 '통일'하여 자신의 의사대로 통합하고 재통합한다.공동체Gemeinde를 화폐Geld가 대신하게 된다. 아니, 사실은 반대의 순서로 말해야 한다. 생산자들이 화폐를 위해 자신의 생산능력을 판매하게 하기 위해선, 그들이 생산자로서 갖는 자립성을 해체하고 생산의 조건을 탈취하여 불구화시켜야 한다. 먹고살기 위해선 좋든 싫든 고용주를 찾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불구를 생산하고 불구에 기초하는 불구의 체계다.
화폐를 통해 결합되는 경우에는 관여된 개체들 간의 에너지, 물질의 소재적 순환이나 순환의 이득이 아니라 생산수단 소유자의 이윤만이 직접적인 목표가 (된다.) (...) (141)생산의 목표는 순환계 안에서 함께 공생하는 개체들의 생존이나 유지가 아니라 그 전체를 통합하는 화폐의 증식이 된다. (...) (이럴 경우) 탈영토화/재영토화 능력이 아니라, 생산된 결과물의 가치화 안에서 그것(생산요소들의 능력)이 차지하는 비중으로 평가된다.
6. 생산능력의 해방, 혹은 혁명
(141)생산력이란 생산성이라는 하나의 양적 지표가 아니라 항상-이미 집합적인 생산능력을 뜻한다.
(141)생산능력은 한편으로는 어떤 대상을 변형시키는 강도적 능력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에 필요한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능력이다. (...) 따라서 생산력의 '크기', '생산력의 '정도'는 한편으로는 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힘을 응축하여 사용할 수 있는 변형능력의 강도에 의해 결정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142)그것이 수용할 수 있는 욕망의 폭, 그것이 담지할 수 있는 활동의 폭에 의해 결정된다. (...) 생산력의 발전이란 이러한 강도적 능력이 발전함을 의미하는 것과 더불어 공동체적 협동 속에서 그것이 수행할 수 있는 생산활동의 폭이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생산력이 발전된 사회로서의 코뮨주의, 그것은 이처럼 생산능력의 외연과 더불어 강도가 최대화될 수 있는 사회를 뜻한다.
(143)생산력의 발전은 단지 기술의 발전을 뜻하는 게 아니다. (...)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강밀하게 응축하게 하는 조건, 혹은 새로운 활동을 향해 자신을 열고 던져 넣을 수 있게 하는 관계의 문제다.
(144)기계의 발전은 (...) 숙련을 해체시켜 (...) 복잡한 동작들을 기계적인 단순동작들로 분해하여 탈코드화했(다.) (...) 작업내용은 정말 몰두하기 힘들 정도로 생산자 자신의 욕망이나 목적, 판단과 분리되었다. 이는 작업의 강밀도intensity를 현저하게 떨어뜨렸다. (...) '노동강도'를 높일 수는 있겠지만, 활동 자체의 강밀도를 그런 식으로 높일 수는 없다. 이는 생산력 발전에 반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145)개인적인 노동자들의 강도의 저하와 의욕의 축소 등은 '완화된 감옥'인 공장이라는 장치, 자본가의 눈을 대신하는 감시와 훈육 및 강제의 체제 없이는 그것이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능력이 되게 했다. (...) 생산능력의 강밀도를 '노동강도'로 대체하여 강요하는 메커니즘을 생산의 필수적인 요소로 요구하게
테일러주의는 역으로 산업혁명에 의해 야기된 생산력의 감소에 대한 반응이고 반동이었다.
(145)(자본주의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모든 상호적 관계에서 생산의 고리 각각을 분리시켜 순환계 내부의 모든 순환의 이득을 오직 하나 잉여가치로 전환시키는 데만 몰두했(다.) (...) 그 결과 순환계 안에서 생산자들 각각의 생산능력은 치명적일 정도로 감소되었다. 그러한 생산능력의 (146)치명적 감소를 메우기 위해 자본은 화학비료나 화학적 약품 등의 외부적 투입물을 대량으로 투여해야 했다. (...) 최근 생명공학의 '발전'을 통해 새로이 유기체 내부의 국소적 순환계를 착취할 가능성이 확보됨에 따라 새로이 세포 내부적 층위로 다시 침투하고 있다.
(146)생산성과 구별되는 '생산력의 발전'은 새로운 종류의 협동방식을, 새로운 종류의 순환적 공동체를 요구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이 문제를 자본주의적 공장체제를 넘어서 사유하지 못했다.
(147)지금 중요한 것은 생산력 발전을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력 발전을 진심으로 추구하는 것이고, 생산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진정 생산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고하는 것이다.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는 것, 인간 아닌 생명체들의 생존과 공존을 추구하는 것, 인간들의 새로운 '협동방식'을 구성하고 인간을 포함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 욕망과 생산활동의 거리를 좁힘으로써 생산의 강밀도를 높이고 가능한 생산활동의 폭을 확장하고 다양화함으로써 생산능력의 외연을 확대하는 것 등등. 이 모든 것을 위해서, 잠재성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 요컨대 생산력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 생산관계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대체한 새로운 종류의 생산관계를 창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맑스 말대로 생산력 발전이 혁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영유를 벗어나 생산 자체를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4장 생명의 추상기계와 구체성의 코뮨주의
1. 생산의 일반성과 추상기계
(148)자연의 생산과 인간의 생산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다.) (...) 그러나 이러한 연속성은 (...) 유비적인 관념이 아니며, 그렇다고 양자 사이에 있는 어떤 공통된 본질을 보편화한 개념도 아니다. (...) 좀더 중요한 것은 생산이라는 활동이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이 항상 결합하고 협-업으로 진행된다는 것이고, 생명의 생산이 경제적 생산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며, 경제적 생산이 생명의 생산에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 (149)이런 점에서 자연의 생산과 인간의 생산 사이에는, 인간학적 노동의 관념을 넘어서기만 한다면, 거대한 연속성이 존재(한다.)
(149)일반화된 생산이론이란 일반화된 생산(인간과 비인간 간의 연속적 활동)의 개념을통해 생명의 자연학과 생산의 경제학을 하나의 연속성 속에서 다루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생산이 경제학에 대한 생명이 자연학의 비판이 가동될 수 있어야 하며, 반대로 생명의 자연학에 대해서도 생산의 경제학적 개념들이 작동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 '생태학'에서 정치경제학의 개념들이 작동할 수 있어야 하며, 정치경제학에서 생태학적 개념이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의 논리 없이 생태학적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생태학을 하나의 공상으로 만들 것이 틀림없고, 생명과 생태의 문제를 다루지 못하는 (150)경제학은 생명력 자체를 세포 이하의 수준에서 착취하기 시작한 자본의 문제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다룰 수 없을 것이(다.) (...) 그것(일반화된 생산이론)은 약간의 변형을 거치면 생명의 자연학에서 생산의 경제학으로, 혹은 반대로 넘나들 수 있는 추상기계여야 한다. (...) 여기서 공동체의 개념이 또 다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생명이 항상-이미 공동체이며, 생명의 생산이 항상-이미 공동체로서 생산하기 때문일것이다.
2. 두 가지 추상화
(151)(보편적 추상화와는) 반대로 변형을 통해 넘나들 수 있는 것을 하나로 묶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 기하학에 따르면 직선은 곡선이 아니며, 원은 타원과 다르다. 그것을 묶으려면 '선'이라는 더 추상적이고 더 보편적인 본질을 통해야 한다. 반면 케플러는 포물선은 원의 극한이라고 말함으로써, 원과 타원, 포물선 간에 연속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 (152)데자르그의 사영기하학은 여기에 더해 쌍곡선과 직선으로까지 하나의 변형방법을 통해 묶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 빛이 만드는 원뿔 모양의 입체에 종이 하나를 끼워 넣어 만들어지는 경계선은, 그 종이의 각도를 달리함에 따라 원에서 타원, 포물선, 직선, 쌍곡선으로 연속적으로 변한다. 이런 점에서 이 다섯가지 곡선을 '원추곡선'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을 수 있다. 변형으로서의 추상의 방법 (...) 이는 공통된 상위의 보편성을 추출함으로써 추상된 게 아니라 변형을통해 추상된 것이다. 이는 동일한 본질의 추상과 달리 동일성을 깨는 변형에 의한 추상이고, 상위의 보편적 본질을 찾아가는 추상이 아니라 보편적 본질을 넘나들고 가로지르는 추상이란 점에서 '횡단적 추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53)조프루아 상틸레르는 퀴비에에 반대하여, 변형에 의해 넘나들 수 있는 방식으로 동물들을 하나로 묶는 방법을 제안한다. 가령 포유류의 팔에 달린 뼈를 분지하여 확대하면 조류의 날개가 되듯이, 척추동물의 척추를 0에 가깝게 줄여 팔과 다리가 머리에 달라붙게 만들면 문어 같은 두족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것이다. (...) 공통형식을 추출함으로써 개별자들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상승하는 보편적 추상과 변형을 통해 구체적 형태와 차이를 넘나드는 횡단적 추상의 차이 (...) 공통형식의 추상과 탈형식화의 추상 (...)
