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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욕망

by Nomadia 2021. 1. 16.

*원문서지: Hannah Stark, ‘Desire’, Feminist Theory After Deleuze, Bloomsbury, 2017, pp. 41-59

*이 글은 한나 스타크(Hannah Stark)들뢰즈 이후 페미니즘 이론‘3장 욕망을 번역한 것이다.

 

3장 욕망

 

욕망은 언제나 우리에게 성, 젠더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관한 것들을 말해 준다. 이것은 특별히 정신분석의 대상인데, 왜냐하면 욕망과 관련하여 성차가 출현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하나의 틀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욕망은, 결핍되어 있는 것의 획득과 관련하여 이해될 때, 어떤 거대한 수수께끼로 파악되어 왔다. 여성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성적 욕망이 섹슈얼리티와 관련하여 이해될 때, 그것은 상상불가능한 것으로 비춰지지만, 또한 혼잡하고, 통제불가능하며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우리는 가장 흔한 여성 잡지가 우리 자신에게 여성들이 욕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해왔던 것을 상기하게 하는 것 외에 더 이상 나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여성들이 어떻게 그들의 욕망을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소비해야만 하는 생산물들과 라이프스타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훈련시키는 충고나 교육 칼럼들 안에서 명백해진다. 동시에 이러한 동일한 미디어가 여성의 신체들이 욕망의 대상들로 코드화되는 시각 문화에 기여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자본주의와 정신분열기획의 첫 번째 책인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욕망, 섹슈얼리티 그리고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생각한다. 들뢰즈의 모든 저작들 중에 이 텍스트는 그 역사적 출현의 순간에 맥락화될 필요성이 가장 많다. 1972년 프랑스에서 안티오이디푸스가 출간되었을 때, 이것은 출판계의 사건이었다. 3일 만에 완판되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적 개입을 제공함으로써, 이 텍스트는 결핍이라는 욕망의 공식과 핵가족의 한계 안에 욕망을 옭아매어온 바를 해체했다. 때로 들뢰즈와 과타리의 정신분석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젠더, 섹슈얼리티 그리고 가족을 재-형상화하기 위한 중대한 함축을 가진다. 이것은 물론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투쟁이라는 중요한 위치에 놓인 의미이기도 하다. 이 장은 안티오이디푸스의 맥락, 그리고 들뢰즈와 과타리에 의해 개괄된 정신분석 비판과 더불어 시작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들의 욕망하는-기계(desiring-machines) 개념과 이것이 제공하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새롭고, 긍정적이며 비-정신분석적인 영역으로 나아갈 것이다.

 

욕망, 정신분석 그리고 실험 정신의학

들뢰즈와 과타리의 욕망에 대한 연구서인 안티오이디푸스는 어떤 특유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탄생했다. 이 책은 그 저자들이 처음 만난 것이 5월 혁명 이후인데도 불구하고, 일종의 1968년식 책으로 자주 묘사된다. 우리 또한 안티오이디푸스1960년대를 관통하여 프랑스에서 싹트고 있었던 폭넓은 지적 경향들 안에 위치시킬 수 있다. 19685월 파리에서의 학생, 노동자 봉기에서 절정에 이른 정치적인 격동의 시기에, 일련의 중요한 텍스트들이 출간되었다. 이 저작들은 이제 후기구조주의적 사유의 정전(正傳)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여기에는 푸코의 말과 사물(1966), 지식의 고고학(1969),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1967),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1968), 의미의 논리(1969)가 포함된다. 비록 1968의 사건들이 최저임금에 대한 불만족, 치솟는 실업률 그리고 대학의 여건들(이를테면 과밀한 학생수와 구식의 규율들)과 같은 물질적인 요인들로부터 기인했다 해도, 오래된 위계들을 흘러 넘치는 명령은 아나키스트와 후기구조주의적 담론의 유토피아적인 분위기와 공명했다. 이것은 18685월이 후기구조주의 사상사들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정확히 말해, 그들의 저작이 문화적 시대정신과 공명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와 같은 철학자들이 이 시기에 학생들과 대오를 같이 하여 역할을 했던 반면, 많은 핵심적인 후기구조주의 사상가들은 물리적으로 그 사건에 부재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들뢰즈는 주기적인 폐결핵으로 위중한 상태에 놓이곤 했는데 그런 중에도 그의 박사논문을 완성하는데 매진하고 있었고, 또한 리옹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1968년이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간에, 그것은 들뢰즈와 과타리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당시의 정치적 격변 상황을 반영한 방식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 그 책은 욕망이야말로 혁명의 힘이라고 주장하고 있던 것이다.

 

안티오이디푸스는 또한 보다 넓은 역사적 상황에 맥락화될 필요가 있다. 이안 뷰캐넌은 우리가 19685월의 사건들을 포함하여 이질적이고 분산된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횡단한 것으로 이해하는 바로 그 조건에서, 그러한 사건들을 불러일으킨 사회적 불안으로서의 베트남전쟁과 알제리 사태라는 그 조건에서, 이 책을 하나의 1968년 책으로 읽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책에 관한 이러한 폭넓은 맥락화는 19685월의 파리에서 발생한 국지적 사건들을 넘어서는 훨씬 더 복잡한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나오는 발전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그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68세대는 아니었고, 그 정치의식이 2차 세계 대전 과 그 직후 시기안에서 형성된 구세대에 속한다는 점을 지적한다(2008: 8). 그래서 우리는 안티오이디푸스가 그 시대의 책이지만, ‘그 시대란 복잡하고 투쟁적인 맥락에서 지적이면서 정치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안티오이디푸스가 프랑스의 지적 삶에서 정신분석의 지배력, 그리고 들뢰즈와 과타리 둘 모두의 작업에서 이러한 이론적 틀거리의 위상과 관련하여 이해되는 것도 중요하다. 정신분석가인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의 작업을 구조주의 언어학과 연관시켜 재해석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지적 역사의 장면에서 주요한 인물이었다. 라캉은 그의 1968-9년의 세미나에서 차이와 반복의미의 논리에 있는 정신분석에 대한 들뢰즈의 개입을 알고 있었다(Dosse 2011: 187). 하지만 이 두 사람 사이의 경쟁의식은 같은 시간에 그들의 세미나 스케줄을 잡는 식으로 드러났으며, 그래서 학생들은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다. 다시 말해 당신은 들뢰즈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라캉주의자가 될 수 없었던 셈이다. 과타리가 라캉 그리고 정신분석과 가졌던 관계는 좀 더 복잡하고 훨씬 더 개인적이다. 1950년대에 과타리는 라캉의 제자였고 정신분석가로 훈련받았다. 그는 1969년부터 분석가로서 프로이트 학파에 속해 있었으며 라캉과 더불어 정기적으로 분석을 수행했다. 라캉과 과타리의 관계는 안티오이디푸스의 출간으로 위태롭게 되었다. 라캉은 그 책이 출간되기 전에 보기를 원했지만 저자들은 그것을 거절했다(Guattari 2006: 343). 출판에 대한 그의 응답은 신랄했다. 그 책을 프로이트 학파에서 읽거나 참조하는 것을 금지해 버린 것이다(Dosse 2011: 209).

