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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컴의 필사적(筆寫的) 도망

<주체는 죽었는가_현대철학의 포스트모던 경향>(강영안)

by Nomadia 2021. 3. 23.

*발췌문의 소제목은 발췌자의 것이다.

『주체는 죽었는가-현대철학의 포스트모던 경향』

강영안, 문예출판사, 1997.



차례
서론 현대 철학과 주체의 문제 

제1장 현대 철학의 포스트 모던 성격 
제2장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현대성 
제3장 셀링의 자아와 철학 
제4장 독일 관념론 이후의 주체와 개인 
제5장 라캉의 주체와 욕망 
제6장 레비나스의 주체와 타자 
제7장 주체 없는 인식론과 인격적 지식 
제8장 철학의 종말과 인간의 미래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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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근대적 주체의 탄생과 이중성
p. 12-13
하이데거에 따르면 근대의 권력 주체, 즉 세계를 하나의 표상, 즉 앞에 세워 지배 대상으로 삼는 주체가 데카르트에게서 탄생하였다. 그러나 『성찰』2의 부동의 근거로서의 코기토의 자아와 『성찰』3의 유한 자{13}아 사이의 간격을 염두에 두면 데카르트의 주체를 그렇게 단순화시켜 볼 수 없다. 데카르트의 주체는 『성찰』2에서는 확고부동한 절대 근거로서 나타나지만 자기성의 테두리를 벗어날 때 삶의 우연성과 악의 존재에 직면한다. 그러므로 『성찰』3에서 주체는 자신의 존재를 떠받쳐 줄 큰 타자를 필요로 한다. 데카르트가 만일 근대 이후 주체 철학의 효시라면 그것은 단지 권력 주체로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주체의 이중성, 즉 절대 근거로서의 주체와 유한 자아로서의 주체의 긴장된 모습을 보여준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해석에는 이러한 측면이 강조되지 않았다.

주체/칸트/독일 관념론
p. 15
칸트 이후의 주체는 스피노자의 실체를 ‘주체화’한 까닭에 사실상 신적 존재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독일 관념론은 가장 극단화된 형태에서는 하나의 신학(세속화된 신학)이었다고 보아도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칸트와 칸트의 후예들은 바로 이점에서 구별된다. 칸트는 그것이 실체이든, 주체이든, 또는 이성이든 또는 신이든 어떤 하나의 개념이나 이념으로 세계 전체를 일원론적으로 통합하고자 하지 않았다.  …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칸트의 약점이기보다는 오히려 위대한 점이고 이 점에서 역시 칸트는 아직도 공부할 가치가 있는 철학자로 보인다. 

주체와 한국철학
pp. 16-17
우리에게 주체 개념이 익숙하게 된 것은 마르크스 전통임을 여기서 다시 한 번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현대 한국 철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20년대 말, 30년대 초 한국에 소개된 철학은 헤길과 마르크스 철학 계열과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실존철학 계열이었다. … {17}현실을 개조하고 변혁하는 개념을 쓴 경우는 초기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신남철과 박치우뿐만 아니라 실존 철학 계열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박종홍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남철과 박치우는 역사 변혁적인 신체적 주체에 관심을 보였다면 박종홍은 철학과 현실의 관계를 현실에 대한 주체적 파악과 구상 활동으로 정의할 만큼 주체의 능동적, 변혁적 역할을 강조해서 다루었다.  이 점에서 한치진은 … ‘주체’란 개념에 담긴 능동적, 변혁적, 또는 창조적 역할을 의식하진 못했다. 그는 통상적으로 ‘객관’에 대응해서 쓰던 ‘주관’이나 또는 심지어 ‘객격(客格)’에 대응해서 쓰던 ‘주격(主格)’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 북한의 주체사상의 ‘주체’ 개념도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원리를 기초로 근로 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사회발전의 동력으로 보는 점에서 적어도 개념상으로는 1930년대 수용된 서양 철학적 ‘주체’ 개념과 다를 바 없다. 

니체와 키에르케고어
p. 18
키에르케고어의 철학은 “주체성이 진리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면 니체 철학은 “주체는 허구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레비나스와 폴라니/인격적 주체
p. 26
가능하면 인간의 얼굴을 배제하고 그 자리에 객관적 계기, 예컨대 자연, 구조, 언어 등을 자리잡게 하려는 경향이 결국에는 ‘인간의 죽음’, ‘주체의 죽음’에 대한 논의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레비나스는 폴라니와 더불어 서구 문화와 철학에 깊이 깔려 있는 탈인격화 경향, 즉 ‘얼굴 없는 사유’의 정체를 폭로한 철학자로 보인다. 

주체의 죽음/니체․하이데거와 현대철학
p. 28/30
'주체의 죽음‘은 서구 문화의 탈인격화 경향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 이것은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지난 몇백 년 동안 서양 근대 문화가 준비해온 일이었다. 60년대 이후 주체의 죽음과 형이상학의 종말에 대한 논의는 이미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과 ’주체는 허구‘라는 주장을 철학적으로 대변한 것에 불과하다.
…{30}1960년대 이와 관련된 논의는, 데리다 같은 사람은 하이데거조차도 여전히 휴머니즘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지만 사실은 모두 하이데거를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 자체를 사유하는 것, 존재의 감춤과 드러냄을 생각하는 것, 이것은 철학의 종말에 직면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한다. 

객관주의․주관주의의 극복
p. 34
객관주의 비판이 절대화될 때 우리는 어떠한 인식 기준도, 준거틀도 상대적이라는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고 주관주의 비판을 절대화할 때 객관주의에 빠지거나 또는 극단적 반휴머니즘에 빠질 수 있다. … 오만과 절망, 그 어느 것에도 빠지지 않으면서 철학적 사유를 펼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인간을 높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낮추지도 않으면서 인간에게 제격에 알맞은 자리를 줄 수 있는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펼쳐나갈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물음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현실과 철학
pp. 35-36
존재 부조리와 현실 문제에 놀라움이나 당혹감, 또 때로는 분노조차 없다면 좀더 철저한 철학적 사유가 형성될 수 없다. 한 시대의 철학적 사유가 다른 시대와 구별할 수 있는 문제의식과 논리를 갖는 것도 현실 경험과 현실에 대한 반응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파악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이론{36}적 노력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 현실을 바르게 평가하고 바르게 방향 설정을 해보고자 하는 실천적인 노력이 철학의 변화를 가져 온다고 하겠다. 

현대철학의 포스트모던 경향
pp. 36-37/39
현대철학의 조류 가운데 특히 1960년대 이후 강력한 운동으로 등장한 조류로는 철학적 해석학(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위르겐 하버마스, 폴 리쾨르), 프랑스 ‘파리의 철학’(미셸 푸코, 자크 라캉, 엠마누엘 레비나스,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그리고 ‘새로운 과학 철학’(마이클 폴라니, 스티픈 툴민, 토마스 쿤, 임레 라카토스, 파울 파이어아벤트), ‘포스트 분석철학’(리처드 로티, 힐러리 퍼트남)을 들 수 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거의 자명한 것으로 수용했던 이성의 절대성, 자아의 명증성, 과학의 확실성, 언어의 도구성, 사실의 우위성 등에 대해서 이들은 매우 비판적이 되었다. 물론 여러 조류 사이에는 개별적인 이론에 있어서 현{37}격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근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출현과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형성된 서양의 근현대 문화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반성하고 전통적인 지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뒤엎는 운동이란 점에서 이들은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철학을 만일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이름으로 모두 포괄할 수 없다면, 적어도 포스트 모던 경향을 띤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39}현대철학의 흐름을 ‘포스트 모던적’이라고 규정할 때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현대철학은 과학과 기술이 현대 사회에 차지하고 있는 절대적 위치에 대하여 의심하고 세계의 의미 근원으로서의 인간 주체가 그렇게 절대적이 아님을 밝혀 준다는 것이다. … 하나는 객관주의 또는 실증주의로 대변되는 과학관에 대한 비판이요, 또 다른 하나는 주관주의 또는 주체에 대한 비판이다. … 이 두 가지 비판은 인식 영역에서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로, 인간에 대해서는 반휴머니즘으로 귀결한다. 

