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바깥(dehors)이 곧 안쪽(dedans)인 것, 그것을 ‘주름’(pli)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심층(profond)과 표면(surface)이 한 평면(plan)에 존재하는 것을 ‘주름운동’(plissement)이라 한다. 주름과 주름운동은 철저히 ‘내재성’(immanence)에 기반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초재적 유출(ἀπόρροια)이나 참여(μέθεξις)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름과 주름운동은 존재론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자(헤라클레이토스), 가장 최근의 것(푸코와 들뢰즈)이기도 하다. 이 존재론의 계보는 주류의 존재론, 즉 ‘존재인 한에서의 존재’(ens inquantum ens)에 관한 탐구가 아니라, 비주류의 존재론, 즉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événement inquantum événement)에 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전자를 ‘왕립 존재론’ 또는 ‘존재의 존재론’이라 부를 수 있으며, 후자를 ‘인민의 존재론’ 또는 ‘사건의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 A가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존재의 존재론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반면 이 명제는 사건의 존재론에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사건의 존재론에서는 ‘여기 A가 존재하게 된다’가 의미의 기본 단위, 즉 의미소(semes)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이 변증법적인 대립관계를 가진다고 보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오히려 후자가 의미화 작용 안에서 전자를 포괄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인민의 존재론은 왕립 존재론을 포괄하며, 그것의 기반이자, 핵심적 의미소(semes nucleaires)다.
사건이 존재하면 존재가 현전하고, 사건이 사라지면 존재도 물러난다. 이를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차이’(Ontologische Differenz)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들뢰즈를 따라 이를 ‘차이화하는 반복’ 또는 ‘차이와 반복’이라고 부르거나, 니체를 따라 그저 ‘영원회귀’라고 부른다. 따라서 사건의 존재론, 인민의 존재론에서 ‘여기 A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우주론적 재-순환(re-volution) 또는 혁명(revolution)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주름(Un Pli)이라는 우발적 대사건(Événement) 안/밖에서 펼쳐지고(explicatio), 함축된다(implicat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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