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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힘과 강도: 『차이와 반복』 4장과 5장

by Nomadia 2021. 2. 18.

원문출처: Leonard Lawlor, ‘Power and Intensity: Difference and Repetition, Chapters Four and Five’, Deleuze and Guattari Studies 13.3,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9, 445453

 

힘과 강도: 차이와 반복4장과 5

 

저자: 레오나르드 롤로(Leonard Lawlor)

번역: 노마씨 박주영(본명: 박준영, 수유너머 104, nomadia@naver.com)

 

이 글의 제목이 암시하는 바는, 이 논문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의 힘(power)과 강도(intensity)를 논한다는 것이다. 푸코 이후 힘이 생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부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힘이 생산적이라는 주장을 이해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로지 들뢰즈가 프랑스어 단어 역능(puissance)’을 가지고 이라 부르는 바로 이해할 때에만 그러하다. 그러나 (잠재력potency, 역능puissance이라는 의미에서) 힘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푸코에게서 중심적으로 드러나는 ’[권력]과는 달리, ‘강도는 엄밀하게 들뢰즈의 것으로 여겨지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강도개념은 들뢰즈가 점점 더 강도적인 삶/생명을 옹호하면서 들뢰즈의 저작에서 셀 수 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상은 만일 우리가 안티오이디푸스천의 고원사이에 있는 어조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명백하게 오류이다. 이것은 분별없는 포기와 신중함 사이의 차이다. 하지만 나는 천의 고원에서의 신중함의 어조라는 것이 들뢰즈(또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점점 더 강도적인 삶/생명의 스타일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권력]과 마찬가지로 물어야 한다. 강도란 무엇인가? 힘과 강도는 들뢰즈의 1968년 저작인 차이와 반복와 관련하여 4장과 5장의 중심 개념들이다.[1] 사실상 4장과 5장이 가장 근본적이며 따라서 차이와 반복의 가장 중요한 장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차이, 반복 그리고 사유와 관련하여 철학사를 비판적으로 논한 이후(1, 2, 3)에 오는 4장과 5장은 힘과 강도라는 창조적인 두 개념과 더불어 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게 될 것처럼 개념들을 창조하기 위한 들뢰즈적인 철학하기의 시도에 상당한다. 하지만 5장에서 강도과 힘의 개념들은 둘 모두 이론적이거나 비-윤리적으로 보이지만, 들뢰즈는 우리에게 강도적 양의 어떤 윤리학을 마련한다. 이 윤리학은 천의 고원의 보다 신중한 어조를 예견하는 것이다(Deleuze and Guattari 1987).

 

4장과 5장은 여러 방면에서 연결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연결은 현실성에 대한 잠재성(potentiality)의 연결이다. 이 연결이 정확히 힘과 강도 간의 연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장에서 우리는 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발견한다. 5장에서는 강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을 발견한다.

 

I. 4: 잠재성(Potentiality) 또는 문제 전체는 이 영점들(zeros)의 의의에 놓여 있다.”

힘이란 무엇인가? 잘 알려진대로, 들뢰즈에게 힘(또는 잠재성virtuality)은 이념들 안에 거주한다. 4차이의 이념적 종합이 미분법의 역사로 시작하므로, 들뢰즈에게 이념들의 이념은 미분학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분법에 관한 이 난해한 입론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 미분법을 점점 더 공식적인 수준으로 밀어붙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이해하는 바는 기본저으로 그가 시간이 텅 빈 형식이라고 그가 부른 것, 그리고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앞선 1장에서) ‘추상’(abstraction)이라고 부른 것과 동등하다. 아마 독자들도 알고 있듯이, ‘추상이란 들뢰즈에게 (또는 들뢰즈와 과타리에게) 긍정적인 개념이다. 오직 추상만이 힘을 개시하므로 좋은 것이다. 나는 미분법에 관한 들뢰즈의 논의에 대한 단순한 접근법을 취할 것이다. 4장에서 들뢰즈는 미분을 무리수와 비교하고 일련의 정수와 무리수의 차이를 비교한다. 그래서 들뢰즈에게서 잠재성과 힘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무리수에 관한 생각으로부터 실마리를 찾을 것이다. 물론 미분은 변화율 연구의 방식을 함축하며, 라이프니츠의 표기법에서, 변화율은 비례식 dy/dx로 표현된다. 본래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비율에 관한 생각이 아니라, 무리수에 관한 것이다.

