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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Yuk Hui, Machine and Sovereignty : For a Planetary Thinking,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Introductioin, Chap. 1 §5 _전문 번역

by Nomadia 2025. 9. 13.

*원문서지: Yuk Hui, Machine and Sovereignty: For a Planetary Thinking,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24

*‘< >’ 안의 숫자는 원문의 페이지수, ‘[ ]’ 안의 숫자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주석의 순번임.

 

목차

 

서언

서문: 행성적 사유를 위하여

§1. 행성적 조건에 관해

§2. 정치적 인식론들로서의 행성적 사유

§3. 국민-국가 너머 행성적 정치학을 위한 탐색

§4. 행성적인 것의 정치-기술학 논고(Tractatus Politico-Technologicus)를 향해

 

1. 행성적 사유로서의 세계 정신(World Spirit)

§5. 역사적 과정으로서 정신의 개체화(Individuation)

§6. 행성적 사유로의 세계 정신과 역사 안에서 이성의 장소

§7. 정치적 형식의 이행 추동력으로서 자유

§8. 이성의 재귀성과 근대 국가체제에서의 자유

 

2. 국가 유기체와 그것의 한계

§9. 정신과 연장된 것의 유기적 생성

§10. 국가 유기체 대 동물 유기체

§11. 국가로부터 행성적 자유로의 초극에 따르는 난국

 

3. 지성적(Noetic) 반성으로부터 행성적 반성으로

§12. 지성적 반성: 의식과 삶[생명]

§13. 생명경제학적 반성: 제오르제스쿠 뢰겐(Georgescu-Roegen)이 헤겔을 읽다.

§14. 사이버네틱 반성: 기계적 의식을 향해

 

4. 기계론, 유기체 혹은 결단주의(Decisionism)

§16. 정치 신학에서 정치 인식론으로

§17. 토마스 홉스의 국가론에서 리바이어던의 기계와 유기체

§18.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정치 인식론

§19. 가톨릭주의와 대립물의 통합체(Complexio Oppositorum)

§20. 헤겔의 죽음과 정치 생기론의 승리

 

5. 디지털 지구의 노모스

§21. 주권의 우발성에 관한 첫 번째 탈구축(Deconstruction)

§22. 친구와 적의 우발성에 관한 두 번째 탈구축

§23. 주권과 공간의 기초 철학

§24. 포스트-국가 정치 형태로서의 거대공간(Großräume)과 복수주의(Pluralism)의 문제

§25. 식민주의 부여하기, 신 거대공간 그리고 디지털 주권

 

6. 전쟁 기관론(Organology)

§26. 기관의 불균등성과 전쟁의 혼종성

§27. 자유의 사이버네틱스로부터 차이의 기관론으로

§28. 경향들의 충돌과 신비주의의 부활

§29. 기술적 경행과 기술적 사실의 동력학

§30. 기술과 민주주의 사이의 기관론적 관계에 대해

§31. 생물다양성(Biodiversity), 지식다양성(Noodiversity) 그리고 기술생태다양성(Technodiversity0

 

7. 인식론적 외교를 향해

§32. 가속, 자동화 그리고 인공적(Prosthetic) 미래

§33. 기술생태다양성 관점에서의 보편성

§34. 기술생태다양성 관점에서의 주권성

§35. 기술적 객체의 해부학에 따라 분석된 기술생태다양성

§36. 인식론적 외교로서의 기술생태다양성

 

주석

참고문헌

색인

 


<ix>

서언

 

20228, 나는 칼 미첨(Carl Mitcham) 교수를 초청해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 기념 강연을 진행했다. 칼은 레오 슈트라우스(Leo Strauss)를 따라 정치-기술학 논고(Tractatus Politco-Technologicus)를 작성할 수 있을지 물었다. 이 질문은 슈트라우스가 정치 철학에서 기술의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기술 철학이 정치 철학과 깊이 있게 교류하지 않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정치 철학에서 기술을 고려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필수적이 되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아직 충분히 탐구되거나 포괄적으로 고찰되지 않았다. 우연히도 나는 2018년 여름 재귀성과 우발성(Recursivity and Contingency)의 원고를 완성한 후부터 유사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나는 저 책에서 제기된 인식론적 질문의 함의를 정치적 사고, 특히 기술의 행성화 과정에 적용해 탐구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다양한 이유로 재귀성과 우발성(2019) 이후 바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작업은 예술과 코스모테크닉스(Art and Cosmotechnics, 2021)에 선행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재귀성과 우발성의 두 번째 권으로 간주한다. 기계와 주권은 이 시리즈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권으로, 내가 10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한 작품이다. 이 책은 또한 칼의 질문에 대한 내 첫 번째 답변이 될 것이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지정학적 변동, 즉 국가주의와 정체성 정치의 대두, 국경 통제의 강화, 증가하는 전쟁의 긴장과 기후 위기가 압도적이었던 코로나-19 판데믹 기간 동안 쓰여졌다. 이 충격은 특히 내가 유럽에서 불안정한 홍콩으로 막 이동했을 때는 실존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헤겔과 슈미트를 읽는 것은 마찬가지로 기묘한 경험이 되었다. 추상적인 개념이 구체적이면서도 아주 가깝게 그리고 동시에 위협적이며 불안하게 다가왔다. 헤겔과 슈미트의 사유는 두가지 근대 정치의 형태, 즉 국민-국가와 거대공간(Großraum)을 구현하는데, 미래의 행성적 사유는 이 둘 모두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행성적 사유와 도래할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개념을 위한 새로운 관점을 강력하게 열어젖혀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들을 <x>철학적 적수로서 존중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들의 사유에 섬세하게 개입하면서, 그들을 돌파하고 뛰어 넘을 수 있는 계기들을 모색해야 한다. 나는 정치 및 법 사상의 전문가로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연구는 고단한 작업 이상이었다. 그 작업 중에 나는 내가 정치 인식론(political epistemology)이라고 이름 붙인 나 자신의 정치철학 고전 독해 방법을 전개해야 했다. 정치 인식론은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의 메가머신(megamachine)에 있어서 중심적인 것으로서,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 작동을 이끄는 것이다. 그것은 행성 탐사를 위한 아리아드네의 실이다. 이 연구의 첫 번째 부분은 헤겔과 슈미트의 정치적 사유의 인식론적 기초와 그들이 정당화하고자 했던 두 가지 정치 형태를 개괄한다. 책의 후반부는 내가 재귀성과 우발성에서 발전 시켰던 기술생태다양성 개념의 의제를 상술한다. 하지만 이 역사-인식론적 연구는 아직 덜 완결된 것이다. 분명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 이 연구가 당면한 난국의 몇몇 지점들을 표명할 수 있는 행성적 사유를 구상하는 통찰을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기획은 아래와 같은 여러 기관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홍콩 시립대학교, 특히 크리에이티브 미디어(Creative Media) 학과의 리처드 윌리엄 알렌(Richard William Allen) 교수, 홍콩 리서치 그랜트(Research Grant) 위원회, 사회과학 및 인문학 권위자 동료단체(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Prestigious Fellowship, 2023), 이들 덕분에 나는 가르치는 일을 잠시 쉬고 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 책이 공개될 수 있도록 후원했다. 또한 베르그루엔 연구소(Berggruen Institute)2021년부터 2022년까지 행성적인 것에 대한 나의 연구를 지원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 참여해 준 다음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감사드린다. 피터 레멘스(Pieter Lemmens)와 앤더스 던커(Anders Dunker)는 여러 장에 걸쳐 피드백을 제공해 주었다. 비판적 사고 센터와 켄트 대학교(University of Kent) 로스쿨의 호세 벨리도(Jose Bellido)를 비롯한 동료들, 알렉스 다미아노스(Alex Damianos), 마리아 드라코풀루(Maria Drakopoulou), 지안-지아코모 푸스코(Gian-Giacomo Fusco), 코너 히니(Conor Heaney), 필립 켄더(Philipp Kender), 코널 파슬리(Connal Parsley) 등이 독서 그룹을 조직해 여러 장에 대해 논평하고, 법적 사유와 국제 관계에 관한 비판적인 피드백을 제공했다. 밀란 슈투르머(Milan Stürmer)는 나와 1년 넘게 매주 온라인으로 헤겔의 법철학 강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를 한 문장씩 읽었다. 이 기획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미네소타 대학 출판부(University of Minnesota Press)의 피터 마틴(Pieter Martin)에게도 감사드린다. 건설적인 의견을 주신 익명의 리뷰어들과 수고(manuscript)를 정리하고 조언을 해 조엘 화이트(Joel White)에게도 감사드린다.

 

육후이, 2024년 여름, 로테르담/도쿄

<1>

서문: 행성적 사유를 위하여

 

본 저작은 행성적 사유 - 1960년대에 코스타스 악셀로스(Kostas Axelos)가 이미 행성 기술의 지배와 다가올 새로운 시대의 문턱이라는 전망에서 천명했던 사유 - 를 과감하게 불러 낸다. 이러한 요청의 뒤에 놓인 이론적 설명은 다음과 같다. 즉 우리는 아직 행성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 상당한 시간이 걸릴지라도 행성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행성적인 것는 그 자체로 드러나지만, 여전히 사유되지 않은 것으로 남아 있다.[1] 행성적 사유란 그것에 관한 책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라 해도, 반드시 우주 공간의 주권을 선포하거나 정의하거나 테라포밍(terraforming)과 지구공학에 대해 탐구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행성적 사유란 첫째, 경제-군사적 경쟁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 근대 국민국가의 구성을 넘어서는 사유, 둘째, 다양한 사람과 종이 한 행성에서 살아갈 수 있는 공존의 언어를 공식화하는 사유, 셋째, 영토 문제를 넘어 현재의 생태 위기에 대응하고 인류세의 가속화된 엔트로피 과정을 역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틀을 개발하는 사유를 의미한다. 행성적 사유의 과제는 아베 드 생-피에르(Abbé de Saint-Pierre)가 제안하고 이후 칸트, 피히테 등이 제안한 영구 평화라는 개념과 공명한다. 이 저자들이 글을 쓸 당시 유럽에서는 근대 국민국가가 아직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국민국가가 가장 적절한 정치 형태로 간주될 수 있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산업 자본주의는 아직 초기 단계였고, 지구화로 인한 피해는 아직 예측할 수 없었다.[2] 공동체와 호혜성이라는 두 가지 핵심 개념으로 파악되는 바, 유기적 자연은 다양한 부분이 전체를 구성하고 모든 부분이 서로와 전체에 의해 조건지어지기 때문에 영원한 평화를 위한 본보기가 된다. 따라서 칸트는 영구평화란 <2>국가들 간의 힘들의 균형과 가장 격렬한 경쟁에 의해 보증될 것이라고 열정적으로 주장한 것이다.[3] 이것이 바로 국민국가와 자연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대신 지구행성을 위한 새로운 틀거리가 요구되는 이유이다. 철학자들[4], 역사가들, 디자이너들 그리고 맑스주의 학자들[5]의 여러 탁월한 행성 관련 연구를 고려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탐구들을 견인할 어떤 색다른 경로를 제안할 것이다.

