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서지: - Bryant, Levi R. ‘Individuation: The Genesis of Extensities and the Other-Structure’, Difference and givenness : Deleuze's transcendental empiricism and the ontology of immanence, Evanston, Illinois;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chap. 8, 220-262.
8장 개체화: 연장과 타자-구조의 발생
현행화의 과정에 따라오는 세 가지 문제들
세 가지 문제들이 남는다. 첫째 잠재적인 것에서 현행적인 것으로의 운동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개별체들(entities)이 현행화 또는 개체화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인가? 지금까지 말해 왔던 모든 것은 그 초월론적 규정 안에서만 잠재적 또는 시간적인 것에 관련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들뢰즈가 감각적인 것의 두 가지 의미를 조화시키고, 가능한 모든 경험보다 실재의 조건을 표명하는 그의 기획에서 성공적이었다면, 이때 그는 개별적인 것(the individual)에 이르기까지 개체화나 현행화에 대한 해명을 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들뢰즈가 ‘초월론적 환영’의 자리로 지목한 사유의 이미지나 재인(recognotion) 모델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이 질문은 특별히 긴급하며, 들뢰즈에 관한 2차 저술들 안에서 줄곧 간과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진정한 비판 철학의 표식은 사유 자체에 내면적인 일련의 환영들을 예감하고, 예언하며 해명할 수 있는 것에 놓여 있다. 이러한 환영이나 오류들이 사유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어떤 면에서 사유의 구성요소라는 것, 즉 그것들이 단어와 사물 사이의 어떤 실패한 적용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환영과 오류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사유작용 자체의 효과들이다. 사유의 이미지를 ‘극복하는 것’과 그게 아니라면, 만약 그들이 이러한 이미지를 단지 파괴하기만 한다면, 완전히 자유로와질 주체들을 강요하는 어떤 제도적인 압력으로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단순히 파악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들뢰즈의 사유에 있는 이 미묘한 지점을 아는데 완전히 실패할 것이다. 사유의 이미지를 극복하는 것은 이러한 이미지를 불가피하게 만들 뿐 아니라, 어떤 다른 일련의 가치들이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환영들이 불가피하다면 – 들뢰즈가 사유의 이미지가 원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관련되는 한그러한 것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환영이 사유를 통해 생산되는지 해명해야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유의 이미지가 도덕적 성격을 가진다는 들뢰즈의 지속적인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의 사유이력에서 다른 어떤 것으로 옮겨갈 때, 들뢰즈는 보수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서의 사유의 이미지를 포기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유의 이미지를 교조적이고, 전통적이거나 도덕적인 이미지라고 부를 것이다”(DR 131). “니체가 가장 일밙거인 철학의 전제들에 의문시할 때, 그는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도덕적이라 말한다. 도덕이란 단지 사유가 선한 본성을 가지며 사유하는 자는 선한 의지를 가진다고, 그리고 선만이 사유와 진리 간의 추정된 친밀성을 근거지을 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할 수 있을 뿐이다”(DR 132). 이제까지 나는 목적의식적으로 사유의 이미지를 도덕적인 의미 안에서 비판하는 들뢰즈를 견제하고자 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이런 측면에서 들뢰즈의 논증이 사유의 이미지와 같은 무언가가 가능한 근거에 대해 엄격하게 해명하기보다, 특별히 허약하고, 반-도덕적인 반응성(reactivity)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도덕(moral)이라는 단어의 함축적 차원이 그의 모든 전제들을 노출시키지 않은 어떤 설득력 있는 논증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들뢰즈가 제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도덕 안에 있는 보수적 사유에 이미 비판적인 사람들과 도덕을 삶의 긍정의 안티테제로 전환시켜 버린 니체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만약 그들이 그것이 특성상 도덕이라고 믿게 되면, 사유의 이미지를 거부할 만한 훨씬 많은 경향성을 가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잠재적으로 일련의 모든 관계들은 들뢰즈가 아마도 그것을 어떤 정직하고 엄격한 태도로 지원하지 않으면서 입장을 진전시키도록 하는 도덕 개념 주위를 맴돈다. 물론 어쨌든 이런 류의 논증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사유의 노동’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비판들을 거부하기 쉬울 것이다. 사유의 노동이란 강한 논증과 개념적 정확성을 요청하는 것이며, 더불어 삶에 반하는 부정성과 반응성의 형식이기도 하다. 그러한 경우에, 나는 논의를 계속할 이유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다른 한편 나는 들뢰즈가 환영에 대해 보다 더 많이 해명해 낼 수 있으리라고 보는데, 이러한 환영에 대해 그는 내적 차이보다 경험적이고 외적인 차이로 둘러 싸인 문제들을 참조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한다. 이 문제에 대해 응답하면서, 우리는 『니체와 철학』에서 들뢰즈의 니체 독해를 보다 더 인용할 것인데, 여기서 그는 능동적이고 반응적인 힘의 활동과 관련하여 사유의 이미지의 발생을 신중하게 추적한다. 하지만 『니체와 철학』에서 전개되는 힘의 형이상학은, 사유의 이미지 개념에서는 나타나지만, 그 외의 그의 사유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들뢰즈가 사유의 이미지를, 원한감정(ressentiment)과 반응성에 관련하지 않고 뒷받침하면서, 다만 타자-구조(Other-structure)와의 관련에 의해서만 여타 다른 곳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어째서 우리가 니체의 책에 있는 설명에 특권을 부여해야 하는가? 누군가는 니체를 체계적 철학자로 변형하는 들뢰즈의 명민함을 숭배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그가 성숙한 사유로 발전시킨 모든 입장들에 귀속될 수 있을 만한 이유는 아니다. 사실상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힘에 기반한 사유의 이미지에 대한 해명의 이러한 실행은 들뢰즈 자신의 기획에 비추어 전반적으로 의심스럽다. 우선 우리는 능동적이고 반응적인 힘과 닮은 그 어떤 것도 『차이와 반복』 또는 『의미의 논리』에서 발견할 수 없다. 이 주장은 『안티오이디푸스』와 『천의 고원』 그리고 과타리와 함께 쓴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통틀어서도 마찬가지 적용될 수 있다. 마수미(Massumi)나 하트(Hardt)와 같은 독자들이 주장해 마지 않는 것과는 관계 없이, 들뢰즈는 단순히 어떤 힘의 존재론에 집착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기호 dy/dx 안에 있는 미분소들 간의 관계가 사실상 힘의 존재론과 유사하다며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응답은 dx와 dy 미분소들 간의 관계가 상호적 규정의 관계인 한, 불가피하게 불충분해지며, 반면 니체적인 힘의 활동들 간의 관계는 언제나 하나의 힘이 다른 힘을 지배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요컨대 미분소들 간의 관계는 내적인 반면, 힘들 간의 관계는 외적이다. 들뢰즈의 니체에 있어서, 능동적 힘들은 전체적으로 반응적 힘들과 무관하다. 이는 들뢰즈의 저작 전체를 통틀어 - 『니체와 철학』을 포함하여 – 나타나는 미분적인 것, 그리고 상호적 규정에 의해 규정되는 그러한 경우에는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들뢰즈가 니체와 관련하여 미분적인 것을 소환한다는 것을 실재로 사실이지만, 그와 같은 소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적 규정의 관점에서 방어되지 않은 채 남는다. 들뢰즈의 니체를 작동시키기 위한 선택은 초월론적 경험론을 둘러싸고 출현해 왔던 낭만주의를 회피하려는 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만약 들뢰즈가 『니체와 철학』에서 발전시킨 입장을 확증한다고 드러날 수 있다면, 어떤 손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사상가가 한번 말한 것은 다른 모든 가능한 맥락들에서 언급되기 위해 드러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들뢰즈가 사유의 이미지에 대한 해명을, 이 이미지가 근거지워진 방식을 보여주는 『차이와 반복』에서 전개한다면, 그가 마찬가지로 『니체와 철학』에서 어떤 설명을 전개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의 입장은, 『니체와 철학』에서의 그 입장보다 더 중요해야 한다. 즉 『니체와 철학』의 목적은 들뢰즈의 입장을 정하는 것이지, 그의 니체에 대한 입장을 확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맥락에서 니체에 대한 들뢰즈의 입장 또는 다른 사상가들에 대한 입장은 그것이 들뢰즈의 입장을 조명하는 한에서 오직 상대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다른 텍스트들의 논증은 게으른 호기심을 위한 것일 뿐이다. 우리 관점에서, 그토록 많은 강조점이 이러한 다른 텍스트들에 놓여지는 유일한 이유는 들뢰즈의 그 자신의 철학을 설명할 때, 들뢰즈가 썼던 텍스트들의 심대한 난해함에 기인한 것이다. 어떤 이상한 방식으로 이것은 들뢰즈가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보다 그 이야기 안으로 들뢰즈를 변형시키는 경향을 야기해 왔다.
두 번째, 『차이와 반복』과 『의미의 논리』를 관통해서 우리가 니체에 의해 도입된 도덕 개념들(원한, 나쁜 의식, 금욕적 이상)에 대한 그 어떤 참조도 발견하기 못하는데, 이로써 우리는 들뢰즈 자신의 독립적인 저작 내부의 힘의 존재론의 결여로부터 그 어떤 놀라움도 가질 필요가 없다. 아니, 만약 들뢰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유의 이미지가 도덕적이라는 주장에 경도된다면, 그때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힘들의 근거와는 다른 근거들을 찾아야 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현행화 과정의 불가피성과 다양성의 산출을 통한 차이의 삭제 경향이 주어지면, 도덕으로 존재하는 사유의 이미지에 대한 들뢰즈의 폐기과정은 그것 자체로 거부할 만한 무언가를 지적하기보다 어떤 취미 판단으로 존재하는 것의 외양을 가질 것이다. 만약 재인(recognition)이 의문시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 자연화하거나 본질화하는 그것의 경향 때문이며, 어떤 간교한 도덕적 책략들로 인한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이러한 측면들에서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드러내진 못한다.
개체-미/분화(Indi-Different/ciation)와 연장된 것들의 발생
사실 이 모든 세 가지 문제들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함께 해결된다. 만약 개체화 또는 현행화에 관한 들뢰즈의 해명에 있어서 하나의 규정적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들뢰즈가 개체적인 것 전체가 진행되는 발생에 관한 해명(사실상 어떻게 개체적인 것이 일반적 종들을 앞서는지에 관한)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행화의 과정이 연장성의 가능 조건으로 기여하는 차이를 삭제하거나 뒤덮는 바, 그 연장성의 구성을 주도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현행화나 ‘개체-미/분화’에 관한 그의 사유에서, 들뢰즈는 연장들이 어떻게 강도들로부터 출현하는지 증명해낸다. 또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개체-미/분화의 과정은 연장적, 외적 차이들이 강도적(시간적), 내적 차이들로부터 일어나는 방식을 보여준다.
현행화에 관한 들뢰즈 사유의 이런 측면은 들뢰즈의 사유의 이미지 비판이 가진 본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연장적 다양성과 강도적 다양체 간의 대립을 [『차이와 반복』의] 1장으로부터 가져온다면, 연장들의 발생에 관한 들뢰즈의 사유는 우리가 본성적 차이(지속으로서의 차이)를 정도에서의 차이나 외적 차이들로 환원하는 경향을 가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비춰질 것이다. 재인의 모델이 가진 중심적인 오류가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초월론적인 것을 추적하는데 놓여 있는 한, 그리고 이러한 능동성이 차이에 관한 일련의 맹목에 기반하는 한, 연장의 발생은 어떻게 이러한 오류들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이다. 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가 그러한 것을 재빨리 벗어 던지기 위해 파악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연장성으로] 은폐하기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로지 우선 그것의 국면들과 구조를 고려하는 한에서만, 그리고 덧붙여, 우리가 그것이 지향적 목표를 이해하는 한에서만 파악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본성상 공간적이며 어떤 사회적 유용성이다. 그러므로 공간성과 그 상당히 특별한 의미에서, 사회적 유용성이란 이런 경우 우리 인식의 상대성에 대한 실재적인 원인들이다.[1]
‘은폐하기’라는 단어로 베르그송은 어떤 것이 지속이나 강도적 차이를 가린다는 의미에서 공간을 지칭하고 있다. ‘지식의 상대성’으로 베르그송은 내적이고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경험적이거나 연장적 차이들이 우리에게 오직 정도상의 차이들만을 부여할 수 있는 그런 방식(우리가 쾌락 원칙에 지배되는 사도-마조키즘적인 개별체에 관한 설명에서 보았듯이)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들뢰즈는 공간성이라기보다 연장성과 관련한 그의 사유의 중심을 파고들어감으로써, 사실상 베르그송을 넘어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간성과 관련하여 그러한 환영들, 은페하기 또는 삭제하기를 살핀다는 것은 환영 그 자체에 속하는 어떤 균질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공간화된 지식의 상대성과 공간의 균질성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는 방식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대조적으로 연장들에 관련된 사유의 이미지에 속한 환영을 내세우는 것은 환영이 어떤 특수한 개체화로부터 야기되는 그 방식을 강조하는데 있어서 유리한 점을 가진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유의 이미지와 관련된 환영을 구성하는 것은 연장성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장들은 개체화 과정의 어떤 불가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사유의 이미지에 특화된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연장의 공간화다. 달리 말해 연장성의 균질화, 모든 연장들을 규정하고 정의하는 것으로서 어떤 하나의 연장성의 보편화가 사유의 이미지의 환영을 구성한다. 이런 경우 삼중의 환영이 발생한다. 첫째 내적이고 강도적인 차이는 문제가 되는 연장성이 이념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 자신의 발생이나 개체화의 특유한 조건들을 관찰하는데 실패하는 한 삭제된다. 이것은 무언가가 너무 가까이 있고, 너무 인접하며, 너무 분명해서 비가시적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연장성은 스스로를 어떤 연장성이라기보다 하나의 공간으로 취급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칸트적인 비판이 암묵적으로 접혀 있음을 보게 된다. 공간을 선험적 직관에 속한 하나의 균질적 장으로 취급하기보다, 들뢰즈는 서로 간에 불연속적인 공간들(spaces) 또는 연장들의 발생을 해명하고자 한다. 둘째, 강도적이고 내적인 차이는 연장성이 스스로를 보통의 특이성들과 그것들의 관계들에 의해 퍼져 있는 강도적 다양체라기 보다 균질성의 매개체로 다루는 한 삭제된다. 다시 말해 강도성을 분포시키는 모든 개별체들[실체들, entities]은 경향이나 잠재성에 의해 정의되는 복잡한 다양체라기보다 동일한 요소들의 다양한 정도에서만 구성되는 것으로 보인다(설탕은 더 작은 양의 설탕으로 구성된다, 등등). 그리고 세 번째, 차이는 다른 연장성의 어떤 가능성이 선험적으로 배제되는 한, 삭제된다. 개체화의 경우는 여기서 모든 개체화들로 일반화된다. 우리는 여기서 들뢰즈가 실재 경험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경험을 이론화하는 초월적 사유에 반대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이 세 가지 삭제는 외적 차이나 동일성의 모델에 관한 그토록 많은 확언들과 같은 기능을 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공간화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때 이것은 유용성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여기서 사유의 이미지가 속성상 도덕적이라는 한 가지 방식을 느낀다. 유용성의 판단은 내적 차이를 결정하는 욕망에 기초하지 않으며, 오히려 가치에 대한 판단에 기반한다. 이런 경우 가치 있다는 것은 유용하다는 것이다. 만약 가치 있는 것이 연장적인 것으로 존재한다고 드러난다면, 이때 그 이유는 공간이 가장 손쉽게 작용을 가할 수 있고, 계산되며, 그리고 능숙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베르그송주의의 주제와 밀접한 연관성 안에서 사회성은 연장성 주위를 회전한다고 주장된다. 이것은 연장적인 것이 가장 손쉽게 작용을 가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가장 수월하게 소통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어떻게 시간의 흐름을 교환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이런 면에서 연장성과 언어는, 베르그송에 따르면 서로 간에 내적 연결을 내포한다.
