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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우주의 중간에서 만나기>(카렌 바라드)_7장_part 2

by Nomadia 2022. 7. 13.

원문서지: Karen Barad,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7, 275-287.

 

 

번역: 박준영(노마씨, 수유너머 104)

 

_ ‘< >’ 안의 숫자는 원문의 페이지 숫자임

_ '[ ]'의 숫자는 주석의 숫자임.

_ 주석은 번역하지 않음.

 

3.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

EPR 논문에서 영감을 받아 슈뢰딩거는 1935년에 측정의 문제에 관한 그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당신이 이것에 관한 이례적인 악명과 그것이 표명했던 모든 것을 모른다 할지라도, 유명한 고양이 역설에 관한 슈뢰딩거 논의의 전체적인 내용은 양자역학에서 측정의 문제에 관한 장황한 설명 중 단 하나의 구절에 제한될 것이다.[36] 고양이 역설은 측정의 본성에 관한 적합한 이해에 다가가는 것의 난점을 극화하는데 유용하다.

 

<276>슈뢰딩거는 고양이 역설을 측정에 관한 그의 아주 긴 논의에 앞선 변수들은 정말로 오염되었나?’라고 이름 붙여진 한 절에 도입한다. 이 절에서 그는 파동 함수나 체계의 양자적 상태에 관한 생각을 해결하자고 권유한다. 그의 논문 이전 절에서 양자적 개연성의 해석에 관한 통계적인 또는 고전적인 무지를 해소했기에, 슈뢰딩거는 파동함수가 우리가 미시 영역에 천착하는 한에서 하나의 완전히 확실한 개념 안에서 특정 수준이나 종류의 모든 변수들의 오염(blurring)”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오염’(blurring)이란 슈뢰딩거가 양자 미결정성이나 불확실성에 관한 생각과 씨름하기 위해 사용하는 은유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오염의 은유를 취하면서, 만약 우리가 이 오염이 거시적 객체들의 세계 안으로 스며들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고려한다면, 관련되는 것들이 너무 심각하게 발생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모든 사건들[파동함수]에 고전적 모델이 그 명확한 수치에서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백하고 믿을만한 것으로서 모든 순간에 모든 변수들의 오염을 이미지화하는 어떤 상상된 실체가 있다. 체계가 고전적 모델의 운동 방정식 뒤에 조금도 뒤처지지 않고, 명확하고 결정적으로 방해받지 않고 남아 있는 한에서, 그것의 운동 방정식, 즉 그것의 시간 변화의 법칙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고전적 모델은 그 오염이 직접적인 통제에 열려있지 않고, 원자적 규모에 제한되는 한에서, Ψ-함수에 의해 직접적으로 대체될 수 있다. 사실상 그 함수는 ‘음전자의 구름’이 핵 주위에 있는 사례 등등을 위해 매우 직관적이고 편리한 생각을 제시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불확실성이 거시적으로 지각가능하고 가시적인 사물들에 영향을 준다는 것에 주목한다면, ‘오염’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틀린 것으로 보이는 바, 심각한 오류를 발생시킨다.(Schrödinger 1935)

 

슈뢰딩거의 논점은 측정 사이에 슈뢰딩거 방정식이 파동함수의 결정론적인 시간 진행을 기술하고 - ‘오염은 그 자체로 시간 안에서 어떤 결정론적인 경향으로 증식되어 나아간다 - 그러므로 그 어떤 주요한 개념적 난점도 도입하지 않는다(이러한 오염성의 예외성을 갖춘 친숙한 고전 역학과 많이 유사해 보인다). 따라서 사물들이 미시적 객체들의 규모로 유지되는 한에서 오염은 어떤 도움이 되는 발견적인 것으로 증명된다.[37] 하지만 오염이 거시적 객체의 세계로 스며드는 기회를 가질 때, 특별히 측정 동안 미시적 체계가 거시적인 측정 도구와 상호작용 할 때, 오염이라는 관념은 그릇된 것으로 된다. 슈뢰딩거의 논점은 미시적인 변수들의 오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오염적 성격을 측정에서 목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측정하는 거시적 변수들은 정밀한값들을 가진다. 슈뢰딩거는 아래와 같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이러한 거시적 규모에서의 오염의 관념이 가진 불합리함을 강조한다(그림 25를 보라).