 

나의 이전 작품들을 계승하면서, 이 저작은 기술을 정치적 사유의 최전선으로 가져 오려 할 것이다. 행성적 사유가 가능하려면 정치 철학의 오랜 전통을 피하거나 무시할 수 없으므로, 정치적 사유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으로, 즉 기술(technology)이라는 문제의식으로 독해해야 한다. 과감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시도를 정치-기술학 논고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치-기술학 논고는 우리의 탐구가 정치와 기술을 더 이상 분리된 영역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분리 대신에 우리 앞에는 보다 긴급한 과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 즉 그것은 기술을 정치철학의 중심으로 가져오는 것, 또는 달리 말해 정치철학을 기술 안에 근거짓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 사유와 그 역사를 읽으려는 우리의 의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 작업은 작은 동시에 엄청나게 큰 과제다. 이것은 작은데,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날의 기술이 여러 국민-국가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주요한 전장(battlefield)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매번 실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군사적 공격은 이제 정보 전쟁으로 변모하였다. 이는 엄청나게 큰 철학적 임무인데, 왜냐하면 그것을 성공적으로 획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특히 자크 데리다와 베르나르 스티클러의 작업에서처럼 플라톤부터 현대 정치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수고롭게 상기하면서 해체(deconstruction)의 과업 또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체는 철학이 그 시작부터 기술의 문제를 -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 억압해(verdrängt) 왔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철학에서 사유되지 않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유에 필수불가결한 기술의 중심성을 가시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해체의 관점에서 기술을 경시하는 정치철학은 결함이 있는 것이며, 기술의 관점을 통해 새롭게 재사유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해체의 노선을 따른다면, 정치-기술학 논고는 필수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정치적 사고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기술이 거버넌스의 필수적인 수단이라는 의미인가? 아니면 정치가 공동체에 새로운 역동성을 가져다 주는 어떤 기술 발전에 응전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혹은 [기술적] 장치들이나 그 응용을 위한 기술의 윤리, 예컨대 아마존 알렉사(Amazon Alexa)가 아이들에게 보다 윤리적으로 응대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방식은 <3>기술과 정치를 여전히 두 영역, 다시 말해 행위하고 반응하는 영역으로 간주한다. 정치-기술학 논고는 정치와 기술이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고 제안한다. 우선 노모스(Nomos)는 법적인 것이기 이전에 하나의 기술적 활동이다. 게다가 우리는 정치적인 것을 폴리스(polis), 제국, 근대 국가 그리고 거대공간과 같은 정치적 형태들이 기술적 진보의 특정 표현이며 그것의 상상체라는 것, 동시에 기술이 그러한 여러 상이한 정치적 형태들에 의해 제한되고 포함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기술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는 루이스 멈포드가 메가머신(megamachine)이라고 불렀던 것의 표현들이다. 첫 번째 메가머신은 기원전 4000년 말에 등장했는데, 우리는 이를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페루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정치, 경제, 군사, 관료, 왕실 등 다양한 구성 요소가 분업에 따라 거대한 기계로 조립되었다.[6] 멈포드는 기계론적 인식론에 의해 뒷받침되는 메가머신을 수반하는 절대 군주제를 지나, 메가머신의 거대한 역사를 우리에게 제공했다. 우리는 정치-기술학 논고에 관한 사유를 간직한 채, 우리의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1. 행성적 조건에 관해

1958년 스푸트니크 호의 발사를 계기로 지구로부터 인간의 어떤 새로운 형태의 소외와 더불어 정치 이론가들에게 충격을 가져다 주었을 때, 기술은 한나 아렌트의 고찰을 초과하는 새로운 인간 조건을 야기했다. 인간의 조건의 첫 페이지에서 아렌트는 스푸트니크 호 발사가 다른 무엇보다. 심지어 원자핵 분열의 발견보다 중요하다고 썼다.[7] 우리는 또한 하이데거가 1966년 달에서 촬영한 지구의 이미지를 보고 받은 충격을 상기해야 한다. 그는 이를 세계상의 시대”(1938) 강연에서 그의 분석을 통해 확인했으며,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1966)[8]라는 제목의 인터뷰에서 기술적 재앙에 대한 한탄으로 이어졌다. 하나의 이미지로 파악되는 지구는 20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을 상징한다. 우리는 이를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공간 혁명(spatial revolu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다른 방식도 아니고 우주 공간에서 지구를 탐사한 최초의 시간을 구성하며, 심지어 인간이 지구를 탐사하기도 전에 그 일이 이루어졌다. 이 탐사의 탐사(observation of observation)는 말하자면 일상적인 경험에서 우주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을 전복했다. 즉 일상적인 경험에서 지구는 더 이상 우리가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땅이 아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제 <4>조작 가능한 인공물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샬 맥루한이 1970년 즈음 한 인터뷰에서 스푸트니크에 대해 한 다음과 같은 말과 공명한다. “스푸트니크는 지구행성을 위한 새로운 환경을 만들었다. (...) 자연은 끝났고, 생태학이 탄생했다. 지구행성이 예술적[인공적] 지위로 올라서자 마자 생태적사유는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9] 자연은 더 이상 더 이상 마법에 걸린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큰 인공물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에 사라진다. 이 인공물은 정적이지 않다. 대신 그것은 어떤 역동적인 시스템으로 이해된다. 생태학은 생물학자이자 동물학자인 에른스트 해켈(Ernst Haeckel, 1834~1919)이 만든 용어로서, “유기체와 그것을 둘러싼 외적 환경과의 관계에 대한 과학 전반”[10]을 기술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기술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공간은 더 이상 어떤 기하학적 재현이 아니다. 따라서 이제 공간은 서로 다른 힘과 요소가 상호 작용하는 역동적인 시스템이 된다.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권, 생물권, 대기권 사이의 역학 관계를 처음으로 연구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의 초기 가이아 이론(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와 협력하기 전)에서 그는 지구가 항상성(homeostatic)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사이버네틱(cybernetic) 시스템이라고 주장했다.[11] 리처드 벅민스터 풀러(Richard Buckminster Fuller)가 지구를 우주선으로 묘사한 것은 하나의 [사이버네틱] 기계로서 지구를 바라본 가장 도발적인 풍자 중 하나이다. [여기서] 지구는 우주선이고 지구의 주민인 우리는 우주선의 승객일 뿐이다. 이 우주선의 이미지는 공상과학 소설가 류츠신(Liu Cixin)이 쓴 소설 방황하는 지구(The Wandering Earth)에서 조명되었다. 이 소설은 2019년에 영화로 각색되었는데, 2022년의 후속편은 애국적 세계시민주의에 의해 침윤되었다. 승객들은 미래의 어느날 닥칠 난파를 예상해야만 한다.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이미 기후 변화와 생태 위기에 대한 경보를 들어 오고 있으며, 이 경고음은 점점 더 크게 그리고 점점 빈번하게 울리고 있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전문위원회는 끊임없이즉각적인 행동의 필요성에 대해 경고했다. “지금 아니면절대로!”(now or never!)[13] 이에 대응하여 일론 머스크(Elon Musk)와 같은 기업가들은 화성으로 이주하거나 화성으로 이주하거나 다른 은하계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인류와 별들 사이에서 살아가기라는 꿈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이는 물론 그것을 실행할 여유가 있는 초부유층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플랜 B, 즉 다른 행성으로 탈출하는 것 외에 플랜 A는 우주선을 더 안전한 장소로 조종해 가는 것이다. 지구가 우주선이라면 이는 또한 그 구조를 변경하고, 속도를 개선하고,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테라포밍(Terraforming)은 지구의 대기권, 생물권, 지질권을 공학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현대 기술의 힘을 보여준다. <5>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와 브레이크스루 연구소( Breakthrough Institute)의 동료들이 서명한 생태근대론 선언문’(Ecomodernist Manifesto)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견을 들을 수 있다. 이들은 지구에 가해진 기술에 의해 야기된 피해를 더 진보 된 기술이 복구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같은 희망사항을 기술을 통해 인간의 신체와 지능을 끝없이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는 트랜스휴머니스들의 작업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중심주의가 어떤 역사적 높이에 이르기까지 범람한 이 기술의 시대에 생태-근대주의, 트랜스휴머니즘, 프로메테우스주의가 손을 맞잡았다. 플랜 A와 플랜 B는 모두 지구를 인공물로, 즉 공학과 설계에 종속되는 어떤 것으로 대상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행성화는 근대성의 결과로서 우리가 지향하는 행성적 사고는 아니다.