(155)(현대)예술가들이 보여 준 것은, 변형의 방법을 통한 횡단적 추상화의 극한은 모든 것이 하나로 묶이는 존재론적 평면이라는 사실이다(들뢰즈-일관성의 평면'). 그것은 모든 소리가, 모든 움직임이, 혹은 모든 존재자가 모든 척도와 위계를 떠나 '하나로 묶이는' 평면이고, 서로가 다른 것으로 변형되는 데 어떤 근본적 장애나 벽이 없는 '평면'이며, 서로가 어떤 다른 것과도 결합하여 새로운 것으로 변형되는 평면이다. 따라서 그 평면 위에서 모든 것은 평등하다. 모든 것을 어떤 척도와도 무관하게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 (하지만 이때 의미와 가치는) 결합하고 관계를 맺는 이웃항들에 의해 다른 의미를 갖게 되며, 따라서 다른 것이 된다.
(156)존재론적 평면에 우리는 '일반성'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 경우 일반성이란 보편성이나 어떤 고유한 본질을 통한 일반화(보편화)와 반대로 그런 보편성을 가로지르고 고유한 본질을 지우는 방식으로 도달하는 일반성이고, 공통성이나 공통형식의 추출을 통해 도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탈형식화하는 방식으로 도달하는 일반성이다. 그것은 횡단가능성 내지 변환을 통해 도달할 최대치의 폭을 뜻하며, 넘지 못할 어떤 본질도 없기에 곧바로 다시 가로질러질 경계선이다. 이러한 일반화가 본질을 특권화하는 것과 반대로 그것의 특권을 무력화하는 일반화라는 것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56)추상화는 변환과 횡단을 실제로 가동시킨다는 점에서 실제적으로 작동하며 특정한 효과를 산출한다. 그것은 단지 사유의 '속성'을 갖는 층위로 제한되지 않는다. 추상화는 사유를 통해 가동되는 프로세스일 뿐 아니라 신체의 '속성'을 갖는 층위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음악적 소리의 추상화는 한편에서는 음악적 관념에 대한 추상화를 뜻하지만, 동시에 물리적인 파동들로서의 소리의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변형을 뜻하기도 한다. 레디메이드를 사용한 미술작품은, 미술의 관념만 바꾸는 게 아니라 작품으로 사고팔리는 어떤 물리적 신체를 갖는 '사물'이며, 이때 (157)추상화란 그 사물을 실제로변형시키는 실제적인 작용이다.
(157)추상화의 힘과 방향을 표시하는 것은 도식diagram에 지나지 않지만, 그 도식은 신체적인 층위와 비신체적 층위 모두에서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변형의 양상을 표시한다. 그것은 형식이나 본질, 혹은 법칙으로 추상화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와해시키며 나아가는 것(반순수이성적, 초월적 상상력의 도식작용과 인접한 이것)이기에, 추상적으로 작동하는 힘과 방향만을 표시할 수 있을 뿐인 다이어그램이다. 이처럼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변형의 힘을 표시하는 다이어그램을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을 빌려 '추상기계'라고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맑스주의에서 추상의 개념
(160)맑스는 생산의 어떤 공통된 본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생산, 분배, 소비를 넘나들며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개념으로작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횡단적 추상화가 실질적으로 가동되고 있으을 본다.
(164)노동자에 인간을 무조건 대응시키는 것은 근대적 인간관념의 투영이다. (...) 인간의 신체가 가공의 대상이 된 생명산업의 경우, 인간의 신체는 노동대상이 되었다. (...) 노동자와 생산수단, 노동자와 비노동자를 구별하는 것 가체가, 아니 그런 범주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이미 생산의 역사적 형태에 속하는 것이다. (...) (165)따라서 그것 역시 역시적 형태로부터 충분히 추상된 개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역사이전의 생산
(167)생존을 위해 생존수단을 구하는 활동으로서의 생산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이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이란 의미에서, 인간 또한 포함하는 '자연'에 속한 생산이다. (...) 역사 이전의 생산, 생산 개념이 모든 역사적 형태로부터 추상되어야 할 지점은 여기일 것이다.
(168)생명의 생산은 생산의 구체적인 양상들이 펼쳐지고 분화되기 이전의 생산 그 자체다. (169)생산의 본질이란 이 '주어진' 사실이 조건에 따라 어떻게 생산되는가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다. 본질이란 그처럼 역사 속에서 규정되는 것이고, 역사가 달라짐에 따라 또한 달라지는 것이다.
(170)생명의 생산이라는 추상기계를 통해 생산의 문제를, 생상양식이라는 구체적 역사를 파악하려는 이러한 입장은, 가장 분화된 것을 통해 덜 분화된 것, 미분화된 것을 파악하려는 추상화의 방법과 반대되는 것이다. (...) (이런 추상화의 방법은) 분화된 것을 완성태로 간주하여 다른 것을 미완성으로 간주하고 그 유사성의 정도에 따라 미개와 발전의 위계를 부여하게 될 위험을 처음부터 안고 있다. (...) (또한) 미분화된 것에 존재하는 잠재성을 삭제할 위험 또한 내포한다. (171)이런 이유에서 나는 인간의 해부학이 원숭이나 다른 동물의 해부학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필경 19세기의 생물학과 진화론에서 연원했을 것이 분명한 맑스의 말은 정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해부학이 이전 사회의 해부학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말 또한 그렇다고 믿는다. (...) 19세기 진화론의 통념과 반대로 가장 분화된 것이 아니라 가장 미분화된 것을 통해, 모든 분화 이전의 것을 통해 분화된 것을 분석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인류학이 '원시사회'의 분석을 통해 현대사회를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 혹은 생산의 추상기계
(172)맑스는 생산을 통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한다. (...) 그러나 맑스로서는 접할 수 없었던 동물행동학은 이런 생각이 부적절함을 수많은 사례를 통해 보여 준다. 가령 개미들은 진드기를 키우는 '농장'을 만든다. (...) 이는 인간이 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 이산화탄소와 햇빛을 섞어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식물들의 활동 또한 생산이라고 해야 한다. 식물도 동물도 아니지만, 박테리아, 미생물 전체 역시 마찬가지다. (...) (173)따라서 생명의 생산이라는 '역사의 전제'는, 기원 이전의 기원인 '질료'로서 모든 생명체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생산이 평면은 모든 생명체들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173)생산은 자신의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이웃한 어떤 신체를 직접 혹은 가공하여 섭취하고 이용하는 것이다. (...) 이 경우 생산한다는 것은 냉정하게 말하면 이웃한 생명체를 '소비'하여 자기화(수취Aneigung, appropriation)하는 것이다. 혹은 공생체들 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 것이다. (또한) '분배'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 교환, 분배 역시 인간의 경제를 넘어 이처럼 일반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생명의 생산이란, 이러한 생산, 소비, 교환, 분배 모두를 포괄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74)생산은 순환의 고리들이며, 이런 점에서 순환 안에 있다. 마치 넓은 의미의 생산이 소비, 교환, 분배를 포괄하듯이, 순환은 이 생산 모두를 포괄한다. 이러한 순환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이기에 그것으 ㄴ유한성의 장벽, 열역학적 죽음이라는 숙명을 피할 수 없다. 즉(그러나?) 순환계를 통해 구성되는 비평형적 항상성이, 생명체의 소비에 덮쳐올 유한성의 심판을 끝없이 연기시킨다. (...) 그것은 새로운 에너지의 비약적 창발을 생산한다. (...) (175)열역학적 평형, 즉 열적 죽음에 반하여 '네겐트로피'를 창조하고 창발하는 것이 순환계라는 명제 (...) (그렇다면)생명이란 순환계를 이루는 네겐트로피를 창조하는 하나의 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이란 이처럼 복수의 하위-개체들이 모여 구성된 집합적 순환계인 것이다. 순환계를 이루는 방식으로 개체화된 공동체, 그것이 생명이다. 생존이란 이러한 순환계의 지속, 비평형적 항상성homeostasis의 지속을 뜻한다. 그것은 유기체와 같은 생명에 대해서뿐 아니라 유기체 이하의 중-생적 생명체에 대해서도, 또 유기체 이상의 집합적 공동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순환계를 구성하는 집합적 요소들의 공동체가 곧 생명이라는 것이다.
