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문의 소제목은 발췌자가 작성함.
장 피에르 베르낭 지음 / 김재홍 옮김 / 도서출판 길 / 2006
차례
옮긴이의 말
일러두기
서론
제1장 역사적 배경
제2장 뮈케네의 왕권
제3장 군주권의 위기
제4장 폴리스의 영적 우주
제5장 도시의 위기: 초기의 현인들
제6장 인간 세계(코스모스)의 구조
제7장 우주 발생론과 군주권의 신화
제8장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像)
결론
더 읽어야 할 책
찾아보기
서론
뮈케네 왕국의 붕괴와 헬라스 세계의 대변화-왕의 죽음.
[19]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자리매김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헬라스 역사에서의 이 같은 단절[호메로스 이전과 이후]의 문제인 것이다. 고전기 헬라스의 종교와 신화는, 특히 닐슨이 지적했다시피 명백하게 뮈케네의 과거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다른 영역에서 그 단절은 완벽했던 것처럼 보인다. 기원전 12세기에 쳐들어왔던 도리아 종족의 힘에 몰려 뮈케네 세력이 무참히 붕괴되었을 때, 처음에는 퓔로스 왕국이 무너지고, 이어서 뮈케네 왕국이 소멸되었던 대재난 가운데 사라졌던 것은 단지 왕조만이 아니었다. 어떤 유형의 왕권과 궁전 중심적 사회생활의 조직 형태가 영원히 파괴되었다. ‘신적인 왕’의 모습을 띤 인간이 헬라스 역사의 지평으로부터 사라져버렸다.
군주에서 시민으로, 신화에서 코스모스로.
[21]다시 말하여 헬라스인들은 그의 궁전에서 은밀하게 그 어떤 통제나 제한 없이 자신의 전능한 힘을 휘둘렀던 왕의 자리 대신에, 헬라스의 정치적 생활이 아고라의 밝은 대낮 아래에서 동등한 자로 규정되는 시민들 사이에서 공개적인 토론의 주제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시민들에게 국가란 공동의 사업이었다. 왕의 제의와 군주권의 신화와 연관되어 있었던 고대의 우주 발생론을 대신하여, 새로운 사고는 코스모스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간의 대칭과 평형, 동등성의 관계의 터전 위에 세계질서의 토대를 구축하고자 시도하였다.
제1장 역사적 배경
말의 사육
[26]다른 문화적 요인이 지중해 반대편 해안에 사는 사람들과의 유사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말[馬]이 트로아스 지역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6트로아이 문명[BC.1900년 경] 사람들과 더불어서였다. 호메로스에 의하여 고대의 구전 전통에서 차용된 공식적인 문체인 ‘풍부한 말들’이란 어구는 여전히 다르다니오스인들의 영광을 상기시킨다. 그 지역의 직물과 마찬가지로 트로이아 말들의 명성은, 심지어 아카이아인들이 프리아모스의 도시(제7a트로이아 문명)를 파괴했던 원정을 감행하기 이전에조차 그 지역을 점령했던 그 관심과 전혀 무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로써 트로이아 전쟁의 서사시적 전설이 시작되었다. 트로아스의 미뉘아인들과 마찬가지로 헬라스의 미뉘아인들은 말을 다루는[27]데 숙달해 있었고, 헬라스에 도착하기 이전에 그들이 거주했던 대초원 위에서 말을 사육해야만 했었다. 포세이돈 숭배의 전개 상황은 그 신이 바다의 신으로 등장하기 이전에, 거기에는 말의 포세이돈, 즉 히포스(Hippos) 혹은 히피오스(Hippios)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제2장 뮈케네의 왕권
뮈케네 왕권의 특징: 1. 전사귀족에 의해 지탱된 왕권. 2. 다모스의 독립적 성격. 3. 크레타인들에 의한 경제적 행정적 체제의 도입.
[51]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뮈케네 왕권의 특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일반적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겠다.
1. 첫째는 그들의 상무적(尙武的) 특징이다. anax[왕]는 그의 권위에 복종해야만 하나 왕국의 사회적 구조와 군사적인 조직 내에서 특권 계급을 형성했던 전차를 모는 전사, 즉 독자적 지위와 스스로의 생활 방식을 누리고 있었던 전사 귀족에 의하여 지탱되었다.
2. 지방 공동체들은 궁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궁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았다. 만일 왕권의 권위가 폐기되었더라면, 다모스는 동일한 방식으로 그 토지를 지속적으로 경작하였을 것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순수한 촌락 공동체 구조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안에서는 물품과 공물의 인도 그리고 [52]다소간의 강제적인 조달 방식을 통하여 그 지역의 왕들과 유력자(부자)들이 부양되었을 것이다.
3. 부기와 등록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궁전의 행정요원을 통해서 경제와 사회 생활을 엄격히 통제하던 궁전 조직은 외부에서 빌려온 (...) 서기(書記)의 사용과 기록의 유지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뮈케네 왕조들에 복무하기 위해서 들어왔던 크레타 출신의 서기들은 그들의 새로운 지배자들의 말투(선상B문자)에다가 크노소스 궁전에서 사용하는 글자체(선상A문자)를 채택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궁전 중심 조직 체제의 행정적 방법을 헬라스 본토에 도입하는 수단을 소개하였다. (...) 크레타 출신으로 이루어진 서기들의 전문화된 집단은 뮈케네 왕들에게 그들의 궁전을 통치하기 위한 기술뿐만 아니라 그들을 보좌하는 참모 체제를 갖추게 하였다.
중앙집권화와 제국화
[53][궁전 중심 체제는] 광대한 영토에 걸쳐 엄격한 통제를 확립할 수 있는 국가를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그 체제는 그 나라 전체의 부를 개발하였고, 그 부를 군주의 손아귀에 넣어 축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 체제는 중요한 자원과 군사적 힘을 중앙집권적 통제 밑에 집중시켰다. 따라서 그 체제는 헬라스인들이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서 혹은 헬라스 본토에 부족한 금속과 다른 생산품을 찾아 떠나갔던 해외로의 위대한 모험을 감행할 수 있게끔 하였다.
수공업의 발달
[53]궁전중심 경제체제는 지중해를 통해서 뻗어나간 뮈케네의 확장과 농경생활에 비해서 이미 고도로 전문화되었던 헬라스 자체 내에서의 수공업의 발전과 밀접하게 관련 맺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수공업은 오리엔트의 모델을 좇아 길드로 조직되었다.