 

소급해서 보면, 우리는 행성화 과정을 현대 서구의 기술이 전 지구적인 현상이되고 인류 발전의 공동 목표가 된다는 의미에서 기술적 세계화와 동일하게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과학과 기술은 서구의 과학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전 세계 연구자들로 구성된 글로벌 커뮤니티의 기반이 되었다. 이는 철학의 종말이 가진 두 가지 의미를 지적한 하이데거의 1964년의 유명한 논문 철학의 종말과 사유의 과제(The End of Philosophy and the Task of Thinking)와 공명한다. 첫째, 그것은 과학 기술 세계와 이 세계에 적합한 사회 질서의 조작 가능한 배치[steuerbare Einrichtung]의 승리를 의미한다. 여기서 steuerbare Einrichtung이란 말은 명시적으로 사이버네틱스를 지칭하기 때문에, 사회는 어떤 사이버네틱 모델로 이해될 것이다. 둘째, “세계 문명의 시작이란 서유럽적 사유에 기초할 것이다.”[14] 하이데거의 이말은 서유럽적 사유가 다른 형태의 사유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그것이 세계 문명의 기반이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서유럽적 사유가 사이버네틱스에서 그 완성된 형태를 찾는다는 것, 그리고 현대 기술의 대명사 인 사이버네틱스가 전 행성적인 현상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세계 문명의 발전이 현재 서유럽적 사유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사이버네틱스를 통해서이며, 또한 그로 인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판단은 열역학적 이데올로기(thermodynamic ideology)가 지구를 지배하기 시작한 때, 즉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소비에트의 몰락 이후 더욱 분명해졌다. 열역학적 이데올로기란 물리학에서 시작하여 경제 및 정치 영역에 스며들어 그것의 운영원리가 된 어떤 인식론을 의미한다.[15] 열역학적 이데올로기는 <6>자유 시장, 열린 사회, 경제적 자유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그것은 시장에 의해 자유가 정의되는 새로운 형태의 개인주의를 지칭한다. 열린 체계는 흔히 신자유주의 원칙으로 설명되고 닫힌 체계는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체제로 설명되기도 한다. 동양은 열린 사회와 자유 시장에 대한 요구에 직면하여 그 어떤 저항력도 상실했다. 오늘날 동양은 치열한 기술 경쟁, 특히 중요하게는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우리는 행성화 과정에서 비-서구 사상의 역할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서양과 동양의 경쟁은 지난 세기에 반동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정치를 가져 왔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비-서구 사상이 앞으로 더 많은 것을 기여할 수 있고 심지어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을 무효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양한 철학적 전통에서 행성적인 것에 대한 기성 이론을 찾는 것은, 역사상 아무도 우리의 현재 상황을 미리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헛된 것이다. 사유하기란 특정 시대에 속한다는 점에서 당대적이며, 어떤 사유 체계가 우리에게 전달되더라도, 급진적인 재해석을 통해서만 그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따라서 서양 사상이 실패했고 동양 사상이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와 같은 대립이 단지 이데올로기적이며 사유 자체에 맞서기 때문에 나의 목적이 아니다. 탈식민주의는 지구화와 식민지화 사이의 관계, 즉 농업, 채광, 사냥, 어업 등의 형태로 지구를 극단적으로 착취한 식민지화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파악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거의 항상 기술적 주제와 기술에 관한 행성적 사유에 있어서 비-서구적 사유의 공헌, 그리고 다가오는 전 지구적 재앙에 부여된 정치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해 왔다. 다른 한편, 맑스주의는 모든 원인을 자본주의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는 지구를 고갈시키고 창조하는 경제 활동의 동의어이며, 기후 변화와 관련된 연속적인 생태적 돌연변이와 인류세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위기는 경제적이며 기술적이고 정치적이다. 따라서 탈식민주의와 마르크스주의도 행성적 사유의 전개 안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행성적 사유를 직접적으로 다루기 전에 행성화 현상에 대해 살펴보고 그 본질을 이해해 보도록 하자.

 

현대적 프로젝트로서의 행성화는 우선 시간의 동기화이다. 첫째, 그것은 교통과 통신 기술의 융합을 통해 서로 다른 지리적 영토와 기계들 사이의 어떤 동시성을 창조할 수 있다.[16] 둘째, <7>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지구적 시간축, 즉 인류의 공통 양식(common mode)을 구성한다. 칼 슈미트가 지구의 노모스(The Nomos of the Earth)에서 주장했듯이 노모스(Nomos)지구의 땅과 토양[Grund und Boden der Erde]이 특정 순서로 나뉘고 위치하는 척도이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과정에 따라 결정되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질서의 형태이기도 하다.”[17] 슈미트의 사상에서 우리는 지구적 노모스의 역사란 근본적으로 기술적 수단을 통한 공간(space) 혁명, , 우주, 또는 원소(elements. , 바다, 공기)의 끊임없는 정복을 일컫는다는 것을 이해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공간의 기본 형태가 마침내 질적 변화, 다시 말해 공간의 억압과 그것의 시간으로의 전환에 도달하는 것을 보게 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글로벌 금융 산업과 물류는 돈과 상품의 순환을 보장하는 동시성을 따라 기능했다. 이는 공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경계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기능하지만 영토는 글로벌 물류, 상품의 표준화 및 식량의 인공화(예컨대, 축산업 및 온실 농업)를 통해 매끈한 평면으로 변모한다. 이는 이러한 상품들이 고정된 지역에서 분리될 수 있도록 한다. 팬데믹 기간 동안 매끈한 평면은 멈추었고, 시간의 경험은 갑작스럽게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않게 되었다. 글로벌 물류(global logistics)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제 우편물과 물품이 도착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 2021년 여름, 나는 베를린에서 일본으로 엽서를 보냈는데,도착하는 데 두 달이 넘게 걸렸다. 이는 모리 오가이(Mori Ōgai, 1862-1922)가 베를린에서 도쿄로 우편물을 보내는 데 걸린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린 것이다. 글로벌 물류의 중단은 세계화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낸다. 즉 그것은 최단 거리로 공간을 끊임없이 압축하는 동시성의 증가이다. 이 동시성은 에너지 시장에 의존하는 기계로 인해, 그리고 마찬가지로 국가 권력의 개입때문에 취약하다.

 

이러한 동시성은 역사의 동시화(synchronization)에서도 드러난다. 다시 말해,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를 경유하여 호모 파베르(Homo faber)에서 호모 데우스(Homo deus)로 이어지는 선형성을 따라 갈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오로지 기술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기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진화는 기술적 활동의 연속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기술 인류학에서 앙드레 르루아-그루앙(André Leroi-Gourhan)은 진화의 과정에서 기술의 근본적인 역할을 확증한다. 그는 인간이 유인원의 후손이라는 상식을 거부하는데, 그에게 있어 이 주장은 도구의 발명과 사용이 <8>인류 진화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르루아-그루앙과 에두아르 르 로이(Édouard Le Roy), 앙리 베르그송과 같은 동시대 사람들은 호모 파베르와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 어떤 불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18] 라스코, 예술의 탄생(Lascaux ou la naissance de l’art, 1955)에서 호모 사피엔스와 예술의 탄생을 연관시킨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처럼,[19] 르루아-그루앙은 호모 파베르의 특징인 기술과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인 지성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고 여긴다. 전자는 손과 관련이 있고 후자는 뇌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된 격절은 문제가 있거나 심지어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만약 인간이 우선 호모 파베르라면, 그것을 정의하는 것, 즉 기술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더 이상 본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20] 기술이 본질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르루아-그루앙이 제스처와 말하기(Gesture and Speech)와 여타 저작들에서 정의한 것처럼 기술은 어떤 인류학적 보편성, 즉 기억의 외부화, 그리고 기관의 해방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고대에 사용 된 부싯돌은 신체적 제스처의 결정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생물학적 진화의 오랜 과정을 거쳐, 복잡한 운동 신경 체계가 개발되었을 때만 가능했다. 또는 라스코의 예처럼, 그러한 그림들은 호모 사피엔스의 기억과 상상력을 외부화한 것이며, 이는 오늘날 우리가 물려받아 다양한 기술적 수단 안에서 표현하고 있다. 즉 지성은 기술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반대로 기술은 동시에 지성의 외부화 및 그것의 버팀목이다. 따라서 베르나르 스티글러가 기술과 시간 1-에피메테우스의 오류에서 르루아-그루앙에 대해 제기한 비판은 기술과 지성 사이의 대립관계를 지정하는 것에 대한 강조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그것이 단지 바타유의 논지를 반복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기 모순의 위험을 드러낸다고 논증한다.[21]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파베르 사이의 격절에 대한 이러한 거부는 지성과 기술의 분리라는 측면에서 장 자크 루소가 그의 인간불평등 기원론(Discourse on the Origin and Basis of Inequality Among Men, 1755)에서 묘사한 그 악명 높은 [인간의] 타락을 거부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류 발생이 기술적 활동에 기반을두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더 이상 기술을 창조하는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기술에 의해 가능하게 된 인간이라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은 어떤 기술적 현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기술에 대한 인류학적 이해는 인간 종의 역사를 통합하고, 문명은 기술적 수렴에 따라 동일한 지구적 시간 축으로 동기화된다. 동시에 세계사는 인류발생론적 과잉의 역사, 즉 기술,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해 <9>서양 기술사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따라서 앞서 주장했듯이 동시성의 두 번째 의미는 호모 파베르에서 고도로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로, 그리고 이제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인류의 역사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 가능성은 공상 과학 소설에서 호모 데우스, 즉 신이 된 인간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또한 인간 욕망의 투영으로서 신에 관한 포이어바흐의 유명한 비판의 목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호모 데우스는 더 이상 투영이 아니라 그러한 투영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공상 과학 소설이 이 행성화 시대에 철학을 지배하면서, 철학을 광신(Schwärmerei)으로 가져간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기술 철학자로 불릴 수 있다.

 

§2. 정치적 인식론으로서 행성적 사유

20세기에 지구의 객체화는 추상적 재현에서 채굴, 과학적 탐사, 지구 시스템 과학, 자동화 된 농업, 수력 공학 및 지구 공학뿐만 아니라 우주 전쟁 준비에 이르기까지 21세기에 어떤 새로운 정치를 구상하는 긴급한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평화와 공존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무언가를 상상하도록 하는 무언가를 제시해 왔다. 행성적 사유는 행성화 과정을 확고히 파악하고 공존의 언어(language of coexistence)를 개발해야 한다. 여기서 행성적 사고는 엄격하게 세계화의 사고(global thinking)와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세계화는 15세기 말 대항해 시대로부터, 식민화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는 열역학적 이데올로기를 찬양하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절정에 달했고,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에 이르러 끝났다고 주장된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화는 곧 지구화다. 행성적 사유는 새로운 개념적 틀을 통해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 장애물은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주로 국민국가와 그 국가의 경제적, 군사적 이익의 관점에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정치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으므로 행성을 양극적 또는 다극적 구성과 같은 국가 간의 새로운 구성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국가간 구성은 국민 국가 정치의 단순한 지속일 뿐이기 때문에, 여기서 차이점은 누가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자원과 세계 시장을 더 많이 통제할 수 있느냐와 관련이 있을 뿐이다.

