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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Thomas Nail, Marx in Motion: A Nematerialisit Marxism, Oxford University Press, 2022_Introduction

by Nomadia 2024. 6. 14.

<1>서문

 

오늘날 맑스주의의 재탄생이 진행중이다. 가장 최근 2008년 금융시장 붕괴 기간에 대중이 맑스에 다시 관심을 가진 나머지 세계를 제외하고, 맑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금융붕괴 이후 자본론에 관한 세계적인 판매부수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맑스의 얼굴과 이념들이 신문, 텔레비전 그리고 인터넷 등 전 세계에 등장했다. 대학과 직업학교에서는 오랜만에 맑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위기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널리 발언할 것을 요청하는 공개 행사를 개최했다. 모든 사람들 자본론을 다시 읽고 있었던 것 같다.

 

맑스로의 귀환의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명백하다. 너무 대규모이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은행에 대한 납세자 구제금융, 정부 긴축, 학자금 대출 부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붕괴로 집에서 쫓겨난 수백만 명의 사람들, 99%1% 사이의 전무후무한 소득 불평등, 기록적인 이주행렬, 인간이 유발한 기후 변화 등, 모든 것이 글로벌 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역사적으로 가장 심각한 기초적이고도 체계적인 자본주의 위기에도, 칼 맑스는 우리 시대에 살아 남아 있다. -폴 사르트르가 썼던 것과 같이, “맑스주의는 우리 시대의 철학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둘러쌌던 조건들 너머로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2]

 

맑스 이후 모든 시대는 필요에 따라 그의 사상을 재발명했다. 2008년 금융 위기로 시작된 현재도 예외가 아니다. 자본주의, 유물론, 공산주의 이론이 늘 하나의 이론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맑스도 그러하다. 수 천의 맑스들이 존재한다. 사실상 맑스 저작의 가장 큰 통찰과 공헌 중 하나는 이론 자체를 역사적 실천으로 취급했다는 점이다. 맑스주의는 <2>해석적 활동이 아니라 창조적 활동이다. 물리학, 경제학, 생태학, 문화 등의 새로운 지식을 포함한 우리의 역사적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우리가 제기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도 변화하고 있다. 운동적 맑스20세기 맑스로의 귀환에 기여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귀환은 맑스의 역사적 수용에 초점을 맞춘 맑스주의로의 귀환이 아니다. 이 책은 생태 위기, 성 불평등, 식민지 착취, 전지구적 이동성(mobility) 등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철학적, 정치적 문제의 렌즈를 통해 맑스를 재독해함으로써 귀환한다.

 

이 책의 목적은 맑스 저작의 명백한 오류나 시대착오를 보완하거나 수정하거나 심지어 그의 이론을 현대 문제에 적용하여 관련성을 높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개입도 그 나름의 자리가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에서 나의 목표는 맑스 자신의 저술로 돌아가 마치 완전히 현대적인 것처럼 재독해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오래된 맑스의 업데이트나 새로운 적용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맑스다.

 

보다 분명히 말해, 이 책은 맑스의 초기 논문에서 영감을 받아 그를 활동(movement)과 운동(motion)의 철학자로 읽는다. 이 독특한 관점에서 나는 맑스가 역사적 결정론자, 환원주의적 유물론자, 인간 중심적 휴머니스트, 구조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더욱이 노동 가치론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담한 주장은 맑스에 대한 잘 알려진 해석의 핵심에 충격을 가하면서 나의 맑스 재독해를 운동적 과정 철학자이자 신유물론적 교정쇄(avant la lettre)로서 동기화한다. 이 서문의 목적은 이러한 개입을 맥락화하고 이 기획과 관련된 논의들, 방법, 결과를 소개하는 것이다.

 

나는 맑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이 책을 썼지만, 그의 명백한 죽음의 원인을 진단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맑스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의 죽음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4] 21세기 맑스로의 전환은 오로지 맑스의 쇠락이라는 움직임 안에서만 가능하다.

 

맑스주의의 쇠락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맑스주의는 1970년대 이후 쇠퇴의 길을 걸어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5] 하지만 맑스주의가 쇠락했지만 다시 귀환하게 되는 주요한 비판으로서 세 가지 논거가 두드러진다.[6] 이러한 비판은 외부에서뿐만 아니라 맑스주의 자체 내에서도 제기된다.

 

역사결정론: 비판의 첫 번째 축은 맑스주의가 결정론적 역사론을 따른다는 것이다. 여러 맑스주의는 전반적으로 결정론적일 뿐만 아니라 미리 주어진 목표, 즉 인간성의 종착지로서 공산주의를 향해 달려 나아가는 <3>인간 역사에 관한 어떤 이론이라는 점을 수용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효력이 없었다. 최근의 역사에서 멀리갈 필요도 없이, 2차 세계대전, 1968년의 계획되지 않은 정치 혁명, 전지구적 핵전쟁의 위협, 지구 기후 변화 등의 사건이 진보 또는 자유에 있어서 어떤 명쾌한 역사적 패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이다. 오늘날 우리의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 암담해 보인다.

