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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연속성에 반대한다-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_2장

by Nomadia 2021. 1. 25.

*원문서지: Arjen Kleinherenbrink, Against Continuity: Gilles Deleuze’s Speculative Realism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9), chap. 2 

*이 번역은 발췌번역이다.

2장 연속성 테제

 

[Kleinherenbrink 2019, chap. 2, 51]관계들이 항들에 외재적이라는 깨달음은 들뢰즈에게 철학의 천둥벼락이다(SC 141 282). (...) 만약 관계가 항들에 외재적이라면, 개별체들은 따라서 어떤 개개의, 내적인 실재성을 가져야 한다. 즉 하나의 개별체는 그 안에 개별체들을 가지며, 거기 존재하는 그 개별체들은 결코 완전히 접촉하지 않는다. (...) 외재성이란 따라서 어떤 것의 조우, 이전(removing), 변형 또는 파괴의 조건이다. (...) 따라서 [52]관계들은 결코 본질적 속성이나 최종 목적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들은 연결, 내어 줌(gift), 피난, 도구 그리고 구성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2, 52]‘우월한경험주의는 개별체들이 모든 관계들로부터 되물려지는(withdrawn) 것이지, 단지 우리의 지각으로부터만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고 정의된다(DR 143).

 

[Kleinherenbrink 2019, chap. 2, 52]외재성과 환원불가능성은 들뢰즈 철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성(interiority)에 관한 반감’(N 6)을 가진다. ‘내성은 개개의 실재성을 개별체로부터 거부하는 어떠한 철학을 표시한다. 내성이란 개별체들을 다른 어떤 것의 재현으로 환원하며, 이에 따라 그 자신을 넘어서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는 그것들의 존재를 내면화(internalising)한다. ‘잉여 없음이 내면주의(internalism)의 만트라(mantra).

 

[Kleinherenbrink 2019, chap. 2, 53]만약 관계들이 개별체들에 외적이라면, 개별체는 그것들의 내적 자아(selves)와 관계 안에서의 그 표명 사이에 어떤 내적 차이를 담게 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2, 55]우리는 어떤 개별체가 한편으로 개개의 실재성을 가지고, 다른 한편으로 관계들에서 완전히 상이한 표현을 가진다고 이해한다. (1) 들뢰즈는 흄의 경험론에서 외재성을 만나며, 그것을 우월한 경험론으로 급진화하고자 한다. (2) 외재성은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 앙띠오이디푸스천의 고원에서 중심 개념이며 (3) 들뢰즈의 다른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에 대한 독해도 또한 외재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2, 56]‘모든 것은 기계이다라는 공식은 프랑스어 원문으로는 ‘tout fait machine’이다. 여기서 ‘Tout fait’는 뒤샹의 유명한 변기와 병건조대와 같은 레디메이드 예술 작품을 가리킨다. 앙띠오이디푸스에서 다다이스트의 작품을 인용하면서, 들뢰즈는 분명 이것을 인식하고 있다. (...) 레디메이드 작품들은 언제나 하나의 맥락에서 다음 맥락으로 이전된 객체들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우리가 보통 객체의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단지 관계적 기능일 뿐임을 이해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이다. 예술작품으로 변한 변기는 더 이상 어떤 붙박이 위생 물품이 아니다. 그러나 뒤샹의 개입 이전에 그 변기는 아직 미적 감각체가 아니었다. (...) 거기에는 둔스 스코투스의 개념을 빌어온다면, 변기의 이것임’(thisness)을 구성하는 관계들에 외재적인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 모든 것은 하나의 레디메이드이며, 그것은 우리의 인지과정, 명명과정, 또는 사용과정으로 환원불가능하다. (...) 그 변기는 쓰레기장에도 박물관에도 화장실에도 속하지 않는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은 또한 개별체들이 그것들의 부분들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은 실존하기 위해 ‘R. Mutt’라는 서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L.H.O.O.Q도 모나리자에 부가된 수염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개별체의 부분들은 언제나 다소 불필요하고, 복합적인 관념이다. (...) [57]외적으로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각은 단순히 세계 안에 풀려 나온 하나의 힘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2, 57]뒤샹은 ‘tout fait’를 베르그송에게서 가져왔다. (...) 레디메이드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경험되는지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개별체들이 그들의 관계들로부터 완강하게 버티면서 물러난다는 것을 가르친다. (...) 어떤 개별체도 자동적으로 어떤 다른 것으로 환원되거나 그것과 수반되지 않으며, 저항과 경직성이야 말로 어떤 비정상적인 예외가 아니라 원초적인 사실이다. 레디메이드는 우리에게 개별체들이 어떤 실천적이거나 미적인 기능을 기다린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오히려] 그러한 기능에 저항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 이것이 바로 정확하게, 들뢰즈가 배치개념을 기계와 동의어로 사용하는 이유이다. 배치는 이질적인 부분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나오는 어떤 체계이기 때문이다. (...) [58][따라서] 역설적이게도 (...) 어떤 개별체도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든 관계들로 환원불가능하지만, 언제나 그것을 [관계들로부터] 빼내기 위해 다른 개별체들을 필요로 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2, 58]우리는 단지 객체의 기호들을 경험할 뿐이다. (...) 기호들은 크기의 두 질서 또는 그 기호가 번뜩이는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실재들을 의미하며, ‘다른 객체들을 감싸고 있다(DR 22). 한편으로 기호는 관계 안에서의 그것의 표명에 있는 객체이다. 다른 한편, 그 객체 자체는 기호들 안에 감싸여져 남아 있으며, 직접 접촉으로부터 물러난다. (...) 이것이 우리가 오직 객체들의 번역된 기호들만을 만나고, 객체 자체를 만날 수 없는 이유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2, 58-59]경험은 실재가 진정한 경이로움을 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며, 거기에는 어떤 보편적 근거도 없지만, 근거가 되어가는 어떤 변화, 새로운 무언가가 곧 근거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함축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2, 59]만약 개별체들의 존재가 순수하게 현재적이며 관계적이라면 각각의 개별체는 그 현행의 사태들 안에서 소진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면] 어떤 개별체도 오래된 관계들로 이어지도록 요청되는 비-관계적 잉여를 가지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것들을 구축하지 않는다. 각각의 개별체는 그것이 실존하는 각각의 순간 동안에 어떤 내적 실재성을 가져야만한다. 이것은 관계들이 구축되는 언제나 이미 과거인 바 그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2, 61]들뢰즈가 쓴 것처럼, 어떤 날 것의 물질적인 모델은, 정당하게 말하자면, 사유불가능하다’(DR 286). 유물론 안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 현행적이고 동질적이기를 기대할 것이며, 그 결과 미래의 사건들은 결코 가능하지 않게 된다. (...) [이것은] 유물론의 문제만이 아니라 관념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 예컨대 칸트의 초월론적 주체[가 그것이다.] (...) 들뢰즈는 유물론 뿐 아니라 실체들을 내면화하고 그것들의 관계들을 실체, 행위자, 원리, 운동 또는 예외적이고 지배적인 관계(인간과 세계의 관계와 같은 것)로 가져가는 것을 기각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2, 61]실재는 관계들을 구성하는 유일한 것이 아니다. 완전히 관계적인 실재는 변화를 고려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각 관계는 다른 무언가에 의해 수반되어야만 한다. 즉 그 개별체의 개개의 실재성이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잉여로 구성되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 오직 관계들만이 존재한다면, 관계들이 관계하는 것은 이해불가능하게 된다. [62]거기에는 무한한 재현’(DR 56)만이 있을 것이다. (...) 관계적 특질은 수렴할 수 있지만, 오직 그와 같은 비-관계적 개별체에 따라서만 그렇게 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2, 63]만약 관계가 항들에 내속한다면, 무언가가 개별체들과 변화의 근거가 되는 상호작용 너머에 수립되어져야 한다. 만약 관계와 항들이 모두 보다 근본적인 관계에 내속한다면, 모든 것이 들어서 있는 그것과 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 간의 이원론이 존재하게 된다. 두 경우 모두 다양체가 일자에 의해 포섭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와 달리 복수주의를 방어하는 바, 그것은 동시에 일원론이기도 하다. 복수적인 것은 각 개별체가 어떤 개개의 그리고 환원불가능한 실재를 가지기 때문이며, 이때 이 실재는 그 자신의 힘을 가지게 된다. 일원론이라는 것은 각 개별체가 어떤 형식적 의미에서, 이와 동일한 내적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오직 사유의 한 가지 형식만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동일한 것이지요. 우리는 오직 일원론적 또는 복수주의적 태도로 생각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직 적수는 둘입니다. 일원론과 복수주의. 이것은 동일한 것이에요. [...] 이것은 이원론의 원천이 정확히, 하나로 긍정될 수 있는 무언가와 다수로 긍정될 수 있는 무언가 사이에 있는 대립이기 때문이지요.”(SCS 260370; cf. DR 56)