 

<277>

25. 슈뢰딩거 고양이 역설 실험. 고양이가 방사능원(radioactive source)이 있는 박스 안에 놓여 있다. 테이블 위에는 방사능원이 부착된 가이어 계수관(Geiger counter[방사능 측정기])이 있다. 만약 가이거 계수관이 방사능 붕괴 사건을 탐지하면, 계전기에 하중이 발생하면서, 플라스크를 치게 된다. 그러면 독극물이 빠져나오면서, 고양이는 죽는다. 만약 아무런 붕괴도 탐지되지 않으면, 고양이는 살아 남는다. 따라서 이 고양이의 운명은 원자의 운명과 얽혀 있다. Illustration by Mikaela Wilson-Barad for the author.

고양이는 금속 방 안에 다음과 같은 사악한 장비(고양이에 의한 직접적인 간섭에 대해 보호되어야 하는 장비)와 더불어 갇혀 있다. 가이거 계수관 안에는 미량의 방사능 물질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 적은 양이라, 아마도 한 시간에 원자 하나가 붕괴되며, 마찬가지로 아마 그러지 않을 개연성도 있다. 만약 붕괴가 발생하면, 계수관 튜브는 방전되고 계전관을 통해 그것이 흘러 들어가 망치를 움직이면서 시안화 수소가 담긴 작은 플라스크를 깨트린다. 만약 우리가 이 전체 장치를 그대로 한 시간 동안 놔두고 그동안 원자가 붕괴하지 않았다면, 고양이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원자 붕괴는 고양이를 독살할 것이었다. 이 전체 장치의 Ψ-함수는 그 안에 (이렇게 말해 미안하지만) 뭉개져 혼합되거나 오염된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를 가짐으로써 이를 표현할 것이다. 이는 본래 원자 규모에 제한된 미결정성이 거시적 미결정성으로 이동하게 된 전형적인 사례이며, 따라서 직접 관찰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실재를 재현하기 위해 ‘오염된 모델’을 정당한 것으로 소박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한다. 그 자체로는 그것이 불분명하거나 모순된 어떤 것을 구체화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불안정하고 초점이 나간 사진과 구름이 끼고 안개 자욱한 봉우리의 스냅사진 간의 차이가 있다(Schrödinger 1935).

 

<278>이 구절에 대해 논의되는 중요한 지점들이 있다. 우선 앞서 제시된 뭉개져 혼합된불행한 고양이가 나오는 으스스한 시나리오에 집중해 보자. 슈뢰딩거가 뭉개져 혼합된고양이에 대해 말할 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는 체계의 파동함수가 고양이의 살아 있는그리고 죽은상태의 중첩을 포함하는 사태를 가리키고 있다. 일어난 사태에 대해 명확하게 해 보자. 이 사악한 이야기가 고양이의 운명이 몇몇 미시적 사건, 이 경우에는 원자의 붕괴와 같은 사태와 얽히면서(이 특별한 경우에, 우리가 그 방안에 방사능원과 독성물질과 함께 고양이를 가두고 떠난 그 시간 동안 붕괴가 일어나는 것은 반반의 확률을 가진다) 미시 세계에서의 중첩이 거시 세계로 슬며드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식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에 주목하자. 질문은 다음과 같다. 거시 세계의 중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오염이라는 은유는 분명 이 경우에는 부적합하지 않은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선 고양이 역설에 과한 많은 그릇된 생각이 있기 때문에, (이른바) 고양이의 뭉개짐에 관한 몇몇 잘못된 이해들을 추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양이가 살아 있거나 죽은 것 중 하나라는 것과 우리가 단순히 어느 쪽인지 모른다는 것, 또는 고양이가 살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죽어 있다는 것(이 가능성은 논리적으로 배제되는데, 왜냐하면 [살이 있][죽은] 것은 상호배제적인 상태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또는 그 고양이가 부분적으로 살아 있고, 부분적으로는 죽어 있다는 것(코마 상태의 고양이), 혹은 그 고양이가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 있다는 것(여타 죽지 않은생명체들 가운데 살아 있는 뱀파이어 고양이)은 사실이 아니다.[38] 오히려 뭉개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은 고양이의 운명이 방사능원과 단순히 은유적으로 얽혀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어떤 얽힌 상태이다(앞서 논의된 바 기술적technical 의미에서). (고양이와 원자를 함께 포함하는) 체계의 파동함수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이라면, 즉 결과는 반반이다, 즉 원자가 붕괴하지 않고 고양이가 살거나, 원자가 붕괴하고 고양이가 죽는다.[39] 다시 말해, 고양이의 운명은 원자의 운명과 얽혀 있으며, 적합한 측정 장치가 부재하면, 그들의 운명은 미결정적이다. 여기에는 고전 물리학과 상응하지 않는 상황이 있다.[40]