단어들의 의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사회적 삶이 하나의 획득되고 전승된 습관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마치 개미가 개미집을 위해 그러한 것처럼 국가에 속한 삶을 위해 조직화된다. 하지만 여기서 차이는 개미가 그 목적을 획득하기 위해 이미 마련된 수단들을 소유하는데 반해, 우리는 그러한 수단들을 재발명하고 그 형식을 다양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 우리의 발화에 속한 각각의 단어가 인습적인 것이지만, 그러므로 언어는 규약이 아니고, 따라서 인간이 걷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언어의 원래 기능인가? 그것은 협력의 관점에서 소통을 수립하는 것이다. 언어는 명령들이나 교훈들을 실어 나른다. 그것은 지시하거나 평가한다. 첫 번째 경우, 그것은 즉각적인 행동에 대한 요청이고, 두 번째 의 경우, 그것은 행위의 관점과 더불어 사물/사태나 그것의 속성들 중 몇몇에 대한 기술이다.[2]
이 언급에서 들뢰즈의 사유의 이미지에 관한 첫 번째 전제를 식별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모든 사유의 이미지는 ‘모든 사람이 안다’는 가정으로 시작한다. 만약 소통과 같은 무언가가 발생해야 한다면, 소통이 송신자로부터 수신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이 메시지가 하나의 축에서 다른 축으로 그 동일성을 유지하는 어떤 코드에 기반하여 전달한다는 것을 요청하는 한에서, 이 가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양식(good sense)과 상식(common sense)의 가정이 가진 중요성을 재인할 수 있다. 상식은 주체와 객체의 추상적 동일성, 즉 주체적 동일성의 형식, 그리고 객체적 동일성의 형식을 단언한다. 대체로 이것은 형식을 채우는 그것의 소통가능성을 원리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양식은 특유성(과거)에서 일반성(미래)으로 이동하는 주체들과 객체들에 속해 있는 어떤 분배를 옹호하면서, 미래가 더 많은 동일한 것을 가져올 것인 한에서, 연장성이 어떤 특정 방식으로 존속을 유지할 것인 한, 소통가능성을 수립한다. 사유의 이미지의 도덕적 차원이 정말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소통가능성, 즉 사회성의 요구 아래에서이다.
[여기서] 질문은 강도적 차이만으로 채워진 시간성의 영역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연장성들과 그것들에 수반하는 사회적 도덕성의 구성을 갖게 되는가이다. 만약 들뢰즈가 사실상 실재 경험의 발생적 사유를 제시한다는 것이 맞다면, 그는 사유의 이미지 자체의 발생에 관한 해명도 마련해야할 의무가 있다. 사유의 이미지를 바깥으로부터 오는 어떤 강요된 이데올로기로서, 단순히 ‘외재적’ 속성인 것으로 다루는 설명은 들뢰즈가 극복하고자 하는 그 동일한 경험론적 오류에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유의 이미지에 대한 그 모든 자연주의적 논법을 피해야만 하고, 그것을 단순히 몇몇 외재적인 사회적 조건화나 국가 권력의 결과로서 논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들뢰즈가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말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국가가 우리로 하여금 진실된 존재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외적 힘이라서 그런 것일 수 없고, 오히려 국가가 사유 자체에 내재적으로 생산된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충족이유율: 개체-미/분화
들뢰즈의 (개체)미/분화 또는 현행화에 대한 사유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원인에 관한 해명이 아니라, 오히려 충족이유율의 변형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또한 발생과 구조를 조화롭게 하려는, 즉 개체들, 종들 그리고 부분들의 형태발생이나 구성을 위한 해명을 탐구하는 어떤 사유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어째서 어떤 원인이 결과에 연결되는지를 설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개체화가 가능한 필연적인 조건들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충족이유율이 겨냥하는 바는 무엇인가? 들뢰즈는 충족이유율을 라이프니츠에 관한 그의 미출간 강의에서 놀랄만한 명확성을 가지고 설명한다.
모든 것은 분명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충족이유율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습니다. 어떤 주체에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즉 그것이 시공간적, 관계적, 사건적 규정요소들에 존재한다면, 어떤 주체에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발생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진실로 말하는 바, 모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체는 주체에 관한 사념(notion)에 함축되어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지요("DLS," 15/04/80).
우리는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흄, 칸트, 니체 그리고 베르그송에게 만큼이나 라이프니츠에게 아주 깊이 빚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라이프니츠주의자는 아니다. 이 점은 그가 불공가능성(incompossibility)이라는 라이프니츠 개념을 구성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의해, 그리고 모든 가능 세계들 중 가장 좋은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적인 주장에 대한 그의 거부에 의해 즉각적으로 수립될 수 있다.
우리는 충족이유율이 어째서 들뢰즈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형이상학이 일반성과 특수성 사이의 관계의 측면에서 물질을 파악하는 류와 종에 기반하는 곳에서, 그와 같은 특유한 물질성은 단지 일반적인 것의 사례이며, 모든 개체화하는 차이들은 부차적으로 다루어지는데, 그보다도 이때 충족이유율은 개별적인 것 안에서 ‘술어들’[속성들]의 포섭을 위한 조건들을 결정하려 한다. 충족이유율과 연결된 동일성과 식별가능성의 원리를 받아들이면, 그와 같은 접근법이 범주들, 형식들 또는 류와 종 간의 위계들에 기반한 사유와 본래적으로 불화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또한 충족이유율이 겨냥하는 바가 어떻게 인과율의 목표와 상이한지 이해할 수 있다. 충족이유율은 개체성의 개념 내부의 포섭의 조건들 또는 봉쇄의 조건을 결정하려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인과율은 왜 또는 어떻게 무언가가 작용인의 연쇄를 통해 발생하는지 결정하려 한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충족이유율과 인과율 간에 존재하는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아주 잘 이해합니다. 인과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인과율이 어떤 필연적인 원인 드러내지만 결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필연적 원인과 충족 이유 사이을 구별해야 하지요. 그것들을 명백하게 구별하는 것은 사물의 원인이 언제나 무언가 다른 것이라는 점이에요. A의 원인은 B이고, B의 원인은 C이고 등등 ... 무한한 원인의 계열. 충족이유는 결코 사태 외의 다른 무언가가 아닙니다. 사물의 충족 이유는 사물의 개념(notion)이지요. 이러한 충족이유는 그 자신의 개념과 함께 사물의 관계를 표현하지만, 반면 원인은 다른 무언가와 사물의 관계를 표현하는 겁니다("DLS," 14/04/80).
대신에 우리는 사물의 충족 이유가 그것의 개체성 안에서 사물을 구성하는 내적 차이들을 해명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인과율을 거부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인과율과 충족이유율은 확실히 상호연결되어 있다. 오히려 이것은 상이한 영역, 상이한 문제틀에 대한 질문이다. 만약 인과율이 개체적인 것의 존재를 규정함에 있어서 부적합한 것으로 증명된다면, 그것은 원인이 언제나 의문스러운 개체성 외의 어떤 것을 함축한다는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충족이유율이 오래된 형상적 본질의 세계로 우리를 돌아가게 한다는 생각에 대항하여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충족이유율에 상응하는 근거(ratio)는 더 이상 존재근거(ratio essendi, 본질근거), 즉 본질의 근거 또는 존재의 이유가 아닙니다. 이제 그것은 현존근거(ratio existendi), 즉 실존의 이유이지요. 그것은 더 이상 왜 무가 아니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아닌데, 그 이유는 일치(identity)의 원리가 우리에게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즉 일치한다는 것을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왜 더 이상 무가 아니라 무언가 있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 저것이 아니라 이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무엇이 그것의 통속적인 공식일 것인가? 우리는 모든 것이 어떤 근거를 가진다는 것을 보았어요. 사실상 모든 것은 어떤 근거를 가져야 합니다. 무엇이 학문적인 공식일 것인가? 여러분들은 현상적으로 우리가 완전히 일치의 원리 바깥에 있다고 이해합니다. 왜 그렇지요? 왜냐하면 일치의 원리는 사물의 동일성과 그것의 본질을 함축하지만, 그 사물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사물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본질[그것임, what it is]과 완전히 다릅니다. 나는 언제나 어떤 사물이, 그것이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은지를 아는 것에 관한 질문과 독립적으로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나는 유니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유니콘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지요. 따라서 하나의 원리는 사실상 필수적인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실존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면 정말 어떤 원리, 즉 ‘모든 것은 근거를 가진다’만큼이나 막연하게 우리에게 드러나는 그 원리는 어떤 식으로 우리를 실존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일까요? 정확히 말해 우리에게 그것을 설명할 만한 학문적인 공식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학문적 공식화를 라이프니츠의 저작들에서 다음과 같은 진술 안에서 발견합니다. 즉 모든 술어(술어는 어떤 주어에 무언가가 속한다는 판단 작용을 의미하지요. 이를테면 내가 ‘하늘을 푸르다’라고 말할 때, 나는 푸름을 하늘에 귀속시키고, 어떤 속성을 작동시키는 겁니다), 그러한 모든 술어는 사물의 본성 안에 어떤 기초를 가집니다.("DLS," 06/04/80)
여기서 얼마간의 실마리가 잡히는데, 그것은 들뢰즈의 기획에 아주 막대한 빛을 드리운다. 첫째, 우리는 곧바로 그와 같은 사유가 감각적인 것의 두 절반들을 재통합하는 것, 실재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들에 관한 해명을 제공하는 것에 관한 본래의 과제에 기반하여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전자는 후자로부터 따라 나온다. 만약 우리가 실재 경험의 조건들에 관한 어떤 해명을 드러내야 한다면, 그때 우리는 직관될 수 있는 것에 만족한 채 머무를 수 없고, 직관 내부로부터 직관의 발생에 대한 해명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할 만큼 충분히 과감한 하나의 입장을 또한 알게 된다. 즉 그러한 해명은 실재 경험의 조건을 드러내는 바, 더 이상 류, 종, 범주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직관의 형식들을 담지 않지만, 개체적인 것, 특유한 것, 어떤 중요한 것, 존재하는 그것으로 줄곧 나아가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마찬가지로 들뢰즈가 왜 사유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관심을 사건에 두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정확히 말해 사건이야말로 실존적인 것 속하는 것으로서, 실존적인 것을 정의하거나 술어화한다. 실존하는 것은 사건이다. 들뢰즈가 항상 원인과 결과(사건)를, 원인이 필연성의 사슬을 형성하는 반면 사건이 충족율의 사슬을 구성하는 한, 서로 간에 그토록 조심스럽게 구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왜 들뢰즈의 입장이 역설적으로 경험주의에 대한 비판과 거절 그리고 경험주의의 긍정에 의해 진행되는지 안다. 만약 들뢰즈가 경험주의에 대한 완고하고 광범위한 거부에서 시작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그가 결국에는 경험주의로 되돌아 가기 위함이다. 경험주의 비판은 현행적 개체(이것은 그 충족이유 또는 개체화의 조건들과 일치하지 않는다)가 초월론적 장에서 창출되는 다양한 현행화 전체를 뒤덮으면서, 그 자신의 현행화를 보편화하는 한에서 요청된다. 그것은 현행화 과정에서 차이들을 지우는 경향을 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입장은 개체적인 것, 실존적인 것이 선험적인 것을 예상할 수 없는 한, 하지만 오직 경험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조우하게 될 수 있는 한, 경험주의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험적인 것이 후험적인 것이 되고, 후험적인 것이 선험적인 것이 되는 것과 같은, 선험적인 것과 후험적인 것의 어떤 낯선 번짐효과(blurring)를 목격한다. 조건들은 여전히 조건들이며, 그것들은 여전히 선험적이지만, 그것들은 보편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더 이상 선험적이지 않다. 오히려 선험적인 것은 필연적인 것과 충족된 것들로 감축되어 버렸다. 이것은 어떤 후험적인 선험(a posteriori a priori)이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충족이유율로 이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들뢰즈가 충족이유율과 씨름하는 그 문제와 질문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들뢰즈가 칸트의 개념인 ‘이념’을 그의 문제의 존재에 관한 사유 안으로 채택한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한편으로 이념들은 사유 자체에 내적인 환영의 자리이다. ... 환영들은 더 이상 일치의 오류나 실패의 문제가 아니라, 시각적 환영 또는 왜곡의 의미이다. 다른 한편 근거가 이러한 이념들을 생산하는 이유는 경험과 연관된 통일성이나 조직화의 문제에 놓여 있다. 경험 자체는 불연속적이고 부분적인 재현들만을 드러낸다. 칸트적인 이념은 이러한 불연속적이고 부분적인 재현들이 합당하게 지식을 구성한다고 여겨질 수 있는 질서잡히고 조직화된 체계로 통합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를 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것이 문제로 말해질 수 있다면, 만약 경험의 조직화가 하나의 문제라면, 그렇다면 이것은 경험의 조직화가 경험 안에 야기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기보다 어떤 이상적인(ideal)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이념의 표명에 있어서 칸트를 따를 것이지만, 그것을 분명하게 변형할 것이다. 칸트와 같이 들뢰즈에게서도 이념에 속한 문제는조직화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칸트와 달리, 이러한 조직화는 더 이상 개념적 질서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감각적 질서에 속하고, 연속성의 문제이며, 우리가 현행화된 경험 안에서 발견한 그 연속성이 경험의 아래에 놓여 있는 미분적인 것의 미규정적(그리고 원리적으로 인식불가능한/직관불가능한) 본성에 주어지는 것이 가능해지는 방식에 속한다. 우리는 여기서 ‘순수 감가성(sensibility)의 비판’을 발견한다.
연속성이 이념들 그리고 그것들의 문제적 쓰임에 관련되어짐에 틀림없다는 것은 진실이지만, 이것은 그러한 것이 더 이상 감각으로부터 또는 심지어 기하학적 직관으로부터 빌어온 규정적인 것들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이다. 우리가 매개들의 삽입, 즉 무한한 삽입 계열들 또는 결코 가장 작은 것이 가능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연속성은 연속성이라는 이상적 원인이 규정되는 한 정말 이념들의 영역에 속한다. 그 원인을 함께 묶는다면, 연속성은 양화가능성의 순수요소를 형성하며, 이것은 고정된 직관의 양(quantum)과 지성의 개념들의 형식 안에 있는 다양한 양 둘 모두와 구별되어야 한다.(DR 171)
연속성은 개체성과 연관되는 것이다. 개체들은 그것들이 주체든 객체든, 스스로를 체계성, 조직화, 술어화될 수 있는 관계들, 습관에 의해 규정된 하나의 세계 안에서 발견한다. 오로지 어두운 조우의 순간에서만 카오스는 안으로 흘러 넘치는 것으로 보이며, 우리의 세계는 의문에 부쳐진다. 충족이유율의 문제는 이 연속성, 이러한 질서, 이러한 조직화에 대한 해명을 위한 방법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연장성에 관한 질문을 알아채게 된다.