 

공산주의의 완고한 필연성 같은 것이,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당장 눈앞에 다가왔다는 증거는 더더욱 없다. 모든 위대한 발전적 역사 서술에서는 공교롭게도 현재의 그러한 역사서술의 역사적 성취라는 관점에서 알려지는 것처럼, 미래가 발생한다. 소련 사회주의의 융성은 막을 내렸다.[7] 사회주의 역사 결정론에 대한 예측은 실현되지 않았고, 경제적 필연성, 이윤률 하락 및 기타 요인에 관한 철의 법칙은 유지되지 못했다. 이른바 역사 발전과 자본주의의 보편법칙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사회주의 국가, 정당, 전위의 탄생은 혁명이나 공산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이러한 단체들은 새로운 형태의 군국주의, 가부장제, 제국주의, 권위주의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치 형태가 반드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당과 국가의 형태가 그 이후의 결과를 결정적으로 좌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환원주의: 비판의 두 번째 축은 맑스주의는 사회가 경제적 인과 법칙에 의해 엄격하게 결정된다는 잘못된 환원주의적 모델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모든 것은 경제적 토대’(생산력)와 이데올로기, 즉 관념, 느낌들, 세계에 관한 감각이라는 문화적 상부구조의 일방향적 인과적 연결에 의해 연역되고 설명된다. 문화적인 상부구조는 경제적 생산양식에 기반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동물성이 속하는데, 이 모든 것이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의해 구성된다. 모든 현상은 경제 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환원주의는 애초에 설명해야 할 것, 즉 경제적 조건 자체의 출현에 대한 비경제적 조건을 가정할 뿐이다.

 

이런 경제적 하부구조는 사태의 진행에 있어서 분명 중요한 측면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경제 관계가 항상 정치적 투쟁에서 엄격하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1970년대 이후의 자유주의 운동과 21세기 정치투쟁은 많은 경우에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 동물권과 같은 생태적, 탈식민지적 주제들[8]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집중해 왔다. 이러한 주제들은 분명 자본주의 생산 양식과 연관되지만, 결코 그 어떤 <4>환원적 방식으로도 완전히 결정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다양한 움직임을 경제 분석만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는 전혀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이것은 맑스주의가 자연, 젠더, 인종 등등이 부가된 보충적’(supplemented) 논의들로 나아가도록 했다.[9]

 

또한 이데올로기 비판또는 혁명의 분명한 가능성은 토대과 상부구조 사이에 엄밀하게 환원 가능한 관계가 있을 수 없거나, 그러한 토대에 의해 결정된 것 외에는 결코 다른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상반된 사실을 도출한다. 다시 말해, 결정론이 실제로 사실이라면 비판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환원주의 비판의 또 다른 측면은 맑스의 유물론에 대한 것이다. 환원주의 유물론은 모든 물질과 자연에는 환원 가능한 변증법적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경제 법칙은 물질이 따르는 더 큰 자연 법칙의 한 가지 표현일 뿐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 판본에서는 모든 물질이 개별적인 현실적 입자로 파악되는 바, 자연적인 발달 또는 진화 패턴을 따른다. 여기서 환원주의는 모든 것이 현실적인 개별적 입자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물질 자체가 과학이 알고 있고 알 수 있는 영원한 운동 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 이론은 21세기 물리학의 표준 판본을 따르는 물질에 관한 기술에서는 지탱될 수 없다. 양자론에서 물질은 불연속적 입자가 아니라 진동하는 장들(vibrating fields)이다. 이 물질은 경험적으로 또는 총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으롸 환원되지 않는다. 더욱이 플랑크 규모(Planck scale) 아래의 미시적인 차원에서의 물질의 운동에 관한 보편 법칙은 불확정적이다.[10] 게다가 물질이 (인간적 관찰만이 아니라) 관찰행위로부터 독립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언제나 양자얽힘(quantum entanglement)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맑스주의 과학이 19세기 과학의 발전 그리고 심지어 기계론적 유물론의 사유, 다시 말해 보편법칙의 멍에를 쓴 곳에서, 양자 체계라는 한계와 마주친 것이다.[12]

 

인간중심주의: 맑스주의가 다른 어떤 것 보다 인간존재 또는 인간사회 그리고 경제에 방법론적인 또는 존재론적인 특권을 부여한다는 비판에서 비롯된다. 이로 인해 맑스주의는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서 전지구적 기후 변화, 우리 시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13] 모든 종류의 인간 중심주의는 현재의 생태적 재앙을 초래한 인간 중심주의에 적어도 부분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해야만 하는 바, 맑스주의 역사에서 인간중심주의 주제에 관한 적어도 세 가지 주요한 변형들이 존재한다.

우선 직접적으로 생산주의적 판본인데, 이것은 기술 혁신을 통해 자연을 종속시키려는 인간의 노력에 중점을 둔다. 이 버전에서 인간이된다는 것은 <5>그 생태적 결과와는 상관 없이 인류의 이익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자연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아마도 다른 어떤 동물도 이런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스스로 지배한다는 의식에서 특수한 존재이므로, ‘인류세라는 개념은 인간중심주의를 함축한다.

 

두 번째 판본은 보다 인간주의적인 것으로서 자연에 관한 감각적 향유에 의해 규정된다. 이에 따르면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에 관한 미적 향유를 경험하기 위해 스스로를 아는 동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다른 동물은 이 특유한 능력을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생태 문제들은 엄밀하 말해 자연을 향유하는 인간이 한계를 가진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인간적 문제들로 남겨진다.

 

세 번째는 구성주의적(constructivist)이다. 구성주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개념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인간적 구조를 놓는다는 점에서 반인간주의적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존재는 일차적으로 비역사적인 본질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정치적, 심리적, 경제적 그리고 언어적 구조들의 역사적 생산물이다. 자연에 관한 모든 인간적인 지식은 이 구조에 의해 엄격하게 제어된다. 궁극적으로 자연이 진정 무엇인가하는 것은 모든 인간적 구조의 한계를 넘어서는 미지의 물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남는다. 자연과 물질은 과잉된 것이거나 우리의 구조들 바깥에 남겨지며, 이러한 결핍이나 실패는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유일한 지식 형태가 된다.[15]

 

* * *

 

맑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의 실제적, 이론적 성공과 더불어, 그 텍스트적 원천인 맑스의 저술이 같은 운명을 맞이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의 양을 고려할 때, 맑스와 그의 저작으로 다시 돌아가 새로운 사상을 발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나의 주장은 이러한 비판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성공 때문에 오늘날 그 대답은 그렇다라는 것이다. 맑스주의의 쇠락(decline)은 새로운 것을 향한 클리나멘(declination) 또는 사행(swerve)을 가능하게 한다. 사실상, 이것은 맑스주의 역사에서 이미 두 번 이상 일어난 일이다. 첫 번째는 (스탈린주의로부터 사행하기 위해) 1844년 수고(manuscripts)의 인간주의적인 청년 맑스1950년대에 발견되었을 때이고, 두 번째는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인간주의적인 청년 맑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1970년대에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자본이전 맑스가 발견되었을 때이다.