 

미분법의 역사에 관한 그의 논의에서 들뢰즈는 즉각 미분에 관한 역사적 논쟁을 무한소의 문제와 분리한다. 무한소 문제는 미분 논쟁을 지배해온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비례식 dy/dx0/0을 향한 비율적인 감소를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뢰즈가 말한 바에 따르면 문제 전체는 이 영점들의 의의에 놓여 있다”(Deleuze 1994: 171). 내가 알고 있는 한, 이 영점에는 두 가지 의의 있다. 첫 번째 의의는 들뢰즈가 미분적인 것의 첫 번째 작용’, 즉 탈잠재화(depotentialisation)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174). 미분적인 것의 첫 번째 작용을 탈잠재화(이 단어는 탈영토화와 닮았고, 따라서 추상과 극단적 형식주의와 닮았다)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에는 혼동스럽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잠재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잠재성virtuality이 가능성과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때, 들뢰즈는 이 주장을 탈잠재화의 작용에 근거하고 이다(174). 탈잠재화는 오직 실재화될 필요가 있는 선-형성된 가능성들의 이념으로부터 힘을 해방한다.

 

보다 특수하게, 탈잠재화는 비율상의 어떤 양적 또는 질적 전제들을 무화하(annihilates)거나 기각(cancels, 무효화annule)한다. 그래서 영점이란 이것이 첫 번째 의의인데 비율이 양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개체들(individuals)을 결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양적인 것과 관련해서 탈잠재화는 dy/dx 비례를 어떤 연속적 변화와 무한한 근접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Deleuze 1994: 172). 달리 말해 비례는 변화가능하고 일반적인 양으로부터 뿐 아니라 고정되고 특수한 양으로부터 탈잠재화되는 것이 분명하다. 양적인 것(어떤 특수한 값이나 일반적인 값 중 하나로 이해되는 양)으로부터 비례의 탈잠재화가 가져오는 결과는 비례 안에서 본성적인 또는 자연적인 차이, 즉 유적 차이를 변이성(variability) 또는 단순히 변화가능성으로부터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르다스-드물랭(Bordas-Demoulin)을 언급하면서(그러나 데데킨트로부터 아이디어를 취하면서) 들뢰즈는 이러한 본성적 차이를 진정한 절단’(genuine cut)이라고 부른다(172). 들뢰즈가 미분과 무리수를 비교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같은 방식으로 절단은 유리수 개념과 본성적으로 다른 무리수를 가리킨다”(172). 무리수는 유리수와 본성적으로 다른데, 무리수에 기반하는 비율이 언제나 비동등화가능성(unequalisable)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 비동등화가능성은 힘에 관한 들뢰즈의 개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나는 곧 이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어떤 경우에 이 양적?* 차이로부터 들뢰즈는 질적인 것 쪽으로 간다. 따라서 이제 질과 관련하여, 탈잠재화는 비율을 고정적이고 일반적인 질들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비율 dy/dx, 말하자면, 동등화될 수 있는 분수들과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비율은 다른 질과의 관계에서 취하게 되는 개별적인 값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에 비율은, 들뢰즈의 말에 따르면, 질적으로 상이한 다른 비율들과 방정식들을 생성하거나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 표현하는 바와의 차이를 남긴다. 따라서 양적인 탈잠재화가 순수 양화가능성을 초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질적인 탈잠재화는 순수 질화가능성을 야기한다. 그것이 표현하는 것과 본성적으로 차이나는 비율로써, 들뢰즈는 그것이 근거하는 것과 닮지 않은 어떤 기초를 명확하게 수립하고 있다.[2] 결과적으로 특수한 수의 값과 일반적 수의 값들로부터, 하나의 자기-동일적일 변항과 무한한 근사치들의 변화로부터 비율을 자유롭게 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비율을 진정한 기초 또는 발생적인 원천으로 수립하는 것을 통해, 탈잠재화는 비율적으로 비규정적인 것을 야기하며 따라서 연속적인 변화를 열어 젖힌다. 들뢰즈에게 연속적인 변화는 다양체, 즉 양적으로 무한한 계열들이자 질적으로 차이나는 계열들과 동의어이다.

