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사항: Thomas Nail, The Philosophy of Movement: An Introductio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24
*‘< >’ 안의 숫자는 원문의 페이지수, ‘[ ]’ 안의 숫자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주석의 순번임.
<1>서문
움직임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그것을 파악하려는 우리의 시도를 끊임없이 회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움직임은 우리가 그것을 파악하려는 방법에 따라 변화하고 휘감기면서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연기처럼 흘러간다. 내가 다섯 살 때, 우리 가족은 저녁 무렵 앞마당에 모여 달맞이꽃이 피는 것을 보곤 했다. 더운 여름날, 꽃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작고 옅은 노란색 우산 안으로 몸을 말아 올린다. 그리고 시원한 저녁이 되면, 꽃은 자세히 살피면 꽃잎을 볼 수 있을 만큼 천천히 펼치지만, 눈을 돌리면 놓칠 만큼 빠르게 펼쳤다. 며칠이 아니라 몇 분 만에 피고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꽃의 숨겨진 삶을 엿보는 것은 정말 마법 같았다. 할머니가 ‘달맞이꽃’이라고 부르던 이 꽃의 움직임에는 역설적인 느낌도 있었다. 언뜻 보면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숨겨진 움직임의 패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다. 달맞이꽃이 피는 경우와 같은 경우,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을 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너무 느리거나, 빠르거나, 작거나, 크거나 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움직임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패턴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상의 패턴을 정적이거나, 그것들이 근접해 가는 움직임과 무관하게 취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시도한 전부이다.
움직임이란 무엇이며, 왜 그토록 매력적인 여신(muse)일까? 나는 지금 이 서론[이 책의 부제-역자]을 쓰고 있다. 왜냐하면, 움직임이라는 주제에 관한 10년간의 연구와 12권의 책을 쓴 후, 나는 이 모든 것의 더 큰 패턴을 그리는 하나의 이야기로 모든 것을 정리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독자가 나의 이전 작품을 읽었거나 철학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이 책은 운동의 본질에 대한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으로 시작하여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고 시도하면서 발생하는 몇 가지 함의를 독자들에게 안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선, 다른 세계 전통에는 그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서양 전통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에게 왜 움직임이라는 단순한 것이 그렇게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는지 물을 수 있다.[1] 왜 서양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 중 일부는 사물이 운동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식으로 진정으로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데 평생을 바쳤을까?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를 처음으로 추동하고 질서를 부여한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를 상상했다. 고대 과학자 아르키메데스는 고정된 받침대와 충분히 긴 지렛대가 있다면 지구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 후,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아르키메데스의 받침대를 움직이는 현실의 여타 부분들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확실한 지식’의 지지점으로 재해석했다.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 같은 대부분의 근대 사상가들도 신이 마치 움직이지 않는 시계 제작자처럼 우리들의 기계적 우주를 움직이게 하는 동시에 그 자신은 가만히 있다는 믿음을 공유했다. 우리가 유한한 ‘닫힌 우주’에 살고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잘못된 이론조차도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운동을 설명하려는 수 세기에 걸친 노력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추구가 동기를 부여한 것은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또는, 다른 것으로 움직임을 설명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어떤가? 이 질문들은 간단한 질문처럼 들릴 수 있지만, 나로서는 이 질문에 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실제로, 서유럽 의 사상가들 중 이러한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려고 시도한 사람은 많지 않다. 이는 부분적으로 유럽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유 없는 운동을 긍정하는 것은 이단으로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운동의 우위라는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상당히 이단적인 개념이다.
이 책은 지난 10년 동안 내가 운동에 관해 연구한 주요 아이디어를 모두 모아 일반적인 종합을 시도함과 동시에 접근하기 쉬운 입문서로 만들려고 시도한 것이다.[2]
비판 철학
이 책과 지금까지 내 연구의 핵심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서양 철학자들은 <3>운동을 다른 어떤 것의 결과 또는 산물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서양 전통에서 이것은 사실이다. [이에 따르면] 무언가가 운동한다면, 그것은 분명 무언가 다른 것이 그것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어떤가? 이 의심은 서양 사상에 대한 나의 연구를 계속 쫓아 다녔다. 철학자들은 종종 지식과 실재의 확고한 토대를 찾아 다녔다. 하지만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어쩔 것인가? 절대적인 견고함, 법칙 또는 구조에 대한 모든 추구가 운동이 다른 무언가로 설명될 수 있고 설명되어야 한다는 확인되지 않은 역사적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어떠한가?
다른 곳에서 나는 기원전 6세기 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바, 유라시아에서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에 따라 움직임을 설명하려는 이러한 [철학의] 욕망에 관한 문헌사를 추적하려고 노력했다.[3] 다른 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들은 이 시기를 ‘차축 시대’(Axial Age)[4] 또는 ‘도덕 시대’(Moral Age)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원전 6세기경, 근동과 서양을 가로질러 주요 신화, 종교와 철학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사건들이 발생했다. 운동이 어떤 보다 일차적인 원리와 관련하여 파생적이고 수동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철학적, 사회적, 미학적, 과학적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으며,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서양 문화를 관통하는 이것을 추적해 왔다.
결과는 무엇이었나? 첫째로 이 새로운 변화로 인해 존재의 어떠한 상상된 위계질서에서 운동을 가장 아래에 위치시켰다는 것이다. 이 위계질서에서는 마음, 정신, 본질, 형상, 그리고 신과 같은 비물질적이고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자연, 신체, 날씨, 그리고 동물과 같은 물질적이고 움직이는 존재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겨졌다. 고대 세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물질적이고 운동적이라고 여겼던 인간과 사물의 종속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자연적 위계질서에 관한 생각을 이용했다.
예를 들어, 인간에 의한 자연(식물, 동물, 강, 토양)의 파괴와 지배는 자연이 물질적이고 언제나 변화하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자연은 움직이는 물질처럼 수동적이고 변동이 심하며 변화하고, 정신이 결여되고, 문화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들이 보기에 적합하도록 자연을 지배하고, 형성하고, 파괴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 인간은 능동적이므로, 이러한 논의는 계속되어 그들은 의식과 문화 그리고 신, 형상, 힘, 영원성 그리고 본질과 같은 보다 높은 수준의 원리들에 관한 지식을 가지며, 우주의 질서에 따라 자연과 함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 존재의 위계 사슬은 운동 위에 정지를, 물질 위에 형상을, 죽음 위에 생명을, 인간 위에 신을, 여성 위에 남성을 신체적 느낌 위에 이성을, 어두운 피부 위에 밝은 피부를, 식민지 위에 제국을 이주민 위에 시민을, 퀴어 위에 이성애를 <4>동물 위에 인간을, 식물 위에 동물을 그리고 광물 위에 식물을 놓는다. 이것은 상호 맞물린 체계이다. 사다리에서 더 높은 곳에 있는 모든 것은 아래쪽에 있는 것보다는 덜 물질적이며 변동이 적다고 간주된다. [따라서] 서양-유럽 전통 내부에서 지배의 역사, 그리고 이와 비슷한 존재론적 방향은 물질과 운동에 대한 이런 방식의 뿌리 깊은 혐오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5]
이것이 바로 서양-유럽의 전통에서 역사적 진보를 자연의 지배로 정의한 이유이다. 근대 유럽인들은 자연을 변하지 않는 법칙과 정적인 원리를 따라 조작하고 지배해야 하는 수동적인 물질로 취급했다. 영원성, 영혼, 힘, 본질 그리고 절대적 시공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이념들은 변하지 않는 외부 원인에 의한 물질의 움직임을 모두 설명하려는 것으로 향했다. 불행하게도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이 움직이는 물질을 복속시키려한 이 치명적인 결정의 후유증을 겪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자연과 물질을 수동적인 물질로 취급 한 후, 전 세계는 이 실수의 완전히 변덕스러운 결과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물질을 체계적으로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습관은 또한 존재하는 것들의 어떤 위계 안에서 물질, 운동, 여성, 식민지 인구의 수동성을 확증하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요컨대, 이 고대적 습관은 마치 물질, 운동 및 “더 물질적이고 운동적인”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위계질서의 맨 아래에 있고 정신과 정지상태가 맨 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해 왔다. 그것은 자연, 여성, 보다 어두운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동물들과 신체의 종속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반드시 이러한 오래된 수직적 지배 축을 따라 정연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지와 위계와 같은 개념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끄는 문화적인 암묵적 가정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 이면에 있는 고대 철학적 가정과 지배의 논리를 인식하고 있든, 아니면 비반성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수행하든, 동일한 개념과 관행이 작동하고 있다.
비판 이론가들에게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00년 넘게 비판 철학자들은 이러한 위계적 가설들에 도전하고 그것을 폭로해 왔다.[6] 그들의 전제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문화적 가정의 근거 없고 억압적인 본성을 보여주고 사람들이 관련된 행위들을 줄임으로써 생각과 <5>관행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인종차별, 생태학살은 존재자들의 위계에 관한 고대의 문화적 구성에 의해 형성된 지배 논리와 맞물려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비판 이론가들은 여전히 물질과 운동을 공간적으로 존재의 위계질서 최하위에 놓는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비판 이론가들은 그들에게는 명백해 보이는 물질과 운동의 열등성과 수동성을 제외하고서 존재의 위계질서에 도전한다. 인간은 여전히 자연을 구성하는 자다. 이런 식으로 비판 이론의 대부분은 여전히 인간 중심적인 존재론적 위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의 철학이 비판 이론의 근대적 기획에 기여한 한 가지 공헌은 운동과 물질에는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개념을 드러내고, 그것에 문제제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내가 바라는 바는 만약 우리가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위계 구조의 바닥을 드러낸다면, 그 전체 사슬이 무너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우리는 존재론적 위계라는 위조된 관념 뒤에 숨지 않고도 함께 잘 살기 위한 진정한 투쟁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위계적 사슬에 관한 내 문제 제기의 논점은 그러한 위계가 운동이 맨 위에 있거나 모든 것이 운동하는 물질로 ‘환원 가능한’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 책의 결론 참조). 운동의 철학에는 절대적인 최상위, 최하위 혹은 환원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운동-지향 철학은 단적으로 형이상학적 위계질서를 인간과 지구행성에 대한 그릇되고 위험한 생각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움직임의 세계에는 형이상학적 한계와 위계가 내장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것은 앎과 존재에 관해 상이한 방식을 가진 열린 다원주의와 보다 더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운동-지향 철학은 여러 면에서 현재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 해도, 결코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움직임의 우선성은 상대적 위계질서가 나타나지 않는다거나 위험이 결코 없다거나 앎과 존재의 방식 간에 충돌이 없을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보증이 아니다. 변화하고 상충하는 욕망을 해결하기 위한 철학적인 지름길은 없다. 존재론은 우리의 행동 방식을 지도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의 영역을 형성할 수는 있다. 따라서 우리는 최소한 형이상학적인 지름길과 위계를 찾는 것을 멈추고, 대신에 창조하고, 알고, 함께 잘 살아가는 어렵고 위험하며 유쾌한 작업에 집중하면서 현실과 역사에 대한 어떤 설명을 채택 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인 실체와 위계는 또한 우리의 운동하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방해한다. 이 책에서 나는 또한 <6>세상의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으며, 이 움직임에 대한 하나의 적절한 사고 방식은 그것의 출현 패턴을 통하는 것이라는 증거를 제시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역사적 관찰에 더 잘 맞아 떨어지는 어떤 관점을 채택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몇 가지 고정된 형이상학적 가정을 가질 때보다 생존할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그런 다음 생존은 우리가 사유하고, 존재하고 행동하는 여러 상이한 방식에 대해 계속 토론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따라서 규범적인 윤리적 지름길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운동의 철학은 형이상학적 장애물 없이 생존하고, 토론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여전히 윤리적 삶에 기여한다.
