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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연속성에 반대한다-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_서문과 서론

by Nomadia 2021. 1. 23.

*원문서지: Arjen Kleinherenbrink, Against Continuity: Gilles Deleuze’s Speculative Realism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9) 

*이 번역은 발췌번역이다.

 

연속성에 반대한다-질 들뢰즈의 사변적 실재론

 

저자: 아르젠 클레인헤렌브링크

번역: 박준영(노마씨, 수유너머104, nomadia@naver.com)

 

서문

[Kleinherenbrink 2019, 서문, x-xi][들뢰즈]의 중요한 성찰은 개별체들이 결코 단순한 부분, 재현, 결과, 순간 또는 어떤 다른 것의 기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개별체도 결코 다른 본질, 주체, 세계, 구조, 운동, 기술(description), 지각, 내용, 맥락, 미래, 과거 또는 이러한 것들의 어떤 조합으로 환원될 수 없다. 아무 것도 다른 것을 대신할 수 없으며, 심지어 많은 들뢰즈주의자들에 의해 중요하게 여겨지는 그 유명한 잠재적 영역도 모든 존재하는 사물/사태들을 고려하는데 실패한다. (...) 들뢰즈는 개별체들의 절대적 특이성(singularity)으로 사유하기 위해 존재론을 설계하고 일신한다. (...) 개별체들 자체는, 변화와 새로움을 근거짓기에 충분한 잉여를 구성하면서, 언제나 이미 그것의 관계들을 초과한다.

 

서론

[Kleinherenbrink 2019, 서론 1, 1]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서] 무엇을 선택하든지 간에, 분명한 결과는 이원론(dualism)이다. 그것은 실재를 결과적으로 두 면으로 분할한다. 한 측면은 막 목록화된 경쟁원리들 중 하나나 몇몇을 함축할 것이고, 오직 그것 또는 그것들만이 진정 원인으로서 발생하고 존재하는 것을 결정한다. 다른 측면은 결국 단지 외관, 효과들, 계기들, 재현, 점 또는 그 첫 번째 측면의 파생태들일 분이다. 이 환원주의적 경향은 우리의 가장 심각하게 각인된 습관들 가운데 존재한다. 질 들뢰즈의 위대성은 이러한 습관의 거부에 있다. 그는 모든 개별체들에 동등한 실재성을 체계적으로 부여함으로써 모든 형태의 이원론을 격하시킨다.

 

[Kleinherenbrink 2019, 서론 1, 2] 들뢰즈는 모든 정신적, 물리적, 화학적, 유기적 그리고 디지털 실체들의 존재론적 평등성을 이들 모두 그리고 각각을 기계’(AO 12)라고 부름으로써 강조한다. (...) 모든 개별체는 기계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재적으로 그 자신의 작용기제를 가진다. (...) 우리는 이를 들뢰즈의 기계 테제라고 부를 것이다. 이 테제는 들뢰즈가 -실재론’(hyper-relaism)(K 70)이라고 부른 것을 함축[한다.] (...) 그의 철학의 핵심은 이러한 초-실재론이나 보편 기계론’(ATP 256)의 체계적 옹호와 탐색이다. (...) [3]모든 것이 기계처럼 존재한다라는 약한 테제 대신에 들뢰즈는 모든 것이 기계 존재한다라는 강한 테제를 옹호한다.

 

[Kleinherenbrink 2019, 서론 1, 3][리좀, 배치, 다양체 등등의 개념들에서] 들뢰즈는 기계 테제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다. 어휘에서의 변주는 이후에 설명될 기계들의 다양한 국면들을 강조하는데 일조한다. 같은 것이 사회기계’, ‘기술기계그리고 욕망하는-기계와 같은 개념들에서 견지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전체 기계 기능의 상이한 측면들일 뿐이다. “그것들은 같은 기계이지만, 같은 권역에 있지는 않다”(BSP 130). (...) [4]기계적인 것은 비-기계권에 반하는 기계권도 아니고, -유기적 권역에 반하는 유기적 권역도 아니다(D 104). 기계가 자연=산업, 자연=역사”(ATP 37)로 간주되는 곳에서는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또는 원초적 과거와 진화된 현재(ATP 69) 사이의 모든 구별들을 거부한다. 기계 테제는 일의적(univocal)이고, 따라서 생명권, 정신권(noosphere)은 없지만, 모든 곳에서 동일한 기계권(Mechanospher)이 있다”(ATP 69).