(176)생명의 생산과정을 표시하는 벡터는 공동체의 외연을 그리는 하나의 원환적 흐름의 벡터와 외부를 향해 열린 두 개의 벡터를 통해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순환적 공동체를 모든 역사적 형태로부터 추상한 것이란 점에서 '순환적 공동체의 추상기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공동체인 생명체가 자신의 생명을 생산하는 것을, 모든 역사적 형태로부터 추상한 방식으로 구성한 것이란 점에서 (177)'생명의 추상기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생명의 생산을 통해 포착한, 가장 단순한 형태의 '생산의 추상기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그러나 이는 사회적 관계 일체를 추상한 정의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 사회적 관계 속의 인간에 직접 적용될 순 없으며, 나아가 '자연적 인간'의 어떤 행동이나 본성을 설명하려는 순간, 근본적 오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생산의 추상기계의 몇 가지 변형들
(178)어떤 경우에도 잉여를 목적으로 한 생산은 없다. 그리고 포틀래치가 행해지는 수많은 원시사회에서 보여 주듯이 의도적으로 그 잉여를 파괴하기도 한다. 자연발생적 잉여의 누적이 지속될 경우, 그 잉여가 스톡으로 전환되어 다른 양상의 관계로 전환되는 것을 예감하고 방지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생명의 추상기계에서 생산의 순환은 그 자체로 소비의 궤적을 표시하며, 별도의 분배흐름을 갖지 않는다. (...) (179)이러한 분배는 생산과는 반대방향으로 순환되는, 즉 생산의 흐름이 모인 곳에서 시작하여 역방향으로 분배되는 흐름의 벡타를 필요로 한다. 사적 소유나 비생산자의 영유가 없는 경우에도 생산양식은 생산의 흐름과 역방향으로 도는 또 하나의 흐름의 벡터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구체적인 분배의 양상이나, 그것이 생산의 흐름을 변형시키는 양상에 대한 어떤 역사적 형태와 상관없는 가장 단순한 생산양식의 추상기계를 구성한다.
179)스톡을 비축한 사람이 그 스톡을 제공한 대가를 사적으로 취득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스톡의 분배방식은 물론 생산양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변환된다. 이는 스톡에 대한 사적인 취득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 2차 스톡이라고 명명한다. (...) (그러나) 사적인 비축이 항상 사적 취득과 사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180)왜냐하면 대개 이미 공동체적인 사용의 규칙들이 그런 사적 사용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이유에서 사적 비축에 대해 원시사회가 갖고 있는 적대감은 아주 확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톡의 비축 자체는 이미 2차 스톡의 가능성을 항상-이미 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스톡의 사적 사용과 비축은 사실 사적 소유를 전제하며, 또한 역으로 그것을 촉진한다. 스톡이 2차 스톡의 문턱을 넘었을 때, 생산양식은 사적 소유의 문턱을 넘게 될 것이다. 생산물의 사적 소유가 생산수단의 사적 사용(점유)으로 전환되면, 사적 소유가 생산 일반의 조건으로 변환된다. (...) (여기서) 생산양식의 추상 기계 역시 약간의 변형이 필요할 것이다. 잉여생산물의 분배 흐름이 소유자가 만든 고리 안에 귀속되고 그로부터 다시 '분배'되는 것. 만약 여기에 정치적인 권력의 흐름의 벡터를 더한다면 사회구성체의 추상기계로 변형할 수 있을 것이다.
(180)만약 생산의 공동체가 이웃한 공동체와 잉여생산물을 교환하기 시작했다면, 공동체를 표시하는 '허리'에 유입과 유출의 화살표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이는 아마도 소상품 생산이라고 명명되는 생산양식에 대응하는 것이겠지만, (181)여기서 외부와의 교환은 공동체의 중심을 이루는 생산과 분배의 순환 자체를 크게 바꾸지 않는다. 사용하고 남은 것을 교환하는데 그치기 때문이고, 그 교환 역시 사용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혹은 공동체 간의 '연대'를 위한 증여나 교환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시 원래의 생산의 이중순환은 크게 변화시키기 않을 것이다.
(181)중세도시의 경우에는 교역의 흐름을 표시하는 흐름이 지배적인 것이 되면서 그것을 위해 생산의 이중회로가 복무하는 양상으로 변환될 것이다. 아마도 생산된 것 가운데 직접적 소비로 이어지는 내부의 회로는 상대적으로 크게 위축될 것이고, 소유자의 고리를 통과하는 잉여생산물의 회로는 그 교역의 양에 맞추어 크게 비대화될 것이다.
(181)도시적 변형의 경로와는 다른 변형의 경로가 있다. 그것은 공동체들의 공동체 형태로 하나의 생산형태가 구성되는 경우다. 먼저 가장들이 여자와 노예들을 소유하는 오이코스(가정)라는 공동체를 통해 그들의 생산물을 취득하고 소유하며, 그처럼 오이코스를 갖는 가장들이 모여 폴리스를 구성하는 그리스적 도시국가 형태가 그것이다. 그것은 사적 소유의 추상기계들로 표시되는 복수의 오이코스들과, 그 오이코스에서 (182)잉여생산물의 순환을 사적으로 취득하는 소유자의 고리들을 포함하는 또 하나의 원환에 '폴리스'라고 써 넣음으로써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게르만적 형태는 영주를 정점으로 하는 장원적인 공동체들이, 맑스에 따르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다른 장원적인 공동체와 연합하여 또 다른 규모의 집합체를 구성하는 것이란 점에서 사적 소유의 생산양식을 표ㅗ시하는 복수의 추상기계들을, 허리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원으로 잇는 방식으로 변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적 형태는, 논란이 많긴 하지만 마찬가지의 사적 소유의 추상기계들이 수직적인 중심을 통해 하나로 묶이는 3차원적 구조를 이룬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182)자본주의에서는 생산자들의 순환계가 자본에 의해 절단되고 파괴된다. 생산의 공동체를 해체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파괴된 생산자들을 잉여가치의 증식을 위한 (183)국지화된 생산으로 끌어모으며, 생산자인 노동자들은 자본에 의해 제공되는 임금으로 생활수단을 구하는 '소순환' 속에서 생존한다. 그리고 이전의 공동체를 형성하던 직접적 생산의 순환은 자본의 순환으로, '대순환'으로 대체된다. 그러한 대순환과 나란히 잉여가치의 거대한 순환이, 아니 화폐자본의 거대한 순환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이전의 공동체를 표시하던 G는 맑스가 말했던 것처럼 그 순환 전체를 장악한 화폐G(Geld)로 대체된다. 이는 자본의 추상기계의 중심이다. 여기서 G로 이어지는 이중의 순환은 직접적 생산의 순환이 G에서 시작해 G'으로 끝나는 자본의 일반공식(G-W-G')을 표시하는 동시에, G에서 시작해서 G'으로 끝나는 화폐자본의 순환(G-W ...... P ...... W'-G')을 표시하기도 한다. 하나의 자본을 표시하는 추상기계는 당연히 다른 자본과의 교환을 표시하는 복수의 선들이 G로 흘러들어 오고 G에서 흘러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는 사실 화폐가 자신의 외부를 향해 벌린 두 개의 발로 지탱되고 있는 것임 또한 빼놓아선 안 될 것이다.
