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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들뢰즈, 수학 그리고 실재론적 존재론

by Nomadia 2021. 1. 19.

원문서지: Manuel DeLanda, “Deleuze, mathematics, and realist ontology”, (Eds.) Daniel W. Smith & Henry Sommer-Hall, The Cambridge Companion to Deleuz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pp. 220-238.

 

 

들뢰즈, 수학 그리고 실재론적 존재론

 

저자: 마누엘 데란다

번역: 박준영(노마씨, 수유너머104, nomadia@naver.com)

 

 

그의 대부분의 당대인들과는 달리 들뢰즈는 실재론적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의 실재론적 태도는 철저하게 혁신적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창안된 이래 2500년 동안 서구 사상을 지배해 온 전통적인 실재론과는 날카롭게 결별했다. 잘 알려진대로 그리스 철학자들의 세계는 세 가지 실체 범주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genus), (species) 그리고 개체(individual)가 그것이다. 첫 번째 두 범주에 속한 실체들은 본질적으로 항구적으로 존속하는 바, 이 실체들은 단지 우연적으로만 존재하는 세 번째 실체에 속한다.[1] 예컨대 유는 동물, 종은 인간 그리고 개체란 우연적인 속성들, 즉 흼, 음악적임, 정의로움에 의해 규정되는 이런 저런 특정 인물이다. 유는 일련의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하위부류에 따라 다양한 종들(, 인간)과 연결되어진다. 동물 유는 예를 들어 이족(two-footed) 유형과 다족(many-footed) 유형으로 세분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즉 말에게서 말굽, 또는 인간에게서 발과 같이 그 분류의 말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세분될 수도 있다. 우리가 발가락이 없는 발과 같은 어떤 우발적인 구별들로 더 나아가면, 종들의 수준, 즉 사물의 본질이나 그 본성을 말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존재론적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본질적인 특성들을 가진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재론에서 사물들의 정신-독립적인 동일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새로운 형태의 실재론을 야기하는데, 만약 그것이 진정 새롭다면, 이 실재론은 유와 종의 범주를 초재적(transcendent) 실체들(본질들)에 할당하는 존재론을 함축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대체해야만 한다. 이러한 임무는 유들보다 종들에게 더 쉽다. 종들의 초재적 본성은 다윈이 그렇게 했듯이, 그것들을 역사적 실체들로 변형함으로써 간단하게 제거될 수 있다. 진화론에서 생물학적 종은 단일하고, 특유하며, 개별적 유기체로서 역사적으로 우발적인 것이다. 즉 하나의 종은 그것의 유전자풀(gene pool)이 다른 재생산 공동체들로부터 유전자 물질의 흐름이 닫힐 때 탄생하며 - 다시 말해, 그것은 재생산적 격리(reproductive isolation)를 통해 태어난다 멸종(extinction)을 통해 죽는다. 달리 말해 유기체와 같은 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와 같이 쇠락과 파괴를 겪는다.”[2] 그리고 그 속성들을 정의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 않다. 재생산적 격리는 어떤 우발적 성취인데, 이는 점차 다양해지고, 그래서 아무 것도 어떤 생물학적 종들의 동일성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보증을 할 수 없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의 종이 멸종해 버린다는 것은 개별적 유기체가 살해되는 것과 같다. 즉 우리는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떤 특유한 역사적 창조물을 파괴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적 수준에서 본질의 제거는 단순히 역사(이런 경우 진화의 역사)를 실재론적 존재론에 도입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유(genus)적 수준에서 본질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우리가 여기서 필요로 하는 것은 위상학적 동물’, 즉 일련의 발생학적 작동과정, 다시 말해 주름작용, 뻗침(stretchings), 함입(invaginations), 세포이동(cellular Imigrations)을 통해 인간이나 동물을 생성시킬 수 있는 어떤 추상 동물(abstract animal)을 개념화하는 도구이다. 이 두 번째 대체(replacement)는 수학을 포함하는 것이다. 보다 특별하게, 만약 종이 개별적 특이성들(individual singularities)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면, 유는 보편적 특이성들(universal singularities)에 의해 구조화되는 어떤 위상학적 다이어그램에 의해 대체될 수밖에 없다.[3] 이는 오직 연역 논리, 즉 일반성과 특수성 개념의 원천을 넘어 감으로써, 그리고 수학 안에서, 즉 미분학, 집합론, 비계량 기하학(non-metric geometry) 안에서 획득될 수 있다. 어떻게 수학이 비-초재적인 실재론 형식에 있어서 논리학을 대체해야만 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처음부터 미분함수가 과학에서 사용되는 방식에 대한 간단한 기술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탐문하고자 하는 것은 수학의 존재론 자체(플라톤주의적이고 구성주의적인 것)가 아니라 실재 세계를 개괄하는 수학의 활용에 의해 제기되는 존재론적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수학의 역할