 

[Kleinherenbrink 2019, 서론, 4][두 번째] 원리는 관계가 항들에 외재적이라는 것이다(ES 66). 외재성 테제는 들뢰즈의 사유에서 절대적으로 중심을 차지한다. 이것은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코기토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다. (...) [5] 외재성이란 하나의 개별체 자체는 결코 그것의 관계 안에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별체 자체와 그것이 표현들(manifestations) 간에 종적인 차이를 정립하며, 개별체들 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불가능하게 만든다(하나의 개별체는 오직 다른 표현들과 만날 수 있을 뿐, 다른 개별체들 자체와 만나지 않는다). (...) 상상가능한 가장 매끈한 기계라 하더라도 그 모든 부분들은 따라서 존재론적으로 다른 기계 뿐 아니라 부분들 서로 간에 환원불가능한 상태로 남는다(K 37). 무한정하게 진행하는 어떤 기계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 요컨대 외재성이란, 비록 다른 어떤 것들이 모든 것이라 해도, 아무 것도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물/사태들의 표면에 놓여 있는 그 관계들을 따르며, 물론 관계는 그것들의 기계로 환원불가능하다. (...) 외재성은 단지 개별체들이 그것들의 관계들로 소진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 모든 개별체는 스스로 언제나 강력한 힘(force)이 되어간다. 개별체에 관한 이러한 관점은 들뢰즈가 -유기적또는 유기적/생명이라는 개념으로 의미하는 것이다(ATP 503). (...) [6] 그 어떤 것도 특정한 신, 영혼, 본질, 물질, 부분, 전체 또는 패턴으로 환원될 수 없다. 단일한 감정은 뇌나 뇌의 조합, 유전자 그리고 문화로 환원불가능하다. 하나의 바위조차 그것의 원자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사건들로 환원될 수 없다. 모든 내재주의(internalism)은 그것이 아무리 미세하게 이루어진다 해도, 외재성의 의해 금지된다.

 

[Kleinherenbrink 2019, 서론 2, 7] 사실 들뢰즈의 철학에 대한 많은 해석들은 세 가지 범주로 넓게 수렴될 수 있다. 그 각각은 들뢰즈가 고수하는(우리가 이제 볼 바와 같이) 기계 존재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첫째 그룹의 사람들은 들뢰즈가 체계 없는 철학자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들뢰즈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철학자들은 엄격함이나 실재에 부합하는 것에 대한 일관된 이론 둘 모두가 아닌 것으로부터 도출된 개별 개념들을 고안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개념들은 단지 고립된 도구들이며, [8]우리가 어떠한 정치적이거나 미학적인 기획든지 간에 재단할 수 있는 손쉬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두 번째 들뢰즈의 대한 해석은 그가 개별체(entity)들을 확실히 비-존재적(no-ontic) 어떤 것, 즉 유사 전소크라테스적 과정이나 사건들의 덧없는 다양성에 속하는 혼돈스럽고 약동하는 흐름으로 환원하는 형이상학자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그룹은 들뢰즈의 철학을 형이상학에 대한 한결같은 공격으로 읽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들뢰즈를 존재론의 가능성 바로 그것을 해체하는 것으로 독해하며, 현상학과 해석학이 그러한 형이상학의 죽음 뒤에 남겨진 모든 것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Kleinherenbrink 2019, 서론 2, 7] 이 책은 들뢰즈의 네 겹의 개별체들(fourfold entities)과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특성화하는 세 개의 종합(three sythesis)을 재구성한다. 매우 놀랍게도 이것은 들뢰즈의 철학을 이렇게 다루는 첫 번째 작업이다.

 

[Kleinherenbrink 2019, 서론 2, 8][퀭텡 메이야수의] 상관주의(correlationism)가 맞다면, 물론 모든 것은 기계이다[들뢰즈의 주장에서] 개별체들 그 자체의 현실적 존재에 대한 테제로 가능하게 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와의 인간적 상호작용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Kleinherenbrink 2019, 서론 2, 9]들뢰즈의 존재론은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의 선행연구이면서 첨단의 사상일 것이며, 보다 세부적으로는 사변적 실재론의 객체-지향론의 계보에 속한다.

 

[Kleinherenbrink 2019, 서론 2, 9]사변적 실재론자는 상관주의 너머로 가기를 또는 그것을 끝내기를 바란다.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다기화하는 이성을 위해, 그들은 인간이 경험하는 것과 독립적으로 실재를 이론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실재론이란 (적어도) 인간적 경험 세계 너머의 실재의 존재에 대한 어떤 투여를 의미한다. 형용사인 사변적이라는 말은 사유로서의(qua thought) 사유가 이러한 실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암시적 의미이다. 사변적 실재론자는 물론 자연과학이나 수학이 우리에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재에 접근하게 한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 [사유에서] 이념적인 것은 과학적 또는 수학적 자료에 기초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사유 그 자체에 기반한다. (...)