 

이 책의 주장은 (1950년대의 휴머니즘과 1970년대의 구성주의 모두에서 벗어나기 위해) 맑스의 모든 저작 중에서 가장 적게 읽힌 박사 학위 논문의 첫 번째 맑스로 또 다른 전환을 할 때라는 것이다. 각각의 전환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저작을 다시 읽고 돌아가는 렌즈로 작동했다. 각각의 전환은 이전의 전환에 기대어 항상 어딘가에서 다시 돌아온다.

 

현대 물리학, 생태학, 정치학, 경제학, 그리고 맑스의 박사 학위 논문을 통해 다시 맑스로 돌아가 우리 시대의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을 찾을 수 있다. 맑스주의가 오늘날의 문제에 대응하려면 방금 논의한 세 가지 비판을 넘어서야 한다.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운동론적 유물론의 저류(低流)

맑스주의는 정적인 교리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흘러가는 이론적 실천의 추세이다. 그것은 각 세대에 의해 새롭게 수용되고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맑스를 철학적 유물론이라는 더 크고 긴 전통의 일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때 맑스주의는 그 하위 집합이 된다. 맑스는 박사 논문에서 고대 유물론의 전통을 명시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가 생기론적이고 이신론적 버전을 포함하여 고대와 현대의 모든 구유물론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신유물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16]

 

맑스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에 대한 독창적인 독해를 통해 당대의 유물론을 전진시켰다고 여겼다. 맑스가 헤겔을 읽기 훨씬 이전, 그의 첫 번째이자 독창적인 철학적 참여는 에피쿠로스에 대한 것이었다. 헤겔주의자 맑스 이전에 에피쿠로스주의자 맑스가 있었다. 그리고 에피쿠로스주의에 대한 그의 지식의 주요 출처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De Rerum Natura)였으므로, 루크레티우스적 맑스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맑스의 철학에 대한 개입과 기여는 루크레티우스로부터 시작함으로써 더 긴 저류의 전통 안에 위치지어질 수 있다. 이것은 운동론적’(kinetic) 또는 과정적’(process) 유물론의 흐름이다. (맑스가 처음으로 보여준 대로)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가 데모크리토스에 대해 그러했듯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에피쿠로스를 해석한 첫 번째 사람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새로움은 그리스 원자론에서 원자의 불연속성을 물질의 지속적인 흐름과 운동론적(kinetic) 흐름으로 대체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소한 운동이 아니었다. 루크레티우스에게 물질이란 근대 유물론자들, 예컨대 프란시스 베이컨과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서와 같이 어떤 운동 중의 사물(thing)이 아니다. 그것은 루크레티우스에게 어떤 결정론적 법칙과 경험적 환원론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맑스와 루크레티우스의 공통점은 둘 모두 시대 뛰어넘어 에피쿠로스에 대해 동일하게 특유한 방식의 해석을 내놓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물질의 끊임없는 흐름, -분할성 그리고 운동적 특성이다.

 

이러한 유물론의 광범위한 전통 안에서 맑스는 신유물론을 전개한 최초의 철학자다. 그는 데모크리토스, 뉴턴 등등의 불연속적 해석에 반하여 물질의 추계적(stochastic) 운동의 역사적-존재론적 우선성을 주장했던 것이다.[19] 이 책에서 전개되는 논증 중 하나는 맑스가 매우 현대적인 물질에 관한 이론을 전개한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최근의 신유물론적 경향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맑스에 대해 알려진 상식적인 견해는 맑스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사람들이 그가 말했던 것을 다시 말함으로써 나온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자주 인용되는 맑스의 다음 언급이 요청된다. “확실한 것은 내 자신이 맑스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서문에서 맑스에 대한 다양한 수용사 전체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 해도 최소한의 간략한 소개가 없다면 이 책의 주요한 개입 지점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이어지는 짧은 절들에서는 맑스 저작의 해석에 관한 세 가지 주요 혁신과 앞서 설명한 세 가지 주요 비판과의 연관성을 설명할 것이다. 나의 의도는 오늘날 맑스주의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고 극복해야할 문제가 무엇인지 조명하는 것이다.

 

첫 번째 혁신: 소비에트 맑스주의

맑스주의의 첫 번째 혁신은 20세기 초 소련 공산주의의 부상과 함께 일어났다. 소비에트 맑스주의는 맑스와 엥겔스의 연구를 바탕으로 미래의 모든 지식과 사회 정책을 위한 하나의 보편적인 원칙 또는 기초를 제시했다. 이것은 변증법적 유물론또는 디아메트(Diamat)라고 불리워지는 이론으로서,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Dialectics of Nature)에서 도출되어, 모든 물질과 자연에 대한 종합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이론을 제공했다. 이로써 보편 변증법의 법칙이 다음과 같이 정식화되었다.

 

1. 대립자들의 갈등과 통일의 법칙

2. 양질전화의 법칙

3. 부정의 부정 법칙.

 

자연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관점은 엥겔스의 반뒤링론(Anti-Duhring)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되었다.[21]

 

1. 세계의 통일성은 그 물질성에 있다.