연속성과 관련하여 들뢰즈는 충족이유율, (개체)미/분화 또는 현행화에 의해 고려되는 세 가지 규정적 또는 발생적 조건들을 확인한다.
변증론적 이념은 미분적 관계들의 다양성과 상관적인 특이성들의 분배(미분화)에 의해 이중적으로 결정된다. 감각적 현행화는 종의 규정성에 의해 그리고 구성(분화)에 의해 이중적으로 결정된다. 종적 규정은 마치 구성이 특이성에 하는 것처럼 관계를 구체화한다. 현행적인 질들과 부분들, 즉 종 그리고 수는 이념 안에서의 질화가능성의 요소와 양화가능성의 요소들에 상응한다 하지만 충족이유율의 세 번째 측면을 수행하는 것, 다시 말해 이념 안의 잠재성의 요소는 무엇인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은 전-양화적이고 전-질화적 극화다. 결과적으로 규정하고 해방하는 것, 즉 이념적인 미분화와의 상응에서 현행적인 것의 분화를 구별정립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DR 221)
따라서 우리는 현행화 또는 충족이유에 관한 들뢰즈의 설명에서 두 개의 무대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첫 번째, 미분적 관계와 이런 관계들이 촉발하는 특이성을 통한 이념의 구성이 있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미분화’(differentiation)라는 말로 의미했던 바이며, 그가 어떤 자기-종합(auto-synthesis)에 기반하여 정당화한 것이다. 만약 그와 같은 자기-종합을 내세우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존재-함(be-ing)과 연관되는 본질적인 무근거성(groundlessness)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연의 긍정이라는 의미였다. 이러한 자기-종합보다 더 깊은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은 근거없음 아래에 어떤 기초를 놓을 것이다. 주사위 던지기 너머에, 필연성을 산출하는 이 본질적인 우연 너머로 우리는 갈 수 없다. 따라서 이념은 들뢰즈의 사유에서 진정한 초월론적 순간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찬가지로 내재적인, 그리고 내재적인 적용만을 가지는 ‘초월성’이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이념이 – 능동적 종합에 반하는 - 수동적 종합의 결과이며 따라서 의식의 어떤 결정에 기초하지 않는다는 점을 견지해야 한다. 사실상 이념은 그 효력에 있어서도 의식에 접근가능한 것이 아니다. 어떤 수동적 종합으로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무의식이다.
현행화의 두 번째 계기, 즉 현행화된 고유성, 종과 부분들은 이념에 속한 관계들과 특이성에 각각 상응하여 발생된다. 들뢰즈는 이러한 계기를 ‘분화’(differenciation)라고 지칭한다. 그러므로 종과 종을 규정하는 그 부분들은 어떤 낯선 비틀림 안에서 발생되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그것들[종과 부분들]은 시작부터 당연히 여겨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가 이를 언급할 때 의미하는 바를 이와 같이 알아챈다.
이념들은 그것들의 유동적인 종합을 규정하는 조건들에 따라 객관적으로 만들어지며 해체된다. 이는 이념들이 분화에 있어서의 무능력과 미분화에 있어서의 가장 거대한 능력을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념은 그것들 자신 안에 하위-다양성을 포함하는 다양성이다. 우리는 다양성의 세 가지 차원을 구별할 수 있다. 첫째로 수직적 차원으로서, 우리가 요소들와 미분적 관계들의 본성에 따라 서수적 다양성(ordinal varieties)을 구별할 수 있는 바가 이것이다. 예컨대 수학적, 수리-물리학적, 화학적, 생물학적, 물리적, 사회학적, 그리고 언어적 이념들 ... 이 각각의 수준은 어떤 상이한 미분적 ‘질서’에 속한 미분소들을 함축하지만, 어떤 질서에 속한 요소들은 보다 큰 우월한 질서 안에서 해소됨으로써, 또는 보다 열위에 있는 질서 안에 반영됨으로써 새로운 관계들 아래에 있는 다른 것 안으로 지나갈 수 있다. 두 번째는 수평적 차원인데, 우리는 이것으로 주어진 질서 안에 있는 어떤 미분적 관계의 수준에 상응하는, 그리고 각 수준의 특이점들의 분포에 상응하는 규정적 다양성을 구별할 수 있다(이를테면, 타원, 쌍곡선, 포물선 또는 직선에 따라 만들어지는 원뿔곡선 방정식, 혹은 구성의 통일성이라는 관점에서 정돈된 동물의 다양성, 또는 그 음운 체계의 관점에서 질서잡힌 언어의 다양성). 마지막으로 깊이가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상이한 질서의 미분적 관계를 위한 어떤 일반 공리를 결정하는 공리적 다양성을 구별할 수 있다. 이 질서에서는 이러한 공리 자체가 세 번째 미분적 관계와 일치한다.(DR 187)
첫 번째 수준 또는 수직적 수준은 미분화의 수준으로서, 이념에 속하는 관계들과 특이성들의 유형을 정의한다. 우리는 이것을 구조적 수준이로고도 부를 수 있다. 두 번째 수준 또는 수평적 수준은 분화 또는 이념이 겪는 발산하는 현행화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다양한 종들은 수많은 분화들, 수많은 살아 있는 미분화된 이념들의 다양성이다. 미분화와 분화 사이에는 이념에 속하는 활력적인 또는 현행화하는 요인들이 있다. 우리는 이미 바로 앞 장에서 왜 들뢰즈가 특이성과 관련하여 잠재성이나 준안정성 개념을 함축하는 것으로 일컬어지는지 보았다. 이 미로 안 어딘가에 우리는 개체성의 자리를 지정해야 할 것이다.
현행화의 정적인 시간
앞서 논의한 것들은 우리에게 들뢰즈의 현행화 논증에 대한 어떤 거친 개괄을 가져다 주지만, 아직까지 현행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지도만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 지도는 영토적인 것이 아니다. 이제, 명심해야 할 첫 번째 논점은 현행화가 동적이지 않고, 오히려 정적이라는 것이다. 현행화, 충족이유율이 동적이라는 주장은 현행화의 인과적 해명을 제공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았다시피, 인과성은 무언가의 필연적 근거들을 부여할 수 있을 뿐, 결코 충족이유를 주지는 않는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인과율이 미리당김(retensions)과 기대(expectations)의 체계를 수립하는 습관의 첫 번째 수동적 종합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았다.
결과적으로 인과성 개념은 그 자체 필연적으로 현행화의 과정에 의존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라는 것이 따라나온다. 현행화가 존재하는 그 수준에서만 인과성이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발생적인 것은 하나의 작지만 현행적인 요소와 다른 현행적 요소들 사이인 바, 시간 안에 야기되지, 잠재적인 것과 그것의 현행화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달리 말해 발생적인 것은 구조로부터 그것의 구체화로, 문제의 조건들로부터 해의 경우들로, 미분적 요소들과 그것들의 이념적 연결들로부터 현행적 요소들로 이동하며, 각각의 순간에 시간의 현행성을 구성하는 실재 관계들로 분기한다. 이는 역동론 없는 발생, 필연적으로 어떤 초-역사성(supra-historicity)의 요소 안에서 진전되는 바, 정적-발생(static-genesis)이며 아마도 제 차례에 그 사념을 해명하는 수동적 종합 개념과의 상호연관성으로 이해될 것이다.(DR 183)
‘정적 발생’이라는 생각에는 분명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 ‘발생’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운동, 변화, 과정, 출현을 함축한다. 다른 한편으로, ‘정적’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운동의 결여, 멈추어 서 있기, 정체, 자기-동일성을 가리킨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운동과 정지 간의 대립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 들뢰즈는 현행화 또는 정적 발생을 ‘진정한’ 운동의 유일한 형식으로 인식한다 – 오히려 운동의 ‘수평적’ 양태와 운동의 ‘수직적’ 양태 간의 차이에 해당된다.
만약 정적 발생이 정적이어야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발생이 그 안에서 수평적 또는 역동적 운동이 발생하는 바, 연장성들의 구성이나 기여를 위해 사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평적인 것과 수직적인 것,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 간의 차이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데, 이는 통합체(syntagm)와 계열체(paradigm) 간의 차이와 같은 것으로서, 여기서 통합체는 결합의 평면이고 계열체는 선별의 평면 또는 저장소다. 문제를 좀더 명확히 하기 위해, 우리는 체스 게임을 행각해 볼 수 있는데, 여기서 게임을 관통하는 운동들(동적인 사례)은 처음에 게임의 공간 구성에 의존한다(체스판, 배치, 반대 편, 말들의 가치 등등). 달리 말해 어떤 정적 발생은 완연한 기호적 의미 안에서의 위치(positonal) 발생인 것이며, 이는 현행화된 경험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존재와 부재의 놀이 같은 어떤 것을 허용하는 어떤 체계의 순서성(ordinality)을 정의한다(무언가는 그것이 하나의 장소를 가지는 한에서 그 장소를 잃어버릴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이와 같은 발생 개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오직 개체들의 정적 발생이 개체적인 것 외의 어떤 것에 대한 어떤 설명인 것처럼 계속해서 차이화함이 없는 개체적인 것의 충족이유를 해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들뢰즈는 모든 객체가 두 반쪽, 즉 잠재적인 것과 현행적인 것을 담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왜 그와 같은 이중성이 잠재적인 것이 현행적인 것이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결정하는 한에서 필연적인지 알 수 있다. 잠재성은 현행성의 충족이유를 구성하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현행적인 것과 연결된다. 하지만 잠재성이 현행성과 필연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우리는 잠재성은 현행성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없다. 잠재적인 것은 어떤 코드와 유사하고, 모든 코드들 또는 결합 체계같이, 메시지와 그 어떤 유사성도 없다.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은 특이성과 수반되는 미분적 요소들과 관계들로 구성되며, 이 요소들과 관계들은 특이성에 상응한다. 우리는 구조를 형성하는 요소들과 관계들을 그것들이 가지지 않는 어떤 현행성에 부여하는 것을 피해야 하고, 요소와 관계들로부터 그것들이 가지지 않는 실재성을 뒤로 물려야 한다. 우리는 상호적 규정과 그 실재성에 의해 정의되는 완결된 규정성의 이중 과정을 보았다. 미규정된 것에서 멀어져, 잠재적인 것은 완전히 규정된다 ... 요소들, 즉 관계들과 특이점들의 다양체들은 다른 것들에 대해 특권적인 관점을 가질 가능성 없이, 작용 중에 또는 객체 안에, 다시 말해 작용하는 잠재적 부분 또는 객체 안에 공존하는 바, 다른 중심들을 통합할 중심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객체의 완결된 규정성과 객체의 단지 한 부분, 둘 모두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 우리는 완결적인 한에서의 객체와 전체인 한에서의 객체를 신중하게 구별해야 한다. 완결된 것은 오직 객체의 이념적 부분일 뿐이며, 이념 안에서 그것은 다른 부분들에 관계하지만(다른 관계들, 다른 특이점들), 결코 어떤 통합적인 전체 그 자체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완결된 규정이 결여하는 것은 현행적 실존에 속한 전체적 관계 이다.(DR 209)
현행적인 것, 작용, 출현, 스스로를 표명하는 것, 스스로를 보여주는 것, 현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잠재성이다. 다른 현행적인 것들과 시간 안에서 관계를 맺는 것을 통해 지속적인 변형들을 겪고, 따라서 완결성을 결여하는 현행성과 달리, 잠재성은 완전히 규정되어 있다. 잠재적 이념이 완전이 규정되어 있다는 주장은 모든 요소들이 서로간에 상호적으로 규정되는 강도적 다양체의 본성으로 인해 이끌려 나온다.
이러한 다양체들은 조합 체계의 질서 위에 있지만, 만약 다양체나 이념이 오직 절반 또는 전체의 부분이라면, 그것이 객체의 충족 이유로 기능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만약 잠재성이 현행화된 요소의 충족 이유로 기능한다면, 이것은 현행적인 것이 체계에 속한 조합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재성과 현행성 간의 관계가 어떻게 정적 발생 중의 하나인지 알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개체화가 개체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이동시키는 방식에 대한 어떤 설명도 알게 된다. 실재 경험에 대한 것이 이러한 것이다.
충족 이유로서의 시간
용어가 제안하는 바와 같이, 정적 발생은 시간에 대한 어떤 특별한 관게를 포함한다. 이것은 더 이상 연속적인 시간이나 동시성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의 다양한 표현들 속 현행화의 과정에 있는 일종의 내적 시간성이다. 이것은 충족 이유의 시간, 문제가 해결되는 시간, 규정성의 시간이다.
한편으로 완결된 규정은 특이성들의 분화를 수행하지만, 그것은 특이성들의 실존과 분배에 대해서만 행해진다. 이러한 특이점들의 본성은 이웃하는 적분 곡선들의 형태에 의해서만, 다른 말로 해서 현행적이거나 분화된 종과 공간들에 의해서만 명시된다. 다른 한편으로 충족 이유의 본질적 측면들 – 규정가능성, 상호적 규정성, 완결된 규정성 – 은 그 체게적 통일성을 전진적인 규정성 안에서 발견한다. 결과적으로, 규정의 상호성은 어떤 퇴행, 또는 시간의 표식을 의미하지 않지만, 상호적 항들이 차례 차례 안전해짐에 틀림없는 어떤 진정한 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관계들 자체는 그것들 사이에 수립된다. 규정의 완결성은 또한 부가적 장들의 전진성을 함축한다. A로부터 A로 그리고 또 B로부터 A로 가는 중에, 헐벗은 반복에서처럼 우리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며, 오히려 A와 B 그리고 B와 A 사이의 반복은 문제의 장 전체의 전진적 여정 또는 작성(description)이다.(DR 210)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차이가 스스로를 추적하는 장의 과정 안에서 생산되는 반복현상이다. 여기서 과정이란 퍼스(Peirce)의 해석소(interpretant)의 차원으로서 기호에 속하며, 여기서 해석소는 차례로 다른 해석소를 위한 기호적 대상이 되고, 이에 따라 어떤 계열을 생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적합하게 구조적인 시간을 구성하는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이러한 전진성에 기대어 모든 구조는 어떤 순수하게 논리적, 이념적 또는 변증론적 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이 잠재적 시간은 분화의 시간을 규정하거나 또는 오히려 구조에 속한 관계들과 특이성들에 상응하는 현행화의 상이한 시간들의 리듬을 규정한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잠재적인 것에서 현행적인 것으로 가는 경로를 추정한다. 이런 측면에서 다음 네 개념은 동의어이다. 현행화, 미분화, 통합[적분] 그리고 해결. ... 각각의 분화는 전체 통합치의 전반적 해결 안에 있는 다른 것들과 연결되는 어떤 국지적 적분 또는 국지적 해결이다.(DR 210-11)
A로부터 B로 그리고 B로부터 A로의 운동은 펼침(unfolding)의 시간, 즉 경로나 연속의 시간이 아니라, 현행화 자체에 속하는 내재적 시간성을 구성하는 어떤 해(solution)이다. 우리는 여기서 게임에서 발견되는 시간의 양태들, 또는 유기체들의 전개과정, 또는 유년기, 성인 그리고 노년 간의 상이한 생애 단계를 감싸는 사회적 코드들에 관해 생각해야 할 수 있다.
