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서지: Arjen Kleinherenbrink, Against Continuity: Gilles Deleuze’s Speculative Realism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9)
* 이 글은 발췌번역입니다.
3장 내재론[internalism, 내면주의] 비판
[Kleinherenbrink 2019, chap. 3, 68]실존적으로, 그 외재성에서의 산과 그 관계에서의 산 사이에 반복되는 차이는 어떤 꽃의 두 면들[외재성과 관계] 사이의 차이와 같지 않다. 그리고 산이 다른 유형의 관계로 들어갈 때부터, 산 자체에 있어서조차 그것은 동일한 반복되는 차이가 아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3, 70]기능주의와 기계론은 기능하기 위해 몇몇 지점에서 출발했던 이(this) 개별체를 생각할 수 없다. 이것들은 ‘[기계의] 구성들을 생각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무능력’(AO 323)에 의해 저해된다. 사물/사태의 표면적 작동에만 집중함으로써, 그것들은 사물/사태 자체의 내부 영역을 간과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3, 74]비록 단자 개념이 명백하게 들뢰즈에게 영감을 준다 해도, 각각의 단자가 세계의 전체성과 어떤 내적 연관을 향유한다는 사실은 들뢰즈가 라이프니츠를 거부하도록 이끈다. 단자들 사이의 차이는 오직 동일한 세계에 대한 전망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이것은 외적(external) 차이로서 어떤 동일성을 전제한다. 즉 ‘모든 단자에 의해 일반적으로 표현되는 바로서의 그 세계는 그것의 표현들에 선-재(pre-exists)한다’(DR 47).
[Kleinherenbrink 2019, chap. 3, 74]문제는 엠페도클레스의 분리된 객체들이 언제나 이미 머리들이고 목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존재는 이미 미래의 기능들과 관련해서 합리적으로 결정된다. 그것들은 ‘분리된’ 그리고 ‘흩뿌려진’ 것으로 시작되지만, 언제나 분리된 결정들 그리고 흩뿌려진 구성원들로서 그러하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3, 76]이전 바디우의 독해와는 반대로, 들뢰즈가 베르그송주의자가 아니라는 이해가 중요하다. 베르그송은 [77]각각의 생명체가 삶/생명 자체의 어떤 보편적, 유기적 연속성 안에 놓여 있다고 주장하는 생기론자이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러한] 잘못된 깊이로의 환원적 경우를 거부할 것임에 틀림없다. (...) 잘못된 깊이의 존재론들이 우리 시대에는 갑자기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따라서 들뢰즈주의는 단지 고대의 철학적 입장들에 대한 대체만이 아니라, 기초적인 하부원자적 입자들, 파동들, 힘들, 장들 또는 심지어 신경세포들의 중심에 놓여진 여러 환원주의들을 대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고대의 것과 동일한 흠결을 지닌 현대적 판본들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3, 77]칸트도 또한 높이의 사상가로 분류된다(DR 58; LS 71, 105-6). [78]칸트적 현상은 초월적 주체성에 의해 완전히 조건지워져 있다. 자연법칙조차 범주들, 통일체들[단위들]을 통해, 그리고 현상하는 모든 것을 구조화하는 순수 지성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Kant 1996: A 128). (...) 칸트적 사물/사태 자체가 경험으로부터 물러나 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핵심이 아니다. 칸트주의는 어떤 내면주의(internalism)인데, 왜냐하면 인간 경험에 속한 모든 개별체들과 관계들이 그 초월적 주체와 범주들과의 보편적 관계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3, 79]잘못된 차이, 반복, 높이 그리고 깊이에 대한 들뢰즈의 반복적인 비판은 그러한 개념들이 외재성 테제를 위반한다는 것이다. 외재성은 우리가 그러한 것들로부터 떠나도록, 즉 “더 이상 깊이나 높이는 없다”(LS 130)라는 것을 전반적으로 요청한다. 결론적으로 외재성은 개체적 신체들 또는 기계들의 ‘깊은’[심층적인] 실재성과 그것들의 관계의 ‘높은’[초월적인] 표면 간에 어떤 차이를 요구하는 것이다. 들뢰즈가 썼듯이, “만약 신체들이 [...] 실체와 원인의 모든 특성을 가정한다면, 반대로 이념의 특성들은 한쪽으로 [...] 사물/사태의 표면으로 밀쳐진다. 즉 이념적인 것 또는 비신체적인 것은 더 이상 어떤 ‘효과’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LS 132). 