2. 운동 없는 물질은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맑스주의에 관한 첫 번째 혁명은 소비에트 공산주의 기간 동안 발생했다. 소비에트 맑스주의는 어떤 단일한 보편적 원리 또는 기초를 제공했는데, 이것은 변증법적 유물론또는 디아매트’(Diamat)로 불린다. 이것은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모든 물질과 자연에 관한 종합적이며 환원론적인 이론을 제공한다. 이 보편 변증법의 법칙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다.

 

1. 대립물들의 통일과 모순의 법칙

2. 양적 변화 과정의 질적 변화의 법칙

3. 부정의 부정 법칙

 

자연에 관한 형이상학적 관점은 엥겔스의 -듀링론으로부터 해석되어 나오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세계의 통일성은 그것의 물질성에 놓여 있다.

2. 운동 없는 물질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요컨대, 소비에트 맑스주의의 목표는 맑스주의의 보편적인 철학적 교리를 생산하여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이론적 문서이자 국가 통치의 교리로 확보하는 것이었다.[22]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련 맑스주의는 앞서 기술한 세 가지 비판의 희생양이 되었다.[23] 소비에트주의자들은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에 담긴 이론을 맑스의 역사 진화와 사회 발전의 보편 법칙으로 해석했다. <8>

소련 사회주의자들은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세계사적 발전의 최종 국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역사적 자연철학을 자연적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명제들로 완전히 환원해 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물질의 능동성과 창조성을 형이상학적 법칙의 수동적 노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특히 스탈린 체제 하에서 맹렬한 생산주의적 인간중심주의를 따랐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은 산업화되고 날것 그대로의 물질들의 단순한 창고로 취급되었다.[24]

 

두 번째 혁신: 인간주의적 맑스주의

맑스주의의 두 번째 혁명적 단계는 20세기 초에 일어났는데, 이는 결정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소비에트 맑스주의에 대한 응답이었다. 1930년대 이르러 맑스주의는 청년 맑스기에 쓰여진 경제학-철학 수고 1844(Economic and Philosophic Manuscripts of 1844)를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은 프랑스 헤겔주의자였던 알렉산더 코제브(Alexandre Kojève)와 장 이폴리트(Jean Hyppolite)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환을 따른 사람들로는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루시앙 골드만(Lucien Goldmann),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와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있었다. 이들은 청년 맑스에게서 그 어떤 경제 결정론이나 역사적 결정론도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에 그들은 인간사회적 소외에 관한 새로운 논증들을 발견했으며, 이것은 경제 공식, 역사적 교조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스탈린적인 정치 테러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 것이었다.

 

보다 인간주의적이고 반-소비에트적인 저자로는 게오르트 루카치(György Lukács), 칼 코르쉬(Karl Korsch), 그리고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가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193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래 새로운 실존주의적이고 현상학적인 전통이 점점더 많이 헤겔주의적 맑스주의와 결합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에리히 프롬(Erich Fromm),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을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였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실존주의적이고 현상학적인 해석과는 다른데, 이들은 그 어떤 종류의 부르주아적인 또는 사회적의적인 인간 본질’, 역사적 보편주의그리고 토대와 상부구조 간의 일방향적인 관계도 거부했다.[25]

 

매우 광범위하게 다양한 해석 간의 균열에도 불구하고 이 두 번째 혁신은 결정적으로 엥겔스와 소비에트의 결정론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맑스주의를 거부했으며, 이는 그들이 감각적인 인간 실천에 근거하여 맑스주의에 접근했기 때문에 그러했다. 인간 실존의 본성은 그 어떤 자연, 역사 또는 물질의 결정론적 법칙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인간 존재는 또한 자신을 소외시키는 사회 구조에 의해 모든 곳에서 제약을 받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인간주의적 맑스주의는 결정론의 문제를 극복했다. 하지만 그것은 경제 환원론을 거부한다 해도, 여전히 실존론적이며 정신분석적 환원론에 붙들려 있다. 즉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는 이 경우에 단순히 인간-중심적 사회 심리학 주위에서 재형성되었던 것이다. 현상학적 맑스주의와 프랑크푸르트학파 스타일의 맑스주의 둘 모두 인간주의(humanism)의 문제에서는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드러냈다.[26]

 

세 번째 혁신: 후기-구조주의 맑스주의

세 번째 맑스주의 혁신은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안에 발생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보다 넓은 구조적 조건들에 관한 인간주의적 경시와 공산당의 위계적인 중심성에 대한 응답이었다. 예컨대 이탈리아에서는 자율주의 맑스주의자들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중심으로서 산 노동’(living labour)을 강조했다. 산 노동은 노동 뿐만 아니라 공장과 조합 그리고 당의 구조 바깥에서 놀이하고, 살아 가며 자기-조직화하는 힘이다. 자율주의는 정당과 대조적으로 그리고 그것과 구별하여 사회 운동을 창안했다. 그들의 반란은 현대 대의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권위적인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에는 또한 제3세계 맑스주의가 발흥했다. 여기서는 식민지 개척자와 피식민자 간의 분할이 투쟁와 분석의 주요 축이 된다. 계급 분할은 근본적이지 않으며 이것은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식민지 관계로부터 파생된다. 자본론의 말미에서 맑스는 우리가 시초축적의 지리적 재탄생과 자본주의의 역사적 수법들을 식민지 기획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3세계 맑스주의는 비판의 출발점으로 계급투쟁이 아니라 이러한 점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페미니스트 맑스주의는 이 기간 동안 오로지 남성 임금 노동자들만이 노동자라는 가설을 강조하는 자본론의 남성-노동자-중심적 해석을 거부했다. 사실 여성의 값싼 노동 또는 공짜 노동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근간이며, 따라서 그것은 가치가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주장이다.

