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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_Poietikes_Demos

#1. 최근 금융자본 사태에 대해

by Nomadia 2020. 1. 30.

눈 먼 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를 횡단하는 금융자본의 시대에 소위 파생상품에 결정적인 정치적, 법적 제한을 가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2007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망한 회사로부터 이직한 브로커들은 여전히 성과급 잔치를 벌였지 않은가?(https://www.yna.co.kr/view/AKR20081026030800009 참조)

 

그런데 과연 이러한 사태를 단순한 모럴헤저드라고 보는 것은 정당한가? 그렇지 않다. 최근 벌어진 라임무역금융펀드사태는 금융자본의 움직임이 도덕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입증한다(http://www.hani.co.kr/arti/economy/finance/924747.html. 참조) 오히려 이것은 정말 날것 그대로의 욕망에 살을 붙이고 있다. 복잡한 금융공학적 계산 과정은 단지 화폐에 대한 욕망을 위한 수단이다. “이성이란 정념의 노예”(Hume)라는 말이 아주 정밀하게 맞아 떨어지는 일종의 아사리판이 금융시장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덕적인 단죄는 물론 사법적인 배상까지 마치거나 진행중인 기업들이 계속해서 파생상품을 만들어내고, 리스크에 리스크를 얹어 금융설계를 해댈 이유가 없다. 심지어 여기서는 파는 자(금융자본)와 사는 자(투자자) 모두 이른바 구조화에 대한 맹신으로 인해 어디에 뇌관이 숨어 있는지 알아챌려고 하지 않는다. ‘화폐획득의 욕망이 이성을 맹목의 방향으로 아주 정신없이 몰아치기 시작하면 뻔히 예상되거나 볼 수 있는 것도 고의로, 또는 미필적으로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 아담 스미스). 눈 먼 자들의 시장에서 이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금융당국이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경우는 이 금융당국의 고위급들이 대개는 퇴임후에 투자사의 고문으로 내정되어 있고, 한국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침내 공정해야할 관찰자의 이상은 자본주의, 그것도 금융자본주의에서는 넌센스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피해는 일반투자자에게 돌아온다. 그 중에서도 퇴직금조로 목돈을 쥐고 노후를 걱정하는 6,70대의 가장들이 더욱 피해를 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손실 투자자 중 60대 이상이 48.4%, 70대 이상도 21.3%에 달한다”(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2018) 노동능력이 없는 노년에 일정한 수준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브로커들이 안정적이라고 말한 펀드들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이들이다. 하지만 브로커들이 말한 안정성이란 금융설계 상의 구조전체가 아무런 기능부전 없이 돌아갈 때에나 가능하다. 하지만 많게는 수 십, 수 백의 금융상품이 얽히고 설킨 파생상품이 결국에는 거대한 파국을 불러올 가능성이 안정성보다 더 크다.

이렇게 보면, 사실상 금융위기란 자본 편에서는 오히려 기회라는 것이 실감난다. 결국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책임진다 하더라도 성과급으로 받은 돈은 페이퍼컴퍼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몇 년 감옥에서 썩는다고 그 짓을 다시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금융당국이 믿을만 한 것도 아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저 위기라는 것이 다중-인민들에게는 단순히 생활과정의 위기가 아니라, ‘삶의 위기와 직접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노후나 경제불안에 대한 위기감을 부추겨, 삶을 불안정하게 하고, 이를 투자로 꾀어내어 결국에는 더 큰 삶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심란한 페시미즘을 구사하는 것을 되도록 피하고 싶지만 이런 경우에는 어떤 혁명적 파괴외에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놔두면 아마도 한 기백년 정도는 금융자본이 해먹을 것이고, 그동안 자본주의 사슬의 맨 뒤쪽에서 노동하는 인민들의 고통은 나날이 가중될 것 분명하다. 금융자본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긴 하지만, 인민이 죽이지 않으면 죽지는 않는 병이다. 왜냐하면 세대를 거듭하면서 투자자들을 생길 것이고, 도덕 따위는 일찌감치 화폐의 오물을 뒤집어쓴 채 형체도 알 수 었으므로,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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