 

이 역설의 핵심에 도달하기 전에, 나는 박스 안에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의해 제기되는 다른 중요한 주제를 논의하고 싶다. 사람들은 만약 슈뢰딩거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 눈을 속이려는 것인지 궁금해 할 것이다. 즉 예컨대 중첩과 같은 양자적 행위란 원리적으로 <279>미시적 영역에 제한되는 것은 아닌가? 이 그릇된 생각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해도,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41] 그 어떤 경험적 증거도 물리 법칙의 두 가지 상이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즉 하나는 양자 물리학에 의해 기술되고 다른 것은 고전 물리학이 기술하는 식은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경험적 증거는 양자 물리학의 보다 넓은 적용가능성ㅇ르 지지한다.) 양자 물리학은 뉴턴 물리학을 대신한다. 그것은 단순히 그것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고양이 역설은 의도적으로 그것의 명백하게 터무니없는값으로 구성되는 반면, 거시적인 양자 효과들의 쟁점은 단순한 고안물 중 하나로 무시될 수 없다. 양자 역학적 행위가 거시적 규모에서 관찰된 적이 있는가?

 

양자 효과들이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영역에서 일반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기본적인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양자 효과는 해당 객체의 질량(m)에 있어서 플랑크 상수(h) 비율의 수준에 속한다. 전자, 원자 그리고 여타 매우-작은-질량의 객체들이 꽤 의미있는 f/m 비율을 가지는 반면, 고양이와 같은 거시적 객체들에서 f/m 비율은 극단적으로 작다. 고전적인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 삶을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자적 세계를 살아 간다. 논점은 양자 효과가 너무나 작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것을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너무 작아서 특수한 장치 없이는 관찰할 수 없다).[42] 게다가 양자 활동은 객체, 특히 어떤 상대적으로 큰 객체를 그것의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보호하는 난점때문에 관찰하기 어렵다. 이때 이 환경은 지속적으로 어떤 중첩이 (원리적으로가 아니라) “전반적인 실천적 목적들을 위해혼합물로 무작위화되는 방식으로 변덕스럽게 동요한다. 이 무작위 과정은 결깨짐’(decoherence)이라고 불리워진다. 결국 우리는 어떤 얽힘을 규정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며(예컨대 어디서 상관관계를 찾아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측정할 것인지), 일반적으로 말해 이것은 확실성과는 거리가 멀다.

 

분명 큰-규모의 체계들에서 양자 작용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장애물이 있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어떤 난점이 현실화되든지 간에, 원리적으로 우리는 거시 체계들에서 양자 작용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상, 거시적인 양자 터널화와 거시적인 양자 결맞음처럼, 상대적으로 큰 규모의 체계에서 양자 작용은 관찰되어 왔다. 가장 잘 알려진 예는 아마도 앤서니 레깃(Tony Leggett)1984년 초전도 양자 간섭 소자 실험 또는 줄여서 SQUIDS 실험일 것이다. 그래서 거시적인 양자 상태들에 관한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슈뢰딩거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슈뢰딩거에 의해 제안된 사유 실험은 미시적 수준에서 이미 존재하는 쟁점에 관한 극적인 무대화인데, 우리는 사실상 이것을 이미 만났었지만, <280>미시적 입자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렇게 많이 방해받을 것 같지는 않다. 논점은 우리가 철로 된 방을 열 때 발견될 것을 상당히 확신한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뭉개져 혼합된고양이를 발견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죽거나 살아 있는 고양이를 발견할 것이다. . 그러나 이 논점은 또한 우리가 원자나 이런저런 입자들을 측정할 때 적용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고유상태들의 중첩으로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고유상태들 중 하나로 발견할 것이다. 논점은 측정이 미결정성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슈뢰딩거가 실재를 기술하기 위해 오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주어진다.) 우리가 하나의 체계를 관찰할 때, 그것은 중첩 상태를 그만둔다. 그러나 어떻게 그 미결정성이 해결되는가? 고유상태의 중첩으로부터 해당 속성이 측정되는 어떤 결정값으로 가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파동함수가 중첩(또는 얽힘)에서부터 하나만 제외하고 모든 계수들이 0으로 수렴하는 것으로, 즉 가능한 고유상태들 중 하나만 선별되는 상태로 얼마간 붕괴되는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떻게 이와 같은 붕괴가 가능한가? 어떤 상태에 의해 파동함수는 하나의 고유상태로 축소되는가?