 

안티오이디푸스를 쓰기 전에, 과타리는 장 위리(Jean Oury)1953년에 연 라보르드(La Borde)에 있는 실험적인 정신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 병원은 반-정신의학의 원리에 따라 세워졌는데, 이 원리는 하나의 국제적인 운동으로서, 정신질환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져서, ‘정상비정상적 행위의 경계를 나누곤 한다는 취지로 나아갔다. 게다가 라보르드 병원은 제도 정신의학(institutional psychotherapy)이 시행되는 곳이기도 했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제도가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실천이다. 다시 말해 그 제도의 구성 부분들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그것이 투자하는 것은 무엇인지, 권력은 어떻게 순환하며 그것의 효과는 어떻게 개인들에게 미치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의 지점은 제도가 작동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하도록 한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제도 자체를 어떤 치료가 요구되는 환자로 다루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에서 대개의 정신병원은 국가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그래서 이 사립병원의 설립은 그 자체로 국가와 그 제도에 대한 정치적 저항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국가가 그러했던 것처럼 정신적으로 병이 난 것으로 간주되는 그 사람들을 정상인구로부터 축출하기 보다, 라보르드는 포용하고 함께 했다. -정신의학 운동은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종종 최고도로 창조적이며, 따라서 그들의 창조성을 제한하거나 죽이는 요법을 시행하지 않는다. 이 병원은 전통적인 제도에서의 위계를 파괴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목적에 맞춰, 임금은 근본적으로 다시 고려되었고, 업무는 다른 방식으로 상상되었다. 모든 사람(의사, 환자, 수리공들, 지식인들)은 요리하기와 청소를 포함한 병원일에 매일매일 참여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모든 사람들은 환자 자신까지 포함하여 환자를 돌보는 일을 맡았다.

 

과타리는 1955년에 라보르드에 거주하면서 업무에 엄청난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는 그의 정치투사로서의 경험과 사람들을 조직화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병원에 고용되었었다. 처음에 맡은 그의 임무는 활동들을 조직하는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병원의 재정 관리와 같은 역할을 맡도, 환자를 돌보는 데에도 참여하게 되었다(Dosse 2011: 58). 안티오이디푸스를 집필하고 있는 기간에, 과타리는 제도적인 치료법과 정신분석의 미망으로부터 깨어났다. 그는 라보르드에서의 그의 일을 지속했고, 그곳에서의 인상적인 경험은 들뢰즈조차 가늠할 수 없었던 협력 작업을 이루어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삶에 관한 매력적인 역사적 고찰에서, 프랑수아 도스(François Dosse)안티오이디푸스에 관해 놀라운 점은 그것이 정신분석에 대한 심대한 도전임에도, 그리고 그 저자들 중 한 사람이 실험적인 정신병 치료에 참여하고 있었음에도, 그 책이 정신치료나 정신분석 어느 것에도 거의 충격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며, 라보르드에서조차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쓴다(2011: 215).

 

욕망은 라보르드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했다. 즉 반-정신의학 운동은 사회적 억압들로부터 욕망의 해방을 실천했다. 라보르드는 좌파와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이었으며, 사회 관습들, 특히 섹슈얼리티와 가족으로 뭉친 집단들이 도전받고 재-구상되는(re-imagined) 장소였다. 라보르드의 유토피아적 영감들은 전부 성공적이진 않았다. -위계적이고 참여적인 작업할당은 당연히 비효율성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욕망의 해방은 문제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19685월의 역사와 프랑스 지성계에서 그것의 위상에 대해 말할 때, 줄리앙 부르(Julian Bourg)는 억제되지 않은 욕망의 한계들에 대해 성찰하는 장 위리가 전하는 이야기를 활용한다. 1984년 인터뷰에서 위리는 그가 라보르드를 떠났 있었을 때, 과타리가 영국 반-정신의학 운동의 리더 중 한 사람이던 데이비드 쿠퍼(David Cooper)를 초대하여 의료진들과 환자들을 상담했다고 기술한다. 쿠퍼는 모든 이들이 약물복용을 중단하고 성관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예기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환자들 중 한 명이 죽은 것이다(2007: 174). 비록 이것이 하나의 극단적인 사례라 할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욕망의 해방이라는 것이 확실히 좋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반성하도록 만든다. 또한 자유 연애를 둘러싼 몇몇 반문화적 실천들이 여성과 남성에 따라 어떻게 다른 식으로 경험되는지를 사유하는 것도 가치 있을 것이다. 가부장제는 자주 이러한 사회적 실천들 안에서 여전히 작동하며 가끔은 욕망의 해방이란 것이 단지 여성의 신체에 대한 보다 큰 접근을 허용하는 것으로 변형된다.