 

또한 지구를 주체로 삼고 행성적으로 사유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또한 지구의 객관화이다. 이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그의 행성적 의제를 두 가지 전제에 기반하여 공식화할 것을 제안한 이유이기도 하다. 첫 번째 전제는 모든 <10>모든 인간은 동일한 생태학적 돌연변이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돌연변이는 행성적이고 우리는 이 행성의 거주자이므로 행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 전제는 칸트가 영구평화로부터 도출한 세계시민주의’(Weltbürgertum)에 대한 전제를 상기시킨다. 여기서 칸트는 지구 표면이 모든 사람들에 의해 공동으로 소유된다(das Recht des gemeinschaftlichen Besitz der Oberfläche der Erde)고 말하며, 이는 국경은 인위적일 뿐이므로 외국을 방문 할 권리가 자연법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22] 따라서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공동의 대상인 지구는 인위적인 경계를 넘어 하나의 집단성을 구성하는 상상력을 요청한다. 라투르 프로젝트와 관련된 두 번째 전제는 유럽인은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따라서 유럽인과 비유럽인 모두는 근대적이지 않으므로 서로 협력하여 근대성이라는 곤경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23] 이 곤경은 유럽의 근대성에서 비롯된 지식 체계가 새로운 교통과 통신 기술을 통해 전 세계에 퍼져나갔고 때때로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보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주제는 중국에서의 기술에 관한 물음-알고리즘 시대 인문학의 새로운 시작: 코스모테크닉스 시론(The Question Concerning Technology in China: An Essay in Cosmotechnics, 2016)에서 면밀히 검토한 바 있다. 2020 타이베이 비엔날레에 출품된 라투르의 전시 제목인 당신과 나는 같은 행성에 살지 않는다”(You and I Don’t Live on the Same Planet)는 행성적으로 사유으로 사유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간결하게 요약한다. 따라서 라투르는 새로운 외교를 요구한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인식론적 외교를 표명하고자 애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행성적 사고를 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 행성적 사고를 재구성하여 그 한계를 드러내고 다른 가능한 정치 형태를 구상해야 하는 것이다. 행성적 사유는 단지 더 크고 넓은 규모의 것을 취급할 수 있는 사고를 개발하는 것을 넘어선다. 규모가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규모가 너무 크면 그와 동시에 행성적 사유에 똑같이 필수적인 지역성(locality) 문제를 무시하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지구행성을 분할하고 변화시키는 어떤 거창한 정치를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기술과 그것이 21세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재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Kojin Karatani)은 그의 저서 세계사의 구조(The Structure of World History)에서, 그가 자본-민족-국가라는 삼위 일체와 관련하여 공식화 한 최근의 정치 형태란 이미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넘어서거나 부차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저서는 경제를 생산양식으로 환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한다 해도, 그의 영감은 국민 국가를 초월할 수 있는 정치 형태인 칸트의 세계공화국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칸트주의적이다. 그의 주요 타겟은 헤겔이다. 마르크스가 아닌 헤겔이 <11>자본-민족-국가의 통합을 진정으로 이해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전히 민족과 국가를 경제적 토대와 분리된 상부 구조로 간주한다. 가라타니는 세계사를 생산 방식이 아닌 교환 방식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세계사는 세 가지 지배적인 교환 양식, 즉 선물, 국가 그리고 화폐에 각각 상응하는, 선물의 교환, 국가가 강제하는 유통, 그리고 세계 시장과 관련하여 파악된다. 따라서 가라타니는 민족-국가를 지양하는 어떤 D 양식을 상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때 D 양식은 A 양식(선물 경제)을 더 높은 형태로 되살리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민족-국가를 극복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법철학 강요(Outlines of the Philosophy of Right)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24] 그러나, 나는 경제사에 관한 칸트의 분석을 더 이상 따르지 않으면서 칸트가 자본-민족-국가의 통일이라고 불렀던 바, 그 통일의 개념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가라타니는 칸트 독해를 통해 자본주의 경제를 감성, 국가를 지성, 그리고 민족을 상상력과 비교한다. 칸트에서 감성과 지성을 종합하는 것이 상상력이라면, 마찬가지로 민족은 자본과 국가를 종합한다. 따라서 가라타니는 자본주의 경제(감성)와 국가(지성)는 민족(상상력)에 의해 함께 유지된다. 이 둘은 함께 보로메안 고리(Borromean rings)를 형성하며, 세 고리 중 하나라도 제거되면 전체가 무너진다.”[25] 우리는 이러한 통일성이 보로메안 고리로는 위상학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또한 칸트와 헤겔에 대한 우리의 독해와 가라타니의 독해를 다르게 만든다. 가라타니는 또한 헤겔의 변증법이 통일성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보로메안 매듭은 일차원적 접근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즉 이것이 헤겔이 변증법적 설명을 채택한 이유이다.”라고 쓴다.[26] 그러나 이러한 파악은 여전히 너무 미흡한 것이다.

 

이러한 통일성은 보로메안 다이어그램이 아니라 정치적 인식론(political epistemology)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정치적 인식론이란 과학에서 정치, 경제, 기술로 위치 이동된 인식론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앎, 조직화 그리고 사회적 작동의 양식들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구성하는 것이다. 또는 다시 말해 모든 메가머신 뒤에는 어떤 인식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메가머신과 하나의 인식론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존재와 특정 형태의 조직화를 적절히 정당화하는 인식론이 함께하는 메가머신의 진화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행성적 사고의 역사는 <12>다양한 정치적 인식론을 살펴봄으로써 연구될 수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주요한 인식론, 기계론 및 유기체에서 출발한다. 유기체, 또는 그것이 분석적, 수학적으로 추론된 모델인 유기체론(organicism)17세기와 18세기 초에 형성된 기계론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어떤 인식론을 제시한다. 기계론의 정점은 정치적 절대주의와 지배의 출현과 연관 지어 읽을 수 있다. 이것은 멈포드가 기계의 신화2, 데카르트와 홉스에 관한 그의 독해에서 입증하기 위해 애썼던 것이기도 하다. 기계론에서 유기체로의 전환은 18세기 말의 관건적인 인식론적 파열을 특징짓는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은 유기체를 독일 철학의 정점에 올려놓은 주요 저작으로 꼽히며 철학의 원-모델로 이해되는 유기체에 대한 가장 심오한 논문 중 하나를 구성한다.[27] 우리는 심지어 칸트가 철학의 유기적 조건을 부과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며, 이러한 조건은 우리 시대까지 이어져 왔다. 이를테면 주목할 만하게도 멈포드의 기계의 신화(The Myth of the Machine)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신 기관”(New Organum[신 유기체])이다. 이 장은 17세기부터 지배적인 기계적 세계관에 대한 해독제로 여겨지는 유기적 세계관에 관한 것이다. 유기체주의 역사에 대한 이 분석은 내가 재귀성과 우발성(2019), 예술과 코스모테크닉스(2021)에서 수행한 주요 작업 중 하나였으며, 정치 철학으로 확장되어 본 저서 안에서 이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민족-국가에 대한 비판이 국가가 행성적 사고의 반대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우리는 국가를 그러한 사유의 역사에서 아직 명시되지 않은 어떤 단계로 간주하면서, 이 책에서 그것을 시도할 것이다. 이 행성적 사유의 전개는 유기적 형식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할 것이다. 헤겔의 정치 철학을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근대 국가를 이성의 정점이자 자유와 윤리적 삶이 가능한 정치적 형태로 정당화한다는 점이다.[28] 헤겔의 정당화(Berechtigung)은 그의 변증법적 방법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연역된다. 변증법은 유기적 형태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것의 원리이기도 하다. 변증법은 유기적 형태에 도달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그 원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대 국가의 정치적 형태는 그의 초기 저술에서 실증적이고 기계적인 성격으로 인해 독일 헌법과 같이 심각한 비판을 받았던 국가와 달리 유기적이다.[29] 유기체는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서 상상적인 유기적 기계(imaginary organic machine)를 가리킨다.[30] , 그것은 아직 유기체가 아니다. <13>왜냐하면 유기체는 사실상 이미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또는 시몽동의 의미에서 그것은 이미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가에게는 어떤 목표이다.[31] 그 이유는 국가란 이성효능의 원리에 따라 유기체를 동화시키는 조직 형태이기 때문이다.

 

새롭게 등장하는 인식론을 정치에 투영하는 것은 그것이 사변적이고, 따라서 항상 시대를 앞서기 때문에 종종 문제에 직면한다. 젊은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에서 헤겔의 유기체적 국가에 문제를 제기하며 국가 유기체와 동물 유기체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유기적 국가의 특수성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그의 이론은 형식적이고 공허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중요한 이유는 마르크스가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마르크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이론적 작업을 위대한 진보로 인정했다), 마르크스가 헤겔 철학에서 그것의 중심적 역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32] 마르크스가 헤겔에 맞서 도입했던 바, 유물론과 관념론 간의 대립은 헤겔에 대한 어떤 의도된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은 정신의 기원이 이미 외화(externalization)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한 유기적인 것 되기(becoming organic)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그것이 헤겔의 정치철학의 섬세한 독해가 어떤 정치-기술학 논고(Tractatus Politico-Technologicus)의 기초인 이유이며, 앞서 우리가 헤겔주의적 국가를 상상적인 유기적 기계라고 불렀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관련된 질문은 행성적 사유로서 헤겔의 정치적 인식론의 한계는 무엇이며, 20세기에 그것을 계승한 것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두 가지 한계는 우리를 행성적 사고를 더욱 발전시키도록 독려했다. 첫째, 헤겔은 국가의 내부성에만 유기성(organicity)을 적용했을 뿐, 그 외부성을 향해서는 유기성을 적용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헤겔은 칸트가 국제 관계의 유기성에 대해 파악한 것을 거부했으며, 친구-적 관계에서 멈췄는데, 이는 칼 슈미트의 그것과 공명한다. 둘째, 헤겔이 개념화했던 상상의 기계는 잘 알려진대로 헤겔 학자 고타드 귄터(Gotthard Günther)가 그의 저서 기계의 무의식: 사이버네틱스의 형이상학(The Unconsciousness of Machines: A Metaphysics of Cybernetics)에서 주장했듯이 사이버네틱스에 의해 실현되었다.[33] 귄터의 결론은 헤겔의 논리에 대한 그의 헌신적인 연구와 미국으로 이주한 후 사이버네틱스로 방향을 전환한 데서 비롯되었다.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인 노버트 위너는 이미 사이버네틱스가 생기론과 기계론 사이의 이분법을 극복한다고 천명했다. 왜냐하면 피드백(feedback)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이버네틱 기계는 유기체의 행동에 동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고적으로, 우리는 또한 하이데거가 사이버네틱스가 철학의 완성 또는 <14>철학의 종말을 표시한다고 주장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머신러닝의 발전을 살펴보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아무리 빠르게 발전해 왔다고 해도, 그것들의 사이버네틱스적 기원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유기적인 기계가 기술 뿐 아니라, 예컨대 경제학, 생태학, 지구과학 등 다양한 영역에 속한다는 점을 판별할 수 있다.