뮈케네의 멸망과 호메로스 시대의 도래: 해상항로의 페쇄, 농업경제로의 퇴행, anax의 소멸과 basileus의 부상, 기술(문자)의 공공성 부상
[53]이 모든 것은 헬라스와 오리엔트 지역의 국가 간의 유대를 여러 세기 동안 단절시켰던 도리아인의 침입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뮈케네의 멸망과 더불어 해양은 교통의 통로이기를 그치고 그만 장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내부로 돌아섬으로써 고립된 헬라스의 본토는 순전히 농업경제로 전환되고 말았다. 호메로스의 세계는 더 이상 뮈케네 세계의 노동분화와 비교할 만한 노동분화에는 친숙하지 못한 세계였으며, 또한 그렇게 광대한 규모의 노예 노동력의 사용에는 친숙하지 못한 세계였다. 호메로스의 세계는 궁전의 변두리에 모여들었거나 혹은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촌락에 정착했던 ‘도구 인간들’의 다양한 길드에 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뮈케네 왕국의 붕괴와 더불어 궁전 중심 체제는 완전히 파괴되어 결코 다시[54]는 소생하지 못했다. anax란 용어는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적 어휘의 영역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역적인 수령 정도의 의미만을 지니는 바실레우스라는 말로 대체되고 말았다. 복수적 표현으로 사용되는 바실레우스라는 말은 그 자신에게 모든 형태의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한 사람을 지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집단으로서 사회적 계층 구조상에서 볼 때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는 귀족들의 범주(une catégorie de Grands)를 지시하는 말에 불과하다.
(...) 기술(記述 혹은 글자)에 대한 사회적, 심리적 의미 또한 바뀌어지고 말았다. 아니, 완전히 뒤바뀌었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의 목적은 더 이상 궁전 내에서 왕의 개인적 사용을 위한 문서 보관소의 제작물이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공공의 목적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회적, 정치적 생활의 여러 측면을 모든 사람의 시야에 똑같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했던 것이다.
3장 군주권의 위기
anax의 소멸과 데모스, 귀족간의 대립
[57]anax의 소멸은, anax의 힘에 의하여 균형 잡혀졌던 대립하는 두 개의 사회적 세력들을 나란히 남겨 놓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즉, 서로 맞서는 세력 중의 하나는 촌락공동체[데모스]이고, 다른 하나는 전사 귀족인데 이 중 가장 중요한 가문이 게노스(계보, 혈통)의 특권으로서 종교적 독점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 대립되는 힘들 간의 균형과 조정의 추구는 혼란한 시기에 접어들어 인간적 ‘지혜’의 초기 형식에 해당하는 도덕적 사고와 정치적 사변을 생겨나게 하였다. 이 소피아(지혜)는 기원적 7세기의 여명기에 맞춰 일찌감치 나타났다. 이 소피아는 전설적인 찬연한 광채로 뒤덮인 채 등장했던 다소 기이할 만큼 유별난 인물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 후 헬라스인들은 계속해서 그들을 최초의 참된 현자로서 존경해왔다. 소피아는 퓌시스(자연)의 우주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와 관련 맺고 있었다. 다시 말해 소피아는 인간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 및 그 자체에 반하여 인간 세계를 분리시켰던 대[58]립적인 힘들과 관련 맺고 있었으며, 여러 수단들의 상층에서 도시의 인간 질서가 생겨나도록 그것들이 조화될 수 있게 하고, 통합시킬 수 있는 수단들과 관련 맺고 있었다. 이 초기의 지혜는 혹독한 시련을 거친 오랜 역사의 결실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많은 요인들이 결부되어 있었지만, 지혜는 애초부터 다른 행로를 추구하기 위해서 군주에 대한 뮈케네적 관념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소피아의 등장: 대립적인 힘들의 조정에 관한 지혜.
바실레우스의 권한
[58][바실레우스라는] 각 지역의 왕들이 (...) 오래된 조직을 존속시키고 있었다고 가정할지라도, 그 우월[59]성이라는 것은 사실상 『일리아스』에서 보여지고 있는 바처럼 아가멤논과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었던 왕들과, 그리고 그의 지휘 밑에 함께 연합해서 원정이 참가하고 있는 동안에만 그에게 종속되었던 왕들에 대하여 아가멤논이 행사하였던 우월성과 비슷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아르케의 성격 변화-사제적 기능으로의 축소
[60]일단 아르케(통치권)의 개념이 바실레이아로부터 분리되자마자, 그것은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되고 마침내 사실상 정치적 현실의 영역을 결정하게 되었다. (...) 선거제도는 새로운 권력개념을 함축하고 있었다. 아르케는 대결과 토론을 전제하는 선택을 통한 인간의 결정에 따라서 매년 위임되었다. (...) [61]바실레이아는 더 이상 그 권력이 모든 차원에서 드러나는 준-신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책임은 특정한 사제의 기능으로 한정되었다.
anax의 소멸과 아곤의 전면화-전쟁, 종교, 정치의 장에서
[65]초인적인 힘에 의하여 왕국을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을 통합하고 질서를 부여했던 anax의 소멸과 더불어 새로운 문제가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대립되는 집단들 간의 불화와 서로 맞서는 특권과 기능의 충돌로부터 어떻게 질서가 생겨났는가? (...) 어떻게 사회적인 차원에서 다자로부터 일자가, 일자로부터 다자가 생겨날 수 있었는가?
투쟁과 결합의 정신인 에리스와 필리아, 즉 대립적이면서 보족적인 이 두 개의 신적 실재물들은 고대의 왕권 시대에 뒤따랐던 귀족 세계에서 나타난 사회의 두 지주를 표시한다. 투쟁, 경쟁 그리고 대결의 가치에 대한 고양은 사회적 통합과 결속의 요구와 더불어 단일 사회에 속한다는 소속감과 연관되어 있다. 고귀한 신분의 가계[가문, 게네]에 활력을 불어넣는 경쟁의 정신[아곤]은 모든 영역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전쟁에서 드러났다. (...) [66]이와 동일한 경쟁성이 종교적 영역에서도 발견된다. 각 가문은 특정한 제의에 대한 권리, 종교 형식, 신비한 역대기 및 특별히 효험 있는 신적 상징물들의 소유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가문에 권력과 권위의 자격을 부여하였다. (...)
실제로 정치는 아곤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즉 정치는 웅변적 경쟁, 쟁론적 형태를 띠고 있다. 바로 그 경쟁의 무대가 공공의 광장인 아고라인데, 시장이기 이전에는 회합의 장소였다.
성벽과 폴리스의 탄생
[68]이제 도시 자체는 도시를 구성하는 인간 집단 전체를 보호하고, 경계를 그어주는 성벽에 의하여 둘러싸이게 되었다. 과거에 왕의 성채가 세워졌던 장소-사적이면서 특권을 지닌 자가 거주하던 곳- 위에 도시는 공중의 예배에 개방되어 있는 사원을 세웠다. 왕궁의 옛 터전 위에 이제부터 그 신들에게 바쳐지게 된 아크로폴리스를 축으로 하여, 마치 세속적인 차원에서 아크로폴리스가 아고라의 광활한 공간 가운데 그 적절한 장소를 발견했던 것처럼, 공동체 그 자체는 이제 신성한 지평 위에서 입안되었다. 사실상 명확하게 규정된 이러한 도시의 골격이라는 것은 정신적 공간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영적인 지평을 열었다. 일단 도시가 공공의 영역을 중심으로 세워지게 되었을 때, 도시는 그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이미 폴리스였던 것이다.