그러나 마지막 고리(last link)가 끊어질 때까지는 존재론적 위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비판 철학에 의해 사슬에서 끊어져야 할 마지막 고리는 역사적으로 암흑 운동 물질(dark moving matter)과 관련된 가장 아래에 있는 고리이다. 이 연결고리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사람들은 그 뒤에 숨어 모든 종류의 지배와 배제를 정당화할 수 있다.[7] 지배는 언제나 가능하지만 운동의 철학은 그러한 지배에 대해 숨을 곳이나 존재론적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운동의 철학을 연구하는 중에 숨겨진 나의 관건적인 동기이다.
움직임의 세기
내가 운동의 철학을 시작하게 된 두 번째 동기는 역사적인 것에 있다. 철학은 항상 누군가에 의해 어느 때, 어딘가에서 발생한다. 이는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서양 철학자들은 부분적으로 그들의 형이상학적 가설 때문에, 보편적 진리에 관한 중립적 관찰자인 척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이해하는 철학은 다른 곳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을 만들어내더라도 그것은 어떤 위치지워지고 특유한 운동적 실천이다. 철학은 또한 당대 사건들의 성좌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철학은 과거, 미래, 그 밖의 모든 것을 시간 위에서 변천하는 어떤 우월한 위치에서 바라본다.[8]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나 자신의 광범위한 위치성(positionality)은 20세기 후반과 21 세기 초반,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주, 탈식민지화, 기후변화, 그리고 만연한 디지털 미디어가 역사적으로 교차하는 동안 지적 성숙에 도달한 미국의 백인 서부 정착민 식민지 개척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 네 가지 현상은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사람과 사물의 전지구적 이동성(mobility)을 절대적인 수준으로 높였다. 나의 철학적 사유는 무엇보다도 이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들과의 생생한 마주침에서 시작되었다 <7>이 모든 역사적 운동은 무엇이며, 여타 우주적이고 행성적인 이동성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 것인가?
철학은 위치적(positional)이고 역사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임의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위치적 지식은 무엇보다 하나의 게슈탈트 이미지와 같다. 잘 알려진 게슈탈트 이미지인 토끼-오리에서, 두 이미지가 실제로 거기에 [함께] 있기에, 관찰자는 토끼와 오리를 번갈아 볼 수 있다. 관찰자가 그것을 토끼로 묘사하는 것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옳은 것도 아니다. 자연은 어떤 다양체(manifold)와 훨씬 더 비슷하며 이와 같이 모양이 변하는 이미지에 가깝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신이 본 이미지에 우주, 신, 힘, 시간 등 다양한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위험한 점은 철학자들이자연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이미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너무 자주 주장하고 다른 모든 이미지는 그 하나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여기서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운동의 철학은 우리 시대의 전지구적 사건에 의해 형성된 세계에 관해 어떤 명시적으로 역사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이 철학은 세계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것들을 바탕으로 어떤 관점의 지평(horizon of vision)을 표명한다. 물론 미래에 이러한 관점에 대해 재해석하는 새로운 지식과 관점이 드러날 수 있다. 이 모든 관점들은 어떤 의미에서 진리일 것이다. 그것들은 각각 어떤 실제적인 관점을 표현할 것이다. 따라서 지식이란 어떤 심오한 역사적, 지리적, 그리고 지질학적 관점이다.
나는 현재 우리가 운동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이것으로 나는 근대 문명에서 안정성이라는 지배적인 가정에 비해 현대의 이동성의 불확실성이 다소 갑작스럽게 닥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근의 과학적 관찰은 자연이 항상 움직임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서구인들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예측할 수 없게 이동성이 편재하는지 깨닫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생태 파괴와 전지구적 식민주의는 세계 체계에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서구인들은 더 이상 정적인 법칙을 통해 움직이는 자연을 지배하는 행위를 계속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 세계가 점점 더 이동성이 강화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로, 운동의 본질에 대한 이와 같은 역사적인 성찰은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몇 가지 중요한 발견을 이끌었다. 특히 1920년대에 물리학자들은 ‘양자 불확정성’(quantum indeterminacy)이라는 도전에 직면했다. 물리학자들이 처음으로 에너지의 운동이 더 이상 근본적인 현상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기 때문에, 그것은 도발적인 문제였다. <8>고전 물리학과는 달리,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이를 ‘불확정적’(indeterminate)이라고 불렀다. 아인슈타인은 이 결과가 너무 싫은 나머지,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과학은 끝나버릴 것이라고 선언했다.
양자 불확정성은 애매한 문제인 만큼이나, 20세기에 광범위한 결과를 초래하는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예를 들어, 양자 물리학이 없었다면 디지털 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디지털 프로세싱에는 양자 물리학 방정식에 기반한 트랜지스터 사용이 요구된다. 디지털 혁명이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화도 없었을 것이고, 세계화가 없었다면, 주로 지난 30년간 세계화의 결과인 기후 변화도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역사를 하나의 사건으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이 네 가지 주요 세계 현상을 관통하는 공통된 주제가 있다. 즉, 이것들 모두는 불안정한 운동과 이동성의 급격한 증가와 관련이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양자 흐름, 디지털 흐름, 인간의 흐름, 행성적 흐름을 포함하는 다양한 규모의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물질의 움직임을 활용하기 위해 애써 왔다. 이 네 가지 사건들은 각각 이전의 것을 변형하고 확장했다. 기후 변화는 자본주의 세계화, 디지털 통신 혁명에 기반한 세계화, 그리고 양자 혁명에 기반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혁명 위에서 진행되었다. 상당히 거칠게 공식화하자면, 더 빠른 물리적 과정의 발견은 확장된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가능하게 했고, 이로 인해 인간의 이동성을 증가시켰으며, 이는 지구 전체를 변화시켰고 기록적인 운동으로 나아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 세계 도시 거주자들은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며 점점 더 이동성이 쉽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느낀다.[9] 또한 과학자들이 ‘삶의 속도’를 측정하는 데 사용하는 다양한 지표에 따르더라도 그러하다.[10]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왜 10년 전보다 10% 더 빨리 걷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쩌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지 알지 못한다. 유럽-서양 전통이 지금까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발명해 온 대부분의 해석 도구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세상을 위한 그것들의 영향력 아래에 우리를 두는데 기여했다. 양자 물리학이 객체가 변동하고 얽혀 있는 과정이라고 말할때, 우리는 여전히 객체에 대해 마치 정적이거나 불연속적인 사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우리는 여전히 디지털 이미지가 마치 작은 비트와 바이트로 이루어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전자파가 <9>우리를 둘러싼 대기를 통해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사람들을 시민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은 인간 전역사를 통틀어 결코 지구 너머로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늘상 인간이 그 위에서 움직일 때 자연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장소에 대해 말하지만, 생물권 전체와 지질은 우리 위와 아래에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객체, 이미지, 사람들, 장소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이는 사실, 훨씬 더 복잡한 과정에 대한 개괄로서 매우 실용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개괄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개괄적인 생각의 전지구적인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고 믿는다.
세계는 증가하는 운동 위에 있지만, 우리들 중 유라시아 ‘차축 시대’(Axial Age)라는 마법에 걸린 몇몇은 정지 상태에 대한 우리의 고착으로부터 충분히 놓여나지 못하면서, 그 핵심적인 운동을 수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몇 가지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달리 말해 우리는 우리의 현재와 깊은 과거에 숨겨진 의미를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우리의 움직이는 세계가 고정된 사물, 사람, 그리고 장소의 측면에서라기 보다 흐름과 과정의 측면에서 훨씬 더 잘 이해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서양의 과학, 예술, 정치 분야에서 현대의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나는 전통적인 서양의 정지에 관한 개념적 모델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거기서 새로운 운동-지향적 이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점을 정확히 드러내고자 시도했다.
어떤 대안적인 사유의 방법으로, 나는 운동에 기반한 현재의 과정 철학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것을 현대 실험 과학에서의 관찰과 일치 시키고 생기력(vital forces)에 기반한 기존의 과정 철학 모델과는 구별하려고 시도했다. 기존의 과정철학은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 혹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설명한 것처럼 정적이고 섬광등 같은 ‘계기들’(occasions)에 기반한다(1장 참조). 나는 운동론적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실의 새로운 패턴과 특징이 나타난다고 제안한다. 나는 이 운동론이 우리의 깊은 과거를 더 잘 이해하고 양자 역학, 디지털 미디어, 세계화, 그리고 기후 변화 등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과 씨름하는 데 도움이 되길 희망한다. 이것이 이 책에서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양자 물리학
현대 과학의 중심에는 물리학에서 발견된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미스터리하지만 궁극적으로 서로 연관된 두 가지가 있다. 그 결과는 운동의 우선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0>첫 번째 발견은 에드윈 허블의 것으로서, 우주가 아인슈타인의 오랜 믿음과는 반대로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확장의 이유는 한 세기 동안 계속 열띤 논쟁거리였으며, 과학자들은 그것을 마침내 어떤 단순하고, 거대하고 정당한 원인, 즉 ‘암흑 물질’이라는 것으로 일치를 봤다. 오늘날에는 우리의 우주가 비가시적인 에너지의 흐름에 의해 모든 방향으로 팽창하고 있다는데 거의 일치한다. 더 나아가 우주론자들(cosmologists)은 이 팽창이 약 40억 년 전부터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우리는 지금 우주론자들이 운동으로 정의하는 바, ‘가속하는 우주’(accelerating universe)에 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발견은 1920년대에 있었는데, 이는 우리가 고체와 아원자 입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양자 요동’으로 가득 찬 에너지장이라는 것이다. 관측 가능한 입자는 운동하는 에너지 장 안의 어떤 준안정적 영역 또는 농도일 뿐이다. 폴 디랙(Paul Dirac), 닐스 보어(Niels Bohr),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그리고 다른 물리학자들은 20세기 내내 양자 이론을 연구한 결과 역학을 놀라운 예측 정확도로 발전시켰지만, 물질의 핵심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예측 불가능성을 결코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세기 후반, 물리학자들은 마침내 우주의 팽창과 양자 세계의 해결할 수 없는 불확정성 간의 연결을 확증했다. 그들의 결론은 그 둘이 서로 다른 규모로 작동하는 동일한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우주를 가속화하고 있는 암흑 물질은 모든 견고한 객체의 핵심에 존재하는 동일한 불확정적인 양자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가지 발견은 모두 세계의 움직임과 흐름을 어떤 보다 더 근본적이거나 정적인 과학적 원리에 따라 설명하려는 이전의 시도에 도전했다. 서양 과학은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가 자연의 모든 수준에서 운동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반긴 것은 아니다.[11]
디지털 미디어
이러한 동일한 양자 흐름 때문에, 우리는 또한 모바일 이미지의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전세계적으로 2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기계 재생산 기술과 글로벌 운송 수단 및 유통 회로 덕분이다. 하지만 이미지가 이렇게 대량으로 유통되는 가장 큰 원천은 바로 디지털 이미지의 출현으로서, 이는 트랜지스터와 발광 다이오드와 관련된 양자 과학 덕분이다. <11>디지털 이미지는 전자의 형태로 화학 게이트를 통과하는 진동하는 양자 장으로 만들어진다. 즉 이것은 전류의 개방적 또는 폐쇄적 2진법 흐름을 나타낸다. 이러한 흐름을 제어하는 양자역학의 방정식이 없었다면 디지털 혁명은 없었을 것이다.