어떤 현실적인 물리 체계에 관한 수학 모델을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처음에 그 체계가 변화에 있어서 자유로운 적절한 방식들을 특성화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것의 자유도’(degrees of freedom)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체계의 자유도가 변화할 때, 그것의 전반적인 상태도 변화하기 때문에 체계의 모델은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 상이한 가능 상태들을 획득해야 한다. 수학자 앙리 푸앙카레가 한 세기 전에 보였듯이, 이 일련의 상태들은 그 체계가 가진 자유도만큼 많은 차원들을 가진 가능 공간들로 재현된다. 이 공간은 상태 공간’(state space)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모델화된 체계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 공간에서 각각의 점은 어떤 물리 체계에 상당하는 하나의 가능한 상태를 재현하며, 이 상태는 시간상에 주어진 한 순간을 가진다. 어떤 물리 체계의 상태들이 시간과 더불어 변화할 때, 즉 체계가 상태들의 시간적 연속을 통해 나아갈 때, 상태 공간에서 그것의 재현은 점들의 지속적인 연속체, 이를테면 곡선이나 궤적이 된다.[4] 일련의 다른 궤적들은 체계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한 역사들(histories)을 획득한다. 이 공간에서 각 점, 즉 각각의 가능 상태는 존재의 상이한 가능성들을 가질 수 있다. 모든 점들이 동등하게 개연적인 공간은 어떠한 구조도 없는 공간이며, 그것은 상태들이 완전히 임의적인 방식으로 변화하는 물리적 공간을 드러낸다. 예컨대 궤적들은 한 곳에 멈추지 않고 상태 공간을 돌아 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18세기까지,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와 같은 수학자는 미분 방정식을 위한 해들(solutions)의 가능 공간이 구조를 정말로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특히 그는 이 공간을 구성하는 몇몇 점들이 그것들이 재현되는 그 공간 안에서 다른 어떤 가능 공간에서보다 더더욱 발생할 만한 특별한 것이거나 특이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이러한 특별하거나 특이한 점들이 한 체계의 오래 지속된 경향들과 유사하며, 만약 우리가 충분히 오래 기다리기만 한다면, 현실화될 만한 상태들임을 암시한다. 그것들이 어디서 시작되는지와는 상관 없이, 모든 가능한 역사들은 어떤 특이점(singular point)에서 끝을 맺으려할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특이성들은 그것들이 전반적으로 상이한 물리체계들, 예컨대 중력체계, 기계체계, 광학체계, 전기체계에 의해 공유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다. 사실상 19세기의 고전역학에 속한 모든 갈래들의 통합은 이러한 보편성에 의해 가능해졌다. 우리의 원래 예시로 돌아가자면, 모든 가능한 동물들의 공간은 진화적 역사를 형성하는 전반적인 경향들을 결정하는 보편적 특이성들에 의해 구조화되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유적 동물을 그와 같은 위상학적 다이아그램과 같은 것으로 대체하는 것은 어떤 중요한 장애에 부딪힌다. 고전물리학의 공간과는 달리, 우리는 공간들이 동물들과 연합되는 그런 가능성의 구조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위상적 동물’(topological animal)을 이해하기 위해 요청될 많은 개념들은 보다 단순한 사례들에서 출발하여 발전될 수 있는데, 그것은 들뢰즈에 의해 명쾌하게 논증된 그러한 사례들이다.

 

사실 들뢰즈가 상태 공간과 그것을 구조화하는 보편적인 특이성들에 대한 관심을 전개했던 유일한 현대철학자는 아니다. 최근에 과학 철학에 대한 분석적 접근은 논리학으로부터 벗어나 과학자들에 의해 실재로 활용된 수학으로 향하고 있고, 이러한 최근의 발전들을 검토하기 위해서, 들뢰즈의 관점에 관한 우리의 논증을 적용하는 것이 비교적 유용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일반성과 특수성이라는 범주를 포기한 많은 분석철학자들는 난국에 처해 있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모든 수학은 논리학으로 환원되었다19세기 후반의 말을 믿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분학은 대수학으로 환원되고 무한소 개념은 극한에 의해 대체되었고 극한은 수의 한계로 축소되었다 이후 대수학은 집합론으로 환원되었다. 이러한 환원이 사실상 성공적이라고 믿었던 철학자들에게, 수학은 사라졌고 연역논리가 숙달되어야 할 유일한 공식적인 분과가 되었다. 따라서 실재론적 분석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사물의 동일성을 일반범주에 속한 필요충분조건으로 정의하는 것이 놀랍지 않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해 동일성은 어떤 본질의 소유로 정의된다.

 

나아가 수학의 논리적 환원을 수용한 사람들은 과학 이론들에 대한 공리적 접근(axiomatic approach)을 취한다. 즉 어떤 이론의 내용이 일련의 공리들 또는 자명한 진리들로, 그리고 연역논리를 사용하는 그런 공리들로부터 추론되어질 만한 모든 정리들(theorems)로 짜여지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논리학과 언어 둘 모두의 역할을 강조한다. 하지만 새로운 사상, 의미론적 접근은 공리론을 그릇된 모델로 바라본다. 이 다른 철학자들은 과학자들이 물리 현상의 모델들을 창안한 것은 이를테면 미분학과 같은 도구의 활용을 통해서라고 논증하며, 과학철학의 주제여야 하는 것이, 어떤 현상의 논리적 재구성이 아니라, 이러한 모델들이라고 논한다. 이러한 운동을 이끄는 사람들에 중에는 바스 반 프라센(Bas Van Frassen)이 있는데, 그는 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 진술했다.


이론들의 의미론적 전망은 언어를 주제에 대해 대개 부적절한 것으로 만든다. 물론 이론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언어 안에서 그리고 그것에 따라 드러낸다. 그것은 사소한 지점이다. [...] 게다가 우리 자신의 역사 – [지난] 세기 전반부 동안 강렬하게 언어-지향적이었던 과학철학의 역사 – 때문에, 그리고 그것의 내적 중요성 때문에, 우리는 과학에 속한 언어를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론들의 구조에 관한 어떤 논증에서는 그것은 대부분 무시될 수 있다.[5]


언어를 떠나고 논리학을 미분법 뒤로 그리고 그 연구에 있어서 기하학적 접근, 즉 상태 공간 다이아그램으로 - 가져가는 이유는 오직 우리가 이론들과 그것들이 기획되고 설명되는 실험실 현상들 간의 관계를 탐색할 수 있는 현실적 모델들을 분석함으로써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그러한 모델들이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이유, 그것들이 실재 체계들의 움직임에서 규칙성들을 가까스로 획득하게 되는 이유를 알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어떤 공리론의 논리적 구조에 의해 주어지지는 않는다. 수학 모델들을 실재론적 존재론을 위해 흥미롭게 만드는 것이 그러한 것들의 실천적인 성공이므로, 모델들이 어떻게 현상들에 맞아 떨어지는지에 대한 간단한 묘사를 해 보도록 하자. 우리가 실재 물리 현상들을 조작할 수 있는 실험실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다시 말해 거기서 우리는 그러한 현상들의 자유도를 (다른 요인들을 차단함으로써) 제한할 수 있고 어떤 주어진 최초 상태에 그것들을 위치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일련의 상태들을 자연스럽게 통과해갈 수 있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느 정도 정밀하게 자유도(말하자면, 온도, 압력 그리고 부피)의 값을 그러한 각각의 상태에서 측정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여러 번의 시도 후에 우리는 상이한 최초 상태에서 출발한 현상의 데이터를 생성시킨다. 그 데이터는 초기 조건들로부터 나오는 바, 기본적으로 현상이 취하는 온도, 압력 그리고 부피의 값을 표시하는 숫자들로 구성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숫자 계열을 곡선이나 궤적로 바꾸면서 종이 위에 전개할 수 있다.