 

프랑스 맑스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는 새롭게 맑스로의 회귀와 후기 맑스의 자본론에 대한 재독해를 개시했다. 그의 독해는 인간 본질과 소외에 초점을 맞춘 수고의 청년 맑스에 대항하여 생산 관계와 생산력에 집중하는 것이다. 알튀세르,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로저 에스타블레(Roger Establet),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그리고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10>1965년에 자본을 읽자를 공간하면서, 비결정론적이고 비재생산적인 자본주의의 구조적 본질과 더불어 자본 자체가 인간 주체를 형성하고 생산하는 방식을 강조했다.

 

가장 잘 알려진 알튀세르의 논증은 고전 정치경제학과 독일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은 맑스 초기 저작과 지식 생산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전반적으로 새로운 철학 체계를 도입하는 그의 후기 저작 사이에 인식론적 단절이 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지식은 문제틀적인’(problematic) 또는 국면적인’(conjunctural, 정세적인) 역사적 장소들을 통해 생산된다고 논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와 전반적으로 독립적이다. 알튀세르는 인간주의적 맑스 뿐만 아니라 결정론적이고 환원론적인 맑스로부터도 확실히 벗어난다. 이후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프랑수아 리오타르, 알랭 바디우, 미셸 푸코와 같은 후기-구조주의 맑스주의자들은 모두 알튀세르의 영향을 받았지만 여기서 언급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그와 결별했다.[28]

 

 

하지만 여기서 설명한 주요 비판의 축과 관련하여 중요한 공통점은 알튀세르, 포스트구조주의 맑스주의자, 자율주의자, 탈식민주의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들이 모두 역사적 결정론, 경제적 또는 유물론적 환원주의, 휴머니즘이 없는 새로운 맑스로 결정적으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인간 주체는 다양한 사회적, 언어적, 무의식적, 역사적, 정치적, 지리적, 젠더적, 경제적 구조에 완전히 용해된 어떤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하나 이상의 서로 맞물려 있는 사회적, 젠더적, 지리적 구조가 교차하는 지점 또는 종착역이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사회 구조(, 인종, 정치 등)집합체’, ‘장치’, ‘힘들의 관계등은 인간적 구조이며, 이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29] 맑스에 관한 포스트구조주의적 탐색에서 맑스는 어떤 형태로든 인간 중심적인 사회 구성주의자로 남아있었다.[30]

 

맑스와 운동의 철학

이러한 각 혁신의 단계들은 이전의 해석이 제기한 문제를 극복했지만, 또 다른 문제를 가져 왔다. 따라서 이 책의 목표는 맑스 자신의 저작을 벗어나지 않고도 앞서 설명한 세 가지 문제를 모두 극복하는 맑스 독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인간중심주의의 주장은 세 가지 주요 해석적 혁신 모두에서 가장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에 따라 최근 제인 베넷, 브뤼노 라투르, 마누엘 델란다, 로지 브라이도티와 같은 신유물론 철학자들이 많이 비판하는 논점이 되고 있다. 신유물론자들은 심지어 후기-구조주의 맑스주의를 <11> 앞서 논의된 세 가지 비판과 더불어 가망 없는 -유물론이며 인간중심주의라고 해석한다.[31]

 

이러한 방향에서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34] 그러나 내가 알기로 이 주제에 대한 이 정도 분량의 연구는 이 책이 처음이다. 동시에 이 책은 맑스가 대중의 정치적 상상력에 더 폭넓게 복귀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려는 의도가 있다. 요컨대, 나는 비결정론적이고 비환원주의적이며 비인간중심적인 신유물론적 맑스주의에 대한 주장을 펼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이 책이 일반적으로 오래된 운동론적 유물론의 비주류 전통과 최근의 맑스와 신유물론에 대한 관심에 더하는 것은 맑스를 운동의 철학자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신중하게 고려하자면, 이 단순하고 다소 직관적이거나 순진한 접근 방식은 앞서 나열한 맑스주의의 세 가지 비판을 극복하는 방법론적 열쇠가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맑스의 운동에 대한 관심이 너무 뻔해서 더 이상 언급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이다. 맑스가 항상 움직임과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35] 변증법이 운동의 과학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36]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적어도 합의되지 않은 것)은 맑스가 운동을 두고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으며 그것이 그의 신유물론의 핵심이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앞서 논의한 해석적 비판의 세 가지 축의 핵심에는 맑스 자신의 운동론적 유물론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고 내가 주장하는 바, 운동에 대한 어떤 특별한 문제적 해석이 있다. 따라서 -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의 가장 야심찬 주장이다 - 각 해석학적 혁신은 부분적으로는 맑스의 저작에서 운동의 본질과 우월성을 충분히 이론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급된 역사적 비판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처음 이 주제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맑스의 움직임, 운동, 운동성(mobility)에 관한 학문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움직임과 같이 맑스의 저작에서 거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주제가 왜 적어도 몇 가지 연구의 주요 대상이 되지 못했을까? 나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 공백에는 적어도 세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엥겔스: 우선 맑스의 운동론은 <12>엥겔스의 반뒤링론자연변증법과 관련되어 운동--물질(matter-in-motion)에 관한 보다 형이상학적이고 과학적인 이론과 그것의 역사적인 연합 때문에 무시되어 왔다. 맑스와는 달리 엥겔스는 운동--물질의 특수한 역사적 이론을 19세기 고전 물리학, 즉 물질을 경험적 물질의 입자와 같은 조각들로 취급하는 불연속적인 기계론에 해당하는 물리학을 따라 채택했다. 따라서 적어도 최근의 학술적 입장에서는 보다 덜 형이상학적 부담을 지니는 것에 기대어 이러한 주제를 피하고자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37]

 

소비에트: 둘째, 이와 관련해서 맑스의 운동론은 소련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교조적으로 전유되었기 때문에 소홀히 다루어졌다. 소련은 엥겔스의 운동--물질 이론을 채택하고 그것이 맑스의 것이 아닌데도 맑스의 것이라고 주장한 책임이 다른 누구보다도 크다. 원칙적으로 이것은 이론적 오류일 뿐이지만, 실제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스탈린은 이 해석을 공포와 권위주의의 실천과 직접 연결시켰다. 그 후 어떤 인간주의자나 후기-구조주의 맑스주의자도 이러한 형이상학적이고 소비에트에 오염된 운동과 물질 이론을 원하지 않았다.