 

결정적으로 슈뢰딩거는 상태들의 중첩에서부터 결정된 고유값으로 - 미결정성에서 결정성으로 - 의 소위 파동함수의 붕괴가 SE에 의해 고려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때 문제의 핵심은 이 해결의 본성을 이해하는 방식, 즉 우리가 측정의 본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는 슈레딩거 논문에서 핵심적인 질문이며, 그것이 우리를 양자역학의 근원적인 중심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한 절을 할애 받아 설명할 가치가 있다.

 

4. 측정의 문제

고양이 역설은 전자와 중성자를 포함하는 동일한 현상이 단순히 그러하지 않다는 측면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가장 많이 우리를 사로잡는 특성은 그것이 어떤 얽힌 상태의 부분으로 존재하는 바, 중첩 또는 죽은 상태와 산 상태의 혼합된 상태’ - 많은 물리학자들이 가장 곤란해하는 바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 즉 설명이 가장 필요한 것은 측정과정 중에 일어나는 상태 변환의 본성이지, 단순히 그것의 사전에 있던 상태의 본성이 아니다. 측정 이전과 이후의 상태에 있어서 중요하게 차이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측정에 의해 중첩은 혼합된 것으로 붕괴하는 것 같다.[43] 특히 우리는 미결정 상태에 있는 고양이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측정에 의해 죽거나 살아 있는 고양이를 발견한다. 이것은 우리가 미시적 객체들에 측정을 수행할 때 만나는 상태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즉 측정기는 언제나 결정된 방향 안에서 무언가를 가리킨다(또는 적어도 그런 듯이 보인다). 예컨대 만약 우리가 z-방향 스핀값을 측정하는데 적합한 실험적 배치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281> ‘값을 가진 몇몇 입자들 그리고 아래값을 가진 몇몇 입자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중-슬릿 실험을 수행한다면, 모든 입자들은 스크린의 어떤 결정 위치에 놓일 것이다(그것이 어떤 궤도를 가지지 않을지라도).

 

논점은 SE가 파동함수의 결정론적인 선형적 진행을 좌우하면서, 실제로 중첩, 얽힘 그리고 여타 양자 작용의 형식들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반면, 그것은 오로지 측정들 사이의 파동 함수에 발생하는 것으로 고려되며, 측정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갑작스러운 변이를 기술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양자역학 이론을 위해 이러한 문제의 심오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형식주의 자체가 측정 과정 동안 일어나는 일을 기술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형식주의가 우리가 측정에 의해 의도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비친다. 이 논의의 중요성은 슈뢰딩거도 놓치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측정에 의한 갑작스러운 변화는 [...] 전체 이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소박한 실재론과의 단절을 요청하는 것은 정확히 바로 이 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Ψ-함수를 직접 모델이나 물리적 사태의 위치에 놓을 수 없다. 이것은 사실상 우리가 결코 갑작스러운 예기치 않은 변화를 대담하게 어떤 물리적 사태나 모델로 귀착시키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실재론적 관점에서 관찰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자연적인 과정이며, 그 자체로 자연적인 사건들의 질서잡힌 흐름의 방해를 발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Schrodinger 1935)

 

여기서 슈뢰딩거는 측정의 문제에 관한 전체적인 분석을 시작한다. 다소 길게나마 그의 추론과정을 음미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실재론의 거부는 논리적 결과를 가진다. 일반적으로 변수는 내가 그것을 측정하기 이전에는 아무런 결정값을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측정한다는 것은 그것이 가진 값을 확인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측정이 참이나 거짓이 되거나, 방법이 좋거나 나쁜, 정확하거나 부정확한 것에 대한 – 과연 그것이 측정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을만한지 아닌지에 대한 - 어떤 규준이 여전히 있어야 한다. 다른 물체 옆에 놓인 어떤 지시계기(indicating instrument)가 작동하는 오래된 것, 따라서 아무 때나 우리가 읽어내는 그것은 이 물체의 측정으로 불리워지기는 힘들다. 이제 그것은 충분히 명백하다. 즉 만약 실재가 측정값을 결정하지 않는다면, 그럼에도 적어도 그 측정값이 실재를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그것이 다시 알려질 것이라는 그러한 의미에서, 실제로 측정 이후에 드러남에 틀림없다. 즉 바라던 바 규준은 단지 이것이다. 측정의 반복은 동일한 결과를 산출해야 한다. 많은 반복에 따라 나는 그 과정의 정확성을 증명할 수 있고, 내가 그저 쓸데 없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줄 수 있다.(Schrödinger 1935)