 

우리는 실험실 작업을 진행할 때 초기 조건들을 따라 같은 값들을 그것에 부여하면서, 수학적 모델을 진행하며, 일련의 상태공간 궤적들을 생성한다. 마침내 우리는 두 개의 곡선을 비교한다. 만약 수학적이고 실험적인 궤적들이 기하학적 유사성을 전개한다면, 이것은 그 모델이 실재로 작동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떤 분석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우리는 동력학 이론이, 단지 기하학적 구조를 모델링하는 과정이 모델화되는 구조에 (적절한 관점에서) 가깝다면, 대체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기본적인 경우는 모델 안의 궤적들이 물리적으로 실재적인 작동들을 코드화하면서, 궤적들에 가깝게 흔적을 그리는 곳(또는 적어도 충분히 오랫동안 그것들을 따라가는 곳)에 있다.[6]


상태 공간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을 수행하기 위한 철학적 정당화가 있는 경우는 오직 수학적 모델이 실험실의 실험 결과들을 따를 능력을 가질 때 뿐이다. 이런 분석은, 우리가 그 결과들을 맹목적 사실, 또는 더 나쁘게는 하나의 설명불가능한 기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면, 모델들의 추적 능력(tracking ability)이 하나의 설명으로 주어져야만 하기 때문에, 요구된다.

 

수학적 모델들과 존재론적 실행

하지만 우리는 상이한 존재론적 실행들(commitments)로 시작할 것이므로, 모델의 성공에 관한 매우 다른 설명에 도달할 것이다. 예컨대 몇몇 철학자들은 직접 경험에 속하는 대상들(애완동물, 자동차, 빌딩들)의 자동적인 실존을 믿지만, 수소, 전자 또는 인과 관계들과 같은 실체들이 단순한 이론적 구성물들이라고 추정한다. 이런 종류의 존재론적 실행은, 비록 여러 다른 철학자들이 직접 관찰가능한 것은 무엇인지, 다른 장소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사이에서 노선을 끄집어 내긴 하지만, 실증주의 그리고 경험주의와 연관된다. 이를테면 반 프라센은 현미경이 아니라 망원경을 통해 지각되는 객체들을 직접 경험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7] 다른 한편으로 실재론 철학자들은 관찰가능한 것과 관찰불가능한 것 사이의 구별을 거부하지만, 그들 또한 그들이 믿는 것이 세계의 내용물들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상이한 의견을 가진다. 들뢰즈는 실재론적 철학자지만, 예외적으로 내재적 실체들과 더불어 자율적인 실재를 허용하도록 했으며, 그것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과 같은 어떤 초재적 실체들을 몰아냈다. 이제 이러한 상이한 존재론적 수행들이 어떻게 상태 공간의 구성요소들에 관한 상이한 평가를 이끌어내는지 논의해 보자. 존재론적 평가를 위한 첫 번째 지원자는 그 궤적들 자체다. 내가 말한 바, 이것들은 가능한 역사들(상태들의 가능한 시간적 연속들)을 재현한다. 잘 알려진대로, 경험주의자들은 가능한 실체들에 대해 회의적이다. 특히 콰인(Quine)은 그러한 실체들을 조롱하길 좋아한다.


예컨대 문앞에 가능한 뚱뚱한 남자가 있다고 해 보자, 그리고 다시 가능한 대머리 남자가 문 앞에 있다고 하자. 그들은 동일한 가능한 남자 또는 두 명의 가능한 남자인가? 우리는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가능한 남자들이 그 문 앞에서 존재할 것인가? 뚱뚱한 남자들보다 야윈 남자들이 보다 가능성 있는가?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자들이 닮았나? 또는 그들이 비슷한 나머지 하나로 만들 수 있나?[8]


콰인이 여기서 논증하는 바는 우리가 가능한 실체들을 개별화하기 위한, 즉 그들을 모든 가능한 변환들의 한가운데에 지정하기 위한 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가능세계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법, 그리고 콰인의 빈정거림이 목표로 삼는 그것은 양상논리학(modal logic)이다. 이 논리학 분야는 반사실문(counterfactual sentences), 예컨대 만약 J.F.K.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베트남전은 더 일찍 끝났을 것이다와 같은 문장에 대한 분석과 관련된다. 반사실성의 경우, 우리는 콰인의 견해에 동의한다. 즉 우리가 세부적으로 변형할 만한 하나 또는 여러 실체들을 다루는지 아닌지 알기에는 어떤 언어적으로 특수화된 가능 세계 안의 구조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날드 기어리(Ronald Giere)와 같은 실재론 철학자들은 콰인의 회의주의적 진술들은 양상논리에 유효하지만, 상태 공간이 가지는 예외적 구조(extra structure)는 이러한 제한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논증했다.


콰인이 즐겨 지적한 대로, 가능성들을 개별화하는 것은 종종 힘들다. [...] [하지만] 체계 법칙들이 미분방정식으로 표현되는 많은 모델들이 그 모델의 가능한 역사들을 개별화하는 분명한 기준을 제공한다. 그러한 모델들은 모든 가능한 초기 조건들에 상응하는 상태공간 안의 궤적들이다. 일련의 가능적인 초기 조건들에 있는 위협적인 모호함들은 이론적 모델의 정의 안에 그것들을 명백히 제한함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9]


하지만 상태공간이 가능한 역사들의 규정을 이끄는 예외적 구조는 경험주의자들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치 않다. 예컨대 반 프라센은 여전히 주어진 가능한 역사를 존재론적으로 실행할 필요성을 거부할 수 있다. 그에게 과학의 역사는 실재의 관찰불가능한 특성들을 잡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경험적인 타당성(empiriacal adequacy)을 획득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주어진 초기 조건을 위한 단일한 궤적을 생성시키고, 그것을 일련의 실험실에서 얻어진 현행적 상태(actual states)에 관한 일련의 측정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한 궤적군()의 잔여분은 단순히 어떤 유용한 허구다. 기어리는 양상들에 대한 이러한 존재론적 태도를 현실주의’(actualism)라고 부른다.[10] 그러나 현실주의는 가능한 궤적군이 어떤 하나의 특정한 현실적 역사를 형성하는 기능을 할 때 규칙성을 전개한다는 사실을 놓친다. 위에서 쓴 개념들과 관련하여 가능성들의 공간은 구조를 가지며 이 구조는 어떤 하나의 단일한 궤적에 의해 전개되지는 않는다. 기어리는 하나의 체계를 이해하는 것이 단지 그것이 어떻게 이런 저런 특수한 상황에서 실재로 작동하는지를 아는 것은 아니고, 그것이 실재로 발생하지 않을 조건들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 아는 것이라고 논한다. 따라서 가능공간들의 구조에 관한 존재론적 평가가 요구되는 것이다.