일련의 논리 게이트를 통해 양자 요동을 실행하는 간단한 기술은 수많은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 기술(컴퓨터, 인터넷, 비디오 게임, 모바일 장치 및 기타 많은 다른 기기들)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21세기로 접어들기 직전의 세계에 단어, 이미지 및 사운드의 홍수를 야기했다. 요컨대, 디지털 미디어의 형태로 물질적 흐름을 활용함으로써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의 이미지에 이동성을 부여했다.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의 새로운 상호작용적이고 양방향적인 특성은 이미지의 이동성과 가변성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했다. 인터넷과 모바일 디바이스(휴대폰, 스마트폰, 노트북 등)의 대중화와 함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디지털 미디어는 유비쿼터스적이면서도 점점 더 휴대하기 간편한 어떤 것이 되었다. 2014년 현재, 전 세계 인구보다 더 많은 모바일 디바이스가 사용되고 있다. 휴대폰은 아마도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인간 감각에 관련된 단일 기술일 것이다. 휴대폰은 불과 30년 만에 70억 개의 기기가 출시되었다.[12]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장소에서 하나의 디바이스를 통해 다른 사람과 문자를 보내고, 녹음 된 거의 모든 소리를 듣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거의 모든 이미지를 보고, 거의 모든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기술은 이제 이동 중에도 사용할 수 있으며 그 자체가 행성을 가로지르는 전기 및 양자 에너지 흐름의 형태로 운동 중이다.
현대 경제의 세계화와 인간의 이동성의 부상을 부분적으로 가능하게 한 것도 바로 이 디지털 통신의 거대한 전류이다.
전지구적 이동성
디지털 흐름의 증가는 현대 사회 자체가 점점 더 모바일화되는 데 기여했다.[13]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없이는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고 있는 전지구적인 문화, 경제, 정치는 상상하기 어렵다. 인터넷, 휴대폰, 이메일이 없다면 오늘날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2>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이 경제적, 문화적 세계화를 크게 촉진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14] 세계화는 경제적 이주와 전지구적 운송 네트워크를 극적으로 증가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지역 및 국제 이민자가 10억 명을 넘어섰다. 새로운 10년이 지날 때마다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이민자의 비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15] 인구학자들은 전세계적으로 2050년까지 20억 명 이상의 인구가 도시로 이주할 것으로 예상한다.[16] 세계화로 인한 환경, 경제, 정치적 불안정성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이주의 필요성이 커졌다. 특히 기후변화는 향후 40년 동안 국제 이주를 두 배로 늘릴 수도 있다.[17] 많은 사람들이 지역 또는 국제적인 경계를 넘지 않더라도 상대적으로 안정된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더 자주 직장을 바꾸고, 더 오래, 더 먼 거리를 출퇴근하고,[18] 거주지를 반복적으로 변경하며, 해외 여행도 더 자주 하게 된다.[19] 인간의 일반적인 이동성 증가는 우리 모두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며, 이제 21세기의 특징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20]
이러한 전지구적인 운동은 또한 인간의 운동을 관리하고 순환시키는 경계 관리기술(bordering technique)의 폭발적인 탄생을 야기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특히 9/11 테러 이후 전 세계적으로 수백 개의 새로운 국경 - 수 마일에 달하는 새로운 철조망, 수 톤에 달하는 새로운 콘크리트 보안벽, 수많은 해외 구금 센터, 생체 인식 여권 데이터베이스, 유비쿼터스 CCTV, 학교와 공항, 전 세계의 다양한 도로를 따라 설치된 모든 종류의 보안 검색대 - 은 사회적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에 관한 사회적 불안이 증가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현대 정치는 정적인 국가와 고정된 시민이라는 패러다임으로는 더 이상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오래된 이론적 틀은 더 이상 전지구적 이동성, 변화하는 국경, 난민 위기, 그리고 끊임없는 이주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21] 이동하는 세계가 국가, 국경, 정치적 행동의 정적인 모델에 부합할 것이라는 기대는 엄청난 고통을 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이 현대의 사회적 현실을 이해하고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길 원한다면, 움직임과 유동성을 우리가 최근에 하고 있는 것보다 구성적인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특히 전지구적 이동성 및 여객 운송이 기후 변화를 유발하는 자본주의의 동일한 화석 연료 사용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화석연료 사용은 다음 번에 다시 이주를 강제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13>기후 변화
인류의 대규모 이동과 세계화로 인해 지구도 여러 면에서 이동성이 강화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물질이 지구와 대기권, 궤도를 순환하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며 돌아 다니고 동물과 칼로리를 생산하는 식물을 더 많이 소비하고 있다. 특정 인간 집단은 화석 연료를 태우고, 가축과 식물을 기르고, 질소 비료를 과도하게 생산하고 삼림을 벌채하는데, 이 모든 행위들은 대기 중으로 이산화탄소의 이동을 증가시키고 있다. 이산화탄소 수준의 증가는 지구 평균 기온을 상승시켜 열파(heat waves)를 일으키고, 해양 증발을 증가시키며, 이는 다시 기록적인 겨울 눈폭풍 및 기타 극한의 날씨 패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구가 온난화됨에 따라 동식물 군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전 세계 곳곳에서 수만 종의 동식물이 운동 속으로 던져졌다.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의 절반이 이동 중이다.[22] 여기에는 곤충, 질병, 미생물도 포함된다. 하지만 모든 종이 같은 속도로 또는 같은 방식으로 이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전에 알지 못했던 종들이 서로 접촉하여 새로운 잡종을 만들어 내거나 토착종을 압도하고 있다. 빙하도 움직이고 있다.[23] 이제 우리는 빙하가 타임 랩스 사진의 도움으로 몇 분 만에 포효하는 강물처럼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해수면이 지난 2700년 동안보다 오늘날 해수면이 더 빠르게 상승하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여타 동물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24]
인간은 이제 지구를 극적이고 영구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데, 지질학자들은 이런 우리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인간을 상대적으로 정적인 지구 위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자들로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즉 이제 인간은 지구의 모든 순환 과정에 유동 상태로 얽혀 있는 지질학적이고 대기적인 행위자(agents)로서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지질학적 시간’에 대해 마치 그것이 지각불가능할 정도로 느린 과정인 것처럼 이야기해 오곤 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눈앞에서 지구가 바다로 가라앉고 숲이 사막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는 화석에 남아 수천 년 동안 지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플라스틱, 닭뼈 그리고 여타 쓰레기들로 이루어진 완전히 새로운 지층이 생성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기후 변화는 이제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모든 역사적 혁명을 변형하고 심지어 파괴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게 된다. 따라서 인류세의 도래는 다른 어떤 변화 이상으로 <14>정적인 또는 안정된 세계에서 우리가 살지 않고, 살아본 적도 없었던 시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현재와 그 중심에 있는 운동의 매우 불확실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양자 물리학, 디지털 통신, 전지구적 이주의 혁명, 이 모든 것은 매우 압도적으로 보인다.
개인적 마주침
이 네 가지 큰 사건은 2010년에 내게 아주 극적으로 동시에 다가왔다. 2009년 가을, 나는 세계에서 가장 이민자 밀집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토론토에서 이주민 정의 활동가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 몇 가지 짐을 차에 싣고 오리건주, 유진(Eugene, Oregon)에서 동쪽으로 국경을 넘어 2700마일을 운전해 갔다. 권위 있지만 겸손한 풀브라이트 장학금의 지원으로 신혼이었던 아내와 나는 곧 21세기의 불안정한 교차로에 있는 시내의 작은 아파트 지하층에 살게 되었다.
아파트에서 서쪽으로 우리가 살던 거리에서 몇 블록만 가면 저명한 토론토 대학교 캠퍼스 끝자락에 다달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곳은 물리학과 건물과 바로 맞닿아 있었다. 2010년에 놀라운 뉴스가 이 건물과 전 세계의 다른 건물들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마침내 제네바에서 세계 최대의 입자 충돌기 작업을 완료하고 이전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했던 속도로 초당 수백만 번씩 입자들을 서로 돌진시킬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언론은 과학자들이 신의 입자라고 불리는 양자 물리학의 마지막 조각을 발견하거나 지구를 파괴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 또는 죽음, 구원 또는 종말, 다시 말해 과장된, 그러나 전면적인 변화가 이처럼 겉보기에 작은 과학적 도약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결국 토론토를 밝히는 모든 트랜지스터와 LED를 가능하게 한 것은 양자 물리학의 혁명이었다. 스위스에서의 이러한 폭발적 양상들에 의해 어떤 새로운 세계가 예고되고 있었던 것일까? 사무실로 가는 길에 있는 물리학 건물을 지날 때 나의 몸은 불안감으로 긴장했다.
우리 아파트 바로 뒤, 북쪽에는 양자 혁명의 산물 중 하나인 캐나다 최대 미디어 대기업인 로저스 커뮤니케이션(Rogers Communications)의 본사가 있었다. 그것은 중세 성처럼 우리의 작은 거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빠른 속도로 제네바로부터 그리고 여타 모든 곳으로부터 우리의 노트북, 휴대폰, 텔레비전으로 전달되는 매일 매일의 뉴스를 소통시키는 빅데이터의 전지구적 흐름을 조율하고 있었다. <15>매일 아침, 그 옆을 지날 때면 우리 모두가 헤엄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디지털 파도의 바다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없다면, 고도로 (그리고 위태롭게) 연결된 전 세계 도시들이 대부분 무너질 것이었다. 나는 마치 위험한 디지털 심연의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우리의 임시 거주지에서 동쪽으로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는 이 세계화된 통신 혁명의 큰 결과 중 하나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세인트 제임스 타운(St. James Town)의 이민자 및 난민 지역이다. 거기에는 북미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고 다양한 이웃들이 있는 지역 중 하나가 있다. 그곳은 반경 세 블록 안의 열아홉 개 흰색 고층 아파트 건물에 글로벌 빈곤층이 2만 5천 명 이상이 거주한다. 또한 이곳에서 이주민들은 경제적인 요청에 따라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금융 및 교통으로 가능해진 자신들만의 소통 네트워크를 만들었는데, 이는 가족과 친구들을 토론토로 오게끔 했다.
