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체-지향 존재론의 의미, 발전, 구별점
<6>당신 앞에 놓여 있는 이 책의 주제는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줄여서 OOO이며 ‘삼중O’라고 발음한다) (...) 이다. 아무도 실제적으로 지식이나 진리를 소유하지 않으며, 따라서 정치학이나 여타의 다른 것들의 퇴락에 대항하여 우리를 방어할 수 없다. OOO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사유를 진정 위협하는 진리는 상대주의가 아니라 관념론이고, 그래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에 대한 치유책은 진리/지식 쌍이 아니라 (...) 실재(reality)이다. 실재는 늘 우리의 다양한 배를 침몰시키는 암초인데, 그것은 보통 인지되거나 숭배되어야 하지만,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 <7>실재는 언제나 우리가 그것에 대해 공식화하는 것과 근원적으로 다르며, 결코 우리가 신체적으로 직접 마주칠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간접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직접 접근으로부터 사물의 물러남(withdrawal)이나 보류(withholding)는 OOO의 중심원리이다. 이 원리에 대한 일반적인 반론은 이것이 우리에게 알 수 없는 실재에 대한 쓸모 없는 부정적 진술만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오로지 두 가지 대안들만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즉 한편으로는 진리에 관한 명확한 산문적 진술들, 다른 한편으로는 모호한 시적인 제스처가 그것이다. 이 대신 나는 미학, 은유, 디자인, 상당정도로 비난 받는 분과인 수사학 그리고 철학 자체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대개의 인식이 이러한 대안들을 모두 취하지 않는다고 논증할 것이다. 모든 분과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은 비록 그것이 지식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해도 커다란 인식적 가치를 가진다. 모든 불쾌감에 대한 치유책으로 재빨리 인식을 환기하는 우리 시대에, 이것은 과학보다 인간 진보를 위한 광범위한게 상이한 제안인 철학을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힘으로 만든다. 그러는 동안 정치나 다른 곳에서 허풍쟁이들은 아무도 실제로 가지지 않은 진리에 대해 주장하지 않는 것을 최고로 여기지만, 그들이 실재를 마주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요구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지식과 실재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탐색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이 책의 중심 관심사 중 하나다.
10년 전에는 대중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객체-지향 존재론은 최근 예술과 인문학에 영향을 주는 가장 도발적인 철학 이론들 중 하나로 등장했다. 지젝은 이 학파를 <8>인간 주체를 위한 모델에 그 어떤 장소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격했으며, 그의 지지자들은 OOO에 대한 거부로 대개 뭉쳤다. 프랑스 철학자인 브루노 라투르는 이 학술 운동에서 보다 친근하게 인용되었는데, 그는 최근의 존재양태에 관한 주요 저서에서 ‘객체-지향 정치학’이라는 구절을 도입했다. OOO는 《아트리뷰》지에 국제적인 예술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100가지 중 하나로 등재되었다. 그러나 아마도 OOO의 가장 거대한 충격은 무엇보다 건축 분야다. 이 분야는 새로운 철학적 트랜드를 일찌감치 채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주요 건축 컨퍼런스의 적어도 두 명의 조직자들이 공적으로 OOO가 탁월한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스트 사상가인 자크 데리다와 질 들뢰즈의 건축에서의 이전 영향력을 장악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는 동안 예일 대학 건축학과 부학과장인 마크 포스터 게이지(Mark Foster Gage)는 “OOO가 [...] 건축학에서 탐구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존재에 대한 생성의 우위라는 들뢰즈적 강조에 대한 해독제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건축이 그 자신의 질적인 것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관계, 과정, 내적 복잡성, 맥락적 관계들에 의해 평가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해독제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 이 학파의 권위는 다른 영역들에서의 명성을 관찰함으로써도 파악된다. 예컨대 팝뮤지션인 비요크(Björk)는 OOO 저술가인 티모시 모튼과 함께 작업했으며, 배우인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는 2014년 런던의 사택에서 열린 내 강연들 중 하나를 진지하게 경청했었다.