 

들뢰즈의 실재론적 접근법의 중요성은 정확히 그것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평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현실주의자도 아니고, 전통적인 양상들에 대한 실재론자도 아니다. 예를 들어 그는 상태 공간의 점들을 구성하는 가능성들이 우리의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실재론적 실행을 요구하는 가능 공간들의 구조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리적 양상의 새로운 형식, 잠재성(virtuality)을 모델들과 본성적인 생성의 내재적 패턴 둘 모두의 규칙을 사유하기 위해 도입해야 한다. 잠재적인 것이란 실재적이지만 현행적이지는 않은 것이다.[11] 따라서 들뢰즈는 오로지 현실적 실체들에만 수행되는 반 프라센의 논의와 마찬가지로 가능한 것에 대한 기어리의 논의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로지 상태 공간의 잠재적 구조만이 정신-독립적으로 고려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구조의 엄격한 형식 분석은 상태 공간의 상이한 구성요소에 관한 고려를 포함한다. 그것은 속도벡터장(the velocity vector field)이다.

 

미분방정식의 연산방식에 대한 연구가 어떤 기하학적 형태로 주어질 때, 사용되는 추상 공간은 미분적 다양체들이지, 계량적인 유클리드 공간이 아니다. 계량 공간이 전체 좌표계(global coordinates)에 의해 정의된 일련의 점들인 반면, 미분 다양체에서 구성점들(component points)은 오직 국지적인 정보, 즉 한 점에서 곡선의 순간변화율을 사용함으로써 정의된다. 이것을 다르게 놓기 위해, 계량 공간에서 점들이 데카르트 좌표계와 공간적이고 고정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으로 연구되는 초재적인 전체 공간을 가정함으로써, X, Y, 그리고 Z로 정의되는 반면, 미분 다양체는 빠름들과 느림들의 장, 즉 각각의 점에서 곡선의 변화들로 이루어진 빠름과 느림이다. 사실 미분 다양체에서, 모든 점은 어떤 속력뿐 아니라 속도(velocity)이기도 한데, 어떤 방향이 그것에 할당되기 때문이다. 속도가 벡터에 의해 재현될 수 있기 때문에, 상태공간들은 점들(가능한 상태들을 재현하는 점들)과 더불어 속도벡터장을 가진다. 이것의 중요성은 상태공간의 구조를 구성하는 보편적 특이성의 분배가 궤적들(또는 적분곡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벡터장 자체에 의해 주어진다는 점에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해, 특이성의 본성은 그와 가까운 궤적들에 의해 수립되어짐에 틀림없지만, 특이성이 초점이나 노드(node)가 되는 점이 어느 것인지는 분명히 적분 곡선이 특이성 근방에서 그것에 다가가는 방식, 즉 나선형인지 또는 직선인지를 관찰함으로써 결정된다. 그런데 특이성들의 존재와 분배는 그것이 수립되기 위해 그 어떤 궤적도 필요하지 않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쓴다.


라이프니츠는 이미 미분법이 [...]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또는 드러내지조차 못했던 문제들을 표현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우리는 규칙적인 것과 특이점에 대해 생각하는데. 이들은 곡선의 완전한 종적 규정으로 들어선다. 특이점들(예컨대, 침저dips, 노드nodes, 초점, 중심)의 특수화가 적분곡선 형식에 따라 탐색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형식은 미분방정식의 해들을 되짚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차이나는 순간들, 다시 말해 방정식 자체에 의해 정의되는 벡터장에 의존하는 이러한 점들의 존재와 실존과 관련하여 어떤 완전한 규정성이 존재한다. [...] 더 나아가 만약 점들의 특수화가 이미 해 속에 있는 문제의 필연적 내재성을 보여준다면, 문제를 뒤덮고 있는 해의 함축은, 점들의 존재와 분배를 따라, 해 자체의 조직화와 연관된 문제의 초월성과 그것의 직접적 역할을 입증한다(DR 177).


문제들과 가능공간들의 구조

들뢰즈에게 벡터장과 그것의 특이성 사이의 수학적 구별이란 한편으로 궤적들 또는 곡선들, 다른 한편으로 문제의 조건들에 관한 정의그것의 많은 가능한 해들 간의 철학적 구별이 된다. 이것은 경험적으로도 그리고 존재론적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 의미에서 하나의 경험론적 문제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둘 모두의 분배를 마련함으로써, 즉 현상이 변화와 모든 사소한 방식들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중대한 경로들을 발견함으로써 드러난다. 문제는 따라서 어떤 공간적 형식(-계량적 공간의 차원으로 자유도를 돌려 놓는 것에 의해)으로 주어질 수 있고 그것의 구조는 벡터장을 경유하여 규정된다. 마침내 우리는 그 방정식에 대한 수적 해들을 발견하고, 궤적을 생성시킬 수 있으며, 실험실적인 현상에 속하는 일련의 현행적 상태들에 비견할 수 있는 일련의 상태들을 각각 재현하는 것이다. 명백하게도 이 인식론적 연속과정에서 관건적인 계기는 첫 번째 단계이다. 즉 차이를 만드는 것과 현상의 작용 안에서 차이를 만들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가 마침내 획득하는 해들은 오직 그것들이 해결을 위해 가정되는 바, 그러한 문제들 만큼 훌륭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우리가 문제의 본래적인 종별화 안에서 사소한 자유도를 포함한다면, 그 해들도 마찬가지로 사소해지거나 오도될 것이다. 게다가 문제를 정의하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구체적인 분배는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때에도 그 잠재적 실존을 유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개체적인 해들의 생성을 이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험실 현상들은 수학적 모델의 목표와 유사하다. 최적값(예컨대 에너지의 최소치)을 정의하는 어떤 단일한 특이성에 의해 구조화되는 상태 공간은 현행적 실체들(비누거품, 결정체, 광선)의 전체적인 다양성이 구체적인 해들에 해당되는 실재적으로 최적화된 문제를 획득한다. 그러나 최적화 문제는, 일단 어떤 물리적 해가 주어지면, 존속한다. 이것은 마치 납작한 비누방울막이 다음 차례에 구체(sphere)로 말릴 준비를 하거나, 일련의 분자들이 스스로를 기하학적인 결정체로 구성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원래 예시로 돌아가자면, 우리가 유적 동물을 대체해야만 했던 모든 가능한 동물들의 구조화된 공간은 어떤 객체적인 존재론의 문제, 즉 모든 종들과 유기체가 구체적인 적응적(adaptive) 해들인 그런 문제로서 사유되어야만 한다. 들뢰즈는 유기체는 어떤 문제에 대한 해일 뿐이다. 여기서 해는 빛의 문제를 해결한 눈처럼, 그 각각의 분화된 기관들이다라고 쓴다(DR 211).

