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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변하는 현대철학 용어사전

'내재성 / 내재성의 평면(from 들뢰즈 사전들)

by Nomadia 2019. 6. 29.

Vasily Kandinsky, Composition 8, 1923


흄에 관한 최초의 제대로된 철학적 저서에서부터 들뢰즈는 내재성의 철학에 대한 기미를 보인다. 이를테면 그는 경험론과 주체성에서 철학은 항상 분석의 평면을 찾아왔다”(Gilles Deleuze, Emprisme et subjectivité. Essai sur la nature humaine selon Hume, PUF, 1953, 92)고 말한다. 그것은 경험주의의 운명일 것이다. 다른 한편 평면이라는 아이디어는 정신분석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적 사유와 존재의 운동을 기하학이나 위상학에 따라 묘사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어떤 표면의 운동이며, 그것을 들뢰즈는 평면이라는 다른 용어로 표사한 것이다. 예컨대 의미의 논리에서부터 들뢰즈는 순수한 표면’, ‘형이상학적 표면’, ‘커튼, 카펫, 망토등을 철학적 개념으로 정련했으며, 마침내 기관없는 신체에 대해 논한다. 이것은 어떤 표면의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이 완연한 헤게모니를 가지고 전체를 지배하는 책은 철학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들뢰즈는 과학을 지시의 평면(paln de référence)으로, 예술을 일관성의 평면(plan de consistence)으로, 철학을 내재성의 평면(plan d’immanence)으로 규정한다. 지시의 평면이란 현실적인 것으로만 구성되며 무한에 대한 사유는 포기하거나 연기하는 평면이며, 일관성의 평면은 정동과 지각으로 형성되고 유한한 것에 의해 창조되지만 이로부터 무한을 드러내는 평면이다. 마지막으로 내재성의 평면은 개념으로 구성되고 무한을 표현하는 평면이다.

 

그렇다면 이 평면의 구성 또는 특성은 어떻게 규정되는가? 그것은 우선 카오스. 카오스는 또한 속도. 다시 말해 카오스는 너무 빠르게 나타나고 사라져서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는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태는 규정성의 부재가 아니라 넘치는 규정성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는 이 상태를 미적분적 사유와 도구를 사용해서 말 그대로 무한히규정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때 그 규정은 무한하게 흘러 넘치는 사유의 장이 된다. 그런데 이 카오스는 평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평면은 철학이 인위적인 방식으로 발명하는데, 그것이 바로 절단이며 그 결과물이 절단면이다. 이 절단면에는 한 다발의 점들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내재성의 평면이고 그 점들이 평면소’(planomène)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재성의 평면이 사유되거나 사유가능한 개념인 것은 또한 아니다(Gilles Deleuze, 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38). 그것은 일종의 사유의 이미지. 다시 말해 사유하다는 것, 사유를 활용한다는 것, 사유 속에서 방향을 잡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하여 사유가 제공받는 이미지인 것이다(ibid., 41).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사유의 이미지는 늘 기호의 폭력에 노출되어 전쟁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재성의 평면은 개념도 아니고, 개념들의 개념도 아니다”(ibid., 55). 왜냐하면 철학이란 명제의 문제도 재현의 문제도 아니며, 오로지 평면, 기계, 구성, 생산의 문제라는 점, 간단히 말해서 공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바로 철학은 개념의 발명이다. 그렇다면 내재성의 평면은 다음과 같이 생각되어야 한다.

 

만약 철학이 개념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한다면, 내재성의 평면은 전-철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 전철학적이라는 것은 이전에 존재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철학이 이 무엇을 전제할지라도 철학 외부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다(ibid., 43)

 

내재성의 평면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철학의 선험성이지 어떤 경우에도 초월은 아니다.(1) 선실험적 평면으로서의 내재성의 평면은 매우 구성적이다. 즉 이 평면은 서로 이웃하는 이질적인 것들의 구성(질의 구성)이며,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들의 구성(강도의 구성)이다. 특히 주목해야 하는 점은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구성이다. “내재성의 평면은 잠재적인 것과 동시에 그 현실화를 포함한다”(Gilles Deleuze (avec Claire Parnet), Dialogues, Flammarion, 1977; 1996, 180).