7. 추상에서 구체로
(184)생명과 생산의 추상기계 (...) 생명과 생산을 하나로 묶어주고 그 경계를 넘게 해주는 추상기계, 개체의 생명을 생산하는 것을 공동체 안에서 생산의 순환계를 통해 포착하는 추상기계, 이는 코뮌주의적 존재론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명제를 생명의 자연학과 생산의 경제학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 계속해서 밀고 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185)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 추상이란 구체적인 조건들을 추상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상이한 조건들을 넘나들 수 있는 ‘일반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현행적인 조건들로부터 추상된 개념을 분리하여 잠재성의 장으로 밀고 가는 것이다. 그러한 잠재성의 장에서 새로운 횡단적 만남을 사유함으로써 새로운 ‘생산’의 방향을, 또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엿보려는 것이다. 보편성이나 자명성의 형태로 주어진 모든 초월적 방향이나 법칙을 넘어서, 만나는 이웃항들에 따라 달라지는 방향과 본성에 따라, 그 내재성의 구도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아니 현재를 사유하는 것이다. 구체화란 잠재화와 반대로 현행화의 선을 따라 달라지는 구체적 배치를 보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구체적 조건에 따라 추상기계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화는 추상했던 조건들을 다시 대입하는 것이 아니며, 구체화의 경로는 추상화의 경로를 단지 역으로 되돌리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186)(...) 현실로 되돌아온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사실은 완전히 다른 현실로 빗겨간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 관계를 통해 포착된 ‘총체적 현실’이란 의미가 아니라, 수많은 변형과 이탈의 길들로 이미 애초의 길들을 알아볼 수 없도록 조각조각 난 지도란 의미이다. (...) 그것은 차라리 변형과 이탈의 선들의 표시된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것이고 (...) 삶의 흐름을, 사유의 흐름을, 대중의 흐름으 다시 불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추상으로부터 오직 앞으로만 나아가는 논리적 진전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항상 기원 이전의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뒤로 더듬어갈 때마다 항상 도래할 미래를 경유해서 나아가는 실천적 비약이고, 오직 상승의 비행을 있는 힘껏 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상승과 하강을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다. 코뮨주의적 존재론, 그것이 이 모든 추상화가 항상-이미 경유하는 현행적인 미래라고 해야할 것이다. 생명의 추상기계와 구체성의 코뮨주의.
III부 생산의 사회학, 생명의 정치학
5장 역사속의 코뮨주의: 역사의 외부로서 코뮨주의
공산주의와 코뮨주의
(188)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공동체’나 ‘공산주의’의 꿈이 사라졌다고 믿는 것은, 사회주의 체제의 탄생 이전에 그런 꿈이 없었다고 믿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다. (...)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피곤하고 피폐한 삶의 외부를 꿈꾸는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코뮨주의란 어떠한 시대에도 있었던, 이러한 꿈의 이름이다.
(189)자본주의의 전복이라는 전 사회적 혁명으로 대중들을 밀고 갔던 이념으로서 ‘공산주의communism는 코뮨주의의 19세기 판본이다. (...) 그러나 하나의 사회, 하나의 시점에 오직 하나의 생산양식이나 사회구성체를 대응시키는 19세기 역사철학의 선형적 시간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것은 무한히 연기되는 미래를 위해 지금 여기에서의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포기해야 하는 봉쇄의 빗장이 되고 말 것이다.
(189)국민국가의 스케일에 이르지 못하는 한, 코뮨이나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는 아무리 성공적인 것이라고 해도 ‘자신들만의 천국’이라는 국지적 게토로 간주된다. 이러한 공간적 관념은 통상 ‘국가’를 장악하고 ‘공산주의적’ 변환 속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국가적 정치의 관념으로 귀착된다. (...) (190)하지만 코뮨이란 애시당초 국가와 다른 방식의 정치를 구성하려는 시도였다. (...) 그것은 국가의 장악이나 ‘소멸’이후가 아니면 꿈꿀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국가가 존재하는 경우에도 실행되어야 하는 ‘현실적인 이행운동’이고, 현재의 시제 속에서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다.
(190)‘혁명’을 국가만큼이나 국민국가적 외연 안에서 표상하는 것은 코뮨주의를 사유하기에 너무 크거나 아니면 너무 작은 것이다. 그것은 국가적인 스케일의 ‘코뮨’이란 상생적인 삶이 구성되는 실질적인 범위가 아니라,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 동질적 공간으로 상상된 경계의 표상이란 점에서 너무 큰 것이다. (...) 이와 반대로 국민국가 스케일의 상상된 공동체란 상생적 삶을 사유하기에는 너무 작은 것이다. (...) (191)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우주적 스케일, 아니 최소한 전지구적 스케일에서 상생적 삶을, 코뮨주의를 사유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면에서 나는 먼지 하나 속에서도 우주를 보는 존재론적 사유의 스케일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싶다. 그런 사유를 통해서 국가적 단위로 표상하고 생각하는 제한된 상상력을 해방시킬 것을 제안하고 싶다.
(191)코뮨주의는 무엇보다 코뮨이라는 개념으로 상정되는 어떤 관계나 구성체를 지향하는 ‘이념’이다. 코뮨이란 단지 경제적인 의미에서 생산조직의 형태로서만이 아니라, 개체들 간의 미시적 관계에서조차 항상 작동하는 실질적 관계를 뜻한다.
(192)코뮨주의라는 개념은 준다거나 받는다는 생각도 없이 주고받는, ‘선물’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을 순환의 체계 속에서 형성되고 지속되는 관계를 통해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2. 공동체의 ‘경제’와 자본
1) 생명의 생산과 공동체
(194)경제학적 생산과 자연학적 생산이 합류하는 이 지점에 있는 것은 바로 ‘공동체’다. 인간이든 다른 생명체든 항상 동종의 개체 및 이종의 개체들과 협-력하여 생산한다는 것은 이들의 생산이 항상-이미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짐을 뜻하기 때문이다.
(197)공동체란 어떤 이득을 생산하는 그런 순환계다. 그 이득은 상이한 개체들이 순환계를 구성하는 순간 발생하는 이득이다. 이를 ‘순환의 이득’benefit of the circulation이라고 부르자. 순환의 이득, 그것은 의도없이 주는 선물의 다른 이름이다. 뒤집어 말하면 공동체란 이런 선물의 순환계다. 의도가 없는 이러한 질료적 흐름을,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선물’이라는 말보다는 ‘순환’이라는 말로 명명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순환의 이득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사건의 양상을 ‘경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희소성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제’ 이전의 경제고, ‘경제 바깥의 경제’다. ‘자연사적’ 조건 속에서의 공동체의 ‘경제학’이 있을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이러한 ‘경제’를 대상으로 다루는 것일 터이다.