매일 아침, 글로벌 사우스에서 온 이민자들이 소위 ‘슬럼가’(slums)에서 쏟아져 나와 토론토에서 가장 가장 열악하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하기 위해 우리 집 앞을 지나갔다. 이 이민자들은 그들의 가족들이 국경 보안을 통과하여 캐다나로 올 수 있는지 아닌지를 관리하는 생체 인식 정보를 전송했을 법한 바로 그 빅 데이타 회사 옆을 걸어 갔다. 이러한 비가시적인 연결고리는 그 거리 안에 얽혀 들어가 있었다.
우리 거주지 남쪽에는 캐나다의 주요 광산 회사 배릭 골드(Barrick Gold)의 거대한 본사가 세워져 있다. 5개 대륙에 27개의 광산을 보유한 배릭은 매년 전 세계 채굴 산업으로 인해 비자발적으로 이주하는 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분명 일부 책임이 있다. 이들은 2009년 12월 코펜하겐 정상회담에서 전 세계가 인정했던 것과 동일한 화석 연료 채굴 산업에 해당한다. 이들은 ‘기후 시스템에 대한 위험한 인위적 간섭’을 일으키고 있으며, 그 결과 많은 섬나라를 물에 잠기게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기후 난민들을 생산하고 있다. 기차를 타고 시내 배릭 골드 본사가 있는 마천루를 지나던 날, 나는 토론토에 사는 친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가족은 국제 채굴 회사에 의해 인도의 집에서부터 옮겨진 것이다. 토론토에는 얼마나 많은 이주민들이 먼 나라에서 고향을 잃어 버린 채 살고 있을까?
<16>2010년 토론토의 거리를 걸어 간다는 것은 마치 인간과 빅 데이터, 돈, 전자에 그 피를 공급하는 거대한 짐승의 동맥을 걷는 느낌이었다. 작은 창문 밖에서 우리는 21세기 세계사의 축소판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매일매일 바라보았다. 또는 우리는 모든 것이 쾅하고 폭발할 때까지 우리 주위를 돌고 있는 거대한 입자가속기 안에 살고 있었던 것일까?
그해 겨울, 기후 변화로 인한 새로운 기상 패턴은 우리 지역에 ‘스노우마게돈’(Snowmageddon)을 전달하여 전례없는 양의 눈을 쏟아 부었으며, 심지어 제1세계에도 기후 변화가 급격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아주 광범위한 실제적 위협이 유포되었다. 5월 1일 봄 토론토시에서는 그해 겨울 시내 건설 플랫폼에서 추락한 네 명의 이주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대응으로 거대한 이민자 시위가 분출했다. 그 결과 추방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이주 노동자들은 안전하지 않은 근무 조건에 대해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한 달 후 세계 정부와 은행가들의 국제 포럼 G20이 열렸을 때 세기적인 전지구적 흐름의 본격적인 격변이 이 도시에 밀어 닥쳤다. 이민자, 노조원, 환경운동가, 그리고 그 외 많은 사람들이 대량 이주, 전지구적인 소득 불평등, 기후 변화, 빅 데이터 축적, 그리고 G20 자체의 언론 비밀주의에 항의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몰려 들었다. 이 사건들은 내가 매일 지나쳤던 그 모든 거대한 모순들 속에서 나타났다. 우리 집 바로 아래 거리에서 폭동이 발생하여 재산이 파괴되었고, 자동차가 불타고, 캐나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량체포가 발생했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입자가 거의 빛의 속도로 폭발했다.
그 모든 일이 있은 후, 아내와 나는 미국 중부의 평화롭게 펼쳐진 밀의 바다(wheat oceans)를 가로 질러 불타고 있는 오리건주의 열대 우림 지대를 통해 집으로 돌아 왔다. 우리는 가슴이 아팠고, 곧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기후 변화로 인해 2010년은 지구 역사상 가장 더운 해였으며, 많은 사람들과 환경이 그로 인해 고통받았다. 러시아 산불로 75만 에이커가 넘는 면적이 불탔다. 열기와 스모그로 인해 그해 여름에만 5만 6천 명 이상의 러시아인이 사망했다. 2010년대는 극적이고 급격한 기후 변화로 인한 사건들이 일어난 10년이었다.
그해 여름의 기후 변화는 나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집에 돌아온 직후, 나는 격렬한 현기증을 유발하는 만성 질환 진단을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 증상은 매년 이산화탄소 및 지구 온도 상승으로 발생한 <17>대기 중의 어마어마한 양의 꽃가루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것은 마치 당시 세계가 느닷없이 생물학적으로 바뀌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모든 것이 말 그대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인생에서 세계사가 이토록 개인적이면서도 상호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다. 나는 대학원생 시절 이주 연구를 위해 해외로 여행을 떠났었는데, 이 길을 가면서, 나는 총체적 전망에 눈을 떴다. 나는 더 현명해졌지만 압도된 채로 돌아왔고, 나의 세계는 의학적이면서 실존적인 이유에 따라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내가 운동의 철학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할 때의 몇몇 상황들이다.
단일한 혹은 몇 안 되는 사건들로는 한 세기의 정신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현재는 이상하게도 파악하기 어렵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과정이다. 그것은 항상 미래의 새로움을 향해 열려 있는 동시에 과거의 새로운 측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는 우리 당대에 펼쳐진 성좌에서 가장 큰 네 개의 별과 그것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현재 관점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간략하게 언급했다. 여기서는 내 작업의 배경이 된 명백한 역사적 조건과 실존적 동기를 가지고 그러한 것들을 소개한다. 이 사건들은 그로부터 내가 실재, 지식, 역사, 윤리, 그리고 아름다움의 본성에 대한 몇몇 질문들을 끊임없이 재-노출시키고자 하는 어떤 출발점을 정립하고 촉진한다.
세계가 항상 변화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현대의 진리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변화의 본질 자체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변화는 그밖의 다른 것들과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은 많은 방면에서 더 이상 통하지 않으며 재앙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오히려 모든 것은 함께 변화하고 있다.
서구 인류가 이전에 변화와 진보, 기술 발전, 국민-국가, 심지어 지구 자체를 평가했던 겉보기에 안정된 기반은 오늘날 점점 더 불안정 해지고 있다. 자연은 항상 움직이고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정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차축-시대(Axial-Age) 형이상학의 영향을 받은 많은 서양 철학자, 과학자 및 여타 사람들에게는 점점 더 증가하는 도전으로 다가왔던 것으로보인다. 따라서 현재의 역사적 상황은 서양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많은 사상을 재고하고 운동하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상이한 개념들을 드러낼 특유한 기회이다.
I. 이론
1. 과정 유물론
운동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유물론적 과정 철학이다. 그 기본 개념은 정적인 물질, 본질 그리고 객체란 없으며 오직 과정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20세기의 과정 철학과 비슷한 통찰을 기반으로 하지만, 핵심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 운동의 철학은 안정적으로 보이는 사물이 실제로는 운동적 물질의 ‘준안정적’ 패턴이라고 말한다.
넓은 의미에서 운동의 철학은 움직이는 모든 것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주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 관점은 폭넓게 적용된다. 운동의 철학은 양자 수준에서 생물학, 인간 사회, 예술, 과학, 존재론, 지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과 현실의 규모에 걸쳐 운동하는 사물을 생각하는 개념적 틀이다.
이론적 프레임워크로서의 이 철학의 주요 특징은 실재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모든 것이 운동 중에 있다는 물리적 관찰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 이론은 운동을 다른 것에 의해 야기되지 않으며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철학사 상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운동에 대해 말했지만, 내가 여기서 제안하는 운동의 철학은 움직임이 모든 사물들의 본성에 최우선적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유일한 관점이다.
이러한 운동-지향(movement-oriented) 접근은 생각보다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철학자들조차도 움직임을 생각할 때, A 점에서 B 점까지 공간과 시간을 움직여가는 어떤 물체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이 정의는 공간과 시간이 최우선적이고, 그것을 통과해 물체들이 움직이는 어떤 움직이지 않는 배경으로 기능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만약 움직임이 최우선적라면 공간과 시간은 움직이지 않는 배경이 전혀 되지 않을 것이다. <22>시공간은 그것을 통과해 운동하는 물체들과 분리 불가능한 운동하는 물질의 비교적 안정적인 출현 패턴이 될 것이다.
모든 움직임은 다른 움직임에 상대적이다. 이 관점은 물리적 관찰과도 일치한다.[1] 움직임에 분석적 우선순위를 부여한다고 해서 시공간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공간과 시간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운동하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운동의 철학에 대한 너무 광범위한 정의이다. 우리는 ‘운동’과 ‘물질’을 더 정확하게 정의하고 운동의 철학이 그것과 가장 친근한 이론들, 즉 이동성(mobility) 연구 및 과정 철학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다.[2] 나아가 우리는 운동-지향적 관점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러한 것들이 이 장에서 대답되어질 주요 질문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학술적 논쟁과 비교에 관심이 없다면, 다음 장으로 자유롭게 넘어가도 좋다. 거기서 우리는 물질과 운동의 핵심 정의로 바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이 장의 요점은 운동의 철학이 다른 과정 철학과는 구별되는 미결정적 과정 유물론(indeterminate process materialism)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 유물론은 적용 범위가 훨씬 넓기 때문에, 이동성 연구와도 구별된다.
모빌리티 패러다임
2006년, 미미 셸러(Mimi Sheller)와 존 위리(John Urry)는 사회과학에서 ‘모빌리티 패러다임’ 또는 ‘모빌리티 전환’의 출현을 알렸다.[3] 그들이 편집한 저널은 여러 학문 분야를 가로질러 운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10여 년간 이미 느껴오고 있던 것을 매우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연구 주제는 다르지만, 많은 사회학자들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움직임을 연구하고 있었고, 모빌리티 패러다임은 아주 최근에야 인문학으로 확장되었다.[4]
모빌리티 패러다임은 움직임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내세운 첫 번째 사례이다. 현재 이동성은 인류학, 문화 연구, 지리학, 과학기술연구, 관광학 및 교통학, 사회학 등을 포함한 인문학 및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 연구되고 있다.