제4장 폴리스의 영적 우주
종교언어에서 연설로
[69]폴리스 체제는 무엇보다도 다른 모든 권력의 도구를 넘어서는 연설에 대한 발군의 탁월성을 함축하고 있다. (...) [70] -헬라스인들은 이 힘으로 설득력을 표상하는[peitō; 설득의 여신]라는 신성을 만들어내었다- (...) 연설은 더 이상 제의적인 말이나 당연히 수긍해야만 하는 종교 언어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활발한 토론이고 논의이며 논쟁이었다. (...) 그의 적대자에 대한 한 연사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연설의 설득력을 견주어 보는 순수한 인간적인 선택이었다.
공개성의 강화
[71]폴리스의 두 번째 특징은 사회적 생활의 가장 중요한 측면들에 주어졌던 완전한 공개성(publicité, 드러냄)이었다. 심지어 우리는 폴리스가 단지 공공의 영역이 부상하였던 범위에서만, 다시 말하여 그 용어에 대해서 서로 다르긴 하지만 상호의존적 의미를 가지는 두 의미에서만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적인 관심사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공통의 관심을 지니고 있는 영역과 은밀한 절차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공개적 절차를 거쳐 도달하던 공개된 소송 절차가 그것이다. 공개성에 대한 이 같은 끈질긴 요구는, 원래 아르케를 보유하던 바실레우스 혹은 게네의 배타적 특권이었던 지휘 감독권과 소송 절차 및 지식 등을 집단에 의한 점증적인 점유화로 나아가게 했으며, 또한 모든 사람의 시야 가운데로 그것들의 노정을 이끌어갔다. (...) 지식, 도덕적 규범 그리고 정신적 기술들이 공통 문화의 요소가 되면서, 그것들 자체는 공중의 여론(공공의 장소)에 내맡겨지게 됨으로써 이제 비판과 논쟁에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다. (...) 그것들은 더 이상 개인적이거나 혹은 종교적 위신을 지닌 권위에 따를 것을 강요받을 수 없었다. 그것들은 일종의 변증술적 절차에 의하여 그 정당성을 입증해야만 했다.
문자화된 디케
[74]하늘에서의 디케는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군주적 신성이었다. 하지만 기록된 글자에 의하여 공중에게 완전히 드러나게 된 결과로서 디케는-여전히 이상적인 가치로서 간주되었으면서도-본래적인 인간 차원으로 구체화될 수 있었다. 이제 디케는 법으로서, 동시에 모든 것에 공통되고 모든 것보다 우월한 원리로서, 논의에 따르고 법령에 의하여 수정되어야 하는 합리적 기준으로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신성한 것으로 이해되는 질서를 표현하였다.
문자화된 진리
[76]현인들의 진리도 근본적인 것을 드러내고, 또 인간에게 공통하는 것(인간성)을 초월하는 높은 단계의 실재를 드러낸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저술에 위임됨으로써 진리는 폐쇄적인 신앙집단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전 도시의 응시 앞에서 백일하에 펼쳐져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저술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메시지가 정당하게 모든 사람이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고 승인하기를 바라면서, 정치적인 토론처럼 그것을 모든 사람의 판단에 내맡기는 데 동의하였다.
합리주의의 한계
[79]도시의 제도를 관장하는 정치적 ‘합리주의’는 분명히 예전의 정부의 종교적 통치 행위와는 극명하게 대조되긴 하지만, 아직도 근본적으로 종교적 통치 행위를 폐기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지혜의 공공적 변형/ 철학의 위치-제의와 논쟁 사이, 소학파와 정치 사이.
[82]지혜는 (...) 이제 그 신비스러움은 말로써 분명하게 형식화되었다. 그러나 대중은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지혜는 그 신비스러운 면을 들춰내서 공공의 거리로 이끌어내었다. 지혜가 그것을 검토하고 샅샅이 조사했지만, 여전히 그것에서 그 신비스러움이 모조리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소피아 혹은 필로소피아[지혜에 대한 사랑]는 금지된 계시들로의 접근을 인도했던 전통적 입회제의를 다른 혹독한 시험(시련)으로 대체하였다. 즉 그 시험이라는 것은 토론과 논쟁의 방법 혹은 수학과 같은 새로운 정신적인 도구들과 병행하여, 고대 점술의 활용과 (정신의) 집중, 황홀경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목표로 하는 영적인 훈련을 유지하던 삶의 규칙, 훈련[아스케시스]의 길, 탐구의 행로였다.
따라서 탄생에서부터 철학 그 자체는 모호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철학은 그 문제제기 방식과 방법에서 신비한 것으로의 입회 제의와 아고라에서의 논쟁, 이 두 가지 것과 관련 맺고 있었다. 철학은 예배 의식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신비스러움과 정치적 활동을 특징짓는 공공의 논변 사이에 맴돌고 있었다. 그 환경(장소)과 그 계기(시점) 그리고 그 경향에 의존하던 철학은, 기원전 6세기에 대희랍국의 피타고라스 [83]학파와 같이 순전히 비교적인 교설을 공개적으로 저술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폐쇄된 형제애로 조직화될 수 있었거나, 아니면 소피스트 운동과 같이 도시에서의 권력의 행사를 위한 준비 수단으로서 제기되었던 공공의 생활과 결부되고 그리고 그 대가로 현금을 지불했던 배움을 통하여 어느 시민에게나 자유롭게 제공되었던 공공의 생활과 완전하게 통합될 수 있었다. 아마도 헬라스의 철학은 그 기원의 모호[84]성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될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철학자는 지속적으로 그 두 태도 사이에 머물렀을 것이고, 두 개의 상충하는 유혹 사이에서 머뭇거렸을 것이다. 때때로 철학자는 (...)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왕의 행세를 했을 것이다. 또 경우에 따라 철학자는 세상에서 물러나 순전히 사적인 지혜에 몰두했을 것이다.
이소노미아의 전사(前史)-귀족적 평등주의의 흔적
[85]사회생활의 하루하루 일상적인 업무 속에서 시민들 간에 분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모든 사안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차원에서 시민들은 법이 권력의 균형이고 또 그 규범은 평등이었던 한 체계 내에서 자신을 상화 교환 가능한 단위(개체)로서 간주하였다.
기원전 6세기에 인간 세계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정확하게 이소노미아의 개념-즉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에 모든 시민들의 동등한 참여-에서 표현되었다. 하지만 그 개념이 충분히 성숙된 민주주의적 의미를 획득하기 이전에, 그리고 클레이스테네스의 정치 개혁과 같은 제도적 개혁을 불러일으키기 앞서, 이소노미아의 이상은 폴리스의 바로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공동체적 동경(열망)을 전하거나 확장할 수 있었다. 귀족 집단 내에서 이소노미아와 이소크라티아(동등권)라는 명사들이 한 사람의 절대 권력(모나르키아 혹은 티라니스)과 대조되었던 과두정치 제도를 정의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약간의 증거가 있다. 이러한 정치제도에서 아르케가 귀속하는 엘리트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 사이에 동등하게 분산되었다. 이소노미아에 대한 요[86]구가 기원전 6세기 말엽에 이러한 힘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요구가 모든 시민적 관직으로 손쉽게 접근하기 위한 데모스의 요구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소노미아란 말이 예전의 오래된 평등주의적 전통에 뿌리 박혀 있으며, 심지어 히페이스[말 소유 계급들]의 귀족정에 대한 심리적 태도에 부응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의심할 나위 없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밀집방진형의 출현과 에리스의 쇠퇴, 그리고 필리아의 부상.