객체-지향 존재론(‘객체-지향 철학’으로도 알려진)은 비록 그 방대한 영향력이 2010년 4월 아틀란타의 조지아 기술 대학에서 그 주제에 관해 열린 첫 번째 컨퍼런스에 개략적으로 시작되었다 해도,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다. 내 자신의 책들과 더불어, OOO 노선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저작들이 <9>이안 보고스트(『단위 작동』Unit Operations, 『에이리언 현상학』Alien Phenomenology) 티모시 모튼(『실제적 마술』Realist Magic, 『초객체들』Hyperobjects) 그리고 생각이 바뀌기 전의 레비 브라이언트(『객체들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Objects)에 의해 쓰여졌다. 철학과 같은 고전적 분과에서 늘 그렇듯이, 새로운 조합들로 전개되고 철학자들이 자주 무시했던 주제들에 적용된다 해도, OOO의 모든 생각들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상세하게 논의될 OOO의 기본적인 원리들 중 몇몇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객체들은 그것이 인간인든, 비인간이든, 자연적이든, 문화적이든, 실제적이든 또는 공상적이든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2) 객체들은 그것들의 성질들과 동일하지 않지만, 그 성질들과 긴장관계를 가지며, 바로 이러한 긴장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변화의 원인이다. (3)객체들은 두 가지 종류로만 관여한다. 즉 [하나는] 실재 객체(real objects)로서 다른 여타의 것들에게 일반적으로 영향을 주든 주지 않든 존재한다. 반면 [다른 하나는] 감각 객체(sensual objects)로서 오로지 몇몇 실재 객체와 관련을 가짐으로서만 존재한다. (4) 실재 객체는 서로 간에 직접적으로 관계할 수 없고, 오직 간접적으로만, 즉 감각 객체를 통해서만 관계할 수 있다. (5) 객체의 성질들도 마찬가지로 오로지 두 가지 종류로만 관여한다. 즉 실재 성질과 감각 성질이 그것이다. (6) 객체의 이 두 가지 종류아 성질의 두 종류는 네 가지 기본적인 순열을 이끌어 내는데, 이때 OOO는 시간과 공간의 근원처럼 이것을 취급하며, 마찬가지로 본질(essence)과 형상(eidos)으로 알려진 항들과 밀접하게 관련시킨다. (7) 마지막으로 OOO는 철학이 일반적으로 수학이나 자연과학보다 미학과 더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열거된 이 생각들 중 몇몇은 아마 도전적이거나 심지어 받아들이기 힘든 것처럼 들릴 것이지만, 나는 이것들을 가능하면 알기 쉽게 설명하도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나의 희망은 이 책을 끝까지 읽는 사람들이 어떤 남달리 새로운 지적 전망이 펼쳐졌다는 것을 발견하리라는 것이다.
<10>OOO는 철학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아프리카-미국학, 고고학, 건축, 안무, 디자인, 생태학, 교육, 페미니즘 이론, 문학 이론, 미디어 연구, 음악, 정치 이론, 정신분석, 사회 이론, 신학, 비디어 게임 이론 그리고 시각예술에서 강력한 반응 –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 을 불러 일으켰다. 이 광범위한 영향은 어떤 친숙한 노래처럼 들릴 것인데, 왜냐하면 대륙철학적 전통(특히 프랑스-독일)으로부터 나온 수많은 철학적 방법들이 이미 지난 50년간 영어권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자주 다소 부정확하게도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단순히 ‘이론’이라는 일반적 명칭 하에 도매급으로 취급되었으며, 일부에서는 현란한 사기술로 격하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당장 떠오르는 이름들 중 몇몇은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뤼스 이리가라이, 슬라보예 지젝, 주디스 버틀러, 마르틴 하이데거 그리고 브루노 라투르 등이다. 마지막 두 사람은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실재가 언어, 권력 또는 인간적 실천들에 의해 ‘구성된’ 어떤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던 반면, OOO는 직설적으로 실재론적 철학이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의미하는 바는 OOO가 외부세계는 인간의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지루하고 상식적으로 들리겠지만, 지난 세기 대륙철학의 경향은 그 반대로 갔으며, 놀랍게도 상식과는 낯선 방향으로 이끌렸다.