 

박사학위 논문: 세 번째, 맑스의 운동 이론은 맑스의 박사 학위 논문과 에피쿠로스 철학에 관한 그의 노트를 읽거나 쓰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소홀히 다뤄져 왔다. 그러나 이 논문들은 맑스의 저작 중 물질과 운동에 대한 가장 집중적인 이론을 제공한다.[38] 안타깝게도 맑스의 박사 학위 논문과 에피쿠로스에 관한 노트는 몇 가지 이유로 그의 모든 저작 중 가장 적게 읽히고 가장 소외된 채로 남아 있다. 그 논문은 맑스의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고, 마지막 두 장이 유실되었다. 그것은 1927년 경에야 독일어로만 출판되었으며, 이것은 1975년에야 늦게 선집 안에 완전한 영역본으로 출간되었을 뿐이다. 오로지 최근 2004년에, 적당한 가격으로 영어 요약본이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맑스의 운동론은 맑스의 운동론이 소홀히 다뤄진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 주요 원본 자료가 늦게 도착하고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박사논문과 에피쿠로스 노트가 출판된 후에조차, 그것에 대한 관심은 부족했고, 심지어 맑스 작품들에서 자연에 관한 형이상학적 유물론, 독일 자연철학, 소비에트풍 등등의 기미를 띄는 어떤 것으로 치부되어 적극적으로 사장되기까지 했다.

 

더 나아가 박사논문에 대한 관심의 부족이란 그것이 맑스의 다른 저작들과 너무 달라서 인간주의적이고 후기-구조주의 전통들이 상대적으로 지배적인 권위 있는 초기 수고본과 원숙기의 자본론과 어떤 연결을 가지는지에 대해 전혀 명백하지 않다는 사실 탓으로 돌려지기 일쑤였다. 그리스와 라틴 고전 철학에 관한 기술적인 세부사항들은 계급투쟁, 생태적 붕괴, 식민주의 또는 그밖의 것들의 명법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13> 맑스주의자들이 맑스의 자연, 물질, 운동 이론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프랑크푸르트 인간주의자 알프레드 슈미트(Alfred Schmitt)맑스에 있어서 자연의 개념(The Concept of Nature in Marx, 1962)처럼 박사 논문을 회피하거나, 후기-구조주의자 질 들뢰즈처럼 맑스의 결론을 아예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질 들뢰즈는 명백하게 그의 니체에 관한 책에서 물질과 운동을 (force)에 종속시키면서, 그 자신과 니체를 루크레티우스와 맑스의 운동론적 유물론과 대조하고 있다.[40]

 

이 책의 주제

이 책의 논지는 맑스의 운동론적 유물론 이론이 이전에 밝혀진 맑스주의의 세 가지 주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열쇠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 책 한 권을 다 써야 입증할 수 있는 대담한 주장이지만, 나의 해석을 애써 방어하는 대신 여기서는 세 가지 핵심 주장을 간략하게 소개할 것이다.

 

운동론적 변증법(Kinetic dialectics): 맑스의 운동론은 자연과 사회의 결정론적 이론들을 거부한다. 물질은 기계적, 생기적, 고전적 또는 다른 어떤 결정론적 운동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역사는 미리 정해져 있거나, 선형적으로 발전하거나, 점진적이거나, 목적론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정당, 국가, 전위적인 정치가 역사적으로 반드시 존재해야 할 필요성도 없으며, 혁명적 실천을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할 필요성도 없다.

결정론적이거나 법칙-종속적인 운동과는 대조적으로, 맑스는 그의 박사논문에서 첫 번째로 그리고 이후 그의 저작을 통틀어 내가 운동론적 변증법이라고 부르는 방행적(pedetic) 또는 추계적(stochastic) 이론을 제안한다. 방행은 엄격하게 필연적이지도 무작위적이지도 않은 일종의 물리적 운동이다. 각각의 새로운 운동은 이전 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만, 이전 운동의 이력에 의해 결정되거나 바로 앞의 운동에 의해 엄격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방행적 운동은 그 어떤 목적론적인 최종 상태가 없다. 맑스에게는 물질이 수동적으로 따르는 그 어떤 보편적인 자연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 자체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이다. 법칙들은 자연 안에 출현하는 경향들이다.

 

사적 유물론: 맑스의 운동론은 또한 하부상부구조사이의 경제적으로 환원주의적인 분리를 거부한다. 둘 사이에는 단순한 인과적 관계도 없을뿐더러, ‘상호작용조차 없다. 엄밀히 말해 그것들 사이에는 그 어떤 물질적 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두 영역 간의 변형들과 상호-생산들은 집합적으로 자기-원인적인 또는 자기-운동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오로지 운동적 변형과 전체 역사적 상황들의 재분배만이 있다.

<14>더 나아가 맑스의 운동론은 물질에 관한 그 어떤 환원주의와도 충돌한다. 맑스의 박사 학위 논문과 에피쿠로스에 관한 노트에 나오는 물질의 운동론은 모든 원자론적 이론을 거부한다. 보편적인 자연 법칙을 따르는 개별적 입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의 운동론은 물질에 관한 조잡한 기계론과 완고한 경험론은 물론 관조적이거나 사변적인 형이상학 이론과도 완전히 상충한다. 맑스는 물질 또는 운동에 관한 그 어떤 형이상학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스 원자론에 대한 전형적인 해석들과는 달리, 맑스는 연속적이고 방행적인 흐름들에 기대어 물질에 관한 불연속적 해석을 거부한 첫 번째 근대 사상가였다. 원자를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으로 취급하고(베이컨), (가상디)이나 생명론(캐번디시)을 재도입한 근대 원자론의 여러 해석과 달리, 맑스는 물질을 과감하게 운동론적 과정(kinetic process)으로 취급했고, 따라서 물질이 있는바에 대한 환원주의나 실체-기반 이론을 거부했다.