데카르트/방법론적 일원론
pp. 42-43
회의의 규칙, 분해의 규칙, 합성의 규칙, 매거(枚擧)와 통관의 규칙이라 부를 수 있는 이 네 규칙은 기하학 뿐만 아니라 진정한 학문에는 어느 곳에나 적용시킬 수 있다고 데카르트는 믿었다. 
… 데카르트 자신은 진리를 찾는 방법이 계량적이고, 관찰과 실험을 통한 검증적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감각적 경험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 명증적인 직관을 토대 삼아 그 직관으로부터 단계적으로 연역함으로써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43}그의 방법론적 일원론은 필연적으로 토대론(foundationalism)을 함축하고 있다. 이 토대는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 자체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쉽게 치환될 수 있었고 그가 말한 방법도 계량적, 검증적 방법으로 대치될 수 있었다. 하나의 형식적 구조가 형성되면 그 속에 담길 수 있는 내용은 쉽게 바뀔 수 있다. 

폴라니/인격적 참여․인격적 지식
pp. 46-47
그는 매우 치밀한 연구를 통해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활동이란 삶의 현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그리고 우리의 신체적 조건과 지적 열망 등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인격적 참여(personal commitment)’의 행위임을 보여준다. 
…{47}“인격적 참여로 인해 우리의 이해가 주관적이 되지는 않는다. 파악과 이해는 자의적인 행위로 수동적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 타당성을 주장하는 책임적 행위이다. 그와 같은 인식은 숨은 현실과 접촉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이다 … 인격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융합을 ‘인격적 지식’이라 부른 것이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Michael Polanyi, Personal Knwledge, Toward a Post-Critical Philosophy(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58), ⅶ-ⅷ 쪽)

폴라니를 통해 우리는 과학의 객관성과 현실 관련성을 송두리째 팽개치지 않으면서도 인격과 상관이 없어야 곧 객관적이라고 보는 관점을 벗어날 수 있다. 

주14) 폴라니는 인격적 지식이란 개념을 통해 지식을 ‘주관적/객관적’의 대립구조로 보는 관행을 뛰어넘는다.

과학철학과 해석학
p. 51
현대철학, 특히 그 가운데서도 현대 과학 철학과 철학적 해석학은 객관주의와 실증주의를 비판하면서 과학과 과학적 합리성이 인간의 삶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관해 좀 더 균형잡힌 모습을 보여 주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반휴머니즘 조류
p. 56
현대 유럽대륙 철학자들, 그 가운데서도 현상학의 영향 아래 철학을 한 하이데거와 가다머 그리고 프랑스 파리의 철학자들(푸코, 라캉, 데리다, 리오타르, 리쾨르, 레비나스)은 개인적, 심리적 의미의 주체가 아니라 세계의 근거로서, 세계를 떠받쳐 주는 기체(substratum)로 해석된 주체(subjectum)를 거부한다. 기체로서의 주체는 이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신일 수도 있고, 데카르트 이후 독일 관념론(피히테, 셸링, 헤겔), 후설의 현상학을 통해 절대화된 자아일 수도 있다. 현대 철학의 주체 비판은 암묵적으로 이 둘을 다같이 겨냥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그들의 비판은 주체로서의 자아뿐만 아니라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는 휴머니즘 자체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반휴머니즘(Antihumanism)'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하였다.

후설의 근본주의
p. 59-60
후설 자신이 종종 표현하고 있듯이 ‘엄밀학으로서의 철학’의 이념과 근본주의는 결국 ‘로고스에 따른 삶’이라는 고대 그리스의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하면 인간의 삶은 ‘로곤디도나이(logon didonai)’, 즉 ‘근거(또는 이유)를 제시하는 삶’이어야 했고, 근거 또는 이유는 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 {60}스스로 책임 지는 것,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곧 인간은 이론적 삶과 실천적 삶에서 다같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이다. 이러한 합리성의 요구를 후설은 유럽문화와 유럽인간성의 이념적인 뿌리로 보고 있고 현상학은 이와 같은 유럽문화의 목표를 실현하는 도구로 생각했다. 

포스트모던/욕망의 철학
p. 67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 모던 철학은 데카르트와 베이컨 이후 홉스와 스피노자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 욕망(존재 욕망, conatus essen야)을 거침 없이 드러내주지 않았는가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실적 인간은 이성보다는 정념(욕망)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 이들의 통찰이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민사회의 정치철학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들과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 사이에 만일 차이가 있다면 다름이 아니라 욕망의 정체를 기호와 텍스트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욕망은 문화적 생산에 의해 얼마든지 증폭될 수 있고 대상을 달리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와 레비나스
pp. 67-68
어떤 초월적인 기준이나 {68}믿음을 갖지 않을 경우 이러한 포스트 모던 철학은 결국 허무주의와 상대주의를 견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폐쇄된 생각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지만 문제는 ‘어디로’ 향해 해방시켜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우상파괴가 언제나 안고 있는 난점이다. … 종교도 과학도 확고한 발판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에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욕망 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서 레비나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볼 만하다. …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세계의 유한성과 한계를 벗어난 초월이 가능하다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종교적 욕구
p. 69
사람의 종교적 욕구는 소멸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느 시대보다 의미에 대한 갈증과 추구는 어 절실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나와 분리된 신, 경험 세계 너머 저편에 있는 초자연적인 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근대의 극복/폴라니․레비나스
p. 71-72
이론적 차원에서는 근대철학 이후 심화된 전체와 개체의 분리, 주관과 객관의 대립, 자아의 절대적 주장을 벗어나 타인과 자연, 그리고 신과 더불어 사는 총체적 세계로 향한 상상력이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하겠다. … 적어도 우리는 폴라니, 레비나스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성적 전통을 완전히 팽개치지 않으면서도 객관주의와 자아중심주의를 벗어나, 지식이 지닌 인격적 측면을 인정하면서 타자와 더불어 살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꿈과 동경을 우리는 그들의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프로그램
p. 75
'포스트 모더니즘‘의 철학은 하이데거의 시대 비판과 형이상학 비판에서 출발하여, 니체를 통해 현대를 지양하려는 철학적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현대철학
p. 78
하이데거의 해석과 그의 해체 작업이 현재 유럽철학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고려해볼 때, 현대성과 주체성에 관한 어떤 논의라도 데카르트를 시발점으로 현대의 주체성의 철학이 생성되었고, 이미 그 가운데 주체의 종말이 예고되었다고 보는 하이데거의 관점을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주체의 죽음’에 대한 확인 작업과 현대의 ‘주체’ 개념의 이해도 하이데거의 해석에 대한 재수용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의미있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코기토/하이데거
pp. 79-80
첫째 코기토는 ‘무엇을 소유함’, ‘어떤 사태를 붙잡음(per-capio)', '자기 앞에 세움(Vor-stellen)’, 즉 대상화를 뜻한다. 무엇을 사유한다는 것은 ‘앞에 가져올 수 있는 것(대상화 가능한 것)’을 소유함이다. ‘손을 뻗어 움켜쥠(capere)'이 그러므로 코기토의 본질적인 계기이다. 이 움켜쥠 가운데 인간은 사물을 자기 앞에 세우고, 움켜쥐는 자로서, 닦달하는 자로서 스스로 서게 된다. 둘째, 코기토는 회의함(dubitare)이다. 회의함은 무엇에 대해 의심을 품은 채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심적 상태가 아니라 의심할 수 없는 것, 확실한 것과 관련짓는 행위이다. 의심함으로써 ‘앞에 세움’은 곧 ‘확실하게 세움’, ‘확실하게 만듦’을 의미한다. 셋째, 코기토는 ‘내{80}가 사유함을 사유함(cogito me cogitare)'이다. 대상을 내 앞에 세워 움켜 잡을 때, 나는 거기에 부수적으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함께‘ 세워진다. 내가 어떤 것을 사유할 때, 그 어떤 것은 나의 ’앞에 세움‘을 통해 어떤 것으로 등장한다. 이때 나는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대상화한 다음, 그 이후에 또 다시 나의 반성적 사유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화하는 그 가운데 이미 함께 현존한다. 그러므로 대상을 앞에 세우는, 대상화하는 나를 사유하기 위해 또다시 나에게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 자기 의식은 대상 의식과 함께 현존한다. 요컨대, 의식은 본질적으로 자기 의식이고, 내 자신에 대한 의식인 자기 의식은 사물에 대한 의식에 첨가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으로 대상의식은 그 본질에 있어 무엇보다도 자기의식이며 오직 자기의식으로서만이 자기와 ’마주 서 있는‘ 것으로서의 대상에 관한 의식이 가능하다. 

