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서지: Karen Barad, “Four. Agential Realism: How Material-Discursive Practices Matter”, In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7, 135-185.
번역: 박준영(수유너머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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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행위적 실재론: 물질-담론적 실천들은 어떻게 물질이 되는가?
"우리는 대체 어디서 자연이 비역사적이고 비시간적라는 이상한 생각을 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리함과 자의식에 의해 지나치게 많이 감동받는다. ... 우리는 옛날옛적 인간중심적인 똑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우리 자신에게 속삭이는 짓을 그만둘 필요가 있다."
- 스티브 샤비로(STEVE SHAVIRO, 『죽음 순찰대』(Doom Patrols)
언어는 너무 많은 힘을 부여받아 왔다. 언어적 전회, 기호적 전회, 해석적 전회, 문화적 전회, 최근의 이런 것들에서 그 모든 전회마다 모든 ‘사물/사태’ - 물질성도 마찬가지로 – 가 언어의 문제이거나 문화적 재현의 이런저런 형태들로 전회한 것으로 보인다. 도처에 수군대는 ‘물질’에 대한 재담들은 공교롭게도, 핵심개념들(물질성과 의미화)에 대한 어떤 재사유의 흔적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의 문제들/물질들(matters)이 의미화의 문제들로 대체되는 한에서 징후적인 것으로 보인다(여기에는 어떤 인용할 만한 것도 없다). 언어 문제/물질. 담론 문제/물질. 문화 문제/물질. 여기에는 더 이상 물질로 보이지 않는 것들만이 물질이라는 점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문제를 신중하게 취급하기: 물질성과 수행성
무엇이 우리가 재현된 사물/사태들에 대해 결핍된 그것들의 내용과 문화적 재현에 대한 어떤 직접적 접근을 가진다는 믿음을 추방하는가? 언어가 물질보다 더 믿을 만한 것이 되는 사태는 어떻게 도래하는가? 왜 물질이 수동적이고 변화불능으로 그려지거나 기껏해야 언어와 문화로부터 파생적으로 변화를 위한 잠재성을 물려받는 반면, 언어와 문화는 그들 자신의 행위성과 역사성을 부여받는가? 어째서 물질성 자체가 언제나 이미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어떤 언어적 영역 안에서 형상화될 때, 자연주의적 믿음에 대한 잔인한 역전과 같은 것으로 우리를 이끌었던 물질적 조건들을 따라 우리는 탐구들을 지속하는 것인가?
언어의 힘이 실질적이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우리는 너무나 실질적이라고, 또는 아마도 보다 핵심적으로, 너무 실질적으로 되고 있다고 논증할 것이다. 언어의 힘에 대한 지나친 믿음도 언어가 너무 많은 힘을 부여 받고 있다는 기존의 관점도 21세기 초에 특별히 적합한 새로운 파악은 아니다. 예컨대 19세기 내내, 니체는 문법을 너무 심오하게 취급하는 잘못된 경향에 대항하여 경고했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모양짓고 결정하기 위한 언어적 구조를 받아들이는 것, 즉 언어의 주어과 술어 구조가 실체와 속성이라는 선재하는 존재론적 실재를 반영한다는 그 믿음 말이다. 문법 범주들이 세계의 아래에 놓인 구조를 반영한다는 믿음은 어떤 계속되는 유혹적인 정신의 습관으로서 의문시될 만한 것이다.
결국 이것은 재현주의에 속한 상식적인 관점이지 않은가? 이 관점은 재현이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사이에 어떤 매개기능을 가져온다는 믿음이며, 물질에 관한 심대한 불신을 전개하고, 물질에 대해 거리를 두면서, 물질을 수동적이고, 운동불가능하며, 벙어리 상태로 그려놓는다. 여기에는 그것을 완수하기 위한 문화나 역사와 같은 외적 힘의 흔적에 대한 요청이 있다. 사실상 선재하고 있는 현상을 반영하는 단어들의 힘에 관한 재현주의적 믿음은 전통적인 실재론자 뿐 아니라, 사회 구성주의자의 믿음을 지지하는 형이상학적 전제다. 특히 사회구성주의는 사려깊고 지적인 불만을 표명해 왔던 페미니스트와 과학자 연구 집단 둘 모두 안에서 강력한 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1]
담론적 실천에 관한 수행적(performative) 이해는 선재하는 사물/사태를 재현하는 단어들의 힘에 관한 재현주의적 믿음에 도전한다. 우리가 단순히 반영하는 세계 위나 바깥에 우리를 위치시키는 재현주의와는 다르게 수행적 사유는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영위하는 세계의 부분으로서 그리고 그것에 연루된 실천으로서 사유하고, 관찰하고, 이론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합당하게 해석하자면, 수행성이란 (물질적 신체들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단어들로 되돌리는 어떤 시도가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수행성은 정확히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결정하는 언어에 주어진 과도한 힘과의 경합이다. 그러므로 수행성을, 언어를 실재의 더미라고 파악하는 어떤 언어 일원론의 형태와 동일시하는 그릇된 개념과의 아이러니한 대조에서, 수행성은 실재적으로 언어와 재현의 다른 형태들에 우리의 존재론들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허용될 만한 것보다 더 많은 힘을 부여하는 정신의 음미되지 않은 습관들에 대한 반대인 것이다.[2]
망원경으로 밤하늘로 눈길을 주거나, 현미경으로 물질의 구조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인간은 눈깜짝할 순간에 거대한 차이를 매개하는 그의 능력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의 시각 장치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망원경과 현미경은 저기 외부에 있는 것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너무 광대하거나 너무 미소하지 않다. 인간이 어떤 단순한 얼룩, 이를테면 레이더 스크린 상의 휘점(blip)이라 해도, 인간은 세계가 운행하며 돌아가는 중심에 있다. 인간은 태양, 핵, 지렛대, 통합하는 힘, 모든 것을 끌어 잡는 접착제이다. 인간은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어떤 개체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그의 동료 인간에 대한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반성(reflect, 반영)을 하는 자리로서의 어떤 거리를 상속함으로써 거기에는 바로 그러한 구별이 있는 것이다. 하나의 독특한 개체, 모든 측정의 단위, 육체로 만들어진 유한성, 그의 분리성이 핵심이다.