 

이것은 문제들이 그것의 해들로부터 독립적일 뿐아니라, 해들과 발생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것의 조건으로서 그 자신의 해를 발생시키는 하나의 문제는 전진적으로 보다 좋게 특수화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한 들뢰즈의 논증은 좀 다른 수학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군이론(group theory)과 그것의 대수적 해들로의 적용이며, 미분방정식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에 이 다른 영역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방정식에 대한 두 가지 종류의 해법이 있는데, 수적인 것과 해석학적인 것이 있다. 수적 해법은 방정식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대체하곤 할 때, 방정식을 진리값을 도출하도록 하는 수들에 의해 주어진다. 예컨대 + - 8 = 0*와 같은 대수 방정식은 그것의 수적 해로서 = 2**를 가진다. 다른 한편, 해석학적인 정확한 해는 어떤 특정 값이나 일련의 값들을 산출하지 않으며, 모든 값들의 전체 패턴들을 산출한다. 이 패턴은 또 다른 방정식이나 공식에 의해 표현된다. 또는 이전에 사용된 개념과 관련해서, 해석학적 해는 우리에게 모든 가능한 해들의 공간 구조를 제공한다. 위의 예는 다음과 같이 수적인 불변항들 없이 재기술될 수 있다.

 

+ + c = 0***

 

이것은 다음과 같은 해석학적 해를 가진다.

 

,****

 

16세기까지 수학자들은 미지수가 4제곱까지 올라 가는 대수 방정식(, 그리고 을 포함하는 방정식*****)에 대한 정확한 해들을 알았다. 하지만 그때 위기가 찾아 왔다. 5차 방정식은 이전의 성공적인 방법을 따르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돌파구는 2세기가 지나서 찾아 왔는데, 처음 네 가지 경우들의 해들을 내는 패턴에, 5차방정식으로 알려진 다섯 번째 것의 난점을 이해할 핵심적인 것이 있었다. 아벨(Niels Abel)과 갈루아(Évariste Galois)는 우리가 오늘날 군이론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자료들을 활용하는 이 패턴에 관한 연구에 접근하는 법을 발견했다.[12] ‘’(group)이라는 개념은 어떤 수적 실체들(숫자들, 수적 연산들)의 집합이자 그러한 실체들의 조합 규칙을 지칭한다. 집합은 반드시 닫힌 집합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집합 안에서 어떤 두 실체들을 조합하기 위한 규칙을 사용할 때, 그 결과도 마찬가지로 집합 안의 한 실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 목적을 위해, 가장 중요한 실체의 유형은 변환(transformation)이다. 예를 들어 90도 회전을 구성하는 집합(90, 180, 270 그리고 360도 회전을 포함하는 집합)은 하나의 군을 형성하는데, 어떤 두 개의 연속적인 회전은 마찬가지로 그 군 안의 회전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차례대로 한 군은 어떤 수학적 실체의 속성들을 규정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데, 이 실체는 변환에 따라 불변항으로 남으며, 따라서 그것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예컨대 입방체는 회전의 상위 군 아래에 (그것의 시각적 작용이 관련되는 한) 변경되지 않은 채 남아 있으며, 따라서 그 군은 그 군의 동일성이라는 중요한 측면을 획득하는 것이다.

 

한 군의 변환이 문제의 조건들을 수립하는데, 즉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어떤 분배를 생성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물리법칙들의 불변항을 연구하기 위해 변환군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고전물리법칙에서 군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전위들(displacements) 뿐 아니라 회전과 다른 변환들도 포함한다. 실험실에서 손쉽게 산출될 수 있는 어떤 물리 현상을 상상해 보자. 만약 우리가 그것을 공간 안에서 실험실을 떠나 다른 환경 안에서 현상을 재생산함으로써 그것을 전위한다면, 우리는 그것의 모든 불변적 속성들을 버리게 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만약 우리가 단순히 실험을 시작한 그 시간을 변경한다면, 우리는 이 시간 전치가 관련된 현상의 규칙성 만큼이나 현상을 불규칙하게 하리라 예측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실험의 첫 번째와 마지막 상태들 사이의 시간적 차이인 것이지, 첫 번째 상태가 발생하는 그 절대적 시간이 아니다. 따라서 변환이 법칙을 표현하고 있는 방정식들에 적용됨으로써, 우리는 법칙이 무차별한 그러한 변화의 유형들, 다시 말해 법칙에 어떤 차이도 만들지 않는 변화의 유형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법칙을 표현하는 방정식에 입력되는 절대시간 또는 절대적 위치를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정당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한다.