과학의 해방적 성격과 효과
p. 87
고중세 서양전통과 비서구권 문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종교와 형이상학으로부터의 이러한 과학의 해방(과학의 자율성)은 한편으로는 사적 영역(개인의 경험, 종교적 믿음, 형이상학적 전제)과 공적 영역의 분리를 가져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지닌 효용성과 실질성으로 인해 과학은 종교나 형이상학보다 더 큰 힘을 실제적 삶에 행사하게 되었다. 

성찰의 문제의식
p. 87
데카르트적 ‘성찰’은 무엇보다도 인간존재의 우연성, 악의 존재, 외부세계의 불확실성 등을 극복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 이와 같은 ‘자기주장’은 삶의 허구와 우연성, 스스로 만든 착각과 밖(‘악신’)에서 오는 기만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하고, 확증함으로써 자기 보존을 꾀하려는 노력으로 보아야 한다.  

코기토/숨
pp. 94-96
우리는 여기서 데카르트 이후의 주체성의 철학이 문제 삼은 초월적, 절대적, 무시공적 자아와 경험적, 상대적, 시간적 자아 사이의 분열을 감지한다. . 코기토의 자아와 숨의 자아 사이에 분명한 분열이 존재하고 인식의 질서에 따를 때 코기토의 자아는 숨의 자아를 완전히 뒷받침하지만 존재의 질서를 따를 때 그것은 타자에 의해 뒷받침된다. 

{95}… 데카르트의 ‘나’는 나의 존재와 사유의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한 채 ‘나’를 축으로 한 원 속에 갇혀 있다. 나는 아직 내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와 나와 함께 세계 안에 거주하는 타자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확실성을 얻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사유와 존재 확실성을 통해 직접 외부 세계와 타자의 존재에 대한 확실성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96}…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는 사유되는 것(cogitatum)에 대한 사유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사유’는 후설에서 보는 것처럼 그 바깥에 어떤 무엇을 가지지 않는 사유, 즉 존재 의미 자체를 구성하는 의식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 맞서 있는, 표상(관념)과 표상되는 것의 테두리 속에 머물러 있는 의식이다. …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을 보장하기 위해 내 밖으로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이 초월을 위협하는 악신의 기만을 내 힘으로 물리칠 수 없다면 그것을 제압할 수 있는 다른 존재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데카르트는 인간과 세계를 매개하기 위해 신의 완전성과 신뢰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관념론의 신학화
p. 97
주관과 객관의 분리, 자아와 세계의 분열 … 주체성의 원리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이 분열을 해소해보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데카르트가 허용했던 주체 바깥의 공간을 주체의 절대 자유(피히테, 초기 셸링) 혹은 절대 정신의 자기 정립(헤겔)을 통해 주체 안으로 되돌리는 작업으로 나타났다. 이 작업의 승패는 결국 인간이 신적인 힘을 가진 주체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었고, 독일 관념론으로 통칭되는 주체성의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철학적 신학(혹은 존재 신학)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코기토의 이중성과 그 이후
pp. 98-99
실체는 ‘자존성’을 뜻한다면, 수브옉툼은 ‘의존성’을 뜻한다. 절대 근거로서의 주체는 그 홀로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수브옉툼(주체)이다. 그러나 그것은 타자에 의존하는 한, 다른 것에 종속되는 수브옉툼(의존체)이다.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은 코기토의 주체, 즉 절대 시작, 제1원리로서의 주체만을 데카르트가 발견한 진정한 주체로 파악하고 그것이 지닌 가능성을 더욱 치밀하고 철저하게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탈근대적 주체
pp. 100-101
자기 분열 가운데서 ‘자기’(이성으로 이해하든, 감성으로 이해하든 간에, 혹은 키에르케고어의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이해되든 간에)를 통해 분열을 극복하려는 운동이 현대성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자기 통합, 자신과 자신의 완전한 일티, 자신과 {101}타자와의 완전한 융합을 하나의 ‘상상적 합일’로 보고 이러한 일치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특히 라캉을 통해 강조된 탈현대적 주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는 철학자들이 이제는 죽었다고 말하는 주체는 다름 아니라 절대적 명증성을 띤 주체, 자기 자신에게 현존하는 주체, 절대 기원의 신화를 만들어낸 주체, 현실을 완전히 독점하고 지배하는 주체이다. 이것은 분명히 데카르트의 코기토 주체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증적인 주체가 데카르트 자신을 통해 벌써 해체되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다.

주체의 죽음/주체의 자리
p. 102
'주체의 죽음‘에서 문제시되는 ’주체‘는 하나의 개별자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현대성‘ 혹은 ’현대‘의 기획 자체와 인간에게 부여된 자리를 일컫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성의 이념 자체를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여전히 말하는 주체, 글쓰는 주체 혹은 도덕적 행위 주체에 관해 의미있게 말할 수 있고,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주체성의 개념을 포기하기보다 오히려 자연과 이웃, 자기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주체의 죽음‘ 이후의 주체성의 의미를 다시 반성하고 자각하는 일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된다.   

셸링/주체성의 철학자
p. 105
위대한 철학자는 오직 하나만을 생각한다는 말처럼 셸링은 오직 절대적, 무제약적 주체만을 생각하였다. 셸링은 이런 의미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체성의 철학자였다. 

절대 자아/셸링
p. 114
"나는 존재한다. 나의 자아는 모든 사유와 표상에 선행하는 존재를 담고 있다. 그것은 사유됨을 통해서 존재하고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유된다 … 그것은 오직 그 자신만을 사유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오직 그 자신만을 사유한다. 그것은 자신의 사유를 통해서 [절대 원인성으로부터] 자신을 산출한다"(Ich 1, 167).

절대 자아에 대한 의문
p. 117-118
셸링의 자아 규정에서 의문으로 남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절대 자아를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자아는 마치 우리가 책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파악할 수 있는가?
…{118}절대자유를 본질로 하는 자아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자아(이것을 셸링은 경험 자아와 동일시한다0가 가능한 근거이며, 오직 이 절대 자아를 근거로 모든 표상과 행위가 가능할 뿐이다(Ich 1, 181). 셸링은 절대 자아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직관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셸링/칸트
pp. 122-123
절대자아의 존재가 감성적 직관이나 개념을 통해 인식 가능하다면, 그것은 여러 대상 중의 하나의 대상에 불{123}과하다. 이 점에서 칸트와 셸링의 의견은 일치한다. 셸링과 칸트의 결정적인 차이는 초월적 자아의 지적 직관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칸트가 지적 직관을 거부하는 이유는 인간의 지성은 사고의 능력일 뿐 대상을 산출할 수 없고 인간의 직관은 항상 감성적일 뿐이기 때문에 지성적이면서 동시에 직접적인 인식은 ‘적어도 유한적으로 사고하는 존재’인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칸트/데카르트
pp. 123-124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칸트가 비판한 것처럼) 논리적 추론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아의 존재와 사고하는 행위가 동시적으로 직관되는 사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칸트와 데카르트의 생각은 거의 일치한다. 칸트 자신이 ‘나는 생각한다’와 ‘나는 존재한다’는 동일 명제라고 주장한다. 칸트의 이런 주장은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사유와 존재의 합일점으로 생각된 ‘절대자’ 혹은 ‘절대 자아’의 지적 직관을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한 가능성은 오직 신에게만 유보시켜 {124}놓았다. … 그래서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는 작용은 생각함에 재료를 제공하는 어떤 경험적인 표상 없이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고는 그것이 인식의 차원에 이르기 위해 사고의 형식 뿐만 아니라 질료를 요청한다. 사고의 형식과 질료의 종합은 서로 대립된 것의 종합일 뿐 결국 종합을 뛰어 넘어 절대 정립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칸트/셸링
p. 125
칸트에게서 자기 의식의 자발성(자유)은 늘 감성적인 것과 대립된 가운데 그것과의 관계에서 그것의 입법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지만, 셸링에게서는 인식과 행위, 존재와 사유의 전영역을 절대 자아의 ‘절대 권력’ 아래 두게 되었다. 근대의 주체성의 철학은 셸링에 이르러 칸트의 비판 철학이 안고 있는 유한성의 한계를 초월하여 자아의 ‘절대 권력’(Ich 1, 201)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키에르케고어/사이존재
p. 134
사이 존재(intermediary being, Zwischenwessen) … 인간은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개인으로서 존재와 사유, 바로 이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와 사유, 신체와 자기 의식 ‘사이’에 위치해 있고 이것을 의식하면서 존재하고, 존재하면서 의식한다. 그러므로 키에르케고어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원리를 뒤바꾸어 “나는 존재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원리를 하나의 대안으로 제안한다. 따라서 사변적 사유를 통해 추구되어 온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 대신 키에르케고어는 존재와 사유의 차이성을 강조한다. 