 

안티오이디푸스는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했지만, 그 논증은 정신분석에서 욕망의 자리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한다. 정신분석에서 욕망이란 결핍, 부재 그리고 욕구와 관련하여 상상된다. 이것은 욕망이 플라톤과 헤겔과 같은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그리고 사유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개념화되는 방식과 일치한다. 프로이트의 저작에서, 욕망이란 처음에는 가족 안에 정위되며, 가족 바깥으로 향하는 과정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 설명된다. 이것이 아마도 대중들 사이에 가장 잘 알려진 프로이트의 사상일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소포클레스의 연극 오이디푸스 왕을 따라 지어진 이름인데, 프로이트는 이를 어린 아이의 성심리 발달을 기술하는데 사용한다. 즉 어린아이는 이 콤플렉스를 따라 사회화된 존재가 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어린이가 적합하게 젠더화되고, 지속적으로 재생산적인 이성애에 연루되도록 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에게서 동일하게 시작된다.즉 그들은 어머니를 그들의 첫 번째 사랑의 대상으로 취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사이의 뚜렷한 차이는 그들이 각자 상대방의 해부학적인 요소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가 페니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시할 때, 그는 그들이 처벌을 받아 거세되었다고 이해하며, 이것을 결핍으로 해석한다. 만약 여자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라난다면, 그녀 또한 이것을 하나의 결핍으로 이해할 것이다.

 

프로이트가 거세 콤플렉스로 기술했던 것은 최초에 그의 리비도 욕망을 어머니에게 투사하는(이는 나중에 무의식 안에 억압된다) 남자아이가 그의 아버지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거세하려 한다는 공포를 발전시킨다는 점이다(이 공포는 그의 초자아를 형성하거나 도덕적인 양심에 따라 행위하는 그의 정신의 일부가 된다). 이 공포로 인해 그의 욕망은 다른 여성에게 옮겨가고 아버지와 그 가부장적 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한다. 또한 여자아이는 어머니로부터 그녀의 욕망의 대상을 전이받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여자아기아 그녀의 결핍을 거세와 처벌로 이해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 결과 그녀는 일반적으로 여성, 특히 어머니에 대해 경멸적인 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녀는 따라서 그녀의 욕망을 아버지로 전환시키고 나중에는 가족 바깥의 남성에게 투사한다(Freud 2001). 당연하게도 이러한 성심리 발전 모델은 많은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에 직면했다. 이것은 여성의 해부학적 특성을 독해하는데 있어서 현존(presence)보다 부재(absence)과 관련시키는 노골적인 성차별주의이고 근본적으로 그 전제에 있어서 이성애적이다. 여기서 욕망의 정상적대상이란 오로지 반대 성의 구성원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프로이트의 생각들이, 그것들 중 많은 것이 문제적이라 해도, 성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위해 중요한 몇 가지를 드러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성적 발달과정에 관한 그의 모델은 실제로 성차에 대한 지식을 준다. 이것은 그가 특정 성을 체현한다는 것이 정신적 발달 과정에 심대한 충격을 가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다. 게다가 우리가 섹슈얼리티에 관한 세 개의 에세이(Three Essays on the Theory of Sexuality, 2011)에서 본 것처럼, 프로이트는 여성의 섹슈얼리티과 그들의 쾌락 능력을 믿었다.

 

라캉(1977)은 어린아이가 자아나 주체성(라캉은 이것을 환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발전시키는지를 고려하기 위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재해석하며, 상징 질서 또는 언어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이것이 남성의 해부학적 특성(페니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 안에서 권력의 상징적 표식으로서의 팔루스를 지칭하는 것을 통해 그가 권력에 천착한다고 이해한다. 유아기에 어린아이는 환경으로부터 구분되는 어떤 실체를 그 자체로 이해하지 못하며, 결핍없이 충실한 세계를 경험한다. 이러한 발전단계는 유아가 가지는 욕구 가운데 하나라서, 특정한 대상들에 의해 충족될 수 있다. 예컨대 영양에 대한 욕구는 어머니의 가슴으로 충족될 수 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와 분리되어 자아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킬 때, 그 아이는 또한 어떤 근본적이고 해결불가능한 상실감도 경험한다. 어린아이는 개별적 대상들에 대한 요청과 그러한 요청들이 지향되는 그 인물에 대한 관심(그리고 사랑) 둘 모두에 대한 언어적 요청을 형성하기 시작할 것이다. 요청이란 언제나 타자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충족될 수 없다. 라캉에게 있어서 욕망이란 이러한 감각, 즉 어떤 것이 상실되는 감각이며, 만족불가능한 결핍이다. 이러한 결핍은 언어 안에서 구조화하는 원리가 되며, 라캉에 따르면 거세의 공포는 현실적인 것, 즉 구체적인 아버지로부터가 아니라 이 상징적 영역 안에 존재한다. 상징적 질서로의 접근은 남성적 권력(아버지의 이름으로)에 의해 통제되며, 이러한 결핍에 대한 보상을 제공한다.