강도적 시간의 공간화
이념의 현행화를 관리하는 이러한 내재적 시간 또는 시간성은 이념의 잠재성, 시공간적 역동성들 또는 강도들에 의해 가능해진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 현행화의 과정은 또한 현행화에 속해 있는 연장들 또는 공간의 구성과 상응한다.
응축되고 연장된 시간과 더불어 그리고 가속 또는 연기(delay)에 따라, 다른 공간들이 창조된다. 심지어 정지조차 유형생장(neoteny)의 경우에는 어떤 창조적 현행화의 측면을 가정한다. 원리적으로 시간적 요인은 역동적인 것들의 변형을 허용한다. 비록 이 역동적인 것들이 비대칭적이고, 공간적으로 환원불가능하며 완전히 분화될지라도, 또는 분화할지라도 그러하다.(DR 216)
그래서 우선 추정적으로 우리는 공간화, 즉 연장화가 시간의 다양한 이완이나 응축의 결과로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높은 수준으로 응축된 시간은 최고치의 차이를 담고 있는 것인 반면, 상대적으로 이완된 시간은 상대적으로 더 적은 차이에 의해, 정도상의 차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이 현행화의 과정과 연장의 발생이란 특이성의 본질적 관계를 함축한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에 대한 강의에서 이러한 관계성을 아담이 죄를 저지르는 세계와 이브가 유혹하는 세계 사이의 연속성을 논함으로써 해명하려고 한다. 이 세계는 두 특이성들을 정의하는 두 가지 세계이다.
이브의 유혹과 아담의 죄 간의 연속성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그 둘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는 경향이 있는 어떤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본질의 진리는 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며, 실존[존재]의 진리는 연속성의 법칙 또는 점차 사라지는 차이에 의해 지배되며, 그것은 동일한 것으로 드러난다고 말할 것입니다.("DLS," 22/04/80)
만약 현행화된 존재의 참모습이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면 이것은 특이성들이 서로 간에 연장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컨대 정사각형을 그려 보라. 그러면 그 사각형은 그 각각의 모서리들에 속한 네 개의 특이성로 구성된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떤 특이성을 취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점이에요. 여러분들은 어떤 원의 중심으로 그것을 취할 수 있어요. 어떤 원? 줄곧 다른 특이성에 인접하는 그런 원입니다. 다시 말해 정사각형 abcd에서 여러분들은 a를 어떤 원의 중심으로 택하는데, 이 원은 그것의 원주가 특이성 b의 인접항 안에 멈추는 것이지요. 같은 식으로 b를 다룰 수 있어요. 즉 여러분은 원을 그려나가고 특이성c 안에서 멈춥니다. 이러한 원들은 교차하겠지요. 여러분은 그러한 구성방식대로, 하나의 특이성에서 다음 특이성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연속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연속성의 가장 단순한 사례는 직선이지만, 정확히 말해 직선 아닌 선의 연속성도 존재하지요. 여러분들의 교차하는 선들의 체계에서, 여러분들은 두 평범한 계열들의 값, ab 값, ba 값이 일치할 때,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 두 원들에 포함된 두 개의 평범한 계열값의 일치가 있을 때, 여러분들은 연속성을 가집니다. ... 만약 특이성로부터 나오는 평범한 계열들이 발산한다면, 그때 여러분들은 불연속성을 가지게 될 겁니다.("DLS," 29/04/80)
여기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그 둘이 상호연관되고 상호의존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특이점과 보통점의 분배이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상호적 규정의 개념이 가진 의미를 발견한다. 만약 관계들이 상호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면, 만약 그것들이 스스로와의 관계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특이성이 다른 특이성의 근접성과의 관련에 의해 정의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연장성의 존재를 구성하는 바, 하나의 특이성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가는 경로는 이것이다.
현행화의 강도적 요인들
연속성 또는 연장성의 구성에 관한 들뢰즈의 논의에 대한 이런 기초적인 표명에서 우리는 따라서 특이성, 강도 또는 감각적인 것의 존재가 감각적인 것이 스스로를 차이로서 삭제함에도 불구하고, 감각되어져야 한다는 어떤 역설적 상황을 발견한다. 들뢰즈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차이는 다양성이 아니다. 다양성은 주어지지만, 차이는 주어지는 것이 그것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며, 주어진 것이 다양하게 주어지는 바 그것이다. 차이는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에 가장 가까운 본체(noumenon)이다”(DR 222). 우리는 이 역설적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실상 연속성이나 연장성인 감각의 다양체 안에서 드러나는 현행적 차이와 대조적으로, 감각적인 것의 존재는 들뢰즈에 따르면 강도적 또는 비대칭적 차이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비대칭적 차이들은 이념의 현행화를 통제하는 시공간적 역동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세계는 어떤 ‘잔여’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세계 안의 실재적인 것은 분수적인(fractional) 또는 심지어 측정불가능한 수들의 측면에서 이해된다. 모든 현상들은 어떤 불균등성을 가리키며, 이에 따라 그것은 조건지어진 다양성이고, 모든 변화는 그것의 충족이유인 어떤 차이를 가리킨다. 발생하는 모든 것과 현상하는 모든 것은 차이들의 질서와 상호관련된다. 즉 수준에서의 차이들, 온도, 압력, 긴장, 잠재력, 강도의 차이.(DR 222)
본성적이라기보다 정도의 측면에서만 다른 것들과 차이나는 것으로 이해되는 질적이고 연장적인 차이들 – 예컨대 좀 더 작은 설탕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각설탕 - 과는 달리, 강도적 차이는 여러 다른 차이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될 수 없는 비대칭성 또는 불균등성을 표시한다. 다시 말해 사물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또는 다양성이 주어지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강도적 차이들, 이 특이한 차이들이다. 정도 상의 또는 수적 다양체에서 차이의 경우, 어떤 분할은 오직 이미 거기에 있었던 여러 가지 양적인 것들을 산출한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점들이 서로 간에 정도상으로 차이나기만 하는 바, 특이성들이 서로 간에 이끌어내어지는 정사각형의 사례에서 본다. 하지만 내가 어떤 강도 또는 강도적 다양체를 분할할 때마다, 나는 다른 강도적 비대칭성을 이끌어내게 된다.
위에서 들뢰즈의 사례들은 명확하다. 온도는 끓는점에서 여러 상이한 온도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될 수 없지만, 대신에 그것의 존재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확정적이고 긍정적인 어떤 문턱을 표시한다. 그것은 어떤 서수적(ordinal) 차이, 위치, 장소다. 이 예는 속도, 음향 그리고 상이한 압력와 팽창력에서도 유사하다. 이 모든 사례들에서, 특정 사물들은 오직 그것의 차이와 관련해서 가능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은 어떤 특정 주체나 집단의 전망과 관련되는 진리의 상대성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성 또는 전망의 진리를 표명하는데, 여기서 특정한 현상들은 그것들이 포함하는 차이의 비대칭적 크기와 관련하여 가능할 뿐이다(즉, 세계는 그것이 시속 50마일인 경우 보다 시속 5마일에서 보여질 때 상당히 달라 보인다.). 더 나아가 강도적 차이는 그 자체로 감각적이진 않은데, 왜냐하면 온도, 압력 등등의 사태들은 그 감각적 실증성이 아니라 그 효과와 관련하여 감각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강도적 차이는 감각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변형이나 변화의 문턱들을 그것에 가닿기 위해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강도들이 어떤 정적 발생에 속한 개체화하는 차이들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이다. 그것드은 개체와 일치하지 않지만, 개체가 스스로를 개체화하는 방식을 통괄한다.
들뢰즈는 강도적 차이를 연장적 차이와 구별하는 세 가지 속성들이 있다고 여긴다. 첫째로 우리가 보았다시피, 강도적 차이는 그 자체로 불균등성을 포함한다. 또는 양적 차이들을 통과하면서 삭제될 수 없다. 자체적인 불균등성으로서 강도적 차이들은 서수성(ordination) 또는 차원들과 관련하여 사유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들뢰즈는 수체계가 불균등성에 기초하여 구성된다는 수학으로부터의 예시들을 제시한다. 그가 논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체곚거 유형들이 본질적인 불균등성이 기초하여 구축된다는 것을 이해하며, 그 다음으로 낮은 유형과 관련된 불균등성을 유지한다. 따라서 분수는 어떤 정수에 속한 두 양들 사이의 관계로 환원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포함한다”(DR 232). 요컨대 특성상 실증적인 이러한 불균등성은 특수한 수학적 연산들을 허용하는 차이나는 수의 유형의 영역을 표시한다. 수학에서 서수성은 따라서 기수성(cardinality)을 앞서 간다(예컨대 정사각형 증명에서처럼). 둘재로 들뢰즈는 강도가 차이를 긍정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차이는 부정적 관계 또는 항들 간의 대립을 가리키지 않으며(대립은 관계의 결과인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대신에 긍정의 대상으로 알려짐에 틀림없는, 즉 감각적 다양체의 소여(the given)를 위한 조건이다. 결론적으로 부정성은 헤겔에게서처럼 어떤 존재론적 위상을 가진다고 이해될 수 없고, 다른 것들과 비교되어지는 현행화된 현상의 관점에서 보여질 때 차이의 뒤집어진 이미지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부정, 부정성, 결여 그리고 부재에 대한 모든 말들이 폐절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 예컨대 들뢰즈는 그의 논문인 「냉정과 잔혹」(“Coldness and Cruelty”)에서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포함된 부정의 양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 오히려 그와 같은 부재가 가능하게 되는 위치상의 또는 기호적 조건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청한다. 요컨대 어떤 구조적 입장은 결여와 부재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긍정이다. 이것은 들뢰즈의 정신분석에 대한 후기 비판들을 미묘하게 다른 조명 안에 둔다. 정신분석은 주체의 분석에서 결여의 관념으로 시작하지 않지만, 결여가 최초의 장소 안에 부여될 만한 그러한 구조에 주체가 종속되어 지는 한 주체에 대한 구조화의 결과를 따라간다. 결여가 결코 논의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즉 그것이 경험과 주체의 실재 특성이 아니라는 것은 지적으로 스스로를 절름발이로 만드는 것이고 현실적인 실천의 수준에서 혼동스럽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강도적 차이가 양에 관련되거나 그것을 ‘배아화’(embryonized)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시공간적 역동성으로서, 현행화, 그것의 내적 시간성을 산출하는 과정을 통괄한다. 달리 말해 강도적 차이는 그것이 질료가 형상을 취하도록 하고 완전히 특유한 방식으로 현행화되도록 하는 식으로 물질 내부에 안주름화되거나 감싸여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사각형의 경우에 보았듯이, 서로 간에 확장되는 특이성들의 수렴을 통해 발생한다.
안주름운동과 밖주름운동
이 세 번째 특성과 함께, 우리는 개체화 과정, 그리고 잠재성과 현행성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우리가 보았다시피, 강도적 차이는 감각적인 것의 존재 또는 소여가 그것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강도적 차이가 현행화되는가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과정을 안주름으로부터 밖주름으로의 운동, 또는 강도적인 것에서 연장적인 것으로의 운동으로 기술한다. 우리는 마찬가지로 이 운동을 특이성에서 평범성으로의 운동과 등치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해 강도적 차이에서 연장적 차이로의 운동은 어떤 생성의 운동에 연루된 ‘에너지적’ 차이에서부터 동종적 종과 부분들에 의해 차이가 그 안에서 무화되고 은폐되는 연장적 또는 공간적 차이로의 운동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어떤 생명체는 그 내적 환경을 결정하는 역동성에 의해 유전적으로 정의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연장성 안에서 그것의 분배를 통괄하는 외적 운동에 따라 생태학적으로도 정의된다. 알의 운동과 닮지 않고도 군집체의 운동들은 서로 인접한다. 즉 개체의 지리적 격리과정은 내적 내적 유전 변형들 만큼 종에 구성적일 것이고, 가끔 후자를 앞서 가기도 한다. 모든 것은, 우리가 내적인 공간 스스로 국소적으로 통합되고 연결됨에 틀림없는 다양한 종들로 구성된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다양한 방식으로 성취될 만한 이러한 연결이 객체나 생명체를 그것 자체의 한계들, 즉 외부적인 것과 접촉하는 모든 것들로 밀어붙여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외부와의 연결, 그리고 다른 사물들, 생명체들과의 연결은 차례로 앞선 것들과 본성적으로 차이나는 연결들과 보편적 통합들을 함축한다.(DR 216-17)
하나의 연장성과 다른 것들 간의 한계를 표시하는 이러한 부분들, 연장들, 공간들의 발생을 통괄하는 것은 바로 특이성이다. 이런 이유로 들뢰즈는 다른 곳에서 기호의 어떤 변화로서 상호적으로 규정되는 관계 dy/dx를 가져 온다. “특이성은 어떤 방식으로 미분학에 연결될까요? 그것은 특이점이 미분관계 dy/dx가 그 기호를 변화시키는 이웃항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DLS," 29/04/80). 연장성이 할당되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다. 연장된 것들은 다른 특이성 전체에 걸쳐 어떤 특이성의 이웃항에 의해 정의되며, 따라서 동시에 연속성과 문턱을 규정한다.