키에르케고어/독일관념론
p, 139
독일 관념론 전통은 개인성을 뛰어넘어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을 근거지우는 보편적, 초월적 주체성에서 주체의 의미를 찾았다면 키에르케고어는 실존하는 개인의 존재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적 의미를 규정할 수 있는 근거로 보았다. 

주체성/실존과 윤리
p. 141-143
“실존하는 개인이 단지 인식적인 것 이상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현실은 그 자신의 현실, 즉 그가 실존한다는 사실 밖에 없다. 이 현실은 그의 절대적 관심을 구성한다. 추상적 사유는 지식을 얻기 위해 [그의 실존에 대해] 무관심할 것을 요구한다. 실존에 대해서 무한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윤리적 요구다. 실존하는 개인에게 존재하는 유일한 현실은 그의 윤리적 현실 밖에 없다”(S. Kierkegaard,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139쪽).

…{142}“주체성은 진리이고, 주체성은 현실이다”(같은 책, 306쪽) … 현실성은 자신의 실존에 관여하며 자신의 실존에 관심을 두는 방식과 상황을 일컫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적 실존이 현실”이며(같은 책, 283쪽), “개인의 윤리적 현실만이 유일한 현실”이다(같은 책 291쪽). … {143}따라서 현실은 윤리적일 때 진정한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이란 실존하는 개인이 자기 자신과 스스로 관계함이며, 이 관계를 통해서 실존하는 개인은 신체와 자기 의식,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등의 ‘사이 존재’로서의 자신의 실존을 실행한다. 

주체/정신/종합/키에르케고어
pp. 143-145
"인간은 정신이다. 하지만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은 자아이다. 하지만 자아는 무엇인가? 자아는 자기 자신과 스스로 관계하는 관계이거나 또는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관계시키는 것이다. 자아는 {144} 그 관계가 아니라 관계가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관계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 자유와 필연성의 종합, 요컨대 ‘종합’이다. 종합은 두 요서의 관계이다“(S. Kierkegaard, Sickness unto Death, 146쪽).

키에르케고어가 쓰고 있는 ‘정신’, ‘자아’, ‘유한과 무한의 종합’ 등의 표현은 역시 헤겔과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의 그능 아래서 키에르케고어의 철학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인간 존재의 실존 구도를 드러내고 그리하여 각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종용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 점에서 키에르케고어는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정신’으로, ‘자아’로, ‘종합’으로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에서는 전혀 다른 전개 방식을 보이고 있다. 

…{145}‘자아’가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관련시킨다는 것은 ‘자아’가 단순히 두 요소 간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두 요소와의 관계에 스스로 자기를 관계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아’ 자체는 이 관계 속에 있지 않고 이 관계에 자신을 관련시키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 ‘종합’의 의미를 헤겔적 의미의 종합, 곧 매개를 통한 화해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키에르케고어는 부정성의 소멸을 통한 대립의 지양을 거부한다. 오히려 실존하는 개인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실존의 모순을 스스로 지탱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 따라서 종합은 긴장관계의 지속적인 유지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에 인간실존의 고유한 의미가 있다.

단독자/키에르케고어
p. 154
키에르케고어 철학 전체가 “어떻게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의 관심은 궁극적으로 바로 이 단독자, 신 앞에서 홀로 선 실존에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참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때 비로소 신 앞에서 홀로 선 단독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니체
pp. 156-158
"주체라는 ‘원자’는 없다. 주체의 영역은 예컨대 계속 증대하고 있거나 계속 감소하거나 하며, 체계의 중심점은 계속 변동하고 있다. […] 주체는,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로 강화를 향해 노력하는 어떤 것이다“(Nietzsche, Will zur Macht, §488).

“하나의 주체를 가정할 필요는 없다. 아마도 다수의 주체를 가정하는 것이 허용될 터인데, 이와 같은 여러 주체들의 협조와 투쟁이 우리의 사고나 일반적으로 우리의 의식의 근저에 있을지도 모른다. […] 나의 {157}가설-주체의 다수성”(같은 책, §490).

니체는 여기서 주체가 하나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존재와 인식, 행위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만, 주체 자체에 대해서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주체는 하나가 아니라 다수일 수 있다는 것, 주체는 어떤 고정된 중심점이 아니라 ‘계속 증대하거나 계속 감소하거나“ 하는 힘의 역학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니체의 진정한 의도는 ”’주체‘란, 우리의 입장에서 해석된 것이며, 그 때문에 자아(das Ich)가, 실체로서, 모든 행동의 원인으로서, 행동하는 자로서 통용되는 것“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을 뿐 주체 자체를 거부하는 데 있지 않다는 가저을 해 볼 수 있게 해준다. 니체는 전통적 주체의 해체를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대로 각각 자기 자신이 될 것인가?(Wie man wird, was er ist?)"를 보여주고자 한다고 말할 수 있다.

…{158}실재세계와 가상세계의 이분법을 갖고 있는 철학자는 다양한 행위와 속성 배후에 어떤 불변하는 주체를 상정하며서, 이 주체야말로 진정한 현실이며 실재라고 믿는다. 자신이 만든 것을 자신이 만든 것처럼 보지 못하고 실재하는 것처럼 보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허구임을 니체는 말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주체‘는 허구”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는 허구”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실재인 것처럼 믿고 있는 데 있다. 

주체/실체
p. 163
“실체 개념은 주체 개념의 결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우리가 영혼을, ‘주체’를 포기하면 실체 일반에 대한 전제도 없어진다”(Nietzcshe, Will zur Macht, §485).

주체와 행위의 이원화
pp. 164-165
행위와 행위의 원인, 즉 행위와 행위 주체, 힘과 힘의 주체를 서로 구별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주체가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면, 약자 스스로 약함을 은폐하고 그것이 스스로의 선함과 겸손의 결과인 것처럼 위장할 수 있다. … 이렇게 본다면 서양의 주체 사상은 강자에 대한 약자의 ‘원한’에{165}서 비롯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둘째, 행위 결과와 행위 원인으로 구별하고 원인이 되는 주체를 상정한 결과, 자연도 마치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건 배후에 원인이 있고, 의도와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게 된다. 이것은 자연을 의인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몸/주체 이후/니체
pp.167/169-171
{167}“너는 너 자신인 바, 그것이 되어야 한다(Du sollst der werden, der du bist)"(Nietzsche, Die Fröhliche Wissenschaft, §269).

…'나 자신‘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 내가 찾을 수 있는 나는 어디에도 없다. 
… 논리적, 보편적 주체가 사라진 뒤, 내가 되고자 해야 할 주체는 내가 창조해야 할 주체이며, 그 주체는 자신을 스스로 창조하는 자율적 주체여야 한다. 

{169}“주체의 지속적인 무상함과 덧없음 … 사멸하는 주체”(Nietzsche, Wille zur Macht, §490). … 니체가 대안으로 생각하는 주체, 즉 스스로 자기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율적 주체는 신체성의 원리에 따라 몸으로서 존재하는 신체적 주체라는 것이 밝혀 진다.

…{170}“하지만 자각자요, 지자(知者)는 말한다. 나는 몸이고 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영혼은 단지 몸에 있는 어떤 것을 일컫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몸은 하나의 커다란 이성이고, 하나의 의미를 가진 다양함이며, 전쟁이고 평화이며, 가축의 무리이고 목자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 부르는 그대의 작은 이성도 몸의 도구 즉 그대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며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나(Ich)’라고 그대는 말하고 그대는 이 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그대의 몸과 몸이 지닌 큰 이성이다. 그것은 나라고 말하지 않으나 나를 실천한다. […] 나의 형제여, 그대의 생각과 느낌 배후에는 ‘자아(das Selbst)'라는 이름을 가진 더욱 힘센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나니. 그대 몸에 그가 살고, 그대 몸이 바로 그이니라.”

“그대의 최선의 지혜 가운데보다는 그대의 몸 속에 더 많은 이성이 있다. […} 창조하는 자아가 존경과 경멸을 스스로 창조했고, 쾌락과 고통을 스스로 창조했다. 창조하는 몸이 자신의 의지의 도구로서 스스로 정신을 {171}창조했다”(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Schlechta Ⅱ, 300-301쪽).