 

안티오이디푸스는 자본주의가 욕망에 제한을 가하는 방식을 비판하기 위해 맑시즘과 정신분석을 결합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정신분석적 모델을 거부하고, 그것이 욕망을 생산보다 취득된 것과 관련하여 틀지우기 때문에 결여로서 코드화하는 것을 거부한다(A-O: 25). 그들은 또한 욕망의 오이디푸스 틀거리를 거부하면서, 그것이 이성애 커플과 핵가족 안에 붙잡혀 있다고 말한다(A-O: 51). 핵가족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형상으로 특정한 문화적 장 안에 놓여 있는 것으로서, 정신분석 안에서 역사화되지 않으나, 주어진 조건 안에서 어린 아이의 성심리 발달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다. 부르주아 핵가족(이것은 정신분석이 분석의 모델로 취하는 가족의 유형이다)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출현과 중첩된다. 맑스를 따라 들뢰즈와 과타리는 가정의 변화를 깨닫는데, 그것은 상품 생산과 노동의 장소에서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일터와 분리된 사적 장소로서 가장 통상적인 환경으로의 변화이다(A-O: 2257). 이것은 일과 가정,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포함하는 서구의 근대적 삶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일련의 이원론들을 영속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분리들이 여성적인 것으로 코드화된 사적 공간과 가정에서 수행되는 가사일, 특히 아이를 양육하는 것을 둘러싸고 사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것들과 더불어 전통적으로 발생되어 온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후기 자본주의사회에서, 핵가족 세대는 상품과 서비스 소비의 장소이며, ‘아빠엄마는 자본주의에 충실하게 참여할 수 있는 미래의 노동자로 아이들을 양육한다. 욕망의 운동은 이 시스템 안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요약된다. 즉 이것은 엄마-아빠-라는 삼각형 형상(오이디푸스) 안에 폐쇄되며, 자본주의 자체는 사람들을 노동과 소비의 특정 패턴 안에 가두는 어떤 것으로 현상하기 보다, 사람들이 실재로 욕망하는 것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 들뢰즈와 과타리는 정신분석을 가족 안에 욕망의 자본주의적 제한을 강화하는 하나의 담론으로 놓는다.

 

하지만 들뢰즈와 과타리는 가족을 이런 단순하거나 닫힌 어떤 것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은 괴상한’(A-O: 97) 것으로서, 상대적이고 비상대적인 영역으로부터 오는 지속적인 균열들과 강요들에 복종하고, 따라서 간격들과 파열구들로 가득차 있다(A-O: 97). 이것은 그러한 것들이 반-가족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상 그들은 특별히 그것이 가족 안에 지속되는 애착이나 돌봄이라는 중요한 구조들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언급한다(A-O: 47). 우리는 안티오이디푸스에 대한 통상적인 오독의 증거를 들뢰즈의 어느 가혹한 비평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확인하는데, 이것은 미셸 크레솔(Michel Cressole)의 비난에 대한 응답이다. 크레솔은 어떤 규범적인 가족 단위가 오이디푸스에 기반하여 연명할 수 있다고 말하며, -규범적인 구조들은 이러한 정신분석적 구조로부터의 어떤 탈출을 보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DI: 10).

 

들뢰즈와 과타리는 특히 무의식이 정신분석 안에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견해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들은 반대 공식을 논하기보다 무의식으로 흘러들고, 균열되며 형태를 갖추는 것이 바로 의식적인 마음이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프로이트, 라캉과 달라진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숨겨진 욕망의 저장소로서 무의식이라는 정신분석 모델에 도전하면서, 그들은 깊이에서 특권을 부여하는 주체성의 모델에 대립한다. 오이디푸스에 대항하는 긴 논의에서, 그들은 푸코의 억압 가설과 유사하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그것이 금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재로는 게재시킨다고 주장한다(A-O: 79). 들뢰즈와 과타리는 법칙은 우리에게 너는 엄마와 결혼할 수 없고 너의 아빠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유순한 주체들은 우리 자신에게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원한다!”(A-O: 114). 오이디푸스가 무의식으로 투사될 때, 그것은 자유로운 종합의 확장이며, 여기서 끝없는 연결들, 비배제적인 이접들, 특수하지 않은 연접들, 부분대상들 그리고 흐름들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A-O: 54). 들뢰즈와 과타리는 프로이트가 이러한 자유로운 종합들(A-O: 54)과 리비도의 형식에서 욕망의 본질을 처음으로 발견했다는 점에서 신뢰한다(A-O: 270).

 

이러한 발견에 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인정은 그들이 정신분석 비판에서 이 지적 전통에 대해 무작정 거부한다는 주장에 찬성할 수 없게 한다. 그들은 단순히 정신분석이 야생적인 생산폭발적인 욕망을 뒤에 남겨두고(A-O: 54), 오이디푸스로 방향을 잘못 틀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안티오이디푸스가 교정하려고하는 것이다. 부가적으로 들뢰즈와 과타리는 오이디푸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오이디푸스가 무의식의 기저가 아니라, 단지 정신분석에 의해 무의식에 덧씌워진 것이라고 본다. 들뢰즈와 과타리에 따르면, 무의식은 오이디푸스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으로 간주되지 않아야 하며, 하나의 공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A-O: 55). 공장이라는 이미지는 무의식이 근본적으로 생산적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들뢰즈(와 파르네Parnet)우리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무의식을 축소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그것을 생산하고자 한다.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무의식 따위는 없다. 무의식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생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D: 274).

 

욕망하는-기계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어떤 긍정적이며, 실증적이고 생산적인 욕망의 모델을 제안한다. 그들에 따르면, 욕망이란 결핍이나 욕구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들의 도식 안에서는 욕망이 결핍된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그것의 객체를 인물들이나 사물들로 취하지 않고, 그것을 횡단하는 전체적인 환경으로 취하기 때문이다”(A-O: 292). 그 이유는 욕망이 하나의 대상으로 향하지 않으며, 특정 대상들이 부재할 때 등록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므로 그것은 객체들의 획득을 통해 만족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결핍은 우선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아니고 결핍은 정신분석과 자본주의에 의해 욕망에 덧코드화되는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이 어디에나 존재하며 그것이 사물들을 회집할 때 만드는 연결들을 통해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된다고 논증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욕망이란 섹슈얼리티에 제한되지 않는다. 섹슈얼리티는 욕망이 흘러들어 가는 영역 중 하나일 뿐이다. 그들은 섹슈얼리티와 사랑이 오이디푸스의 침실에 홀로 거주하지 않으며, “넓게 개방된 공간들 대신에 꿈과 함께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들뢰즈와 과타리에게 욕망은 쾌락과 만족에 관한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특히 이것을 푸코의 입장과 대조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푸코는 욕망이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했는데, 그것이 결핍을 주입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TRM: 130). 푸코에게 쾌락과 힘의 배치가 욕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과 쾌락의 연결에 저항한다. 왜냐하면 욕망에 대한 그들의 판본은 삽입이나 오르가슴과 같은 어떤 특정 만족감을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욕망의 내재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푸코에게 욕망이란 결핍이며 억압이지만, 들뢰즈와 과타리에게 이것은 구조나 발생이라기 보다 과정이다. 이것은 느낌에 대립하는 하나의 감응이다”(TRM: 130).

