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Us, #Jordan_Peele, 2019)
히치콕(Alfred Hitchcock, 1899~1980) 이후 작가주의 반열에 오른 공포물이 몇 있긴 하다.
《악마의 씨》(Rosemary's Baby, 1968)와 그 계보를 따라 《오멘》(The Omen, 1976)이 탄생했고, 《엑소시스트》(The Excosist, 1973)와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 1991), 《쏘우》(Saw, 2004)가 그 뒤를 잇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한국적인 작가주의 공포물로 《알포인트》(R-POINT, 2004)를 꼽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기존의 뻔한 호러 문법을 깨는 새로운 내용이나 형식의 실험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다. 모든 예술적 성취가 형식실험의 전복성이라는 점은 영화에서도 통한다.
만약 형식의 실험이 일정한 해석공동체(관람객이나 비평가, 또는 둘 모두)의 기꺼움을 얻으면, 그 영화는 다음 번 작가들에게 오마쥬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어스》는 사실 획기적인 시네마틱 컨텐츠라고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하긴 그럴려면 돈이 필요하다). 스토리텔링은 흔한 미국적 가족주의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며, 소재는 온갖 기존 호러물을 뒤섞은 것이다.
이를테면 폐쇄 공포를 일으키는 으스스한 별장, 놀이 동산 기구들과 공포의 집, 부지깽이 하나로 괴물들을 퇴치하는 엄마와 어린 자식들(상대적으로 아빠는 영화 내내 무능하고, 시덥잖은 농담이나 던진다), 가위로 신체를 절단하는 슬래시 등등.
수많은 클리셰들이 오버랩되거나 스쳐지나가고(심지어 《혹성탈출》도 등장한다-아들의 가면) 혼재된다. 따라서 형식적으로도 패스티시의 범주를 넘어설지 의문이다.
다만 조던 필(1979~ )의 전작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사람들을 위해 꽤나 다른 방면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영화 전반에 펼쳐 놓긴 한다. 《겟 아웃》에서 그것이 인종주의에 대한 적대감이었다면 이번에는 기묘한 서발턴 감수성이 필름에 입혀지면서 하층계급에 대한 공감을 생산한다. 거기다 최신의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소수자인 클론이 전면에 나선다.
그러나 전작에서 인종적 편견에 날렸던 강력한 스트레이트 펀치가 이번에는 모호한 공감 안에서 ‘쉭, 쉬, 쉿’ 소리만 요란하다고 할까?(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일까? 진짜 주먹소리일까?)
관대함을 발휘하도록 하자. 요컨대 이 영화는 작가주의 호러물의 반열에 오르기보다는 그 호러물들을 오마쥬하고자 애를 쓴 평작이다. 아니, 아니 그렇다고 감독이 그만한 역할을 못한 것은 아니다. 이만한 클리셰들을 모으고 노련하게 편집해 내는 것도 작가주의(?)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하긴 너무 많은 기대가 이 영화의 어떤 탁월한 장면을 놓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내가 잘못 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작가주의(씩이나 되는) 호러’라는 내 기대치와 미적 감각이 애초에 글러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치자. 그래 그렇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좀 너무하지 않나? 그건 반전도 아니고 뭐도 아닌 것 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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