재현주의, 형이상학적 개체론 그리고 휴머니즘은 이러한 현재 진행중인 세계관을 견지하면서, 함께 작동한다. 이 영향력은 현대사유의 양식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같은 것을 가지는데, 심지어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적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가장 잘 조직화된 노력들조차 실패했다. 닐스 보어의 철학-물리학은 뉴턴 물리학과 형이상학 뿐 아니라 재현주의와 일치론적 인식론들, 이를테면 실재론과 사회구성론의 전통적 형식들에 대해서도 강력한 도전을 가한다. 미셸 푸코와 주디스 버틀러와 같은 후기구조주의 이론가들은 속도를 벗어나는 경계에 반하여 충분한 순간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이 폭발력을 길들이려는 휴머니즘과 재현주의의 교의를 날려 버린다. 이 각각의 강력한 시도들은 우리의 문화적 상상력을 잘 알려진 기존의 안정적인 궤도 바깥으로 쏘아올린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러한 활발한 개입의 힘은 이 이론들을 묶어내는 유혹적인 핵심으로부터 충분히 해방시키기에는 불충분하며, 각각은 동일한 핵 주위를 도는 몇몇 다른 것들에 다시 붙잡혀 버렸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대한 동요를 야기하기에 충분히 강력하며, 우연찮게 얻은 전리화(ionization)는 각각의 경우에 인간중심주의적인 잔여물들 안에서 좌절된다.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흥미로운 장기적인 영향력의 모든 구성요소들에 대한 어떤 단호한 동시적인 극복이다.[3]
이 장에서 나는 기술과학적이면서, 특수하게 알려지는 자연문화적 실천들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포스트휴먼적 수행적 접근을 제안한고, 물질의 활력에 관해 사고하자고 제안한다.[4] 재현주의에 대한 수행적 대안들을 향한 움직임은 초점을 기술적인 것들(descriptions)과 실재 사이의 상응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실천, 행함 그리고 행위들의 문제로 옮겨 놓는다. 그와 같은 접근은 또한 존재론, 물질성 그리고 행위소(agency)에 관한 선제적인 중요한 질문들을 제가한다. 반면 사회구성주의적이고 전통적인 실재론의 접근법들은 두 개의 마주 보는 거울들 사이의 무한한 이미지 놀이와 상당히 흡사하게 인식론적 획득물이 앞뒤로 흔들리지만, 아무 것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반사적인 기하학적 광학 안에 붙들려 있다. 기하학적 광학의 재현주의 덫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나는 물리학적 광학으로 초점을 옮겨, 반영보다 회절(diffraction)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5] 서로 간에 회절적으로 후기구조주의 이론, 과학연구 그리고 물리학을 읽는다는 것은 명료한 방식으로 문화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사유하도록 이끈다. 자주 날카롭게 분리된 개별체들(그리고 분리된 관련 사항들)로 나타나는 것은 실재로는 전혀 절대적 외재성의 관계를 수반하지 않는다. 경계들의 불확정적 본성 - ‘빛’ 경계들 안의 그림자, 그리고 ‘어둠’ 경계들 안의 밝은 지점을 전개하는 – 을 설명하는 회절 패턴들과 같이 문화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관계는 ‘내부 외재성’(exteriority within)이다. 이것은 어떤 정적 관련성이 아니라 언제나 구성적 배제들을 수반하는 행함(doing) - 경계들의 실행 – 이며, 따라서 사유가능성(accountability)을 야기한다. 나의 목표 중 하나는 과학연구와 페미니즘 이론을 위한 수행성의 이론적 도구를 날카롭게하고, 그것들의 상호 관심을 증진시키는 노고에 기여하기 위함이다. 결정적으로 행위적 실재론의 수행적 실행은 물질이 세계의 생성 안에서, 그것의 계속적인 간-행 안에서 어떤 능동적 참여자에 상응하도록 허용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은 담론적 실천이 어떻게 중요한지에 대한 이해를 제공한다.
