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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2장 산과 물
<131>§13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현상학에 관한 노트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질 자격을 가지기 위해, 위대한 예술 작품은 기술적 숙련 또는 부정성을 통해 차별화를 획득한다. 전자는 연속성이 특징이고 후자는 격절이 특징이다. 거장의 그림은 수십 년에 걸친 수련과 이전 세대로부터 전수받은 지식을 개인적인 해석과 습득한 기술로 수정하여 보여준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기술적 이해는 아마추어가 쉽게 뛰어넘을 수 없다. 다른 한편, 불연속성[격절]은 기술뿐만 아니라 감성의 측면에서도 개념적, 패러다임적 단절을 요구한다.
현대 예술에서, 예술가들은 작품 자체를 ‘취소’(undo)함으로써 이 과제를 추구했다. 물론 이러한 되돌리기에는 숙련과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예술 작품과 예술 작품이 그 자체로 정의되는 조건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정의한 모더니즘이며, 아서 단토(Arthur Danto)에 따르면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에서 시작되어 앤디 워홀로 끝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의 본질이란 “내가 보기에 한 학문의 특징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그 학문 자체를 전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학문의 역량이 미치는 영역에 더 확고히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 비판하는 데 있다”고 썼다.[1]
다시 말해, 모더니즘은 종종 자기-비판의 형태를 취하는 반성성에 의해 규정된다. 모더니즘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동어반복적(tautological)이다. 그것은 어떤 부정적인 우회, 논리적 모순을 통해 그것이 부정하는 것을 증강한다. 이러한 태도는 애초의 부정 또는 거부가 실제로는 긍정을 예비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비극적이다.[2]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 1917)이 <132>대표적인 예이다.[3] 그것은 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예술 작품이다. 《샘》은 예술 작품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사회적, 문화적 조건을 파괴한다. 예술 작품의 자기 부정은 예술 작품의 전통, 의식, 제도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현대미술이나 아방가르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술의 대상이 아름다움이라고 가정한다면, 객관적인 의미에서 아름다움은 결코 그 자체로 현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앞에 있는 물 한 잔이나 사과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관념으로서 그것의 현전은 대상으로서의 부재와 동의어일 뿐이다.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반대로, 부재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있는 물 한 잔처럼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1790)에서 아름다움을 정의하려고 시도하면서 아름다움은 필연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긍정적인 정의 대신 두 가지 부정적인 조건, 즉 무관심의 쾌락과 무목적의 목적성을 제시한다. 무관심의 쾌락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때까지의 끊임없는 부정을 함축하며, 거기에 무엇이 남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게 된다. 무목적의 목적성도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아름다움의 목적성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망치는 못을 치는 데 사용되고 숟가락은 음식을 그러담는 데 사용되지만, 아름다움은 주체의 특정한 관심이 담긴 모든 실용적인 설명을 초월한다. 식물학자가 어떤 식물이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것은 식물학자로서 그 식물이 식물학자 자신을 넘어설 때에만 진정으로 그러한 것이다.
칸트에게 자연은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지만, 자연의 목적성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끊임없는 움직임 안에서 반성적 판단은 모호한 대답, 즉 ‘마치 ~인 것처럼[als ob]’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자연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찰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을 정확히 포착할 수 없으며 단지 ‘마치 ~인 것처럼’이라고만 말할 수 있다. 아름다움을 표명하는 데 있어 난점은 <133>사물-자체, 신, 자유와 같은 개념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의 개념은 (자유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어떤 부정적 개념일 수밖에 없다.
1장에서 우리는 붓으로 묘사된 형태가 부재하는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기 위해 시도하는 회화에 대한 하이데거 이후의 현상학적 해석을 개괄했다. 이 맥락에서 비가시적인 것은 더 이상 기독교적 신성이 아니라 개방성(the Open)과 존재(Being)와 같은 비-합리적인 것의 범주에 속한다. 비가시적인 것은 현전과 반대되는 부재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만, 현전으로 포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확히 말해 전경화되지(figural) 않기 때문이다. 전경화되는 것은 자연의 모방 혹은 자연의 거울 이미지일 뿐이다.
비가시적인 것은 전경화하지 않는다.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배경은 비가시적이지만 어디에나 존재한다. 또한 배경은 상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술은 배경을 감각적으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클레는 그의 노트 『사유하는 눈』의 ‘창조적 가르침’이라는 항목에서 “예술은 가시성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쓴다.[4] 예술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만든다. 클레와 달리 우리는 가시적인 것 대신 감각적인 것을 더 선호할 수 있다. 가시성은 여전히 시각적 증거에 특권을 부여하는 ‘봄’(seeing)으로 제한된다. 플라톤적 형상(eidos)에 의해 지배되므로, 가시성은 만약 형상의 세계가 물리학의 세계 뒤에 있다면 항상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은 가시적인 것과 동일하지 않다. 가시적인 것은 감각적인 것에 참여하지만 그것의 전체성(totality)과는 거리가 멀다.
그림을 역설적으로 시각적 대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봄의 제한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화가는 우리가 숨겨진 기호나 암시만이 아니라, 캔버스 위의 비기사적인 것을 ‘보길’ 원한다. 화가는 비가시적인 것을 그린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비가시적인 것을 어떻게 그릴 수 있는가? 내 연인의 눈을 바라볼 때 나는 사랑을 느끼지만 그 자체로 그것을 보지는 않는다.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가 『엔네아데스』(Enneads)에서 한 말을 떠올려 보라. 사랑은 우리가 <134>감각적인 형태에서 형태 없는 것으로 나아갈 때만 출현한다.[5] 역설적이게도 플로티누스는 이러한 경험을 연인이 아닌 내적 자아에서 발견한다. 사랑은 “은혜를 줌으로써 사랑을 낳고 사랑을 일깨움으로써 은혜를 나타나게 하는” 선을 갈망하기 때문이다.[6]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의 제자로서 형상(eidos)을 설명의 근거로 이해한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교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영지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는 이데아를 지상 너머에서 찾지 않는다. 대신 그는 내면의 자아로 돌아가서 그것을 찾는다.
우리는 이 플라톤주의적이고 기독교적인 틀은 사랑을 성찰하는 여러 방법 중 한 가지를 제시하기 때문에 일반화하길 원할 수 있다. 사랑은 글로 쓰거나 말하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감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따라서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상호주체적이고 상호객체적인 관계를 결정화하고(crystalizes) 그것으로부터 출현한다. 마치 내 모든 지향이 탖자를 생각하도록 명령받는 것처럼 타자로부터 사랑을 느낀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상호주관적이다. 또한 그것은 마케팅이 잘 이해하는 것처럼, 우리의 행위유도성(affordance)에 끊임없이 감응하는 환경, 즉 주변 객체들에 의해 나의 시선이 매개되고 지시되기 때문에 상호객체적이다.
사랑의 감정은 우리가 고통을 견디게 하는 의미와 용기를 발견하는 더 넓은 현실을 드러낸다.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지각-감각(perception-sensation)에 대해 말했듯이 전경화[figuration, 형상화]는 배경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빨간색은 단순히 추상적이고 동질적인 색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빨간색이 존재하며, 모든 빨간색은 주변 환경에 분포된 다른 빨간색과 병치되어 지각되고 우리의 기억에 저장된다. 따라서 지각은 상호주체적이면서도 상호객체적이다. 어떤 그림에서 진실은 전경[figure, 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경과 배경 간의 상호성에 있다.[7] 배경이 <134>언제나 전경으로부터 물러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진리는 그것이 둘 간의 관계로부터 출현하기 때문에 증명가능하지 않다.
진리는 증명될 수는 없지만 회화를 통해 경험될 수 있다. 그림은 캔버스 너머에 있는 어떤 목표를 위한 수단이다.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에게서 우리는 현상학적 판단중지(에포케, epochē)가 코기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도구(Zeugsein) 또는 예술 작품의 형태로 세계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상학에서 에포케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이 학문의 슬로건처럼 사물 자체로 돌아가기 위해 소박한 세계관을 일시 중단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세잔과 클레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글, 칸딘스키에 대한 미셸 앙리, 자코메티에 대한 장 폴 사르트르 등 거의 모든 현상학적 예술 탐구에서 비가시적인 것을 감각적으로 만들기 위해 판단중지를 하려는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접근 방식은 과학, 기술, 예술 그리고 삶 사이의 얽힘을 지시한다.
칸딘스키에게서 외적 필연성의 판단중지는 점, 선, 면 그리고 색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삶과 일치시킬 수 있는 내적 필연성에 따라 캔버스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자코메티의 판단중지는 관객과 조각품 사이의 불가분한 거리에 의해 드러난다. 사르트르가는 자코메티가 “처음부터 관계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절대적인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8] 자코메티는 공간의 무한한 분할 가능성에 사로잡혔는데, 이는 고전적인 조각에서 완전한 세부 묘사로써 절대적인 것을 특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관객과 조각 사이의 거리는 어떤 완전한 형태로서의 본질에 대한 직관적 이해와 같은 것을 중단시키는 에포케이며, 이러한 거리를 통해 절대적인 것을 근사화할 수 있게 해준다. 세잔의 회화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물에 대한 지각을 중단한다는 점에서 에포케를 달성한다. 세잔은 전통적인 기하학적 투시법에서 벗어나 자신을 숨기고 있는 자연을 그리고자 했다.
세잔은 자연에 의해 감응된 자신의 감각을 그림으로써 자연을 몸으로 살아가고 그것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고자 했다. <136>이런 의미에서 신체는 자코메티보다 세잔에게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세잔이 - 30점의 유화와 45점의 수채화로 - 담아내려 했던 생-빅투아르 산은 사진이나 기하학적 효과에 근접하지 않으며, 인간과 풍경 사이의 관계에 관한 어떤 탐구를 열어 보인다. 즉 “풍경은 내 안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나는 그것의 의식이다[Le paysage se pense en moi, et je suis sa conscience]”[9] 지나가는 순간을 색채의 흐름 속에 담아내고자 했던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세잔은 변화들 속의 영원성, 즉 그 존재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언제나 욕망의 대상으로 남는 무시간적 자연을 보존하고자 했다.[10] 이것이야말로 세잔의 그림이 항상 미완성인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세잔은 1870년 《생-빅투아르 산과 참호》를 그린 이후에도 산업주의를 배경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화해시키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산업화가 가시적인 것을 그 자체로 파악하여 그것 -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비축물’(Bestand) - 을 착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세잔은 아직 가시적이지 않은 것, 항상 현전을 벗어나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본다는 것은 깊이 - 시각 자체에 의해 가려져 있는 것 - 을 드러내는 것이다. 회화는 과학적이고 역사적으로 구성된 전망을 벗어난 봄의 방식이다. 회화는 존재가 화가에 의해 관중에게 접근가능하도록 요청받는다는 점에서, 또는 다시 말해 개방성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존재로의 참여이다. 우리는 이것을 메를로-퐁티가 ‘깊이’ 또는 ‘제한 없는 존재에의 참여’라고 불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물들이 겹치거나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정의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것들 중 하나, 즉 내 몸과의 파악불가능한 연대를 표현할 뿐이다 (...) 나는 바로 이 순간 다른 곳에 위치한 다른 사람 - 또는 더 낫게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 - 이 그들의 <138>‘숨은 장소’를 뚫고 들어와 공개적으로 배치된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깊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nothing)이거나, 제한 없는 존재에 대한 나의 참여, 즉 우선적으로 모든 [특정] 관점을 넘어선 공간의 존재에 대한 참여이다.[11]
<138>메를로-퐁티는 세잔에게서 과학적 재현에 대한 소박한 믿음에 의해 가려진 깊이에 대한 탐구를 발견한다. 세잔은 깊이를 위해 질서와 견고함을 희생하지 않고, 오히려 깊이가 저절로 드러날 수 있도록 디테일을 교묘하게 비틀었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투시법]에 관계없이 테이블의 가장자리가 직선을 유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추상적인 규칙이 아니라 세계와의 역동적인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특정 크기와 특정 순간에는 유효하지만 모든 규모와 모든 순간에 그렇다고 보장할 수 없다. 물 한 잔은 분자 구성에 따라 분석할 수 있고 액상 음료로 즐길 수도 있으며, 이러한 즐거움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과학주의를 포함하여 근본주의는 경험의 다양성과 특정 척도가 의미를 획득하는 조건을 깨닫지 못한 채 한 가지 척도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그 관점을 궁극적인 실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세잔은 기하학적이고 사진적인 투시법이 아닌 살아있는 투시법을 재창조한 것이다.[15] 이 투시법에서 객체는 애니미즘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주의(spiritualism)를 통해 생명을 부여받는다. 1904년 버나드(Bernard)는 다음과 같이 썼다. “폴 세잔은 위대한 화가들 사이에서 신비주의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회화와의 관계, 즉 그것들이 가진 아름다움의 구체적인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 그것이 그의 예술에 관한 메시지이다.”[16]
(20세기 주요 대륙 철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현대 예술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에는 전경과 배경,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관계를 명료화하려는 공통된 시도가 담겨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세잔, 클레, 칸딘스키가 하이데거를 읽지 않았더라도 <140>비가시적인 것 또는 개방성에 대해 탐문하고 표현하려는 지향은 예술과 현상학이 공유되는 바이다. 그들의 작업은 만연한 근대화와 산업화의 근절과 파괴 이후, 타자를 탐구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14. 산수화와 관련된 첫 번째 시도-논리
서양 미술과 그 현상학적 해석이 20세기에 와서야 존재론적 차이와 그 극복에 도달했다면, 중국 산수화에는 처음부터 배경에 대한 탐구가 내재되어 있었다. 스위스의 중국 화가 자오우키(Zao Wou-ki)는 “중국의 자연을 보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세잔이었다.”[17] 하지만 세잔이 그에게 중국의 자연을 보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인가, 아니면 세잔이 1974년 프랑스로 이주한 후 중국 풍경화 교육을 통해 처음 습득한 봄(seeing)의 감각을 그에게 불러일으킨 것인가? 자오가 파울 클레의 작품에서 보았던 것이 중국 회화의 상징주의 아니었는가? 클레의 상징 세계가 중국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그가 확신하게 된 것은 아닌가? 세잔이 현상학의 관점에서 이론화 할 수 있었던 배경이나 깊이에 대한 탐구와 중국 풍경화의 탐구 사이의 차이점은 정확히 무엇인가? 화가 형호(荆浩, Jing Hao, 870-930 무렵)의 이론적 저술인 <필법기>(筆法記, Notes on Brushwork)에서도 비슷한 말을 찾을 수 있는데, 저자는 무명의 스승의 목소리를 통해 대상의 실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외관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는 메를로-퐁티의 회화 이론을 일반화하는 대신 - 처음에는 그럴 필요가 있겠지만 - <141>사고의 과제를 공식화하기 위해 예술의 다양한 경험에 대한 질문을 열어보려고 한다.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중국의 산수화, 더 정확하게는 산수(山水, shanshui), 즉 문자 그대로 ‘산과 물’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서론에서 나는 그리스 비극과 산수화가 유럽과 중국에서 미학적 (그리고 철학적) 사고의 두 가지 주요 양식을 특징짓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비극적’ 논리라고 부르는 것을 설명했다. 이 장에서는 도교적 논리인 산수화의 논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산수화는 중국 예술에서 가장 정교한 미학적 사유를 체현한다. 많은 이론가들과 미술사학자들이 이미 말한 것을 반복하기보다는, 나는 산수화를 기술적(technical) 활동, 즉 회화를 통해 우주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가 통합되는 더 넓은 우주적 현실 속에서 인간과 그 기술 세계를 재구성하는 코스모테크닉스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하지만 이 통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두 개의 사과가 나란히 놓인 것처럼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호혜적인(reciprocal) 관계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호혜성은 내가 상반적 연속성(oppositional continuity)과 대립적 통합성(oppositional unity)이라고 부르는 것에 기반하여, 어떤 재귀적 논리로 더 탐구될 필요가 있다. 이 주제에 대한 사유는 위진 시대(220~420)의 지적 발전, 특히 스물네 살에 죽은 뛰어난 철학자 왕필(王弼, 226~249)의 사상에 힘 입은 바 크다.