 

이러한 탐구의 노선을 견지하면서, 우리는 사이버네틱스에서 철학의 완성이 또한 헤겔 법철학의 완성을 의미하는지 아닌지 묻고자 한다. 아니면 이 완성은 앞서 언급했던 바, 첫 번째 한계를 국민-국가의 내부에서 외부로 확장하여 수 세기 안에 다가오는 오메가 포인트’(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라는 이름으로 세계 정신의 이정표를 표시하는 거대한 유기 기계 혹은 특이점(커즈와일Kurzweil)을 구성하면서 넘어설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사변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행성적 사고에 적합한 정치 형태에 대해 생각해보는 데 있어 중요하다.

 

§3. 국민-국가 너머 행성적 정치학을 찾아서

국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가? 국가는 죽었고 주권자는 이미 글로벌 자본주의에 의해 해체되었다는 많은 풍문이 돈다.[34]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3부작은 국민국가의 잃어버린 대의와 새로운 혁명적 주체, 다중(multitude)을 위한 가장 체계적인 설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저자들에 따르면, 하나의 제국 다시 말해 글로벌 자본주의는 주권을 빼앗겼다.” 왜냐하면 주권자가 통화 및 군사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그것의 능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35] , 세계화는 모든 외부를 그것의 내부로 통합했다는 것이다.[36] 하지만 2016년 한 토론회에서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는 사실은 그 반대라고 네그리의 주장에 반박했다. 왜냐하면 지난 10년 동안 글로벌 금융 위기에서 은행을 구한 것은 결국 정부였기 때문이다.[37] 에스포지토의 말을 빌리자면 “(칼 슈미트의 공식을 사용하자면) 지구의 노모스는 생산, 유통과 함께 새로운 세계적인 지정학적 질서 안에서 어떤 종류의 책임 할당으로 되돌아가고 있다.”[38]

 

네그리는 에스포지토의 사고는 정확히 정치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반박했다.[39] 우리의 과제는 정치 면역론자(political immunologist)인 에스포지토를 옹호하는 것도, 마르크스주의 혁명가인 네그리를 반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팬데믹 이래, 국가가 결코 시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국민-국가-자본의 삼위일체는 더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파시즘과 민족주의는 <15>이탈리아를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널리 퍼져 있으며 주권과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한 모든 언급들은 단순히 즉각적인 것을 궁극적인 진실로 받아들인 잘못된 진단이다. 돌이켜보면, 밀레니엄이 끝날 무렵 반세계화 운동 기간 동안 다중에 관한 담론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반세계화 운동은 상대적으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대신에 우리는 당혹스러워 보이는 아나키즘적 태도들을 관찰할 수 있다. 보수적인 아나키스트인 오드리 탕(Audrey Tang, 대만 정부의 디지털 부서 장관), 유토피아 아나키스트 일론 머스크(그가 X에서 주장했던 바), 그리고 (<뉴 스테이트먼>(New Statesman)이 이름 붙인) 최후의 아나키스트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인물들이 그 예이다.[40]

 

정치 인식론에 드리워진 더 심오한 도전이 있다. 그것은 앞서 설명한 기계론과 유기체 사이의 대립, 마찬가지로 국민국가의 틀이라는 렌즈를 통한 현대의 정치적 사유 독해가 그것이다. 칼 슈미트의 저작은 이러한 맥락에서 주의 깊게 연구되어야 한다. 헌법 및 국제법 교수이자 제3 제국(Third Reich)의 법률 이론가인 칼 슈미트는 헤겔 이후 가장 심오한 행성적 사유의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슈미트는 헤겔주의자는 아니지만, 우리는 헤겔에 관한 슈미트의 저서에서 존경과 불만이 섞여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슈미트는 당대의 세 가지 유형의 법률 사상, 즉 결단주의(decisionism), 규범주의(normativism) 그리고 구체적 질서와 형식 사고” [konkretes Ordnungsund Gestaltungsdenken]를 구분했다. 우리는 슈미트가 말하는 규범주의를 기계론 또는 한스 켈젠(슈미트의 지적 경쟁자)의 실증주의에 상응하는 것으로, 그리고 구체적인 질서와 형식 사고를 유기체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헤겔의 국가에 관한 정치적 사유에서 예화된다. 왜냐하면 헤겔에게 국가란 질서들의 구체적 질서, 제도들의 제도이기 때문이다.[41] 슈미트의 입장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결단주의이며, 이것은 우리가 어떤 정치적 생기론(political vitalism)으로 공식화할 것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은 기계론에도 유기체에도 기반하지 않으며, 오히려 결단주의에 기반한다. 슈미트는 그의 정치 신학(Political Theology)에서 주권자를 예외를 결정하는 자로 정의했다.[42] 이 예외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과 우방과 적을 구분하는 것은 국민-국가에 영혼을 부여한다. 여기서 영혼이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홉스에 대한 슈미트의 논문에서 홉스의 국가 기계화와 데카르트의 인간 기계화를 비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43] 예외 상태를 선언할 수 있는 권력이라는 슈미트의 주권자에 대한 규정은 우리를 절대적인 <16>권력이 아니라 오히려 주권자가 정당성의 궁극적인 근거이기 때문에 그가 모든 합법성을 무시할 수 있게 하는 어떤 법적 틀거리이다.

 

이 정의는 주권에 관한 존재론적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 준다. 하지만 가장 당혹스러운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주권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는 여전히 실정법과 자연법 전통 모두에서 만족스러운 답을 찾고 있다. 실정법은 우리를 어떤 전제된 기본 규범으로 되돌아 가게 한다. 반면 자연법은 과거 수 세기 동안 그 토대가 역사적으로만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역사주의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왔다.[44] 슈미트의 생기론은 마르틴 하이데거가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 대한 세미나에서 말했듯이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일 수 있다. 그 세미나에서 우리는 칼 슈미트는 자유주의적으로 사유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1. 정치 역시하나의 영역(sphere)이기 때문이며, 2. 그가 개별성과 그것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사유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하이데거를 본다.[45] 이러한 언급은 칼 슈미트가 자유주의를 주권 붕괴의 맹아라며 끊임없이 비판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다. 거기서 그가 발견 한 것은 홉스와 근대의 자유민주주의이다.

 

이러한 정치적 생기론은 슈미트로 하여금 세계 대전과 그 새로운 역학 관계로 인한 주권의 미래에 대해 성찰하게 만들었다. 슈미트는 (먼로 독트린의 쇠퇴 이후) 미국 제국주의와 한때 세계 질서를 정의했던 유럽 공법 체제(Jus Publicum Europaeum)의 붕괴에 비추어 보면서, 국민-국가의 한계를 이해했다. 다시 말해, 유럽 공법 체제는 전지구적 공간 질서를 지배할 때, 본질적으로 유럽 중심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의 퇴락은 주권자의 독립성을 내세우는 새로운 전지구적 공간 질서의 등장을 암시한다.

 

슈미트의 지구의 노모스(nomos)에 대한 이론 전개는 국민-국가 이후 새로운 정치 형태와 행성적 사유의 역사를 제공하려는 시도이다. 이 역사는 곧 우주 정복과 공간 혁명의 역사이다. 슈미트는 지정학의 원소 철학을 대지의 노모스에서부터 바다의 노모스 그리고 마침내 대기의 노모스에 이르기까지 교묘하게, 아마도 매우 교묘하게 전개한다. 슈미트의 이론적 시도에서 그가 암묵적으로만 인정했지만 근본적인 것은 기술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슈미트의 정치 사상을 정치-기술학 논고로 읽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의 중립화와 탈정치화의 시대(1929)에서 슈미트는 이미 20세기에는 기술을 중립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제안했다. 공간 혁명은 기술 발전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양 권력의 발전은 산업 혁명이 없었다면, 즉 베헤모스(유럽 대륙)<17>리바이어던(영국) 사이의 대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항공기의 발명으로 가능했던 대기 권력으로, 몇 시간 안에 여러 주권 국가를 가로질러 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슈미트는 지구의 새로운 노모스(The New Nomos of the Earth, 1955)에서 미래의 행성 정치를 파악하기 위해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안했다.[46] 첫째, 개별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한 구성은 변하지 않은 채 남는다. 둘째, 서양과 동양 간의 통일(동양에는 소련과 중국이 포함된다). 그러나 슈미트는 통일이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세 번째 시나리오는 새로운 정치적 형태로의 발전인데, 그는 이를 Großraum 즉 거대공간이라고 부른다. 슈미트에 따르면, Großraum은 헤겔의 정치적 국가로 했던 것과 같이 정당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Großraum은 슈미트에 따르면, 세기 전환기에 기술-산업-경제-조직 영역[Bereich]”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이 시기에 에너지와 전기 공급이 소공간(Kleinräume)에서 거대공간경제(Großraumwirtschaf)로 통합되었다.[47]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육지와 바다에 이어 대기에 의한 공간 혁명이 가져온 상상력이다. 지리학자 죠프 만(Geoff Mann)과 조엘 웨인라이트(Joel Wainwright)는 그들의 책 기후 리바이어던-우리 행성의 미래에 관한 이론(Climate Leviathan: A Political Theory of Our Planetary Future)에서 기후 변화가 기후 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르는 행성적 주권의 출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행성적 주권은 지구상의 생명체들의 안전을 위한 비상 사태를 결정할 것이다.[48] 슈미트를 언급하면서도 그들은 슈미트가 인류의 이름으로 말하는 모든 정치적 제도들에 회의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행성적 주권을 즉시 거부할 바로 그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 한 것 같다. 만약 슈미트에게서 행성적 사유의 발전이 있다면, 그것은 행성적 주권이 아니라 거대공간이다.