(198)순환계의 변형을 통해 획득되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치를 초과하는 잉여분의 이득을 ‘잉여이득’이라고 부르자. (...) (잉여이득의 발생으로 생겨나는) 교환은 대개 상이한 순환계 사이에서 발생한다. 공동체 내지 순환계 사이의 교환은 새로운 차원의 잉여이득을 창출한다. 이전의 순환계에서 어떤 재화나 사물이 갖는 ‘사용가치’와 다른 ‘사용가치’를 새로이 끼어들어간 순환계 안에서 갖기 때문이다. (...) 이러한 잉여이득을 위해, 상이한 공동체 간에 교환을 일반화하기 위해 화폐가 도입된다. 그리고 이러한 화폐를 통해 잉여이득은 ‘가치’의 형태를, (199)좀 더 정확히 말해 ‘잉여가치’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순환계 사이에서, 순환계의 치환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는 순환계마다 고유한 코드변환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란 점에서 ‘코드변환transcodage의 잉여가치’라고 할 수 있다. (...) 잉여이득이 잉여가치화되고, 순환의 이득 일반이 가치화되게 되면서, 결정적 역전이 발생한다. 이전에는 잉여이득을 교환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잉여가치를 위해서 잉여이득을 생산하려는 경향이 발생한다. (...) 순환계의 자연발생적인 이득의 생산이 아니라, 화폐와 교환하기 위해 화폐가 사용되기 시작할 때, 화폐는 자본이 된다. ‘돈이 되는’ 이득의 생산을 위해, 순환계 안에서 그 이득의 국지성으로 인해 순환계의 안정성이 파괴되고 순환계의 생산은 그 국지적 요소의 과잉생산을 위해 변형되게 된다. (200)이로 인해 더 이상 순환의 이득을 얻을 수 없는 요소들이 생겨난다. 이들은 공동체를 뜻하던 이전의 순환계로부터 배제된다. (...) 자본은 이처럼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순환의 이득, 잉여분의 이득을 잉여가치의 형태로 착취한다. 잉여가치란 공동체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득의 착취를 뜻한다. 자본은 공동체를 착취한다. 공동체 안에서 순환의 이득을 주고받으며 공생하는 개체들의 공동성을 착취한다. 잉여 가치의 착취를 위해 자연적인 공동체를 파괴하고, 국지화된 잉여이득만을 생산하는 최소공동체로 변형시킨다. (...) 인간들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한 개인이 굳이 공장에 가서 노동자가 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그 공동체를 해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201)코뮨주의에 수많은 형태들이 있을 수 있지만, 자본에 대한 투쟁, 착취에 대한 투쟁 없는 코뮨주의는 코뮨주의가 아니다. ‘가치의 공정한 배분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가치법칙에 반하는 활동의 생산’이 코뮨주의를 정의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것을 그런 이유에서다.
(202)주어진 상태의 보존이란 관념에 기대지 않고 생명의 순환계를, 생태계적 삶의 순환성을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보존의 관념에 수반되는 ‘외부자의 배제’, ‘동질화된 안정성’을 넘어서 동적인 안정성, 새로운 비평형적 항상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203)지금처럼 기계가 우리 삶의 필수적 일부, 우리 신체의 연장이 된 조건에서 (203)코뮨적 순환계를 구성하는 것은 기계와 생명의 대개념을 넘어서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3. 자본주의와 코뮤니즘
(203)맑스는 자본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전제란 직접생산자의 ‘이중의 해방’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즉 직접 생산자가 한편으론 생산수단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즉 생산수단을 잃고 무사자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론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그것이다. (...) 따라서 ‘이중의 해방’이란 공동체로부터의 ‘해방’을, 즉 공동체의 해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노동력의 흐름은 이러한 이중의 해방의 결과 만들어진다. 이런 이중의 해방을 들뢰즈, 가타리는 한편으론 생산자가 토지로부터 탈영토화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론 신분적 코드로부터 탈코드화되는 것이라고 바꾸어 말한다. 이처럼 탈영토화되고 탈코드화된 노동력의 흐름이 자본의 흐름과 결합할 때 자본주의가 탄생한다.
(205)신분적 탈코드화 위에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규칙 가운데, 다른 규칙의 근거가 되는 핵심적인 규칙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학적인 어법을 빌려 ‘공리’라고 말한다. 교환의 공리, 생산의 공리, 척도의 공리 등등이 그것일 터이다. 자본주의란 그런 공리적 규칙들에 기초하여 그로부터 추론되는 다른 규칙들이 만들어지고,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런 규칙들에 의해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사람들을 통제하고 정착하며 일하게 한다는 점에서 ‘공리계’라고 말한다. (...) 수학적 공리계 역시 기존의 공리들에 다른 공리가 추가되면서 공리계가 새로운 양상으로 변화되며 유지되듯이, 자본주의 공리계 역시 그렇다.
(207)(기존의 자본주의 공리계에) ‘복지의 공리’를 채택하는 것은, 비록 자본주이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자본주의 전체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 ‘교환의 공리’ 혹은 가치법칙의 공리를 선물의 공리 같은 것으로 대체한다면, 혹은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노동의 공리’를 노동없는 생산이 공리로, 혹은 바타유 말처럼 ‘소모의 공리’로 대체한다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없는 공리계가 출현할 것이 틀림없다. (...) ‘혁명’은 이처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공리를 대체하려는 투쟁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리의 대체가 반드시 전 사회적 층위에서만 진행될 이유는 없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공리계라는 것은, 우리들이 사는 삶의 영역에서 다른 종류의 공리계를 구성하는 것을 저지할 수 없음을 뜻한다. 자본주의가 전복될 때까지 (208)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공리계의 구성을 연기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자본주의 안에서 필요한 최소치를 통해 그것과 연결되지만, 자본주의와는 다른 종류의 공리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아니 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처럼 자본주의 안에 존재하지만 비자본주의적인 공리계를 ‘자본주의의 외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코뮨이란 자본주의 안에 존재하는 이런 비자본주의적 공리계라고 할 수 있다.
(208)자본의 논리에 대해 외부적인 어떤 원칙(공리)에 따라 복수의 요소들이 어떤 순환이 이득들을 생산하고 주고받는 방식으로 하나의 순환계를 형성할 때, 우리는 자본의 외부를 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자본에 의해 착취되는 것으로서의 존재론적 공동체와 구별하여 이를 ‘코뮨’이라고 부른다. 이는 지금 현재의 시제 속에서 실천적으로 구성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 반하는, 혹은 그것과 대결하는 방식으로 코뮨을 구성하려는 시도들에 대해 ‘코뮨주의’라는 하나의 일반화된 명칭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코뮨주의란 자본주의 안에서 이러한 외부를, 자본주의와 다른 삶의 방식이나 생산방식, 활동방식을 창안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 (209)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이런 비자본주의적 내지 반자본주의적 외부를 증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비자본주의적 외부로 가득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구멍들로 가득찬 멩거의 스펀지처럼, 자본주의의 부피가 0으로 수렴하고 코뮨적 구멍들의 총 부피가 애초의 부피를 대체하는 그런 입방체를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타도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방법이라고, 좀더 정확히는 ‘무효화’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209)자본주의 내부에 그 외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와 그 외부 사이에 어떤 기회와 위험이 있음을 또한 함축한다. (...) 따라서 코뮨은 비자본주의적 공리들이 자본주의 안으로 침투하여 새로운 결정불가능한 명제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갖지만, 동시에 비자본주의적 공리계에 자본주의적 공리가 침투할 수 있는 통로가 될 가능성을 갖는다. (...) (210)‘복지의 공리’가 ‘유효수요’의 경제학을 만들어낸 것처럼, ‘환경보존의 공리’는 이전의 노동가치론에서는 경제학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생태학적 요소들에 대해 ‘환경재’로서 가치를 부여하는 ‘환경경제학’을 만들어 냈음은 이런 변화의 징표일 것이다.
(210)코뮨에서는 자본주의 공리의 가동에 대해 의식적으로 대결하고 (211)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새로운 공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나는 노동가치론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활동을 ‘가치화’하고 순환이 이득을 가치화하는 ‘노동’의 관념에 대한 비판적 거리가 자본주의의 외부를 창안하는 데 중요하다고 믿는다. 모든 것이 가치를 그걸 생산하기 위해 투여된 ‘인간의’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하는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고선, 코뮨을 통해 형성되어야 할 ‘공동성’에 충분히 도달할 수 없다고 믿는다.