OOO가 새로운 독자라 하더라도 G++ 또는 자바와 같은 객체-지향 컴퓨터언어에 친숙할지도 모른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애초에 나는 이 둘 간에 그 어떤 <11>본질적인 연관성도 없다고 말해야 하겠다. 즉 OOO는 단순히 그 ‘객체-지향’이라는 용어를 빌어왔을 뿐, 그쪽 방면의 연구발전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마도 컴퓨터공학의 전문가는 객체-지향 프로그래밍과 OOO간의 보다 상세한 비교를 수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것은 필수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OOO는 그 영역의 세부사항으로부터 영감을 취하기보다, 그 분야에서 ‘객체-지향’이라는 용어를 빌어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와 철학 둘 모두에서 ‘객체-지향’이라는 의미에 대해 몇몇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오래된 컴퓨터 언어로 쓰여진 프로그램이 그 모든 부분들이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통합되는 체계적이고 전체적인 엔티티들이었던 반면, 객체-지향 프로그램은 각각의 내부정보가 다른 것들에게 숨겨진(또는 ‘감싸여진’) 채 남아 있는 독립적인 프로그램 ‘객체들’을 사용한다. 그 부분들의 독립성이 주어지면, 컴퓨터 프로그램은 더 이상 매번 기억장치(scratch)로부터 불러낼 필요가 없어지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목적으로 다른 곳에 이미 쓴 프로그램 객체들을 그 내부구조를 변경할 필요 없이 새로운 맥락 안으로 불러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매번 전체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야하기 보다, 새로운 쓰임을 창조하는 여러 조합들에서 그것들을 재정립하기 위한 새로운 세트를 만들어내는 개별 프로그램 객체들을 결합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객체들이 서로 간에 불투명하며 사용자에게 맞춰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데, 이러한 생각이 서양철학사에는 낯설다는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여러 사상가들은 사물의 실재성이 궁극적으로 <12>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임마누엘 칸트의 ‘물 자체’, 하이데거의 ‘존재’ 그리고 라캉의 ‘실재’는 지성사에서 이런 경향의 세가지 예시이다. OOO를 이러한 사유 경향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 – 그러나 객체-지향 프로그래밍과 유사하게 만드는 것 – 은 인간 정신에 대한 것과 같이 객체들이 결코 서로 간에도 충분히 접촉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바로 OOO가 독창적이지 않다는 비난의 대부분이 간과하는 핵심 논점이다. 객체 간 상호 맹시(mutual darkness)에 대한 OOO의 기여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유력한 전체주의 철학들 중 어떤 것에 저항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철학들은 모든 것이 그것의 관계들로 순수하게 규정되며 세계는 이 관계들의 전체 체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론들에 대항하여 OOO는 객체들 – 실재적이든, 공상적이든,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인간이든 또는 비인간이든 간에 – 이 상호적으로 자율적이며 당연시되기 보다 설명될 필요가 있는 특수한 경우들에서만 관계로 진입한다는 생각을 방어한다. 이러한 관점을 만드는 기술적(technical) 방법은 하이데거로(1889-1976)부터 취한 용어에 따라 모든 객체들이 상호적으로 ‘물러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싱적인 가설에 반해, 객체들은 서로 간에 직접 접촉하지 않으며, 그와 같은 접촉을 야기하는 세 번째 항이나 매개물을 요청한다.