휴머니즘과 반휴머니즘의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할 때,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과 그 타자들이 상이하게 묘사되고 정의되는 경계-만들기 실천을 위한 설명의 실행을 표시한다.[6] 이 이론적 여지가 있는 개념을 환기하면서, 나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생생한 증언들로서도 인간의 다음 단계로서도 포스트휴먼의 포스트모던적 찬양(또는 악마화)에 대한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역설적인 해방적 구세주로 사이보그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그 어떤 것도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7] 내가 여기서 의미하는 바, 포스트휴먼은 인간을 기준으로 계측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우리는 다른 생명체들(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 사이에서 상이한 구성과 상이한 입장정립에서 활동하는 역할에 대한 사유가능성으로 존재함에도, 인간 예외주의(human exceptionalism)에 관한 주제를 채택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은 행위소나 역사성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연을 거부하는 문화에 모든 변화의 근원이 놓여 있다고 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것은 자연과 문화 간의 어떤 자연적(또는 그런 문제에서, 어떤 순수하게 문화적인) 분할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포스트휴머니즘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경계가 현실적으로 배치되고 재배치되는지에 대한 어떤 해명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라고 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거리 기준에 사로잡혀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 기준이 생산되는 실행들에 주의를 기울인다. 포스트휴머니즘은 형이상학의 붕괴나 죽음을 전제하는 원리화된 주장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 그와 같은 오만한 주장들이 관찰가능하거나 아닌 것, 사유가능거나 아닌 것이 말해지지 않은 척도로서 인간의 은밀한 부활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 드러날 때 그러하다.[8] 그것은 인식론적인 것에 대한 모든 해방을 제한하면서(인간이라는 안전한 항구에 정박된 채), 존재론적 언급에 반하는 금지를 따르지 않는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을 순수한 원인이나 순수한 결과 중 하나로 정립하고, 신체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자연적이고 고정된 분할선으로 취급하는 주체에 관한 휴머니즘적이고 구조주의적인 해명을 피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어떤-‘것’[사물]의 분할을 가정하지 않으며, 인간과 분리된 어떤 의심스러운 공간적, 존재론적 그리고 인식론적 구별을 따로 두지 않는다.
사실상 내가 제안하는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은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의 고유한 특성으로 개별성(separateness)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식의 가공물이 미혹시키는 바, 단순한 환상으로서 개별성을 훼손하는 것도 아니다. 차이는 거저 주어질 수 없다. 이것은 중요하다. 사실상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세계는 서로간에 이러저러하게 동일하거나 차이나는 사물들로 뒤덮여 있지 않다. 관계는 관계항(relata)에서 나오지 않으며, <137>오히려 그 반대다. 물질은 고정되거나 주어지지지도 않으며, 상이한 과정들의 단순한 목표나 결과도 아니다. 물질은 행위적인 것이지, 사물들의 고정된 본질이나 속성이 아니다. 물질되기(Mattering)는 차이나기(differentiating)이며, 이 차이들이 물질, 즉 차이나는 차이들의 반복적인 생산에서의 물질이다. 차이의 변화하는 패턴들은 순수한 원인도 아니며 순수한 결과도 아니다. 사실상 그것은 어떤 인과적 구조, 즉 원인과 결과를 차이나게 하는 바를 초래하거나 시행한다(enacts). 차이 패턴들은 단순히 시공간적인 변화가 아니다. 시공간은 차이의 수립(enactment), 지금과 여기를 만드는/표시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
"실재는 우리보다 더 크다"
- 이안 해킹(Ian Hacking), 『재현하기와 개입하기』(Representing and Intervening)
"나는 세계가 정확히 재현과 과학적 객관성의 교설에서 잃어버린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 도나 해러웨이, 「괴물들의 약속」(“The Promise s of Monsters”)
재현주의는 근본적으로 분리의 관념을 취한다. 그것은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말들(words)의 영역과 사물들의 영역의 이접(disjunct)으로 나눈다. 재현주의는 그 연결의 딜레마를 그 자체로 남겨둔 채로 지식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만약 말이 물질적 세계로부터 풀려난다면, 재현이 어떻게 기반을 가질 것인가? 만약 우리가 더 이상 세계가 그 특성이 세계의 표면에 새겨진 바, 고유한 유사성들로 채워진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사물들은 이미 기호들로 꾸며지고, 말들은 해변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모래처럼 놓여 발견되기를 기다릴 것이지만, 오히려 인식주체(knowing subject)는 재현의 두터운 그물망에 붙들린다 이것은 정신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객체들로 가는 길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으며, 가시적인 모든 것이 언어 내부에 인간 자신을 감금하는 곤란한 문제와 같다. 따라서 재현주의가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적인 형이상학의 어떤 수인(囚人)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제논의 역설에서 좌절된 육상선수 지망생 같이, 재현주의는 결코 그것이 드러내는 문제의 해결에 가까지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형이상학적 출발지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그러한 불가능성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규정된 실체들에 관한 요청은 원자론적 형이상학의 확실한 표징이다. 원자론은 데모크리토스로부터 유래한다.[9] 데모크리토스에 따르면, 모든 사물들의 속성은 가장 작은 단위, 즉 원자(‘잘려나갈 수 없는’ 또는 ‘분리불가능한’ 것)의 속성들에서 비롯된다. 자유주의 사회 이론들과 과학 이론들은 세계가 분리되어 술어화될 수 있는 속성들로 이루어진 개체들로 구성된다는 생각에 많은 것을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과학적, 사회적,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실천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우리 이해의 얽힌 망은 이 가정의 여러 상이한 예화들에 달려 있다. 많은 것들이 그것의 외견상 확실성의 논쟁적 균형에 달려 있다.