(211)공동체라는 관념에 따라다니는 동질성과 내부성의 관념을 벗어나지 않고선, 공동체라 부르든 코뮨이라 부르든, 그것은 이질성에 대한 개방으로서, 이질적 차이의 긍정으로서 외부성을 핵심적인 원칙으로 삼지 않고선,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가 또 하나의 배타적 폭력을 산출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211)효율성을 생산적인 능력과 동일시하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고선 자본주의와의 근본적 단절로서 코뮨주의를, 코뮨주의적 생산 내지 생산능력이란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212)순환의 이득을 오직 인간의 관점에서 ‘가치화’하는 한, 가치화에 항상-이미 전제되는 ‘잉여가치화’를, 잉여가치를 위해 순환계를 변형시키고 착취하는 자본의 작동을, 그 끔찍한 효과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4. 사회주의와 코뮨주의
(214)자본가란 “자본의 담지자”라는 명제가 타당하다면, 돈이 있든 없든, 직업이 노동자든 농민이든 상관없이 증식욕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모두 자본가계급에 속한다. 그런 욕망에 따라 사는 사람은 모두 부르주아인 것이다. (...) 가령 선거에서 대개는 부르주아지가 승리하고 국가권력을 대부분 부르주아지가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자본에 포섭되어 자본가가 요구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노동자가 ‘가변자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자본의 증식욕에 포섭되어 부르주아로서 사고하고 (215)행동하는 사람은 모두 부르주아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욕망의 전복이나 해체 없이는, 노동자의 수가 아무리 늘어난다고 해도 혁명은 요원한 일이다. 선진국이 될수록 노동자가 혁명에서 멀어지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에 반하는 혁명이란 이런 욕망을 전복하는 것이고, 다른 종류의 욕망의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언급은 매우 아슬아슬하다. 욕망의 전복이라는 기계적 테제를 심리적 테제로 환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욕망은 정신분석적인 심리기제가 아니라 그것 이상이라는 것을 늘 망각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여기서 ‘혁명’도 욕망이 아니라 ‘배치’에 방점이 놓여야 한다.
(215)자본주의 사회에는 부르주아지라는 오직 하나의 보편적 계급만이 존재한다. (...) ‘계급’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자본의 공리, 혹은 부르주아지를 구성하는 가치법칙의 공리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 복속되어야 할 부르주아를 갖지 않는 사람들, 혹은 고용되었지만 그들의 의지에서 벗어나는 사람들 .... 이들은 단일한 계급적 규정성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계급’에 속한다고 해야 한다. 맑스에 따르면 무산자를 뜻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바로 이런 ‘비-계급’을 표시하는 개념이다. (...) (216)비-계급이란 부르주아지가 하나의 계급으로 존재하는 한,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부르주아 계급의 외부이다. 따라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은 일차적으로 두 개의 계급 간의 투쟁이 아니라 계급과 비계급 간의 계급투쟁이다.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은 무엇보다 먼저 생산적인 능력을 생산의 조건(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하여 상품화하려는 순간에 시작된다.
(218)부르주아지의 지배에 대한 반-계급화의 욕망이 사회주의와 관련되어 있다면, 계급 자체에 반하는 비-계급화의 욕망이 코뮨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지를 대신하여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사회를 구성함으로써 전국가적 범위에서 하나의 ‘보편적 계급’으로서 자신을 완성하고자 하는 기획이었다. 반면 코뮨주의는 전 사회적 차원에서 노동자나 인민을 하나의 계급으로 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계급적 욕망의 외부, 계급적 지배의 외부를 만들고자 한다. 국가를 통해 전 사회를 하나의 단일한 유기적 통합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다양한 종류의 코뮨적 구성체들을 만들고자 한다. (...) 이로써 부르주아적 욕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욕망의 배치를 창안하고 계급적 욕망(증식욕!)의 해체를 시도한다. 그것은 제값을 받는 노동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화된 활동인 노동 자체의 소멸을 추구한다.
(218)국가로 귀속되는 대행자 내지 대리자를 통해 전사회를 매개하는 식의 정치가 아니라, 자시의 삶 자체를 통해 직접적으로 구성되는 (219)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사회관계를 구성하며 그 장 안에서 자본의 공리와 대결하는 실천의 체제를 구성하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코뮨적 구성체들 사이의 접속과 횡단, 혹은 ‘네트워크’를 통해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가운데 그것을 횡단하는 외부지대를 증폭시키고 확장하고자 한다.
(219)자본주의 안에서 코뮨적 외부를 만들고 지속하는 게 가능하다고 해도 (...) 반-계급의 정치 또한 피할 수 없다. 그것은 계급과 투쟁하기 위해선 피할 수 없는 길이지만, 재-계급화의 아찔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그런 길이다. 결국 혁명은 비-계급과 반-계급이라는 이 두 가지 상이한 개념의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진행되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이는) 코뮨주의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지지하고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주의를 코뮨주의적 외부들이 증식하도록 촉발하는 조건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재정의할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서만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코뮨주의적 사회로 이행하는 이행기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220)사회주의가 코뮨주의적 외부의 증식을 촉발하고 촉진하는 조건이 되는 것, 그것은 사회주의와 코뮨주의가 연대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비계급과 반계급이 상충하는 것만큼이나 역설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이런 조건에서만, 스스로 소멸해 가는 것을 향해 가동하는 국가, 스스로 소멸해 가는 것을 추진하는 이행기라는 역설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사회주의 개념이 실질적으로 가동될 수 있을 것이다.
(220)현실사회주의의 실패는 반-계급적 혁명의 ‘성공’ 이후에 다시금 비계급적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안하고 고무하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반프롤레타리아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금지하고 배제하려 했고, 그럼으로써 부르주아지를 대신하는 또 하나의 계급에 안주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따라서 재계급화에 함축된 이러한 위험에 반하는 비-계급화의 전략을, 비-계급적 운동, 비-계급적 정치를 사회주의 사회 안에서도, 혹은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도 가동시킬 수 있을 때, 그럴 때에만 혁명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주어진 어두운 전망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비계급의 정치학으로서 코뮨주의란 사회주의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재-계급화를 저지하는, 비계급화의 벡터를 가동시키는 사회주의의 외부인 것이다.
5. ‘신자유주의’와 코뮨주의
(225)(구제금융에) 투여되는 자금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이나 1000분의 1을 민중들의 삶을 위해, 가령 ‘기본소득’처럼 (226)노동없이도 살 수 있는 최소한계를 만드는데 투여할 수 있다면 (...) 위기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거대한 공적 자금을 위기의 주범인 기업이나 자본가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에 비한다면 공적인 자금을 코뮨적(‘공동’이) 목적에 맞추어 직접 이용하자는 제안은 결코 뻔뻔스런 것도, 턱없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로코뮨주의는 이런 공적 자금 없이도 충분히 가능한 현실적 대안임을, 역으로 그런 자금에 의존적이 되는 순간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반드시 덧붙여야 하지만 말이다.
6장 형대 자본주의와 생명-정치학
1. 자본주의와 생명의 문제
2. 생명, 중-생적 순환계
(232)개체화에 ‘말려-들어가는’in-volve 수많은 하위-개체sub-dividual들의 집합체가 하나의 신체를 구성할 때, 우리는 그렇게 구성된 신체를 모두 개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개체란 언제나 다수의 요소들이 무리지어 하나의 신체로 개체화된 존재, 즉 ‘중-생’multi-dividual이다. (233)그것은 각각의 개체가 항상-이미 복수의 요소들이 서로 기대어 사는 ‘공동체’임을 의미한다. (...) 중생적 집합성, 중생적 공동체성은 동일한 존재론적 평면상에서 모든 양태들, 모든 ‘개체’들이 갖는 공통성이라고 할 것이다. 이 평면 상에서 모든 것은 동등하게 스피노자가 말하는 바 ‘자연’이고, 또한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바 ‘기계’다.
(234)화학자 아이겐은 순환적으로 촉매역할을 하는 복수의 효소들이 하나의 순환적 사이클을 이룸으로써 비평형적 안정성(엔트로피 감소)이 분자적 수준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 (...) 이러한 순환적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를 통해 엔트로피 증가에 반하는 안정적인 상태가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창발’emergence이라고 명명되는 이러한 현상은 대체로 이처럼 무언가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다른 것에게서 필요한 것을 받는 복수의 요소들이 하나의 순환계를 이룰 때, 그리고 그것이 비평형적 항상성을 획득할 때 발생한다. (...) (235)생명이란 이런 순환계를 구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 혹은 그에 가담하여 그로부터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정의된다. 달리 말하면 생명력이란 중생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 혹은 그런 공동체에 가담하여 이득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 (236)서로 간에 순환적으로 무언가를 받고 주며 이어지는 사람들의 공동체 또한 다르지 않다.