그러나 모빌리티로의 전환은 이론적 및 방법론적 통일성에 관한 중요한 문제도 제기했다. 예를 들어, 모빌리티적 방법은 <23>관광, 이주, 바이러스 전염병, 휴대용 컴퓨터, 비행기 그리고 자동차와 같이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한 연구에만 적용되는가? 이동성 연구를 국경, 주(洲), 교도소, 데스크톱 컴퓨터 그리고 도로 등에도 사용할 수 있을까? 아니면 더 명백하게 움직이지 않는 사물의 경우 1980년대에는 10여 년 전에 시작된 ‘공간적 전환’(spatial turn)과는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 이동성에 대한 연구는 현대의 이동성에만 국한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사물들이 보다 안정적이었던 보다 오래된 사건에는 전통적인 정적 이론을 사용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모빌리티 학자만큼이나 많이 있다. 따라서 모빌리티 패러다임은 학자들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만큼만 확장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모빌리티 연구는 확연히 눈에 띄는 자동차, 춤, 디아스포라, 비행기와 같은 이동체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분야에서는 19세기부터 현재까지 모빌리티 연구가 이루어져 왔으며, 대개의 사회과학, 때로는 인문학, 드물게는 자연과학에서도 연구해 왔다.[7]
셸러와 위리는 이 모빌리티 패러다임에 대한 그들의 설명에서 그들이 “이동성, 유동성 또는 액체성에 대한 새로운 ‘거대 서사’를 주장하지 않으며, 새로운 모빌리티 패러다임은 당대 세계의 설명으로의 총체화나 환원이 아닌 일련의 질문, 이론과 방법론을 제시한다”고 말한다.[8] 저자들에 따르면 모빌리티 패러다임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납득될 수 있지만, 모든 철학이나 존재론이 총체화한다는 가정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저자들은 운동이 존재론적으로 일차적일 수 있다는 더 광범위한 철학적 입장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모빌리티 학자들은 심지어 부동성(immobility)과 이동성 사이의 이원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부동성이야말로 이동성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셸러와 위리는 “여러 고정물 또는 계류장이 (...) 액체적인 현대의 유동성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하며, 이동성은 “중첩되고 다양한 시공간적 부동성을 전제한다”고 논한다. 나는 세계에 상대적인 안정성이 있다는 데 동의하지만, 우리는 또한 물리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관찰도 고정된 것을 확인해주지 못한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모빌리티 연구에서 소위 고정성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가?[10]
일부 모빌리티 학자들은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움직인다는 물리적인 사실을 싫어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피터 아디(Peter Adey)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것이 움직인다면, 이 개념을 거의 아무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11] 하지만 나는 <24> 이러한 주장이 혼란스럽다는 것을 발견한다. 어떤 물리학자에게 “모든 것이 공간이나 시간 안에 있기 때문에, 이 개념은 거의 아무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고 상상해 보라.[12] 모빌리티 패러다임에 관심을 보이는 자연과학자가 극소수인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나는 ‘모든 것이 운동 중에 있다’라거나 ‘운동이 좋은 것’이라는 것이 분석적으로 쓸모없고 잠재적으로는 정치적으로 치명적이라는 아디의 말에 동의한다.[13] 그러나 그것은 일부에 해당되는 것이다. 때문에 나에게 운동의 철학이 가진 방법론적 목표는 운동의 보편성과 정지의 해악에 대한 단순한 형이상학적 주장 대신 움직임에 기반한 개념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위리와 셸러와는 대조적으로, 나는 철학이 단지 세계에 대한 일관되거나 환원적인 설명이 아니어도 운동의 개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일한 사물에 대한 공존하는 다양한 관점의 설명은 확실히 존재하며, 가능하다. 실제로 내가 보기에 이것이 바로 움직임의 존재론이 제공하는 복수적 결론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왜 모빌리티 패러다임은 우리가 모든 사물의 공간적, 시간적 차원에 대해 매우 쉽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의 본질에 대한 체계적인 관점을 제공하지 못하는가? 운동은 자연의 실제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차원이다. 따라서 나는 운동의 철학이 운동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따라 가능하다고 믿는다. 사실 철학은 그 자체로 역사적 수행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빌리티 패러다임은 운동의 중요성과 광범위한 영향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데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이 나에게 준 크나큰 영감은 놀라운 간학문적 노고였다. 그러나 모빌리티 패러다임이 움직임을 반드시 일차적으로 철학적 또는 분석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학자들 조차 반대편 의견을 신뢰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빌리티 연구는 자연 과학으로 확산되거나 근대성을 훨씬 뛰어넘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 이는 모빌리티 연구의 근본적인 누락이라기보다는, 내 생각에 강력한, 비형이상학적인 운동의 철학으로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이다. 따라서 운동의 철학은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빌리티 패러다임 전반에 걸쳐 사용될 수 있는 몇 가지 개념을 개발하려는 시도이다.
과정 철학
다음으로 운동의 철학과 친근한 것은 과정 철학의 전통이다. 운동의 철학은 이러한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25>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과정 철학은 간단히 말해 현실은 물질이나 대상이 아니라 과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관점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과정 철학의 두 가지 전통을 구분하고, 운동의 철학이 그것들의 어디에서 분기되는지 보여줄 것이다.[14]
연속적 과정 철학
나는 과정 철학의 첫 번째 전통을 ‘연속성’(continuity) 전통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과정이란 연속적(continuous)이고 분할되지 않는다(undivided)고 믿기 때문이다. 이 전통의 첫 번째 저명한 철학자는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다. 베르그송은 사물을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어떤 움직이는 영역”의 “유동하는 덩이”로 묘사했다. 베르그송에게 “사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행위만 있을 뿐이다.”[15] 실제로 그는 “이렇게 정의된 상태”란 “별개의 요소로 간주될 수 없으며, 그것들은 서로 간에 끝없이 이어지는 흐름”이라고 말한다.[16] 그는 다른 곳에서 자연은 “물질 위를 흘러 넘치는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라고 말한다.[17]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에는 실재의 연속성과 그것에 속한 인간의 개별적인 지각 간의 구별이 존재한다. 우리가 실재를 기술하기 위해 언어나 개념을 사용할 때마다, 우리는 마치 자연의 “연속적인 비분할적 과정”이 구별되는 것처럼 행위한다.[18] 베르그송은 지성은 “보편적 연속성”의 세계에서 불연속적인 사물들에 관한 환상을 만들어낸다고 논증한다.[19] 그는 “따라서 물질이란 그 자체로 끊임없는 연속성 안에 모두 서로 연결된 무한한 진동들로 변화한다”고 말한다.[20] 베르그송에 따르며 물질과 공간은 그릇되게도 우리의 도구적 행위들을 위해 분할된 물체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진정, “공간은 실제 움직임이 정립되는 어떤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 바로 밑에 공간을 야기하는 실제적인 움직임이다.”[21]
베르그송은 이 지속적인 과정 또는 움직임을 생의 약동(élan vital) 혹은 생의 추진력(impetus)이라고 부른다. 그는 또한 우리가 생명력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22] 생의 추진력은 자연계 위와 너머에 떠 있는 초월적인 힘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모든 자연에 내재된 방향성이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자동적인 물리적 질서”와 “‘의지적’ 질서와 유사한 (...) 생명의 질서”를 대조한다.[23]
베르그송에게 생명의 충동은 “본질적으로 창조”이다.[24] 그것은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25] 그리고 “그것은 낙관적이다.”[26] 그것은 또한 베르그송이 말하는 “신 따라서 끊임없는 생명, 행동, 자유이다,”[27] 베르그송은 계속해서 “생명력의 엄청난 풍요로움은 바로 생명의 원천인 샘에서 흘러나온다. (...) 이 에너지 자체가 바로 신이다.”[28] <26>베르그송에게 이 생의 추진력은 물질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물질을 관통하는 것”이다.[29]
베르그송의 생의 연속성에 속하는 과정 철학은 오늘날 ‘생기적 신유물론’이라고 불리는 것 안에 지속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신유물론자 제인 베넷은 내재적인 “분할할 수 없는 생명의 연속성”에 관한 베르그송의 신념을 명시적으로 지지한다.[30]
내가 비인격적인 감응이나 물질적 진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영적인 보충물이나 ‘생명력’(life force)이 아니라 그것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물질에 추가된 것이다. 나의 이론은 전통적인 의미의 생기론이 아니다. 나는 물리적 신체에 들어가서 그것을 움직일 수 있는 별도의 힘을 가정하는 것이라기보다, 감응과 물질성을 같다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목표는 물질성 자체에 내재된 생기성(vitality)을 이론화하고 그것을 수동적, 기계적 또는 신적인 것에서 주입된 실체의 상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이 생동하는 물질은 인간이나 신의 창조적 활동을 위한 원료가 아니다.[31]
또한 베르그송을 따라 다이아나 쿨과 사만다 프로스트는 “물질을 능동적이고, 자기-창조적이며, 생산적이고,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어떤 과잉, 힘, 활력, 관계성, 또는 차이가 존재한다.”[32]고 논한다. 이러한 견해들의 더 많은 변형들은 여기에 기록하기에는 너무 많지만, 여러 중요한 신유물론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s), 생명력(vital forces) 그리고 감응(affect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33] 신유물론 철학자 카렌 바라드(Karen Barad)조차도 “생기론의 새로운 형태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음(aliveness)의 새로운 의미라는 측면에서 어떤 생기(vitality)가 있다”[34]고 쓸때, 모호함을 유지한다. 영국 철학자 이언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 역시 자신의 생기론적 철학과 베르그송의 생기론적 철학을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셸링의 영향을 따라 추적한다.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편저에 수록된 바에 따르면, 그랜트는 셸링의 저서들에서 기계론, 영성주의 또는 단순한 유기체론으로 환원할 수 없는 생기적 전체론(vital holism)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랜트의 셸링 독해에서, 물질은 생기적 ‘힘’ 또는 ‘권력’으로 구성되어 있다.[35] 피히테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베르그송에 매우 가깝게 해석하면서, 그랜트는 “양자(quanta)는 연속적인 과정의 불연속적인 생산물이다”[36]라고 말한다.
생기적 유물론은 생명력을 물질과 분리된 힘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생명력을 우리가 알고 있는 유기적 생명으로 환원하지 않으므로 전통적인 생기론과 구별된다. 대신 생명력은 살아 있는 존재와 살아 있지 않은 존재를 관통하는 어떤 창의적인 조직화의 힘이다. 이 관점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운동의 철학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27>운동은 지속되는가? 그것은 생기적 추진력을 가지는가?
과정은 설명하기 까다롭다. “연속적” 또는 “불연속적”인 우리의 언어는 우리가 생성하는 것들(becomings)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때조차도 존재자(beings)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자주 가정한다. 따라서 베르그송이 ‘분할할 수 없는 생명의 연속성’에 대해 쓸 때, 우리는 그가 어떤 하나의 변화하는 물질을 설명하려고하는 것이 아니라, 진행중인 과정(ongoing process)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일부 베르그송적인 그리고 생기론적 신유물론 철학의 쟁점이 있다.