논증을 하는 중에 들뢰즈는 에너지론과 관련하여 이 운동을 기술한다. “에너지론은 두 가지 요인들, 즉 강도적인 것과 연장적인 것의 조합으로 어떤 특정 에너지를 정의한다(이를테면 선형 에너지(linear energe)의 힘과 거리, 표면 장력 그리고 표면 에너지의 표면 영역, 압력과 압력 에너지의 부피, 중력 에너지의 높이와 무게, 열에너지의 온도와 엔트로피)”(DR 223). 이 구절에 따르면, 강도적 차이와 연장적 차이 사이의 관계는 질을 생산하는 힘들 간의 역동적 관계의 측면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들뢰즈의 개체화에 관한 설명에 원리적인 영감을 준 한 사람인 시몽동은 이 과정을 잘 표현한다. 그는 “잠재적 에너지의 양이 현실화되는 것과 동시에 증폭과정에 따라 전개되면서 물질의 부분들이 중간 크기 질서( a middle order of magnitude)의 구조화된 개체들로 조직화되고 분배된다(보다 낮은 크기 질서를 위한 필수 조건).”[3] 따라서 예컨대 물(보다 낮은 크기 질서)이 어떤 특정 온도(보다 높은 크기 질서)를 안주름화할 때, 그것은 끓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빠르게 부글거리며 증기를 뿜어내는 형태(중간 크기 질서)로 특정한 질들과 부분들을 생산한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 사이의 관계, 지속과 연장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들뢰즈의 강도 개념을 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는 강도라는 개념을 이념들과 종들 그리고 부분들을 인과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선택하지 않는다. 강도는 어떤 특정하게 생동하는 또는 살아 있는 감각 또는 질을 의미하지 않으며, 대신에 증감과 관련되는 정확한 시간적 관계를 의미한다. 사실상 들뢰즈는 칸트로부터 강도 개념을 가져 온다. 칸트에 따르면,
지각은 경험적 의식, 즉 감각적인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바 그것이다. 지각의 대상으로서 외양(appearances)은 시간과 공간 같은 순수(단지 형식적인) 직관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외양은 직관에 부가하여 또한 일반적인 몇몇 대상의 질료적인 특성(이를 통해 시공간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재현된다)을 담는다. 즉 이는 감각적 실재성으로서, 단지 주체적 재현이며, 이에 따라 우리는 오직 주체가 감응되는 의식일 수 있고, 일반적으로 어떤 객체와 관련된다. 그런데 경험적 의식으로부터 순수의식까지 어떤 점진적인 대체가 가능하다. 여기서 앞선 실재적인 것은 전체적으로 사라지며, 시공간적 다양체의 어떤 단순히 형식적인 (선험적한) 의식만이 남는다. 여기에는 또한 그 시작점인, 순수지각=0에서부터 어떤 파생적인 크기에 이르기까지의 감각 크기의 발생의 가능한 종합이 있게 된다. 이제 감각 자체가 대상적 재현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 안에 공간의 직관도 시간의 그것도 만나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확실히 그 어떤 연장적 크기도 가지지 않지만, 여전히 어떤 크기를 가지며(그리고 사실상 경험적 의식이 무=0로부터 특정 시간 안에서 자라나올 수 있는 그것의 통각을 통해), 이에 따라 그것은 어떤 강도적 크기로서 그것이 감각을 담고 있는 한에서 모든 지각 대상에 상응하고 강도적 크기, 즉 감각에 대한 영향의 정도에 속함에 틀림없다.[4]
강도적 크기 개념은 단순히 강도적 크기가 감각에 가하는 영향의 정도를 가진다는 생각을 아니다. 만약 이것이 강도적 크기가 단순히 경험적이라는, 그리고 그것에 그 어떤 선험적 차원도 간직하지 않는 경우라면, 그것은 아니다. 우리는 크기가 정도를 가진다는 것이 최소한 선험적으로 진리라고 주장함으로써 그것에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직 분석적 의미에서 선험적인 것이고, 종합적 의미에서는 아니다. 오히려 강도적 크기에 관한 생각은 어떤 감각적인 것의 증감과 관계 있다. 어떤 감각에 주어진 것과 같이 우리는 그것의 0으로의 감소와 무한으로의 증가를 상상할 수 있다. 만약 강도가 선험적 차원을 가진다면, 그것은 강도 안에 포함된 종합이 나로 하여금 어떤 주어진 감각에 대해 내가 그 감각보다 더 작거나 크게 어떤 감각을 상상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유사하게 어떠한 두 가지 감각이 같은 강도와 관계있기 때문에, 나는 이 두 가지 감각들 간의 다양한 감각의 정도를 상상할 수 있다. 비록 들뢰즈가 칸트의 강도적 크기에 대한 생각을 그것의 범주적 차원 때문에 거부했다 해도(이러한 거부는 마이몬Maïmon에 의해 제시된 미분적인 것의 관념이 선험적인 범주를 가정하지 않고서 같은 현상을 해명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는 강도적 크기에 대한 칸트의 기본적 정의를 받아들인다(DR 230).
들뢰즈가 베르그송으로부터 가장 현저하게 갈라져 나오는 것은 강도의 역할과 관련해서다.베르그송에 따르면 내적 차이는 질적 차이이며, 진정한 변화 또는 대체는 질적인 변화이다. 여기에 기반하면, 내가 어떤 지속적 다양체를 나눌 때마다, 나는 앞선 질과 본성적으로 다른 어떤 질적 차이를 산출한다. 결과적으로 『시간과 자유의지』에서 베르그송은 강도 개념이 질적 변화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본성적 차이를 사유하는데 실패하게 되는 지속의 공간화에 기반하고 있다고 길게 논증한다. 이에 반대하여,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강도에 관한 베르그송의 비판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질과 이미 구성된 연장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강도는 질의 경우 본성적 차이를 연장의 경우 정도상의 차이를 분배한다. 이런 관점에서 강도는 필연적으로 불순한 혼합물로 드러날 뿐이고, 더 이상 감각가능한 것 또는 지각가능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이에 따라 강도량에 속한 모든 것을 질적인 것에 귀속시키고 있었다. 그는 불일치나 모순에 그것을 묶는 표면적인 운동으로부터 질을 자유롭게 하고자 했다(이것이 그가 생성에 지속을 대립시킨 이유이다). 하지만 그는 오직 질적인 것에 하나의 깊이, 즉 정확히 강도량에 속하는 그것을 귀속시킴으로써만 그렇게 한다. 우리는 부정적인 것과 강도적인 것 둘 모두를 한 번에 거부할 수 없다.(DR 239)
만약 베르그송이 내적 차이를 질에 부여한 것이 실수라면, 그것은 단지 질적 변화가 본성적으로 차이난다고 알려지는 그것의 부정을 통해서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지속을 분할하는 것의 결과). 결과적으로 베르그송은 질을 자명한 것으로 시공간을 서로간에 외재적인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경험주의에 속한 모든 문제들로 돌아가며, 본성적으로 다른 질들 사이의 부정의 변증법으로 되돌아 간다. 반대로 강도는 그것이 증감의 과정에 있는 차이 안에 일련의 독자성을 정립하는 한, 이러한 문제들과 마주칠 리가 없다. 강도는 타자성, 부정 또는 매개를 함축함이 없이 스스로와 차이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강도 개념은 연장성이 시간으로부터 출현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한에서 중요하다. 우리가 두 번째 장에서 보았다시피, 이것은 내적 차이의 영역이다. 여기서 강도는 – 권리상 경험에 속하는 감각의 증감 그리고 이에 따라 칸트 자신이 주목한 바처럼 후험적인 선험성이라는 낯선 방식으로 – 시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만약 내가 선험적 감각의 증감을 파악할 수 있다면, 이는 내가 그것을 하나의 생성으로서 시간에서 펼쳐지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우선성에 관한 칸트적 질서의 역전을 발견한다. 칸트에게서 연장적 크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강도적 크기가 아니고, 오히려 연장성이 강도적 지각의 선결조건이다.
나는 하나의 연장적 크기를 부분들의 재현이 전체의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따라서 이것은 필연적으로 후자에 앞선다). 나는 그것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그것을 사유, 즉 하나의 점으로부터 그 부분들 모두가 연속적으로 생성되는 바를 사유 안에서 그리지 않고, 이에 따라 이 직관을 처음으로 스케치하지 않고, 나 자신에 대해 어떤 선(line)을 재현할 수 없다. 이것은 가장 작은 시간의 경우에도 똑같다. 나는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의 연속적인 진행만 생각하는데, 여기서 시간의 모든 부분들과 그것들의 부가를 통해 어떤 시간에 관한 규정적 크기가 충분히 산출된다. 모든 현상에서 단순한 직관은 공간 또는 시간 중 하나이기 때문에, 직관으로서의 모든 현상은 그것이 오직 연속적인 종합(부분에서 부분으로)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하나의 연장적 크기이다. 따라서 모든 외양은 이미 총계적으로 되며(앞서 주어진 부분들의 다양들), 이는 모든 종류의 크기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의해 연장적인 것으로 재현되고 파악되는 것들에만 해당된다.[5]
이런 측면에서 칸트는 모든 지각들을 연장에 종속시킨다. 결과적으로 직관의 세계는 기하학적 직관에 종속되는 바, 여기서는 오로지 정도상의 차이와 외적 관계들만이 발견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들뢰즈는 연장성이 강도의 효과라고 논증한다.
칸트는 모든 직관들을 연장적 양, 다시 말해 부분들의 재현이 필연적으로 전체의 재현을 앞서 가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양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공간과 시간은 그것들이 재현되는 것처럼 재현되지 않는다. 반대로 전체의 재현은 부분들의 가능성에 기반하는데, 후자는 오직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오직 경험적 직관의 규정적 값에 의해서만 현행화된다. 연장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경험적 직관이다. 그는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논리적 연장을 거부하지만, 칸트의 오류는 어떤 기하학적 연장성을 시공간에 대해 견지한다는 것이고, 어떠한 정도 또는 여타의 것에 어떤 주어진 연장성을 채우는 물질을 위해 강도적 양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좌우대칭적 신체의 사례에서, 칸트는 정확하게 내적 차이를 인식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관점에서 개념적 차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외연적 크기의 형식에서 전체로서의 연장성과 어떤 외적 관계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었다. 사실상 오른쪽과 왼쪽, 높고 낮음, 전경과 배경과 관련된 모든 것처럼, 대칭적 대상들의 역설은 강도적 원천을 가진다.(DR 231)
들뢰즈적 모델 아래에서, 그것은 선재하는 외재성을 채우러 오는 강도가 아니라, 오히려 공간이 생성을 설명하는 강도이다. 만약 칸트가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이미 공간에 기반하여 부여 가능하고 생성 가능한 재현적 동일성에 특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지점은 살펴 봐야할 것으로 남아 있다.
깊이와 연장성
만약 연장성이 강도에 의존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라면, 이것은 강도가 연장성의 가능한 규정성을 부여하는 깊이와 본질적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논한 바에 따르면,
연장성이 그것 안에서 발생하는 개체화들을 위한 해명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할 만하다. 높은 것과 낮은 것, 오른쪽과 왼쪽, 전경과 배경이 연장성 안에서 솟아오르고 추락하는 것, 흐름과 하강을 따라가는 개체화하는 요인들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떤 이미 전개된 연장성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값은 오직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어떤 ‘더 깊은’ 순간, 즉 깊이 자체로부터 흘러나오며, 이 깊이는 연장이 아니라 순수한 안주름체(implex)이다. 모든 깊이가 물론 가능한 길이와 크기를 가진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 가능성은 관찰자가 장소들을 바꾸고 어떤 추상적 개념 안으로 그 자체로 길이인 것, 그리고 다른 것에 대해서 길이인 것을 모아들이는 한에서 실현된다. 사실상 이전의 것이 길이가 되거나 길이 안에서 펼쳐지는 것은 언제나 깊이의 기초해서이다.(DR 229)
한편으로 연장성은 그 아에서 발생하는 개체화들의 근거짓기에 실패한다. 왜냐하면 (1) 연장성은 동질성의 장을 기능하는 이미 현행화된 매개체이기 때문이며(따라서 이런 저런 개별체들은 그 자신의 개체화하는 요인들과 관련 없이 어떤 연장성을 점유할 수 있다), (2) 높이, 좌우대칭상 그리고 전경과 배경과 같은 규정들이 다른 객체와의 외적 관계에 의존하는 상대적 규정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의 경우에, 이 상대적 규정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들뢰즈가 강도, 그리고 순수 과거와 동등하게 본 일련의 절대적 깊이이다.
객체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는 깊이의 이 종합은, 하지만 그러한 그림자로부터 객체를 출현시키며, 가장 먼 과거와 현재와 과거의 공존에 대한 증언을 간직한다. 우리는 여기서 순수한 공간적 종합이 이전에 특성화된 시간적 종합을 반복한다고 해서 놀라지 말아야 한다. 즉 여기서 연장성의 밖주름운동[펼침]은 첫 번째 종합, 즉 습관 또는 현재의 종합에 놓여 있지만, 깊이의 안주름운동[함축]은 두 번째 종합, 즉 기억과 과거의 종합에 놓여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깊이 안에서 세 번째 종합의 근접성과 끓어오름이, 보편적 ‘근거없음’을 내세우면서, 그 자체를 지각하게 한다.(DR 230)
들뢰즈가 순수과거의 측면에서 깊이를 다루고 강도와 그것을 동등하게 놓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어떤 공간적 규정성의 측면에서 시간을 그리고 시간적 규정성의 측면에서 어떤 공간적 규정성을 개념화함으로써 은유로 빠져들어간 것은 아닌가? 모든 것은 우리가 일단 강도에 관한 규정적인 속성이 그것의 증감의 속성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분명해진다. 우리는 깊이라는 것이 강도가 증가하고 감소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의미에서 증감의 끊임없이 사라지는 한에서 즉각적으로 깊이와 강도 간에 내적 관계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두 경우 모두에서, 강도도 깊이도, 만약 어떤 시간의 경로가 없다면, 스스로를 표명하지 않는다. 만약 깊이가 순수과거와 등치되어야 한다면, 이것은 깊이가 그 자체로 현재가 되지 않는 어떤 규정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전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현전하지 않는 것의 끊임없이 사라지는 장이다. 그것은 미래가 아닌데, 왜냐하면 스스로 연장성 속으로 축소되고, 삭제되며, 스스로를 펼치고, 스스로를 끌어 들이는 것에 기초하여 드러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연장성을 설명한다면, 이것은 그것이 위 아래, 왼쪽과 오른쪽, 전경과 배경으로 분배하기 때문이다.
깊이와 사유의 이미지
우리가 초월론적 환영의 자리 또는 사유의 이미지를 지정할 수 있는 것은 정확히 깊이와 그것이 야기하는 연장성의 발생 안에서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일단 깊이가 연장적 양으로 파악되면, 그것은 발생적인 연장성에 속하고, 다른 둘과 관련하여 그 자체 안에 스스로의 이질성을 포함하는 것을 멈춘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연장성의 궁극적 차원이지만, 이것을 오직 근거에 대한 이해 없이 어떤 사실로서만 이해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이 원초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개체화하는 요인들의 연장성 안에 있는 현존에 주목하지만, 그것들의 힘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에 대한 이해 없이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들이 원초적인 깊이를 표현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DR 229)
깊이를 다른 것들 중에서 (그것이 존재하는 강도적 차원이라기 보다) 어떤 연장적 양으로 다루면서, 우리는 현행화하는 것을 넘어선 현행화되는 것에, 즉 과정을 넘어선 생산물에 특권을 부여한다. 결과적으로 사유의 이미지의 모든 공준들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 그것은 해들(solutions)이 문제들보다 더 특권화 된다는 의미에서 불가피한 것이 된다. 현행성의 영역, 연장성의 영역이 정확히 해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주체와 객체의 형식(상식)은 공간 안에서 현행화되고, 가장 일반적인 것이 연장성과 관련하여 특권화될 것이라는 점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 더욱이 능력들의 수렴적 사용이, 연장성이 그 능력들이 수렴하는 현상적으로 동일한 매개를 재현하는 한 특권적일 것이다. 만약 상식 안에서 능력들의 분배가 특수한 것에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현행화된 연장성이, 미래에 속하는 차이들이 오로지 정도상으로 차이날 수 있는 하나의 장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깊이를 강도, 순수 과거 또는 지속으로 인지할 때 풀린다. 강도가 지배하는 곳에서, 깊이는 차이와 현재적 현행화에 속한 바를 풀어내는 더욱더 멀리까지 개체화를 가져올 수 있을 뿐이다. 시몽동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전개체적인 것은 언제나 더 전진한 개체화들을 위한 잠재력을 담고 있다. 깊이는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
개체들과 인칭들의 생성
하지만 연장성의 탄생이 사유의 이미지의 근원을 해명하는 반면 – 동종화하고 개체화의 미분적 근원들을 은폐하려는 경향 –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의 전제와 사유의 이미지의 도덕적 성격을 설명하는데에는 실패한다. 연장성은 동종화의 매개, 그것의 조건, 그것의 ‘의도’를 설명하지만, 아직까지 그와 유사하게 다루어지는 객체들의 발생이나 이러한 ‘결정성’(decision) 안에 포함된 도덕적 차원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 문제의 해결은 심리적 체계 또는 우리 자신인 바 그 체계의 발생 또는 현행화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들뢰즈의 생각에, 심리 체계의 개체화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는 세계의 구성에 놓여 있다. 이 단계는 개체적인 것을 적합하게 구성한다고 일컬어질 수 있다.