 

정신분석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비판의 일부는 그것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요인들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욕망은 프로이트에게 그러한 것처럼 가족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체계, 즉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정신분석적 틀거리에 의해 그것을 덧코드화하는 상징을 통해 우리의 욕망을 해석하기 보다 여기서 욕망은 언제나 다른 무언가에 의해 매개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란 직접 사회적 장으로 진입한다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욕망은 작업장, 정치, 종교 그리고 가족과 같은 집합적 자리의 영역에 투자한다. 욕망이란 사회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체의 내면성으로부터 출현하는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가 그것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는 무의식 안에 거주하지 않으며, 비인간적이고 전인격적인 힘으로서, 모든 곳에 존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분열증적 망상이 실재로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낸다고 여기기 때문에 욕망을 설명하기 위해 정신분열의 해리적(dissociative) 측면을 활용한다. 이것은 그들이 분열증을 가치화한다거나 그들의 지적인 어휘목록에 질병을 안이하게 채택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라보르드에서의 실험작업으로부터 과타리는 분명히 여러 정신적 조건들과 질병들에 대한 확실한 경험을 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질환으로서의 정신분열을 낭만화하지 않으며, 자본주의의 분열증적 측면에 관심을 가진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어떤 증상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출현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정신분열증과 교전하는 것이다. 정신분열증에 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많은 사례들이, 글쓰기나 다른 표현수단이 단어들이나 사유의 분열증적 흐름을 풀어놓을 수 있는 문학과 예술로부터 취해진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자본주의는 분열증을 생산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모든 의미있는 체계보다 시장 가치를 높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상품의 교환은 내적이거나 안정된 가치에 기반하지 않고, 오히려 교환가치가 변동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화폐, 노동 그리고 재산의 흐름이며 욕망을 해방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하기 때문이다. 욕망의 생산적 본성에 대한 들뢰즈와 과타리의 주장은 그들의 자본주의 비판과 긴밀하게 엮여 있다. 그들은 생산, 분배 그리고 소비과 관련하여 생각하는 것이 그릇된 의식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생산이란, 그리고 재생산이란 즉각적으로 소비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과타리에 따르면 오로지 생산과 재생산만이 존재한다. 욕망이 생산하는 것은 실재다. “만약 욕망이 생산적이라면, 그것은 오로지 실재 세계 안에서만 생산적일 수 있으며, 오로지 실재만을 생산한다”(A-O: 26).

 

욕망은 결여하고 있는 것의 획득에 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물들을 모두 흩어놓는 능동적이고, 무정부적이며 예측불가능한 힘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균열들이 조직화된 체계들 안에 등장할 때마다 뚜렷해진다. 이것은 그것의 분열증적 흐름으로 사태를 탈조직화하는 바, 이것이 욕망이 결코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갇힐 수 없는 이유이다. 욕망은 근본적으로 과잉이며, 그것의 점성(viscosity)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기존의 패턴들을 빠져나가는 길들을 발견할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욕망이란 기존의 사회적 조직화를 무화하는 잠재력을 가지는데, 이는 욕망이 비사회적이거나 심지어 반사회적이라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코드화된 흐름들에 개입하면서 새로운 배치들을 생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A-O: 116). 이것이 정확하게 욕망이 생산적인 이유다. 즉 욕망은 신체들 간의 그리고 그 안에서 연결들을 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은 현실적인 세계를 생산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을 근원적으로 혁명적인 것으로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어떤 사회도 그것의 수탈, 노예상태 그리고 합의된 위계의 구조 안에서 실재적인 욕망의 입장에 대해 관대할 수 없다”(A-O: 116).

 

욕망은 안정성보다 항구적인 흐름을 창조하는 광볌위한 연결들을 생산한다. 욕망의 연결 능력은, 적어도 두 가지 부분들을 회집하기를 요청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집합적인 본성을 증명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이 창조하는 이러한 진동하는 연결들을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욕망하는-기계라고 부르고, 천의 고원에서는 배치라고 부른다. 욕망은 미묘한 것으로서, 우리가 오직 그것의 작동들을 그것이 생성하는 연결을 통해서만 수 있다. 욕망하는-기계의 특성은 무한한 연결들에 잠재적 힘을 제공하는데, 그 이유는 욕망이 기관없는 신체와 같이, 의미나 코드화에 선행하는 주체가 아니고 따라서 그것이 앞서서 불변하는 행위 패턴들 너머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잠재적으로 무한하고 차이나는 부분들과 조각들은 끝없는 총체 안에서 연결될 수 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하는-기계 자체는 해석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거나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욕망하는-기계는 정확히 우리가 그것을 구성하는 바 그것, 그것들과 더불어 만들어지는 것, 그것들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A-O: 288). 만약 우리는 욕망을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증거라기보다, 사물을 만들고 행하는 힘으로서, 어떤 현행화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때 욕망은 생성을 일으키는 하나의 힘으로 드러난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욕망하는-기계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은유가 아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의 연결들을 유비적으로 기계와 비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욕망이 정확히 일반적인 기계와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계를 부수거나 개입하는 하나의 체계로 정의한다(A-O: 36). 욕망은 사태들을 연결시키지만 그렇게 함과 더불어 이러한 흐름을 끊는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사례는 입에 관한 것으로서, 입은 가슴과 연결되고, 이때 우유의 흐름을 끊는다(A-O: 36). 여기서 최초의 흐름은 이 새로운 연결에 의해 방해 받으며 다른 경로로 바뀌에 된다. 기계의 이 이미지는 끊임없는 움직임과 생산을 불러 일으키는 바, 이것이 바로 그들이 무의식이 기계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욕망하는-기계는 안/, 자기/타자, 기계론/생기론, 인간/자연 사이의 통상적인 구분을 부순다. 이 이원론들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양쪽 모두 생산의 동일한 과정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욕망하는-기계들은 인간과 같은 범주들에 관련되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들은 임의적인 부분들과 조각들을 총괄하면서 전환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쓴다. “하나의 마술적 사슬이 식물의 삶, 기관들의 조각들, 벌거벗은 모양, 아빠의 이미지, 공식들 그리고 단어들을 묶는다. 즉 우리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묻지 못할 것이지만, 이런 식으로 배치된 기계가 무슨 종류인지 물을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단절들과 흐름들과 관련하여 무슨 종류의 흐름이며 흐름을 깨는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A-O: 181).