(1) [편자주]초월적이지 않은 선험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경험 이전의 물자체와 같은 칸트적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경험으로밖에는 알 수 없지만, 경험될 수 없는 것, 잠재성’, ‘시뮬라크르를 의미한다. 따라서 선험이란 경험주체의 선()험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이라 해야 정확하다. 이것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시 칸트주의(그것이 마이몬의 것이든 뭐든 간에)초월성의 미망으로 빠져들게 된다. 나는 들뢰즈의 맥락에서 선험적이라고 쓰기보다 선실험적이라고 쓰기를 선호하고 권한다.

 

내재성의 평면은 이렇게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상호길항과 갈마듦, 조우와 교전의 관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유의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름아니라 영원회귀의 장소가 된다. 주름과 주름이 만나고, 모든 특이성들 안에서 강요된 운동들이 만들어내는 공명이 있는 그 장소, 무한속도의 운동이 반복되는 그 장소가 바로 내재성의 평면인 것이다.

 

- Arnaud Villani, Robert Sasso ed. Le Vocabulaire de Gilles Deleuze, Vrin, 2003, 314-17.(신지영 옮김, 들뢰즈 개념어 사전, 갈무리, 2012, 77-80 참조, 번역 수정/내용 편집보충)


 

우리는 단지 경도와 위도, 속도들과 핵세이테들(heccéités, 이것임)만을 아는 이러한 평면을 공속(conssistance) 혹은 구성(composition)의 평면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내재성(immanance)과 일의성(univocité)의 평면이다. 이 평면은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않으므로, 비록 자연/본성이 그 평면과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자연(Nature)의 평면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차원들로서 증가될 수 있지만, 그 위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에 보충적인 차원을 갖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적이고 내재적이다”(MP, 326).(1)

(1) MP의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모순의 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평면은 또한 비모순(non-contradiction)의 평면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정신적인 구상(dessein)으로 소급되지 않고 추상적 구상으로 소급되는 기하학적 평면이다. 그것은 일어나는 어떤 것과 함께 차원이 끊임없이 증가하는 평면으로서, 그 가운데에서 평면성(planitude)의 어떠한 것도 상실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증식, 번식, 감염의 평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재의 증식은 진화, 형태의 발전, 혹은 형태의 계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원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퇴행은 더더욱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것은 함입(involution)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안에서 형식은 시간과 속도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용해된다. 그것은 고정된 평면이고, 고정된 청각적, 시각적 평혹은 표기(scripturaire) 평면이다. 여기서 고정되었다는 것은 부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휴지의 절대적 상태인 만큼이나 운동의 절대적 상태이다. 이 위에서 모든 상대적인 빠름과 느림이 그려지며, 오직 그것만이 그려진다.”(천의 고원 2, 이진경, 권혜원 번역본 참조. 41. 번역 수정)

 

