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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연속성에 반대한다-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_1장

by Nomadia 2021. 1. 24.

*원문서지: Arjen Kleinherenbrink, Against Continuity: Gilles Deleuze’s Speculative Realism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9) 

*이 번역은 발췌번역이다.

 

연속성에 반대한다-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

 

저자: 아르젠 클레인헤렌브링크

번역: 박준영(노마씨, 수유너머104, nomadia@naver.com)

 

1장 들뢰즈와 존재론

[Kleinherenbrink 2019, chap. 1, 22]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뢰즈의 철학이 개념도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간단하게 거부할 수 있다. 어떤 철학은그 자신의 개념들에서 필수적인 가치를 체계적 연구에 부여한다. 어떠한 철학에 창조적인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맥락에서의 그것의 전개보다 더 많은 것이 철학에 존재하는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1, 23]비록 들뢰즈의 저작의 많은 부분이 재현과 주체성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철학을 현상학으로 환원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다. 첫째 들뢰즈는 현상학을 단순한 견해(WP 149)로 기각하며, 단순한 상식(mere comnon sense, DR 137)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것은 원인 보다는 결과들에(DR 52), 그리고 '정신분석'(AO 37)에 집중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두 번째로 들뢰즈의 연구는 개별체들이 그 자신들 사이에서 시적인 과장으로 작동하는 여러 경로들을 기각하기를 요청한다. 세번째로 그리고 좀 더 심오하게도 우리는 들뢰즈가 개별체들 자신들 사이에 관계들을 이론화한다는 것을 거부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다양체 그 자체'(TRM 309)라는 말을 '의식을 위한 다양체 그 자체'로 읽을 것이다. 외재성(externality)은 따라서 단 하나의 정의하는 예외에 의해 통제될 것이다. 이떄 모든 것은 주체성과 재현의 발생 안에서 그것을 위해 야기될 것이다. 이것은 들뢰즈의 경우에는 맞지 않다. 들뢰즈는 분명히 기계적 존재가 주체를 '지목하는' 것을 거부한다. (...) [24] 기계들은 상호간의 관계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지, 우리를-위한-상호간에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 기계적 존재의 핵심은 태양은 나의 실존과는 상관없이 오르막길을 따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1, 26]들뢰즈의 철학은 해석학이 아니다. 해석학이 세계에 접근하면서 언어와 의미화에 주의를 기울이는 곳에서, 들뢰즈는 인식론이나 언어학의 재료들을 내세우는 철학을 거부한다(WP 10).

 