닐스 보어는 원자의 양자 모델로 노벨상을 받았고, 이것은 양자론의 발전에 대한 그의 맹아적인 기여의 시작을 의미한다. 하지만 중요하게도 그의 지적인 조상들의 도식을 멋지게 뒤집음으로써, 보어는 ‘사물들’을 존재론적으로 기초적인 개별체들로 채택하는 원자론적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보어에게, 사물은 고유하게 규정된 경계들이나 속성들을 가지지 않으며, 말은 고유하게 규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보어는 또한 주체와 객체, 그리고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간의 고유한 구별에 대한 데카르트적 믿음과 관련된 것을 의문에 붙인다. 사실상 보어의 철학-물리학은 뉴턴 물리학 뿐 아니라 데카르트적 인식론과 그것의 재현주의적 삼항 구조, 즉 말, 인식주체 그리고 사물에 대한 어떤 급진적인 도전을 나타낸다.[20]
보어가 발전시킨 인식론적 틀은 언어의 투명성과 측정의 투명성 둘 모두를 거부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언어와 측정이 매개 기능을 수행한다는 가정을 거부한다. 언어는 사태(states of affairs)를 재현하지 않으며, 측정은 존재하는 것의 상태와 독립적인 측정을 재현하지 않는다. 보어는 그의 인식론적 틀을 허무주의의 자포자기 상태와 상대주의의 현기증에 투여하지 않으면서 발전시킨다. 총명함과 영민함을 가지고 보어는 뉴턴 물리학과 재현주의의 거대한 구조로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분쇄되어 버리는 길을 발견한다.
뉴턴, 데카르트 그리고 데모크리토스와의 보어식의 단절은 ‘단순하고 게으른 철학적 반성’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20세기 초반동안 빛을 비추었던 원자물리학의 영역에서의 새로운 경험적 발견들에 기반한다. 이 발견들에 관한 이론적 이해를 제공하려는 보어의 분투는 전반적으로 새로운 인식론적 틀이 요청된다는 그의 근본적인 제안을 낳았다. 불운하게도 보어는 그의 성찰에서 결정적인 존재론적 차원들을 탐색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 인식론적 취지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그의 함축적인 존재론적 전망들(3장을 보라)에 대한 저술들을 깊게 탐색해왔으며, 여기서 그것에 기대어 어떤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을 전개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 절에서 나는 보어의 사유에 있어서 중요한 측면들에 관한 간명한 개괄을 제시하면서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에 관한 설명으로 옮겨갈 것이다. <139>이 관계적 존재론은 나의 물리적 물체들(인간과 비인간 둘 모두)에 관한 포스트휴먼적인 수행적 사유를 위한 기초이다. 이 사유는 말들과 사물들에 관한 재현주의적 고착과 그 관계의 본성 상의 문제틀을 거부하면서, 대신에 경계들, 속성들 그리고 의미들을 통해 세계의 특정한 물리적 (재)배치 사이에 어떤 관계성이 상이하게 시행된다는 것(즉 나의 포스트휴먼적 의미에서의 담론적 실천들)과 특정한 물리적 현상들(즉 물질되기의 차이나는 패턴들)을 옹호한다.[11] 물체적[신체적] 생산의 장치와 생산된 현상들 간의 인과 관계는 행위적 간-행 중 하나에 속한다.[12] 자세한 것은 아래와 같다.
보어에 따르면 이론적 개념들(예컨대 위치와 운동량)은 특성상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특정한 물리적 배치이다.[13] 예를 들어 위치의 개념은 잘 정의된 추상적 개념이라고 간주될 수 없고, 또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들의 개별적으로 규정된 속성이라고 가정될 수도 없다. 이와 달리 위치는 오직 일련의 적합하게 고정된 부분들로 이루어진 장치가 사용될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더 나아가 이러한 장치를 사용한 위치에 관한 어떤 측정은 다소 추상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가 아니라, 현상의 속성에 귀속된다. 이는 객체와 측정 수단들의 분리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게 운동량도 어떤 특정한 일련의 운동가능한 부분들을 포함하는 물리적 배치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위치와 운동량의 동시 측정의 미결정성이란 위치와 운동량의 배치들의 물리적 [상호]배제에 관한 어떤 직접적인 문제인 것이다(고정된 부분들이 요청되면서, 그 동일한 부분들이 운동해 나갈 수 있도록 그에 상응하는 배치도 요청된다).