위진 시대는 중국에서 불교가 번성하기 시작한 시기로, 지식인들이 도교를 통해 불교를 흡수하려고 시도했다. 동시에 학자들은 도교와 유교의 조화를 시도하였다. 그것은 현(玄, xuan)이라는 어떤 특수한 논리에 기초하여 탁월한 종합을 만드는 시기였다. 산수화도 이 시기에 등장했으므로 이 논리와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18] 이를 위해서는 유럽과 중국 미학적 사유의 차이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 요청된다. 낯설게 보일지라도 이러한 차이화 없이는 니체가 칸트를 쾨니히스베르크의 위대한 중국인으로 묘사한 것처럼, 모든 모델을 보편적인 척하는 하나의 모델로 뒤섞을 위험이 있다.[19]
14.1. 상(象)과 형(形)의 개념
지난 수십 년 동안 중국과 유럽 사상, 특히 미학의 차이에 관한 여러 작품에서 중국과 유럽 사상 사이의 간극(écart)을 탐구한 프랑스 중국학자 프랑수아 줄리앙(François Jullien)에서부터 시작하겠다. 그의 저서 『불가능한 누드』(The Impossible Nude, 2000)는 다소 이상하지만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고대 중국에는 왜 고대 인도-유럽 문화에서 볼 수 있는 누드화가 없었는가? 줄리앙은 누드가 플라톤적 형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누드는 “이데아를 지향하며 이데아의 ‘이미지’(eikon) 역할을 한다.”[20] 단순한 나신이 아닌 신체적 아름다움의 ‘원형’을 나타내는 누드는 진정한 형상(eidos)이다.[21] 누드는 존재와 대립하여 “존재의 항복을 얻어내고 그것의 수수께끼를 탈취한다.”[22] 『위대한 이미지에는 형태가 없다』(The Great Image Has No Form)에서 줄리앙은 중국 예술은 유럽 사상에서의 현전과 부재가 “가차 없이, 강렬하게, 열정적으로” 분리된 것과는 다른 형태의 사유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23] 그와 달리 중국 예술은 현전과 부재 사이의 어떤 지속되는 관계를 유지한다.
<143>마르틴 하이데거가 보여주었듯이 그리스인들은 그들 자신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로, 본질의 결정을 현전으로, ousia[실재, 실체]를 그것이 심연으로 변할 때까지 그 균열(rip)의 생산성을 착취하는 parousia[나타남, 임재]로 이해했다. 그로부터 그들은 비극적인 부재의 예술을 발전시키면서까지 현전의 숭배에 전념했다.[24]
줄리앙은 중국 사상에서 하이데거의 물음 또는 형이상학의 역사를 관통하는 eidos의 지배와 관련된 서양 철학의 도전에 대한 가능한 응답을 본다.[25] 줄리앙은 고대 중국 사상에서는 감각적 영역을 넘어서는 가지적(intelligible) 형태는 없다고 주장한다.[26] 그리고 현전의 숭배가 된 유럽 사상과 달리 중국 사상에서는 부재와 현전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없는데, 이는 중국인에게 존재론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줄리앙은 주장한다. 서양에서 존재의 지배에 대한 추구는 (사진에 찍힌 정지된 누드처럼) 존재의 우선화로 이어지며, 그 가장 높은 형태가 바로 그것의 본질인 eidos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eidos의 초월적 세계는 존재자 자체와 전체적인 존재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임무이다. 우리는 이러한 철학의 경향을 플라톤적 욕망이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다. 반대로 줄리앙은 부재와 현전이 통일되지 않으며, 비-존재론적이고 비-신학적 사고방식을 강요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동등한 의미를 갖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줄리앙은 강남(江南, 양쯔강 남쪽) 풍경을 등장시킨 새로운 산수화 양식을 개척한 오대-십국 시대의 화가 동원(董源, Dong Yuan, 934-962)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144>‘떠오르고-잠기는’, ‘거기 있고-없는 사이’인 동원의 풍경은 (현전의) 기적과 (부재의) 파토스 모두로부터 우리가 거리를 가지게 한다. 그것들은 황홀경과 비극의 저 너머로, 아니 오히려 가까운 쪽으로 열린다. (...) 다시 말해, 나는 동원의 그림이 비신학적, 비존재론적 접근의 수단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한다.[27]
앞에서 우리는 현상학에서 적어도 하이데거의 ‘존재 망각’에 대한 도발 이후 존재와 존재자, (게슈탈트 심리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배경과 전경, - 학술적 전통에서 영원한 논쟁 주제인 - 본질과 존재 사이의 관계를 재고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음을 살펴보았다.[28] 그러나 우리는 줄리앙의 진술이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았다. 줄리앙도 그의 책 서문에서 이를 인정한 바 있다.
회화의 텔로스는 모든 형태를 가능케 하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근거를 드러내는 것이다. 회화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며, 따라서 항상 텔로스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것은 기껏 하이데거가 말하는 로곤 디도나이(logon didonai), 즉 유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목적 자체가 없다면 그림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붓의 흔적을 통해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러한 부재는 결코 그 자체로 드러날 수 없다. 하얀 종이 위에 먹물의 현전은 화가 정신의 시공간적 경험을 간직하고 있으며, 모든 획은 이 경험을 간직하고자 하는 어떤 시간적 장명과 공간적 배치를 나타낸다.
그러나 간직되는 것은 드러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 현전은 더 높은 목적(telos)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재하는 것을 - 결여가 아니라 반대로 - 감각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회화에서 형태의 현전은 스스로를 무의미하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되돌릴 수 있는 시간적 과정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회화에서 텔로스는 바로 부재하는 것, <146>현전을 통해 드러날 수 있는 부재를 향한 길에서 불거져 나오는 전경[상]에 의해 가능한 이러한 개방성이다. 하이데거는 선 예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45>
선(Zen)에서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은 형상 없는 것이 어떻게든 그림 속에 현성(comes to presence, Anwesung[현전으로 나온다])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형상이 없는 것의 현전이 없다면, 어떤 선예술 작품도 불가능하다.[29]
선 예술에서 우리는 존재가 무에서 와서 무로 돌아간다는 것, 즉 무형식(formless)임을 알 수 있다. 진리는 명백한 현존성(Anwesenheit)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현존의 결코-채워지지-않는-충만함(Anwesend)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telos는 전경화(figuration)로의 환원이나 모든 상들의 총합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목적성이다. 아마도 이것은 칸트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데, 왜냐하면 각 붓놀림의 목적은 자신을 넘어, 자신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를 취소하기(undo)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현상학의 관점에서 예술에 관한 20세기의 재사유를 중국 철학으로의 전환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의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가? 중국 사상과 현상학적 사유가 일치하여 보다 ‘보편적인’ 사유의 방법으로 정렬될 수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예술에 대한 포스트-하이데거적 현상학적 사유와 풍경에 대한 중국의 미학적 사유를 동일시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은 아닌가?
줄리앙은 고대 그리스 사상을 ‘존재(본질)’와, 중국 사상을 ‘과정’과 연관시킨다.[30] 실제로 플라톤에서 플로티누스에 이르는 고대 텍스트에서 우리는 아름다움과 이상적인 형태 사이의 친밀함을 강조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간략화는 역동적인 중국 사상과 대조적으로 그리스 사상을 정적인 것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 앞서 비극적 논리의 정신에 따른 유기적 형태에 대한 설명을 생각해 보라. 이는 줄리앙이 <147>셸링의 예술철학과 빙켈만(Winckelmann), 레싱(Lessing), 헤르더(Herder)를 언급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누드』에서 기술하는 형태와 매우 다르다.[31] 여기서 그는 셸링의 미학적 철학의 중심인 비극적 예술과 유기적 형태, 그리고 서구 시적 예술의 최고 형태인 비극에 대한 해석에 대해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분명히 해보자. 즉 그리스인들은 생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존재와 생성의 통합된 이론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고대부터 중국 사상은 과정에 관한 것이고 서양 사상은 형식(본질)이 지배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오늘날 철학의 지형에서, 특히 과정 철학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구분이 어떻게 생각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철학과 중국철학은 과정철학을 통해 통합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 사상은 중국 사상만큼이나 역동적이지만, 그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른 철학적 기질, 예술적 추구, 삶에 대한 이해가 생겨났다.
나는 ‘근거’(ground[배경])이라는 용어가 두 철학적 담론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지만, 중국에서 ‘근거’(또는 진리)의 의미와 그것이 표현되고 접근되는 방식은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긍정과 부정의 모순을 통해 나온 서양과는 다르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싶다. 플라톤적 사유는 철학의 과제를 유한한 것(peras)과 무한한 것(apeiras) 사이의 대립 속에서 무한한 것을 경계 짓는 형태를 찾는 것으로 설정했다. 젊은 셸링은 이 탐구의 산물을 유기적 형태로 규정했다. 즉, 비가시적인 것은 비극적 논리에 내재된 화해불가능한 긴장과 모순으로 나타난다.[33] 이 논리는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라기보다는 스타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예술적 경험의 다양성에 대한 내 논문의 핵심이다. 이어서 나는 다소 다른 역학과 작동으로 생각해야 하는 도가적 논리로 넘어갈 것이다. 도가 논리에서는 현전과 부재와 같은 대립이 어떤 작용의 시작 부분에 제기되지만 불연속성으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논리적 작용은 상상력이든 이성이든 어떤 형태의 폭력에도 의존하지 않고 두 가지를 모두 긍정함으로써 반대되는 두 부분을 조화시키려고 애쓴다.
현대 미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중국 산수화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부재하는 것을 감각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더 높은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 이 부재는 도(道), 즉 ‘길’ 또는 ‘태허’(the great void) 등 원하는 대로 이름을 붙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설명되지 않은 이 과정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물론 중국 회화에는 기(氣, ch’i, 숨결), 신(神, shen, 정신), 형(形, xing, 형태), 상(象, xiang, 이미지 또는 현상), 의(意, yi, 의미 또는 감각) 등 회화의 규범을 설정하는 다양한 목록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도(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셴(shen, 神似[신사], shen si,)은 싱(xing, 形似[형사], xing si)을 닮았다는 의미보다, 이(yi, 寫意[사의], xie yi)는 싱(xing, 寫形[사형], xie xing)을 닮았다는 의미보다 더 우선순위가 높다. 도(道)와의 관계는 무엇이며 이러한 관계의 역학 관계는 무엇인가?
중국 회화에 상(figure[전경])이 있는 한, 형태도 존재하지 않는가? 이러한 형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morphē라고 부르고 플라톤이 eidos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게 들릴 수 있지만, 중국 사상에서 형상(figuration)의 개념은 다소 다르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형태’(form)를 번역할 때 싱(xing, 形)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싱은 현대적 의미의 ‘형태’가 아니며, 어원적으로 싱은 씨앙(xiang, 象)의 동의어이다.[34] 씨앙은 ‘코끼리’, ‘현상’, ‘인상’ 그리고 ‘닮음’으로 번역될 수 있다. 모종삼은 씨앙의 세 가지 의미를 첫째 현상(現象之象), 둘째 ‘닮음’(法象之象), 마지막으로 자연현상의 관찰을 통해 법칙을 정립하는 유추적 방법(垂象取法[수상취법])을 지칭한다고 설명한다.[35] 『역경』의 고대 주석서인 시서(Xi Ci, 系辭[계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늘에서 상(phenomenon)으로 나타나는 바,
땅에서 구체적인 형(form)을 취한다.
(在天成象,在地成形)
하늘은 영적 존재를 낳고
성인은 그들을 따른다.
(天生神物,聖人則之)
하늘에서 상[象]이 내려와 길흉화복을 나타내면
성인은 신성한 64괘를 통해 이를 모방[象]한다.
(天垂象,見吉凶,聖人象之)[36]
첫 번째 구절은 씨앙의 첫 두 가지 의미인 “하늘의 상과 땅의 구체적인 형”에 해당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구절은 세 번째 것에 상응한다. 즉 이러한 상들의 해석과 그 의미를 나타낸다. 여기서 세 번째 것이란 하늘과 인간 세계(ren jian, 人間)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더 정확하게 나타낸다. 특히 씨앙은 상과 인상(impression) 사이에 위치하며, 지각자와 무관한 어떤 현상이 아니라 닮음에 따라 지각되는 어떤 것이다. 이 닮음은 주체의 판단을 요구하는데, 주체는 나중에 우리가 감응(resonance)이라고 부르는 것의 매개체이며, 이는 조셉 니덤이 까이응(gan ying, 感應)을 번역한 말이다. 감응은 문자 그대로 ‘느낌’ 및 ‘반응’이다.