[86]중장비 보병의 출현과 방진형(方陣形)의 전술에 따른 밀집 대형[87]의 용병술은 히페이스의 군사적 특권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자신의 중장비 용구의 비용을 지불할 수 있었던 모든 사람들-가령 아테네에서의 제우기타이와 같은 데모스를 구성하던 자유로운 소지주 계급들-에게는 말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들과 같은 계급 수준이 할당되었다. 또한 전에는 귀족적 특권이었던 군사적 기능의 민주화는 전사의 가치관에 대한 완전한 개조를 수반하였다. 호메로스적 영웅 (...)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일대일 전투에서의 개인적인 공적이었고 빛나는 전공이었다. (...) 하지만 중장비병은 더 이상 일대일로 맞부딪치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 따라서 군인의 덕[88]은 더 이상 티모스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지 않았다. 이제 군인의 덕은 완전한 극기요, 공동의 훈련에 자신을 희생하는 끊임없는 분투노력이요, 전체적으로 대형의 훈련에 동요를 가져올 위험이 있는 본능적인 욕구들을 절제하기에 필요한 냉정성, 즉 소프로쉬네로 구성되었다. (...) 즉 에리스는 공동체의 정신인 필리아에 그 자리를 넘겨 주어야 했다. 즉 개인의 힘은 집단의 법칙에 양도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휘브리스에 대한 비난
[90]비단 전쟁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생활의 차원에서도 명백한 심리적인 태도의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 태도는 폴리스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표시해 주고 있다. (...) 이로써 부의 과시, 값비싼 의복, 장려한 장례 의식, 애도하는 경우에도 지나친 비탄을 드러내는 행위, 여성들의 지나친 현란스러움 혹은 젊은 귀족들의 지나치게 자만에 찬 불손한 행위 등은 군사적인 광포함을 드러내는 것과 전투에서 순전히 개인적 전공만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범주의 행위로 간주되어 지나침과 휘브리스[오만]로서 비난받았다.
스파르타-전쟁을 위한 법과 질서.
[93]스파르타 국가제도 속에서 사회는 더 이상 뮈케네 왕국에서처럼 왕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군사적 훈련과 그 훈련이 수반하는 여러 시험과 입회 제의를 감수함으로써 클레로스[분급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쉬스시티아[공동 식량 배급소, 공동 식사 제도]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지위로 상승되었다. 바로 그 지위가 도시를 규정했다. 이로써 사회적 [94]질서는 더 이상 군주권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 실제로 아르케는 배타적으로 법에 귀속되었다. (...)
새로운 스파르타가 이와 같이 법과 질서의 우월성을 인정했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는 목적은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 호모이오이는 아고라의 논쟁에서 보다 더 철저하게 전쟁을 위한 훈련을 받게 되었다. 스파르타에 있어서 연설은 결코 다른 여러 도시 국가에서처럼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없었으며, 또한 논의, 논쟁, 반박의 형식을 갖출 수도 없었다. 법의 도구로서의 설득의 힘인 페이토 대신에 라케다이모니아인들은 모든 시민들을 복종하게 만드는 두려움, 즉 포보스의 힘을 찬양하였다. (...) 그들에게 있어서 연설은 여전히 토론을 거치지 않은 채 복종해야만 하고 (...) [95]도시는 질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법의 지배 아레에서 균형 잡히게 되어 조화로운 우주(코스모스)가 되었다.
제5장 도시의 위기: 초기의 현인들
오리엔트와의 재접촉과 해상무역의 확대
[99]경제적 변화는 문화적 차원에서 아주 결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과 연결되어 있다. 즉 그것은 뮈케네 왕국의 붕괴와 더불어 단절되었던 오리엔트와의 교섭의 재개와 발전이었다. 헬라스 본토와 오리엔트의 관계는 페니키아 선원들을 통하여 기원전 8세기에 다시 형성되었다. 이오니아 해안의 헬라스인들은 아나톨리아 해안의 후배지(後背地)와, 특히 뤼디아와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원적 7세기 후반 마지막 25년간에 걸쳐서 유럽과 아시아 도시들의 경계는 대담하리만치 외부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 당시 해상 무역은 교통의 통로로서 그 역할을 다시 담당하지 시작했던 동부 지중해를 넘어 확장되었다. 무역의 범위는 아프라키와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서쪽으로 확대되었고, 동쪽으로는 흑해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칼로스 카가토스의 등장
[101]기원전 7세기에 사치와 우아 그리고 풍요로 이끌었던 헬라스 귀족의 취향과 삶의 방식은 오리엔트 세계에서 발견되는 하브로쉬네, 즉 장엄함과 화려함의 이상에 의하여 고무되었다. 그때 이래로 부의 과시가 게네의 위신 중의 한 요소가 되었다. 군사적 용맹성 및 종교적 자격들과 더불어, 부는 우월성을 보여주는 수단이었고, 적대자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수단이었다. (...) 새로운 인물들이 고귀한 귀족 계급 중에서 부상하였다. (...) 해상 무역에 종사했던 좋은 가문 출신인 칼로스 카가토스(kalos kagathos)가 바로 그들이다.
토지 집중과 데모스의 몰락
[102]부유하게 된 귀족은 촌락공동체를 희생시켜 그의 재산을 에스카티에[eschathiē; 변경의 땅]에까지 확대하였다. (...) 극소수의 손아귀에 토지 재산이 집중되는 것과 ‘여섯 번째 계급’에 위치하는 자유롭지 못했던 시민, 즉 hektēmoriori의 지위로 격하되었던 데모스 대다수의 굴종이란 상황은 알카익 시기(古拙期)의 중요한 이슈인 토지 (균등 분할의) 문제를 야기했다.
사회적 휘브리스의 확대와 디케의 역할
[103]이처럼 (...) 휘브리스로 인하여 (...) 사회적 관계는 폭력, 간계, 독재와 부정의로 특징지어졌다. 새로운 개혁작업이 여러 차원에서 일어났다. 개혁은 종교적, 법률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차원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 지속적인 목적은 귀족들을 그 제약 조건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일[104]반적 규칙에 종속시킴으로써 게네[귀족가문]의 뒤나미스[힘]를 제어하고, 그들의 야망과 기도, 그리고 권력 의지를 억제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 높은 기준이란, 신적 능력을 소유하는 현인에 의하여 불러일으켜지고 또 법 제정자에 의하여 공표되었으며, 비록 참주들이 힘으로 그것을 강요함으로써 왜곡시켰긴 해도 이따금씩 그들을 고무할 수 있었던 것인 바로 디케[정의]였던 것이다. 디케는 시민들 사이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형평성을 확립하고, 사회조직을 구성하는 개인과 파벌 간의 의무, 영예 그리고 권력의 공평한 분배, 즉 에우노미아의 보장을 확립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디케는 상호 대립되는 요소들을 화해시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요소들을 단일한 공동체, 즉 하나의 통합된 도시로 만들었던 것이다.