OOO의 ‘객체-지향’ 부분을 논의하면서, 우리는 이제 이 명칭의 세 번째 O, 즉 존재론을 대표하는 단어로 나아간다. 여기서 이전에 빌어온 관계는 역전된다. 즉 철학이 ‘객체-지향’을 컴퓨터과학으로부터 빌어왔지만, 컴퓨터과학은 ‘존재론’이라는 단어를 철학으로부터 빌어오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존재론’이라는 말과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너무 밀접해서 (이 책의 저자를 포함하여) 몇몇 사람들은 그것들을 동의어로 사용하길 선호한다. 둘 모두 윤리학, 정치철학 또는 예술철학이 담당하는 보다 특수한 영역이 아니라 <13>실재 자체의 구조와 관련된 철학의 분야를 지칭한다. ‘형이상학’이라는 단어에 관한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역사는 우리에게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384– 322 BCE) 저작들의 고대 편집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려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만큼이나 자연과학의 위대한 설립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자연학』(Physics)은 우리에게 자연에 관한 연구의 세부적인 사유를 가르쳐 준다. 『자연학』을 따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자연의 주제 너머 또는 바깥에 놓인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다른 저작을 썼다. 이를테면 개별적 사물들(또는 ‘실체들’)은 어떻게 그것들의 변화하는 질들을 유지하면서 작동하는가, 마찬가지로 우주의 구조에서 신의 역할은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가 그것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편집자는 이 난해한 저작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할지 불분명했고, 그것이 선집에서 『자연학』 다음에 놓여 있었으며, 그래서 그것을 『형이상학』(Metaphysics) 또는 ‘자연학 뒤’라고 불렀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접두사인 ‘meta-’는 또한 ‘너머’(beyond)라는 의미도 가질 수 있으며, 따라서 형이상학은 자연 세계 ‘너머’로 가는 분야로 일반적으로 이해되었다. 대륙철학 전통에서 하이데거와 데리다 이래 ‘형이상학’은 이러한 대륙사상가들이 플라톤 이후 서구 철학의 소박한 전형으로 간주하는 철학을 따르는 누군가의 적들을 고발하는 고도로 부정적인 단어로 사용된다. 존재론에 관해서 말하자면, 몇몇 철학자들이 그리스 단어 ontos와 logos라는 의미로 섬세하게 해석하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해도, 우리의 목적 하에서는 존재론이 ‘존재에 관한 학문’과 같은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에 기반하여 우리는 존재론이 일찍이 그리스 철학에서 나타났으며, 심지어 보다 이르게 인도에서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론’이라는 단어 자체는 <14>분명 1613년에야 만들어졌다. 그것은 철학과 같이 천천히 변화하는 영역에서 실제적으로는 어제일이나 마찬가지다. ‘형이상학’과 대조적으로 ‘존재론’은 보다 엄격하고 역사적이거나 신비론적인 짐을 덜어낸, 폭넓게 존중받을 만한 단어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저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나는 ‘형이상학’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경멸적인 쓰임새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고전적 철학으로부터 나온 가치 있는 어휘를 망칠 좋은 이유를 모르겠기 때문이다. 사실상 나는 반복을 피하기 위해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동의어로 사용할 것이다. 이로써 나는 독자들의 귀를 너무 빨리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을 중요한 문체적인 원천을 보존할 것이다.
당신이 이 책을 다 읽을 때쯤, 나는 OOO의 기본 개념들이 가능한한 명쾌하게 설명되고, 이러한 철학의 스타일에 대해 흥미진진해 하는 나의 근거들이 전달되기를 바란다.
- Graham Harman, “INTRODUCTION”, Object-Oriented Ontology: A New Theory of Everything,
UK: Penguin Random House, 2017, 6-14
객체-지향 존재론, 사변적 실재론, 신유물론의 의미와 계보
사변적 실재론자는 상관주의 너머로 가기를 또는 그것을 끝내기를 바란다.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다기화하는 이성을 위해, 그들은 인간이 경험하는 것과 독립적으로 실재를 이론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실재론’이란 (적어도) 인간적 경험 세계 너머의 실재의 존재에 대한 어떤 투여를 의미한다. 형용사인 ‘사변적’이라는 말은 사유로서의(qua thought) 사유가 이러한 실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암시적 의미이다. 사변적 실재론자는 물론 자연과학이나 수학이 우리에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재에 접근하게 한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 [사유에서] 이념적인 것은 과학적 또는 수학적 자료에 기초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사유 그 자체에 기반한다. (...)