[Kleinherenbrink 2019, chap. 1, 26]다른 곳에서 들뢰즈는 "'철학의 죽음'이나 '철학 너머로 가는 것'을 주장하는 그런 질문들은 결코 내게 영감을 주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을 고전적인 철학자로 간주한다"고 재우쳐 주장한다. 그는 철학의 죽음에 관한 생각을 어리석고 바보같다고 본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1, 25]들뢰즈가 '기계'를 사용하고 '객체'[대상]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객체라는 말이 어떤 관찰자에 의해 공간과 시간 안에서 경험되는 것으로서의 개별체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경험된 이미지로 파악되는 것이다. 그는 비록 그것의 발생이 늘 완전하지 않은 잠재적 주체들이라 해도, 개별체들이 단지 주체를 위한 대상들이라는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들뢰즈가 객체의 완전한 파악이라는 생각을 거부만 한 것은 아니다. 불완전하게 파악된 대상들이라해도 그것은 여전히 어떤 주체에 의해 파악된 것으로서 정의되는 것이지, 그것에 외재적인 것으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1, 27]이것이 들뢰즈가 그 자신을 하이데거의 옆에 놓기를 거부하는 이유이다. 즉 그는 하이데거가 여전히 우리와 그것[대상, 세계]의 관계로 존재하는 것에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DR 66). 이렇게 되는 이유는 현상학적 독해에서와 마찬가지로, 해석학적 분석도 모든 것을 인간과 그들의 세계와의 단일한 관계로 가져감으로써 외재성 테제를 위반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들리즈의 철학은 환원불가능한 개별체들이 그것들 사이에서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인간 관찰자를 위한 배경으로 이해되는 세계라곤 요구되지 않는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바와 같이 이것은 들뢰즈가 '내재성 안에서의 초월'(transcendence within the immanent)을 사유함으로써 의미한 바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1, 28]들뢰즈는 모든 실재성이 파생되는 고정된 어떤 것을 분별해 내는 특정한 종류의 존재론에 반대한다. (...) 들뢰즈는 본질과 외양[현상] 그리고 진리와 오류 사이의 구별을 제거한다(DI 74). 본질의 제거는 모든 존재신학(ontotheology)을 거부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으며, 반면 진리들의 제거는 현전(presence)의 거부로 읽힐 수 있다. 그와 같은 독해는 타당하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1, 28]헨리 솜머스-(Henry Somers-Hall)은 들뢰즈가 "하이데거의 존재-신학에 대한 분석을 거부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과 존재-신학을 동등하게 보는 그 정식을 거부한다"(2012: 344)는 점에 주목한다. 들뢰즈는 상호관계적(among each other) 개별체들의 존재론을 제안하는 바, 여기에는 기초들, 목적들, 시초들, 저 세상이나 영원한 실체들에 대한 의존이 없으며, 어떤 것에 대한 직접적 접근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20세기 유럽 철학에서 거의 유일한 것이다. 이 존재론은 존재신학도 아니고 현전의 형이상학도 아니다. 들뢰즈는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외재성 테제를 보여주고 그것으로부터 [29]연역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개별체의 국면들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 들뢰즈의 존재론은 (...) 어떤 것이 무엇인지, 존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기보다, 개별체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관계하고, 지속하며, 출현하는지 드러낸다. 이것은 무어(A.W.Moore)가 일컬은 '비명제 형이상학'(2012: 583)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와 같은 존재론은 주체에 완연히 현전하는 객체들을 결코 만들지 않으며, 결코 어떤 구성적 주체를 정립하지도 않고, 언어가 투명한 매개체로서 내적 실재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 그의 존재론은 무한한 지성이나 절대적 지식에 속한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존재론은 엄격하게 인간의 유한성을 존중한다(DI 16; WG 167-73). 이것이 어째서 들뢰즈가 어떤 체계적 존재론이란 존재 자체(Being)에 대한 특권적 지식과 모든 것을 판정할 권위를 가진 철학자-왕으로 스스로를 표명하는 것 같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1, 30]다른 한편, 우리는 외재성 테제를 고려하면서, 존재론을 개별체들의 존재에 관해 사유하는 어떤 철학으로 정의할 것이다. (...) 존재론은 특정한 사물/사태들이 무엇인지, 이런 저런 경우에 무엇이 그것들을 발생시키는지, 이런 저런 지점에서 무엇이 그것을 촉발하는지, 곧 또는 이후에 무엇이 그것들을 파괴하는지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개별체들과 관계들에 대한 그것의 설명은 완전히 형식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 우리는 들뢰즈의 비-형이상학적 존재론을 긍정하는바, 개별체들의 존재와 발생은 기계 자체로부터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1, 30]존재와 그것이 경험되는 바를 동등하게 보는 경험주의적 철학 대신에, 들뢰즈는 '초월적' 또는 '우월한' 경험론을 제안하는데, 이는 '존재하는 모든 유형보다 더 우월한 것'을 전제하는 것이고, 이것은 그것의 존재론적 위상을 기계로 정립한다. 그것은 또한 기계들 간의 종합이 '실재의 일반 법칙'(DR 108)이라는 점을 따른다. 