제6장 인간세계(코스모스)의 구조
귀족적 아레테(안드레이아)의 소멸과 새로운 아레테(아브로쉬네, 아스케시스)의 등장
[116]이 시대의 귀족적 덕은 좋은 혈통을 이어받은 출생과 연관된 자연적 특성이었고, 전쟁에서의 용기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그 덕은 풍요한 생활의 방식이었다. 종교적 집단 내에서 아레테는 그 전통적인 호전적 측면을 발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와 정반대로 신중한 행위와 자세와 같은 하브로쉬네[품위, 우아함]의 이상으로 표상된 모든 것에서 정의되었다. 이제 덕은 혹독하고 엄격한 고행, 즉 멜레테에 대한 오랜 기간의 끈질긴 아스케시스[훈련]의 결실로서 간주되었다. 덕은 헤도네, 즉 쾌락의 유혹으로부터 도피하여 포노스에, 다시 말해 분투노력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생활을 선택하기 위한 방심 없는 절제, 백절불굴의 채비인 에피멜레이아를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17]부는 모든 귀족적 가치들, 즉 혼인, 영예, 특권, 평판, 권력 등을 대체했다. 부는 그 모든 가치를 넘어서 승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돈이었고, 인간을 형성하는 것도 돈이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권력(힘)들’과 달리 부는 그 어떤 제한도 인정하지 않는다. 부 안에서는 그 어떤 한계도 정해질 수 없었으며, 부를 제한하거나 혹은 완벽하게 성취할 수도 없었다. 부의 본질은 과도함이었다. 부는 또한 이 세상에서의 휘브리스[오만]에 의하여 형성된 형식이었다. (...)
[118]소프로쉬네[절제]에 대한 관념은 부자의 휘브리스와 대조적으로 형성되었다. 그것은 적절성, 적절한 몫, 공정한 제한, 중용으로 이루어졌다. ‘무엇이든 지나치지 말라’는 잠언은 새로운 지혜의 모토였다. 적절함과 중용에 대한 이 같은 가치부여는 ‘중산 계급자’(부르주아지)의 측면에서 아레테에 대한 헬라스인의 관념에 영향을 미쳤다. 소유한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소수의 부자와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못해서 모든 것을 얻고자 하는 다수의 사람 이 양극단 사이에
부의 휘브리스와 호이 메소이의 소프로쉬네
[119]균형을 이룸으로써 도시 내에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중산계급이었다. 호이 메소이(hoi mesoi)라고 불리던 사람들은 빈곤과 풍요의 중간지대에 위치에 서 있는 메소이[중간 계급들]는, 각 파벌이 모든 아르케를 홀로 소유해야만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도시를 분열시켰던 두 파벌들 사이의 균형을 확립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솔론-노모스를 통해 권력과 정의를 연계시키다.
[120]엔 메소(en mesō; 중심에, 대중에)에 남아 있어야만 하는 아르케를 어떻게 그[솔론]는 자신의 손안에, 그것도 한 사람의 손아귀에 휘어잡을 수 있었는가? 솔론은 자신이 성취했던 일을 법의 힘(크라테이 노모)을 통하여, 권력을 정의와 결부시킴으로써(비아 카이 디케; bian kai dikēn) 공동체의 이름으로 이룩하였다. (...) 디케와의 그 관계 때문에 노모스는 여전히 종교적 함축을 지니고 있었다. 노모스는 또한 무엇보다도 분규를 종식시키기 위한 합리적 시도를 법제화하고, 반목하는 [121]사회적 힘들을 균형잡히게 하고, 대립하는 인간의 태도들을 화해시키기 위한 실천적인 노력 가운데에서 표출되었다.
소프로쉬네의 변천(세속화)-광기의 진정에서 이성으로 그리고 정치적 절제로.
[121]솔론과 더불어 디케와 소프로쉬네는 하늘에서 내려와 아고라에 그 [122]거주지를 마련하였다. 다시 말하여 그것들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헬라스인들은 소프로쉬네와 디케도 반드시 논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다시는 결코 억제하지 않았다.
도덕적 사고의 이와 같은 현저한 세속화를 통해서 소프로쉬네와 같은 덕의 관념은 새로워지고 명료하게 될 수 있었다. 호메로스에게서 소프로쉬네는 양식(이성; bon sense)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 그러나 현인들에 의하여 정치적인 맥락에서 재해석되기 이전에 그 관념은 어떤 종교적 집단 내에서 가다듬어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 집단에서 소프로쉬네는 대변동과 마법적인 홀림의 시기가 지난 이후에 오는 평정, 안정 그리고 자기 통제의 상태로 복귀함을 지시하였다. (...) 테베에 있는 헤라클레스의 성지에서 파우사니아스는 자신의 아이들을 살육하고 암피트리온을 죽이려고 마이나[광기]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날뛰는 격노한 [123]그 영웅의 정수리에 아테나가 던졌다고 전해지는 돌을 보았다. 그를 꼼짝 못하게 하고 진정시켰던 그 돌은 소프로니스테르(sōphronistēr)라고 불린다.
소프로쉬네의 사회적 배경-솔론의 법적 평등
[129]소프로쉬네의 이상을 바탕에 깔고 있는 사회적 실재들을 이해하기 [130]위해서는, 그리고 메트리온[중용], 피스티스[신뢰], 호모노이아[동의], 에우노미아[법과 질서]의 개념들이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기 위해 어떻게 서로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솔론의 개혁들과 같은 그러한 제도적 개혁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러한 개혁들은 이미 질서에 대한 새로운 개념에 대한 토대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타났었던 평등-이소테스-을 위한 하나의 장소를 마련하였다. 이소테스 없이는 필리아[친애]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도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솔론은 “평등한 사람은 싸움을 시작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계급적 평등성이었다. 달리 말해서, 헬라스인들이 늘 말해왔던 것처럼 그것은 산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하학적인 평등이었다. 그 본질적 이상은 실제적인 ‘비율’이었다. 도시는 이제 유기적으로 조직된 전체, 즉 구성적 요소들 각각이 적절한 위치에 자리매김하고, 그 자신의 평등에 따른 마땅한 권리인 권력의 몫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면, 조화롭게 되는 코스모스를 형성할 수 있었다. (...) 이제는 확립된 법[131]이 모든 시민에게 동일하다는 사실과 모든 사람이 법정과 민회에 참여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 평등성이 놓여 있었다. 여태까지 사회적 관계를 지배했던 것은 부유한 자의 ‘자부심’, ‘무법적인 정신’이었다. 솔론은 그것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던 최초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이 그것에 의하여 ‘설득되는’ 것을 그냥 방관하지 않았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소테스-귀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공통적 기반
[134]헬라스 세계에 있어서 크게 대립하는 두 경향 간의 논쟁에서-하나는 그 기조에 있어서 귀족적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에 있어서 민주적인데- 양자가 다 같이 자신들의 입장을 동일한 발판 위에 세워두고 있었고 이소테스, 즉 평등으로의 동일한 호소를 하고 있었다는 점은 아주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귀족적인 경향은 코스모스가 온갖 부분들로 구성되는 것처럼, 솔론적인 에우노미아의 견지에서 도시가 법에 의한 계급질서로 유지되라라고 생각하였다. 호모노이아는 2/1, 3/2, 4/3 관계로 된 음악적 양태에 기초해 조화를 이루는 화성과 비슷하다. 적절성은 보다 강한 자가 자기 분에 넘치지 않도록 보장함으로써 본래적으로 불평등한 힘들을 조화롭게 할 수 있다. 에우노미아의 조화는 개인의 경우에서처럼 사회적 조직 내에서도 선악 간의 양극성, 즉 보다 나은 것이 열등한 것에 대한 지배를 확실하게 할 필요성과 같은 일종의 이원론에 대한 인식을 함축한다.