이 표면적 위상학, 이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유목적 특이성들은 실재적인 초월론적 장을 구성한다. 개체적인 것인 이러한 장으로부터 파생되는 방식은 첫 번째 발생 단계를 드러낸다. 개체적인 것은 세계와 분리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았다시피, 하나의 특이성이란 두 가지 방식으로 파악될 것이다. 그것의 실존과 분배 안에서, 그리고 그뿐 아니라 그것의 본성 안에서, 즉 보통점의 선을 넘어선 어떤 규정된 방향 안에서 스스로를 연장하고 흩뿌리는 것을 따라서 파악된다. 이것의 두 번째 측면은 이미 어떤 안정화(stabilization)와 특이성의 현행화의 시작을 드러낸다. 특이점은 다른 특이성들의 근방까지 이르는 보통점의 계열을 넘어 분석적으로 확장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세계는 계열들이 수렴하는 조건 위에서 구축된다. (‘다른’ 세계는 계열들이 발산할 만한 그러한 점들의 근방에서 시작될 것이다.)(LS 109)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할 것은 들뢰즈가 개체적인 것의 원인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오히려 그 개체성의 충족 이유를 탐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행화의 이 첫 번째 단게에서, 우리는 따라서 특이점들의 수렴에 의해 결정되는 특이점과 보통점들의 분배를 발견한다. 우리가 사각형의 예에서 보았다시피, 이러한 수렴은 수렴적인 특이성들의 중복을 통해 보통점들의 응결을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연장의 발생을 알게 되며, 그와 더불어 근원의 삭제가 어떤 대안적 방식 안에서 표현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달리 말해 깊이, 초월론적 장은 그 자신의 삭제의 원리가 된다.
들뢰즈의 주장은 개체적인 것이 세계와 분리불가능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의 비판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하다. 특이성들의 수렴으로 개체화의 원리를 수립함으로써 들뢰즈는 동시에 발생의 원리를 제공할 수 있는데(공가능성의 장에서 이러한 특이성들의 종합) 이는 어떤 일반성에 속한 특수성으로 파악된 존재로부터 개체적인 것을 구출한다(왜냐하면 특이성은 사건들이며 사건은 실존에 연루되기 때문이다). 반면 이 원리는 개체화하는 전망을 보편화함으로써 개체가 초월적 환영에 희생당하는 조건들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다음과 같이 곧장 주장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현행화된다는 것은 또한 표현된다는 것이다. ... 이 논증은 우리가 그것을 표현적 모나드에서 술어[속성]의 고유성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한 불충분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표현된 세계가 그것을 표현하는 모나드 바깥에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모나드들 안에 내재하는 일련의 술어들로 모나드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 표현된 세계는 미분적 관계들 그리고 우발적 특이성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정확히 각각의 특이성이 의존하는 계열들이 다른 것에 의존하는 계열들로 수렴하는 한에서 하나의 세계로 형성된다. 이 수렴은 세계 종합의 규칙으로서 ‘공가능성’을 정의한다. 계열들이 발산하는 곳에서 처음에는 불공가능한 다른 세계가 시작된다. ... 각각의 세계에서 개체적인 모나드들은 그것이 비록 불분명하고 혼란스럽다 해도 이 세계의 모든 특이성들 – 무한성 - 을 표현한다. 하지만 각각의 모나드들은 ‘명백하게’ 몇몇 특이성들만을, 즉 그것이 구성되고 그 자신의 신체와 연결되는 근방역에 있는 특이성들만을 감싸거나 표현한다. 우리는 특이성들의 연속체가 전체적으로 그것을 다양하게 그리고 판명함의 보조적 수준에서 그것을 감싸는 개체들과 구분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특이성들은 전개체적이다.(LS 110-11)
이 구절의 중요성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들뢰즈는 세계가 그것을 표현하는 모나드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달리 말해 두 가지 모두의 동종화(homogenization)를 확증할 만한 세계와 주체 사이에 외재성의 주름을 충돌시킨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가 그것을 표현하는 모나드 바깥에 존재한다는 주장이 단지 교조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특성만이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에게 자명하다는 주장에 상당한다는 것을 고려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세계가 스스로에게 자명하다고 고려되는 한, 그리고 세계가 개체화의 필수 조건인 한, 개체화의 조건들이 모든 개체들에게 동일하다는 것이 따라나온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개체화의 조건들이 모든 것에 대해 동일하다고 주장하면, 우리는 이러한 해명에 속하는 모든 개체들이 원리적으로 같을 것인 한에서 개체화하는 어떤 능력을 상실시키게 된다. 이것은 우연찮게도 그것이 장을 점유하는 다른 모든 개체들을 위해 어떤 평가적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는 어떤 단일한 특권적인 개체화의 장으로 [다른] 개체들의 장을 환원하는 한 핵심적인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이다. 이것은 개체론의 위험성이다. 다른 한편으로, 연속체가 개체와 구별된다고 증명됨으로써, 들뢰즈는 주체론의 두 번째 위험성으로 회피하는데, 여기서 주체론은 그 자신의 우주의 개체적 주인으로 행세하며, 어떤 차이나 타자성을 해방한다. 개체적인 것은 초월론적 장을 점유하지만, 그것과 같지는 않다. 그것은 특이성들의 동합의 결과이지만, 그 자체로 이러한 특이성들의 기원이 아니다. 정의상 분열된 주체는 유아론적을 존재할 수 없다.
첫 번째 종합은 개체들의 발생을 해명하지만, 두 번째 종합은 첫 번째 종합에 근거하여, 인칭들의 발생을 해명한다. 처음에 이것은 이상하게 들릴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인칭들과 개체들을 동일시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하나의 인칭으로서 스스로를 인지하는 것이 최소한 거기에 다른 인칭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면, 우리는 이 두 번째 방생 단계를 드러내는 것이 왜 필수적인지 알 수 있다. 인칭으로서의 스스로의 정체성은 하나의 클래스(class)의 구성요소로 스스로를 인지할 것을 요청한다(여기서 클래스는 집합론적 의미의 개념이지 맑스주의적 의미가 아니다). 사유의 이미지의 도덕적 차원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은 바로 여기, 이 순간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첫 번째 현행화의 영역에서, 두 번째 수준이 수립되고 전개된다. ...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모나드에게 “적합한 초월성, 즉 구성적으로 이차적인 객체적 초월성에 속하는 감각-저장소”를 부여하는 것, 첫 번째 수준의 “내재적 초월성”과 구별되는 이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해(solution)는 현상학적인 어떤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자아가 개체적인 모나드로만 구성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 모나드, 이 살아 있는 개체는 하나의 연속체로서의 세계, 또는 수렴들의 원환 안에서 정의된다. 그러나 앎의 주체로서 자아는 무언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공가능한 세계들 내부에서 보증될 때 나타나며, 발산하는 계열들을 가로지른다. 이런 경우 주체는 “세계”(Welt)의 새로운 의미에서, 세계에 관련된다. 반면 살아 있는 개체는 세계 안에, 그리고 그 또는 그녀 내부의 세계 안에 있다(Umwelt).(LS 113)
이 두 번째 수준을 발산적 계열 또는 불공가능한 세계들의 측면에서 정립함으로써, 들뢰즈는 결론적으로 두 번째 수준이 세계간 횡단적 관계들 또는 상호주체성과 관련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연결에서 인식론의 중심문제는 주체가 어떻게 객체를 알 수 있는가가 아니라, 존재자들이 어떻게 상호주체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가라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내가 나의 경험의 상호주체성을 수립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또는 다른 주체들과 더불어 공유된 세계에 내가 어떻게 속하는지가 문제인 것이다. 두 번째 수준은 개체들 간의 관계들에 따른다. 만약 그와 같은 관계가 인칭들의 현행화에 필수적이라면, 그것은 자아가 본질적으로 타자이기 때문이다. 인식 주체로서 자아는 본질적으로 타자로서 스스로를 만난다. 개체적인 것은 홀로 개체로서 스스로를 만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주위세계(Umwelt)나 환경 안에 걸려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뿐이다.
그러나 세계 사이에 무언가를 확증하기 위해 개체적인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개체적인 것이 현행화되는 세계가 어째서 어떤 환영적인 폐쇄구조에 그토록 완벽하게 종속되어 그것이 다른 어떤 세계로의 그 어떤 개방도 받아들이지 않는 외양을 부여하는 것인가? 여기서 들뢰즈는 문제들의 발생적 힘을 언급한다.
문제는 ... 필연적으로 ‘애매한 기호들’ 또는 우발점들, 다시 말해 상이한 해들의 예들에 상응하는 특이성들의 다양한 분배들을 포함하는 조건들을 가진다. 따라서 예컨대 원뿔 단면에 관한 방정식은 그것의 애매한 기호가 다양한 사건들 – 원, 타원, 쌍곡선, 포물선, 직선 - 로 세분되는 하나이자 동일한 대사건(Event)를 표현한다. 이러한 다양한 사건들은 문제에 상응하고 해들의 발생을 규정하는 수많은 예들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공가능한 세계가 그 불공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이자 동일한 문제를 위한 해의 예들로 여러 세계가 나타나는 관계 안의 발생적 요소의 애매한 신호를 표현하는 공통적인 무언가를 가진다고 이해해야 한다(단 한 번의 승부, 모든 던짐).(LS 114)
다시 말해, 내가 2장에서 논했다시피, 문제는 일련의 위상학적인 변화의 공간을 재현한다. 하지만 그것의 미분적이고 이질적인 힘에 따라 애매한 신호의 이러한 귀속에서 강도의 개념을 인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칭의 발생이 생겨나는 것은, 많은 불공가능한 세계 중 하나에 속하지 않는 공통적인 이 애매한 기호에 기반해서다. 이 애매한 기호에 따라, 그 자체 세계성(worldliness)을 정의하는 속성들과 범주들을 생성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이미 고정된 특이성들에 의해 구성된 어떤 개체화된 세계, 수렴적인 계열들로 조직화되는 세계에 맞닥뜨리지도 않고, 이 세계를 표현하는 규정된 개체들과도 마주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특이점들의 우발점, 특이성들의 애매한 기호, 또는 오히려 이 기호를 재현하고 수많은 이 세계들을 좋게 유지하는 것들과 마주친다. 또는 지난 분석에서처럼 모든 세계들에 있어서 발산들과 개체들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거주하는 그 모든 세계를 위한 것들과 마주친다. 따라서 여기에는 마치 섹스투스=x 또는 팡=x가 있는 것처럼 다양한 세계에 공통되는 어떤 ‘애매한 아담’, 즉 방랑자, 유목민, 어떤 아담=x가 있다. ... 모든 객체=x는 ‘인칭들’이고 속성들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들은 더 이상 이 개체들의 기술(description)을 수행하는 어떤 세계 내부에서 규정되는 개체들의 분석적 속성이 아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것들은 종합적으로 인칭들을 정의하는 속성들이며, 수많은 변이들과 가능성들로 상이한 세계들과 개체들을 개방한다. ... 어떤 인칭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변이들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들을 필연적으로 클래스들과 속성들을 의미하는 개념들로 취급해야 하며, 따라서 범주적인 배경에 반하는 연속적인 종별화 안에서 일반성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킴으로써 본질적으로 감응[촉발]된다.(LS 1 14-15)
애매한 기호에 기반하여, 우리의 세계와 다른 세계들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왜냐하면 애매한 기호란 하나이자 같은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들이 거기 존재한다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어떤 이접적 종합으로 세계 사이의 관계들을 지칭하는 것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세계들 간의 관계는 환원이나 동화(assimilation)의 그것이 아니다. 다른 세계와 연관된 존재 안에서, 인칭은 이 세계를 그것들 자신의 개체화된 세계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 그것들 자신의 세계보다 더 나은 개체화의 장을 만난다. 만약 애매한 기호, 객체=x 또는 텅 빈 정사각형이 이 가능성을 부여한다면, 이는 그것이 그 자체로 스스로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과 유사한 방식으로, 애매한 기호는 그 자신과 차이나고 지연된다(deferred).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그것의 독특한 속성은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는 곳에 없으며, 반대로 또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그 장소로부터 사라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그리고 이런 점에서 실재적인 것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신의 유사성과 일치하지 않는다(그리고 이런 점에서 이미지가 없다). 또한 그것은 그 자신이 동일성과 일치하지 않는다(그리고 이런 점에서 어떤 개념이 없다). “숨겨진 것은 결코 그 자리로부터 이탈한 것이 아니다. 마치 도서관에서 잃어버린 어떤 책에 대해 말할 때, 도서열람권을 놓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비록 책이 바로 옆 책꽂이나 다음 열(slot)에 있다해도, 그것은 거기에 숨겨져 있을 것이지만, 시각적으로 그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 자리를 바꿀 수 있는 어떤 것만이 말 그대로 그것으로부터 이탈한 것으로 알려지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기호적인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격변이 무엇이든지간에, 실재적인 것은 언제나 그것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기호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뒤꿈치에 붙이고 다닌다.”[6] 만약 객체=x가 필연적으로 횡단하는 계열들이 서로 간에 관계 안에서 상대적인 이동을 나타낸다면, 이는 구조 안에서 그것들의 상대적 장소들이 처음에 언제나 순환하고, 언제나 그 자신과 관련하여 대체되는 객체=x와 관련하여 각각의 순간에 각각의 절대적 장소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 이동, 보다 일반적으로는 교환의 형식들이 바깥으로부터 부가된 어떤 특성을 구성하지 않고, 구조가 관계들의 변화에 속하는 장소들의 질서로 정의되도록 허용하는 근본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전체 구조는 이 세 번째 근원적인 것에 의해 이끌어진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것은 그 자신의 원초적이 것과 일치하는데 실패한다. 전체 구조를 가로질러 차이를 분배하면서, 미분적 관계들을 그것의 이동으로 구성하면서, 객체=x는 차이 자체의 차이화하는 요소를 구성한다.("HRS" 275)
들뢰즈의 사유에서, 구조의 최소한의 조건은 (1) 하나가 의미화하는 것으로, 다른 것은 의미화되는 것으로 규정되는 두 이질적인 계열들의 최소치, (2) 오로지 그것들이 다른 것들과 유지하는 관계들 안에서 존재하는 항에 의해 구성되는 각 계열들, (3) 객체=x의 역설적 순간에 의해 함께 연결되고 있는 이러한 두 계열들 또는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어두운 전조’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면 만약 비어 있는 정사각형 또는 객체=x가 인칭의 형태로 다양한 세계들의 현행화를 허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빈 사각형, 즉 두 계열들이 횡단하는 것이 이러한 세계들 각각에서 현행화되는 일련의 비어 있고, 채워져 있는 (구조적) 자리들을 분배하기 때문이다. 비어 있음과 가득 참이 오직 ‘기호적’ 구조에 기반하여 규정될 수 있는 한(여기서 위치는 특이성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동시에 두 세계가 소통할 수 있는 방법과 그것들이 발산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어떤 설명을 얻는다.