이 개념과 관련하여 최초로 살펴 봐야할 것은 카오스’(chaos)이다(Gilles Deleuze, 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189 sq.). 다시 말해 이것은 지각과, 정동, 지성의 모든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 흐름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오직 서로 배제하고 관계 없다는 것만이 공통의 특성이라고 할 수있다. 들뢰즈-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순수한 우연의 영역은 서로 간의 무관함 외에 다른 효과를 가지지 않는다. “정신의 심층은 사실상 환각(délire)이거나 또는 다른 관점에서 말하자면, 우연과 무관성(indifférence)이다”(Gilles Deleuze, Emprisme et subjectivité. Essai sur la nature humaine selon Hume, PUF, 1953 23). 모든 삶(생명)은 그러므로 모든 점에서 소여’(donnée)에 의해 침윤되어(submergée)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가하자면, 이것은 오늘날 더욱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즉 매일매일 우리는 미디어로부터 주어지는 수많은 그리고 분산된 데이타의 덩어리들에 대해 흥미를 기울여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정보들을 모두 데이터가 지향하는 행위의 관점에 비추어 등록하고, 그와 같은 복잡한 세계 안에서 우리의 것이 정보화된 데이타가 돌아다닌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들뢰즈에게서 이러한 정보 영역 또는 질서잡힌 세계에 대한 분석의 출발점은 특히 운동으로서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주어진 상황, 극중 역할은 그것의 구성적인 데이타에 배우 스스로가 스며듦으로써 시작된다. 이는 역할이 가진 적절한 리액션을 확장-변형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IM ch. 9, MP 95 sq). 따라서 정보의 전제는 감각-운동 도식(schèmes sensori-moteurs)의 지속적인 활동으로서의 생명()이다. 데이타는 유용하고, 당신은 그것을 이동시키며, 당신의 삶의 관심 또는 관례적인 용법에 따라 그것을 성립시킨다.’ 문자 그대로, 정보는 형식부여(mise en forme)의 계기, 즉 유용한 형식인데,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정보를 주어진 것’(datum)으로 만든다. 일단 그것인 그와 같은 도식에 의해 파악되도, 나아가 유용하다고 인지되면, 심지어 그것이 무엇을 위해 유용한지 확실하지 않더라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렇게 다루기 힘들고 과다한 추정적 유용함들이 우스꽝스럽게도 그것에 대한 혼돈스러운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어떤 보잘것 없는 스크린 반대편에 있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피했다고 주장하는 것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고 볼 것이다. 들뢰즈가 클리쉐’(clichés)의 파산이라고 부르는 것, 이러한 코드들과 감각-운동 도식들은 한꺼번에 인간과 세계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보증하는 것이다. 앙띠오이디푸스에 따르면, 현대세계는 자본주의적 사회체들로부터 유래되는 일반화된 탈코드화에 의해 정의된다. 어떤 휴식과 이완, 심지어 속박의 사라짐은 이미 갖추어진 파악의 형태, 삶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것은 데이타와 행위의 과정이다(시네마 2에 따르면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다). 이러한 사실, 즉 심리학이 아니라 문명화에 속하는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매일매일 전달 받는 과도한 데이타의 홍수에 대항하여 어떤 방어기제도 우리에게 남겨 두지 않으며, 현대인은 현기증에 사로잡혀 혐오나 매혹에 지배받는다.

 

이와 같은 것은 들뢰즈가 카오스를 이해한 방식과 거의 유사하다. ‘현대적 사실은 원리적으로 실존하는 어떤 상황을 폭로한다. 카오스에 대한 어떤 차이의 관계의 강제는 결코 그와 같은 투명성과 필연성에 의해 도입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 관계는 카오스로부터 스스로에 대한 방어하는데 있어 코드와 기존의 도식들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동시에 이러한 새롭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타의 할당불가능한 현상에 직면하여, 사유는 특수한 관계, 즉 우리가 진입하고 있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그런 관계를 요청한다. ...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는 오래된 해석적 또는 정보적 도식의 붕괴에 직면하여 그것이 관계 또는 해독의 새로운 형태, 즉 우리를 항상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이끌어 가는 초월적이고 해석적인 전체화로부터 구별하는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우리에게 그것의 생성을 뒤쫓아가는 방식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고, 단지 어떤 것을 정립한다. (대답은 생성의 평가라는 의미로서 진단’(la clinique)의 정의 안에 놓여 있다. 이것은 하나의 기호들의 조직화로부터 다른 것으로 표면을 따라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내재성의 평면에 대한 첫번째 개괄이다. 이것은 정확히 말해 의미의 표면(LS, 102)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이라는 두 권의 책이 바로 이 평면(표면)에 대한 연구작업이다. 이 책에서 내재성의 평면은 어떤 코드화의 사회적 체제로부터 공리화의 체제로 이동하는 것으로 그려지며, 그렇게 함으로써 평가 가능하다. 또는 보다 최근의 작업에 따르면, 푸코에 의해 정의된 훈육사회에서 들뢰즈 자신이 정의한 통제사회로의 이동이 있다(P, 240-247). 우리는 더 이상 데이타들에 대해 반응하기 어렵다. 우리는 더 이상 늘 똑같은 장면들이나 전통 안에 있는 어떤 신념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개인과 집단적 삶의 요행적인 정확성 안에서 행위로 확장되어질 수 있는 어떤 데이타를 인지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더 좋은 것을 결핍한 채로, 우리는 부주의한 태도를 유지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무관심 상태로 되돌아 가게 되며, 매일매일 그렇게 하기가 어려워짐에도 오래된 도식들의 잔해가 저항을 계속한다. 우리는 카오스로부터 이끌어낼 중요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어떤 불쾌한 예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도식들의 훈계를 혐오하며, 내재적 분별의 조건이 주어진 그것들 자체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행위에 기반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요컨대 우리는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카오스를 절단할 법한 평면을 결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해석적 양상이라기 보다 어떤 문제틀 안에서, 이러한 데이타와 관계를 맺고 그것의 의미를 발견할 만한 조건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어떤 절단의 효과를 따라, 또는 그와 같은 어떤 평면의 장착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내재성의 평면은 그 아래에서 감각(의미)이 발생하고, 카오스 자체가 우리 삶의 바로 그 근거에 뿌리를 내리는 이러한 비합리적인(의미없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면은 해석의 격자와 전반적으로 구분되어진다. 이 격자는 사유의 기존 형식, 즉 카오스 앞에 서기 보다 카오스를 덮는 클리쉐를 지칭하는 것이다. 평면은 구조와 같이 주어진 것의 기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란 그 안에 속해 있는 것들에 대해 보충적인차원에 기대어 우리에게 주어지는 지성을 그것에 부여하는 것일 뿐이다.

