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결과적으로 우리가 지금 사유하고자 하는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은 일상적 사태나 역사적 사건 둘 모두를 회피한다. 비록 그것이 어떤 순간에 일상적 사태와 역사적 사태 둘 모두로 변형된다 하더라도 그 급진적(radical, 뿌리까지 닿는)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사건의 철학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 사건은 그 본래적인 의미에서 세계나 삶과 유리되지는 않지만, 그것의 소박함과는 거리(distance)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거리’는 어떤 파열(rupture)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건의 본래면목이 일상이나 역사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그것과 단절되어 있다는 부정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절합(articulation)되어 있다는 실증성(적극성, positivité)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부정이 아니라 긍정(affirmation)이다.
이 실증성(적극성) 또는 긍정성으로서의 사건은 최근 신유물론(neo-materialisme)의 철학이 전개하는 바와 유사하다. 신유물론은 근대성의 기획이 ‘이원론적 대립’을 전제로 자신을 대립의 한 항으로 정립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페미니즘은 이 전제 하에 성들(sexes) 간의 대립 중 여성의 편에 서서 남성을 대립항으로 만든다(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긍정성으로서의 (탈근대) 페미니즘은 이들 이항대립적 요소들을 횡단(traversée)하면서, 성들을 ‘무한한 요소들’로 전개한다. 즉 성들을 무한한 주름들의 마루나 홈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제 성은 둘이 아니라 n개가 된다. 여기서 성과 젠더가 가진 이항대립적 요소, 즉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사회구성주의도 횡단된다. 왜냐하면 성의 생물학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는 관건적인 것이 아니라, 무수한 결정인자들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무수한 것들은 인종, 민족, 계급 등등이 교차하는 주름 간의 매듭들이다. 페미니즘이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는 담론이 되는 것은 여기서부터다. 이는 대립이 아니라 ‘거리’가 관계성의 본원적 형상을 띄기 때문에 가능해 지는 바다. 그리고 이 거리는 공간적인 거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건의 철학에서의 ‘거리’로 돌아와 보자. 페미니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은 사태나 역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럴 경우 사건은 사태와 역사가 겉보기에 가리키는 이항대립(적과 동지, 정당들의 대립, 피해자와 가해자)과 맞아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것이 현행화되기까지 그 실재의 가능근거를 밝히는 것이 철학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재우쳐 생각해 보면, 사건의 철학에서 말하는 ‘사유상’의 거리가 곧 공간적인 거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거리가 사유 안‘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거리는 사유와 공간, 그리고 시간을 모두 변수로 놓고 계산(logos)하는 것을 통해 드러나며, 결국에는 그 계산 자체가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상실하는 지점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 해석(interprétation)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해석’은 그래서 인간-주체의 사유방식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실존의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여기서 사유와 공간, 시간의 변수는 그것 각각이 서로에게 벡터적인 힘점으로 기능함으로써 삼항을 결정하는 사건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거리는 바로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며, 사유와 시간, 공간은 그것의 구성요건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구성요건이 현실화 또는 현행화되는 가능근거에 대한 탐구가 요구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차적인 특성을 가지는 ‘사건’이란 도대체 ‘철학’에 의해 탐구되지 않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그것이 합당하게 ‘사건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에 어떤 이의가 제기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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