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인간 행동의 기반일 뿐 아니라, 노동하는 주체에 합당하게도 속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노동자가 신체적 생존을 위한 투쟁에 내몰릴 때 가장 명확해진다. 인간 노동의 자연적이고 신체적인 측면은 동일하지 않지만, 신체적 인격의 재생산은 계속 수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연은 간혹 신체적인 측면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의 자연의 생명체들이 타자들, 또는 삶/생명 또는 사실상 생명 과정과의 관계형성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질은 그의 자연[적 본성]이 아니지만, 그러한 두 개념이 서로 겹쳐 있다는 것도 당연하다. 인간은 생존만을 위해, 즉 스스로를 살아가는 존재로 재생산하기 위해 노동할 때, 그들의 본질을 잃어버린다.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labour)은 생존 노동과 다르다. 일(work)의 고유한 의미를 박탈당함으로써, 인간은 그가 창조하는 대상 안에 자신의 의식을 실현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점차적으로 그의 본질적인 역능의 실현보다 그의 생존과 연관되며, 이 지점에서 신체적[물리적] 본성과 의식성은 서로 간에 이탈한다. (...)
인간 유기체는 그 자신의 삶/생명을 위해 비유기적 자연과 결속되어 있으면서, 스스로 비유기적으로 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몇몇 측면들에서는 활력을 가지고, 다른 측면에서는 활력을 빼앗기는 두 측면 모두에 속하는 존재자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신체는 그것의 자연적 세계 안에서 어떤 존재론적으로 분리된 실체(entity)가 아니라, 나누어지거나 통합될 수 있는 개체들(terms) 간의 관계적 과정이다. 신체는, 만약 분열되거나 파괴된다면, 이러한 진행중인 과정이 신체를 불안정성으로 던져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자연 안에 그리고 거기 속해 있으며, 갱신을 요청하는 그리고 그러한 갱신의 조건들을 요청하는 어떤 진행중인 상호교환 과정이다.
초기 맑스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삶의 욕망이 보다 더 가능해지는 조건들, 즉 생존하거나 생존에 실패할 노동의 조건들, 생존하거나 생존에 실패할 노동과정의 형태들이 있다는 것이고, 삶의 욕망은 언제나 이 세계 안에서, 그리고 특유한 방식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세계가 더 이상 지속하지 않게 될 때, 그리고 존속성이 탈취될 때, 그때에 삶의 욕망에는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가? 만약 살아있음이 이 살아 있는 신체와 그것이 불가피하게 엮여 있는 어떤 비유기적 자연 사이의 상호교환이라면, 그리고 생명유지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조직이 그러한 상호교환을 파괴한다면, 또는 파괴하려고 위협한다면, 삶의 욕망이 위험에 처하는 것은 당연하다.
매개체로서,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는 언제나 이 신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이 신체는 타자들과 삶/생명 자체의 조건들에게로 뻗어 나간다. 지속이든 삶의 욕망이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는 없다. 이것들은 삶/생명의 조건들에 기대어 활력이 주어지거나 죽게 되는 지속성을 위한 사회적 가능성들보다 덜 본질적인 능력들이거나 속성들이다.
이러한 사회적 가능성들에는 노동의 현존이나 부재, 신체들을 손상시키거나 쇠락하게 만드는 노동 형식들, 불안정한 조건에 따라 고용된 자들을 주기적으로 해고하는 경제 구성체들, 연금축소를 암시하는 정책들, 또는 사회 복지와 보호의 완전한 상실 상태를 포함한다.
그리고 이 상호의존성의 인정, 그리고 그것이 함축하는 살아가는 주체의 탈중심화는 상호의존성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방법과 아마도 궁극적으로 인간 조건과 지속가능해지고 지속가능한 환경 간의 엄격한 구별을 거부하는 연대(solidarity)의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인간은 자연 안에 있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자연을 단순히 지식의 대상으로 간주하지도 않지만, 그 앎이란 처음부터 생기론(vitalism)의 형식을 그에 따라 예화하지 않는, 그런 생명적인 것이다. (...)
이 세계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위한 비판의 실천은 다양한 종들의 파괴를 가속화하는 것과 우리가 너무나 잘 알게 된 세계의 존속을 위협하는 기후 변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또한 그 안으로 개입해야 한다.
비판적인 사회정의의 어떤 기획도, 생태적 파괴의 가속화를 멈추기 위해 탐구되는 바, 이 세계 안의 모든 생명체들이 평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가정, 즉 평등성의 기반 위에서 그들의 풍부한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며, 필요, 욕망 그리고 의무의 수준에서 살아 있는 세계에 구속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이 신체는, 자연의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해도, 그 신체에 구속되어 있고, 그 결속, 그 관계가 바로 우리가 지금 ‘신체’로 의미하는 바 그것이다."
- #Judith_Butler(1956~ ), 'The inorganic body in the early Marx: A limit-concept of anthropocentrism', <Radical Philosophy> (issue 2.06, winter 2019), https://www.radicalphilosophy.com/…/the-inorganic-body-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