이러한 [메이야수, 브래시어, 하먼]입장들은 매우 상이한 의견을 가지며, 그래서 누가(그리고 무엇이) 사변적 실재론에 속하는지(또는 속하지 않는지) 결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몇몇 부가적인 요인들이 있게 된다. 예컨대 브래시어는 스스로 그 명칭을 떼어낼려고 애를 써왔다. 메이야수는 실재로 그의 입장을 ‘사변적 유물론’(speculative materialism)이라고 언급하면서, 이 입장도 마찬가지로 상관주의적 순환을 돌파하려고 하는 두 번째 사상가들에 속한다고 본다. 메이야수에 더해, 이 신유물론자들(new materialists)에는 마누엘 데란다 그리고 카렌 바라드와 같은 사상가들이 포함된다. 나아가 지난 10여 년간 여러 다른 사상가들이 이 둘 모두나 하나의 그룹에 포함되어 왔다(여러가지 이유로, 여러 번, 어떤 경우에 몇몇은 아마도 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등등), 한계를 두기 않고 말해 본다면, 레비 브리안트(Levy Bryant), 트리스탕 가르시아, 브루노 라투르, 마르쿠스 가브리엘, 마우리찌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제인 베네트(Jane Bennett)와 엘리자베스 그로스까지 포함된다. (...) 이들 각각은 사유가 직접적 경험을 넘어 존재하는 실재에 대해 의미 있는 진술들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수용한다는 그러한 최소한의(minimal) 의미에서 사변적 실재론자들이다. 이들은 아주 오랜 상관주의의 밤을 지나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포함하는 몇몇 방식과 새로운 형태의 형이상학을 건설하는 중에 있다. (...) 들뢰즈는 이들 사변적 실재론자들 사이에 자리매김할 수 있다. (...) 그의 기계 존재론은 개별체들이 ‘우리를 위해’가 아니라, 그 자신의 자격으로(qua themselves) 기계라는 의미에서 명백하게 실재론이다. 또한 들뢰즈는 이러한 기계들의 존재론적 구조가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외재성 테제로부터 전진적으로 연역된다는 의미에서 사변적이다. (...) 사변적 실재론자들을 범주화하는 흥미로운 방법은 그들의 철학이 ‘객체-지향적’인지 아닌지 묻는 것이다. 이 경우는 개별 실체들이 가장 기초적인 실재의 구성물이라는 것에 대한 수용여부이다. 이를테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역자]의 철학은 분명 객체-지향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개별 실체들이 보다 기초적인 생산적이고 역동적인 힘의 표현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먼의 존재론은, 그가 객체들 너머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므로, 객체-지향적 존재론의 모범적인 사례이다. 게다가 [하먼에게] 개별체들이 다른 실체가 조우하는 방식 너머에 놓여 있는 ‘보다 심오한’ 실재란 단순히 객체들 자신들의 어떤 형상일 뿐이다. (...) [여기에는] 브루노 라투르, 마우리찌오 페라리스, 트리스탕 가르시아, 마르쿠스 가브리엘, 마누엘 데란다 그리고 레비 브리안트가 속한다.
- Arjen Kleinherenbrink, Against Continuity: Gilles Deleuze’s Speculative Realism,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9, 9-12
객체-지향 철학에서 ‘객체’
객체 지향 철학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와] 같은 계보에 있는 최신 이론이다. 그러나 여기서 제안한 이론은 더욱 특이한데, 객체 지향 철학은 전통적으로 실체에 귀속되는 많은 특징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
객체는 [전통적인 실체 귀속성과 달리] 자연적인 것이거나 단순한 것이거나 파괴될 수 없는 것일 필요가 없다. 대신 객체는 스스로의 자율적 실재성에 의해서만 규정될 것이다. 그것은 분명 서로 다른 두 방향에서 자율적이어야 한다. 즉 부분적으로는 스스로를 다른 존재자와 관계 맺지 못하게 하는 한편, 스스로의 편린을 넘어선 무언가로서 출현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실재를 입자이건 아페이론이건 마음 속에 맺힌 상이건 성질의 다발이건 실용적인 효과이건 간에 더욱 기초적인 근본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급진적 시도와 달리, 객체는 환원될 수 없는 두 부분으로 분극화된polarized 것으로 드러난다. 이 책은 객체가 우연, 성질, 관계, 계기를 갖는다는, 고전적으로 들리는 주장을 지지하는 한편, 또한 객체가 이러한 조건을 갖기도 하고 갖고 있지 않기도 하다는 역설을 주장할 것이다.
- 그레이엄 하먼 지음, 주대중 옮김, [쿼드러플 오브젝트](현실문화, 2019). pp. 46-48.