 

이와 유사하게 갈루아는 어떤 변환(어떤 방정식의 해의 대체substitution 또는 치환permutation)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하나의 군으로서, 해들 간 관계 안의 불변성을 드러낸다. 보다 특별하게, 하나의 해의 다른 해로의 치환이 방정식의 타당성을 떠날 때, 두 해는 그것들의 타당성이 관련되는 한 구별불가능indistinguishable하게 된다. 한 방정식의 군은 그것의 해결가능성(solvability)에 관건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해들의 구별불가능성의 정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13] 또는 들뢰즈가 논한 바에 따르면, 군은 해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모르는 것의 객관성, 다시 말해 문제 자체의 객관성을 드러낸다(DR 162). 또한 그는 논증을 계속하는데, 해로부터의 문제들의 자율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 군이론적 접근은 최초군으로 생산되는 방정식의 해들이 관계들을 불변항으로 남겨 놓는 대체항들을 연속적으로 제한하는 하위군들(subgroups)을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문제는 그것 자신의 조건들이 전진적으로 보다 좋게 정의되도록 그것의 해들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는 어떤 기술적 관점에서 문제 미분법이 그 자체의 수학적 표현일 뿐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 보다 최근에는 다른 과정들이 이러한 역할을 좀 더 잘 만족시키고 있다. 문제 이론이 사로잡히는 순환을 상기해야 한다. 즉 하나의 문제는 그것이 ‘진리’인 한에서만 해결가능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문제의 진리를 그것의 해결가능성에 따라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 [...] 수학자 아벨은 아마도 이 순환을 처음으로 깨트린 인물일 것이다. 그는 해결가능성이 문제의 형식으로부터 따라 나온다는 것에 따라 전체 방법론을 탐구했다. 주어진 방정식이 일반적으로 해결가능한지 아닌지에 관한 시도와 오류에 따라 발견해 나가는 것 대신, 우리는 점차적으로 진술이 해의 씨앗을 담고 있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가능성의 장을 특수화하는 문제의 조건을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문제-해 관계에 관한 급진적인 전복, 즉 코페르니쿠스적 혁명보다 더 심대한 혁명이다. [...] 동일한 판단이 갈루아의 연구과 관련하여서도 확증된다. 기초적인 ‘장’(R)에서 출발하여, 이 장의 연속적인 부가(R', R", R"' ...)로 가면서, 점차적으로 가능한 대체들의 점진적인 한계의 의해 어떤 방정식의 근들 간에 보다 정확한 구분을 허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분적 분해식’ 또는 어떤 ‘군의 착근운동’(embodding of groups)의 연속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해들을 정확히 문제의 그 조건들로부터 따라나오게 한다.(DR 179-80)


문제와 잠재성의 현행화

실재론적 존재론에 문제들의 발생적 개념을 연결하기 위해, 우리는 기하학적 접근이 이미 알려진 미분방정식에 접근할 때처럼, 군이론의 자료들을 동력학적 체계 이론의 자료들에 결합할 필요가 있다. 상태공간에서 적절한 변환은 분기(bifurcations)로 알려진 수학적 사건들로서, 이것은 어떤 보편적 특이성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학적 사건들은 상태공간의 벡터장에 적용되는 연산들로부터 나온다. 즉 작은 벡터장은 주된 벡터장에 그것을 교란하기 위해 더해지며, 그러한 교란이 어떤 임계치에 도달할 때, 분기가 발생하는 것이다.[14] 몇몇 경우에 그것은 변화하는 특이성의 수일 뿐이지만, 다른 경우에 그 특이성의 유형이 변환될 것이다. 우리가 물리체계의 경향을 어떤 고정-상태에 도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지금까지 오로지 점적인(point) 특이성들만을 생각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선적(line) 특이성들도 존재하는데, 이것은 어떤 순환(loop)으로 형태를 갖춘 것으로서 안정된 방식으로 진동하는 경향을 정의한다. 이러한 특이성들을 주기적 끌개들’(periodic attractors) 또는 경계 순환들’(limit cycles)이라고 부른다. 보다 최근에는 보편적 특이성의 세 번째 변환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반복적으로 뻗치고(stretching) 접히는 닫히 순환에서 나온다. 이것은 카오스적인 또는 낯선 끌개들로 간주된다. 이렇게 특이성의 한 유형들에서 다른 유형들로 옮겨가는 변환은 마찬가지로 잘 알려져 있다. 호프 분기(Hopf bifurcation)가 그것이다. 이 분기는 점적 특이성을 주기적 특이성으로 변화시킨다. 또 다른 것으로 파이겐바움 분기(Feigenbaum bifurcation)가 있는데, 이는 주기적 특이성을 카오스적 특이성으로 변화시킨다. 이 일련의 분기들은 유사한 군이론적 구조를 가진다. 즉 이들은 일련의 치환으로서, 갈루아가 5차방정식의 해를 산출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기도 하다. 즉 분기가 하나의 특이성(또는 특이성의 집합)을 다른 것으로 변환할 때, 문제의 모든 해들은 점진적으로 펼쳐지는(unfold), 다시 말해 고정-상태 해들, 주기적 해들, 카오스적 해들로 펼쳐지는 미분방정식에 의해 나타난다.

 

이 규칙적 연쇄과정은 수학적 모델들에서 뿐 아니라 유체역학에서 연구되는 현상들과 같은 객관적 현상들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운동 중인 유체들은 그것들의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어떤 문제과 함께 나타나며, 그것들은 각각의 속도 영역에 적응된 흐름의 다양한 통제를 채택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느린 속도에서 문제에 대한 해는 간단하다. 즉 고정-상태를 따르거나, 흐름을 통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속도의 임계치 이후, 그 해가 불충분해지고 운동중인 흐름은 대류하는 또는 불안정한 흐름으로 분명 교체될 것이다. 마침내 다른 임계치가 교차한 후, 보다 빠른 속도가 그것이 율동적으로 움직임으로써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서의 흐름이 나타나며, 그것의 에너지가 소용돌이들 안에서 소용돌이들의 구조 안으로 분배되면서, 난류를 형성하도록 강제된다.[15] 이러한 상이한 방식의 운동들이 차례로 펼쳐질 때, 그것들은 흐름의 문제에 대한 모든 해들을 전개한다. 더 나아가 수학 모델의 성격과 유체역학 현상 간의 동형성은 이들이 동일한 잠재적 문제들에 대한 상이한 현행적 해들로 간주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달리 말해 우리 모두를 만족시키는 수학 모델의 성공을 설명하는 것은 그것을 모델이 되고 있는 현상이 해결되는 동일한 잠재적 문제의 현행화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모델들과 실재 간의 상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현행화(co-actualization)의 관계가 존재한다.[16]

 

들뢰즈가 아벨과 갈루아의 성취를 천문학자들이 태양중심설로 전환한 것의 혁명적 충격과 비교 하는 것은 그가 이러한 생각들이 과거로부터의 근본적인 단절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다른 곳에서 부언한 바에 따르면, 군이론으로부터의 성취는, 만약 우리가 그 이론의 성찰을 문제 이론을 만들기 위해 비-계량 기하학의 성찰과 잘 섞는다면, 오직 철학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뿐이다.