 

따라서 맑스는 결정적으로 반고전적인 물질 이론을 제시하면서, 현대의 양자이론에 더 많이 근접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들이 고려했던 것보다 더 나아간 것이다. 맑스에게 물질이란 사실적인, 관찰가능한, 경험적 물질로 환원불가능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사변적이거나 관념적인 것(데모크리토스에게서처럼)이라서가 아니라 정확히 말해 물질이 운동과 유동 속에 있기 때문이다. 물질은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 자체 감각(sensation)을 위한 조건이기 때문에, 감성적(sensuous) 사물이나 실체가 아니다. 물질의 핵심에 있는 운동의 비환원적 우선성은 맑스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면서 모든 종류의 환원론에 저항한다.

 

역사적 존재론: 맑스의 운동론은 물질이나 운동의 존재론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존재론이다. 맑스의 운동론적 유물론은 물질 그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물질이 우리에게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완고한 인간 중심적 또는 사회적 실천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맑스에 따르면 자연과 사회 간에는 아무런 존재론적 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맑스의 물질론은 대신에 엄격히 말해 실천에 기반하지만, 이때 실천은 인간만이 실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자연을 기술하는 인간의 이론적 실천들은 언제나 체현되어(embodied) 있으며 역사적으로 위치지워져(situated) 있다. 철학은 그것이 기입된 물질적 조건에 의존한다. 하지만 비인간 또한 그렇게 한다.

 

다시 말해, 이 입장은 현대 맑스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 가지 입장과 구별된다. 하나는 인간중심적 구성주의 또는 사회적 일원론으로, 물질에 대한 인간적 설명이 반실재론적이며 자본주의 외부의 물질이나 자연에 대해 그 자체로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구별된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이나 물질이 영원히 그리고 항상 그 자체로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 이론과도 구별된다. 이 책은 인간중심적 구성주의와 소박한 실재론 사이에서 맑스가 비인간중심주의적 실재론자였다고 주장한다.

 

자연에 관한 인간적 기술(description)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기술하고 변화하는 자연이다. 하지만 다른 자연 존재들 또한 변형의 방식으로 서로 간에 얽혀 든다. 자연은 스스로를 실제적으로 구성한다. 따라서 맑스의 존재론은 자연의 어떤 영역으로부터 자연의 실제적인 기술/변형이라는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미래에 물질은 <15>변화할 것이고, 새로운 입장이 자연의 새로운 영역들을 열 것이다. 맑스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론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전체적으로 국지적이며 또한 마찬가지로 실재론적이다. 맑스에 따르면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그 어떤 존재론적 이원론이나 상호작용도 없다. 또한 어떤 단순한 일원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 거기에는 주름들 또는 매듭들의 다양체(multiplicity)가 존재한다.

 

맑스는 우리에게 물질의 행위소(agency)가 수평적으로 동등하게 분배된다는 평평한 존재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한 존재론은 부르주아 자유주의과 여러 신유물론 정치 이론들을 형제 관계 같은 것으로 본다. 오히려 그는 물질의 상이한 영역들이 평평하지 않게 전개되며 순환된다는 비틀린(twisted) 존재론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맑스가 인간주의적이지도 반인간주의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평평하지 않은 물질 행위소들이라는 신유물론적 맑스, 즉 얽힌, 운동론적 맑스주의를 제시한다.

 

이 책이 맑스로 돌아가서 증명하고자 겨냥하는 몇몇 주요 주장들이 있다. 독자들이 이 논제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이 책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론가들의 맑스 연구를 단순히 보충하는 데 그치지 않으려는 것이 나의 목표이므로, 텍스트 자체의 면밀한 독해를 통해 이 테제들이 가라앉아 버리는지 혹은 헤엄쳐 나아가는지를 입증할 때까지 독자들의 인내와 선의를 부탁드린다. 특히 맑스의 박사 학위 논문에 정통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발견과 맑스의 후기 저작과의 예상치 못한 연결고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사료된다. 나는 맑스의 논문이 진정한 맑스의 열쇠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철학에서 중요한 유실물로서, 보다 일반적으로 맑스주의 이론의 현대적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방법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법론적 노선을 따라 구조화된다.

 

근접 독해

무엇보다도 이 책은 맑스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전체 이론의 토대가 되는 핵심 가치 이론을 제시하는 자본11장의 근접 독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접 독해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그의 박사 학위 논문과 에피쿠로스 노트에 처음 제시된 운동과 운동론적 유물론의 이론적 틀을 살펴볼 것이다. 맑스의 여러 저서에서 이러한 방법론적 실마리를 찾아낸 후, 나는 이 방법을 사용하여 자본의 여러 핵심 개념을 <16>새로운 관점에서 독해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운동은 지엽적인 논쟁이나 그의 저서에 있는 한두 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운동이 맑스 사상의 전체 핵심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으며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맑스의 저작과 방법론이 서양 철학사에서 절대적으로 독창적이고 이단적인 이유이다.

 

나의 근접 독해의 목표는 이 책의 주장에 유리한 인용문을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논쟁적인 구절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또한 나의 목표는 맑스의 텍스트 위를 떠다니는 창의적인 재해석이 아니라 그것을 한 줄 한 줄 읽어가면서, 자본1장에서의 내 해석이 가진 뉘앙스와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가능한 한 핵심 텍스트에 가깝게 접근하고 맑스가 수집한 관련 자료로 이를 뒷받침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

 

번역

이것은 나의 두 번째 방법론적 노선인 번역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맑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뿐만 아니라 독일어 텍스트의 영어 번역과 관련하여 몇 가지 새로운 개입을 시도한다. 일반적으로 나는 맑스 어휘가 가진 운동론적 가치에 대하여, 특히 여기서 영어 번역이 충분히 명확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주의를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이러한 모든 개입에 대해 언급할 수는 없으므로 번역과 해석을 안내하는 가장 중요하고 상호 관련된 몇 가지 독일어 단어에 대해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킬 뿐입니다.