3. 생명과 자본
(237)어떤 이유에서든 독립적 순환계 사이에 교환이 요구될 때 화폐가 발생한다. ‘교환수단’으로서 화폐는 이러한 공동체 사이의 교환을 매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선물’의 순환으로 결합되는 공동체를 파괴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공동체 외부의 교환으로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 그런데 화페가 순환계 안으로 들어가고, 순환되는 질료의 흐름을 따라 운동할 수 있게 된다면, 순환계 전체를 뒤바꾸는 거대한 변환이 나타나게 된다. 화폐는 먼저 사용되고 남는 순환의 이득의 모든 잉여를 그때 그때 소모되는 것에서 일반화된 가치로 변환시키고자 하는 경향을 창출한다. 물론 일차적으로 그것은 외부의 다른 순환계로 유출되면서 화폐로 변형되어 환류할 것이다. 이러한 교환의 체제가 수립되면 순환계 안의 모든 잉여를 화폐화하려는 경향이 발생하게 된다. (...) 잉여를 그때그때 소모하지 않고 나중에 사용 가능한 형태로 일반적 가치의 형태로 변형시켜 저장하는 것. 이로써 이제 자연적 과잉인 순환의 이득은 비축가능한 일반화된 가치인 부로 변형된다.
(239)자본이 욕망하는 잉여가치의 증식이 생산의 목적이 되자마자, 증식을 위해 겨냥되어 투여되는 순환계 안의 국지적인 이득만이 중요하게 된다. (240)즉 자본은 자신이 목표로 하는 특정한 국지적 이득만을 집중적으로 생산하게 하며, 그것이 순환계 내 다른 순환의 이득의 순환과 갖는 관계나 연관은 고려되지 않고 추상된다. 자본이 생산하고자 하는 것으로 생산은 국지화되고 파편화된다.
(240)자본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순환계로서 공동체 내지 생명체의 해체가능성을 항상-이미 잠재적으로 함축한다. 우리의 정의에 따르면 그것은 생명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생명체의 대립물은 기계가 아니라 자본이다! 그렇게 해체된 공동체의 요소들을 자본은 화폐에 의해, 아니 화페자본에 의해 재통합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배치의 요체다.
4. 생명공학과 생명의 착취
(244)근대적 소유권의 기본 거처가 자신의 신체였음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사태(신체 매매)는 이미 자본의 권리가, 아니 자본의 권력이 근대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자본의 권리가 인간에 대해서조차 생명 자체를, 생명이 거주하는 신체 자체를 위협하고 포획하며 착취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5.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생명의 식민주의
(247)생명특허 자체에 대해 반대하고 투쟁해야 함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 인간의 유전자뿐만 아니라 인간 아닌 생물이 다양성을 보호하겠다는 프로젝트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서구에 의한 비서구, 선진 자본주의에 의한 제3세계에 사는 생명의 권리를 자본에 의해 독점하고 착취할 기획이라는 점 역시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1992년 체결된 「UN생물다양성협약」조차 유전자 특허와 지적 재산권의 비호를 받으며 상업적 가치가 높은 유전자원을 찾아내는 유전자 사냥을 독려하고 있으며, 남반구 유전자의 북반구로의 유출을 막기 위한 장치가 전혀 없다.
6. 인권에서 생명권으로
(250)생명권을 오직 인간이라는 특권적 형상 안에 가두어 두는 한, 근대적 권력의 자장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생명권을 오직 인간의 권리로 제한하고, ‘인권’이라는 치환된 형식 안에 가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란 존재가 특권화된 시대로서 근대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251)19세기에 생명권력이 인구를 대상으로 인간이라는 종의 생명을 다루는 것으로 출현했다면, 생명복제라는 개념으로 명명된 지금 시대에 그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생명력 자체를 다루는 것으로 다시 출현한다.
(252)생명의 정치화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에 고유한 정치적 삶을 (253)동물적인 필연적 삶/생명으로 전락시켜서가 아니라 거꾸로 자연적, 동물적 능력으로서의 생명을 경제적인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정치적인 통제의 대상으로 변환시켜서라는 것이다. 생명권력에 대한 투쟁, 그것은 바로 생명을 직접적인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법적, 정치적 보증을 제공하는 저 생명권력에 대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253)‘인권의 정치’는 ‘생명권의 정치’로 변환되어야 한다.
IV부. 코뮨-기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7장 존재론적 평등성과 코뮨주의: 코뮨-기계 가동의 몇 가지 원칙들
(256)코뮨주의란 단지 국지적으로 고립된 하나의 영토를 만드는 소박한 ‘철학’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인 차원에서의 이행 운동이자 새로이 시작되어야 할 저항의 정치학이다.
(257)‘윤리’라는 말이 ‘정치’라는 말을 대신하면서 탈정치화의 정치를 가동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미시적인 권력이 작동하는 지점이 삶의 모든 지점임을 안다면, 역으로 ‘윤리’라고 불리는 삶의 영역이야말로 정치적 사유가 가동되어야 할 곳 (...) 스피노자적 의미에서의 윤리학이 가동되어야 할 지점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란, 들뢰즈와 가타리가 뚜렷하게 해주었던 것처럼, 도덕moral과 대비되는 것일 뿐 아니라 ‘미시정치학’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258)(자연학적 윤리학이라고는 하나) 공동체적 순환계를 착취하고 파괴하는 화폐와 자본은 오직 인간의 고안물이고, 인간을 움직여 가는 동력이며, 인간의 모든 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런 인간에 의해 함께 사는 모든 양태들이 영향을 받고 ‘망가진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윤리학은 특별히 인간을 대상으로 할 이유가 있다.
1. 코뮨주의와 ‘연대의 쾌감’
(260)코뮨은 특정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코뮨 또한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익은 명확히 규정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멋대로 정하는 것이고, 그 획득 정도를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코뮨의 합목적성은 칸트의 말을 빌려 ‘목적없는 합목적성’이라고 말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그것은 특정화될 수 없는 목적이고, 발산하기 마련인 목적이다. 특정한 목적보다는 그러한 목적을 초과하는 연합 그 자체의 쾌감이, 종종 어떤 손해나 ‘비용’마저 감수하며 그런 연합을 자발적으로 추구하게 만든다. 나 아닌 타자들과 함께 어떤 활동을 하고, 타자들과 더불어 무엇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기쁨, 동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주는 기쁨의 감응, 그것이 코뮨을 만들고 지속하도록 추동하는 힘이다. 이런 기쁨의 감응을 다니가와 간은 ‘연대의 쾌락’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기쁨의 감응이란 점에서 ‘쾌락’보다는 ‘쾌감’이라고 바꿔 쓰고 싶다. ‘연대의 쾌감’, 그것은 어떤 목적을 넘어 연대 그 자체가 주는 쾌감이다. 그것은 다시 칸트의 말을 이용해 바꿔 쓰자면, ‘이익interest 없는 이익’이 주는 쾌감이고, ‘사심interest 없는 관심interest’이 주는 쾌감이다.
(261)코뮨은 연대의 쾌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 없이 존재하는 건 아닌지, 그 쾌감을 대신한 어떤 목적/이익이나 쾌감 없는 관성에 의해 존재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항상 주시하고 질문해야 한다.
(261)코뮨은 항상 이견과 불화로 가득 찬 곳이고, 그런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 분열의 위험이 상존하는 집단이다. (...) 이런 의미에서 코뮨은 어쩌면 (...) ‘전쟁 중인’ 집단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갈등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코뮨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하나의 개체로서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불화의 정도를 초과하는 연대의 쾌감이고, 연대의 쾌감으로 인해 만들어진 신뢰의 포텐셜이다.
(262)코뮨은 그 존재 자체가 목적이다. 쾌감을 주는 연합의 과정 그 자체가, 코뮨적 활동 그 자체가 목적이다.
(262)연대의 쾌감은 코뮨이 욕망을 긍정하는 욕망으로 촉발되는 집단이어야 함을 함축한다. (...) 코뮨은 이질적이고 다양한 욕망이 함께 작동하면서 만들어 내는 공동성을 통해, 그리고 그 공동성에 의해 피드백되며 변환되는 욕망의 연대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코뮨이란 연대의 쾌감을 욕망하는 것이란 점에서 ‘연대의 욕망’일 뿐 아니라, 그 다양한 욕망이 공동으로 작용하며 그때그때 ‘하나의 결과’를 산출하는 것이란 점에서 ‘욕망의 연대’다.