 

[Kleinherenbrink 2019, chap. 2, 63]‘더 이상 깊이도 높이도 존재하지 않는다’(LS 130). (...) 우리는 개별체들을 그 자체로, 그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체계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들뢰즈가 겸손하게 그의 철학에의 작은 기여라고 부르는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2, 64]우리는 각 개별체의 형이상학적 표면물리적 표면사이에 어떤 종적[본질적] 차이를 놓아야 한다(LS 125). 이에 따라 개별체들은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리고 부분전체적으로(mereologically) 환원불가능하다. 두 표면은 항구성과 마찬가지로 변화의 요소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성이든 변화든 둘 중 하나가 그 존재의 한 면과 연관된다. 이 측면은 결과적으로 다른 개별체에서의 저 동일한 면과 구분불가능해 질 것이고, [따라서] 그 모든 면들이 하나로 혼합되며, 따라서 이원론이 재-수립된다. (...) 하나의 개별체는 언제나 다른 개별체들을 포함한다. 들뢰즈는 개별체들의 개개 실재성을 이러한 관계적 측면을 참조하지 않고 고려해야만 했을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2, 65]기계나 배치에 대해 배운다는 것은 다양한 관계들에서의 그 표명들, 그 기술들(descriptions), 부분들, 용법들 등등에 익숙해진다는 것이지, 결코 그 자체로 그것을 안다는 것이 아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2, 66; endnote 14]들뢰즈는 또한 내면주의(internalism)와 외재주의의 대결이라는 주제가 허위-문제라는 반론을 거부한다. 이것은 지향성 이론에 기반한 사람들[현상학자들-역자]에 의해 제기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든 의식이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며, 의식 자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마도 외재성(의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것)과 내면성(의식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동시에 그리고 모순 없이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의식 안에 있는 객체의 환원불가능한 부분은 의식 자체에 의해 생산되거나 근거지워질 수 없다. 만약 그러하다면, 객체의 두 면들(그 현존과 타자성)은 의식으로 환원할 수 있게 되고, 내면주의가 모조리 되돌아 오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객체의 타자성으로의 되물림은 그것에 속해야 한다. 같은 것이 개별체 간의 관계에도 이어진다. 만약 의식이 그것들에 대한 완연한 이유라면, 그 결론은 전-소크라테스주의, 즉 어떤 통일된 퓌지스(physis)가 누스(nous)에 따라 흔들리고 편재된다는 이론으로 흐르며, 이렇게 해서 유물론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동일한 문제에 다시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