첫 번째 번역 개입은 맑스의 어휘에서 중요하고 상호 연관된 세 가지 독일어 단어, zusammenhängen, wechsel, verkehr 사이의 운동론적 및 개념적 연관성을 강조한 것이다. 맑스는 이 세 단어를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서로 다른 사물들 사이의 지속적인 운동론적 얽힘의 과정을 설명한다. Zusammenhängen은 문자 그대로는 함께 어울리다’(to hang together)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불행하게도 결합또는 뭉치다로 번역된다. 이러한 번역은 상호적인 간-행이라는 생각을 은폐한다. Wechsel연속적인 변화 혹은 주름을 의미하며 흔히 연속적 유동 또는 물질의 주름혹은 신진대사(Stoffwechsel)를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다. 맑스는 또한 저 단어 wechsel을 행위나 효과(Wirkungen)가 일련의 내재적 피드백 루프나 전체의 연속적인 변형에서 서로 간에 접혀들 때,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Verkehr상호변화 또는 교섭이며 맑스는 이를 <17>‘상호 변형의 과정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는. 매우 광범위한 맥락(경제적, 군사적, 의미론적 그리고 성적인 맥락)에서 사용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이 세 단어와 그 중요한 운동론적 의미가 박사 학위 논문부터 자본에 이르기까지 맑스의 작업에서 어떻게 지도적인 선입견으로 작용하는지 보이려고 노력했다.

 

두 번째 번역 개입은 풍부한 의미를 가진 독일어 tragen에 포함된 모든 해석적 가치를 개발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tragen나르다로 번역되지만, 지탱하다, 유지하다, 운반하다, 낳다, 열매를 맺다, 옷을 입다, 가져가다, 끌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 단어가 가진 의미 조합은 맑스가 자신의 가치 이론의 핵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여기서 고려할 사회의 형태에서 그것들[사용-가치]은 교환-가치의 물질적 운반자[Träger]이기도 하다”(C, 126). 맑스는 가치 창조 이전에 가치의 물질적 조건들을 지지하고 유지하는 사용-가치가 있음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물질적 운반자(bearer, Träger)가 가치를 지지하고 유지한다(운반한다tragen). 운반하기는 능동적이고 운동론적인 개념(움직임--가치의 탄생기원을 지칭한다)일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자연, 여성, 동물 그리고 노예들의 구성적 노동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의해 전유된 조력 활동이다. 이 생각은 맑스의 가치론을 그의 시초축적론과 연관하여 재해석하기 위해 관건적이다.

 

논쟁

이 책이 추구하는 논증의 방법 또한 있다. 맑스는 엥겔스의 자연 변증법에 대한 접근법을 따르지 않았고, 그 자신의 유물 변증법을 따랐다. 맑스의 변증법은 상당히 심도 깊고 독창적인 운동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루크레티우스가 에피쿠로스를 읽은 후, 맑스는 그리스 원자론에 관한 전형적인 해석의 정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물질의 운동에 역사적-존재론적 우선순위를 부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러한 논쟁적인 테제라는 것이, 단번에 투명하지는 않으며 현대 맑스주의의 지배적인 패러다임과 몇 차례 이상의 전투를 수반할 것임을 수긍한다. 따라서 이 책은 논쟁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 책의 큰 논지를 뒷받침하는 독해와 번역의 참신함과 힘을 각 단계에서 보여주기 위해 보다 근접한 독해와 번역적 개입과 더불어 여러 논증적 추론의 선들을 담게 된다.

 

그러나 근접 독해와 논증을 연계하는 이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이 책의 핵심 논제들은 엄밀히 말해 근접 독해에 묶여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고려된 텍스트를 넘어 논증을 확장하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지 한 권의 책에서가 아니라면,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18>이런 종류의 주장을 텍스트로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길이와 깊이 때문에 나의 독해는 여기서 더 이상 확장될 수 없다.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의 작업에서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따라서 여기에 제시된 주장은 맑스의 저작집 전체를 대변하거나 맑스가 쓴 모든 것을 재해석하거나 옹호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보편적이거나 종합적인 주장이 아니다. 그의 저작을 통해 운동 지향적 방법론을 확인하는 것을 제외하고, 이 책의 대부분의 주장 범위는 적어도 현재로서는 자본1장에만 국한되지만, 그러한 주장이 원칙적으로 더 광범위하게 확장되고 정교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선집의 나머지 권으로부터도 참고자료를 이끌어냈다.

 

역사

이 책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방법론은 역사적인 것이다. 나의 논변은 최근 맑스와 현재 사이에 나타난 새로운 역사적 공명을 보여줄 수 있다. 새로운 시대마다 과거를 이해하는 조건이 달라진다. 새로운 노선과 유산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특히 21세기에 접어든 현재의 역사적 국면(포스트식민주의적인 전지구적 이주, 생태적 붕괴, 전지구적인 페미니즘 운동)은 맑스에 대한 새로운 독해를 가능하면서도 시급하게 만들고 있다.

 

맑스는 역사의 유물이 아니다. 맑스가 예상했던 것처럼 견고했던 모든 것은 이제 완전히 공기 속으로 녹아내렸다. 오늘날의 세계는 맑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맑스는 움직이는 세상의 동시대인으로서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건네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그의 저작을 우리 세계의 수면 위로 끌어올려 유물론의 지하로부터 다시 한 번 분출시킬 때가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