 

연속적 변화의 생성은 비율의 힘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힘의 실재적 원천을 결정하지 않았다. 비율적 힘의 원천은 dxdy 비율을 나누는 선(bar)이다. 그 선의 역할은 문제가 되는 것이 dxdy 사이의 선 자체(‘추상적 선’)라는 것, 또는 보다 정확하게는 극한(limit)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는 극한을 그 자체로 파악하고자 애쓰고 있는 것이지, 그 외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파악하고자 하지 않는다. 만약 그 비율의 선이 어떤 고정된 변이(variable)나 끝점에 근접하는 어떤 변항과 관련된다면, 그때 그 선은 차이를 생성하지도 무한하게 연장되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서 무리수는 이 절대적인 선이나 극한이라는 난해한 생각에 빛을 드리울 것이다. 만약 어떤 비율이 나누어지는 정수 또는 그것으로 해를 산출하는 정수 중 하나에 기반하고 있었다면, 그때 비율은 무리수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분수이지 어떤 무리수가 아니다. 또한 이러한 분수에 따른 그 계열들은 축소되거나 완결될 수 있다. 반대로 무리수적 비율은 결코 완결될 수 없다. 이 비완결성이 힘이다(그리고 가능성은 아니다). 파이와 같은 무리수의 힘은 원의 반지름의 길이와 그 둘레의 통약불가능한 길이 간의 [비율적] 선이나 극한이 동등해질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비율에 있어서 힘의 실재적 원천은 비동등성(inequality) 또는 들뢰즈가 4장 후반부에(그리고 1장의 전반부에) ‘이질적인 것’(the disparate)라고 부른 것(Deleuze 1994: 205)이다. 나는 이 힘의 원천이란 것이 얼마나 낯선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비율적 선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그 이질성이나 비동등성을 통해 무한한 힘을 생성시킨다. 그러므로 이 원천은 미개봉된 힘의 저수지와 같은 어떤 것을 전혀 닮지 않는다.

 

이 낯선 힘의 원천은 우리를 영점의 두 번째 의미로 데려 간다. 영점의 두 번째 의미는 비율이 불변적’(immutable)이라는 것이다. 불변성(들뢰즈가 보르다스-드물랭에게서부터 다시 한 번 빌어온 단어인데[Deleuze 1994: 172])은 여기서, 비록 비율에 의해 생성된 계열들이 영점을 향해 감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도, 그 계열을 생성했던 비율 자체는 여전히 남는다는 의미이다. 그 비율 자체는 그것의 비동등한 선과 더불어, 이를테면 영점을 향해 내려가는 모든 계열들의 바닥에 존재한다. 계열에 속한 수들 중의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 비율은 영점으로 비춰지지만, 라이프니츠의 말처럼, 비율은 절대적으로 무일 수 없다’[3] 영점의 두 번째 의미는 들뢰즈가 4장 후반부에서 지적할 것처럼(202), 부정적 의미를 변형시키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거기에 어떠한 힘도 남겨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즉 우리가 말하자면 말소되어’(zeroed-out) 버렸을 때조차, 이러한 힘의 부재는 하나의 환상인 것이다. 비동등화가능한 것, 그러므로 무리수적 비율은 언제나 여전히 남아 있다. 또는 적어도 그것은 언제나 남아 있어야 한다.

 