 

거대공간은 미국 제국주의의 보편주의에 저항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보편주의는 보편화(universalization), 즉 배타적 진리로 간주되는 일련의 가치와 지식에 대한 촉진과 보급이다. 슈미트의 정치적 생기론과 거대공간은 헤겔의 유기체와 국민국가를 계승하여 미래의 행성적 정치의 청사진이 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미트의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참여와 그의 제 3제국에 대한 정당화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소위 지식인들이 하이데거와 여타 사상가들에 대해 하는 것처럼, 그의 모든 생각을 무조건 불신하고 거부해서는 안된다. 슈미트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는 국가 사회주의를 철학적 프로젝트로서 정당화하고자 했다. 그리고 우익이자 전통주의자인 알렉산더 두긴(Alexander Dugin)은 슈미트의 거대 공간을 받아들여 자신의 <18>에 통합했으며, 유라시아 프로젝트 - 우크라이나에서의 특수전’ - 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했다. 이것은 슈미트에 대한 논의가 그의 사유에 관한 단지 어떤 가치절하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정치적으로 옳지만 철학적으로는 불충분하다. 대신 우리는 대신 슈미트 이론의 한계를 드러내야 하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와 자유 양자 모두를 방어하는 행성적 사유를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태 위기라는 새로운 도전과 디지털 기술의 경쟁 심화를 고려할 때, 슈미트의 주권 이론과 거대공간의 한계는 무엇인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4. 행성에 관한 정치-기술학 논고를 향해

헤겔과 슈미트는 이 작업에서 자세히 다룰 두 명의 핵심 사상가이다. 이들의 저작은 우리가 간과할 수 없고 그저 단순히 채택할 수 없는 국가와 행성적 사유에 대한 몇몇 가장 근본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헤겔의 법철학과 슈미트의 지구의 노모스에 관한 우리의 독해는 행성적 철학의 역사적 궤적을 구성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술을 정치-기술학 논고에 재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치-기술학 논고는 스피노자에 따른 기하학적 방법이 아니라 대수적 방법을 사용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이전 작업에서 정의한 재귀성 개념이다. 그러나 헤겔의 정치적 국가와 슈미트의 거대공간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 설정된 행성적 사유를 탐구하는 기획은 곧바로 질문자들과 그들이 속한 학문 분야에 의해 부과된 자체적인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탐구하는 내내 이 한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실, 행성적 사유는 정치경제학, 지구 과학, 생태학 등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다. 우리는 행성의 존재발생론[49] 또는 가이아의 침입[50]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할 수 있다. 심지어 우리는 행성의 소멸에 관한 공상 과학 이론을 개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가 여기서 추구할 길은 아니다. 우리는 정책 보고서와 같은 구체적인 방식으로 행성적 사유를 정의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조사 범위를 좁히면서 동시에 이를 통일된 방법론으로 일반화할 것이다. 기술과 정치적 인식론, 또는 인식론 전반의 관계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역할을 한다.

 

지구라는 초월적 형상에 의존하지 않고 헤겔과 슈미트가 했던 것을 넘어 어떻게 행성적 사유가 발전할 수 있는가? 심지어 <19>우리가 심지어 가이아의 초월성을 조명함으로써, 합리주의 자들에 맞서야 할 필요성에 있어서 이사벨 스탱거(Isabelle Stengers)에 동의한다 해도, 가이아의 침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술 및 경제 활동이 스스로를 억제 할 것인지 의심스럽다. 현재의 생태학적 돌연변이와 그와 관련된 극심한 기후 변화는 자본의 게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각성시킨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우리는 여러 장에 걸쳐 이 저자들과의 가능한 어떤 대화도 염두에 두면서 동시에 또 다른 탐구 노선을 개발하기를 희망한다. 사실, 우리는 독자들이 알게 되겠지만, 이 책 전체에 걸쳐 펼쳐 나갈 정치적 형태에 있어서 초월의 다양한 입장은 초월적인 것로부터의 해방을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 국가, 거대공간의 공간 혁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구 자체로 이어지는 겉보기에 논리적으로 보이는 순서는 실제로는 서로 동시대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아직 국가의 소멸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 할 수 없으며, 또한 우리가 지금 거대공간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거대공간을 벗어날 수는 없다. 대신, 우리는 정치적 국가가 가족과 시민 사회가 근대 국가로 가는 디딤돌이었듯이 행성적 사유의 발전에서 한 단계를 나타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근대 국가의 완성은 가족과 시민 사회의 제거로 이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가라타니(Karatani)가 양식 B(국가 강제 분배)와 양식 C(자본주의)의 뒤를 잇는 국가 연합, 양식 D를 제안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양식 D는 양식 A(선물 경제)가 더 높은 형태로 되돌아오는 것으로, 거기서는 주권이 선물이 된다. 주권이 선물이 될 때 주권 국가는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교환 양식 D는 이념으로 남아 있다. , 어떤 규범적 원리가 이것을 이끌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기술적 어려움은 동시성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한 국가 또는 두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그러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 이웃 국가들에 의해 곧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세계 혁명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이다. 따라서 세계 혁명은 모든 국가가 동기화될 때만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에 국가 연합은 단지 어떤 가상(Schein)일 수 있다.[51]

 

세계 공화국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모든 정치 신학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 일어날지는 결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혹스럽게도 가라타니는 칸트가 세계 공화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슈미트가 세계 국가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는 슈미트가 교환을 통해 국가를<20> 폐지 할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52]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슈미트는 세계 국가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세계 국가는 그에게 절대적인 탈정치화와 동질화를 의미하며, 소비주의와 여흥만을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공존의 지구 정치를 구상하기 어려운 이유는 공존의 행성적 정치가 무엇보다도 먼저 차이를 인지하고 다양한 형태의 삶의 이질성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며, 단일한 관료 시스템은 이를 거의 달성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것은 가장 강력한 국가에 의해 조작될 가능성이 높다. 이질성과 다양성은 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유지되어야 하고, 개발되어야 한다.

 

정치-기술학 논고는 기술 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기술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유기체론과 기계론, 생기론을 나란히 놓고, 그것은 정치의 영역에서 기관론의 가능성을 살핀다. 일반 기관론(general organology)이라는 용어는 조르주 캉길렘[53]이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1907)를 규정하기 위해 처음 사용했다. 기관론(원래는 악기에 대한 연구)은 기술적 도구를 인공 기관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에서, 기술과 신체의 다른 부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이다. 기관론은 기술 결정론과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하는데, 이는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토대이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수동 제분소는 봉건 영주와 함께 사회를 제공하고, 증기 제분소는 산업 자본가와 함께 사회를 제공한다.”[55] 기술 결정론과 대조적으로 기관론은 모든 새로운 기관이 갈등을 생산한다고 제안한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연구가 필요하다.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기술 가속화는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부정적 기관론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술-지향 프로그램은 먼저 우리가 기술생태다양성(technodiversity)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56] 기술생태다양성, 지식다양성(noodiversity), 생물다양성은 국민-국가와 인류세를 넘어 공존의 새로운 언어를 체계적으로 구상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여기서 개괄한 관련 사항들을 다룰 것이다.

 

1, “행성적 사유로서의 세계 정신에서는 행성적 사유로서의 세계 정신에 관한 헤겔의 이론을 독해하고, 자유와 정치 형태 사이의 관계를 해석한다. 2, “국가 유기체와 그 한계에서는 헤겔의 유기체로서의 국가에 대한 설명과 함께 청년 마르크스의 비판을 다루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헤겔의 유기체적 사고의 한계를 모종삼(Mou Zongsan)과 자오팅양(Zhao Tingyang)을 읽음으로써 살펴볼 것이다.

 

<21>3, “지성적(Noetic) 반성으로부터 행성적 반성으로에서는 헤겔의 인간학에서 출발하여 인간-지구의 관계를 개관한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헤겔적 동기가바이오경제(bioeconomy)와 사이버네틱스의 영역에서 어떻게 더 추적될 수 있는지 살펴본다. 4, “기계론, 유기체론 혹은 결단주의에서는 3장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슈미트의 부정적인 반응과 기계론과 유기체론을 거부하는 슈미트의 정치적 생기론 그리고 국가 인식론에 대해 살핀다. 5, “디지털 지구의 노모스에서는 슈미트의 주권과 거대공간 개념을 살펴보고 디지털 주권과 행성적 거버넌스에 대한 현재의 논쟁에 대응하는 그의 이론을 평가한다. 마지막으로 6, “전쟁 기관론에서는 베르그송의 전쟁 비판에 대한 긴밀한 참여와 앙드레 르루아- 그루앙에 대한 그의 영향 통해 전쟁의 근원을 이해하고 공존의 새로운 언어를 파악하기 위해 기관론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점에서 민주주의와 다양성의 의미를 명확하게 밝힌다. 7인식론적 외교를 향해에서는 생물다양성, 지식다양성, 기술생태다양성의 틀을 설명한다.

 

<23>

1. 행성적 사유로서의 세계 정신(World Spirit)

 

세계사는 세계 정신이 어떻게 점차적으로 진리에 대한 의식과 그것에 관한 의지로 도래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이 의식과 의지는 정신 안에서 점점 밝아진다. 정신은 그것의 핵심을 발견하고 결국에는 완전한 의식에 도달한다.”

- 헤겔, 법철학 강요

 

정신의 개념에 속하는 이 외부성의 지양이 바로 우리가 정신의 이념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정신의 모든 활동은 정신 자체인 바, 다름 아닌 외적인 것을 내면성으로 끌어들이는 다양한 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정신은 오로지 이러한 끌어들임을 통해, 외부적인 것의 이념화 또는 동화를 통해 정신이 된다.

- 헤겔, 정신의 철학

 

§5. 역사적 과정으로서 정신의 개체화(Individuation)

행성적 사유의 여정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우리는 세계정신(Weltgeist)이라는 이름으로 행성적 관점을 설명하면서, 정치적 국가를 자유의 조건으로 정당화한 철학자 헤겔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이유로 헤겔의 논리적 주장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한계를 파악하면서 헤겔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헤겔의 행성적 사유에 참여하려면 어떤 지성의 숙련, 사변적 노력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먼저 서론에서 설명한 정치적 인식론의 문제부터 시작하겠다. 재귀성과 우발성이후, 우리는 기계론과 유기체론 사이의 대립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탐구했다. 그것은 기계론과 유기체론의 격절(rupture)로서 근대 서구 사유에서 어떤 패러다임 전환으로 특징지어진다. 요컨대 기계론은 어떤 제일 원인을 추적할 수 있는 선형 인과성으로 규정된다. 이를테면 기계식 시계를 상상해 보라. 우리는 그 스프링으로 원인을 추적할 수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한 부분이 우연찮게 고장 나면 깨지기 쉽고, <24>전체 인과 연쇄는 실패하게 된다. 반대로, 유기체는 비선형적 인과성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즉 제일 원인은 자명한 것이 아니고, 어느 한 부분에 사고가 발생하면 전체가 항상 재귀적으로 스스로를 조정한다. 재귀성과 우발성은 특히 판단력 비판에서 철학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유기적이어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철학에 유기적 조건을 부과한 것이다. 오늘날 기계론과 유기체론 사이의 대립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진부하게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완벽한 휴머노이드 로봇을 만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하고, 생명체를 기계로 축소할 수 있는지 여부도 완전히 의심 스럽기 때문이다.