세 당파-페디아코이(평원파), 파라리오이(해안파), 디아크리오이(고산파)
[137]솔론의 집정관 시대로부터 참주 시대를 거쳐 마침내 페이시스트라[138]토스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클레이스테네스에 앞서던 시기를 통하여 아테네의 역사는 세 당파 사이의 갈등으로 점철되어왔다. (...)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종족적 유대와 지역적 연합을 나타냈다. 이 세 당파 각각은 그 이름을 아티카가 분리되었던 세 지역 중의 하나로부터 취하였다. 페디아코이는 페디온의 사람, 즉 평원의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도시의 거주자들이었고,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비옥한 토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파라리오이는 해안을 따라 살고 있었다. 그리고 디아크리오이는 고원에 살던 사람, 내지(內地, 오지)에 살던 사람으로서 사실상 도시의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변경 지역 마을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 페디아코이는 에우파트리다이[세습귀족]로서의 특권과 토지 소유자로서의 이익을 수호하는 귀족들이었다. 파라리오이는 메소이[중간계급]의 새로운 사회적 계층을 형성하였는데, 그들은 자신 이외의 양 세력 중 어느 한 세력이 승리하는 것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디아크리오이는 테테스(thētes)-소농민, 벌목꾼, 숯 굽는 사람들-의 주민들과 더불어 평민당을 구성하였다. 이들 중의 다수[139]는 부족적인 구조 내에서 어떤 위치도 점하고 있지 못했으며, 아직 귀족적인 도시의 골격으로 동화되지도 못했다. 이 세 당파들은 그들이 봉사하던 대귀족 가문의 가신들(예속자들)로서 등장하였으며, 그들 간의 대결의식이 정치적 현장을 지배하였다.
아테네의 민주정-4백인 평의회와 왕권의 계급적 분산과 순환-이소노미아의 행정적, 사법적 실재-코스모스의 구현
[140]태음력은 지속적으로 종교적 생활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행정력은 36일 혹은 37일로 된 10 개의 기간으로 나뉘었다. 각 기간은 10부족 가운데 하나에 대응한다. 4백인 평의회의 구성원은 각각의 부족에서 50명씩 선출하여 5백 명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그래서 그해의 10개 기간 동안에 각 부족들은 번갈아 가면서 그 의회의 상임위원을 맡았다. 클레이스테네스와 더불[141]어 평등주의적 이상은 이소노미아에 대한 추상적 개념을 표명함과 동시에 직접적으로 정치적 실재 세계와 연결되었다. 그 개념은 제도를 재개혁할 수 있도록 고무하였다. 이로써 사회적 관계의 세계는 시민들이 스스로 ‘동일한 자’라고 선언하고, 상호의 동등성, 균형과 상호성의 관계로 접어들도록 하고, 시민들이 함께 더불어 통일된 코스모스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수치상의 관계들과 대응물에 의하여 지배되는 일관된 체계를 형성하였다. 폴리스는 계급도 서열도 차이도 없는 동질적인 전체로 보였다. 아르케는 더 이상 사회적 구조의 정점에 있는 한 인물에게 집중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공공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서 골고루 분배되었으며, 도시의 중심에(즉 메손에) 있던 공통의 공간으로 분산되었다.
군주권은 규칙적인 순환 주기를 통해서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한 개인에서 다른 개인으로 지나쳐 왔기 때문에, 따라서 명령과 복종이란 것은 두 개의 절대적인 것으로서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역전될 수 있는 관계성에 대한 두 개의 불가분적인 측면이 되었다. 이소노미아의 법 아래에서 사회적 영역은 중심으로 모인, 순환적인 ‘코스모스’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 그 속에서 각 시민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자신이 유사한 까닭에 시민적 공간을 구성하는 각자의 대칭적 입장을 계속적으로 점유하고 또 포기함으로써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순환의 전영역을 포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7장 우주발생론과 군주권의 신화
퓌시스의 일의성과 일회성
[143]이오니아 지방의 ‘자연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실증주의적 정신은 애초부터 전 존재에 골고루 스며들고 있었다. 실증주의적 정신은 애초부터 전 존재에 골고루 스며들고 있었다. 자연, 즉 퓌시스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 신적, 자연적 세계들은 모두 동일 지평 위에서 통일된 동질적 우주를 구성하고 있다. 그 세계들은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힘을 발휘하고, 동일한 생명력을 드러낸다. (...) 초자연적인 무언가에 대한 표상을 배제하는 오직 하나의 퓌시스만이 있듯이, 거기에는 단지 하나의 단일한 일회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신화적 이미지의 지속
[148]세세한 점에 있어서조차 어떤 주제에 관련된 발전 단계의 대칭성과 일치성은 자연철학자의 사유 가운데 신화적 표상이 계속적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주제들이 여전히 그 주제에 내포되어 있는 암시적 힘에 대한 어떤 측면도 상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성적인 생식, 우주적 알, 생명의 나무, 앞서 혼합되어 있었던 땅과 하늘의 분리를 비롯한 이 모든 것들은 아낙시만드로스와 같은 사람의 세계 형성에 대한 ‘물리적’ 설명 배후에 내비치는 무늬와 같은 가시적인 암묵적 이미지들이다. 즉 뜨거움과 차가움을 산출할 수 있는 씨앗과 배종(gonimon)이 아페이[149]론으로부터 분비되었다(분리되었다; apokrinesthai). 그 배종의 중심에는 아에르(공기; aer)의 형태로 차가움이 있다.