II. 5: 현행성 또는 강도적 양의 윤리학

내가 말했다시피, 4장과 5장의 주요한 연결지점은 잠재성과 현행성(actuality) 사이의 연결이다. 5장에서 우리는 현행화로 진행하며, 현행화는 강도를 통해 발생한다. 강도란 무엇인가? 들뢰즈에게 강도는 아래에, 연장성(또는 양)과 질들 아래의 깊이(depth)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일반적 사물에 속하는 두 겹의 구별되는 특성, 즉 연장성과 질을 강도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 들뢰즈는 강도의 세 가지 특성들을 제시한다(Deleuze 1994: 232). 첫 번째 특성은 다음과 같다. 즉 강도는 언제나 양적이지만, “강도량은 비동등한 것 자체즉 이질적인 것을 포함한다(232). 강도는 양적 차이 안에서 삭제될 수 없는 것을 재현하거나 양과 같은 것을 만들어 낸다. 5장의 시작 부분에서 들뢰즈는 일종의 신적인 창조설을 제시한다. 그는 세계를 창조하는 신에 대해 말하면서, 그 신이 결코 계산에 기반하여 정확하게’(juste) 일을 잘 해내지 못한다고 말한다(222). 왜냐하면 신의 계산은 충분히 올바르거나 정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세계가 어떤 기초적이고 축소될 수 없는 부정의함을 담고 있는 것과 같거나 마치 시간이 언제가 경첩을 벗어나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어떤 이상한 창조설인데, 그것이 불완전하고 확실히 전능하지 않은 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4장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들뢰즈의 신의 부정확한 계산에 대한 언급은 중요하다. 들뢰즈는 신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이를테면, 공간과 시간 사이 또는 양과 질 사이의 어떤 비율을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계산은 부정확하고(pas juste), 그 비율은 비대칭적(asymmetrical)이다. 또는 우리는 이러한 비율이 언제나 무리수를 산출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때 세계는 이 무리수적 비율로부터 창조된다. 이 비율은 들뢰즈가 말한 바, ‘잔여’(remainder)로서, 정수나 자연수로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어떤 양이다. 따라서 들뢰즈에게 강도량은 유적인 양의 한 종이 아니다(232). 대신에 하나의 환원불가능한 비동등성으로서, 강도는 이른바 양적인 질’, 모든 양들 안에 나타나는 기초적이거나 원초적인 계기이다. 물론 들뢰즈는 무리수의 환원불가능한 잔여가 그것의 비동등성을 산술적으로 유리수의 수렴 계열에 의해 어떤 극한-동등성(limit-equality)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무리수는 물론 두 번째로 큰 정수에 의해 둘러싸여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이웃한유리수에 의해 추정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것(그리고 우리는 곧, 세 번째 특성을 고려할 때 이 구별로 돌아갈 것이다)은 강도와 연장 간의 이중성, 그리고 밖주름(explication)과 안주름(implication) 간의 이중성이다. 무리수는 그것의 차이를 그것이 수립하는 연장적 질서 내부에서 차이를 펼침으로써[밖주름화함으로ㅆ] ‘삭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러한 차이 자체[즉자적 차이]를 그것이 기반하는’(fondé) 감싸는[안주름화하는] 질서 안에 유지한다. 다시 말해 차이 또는 비동등성은 여전히 거기 연장과 양적인 것 아래에, 여전히 깊이(depth, porfondeur)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 강도의 첫 번째 특성 안에서 강도가 XY 축과 같이 서로 간에 동등하게 될 수 없는 두 축을 포함한다는 것, 그 결과 거기에는 언제는 다른 것에 대비해서 하나를 측정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어떤 잔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잔여성은 XY 간의 비율 그것들 간의 차이 이 연장성 안에서 그리고 동일한 양으로 또는 보충적인 질로 펼쳐질(삭제될) 때에도 여전히 감싸여진 채 남는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길, “두 번째 특성은 첫 번째 특성으로부터 흘러 나온다. 즉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차이이며 비동등성 자체를 함축하기 때문에, 강도는 차이를 긍정한다”(Deleuze 1994: 234). 달리 말해 강도는 필연적으로 차이(환원불가능한 무리수)를 함축하므로, 그것은 일련의 다른 차이들을 지시한다. 따라서 만약 그것이 스스로를 긍정한다면, 강도는 계열들 안의 가장 낮은 것을 포함하여 필연적으로 모든 다른 차이들을 긍정한다.[4] 들뢰즈는 다음과 같은 긍정의 이미지들을 제안한다. 독수리의 비행 강하와 폭포수의 낙하. 이런 이미지들은 긴장이 하나의 떨어짐으로 경험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것은 강도가 (칸트에 따르면) 어떤 양의 순간적인 포착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떨어짐 또는 하강으로 경험된다(Deleuze 2003: 67). 이러한 크기 안에서 포착되는 복수성은 부정성=0로의 그것의 근접에 의해 재현될 수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강도가 영점으로의 근접함으로써만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해, 강도의 하강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상승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문제 전체는 영점의 의미에 놓여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영점은 무(nothingness) 아니다. 5장에서 들뢰즈는 높낮이가 오직 말하기의 방식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깊이와 (...) 그것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더 낮은 깊이이다(Deleuze 1994: 234). 다시 말해, 하강의 바닥에서 영점은 비동등한 것 또는 부정확한 비율이며, 어떤 무언가 존재하는 것이지만, ‘무언가는 무리수적인 것으로서 근본적으로 불가해하다. 깊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다. 비록 우리가 이제 영점이 무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 해도, 그리고 우리가 4장으로부터 영점이 무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실재로 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아래에서부터 높이를 바라본다면, 영점은 무라고 생각할 것이다. 보다 낮은 관점에서, 가장 높은 강도는 삶/생명과 같이 보이지만, 더 낮은 또는 더 전락한 관점 자체, 즉 영점은 죽음처럼 보인다. 사실상 들뢰즈에 따르면 부정성이 출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전된 관점으로부터다(235). 그러므로 관점을 역전시켜 더 높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강도 안에 포함된 일련의 차이들을 긍정하는 본질적인 필연성이 반드시 어떤 윤리적 필연성이 되어야 한다. 들뢰즈는 그러한 윤리적 필연성을 보통의 프랑스 어구 ‘~ 해야 한다’(il faut)를 통해 표현한다(234). 그는 멀리까지 가기 위해 그리고 하상에서조차 긍정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폭포의 힘(il faut la puissance) 또는 아주 깊은 하강이다라고 말한다. 보다 단순히 말하자면, 이것은 강도량의 윤리학에서 첫 번째 명법인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가장 낮은 것조차 긍정하라!”