내가 3장에서 논증한대로, 일차적인 존재론적 단위는 고유한 경계들과 속성들을 가진 독립적인 객체들이 아니라, 현상들이다.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탐구에서, 현상들은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단순한 인식론적 분리불가능성이나 측정의 결과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상들은 간-행적 ‘행위소들’(agencies)의 존재론적 분리불가능성/얽힘이다. 즉 현상은 존재론적으로 근원적인 관계들, 선재하는 관계항 없는 관계들이다.[14] 간-행 개념은 (독립적인 개별체나 관계항의 선재성을 가정하는 통상적인 ‘상호관계’interaction와 반대로) 어떤 근원적인 개념적 전환을 드러낸다. 현상들의 경계와 속성들이 규정되고 특정 개념(즉, 세계의 특정한 물질적 표명들)이 의미있게 되는 것은 바로 특유한 행위적 간-행들을 통해서다. 간-행들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행위적 절단을 초래하는 보다 더 큰 물질적 배치(즉 물질적 실천의 집합)를 포함한다(이러한 [주객]구분을 부여하는 보다 낯익은 데카르트적 절단과는 대조적으로). 즉 행위적 절단은 본질적인 존재론적(그리고 의미론적) 미결정성의 현상 내부에서 어떤 해를 시행한다. 달리 말해 관계항(relata)은 관계에 선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상-내-관계항은 특정 간-행을 통해 출현한다. 그래서 관건적으로 간-행은 행위적 분리가능성, 즉 현상-내-외재성의 조건을 시행한다. 행위적 분리가능성에 관한 사유는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지는데, 관찰자와 관찰대상 간의 외재성에 관한 고전적인 존재론적 조건의 부재 안에서, 그것이 객체의 가능성을 위한 어떤 대안적인 존재론적 조건들 제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행위적 절단은 ‘측정된 객체’(‘원인’)에 의해 ‘측정하는 행위주체’(‘결과’)의 표식에서 어떤 현상의 구성요소들 사이에 인과 구조를 시행한다. 이런 의미에서 측정이란 측정된 것에 대한 특수한 사실들을 표현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 즉 측정은 어떤 인과적 간-행이지 ‘어떤 오래된 장난’이 아니다.[15] 따라서 간-행 개념은 전통적인 인과 관념에 대한 어떤 재작업을 구성한다.[16]
이러한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에 대한 나의 더 나아간 탐구작업에서, 나는 현상들이 인간 주체들에 의해 설계된 실험실 실행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논증한다. 그보다 현상은 물질되기(mattering)의 차이나는 패턴들(‘회절 패턴’)로서, 다양한 물질-담론적 실행들의 복합적인 행위적 간-행이나 신체적 생산에 속한 장치를 통해 산출된다. 여기서 장치란 단순한 관찰 도구가 아니라 경계-작성적인 실행, 즉 물질이 되어 가는 세계의 특수한[종별적] 물질적 (재)배치이다. 이러한 인과적 간-행들은 인간을 포함할 필요가 없다. 사실상 인간과 비인간, 문화와 자연, 과학과 사회적인 것 간의 차이나는 경계들이 구성되는 것은 그와 같은 실행들을 통해서이다.[17]
현상들은 실재를 구성한다. 실재는 사물-자체 또는 현상-뒤-사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사물들(things-in-phenomena)로 구성된다.[18] 세계는 규정적 경계들, 속성들, 의미들 그리고 신체 위의 흔적들의 패턴에 수반하는 규정적 인과 구조들의 수립 안에서 간-행과 물질화의 역동적 과정이다. 세계의 부분이 그것을 통해 다른 부분들에 대해 스스로를 차이나는 인식가능성으로 만들고, 인과 구조들이 안정화되고 불안정화되는 이러한 행위소의 지속적인 흐름은 시공간 안에서 발생하지 않고 시공간 자체의 생성 안에서 발생한다. 존재의 차이나는[미분적] 의미가 계속되는 퇴조와 행위소의 흐름에서 시행되는 것은 특정 행위적 간-행을 통해서다.[19] 즉 현상들이 물질이 되는 것, 마찬가지로 말(word)이 되는 것은 특정한 간-행들을 통해서다.
세계는 물질되기 자체가 상이한 행위적 가능성들의 실현을 통해 의미와 형태를 요청하는 바, 물질되기의 열린 과정이다. 시간성과 공간성은 이러한 과정적 역사성(processual historicity) 안에 출현한다. 외재성, 연결성 그리고 배제의 관계는 재배치된다. 세계의 변화하는 위상학들은 동역학 자체에 대한 관념의 어떤 지속적인 재작업을 초래한다. 동역학은 단지 시간 안에서 변화하는 속성들의 문제가 아니라, 상이한 시공간 위상학들의 지속적인 물질화에서 문제되는 것이다. 세계는 그것의 상이한[미분적인] 물질되기 안에서 간-행성이다.
요약하자면, 첫 번째의 존재론적 단위들은 ‘사물들’이 아니라 ‘현상들’, 즉 세계에 속한 역동적인 위상학적 재배치/얽힘/관계성/(재)절합이다. 그리고 우선적인 의미론적 단위들은 ‘말들’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존재적이고 의미론적인) 경계들이 구축되는 바, 물질-담론적 실행들이다. 이러한 활력은 행위소(agency)이다. 행위소는 어떤 속성이 아니라 세계의 지속적인 재배치다. 우주는 그 생성 중의 행위적 간-행이다.