자연철학자들의 퓌시스-지식의 탈성화와 도시의 반영
[149]이러한 재현과 유비에도 불구하고 신화와 철학 사이에 사[150]실적인 연속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는 신학자가 신적인 힘의 견지에서 표명하였던 것을 퓌시스의 견지에서 반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어조에 있어서의 변화와 속화된 어휘의 사용에 대응하는 것은 새로운 정신적 사고방식이었고, 상이한 지적 기조였다. 밀레토스인에게서 최초로 세계의 기원과 질서에 대한 물음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문제의 형식을 취하는 태도가 등장하였다. 그 문제는 그 어떤 신비로움 없이 주어져야만 하고, 인간 지성으로 측정되어야만 하고, 일상생활의 다른 물음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시민들 앞에서 공표될 수 있고, 공개적으로 토론될 수 있는 문제로 형식화된 것으로서 이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요구하는 물음이다. 이처럼 자연철학자들은 제의와의 관련성으로부터 해방된 이해의 기능을 전제하였다. ‘자연철학자들’은 의식적으로 종교의 영역을 무시하였다. 그들의 물음은 더 이상, 신화가 그 상대적인 자율성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로 속박되고 있었던 종교적 절차들과 관련을 맺고 있지 않았다.
지식의 탈성화 및 종교와 무관한 이질적 사유의 출현은 고립되고 이해될 수 없는 현상들이 아니었다. 이미 우리가 보았던 바와 같이 철학은 그 형식에 있어서 도시에 질서를 부여했으며, 사회생활의 세속화와 합리화에 의하여 명확하게 특징지어졌던 영적인 영역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폴리스의 제도에 대한 철학의 의존은 그 내용에 있어서 그와 못지 않은 정도로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밀레토스인들이 많은 것을 신화에서 빌려왔다는 것이 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기하학적 모델에 보다 접근한 방식에 따라서 공간[151]적 골격 안에 그것을 통합함으로써 우주의 이미지를 심오하게 변형시켰다. 그들은 도시 체계 내에서 인간 세계를 ‘코스모스’로 만드는 데 성공을 거두었던 법과 질서의 개념을 자연 세계에 투사함으로써 도덕적, 정치적 사고에 의하여 정교하게 된 관념을 새로운 우주론을 구성하는 데 사용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아르케 개념의 변형
[160]아낙시만드로스가 아르케라는 말에 최초로 원소적 원리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말을 채택하였을 때, 그 새로운 사고방식은 신화상의 ‘군주적’ 용어의 특징에 대한 철학자의 거부를 표시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학자들이 불가피하게 분리시켰던 것을 한데 모으고자 하는 (...) 그의 바람을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과 세계의 이미지
[161]1. 우주는 여러 힘들의 계급 질서로 이루어졌다. 우주는 인간 사회와 구조적 유사성을 띠고 있는 까닭에 순전히 공간적 도식에 의하여 올바르게 표상되지도 않으며, 혹은 위치, 거리, 운동의 견지에서 올바르게 기술될 수도 없다. 그 복잡하고 엄격한 질서는 수행자들 간의 관계를 표현한다. 즉 그 질서 체계는 힘의 관계로, 우선권, 권위, 위엄에 대한 계급적 질서로 그리고 지배와 복종의 결속관계로 이루어진다. 질서 체계의 공간적인 측면들 -그 상이한 여러 우주적 차원과 방향들- 은 기능, 가치, 서열에서의 차이들을 표시하는 것보다 기하학적인 속성을 덜 표시하고 있다.
2. 이 질서는 우주를 구성하는 원소들의 역동적인 역할에서 불가피[162]하게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수행자의 공적을 통하여 극적인 방식으로 확립된다.
3. 세계는 다른 신들보다도 한층 높은 차원에서 출중하면서도 선취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수행자의 각별한 힘에 의하여 지배받는다. 신화는 우주적 구조의 정상에 우주의 군주로서 그를 투영시킨다. 각각의 힘들(신들)에 대하여 그 위치를 계급적 질서로 결정하고 그 의무, 특권, 영예의 몫을 고정함으로써 우주를 구성하는 힘들 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그의 모나르키아[군주권]이다.
헤시오도스-법칙에 대한 관념의 결여
[164]신화의 어휘 및 신화의 논리와 단절하기 위하여 헤시오도스는 군주에 의하여 지배되는 힘들의 계급 질서에 대한 신화적 도식을 대치할 수 있는 포괄적인 관념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가 지니지 못했던 것은 법칙의 지배에 복종하는 우주를 기술할 수 있는 능력과, 모든 그 부분들에 평형과 상호성 그리고 대칭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소노미아의 단일한 질서의 적용을 통하여 질서 잡힌 ‘코스모스’를 기술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제8장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
아낙시만드로스-새로운 스타일: 산문
[165]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그가 비단 아르케[근원]와 같은 중요한 말을 그의 어휘에 더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뿐만 아니라, 또한 산문으로 글을 씀으로써 신들의 탄생의 시적 스타일과 단절하는 [166]것을 완결하였고, historia peri phuseōs[자연에 관한 탐구]에 적합한 새로운 문학적 장르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가 우주에 관한 헬라스적 개념에 심오하고 영속적인 인산을 남겨 놓았던 새로운 우주론적 도식에 대한 가장 엄격한 표현을 발견하는 것은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이다.
기하학적 우주의 출현-새로운 사유구도: 설명체계의 등장
[167][산술적이 아닌] 기하학적인 경향과 모든 점성술적 종교로부터 벗어난 세속적 특징을 띠는 헬라스의 천문학은 그 출발에서부터 헬라스의 천문학에 영향을 미쳤던 바빌로니아적 과학의 지평과는 다른 지평 위에 서 있었다. 이오니아인들은 코스모스의 질서를 공간 속에 위치시켰다. 그들은 기하학적 도식에 따르는 코스모스의 구조와 별들의 위치, 거리, 차원 및 운동을 표상하였다. 그들은 땅, 바다, 강을 포함하는 인간이 거주하는 세계에 대한 형태를 표현하기 위하여 온 땅의 지도를 pinax[나무로된 명판] 위에 그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낙시만드로스가 창안했다고 전해지는 구형(求型)의 우주에 대한 기계적인 모델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코스모스를 ‘볼 수 있도록’ 나타냄으로써, 그들은 테오리아, 즉 ‘구경거리’란 말의 의미가 온전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우주를 구성했던 것이다.
물리적 우주를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재정립한 것은 우주론적 관점에 대한 포괄적이면서도 심각한 변화를 수반하였다. 그 결과로 신화 속에서는 어떤 유비도 가질 수 없었던 사유의 형식과 설명적 체계의 [168]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모나르키에에서 이소노미아로: 아낙시만드로스
[169]땅은 완전한 원형의 우주 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땅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 어떤 것의 지배에 내맡겨짐이 없이(hupo mēdenos kratoumenē) 그 동일한 거리로 해서 움직이지 않는 채로 남아 있을 수 있다.