 

<282>(사태들은 보어에게서보다 더 나은 것에서 시작하고 있다.) 슈레딩거는 그 이론의 바로 그 기초로 파고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즉 만약 측정이 선재하는 값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값들을 만들어낸다면, 우리가 단지 쓸데 없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해 무언가 배우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는 실험의 결과를 위한 객관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가? 측정의 본성과 역할을 무엇인가? 양자역학은 측정의 본성에 관해 어떤 수단을 제공하는가? 만약 양자역학이 측정과정을 사고할 수 없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확실히 높은 위험성이 여기 있다. 우리는 양자역학에서 관찰의 결과를 예측하는 능력을 구축하는 형식주의를 가지며, 그럼에도 측정 양자물리학의 법칙들을 지켜야 하는 그 자체로 어떤 물리적 과정인 - 의 바로 그 본성에 관한 이해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슈뢰딩거는 하나의 실마리로 추론의 노선을 따른다. 그는 파동함수가 변화할 때 만약 그 자체로 남아 있다면, 연속적으로, 측정의 결과로서는 불연속적으로 - ‘예측의 기대 목록은 변화하며, 이것은 그 목록 안에 새로운 진입요소들 뿐 아니라, 소거되는 부분들도 만들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 어떤 지식도 만족스럽게 획득될 수 없지만, 잃어버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 소거부분들은 이전에 옳았던 진술들이 이제는 그릇된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옳은 진술은 오로지 그것이 적용되는 객체가 변화할 경우에만 그릇될 수 있다”(Schrödinger 1935). 그래서 그는 측정 상호작용이 마찬가지로 그가, 측정과정을 좌우하는 추정된 몇몇 새로운 자연법칙이 아니라(측정들 사이에 파동함수의 연속적인 진행을 좌우하는 법칙과는 반대로), 그것이 파동함수 자체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속한다고 믿는 곳에 입증책임을 두기 위해 다른 것들과 같이 자연적 과정[]”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측정이] Ψ-함수의 그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후자는 [...] 고전적 모델에서와 같이 객관적 실재에 관한 실험적으로 정당화가능한 표현으로 기여할 수 없다.” 슈뢰딩거는 따라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측정에 기인하는 [파동함수]의 불연속성은 불가피한데, 왜냐하면 만약 측정이 적어도 어떤 의미를 보유해야 한다면, 잘 된 측정에서 나온 측정값이 획득되어야 한다. 2) 불연속적 변화는 그렇지 않으면 타당한 인과법칙에 의해 확실히 지배되지 않는데[즉 SE], 왜냐하면 그것이 미리 결정되지 않은 측정값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3) 변화는 또한 분명히 (‘최대치’maximality로 인해) 지식의 몇몇 손실을 포함하지만, 지식을 잃어버릴 수는 없으며, 따라서 객체는, 불연속적 변화를 따라,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변화 동안, 예측할 수 없는 식으로, 상이한 방식을 따라 변화한다.(Schrödinger 1935)

 

<283>슈뢰딩거가 얽힌 상태라는 생각을 도입하는 것은 이 지점이다.

 

전체 체계에 관한 최대치의 지식이 필연적으로 그 모든 부분들에 관한 전체 지식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 논점이다. 이는 부분들이 서로 간에 완연히 분리되어 있고 어떤 순간에도 서로 간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때조차 그러하다. [...] 발생한 어떤 ‘예측의 얽힘’은 분명히 두 물체가 다소 앞선 시간에 진정한 의미에서 상호작용하고, 서로에게 흔적을 남겼던 하나의 체계를 형성했다는 사실로 돌아갈 수 있다. [...] 두 개의 체계들이 상호작용할 때, 그들의 Ψ-함수는 [...] 상호작용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즉시 존재하기를 그치며 단일한 하나이기를 그친다. 왜냐하면 합성된 체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 체계들이 서로 간에 영향을 끼치지 시작하자마자 합성 함수는 어떤 생산물이기를 그치며, 더 나아가 그것들이 분리되어 버린 후 체계에 개별적으로 분배될 수 있는 요인들로 다시 나누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임시로(얽힘이 어떤 현실적인 관찰에 의해 해결될 때까지) 둘에 대한 통상적인 기술(description)만을 취급한다.(Schrödinger 1935)