초인/디오니소스
pp. 172-173
"결과, 곧 그것이 나인 것이다(L'effect, c'est moi)."(Nietzsche, Jenseits von Gut und Böse. §19).
… “최고의 인간은 최고의 다양한 충동을 갖되, 끝까지 견딜 수 있을 만{173]큼 상대적으로 가장 강한 힘을 가질 것이다. 사실, 인간이라는 식물이 그 강함을 나타내고 있는 곳에서는 서로 강력하게 충돌하는 본능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이를 테면 셰익스피어), 하지만 이들은 고삐가 잡혀 있다”(Nietzsche, Wille zur Macht, §966). 
… 가장 위대한 사람, 모든 종류의 무력과 연약성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은 최대의 충동과 욕망을 갖되, 그것을 최대한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다. … 부정하지 않고 언제나 긍정한 디오니소스적 인간 …

초인/운명애
p. 174/178
“빼거나 제외하거나 선별하는 일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디오니소스적으로 긍정하는 것-그것은 영원한 순환을 원한다. […] 철학자가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상태, 즉 생존에 대해 디오니소스적으로 관계하는 것, 이것에 대한 나의 정식(定式)은 운명을 사랑하는 일(amor fati)이다”(Nietzsche, Wille zur Macht, §1041).

"인간에게 있는 위대함에 대한 정식은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자기의 현재 모습과 다른 무엇이 되길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필연적인 것을 인내할 뿐 아니라 더구나 그것을 은폐하지 않으며-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는 허위이다-오히려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Nitetzsche, Ecce Homo, Ⅱ, 10).

… 자기 긍정 및 세계 긍정, 그러면서도 끊임없는 자기 창조로 이행할 수 있는 인간을 니체는 ‘위버맨쉬(Übermensch)', 즉 ’넘어가는 인간‘이라 부른다.

{178}아무런 의미 없이 돌고도는 이 세계를 긍정하고 이 세계 안에서 주어진 삶을 즐기라는 충고이다. ‘놀이하는 어린이’로 표상되기도 하는 니체의 운명 사랑은 허무주의이면서도 현실을 긍정하는 낙관주의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독일관념론의 주체 개념은 완전히 해체되고 만다.  

맑스/니체/키에르케고어
p. 175
19세기 중반과 후반 …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의 경우는 개인 주체보다 공동체에 … 강조를 둔 반면, 키에르케고어와 니체는 다같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주체와 개인에 대한 이해에 비판적이었다. … 

‘공동체 또는 연합의 이념이 우리 시대의 구원이 될 것이라고 도무지 말할 수 없다. [중략] 연합의 원리는 우리 시대에 긍정적이 아니라 부정적이아. 그것은 도피요, 파괴요, 속임수다. … 단독자가 온 세계에 직면해서 윤리적 전망을 가질 때만이 진정으로 서로 연합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Kierkegaard, The present Age(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40), 61-62쪽).

단독자/그리스도인
p. 176
결국 단독자가 된다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가 세속회된 시대에 키에르케고어는 정통 기독교를 다시 살리려고 하기보다는 모든 시간적인 간격과 거리를 뛰어 넘어 그리스도와 관계하는 순수 역설의 신앙을 회복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만이 문화와 인간 공동체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권력에의 의지
p. 177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쇼펜하우어의 경우처럼 단지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삶을 증진하고, 극대화하는 힘 그 자체에 대한 의지이다. 세계와 인간을 지배하는 원리가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은 플라톤과 칸트의 이른바 ‘예지적 세계’의 부정 뿐만 아니라 의식(정신)의 우월성에 대한 부정을 함축한다. 

주체/정신분석
p182
19세기의 낭만주의, 포이어바흐의 유기론(有機論), 니체 철학을 통해 발전된 이성비판, 혹은 주체비판은 20세기 학문으로 출현한 정신분석학과 구조 언어학 등과 결합하여 주체(이성, 의식) 중심적 사고에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주체는 존재의 근원 혹은 기원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과 언어를 통해 형성된 결과물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언어와 무의식/라캉의 기여
pp. 184-185
라캉 이전의 생각에 따르면 정신분석만이 무의식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며 이와 반대로 언어학은 전의식(前意識)적인 언어의 법칙성, 다시 말해 발화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법칙성을 대상으로 삼은 과학으로 생각되었지만 라캉을 통해 이런 통념이 깨어지게 된 것이다.
 
…{185}한편으로 라캉은 프로이트를 언어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프로이트 사상에 담겨 있던 상징론을 발굴해낼 수 있었고 이것을 통해 종래의 생물학적 프로이트 해석이 지닌 일면성과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라캉은 대체로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 이론에서 출발했지만 정신분석과 임상경험을 통해 이들의 실재론적 혹은 본질주의적 언어 이론에 중요한 수정을 가할 수 있었다.

주4)라캉은 프로이트를 언어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프로이트 사상에 내재된 상징론의 풍부성을 보여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이트 사상의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유기론을 완전히 무시한 결과를 가져 왔다. 이러한 일면성 …

라캉/시니피에․시니피앙
pp. 192-193
라캉에 따르면 증상과 언어표상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똑같이 무의식의 의미를 드러내는 시니피앙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삼분법은 시니피에(무의식적 사고 내용)와 시니피앙(증상과 언어적 시니피앙)의 양대 축으로 환원되고, 그 결과 프로이트의 사물 표상은 무의식의 시니피앙으로 해석되었다. 이제, 프로이트가 무의식(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물 표상)의 작업방식으로 보았던 압축과 대치는 사물 표상을 형성하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모든 시니피앙, 즉 모든 의미 생산 수단으로 이해된다. 압축과 대치는 라캉에 이르러 사물 표상의 방식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언어의 근본구조로 이해되었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은 구조로 짜여 있다(L'inconscient est structuré comme un langage)", 혹은 ”무의식은 타자의 언술이다“(J. Lacan, "Fonction et champ de la parole et du langage en psychanalyse", in: Ecrit, 265쪽)라는 라캉의 잘 알려진 명제는 이와 같은 배경에서 나온 말이다. 이 명제들은 무의식이 곧 언어적인 시니피앙임을 주장하기보다 무의식이 의미있는 것으로 현현되기 위해서는 언어의 형식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 ”시니피에는 시니피앙을 통해서 부단히 미끄러지“는 말도 이제 무슨 뜻인지 밝혀졌다. 시니피에는 시니피앙을 통해서 완정히 표현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어떤 시니피앙도 무의식을 완전히 지칭할 수 없다. 시니피에가 해독되기 위해서 시니피앙이 있어야 하고 이 시니피앙은 또 다시 다른 시니피앙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시니피에는 결코 완벽하게 파악될 수 없는 환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야콥슨/라캉/은유와 환유
pp. 200-201
야콥슨은 은유가 이미 앞서 존재하는 의미 유사성에 근거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본래’ 의미와 ‘비본래’ 의미를 구분하는 전통적 도식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은유는 본래 의미를 다만 상징적으로 혹은 비본래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며, 의미의 인접성에 근거한 환유도 환유 이전에 이미 고정된 의미 인접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환유 자체는 대치를 가능하게 하는 인접 맥락을 생산하기보다 대치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맥락을 표현할 따름이라고 본 것이다. … {201}라캉은 이 점에 있어서 야콥슨의 생각에 철저한 수정을 가한다. 즉 은유와 환유는 시니피앙에 선행한 의미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은 시니피앙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니피앙을 통해 의미가 생산되기 이전에 어떤 고정된 시니피에나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라캉은 강조한다. 그러므로 시니피앙의 수평적 대치가 언어의 환유적 표현이고 새로운 의미 생산이 은유적 표현이라고 라캉은 보고 있다. 은유와 환유는 2차적인 수사학적 수단이 아니라 시니피앙 자체가 지닌 기본구조이다. 언어가 곧 은유적이며 동시에 환유적이다. 라캉은 결국, 은유와 환유를 통합축과 계열축으로 본 야콥슨의 형식을 따랐을 뿐이고 그 내용과 언어관에 있어서 야콥슨과 라캉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거울단계/타자
pp. 205-208
거울 단계는 자아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동일시 과정을 거켜 형성된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자아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근원적인 명증적 존재가 아니라 구성된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아 구성은 상상적 질서 속에서 완결되지 않는다. 자아는 상상적 질서에서 상징적 질서로의 이행을 통해 보다 성숙된 사회적 자아로 형성된다. 여기서 라캉은 자아, 즉 주체는 근본적으로 타자를 통해, 즉 자기 자신과의 분리를 통해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206}라캉은 ‘자아’ 개념이 자기 자신과의 근원적인 소외를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아는 그 자신이 아닌 타자의 자리(le lieu de l'Autre)에서 확인된다. 다시 말해 자아는 타자가 나에 대해 말하고 나에게 바라는 바를 곧 내 자신으로 확인(동일시)함으로써, 그리고 타자가 나에게 상징적 질서 속에 배정해준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일정한 자기동일성을 획득한다. 자아는 먼저 자기의 내재성에 머물러 있다가 나중에 타자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타자를 통해서 비로소 자아가 자아로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자아를 자아로서 구성하는 것은 곧 타자의 언술이며, 타자가 나의 욕망을 일으키고, 나의 욕망에 일정한 내용을 부여한다고 라캉은 생각한다.
…{208}나는 내가 스스로 의식할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에 내 자신고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다. 타자의 언술은 나를 사로잡고 있으며 내가 스스로 만든 나의 모습을 부단히 깨뜨려 버린다. 그러므로 무의식적 언술의 결과인 증상드로 인해 나의 동일성이 흔들리고 나는 또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고 거듭 되뇌이게 된다.