들뢰즈가 베르그송에 대해 쓴 것에 따라, 그와 같은 철학은 '존재론으로의 도약'을 성취하고, '사물/사태의 다양한 본질'에 도달하면서, '복잡 존재론(complex ontology)의 주제를 제공하는'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1, 35]이러한 해석들[관계의 외재성과 잠재성이라는 모순을 중심에 놓는 해석]은 이해될 수 있지만, 필연적으로 들뢰즈의 사유를 진리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여기에는 그러한 해석들이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될 만한 해석적이고 철학적인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차이와 반복이후 들뢰즈는 명시적으로, 모든 실재적인 것들이 생산되어 나오는 어떤 형이상학적 깊이로 제기된 잠재적 영역이라는 관념을 포기한다는 사실이다. (...) [36] 의미의 논리에서 도입된 표면’(surfaces)은 이후의 저작들에서도, 들뢰즈가 실체들 자체가 어떤 개별적인 잠재적 (aspect)을 가진다고 보는 존재론에서의 잠재적 영역(realm)이라는 생각을 대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잠재적 면은 개별체의 관계들의 어떤 초과분이며 그것을 넘치는 어떤 것을 구성하며, 우리는 이것이 들뢰즈가 변화와 상호작용을 고려하기 위해 그와 같은 과도한 작업을 하도록 잠재적 영역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제안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철학적 근거는 기계 테제도, 외재성 테제도 잠재적 영역과 (상상가능하기는 하지만) 조응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첫째로] 만약 잠재적 영역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은 기계가 아니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때 모든 기계는 단순한 재현이나 표현이 되고, 결정적으로 비-기계적인 것이다(불연속 대신에 연속, 외연 대신에 강도 등등) (...) 둘째로 잠재적 영역이 존재하게 되면, 관계들은 단지 매우 제한된 의미에서만 외재적이다. 사물/사태는 궁극적으로 연결들의 존재발생 장소, 과정의 부분들, 또는 보다 큰 연속되는(특히 내적으로) 각각의 공간들의 주름들에 불과해지는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도, 바로 그 잠재적 영역이라는 생각 자체가 비일관적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에는 어떤 것(과정, 사건, 강도)이 동시적으로 그것이 이웃하는 것들과 연속되거나 스스로 변화할 수 있을 법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1, 32]들뢰즈의 두 번째존재론에서 기계는 최소 실재 단위’(the minimum real unit, D 51)이다. 이 분석은 강도들의 원초적 깊이의 포기에 관해 들뢰즈가 언급한 것들을 모든 곳에서 고려하는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차이와 반복은 들뢰즈가 끝까지 고수하고 있는 기계 존재론을 명확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한에서만 참조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1, 37]이 두 번째 존재론은 더 이상 실재를 잠재적인 영역(realm)과 현행적인 영역으로 나누는 어떤 단일한, 보편적인, 이질적 차이를 전제하지 않고, 오로지 잠재적 (aspect)과 현행적 면 사이의 이질적 차이만을 전제한다. 은 개별체들이 무엇이든 간에 존재론적 구조를 구성한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1, 37]기계 존재론에서 기계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영역이나 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계들은 빈 서판(blank slate), 파생물들도, 재현물도, 계기, 범역들, 요소들, 점 또는 효과들도 아니다. 그것은 담론, 권력, 관계, 이데올로기, 주체성, 언어, 의식, 신경, 기본입자 또는 생물학적 욕동으로 축소될 수도 없다. 기계는 그것보다 실재적인 것이 없을 정도로 실재적이며, 각각의 기계는 네 겹(fourfold)이다. 들뢰즈의 개념은 개별체들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의 네 가지 존재론적 특성들에 신중하게 접근함으로써 더 강화한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이미 모든 객체가 두 개로 갈라져 있으며, 각각은 다시 두 개로 쪼개진다고 언급한다. 각 반쪽은, 다른 방식으로 언제나 변화를 겪는다. 이에 따라 하나는 미분화’(differentiation)이고 다른 하나는 분화’(differenciation)라는 개념으로 기술된다. (...) [38] 들뢰즈는 각각의 개별체가 두 겹의 잠재적 깊이와 두 겹의 현행적 표면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 구별은 모든 측면에서 우선되는데, 자연-관습, 자연-습관 또는 자연-인공의 관계에서 그러하다”(LS 187). 이 네 겹[의 주름]은 여러 이름을 가진다. 때로 현행적인 것은 물리적또는 신체적표면이고, 잠재적인 것은 두 번째 스크린’(LS 207)이다. 의미의 논리에서 개별체의 잠재적 면은 신체특이성들’(singularities), 그리고 현행적인 것은 의미와 그 의미가 간접적으로 암시되는경험된 질들로 나누어진다(LS 20). 앙띠오이디푸스에서, 모든 기계는 욕망으로 가득 찬 기관없는 신체를 가지며, 다른 기계들과의 관계에서 흐름이 접목되는 부분 대상[객체]’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것은 (...) 모든 사물/사태들의 형식 또는 모든 흐름들에 대한 특이한 주형틀(unique cast)”(LS 180)이다. 비록 네 겹의 면들이 상이한 작동들에서 다른 이름들을 가진다 해도, 배치의 사분면’(tetravalence of assemblage)은 변하지 않는다(ATP 89). 이 보편 구조는 들뢰즈가 말하는 존재의 일의성(the univocity of Being)을 의미한다. 주름은 정확히 이 네 겹의 개별체들의 상을 포함한다.