 

확실히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그리고 로젠이 관심을 가진 그런 종류의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슈뢰딩거는 아마도 놀랍게도 얽힘이 흔적이 등록될 그 순간(표시들이 물체들에 만들어질 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주체가 실제로 측정의 결과를 알아챌 때 해결된다고 논증한다. 다시 말해 고양이의 경우로 돌아가서, 슈뢰딩거가 제안하는 해결의 시나리오는 우리를 기묘한 상황으로 이끌어 간다. 우리가 고양이가 있는 그 방의 외부에 한 시간 후 열리고 무슨 일이 안에서 일어났는지 그 결과를 기록하는 어떤 장치를 부착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한 시간 후에 원자가 이미 붕괴되었거나 붕괴되지 않았다는 것, 결과적으로 그 고양이는 이미 죽었거나 그렇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기록 기계가 그 문제의 사실에 관한 기록을 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슈뢰딩거에 따르면 그러한 추정은 그릇된 것이다. 얽힘의 해결이라기 보다, 우리가 가지게 된 것은 이제 기록 기계도 마찬가지로 얽힌 상태 안에 있게 된, 즉 그 방 안쪽에서 진행되는 모든 것과 얽힌 더 복잡해진 얽힘의 상황이다. 사실상 슈뢰딩거는 몇몇 인식하는 주체가 조사에 따라 결정값을 추정하는 기록 장비에 남은 흔적을 간파하기까지 얽힘이 유지된다고 논한다. 슈뢰딩거는 이것이 어떤 종류의 정신적 행위소(예컨대 염력)의 결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284>비로소 분산을 결정하는 이 조사탐구는, 불연속적인 또는 도약하는 어떤 것을 발생시킨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어떤 정신적 작용으로 부르고자 할 것인데, 왜냐하면 [사물들이 그와 같은] 객체들이 이미 접촉 없이 [이 탐구가 시작되는 그 시간까지] 존재하는 식으로 [준비될 수 있기] 때문이며, 더 이상 물리적으로 접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부분적인 상이한 방정식에 따라 변화하는 객체의 Ψ-함수는 이제 정신적 행위 때문에 도약-경향성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이 있지 않든간에, 더 이상 그것은 변화할 수 없다. 그것은 새롭게 태어나며, 재구성되며, 지각활동을 통해 우리가 가진 얽힌 앎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는 바, 그것은 사실상 측정된 객체에 가해지는 어떤 물리적 효과가 아니다.(Schrödinger 1935).

 

따라서 슈뢰딩거에게 측정의 문제는 아래와 같이 해결된다. 파동함수에서 불연속적 변화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파동함수들에서 어떤 불연속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측정행위들이 주재하는 자연의 몇몇 구별되는 법칙에 기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제로 진행되는 것은 객체의 파동함수가 측정하는 체계와 얽히게 된다는 것(그리고 그와 같은 얽힘이 SE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즉 파동함수에서 이 변화에 상응하는 갑작스러운 물리적 변화에 관해 아무런 의문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객체의 파동함수에서 그 전환은 우리가 비록 여전히 전체 파동함수의 최대치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더 이상 개별적 하부체계들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않는다(그것들은 심지어 잘-정의되지도 않는다)는 측면에서 객체에 관한 우리의 인식과 측정 도구에 관한 우리의 지식의 얽힘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파동함수에 관한 소박한 실재론에 대해 분명히 경고하는 슈뢰딩거는 측정의 문제를 원리적으로 획득가능한 어떤 체계에 관한 최대치의 인식의 목록으로 파동함수를 이해하는 것에 기반하여 해결한다. 그러므로 얽힘에 관한 슈뢰딩거의 이해는 명백하게 인식적이지, 존재적이지 않다.[44] 사실상 정의를 내리는 문장에서, 그는 우리 인식의 얽힘”(161)을 이야기한다.