[11]이러한 [메이야수, 브래시어, 하만]입장들은 매우 상이한 의견을 가지며, 그래서 누가(그리고 무엇이) 사변적 실재론에 속하는지(또는 속하지 않는지) 결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몇몇 부가적인 요인들이 있게 된다. 예컨대 브래시어는 스스로 그 명칭을 떼어낼려고 애를 써왔다. 메이야수는 실재로 그의 입장을 사변적 유물론’(speculative materialism)이라고 언급하면서, 이 입장도 마찬가지로 상관주의적 순환을 돌파하려고 하는 두 번째 사상가들에 속한다고 본다. 메이야수에 더해, 신유물론자들(new materialists)에는 마누엘 데란다 그리고 카렌 바라드와 같은 사상가들이 포함된다. 나아가 지난 10여 년간 여러 다른 사상가들이 이 둘 모두나 하나의 그룹에 포함되어 왔다(여러가지 이유로, 여러 번, 어떤 경우에 몇몇은 아마도 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등등), 한계를 두기 않고 말해 본다면, 레비 브리안트(Levy Bryant), 트리스탕 가르시아, 브루노 라투르, 마르쿠스 가브리엘, 마우리찌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제인 베네트(Jane Bennett)와 엘리자베스 그로스까지 포함된다. (...) 이들 각각은 사유가 직접적 경험을 넘어 존재하는 실재에 대해 의미 있는 진술들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수용한다는 그러한 최소한의(minimal) 의미에서 사변적 실재론자들이다. 이들은 아주 오랜 상관주의의 밤을 지나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포함하는 몇몇 방식과 새로운 형태의 형이상학을 건설하는 중에 있다. (...) 들뢰즈는 이들 사변적 실재론자들 사이에 자리매김할 수 있다. (...) 그의 기계 존재론은 개별체들이 우리를 위해가 아니라, 그 자신의 자격으로(qua themselves) 기계라는 의미에서 명백하게 실재론이다. 또한 들뢰즈는 이러한 기계들의 존재론적 구조가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외재성 테제로부터 전진적으로 연역된다는 의미에서 사변적이다. (...) 사변적 실재론자들을 범주화하는 흥미로운 방법은 그들의 철학이 객체-지향적인지 아닌지 묻는 것이다. 이 경우는 개별 실체들이 가장 기초적인 실재의 구성물이라는 것에 대한 수용여부이다. 이를테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역자]의 철학은 분명 객체-지향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개별 실체들이 보다 기초적인 생산적이고 역동적인 힘의 표현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12]하만의 존재론은, 그가 객체들 너머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나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므로, 객체-지향적 존재론의 모범적인 사례이다. 게다가 [하만에게] 개별체들이 다른 실체가 조우하는 방식 너머에 놓여 있는 보다 심오한실재란 단순히 객체들 자신들의 어떤 형상일 뿐이다. (...) [여기에는] 브루노 라투르, 마우리찌오 페라리스, 트리스탕 가르시아, 마르쿠스 가브리엘, 마누엘 데란다 그리고 레비 브리안트가 속한다.

 

[Kleinherenbrink 2019, 서론 2, 13] 하만과 들뢰즈는 둘 모두 개별체들이 네겹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개별체들이 변화하는 방식을 사유하는데 있어서 근원적인 상이점을 가진다. 우리가 살펴 볼 바대로, 하만은 객체들이 오직 매우 한정된 수의 계기들에 따라 변화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들뢰즈는 변화는 하만이 인정하는 것보다 더 지속적이며 누증적(incremental)이라고 생각한다. 브리안트의 경우, 비록 그도 마찬가지로 개별체들을 기계들이라고 부르고, 들뢰즈의 저작들에 상당 부분 의존하긴 하지만, 브리안트의 기계는 두겹이지 네겹이 아니다. 이것은 사소한 차이같이 보이지만, 우리는 이것이 실재로 관건적이라고 볼 것이다. 들뢰즈의 네겹[의 개별체들]이 복수주의 존재론(pluralist ontology)을 끌어 내고, 개별체들 간에 존재하는 불연속성(discontinuity) 때문에 각각의 개별체들이 환원불가능하지만, 브리안트의 기계 존재론은 일원론으로 다가가면서, 실재가 연속성(continuity)에 의해 특성화되고, 기계들은 단지 어떤 단일한 동력학적 장에서 국지적 지점들일 뿐이다.

 

[Kleinherenbrink 2019, 서론 3, 15]우리는 다름 아니란 그의 외침을 탐색할 것이다. 어떤 철학자가 위대한 때는, 그가 매우 추상적인 책을 쓰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추상이란 단지 당신이 그가 외치는 그 순간을 알아채는 법을 몰랐다는 것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지요. 거기 아래에 뭔가 외침이 있는 겁니다. 공포스러운 외침 말이지요”(SL 060580)[Quand un philosophe est grand, il a beau écrire des pages très abstraites, elles ne sont abstraites que parce que vous n’avez pas su y repérer le moment où il crie. Il y a un cri là-dessous, un cri qui fait horreur.]. (...) “개념이 재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중요치 않아요. 중요한 것은 그 개념의 자리가 다른 개념들의 집합 안에서 무엇이냐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위대한 철학자들에게서, 그들이 창조한 개념들은 [서로] 분리불가능하고, 일련의 실제적인 배치(veritable sequences)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어떤 개념이 속해 있는 배치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 개념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지요.”(SS 251180)[Il ne s’agit pas de se demander ce que représente un concept. Il faut se demander quelle est sa place dans un ensemble d’autres concepts. Chez la plupart des grands philosophes, les concepts qu’ils créent sont inséparables, et sont pris dans de véritables séquences. Et si vous ne comprenez pas la séquence dont un concept fait partie, vous ne pouvez pas comprendre le conce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