 

들뢰즈의 강도량의 윤리에서 두 번째 명법은 강도의 세 번째 특성 안에서 등장한다. 들뢰즈는 세 번째 특성이 선행성과 관련되기 때문에, 처음의 둘을 요약한다고 언급한다. 여기서 세 번째 특성은 다음과 같다. 강도는 안주름지고, 감싸여 있으며 또는 배아적인’(embryonised) 양이다. (...) 강도는 우선적으로 자신 안에 안주름잡혀 있다. 즉 안주름잡고 안주름잡혀 있다[함축하고, 함축된다]”(Deleuze 1994: 237) 일차적으로 그리고 실재로 강도는 차이를 함축하며 감싼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강도는 언제나 일련의 차이들을 영점이 아닌 어떤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타낸다. 함축하고 감싸는 차이들은 질들과 본성적인 차이들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그리고 실재적으로 강도는 거리(distance)를 함축하고 감싸고 있었다. 우리가 보았듯이 강도는 연장성 아래에 놓여 있으며, 그것은 그 자체 거리로 구성된 깊이이다. 따라서 이차적으로 그리고 현상적으로 양은 그것의 원인, 강도에 대해 반응하면서 연장적으로 차이를 삭제하는 경향을 띈다. 마찬가지로 이차적으로 그리고 현상적으로 연장성은 차이를 펼치고 어떤 양 안에서 차이를 삭제한다(243). 강도적 양의 윤리의 두 번째 규칙은 펼침과 삭제라는 두 번째 과정에서 발생한다. 들뢰즈가 말한 바에 따르면, “밖주름운동[펼침]의 어려운 법칙은 펼쳐지는 것이 한번에 모든 것으로[최종적으로] 펼쳐진다는 점이다. 강도적 양의 윤리는 두 가지 원리만을 가진다. 가장 낮은 것이라 할지라도 긍정하라. 스스로를 (너무 많이) 펼치지는 마라”(243). 즉시 우리는 이 두 가지 윤리적 원리들 간의 긴징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우 원리들은 모순적인 요청을 담고 있다. 한편으로 첫 번째 긍정의 원리는 최상의 것(superlative)인데, 이것은 가장 낮은 것조차 긍정하고, 전락을 긍정하며, 영점을 향해 곧장 내려간다. 다른 한편 펼침의 원리는 상대적인 것(comparative)으로서, 당신 자신을 너무 많이 펼치지[설명하지] 말라는 것, 역으로 무언가를 간직하면서, 잔여적인 것과 동등해지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두 가지 원리들을 요약할 수 있다. “잔여적인 것을, 당신의 손에서 미끄러져 가도록 그것을 놔둘 때조차, 언제나 충분히 간직하라!”