 

나는 긴급한 교육적 목적에 따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보다 다소 상세하게 슈뢰딩거 논문을 훑어 보았다. 우선 어떻게 1935년에 저술된 이 단일한 논문이 반 세기 넘는 동안 계속 회자되어 왔던 측정의 문제와 관련하여 그토록 많은 쟁점을 제기하는지 놀라운 일이다. 특히 <285>중요한 것은 측정과 파동함수의 본성에 관한 이해의 문제 사이의 관계이다. 두 번째로 당대의 많은 쟁점 요약과는 달리, 상세한 검토는 측정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세 번째로 그것은 얽힌 상태라는 생각을 슈뢰딩거가 도입하는데 있어서 쟁점사항과 중요사항과 그것으로 그가 드러낸 바를 보여준다. 이 후자의 논점은 특히 나의 목적에 있어서 중요한데, 왜냐하면 몇몇 학자들이 슈뢰딩거의 상태 얽힘과 보어의 현상 개념 간의 관계가 무엇인지 궁금해했기 때문이다.[25] 나는 이후 장에서 이 주제로 돌아올 것이다.

 

파동함수의 붕괴라는 생각은 측정 문제로 알려지게 된 최근의 모든 논의에서 표면화되며, 그럼에도 슈뢰딩거의 논문에 붕괴에 관한 언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았다시피, 핵심 주제는 측정에 앞서는 중첩 또는 얽힘과 그것의 측정에 있어서 일정한 값들의 혼합으로의 해결사이에 상태에 있어서 갑작스러운 변화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두 종류의 상태들이 물리적으로 구별가능하다는 것을 상기하자. 즉 중첩은 간섭 흔적들을 남기지, 혼합은 그렇지 않다. 이 상태 변화가 문자 그대로, 즉 물리적인 어떤 것으로 취해질 때(이것이 가장 흔하게 추정되는 바다), 파동함수의 붕괴로 지칭된다. 슈뢰딩거의 논문에서 붕괴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이유는 명백하다. 즉 슈뢰딩거는 물리적 변화에 상응하는 파동함수에서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이해할 수 없다. 측정의 문제 또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에 관한 현대적 사유를 잘 아는 독자들은 실제로 파동함수가 측정에서 발생하는 것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일한 선택지에 직면하여 측정의 본성에 관한 질문은 실제로 측정 문제로 돌아가는데, 왜냐하면 붕괴가 정말로 특이하기 때문이다. 붕괴는 모든 공간에 걸쳐 동시적으로 발생해야 한다”(Greenstein and Zajonc I997, 183).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형식주의(SE를 의미한다)가 붕괴를 해명할 수 없기 때문에, 정말로 곤란에 처한다.

 

우리는 파동함수의 붕괴가 양자역학 내에서 어떤 변칙적인 위상을 가진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관찰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의해 요청되지만, 양자 이론에 의해 예측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부가적인 공준이며, 양자역학이 지속되기 위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Greenstein and Zajonc 1997, 187)[46]

 

이 부가적 공준은 투사 공준’(projection postulate)라고 불리며, 수학자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에 의해 도입된 이론에서 특별히 부록으로 다루어진다. 하지만, 붕괴는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다.

 

<286>우리는 또한 특정 현장에 있는 어떤 연구자들에 의해 유지되는 그러한 전망, 즉 파동함수가 그 어떤 물리적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해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파동함수가 체계에 대한 우리의 정보를 기술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고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파동함수의 붕괴는 아무런 특별한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 다른 한편 우리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파동함수에서의 변화를 그 물리적 과정에 관한 우리 인식에서의 변화와는 반대로, 물리적 과정에 상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에 주목한다.(Greenstein and Zajonc 1997, 188)

 

그러나 슈뢰딩거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과학이 다수가 믿거나 믿지 않는 것에 기반한 어떤 논증에 대해 회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것이 양자 역학에서 기초적인 쟁점이 될 때, 특히 이러한 점을 경계해야 한다.