베르그송에게 움직임과 과정은 연속적이다. 심지어 그는 생명력도 “공간에서 생성되어야만 하는 운동에 의해서만 알려지고 평가된다. (...)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운동과 하나이다”[37] 라고 논한다. 생명은 신비롭거나 미묘한 어떤 물질이나 모호한 에너지가 아니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그것은 운동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베르그송은 시간/지속도 움직임이라고 말한다. 즉, “시간은 이동성이다.”[38] 베르그송은 “이동성”, “또는 같은 것에서 유래하는 것, 즉 지속”[39]은 생성이지만, 생성은 사물들이 통과하는 “움직이지 않는 매개체”[40]로서, 생성 일반”이 아니다. 그보다 생성은 실재 자체의 지속적인 이동성이다.[41] “실재는 이동성 그 자체이다.” 이 마지막 저서에서 베르그송은 가장 명쾌하고 확실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운동이 전부가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42] 따라서 우리는 베르그송이 소위 생명의 힘/추진력 또는 시간/지속에 대해 베르그송이 부여한 것이 운동 자체의 우위일 뿐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생명력이 운동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추가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모든 것이 움직인다는 베르그송의 주장에 동의하는 만큼[43] 우리는 멈춰서서 베르그송과 생기적 신유물론자들이 운동/물질에 부여하는 다른 두 가지 속성, 즉 연속성과 생기/힘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연 과정 철학에 이러한 속성이 필요할까? 그러한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얻거나 잃는가? 또한 그 근거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연속적인 과정이라는 개념은 과정이 그것의 운동을 통해 어떻게든 그 자체에 대해 동일한 것으로 남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만약 하나의 과정이 그 자체와 다르면 그 자체와 동일할 수 없다. 과정이라는 용어는 진정한 변화와 변형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연속적이라는 용어는 공통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연속적 과정이라는 용어는 매우 역설적이다. 만약 그것이 항구적으로 그 자체와 다르다면, 어떻게 과정이 연속적일 수 있는가? 심지어 다르다와 그 자체라는 개념은<28> 고정된 어떤 것을 가정하는데, 과정 철학은 이를 거부하고자 한다. 만약 움직임만 있다면, 그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어떤 연속적이라는 것은 따라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 절에서 고려하게 될 것처럼, 그것은 불연속적이거나 불확정적일 수 있다.
요컨대, 과정의 변형적 본성을 어느 정도 훼손하지 않고는 그것에 연속성을 부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심지어 과정 또는 생성이 먼저 이것(this)이고, 그 다음에 저것(that)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시간적 연속성을 가정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서 시간은 그 안에서 시간 1과 시간 2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연속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운동과 과정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적 연속성과 통일성에 대해 부차적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44]
또한 자연이 근본적으로 연속적이라는 증거도 없다. 여기서 증거란 절대적인 사실이나 객관적으로 타당한 증명 또는 과학적 합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찰에 의해 뒷받침되는 일련의 제한적이고 개방적인 물리적 실험이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다른 곳에서 과학사 안에서 이런 식으로 운동-지향적 실험 방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45] 실험은 존재론이 그런 것과 같이, 항상 수행적이고, 관계적이며, 역사적이다. 이것이 내가 여기서 실험을 강조하고 자신들의 추측을 객관적인 것인양 행하는 과학자와 철학자들 모두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이다.
나는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나 카렌 바라드 같은 물리학자들이 다중-세계(many-worlds) 해석이나 우주 파동 방정식 같은 입증되지 않은 이론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고 양자 실험의 결과를 통해 사유하려 하는 것에 공감한다.[46] 우리는 실험적 증거가 제한적이거나 전혀 없는 과학적, 철학적 가설에 대해서도 똑같이 비판적이어야 한다.
나는 실재가 연속적인지 불연속적인지 알아보기 위해 과학과 철학적 실험의 역사에 대해 다른 곳에서 길게 썼다.[47] 지난 100년 동안 이 질문에 대한 획기적인 실험은 이중-슬릿 실험이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에 따르면, 이 실험은 “[양자역학의] 유일한 미스터리를 담고 있다. 그 미스테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줄 뿐이다.”[48] 물리학자들이 두 개의 슬릿을 향해 에너지를 보내고 검출기를 사용하여 그것이 어느 쪽을 통과하는지 확인하면 항상 한 번에 하나의 슬릿을 통과하는 단일한 전자로 나타난다. 그러나 에너지가 검출기 없이 슬릿을 향해 보내지면, 전자가 벽 뒤에 남기는 흔적의 패턴은 <29>연속적인 에너지 파동이 두 슬릿을 한꺼번에 통과해야만 볼 수 있는 뚜렷한 회절(diffraction) 패턴을 보여준다. 이것은 우주가 에너지이며 우리가 그것이 불연속적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한다는 의미에서 존재론적 실험이다.
이중 슬릿 실험의 결과는 물리학자들이 ‘입자-파동 이중성’이라 부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에너지가 파동면서 동시에 입자라는 생각 뒤에 숨어 있는 에너지가 결정성(determinacy)을 가진다는 형이상학적인 가정에 비판적이어야 한다. 실제로 이 실험은 그 자체로 실험 안에서 직접 관찰되지 않은 에너지의 결정적(determinate) 특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이 실험은 에너지가 무엇이든 실험 장치가 에너지에 작용하고 그 형태를 형성하는 방식에 따라 그것이 연속적인 파동처럼 행동하거나 불연속 입자처럼 행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리학자 카렌 바라드(Karen Barad)는 우리가 이 실험의 결과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에너지의 결정론적인 ‘이중 본질’을 발견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고 길게 주장했다.[49] 최소한 우리가 이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에너지가 특성상 마치 결정론적인 파동 또는 입자처럼 거동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미결정적인 운동의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파동이나 입자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현재] 둘 다이다라거나 실험 전에는 둘 다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안타깝게도 현전의 형이상학(metaphysics of presence)은 이 실험에 대한 많은 과학적, 철학적 해석을 편향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에너지는 인간이나 여타 에너지들에 의한 관찰을 통해서만 상대적으로 결정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이런 식으로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또는 결정론적으로 파동이나 입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실험이 에너지 운동의 어떤 특정한 미결정성만을 보여준다는 바라드의 견해에 동의한다. 에너지의 연속적 또는 불연속적 본성에 대한 부가적인 주장들은 추측에 불과하다.
이러한 정확한 방식에서, 현재의 실험적 증거는 실재가 근본적으로 ‘연속적’이라거나 근본적으로 ‘불연속적’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존재론적 결론을 수정하는 데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생기적 힘은 어떤가? 그것은 무엇이며 과정 철학에서 필요한가? 신생기론(neovitalism)과 고전적 생기론의 중요한 차이점은 신생기론이 생명적 과정과 비생명적 과정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vitality)이라는 개념이 보편적이라면 더 이상 삶, 생명 또는 살아있음을 지칭하지 않는 어떤 과정에 왜 특정 용어인 생기(vital)를 사용해야 하는가? 또는, <30>과연 왜 생명을 특정하게 보편화하는가?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은 개념적으로 모호하다. 그것은 기껏해야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할 뿐이다.
특히, 나는 생기 또는 생명이라는 용어를 유럽-서구적 맥락에서 존재론화하기 위한 철학적 선택에 대해 우려한다. 왜 죽음이나 다른 모든 것을, 그것이 어쨌든 보편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재정의하고 존재론화하는가? 만약 우리가 어떤 용어를 그 역사적 반의어를 포함하여 재정의할 수 있다면, 신생기론자들이 그러하듯,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의 용어를 선택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이라는 용어의 맥락과 수사적 행위성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나는 생명이라는 용어가 역사적으로 유럽-서구 사회에서 특권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신유물론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어 왔다는 점을 우려한다. 유럽인들은 존재의 사슬에서 생명을 비생명보다 우월한 것으로 취급해 왔다. 게다가 서양 사상가들은 근본적으로 물질을 생명과는 대조적이게도 진정한 새로움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으로 취급했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서양 사상가들은 대부분 생명을 비생기적이고 수동적인 물질과 대조적으로 유기체가 소유하는 어떤 것으로 정의했다. 다윈 이후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 우주는 죽은 것이지만, 역사의 어느 시점에 무기물에서 생명체가 출현했다고 믿었다.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 끝에 인간은 가장 복잡하고 우수한 생명체가 되었다. 따라서 생명은 시간적으로 뒤로 갈수록 더 복잡하고 뛰어난 조직체인 것이다.
물론 신생기론자들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우월성을 명백히 거부한다. 대신 그들은 모든 것이 어떤 의미에서 살아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왜 존재의 사슬을 따라 신에서 인간으로, 그리고 이제는 생명으로 점진적인 단계를 밟아 내려가는 것인가? 신생기론자들은 명백히 인간 중심적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수사학적으로 죽은 우주보다 살아 있는 존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인간은 생명의 일부이기 때문에 생기론은 어떤 의미에서 암묵적으로 인간에게 특권을 부여하기도 한다.
물질적 행위소가 우리처럼 생기적이고 살아 있는 것이지, 물질처럼 움직이고 행위적인 존재가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심층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살아있는 유기체나 우리가 ‘생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은 물질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합당하다. 움직이는 물질이 생명을 창조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다시 말해, 나는 신생기론이 선택적 신유물론이라고 우려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기물 및 비생기적 움직임 속으로 비밀스럽게 투사된(projected) 인간과 살아 있는 행위소에 기반한 어떤 모델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31>생명주의자들은 “물론 우리는 물질이 생명과 유기적 행위소를 창조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이 행위소를 개념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질 심지어 죽음조차 생명과 유사하다고 언급하는 것이다”라고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생명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나로서는 개념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우주를 보편적인 수준의 생명체로 취급하면서, 생명을 살아 있지 않은 물질의 미세한 단위로 취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중립적인 결정이 아니다. 신생기론자들이 ‘생명’을 아무리 광범위하게 정의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이 ‘생명과 같다’고 말하는 뿌리 깊은 생명중심적 쇼비니즘에 기대며, 그 반대는 아니다. 정치적으로, 서구의 생기론은 비생명체에 대한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특권의식을 피할 수 없다. 이 특권의식은 비생명체와 관련된 인간 및 비인간 신체의 착취와 전유를 포함한다.[50] 비-서구 전통이 생명에 대한 다른 정의를 유지해온 한, 그러한 것들의 현대적 용어 사용은 색다른 가치를 가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물질, 운동, 과정이 행위성과 창의성을 갖기 위해 요구되는 생명력은 암묵적으로 생명쇼비니즘인데, 이는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 게다가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생명력이 엔트로피 혹은 발생과 같이 실험적으로 알려진 다른 경향과 구별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불연속적 과정 철학
나는 과정 철학의 두 번째 전통을 ‘불연속성’이라고 부른다. 그 철학이 과정은 불연속적이고 분할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전통의 핵심 철학자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이다. 화이트헤드에게 과정은 실재하지만 변화와 움직임은 그렇지 않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변화는 단지 “어떤 결정된 사건으로 구성된 현실적 계기들(occasions) 사이의 차이”이다. 따라서 “‘변화’를 어떤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에 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51] “따라서 현실적 존재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곳에,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52]
따라서 변화와 움직임은 현실적 존재들 간의 차이로서의 그것들의 이어짐(succession)과 관련 있다. 모든 존재는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것”이며, 실재 전체가 서로 다른 상태의 이어짐으로 들어가지만, 어떤 존재도 기술적으로(technically) 변화하거나 운동하지 않는다. 적어도 한 명의 학자는 이것이 순전히 논리적인 종류의 변화 또는 <32>화이트헤드가 영국에서 함께 연구했던 논리주의 학파의 이름을 따서 ‘캠브리지 변화’(Cambridge change)라고 알려진 것임을 알아차렸다. 화이트헤드의 변이(transition)에 대해 그 학자는 그 변이가 “실제적인 변이가 아니며, 흐름이나 유동도 아닌데, 그렇게 이해되는 변화는 단지 일련의 서로 다른 불변하고 정적인 현실적 존재들의 이어지는 실존에 따른 사실일 뿐”이라는 점을 관찰했다. “변화라는 개념 자체가 교정불가능하게 정적인 것으로 구성되었다.”[53]
이 문제에 대해 여전히 의문이 남을지 모르지만,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개념』(The Concept of Nature)에서 “운동은 정지를 전제한다. (...) 운동 이론과 정지 이론은 강조점을 달리해서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같은 것이다.”라고 쓴다.[54] 화이트헤드는 “생성의 연속성은 없”으며, “연속성의 생성”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55] 이것은 부동성이 이동성을 전제한다는 베르그송의 주장과는 정반대이다.