크라토스(kratos)의 관념, 즉 타자에 대한 지배권의 관념을 포함하고 있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이 정식은 이오니아의 우주론적 사고방식에 있어서 정치적 개념과 어휘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찰[170]스 칸이 최근의 연구에서 매우 적절하게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아낙시만드로스는 여기서 그의 제자 아낙시메네스에 의하여 나중에 진척된 이론보다 더 훌륭하고 그것을 능가하는 주장을 내세웠던 것이다. 아낙시메네스에게서 땅은, 마치 영혼이 신체를 지배하는 것처럼, 땅을 지배하고 있는(sungkratei) 공기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는 그 어떤 단일한 원소도, 세계의 그 어떤 한 부분도 다른 부분들을 지배할 수 없었다. 새로운 자연적 질서를 특징짓는 코스모스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힘들의 균형과 대칭이었다. 우월성은 전적으로 평형과 지속적인 상호성의 법칙에 귀속되었다. 도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있어서도 모나르키아는 이소노미아의 규칙에 의해 대치되었다.
아페이론은 평등적 질서와 벌/보상의 규칙을 따른다.
[172]아페이론이 아르케의 지위를 차지하고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확하게 그 지배권이 어떤 하나의 원소가 뒤나스테이아를 붙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아페이론의 우선성은 관계들의 상호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 평등적 질서, 즉 모든 원소들보다 우월하고 모든 원소들을 동등하게 지배하는 질서의 영원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힘들의 평형은 결코 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평형은 대립을 포섭하고, 투쟁을 통하여 형성된다. 각각의 힘은 번갈아 가며 득세했다가 다시 움츠러들게 되는데, 그 초기의 진행에 비례해서 그 힘을 포기하s고 다시 득세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 아낙시만드로스의 경우에 모든 원소들은 “그것들이 저질렀던 불의(부정의; adikia)에 대하여 시간의 질서에 따라서(kata tēn tou chronou taxin; 연속적으로) 서로에게 벌(정의; dikē)과 보상(tisis)을 지불하는 것이다.”
도시공간의 정치적 구도
[174]도시의 지배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관념과 연결되어 있었다. 즉 폴리스의 제도는 정치적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구상되고 구체화되었다. 밀레토스의 히포다이모스와 같은 최초의 도시계획자들이 사실상 정치적 이론가들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즉 도시 공간의 조직화는 단지 인간 세계를 질서 있게 만들고 합리화하고자 하는 보다 일반적인 노력의 한 측면이었다. 도시의 공간과 그 제도와의 연결은 여전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새로운 사회적 공간은 중심을 둘러싸고 조직화되었다. 크라토스, 아르케, 뒤나스테이아 등은 더 이상 사회적 계층의 정점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인간 집단의 중간에, 즉 에스 메손에 위치하고 있다. 이제 특별한 가치를 획득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중심이었다. 폴리스의 번영은 호이 메소이로서 인정되는 중간계급에 위치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하였다. (...) 지상 위에 이 공간적인 배열을 대표하는 아고라는 공동의 공적 공간의 중심을 형성하였다. 그곳에 들어간 모든 사람들은 바로 그 사실로 해서 동일한 자들, 즉 이소이로서 규정되었다. 그 정치적 공간 속에서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그들은 서로 간에 완전한 상호성의 관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플라톤-기하학적 조화와 사회적 조화의 유비
[180]플라톤은 자연적 코스모스의 구조와 사회적 코스모스의 조직화 간의 이러한 대응에 대하여 아주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 그 철학자는 하나의 공통의 기원과 지향점이 헬라스인들 사이에서 확립되었고,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기하학적 사고와 정치적 사고 간의 연계를 증명해준다. 『고르기아스』에서 기하학을 공부하는 것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을(칼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통렬하게 비난함으로써, 플라톤은 이소테스에 대한 지식-물리적 코스모스의 토대로서의 기하학적 평등성-과 도시의 새로운 질서가 토대를 두고 있는 정치적 덕들인 디카이오쉬네와 소프로쉬네를 결부시킨다.
결론
헬라스적 이성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 자체이며 도시의 산물이다.
[181]폴리스의 출현과 철학의 탄생이라는 이 두 가지 일련의 현상은 너무도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합리적 사유의 기원이 헬라스적 도시의 특이한 사회적 구조 및 정신적 구조에 결부된 것으로 마땅히 간주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그 역사적 배경으로 되돌아가, 철학은 이오니아인들이 유치한 과학 수준에 머물러 있던 시기에 초시간적인 ‘이성’이 ‘시간’ 속으로 구체화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학자들이 종종 철학에 부과했던 순수한 계시적인 성격을 벗어던져야만 한다. 밀레토스 학파는 ‘이성’의 탄생을 입증하지 못한다. 밀레토스 학파는 오히려 일종의 이성을, 즉 합리성에 대한 초기의 형식을 고안하였다. 이러한 헬라스의 이성은 물리적 환경에 대한 탐구를 지향했던 이성주의는 아니었으며, 또한 지난 몇 세기 동안 자연을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한 고된 노력 가운데 성취했던 방법들과 지적인 도구, 그리고 정신적 구조들의 사용에 맞추어졌던 현대 과학의 실험적 이성주의도 아니었다. 아[182]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정의했을 때, 그는 헬라스적 이성이 오늘날의 이성과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 그것은 ‘이성 자체’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었기 때문이다.
(...) 프로네시스, 즉 ‘반성’은 그들의 이성과 시민적 권리를 동시에 발휘하는 자유인의 특권이었다. 시민들에게 전체적인 구조를 부여하고, 그 안에서 그들의 상호관계를 고려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사유는 동시에 다른 영역에서 그들의 사고를 조정하고, 형성하게 하였다.
(...) [183]철학은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사를 표명했으며, 정치적 사고에서 그 어휘의 일부를 빌려왔다. 그 후 즉시, 철학이 완전한 의미에서 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 철학은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고, 그 자체에 독특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 철학은 자연현상들에 대한 관찰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철학은 그 어떤 실험도 행하지 않았다. 실험에 대한 관념은 여전히 철학과는 이질적인 것으로 남아 있었다. 철학은 수학을 발전시켰지만, 자연을 탐구하기 위하여 수학을 사용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 헬라스적 사유에서 사회적 세계가 수(양)와 척도에 따르는 질서에 종속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자연은 오히려 정확한 계산도 엄격한 추론도 적용될 수 없[184]었던 어림의 영역(le domain de l'à-peu-prè)을 대표하는 것이리라. 헬라스적 이성은 사물들과 연관된 인간교섭의 소산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상호간의 관계의 소산이었다. 헬라스적 이성은 (자연적) 세계에 적용하는 기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통해서 발전하였다. 바로 그 공통의 도구가 언어였다. 언어는 정치가의 기예요, 수사학자의 기예요, 교육자의 기예였다. 헬라스적 이성은 자연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신중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인간에 대해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는 바로 그 이성이었던 것이다. 그 사유의 혁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 한계에 있어서도 이성은 도시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오컴의 필사적(筆寫的) 도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랍사상의 이해>(박종현)_1장_10장 (0) | 2021.05.03 |
---|---|
<주체는 죽었는가_현대철학의 포스트모던 경향>(강영안) (0) | 2021.03.23 |
<프랑스 비평사> (김현) (0) | 2021.02.21 |
<그리스 과학사상사>(G. E. R. 로이드) (0) | 2021.02.13 |
<종교의 철학적 의미>, 마이클 피터슨 외 지음 (0) | 2021.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