『역경』은 물리적 현상과 그것의 정신적 대상 사이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본문의 첫 번째 64괘 건(qian, 乾)은 들판에 용이 나타난다는 뜻으로, 위대한 사람을 본다는 의미이다(見龍在田, 利見大人). 이는 실제로 밭에 있는 용이 아니라 밭에 있는 용의 상(xiang, 象)을 본다는 것이다. 장자가 “야생마, 먼지가 생명체의 호흡에서 나온다(野馬也,塵埃也,生物 之以息相吹也)”고 말한 것처럼 실제 야생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씨앙을 말하는 것이다.[37] 씨앙은 구체적인 씽[형]과 구별된다. 씨앙은 상과 인상 사이에 있다. 그래서 인상은 <150>인썅(印象, “기입된 샹[yin]”)으로도 번역된다. 당나라 역사가 장언원(張彥遠, 815~877년경, Zhang Yanyuan)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대상[象物]의 상(象)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형[形似]의 유사성을 지향해야 하는데, 이 형식적 유사성은 기본적인 개별성[kuqi, 骨氣]으로 구성되며 기본적인 개별성과 형식적 유사성은 모두 예술가의 주체에 관한 개념에서 비롯되며 궁극적으로 붓질에 기초한다.[38]
씨앙과 씽은 분리할 수 없다. 그러나 어원적으로는 둘은 동의어이지만 씨앙안 씽으로 환원될 수 없다. 따라서 노자가 “위대한 상에는 형이 없다[大象無形]”고 말할 때, 특히 베르그송적 의미의 이미지 개념을 고려할 때 줄리앙처럼 씨앙을 ‘image’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39] 여기서 우리는 씨앙이 단순한 형태(form)가 아니라 중국 회화에서 시각 언어의 핵심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곽사(Guo Si, 북송시대)가 그의 아버지 곽희(Guo Xi, 郭熙, 1000~1087)의 이름으로 쓴 산수화에 관한 고전 이론 논문 『임천고치』(林泉高致, Lofty Messages of Forests and Streams)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물과 산의 구름의 기[ch’i, 氣]는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데, 봄에는 얼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여름에는 굵고 무성하며, 가을에는 희박하고 느슨하며, 겨울에는 어둑하면서 가늘어진다. 그림을 그릴 때는 큰 상(image)을 보는 것이지, 어떤 묘사된 형(form)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구름의 기는 활기차게 된다.[40]
<151>
<152>여기서 곽희는 산수화에서 형태 새기기를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대신 구름의 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씨앙을 보여주기를 경주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활성화인가? 형태만이 아니라 그 움직임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예는 중국인들이 형식적 부과를 회화의 기본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범주인 씨앙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형이 그것의 윤곽(즉, 형태)과 명확하게 구별된다면, 씨앙은 존재하지만 정확한 재현으로 파악할 수 없는 흐릿함(meng long, 朦朧)을 나타낸다. 즉, 거기에는 그것이 재현하는 것에 관한 어떤 절대적인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없다.[41] 회화에서는 이것을 인웬(yin yun, 氤氳[인온])이라고 부르며, 흔히 ‘안개 낀 장면’이라고도 하지만 원래 음(陰)과 양(陽), 붓과 먹의 호흡이 만나는 것을 나타낸다. 카오스는 인(氤)과 온(氳)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그것이 카오스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42]
『도덕경』 21장에서 노자는 이 흐릿함을 황후(huang hu, 恍惚[황홀])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무형적이고 모호하다’는 뜻이다.
어떤 사물로서 도(道)는 어둑하고, 흐릿하며 불분명하다. 불분명하고 어둑하지만 그 안에는 이미지[씨앙]가 있다. 어둑하고 불분명하지만 그 안에는 어떤 사물[wu]이 있다. 흐릿하고 어둡지만 그 안에는 빛나는 어떤 것[jing]이 있다. 이 빛나는 것은 완연한 정수이며, 그 안에는 시금석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43]
<153>도는 어떤 실체로서 파악될 수 없다.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해도, 그것은 모호하고 무형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근거[배경]가 되는 무언가를 전달하며,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앞서 인용한 곽희의 구절은 노자의 “위대한[큰] 형상(image)은 형체(form)가 없다”는 말을 해석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위대하다는 것(또는 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자는 『도덕경』 41장에서 “큰 사각형에는 모서리가 없고, 큰 그릇은 완성되기까지 오래 걸리며, 큰 음은 소리가 희박하다[大方無隅, 大器晚成, 大音希声]”고 말한다.[44] 도는 da(大, ‘크다’)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다. ‘형태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시야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뜻이다. 대신, 우리는 이 헤아릴 수 없는 규모 안에서 살아간다. 장자는 「자유롭고 방만하게 거닒」(씨아오 야오 유, 逍遙遊[소요유])의 첫 장에서 이 규모의 문제를 다루면서 모든 규모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무엇이 가장 큰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규모를 추구하는 것은 지각과 상상을 넘어서는 규모에 대한 우리의 무지에 속박된다. 따라서 씨아오 야오(逍遙)가 된다는 것, 즉 자유롭고 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은 극단을 추구하는 것의 쓸모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함은 여전히 우리의 존재 방식을 규정하는 부재하는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무지와 잘못된 자기만족 속에서 살지 않으려면 우리가 추구하는 위대함이 항상 상대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그래서 가장 위대한 것을 추구할 때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만물제동론’(qi wu lun, 齊物論)의 철학적 토대이다. 이는 모든 존재가 똑같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존재와 비교할 수 있는 존재가 없는 한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인식해야만 우리는 가장 큰 존재인 동시에 가장 작은 존재인 도에 가까워질 수 있다. 장자가 말했듯이 “천지는 나와 동시에 태어났고, 만물은 나와 하나다.” 가장 크고 큰 것을 드러내고, 관객의 시야를 넘어 위대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 바로 자아의 유한성을 무한성으로 열어주는 것, 즉 항상 형태의 구속을 벗어나는 것이 산수화의 목표이기도 하다.
<154>이런 의미에서 물질과 형태의 결합으로 물리적 사물이 생겨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으로는 예술과 기술에 대한 중국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이라는 사원인론도 마찬가지이다. 네 가지 원인은 고대 그리스적인 생산의 경험(poiesis)의 기본이지만, 중국 철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내가 비선형적 인과(non-linear cause)라고 부르는 것에 따라 예술 작품에 대한 또 다른 경험으로 모험을 떠나야 한다. 중국인들은 개체화의 원리로서의 질료형상론 없이, 양(陽)과 음(陰), 건(乾)과 곤(坤)을 두 가지 근본적인 원인으로 삼는다. 음과 양은 서로 상반적(oppositional)이지만,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기 때문에 적대적(antagonistic)이지 않다. 이들의 대립은 모순과 화해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속성으로 이어진다.
§14.2 현의 논리-상반적 연속성
Shan과 shui, 즉 ‘산’과 ‘물’은 이미 양과 음, 즉 산은 양이고 물은 음이라는 상반된 연속성을 구성하고 있다. 중국에 상반적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어디에나 편재하는 것으로, 이것이 서양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산은 굳고 단단한 반면 물은 부드럽고 유연하다. 불교 화가 왕유(王維, Wang Wei, 701-761) - 채색 산수화에서 수묵 산수화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 는 상반 또는 모순을 통해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기법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숲을 그릴 때 “멀리 있는 것은 느슨하고 고르게, 더 가까이 있는 것은 높고 울창하며, 그 잎이 있는 가지는 부드럽고, 잎이 없는 가지는 딱딱하게”라는 식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반성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나열할 수 있다.
멂 대 가까움(遠 vs. 近)
하늘 대 땅(天 vs. 地)
동쪽 대 서쪽(東 vs. 西)
있음 대 없음(有 vs. 無)
<155>맑음 대 흐림(清 vs. 濁)
손님 대 주인(賓 vs. 主)
많음 대 적음(多 vs. 少)
추상 대 구체(虛 vs. 實)
건조 대 습함(乾 vs. 溼)
짙음 대 옅음(濃 vs. 淡)
편평하고 느슨함 대 높고 빽빽함(疏平 vs. 高密)
뿌리처럼 긴 것 대 줄기처럼 곧은 것(根長 vs. 莖直)
드묾 대 무성함(節多 vs. 扶疏)
부드럽고 섬세함 대 단단하고 강함(嫩柔 vs. 硬勁)
왕유 이후 거의 천 년이 지난 후의 화가 석도(石濤, Shitao, 1642-1707)의 가장 철학적인 논문 중 하나를 보면, 그림의 역동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상반의 편재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미 고체 붓과 액체 먹의 대립을 언급하는 ‘붓과 먹’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은 상반적인 것들을 확인할 수 있다.
앞 대 뒤(反 vs. 正)
옆 대 비스듬히(偏 vs. 側)
모이다 대 흩어지다(聚 vs. 散)
가깝다 대 멀다(近 vs. 遠)
내부 대 외부 (內 vs. 外)
비어 있음 대 차 있음 (虛 vs. 實)
끊어짐 대 이어짐 (斷 vs. 連)
고조 대 저하 (層次 vs. 剝落)
식별가능 대 식별불가능 (豐致 vs. 飄渺)
배아 대 뼈대 (胎 vs. 骨)
개방 대 폐쇄 (開 vs. 合)
본체 대 작용 (體 vs. 用)
형태 대 기운(形 vs. 勢)
굽음 대 세움(拱 vs. 立)
웅크림 대 도약(蹲 vs. 跳)
가라앉음 대 솟음(潛伏 vs. 衝霄)
이러한 상반된 연속성은 『역경』에서 하늘과 땅의 상징인 건과 곤의 관계 안에 이미 존재한다. 그것은 노자가 『도덕경』에서 도의 핵심 요소로 <156>삼은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부정적인 힘과 긍정적인 힘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에 반대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이 [긍정과 부정의] 과정의 계기를 ‘현전’이라고 부른다. 도덕경에서는 “상반(혹은 되돌아감)은 도(道)의 작용이다”[反者道之動]라고 한다. 도의 역동성은 상반적 힘에 의해 작동하며, 이는 어떤 첫째 원인이라는 의미보다는 모든 움직임과 모든 존재 방식에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불가결하다. 위에서 언급한 왕유와 마찬가지로, 『도덕경』에 나오는 상반적 연속성을 다음과 같이 몇몇 나열할 수도 있다.
도/덕 (道/德)
있음/없음 (有/無) (2장)
정적/동적 (靜/動) (15장)
흑/백 (黑/白) (28장)
수컷/암컷 (雄/䧳) (28장)
명예/불명예 (榮/辱) (28장)
강하다/약하다 (强/弱)(36장)
응축/팽창 (歙/張) (36장)
시들다/번성하다 (廢/興) (36장)
거기/저기 (彼/此) (38징)
음/양(陰/陽) (42장)
능숙하다/서툴다 (巧/拙) (45장)
차다/비다 (盈/冲) (45장)
구부리다/늘리다 (屈/直) (45장)
완결/누락 (成/缺) (45장)
이익/손실 (益/損) (48장)
흉함/길함 (祸/福) (58장)
기이함/바름 (奇/正) (58장)
선/악 (善/妖) (58장)
큼/작음 (大/小) (61장)
삶/죽음 (生/死) (76장)
단단함/부드러움 (剛/柔) (78징)
곧음/거스름 (正/反) (78장)[46]
<157>『도덕경』 2장은 이러한 상반적 연속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온 세상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움으로 알아 보지만 이것은 추한 것일 뿐이다.
좋은 것을 좋음으로 인식하지만 이것은 나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를 낳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이 서로를 보완하며,
긴 것과 짧은 것이 서로 상쇄하고,
높은 것과 낮은 것이 서로 간에 기울고,
음과 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전과 후가 서로 따른다.[47]
이와 같이, 음과 양은 물질에 형태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생[기원]으로서의 재귀적 과정을 구성한다. 이로써 우리는 이 발생을 전경과 배경 사이의 상호 관계로 이해한다.[48] 전경이 배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면 스스로 소진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악의 근원이 되는 초월적 어리석음을 낳을 수도 있다. 비극적 논리 역시 재귀 논리의 한 형태이며, 도가적 논리와는 달리 화해할 수 없는 대립, 즉 존재와 무, 삶과 죽음의 상호 배타성과 같은 대립적 불연속성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중국적 사유에서 상반적 연속성을 개체화의 원리로 파악할 수 있는가? 『도덕경』에서는 “천하의 만물은 유[yu, 존재有]에서 나오고, 유는 무[wu, 무無]에서 나온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라는 구절을 읽게 된다. 42장 후반부에는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萬物]”라고 적혀 있다. 노자는 왜 완성을 의미하는 4가 아닌 3에서 멈추거나 움직임/원소(목, 화, 토, 금, 수)의 수인
<158>
<60>5에서 멈추지 않았는가? 3이라는 숫자는 고대인들이 단순함을 좋아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복잡함을 다루지 못했다는 뜻인가? 유(有, ‘가지다’having는 뜻으로 흔히 ‘있음’being으로 번역됨)가 무(無, ‘가지고 있지 않음’not having이라는 뜻으로 흔히 ‘없음’nothing으로 번역됨)와 반대되는 말인데, 유 역시 무에서 유래했다면 어떻게 그런 뜻이 나올 수 있었는가? 이 상반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특히 위진 시대(220-430년)에 나타난 도교에 대한 해석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이 사상에 대한 통념적인 해석은 도의 논리적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49] 여기서 나는 위진 시대의 사상이 유가와 도가의 화해를 역사적 과제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전개된 중국 사상에 뿌리를 내린 현(玄, xuan)이라는 논리를 명료화했음을 보이고자 한다.
『도덕경』의 첫 번째 장에서, 우리는 현의 논리와 그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라고 주장하면서 시작하는 바를 알고 있다. 여기서 말해질 수 있는 것(ke dao, 可道)<160>과 진정한 도(chang dao, 常道)를 구별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정한 도가 아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무: 천지의 기원. 유: 만물의 어머니. 욕망의 비움. 신비의 인식. 그 비밀을 관찰하기 위해 욕망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발현을 관찰하기 위해 욕망을 비운다. 이 두 가지의 근원은 같지만 이름은 다른데, 둘 다 현으로 표기된다 - 현지우현[玄之又玄, 현으로 와서 다시 현으로 돌아간다] - 이것이 모든 신비로 들어가는 문이다.[50]
고대 텍스트에는 구두점이 없기 때문에 번역자가 그것을 어디에 넣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처음 두 문장은 “이름 없는 것은 천지의 시작이었고, 이름 있는 것은 무수한 생명의 어머니이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무는 이름 없음이고, 유는 이름 있음이다. 유(有)와 무(無)는 ‘있음’[有]과 ‘없음’[無]이라는 두 가지 기본 범주로,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지만 현(玄)이라는 동일한 근원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현은 (D.C. 의 번역도 포함하여) 종종 ‘신비’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검은색 또는 ‘어둠’을 의미하기도 한다. 진영첩(Wing-tsit Chan)은 현을 ‘깊고 심오한’으로 번역했다. 현지우현(玄之又玄)을 진은 ‘더 깊고 심오하다’로, D. C. 라우(D.C. Lau)는 ‘신비 중의 신비’로, 미첼은 ‘어둠 속의 어둠’으로 번역했다. 진의 번역은 부분적으로 위진 시대의 학자 왕필(226~249)의 해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노자미지례략』(老子微旨例略)(A Brief Exposition of the Essence of Laozi’s Teaching)에서 현은 ‘깊다’는 뜻이고 도는 ‘크다’는 뜻이라고 썼다. 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놓치지 않으려면 왕필의 해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노자는 왜 “현지우현(玄之又玄, xuan zhi you xuan)”이라고 말했을까? 『도덕경』의 다른 구절에서 저자는 도에 이름을 붙일 때마다 곧바로 그것이 도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실용적인 목적으로만 <161> 사용된다는 점을 강조한다.[51] 현은 일반적으로 명사 또는 형용사(‘신비한’, ‘어둠’, ‘깊고 심오한’)로 해석되어 왔지만, 현지우현에서 두 개의 현을 사용하면 ‘신비한’ 또는 ‘어두운’으로 그 의미를 강화하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북경대학장서한죽서노자(北大漢簡)에서는 “玄之有(又)玄之”[xuan zhi you xuan zhi]의 끝에 ‘之’를 추가하여 현을 형용사나 명사가 아닌 동사로 표기하고 있다.[52] 따라서 같은 구문에서 두 개의 현은 신비롭거나 어둡다는 느낌을 강화하는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순환적인 움직임을 형성하는데, 이를 재귀적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현은 실제로 무와 유에 있어서 세 번째 역할을 한다. 여기서 나는 ‘현지우현’에 대립을 해소하고 합일을 이루는 재귀적 논리가 담겨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 해석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도(道)와 현(玄)의 명명 관계를 설명한 왕필의 『노자미지례략』를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이름’은 객체를 정의하는 것이다. ‘지칭’(designation)은 어떤 추론된 스타일이다. 이름은 객체에서 탄생한다. 지칭은 주어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근거하지 않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서 그것을 다룰 때, 그[노자]는 그것을 ‘도’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미묘함이 없는 것으로서 그것을 찾을 때, 그는[노자]는 그것을 ‘현’이라고 부른다. 미묘한 것은 현에서 나오고, 다양성(the many)은 도에 근거하며, [노자의 말에 따르면] “도는 다양한 것들을 생성하고 기른다.” [즉, 그 근원을] 막지 않고 [그 본성을] 가리지 않고 실체들(entities)의 본성에 스며든다는 말은 도를 말하며, [노자의 이어지는 말에 따르면] “그것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그것에 대한 특수한 노력]이 없고, [그것들이 행동하는 동안] 그것들을 의존하게 만들지 않으며, [요컨대] <162>그것들이 성장하는 동안에는 [그것들이 성장하는 것에 대한] 지배가 없다”는 것이다. 즉 [그것들로부터의] 어떤 수용은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지배는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수안-으로부터 나오는 수용성이다. 현은 가장 심오한 스타일이다. 도는 가장 위대한 명칭[지칭]이다. 이름과 표식은 형태와 현상에서 탄생한다. 명칭과 스타일은 ‘관심을 가짐’과 ‘탐색’에서 비롯된다.[53]
왕필은 ‘명명’(命名)과 ‘지칭’을 구분한다. 명명은 객관적이고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고유명사인 반면, 지칭은 주관적이며 한 사람 또는 소수 그룹에만 해당될 수 있다. 이 구분은 고틀롭 프레게(Gottlob Frege)가 ‘의미’(Sinn)와 ‘지시체’(Bedeutung)라고 부른 것을 통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지시체인 금성을 ‘샛별’과 ‘저녁별’로 부를 수 있으며, 이들 각각에는 고유한 의미가 있다.[54] 만물은 도를 따르지만 그 미묘함은 현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어떤 이름이나 명칭으로도 도를 완전히 전달할 수는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노자는 무와 유는 같은 출처에서 왔지만 이름이 다르다고 말한다. 출처를 공유하는데 왜 다른 이름이 필요한가? 우선 논리적 필연으로부터 그러하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립은 필연적이다. 즉, 유가 있으면, 무가 있어야 한다. 유만 있으면 도의 논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왕필의 노자, 『주역』(Zhou Yi) 해석은 이러한 전제 조건에서 시작된다. 왕필이 쓴 『계사』(繫辭, Xi Ci) 요약 주석에서 “무는 <163>자기-해명적인 것이 아니라 유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55]라고 썼다. 무와 유를 서로 다른 두 극으로 설정하면. 우리는 형식적인 논리를 넘어 만물에서 그것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무는 배경화(grounding[근거화])의 과정이고 유는 현상화의 과정이다. 나무는 줄기, 가지, 잎을 가지지만 땅(ground)도 필요하다.