화이트헤드에게 “현실적 존재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소멸한다. 그래서 그 어떤 현실적 존재도 변하지 않는다.”[56] 이것이 “정적인 생명을 구성”[57]하는 바, 이는 “모든 미결정성을 회피한다.”[58] 버트런드 러셀이 말한 것처럼, 화이트헤드의 우주는 일련의 정지된 사진들을 이어 붙인 것과 같다. 이는 영화처럼 운동의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러셀은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의 변화를 나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 어떤 변화의 상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썼다.[59] 과정 철학은 반드시 운동을 수반하지는 않으며, 개별적 상태들 사이의 차이만을 수반할 뿐이다.[60]
화이트헤드도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신을 ‘새로움의 발생 기관’(organ of novelty)이라고 불렀다.[61] 신은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적 존재일 뿐 아니라, 우주를 질서를 향해, 혼돈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한다. 모든 사물은 신의 구성 요소로 존재한다.[62] 화이트헤드는 “신의 개입을 떠나서는, 이 세상에는 새로운 것도 없고 질서도 없다. [신이 없다면] 창조의 과정은 모든 균형과 강도의 양립불가능한 교차에 의해 점진적으로 배제되면서 아무런 효과도 없는 수준이 될 것이다.”[63]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신은 진리, 아름다움, 선에 대한 그의 전망으로 세상을 이끄는 부드러운 인내심을 가진 세계의 시인이다.”[64]
불연속적 과정 철학의 영향은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 존재론(OOO)에서 오늘날에도 상당한 정도로 계속되고 있다.[65] 예를 들어, 프랑스 철학자이자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의 창시자인 브루노 라투르는 사물에 대한 ‘정적인’ 관점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대신에 그는 그것을 “적어도 언제나 수립 행위로 존재하는 연속적인 흐름을 증명하는 잇따르는 정지-프레임” 이론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66] 이것이 바로 <33>화이트헤드와 러셀이 제안한 캠브리지 변화의 정의, 즉 정적 정지-프레임이다.
라투르의 언급은 불연속적인 객체의 지속적인 소멸을 완벽하게 포착한다. 이것이 바로 화이트헤드가 ‘연장적 연속체’(extensive continuum)라고 불렀던 것이다. 우주는 마치 번쩍이는 섬광처럼 존재 하다가, 변화하지 않고 소멸한다. 따라서 라투르는 그가 ‘세속적 기회원인론자’(secular occasionalist)라는 표식을 명시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한다.[67] 기회원인론(Occasionalism)은 원래 신이 모든 것의 직접적인 원인이며 다른 어떤 것도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중세철학의 이론이다. 그러나 ‘세속적 기회원인론’은 신 없이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원인이라고 말한다.[68]
라투르의 관계론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OOO는 객체들이 변화하는 관계의 네트워크에서 연결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에게서 객체는 불연속적인 관계로 환원되지 않으며, 대신 객체는 ‘불연속적’이고, ‘안정적’이며, ‘알 수 없고’[69] ‘사물-그-자체’이다. 이 객체는 ‘명확한 경계와 단절점’을 가지고 있다.[70] 각 개체는 다른 객체들로부터 분리되어 ‘진공-밀봉’되어 있으며 그 안에 ‘단일’하게 홀로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또는 ‘물러난 본질’[71]을 함유한다.[72] 이 이론의 창시자이자 지지자 인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은 이를 주체 없는 칸트주의라고 기술한다. 즉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알 수 없는(unknowable) 객체라는 것이다.[73]
객체-지향 존재론자는 우리가 순전히 다른 객체들과 그것의 관계에 의해 객체를 정의함으로써 무언가 다른 것(something else)에 의해 객체 자체를 설명한다고 우려한다. 이것은 변동하는 관계의 겉모습 뒤에 있는 ‘실재 본질’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객체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체의 “표현되지 않은 저장소”를 다른 것들과의 모든 연결로부터 떨어트려 “진공 밀봉”하는 것이다.[74]
이 이론은 객체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첫째, 하만은 객체를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 한 부분은 관계에 따라 변화하고 다른 한 부분은 “숨겨진 화산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 (...) 다른 무언가로 변할 수 있다.”[75] 이것이 바로 하먼이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고 관계적 존재론을 비판하는 이유이다. “사물이 그것의 진행중인 관계 뒤에 무언가를 보유하고 있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먼은 말한다.[76] 이 관점에서 객체의 본질은 모든 변화와 움직임의 근원이지만 오직 가끔만 그럴 뿐이다. “안정성이 기준이다.”[77] 왜냐하면 객체들은 대부분 “냉담[하고] 전혀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은 단순히 존재할 뿐, 어떤 활동에 관여하기에는 어쨌든간에 너무 비관계적이다.”[78] 하먼은 또한 객체의 본질은 “어떤 영원한 특성”[79]을 가지지 않으며, “순간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80]
<34>이와 관련하여 프랑스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의 사변적 실재론[사변적 유물론-역자]은 화이트헤드의 불연속적 과정 철학의 일부만을 받아들인다. 특히 메이야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필연적인 어떤 것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연적인 것은 실체가 아니라 그 실체의 우발성이기 때문이다.”[81] 메이야수에게 물질은 근본적으로 카오스이기에 그 이전에 존재했던 것과 상관없이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메이야수는 화이트헤드, 하먼, 라투르, 그리고 기회원인론에 동의한다. 실재의 핵심은 어떤 심오한 비관계적 불연속성이다. 이 불연속성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메이야수가 ‘초카오스’(hyperchaos)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질은 그처럼 카오스이기에 모든 물리 법칙을 위반하고 심지어 순수 사유와 신을 무로부터 창조할 수 있다.[82] 그러나 메이야수는 또한 물질은 대체로(mostly) 관계적이며 안정적인 법칙과 패턴을 따른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불연속성 가설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하먼이 그를 “반쪽짜리 초기회원인론자”[83]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운동은 불연속적인가? 그것은 기회원인론적인가?
화이트헤드는 베르그송적인 연속체라는 생각을 거부했는데, 연속적인 과정이 시작되거나 끝나면서 개별적인 존재자들이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먼과 메이야수와 마찬가지로 연속성이 새로움을 제한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하먼과 메이야수처럼 근본적인 불연속성을 가정하는 것으로 그의 철학을 시작했다. 이 접근법의 몇 가지 문제점과 운동의 철학이 불연속적이거나 기회원인론적이지 않은 이유를 살펴보자.
첫 번째 문제는 화이트헤드가 계기들(occasions)은 끊임없이 시간과 신 안에서 소멸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과정을 근본적으로 불연속적인 변화로 생각하고 싶지만, 그러한 변화들은 궁극적으로 그것들 아래에 놓여 있으면서 그것들이 소멸해 들어가는 어떤 것, 즉 시간과 신 안에서의 변화이다. 그러나 시간과 신이 그 자체로 근본적으로 불연속적이지 않다면, 이것은 전체적으로 불연속적인 과정 철학이 아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화이트헤드는 새로움을 엄격하게 일시적이거나 신성한 종류의 새로움으로 축소한다. 하먼과 메이야수는 여기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연결하거나 통합할 수 있는 선재하는(preexisting) 신을 제거함으로써 비관계성을 더욱 멀리까지 밀어붙인다.
하먼과 메이야수는 화이트헤드의 신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지만 다른 문제도 가지고 왔다. 예를 들어, 하먼은 존재론을 메이야수를 넘어서 존재론적 불연속성을 가장 급진적인 위치로 밀어붙이는데, 이는 <35>결국 어떤 불가능한 결론에 도달한다.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문제의 핵심은 하먼이 점점 더 세계와의 어떠한 관련성으로부터도 그것을 떼어놓음으로써 새로움의 존재론적 원천을 보존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객체의 새로운 힘을 너무 밀어붙인 나머지, 객체의 창조적 본질이 세계를 완전히 ‘초월’하여, 그 어떤 활동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게 만든다.[84]
하지만 객체가 그 어떤 활동에도 관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참신함을 낳을 수 있는가? 활동이 없는 새로운 활동 같은 것이 있는가? 우리는 우주에서 활동하지 않는, 혹은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설사 우리가 완전히 비관계적이고 초월적인 새로움의 본질을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든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무런 활동도 없는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주 어디에서도 활동하지 않거나 운동하지 않는 물질이나 과정에 대한 관찰 증거는 없다. 실제로, 20세기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실험적 발견 중 하나는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양자 수준에서 얽혀 있다는 사실이다. 즉, 모든 아원자 입자의 운동은 다른 입자의 움직임과 뚜렷하게 관련된 패턴으로 동시에 변화하며, 이는 매개 입자의 직접적인 인과관계 없이 나타난다.[85] 그래서 심지어 하먼은 변화가 “활동이 전혀없는” 어떤 것에서 나올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러한 형이상학 적 신념은 지금까지의 모든 물리적 실험과 우주에 대한 관찰을 위반하는 것이다.