 

기계론에서 본질적인 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고 선형적 인과관계를 자연의 진실로 간주했기 때문에 사변적 이성의 용기는 자신의 미성숙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성은 자신의 미성숙함을 인정해야만 이성은 그것의 성숙 혹은 절대적인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 본질, 즉 역사적 진리라고 할 수 있는 본질은 단 한 번만 타당하다.[1] 그 후, 그것은 의식의 여정또는 합당한 정신의 오디세이”[2]에 따라 응답되어야 할 질문 또는 도전으로 제기된다. 유기체론와 기계론 사이의 이러한 구분은 유기체가 살아있는 세계와 친화력을 가지는 비선형적 형태의 조직 혹은 추론으로 이해될 때에만 의미있다. 무언가 선형적 인과관계를 가진 반복적인 작업에 의해 지배되는 어떤 것은 기계론[메커니즘]을 결여한다. 이성을 유기적 형태와 동일시하는 것은 이성의 비자명성(nontriviality)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은 [이성적 과정이] 선형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자명성이다. 대신, 그것은 항상 역설적이며 단순화에 저항한다. 이 구분은 진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이념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현대의 상황에 비추어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실마리이다. 기계론과 유기체론은 또한 두 가지 종류의 정치적 인식론으로 드러나며, 그것은 두 가지 거버넌스 양식, 두 가지 메가머신에 대한 상상력, 또는 국가에 대한 두 가지 개념으로 반영된다. 예컨대 에드먼드 버크는 그의 정치적인 글에서 전체는 부분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헤겔주의자 에른스트 캅의 주장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독재를 기계론으로, 자유를 유기체로 규정한다.[3] 또한 이것은 사이버네틱스에서 영감을 받은 최근의 정치 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4] 또한 우리는 헤르더(Herder), 노발리스(Novalis), 슐레겔(Schlegels)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들은 각각 다른 버전의 유기적 공동체주의(organic communitarianism)[5]를 국가 기계 - 문자 그대로 하향식 및 선형적으로 운영되는 국가의 기계화를 의미 - 에 대한 반응과 비판으로 제시한다.

 

<25>이성과 국가, 정신과 세계사 사이의 관계에 대한 헤겔의 논문은 정치 철학에서 복잡미묘한 것으로는 독보적이다. 헤겔의 프로젝트는 그의 동료이자 경쟁자인 셸링을 포함하여, 헤르더나 낭만주의자들의 그것과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6] 반대로 헤겔의 법철학은 한편으로는 기계론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기체와 기술 혹은 목적론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을 극복하려는 하나의 노력으로 보아야 한다. 이 극복은 또한 지양(Aufhebung)인데, 왜냐하면 두 가지를 모두 극복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필요한 것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무비판적 수용이란 유기체의 개념을 자연에서 가져와서 자연과 동등하게 만들며, 따라서 자연을 인공적인 것보다 우선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 유기체론의 독단적 수용에서, 자연은 영감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기반이기도 하다. 나아가 (칸트, 쉴러, 헤르더가 말한 것처럼[7]) 인간 종의 과제로 제기된 인간성의 실현은 따라서 자연에서 발견되는 자질들의 어떤 융합이다. 인공적인 것을 넘어서는 유기적 자연의 우선성은 종종 기계론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또한 두 가지 전제 위에 근거지워진다. 한편으로 그것은 창조 신학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론적 설명으로 환원 할 수없는 유기체에 관한 과학적 개념이다. 초기 유기체 철학자 중 한 명인 칸트에게 있어, 이러한 인간성의 실현은 자연의 숨겨진 프로젝트(Vollziehungeines verborgenen Plans der Natur[8])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숨겨진 것이다. 이 목적지는 인간 종에게 알려지지 않지만, 인류의 진보 또한 마찬가지로 이성의 성숙을 향한 진보이다. 하지만 칸트는 자연에서 멈췄고, 기껏해야 어떤 정치 철학을 제안했을 뿐 제대로 된 역사철학을 제안하지 않았다. 레오 스트라우스가 지적했듯이, 역사 철학은 칸트의 세 가지 비판에서 거의 또는 전혀 역할을 하지 않는다.[9] 스트라우스는 또한 칸트가 역사철학을 발전시키려 했다면 헤르더와 대면해야 했을 것이다고 언급했다. 우리가 알다시피, 칸트는 헤르더의 역사 철학에 대해 두 개의 리뷰를 발표했다.(인류의 역사 철학Philosophy of the History of Mankind, 1784-91 인간 역사에 관한 추찰Junctures on the Beginning of Human History, 1786), 여기서 헤르더는 시인으로, 그의 작품은 시작(poetry)으로 명명된다.[10] 칸트의 해결책은 단순히 “[역사철학]을 체계에 적절하게 진입하도록 허용하는 것”[11]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의 근거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슈트라우스의 것과는 다르다. , 역사 철학은 헤겔에서만 가능하며, 헤겔은 헤르더의 영향을 받아 정신의 조건으로서 제 2의 본성(관습, 습관)의 기원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26>앞서 우리는 칸트가 철학하기의 유기적 조건을 이끌어 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그는 유기체 개념을 철학의 거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한다는 것이다. 반성적 판단에 따른 이성의 유기체적 본성의 공식화는, 판단력 비판에서 발견되는 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에서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던 합목적성과 도덕성에 관련된 작업을 명확히 한다. 실제로 칸트는 판단력 비판64절은 어떤 유기체에 대한 설명에 전념하는 단락으로서 유기체와 국가 사이의 유비를 묘사한다.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유비를 어떤 통합을 조명하는 즉각적인 물리적 목적에 비유할 수 있지만, 이는 사실에서 보다 관념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따라서 최근에 수행 된 바, 위대한 민족이 국가로 완전한 변형하는 경우, 조직화(organization[유기화])라는 단어는 자주, 그리고 매우 적절하게도, 법적 권위 그리고 심지어는 정치체 전반의 구성에 사용되었다. 이런 종류의 전체성이란 확실히 어떤 구성원도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하며, 그 구성원이 전체 정치체의 가능성에 기여하는 것은 그의 위치와 기능이 전체성의 관념에 따라 차례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2]

 

흔히 위대한 민족이 국가로 (...) 변형하는은 미국의 설립을 가리키며,[13] 그것은 민족의 사회성뿐만 아니라 연방 시스템과 국가와의 관계가 유기체와 유비적으로 비교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와 유기체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여전히 어떤 유비이다. , 칸트는 헤겔이 나중에 법철학 강요에서 그럴 것처럼 국가 유기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헤겔은 유기적인 것이라는 관념을 단순히 유비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실재”[14]를 갖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자유의 정치적 인식론으로서 유기적인 것만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헤겔의 생각을 완전히 밀어 붙여, 일종의 기계-유기체 자체를 표명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은 자연과 인공, 유기체론과 기계론 사이의 이러한 대립은 헤겔 철학에서 화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대립은 변증법 논리의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논리는 마침내 유기체론과 기계론 사이의 대립을 승화시키는데, 이는 필요한 것을 보존하고 우발성(contingency)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변증법은 <27>0+1=1도 아니고 1+1=2도 아니며, 오히려 정립과 반정립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어떤 통일을 겨냥한다. 대조적으로, 그와 같은 통일은 단순한 추상이나 범주 대신 가장 구체적인 용어로 생각된다. 따라서 특수성과 대립되는 보편성은 진정한 보편이 아니다. 헤겔이 지향하는 보편은 모든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특수한 것의 가능성이다. 오로지 보편성이 달성될 때에만 합리성과 유효성이 일치할 수 있다. 보편적인 것은 이성의 욕망과 그것의 자기-동일성이다. 마찬가지로 헤겔에게 필연성은 우발성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은 우발성이 절대적 필연성을 향하는 그 자신의 가능성임을 안다.[15]

 

유기체적 논리로서 변증법은 모든 형태의 존재를 집어삼킬 수 있는 괴물처럼 기능한다. 이 변증법적 논리는 개체발생(ontogenesis)과 자연발생(autogenesis, 헤겔은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16]을 함축한다. 이는 개념의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영역에 적용될 수 있다. 존재론의 영역에서, 그것은 존재와 생성으로서의 무(nothing, 논리학서문) 사이 대립의 승화이며, 정치의 영역에서는 (욕망에 의해 정의되는) 개인과 공동체를 구체적이고 합리적이며 보편적인 국가로 승화하는 것이다. 국제 정치의 영역에서 그것은 서양과 동양 사이의 대립의 세계정신(Weltgeist)적 승화이며, 행성적 자유를 향한 진보이다. 모순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증법적 운동의 전제 조건이 된다. 변증법은 현상 이면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념(이데아Idea)와 달리 헤겔의 이념(이데Idee)은 세계초월적인(transmundane) 것이 아니라 현상이나 심지어 역사적 진리까지도 일시적인 것이며 단지 겉모습에 불과한 어떤 운동의 세계이다. 따라서 변증법을 개체화의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충분히 정당할 수 있다.

 