위진 철학의 역사학자 탕용동(湯用彤, Tang Yongtong)은 왕필의 사상에서 우주론에서 본체론(本體論, ben ti lun)으로 전환하여 보다 정교한 논리로 나아간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본(Ben, 本)은 ‘땅’(ground[배경, 근거])을 뜻하고, 체(ti, 體)는 ‘몸’을 뜻한다. 본체론은 근거와 현상의 관계에 대한 이론이다. 그러나 영어로 ‘ontology’라고 표현하는 것은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현의 논리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든다.[56] 이 논리가 대극성(polar)을 띠는 한 - 그리고 그러한 대극성이 연속적이고 따라서 관계적이라는 한 - 그것은 이미 그 공식의 핵심에 실체가 아닌 관계를 배치하고 있다. 무와 유 사이의 관계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무는 어머니이고 유는 자식이므로, 무가 유를 낳는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왕필이 의도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57] 『도덕경』 제1장에 대한 왕필의 주석에서 모성을 가리키는 것은 유이고, 이 둘로부터 현이 출현한다.
‘둘’은 발생[기원]과 모성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모두 현에서 유래했다. 그것들은 다르게 행동하기 때문에 다른 이름을 가진다. 처음에 있는 것을 ‘발생[기원]’이라고 하고 끝에 있는 것을 ‘어머니’라고 한다. 현은 ‘어둡고 모호한’, 무이면서 침묵 속에 머무르는 존재이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바, <164>이곳이 모성이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이다. 따라서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으로 불리워진다. 현은 완전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현이라고 부르면 이 명칭은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현으로 지칭[謂]할 때, 우리는 그것의 그 이름[名]을 정당화하지 못하는 이중성 을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현지우현(玄之又玄, xuan zhi you xuan)으로 부른다. 모든 미묘함이 여기에서 나오므로, 이것이 모든 미묘함의 입구다.[58]
나는 위 인용에서 루돌프 G. 바그너(Rudolf G. Wagner)의 왕필 번역(이 번역은 현을 ‘어둡다’로 번역한다)을 수정했다. 또한 우리는 바그너의 번역이 ‘지칭하다’(謂)와 ‘명명하다’(名)의 차이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으나, 현지우현(玄之又玄)과 현을 구별하는 번역의 차이를 강조하여 유와 무의 이중 과정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왕필에게 현지우현은 더 신비롭고, 더 어둡고, 더 깊고, 더 심오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과정, 즉 발생[기원]의 과정과 발생의 과정을 구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에서 시작하여 <165> 유로 이어지고 다시 무로 돌아오는 어떤 단순한 원을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는 매 순간 유를 지탱하는 근거(ground)로서, 또는 유를 자기 폐쇄와 한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결여의 활동으로서 개입한다. 무는 허무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그 근거이기도 하다. 무는 존재론적 개념도 아니고 불이나 물과 같은 물질적 실체도 아닌데, 무는 이미 유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는 결코 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무는 유와 함께 현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와 유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를 제시할 수 있지만, 비극적 논리의 조건인 존재와 무 사이의 존재론적 불연속성을 무와 유에 적용할 수 없기 때문에 서양 존재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신 도가적(Daoist) 논리가 어떻게 상반적 연속성에서 출발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우선, 무는 유와 대립한다. 그것은 유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고 유가 전개될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허무(nihility)이다. 그것을 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유의 발생[기원]이 유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헤겔이 말한 악무한, 동질적인 반복, 즉 무한정(ad infinitum)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의 부정성은 소거(cancelation)라는 의미에서 유의 부정이 아니라, 유가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유를 넘어서는 행위이다. 너머라는 것은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와 확장을 의미한다. 그것이 유와 대립하고 유 너머에 있는 한, 그것은 또한 유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무는 도저히 상상불가능한 의미에서 유이다.
이러한 활동 과정 안에서, 부정성과 대립은 근거[배경]에 대한 탐색으로 변화한다. 이 근거는 즉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 자체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논리를 염두에 두면 노자와 장자의 무용지용(wu yong zhi yong, 無用之用)에 대한 논의를 이해할 수 있다. 무용한 것은 유 안으로 무의 개입으로, 언뜻 보면 유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부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의 잠재력을 더 잘 실현할 수 있는 다른 용도를 모색할 수 있다. 『장자』(莊子)에서, 왕이 혜자(惠子)에게 박씨를 주었는데, 그 박에서 자란 박은 너무 무거워서 물통이 될 수 없고 너무 커서 국자도 될 수 없었기에 <166>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박을 부숴버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장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제 자네에게 다섯 석의 박이 있거든 어째서 큰 배를 만들어서 강이나 호수에 띄울 생각을 하지 않고 그것이 납작하고 평평하여 소용이 없다고 근심만 하는가?[60]
무용은 용의 부정이지만, 이러한 부정은 이전 용법에 의해 가려진 다른 관점도 보여준다. 무로부터 유가 나온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creatio ex nihilo)는 의미가 아니라 무가 가진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무 자체는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어떤 전체의 한 부분이다. 무는 발생하고 부정하지만 발전하지 않는다. 유의 원초적 부정으로서 무는 도의 역동성을 불러일으킨다. 노자는 “반대(또는 되돌아감)는 도의 움직임[反者道之動][反者道之動]”[61]이라고 말했는데, D. C. 라우는 이를 “되돌아 가는 것이 도[道]가 움직이는 방식이다”라고 번역했다. ‘반대’와 ‘되돌아감’이라는 ‘반’(反)의 이중적 의미는 우리가 설명하고자 하는 재귀적 논리를 완벽하게 포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노자 해석에 있어서 특정한 고정 관념, 즉 왕필이 도 개념을 모든 존재의 근거로서 무 개념으로 대체했다고 보는 귀무론(貴無論, 문자 그대로 ‘무를 우선시하는 논의’)에 반대하여 왕필을 옹호해야 한다. 이러한 철학사 연구의 전통에 따르면 장자의 주석가인 곽상(郭象, 252-312)은 무에 반대하여, 숭유론(崇有論, 문자 그대로 ‘유를 우선시하는 논의’)을 주장한다. 그러나 후자는 정당화될 수 없는데, 왕필과 곽상 모두에 있어서 도에 대한 이해의 핵심은 무와 유 중 어느 것도 일차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현의 논리를 통해 특징지을 수 있는 재귀적 사유이기 때문이다.[62] 이들의 차이점은 오히려 인과성과 <167>생성의 역동성에 있다. 왕필은 모든 것은 존재이유가 있다(物無妄然,必由其理)며 필연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필연성은 인과적이거나 자연법칙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재귀적(recursive) 본성(反本/復)에서 비롯된 것이다. 곽상은 우발성(contingency)을 강조한다. 즉 경험적 규칙이 반드시 생성을 해명하는 것은 아니며, 이는 규칙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발성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自然無因,不為 而自然).[63] 오히려 두 주석가는 본질적으로 일치하며, 단지 재귀적 사고의 다른 단계에 중점을 두고 있을 뿐이다. 곽상에게서 유가 강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왕필에게서 무가 더 강조되는 이유는 곽상이 무로부터 유가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무가 ‘자발성’ 또는 ‘자기-원인’일 때 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곽상이 쯔란(ziran, 현대 중국어에서 ‘자연’을 번역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라고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64]
그러나 무나 유를 도와 동일시하는 것은 부당하다. 도란 상반적 연속성과 통합의 역동성이다. 이 역학은 일반적으로 분리와 통합을 동시에 의미하는 순환적인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대한 이미지(Da xiang)은 다른 ‘덜 위대한’ 이미지(상, xiang)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다른 규모의 존재자 없이는 위대한 이미지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평범한’ 이미지를 제거한다고 해서 ‘위대한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왕필은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말했다.
<168>형태를 갖춘 상(image)은 ‘위대한 상’이 아니다. 음을 취한 소리는 ‘위대한 소리’가 아니다. 그러나 네 가지 상이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면 ‘위대한 상’은 빛을 발할 것이 없고, [따라서] 다섯 가지 소리가 음을 취하지 않는다면 ‘위대한 소리’는 생겨날 것이 없다. 네 가지 상이 형태를 취하고 존재자가 사람들이 그에 의해 지배될 [다른] 것이 없을 때, 위대한 상은 빛을 발한다. 다섯 소리가 음을 띠고 정신이 그것들을 방해하는 [다른] 것을 가지지 않을 때, 위대한 소리가 일어난다.[65]
도(道)는 어떤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본성을 존중하고 성장을 촉진하여 존재의 자기-현실화나 그것의 본성의 전개를 막지 않는다(不塞其原,不禁其性). 우리는 이 운동이 우주의 일반적인 역동성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알 수 있으며, 왕피은 이를 통해 『역경』을 해석했다. 왕필은 스물네 번째 64괘 복(fu, ䷗, ‘되돌아 옴/되풀이 함, 復)에 대한 해설에서 움직임과 멈춤은 더 큰 움직임의 일부일 뿐이므로 멈춤은 움직임과 대립하지 않으며, 말하기는 침묵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유가 무로 되돌아 가는 것처럼, 모든 움직임은 유의 본(本, 땅)으로 돌아가므로, 모든 움직임이 멈출 때가 올 것이다.
복(Fu, 되돌아옴)에서 우리는 천지의 바로 그 마음과 정신을 볼 수 있다! 돌아간다는 것은 “땅[ben, 本]으로 돌아가다”라는 뜻으로, 천지에서는 땅을 정신/마음으로 간주한다. 활동이 멈출 때마다, 고요가 찾아오지만, 고요가 활동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말이 멈추면 침묵이 찾아오지만 침묵이 말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천지는 비록 매우 광대하여 천둥에 의해 활동하고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무수히 많은 <169>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수히 많은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해도, 천지의 본래 실체는 완벽하게 정지해 있는 비존재(nonbeing)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지상의 활동이 멈춰야만 천지의 마음/정신이 드러날 수 있다. 만약 천지에 이 마정신/마음 대신 존재가 있었다면, 사물들의 모든 다른 범주에 존재가 부여되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66]
활동과 고요함, 말과 침묵 사이의 대립에 따라 가능해지는 어떤 움직임이 있지만 왕필은 이러한 대립이 절대적이지도 불연속적이지도 않다고 강조한다. 대신 침묵과 말 사이의 명백한 대립은 둘 모두가 의미를 획득하는 언어의 본질을 드러낸다. 둘 사이의 대립은 되돌아감(reversion)에 의해 해소되기 때문에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의 반전은 대립에 의해 가동된다.
또한 이 대립과 통합 - 노자가 현지우현(玄之又玄)이라고 부르는 바 - 둘 모두로 조성된 운동은 유교와 도교의 조화를 시도한 위진 지식인들 사이에서의 사상적 형태를 보여준다고 주장함으로써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고전 학자들 사이에서는 위진현학(Wei-Jin Xuanxue)이 명명(그리고 질서)(명교名教, ming jiao)과 자연(自然, zi ran)을 조화시키려 했다는 데 동의한다. 유교는 사회의 질서와 명명에 관심이 있는 반면, 도교는 의례와 질서를 버리자고 제안한다.[67] 이 명백한 대립은 철학자들에 의해 <170>해결되어야 했다. 이 명백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전략은 대립을 더 큰 통합하는 운동의 한 계기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왕필은 무/유(wu/you, 無有), 본/말(ben/mo, 本末), 체/용(ti/yong, 體用), 도/기(dao/qi, 道器)의 네 가지 대립을 제시하고 유가와 도가의 대립에서 그랬던 것처럼 재귀적 운동으로안에서 그것들을 조화시키자고 제안했다. 왕필과 배휘(裴徽, Pei Hui)의 대화에서 배휘는 왕필에게 공자와 노자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묻는다.
배휘: 무는 만물의 근원이라고 하지만, 성인은 그것을 언급하고 싶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노자가 내세웠던 이 무는 정확히 무엇입니까?