객체들의 평등성
우리의 기획은 ‘객체-지향 형이상학’(object-oriented metaphysics)을 전개하면서 그레이어 하먼이 ‘접근의 철학’(philosophies of access)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 기반을 발견한다. 이들은 사물/사태의 ‘평면 존재론’(flat ontology)에 관심을 가진다. 들뢰즈 철학에 대한 마누엘 데란다의 재독해에서, ‘평면 존재론’에 관한 생각은 세계의 실체들이 위계적으로 질서잡히지 않는 이론을 기술하는데 활용된다. 실체들의 실재성(substantiality)과 일치하지 않는 혹은 초월적 원리들에 기반하지 않는 이론에 대한 기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실체들은 여기서 각각의 개체화된 사물/사태에 평등한 존재론적 위엄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에릭 쉐빌라르(Éric Chevillard)의 몇몇 소설에서처럼 사물/사태들 - 원자, 죽은 사람, 나무 둥치의 둥긂, 축구팀, 만유인력의 법칙 또는 ‘단어’라는 단어의 절반 - 사이의 모든 차이가 체계적으로 강도적 차이를 포함하고, 변이를 겪는 것이다.
- Tristan Garcia, (trans.) Mark Allan Ohm, Joe Cogburn, Form and Object-A Treatise on Things,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4, 4.
객체-지향과 객체의 의미
‘객체-지향 형이상학’(object-oriented metaphysics)[에서] (...) ‘객체-지향’이란 말은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곤 한다. 비록 아마도 그는 이러한 말을 여러 이유로 거부하겠지만 말이다. ‘사변적 실재론’ 자체처럼, ‘객체-지향 형이상학’은 몇몇 단어들 안에 상당한 정보를 담아 옮긴다. 무엇보다 그것은 형이상학이다. 이 단어는 대륙철학에서 ‘실재론’보다 훨씬 더 시효가 지났다. 하지만 보다 중요하게도, 이 전체 개념에서 ‘객체-지향’은 그 형이상학을 여타 다기한 사변적 실재론과 구분하기에 충분하다. ‘객체’로서 나는 통합된 실체들(entities)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로부터 그리고 서로 간에도 자율적인 특유한 성질을 가진다. (...) 나는 매일매일이 1인칭적 경험들이 결코 철학에서 말하는 객체들에 대한 핵심 증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에 있어서 거의 모든 쓸모 있는 ‘급진적’ 선택지가 객체들을 겨냥해 왔지만, 그것은 모두 제거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논한다. 이미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반(anti)-객체-지향적 입장에 관한 긴 목록이 존재하는데, 이것들은 객체가 반응적 작동들을 야기하는 철학적인 틀로서 특정한 잠재력을 가진다고 제안한다.
- Graham Harman, “On the Undermining of Objects: Grant, Bruno, and Radical Philosophy”,
(In) Bryant, Srnicek & Harman(Eds.), The Speculative Turn: Continental Materialism and Realism, Melbourne: re.press , 2011, 22.