[39]

들뢰즈에 따르면, 여기서는

 

객체적 의미에서 언제나 다양 통일성(a unity of multiple)이 있으며, 하나는 또한 하나다양성을 가지고, 다양통일성을 가지지만, 이제 그것은 주체적 의미에서 그러하다. 어떤 순환적 실존이 있는 곳, 전체 안의 하나’(Omnis in unum)인 곳에서, 그와 같은 하나--다양과 다양--하나는 하나--하나와 다양--다양에 의해 완성된다.(FLB 145)

 

다시 말해, 각각의 개별체의 객체적이고, 잠재적이며, 환원불가능흔 면은 동시적으로 하나이면서 다양[일이면서 다]이다. 들뢰즈가 라이프니츠에게서 배운 바에 따르면, 이것(this)으로 존재하는 하나는, 저것(that)으로부터 이것(this)을 구별하는 다양일 뿐이다. 동일한 것인 주체적, 관계적, 현행적 측면에서 요구된다. 이것으로 존재하는 하나는 그것과 연관되는 사건 또는 경험과 만나지만, 저것과 구별되는 이것의 질들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다양일 뿐이다. (...) 앙띠오이디푸스에 따르면, 생산이면서 생산물의 존재론을 야기하면서, 네 겹은 정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생성으로 고려된다. 그리고 고전적인 체계들에서의 본질과는 달리, 들뢰즈적인 본질은 전체적으로 (비록 무작위적이거나 손쉬운 것은 아니지만) 가변적이고, 따라서 각각의 기계는 준-안정적(meta-stable)일 뿐이다(DI 86).

 

[Kleinherenbrink 2019, chap. 1, 39]기계를 구성하는 이질적 요소들이 단순히 기계 이상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BSP 118). 생산과 대체가 개체적 실체들에 기초할 수 있을 뿐인 결과적 실재성은 당황스럽게도 들뢰즈가 과정’(proces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과정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그것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영역이나 순환회로와 같은 어떤 것도 없는것이다. 따라서 국면들 뒤에 기계들을 야기하거나 연결하는 어떤 초월적 요인도 존재하지 않는다(AO 14). 두 번째, 기계에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어떠한 구분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를 위해설립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과정은 기계란 모든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을 단순하게 의미한다. 그러나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과정이 그 자체 어떤 목표나 목적으로 비춰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한한 영속성 그 자체와 혼동되어서도 않된다(AO 15). 이는 기계에 부가되어 어떤 연속적이거나 보편적인 것 또는 사건 아래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외재성은 실재가 단절과 단면으로 가득 차 있기를 필요로 한다(AO 26). 그리고 이 기계들 사이의 단절화와 단면화가 들뢰즈가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거기에는 오로지 정신분열적 대혼란, 즉 환원되지 않는 기계들의 맞물림, 다시 말해 기계들 간의 무관심, 선별적이며, 순환적이면서, 배제적이고, 스며들고, 소비되고, 생산되고, 기록되며, 겨냥되고, 달아나며, 붙잡히는 또는 다른 것들과 대체되는 것이 있다. 들뢰즈가 자연 안에 있는 악마적인 것의 형이상학적 생산이라고 부른 것이 이것이다(AO 64).