타자/허용과 금지
p. 211
아이는 허용과 금지를 명시하는 법이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다 혀용되고 모든 것이 가능한 곳에서는 욕망이 있을 수 없다. 제한이 없는 곳에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는 단지 사물들만 존재하는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대와 욕망, 금지와 허용, 규범과 의무 등이 존재하는 (타자의) 언술의 질서 속에 태어난다. 아이는 이 질서 속에서 타자의 욕망이 자신에게 가해오는 제한을 끊임없이 체험한다. 타자는 나의 욕망을 인정하거나 거부하고, 허용하거나 심판한다. 달리 말해,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인정을 갈구한다. 

욕망/욕구/인정/타자
pp. 213-216
라캉에 의하면 욕망을 욕구와 같은 차원에서 보면 인간 욕망의 기본 구조를 완전히 곡해하게 된다. 욕구의 경우와 반대로, 욕망은 하나의 일정한 대상을 갖지 않는다. 욕망의 대상은 수시로 변할 수 있다. … 나의 욕망은 나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214}무의식에 의해 계속 전이, 대치될 수 있다. 
… 나의 욕망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함으로써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인정은 ‘거리를 함축한다. 내가 타자의 인정을 바란다고 할 때, 나는 타자가 나를 그와는 다른 존재, 즉 타자임을 인정해주길 바란다. 타자는 나를 욕망의 주체로 인정함으로써 타자가 나에게 줄 수 없는 대상을 내가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215}“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 첫째, ‘타자의 욕망’이라고 할 때 소유격을 목적 소유격으로 이해한다면, 이 명제는 욕망이란 늘 어떤 다른 것을 욕망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욕망에는 종착점이 없다(Le désir n'a  pas de terme final)"라는 것이다. 둘째, ‘타자의 욕망’이라고 할 때 소유격을 주어적 소유격으로 이해한다면, 이때 타자는 처음에는 (즉 상상적 질서 속에서는) 어머니이고 그 다음에는 법(아버지의 이름을 통해 상징되는 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셋째, 타자란 말은 상호 주관성, 곧 상호 인정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인정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넷째, 욕망은 무의식의 욕망이다. 이때, 타자는 곧 무의식을 일컬을 수 있다. 다섯째, 타자는 욕망을 야기시키는 상징적 질서를 가리킨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에게 결핍된 것을 타자는 결코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216}타자의 인정히 함축하는 바의 상징적 거리는, 타자의 언술에 대해서 나의 욕망이 상대적 자유를 지니고 있다는 것과 나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과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타자에 의해 구성되지만, 그러나 타자에 의해 완전히 메울 수 없는 모자람이 여전히 남는다는 것이다. 

주체의 불확실성과 자유
pp. 217-219
라캉의 관점에 따르면 ‘본래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자신에 관해서 말하는 것 외에, 분석가나 나에게서 찾아낼 수 있는 어떤 고정된 나의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동일성은 내가 말하는 것, 타인이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완전히 의존해 있다. … 분석가는 침묵을 통해서, 나 자신의 존재와 나의 욕망의 대상이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할 따름이다. 즉, 침묵을 통해서 분석가는 내가 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상상적인 자아가 그렇게 자명한 것이 아님을 보여줄 뿐이다.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바라야 하는가?’에 대해서 어떤 결정적인 해답도 주어질 수 없다.  

…{219}내가 하나의 시니피앙(하나의 상)을 내 자신으로 동일시할 때 나는 그 시니피앙의 결과물이다. ‘자아’는 근원적 동일성을 그 자체로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자기 동일시를 통해 구성된 산물이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자화상이 근원적 자아가 아니라 동일시의 산물이요, 따라서 오인의 결과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할 때,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되고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해탈의 불가능성
p. 221
근원적인 총체성이나 원초적 합일을 향한 지향은 이렇게 보면 삶의 주체인 자아가 결국 분리와 소외를 통해 타인과 관계 맺고 주변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마치 미분적 삶, 소외되지 않는 삶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하나의 ‘상상적 허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근원적인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전통, 언어와 분별 세계를 뛰어넘어 진정한 자유와 해탈을 실현코자 하는 선불교나 노장철학은 잃어버린 낙원을 그리워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꿈에 지나지 않는다.  

레비나스/라캉의 한계
p. 222
라캉의 이론은 서구 철학에 깔려 있는 로고스 사상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라캉은 이것을 더 강화한 셈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은 본질적으로 언어를 통해 표현될 수 없음을 강조했지만, 라캉은 무의식조차도 언어적인 구조로 파악한 결과 언어를 벗어난 어떤 현실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시켜 버리고 말았다. … 라캉이 말한 자아와 타자의 분리, 상상적 질서와 상징적 질서의 분리를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바로 이 분리는 인간의 책임과 자기 결정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다. 이 분리 가운데서 초월 가능성을 보여준 예는 레비나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레비나스도 라캉과 마찬가지로 서양 철학의 주체 개념을 혹독히 비판하지만 그에게서는 윤리적 주체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언어와 욕망의 변증법적 순환구조, 그것의 전체주의적 틀을 벗어날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전체성에의 반대/평화의 철학
p. 224
레비나스는 전체성의 철학, 또는 전쟁의 철학에 대항해서 어떤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인격적 가치와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평화의 철학을 구축하고자 한다. 

주체의 출현/잠/레비나스
pp. 228-230
"역설적이게도 의식은 무의식을 통해 규정된다“(E. Levinas, De l' existence à l'existant, 115쪽) … 의식은 우리가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일 잠을 잘 수 없으면 인간의 의식은 영원히 깨어 있어야 하고, 쉼없이 활동을 계속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우{229}리는 생각을 중단할 수도, 끝낼 수도, 다시 시작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어떤 주도권도 가질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의식도 ‘있다(il y a)'는 사실의 운명을 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익명성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증거이다. 잠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 의식으로 되돌아올 수 있고, 또 다시 의식 활동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우리의 의식은 항상 위치가 있는 의식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에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고, 자기 자신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영원한 진리”로만 살 수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 돌아와 쉴 수 있어야 한다. 잠은 우리의 의식이 구체적인 ‘여기’와 ‘지금’에 관계할 수 있는 ‘장소’이다. … ‘여기’에서 또다시 일어나는 순간, ‘지금’이라는 순간을 통해 삶을 다시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활동에 대해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자리에 돌아가 다시 일어설 때, 우리 자신은 홀로 설 수 있다. 홀로서기와 더불어 비로소 무엇이라 이름 부를 수 있는 주체가 등장한다. 

자아/홀로서기
p. 230
현재는 항상 새로운 시작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한 순간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ㅇ르 새로운 시작으로 긍정하는 그 무엇, 곧 자아(自我)와 관계한다. 자아는 현재 이 순간에 “바로 여기에 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자아 자체이다. … ‘지금, 여기’에서 자아는 잠자고, 일어남으로써 ‘있음’의 숙명을 망각하고 자기 자신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자아의 자기 정립을 레비나스는 초기 철학에서는 ‘홀로서기(hypostase, 실체)’란 말로 표현한다. 