(263) 타인에 대한 배려 없는 ‘자신에 대한 배려’가 ‘타인에 대한 배려’를 통한 ‘자신에 대한 배려’로 변환되는 것을 통해, 코뮨적 욕망의 배치가 형성될 수 있다. (...) 연대의 쾌감이 이런 욕망의 배치를 위한 ‘쾌감의 활용’으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 코뮨이 욕망을 긍정하면서도 욕망에 잡아 먹히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욕망의 변환을 낳는 배치를, 새로운 코뮨적 욕망이 발아하고 성장하는 욕망의 배치를 만들어 냄으로써일 것이다.
(263)사적인 욕망과 코뮨적 욕망의 손쉬운 대립을 통해, 코뮨적 욕망을 위해 사적인 욕망을 억압하는 금욕주의적 배치 (...) [더 나아가] 억압에 의한 욕망의 희생이 (264) ‘희생의 욕망’으로 변환되는 경우 (...) ‘희생과 봉사의 정신’은 희생의 슬픔에 기뻐하고, 부과된 의무를 자신의 ‘가능성’으로 승인하는 도착된 욕망의 징표다. (...) 어떤 대의를 숭고한 목적으로 변형시키고 그것을 위해 ‘욕심을 버리고’ 현재이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며 남들을 위해 ‘봉사’나 ‘희생’하는 [종종 ‘선물’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한다. (...) 이런 공동체는 종교적 공동체에서 쉽게 발견된다. 어떤 공동체가 불화나 갈등을 초과하는 지점으로까지 연대의 쾌감을 유지하지 못하여 욕망의 긍정 대신 욕심을 버릴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게 될 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취하는 통상적인 경로는 바로 이런 것이다.
2. 코뮨주의와 우정의 정치학
(265)만약 우정의 정치학에서 적과 동지의 개념이 적대의 정치학에서 그것과 다르지 않다면, 우정의 정치학은 적대의 정치학과 대칭적인 동일성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포지션만 달라진 적대의 정치학에 불과할 것이다.
(267)적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 적대의 정치학이고, 친구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 우정의 정치학이라는 생각처럼 소박한 것은 없다. (...) 양자의 [진정한] 차이는 맑스 식으로 말하면,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가이다. 즉 친구에 대해 말하는가 여부가 아니라 친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는가이다.
(268)동조하지 않거나 비판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혹은 이른바 ‘배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우정이란 정확히 적대의 정치학의 중심범주다. 마찬가지로 ‘배신’에 대한 비난과 떨어지지 못하는 의리야말로 적대의 정치학의 침로를 표시한다. (...) (269)적대의 정치학이 적대를 통해 모든 것을 적과 친구로 가른다면, 우정의 정치학은 적대를 넘어서 적과 친구를 정의한다. 그것은 친구를 적이 대개념으로 보지 않고 양자의 경계를 횡단하며 사유한다. 가령 나의 입장에 대한 비판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적대행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오류를 정정하기 위한 것으로 보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수많은 사람들의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비판자는 적이 아니라 친구, 아주 소중한 친구라는 사실은 누구나 수긍한다. (...) 내가 나아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을 친구로 삼을 수 있을 때, 명시적인 적이나 이른바 ‘마구니’조차 ‘친구’로 삼을 수 있을 때, 나를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없어지고, 나를 저지하는 적은 실질적으로 소멸한다. 적대의 횡단.
(269-270)항상 나의 견해에 동조하고, 나의 의견의 타당함이나 탁월함을 상찬하는 ‘친구’야말로, 나의 귀와 눈을 가리고 나의 오류를 가려 그것을 정정할 기회를 빼앗는 최대의 ‘적’이다. (...) 선의를 가진 친구가 실제로는 적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악의를 가진 적조차 친구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 적을 친구로 삼고, 친구가 적일 수 있음을 보는 방식으로 적대를 횡단하는 것, 그것은 적대를 통해 모든 것을 둘로 가르는 적대의 정치학을 넘어서 우정의 정치학을 가동시키는 출발점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적과 친구의 구획이 갖는 근본적 난점, 근본적 불가능성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 나는 이를 ‘친구와 적의 횡단가능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 이 경우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말은 (271)그러한 분할의 무상함을 뜻하는 명제로 변환되고, 적과 친구의 구획을 가로질러 우정을, 의도나 적대를 넘어서 우정을 발견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271)부적절하다고 보이는 태도나 상황에 대해 비판적으로 개입하며 또 다른 변화를 기다려줄 수 있을 때, ‘우정’이나 ‘신의’라는 말은 적대의 정치학에서 벗어난 개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71)적대의 횡단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어디서나 친구를 찾는 것이다. 즉 친구와 적의 횡단가능성은 적조차 친구로 만들 능력을 위한 것이지, 친구를 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니다. 친구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은 그를 적으로 만들기 위한 게 아니라 친구로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것인 것처럼, 친구조차 적일 수 있음을 보는 것은 친구를 계속 친구로 삼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정의 정치학은 적대를 넘어서 모든 것을 친구로 삼는 것이며, 적대를 넘어서 모든 관계에서 우정을 발견하는 것이다. 적대의 정치학이 모든 정치적 분할에서 ‘적대의 보편성’을 믿고 있다면, 우정의 정치학은 그 분할을 가로지르는 ‘친구의 일반성’을 믿는 것이다. 나와 친구를 하나로 묶는 경계 외부에서 다가오는 모든 것들 속에서 그런 친구의 일반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3. 코뮨주의와 선물
(272)첫째 교환과 달리 선물은 주고받는 등가성을 의도적으로 피하며, 그것의 가치를 재는 것 자체를 피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교환과 다르다. 둘째 교환은, 가령 어음처럼 물건이나 돈이 없을 때는 어떤 대체물을 끌어들이는 식으로, 주고받는 행위의 동시성을 전제로 하는 반면, ‘선물의 교환’은 의도적으로라도 그 동시성을 피하고자 한다. 셋째 선물은 주고받는 물건의 교환가치는 물론 사용가치와도 독립적인 것이란 점이다. (...) 요컨대 ‘선물의 교환’은 교환의 일종으로서의 선물이란 관념은 두 번의 선물을 한 번의 교환으로 대체하고 오인함으로써 출현하는 것이다. (...) (273)가량 사회주의 초기에 레닌은 ‘수보트닉스’(공산주의적 토요일)에서 “사회의 이익을 위한 무보수 노동”을, “보상을 예견하지 않으며 보상을 조건으로 하지 않고 수행되는 노동”을, 요컨대 ‘공산주의적 노동’을 발견한다. (...)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계기는 사회주의를 정의해 주는 가치법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외부인 이러한 요소들에 있다고 해야 한다.
(274)선물이나 답례가 의무가 되는 경우 선물의 개념에 어떤 근본적 난점이 발생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 보상 없는 노동이 의무화될 때, 그것은 강제노동과 뒤섞이며 구별불가능ㅎ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런 자발성마저 강요하는 경우조차 있을 수 있다. 보상 없는 활동을 ‘자발적으로’ 하라는 요구가 쉽사리 출현할 수 있음을 우리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알고 있다. 노예노동, 전근대적 공동체에서의 노동, 혹은 봉사와 헌신을 요구하는 ‘종교적’ 공동체에서의 노동, 혹은 ‘스타하노프(Stakhanov)’ 운동 같은 사회주의적 노동의 경쟁 등. 그렇다면 ‘자발적으로’라는 규정을 덧붙임으로써 강제노동과 코뮨적 노동을 구별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275)주는 자든 받는 자든 선물을 선물로서 의식하거나 자각한다면, 선물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채권/채무의 형태로든, 교환의 형태로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경제적 순환의 일종이다. 선물이 ‘선물’이 된다면 선물이 아니게 된다는 것, 그것이 선물의 근본적인 역설이다. (...) (276)선물이 교환이나 채권/채무의 ‘발생적’ 기원인 셈이다.
(276)나는 이러한 선물의 역설을 고려한다고 해도, 절대적 차원의 선물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절대적 선물, 그것은 준다는 생각 없이 주는 선물이다. 받는다는 생각 없이 받는 선물 또한 가능하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금강경』에서 설파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그런 경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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