 

이런 주의사항과 더불어, 우리는 제기된 붕괴라는 문제로 되돌아 간다. 그렇다 하더라도 투사 공준이 붕괴를 해명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본질적으로 투사 공준은 파동함수의 당면한 붕괴에 관한 수학적 수정일 뿐이다. 즉 그것은 측정된 속성을 위해 정해진 값을 얻는 측정에 영향을 끼치는 어떤 형식적 진술이다.(다시 말해, 측정하는 도구의 지침계는 그 방향에서 모든 가능한 고유값들에서 중에서 나오는 하나를 가리킨다.) 많은 물리학자들과 물리 철학자들은 투사 공준을 승인하면서 그것을 소위 코펜하겐 해석의 잘 수립된 특성으로 취한다. 하지만 측정의 본성이 보어의 분석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해도, 보어는 결코 투사 공준을 언급하지 않으며, 그가 코펜하겐 해석의 어떤 기본 요소로서 그것을 포함하는 것에 찬성한다는 증거는 없다. 양자 물리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47](내가 후에 논하는 것처럼, 나는 이에 대한 훌륭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투사 공준을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그것의 완벽하게 특별한 본성에 불만족을 느낀다. 무엇보다 투사 공준은 명백하게 어떤 실제적인 물리적 과정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있다(이론이 슈뢰딩거에 의해 제안된 그 본래적인 형식 안에 머물러야 한다면 그렇지 않다. SE가 자연법칙을 기술하기 위해 고려된다면 그렇지 않다.)[48]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그 공준은 단지 간혹 요청될 뿐이다.(객체의 최초 상태가 측정하는 도구의 고유상태들 중 하나에 상응하는 경우에는 아무런 투사 공준도 요청되지 않는다. SE 자체는 우리가 보았다시피 측정된 결과를 예측한다.)[49]

 

물리학자들 중 다수가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적극 지지한다 해도, 코펜하겐 해석에 관한 그 어떤 단일한 결정된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며, 오히려 <287>이러한 포괄적 용어 아래에서 지칭되는 관점들의 페스티쉬가 있다.[50] 양자역학에 관한 소위 코펜하겐 해석에 관한 불만족. 특히 측정 문제에 관해 그것이 제안하는 해법과 관련된 불만족은 정신적인(Wigner 1961) 또는 중력에 따른(Penrose 1989) 파동함수의 붕괴를 포함하여 많은 창조적인 대안들을 자극했다. 그리고 파동함수가 결코 붕괴하지 않지만, 측정에 있어서 세계가 각각의 가능성과 같은 많은 세계 속으로 분열된다는 이론이 나타난다.(Everett 1957)[51] (Bohm, 1952)의 비국소 숨은 변수 이론(nonlocal hidden-variables theory)은 여타 탁월한 고전적 관념들의 확장에 있어서 결정론을 보존하며, 붕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GRW 형식주의(Ghirardi et al. 1986)는 파동함수의 물리적 붕괴를 야기하는 어떤 항을 포함하는 SE에 대한 대안을 제안하며, 결깨짐은 무작위적으로 변동하는 환경과 함께하는 객체의 상호작용에 기초하는 붕괴에 대한 어떤 물리적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거래해석(transactional interpretation, Cramer 1986)은 그것에 의해 확정 파동’(confirmation wave)야기 파동’(offer wave)을 뒤이어 방사될 때 충돌이 발생하는 것으로서 실험 과정을 준비하는 것에 기반한다. 그리고 [이 외에] 참여적 우주 해석(participatory universe interpretation, Wheeler and Zurek 1983), 양자 논리 해석, 모델 해석 등등이 있다. 에블린 폭스 켈러(Evelyn Fox Keller)는 그녀의 논문 현대 물리학에서의 인식적 억압(Cognitive Repression in Contemporary Physics)에서 물리학자들 자신들의 이론에 적합한 인식 패러다임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물리학자들의 실패를 고전 물리학의 기초 교의, 즉 자연의 객관성과 인식가능성을 포기하는데 아무런 의지가 없었다는 것으로 돌린다. 그녀는 그러한 교의들 대신 필요한 것은 한편으로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간의 명백한 상호작용을 깨달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과 현상들 간의 마찬가지로 명확한 간극을 인정하는 어떤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한다(Keller 1985, chap. 7).[52] 켈러의 인식적 억압이라는 진단을 참조하면서, 안톤 자일링거(Anton Zeilinger, 1996)는 대안적 해석이나 이론들의 이러한 확산으로 이끌었던 심리-사회적 요인들에 관한 그 자신의 진단을 내놓는다. “코펜하겐 해석과 다른 해석에 대한 탐구는 매우 자주 그 급진적 결론, 즉 제안자들의 일부에 대한 인식적 억압이라는 행동을 비켜가기 위한 노력에 의해 추동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