 

이 평면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두 가지 면을 지니는데, 각각은 다른 것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사유의 평면과 자연의 평면이 그것이다. “존재라는 물질(matière de l'être)이 있지 않고서는 운동은 사유의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QPh, 41). ‘형식’(형상)의 관점으로부터 보면, 스피노자가 말한 것과 같이 행위란 어떤 카오스적인 결정들을 선택하는 가운데 놓여 있다. 이는 우리가 위에서 어떤 현시(occurences), 정확성 또는 다루기 힘든 데이타들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보존하기위해, ‘무한한 운동들이 서로 간에 접혀 있는 것이다. ‘무한은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모든 시공간적 만남의 추상화, 순수 감각의 복원, 부정사 동사에 의해 표현 가능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제한된 결정들은 원리적으로 사유가 그것에 속하는 것으로서 동일시하는 것들이다. 결과적으로 사실과 원리의 분리가 수행된다. 이것은 어떤 특유한 그리고 변형가능한 분리로서, 본래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우리는 이에 대해 아래에서 돌아와 살필 것이다.) 그것은 사유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하며, 그것의 상호관계는 하나나 여럿의 개념적 인물들인데, 이 인물들은 사유의 이미지의 구성적인 운동들을 산출해 낸다. 이 인물들은 저자와도, 허구적인 대화상대자, 즉 대화 속에 입장하는 자와도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그러한 것들이 간혹 개념적 인물 안에 구체화되더라도 마찬가지다. 카오스로부터 이끌어져 나오는 인물들, 판사, 사무원, 백치, 말더듬이 등등, 이들은 너무나 많은 태도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유자는 그가 생각하는 한에서 전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를 통해서 사유의 순수한 규정성이 된다. 이 평면상의 인물들(plane-personae)의 앙상블은 사유자가 개념의 창조로서의 어떤 해답을 시도하면서 취하는 문제()’을 정의한다(QPh, ch. 3).

 