‘잠’에서 ‘거주’로
p. 234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레비나스는 잠과 휴식을 통해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렸지만 『전체성과 무한』에서는 거주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그린다. 

전체성과 무한
pp. 235-236
'전체성과 무한‘ … 한편으로 이 두 개념은 대립되는 개념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무한의 이념은 전체성(또는 내재성)을 근거지어주는 것이다. 전체성은 인간이 자기실현을 추구하면서 만든 체계요, 타인들과 함께 구축하는 세계 질서이다. 여기서 존재 의미는 세계 지평의 한계 내에 제한된다. 그것은 죽음과 함께 끝나기 때문에 삶이 결코 절대적인 의미를 줄 수 없는 의미이다. 전체성은 동일자의 지평이고 인간의 자기 실현의 원 속에서 무한히 자기를 확장해 가는 힘이다. 그러나 무한은 동일자의 원 안으로 포섭될 수 없는 이념이다. 무한은 우리의 존재 지평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다. 무한의 차원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막연하게 ’있다(il y a)'는 사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무한은 구체적인 현존과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우리에게 호소하는 타인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막연하게 무의미하게 존재한다는 사실과 구별된다.  

얼굴
p. 238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은 동정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눈길은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무력함 자체가 곧 도움에 대한 명령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얼굴은 직설법이 아니라 명령법으로, 한 존재가 우리와 접촉하는 방식이다. 그것을 통해 얼굴은 모든 범주를 벗어나 있다”(E. Levinas, Difficile Liberté, 270쪽).
타인의 얼굴의 현현은 하나의 모순에 직명하게 만든다. 얼굴은 타인의 무력함과 주인됨을 동시에 계시한다. 가장 낮은 것은 가장 높은 것과 결합한다. 


타자/제3자/비대칭성
pp. 240-241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부버가 말하는 ‘너’와 구별된다. 타자는 나와 너의 친밀한 관계 속에 용해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나에게 거리를 두고 있고 나에게 낯선 이로, 나의 삶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자로 남아 있다. 각자는 타자에게 “낯선 이”로 남아 있다. 타자의 얼굴의 출현은 그러므로 친밀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측면을 보여준다. 타자는 나에 대해서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이다. 이 무한성은 익명성이 아니다. … 무한성은 내가 다른 모든 사람과, 지금 여기에 부재하는 제3자와 맺는 구체적인 결속을 뜻한다. 가까이 있는 타자는 다른 모든 사람과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타자는 나와 마주한 너가 아니라 제3자, 즉 ‘그’이다. …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인간의 보편적 결속과 평등{241}의 차원에 들어간다. 
레비나스의 이러한 견해는 매우 급진적이다. … 타자는 나와 동등한 자가 아니다. 그는 그가 당하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 나의 주인이라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비대칭성, 불균등성이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는 기초이고, 이런 의미의 평등만이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의 법을 폐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리적 주체
p. 242
자아는 그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뿐만 아니라, 타자로부터도 자신을 분리함으로써 스스로 개별적인 자기성을 확립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주체성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의 존재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타인과 윤리적 관계를 형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타인은 인간에게 새로운 존재 의미를 열어주고 지배관계를 벗어나 서로 섬기는 관계에서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본다. 

타자/죽음/무력성
pp. 244-245
죽음과 타자는 둘 다 계산할 수 없는 미래이다. 그러므로 죽음이나 타자는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보일 수 있다. 죽음은 일종의 살인이요, 가해이며 폭력이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죽음의 폭력은 마치 전제 군주의 폭력처럼 우리를 위협한다”고 말한다(E. Levinas, Totalité et infini, 211쪽)고 말한다. 이 때문에 죽음에 대한 불안은 타자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타자도 마치 죽음처럼 나의 세계로 뛰어들어와 내가 가진 것을 앗아가는 자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 타자는 그 초월성(외재성) 때문에 마치 죽음처럼 나의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의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과 무력성 때문에 나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존재이다. 타자의 무력성과 성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나는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서 그를 섬겨야 한다는 요청을 받는다. 
… 자기 중심적인 의미부여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타자를 위한 선행을 통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성애와 아이
pp. 246-247
레비나스는 에로스를 감추어진 것을 찾으려는 몸짓이라고 본다. 여자는 남자에게 감추어진 것은 보여준다. 감추어진 것을 찾는 몸짓은 애무로 나타난다. … 이것은 성관계에서 한층 고조된다. 감추어진 것과 접촉하지만 아직 보지 못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그 ‘감추어진 것’은 무엇인가? 
… 놀랍게도 레비나스는 이 감추어진 것, 전적으로 타자적인 것의 발견은 아이의 출산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본다. … {247}아이의 출산으로 나와 타자 사이에 일어난 분리와 결합의 끊임없는 운동이 멈추게 된다. 아이는 “타자가 된 나(moi étranger à soi)"이다. 나는 아버지가 됨으로써 나의 이기주의, 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로부터 해방된다. 자아는 이제 타자와 타자의 미래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미래와의 관계를 ‘생산성(비옥성)’이라고 부른다.
생산성을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유한성으로부터 구원받는다. … 나는 에로스의 관계를 통해 감추어진 미래를 찾아나서고 이 미래를 아이와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한다. … 시간은 아이를 통해 다시 젊어지고 푸르름을 띄게 된다.

신체
p. 248
인간은 타인과 윤리적, 사회적 관계를 갖는 정신적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이 정신적 존재임은 신체를 통해 실현된다. 신체를 통해 체험하는 존재 무의미, 잠과 불면은 인간이 단순히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찾고 의미를 지향하는 정신적 존재임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는 사회, 경제적 관련을 벗어나 따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레비나스는 누구보다 강조하고 있다. 

이타행의 가능성
pp. 249-250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의 이기적인 욕구를 제한하고 타자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타행(利他行)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만일 내 자신 속에 있지 않다면, 어떻게 나는 나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타자를 나의 존재의 무게 중심으로 삼을 수 있는가? 레비나스의 답은, 타자의 얼굴의 현현으로 나에게 ‘형이상학적 욕망’이 창조되고 이 욕망으로 인해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요청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수 있다. … 무엇으로 인간에게 이타행을 실현케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레비나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물음이다.
 
형이상학 비판
pp. 252-253
현대의 형이상학 비판 … 첫째는 형이상학을 비과학적으로 보는 태도이다. 형이상학은 의미 없는 진술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형이상학적 명제는 명제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은 검증할 수 없는 사이비 문장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 둘째는 앞의 주장과는 반대로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이 지나치게 과학적이었다고 보는 태도이다. 형이상학은 과학이 됨으로써 스스로 그 존재 의의를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하{253}이데거와 하이데거의 영향을 크게 받은 유럽대륙 철학자들, 그리고 일부 미국 철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포퍼/비판
pp. 261-264
지식은 한 개인의 인식 행위와 완전히 독{262}립해서 발전하고 성장한다 … ‘인식 주체 없는 인식론(Epistemology without a knowing subject)' … 현대 과학 철학에서 포퍼가 기여한 바는 상당히 많다. 첫때, 그는 과학행위란 사실을 수집하고 그것으로부터 이론을 추출하는 귀납적 과정이라기보다는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problem solving activity)임을 밝혀준다. … 둘째, 과학의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에 존재한다 … 따라서 시행착오의 방법을 비판적으로 계속 유지하는 것이 곧 과학의 방법이다. … 셋째, ’과학적 객관성‘은 무엇보다도 비판적 방법의 객관성에 달려 있고 ’객관적 사실‘보다는 비판적 전통의 맥락에서 성립된다. … 과학적 활동은 개인적 관심사가 아니라 상호 비판과 상호 협조를 통한 과학 공동체의 사회적 관심사이다. 
… 포퍼 철학에서 난점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 첫째, 과학과 비과학 특히 과학과 형이상학의 분계의 기준으로 경험적 반증 가능성을 내세우지만 반증 자체는 단지 경험적이기보다 항상 이론에 의해서 가능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 {263}만일 그렇다면, 형이상학적인 관점은 이미 과학적 명제라고 부르는 체계 속에 얼마든지 들어와 있을 수 있고 이것은 과학을 비과학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와 같은 것이 과학은 과학으로 제대로 서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둘째, … 형이상학을 지나치게 좁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 형이상학은 이론에 그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미적 삶과 관련해서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포퍼는 거의 도외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언어에 대한 그의 입장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오직 {264}논증적인 언어만이 인식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언어에는 설화적, 담화적, 윤리적인 기능도 있다. 참과 거짓 뿐만 아니라 좋고 나쁨, 옳고 그름도 역시 중요하다. 이렇게 볼 때, 포퍼는 논리 실증주의보다는 한 걸음 진전했다고 할 수 있으나 형이상학을 과학의 전단계로 본 콩트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폴라니/포퍼
p. 265
인간이 사라지면 인간이 발명한 상징(기호)는 해독되지 않는 기호 체계로 그 자체는 아무런 정보를 줄 수 없다는 것이 폴라니의 생각이다. 이 점에서 폴라니는, 인식 주체를 제거하려고 했던 포퍼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암묵지/초점의식․보조의식/폴라니
pp. 266-268
암묵지(tacit knowledge) … {267}지식은 수많은 추상과정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마치 실재와는 상관없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지식은 언제나 실재와의 연관성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이것은 암묵지의 ‘존재론적’ 차원이다. 이것과 구별하여 폴라니는 암묵지의 인식론적 차원을 주로 다룬다. 여기서 폴라니는 게슈탈트 심리학에 힘입고 있음이 드러난다. 
… 초점 의식(focal arwareness)과 보조 의식(subsidiary awareness)의 기능적 관계 … 명시적으로 표시된 수학공식이나 이론은 그것을 읽고 의미를 이해하는 의식과 통합됨으로써 {268}지식으로 수용될 수 있다. 어떤 지식에나 그와 같은 통합 과정(이것을 ‘from-to relation'이라고 부른다) 속에 암묵지가 존재한다.