왕필: 성인은 무를 경험하지만 무를 표현할 수 없으므로 말하지 않았지요. 노자는 무에 대해 말했기에 그가 무에 대해 말한 것은 충분하지 않은 겁니다.[68]
이 대화는 왕필에게 공자가 노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학자들이 자주 인용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대화의 핵심은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에서 무(wu)는 존재(being)도 없음(nothing)도 아니라는 것이다. 왕필은 공자가 체(體)를 경험하고 체현한다고 주장한다. 체는 문자 그대로 ‘몸’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동사로 사용되어 경험하고 체현한다는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그러나 무는 완전히 표현될 수 없다. 공자는 무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한 반면, 노자는 무를 명확하게 표명한다. 『논어』에는 공자가 무언가, 특히 건강과 인간 본성의 원리를 표명하는 데 주저함을 표현한 <171>구절이 있다.
공자가 말했다. “나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자공이 말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면 우리 제자들은 무엇을 기록해야 합니까?” 하였다.
공자가 말했다. “하늘이 말하느냐? 사계절이 제 길을 가고 만물이 끊임없이 생성되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69]
자공이 말했다. “선생님의 원리들과 그것에 대한 평범한 설명들에 대한 선생님의 사사로운 말씀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과 하늘의 도에 대한 말씀은 들을 수 없군요.”[70]
공자가 표현하지 못한 하늘의 원리는 무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71] 공자는 비록 그것을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경험할 수 있고 따라서 그것을 알 수 있다. 확실히 하늘의 원리에 대해 실제로 알고 경험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 공자의 정신을 읽을 수는 없지만, 그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도덕경』에서는 명교(명명하고 질서를 세우는 것)의 대표자인 공자 대신 자연(사물의 본성을 따르는 것)을 장려하는 인물인 노자가 무를 설명하지만, 그의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으나, 여전히 필요하다. 이제 무(표명될 수 없는 경험)와 유(표명)의 대립이 필요한 것으로 확증된다. 극적으로 노자는 공자를 옹호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무(wu, 無), 본(ben, 本), 체(ti, 體), 도(道)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이름과 질서가 필요하다는 점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탕용동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우리를 결론으로 이끈다.
<172>현 이론가들[위진현학자들]은 유가의 성현들은 무를 경험하고 도가들은 상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제안한다. 성인는 무를 체현하기 때문에 유가 고전에서는 삶의 본질과 하늘의 도를 이야기하지 않고, 도가 상 너머에 있기 때문에 노자와 장자는 현지우현[玄之又玄]을 옹호한다. 유가의 성현들이 체현한 것은 도가들이 제안한 것과 동일하며, 현 학파[위진현학파]와 유가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72]
유교와 도교가 통합된 것은 현의 논리를 통해서이다. 위진 시대는 중국 사상에서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시기 중 하나다. 한 왕조의 통치철학인 유교가 소진되고 도교가 유교와 화해하는 역할을 맡게 된 시기인 것이다. 특히 쿠마라지바(Kumārajīva, 344~413)가 다양한 불교 고전을 중국어로 번역하고, 특히 나가르주나(Nāgārjuna)의 중관학파(中觀學派, Mādhyamaka)의 교리(2세기 경)를 번역하면서 불교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는 산수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시기의 초기 회화 이론가 중 한 명인 종병(宗炳, Zong Bing, 375-444)의 글을 통해 이 서로 다른 학파들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내 생각에 중국 사상에서 유교, 도교 또는 불교를 서로 분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위진 시대 이후 순수한 중국 사상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선적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상반적 연속성은 산수화의 핵심이다. 6세기 이론가 사혁(Xie He, 謝赫)는 회화의 여섯 가지 원칙을 제안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것은 기운생동(氣韻生動, ch’i yun sheng dong)으로, 흔히 ‘생명력’ 또는 ‘생명 에너지’로 표현된다.[73] 그러나 이것은 문자 그대로 ‘생명력 있고 활동적인’이라는 뜻의 ‘생동’만을 설명하기 때문에 뛰어난 <173>철학적 해석은 아닐 것이다. 역사학자 서복관(徐復觀, Xu Fuguan, 1904-1982)은 기(氣, ch’i, 에너지)와 운(韻, yun, 리듬)을 대립쌍으로 이해하여 기를 “예술 작품의 양(陽)의 아름다움”으로, 운을 “음(陰)의 아름다움”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했다.[74] 서복관은 기와 운을 양과 음으로 바꾸어 활력을 두 가지 상반된 힘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미 형호(荆浩, Jing Hao)의 『필법 노트』에서 “기, 정신/마음과 붓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상을 결정적으로 표현한다. 운은 흔적을 숨겨서 상을 보이게 하고 칙칙하고 평범하지 않은 효과를 만들어낸다.”[75] 기는 상의 윤곽을, 운은 선의 뾰족함을 숨기는 역할을 한다. 기와 운은 붓(bi)과 먹(mo), 양과 음에 비유할 수 있다. 이는 현의 논리에 따라 움직임을 준비하는 대립이다. 미술사학자이자 감정가인 곽약허(郭若虛, Guo Ruoxu, 11세기경)가 『도화견문지』(圖畫見聞誌, Experiences in Painting)에서 기운(氣韻, ch’i yun)은 화가의 재능에 달려 있기 때문에 기술로 가르칠 수 없다고 주장한 이유도 우리는 이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76] 훌륭한 화가는 형식적인 강요가 없는 기와 운 사이의 역동성, 즉 중국어로 무의(無意, ‘의도[지향] 없음’)를 창조할 수 있다.
무의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형태를 묘사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획, 힘의 흐름을 촉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무의는 유동적이고 상호적인 역동성이다. 순간-안-현재의 의도는 끊임없이 유동한다.[77] 형태가 아닌 흐름을 관리할 수 있게 될 때, 사물의 성향에 따라 우발적인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隨機 應變)도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중국 서예(草書)의 초서(草書)<174>에서는 종이의 배치, 종이의 질감, 잉크의 습도 등에 따라 붓의 다음 움직임(중앙 끝[중봉], 측면 끝[측봉], 기울어진 끝[편봉] 등)이 결정되기 때문에 서예가는 즉각적으로 붓의 움직임을 결정해야 한다.[78] 형태를 미리 종이에 투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표현법에 비해 서예는 무의 훈련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나 무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에서 무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의 흐름에 따라 몸을 동조시키기 때문에 형태부터 시작해야 한다.[79]
이 최고의 표현 형식에서는 존재(being)와 무(nothing) 사이의 움직임에서 대립을 설정하는 모순이 화해에 이른다. 화가이자 이론가인 윤수평(惲壽平, Yun Shouping, 1633~1690)은 최고의 산수화란,
십만 그루의 나무 중 붓이 나무 아닌 것이 없고, 십만 개의 산 중 붓이 산 아닌 것이 없으며, 십만 개의 붓 중 붓이 붓 아닌 것이 없는 그림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어떤 것[유]를 볼 때, 실제로 거기는 아무것도 없는 곳(무, nothing)을 보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무],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이것이 최고의 그림이다.[80]
이는 석도(石涛, Shitao)와 같은 화가들이 ‘비-유사성의 유사성’(不似之似), 즉 화가와 그림 모두를 무한을 향해 자유롭게 하는 ‘방법 없음의 방법’(無法之法)을 강조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바, 회화에서의 현의 논리이다.
<175>
§14.3 현의 재귀성-상반적 통합
도는 깊고 멀기 때문에, 현전을 함축하지 않는다. 현원(玄遠) 또는 유원(幽遠)에서, 유는 ‘고요한’, ‘깊은’을 의미하고, 원(遠)은 ‘먼, 멀리’를 뜻한다.[81] 현과 유는 예컨대 일본 미학(일본어의 yūgen)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유현(幽玄)처럼 종종 함께 사용된다. 오니시 요시노리(Ōnishi Yoshinori)가 그의 작품에서 체계적으로 공식화했듯이, yūgen은 “달 위로 얇게 덮인 구름”이나 “단풍에 드리운 산안개”처럼 숨겨져 있거나 흐릿한 것부터 “무한히 큰 것, 꽉 찬 충만함(inhaltsschwere Fülle)의 응결”[82]을 포함하는 심오함과 완전함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앤 챙(Anne Cheng)은 『중국사상사』에서 현과 원(遠, yuan)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현이라는 단어는 의미론적으로 원과 가깝다. 마찬가지로 현은 지금 여기라는 선입견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인간의 이해 범위를 벗어난다. 이것이 노자 첫 장에 나오는 ‘현지우현’이다.”[83] 도는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크고, 가장 멀면서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중국 회화는 서양 회화의 기하학적 투시법을 따르지 않는데, 이는 산수화의 투시법이 원의 개념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곽희는 『임천고치』에서 산을 묘사하는 데는 세 가지 거리가 있다고 썼다.
<176>아래에서 산봉우리를 올려다보는 것을 고원(高遠)이라 하고, 산 앞에서 산등성이를 엿보는 것을 심원(深遠)이라고 하며,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을 평원(平遠)이라고 한다.[84]
여기서 원은 표현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산수화가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다시 현의 재귀적 사고를 통해 이루어진다. 프랑스의 중국학자 욜렌느 에스캉드(Yolaine Escande)도 그녀의 탁월한 연구서인 『산수화의 문화』(La Culture du Shanshui)에서 산수화에서 원은 종종 현을 동반한다고 강조한다.[85]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역사학자들은 현을 논리적으로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 모종삼은 아마도 논리로서의 현의 특수성을 처음으로 논의한 사람일 텐데, 아마도 그가 초기 연구에서 형식 논리학에 전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헤겔이나 소크라테스의 변증법과 현을 구분하지 않았다.[86] 바로 이곳이 우리가 관심을 갖는 부분이다. 그는 『도덕경』을 읽으면서 형식 논리학의 한계를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도의 역설적 본성을 현의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었다. 도덕경 강의에서 모종삼은 현이 유와 무의 혼종(hybrid)라고 명시적으로 주장한다. 현을 이해해야만 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유, 무 그리고 현은 모종삼에게 <177>도(道)의 분석에 이르는 세 가지 용어이지만, 도의 표현이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현에서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따라서 현은 유와 무의 합성체이다. 유와 우의 합성어가 바로 현이다. 현은 도의 진정한 회복이며 도를 도답게 만든다. (...) 노자는 현을 모든 미묘함(신비)의 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도가 모든 신비의 문이라는 의미이다. 현의 분석에서 도가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도의 구체적이고 진정한 의미가 충분히 표현된다. 이 하나, 둘 그리고 셋은 도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 무, 현은 도의 분리에 대한 명시적인 분석이다. 이것은 도덕경에서 분명히 드러난다.[87]
모종삼은 현의 이론이 너무 추상적이고 신비스럽다는 역사적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현의 논리에서 도의 구체성과 실재성을 강조한다. 중국의 근대화 초기(20세기 초)에는 형이상학(또는 더 정확하게는 xing er shang xue[形而上学])이 비과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이라는 이유로 현 이론을 폄하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누군가의 연구를 현학(xuanxue, 玄学)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의 모욕에 가까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을 통해 중국 철학을 독해하는데 할애한 또 다른 강의에서 모종삼은 이 독특한 논리에 대해 다시 한 번 언급했다. 그에게 현은 고리를 내포하며, 하나에서 둘을 나고 둘에서 셋이 나며 셋에서 천 가지가 난다는 노자의 말과 일치하는 바, 두 가지 대립 요소인 무와 유를 대하는 세 번째 용어이기도 하다.
나는 『도덕경』의 첫 장에서 무는 하나라고 말했다. 유는 둘이다. 무와 유를 합친 것이 현이고, 현은 셋이다. 셋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든 존재의 문이 된다. 이것이 셋이 만물을<178> 낳는 이유이다. 무와 유만이 만물의 문이 아니다. 유는 무의 부정이고, 무는 유의 부정이다(一定是無 而非無就是有,有而非有就是無). 이 원은 멈출 수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현이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곡선적 사유(curvilinear thinking)의 논리이다. 이것은 형식 논리를 초월하며, 현적 사유의 앞뒤 고리이다.[88]
모종삼은 여기서 형식 논리를 초월하는 ‘곡선적 사유’, 즉 그가 ‘순환 곡선적 현 담론’이라고 부른 바를 강조하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논리가 유교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도교에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현 이론가가 제안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초월을 내재화하는 논리를 도입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의 예로 설명할 수 있다. 언어는 그 기호들에 있어서 유한하며, 유한한 기본 요소의 순열에 의존하지만, 이러한 유한한 순열이 무한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제 우리는 문자의 유한성과 의미의 무한성 사이에 있는 어떤 대립을 가진다. 선형 논리를 사용하면, 문자는 불충분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논어』에서 공자(또는 공자의 이름으로 글을 쓴 사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책/문자는 언어를 소진하지 않고, 언어는 의미를 소진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성인들의 사상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 성인들은 자신의 사상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해 상징적인 기호들을 만들고, (사물의) 진실과 거짓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해 (모든) 도식을 상정하고, 자신의 말을 충분히 표현하기 위해 설명을 덧붙이며, 유리한 것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해 (여러 줄을) 바꾸고 그렇게 하는 방법을 일반화했다.[89]
<179>]공자가 제시한 이 대답은 여전히 너무 단선적이며, 질문에 완전히 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호들의 수가 제한되어 있다 해도, 그것들이 표현할 수 있는 의미는 다 소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공자가 말하는 것은 그와 같은 좌절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소진하지 않기 위해 소진한다”(盡而不盡). 더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무한을 만들기 위해 한계를 드러낸다”는 것이 현 이론의 대답일 것이다. 유한과 무한은 더 이상 모순이 아니라 논리적 움직임, 즉 세 번째 요소인 현에 의해 보장되는 연속성으로 드러난다.
나는 포함 논리(inclusive logic)가 아닌 재귀 논리(recursive logic)의 관점에서 현에 대한 이해를 제안하고자 한다. 포함 논리는 예를 들어 유한 집합 A는 반드시 무한 집합 B 안에 있어야 한다고 가정하므로, 집합 B가 집합 A 안에 있다고 하면 모순이 생긴다. 재귀 논리는 집합 A와 집합 B가 단순히 포함 또는 배제의 관계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역설에 의해 유지된다고 본다.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nothings)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라. 포함/배제 논리에 따르면 이 문장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재귀 논리에 따르면 새로운 사변(speculation)의 공간을 동반하는 역설이 만들어진다. “소진하지 않기 위해 소진하다”와 언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은 역설의 형태로 놓기를 원한다.
정립: 글쓰기는 세계를 온전히 표현하는 제한된 수의 기호를 가진다.