 

[Kleinherenbrink 2019, chap. 1, 40]이러한 개념들[수동적 종합, 이접적-연접적 종합]은 하나의 개별체가 다른 것들과 관계 맺는 방식(연결connection), 그것이 환원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는 동안 그렇게 관계 맺는 방식(이접disjunction), 그리고 새로운 개별체들이 창조되는 방식(연접conjunction) 을 기술한다. 이것들은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한 것이기에 시간적이며, 기억, 지성, 의지, 재인(recognotion) 그리고 의식에 독립적이므로 수동적이고, 관계들의 구축을 야기하므로 생산적이다. 또한 이것들은 개체적 본질들의 개변(alteration)을 설명하므로 등록적’(registrative)이며 개별체들의 탄생과 죽음에 연관되므로 소비적이다. [41]이들 종합들은 연속적이지 않지만, 언제나 중첩’(overlap)된다(AO 24). 이들은 서로 간에 ‘~후에라기 보다 ‘~아래에의 관계를 가진다(cf. DI 24, 29). 그리고 이것들은 네 겹만큼이나 보편적이다.

 

[Kleinherenbrink 2019, chap. 1, 41] ‘그림 2’는 들뢰즈의 존재론에 따른 개별체들과 관계들의 구조에 관한 기초 다이어그램이다. 말한 바와 같이, 어떠한 기계라 하더라도 네 겹의 존재론적 구조를 가진다. 그 면들 중 둘은 현행적이며 기계가 다른 기계들과 어떤 식으로 조우하는지에 관련된다. 또 다른 두 면은 잠재적인 것이며 기계인 한에서의 기계(machine qua machine)의 비-관계적 존재와 관련된다. 기계들 간의 어떤 관계도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세 가지 종합으로 구성된다. 이 다이어그램은 들뢰즈가 기계의 특정 면들과 관계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가장 중요한 개념들(그리고 그것들의 주요 동의어들 중 몇몇)을 목록화한다.

 

 

[Kleinherenbrink 2019, 1st.Inter, 42]만약 모든 개별체들이 초과-관계적 면(extra-relational aspect)을 가진다고 언급하는 외재성 테제를 수용한다면, 네 겹의 개별체들은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개념이다.

 

[Kleinherenbrink 2019, 1st.Inter, 46]요컨대 만약 외재성이 유지된다면, 각각의 개별체가 그것이 다른 것에 의해 경험되는 방식에 더해 어떤 X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각 개별체가 결코 어떤 다른 개별체에 속하는 X와 접촉하거나 직접적인 접근을 하지 않는 어떤 X라는 것이 마찬가지로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개별체들이 [브라이언트에 따라] 힘들(powers)이라면 그때 그것들은 또한 부가적으로 어떤 다른 것(어떤 Y)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는 모든 힘들이 하나의 거대한 보편적 덩어리로 해소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 브라이언트는 이제 명백하게 개별체들이 서로 간에 물러나고 그것들이 관계로 환원불가능하다는 객체-지향적인 외재성 테제를 포기한다. (...) [47]외재성 테제에 반해, [브라이언트의] 이 겹주름(folds)들은 서로 간에 연속한다. 그의 예를 가져 온다면, 앨버커키(Albuquerque)에 있는 하나의 나무는 흙, 벌레들, 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생성되는 다른 존재자들과 관련하여 분리된 개별체가 아니다. 대신에 나무는 그 안으로 그러한 것들 모두를 접어넣고 있다(pleats)’

 

[Kleinherenbrink 2019, 1st.Inter, 47]외재성이란 타자적인 것(alterity)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지 않다. 대신에 그것은 개별체들이 (이것들이 서로 간에 다르거나 아니거나 간에) 불연속적인 독립체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어떤 단일한 통합된 연속체의 부분인지에 달려 있다. (...) 만약 외재성이 유지되면, 그때 개별체들은 관계적 표명과 그것들의 개개의(private) 존재(그들의 힘들’)로 쪼개질 것이다. 우리는 관계적 표현들이 현행적으로 두 겹의 질과 질화된 사물/사태라는 것을 보았다. 보다 중요하게, 만약 외재성이 어떤 존재론적 테제로 수용된다면, 그때 거기에는 개별체의 내적 존재와 개별체의 내적 존재 간에 엄격한 분리와 불연속성이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X가 무엇으로 구성된다고 알려지든지 간에, 내적인 것은 모든 실존하는 X의 경우들이 하나의 단일하고 거대한 덩어리로 해소되는 것을 막아서는 어떤 부가적인 Y에 의해 보충되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단일한 개별체만이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