§5. 역사적 과정으로서 정신의 개별화

헤겔의 개체화 이론은 세 겹(triad, 또는 삼단논법)의 게임으로서, 세 겹의 각 요소는 차례로 다른 세 겹으로 구성된다. 세계 또는 심지어 우주 자체도 이 세 겹의 규칙적인 순환적 생성과 소멸로 볼 수 있다. 헤겔을 읽을 때 한 가지 어려운 점은 이전 세 겹으로 끊임없이 반복 순환해야 하지만, 각각의 요소는 다른 세 겹을 참조하기 때문에 반복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복잡한 재귀 알고리즘을 추적하고자 할 때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28>그리고 지난한 세 겹의 목록에서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 각 세 겹에는 개념의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경향은 욕망(Begierde)이다. 개념의 각 변증법적 운동은 다른 변증법적 운동에 기여한다. 헤겔의 우주는 어떤 사이키델릭한 생성처럼 지양된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세 겹의 형식으로 재귀적으로 생성되고 변형된다. 세계는 기계적으로 움직이지도 않고 우발성에 쉽게 노출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변증법적으로, 즉 재귀적으로 개체화된다. 헤겔은 재귀성이라는 단어에 의존하지 않았고,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그들은 순환(circular)과 같은 기존 용어를 재사용하거나, 또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그러나 순환은 물론 단순한 반복을 의미하는 바, 그것은 분명 시작과 끝의 차이가 없다. 예컨대 모든 부품이 동일한 절차를 반복하는 폐쇄형 자동기계가 그것이다. 그러나 재귀는 이와는 다르다. 재귀는 순환적이지만 두 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처럼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영혼은 제 시간에 시간에 따라 개체화한다. 영혼의 첫 번째 형태인 주관적 정신[17]의 첫 번째 형태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볼 수 있듯이 반복적으로라기 보다, 재귀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생각하는 능력인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하지 않을 능력이기도 하기 때문에 순환적일 수 없다고 비판했다. 만약 사고가 저지될 수 있다면 그것은 순환적이지 않다.[18] 돌이켜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점에서 선형적 사고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반복적이지 않은 순환적 형태 즉, 재귀성을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선형성 사상가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했을 때 시간적이든 인과적이든, 절대적인 시작에 대한 질문에 시달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Α권에서 이를 강조했다. “무한한 계열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선을 파괴한다. 만약 그가 어떤 유한한 것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19] 계열이 무한하다면 텔로스(telos, 목적)가 존재하지 않으며, 텔로스가 존재하지 않는 한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제일 원동자(prime mover) 즉 다른 원인의 결과가 아닌 무조건적인 원인, 절대자를 요청하는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선형적이지 않다. 절대자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그것은 단지 즉각적이고 추상적인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헤겔에게 있어 누스(nous, 정신)는 자기 분화 및 자기-의식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회귀로 구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De Anima)에 있는 누스와 관련된 파스케인(πάσχειν, 겪음, 정념, 감응)과 에네르게인(ένεργεν, 가능, 잠재)에 대한 헤겔의 해석은 그의 정신 철학(Philosophy of Mind)역사철학 강의(Lectures on the History of Philosophy)에 수행되는데, 이는 오독이자 부끄러운 내용 중 하나로 비판된다.[20] 역사철학 강의에서 헤겔은 제일 원동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신은 순수한 활동성[현재성, reine Tätigkeit]. (...) [그는] <29>그 잠재성 안에 또한 그 자신의 활동성, 즉 그 자신의 본질[potentia]이 그 자체로 활동성을 가지며, 그 안에 그 둘은 분리되지 않는 바, 그러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 안에서 가능성은 형식[형태]과 구별되지 않으며, 그 자체가 자신의 내용, 다시 말해 그 자체의 결정성을 생산[produziert]하는 것이다.”[21] 신은 더 이상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유출의 지점이 아니라 오히려 원, 즉 순수한 활동성이다. 이는 주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주체는 물질이기를 멈추기만, 오히려 순수한 활동이 된다. 이러한 순환적 사유의 이미지는 헤겔이 아리스토텔레스 텍스트에 자신의 개별화 이론을 덧씌우는 바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오독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22]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의 주장대로 헤겔은 목적론적 순환성과 재현적인 선형성 사이의 사변적인 관계”[23]를 설정한다. 변증법은 개체화의 이론이다. 즉 모든 것은 개체화하며, 따라서 추론 결과로서 생성하는 것, 즉 존재--생성 안에 있다. 정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초기단계에서 성숙단계에 이르기까지 세 겹의 장면 안에서 운동한다. 개체화는 자연철학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연철학은 우발성을 아직 완전히 극복 할 수 없는 변증법의 한 예일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은 그 이전의 다른 철학자들을 넘어선다. 그 철학자들 중 대부분은 개체화를 자연이나 신의 관점에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는 개념과 존재의 불가분성이자 과정의 내재적 인과성으로서 자기 원인(causa sui)이라는 개념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서 스피노자는 실체의 통일성을 긍정하고 서양적 개체성 원칙이 결여된 어떤 동양적 관점의 희생양이 된다.[24] , 스피노자의 실체는 총체성, 다시 말해 신으로 [세계 안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정신현상학서문에 나오는 어두운 밤의 은유와 밀접하다. 비록 자기 원인은 이미 자기-인과 따라서 운동을 의미하지만, 이 과정은 변증법적 방법이 결여되어 있다. 스피노자의 방법은 기하학적이기 때문에 수학적이며 형식적이다. 속성은 헤겔에게 단지 외부로부터 실체를 반영하는 형식과 표상이다. 그리고 실체는 내재적 반성이 불가능하다.[25] 스피노자의 개체화 이론에서 나온 유명한 언명, 모든 결정은 부정이다(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는 헤겔에게 있어서는 (외부에서 오는) 부정의 결정일 뿐, 아직 부정의 부정은 아니다. 헤겔에서 정신의 개체화는 변증법적이고 목적론적이며 따라서 역사적이다. 정신은 시간 속에서 그리고 시간으로 개체화된다. 아니면 우리는 아마도 정신현상학의 마지막 단락, 시간은 거기 존재하는 바 개념 자체이다.”(Die Zeit ist der Begriff selbst, der da ist)를 따라 정신을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30>시간은 거기 존재하는 바 개념 자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에 대해 텅 빈 직관으로서 그 자체로 현존한다. 이러한 이유로 정신은 필연적으로 그것이 순수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는 한, 즉 시간을 무화하지 않는 한, 시간 안에 출현한다. 그것은 외부, 즉 자아(the self)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 직관적인 순수자아이다. 단순한 직관적 개념이 스스로를 파악할 때, 그것은 그것의 시간-형식을 지양한다[hebt seine Zeitform auf]. 그것은 이러한 직관하기를 파악하며, 직관하기를 파악했으며, 또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시간은 아직 그 자신 안에서 완결되지 않은[der nicht in sich vollendet ist] 운명과 필연성으로 출현한다.[26]

 

개념은 어떤 미리 주어진 형식을 가지지 않는다. 또한 개념은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해 날것의 물질에 스스로를 부과하는 주형틀도 아니다. 개념은 시간으로서 그리고 시간 안에서 스스로를 실현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개념 자체이며, 반면 개념은 시간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의 지양된 시간-형식으로서의 어떤 시간(a time)이다. 개념 시간 간의 분리는 우리가 개념이나 시간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개념은 외재화와 내재화를 통해 실현된다. 따라서 개념은 시간을 요구하지만, 또한 정확하게는 시간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한 운동이 없다면 시간은 순수 생성(또는 헤겔이 말하는 바, 시간 형태Zeitform)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러한 생성은 그 자체로 우연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발성 없이는 진행될 수 없다. 우발성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절대자에 도달할 때까지 그것의 논리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27] 다음에 나오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결론부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절대자-역자]의 획득은 그것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아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 실체를 아는 것, 이 앎은 그 자체로 안으로 물러나는 것[자기성찰Insichgehen]이며, 거기서 외부 존재를 포기하고 그 실존적 형식을 기억에 넘겨주는 것[Erinnerung]이다. 따라서 그 자신 안으로 흡수 되는 것, 그것은 자기-의식의 밤으로 가라 앉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밤에는 사라진 외부 존재가 보존되고 이 변형된 실존 - 이전엔 실존이지만 이제는 정신의 지식으로 다시 태어났다 - 은 새로운 존재, 새로운 세계 및 새로운 정신의 형태이다. 이러한 새로운 실존의 즉자성 안에서 정신은 마치 이전의 모든 것이 상실되었고 이전 정신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던 것처럼 스스로 성숙하기 위해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기억[Er-innerung], 내면화, 그 내면의 경험은 그것을 보존 해 왔으며 내면의 존재이고, 사실상<31> 물질의 더 높은 형태이다. 따라서 이 정신은 새롭게 시작하고, 분명히 자신의 원천으로부터 스스로를 성숙시킨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시작하는 지점은 더 높은 수준이다. 외부 세계에서 이렇게 형성된 정신의 영역은 한 정신이 다른 정신의 짐을 덜어주고 각각은 전임자로부터 세계 제국을 이어받는 시간(Time) 안에서 어떤 연속성을 구성한다. 그들의 목표는 정신의 깊이의 드러남이며, 이것이 바로 절대 개념(absolute Notion)이다.[28]

 

우리는 역사란 정신의 자기-지식이라고 알고 있다. 이 지식에는 이념의 외재화(살아있는 개념 또는 개념의 삶)를 포함한다. 이 외재화는 플라톤적 형상의 예화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과 같은 물질에 대한 이념의 각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념의 어떤 지속적인 자기-실현이며 자기-결정을 위해 그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 외재화 과정은 기술적 장치, 저서(writings), 하부구조 그리고 기관들을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기술적이다. 이러한 외부화 과정은 만약 우리가 앙리 베르그송과 앙드레 르루아-구랑의 이 용어를 사용한다면 어떤 경향성(tendency)이다. 베르그송의 경우 생명의 약동(élan vital)은 각기 다른 두 가지 경향들, 즉 본능(insinct)과 지능(intellect)으로 표현되는 가장 근본적인 경향이며, 이때 지능은 도구를 생산하고 도구들로 도구를 생산한다. 르루아-구랑에 따르면, 이러한 근본적 경향성은 기억의 외재화, 즉 신체 기관의 해방이다. 헤겔의 제자이자 기술 철학에 관한 책을 저술한 최초의 철학자인 카프(Kapp)는 외재화는 내면화 될 기관의 투사(projecton)로 간주되며, 이 순환 형태는 자기-의식을 조건 짓는 것이라고 논한다.

 

자의식은 외부 지식이 내부 지식으로 변환되는 과정의 결과임을 증명한다. 이 지식은 다시 외부로 향하고 외부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여 우리 내부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계 안에서의 우리 지향과 일반적으로 우리의 자기-지향, 모든 지식[Wissen]의 내용, 즉 학문[Wissenschaften]이 가진 끝없는 복잡성 속에서 그것을 생산한다.[29]

 

그러므로 헤겔의 변증법이 유물론적 변증법과 모순되는 관념적 변증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념은 <32>물질적 타자 없이는 전개될 수 없기 때문이다.[30] 개별화 과정에서의 부정성은 외부로부터뿐만 아니라 정신 자체의 행위, 즉 우발성과 부정성 둘 모두의 잠재적 원천인 어떤 행위로부터도 온다. 자신에게 돌아갈 때 정신은 조직화[기관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기억(erinnern)할 뿐만 아니라 내면화(er-innern)해야 한다. 기억하고 내면화하는 것은 외부화되는 동일한 행위의 일부이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이 행위는 끝이 없다. 그것은 자기-의식의 밤에 빠져드는 것과 같이 끝이 없다. 그것은 일반적 욕망이다. 헤겔에게 욕망은 심리적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이다. 욕망의 대상, 즉 절대자는 그 자체로 결코 주어지지 않고 어떤 순간에도 그 자체로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욕망한다는 것은 고된 작업에 착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돌아오는 자기-의식의 행위 또한 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내면의 자아로 돌아갈 때마다 외적인 행위성을 통한 내적 자아로의 회귀는 새롭게 시작하는 또 다른 행위의 시작일 뿐이다(A->B->C->A'). 하지만 이 새로운 시작은 더 높은 수준의 자기-의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풍부하다(A->B->C->A'->B'->C'->A").[31] 개체화의 목표는 절대적 개념 또는 절대적 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