정립: 세계는 무한한 반면, 글쓰기 자체는 유한하기 때문에, 세계는 글쓰기의 의해 온전히 표현될 수 없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언어의 유한성을 소진하고 움직이게 하여 기존의 구성 요소 위에 직접 정위될 수 없는 의미를 암시적으로 포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진하지 않기 위해 소진하다”의 의미이다. 위진 시대에는 “미묘하고 한정된 말로 의미를 소진하는 것”(微言盡意)<180>과 “섬세한 이미지로 의미를 소진하는 것”(妙象盡意)과 같은 주제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90] 또는 곽상의 장자 해석에서 “의미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말”(寄言出意)이라고도 한다.[91] 모종삼은 곡선적인 도가적 사유와 달리 유가적 사유는 글쓰기[문자]에 대한 공자의 변호에서처럼 수직선(垂直線)이 특징이라고 믿는다. 수직선은 인간과 우주 사이의 힘차고 활기찬 길을 상징한다. 반대로 도가적 사고는 우리가 현이라고 설명한 곡선적인 움직임이 특징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형적 인과관계로는 ‘발생[기원]’에 대한 어떤 선례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재귀적 논리가 사실상 중국 사상에서 가장 정교한 발생기원의 난문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로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철학을 체/용론(体用論, ti/yong lun, ‘몸/사용에 관한 이론’)의 해명을 향한 여정으로 요약한 스승 웅십력(熊十力, Xiong Shili, 1885-1968)의 사상의 핵심이기 때문에 모종삼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가 도/기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웅십력의 체/용 이론을 간략하게 다시 살펴보는 것도 가치 있을 것이다. 앞서 위진 시대부터 ‘체/용, 도/기, 무/유, 본/말’이라는 네 쌍의 연속적인 대립이 중국 철학의 주요 범주가 되었다는 것을 살펴봤다. 웅십력은 유교의 재해석이자 불교의 허무주의적 경향에 대한 대항으로서 체와 용의 통일성을 강조했다. 그는 유교와 『도덕경』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불교 학자였기 때문에 체와 용의 통일성을 강조했다. 수십 년 동안 불교를 공부한 후, 웅십력은 모든 환상적 현상(法相)을 깨뜨려 참된 본성(法性) 또는 진여(眞如, tathatā)에 도달한다는 나가르주나의 『중론』(Mūlamadhyamakakārikā)의 목표가 이론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웅십력에 따르면, 선형적인 방식으로 생각되는 현상의 끊임없는 단절은 결국 공(空, the void)이라는 기본적 종착점에 도달할 뿐이다. 따라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바, 나가르주나의 방법은 결국 근거 없는 근거로 귀결되며, 이는 순전히 허무주의적인 것이다.
<181>바로 이때 웅십력은 불교에서 유교로 눈을 돌렸고, 『역경』에서 풍부하고 구체적인 ‘땅’(ground, ben ti[본체])에 대한 사고 방식을 재발견했다. 즉, 그는 중국의 본체론이 이미 선형적 사유를 극복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체와 용(‘몸’과 ‘사용’은 비선형적 사유를 불러오는 상반적 연속성을 구성한다.[92] 체/용에 대해 그가 주장하는 것이 유교에도 적용된다면, 이러한 재귀성은 중국 사상에 편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웅십력은 도(道)와 기(器)의 불가분성을 강조한 유학자 왕부지(Wang Fuzhi, 1619-1692)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논어』 제12장에서는 “형 위에 있는 것을 도라 하고, 형 아래에 있는 것을 기라고 한다(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고 나온다. 얼핏 보면 형태는 도(道)와 기(器)를 두 개의 다른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왕부지는 도(道)와 기(器)를 두 개의 실체로 분리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두 명칭은 서로 다른 명칭을 나타낼 뿐이지 두 개의 별개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미 형태가 있을 때에만 ‘형태 위’라는 명칭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형태 위라는 명칭이 반드시 형태가 없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93]
실제로 왕부지에게 도란 기가 거주하는 어떤 실재이지만, 기 없이는 도도 없기 때문에 기는 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그는 『계사』 해설에서 “하늘 아래에는 오직 기만 있다. 도는 기의 도이고, 기는 도의 기라고 할 수 없다”고 쓴다.[94] 이 마지막 구절은 도가 홀로 기를 생산할 수 없으며, 기가 없으면 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도가 기에 선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기의 경우 그것이 일단 만들어지면 도는 항상 존재한다.
왕부지는 도와 기의 일치를 강조했지만, 이러한 일치는 도가 물질적 운반체인 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소박한 유물론으로 오인될 수 있다. <182>오늘날 왕부지는 유물론자라고 불릴 수 있지만, 이러한 독해는 정신주의나 유물론으로의 환원을 거부하는 상반적 연속성과 재귀성을 달성하는 데 아직 근접하지 못했다. 왕부지는 “상(image, xiang)을 잊음으로써 담론(discourse, yan[言])을 얻고, 담론(yan)을 잊음으로써 의미(yi[意])를 얻는다”는 왕필의 말을 비판했다.[95] 왕부지에게 이러한 접근은, 그렇게 하면 도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맞서지 않으면서 기를 없애려고 시도하는 것이다.[96]
왕부지가 물질을 운반체로 강조한 것은 옳지만, 그의 비판은 도와 기의 순환적 관계에 대한 왕필의 통찰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지금까지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재귀성은 물질적 지지체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와 기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다. 동시에 웅십력은 흥미롭게도 왕부지의 도와 기에 대한 주석에서 재귀적 독해를 도출하는데, 그것은 그에게 있어 왕필 철학의 중심 논리인 체와 용이다.[97] 요컨대 체/용은 근본적으로 비-이원론적 논리이다. 이 용어는 두 극을 나타내지만 “서로 다른 두 가지 실체가 아니다”(体用不二).
웅십력은 정신과 사물의 두 가지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행위 - pi[벽辟]와 xi[흡翕] - 를 전개하는데, 이 두 가지 행위의 통합성은 서로 상반적 본성에 의해 가능해진다.
마음(정신)과 사물: 기능에 따라 벽[pi, 辟]이라고 하며 활기, 힘, 발전, 상승, 밝음 등의 의미 또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역경』은 그것에 건[qian, 乾]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른 하나는 흡[xi, 翕]으로, 닫히다, 떨어지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역경』은 이에 곤[kun, 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벽과 흡은 기능에 관한 두 가지 관점이며, 전신과 사물 사이의 대립이 분명하다. 벽은 마음[xin, 心]을, 흡은 사물을 나타낸다. 벽과 흡은<183> 서로 반대지만, 마음은 사물을 지배하므로, 사물을 전환하고, 통합한다. 전환한다 것은 변형한다(transform)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상반적이며, 따라서 보완적이다.[98]
이 재귀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웅십력이 제시한 은유를 사용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웅십력의 은유에 따른 체와 용의 관계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는데, 이는 재귀라는 보다 복잡다기한 논리 대신 포함 논리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웅십력은 바다와 파도의 은유를 사용한다. 여기서 바다는 파도의 체이고 파도는 바다의 용이다. 파도는 바다의 일부가 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으며, 바다는 파도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파도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포함한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하고, 파도는 그 표현의 한 형태로서 바다를 구성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귀 논리는 형식적인 포함 논리가 아니라 시간의 논리, 즉 움직임의 논리이며, 여기서 시간은 달라지고 유예되는 재귀의 차원이다. 이 사고방식은 다른 영역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우주론에서 우리는 몸[체]과 기능[용]의 동일성(비-이원론, 不二)을 발견한다. 이 논리를 생명론에 적용하면 하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늘은 체이지만 용은 아니다 [...] 하늘은 우리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며, 우리 너머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늘과 인간은 원래 하나다). 이 논리를 정치론에 적용하면 도와 기의 통합이 된다. (기는 물리적 세계이고 도는 만물의 체(또는 기초)이므로 도와 기는 동일하다.)[99]
<184>두 극 사이의 이러한 재귀성을 우리는 상반적 연속성과 통합성(unity)이라고 불렀다. 네 가지 주요 범주 사이의 상반적 연속성과 통합성은 이미 위진 시대에 확립되어 중국 사상에서 계속 정교화되었으며, 도와 기, 형과 영(靈), 리(理)와 치(致) 사이의 역학 관계로 구성된 이 재귀적 사고는 중국 사상에서 존재의 문제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이 담론을 따라 내가 도와 기의 갈마듦(unification)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고방식이 중국의 근대화 시기, 즉 아편전쟁 패배 이후 사라진 것이 아니냐고 의심할 수 있지만, 이는 중국 사상의 핵심에 여전히 남아 있다. 갈마듦은 단순히 두 가지가 합쳐지거나 분화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재귀적 움직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지식인들은 몸과 마음, 서양 기술과 중국 사상을 데카르트식으로 구분했고, 중국 사상에 존재하는 재귀적 사고를 이해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서양의 기(qi)는 마침내 중국 사상을 변형했고, 이는 고대 사상으로의 단순한 회귀를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비효율적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이 중국 사상의 전체론(holism)이 서양의 기계론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할 때, 이 ‘전체론’이란 단지 하나의 인상(impression)일 뿐이며 아직 철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불완전하고 독단적인 주장으로 남아 있다.
§14.4 우주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재귀성과 우연성』에서 나는 이 두 가지 개념을 사용하여 유기체 이론을 재구성했다. 나는 기계론에서 유기체론으로의 인식론적 전환을 설명하고, 특히 20세기 전반의 사이버네틱스가 어떻게 그러한 대립을 취약하게 만들었는지에 주목하면서 서양 철학에서 두 가지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로써 이 둘 사이의 단순한 대립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했다. 여기서 나는 ‘재귀성’이라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여 상반적 연속성을 기술한다. 이것은 조셉 <185>니덤처럼 중국 사상에 유기체론적 흐름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100] 오히려 나는 비극적, 도교적, 사이버네틱 논리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모종삼은 또한 서양의 유기론 또는 유기체론은 기계론에 반대되는 개념인 반면, 『역경』에는 그러한 반대 개념이 없기 때문에 『역경』이 유기체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실수라고 주장했다.[101] 모종삼은 기화(ch’i hua, 기의 변형, 氣化)에서 기계론과 유기체론을 모두 확인할 수는 있다고 제안하지만, 중국에서는 [서양과] 동일한 과학 기술 발전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102]
중국 사상은 잠재적으로는 이미 기계론과 유기체론을 모두 내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자동기계(autaomata)를 제작할 수 있었으며, 신체에 대한 ‘전체론적’ 관점을 보유할 수 있었지만, 기계론과 유기체에 관한 서양 형이상학의 사고 궤적을 반드시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형이상학’(meta ta phusika)라는 용어는 기존의 중국어 용어인 ‘형태 위에 있는 것에 관한 가르침’(xing er shang xue, 形而上學)를 일본 간자(kanji) 식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는 서양 철학을 동양 철학에 잘못 전사(轉寫)하여 모든 범주를 뒤섞어 버린다. 형이상학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의 관련 형태는 우리가 명확히 하고자 했던 바, 도와 기 사이의 관련 형태와 동일하지 않다.
우주적인 것은 하늘(tian, 天)이고, 도덕적인 것(de, 德)은 하늘의 자애로움(恩, 흔히 ‘은혜’라고도 하며, 더 나아가 이는 기독교 신학에 의해 <186>흐려졌다)을 지칭한다. 왜냐하면 하늘 아래 땅(di, 地) 위에서 만물이 제자리를 찾고 각자의 방식으로 번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은 발명과 사용을 포함한 기술 활동인 기에서 통합된다. 모종삼은 중국 사상에서 도덕적 목적론은 “천명의 끝없음(天命不已)”이라고 주장한다. 도덕적 목적론에 대한 이러한 긍정은 ‘자애로움’(덕)이며, 동시에 우주에서 인간의 역할을 정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구의 담지자로서 인간은 존재자들의 성장을 촉진하고 존재자들이 자신의 본성을 따르도록 할 책임이 있다(參天地贊化育). 이러한 우주적 목적론은 모종삼에 따르면, 유교에서 도라고 부르는 것이며, 도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103]
웅십력과 마찬가지로 모종삼도 『역경』을 유교적인 도덕적 우주론의 기초로 파악했다. 이 도덕적 우주론은 시작(yuan, 元) → 확장(heng, 享) → 이익(li, 利) → 올바름(zhen, 貞)의 과정으로 나타나는 하늘의 생성과 땅의 보존을 모델로 한다.[104] 모종삼은 도가에서 유가 사상을 풍부하게 하는 재귀적 사고를 발견했다. 모종삼은 중국 사상에서 형상인(causa formalis)과 질료인(causa materialis)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질료형상론이 중국사상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하늘은 실현하는 것이고 땅은 보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교의 작용인과 목적인을 건(qian, 하늘)과 곤(kun, 땅)으로 분별할 것을 제안한다. 『역경』의 일곱 가지 주석서 중 하나인 『단전』(彖傳, Tuan Zhuan)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건이 가리키는 바, ‘위대하고 근원적인 것’(힘)은 광대하다! 만물은 그것으로부터 시작된다[大哉乾元, 萬物資始].” 또한 “건의 도는 변화하고 변형하여 만물이 (하늘의 정신을 따라) 정해진 대로 올바른 본성을 얻게 하는 것이다[乾道變化, 各正性命].”[105]. 건은 그로부터 수많은 <187> 사태들이 시작되는 생성하는 힘이다. 또한 화(化, 변화)의 원리는 만 가지 존재가 각자의 본성에 따라 발전할 수 있게 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건이 기원하는 것이라면 곤은 보존하는 것으로, 『단전』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완전한 것은 곤이 가리키는 바, ‘위대하고 근원적인 것’(능력)이다! 만물은 그것에 의해 탄생한다[至哉坤元, 萬物資生].” 또한 “곤은 그 크기로 인해 만물을 지탱하고 품고 있다. 그 뛰어난 능력(또는 덕)은 (곤의) 무한한 힘과 일치한다[坤厚載物, 德合无疆].”[106]
모종삼 자신을 중국 철학에 작용인과 목적인을 전사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이런 지적 작업은 쓸데없다. 실제로 이러한 작업은 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연역을 반복하고 원동자(prime mover)를 천지로 대체하여 자연 신학을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 더 나쁜 것은, 모종삼이 ‘원인’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너무 쉽게 철회한다는 점이다. 원인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aition은 ‘책임지는 것’ 또는 ‘유죄 판결’을 의미한다.[107] 중국 사상에서는 거의 정반대로, 사물을 나타나게 하는 원인은 [책임을 야기한] 빚이 아니라 오히려 자애로움(en, 恩, ‘원인/의존’을 뜻하는 한자 因에 ‘마음’ 心자를 합친 것)이다. 어원적으로 en은 hui(惠, 혜택)와 같으며, 이는 다시 ren(仁, 자비)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배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만물을 탄생시키는 천지의 덕(生生之德)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에서 나는 코스모테크닉스를 기술적 활동을 통한 우주 질서와 도덕 질서의 통합(unification)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인간의 모든 기술 활동이 도와 기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며, 이 관계는 각 시대의 지배적 사고에 따라 다양하게 재해석되었다. 나는 내가 ‘통합’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단순화를 위해 시몽동의 기술성의 발생[기원] 이론에도 영감을 준 게슈탈트 심리학의 전경-배경 은유에만 의존했다. 시몽동은 『기술적 대상의 존재 양식에 관하여』의 3부 ‘기술성의 본질’에서 기술의 사변적 역사를<188> 취급했다. 그의 출발점은 제1부 ‘기술적 대상의 발생기원과 진화’와 제2부 ‘인간과 기술적 대상’에서 제공한 기술적 대상에 대한 연구가 기술성의 발생기원을 이해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술적 대상(이것들의 구체화 과정으로서의 진화)에 대한 이해가 기술적 사고와 예컨대 종교, 미학 또는 철학적 사고 사이의 관계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몽동의 이론에 따르면 기술성의 발생기원은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지 않는 마술 단계(phase magique)에서 시작되었다. 배경과 전경은 이미 구별되었지만, ‘핵심 지점들’, 즉 산의 정상, 강의 발원지, 축제의 날짜와 같이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특정 장소나 시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통합되어 분리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마술 단계가 포화 상태에 이르면 기술과 종교로 분화되고, 이는 다시 이론과 실천, 윤리와 도그마로 분화된다. 각 분기는 통합 위의 관점에서 존재를 이해하려는 이론적 부분(예컨대, 종교, 과학)과 통합 아래의 관점에서 존재를 이해하려는 실천적 부분(예컨대 기술, 도그마)을 낳는다.