나는 아래에서 이러한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할 것이다. 나는 보어의 공식에 대한 중요한 수정인 아래의 두 가지 의미있는 분석적 전환을 포함하면서, 장치의 본성에 관한 상세한 탐색으로 시작할 것이다. (1) 언어학적 재현으로부터 담론적 실행으로의 전환, 그리고 (2) 멈춰있는 조립식 실험 장비들로서의 장치로부터 사회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 자연과 문화 간의 정확한 구분이 그것을 통해 구축되는, 물질-담론적 실행으로서의 장치에 대한 이해로의 전환.
장치의 본성
“장치를 더 나은 것으로 아는 기회 (...) 그것은 현상이 창조되는 방식을 아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 이안 해킹, 『재현하기와 개입하기』(Representing and Intervening)
장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험을 수행하기 위한 일련의 도구들인가? 그것은 자연의 기호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기 위해 객체를 받아들이는 매개 장치인가? 그것은 우리의 감각 능력들의 인공보철물적인 확장인가? 우리는 장치를 어떤 칸트적인 이해가능성의 그물망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하이데거적 배경의 실천들인가? 알튀세르적인 장치인가? 담론적 실천들 또는 장치(dispositif)라는 푸코적 의미인가? 버틀러가 말한 그 수행적인 것인가? 또는 라투르의 기입(inscription) 또는 번역 기계인가? 또는 해러웨이의 신체적 생산의 장치인가? 보어의 장치 개념은 이러한 이론들 가운데 특유하며, 여전히 이러한 가능성들 가운데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몇몇 흥미로운 반향들을 가진다. 상이한 주파수들에 반향하면서, 사유의 이러한 차이나는 선들은 지성적인 것과 존재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조명하는 공명과 불협화음의 패턴들에 따라 다른 것들을 통해 생산적으로 독해될 수 있다.
장치가 어떤 중대한, 사실상 구성적인 그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의 정확한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긴요하다. 이 장에서 나는 장치가 자연 세계의 중립적인 탐구장치로 전개될 수 있는 단순한 도구 또는 장치가 아니고, 또는 사회적 세계의 구조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어떤 수행적 양상으로 기능하는 단순한 실험실 도구들 또는 사회적 힘들이 아니라는 점을 논증할 것이다. 장치는 단지 우리 주위에 있지만은 않다. 그리고 장치는 단순히 비인간 뿐 아니라 인간까지 포함하는 배치물들도 아니다. 오히려 장치는 단지 시간 속에서 출현하지 않지만 지속적인 생성의 역동성의 부분으로서 시공간물질을 반복해서 재배치하는 세계에 대한 특유한 물질적인 재배치물이다.
장치의 경계[제한]
보어는 장치를 위한 어떤 특수한 기준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보어에 따르면 장치는 거시적인 물질적 배치물들로서, 다른 것들 없이 그것을 통해 특정한 개념들이 정의로 주어지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통해 특정 현상들이 특정한 결정적인 물리적 속성들로 생산되는 것이다. 보어의 원-수행적 분석의 광범위한 결론은 장치가 고전 물리학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능동적으로 작동하며 실험 과정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장치는 수동적인 관찰 도구들이 아니라, 반대로 현상(의 부분)에 있어서 생산적이다. 보어의 분석에서 장치의 중심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의 본성을 결코 충분히 드러내지는 않았다.
뉴턴 전통의 기반에 대해 질문하면서, 보어는 ‘객체’와 ‘관찰의 행위주체’에 관한 기술을 당연시 여기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러한 ‘내부’(inside) 구성을 그의 분석의 주요항목으로 삼는다. 특히 그는 관찰 주체로부터 대상을 기술하는 것을 줄이는 것이 오히려 더 본질적으로 주요한 활동이라고 강조한다. 다른 한편 보어는 장치의 ‘외부’ 경계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측정하는 도구와 측정되는 대상 사이의 어떤 고유한 구분의 결여에 집중하는 동안, 보어는 직접적으로 그 장치가 “목표로 하는” 질문을 드러내지 않는다. 장치의 외부 경계는 기구의 가시적인 경계표시와 일치하는가? 측정하는 도구와 데이터를 수집하는 컴퓨터 간에 인터페이스 연결(즉 무선 연결)이 있다는 것은 어떤가? 장치는 컴퓨터를 포함하는가? 프린터는 컴퓨터에 부속된 장치의 일부인가? 종이는 프린터 안에 넣어져 있는가? 종이를 프린터에 넣은 사람이 있는가? 종이 위의 표시들을 읽는 사람은 어떤가? 또는 디자인하고, 조립하고 실험을 수행하는 과학자나 기술자는? 실험의 의미를 판단하고 미래의 기금을 위해 그들의 지원과 부족분을 고려하는 과학자 공동체는 어떠한가? 