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좌파 이론 진영에서 회자되는 말은 ‘노동자 계급의 자리’다. 한 마디로 한국사회에서든 국제사회에서든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나는 이 진단을 거부한다. 우선 이것은 담론 자체의 현실적 기반을 상실한 채 구사되는 수사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어디에서든 노동자계급은 움직이고 있고, 저항하고 있으며, 조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승리의 움직임이든 패배의 움직임이든, 또는 정당이나 조직 차원의 몰적 상태든, 일상적이며 미시적인 분자적 상태든 헤게모니는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시각이 매우 ‘패배주의적’이라고 본다. 인텔리들은 자신들이 어떤 ‘실재적 전망’을 가지고 현실을 진단한다고 자주 착각한다. 하지만 그 전망이란 대개 자신이 가진 이론적 틀 내에서 왜곡된 상일 뿐이다.
이를테면, 노동자계급의 자리를 ‘광장’에서 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조국-검찰개혁 국면에서 광장에 노동자의 자리가 없다고 징징대는 것이 계급적 관점인가? 과연 (인텔리 지식 논공상들이나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상집 인자들을 빼고) 어느 노동자가 거기 자기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당위적인 주장을 할 것인가?
둘째로 이런 진단은 계급허무주의를 부추길 뿐이다. 마치 현실을 제대로 보는 것인양, 객관적인 자세를 취하고, 진영초월적인 스탠스를 자랑삼아 떠벌리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론가 자신의 머리 속에서만 있는 ‘위기의식’을 꺼내, 프롤레타리아트의 면전에 펼쳐 놓고, ‘이제 대안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 처방을 내가 주마’라고 허튼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비록 그 이론이 현실을 반영한다 하더라도, ‘현장’에서 들끓은 저항과 전술과, 일상의 투쟁들을 담을 수 없다. 이론은 과학적이지 않다. 이론은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이며, 노동자계급의 입장이란 그 이데올로기가 지닌 긍정적 힘을 되살리는 데 복무하지 않으면, 한갓 부르주아적 기만술로 되떨어지게 된다.
위기를 부추기면서, 허무주의를 강설하고, ‘노동자 계급의 자리’를 첨단의 문제의식으로 치장하는 것은 ‘계급 자체의 폐절’을 사유하고, 실천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정말 낯설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 따위가 있다 없다가 아니라, 어디서나 존재하는 ‘노동’의 전사회적 스펙트럼을 재전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산업노동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인지노동과 플랫폼 노동, 그리고 비인간노동에 이르기까지 걸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조직화되어 있다기 보다, 편재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넓게 분포된 노동자 계급의 네트워크를 어떻게 하면 활성화하고, 국제적-국내적인 연대를 강화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자리’는 부르주아의 몫이지만, 그것을 늘 해체하는 ‘운동’은 프롤레타리아의 활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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