이것은 직관이 철학에서 하는 역할의 범역을 지시한다. 적어도 직관은 내재성의 평면을 끊임없이 가로질러 가는 사유의 무한운동을 함축하는 것으로서 간주된다”(QPh, 42). 그리고 직관은 우월한 실재들로의 접근이 아니라, 사유에 독립적인 본질로의 접근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일하게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즉 사유하는 자는 비전을 가지며, 이 비전은 세계에 관한 특정한 결정들의 철학적으로 되기(le devenir-philosophique), 다시 말해 참조점 없이 어떤 것을 지향하는 사유, 우리 자신의 지향 체계를 발명하는 그러한 몸짓과 결합하는 것이다(QPh, 40; P, 202). “비전은 언어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 자체이다”(elles ne sont pas en dehors du langage, elles en sont le dehors. [CC, 16]). 이것은 또한 철학적 개념들이 그것들이 부착되어 있는 문제들로부터만 그것의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것, 그리고 비개념적 이해의 일부에 속해 있는 주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해는 비철학자들과 관련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철학이 스스로를 원리적으로 그에게 표명하는 한에서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철학자와도 관련 있는데, 이때 철학자들이란 철학화하지 않는 스스로의 일부로서의 그의 작업에서 물러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들뢰즈가 이성(Raison, 이유)이라고 부른 것은 정확히 평면에 관한 순수 직관의 운동이다(QPh, 74). 어떤 해학도 도발도 아닌 이것은 우리가 특유한 원초적인 이유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이성(이유)이 있다면, 그것은 전반적으로 설립된 어떤 것, 또는 나아가 제도의 다기한 행위들, “합리화의 과정”(processus de rationalisation)이라고 부르는 바를 지칭한다(PV, 7-9 et 15). 지속적으로 분기하기(bifurquante)란 각각의 것이 필연적으로 어떤 비합리적인 기초 행위를 지칭하지만, 동시에 전반적으로 상이한 종류의 필연성을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자신을 소유하는데 있어서 스스로를 믿거나, 그와 같은 이념적인 것을 미규정적인 미래로 투사하는 사유는 초월성과 주어진 것을 초과하고 사유자의 진정한 테스트로부터 살금살금 도망하는 그러한 믿음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cf. AOE, 447, 455 et ID, 365-366 : “이성은 언제나 비이성적인 것 안에 새겨진 어떤 지대이다...”). 마침내 개념들을 요청하는 평면에 그 개념들을 맞추는데 있어서, 직관은 언제나 어떤 취향에 의해 수반된다. 우리가 가정하듯이,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개념의 궁극적인 결과는 거기에 창조되지않은 어떤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QPh, 31-32; 55; IT, 191). 따라서 여기서 다시 문제로부터 그것의 해(solution)에 이르기까지 내재성의 평면과 관련되어서만 기능하는 진리의 규준이 흥미로운 것, 중요한 것, 특출난 것에 종속된다(l'intéressant, de l'important, du remarquable, [DR, 245 ; QPh, 80]. 이것들은 들뢰즈가 다른 곳에서 참과 거짓의 시험을 문제들 자체의 수준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B, 3 ; DR, 198-213). 진리 개념에 대한 들뢰즈의 평가 절하는 그러므로 진리의 질문에 관한 무관심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cf. IT, ch. 5-6).

 

하지만 어째서 거기 어떤 단일하고 유일한, 대평면(LE plan)이라고 불릴만한 평면이 아니라, ‘평면들이 있는 것인가? 이러한 평면들은 소수의 사유자들만이 접근해 간 것이기도 하다(간단히 말해 스피노자, 베르그송, cf. QPh, 49-50)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될 수 있다. 1. 만약 데이타나 결정들의 앙상블이 하나의 카오스라면, 그 이유는 카오스가 그 안으로 경쟁적인 사유의 이미지들을 가져오기 때문이며, 이에 따라 그 모든 것들을 보유하려고 하는 어떤 사유자가 붕괴한다. 그의 평면이 카오스와 구분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2. 하지만 다른 방향에서, 바로 그것의 일치와 상대적인 리듬에 의해 모든 선택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사유자의 평면은 어떤 특유하고 보편적인 평면, 즉 그 자체가 카오스로 대체될 수 있는 그러한 평면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초월성이 다시 왕좌에 앉게 되고 이와 동시에 그 자신의 개념과 의견들은 가치절하된다(예컨대 노마드와 정주적 분배의 대립). 3. 사유자는 이러한 초월성과 의견으로의 회귀와 단절할 수 있는데, 오직 그가 내재성의 대평면(LE plan d'immanence)을 가능한한 감싸고 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함축적 방식으로] 그의 평면을 이끌어낼 때만 그러하다. 이것은 카오스로 되돌아가는 것과 동일시되는 사유를 이끌어내만한 사유불가능한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의 긍정이 단지 다른 동일시, 이를테면 피조물과 원초적 존재를 피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 그것은 사유의 내부 결정 원리로서, 지속적인 재시작과 분기[분화]에 의한 전진을 표현하는 무한운동들을 촉발하는 것들을 지정한다. 또는 그것은 다른 사유자의 주장을 그 사유자의 한도 안에서 촉발한다(마치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킁킁거리는 개와 같이 말을 더듬고, 방언을 하고, 탐색하는 사유자 등등).(이 모든 것에 대해서는, QPh, 51, 55, 59, 67, 등등 참조)

- François Zourabichvili, ‘Plan d'immanence (et chaos)’, Le vocabulaire de Deleuze, Ellipses, 2003, 54-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