여타의 것이 없이도 어떤 개념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장치의 한계들을 구성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아마도 질문 중의 하나는 바로 보어가 측정 실행을 연구하는 중에 가장 절박했던 것으로서, 측정 결과 안에 ‘주체적 요소’와 같은 인간적 개념이 어떤 생산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주어질 때(그것이 결정되어지지 않는다 해도) 객체의 가능성의 조건을 보존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양자 물리학에 의해 드러나는 도전에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어떻게 과학이 연구하는 사실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주-객 구분에 관한 보어의 분석에서 관건적인 것은 개념들이 물질적으로 장치 안에 체현된다는 그의 주장이다. 특히 보어는 오직 개념들만이 물질적 배치 – 도구들을 포함하여(예컨대 사진건판들, 포인터, 디지털 판독기), 그것들은 특별하게 규정된 속성들의 값을 표시하며, 인간 관찰자에 의해 읽힐 수 있다 - 의 부분으로서 그것들의 특수한 체현에 의해 정의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것들이 의미있게 된다. 즉 보다 큰 물질적 배치는 어떤 절단을 가동하는데,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출현하는 고유하게 존재적-의미론적 미결정성을 해소한다. 장치는 객체들의 규정적 경계들과 속성들, 그리고 현상 내부의 체현된 개념들의 의미화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들이다. 사실상 이러한 장치의 부분으로서 개념들의 체현은, 재생산가능성과 소통가능성이라는 보어의 인식적기준과 관련하여 정의될 때, 궁극적으로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30] 이렇게 해서 우리는 보어의 사유에 있어서 언급된 한계란 인간이 그에 따라 양자 이론의 바로 그 기초들 속으로, 그리고 그의 과학적 실천들의 원(proto)-수행적 해명의 심오한 철학적 함축들 속으로 접합되는 것이다. 관찰과 소통, 가시성과 비가시성 그리고 개념과 발화의 우연성은 이러한 공식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인간은 단순히 모든 사물들의 기준이 아니다. 인간의 유한성은 측정가능성과 규정가능성의 가능성의 바로 그 조건들 안에 뒤얽혀 있다. 그것은 마치 고전 역학의 결점 – 관찰의 현장으로부터 관찰자를 그릇되게도 버려 버리는 - 을 보완하려는 욕망에서 보어가 그의 위상을 넘어서 인간을 그 또는 그녀가 속한 그림 안으로 단순히 돌려 보내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의 중심에 놓는 것과 같다.
더 나아가 보어의 장치 개념은 그의 겉보기의 지향이 그와 같이 보인다 해도, 정확히 말해 실험적 실천의 복잡성에 대해 해명하지 않는다. 이론물리학자적인 글쓰기의 전형과는 매우 다르게, 보어의 논문은 측정 도구들에 관한 상세한 삽화들을 포함한다. 이렇게 장치를 자세히 그려넣는 그의 의도는 개념이 흔히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물리적 배치인 바, 그 현상을 기술하고자하는 그의 의도에 부여된 의미를 완전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즉 보어에 따르면 단어와 세계는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어는 장치 자체를, 제우스의 머리에서부터 느닷없이 튀어 나온 것과 같이, 어떤 이념적(ideal)인 측정 장치로 취급하는데, 이는 그 자체로 또는 적어도 결과를 생산하기 위한 몇몇 버튼들을 누르는 것, 즉 아무런 조작도, 정비도, 뒤섞음이나 융합도 아닌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것의 적합성은 항구적으로 남는다-여기에는 그 어떤 재배치, 대체, 적응도 없다. 그것은 그 역사성과 변화양상을 거부한 채, 시간 안의 한 순간에 얼어 있다. 그래서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보어의 장치는 다른 모든 종류의 ‘외부’ 영향을 폐쇄적으로 봉인해 버린다. 과학자는 단지 연구를 위해 적합한 장치를 고르기만 하고 결과를 주목하는 어떤 자유로운 인간 주체이다. 일단 장치가 자리를 차지하면, 과학자는 뒤로 물러서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한다.
요컨대 보어는 장치를 어떤 단순한 실험실 배치로 오인한다. 이상하게도 과학 기구는 실험자의 역할을 도구에 의해 제시되는 객체적 흔적들에 관한 기록자로 축소하면서 어떤 개입도 없이 올바르게 작동한다.[21] 실제적으로 장치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 모든 보어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그것들을 이념화된(idealized[관념화된]) 형식들로 생각하기를 거부하면서, 실험 행위가 가동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활동들로부터 ‘그 장치’를 절단해 낸다. 해킹(Hacking)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대부분의 실험은 대개 작동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실험이 실행하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다.
실험한다는 것은 창조하는 것, 생산하는 것, 재생하고 현상을 안정화하는 것이다. (...) 하지만 현상들은 그 어떤 안정된 방식으로 생산되기 힘들다. 이것이 내가 [실험이] 현상을 창조하는 것이지 단순히 현상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매우 길고도 힘든 과제다.