해결가능성은 반드시 내적 특성에 의존해야 한다. 즉 그것은 문제의 조건들에 의해 규정되어야하며, 실재적 해들을 따라 문제의 의해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복이 없이는 유명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나아가 우리가 유클리드 기하학에 묶여 있는 한, 거기에는 그 어떤 혁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충족이유율적인 기하학으로 움직여 가야한다. 그것은 연속성에 기반하여 불연속성을 야기하는 경향이 있는, 또는 문제의 조건들 안에서 해들을 근거짓는 리만적(Riemannian) 미분 기하학이다.(DR 162)


내가 위에서 상태공간의 본성을 기술했을 때, 나는 일련의 전체 좌표계와 그것들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계량 공간을 구성하는 점들과는 달리, 상태공간의 점은 그 점에서 곡선의 순간변화율에 의해 개별화된다고 언급했다. 이 공간을 개념화하는 전반적으로 새로운 방식은 두 명의 위대한 19세기 수학자들,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와 베른하르트 리만의 성취였다. 또 다른 위대한 19세기 수학자인 펠릭스 클라인(Felix Klein)은 우리에게 이 성취와 군이론의 자원들을 연결시키는 방법을 제공한다. 클라인은 그가 알고 있는 상이한 기하학들(유클리드 기하학, 아핀 기하학, 사영 기하학)이 그 기초적인 특성들을 불변으로 남겨 두는 변환들의 그룹으로 연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간은 모든 전위(displacen1ent), 회전 그리고 거울-이미지, 다시 말해 변하지 않는 길이, 면적 그리고 부피들과 같은 고정적인 특징들을 남겨 놓는 변환들을 포함하는 군에 의해 불변적인 것으로 남는다. 다른 한편으로 사영 기하학에서 길이와 다른 고정적 특성들은 불변하는 것으로 남지 않는데, 그러한 것들은 사용된 사영의 유형에 따라 크기에 있어서 왜곡되거나 변화된다. - 하지만 다른 더 많은 추상적 특성들은 불변적인 것은 남는다. 수학사가 중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논한다.


폰 스타우트(Von Staudt)의 저작에 따르면, 사영 기하학이 논리적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에 앞선다는 것은 분명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 기하학적 특성의 구성에 들어가는 질적이고 기술적인(descriptive) 속성들을 다루면서, 선분들과 각도라는 측정도구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사영기하학의 몇몇 특수화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제 막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는 비-유클리드 [계량] 기하학은 [...] 마찬가지로 사영 기하학의 특수화일 것이다.[17]


미분기하학과 위상학이 비-계량적 기하학들의 성장하는 목록에 부가되었을 때, 클라인의 제자들은 그들의 변환군들을 특성화하고 그것들이 사영 기하학보다 추상적이며, 따라서 논리적으로 앞선다는 것을 알았다. 보다 큰 변화군 아래에 불변적 속성들을 소유하는 수학적 실체는 보다 작은 군과 비교할 때 보다 대칭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클라인과 그 제자들의 학문적 성취는 모든 기하학들이 대칭성-깨짐 연쇄(symmetry-breaking cascade)에 따라 서로간에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즉 모든 기하학들, 위상학에 속하는 최소한의 계량적 요소’(metric)에서 시작해서, 우리는 (그 군안의 변환의 수를 축소함으로써) 그것의 대칭성을 깨고, 미분기하학을 산출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미분 기하학은 사영 기하학이 되는데, 이때 그것은 대칭성을 잃게 된다. 이 사영 기하학은 다시 아핀 기하학이 되고, 아핀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된다. 비록 수학자들이 이러한 사실로부터 존재론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지는 않지만, 이러한 연쇄 안에서 들뢰즈가 문제와 해들 간에 설립한 것과 동일한 발생적 관계를 분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일련의 깨진 대칭성을 통해 위상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발생시킨다. 또는 들뢰즈의 어구로 고쳐 쓰자면, 연속적 공간들이 불연속적 공간들을 발생시킨다.

 

더 나아가 기하학들의 연속체는 또 다른 들뢰즈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점진적인 분화(progressive differentiation)가 그것이다. 위상학에서 모든 닫힌 도형들(, 타원, 사각형, 삼각형)이 일치하는 반면, 사영 기하학에서는 원뿔 곡선들(원들, 타원들, 포물선들)인 것들만이 일치한다. 아핀 기하학에서 이러한 도형들은 서로 간에 다른 것이 되지만, 다른 크기의 같은 도형은 여전히 같은 것으로 남는다. 그리고 마침내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다른 크기의 모든 도형들이 서로 간에 구분된다.[18] 달리 말해 가장 불연속적이고 고정적인 공간들이 가장 많은 수의 분화된 도형들을 가지는 반면에, 보다 연속적이고 유동적인 공간들이 분화의 최소 등급(가장 작은 구분되는 도형 수)을 가지는 것이다.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들을 연결하는 것은 이러한 점진적인 분화과정이다. 즉 수학과 실험실 현상 둘 모두에서 해들은 문제 그 자체가 점진적으로 분화됨으로써 생성된다.

 

비록 들뢰즈가 펠릭스 클라인의 저작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지만, 클라인은 정확히, 만약 우리가 군-이론적 사유와 비-계량적 공간들을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문제 이론에서 그 어떤 혁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들뢰즈가 말할 때 그가 요청하고 있는 바를 제공한다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더 나아가 비선분적 공간을 충분히 선분적인 공간으로 변형하는 기하학들의 점진적인 분화는 우리에게 실재론적 존재론에 있어서 들뢰즈적인 접근법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접근법이 대조된다는 강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세계는 이미 선-선분적(pre-segmented)이며, 영원히 존재하는 특수한 범주들이다. 즉 그것은 쇠락과 파괴에 속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들뢰즈에게 선분적 실체들(바위들, 식물들, 동물들)의 세계는 어떤 종류의 선분화도 전제하지 않는 조건들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론적 문제들에 대한 해로서 출현한다. 존재론적 문제들은 위상학적 불변항들(topological invariants), 즉 가능 공간의 차원 수, 그것의 연결성, 그리고 그것의 보편적 특이성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존재론적 문제들이 현행화의 과정을 겪을 때, 그것들은 점진적으로 현행적 해들의 다양성으로 분화된다. 이 분화는 어떤 충만한 역사적 방식 안에서 진행되며, 어떤 시간에 가능 공간의 한 조각을 드러낼 뿐이다. 따라서 파충류가 척추동물의 세계를 지배했을 때, 그들은 가장 유용한 생태적 적소들(niches)을 장악한 종들로 어떤 커다란 분화 수준을 전개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 포유류는 그때 생태체계의 작은 구성요소를 구성하는 미분화된(undifferentiated) 야행성 생명체들이었다. 하지만 공룡들의 대규모 멸종으로 인해 텅 빈 생태적 적소들은 분화의 기회를 잡은 포유류들에게 남겨 졌으며, 우리가 오늘날 관찰할 수 있는 종들의 다양성으로 폭발했다.[19]