메이야수에게로 가보자. 우리는 이미 그가 물질이 대부분의 경우 관계적이라는 점을 수용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이는 명백히 화이트헤드와 대립한다. 하지만 그의 저서 『유한성 이후』에서 메이야수는 화이트헤드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배후적 통일성에 동의한다. 메이야수는 그의 카오스에 대한 생각과의 모순율 위반을 피해가기 위해 이렇게 한다. 특히, 그의 카오스 개념은 어떤 것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존재는 근본적으로 예측할 수 없지만 비논리적이거나 모순적이지도 않다.[86] “생성 중에, 사물은 존재하며, 그 다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존재하고, 그 다음으로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 어떤 모순도 포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체(entity)는 결코 동시적으로 이것이면서 그 반대, 즉 실존이면서 비-실존일 수 없기 때문이다.”[87] 메이야수의 암묵적인 가정은 비관계적 변화는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시간은 <36>서로를 오염시켜 모순을 만들어내지 않고도 근본적으로 다른 것들을 함께 담을 수 있는 비물질적이고 중립적인 용기처럼 작용한다. 시간은 사물을 결정론적인 존재자로 묶어두기도 하고 별개의 존재로 분리하기도 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간은 메이야수의 카오스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시간적 순서는 그것이 존재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것, 즉 동시적인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존재자는 그것들이 존재하는 것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으며, 이는 엄청난 모순을 낳는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순수 사유나 신과 같이 무로부터 출현하는 새로움 따위에 대한 증거를 가지지 않는다. 사실, 이런 종류의 주장은 원리적으로 비실험적이다. 반면에 우리는 양자 얽힘에 대한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메이야수의 사변적 결론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메이야수는 “실체(entity)는 결코 동시에 이것과 그 반대, 실존과 비실존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양자 물리학의 이중 슬릿 실험은 이른바 모순‘율’에 대한 잘 알려진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일련의 개별 광자가 두 개의 슬릿으로 발사되면 항상 하나 또는 다른 슬릿을 통과한다. 이것은 메이야수가 오래되고, 비모순적이며, 선형적이고 이성적, 이산적 방식이라고 선호했던 그런 방식이다. 하지만 많은 광자들이 슬릿을 통과하여 슬릿 뒤의 벽에 부딪히면 그것들은 에너지가 두 슬릿을 동시에 통과했음을 보여주는 어떤 뚜렷한 회절 패턴을 드러낸다. 여기서 바라드 역시 이 실험이 메이야수가 고수하고 있는 전통적인 서구-유럽에 속하는 모순율의 인식론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88]
서구-유럽 수학에서도 범주 이론과 같이 수학과 논리를 수행하기 위해 모순율을 채택할 필요성을 전제하지 않는 고차-수학 논리가 존재한다.[89] 따라서 메이야수가 왜 실재가 이 법칙을 이 고대의 자의적인 논리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요컨대, 화이트헤드, 하먼, 그리고 메이야수는 철학적이고 실험적인 근거 위에서 실재가 불연속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불/연속적 과정 철학
과정 철학의 세 번째 판본도 있는데, 이는 두 가지 과정 철학 학파를 통합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이를 ‘불/연속’-유형 과정 철학이라고 부른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위대한 과정 철학자는 내가 보기에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이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나에게 영감과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37>그는 화이트헤드와 더불어 베르그송과 생기론적 전통을 읽었으며, 이들을 연속적이면서 동시에 불연속적인 하나의 과정 철학으로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들뢰즈를 연속성 쪽에 더 기울어 진 것으로 읽는 경향이 있지만, 그는 또한 그것을 불연속적인 과정과 결합 시키려고 노력했다.[90] 들뢰즈에게 과정이란 연속성, 물질, 그리고 운동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과정이 차이, 사유, 정지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였다. 그는 둘 모두에 생성 또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들뢰즈는 “물질의 힘”[92]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의 힘”[91]이 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되기[생성]의 힘이다. 그는 니체에 관한 저서에서 또한 마르크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에 대립하여 이 힘의 존재론적 우선순위에 대해서 명시했다. 들뢰즈는 “원자론은 초기 역학의 가면일 것”이라고 썼다.[93] 그는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루크레티우스가 너무 비관적이고 유물론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94]
들뢰즈의 동력학이 흥미롭고 기묘한 이유는 운동과 정지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95] 화이트헤드에 대한 그의 빚은 명백하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화이트헤드의 책 『과정과 실재』를 “현대 철학의 가장 위대한 책 중 하나”라고 부른다.[96] 화이드헤드를 따라 들뢰즈 또한 화이트헤드가 그랬던 것처럼 『차이와 반복』에서 시간과 정적인 형식적 변화에 운동을 종속시켰다. 들뢰즈는 “[세 번째] 종합은 필연적으로 정적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더 이상 운동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은 가장 급진적인 변화의 형식이지만 변화의 형식는 변하지 않는다.”[97]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계기들(occasions)은 움직이거나 변화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공명한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모든 물질로부터 독립된 텅 빈 형식으로서의 시간”에 관한 이론으로 운동과 물질을 시간에 종속시켰다.[98] 실제로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 16장 전체를 “정적인 존재론적 발생”에 할애한다. 『앙띠오이디푸스』에서 그와 펠릭스 가타리는 사회를 “부동의 원동자”(immobile motor)[99]로 묘사하고, 심지어 마르크스에서 가져온 ‘흐름’ 개념을 지속적으로 ‘중단’, ‘단절’ 또는 ‘절단’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모든 ‘객체’”는 “흐름의 연속성을 전제한다. 그리고 모든 흐름은 객체의 절편을 전제한다”라고 그들은 말한다.[100] 들뢰즈에게 흐름과 정지는 교대로 나란히 존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에서 “따라서 속도와 운동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즉 운동은 매우 빠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는 심지어 움직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속도이다.”[101] 따라서 그것은 유목민의 “움직이지 않는 항해”이다.[102]
<38>따라서 들뢰즈는 운동의 연속성과 정지의 불연속성을 번갈아 강조하며 궁극적으로 둘의 동시적이고 동등한 존재론적 지위를 확인한다. 때로는 과정이 연속적으로 흐르고 때로는 불연속적으로 끊어지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이 관점은 앞의 두 가지보다 우수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더 나쁘다. 앞서 설명한 두 가지 관점의 약점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둘 모두를 긍정하는 것은 양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논점에 대한 나의 들뢰즈 비판은 생기적인 연속적 과정과 비관계적인 불연속적 과정에 대한 나의 비판이 결합된 것이다. 최종적으로 들뢰즈는 두 과정 철학 전통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수용했다.
미결정성과 운동의 철학
과정을 연속적인 생명력이나 불연속적인 대상, 또는 둘 다로 생각하는 대신, 운동의 철학에서는 과정을 미결정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나는 (라투르에 반대하여) 과정을 결정적(determinate) 부분이나 관계로 환원할 수 없다는 하먼의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사물에 어떤 초월적 본질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객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운동이 근본적으로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러하다. 에너지는 결정적인 입자도 아니고 결정적인 파동도 아니다.[103] 에너지에는 결정적인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할당할 수 없다.[104]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가 기원전 1세기에 그의 철학의 핵심으로 물질의 미결정적 ‘편위’(swerve)를 수립했을 때[105], 주석가들은 멈칫거렸다. 그의 비평가들은 어떻게 물질이 “불확실한 시간, 불확실한 장소” 또는 “미결정적 시간과 미결정적 장소에서” 결정적인 외부 원인 없이 운동하는 것이 가능한지 궁금해했다.[106] 서양 전통에서 자연이 그 운동의 외적 원인 업이, 결정적인 시-공간 없이 움직인다는 생각은 거의 보편적으로 거부되었다.[107] 그러나 오늘날 많은 양자 물리학자들은 양자 미결정성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설명으로 루크레티우스의 공로를 직접적으로 인정한다.[108] 핵심적으로 운동의 철학은 이러한 통찰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하먼은 양자 미결정성 이론에 대해 최근 바라드의 연구에 관한 기사에서 <39>“하부채굴(undermining)은 개별 객체를 진리가 되기에는 너무 얕은 것으로 취급하고 그것들을 더 작은 것들의 미시-군대(micro-army) 또는 미결정적 흐름의 원초적 덩어리(primordial lump)로 대체하려고 한다.”[109]고 응답한다. 안타깝게도, 하만은 양자 미결정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 우주에는 양자 미결정성 외에 “원초적 덩어리”와 같은 것은 없다. 미결정성은 정의상 그 어떤 결정적인 덩어리가 될 수 없다. 이 인용문에서 하먼은 또한 양자 요동을 ‘작은 것들’의 군대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어떤 물리학자도 에너지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근본적으로 작은 것들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바로 이중-슬릿 실험의 핵심 발견이었다. 에너지는 결정적 입자로 환원될 수 없다. 에너지는 어떤 실체가 아니며 고정된 선험적 속성이 없다. 이것이 바로 물리학자들이 지난 한 세기 동안 고심해 왔으며, 미결정성을 설명하기 위해 종종 자신들만의 깊이 있는 형이상학적인 해석을 고안함으로써 극복하고자 분투해 왔던 것이다.[110]
이와 같이 하먼의 철학과 양자 물리학은 양립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객체-지향 존재론자인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은 양자 이론이 옳은 이유는 오로지 OOO가 옳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그는 독단적으로 “OOO은 가장 심오하고 정확하며 검증 가능한 물리적 실체 이론과 깊이 일치한다. 사실, 거꾸로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즉 양자 이론은 객체 지향적이기 때문에 작동한다”고 단언한다.[111] 이 논리에 따르면, 만일 어떤 실험이 OOO를 뒷받침하지 않는 증거를 제시한다면, 그 실험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모튼의 철학이 얼마나 비역사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실험적이지 않은지를 드러낸다. 모튼과 달리 운동의 철학은 실험의 개방적 성격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수용적이기를 겨냥한다.
루크레티우스에서 양자 물리학까지 존재론적 미결정성에 대한 생각은 서양의 전통 안에서 그에 반하는 과정의 본질을 이해하는 진정한 대안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지와 과정에 관한 기존 개념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존재론적 변화이기에, 역사, 자연, 지식, 정치,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것들에 대한 우리의 사고 방식에 색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이 책의 주요 주제이기도 하다.
미결정적인 유물론 철학은 어떤 모습인가? 만약 모든 것이 운동하는 물질의 미결정적인 과정이라면 우리 주변의 비교적 안정적이고 결정적인 것들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40>세상을 실체, 형식 그리고 본질 대신 미결정적인 운동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태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가 다음 장에서 제기할 질문이 이것이다.
이 장에서는 운동 철학이 유럽-서양 전통의 가장 가까운 사촌들과 비교했을 때 무엇이 다른지 설명했다. 나는 주로 운동 패러다임(mobilities paradigm)과 과정 철학의 역사에서 몇 가지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그렇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운동의 철학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 주로 다루었다. 하지만 다음 장에서는 물질, 움직임, 미결정성에 대한 핵심적인 철학적 개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또한 이 색다른 철학적 출발점이 어떻게 우리에게 흐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사물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살펴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