이러한 인칭의 발생에 관한 설명에 기초하여, 우리는 어떻게 일반 클래스들[집합들]이 출현하기 시작하는지 알 수 있다. 이 과정의 어떤 중요한 공식화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속성들과 클래스들은 인칭적 질서 안에 근거를 가진다. 이것은 인칭들 자체가 우선적으로 하나의 단일 구성인자로 이루어진 클래스이며, 그것들의 술어들이 하나의 불변항을 가진 속성들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인칭은 그 또는 그녀의 클래스의 하나 뿐인 구성요소이며, 여기서 클래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들, 가능성들 그리고 그것에 귀속하는 개체들에 의해 구성된다. 변화하는 다양들, 속성들로서의 클래스들은 하나의 단일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이러한 클래슫르, 그리고 하나의 불변항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속성들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그러므로 전체적인 연역이 다음과 같다고 믿는다. 1) 인칭들, 2) 그것들이 구성하는 하나의 단일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클래스들 그리고 그것들에 속하는 하나의 불변항으로 이루어진 속성들, 3) 연장적 클래스들 그리고 다양한 속성들 – 즉 그것들로부터 나오는 일반 개념들. 우리가 개념과 자아 사이에 근본적인 연결을 해석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다. 보편적 자아란 마치 다른 자아들이 여러 세계들에 공통적인 어떤 특정한 사물=x인 것처럼, 정확히 모든 세계들에 공통되는 어떤 것=x에 상응하는 인칭이다.(LS 1 l5)
처음에 들뢰즈는 여기서 모순에 빠지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만약 그 속성들이 하나의 불변항을 가진 것처럼 하나의 단일한 구성인자로 이루어진 클래스로 정당하게 알려질 수 있다면, 이것은 인칭이라기보다 개체적인 것의 질서에 속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근소한 이동이 첫 번째와 두 번째 현행화의 수준 사이에서 발생한다. 개체성 또는 세계의 구성이라는 수준에서, 우리는 자유와 활동적인 특이성-사건의 형식 안에서 분석적 술어들[속성들]을 가졌다. 여기에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타자성 없는 차이다. 그 결과 우리는 여기서 개체적인 것이 계속적으로 현행화되는 어떤 초월론적 장을 가지게 된다. 두 번째 수준, 즉 인칭적 수준에서 우리는 종합적 술어들을 가지는데, 이것은 우리가 이제 유일한 하나의 구성인자 그리고 오직 하나의 불변항을 가지는 속성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첫 번째 수준에서 개체적인 신체는 초월론적 장 위로 특이성들을 감싸지만, 필연적으로 그것들을 종합하지는 않는다. 두 번째 수준에서 술어들[속성들]은 하나의 통일성 또는 동일성을 형성하면서 종합된다. 결과적으로 클래스들은 그것들이 구성인자들을 표시하거나 명명하므로, 특이성-사건들과 차이나는 것으로 사유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성은 차례대로 어떤 타자성, 차이, 발산에 기초하여 가능성을 가질 뿐이다. 따라서 ‘나’는 최소한 두 가지 의미에서 하나의 타자이다. 첫째, ‘나’는 그것이 시간의 텅 빈 형식에 따라 쪼개지거나 갈라지는 한 타자다. 두 번째로 ‘나’는 오직 그것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세계들과 이접적인 관계를 통해서 ‘나’로서 그 자체를 만날 수 있는 한 타자다. 나는 그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것이 어떤 인칭적 존재의 조건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통적인 무언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화가 발생하는 이러한 세계들 간에 동일시되어야 하는 한 어떤 역설적 발생이다.
이 두 번째 수준에 기초해서, 그것은 증가하는 일반성의 클래스들을 열거하는 것이 가능해 지며, 따라서 서로 간에 발산하는 많은 가능한 세계들의 이접을 소멸시킨다. 이것은 이미 연장적인 것들의 탄생에 관한 들뢰즈의 해명에서 중요한 의미였다. 그리고 여기서도 똑같이 중요하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발생의 첫 번째 단계가 의미의 작용인 것처럼, 두 번째 단계는 무의미의 작용이다. 이 무의미의 작용은 언제나 의미와 공-현(co-present)한다(우발점 또는 애매한 기호). 두 단계들, 그리고 그것들의 구분은 필연적으로 발견된다. 첫 번째 단계에 따라 우리는 구체화하는 ‘양식’(good sense)의 원리를 발견하는데, 이는 차이에 관한 이미 고정되고 정주적인 조직화의 원리이다. 두 번째 단계에 따르면 우리는 동일성의 기능으로서의 ‘상식’(common sense)의 원리의 구성을 발견한다.(LS 1 16)
달리 말해 사유의 이미지의 발생이 이미 현행화의 과정에 내재하는 어떤 방법이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현행화 과정의 불가피한 결과인 한 그 자체로 사유의 이미지를 극복하는 것에 대한 질문은 있을 수 없다. 다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어떤 해가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어떤 선택으로서 언제나 단지 부분적으로 성공할 것이다. 연장들 또는 인칭의 발생과 함께, 개체화의 ‘근원들’은 은폐되고, 모호해지며, 삭제될 뿐 아니라, 세계들 간의 발산들도 가려진다. 들뢰즈가 보편적 자아의 구성을 암시할 때 그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 계기이다. 또한 우리가 사유의 이미지가 도덕적 특성을 가지는 방식을 간파하기 시작하는 것도 이 순간이다.
사유의 이미지의 도덕적 근거
들뢰즈가 여기서 말하는 도덕성은, 그의 해명이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도덕 법칙의 보편성도 가정하는 입장들을 해명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칸트적 의미에서 도덕 규범들과 법칙들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도덕’은 moralis에 관한 보다 어원학적인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데, 이는 mos, moris에서 나오는 것으로 습관, 관습 그리고 행위과 관련된다. 사유의 이미지의 도덕적 차원이 ‘모든 사람들이 안다’는 전제와 관련된다는 것은 이런 측면이며, 따라서 이는 관습, 행위 그리고 습관의 문제이면서 연장적인 것들의 발생, 즉 인칭적 존재들이 그 안에서 원칙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어떤 이념적인 공유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은 들리즈가 이러한 보편적 자아의 발생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바로 칭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보편적 자아를 사유의 이미지의 현실화와 조건 둘 모두로 가정하도로 하는가? 그리고 두 번째, 이러한 가설은 어떻게 성격상 도덕적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뢰즈의 아름다운 논문인 「미셸 투르니에와 타인 없는 세상」 (Tournier and the World Without Others)에서 발견된다. 들뢰즈가 타자성을 사유의 이미지가 발생하는 조건으로 언급하는 곳이 여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타자에 대한 명료한 논의는 『차이와 반복』의 ‘감각적인 것의 비대칭적 종합’의 마지막 부분에도 있다(DR 254-61). 만약 「미셸 투르니에와 타인 없는 세상」이 사유의 이미지에 관한 들뢰즈의 논의에서 어떤 예시적 장소를 차지한다면, 이는 그 논문이 능력들의 수렴이 가능한 조건, 즉 주체와 객체들의 형식으로의 분배,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런저런 일반적인 시간적 질서 안에서 능력들의 분배에서 우리에게 사유의 이미지의 도덕적 차원에 관해 해명할 수 있는 발생적 사유를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미셸 투르니에와 타인 없는 세상」에서 들뢰즈는, 타인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주위를 돌면서, 투르니에의 매력적인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대한 철학적 독해를 제시한다. 들뢰즈는 「냉혹함과 잔혹함」 그리고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전개한 최초의 철학적 증후학의 기획을 이어, 투르니에의 텍스트에 대해 타자와 관련하여 신경증, 분열증 그리고 도착(perversion)에 관한 상이한 구조들 주위를 선회하는 상당히 라캉적인 독해방식을 행한다.[7] 다소간 몽상적이고 낭만적인 비틀림 안에서, 들뢰즈는 타인 없는 세계가 어떤 요소적 성 또는 더 이상 사유의 이미지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욕망하기의 방식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놓는 일련의 이상한 경제를 드러낸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분투하다. 들뢰즈에 따르면 신경증과 분열증이 타자성을 속박하고 따라서 일련의 보편적 자아로 특권을 누리는 것과 같은 식의 사유의 이미지를 구속하는 곳에서, 들뢰즈는 타자라는 이중체, 차이로서의 타자를 해방하며, 모든 세계들의 인위적인 수렴이 더 이상 가정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논증한다. 이전 맥락에서 나는 이러한 들뢰즈의 논의 차원을 그가 타자성에 부여하는 속성들을 규정하는 대신에 옆으로 밀어 놓았다.
만약 우리가 타자 없는 세계를 규정할 수 있다면, 그때 우리가 타자의 효과가 세계 안에 있는 바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로 필요하다고 들뢰즈는 논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타자성을 그 자체로 특성화한다는 것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타자성은 더 이상 이런 저런 특정 타자로 파악되어서는 안 되고, 대신에 권리상 타자에 속하는 것을 함축하기 위해 대문자화되어야 하는데, 이는 그 가능성의 조건들을 구성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타자의 첫 번째 효과는 세계의 조직화에 놓여 있다.
타인[타자]의 첫 번째 효과는 내가 지각하는 각각의 객체 또는 내가 어떤 잔여적 세계, 표면 또는 배경의 조직화라고 생각하는 각각의 이념 주위로, 다른 객체들 그리고 다른 이념들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는 경로를 규칙화하는 이행의 법칙과 일치하여 드러날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하나의 객체를 주시하고, 그리고 나의 주위를 돌리며, 그것을 배경을 빠져들게 한다. 동시에 배경으로부터 나의 주의 안으로 새로운 객체가 등장한다. 만약 이 새로운 객체가 나를 해치지 않는다면, 만약 그것이 튀어나와 폭력적으로 나와 충돌하지 않는다면(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세게 부짖힐 때처럼), 그것은 첫 번째 객체가 이미 어떤 완연한 잔여적인 배치물로 있었기 때문이며, 거기서 나는 이미 아직 오지 않은 객체의 선행 존재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었던 잠재적인 것들과 잠세적인 것들의 전체 장에 속하는 것으로서, 현행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잔여적 실존에 관한 그와 같은 앎 또는 느낌은 오직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해 진다. ... 내가 타자에 대해 가시적으로 정립하는 바, 내가 보지 않는 객체의 부분은 따라서 내가 이 숨겨진 부분에 도달하기 위해 주위를 돌아다닐 때, 내가 객체 뒤의 타자와 결합하게 될 때, 그리고 내가 이미 예상한 바대로 그것을 총체화할 때, [드러난다.] 내 뒤의 객체들에 대해서, 나는 그것들이 함께 도래할 것이고 어떤 세계를 구성한다는 것을 느끼는데, 이는 정확히 말해 그것들이 타자에게 가시적이며, 보여지기 때문이다.(LS 305)
처음에 우리는 반복의 첫 번째 종합 또는 습관(habitus)의 종합이 들뢰즈가 여기서 일컫는 바, 그 경험의 연속성을 해명하는데 적합한 것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근거로 들뢰즈의 가설을 기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습관이 필연적이지만, 오로지 무작위적인 연합을 충족시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주체와 객체에 대한 충분히 성숙한 체계는 아직 아니지만 말이다. 만약 사정이 이러하다면, 그것은 객체에 관한 개념이 나 자신과 독립적인, 나의 무작위적이고 자유로운 연합과 독립적인 어떤 세계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어떠한 객체들도 존재하지 않는 조직화된 연합들의 체계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만약 객체가 현상들(phenomena)로 가능하려면, 관점들의 수렴, 시간 안에서의 연속성, 근사성(aboutness), 근접성(arouneness)이 요청된다. 이것은 정확히 타자가 제공하는 그것이다. “타자는 세계의 잔여성과 이행들을 보증한다. 그는 인접성과 유사성의 달콤함이다. 그는 형식과 배경의 이행 그리고 깊이의 다변성을 규제한다. 그는 뒤로부터의 공격을 방해한다”(LS 305). 반대로,
우리가 타자의 야비함에 대해 불만을 가질 때, 우리는 이 타자와 심지어 보다 위협적인 야비함을 잊어 버린다. 다시 말해 그 어떤 타자도 없는 사물들의 야비함 말이다. 후자는 알지-못함과 지각-못함을 관련시키는데, 왜냐하면 내 관점에서 타자는 내가 진정 보고 있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기호를 도입하면서, 나를 내가 지각하지 않는 것을 어떤 타자에게 지각가능한 것으로 파악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측면에서 나의 욕망은 타자를 가로질러 가며, 타자를 통해 그것은 하나의 객체로 받아들여진다. 나는 보일 수 없는 것, 사유될 수 없는 것 또는 어떤 가능한 타자에 의해 소유될 수 없는 것은 전혀 욕망할 수 없다. 그것인 나의 욕망의 기초다. 그것은 언제나 나의 욕망을 어떤 객체에 관련시키는 타자다.(LS 306)
우리는 이미 타자로부터 독립적인 현행화의 두 번째 수준 얼마나 근원적인 것인지 이제 이해할 수 있다. 현행화의 첫 번째 수준이 분석적인 술어들로 구성될지라도, 이 술어들은 속성들의 질서 위에 있지는 않으며, 오히려 사건과 동사들의 질서에 기반한다. 그 자체로, 이 첫 번째 현행화의 수준은 타자 없는 위협적인 세계와 같다. 모든 전망들이 상실되고 연속성이 붕괴되는 곳이 이곳이다. 이는 ‘파편적인’ 사건들의 세계이며, 아직 서로 간에 종합되지 않은 세계 ... 어떤 순수 초월론적 장이다. 따라서,
타자가 세계의 구조로부터 사라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모든 곳에서 나는 어둠의 전반적인 지배를 받는 영역이 아니다. 잠재성 또는 잠세성이 없는 난폭하고 검은 세계, 즉 가능성의 범주가 붕괴된 곳. 시공간의 질서에 일치하는 배경으로부터 출현하고 그 뒤로 사라지는 상대적으로 조화로운 형식들 대신에, 오직 눈부실 정도로 해로운 추상적인 선만이 이제 존재한다. 이는 다루기 힘들고 무자비한, 근거 없는 심연일 뿐이다. 여기에는 요소들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LS 306)
들뢰즈가 채택한 기술적 의미에서, 개체적인 것들의 세계는 연속성이나 질서 없는 위협하는 세계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두 번째 현행화의 수준은 이러한 무자비한 사건들의 종합을 발생시키는 바, 여기서 망치는 그 빈약함을 연속성으로 종합하고, 그 빈약함에 어떤 시공간적 질서를 부여한다. 나는 타자의 눈을 내가 보기 위해 가져 온다. 이는 두 번째 현행화의 수준이 개체적인 것보다 인칭적인 것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나 자신을 타자 안에서 인식한다. 하지만 이것은 타자를 나를 닮은 자로 보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나는 나 자신을 타자와 닮은 존재로서 본다. 나는 오직 나 자신을, 내가 처음 마주친 타자인 한에서 인식한다. ... 라캉의 거울상단계에서처럼.