이러한 끊임없는 분기와 발산이라는 관점에서, 시몽동은 (하이데거를 드물게 참조하면서) 마술 단계의 통일성에 대한 하나의 유비로서, 전경과 배경 사이의 수렴을 구상하기 위해 전문화와 공리주의를 넘설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고대의 마법 단계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의 유비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마법의 통일성과 유사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현실을 창조할 수 있다. (기술과 종교로의) 첫 번째 격절 단계 이후, 미적 사고는 두 가지 사고 방식의 수렴을 담당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산수화를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의 통합을 암시하는 시몽동의 ‘핵심 지점들’ 중 하나를 재창조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시몽동에 따르면, 두 번째 격절 단계(기술에서는 이론과 실천, 종교에서는 윤리와 도그마)를 지나면 미학적 사고는 표현과 소통의 한계로 인해 더 이상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철학적 사고가 <189>수렴의 과제를 떠맡게 된다. 미학적 사고와 철학적 사고 사이의 이러한 비교는 매우 자극적이지만 논쟁의 여지가 있다.[108]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몽동은 두 번째 격 단계 이후에는 미학적 사고가 더 이상 현실적인 기술 발전과 동시대적이지 않다는, 즉 동일한 분기 단계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지적을 한다. 따라서 기술 개발의 실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가상 현실이나 기계 학습의 특정 기술-미학을 발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제는 철학적 사고를 위해 미학적 사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나중에 우리는 미학적 사고를 실제 기술 발전과 더불어 현대적으로 만드는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시몽동의 논리를 따라, 산수화가 핵심 지점들의 네트워크를 만들려는 시도이자, 그림 자체를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요점으로 만들려는 시도인지 묻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림은 당나라 미술사가 장언원(Zhang Yanyuan, 張彥遠)이 그림을 “육적(六籍[육경(六經)])과 공(功)을 함께 하며 사계절과 나란히 운행되는 것” [與六籍同功, 四時並運]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하늘의 움직임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림, 특히 산수화는 그것을 그리기 위해서 먼저 우주와 그 발생기원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코스모테크닉스이다. 이는 석도(Shitao)가 “건과 곤의 원리[li]를 알면 산의 본질을 알게 된다[得乾坤之理者山川之質也]”라고 한 것과 통한다.[109] 석도의 걸작 『회화론』(Round of Discussions on Painting)의 첫 장은 임어당(林語堂, Lin Yutang)이 ‘일획법’으로 번역한 ‘일화장’(一畫章)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190>원시 시대에는 방법이 없었다. 태초의 혼돈[tai pu, 太樸(태박)]은 분화되지 않았다. 태초의 혼돈이 분화되었을 때 방법(법)이 탄생했다. 이 법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한 번의 획에서 탄생했다.
tai pu라는 용어는 노자에서 유래했다. 『도덕경』 32장에는 “도(道)는 항상 무(無)이며, 우리는 그것을 박이라고 부른다[道常無, 名樸]”라고 했다. 그리고 28장에서는 “통나무[박]를 쪼개면 그릇[기]이 된다[樸散為器]”고 하였다. ‘한 획’은 도와 기의 관계를 구성하는 시작점이다. 일화(yi hua)를 ‘한 획’으로 번역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그림’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이를 통해 화가는 한 획을 통해 우주와 인간의 통합성을 잡아 쥘 수 있고, 보는 사람은 그 그림을 관조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화가는 누구보다도 존재의 성장을 촉진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본성을 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의 필요성을 이해한다(以一畫測之,即可參天地贊化育).[110]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에서 나는 도와 기의 통합과 땅과 배경과 전경 간의 수렴을 유비했다. 그러나 나의 시도는 그러한 비교에 걸맞은 명확성을 얻지 못했다. 또한 중국의 코스모테크닉스적 사고와 시몽동의 유기체론과 사이버네틱스에서 영감을 받은 기술 철학을 모호하게 한 노선으로 놓는다. 철학은 끊임없이 자신을 정교화하고 수정하는 반성적 사고이다. 여기서 나는 현의 의미를 재조명함으로써 통합의 논리가 보다 적절하게 다루어지기를 바란다.
도덕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은 서로 정보를 고지하며 기술적 활동에서 결합한다. 웅십력이 『역경』에 대해 자주 강조한 것처럼 이 논리는 정확히 말해 종교적이지 않다. 웅십력은 정치에서 우주 질서와 도덕 질서의 통합(천인합일, 天人合一), 기술에서 도와 기의 통일(기도합일, 器道合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러한 통합의 논리를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15 본체적인 것의 영역
이제 우리는 예술과 철학에서 무와 유에 부여한 이 재귀적 움직임의 텔로스(telos)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어디로 이끌어 지는가? 특정 결과물에서 끝나는 사이버네틱 작업처럼 미리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가? 아니면 어떤 수치로도 환원할 수 없는 영역, 즉 계산할 수도, 정량화할 수도, 소진할 수도 없는 영역을 구축하려고 하는 것인가? 중국 회화와 시의 대가들이 의경(意境, yi jing), 말 그대로 의미(또는 의미화, yi)의 환경(jing)을 창조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목적지인가? 아니면 의경은 사실 환경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어떤 분위기(atmosphere)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칸트가 자연과 아름다움 둘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 반성적 판단이 어떤 구체적인 목적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마치~인 것처럼’으로만 이어진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아름다움과 자연의 목적을 객관적 증명을 넘어서는 영역에 위치시키고 싶을 수도 있다. 이 영역을 칸트가 ‘본체’(noumenon[예지])라고 부르는 것과 연관시켜 보겠다. 모종삼과 마찬가지로 장대년(張岱年, Zhang Dainian, 1909-2004)은 20세기의 중요한 철학자이자 철학사가였다. 장대년은 『중국철학 개요』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중국 철학자들은 본근[本根, ben gen, 뿌리]이 사물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양 철학은 종종 뿌리가 현상 뒤에 있고, 현상은 나타나지만 실재하지 않으며, 뿌리는 실재하지만 나타나지 않으고, 현상과 본체는 반대 세계라고 믿는다 (...) 대부분의 중국 철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 중국 철학자들은 본근이 실재하지만 나타나지 않고, 사물이 나타나지만 실재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고, 대신 사물이 실제이며, 본근은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현상에서 본근을 보고 본근에서 마찬가지로 현상을 본다. 따라서 화이트헤드가 ‘자연의 분기’라고 비판한 것은 중국 철학에는 존재하지 않는다.[111]
<192>현상 뒤에 뿌리[근원, 근거]가 있다는 믿음은 자연학 너머의 것, 즉 형이상학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물리학은 외관의 세계이고 형이상학은 관념의 세계로, 이러한 분리는 화이트헤드가 ‘자연의 분기’라고 부르는 것을 예시한다. 장대년의 관찰에 따르면, 우리가 ‘상반적 불연속성’(비극적 논리의 기초)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분리는 중국 사상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다. 대신 중국 사상에서는 상반적 연속성만을 발견할 수 있다. 모종삼도 이와 유사한 통찰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주역 철학 강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양인은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본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 해도 현상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 중국인은 현상도 이해하지 못하고 본체에 대한 이해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중국의 전통적 지혜를 되살리고 서양의 진정한 전통적 지혜를 회복하여 중국 민족의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스스러운 삶을 겪을 것이다.[112]
<193>모종삼과 장대년은 모두 중국에서 엄청난 지적 도전과 변혁을 겪으며 살았던 철학자들로,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면서 위에서 설명한 상반적 연속성의 논리가 서양 사상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두 사람 모두 본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본은 ‘원래’라는 뜻이고, 체는 ‘몸’이라는 뜻으로 앞서 ‘기초’ 또는 ‘땅[근거, 배경]’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본체는 칸트가 누메논(noumenon)이라고 부르는 것을 번역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사용되었다.[113]
본체는 중국 철학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주요 주제이며, 여기서 본체의 번역으로 ‘누메논’을 일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칸트에게 현상과 누메논 사이의 대립은 불연속적인 반면 용과 체, 말과 본 사이의 대립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예술에 대한 논의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 장의 서두에서 제기했던 객관적 의미에서 항상 부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간다.
산수화에서 캔버스 위에 나타나기 위해 분투하는 부재란 정확히 무엇인가? 현상은 존재하거나 존재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캔버스에 나타나려고 분투하는 부재는 형상을 부여할 수 없는 큰 상(大象[위대한 이미지])이다. 그것은 오직 비-현상일 수 있으며, 우리는 칸트를 따라 이를 누메논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진리가 본체적이고 숨겨진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증명될 수 없다는 뜻인가? 만약 그것이 숨겨져 있다면, 우리는 본체적 진리를 완연히 표명할 수 있는가?
스위스의 중국 화가 자오우키(Zhao Wouki, 赵无极)가 “중국적인 자연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세잔이었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며 폴 세잔으로 잠시 돌아가 보겠다. 앞서 20세기 초 유럽 현대 회화에서 형상적(figural)인 것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중국 회화에서 형태(form)를 뛰어넘으려는 노력과 닮았다고 언급했다. 특히 세잔의 경우 이러한 유사성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요아킴 가스케(Joachim Gasquet)는 세잔과의 대화에서 세잔이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194>나는 때때로 색을 위대한 본체적 실체들(noumenal entities), 살아있는 관념, 순수 이성의 존재자로 상상하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을 색의 감성에 속하는 형태가 되도록 그려보고 싶다고 나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 상응할 수 있는 어떤 것 말이지요. 자연은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색은 이 표면 위에서, 이 깊이에 대한 표현입니다. 색은 세계의 뿌리에서 솟아납니다. 색은 생명, 관념의 생명입니다.[114]
세잔은 색을 사용하여 시간과 공간의 감성을 구성하고자 했지만, 그가 ‘본체적 실체들’이라는 구절을 사용한 것은 놀랍다. 이것이 칸트적 언어라는 사실 - 가스케가 세잔에게 칸트에 대해 말해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 을 넘어 세잔이 그림에서 자연의 깊이인 누메논에 도달할 가능성을 보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사변적 이성을 광신(Schwärmerei)에서 벗어나 “광활하고 폭풍우 치는 바다로 둘러싸인” 대지에 유폐시킴으로써 제한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칸트는 두 가지 영역을 구분한다. 하나는 현상의 영역으로, 현상, 즉 경험 가능한 대상에 관한 것이다.[115] 다른 영역은 누메논[본체의 영역]으로, 여기서 사물은 감각적 직관에 속하지 안으며, 이해의 대상일 뿐이다.[116] 인간의 감각적 직관은 누메논에 침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물-자체와 같은 누메논적 실체들에 대해 긍정적인 방식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의 성질들, 즉 <195>색, 냄새, 모양 등을 하나씩 떼어내어 사물 그 자체만 남긴다 해도, 그 사물 자체가 우리가 제거한 성질의 원인이라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 사물을 알거나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누메논은 부정적이며, 지적 직관이 그것에 대한 지식과 일치할 때만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117]
칸트 윤리학에서 누메나(noumena)는 실천 이성의 요청, 즉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의지, 불멸의 영혼 그리고 신이기도 하다.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을 목표로 하는 한, 현상에 대한 감각적 인식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잔이 색을 본체적 실체들로 인식하면서, 깊고 근거를 이루는 무언가를 드러내고 싶다고 말한 것은 색을 통한 본체적 경험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고 예술에서 누메나의 경험이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칸트가 설정한 사변의 한계를 위반하거나 적어도 반칸트적인 예술 철학을 제안하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독해함으로써 아름다움과 본체적인 것의 관계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첫 번째 『비판』(1781)과 세 번째 『비판』(1790)에서의 칸트의 시도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첫 번째 『비판』에서 칸트가 규정적 판단(determinative judgment), 즉 감각 데이터를 순수 개념[범주]에 종속시키는 체계를 설정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단순화해서 설명하자면, 이는 보편적인 것을 특수한 것에 적용하는 선형 논리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종속관계는 직관, 지성 그리고 이성의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구성된 건축학적 구조를 따른다. 세 번째 『비판』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의 문제를 다룰 때, 아름다움의 유형학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첫 번째 『비판』에서 설명한 메커니즘이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은 회화나 조각 등 특정 대상에 적용하기 위해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이 지성의 순수 개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면, 즉 그것이 보편성에서 특수성으로의 선형적인 이동을 통해 도출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에 접근할 수 있는가? 아름다움이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196>사람마다 다르므로 주관적이기 때문인가? 이것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질문을 근본적으로 주관적인 취향의 문제로 만들 것이다. 알렉산더 바움가르텐(Alexander Baumgarten)은 미학을 인식[Erkenntnis]의 기획(또는 더 정확하게는 감각적이고 더 낮은 인식의 학문)으로 이해하고, 따라서 미적 판단의 기초가 되는 원리, 예를 들어 완벽함의 지각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칸트는 취향의 판단이 쾌락에 관한 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합리주의적 접근에 반대했다. 그러나 칸트는 취향에 대한 반정립으로 언급된 사변적 질문, 즉 아름다움을 보편적이면서도 주관적으로 객관적인 어떤 것(대상으로서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없고 주관적으로 사변될speculated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면서도 순수 지성 개념에 따라 결정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객관적이라고, 예컨대 삼각형이 세 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질, 양, 관계, 양상의 범주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어떤 것이 규정될 수 없다고, 예를 들어 그것의 속성을 특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 그것은 객관적일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반성적 판단’과 ‘규정적 판단’을 나란히 배치한다. 후자는 구성적 원리(constitutive principles)에 따라 보편적인 것(순수 개념)을 특수한 것(감각 데이터)에 부과한다. 규범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s)를 따르는 반성적 판단은 자기-합법화(auto-legitimation)를 통해 보편성에 도달하기 위해 특수한 것에서 출발하며, 이러한 법칙은 미리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앞서 규정할 수 없는 그 자신의 법칙을 만들어야 한다. 목표를 미리 결정할 수 없더라도 어떤 반성적 과정을 통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 즉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다. 만약 나의 이웃과 내가 예술 작품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면, 나는 이웃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아름다움은 아직 보편적인 것이 아니므로 소통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주관적인 반성적 판단이 어떻게 경험 이전에 미리 정의되거나 주어지지 않은 ‘객관성’에 도달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다음과 같이 물을 때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자연의 목적론은 무엇인가? 우리는 채소의 존재 목적이 동물이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는 자연 안의 목적<197>이 존재할 수도 있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을 ‘미적 판단력 비판’과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이는 그것들이 동일한 문제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연은 아름다움 자체와 마찬가지로 공허한 개념으로 남아 있다. 지구의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다고 해도 통일된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자연과 아름다운 것의 존재에 대한 주관적인 이해는 ‘마치 ~인 것처럼’이라는 관점에서만 반성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미적 관념으로서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파악될 수 없지만(칸트는 합리적 관념에 부여하는 증명 불가능한 것indemonstrable과는 대조적으로 그것을 설명 불가능한 것inexponible이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험이 우리의 눈과 손을 벗어나면 그것은 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아름다움이 현상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본체적이어야 하고, 아름다운 것이 본체적이라면 그때 우리는 하나의 문제를 가진다. 어떤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기준은 지성적인 직관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지만, 인간이 지적인 직관을 가질 수 없다는 칸트의 말에 동의한다면,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항상 ‘마치~처럼’일 뿐이다. 여기에 칸트가 의도적으로 열어둔 사변의 회색 지대가 있다.