OOO 비판
우리는 OOO가 인간-이상을 그 자신의 용어들로 사유하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류세의 인간중심주의적 폭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형이상학적 장치들을 제공하고자 한 것은 농업병참술의 인간중심적 이원론을 극복하는 이른바 특유한 능력을 통해서라는 것을 이해했다. 여기서 OOO의 기대되는 이익은 삼중적이다. [첫째] 객체에 관한 급진적으로 평평한 그리고 비환원적인 존재론에 동의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적인 위계관념에 대항하게 된다는 것, [둘째] 사물들-자체의 소진불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OOO는 근원적으로 비인간적인 타자성을 인간중심적인 환원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셋째] 마지막으로 OOO는 상관주의의 내향적 초점으로부터 형이상학을 해방하는 증간된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독해에 따르면, 앞서 언급된 이익들의 각각은 물러난 객체라는 생각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하지만 ‘물러난 객체’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있어서 어떤 문제적인 애매함이 존재한다. 위에서 나는 두 가지 해석을 시도했다. 첫 번째는 레비나스적 의미의 물러남을 위하는 것인데, 이에 따라 객체들은 그것들의 교호자들로부터 절대적으로 물러난다. 다른 하나는 무언가를 원칙적으로 다른 위치지워진 객체들에게 접근 불가능하게 만들 필요가 없는 보다 보수적 현상으로 물러난 객체를 취하는 것이다. 비록 OOO가 대개 전자를 향해 묘사된다 해도, 두 가지 해석들은 궁극적으로 비인간 타자성에 대한 어떤 유사하게 인간중심적인 위협을 초래하는데, 왜냐하면 비인간 실체들이 본질적으로 접근불가능하기(따라서 그것들에 관한 우리의 인간중심적 특성화를 ‘교정’할 수 없다) 때문이거나 또는 그것들과의 교전(engagement)이 단지 특권화된 인간 모델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접근법 모두 비인간 타자의 문제적 비체화(abjection)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둘 모두 분명 OOO의 추정된 특성인 반식민주의적 애매성을 가동시킬 수 없다. 따라서 양 쪽 해석 다 분명히 위에서 개괄된 이익들 지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존재론이 평평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오로지 비-순수한, 위치지워진 인간적 전망에 따라서만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비인간 사물들은 소진되지 않는 속성들을 유지하지만, 이것들은 전반적으로 접근불가능하거나 단지 위치지워진 인간적 경험 안에서(경쟁적 개념으로) 그러한 유용함의 단순한 반향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지막으로 그것이 우리의 실재론을 위한 테스트들을 통과하는 한에서, OOO는 효과적으로 그 옹호자들이 온당하게도 스스로 거리를 유지하는 바, 자연주의의 어떤 특정한 인간중심주의적 형태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어떤 유보조항으로서,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이 – 원칙적으로 – 인위개변적인 폭력을 차단하기 위해 필수적인 애매성을 구출하는 입장들 사이에서 중간 경로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만약 내가 위에서 논했던 것이 올바른 노선이라면, OOO는 절대적인 타자성과 보존적인 타자성 사이의 딜레마에 긴박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의 근본적 편견이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현전적이거나 전체적으로 그것들의 위치지워진 탐구자로부터 부재한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결국 하먼과 모튼이, 효과적으로 동종적이거나 문제적으로 친숙하게 되거나(보수적 타자성) 모든 실재의 비인간 객체들과 접근불가능한 타자의 영역과의 상호작용들(절대적 타자성)을 추방해 버리게 되는 바, 감각 객체들을 환기하도록 이끌어 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딜레마였다. 현상들의 부분적인 또는 그늘진 형상화에 대한 접근을 이해하는 어떤 세 번째 길은 실제적으로 인간-이상 세계 자체에 의해 동기화되는데 – 예컨대 생태페미니즘이나 생태현상학에서 이는 일반적이다 – 이는 하먼의 리트머스 테스트를 실패에 빠트리고 내키지 않게도 상관주의자로 간주되게 한다. 요컨대 인류세의 폭력 뒤에서 인간중심적 이원론에 함축된 현전/부재 이항성을 극복하는 것은 그러한 이항성을 사물 자체의 어떤 기초 존재론적 특성으로 취하는 어떤 접근방식과도 양립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이 황제의 새로운 ‘급진적으로 비인간중심주의적인’ 의상들에도 불구하고, OOO가 특히나 긴급한 과제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는 이유이다.
남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만약 그것의 증가하는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OOO의 형이상학적 임무가 이원론적인 인간중심주의를 차단한다는 그것의 약속에 있어서 본래적으로 썩 적합하지 않은 바, 그렇다면 환경 정치학, 환경 인문학 또는 주류 환경 행동주의가 다음으로 향해야 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내게 가장 풍성한 탐구의 노선은 위에서 언급된 바(예컨대 생태페미니즘과 생태현상학)와 같이 입장지워지는 ‘세 번째 방법’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원론의 폭력을 차단하는 모튼의 목적을 공유하지만, OOO의 실패 원인이었던 현전/부재 이항성에 저항할 것이다. 물론 그들의 약속은 부분적으로 유해한 혐의를 극복하는 그들의 능력에 놓여 있다.
- Robert Booth, ‘Abject Withdrawal?: On the Prospect of a Nonanthropocentric Object-Oriented-Ontology’,
Angelaki, 2021, 26:5, 33
관계는 왜곡이다.