인격적 지식/암묵지
pp. 270-273
우리의 지식이 고도의 과학적 지식이라 하더라도 그 지식을 가능케 하는 지적 수단이나 도구에 의존함으로써, 내시경을 볼 때 마치 우리 눈을 신뢰하듯이 그렇게 신뢰함으로써 가능한다는 것이다. 
… {271}“어떤 사람이 어떤 이론을 ‘검사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가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다른 이론과 가정(그가 어떤 이론을 검사하는 동안에는 이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초점적으로 의식할 수 없다)에 의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Meaning, 37쪽). 
…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 수 있다(We can know lore than we can)" … 우리의 지각 뿐만 아니라 과학적 지식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로부터 완전히 초연함(detatchment)으로 성립된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 지식이요, 거주를 통한 참여(personal knowing-participation through indwelling)"이다(Meaning, 44쪽).
폴라니는 포퍼의 ‘인식 주체가 없는 인식론’ 대신 인식 주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인격적 지식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인식주체의 참여를 통한 인격적 지식의 인식론’을 펼쳐 보였다.
…{272}첫째, 지식은 사실에 근거한 논리적 논증 과정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폴라니는 보여준다. … 폴라니는 포퍼의 과학과 비과학의 분계기준인 반증 가능성의 요구를 거부한다. … [273}형이상학은 현실의 과학적 접근뿐만 아니라 도덕적 판단을 가능케 하는 ‘근본 신념’과 관계 있다. …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을 수 있다.
둘째, 폴라니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분리가 정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 자연과학이나 인문학은 모두 ‘인격적 지식’으로 인해 현실과 관계하고 현실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자연과학은 생각하는 것보다 덜 객관적이고, 인문학은 생각하는 것보다 덜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포퍼/폴라니
p. 274
라이엔바흐(H. Reichenbach)의 구분법을 이용한다면 포퍼는 정당화의 맥락에 머물러 있고 폴라니는 발견의 맥락 속에서 정당화의 맥락을 찾아보려고 한다. … 포퍼는 논리적 과정만을 중요한 요소로 본 반면 폴라니는 인간의 행위의 종합적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형이상학의 두 차원
p. 275
한편으로 형이상학에는 주관적인 차원이 있다. 도덕적 태도, 지적 열정, 이론의 미적 차원에 대한 감각, 종교적 관점 등 주체로서의 인간의 자기 이해와 관련된 차원이 있다. 다른 한편으론 형이상학에는 객관적 차원이 있다. 형이상학은 인식하고 행동하고 생활하는 인간 주체에 대한 자기 인식 뿐만 아니라 대상 세계 즉 현실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 진리에 대한 열정과 현실의 의미추구를 자신의 과학적 활동의 본질적 부분으로 볼 수 있는 과학자는 바로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형이상학자가 되는 것이다. 

근대 휴머니즘
p 278
데카르트 철학에서 보듯이 인간의 본질은 사유에 있고, 사유 가운데에서도 자기 사유, 즉 자기 의식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모든 사물과 구별해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특징이다. 인간은 각자가 이러한 자기 의식의 내면성을 갖는 한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다. 근대적 이성과 자유의 본질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이성과 자유란 어떤 다른 무엇에 의존함이 없이 오직 자기 의식을 바탕으로 자기와 사물을 인식하고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투명한 존재요,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를 규정하는 자율적 존재이가. 이것이 근대 휴머니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윤리․실천의 회피
pp. 290-291
문제는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로 과연 철학의 종말을 극복하고 인간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과학 기술과 경제적 효율성의 시대에 기술의 유용성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고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은인자중할 수 있는 사유를 하이데거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물음을 던지는 것을 경건한 사유의 태도로 보는 입장에서 드러나듯이 현실에 깊이 관여하면서도 동시에 현실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현실의 분질에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태도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는 현대가 당면한 핵전쟁의 위협이나 환경문제에 관해서 어떠한 윤리적 태도도 수용하지 않는다. 그의 철학에는 윤리적사유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그의 수많은 저작 가운데에는 실천과 윤리 문제에 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거의 고의적으로 이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 도덕철학에 관한 그의 침묵은 형이상학적 사유에 대한 비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에 따르면 윤리학은 형이상학적 사유에 속한다. 

하이데거 비판/레비나스
p. 292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 하이데거의 철학을 ‘중립성의 철학(la philosophi du neutre)' 또는 심지어 ’유물론‘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의 존재는 퓌시스(physis)이고, 그것은 전혀 어떤 얼굴을 가지지 않은 익명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익명적 존재에 자신을 내어 놓은 하이데거의 사유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악, 현실적인 불평등과 불의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다. ’존재 저쪽의(epekeina tes ousia)'(플라톤) 선의 이념에 대한 갈망을 우리는 하이데거 철학에서 찾아볼 수 없다. 

무한의 우위
p. 293
전체성의 이념을 무한의 이념과 엄격히 구별하고 무한의 이념이 전체성의 이념보다 철학적 우위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그가 두 이념을 구별하면서 무한의 이념에 우위성을 부여한 것은 서양 철학 전통과의 결별 특히 존재를 의식 내재성으로 보는 자아론적 존재론과의 결별을 뜻한다. 

형이상학의 우위
p. 296
전체성에 대한 비판은 하이데거의 비판과 사실상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하이데서와 다른 것은 전체성을 존재론에 둔다면 전체성을 벗어나 타자로의 초월이 가능한 초월을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이라 부르고 “형이상학은 존재론에 선행하다”는 명제를 내세운다(E. Levinas, Totalité et Infini, 12쪽)

타자/무한/신
pp. 299-300
레비나스는 데카르트의 이념을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바꾸어 사용하였다. 타자의 얼굴은 내 속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데카르트의 무한자처럼 문자 그대로 ‘위에서부터 나타남(épiphanie)'이요, 타자는 마치 신이 현현하듯이 나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한의 이념은 높음과 고귀함이요, 저 너머로의 상승을 {300}표시한다. 레비나스가 무한의 이념을 통해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는 것은타자를 자아(동일자) 속으로 끄집어들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오직 타자와의 사회적, 윤리적 관계를 통해서만 신이 우리에게 현현하며, 타자와의 관계가 신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타자와의 분리는 동시에 자아가 그 무엇으로부터 소외될 수 없는 독립적인 존재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타자의 타자성 뿐만 아니라 자아의 자기성과 독립성이 인정되지 않으면 자아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 즉 진정한 초월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력성
p. 306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은 하지만 단지 외적 자극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충격을 수용할 수 있는 수동성과 구별된다. 오히려 이것은 ‘매맞을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는 예레미아 애가 3장 30절을 인용한다. “때리려는 사람에게 뺨을 내주고, 욕을 하거든 기꺼이 들어라.” 이것은,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고난을 받거나 낮아지라는 것이 아니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경우 그와 같은 자리에 처할 수 있으라는 뜻이라고 레비나스는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