 

더 나아가 욕망하는-기계들은 주체의 새로운 모델을 제안하지 않으며, 오히려 주체를 분석의 중심으로부터 빼낸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기계가 사물/사태의 중심이기 때문에, 주체란 주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A-O: 20). 욕망하는-기계들은 주체의 구성 이전에 존재한다(이것은 이러한 기계들의 효과로서 출현하는 것이지, 그것들의 구성을 위해 요청되지 않는다).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창조하는 경로들이다. 즉 그것의 탈주선들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지도제작의 사상가들이다. 그들의 공동 작업물인 천의 고원은 지도를 만드는 것이지 투사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우리에게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중복하지 않고 항구적으로 새로운 것에 가 닿아야 함을 상기시킨다(ATP: 13). 욕망하는-기계들은 영혼과 내면으로부터 표면과 강도의 놀이로 초점을 옮겨 놓는다. 욕망은 인간적 행위주체가 포함되든 아니든 간에 생산적이다.

 

안티오이디푸스의 말미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정신분석 대신에 분열분석(schizoanalysis)을 제안한다. 그들은 이것을 어떤 유물론적 정신의학으로 기술하면서, 이 프로그램을 위해 프로이트와 맑스 둘 모두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분열분석의 첫 번째 과업은 해체, 즉 오이디푸스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이디푸스 파괴가 요청됨으로써 욕망의 실재 작업과정이 드러날 수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작동할 때, 그것은 특정 형상으로 욕망을 돌려 놓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생산을 억압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이 고유하게 분자적이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몰적(molar) 구성으로 욕망을 몰아 넣는다고 믿는다. 분열분석의 실증적인(그리고 실천적인) 과업은 분자적 욕망이, 일단 기존의 오이디푸스적 욕망의 패턴들로부터 해방될 때, 어떻게 욕망하는-기계들을 구성하기 위해 작동하는지 발견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분열분석의 질문이 무엇이 당신 자신의 욕망하는-기계를 추동하는가? 무엇이 그것들을 기능하게 하는가? 무엇이 그것들이 들어가고 작동하게 하는 종합인가? 분자적인 것으로부터 몰적인 것으로 확장하는 그리고 반대로 무의식이 어떤 주체를 남겨둔 채로, 그 자신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순환을 구성하는 모든 이행들 안에서, 당신이 그것들을 구성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쓴다(A-O: 2901). 이것은 자아를 해체하고, 동일성의 관념 너머로 움직여 가는 것을 포함한다. 분열분석은 무의식 안의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본 바대로, 무의식은 고유한 의미로 물들어 있지 않다(A-O: 180). 욕망하는-기계는 우리를 숨어 있는 것과 깊이의 모델로부터, 그리고 오이디푸스의 더럽고 작은 비밀로부터 떼어 놓는다.

 