하지만 (1) 타자가 연속성을 나의 경험 안에 수립하는 것 (2) 주체들과 객체들을 분배하는 것인 한에서, 타자는 또 다른 주체가 될 수는 없다. 만약 타자가 또 다른 주체라면, 이로 닝해 나는 타자가 부재할 때 내 경험 안에 그 어떤 연속적인 경험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타자가 또 다른 주체라면, 그때 우리는 그것이 주체와 객체를 차이와하는데 어떻게 기여하는지 보는데 있어서 실패할 것이다(왜냐하면 차이화하는 것은 결코 그것이 차이화하는 것과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를 지각하는 자, 타자는 처음에는 모든 장이 그것이 작동하는 바에 따라 기능하는 지각적 장의 구조이다. 이 구조가 여러 주체들 – 너를 위한 나 그리고 나를 위한 너 - 을 따라 실재적 특성들에 의해 현행화될 것이라는 점은 그것의 선행존재, 일반적인 조직화의 조건으로서, 각각의 조직화된 지각장 – 너의 것 그리고 내 것 – 을 현행화하는 항들을 방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선험적 타자는, 절대적 구조로서, 각 장 안에서 구조를 현행화하는 항들로서 타자들의 상재성을 수립한다. 하지만 이 구조는 무엇인가? 이것은 가능성의 구조다. 위협적인 표정은 위협하는 가능 세계의 표현, 또는 세계 안에서 내가 아직 보지 않은 어떤 것의 표현이다. 여기서 가능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지시하는 어떤 추상적 범주가 아니다. 다시 말해 표현된 가능세계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것 바깥에 (현행적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겁에 질린 표정은 겁을 주는 사물과 전혀 닮지 않는다. 전자는 후자를 함축하는데, 이는 표현하는 것 안에서 표현되는 것을 수립하는 어떤 종류의 비틀림에서, 그것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감싼다. 내 차례에 나의 부분 안에서, 나는 타자가 표현하는 것의 실재성을 잡아쥘 때, 나는 타자를 펼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이때 나는 상응하는 가능세계를 전개하고 실현한다. (LS 307)
우리는 여기서 들뢰즈의 말들이 잘못 인도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 들뢰즈가 이러한 구조의 본성이 무엇인지 물을 때, 그는 그것이 타-자(an-other)의 표정 또는 표현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대답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가 또 다른 주체라는 입장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아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타자-구조의 현행화이다. 타자-구조[타인-구조]는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연속성의 장에서 표현되는 것과 표현을 연결하는 기호-기능(sign-function)이다. 페르시아 용어로, 우리는 표현은 ‘표현체’(representamen), 타자-구조는 ‘해석체’(interpretant)라고 말할 수 있으며, 가능세계는 표현이 함축하는 바, 표현된 기호론적 대상이다.
들뢰즈가 타자-구조를 가능성과 등치하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가능한 것의 범주는 가능성이, 제 차례에 미래에 발생할 것을 제한하는 기능을 하는 현행적인 것의 소급효과인 한에서,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이 겨냥하는 우선적인 타겟이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는 타자-구조가 연속성을 수립하고, 합리적으로 예상될 수 있는 것과 예상될 수 없는 것을 기초지우며, 이에 따라 존재의 잠재성을 제한하고, 그것을 양식화하는 기능을 하는 한에서, 이것이 타자-구조의 경우에 어떻게 기능하는지 이해한다. 따라서 “타자는 포괄적인 가능성의 실존이다. 언어는 가능성 자체의 실재성이다. 자기성(the self)은 가능한 것의 전개이자 펼침, 즉 현행적인 것 안에서 그것의 실현의 과정이다”(LS 307). 자기성[자아]은 가능적인 것의 형태발생, 그것의 정의, 표명, 규정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이에 따라 어떤 연속적인 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어째서 들뢰즈가 베르그송을 따라, 언어를 명령어(order-words)와 등치시키려 하는지 알게 된다. 만약 언어가 명령어로 구성된다면, 이것은 그것이 표현된 것과 표현 사이에 연속성을 수립하기 위해 기호-기능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구조 안에 담긴 어떤 근원적인 애매성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들뢰즈가 첫 번째 현행화의 수준에 양식의 기원을 놓는다는 것을 상기하게 할 것이다. 이 현행화의 첫 번째 수준만이, 개체적인 것의 발생을 구성하면서, 양식을 구성하는데 충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타자-구조와 관련해서 양식은 충분히 발전되고 규정된 채로 발생한다. 양식은 경험적 자아들 그리고 시간의 선형적 화살에 일치하는 객체들의 분배에 놓여 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주체가 연속성 또는 일관성의 장을 정의하는 일련의 다시당김(retensions)과 예상(anticipation)을 생성하는 가능성의 조직화된 구조 안으로 구성되어 들어가는 것 바깥의 초월론적 장에 속한 ‘물질’(matter)을 조직화하는 타자-구조에 기반하는 것이다. 이곳이 바로 애매성이 놓인 장소다. 한편으로 인칭(첫번째 현행화의 수준)은 ‘물질적 의도’(material purport)로서의 개체적인 것에 기초하여 세계의 총체화를 완료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칭적인 것은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 타자에 의존한다. 이제 타자성의 현행화로서 타인은 언제나 나 자신으로부터 발산하는 어떤 세계를 재현하기 때문에, 연속성의 장을 수립하기 보다, 내 세계의 지평인 내 지각의 한계를 표시한다. 발생하는 것이 이것이 사실상 아니라면, 이는 발산적 세계의 표현으로서 타자[타인]가 그러한 발산으로부터 되돌아와 나의 개체성으로부터 탄생하는 기호론적 망(web)에 포획되기 때문이다.
타자-구조는 연속성으로서의 세계에 관한 지각이 가능한 조건으로 기여할 뿐 아니라, 주체들과 객체들의 분배를 통괄한다. 우리가 상식의 발생과 만나는 곳이 여기다. 상식의 발생은 연속성의 여러 경로를 정의하는 가능성의 한정적 체계의 분배, 구성, 조직화에 놓여 있다. 경험적 자아들과 객체들과 관련하여 각각의 경우에서 능력들의 분배에 기반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이것은 능력들의 수렴에 속하는 각 경우에 기억, 상상력 그리고 지각의 역할을 수립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타자성의] 근본적인 효과는 나의 의식과 그 객체의 구별이다. 이 구별은 사실상 타자-구조의 결과이다. 가능성들, 배경들, 가장자리들 그리고 이동으로 세계를 채우는 것, 내가 실재로 세계에 의해 위협받을 때, 세계를 재보증할 가능성을 기입하는 것, 내 앞에서 다른 식으로 발전된 스스로를 드러내는 세계라는 상이한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 세계의 내부에 매우 많은 가능세계를 품고 있는 매우 많은 물방울을 구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타자다. 연후 타자는 나의 의식이 필연적으로 ‘나는 존재했다’ 속으로, 더 이상 객체와 일치하지 않는 어떤 과거 속으로 기울어지도록 한다. 타자의 출현 이전에, 예컨대 거기에는 나의 의식이 그것과 구별될 수 없는 안전한 세계가 있었다. 이때 타자는, 우리가 그것을 앞서 나아감이 없이 발전될 수 없는 어떤 위협적인 세계의 가능성을 표현한다 ... 만약 타자가 하나의 가능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세계이다. 우리가 타자의 무화를 통해서만 구성되는데 반해, 인식론의 실책은 그 이론들이 주체와 객체의 동시성을 내세운다는 것이다.(LS 310)
우리가 데리다와 들뢰즈의 막대한 유사성을 발견하는 지점은 이곳이다. 만약 타자-구조가 주체와 객체의 분배를 위한 어떤 필연적 조건이라면, 이것은 자기성의 연속성과 객체의 연속성 둘 모두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그것이 기능하기 때문이다. 타자-구조 없이, ‘주체’와 ‘객체’는 프로이트가 말한 유년기의 무차별한 세계와 유사한 방식에 완연히 일치하는 상태에 존재할 것이다. 주체와 객체 간에는 무차별적인 인상들에 속한 부유하는 물질 덩어리 외에 그 어떤 구별, 간격 또는 차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로서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해 온 바에 대해, 그 존재해 온 바와 일치하거나 동일한 것이 되기 위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성이란 ‘나는 있었다’라는 것에 대한 태도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객체의 연속성은 [미래에] 존재할 바이다. 그러므로 타자-구조는 주체가 객체의 완결성이 예상될 수 있는 전망을 제공하는 동시에, 현재의 자기를 과거의 자기와 연속적으로 볼 수 있는 전망을 제공한다. 만약 주체가 스스로를 어떤 ‘~일지도 모름’으로 스스로를 대면하지 않는다면, 이는 주체가 타자-구조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언제나 이미 본래적인 것으로 취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데리다와 유사한 것은 이런 측면에서이다. 한편으로 타자-구조는 주체와 객체 간의 차이를 수립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주체와 객체 양자 모두의 지연(deferral)을 완결성의 측면에서 수립한다. 주체의 충족성이 언제나 그것의 언제나 이미라는 위상에 따라 연기되는 반면, 객체의 완결성은 언제나 가능성의 접힌(unfolding) 구조에 의해 지연된다.
앞서의 논의에 기초하여 우리는 (1) 타자-구조가 어떻게 사유의 이미지를 수립하기 위해 연장들의 발생과 더불어 작업하는지, 그리고 (2) 어째서 이 사유의 이미지가 특성상 도덕적인지를 알 수 있다. 내가 지난 장에서 논증한 바에 따르면, 연장성은 사유의 이미지의 매개체로서, 차이를 삭제하고 평범점들의 분배를 통해 특이성들 사이에 매끈한 연속성의 가능성을 창조함으로써 기능한다. 사실상 들뢰즈가 말한 바에 따르면, “타자[타인]는 의식의 구별과 어떤 시간적 구별로서 그것의 객체를 보증한다. 그 현전의 첫 번째 효과는 공간 그리고 범주들의 분배와 관련된다. 하지만 두 번째 효과는 아마도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서, 시간 그리고 차원들의 분배와 경관된다. 즉 시간 안에서 앞에 오는 것과 뒤에 오는 것”(LS 311). 첫 번째 수준은 개체적인 것 그리고 양식의 발생과 관련된다. 공간화(spatialization)는 마찬가지로 내가 ‘이전과 동일한 것’과의 관련에서 공간을 통한 운동을 지향하는 한에서, 보다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의 운동이다. 두 번째 수준은 인칭적인 것의 발생과 관련되면서, 하나이자 동일한 주체 안의 동일한 객체에 대한 능력들의 조화롭고 수렴적인 실행의 가능성을 수립함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형식들을 내세운다. 이것은 객체를 어떤 ‘~로 존재할 것’으로 그리고 주체를 어떤 ‘~있었던 것’으로 분배하는 시간적 차이에 따라 발생한다. 그 결과 두 번째 계기는 주체와 객체를 형식들로 수립한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어떤 사유의 이미지라면, 이는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고, 언제나 타자-구조 내부에 파열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파국이 있기 때문이다. 개체화의 아폴론적 세계는 인간이 제작자로서(homo fabricans) 그의 지배권 하에 최상의 통치를 한다. 이때 인간은 그 자신의 말과 사유로 세계를 주조하고 그것에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사유의 이미지로 불리워질 만한 이러한 현행화된 질서 뒤에 잠복해 있는 것은 위협적인 초월론적 장의 으르릉거리는 바탕없음이다. 이 두 가지 경로 사이에, 힘과 저주는 어떤 총체화하는 개체화와 지배의 분위기 그리고 이러한 매끈한 연속성을 의문에 부치고 그것을 다른 것, 즉 예기치 못한 뱡항으로 움직이는 항구적인 회귀 사이에 있는 어떤 변증법적 펼침의 복잡한 암호문이 된다.
대조적으로 사유의 이미지는 삼중의 방식으로 스스로 도덕적임을 드러낸다. 첫째로 만약 사유의 이미지가 도덕이라면, 그것이 사건에 속한 어둡고 잔혹한 세계 너머 매끈하고 안정된 연속성의 세계를 위한 어떤 근본적인, 심지어 원초적인 결정을 확정하기 때문이다. 사유의 이미지는 평가적으로 불리워질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억압과 만남, 차이의 추방 위에 스스로를 수립한다. 들뢰즈주의자들이 자주 이야기하는대로 이것은 우리가 연속성을 넘어 만남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에 의해 선택된다. 존재-함(be-ing)에 마땅한 과정이 그것이다. 오히려 사유의 이미지가 괴물적인 것과 집합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 사이의 이항대립에 기초하여 어떤 분배, 선택, 어떤 평가적 체계를 설립하는 것이다. 이 분배 체계는 타자-구조에 기반하여 가능해진다. 둘째로, 타자-구조는 사유의 이미지가 그것이 주체 안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동일성에 기반하여 일련의 태도들, 관습들 그리고 행위들을 세우는 한에서 어째서 도덕적인지 보여준다. 이것은 언어와 명령어의 영역이다. 궁극적으로 타자-구조는, 그것이 ‘모든 사람이 안다’의 전제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에 기반하는 한, 사유의 이미지의 도덕성을 설립한다.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이 안다’는 이것이 주체가 그렇게 살아 가야만 하는 어떤 원리적 주장인 한에서 아는 사람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선별을 위한 분배 원칙이 된다. “만약 그들이 그들 스스로 주체들로서, 아는 자로서 인증된다면, 그때야 그들은 아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무지 안에서 살아가고자 선택한다.”
[주석]
*[역주]본문에 나오는 들뢰즈 텍스트의 약어 기호는 다음과 같다. "DLS" "Deleuze-Leibniz Seminar"(McNeil, 9-138. New York: Zone Books, 1991. "Deleuze-Leibniz Seminar." Translated by Charles Stivale. http://www.imaginet.fr I deleuze ITXT lEN G 1150480.html, 1980), DR Difference and Repetition(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slated by Paul Patt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HRS" "How Do We Recognize Structuralism?"("How Do We Recognize Structuralism?" In The Two-Fold Thought of Deleuze and Guattari, by Charles Stivale, 251-82. New York: Guilford, 1998), LS The Logic of Sense(The Logic of Sense. Translated by Mark Lester and Charles Stival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0).
[1] Bergson, Creative Mind, 27-28.
[2] Ibid., 79-80.
[3] Simondon, "Genesis of the Individual," 304.
[4] Kant, Critique of Pure Reason, A165/B207-8.
[5] Ibid., A162-63/B203-4.
[6] Jacques Lacan, Écrits: The First Complete Edition in English, trans. Bruce Fink (New York: W. W. Norton and Company, 2006) , 17. 이 노트는 원본에서 나타난다.
[7] 들뢰즈의 철학적 증후학에 관한 탁월한 설명은, Daniel W. Smith's introduction to Deleuze's Essays: Critical and Clinical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7)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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