 

이 논문을 끝마치면서, 우리는 수학의 세계로 되돌아 가, 우리가 불변항들에 대해 말할 때 뒷문을 통해 초재적 실체를 도입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불변이라는 개념이 그것만으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확실히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본질의 함축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그 기술적(technical) 의미에서, 이 개념은 언제나 변환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회전들, 전위들, 사영들, 뻗침들, 접힘들인 것이다. 이러한 변환들은 수학적 연산자들에 속한 감응하는(to affect) 능력들과 더불어 수들, 도형들 또는 방정식들에 속한 감응되는(to be affected) 능력을 모두 포함한다. 예컨대 목표에 대한 연산자의 적용, 즉 작은 벡터장을 발생적인 분기(bifurcation)를 야기하는 주요 장에 부가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사건이다. 그리고 사건들은 본질과는 달리, 필연적이지 않으며 우발적이다. 어떤 공리적인 접근법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달리, 기하학의 문제적 개념 안에서,


도형들은 그것들을 발생시키는 감응들(affections)의 관점, 즉 절단(sections), 박리(ablations), 첨가(adjunctions), 투사(projections)로부터만 사유된다. 우리는 유로부터 그것의 종으로, 또는 어떤 안정적 본질에서 거기서 파생되는 속성들로 가는 특수한 차이들에 따라 나아가지 않는다. 그보다 우리는 그것을 조건짓고 해결하는 우연적인 것들에 대한 문제에 따라 나아간다. 이것은 각각의 특성들이 본질과 확연히 다른 어떤 ‘사건’을 지시하는 모든 종류의 탈구성들, 변환들, 경계적 경로들을 포함한다. 사각형은 더 이상 구적법으로부터, 육면체는 입체구적법으로부터, 직선은 어떤 교정작업(rectification)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정리(theorem)가 이성의 질서에 속하는 것과는 반대로, 문제는 과학 그 자체 안에서 감응적이며, 변신(metamorphoses), 생성 그리고 창조와 분리 불가능하다.(ATP 362; DR 187-89도 참조)



[주석]

[1] Aristotle, The Metaphysics (New York: Prometheus Books, 1991), p. 100.

[2] Ibid., p. 160.

[3] 이 용어는 들뢰즈 존재론에 관한 나의 재구성으로부터 도출된다. ‘개별적 특이성보편적 특이성은 들뢰즈의 저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특개성’(haecceity)특이성이라는 개념을 각각 사용한다. 게다가 이 두 개념들은 들뢰즈의 저작에서 을 대체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이 두 개념의 비교는 내가 한 것이지만, 나는 그것이 들뢰즈의 존재론적 접근법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4] Ralph Abraham and Christopher Shaw, Dynamics: The Geometry of Behavior (Santa Cruz, CA: Aerial Press, 1985), vol. I, pp. 20-21.

[5] Bas Van Fraassen, Laws and Symmetry (Oxford: Clarendon Press, 1989), p. 222.

[6] Peter Smith, Explaining Chao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p. 72 (강조는 저자).

[7] Bas Van Fraasen, The Scientific Image (Oxford: Clarendon Press, 1980), p. 16.

[8] Willard Van Orman Quine, quoted in Nicholas Rescher, “The Ontology of the Possible,” in Michael J. Loux (ed.), The Possible and the Actual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79), p. 177.

[9] Ronald N. Giere, "Constructive Realism," in Paul M. Churchland and Clifford A. Hooker (eds.), Images of Scienc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5), pp. 83-84.

[10] Ibid., p. 44.

[11] Cf. B 96-97. 들뢰즈는 앙리 베르그송으로부터 잠재성 개념을 취해서, 그것을 가능성과 같은 다른 양태들과 구분한다.

[12] Ian Stewart and Martin Golubitsky, Fearful Symmetry (Oxford: Blackwell, 1992), p. 42 (강조는 원저자).

[13] Morris Kline, Mathematical Thought from Ancient to Modern Tim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2), vol. II, p. 759

[14] Abraham and Shaw, Dynamics, vol. III, pp. 37-41.

[15] Stewart and Golubitsky, Fearful Symmetry, pp. 108-10.

[16] 이것은 마찬가지로 들뢰즈에 관한 나의 재구성에 속한다. ‘상호-현행화라는 개념은 그의 책에 드러나지 않으며, 들뢰즈는 어디에서도 수학 모델들의 성취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이 점에 대한 더 충분한 논의는 Manuel DeLanda, Intensive Science and Virtual Philosophy (New York: Continuum, 2002), chapter 4를 보라.

[17] Kline, Mathematical Thought, vol. III, p. 904.

[18] David A. Brannan, Matthew F. Esplen, and Jeremy J. Gray, Geomet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p. 364.

[19] 위상학적 다이아그램과 동물과 식물의 진화 간의 관계는 사실상 이것보다 보다 복잡하다. 특히 척추동물들이 위상학적으로 서로 간에 (어떤 기본적인 신체 평면을 공유함으로써) 변환가능하다는 것은 충분치 않은 설명인데, 이런 식의 변환들도 마찬가지로 유전가능해야 하므로 그것들은 진화과정의 부분일 수 있다. 달리 말해 우리는 가능한 유전자들의 공간이 가지는 역할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한 생각을, Manuel DeLanda,“Materialist Metaphysics,” in Deleuze: History and Science (Dresden: Atropos, 2010), pp. 96-102에서 제시하고자 했다.

 


[위 글에 수식 오류 입력 부분의 pdf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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