에로티시즘

욕망이 전통적으로 상상되는 방식에 관한 들뢰즈와 과타리의 비판은 페미니즘 이론을 위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에로티시즘과 섹슈얼리티에 관해 사유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여성은 전통적으로 욕망의 주체라기 보다 객체로 코드화되어 왔다. 게다가 성과 쾌락의 개념화는 역사적으로 팔루스중심적이었다. 안티오이디푸스는 성애(the erotic)와 관련되어 가져오기 적합한 책이다. 왜냐하면 프리다 베크만(Frida Beckman)이 제안하는 것처럼, “성에 관한 모든 것”(2011: 8)이 담긴 책이기 때문이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그들이 맑스 이후 인간적 섹슈얼리티 안에서 작동하는 비인간적 성’(A-O: 294)이라고 부른 것을 진전시킨다. 여기서 그들은 인간적인 성과 분자적인 섹슈얼리티을 대비시킨다. 전자는 사회적 장, 특히 경제적인 것과 특정 시기에서의 권력의 작동(가부장제나 이성애 규범성과 같은 이데올로기) 안에서 무의식의 투입에 얽혀 있다. 후자는 인간적 인격성의 수준 아래에서 발생한다. 이런 식으로 인간적 성조차 비인간적인 것에 개방되며 에로티시즘은 의인화로부터 풀려날 수 있게 된다. 욕망은 그 자체로 분자적이며 미시적 과정들을 통해 작동한다. 욕망하는-기계들을 부분들과 조각들로부터 배치하면서(, 넓적 다리, 옷가지, 가벼운 바람, 정오의 햇살, 덧없는 기억) 욕망은 언제나 남성과 여성이라는 폭넓은 회집체와 아무런 관련을 가지지 않는 구성과 관련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프로이트의 남성적 섹슈얼리티에 대한 초점에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느끼기에 그가 하나의 성적 모델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남성성과 여성성은 둘 모두 여성이 거세를 통해 체현하는 결핍과 관련하여 정의되며, 결과적으로 여성을 부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A-O: 295).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 모델을 두 개의 성 체계로 확장한다고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욕망하는-기계는 부분들과 조각들을 한데 모으면서, 이러한 성적 체계들이 요청하는 몰적 정체성에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욕망하는-기계들은 미시적 횡단섹슈얼리티’(microscopic transsexuality)를 가동한다(A-O: 295). 여기서는 매우 이상한, -의인적 혼례식이 거행된다. 그들은 성관계는 하나로 또는 둘이 되는 것만도 아니고, 십만 개가 되는 것이다. 욕망하는-기계 또는 비인간적 성은 하나나 심지어 둘의 성도 아니고, n개의 성들이다”(A-O: 296). 여기서 그들은 무한한 성들을 구축하기 위해, 프로이트적인 하나의 성 체계 뿐 아니라 남성/여성이라는 2가적 관념 또한 거부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문자 그대로 섹슈얼리티가 모든 곳에 있다고 말한다(A-O: 293). 욕망하는-기계를 가동하여 사물/사태들을 회집하는 것은 성적 에너지다(A-O: 291). 그들이 섹슈얼리티와 욕망하는-기계가 하나며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때문이다(A-O: 294). 들뢰즈와 과타리에 따르면, 리비도가 순수한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은 자유롭게 흐른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우리가 경험하는 욕망이 사회적이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자본주의와 같은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힘들에 의해 경로를 변경해 왔기 때문이다. 이는 욕망이 리비도가 인격, 커플, 가족 또는 특정 대상들과 같이 친숙한 단위들을 통해 스스로를 표명함으로써 억압되고 가두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A-O: 293). 우리는 자유롭게 특정 인격이나 대상을 우리 욕망의 종착지로 선택한다고 느낄 것이지만 이것은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생물학적인 장에서 발생한다(A-O: 293). 여기서 사람, 커플, 가족 또는 대상은 욕망의 목적이나 합당한 종착지라기 보다 지나쳐 가는 어떤 지점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사랑에 대해 쓸 때조차, 그들은 그것을 인간을 포함하는 어떤 것으로 틀짓지 않는다. 그들은 비인격적 사랑에 대해 쓰면서, 관계자들을 비인격화한다고 한다(ATP: 40). 그러나 이것은 사랑과 욕망이 특수한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들이 주체의 수준에서 정체성과 관련된다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랑의 관계가 사랑하는 사람의 다양체들이 황홀한 혼인식, 다양체들의 다양체와 사랑에 빠지는 유사하게 복잡한 다양체에 의해 관련되어 지는 것이라는 식으로 쓴다(ATP: 3940). 사랑의 정치적 개념에 관해 연구하고 있는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는 들뢰즈와 과타리의 사랑에 관한 생각을 비주체적이고 기계적인 어떤 것으로 활용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기계적 특성을 가진다. 즉 당신의 다양체들과 나의 다양체들이 언제나 개별적인 것의 아래와 위 둘 모두 있는 합성체들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내 손에 닿는 당신의 입술의 연약한 곡선, 나의 피부의 거친 톤을 스치는 당신의 바다내음 나는 숨결, 유목적 비행을 하는 당신의 가벼운 꿈과 지상에 거주하는 나의 습성(2012: 7).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과 섹슈얼리티에 관한 저작은 주체/객체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에로틱한 것은 다양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격성의 조직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것은 욕망과 관련하여 남성과 여성에 귀속된 전통적인 역할들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n개의 성이라는 생각과 인격성의 수준 아래에 존속하는 욕망의 작동들은 거세를 통한 성차의 정신분석적인 심리-성애적 생산 너머로 움직여 간다. 그들은 보다 공공연한 페미니즘적 언급 중 하나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는 거세된 게 아니다, 그래서 너는 성교한 것이지”(A-O: 61).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석에서 거세에 부여된 붕심적 역할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의식이 거세를 발견하지않지만, 정신분석이 이 생각을 우리의 머릿속에 집어 넣기 때문에, 드러날 뿐이라고 믿는다(A-O: 60). 거세에 기반하는 것은 오로지 의인화된 섹슈얼리티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미시적 비인간적 성의 횡단섹슈얼리티에서는 그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않는다(A-O: 295). 거세는 정신분석에서 결핍의 코드화에 중심적인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욕망하는-기계들은 선행하는 전체에 속하지 않는 부분 대상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 어떤 것도 결여할 수 없다. 더 나아가 팔루스는 라캉에게서 그러한 것처럼 들뢰즈와 과타리의 욕망 개념을 통제하지 않는다. 이것은 심대하게 의미 깊은 것인데, 왜냐하면 팔루스의 상징적 힘은 가부장제의 보장과 사회체 내에서 여성이 종속적 위상에서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거세는 여성들과 그들의 신체 위에 최초로 코드화되고, 어떤 성적 상상을 이끌어 내는 바, 여기서 여성들은 어떤 부재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능동적이고 남성적인 섹슈얼리티와 형태론에 의해 채워져야할 수동적인 구멍으로 구축된다.

 