외재성 아래에서, 각 개별체는 개개의 신체나 육체(corpus)를 가질 것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관계들에 있어서의 그것이 가진 비신체적인 표명과는 본성적으로 다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3, 80]하나의 개별체는, ‘그 단순한 외재적 기준에 의한 내적 특성’을 만들면서, 그것의 외양에 속하는 하나나 여럿과 동등해진다(DR 179). 들뢰즈는 이것을 ‘객체론’(objectivism, 객체[관]주의)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때 “그 ‘객체’ 자체가 방출하는 기호들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PS 28). 하지만 사물/사태의 그 존재와의 관계들과 표현들을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킨다. 사물/사태의 모든 관계적 측면들이나 기호들이 하나의 개별체에 할당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PS 100-1). ‘피터는 폴보다 키가 크다’에서 ‘~보다 키가 큼’이라는 것은 결코 두 주체들 중 하나만을 지칭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의 세계는 하찮고, 믿을만 하지 않은 기호들로 가득 차 있다(PS 23). 동일한 개별체들이 다른 계기에, 심지어 동시에 상이한 관찰자에게 상반된 질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3, 82][들뢰즈에 따르면] 외재성이란 개별체들이 절대적으로 어떠한 존재론적 공통성(community)도 전혀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요청한다. 인지와 동일시에 속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물리적, 인식론적, 실존적, 실증적, 우연적, 주체적 또는 생산적일 수 있지만, 존재론적일 수는 없다. 심지어 형식적으로, 사물/사태는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3, 83]그러므로 사유의 이미지는 다름 아니라 사물/사태를 사유 안에 있는 사물/사태들, 즉 우리와 관련된 사물/사태들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외재성, 차이 자체, 그리고 자기 반복에 하나의 예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사유 자체일 것이다. (...) 따라서 양식과 상식은 잘못된 깊이와 높이 같이, 그리고 저주받은 차이와 반복 같이, 사유의 이미지가 ‘다른 분배를 전제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LS 76).
[Kleinherenbrink 2019, chap. 3, 83]오이디푸스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사유의 이미지에 따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개별체들과 그것들이 관계들이 우리와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또는 적어도 우리와 관계된 무언가와의 관계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두 경우 모두, 모든 것은 단순한 재현으로 축소된다(AO 70).
[Kleinherenbrink 2019, chap. 3, 84]르클레르(Serge Leclaire)를 인용하자면, 들뢰즈는 “그 요소들이 정확히 어떤 [...] 자연적, 논리적, 또는 의미론적 결속의 부재에 의해 결합된 체계라는 개념”으로서의 기획[외재성의 존재론]을 그리고 있다(AO 125; cf. Leclaire 1996: 148). 르클레르는 아마도 정신분석을 가리키겠지만, 들뢰즈는 철학 자체를 가리킬 것이다. 우리는 모든 관계들이 우발적이고 따라서 실재적으로 물질인 어떤 체계를 요청한다. 이것은 ‘유목적 분배’와 ‘왕관을 쓴 아나키’에 도달하기를 요청하는 바, 그것은 ‘모든 양식과 상식에 선행한다’(DR 224; LS 79). 들뢰즈가 자주 ‘n-1’이라고 불렀던 것이 이러한 사유의 작동을 위해 요청된다(ATP 377, 22, 24, 177; DR 1, 8, 68, 140, 141, 155). 즉 모든 기계를 실재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n-1에서] ‘1’은 그로부터 어떤 것을 떼어내는 것인데, 이 어떤 것은 존재를 재현, 이미지 또는 특정 계기[순간]으로 환원하는 것을 말한다. 오직 이것만이 철학에 ‘진정한 시작’을 부여한다(DR 132). 각각의 기계 또는 다양체는 어떤 주어진 현재에 있는 것 ‘이상’의 존재로 보여질 것이 틀림없지만, 그것은 다른 가능한 관계들을 가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모든 현행적일 뿐 아니라 가능한 관계들을 초과하는 어떤 잉여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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