어떤 관계도 그 관계의 용어에 대한 번역이나 왜곡[이다.]
- 그레이엄 하먼 지음, 주대중 옮김, 『쿼드러플 오브젝트』, 현실문화, 2019, 103
그룹 2: 관계의 회귀성
규칙 3: 객체는 그것이 맺은 관계보다 그것이 맺지 않은 관계로 더 잘 알게 된다.
규칙 4: 객체는 그것이 거둔 성공보다 인접한 실패로 더 잘 알게 된다.
- 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비유물론』, 갈무리, 2020, 한국어판 서문, 22
부정적 신유물론-사변적 실재론, OOO
[Gamble, C. N., Hanan, J. S. & Nail, T. 2019, 120]우리가 ‘부정적 신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물질이 비-관계적으로 사유의 외부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우리는 이것을 ‘부정적’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이는 사유와 물질의 관계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 <121>부정적 유물론의 두 가지 전통은 ‘사변적 실재론’(specualtive realism)과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이다. 이 두 가지가 비록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이들은 둘 모두 사유의 비-관계성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 Gamble, C. N., Hanan, J. S. & Nail, T.,
“What is New Materialism” Angelaki, Vol. 24, Issue 6, 2019, 120-121
육후이의 하먼 비판
관계성과 관련된 하이데거 독해는 우리의 기획을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의 객체-지향 철학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하먼의 작업은 하이데거의 기획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도 또한 그의 이론을 마르틴 하이데거의 ‘손-안에-있음’과 ‘손-앞에-있음’에 대한 독해를 통해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 하지만 나는 하먼의 이론과는 매우 다른 이해를 발전시켰다. 하먼에게서 모든 대상은 어떤 도구-존재(tool-being)이다. 모든 도구-존재는 실재적이며 원자나 보다 작은 물리적 실체로 환원될 수 없다. 나는 최근의 정보에 대한 이해 또는 디지털 대상의 구성에서와 같이 흐르는 데이터가 가능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과 유사한 견해를 공유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다른 크기정도(orders of magnitude)로 이해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두 기획을 근본적으로 나누는 두 가지 지점을 언급하고 싶다.
실체: 하먼은 하이데거가 새로운 실체 개념을 발전시켰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실체는 하이데거에게 질문거리가 될 수 없다고 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실체-우유 개념쌍은 그에게 서구 형이상학의 오류의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의 기획에서는 실체 개념을 총체적으로 거부한다. 하이데거의 과제는 실체를 시간적 관계들로 대체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심려(Sorge)의 역학일 뿐이다. 하먼은 하이데거가 시간의 철학에 대해 말한 적이 결코 없다고 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거부했다. 하지만 내가 읽기로는 만약 하이데거가 발명하기를 원했던 어떤 새로운 실체가 존재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하이데거가 시간 안에서 이끌어내는 그러한 주제는 디지털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다.
관계: 하먼은 관계 대신에 비관계성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를테면 대상이 ‘손-안에-있음’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현존재로부터 스스로를 물릴 뿐 아니라, 다른 도구들로부터도 그렇게 한다. 우리가 이 기획에서 소환하려는 하이데거는 관계의 철학자이다. '손-안에-있음'과 '손-앞에-있음'은 다른 관계성을 표현하는 것이며, 전자는 시간, 또는 내가 실존적 관계라고 부르는 것이고, 후자는 내가 담론적 관계라고 부르는 바, 속성들을 지칭한다. 하먼은 그가 관계로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에 대해 하먼은 그의 책에서 라투르를 네트워크와 관계의 형이상학자로 규정짓는데, 하지만 이러한 관계들은 견고한 분석 없이 한 행위자에서 다른 행위자로 이동하는 어떤 종류의 행동하는 힘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는 블랙박스(행위자의 네트워크가 작동하는 알려지지 않은 인과성)가 새로운 실체라고까지 말한다. 이러한 실체와 관계의 애매성은 비환원주의를 가져다 주지만, 마찬가지로 어떤 형이상학적인 블랙박스도 부여하게 된다.
- Yuk Hui, “Introduction”,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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