또한 들뢰즈와 과타리는 페미니즘과 퀴어이론에 중요한 방식으로, 섹슈얼리티가 재생산에 종속되는 프로이트 이론을 비판한다(A-O: 291). 비록 아동의 섹슈얼리티에 있어서 다양한 변태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관념이 들뢰즈와 과타리의 욕망 개념와 유사하다 해도, 프로이트에게 심리-성적 발전이란 어떤 특수한 산출물로 향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비-근친상간, 재생산적 이성애가 그것이다. 이것은 여성들이 가부장제 안에 예속되어 온, 그리고 가정 내에 제한되어 온 주요한 방식 중 하나인 재생산 기능에 여성을 묶어 세운다. 들뢰즈와 과타리에게 섹슈얼리티는 성차에 대한 규범적 전망이나 삽입에 기반한 이성애적 관계맺기를 통해 재통합되는 이성애적 2가 장치라는 상상된 충족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욕망의 과잉적 본성은 그것이 언제나 재생산 욕구 이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비인간적 성의 관점은 훨씬 더 많은 복잡한 인간적 교합성을 제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규범적인 이성애적 관계 자체를 요소들의 다양하고 과잉된 실천으로서 제안한다. 게다가 이것은 또한 어떤 하나의 성적 실천 또는 정체성 위에 보다 큰 가치를 기입함이 없이도 그렇게 한다. 이는 이성애적 특성이 욕망과 사랑에 있어서 특권적인 독점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하는 신체는 자주 성감대의 위상학으로 이해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공간적 은유들을 취하는데, 그들에게 사랑과 에로티시즘은 영토의 재-지도작성을 할 수 있게 하며, 따라서 신체는 새로운 방식을 알 수 있게 된다. 욕망과 공간 사이의 관계는 로랑 베를랑(Lauren Berlant)과 같은 이론가들에 의해 먼저 연구되었는데, 그녀는 욕망/사랑에서 성관계에 의해 활성화되는 지도작성에 대한 촉구’(2012: 15)에 관해 쓴다. 이 지도작성의 충동은 욕망의 관계가 그 궤도들과 복잡성들이 반복적으로 경험되고 재현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움직임이 우리가 신체세계위에서 좇아 갈 수 있는 흔적들을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다”(2012: 1415). 베를랑은 욕망이 성감대를 통해 개인의 신체위에 그리고 물리적 공간 안에 구획되는 규범적 방식에 흥미를 가진다(우리는 여기서 사적이고 공적인 공간이 각인되는 방식에 대해, 그리고 특정 공간이 특정한 성적 공중sexual public의 기원으로 구획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2012: 14).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이것은 정확히 욕망과 사랑에 의해 분열된 공간의 규범적 조직화다. 그들에게 전체 신체는 에로틱한 표면이 된다. 더 나아가 욕망은 삽입이나 남성적 오르가슴과 같은 특정 방향을 가지지 않으며, 성은 목적론적이지 않다. 이것은 성적 행위가 남성과 여성 간의 삽입 성교를 포함한다는 전통적인 생각을 넘어, 훨씬 더 큰 복잡성이 부여되는 것과 같다. 욕망하는-기계는 제한되고 고착된 신체에 관한 규범적 관념들을 찢어 놓는데, 왜냐하면 욕망이란 부분들과 조각들의 연결 안에서 작업하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은 새로운 신체들을 만들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신체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 들뢰즈과 과타리가 천의 고원에서 우리 각자는 서로 간에 너무나 많은 신체들을 통과해 간다고 쓸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인간적 성에 관한 전망이다(ATP: 40).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의 혁명에 관해 쓴다. “정말로 성 혁명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대상들, 목표들 또는 원천들이 아니라 오직 기계적 형식들이나 그것의 목록들과 관련된다”(AO: 366). 여기에는 욕망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정신분석 모델에 대한 그들의 이론적 거부와 1960년대의 보다 넓은 성 해방(페미니스트와 게이 해방 운동을 포함하는) 사이의 명백한 공명이 존재한다. 우리는 또한 자유연애운동과 같은 대항문화적 실천들과 이것의 담론적 평행성을 보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라보르드에서의 과타리가 행한 것과 사회적 관습들로부터 욕망을 해방시키기 위한 그것의 유토피아적 명법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욕망에 대한 생각을 특정 사회적 장의 단순한 생산물로 간주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욕망의 혁명과 그것의 급진적 본성에 관한 영속적인 타당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궁극적으로 쟁취된 비인간적 성은 꽃들, 새로운 대지와 뒤섞이며, 여기서 욕망은 그것의 분자적 요소들과 흐름들에 따라 기능하게 된다고 쓴다(A-O: 319). 여기서 욕망과 섹슈얼리티는 본성적으로 생산적이 된다. 이것은 성적 재생산이 문제적인 방식으로 삶과 후세 사람들에 이성애적 특성을 기입한 그 방식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것은 들뢰즈과 과타리의 작업이 일반적으로 지향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대지와 인민”(WIP?: 108)의 생산을 말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그들의 욕망 개념을 통해 어떤 급진적인 섹슈얼리티의 전망을 제공한다. 나는 심지어 에로틱한 것이 들뢰즈적인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정신분석과 결핍으로서의 욕망이 가진 상처받고 젠더화된 상호관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사상가다. 덧붙여 과타리와 그의 공동작업은 기존의 패턴들로부터 해방된 욕망을 위한 시야를 확보해 준다. 에로틱한 것은 탈주선으로 가득찬다. 즉 그것은 성에 대한 규정적이고 규범적인 생각들을 벗어나는 충동, 애착 그리고 실천들이다. 욕망은 사물/사태를 흘러 넘치고 탈조직화한다. 그것이 동일성이나 일관성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에게 욕망은 오히려 섹슈얼리티와 에로티시즘은 시간을 넘어 탄력적이고, 이동하고, 변이하며, 인간을 넘어 선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혁명적 잠재력을 유지한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욕망을 배치들 또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구성을 촉진하는 하나의 힘으로 다루는 것은 들뢰즈가 신체를 이론화하는 방식과 공명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들뢰즈와 과타리의 욕망 비판이 에로티시즘, 그리고 에로티시즘 그리고 특히 여성에게 있어서 결핍, 거세 그리고 재생산과 성관계의 상관관계를 거부하는 것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어떻게 유용한지 음미했다. 다음 장은 성, 젠더 그리고 섹슈얼리티와 관련하여 신체들의 특수성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 살펴볼 것이며, 들뢰즈의 저작이 성차에 있어서 지배적인 페미니즘 틀거리와 어떻게 교차하는지 볼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들뢰즈의 신체 자체에 관한 연구로 관심을 돌리고, 그가 신체에 관한 데카르트적 가치절하에 도전하면서 비-규범적 신체들을 이론화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잠재력을 제공한다는 것을 살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