 

III. 천의 고원에 대해 한 마디

우리는 차이와 반복천의 고원이 매우 다른 책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천의 고원은 이 동일한 두 모순적인 윤리적 원리들을 담고 있다. 우리는 여섯 번째 고원에서 이 원리들을 발견하는데, 이것은 당연히 아르토의 기관 없는 신체에 관한 생각에서 취해진다. 그러나 여섯 번째 고원은 정확히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들기위해 요청된 행위와 관계있다. 여섯 번째 고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관 없는 신체로 만들도록 명력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우선 우리는 신체를 하나의 강도들의 공간으로 전개하기 위해, 기관들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기관 없는 신체란 강도=0인 강도의 지대(matrix)로 정의된다. 따라서 우리가 차이와 반복5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가장 낮은 것을 긍정해야 한다. 즉 다시 말해, 우리는 무로 완전히 내려가지는 않아야 하는 것이다. “너는 시작할 때마다 재형성하기 위해 유기적인 것을 충분히 유지해야 한다”(160). 다시 말해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들기 위해 당신은 가장 낮은 영점을 긍정해야 하고, 당신의 삶을 실험하고 위험에 처하게 해야 하며, 몰적인(molar) 연장들과 다수적 질들 안에 봉쇄된 그 모든 차이들과 강도들을 펼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 많이 펼치진 말아야 한다. 충분히 남겨 놓아야 한다’(il faut en garder assez) - 당신이 남겨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 만큼 많이 펼치진 말아야 한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파괴할 정도로 많이 펼치진 말아야 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는 들뢰즈(또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점점 더 많이 강도 있게 되는 삶의 방식을 찬성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가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험은 결코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석]

*[역주]원문에 ‘qualitative’라고 된 것은 ‘quantitative’의 오기(誤記)인 것으로 보인다.

[1] ‘Somers-Hall 2013’은 이 어려운 책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다. 4장과 관련해서 소머스-홀은 들뢰즈의 미분학 역사를 설명하는데 특히 도움이 된다. 또한 소머스-홀의 미분학 강의(Somers-Hall 2011)도 참조하라. 차이와 반복에 대한 다른 세 개의 입문서가 있는데, 모두 훌륭한 책이다. Williams 2003; Hughes 2009; Bryant 2008 참조.

[2] ‘Deleuze 1990: 99’ 참조.

[3] ‘Leibniz 1969’, 특히 p. 545. 또한 ‘Smith 2012’, 특히 pp. 525 참조.

[4] 5장의 원래 제목은 대칭적인 것의 비대칭적 종합인데, 이 논의 안에 있다. 들뢰즈는 말하길, “모든 것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나아가며, 그 운동은 가장 낮은 것을 긍정한다”(Deleuze 1994: 234). 비대칭적 종합은 긍정이 가장 높은 방향이 아니라 가장 낮은 방향으로, 다른 말로 해서 현행적인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을 향해 편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Bryant, Levi (2008) Difference and Givenness: Deleuze’s Transcendental Empiricism and the Ontology of Immanence, Evanston, IL: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Deleuze, Gilles (1990) The Logic of Sense, ed. Constantin V. Boundas, trans. Mark Lester with Charles Stival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Deleuze, Gilles (1994) 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s. Paul Patton, London: Athlone Press.

Deleuze, Gilles (2003) Logic of Sensation, trans. Daniel Smith,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Deleuze, Gilles and Félix Guattari (1987) A Thousand Plateaus, trans.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Hughes, Joe (2009) Deleuze’s Difference and Repetition, London: Continuum. Leibniz, Gottfried Wilhelm (1969) ‘Letter to Varignon, with a Note on the “Justification” of the Infinitesimal Calculus by that of Ordinary Algebra’, in Philosophical Papers and Letters, trans. and ed. Leroy E. Loemker, Dordrecht: D. Reidel Publishing, pp. 5426.

Smith, Daniel W. (2012) ‘Deleuze on Leibniz’, in Essays on Deleuze,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pp. 4358.

Somers-Hall, Henry (2011) ‘Difference and Repetition Course Lecture: Deleuze and the Calculus’, available at < https://www.academia.edu/12713759/Difference_ and_Repetition_Course_Lecture_Deleuze_and_the_Calculus > (accessed 5 April 2019).

Somers-Hall, Henry (2013) Deleuze’s Difference and Repetition,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Williams, James (2003) Gilles Deleuze’s Difference and Repetition,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