예술 이론가 티에리 드 뒤브(Thierry de Duve)는 20세기에 ‘예술’이라는 용어가 19세기의 ‘아름다움’을 대체한다고 제안했을 때, 그는 아름다운 것의 존재 방식이 추상적이고 공허하기 때문에 ‘예술’과 같은 다른 추상적 단어로 대체될 수 있다는 명목론적 비판에 대해 아름다움과 예술을 모두 드러냈다.[118] 칸트가 이성을 해부함으로써 아름다움과 목적론적인 것이 복잡하면서도 논리적인 역학관계로서 가까워질 수 있다고 밝힌 이후, 이 투쟁을 명목론자와 실재론자 사이의 중세 전쟁터로 되돌리는 것은 발전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은 경험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파악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쇼팽의 낭만주의 곡을 듣거나 석도(Shitao)의 산수화를 볼 때, 소리와 이미지의 조화는 우리의 생각을 유예하고 다른 영역에 우리를 노출시킨다. 우리는 <198> 세잔의 그림을 대하는 메를로-퐁티처럼 이 유예를 현상학적 판단중지와 같이 놓을 수 있다. 이 판단중지는 예술가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공간으로 이어지는 ‘길’ 또는 ‘통로’를 열어준다. 예술가는 그것을 그 자체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마치 알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한다. 오히려 그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직 경험되지 않았지만, 신비로운 것이라기보다 개방성으로 다가온다.
예술가는 그 또는 그녀의 사유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유에 응답함으로써 작업하기 때문에 이러한 개방성은 예술가에게 개인적이면서도 시대적인 것이다. 예술 작품이 만들어내는 개방성은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이데거에게 예술 작품의 의미를 구성하는 도약(Springen)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중국 산수화에서 발견하는 ‘도약’의 기회를 구성하는 것은 다다이스트나 초현실주의와 같은 현대 미술을 형성한 ‘충격으로서의 가르침’(shock doctrine)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 비극이나 기독교 미술의 십자가 사건과는 다른 것이다.
석도의 그림 앞에 선 유럽 관객은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할 수 있지만, 교양 있는 중국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이미지를 넘어 화가이자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우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때] ‘나’는 해체되는데, 이는 사물이나 허공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우주를 통합된 경험의 영역으로 보는 더 넓은 현실의 일부가 된다.[119] 산수화는 인간 세계와 우주 간의 만남의 자리로 작용한다. 이 만남에는 비극적 폭력도 낭만적 숭고도 없다. 대신 비극처럼 감정을 과장하거나 자극하지 않는 담아함(blandness, 淡雅)를 발견할 수 있다. 담아함은 이미 잠재력으로 가득 찬 대립과 비-활동(能發之未發)을 체현하기 때문에 딱딱하거나 건조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99>산수화가들은 무엇보다도 철학자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몽동이 ‘핵심 지점들’이라고 부르는 바, 산과 물이 그 안에서 유비되는 참여의 형태를 구성하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16 감각하기와 감응하기
중국 성인들에 따르면, 알려질 수 없는 것은 도라고 불리운다. 노자는 도를 표명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자체로 증명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노자는 무(無), 유(有), 현(玄)의 삼위일체로 이어간다. 시인이자 화가인 종병(Zong Bing)은 이 주제에 관한 최초의 저술(「畫山水序」, 「산수화의 의의에 대하여」) 중 하나에서 산수화의 임무가 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종병은 도를 담고 있거나 모든 존재에 반영된 도를 보는 사람을 성인와 연관 짓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 다른 유형의 사람인 현자(賢者, the virtuous)는 반드시 성인(聖人, the sages)이 되지 않더라도 덕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성인과는 구별된다. 성인 되려면 실천과 지혜가 필요하며, 언젠가 도(道)의 빛을 밝힐 수 있다.
도를 가진 성인은 존재하는 것들 안에서 도를 볼 수 있고, 오염되지 않은 마음을 가진 현자는 여러 현상을 감상할 수 있다 (...) 성인은 정신으로 도를 따르고 현자는 도를 이해한다. 산과 물은 그 형태들(forms)을 통해 도를 나타나게 하고 예민한 사람은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으니, 이들이야말로 비슷하지 않은가?[120]
종병은 도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알다’라는 단어 대신 ‘포함하다’(contain)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했다. 덕이 있는 사람이나 교육 받은 사람은 성인처럼 도를 따르지 않아도 그 미묘함을 이해할 수 있다. 타인과의 윤리적 공존은 <200>그가 민감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일반적으로 ‘자애로움’(benevolent, 仁)을 ‘민감한’(sensitive)으로 번역하는데, 왜냐하면 민감하다는 것은 다른 인간 및 비인간과 ‘감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반화하는 이 민감성(sensibility)은 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데, 이것이 없으면 (오늘날 흔히 고려되는 것처럼) 도가 ‘자연의 법칙’ 또는 ‘사물의 원리’로 순식간에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감성에 대한 생각은 칸트가 기술하는 감성적인 것(the sensible)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칸트는 감성적 직관과 지성적 직관, 즉 하나는 인간에게 속하고 다른 하나는 신성한 것에 속하는 두 가지 직관을 구분한다는 점을 기억할 것이다. 칸트는 감성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현상에 국한했지만, 보편적이지만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공통감(sensus communis, 상식)에 대해서도 설명하고자 했다.
해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공통감은 문자와 여타 소통 수단을 통해서만 가능히다. 장 피에르-베르낭이 주장했듯이 그리스 폴리스는 알파벳 문자가 발명된 후에야 비로소 등장했는데, 법률 또한 문자에 의해 수립됨으로써 공통감이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해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감각 기관을 통해 지각할 수 있는 것을 넘어,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는 감성[민감성]의 문제이다. 중국 철학에서는 신유학자 장재(張載, 1020-1077)가 ‘소지’(小知)라고 불렀던 감각 기관과 구별되는 ‘대심’(大心)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마음(心)에 대한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과 기술은 소지(小知)에 불과하고, 마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은 대지(大知)이다.[121] 후자는 제한된 지식 형태와 합리성에 해당하기 때문에 마음은 감각 기관을 보완한다.
<201>모종삼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칸트가 제한하고자 했던 사변적 이성이 바로 중국 철학이 함양하고자 하는 사유라는 사실에 놀라움과 영감을 받았다. 중국 사상을 구성하는 유교, 도교, 불교의 통합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현상을 넘어 현상 너머를 꿰뚫는 앎의 방법을 배양하여 그것을 누메논과 재결합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지적 직관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지적 직관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수련 없이는 성인, 부처, 진인(眞人, zhenren, 문자 그대로 ‘진실한 또는 거짓없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모종삼과 셸링(피히테도 마찬가지)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즉 이러한 지적 직관은 처음부터 지식의 기초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개발이 필요하다. 따라서 모종삼의 지적 직관은 순전히 선험적이지도 않고 후험적이지도 않다. 종(species) 내에서 전승되는 감성적 직관(선험적)과는 다르며, 지적 직관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순전히 경험에서 발달하는 것(후험적)도 아니다. 종병의 「산수화의 의의에 대하여」에서 우리는 이미 마음이 눈과 대비되지만, 그럼에도 서로 반응(應)하고 만나는(會) 두 가지 형태의 앎을 생성하는 기관임을 발견할 수 있다.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과 감응하고 그 닮음이 교묘하다면 그림은 우리에게도 같은 효과를 줄 것이다. 보고 감응하는 것은 정신이 경계를 넘어 도를 이해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이제 실제 산을 보더라도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다. 정신은 끝이 없고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형태 속에 거하고 닮음 안에서 감응한다. 도는 흔적들 속에 새겨져 있으며, 우리가 이것을 정말로[cheng, 진심으로] 묘사할 수 있다면 도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122]
<202>번역과 관련하여 강조할 만한 사항이 두 가지 있다. 위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에서 성(Cheng, 誠)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완전히 명확하지 않다. 성은 송대 신유학과 그 도덕적 우주론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은 부사로써 문자 그대로 ‘진정으로’라는 뜻이지만, 나는 이를 정도를 나타내는 ‘정말로’로 모호하게 번역했다. 마지막 구절은 성이 도를 표현하고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중용』(Zhongyong, 中庸, 중용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성은 하늘의 길이다. 성을 얻는 것은 인간의 도이다 (...) 우리가 성에서 비롯된 지성을 가질 때 이 조건은 자연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지성에서 비롯된 성을 가질 때 이 상태는 가르침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이 주어지면 우리는 지성을 갖게 될 것이며, 거기에 성이 있을 것이다.[123]
성과 지성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이 없으면 도를 향한 지성도 없다. 장자는 중용의 위대한 독서가이자 성의 해석가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위대한 마음’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둘째, ‘감응’(resonance, gan ying, 感應, [공명])이라는 용어에 주목하고 싶은데, 이것은 말 그대로 ‘느끼고 반응하다’라는 뜻이다. 감응[공명]은 오감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하늘과 땅 사이의 다른 모든 존재, 나아가 하늘과 땅 자신과도 공감할 수 있도록 그러한 오감에 기반하여 세워진다. 감응은 무념무행(non-thinking and non-doing)의 경계(境界)에 도달할 때 증폭된다. 무념과 무행은 생각과 행동을 멈출 수는 없지만, 습관적인 기능화(functioning)의 패턴을 멈출 수는 있다는 점에서 생각하지 않는 것(not-thinking)과 행동하지 않는 것(not-doing)과는 구별된다.
우리는 고대 점복술의 은유에 의존할 수도 있다. 『역경』 64괘에 따르면, 거북이 껍질과 수세미는 한때 역(易, yi), 즉 무념무행을 체현하는 현상을 <204>해석하는 데 사용되었다. 『계사』에서 말하길, “역(yi)은 생각하지 않고 행위하지 않음이며, 움직임 없이 고요하지만[易無思也, 無為也, 寂然不動], 감응하면 온 우주를 느끼고 연결한다[感而遂通天下之故]”는 말이 있다. 이 구절에 대해 모종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거북이 껍질과 수세미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들을 가지고 일할 때, 그것들에게 무언가를 물어볼 때, 당신의 질문이 감응하면, 온 세상을 알게 될 것이다 (...) 그래서 세상을 알기 위해 느끼는 것은 우주 전체를 느끼는 것과 같다. 우주 전체를 느낀다는 생각은 선진유학에서 가장 확고하게 표현되었다. 이것은 칸트가 지적 직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124]
이 대담한 진술은 많은 질문을 이끌어낸다. 모종삼은 마음 - 또는 왕양명(王陽明, Wang Yangming, 1472-1259)이 양지(良知, liang zhi, 문자 그대로 ‘도덕적 양심’)라고 불렀던 것 - 을 칸트가 ‘지적 직관’이라고 불렀던 것과 동일시한다.[125] 우선, 양지를 칸트의 지적 직관과 어느 정도까지 동일시할 수 있는가? 둘째, 이러한 느낌으로의 회귀는 일종의 신비주의로의 퇴행이 아닌가? 물론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검증과 논쟁이 필요할 것이다. 모종삼은 현상 너머에 앎의 길이 있다는 직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 앎을 수양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이다.[126] 이 앎의 존재와 구체성은 또한 천지의 인(仁, kindness)에 대한 평가와 삶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기 때문에 도덕의 원천이다. 모종삼은 여기서 과학적 지식<205>과 도덕 철학의 차이에 대해 칸트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지만, 후자의 정언명령에 의존하지 않았다. 이 둘은 공리는 어떤 기계론을 강요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도덕을 공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도덕을 공리화하는 대신, 우리는 우주에서 인간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인간 중심주의와 거리를 두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중국 전통의 점복술과 회화는, 그것들이 이미 인간을 천지의 실현을 촉진하는 기술적 매개체에 불과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인간 중심주의를 거스르는 보고 믿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우주(천지)가 도덕을 고지하고, 도덕은 인간의 기술적 활동을 통해 우주를 반영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안에서 발견하는 소통 방식은 재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도 있다. 현대 과학은 이미 우주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우주는 도덕과 거의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가? 그리고 직관적인 사고 방식은 어느 정도까지 가치가 있는 것인가? 돌이켜 보면, 우리는 현대 과학의 탄생이 한스 블루멘버그가 관찰했듯이 직관의 포기와 겹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직관의 포기는 현대 과학의 전제 조건이며, 직관의 상실은 스스로를 체계화하는 이론, 즉 그 결과를 통합하고 배열하여 이질적인 질서에 기대어 원초적인 현상에 접근하는 식으로 자신을 배치하고 마침내 이들을 대체하는 어떤 이론의 필연적 결과이다.[127]
<206>과학에 대한 모든 비판은 인식론적 상대주의로 비난받을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다시 생각해 봐야하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은 우리를 예술과 과학의 관계로 되돌린다. 산수화는 도, 즉 ‘누메논’[본체]의 영역을 향해 눈과 마음을 열기 위한 산과 물의 재현이다. 파울 클레는 그의 직관 이론을 개발할 때 누구보다 이를 잘 예상했다.
그것은 혁명을 촉발할 것이다. 놀라움과 당혹감. 분노와 추방. 총체적 종합주의자를 퇴출하라! 전체론자를 퇴출하라! 우리는 반대한다! 그리고 모욕은 우박처럼 쏟아질 것이다. 낭만주의! 우주론! 신비주의! 결국 우리는 어떤 철학자, 어떤 마술사를 불러야 한다![128]
직관과 미지의 것에 대한 담론이 신비주의라는 비난을 받는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것일 수 있으므로 이 비난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지의 것을 표명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모든 형태의 합리주의의 한계를 드러낼 뿐이다. 선형적이고 기계론적인 것에 머물러 있는 합리주의는 재귀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약점을 숨기고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복잡성 이론에 의존하게 된다. 회화는 현재를 신비화하거나 비이성적인 것을 물신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합리적인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회화는 캔버스 위에 일관성의 평면을 구축함으로써 미지의 것을 합리화하려는 노력이 된다.
산수화에 대해 설명하는 이 장은 중국 사상에서 모호하지만 현존하는 어떤 논리를 명확히 하는 동시에 그것이 풍경화 분석에서 불가피하다는 점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나는 [이를 통해] 프랑수아 줄리앙의 본질과 과정의 구분에서 출발하는 어떤 이해의 지평을 열었기를 희망한다. 또한 비극적 논리처럼 재귀적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현의 논리를 해명했기를 바란다.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시몽동의 미학적 사고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특히 사이버네틱스의 재귀 논리에 맞설 때 산수화를 코스모테크닉스로 다시 해명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