아니 오히려 끝이 없는 여러 과제들이 있다. 작동할 만한 어떤 실험을 고안하는 것이 있다. 실험을 작동시키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있다. 하지만 아마도 실제적인 기량은 언제 실험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아 내는 것이다. 그것이 과학-의-철학이 사용하는 상용어구로 하자면, 관찰이 실험 과학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역할을 하는 하나의 이유다. 측정치를 독해한 것을 주목하고 보고하는 것 – 옥스퍼드 철학의 실험에 관한 상 – 은 아무 것도 아니다. 다른 종류의 관찰이 중요하다. 즉 무엇이 이상하고, 틀렸고, 교육적이라거나 누군가의 기계가 터무니없이 작동하여 왜곡되는지를 콕 집어 알아 내는 기이한 능력이 그것이다. 실험은 전통적인 과학 철학에서 말하는 ‘관찰자’가 아니고, 오히려 기민하고 예리한 인물이다. 그는 오직 기계가 제대로 돌아 가고 있을 때에만 관찰을 하고 기록하는 위치에 있게 된다. 그것은 나들이 가는 것과 같다(1983, 230).
주체에 관한 자유주의적인 휴머니즘 개념과 보어의 이론적 장치에 체현되어 있는, 흔히 당연한 듯이 여겨지는 정적이고 제한된 장치 개념은 과학적 실천의 본성에 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제시하려는 그의 노고를 방해한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 생각에 관한 근원적인 존재론적 함축을 갑작스럽게 끝내 버린다. 장치의 경계 바깥에 어떤 내재적인 것이 당연한 듯이 주어지면, 관찰자를 바깥으로 퇴장시키는 동안 인간적인 개념들을 그것의 경계들 내부로 체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어는 그가 길들이려고 시작한 그 동일한 ‘주체적 요소들’을 체화한다. 이때 그는 담론적 실천과 객체와 더불어 주체들의 공-구축(co-constitution)에 관한 역동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보어는 절단이 사람들이 생산을 촉진하는 현상들의 부분이라는 그의 가르침을 망각한 듯이 보인다. 요구되는 것은 장치와 인간의 역할에 관한 포스트휴먼적 이해이고 그것들 간의 관계성이다.
장치에 관한 행위적 실재론의 이해를 향해
우리 앞에 놓인 하나의 과제는 보어의 엄청나게 중요한 성찰을 그의 인간 개념들과 실험장치에 대한 의존성을 포함하여 다소 편안한 인간중심주의적 요소들을 제거하면서 더 멀리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우리가 보았다시피, 과학적 실천의 역동성과 복잡성을 해명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최근 몇 년간, 비판사회학 이론들은 의미화, 경계 그리고 신체들이 생산되는 실천들에 대해 복잡한 설명을 제공해 왔다. 문제는 이러한 해명들 또한 다수의 인간중심주의적 가정들 안에서 시도되면서 거기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디스 버틀러(Jueith Butler)의 물질되기(mattering)에 관한 수행적 사유는 물질성의 문제와 의미의 문제를 모두 그것들의 분해불가능성 안에서 생각한다. 하지만 버틀러의 관심사는 인간 신체(그리고 거기서 오직 그 생산성의 특정한 측면만을)에 제한되며, 그녀의 물질화에 대한 이론화는 푸코의 규율권력과 담론적 실천이라는 생각에 얽매여 있어서, 인간사회의 실천 영역에 긴박되어 있다. 나아가 버틀러와 푸코 양자 모두에게서 행위소(agency)는 오로지 인간 영역에 속하며, 기술과학적 실천과 그것들의 인간 신체에 대한 근본적으로 생산적인 영향력의 본성에 대해 논하지도 않고, 그러한 실천들이 인간을 구성하는 것, 더 일반적으로는 권력의 작동 안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 즉 둘 모두는 (다른 정도로) 자연-문화 이원성을 존중하면서, 그것에 따라 전반적으로 그 생산성의 계보학을 뒤로 미룬다.[23] 관건적으로 버틀러와 푸코의 이론들이 담론적 실천과 물질적 현상들 간의 관계에 대한 적합한 해명을 내놓는데 실패한다. 이런 측면에서 개념들의 체현된 본성에 대한 보어의 성찰이 [이 둘의 사유에 대해] 풍부한 개입을 이룰지 아닐지 우리는 궁금해지는 것이다. 요구되는 것은 물질되기에 있어서 물질-담론적 실천들(‘과학적’이라고 불리워지는 것과 ‘사회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포함하여)에 관한 포스트 휴먼적인 수행적 사유이다
이어지는 논의에서, 나는 그와 같은 사유를 진전시키려고 노력하면서 보어, 푸코, 버틀러 그리고 다른 중요한 이론가들의 성찰을 상호간 회절적으로 독해할 것이다. 이것은 물질성, 담론적 실천, 행위소 그리고 인과성 등등에 대한 관념의 중요한 재구성을 이끌 것이다. 장치에 대한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면밀한 작업은 다음과 같이 보어의 공식들 너머로 의미 있는 발전을 이끌어 낸다. (1) 장치는 특수한 물질-담론적 실천이다(그것들은인간 개념을 체현하고 측정에 소용되는 단순히 실험실 장비들이 아니다). (2) 장치는 물질화하는 차이들을 생산한다. 그것들은 경계-제작적인(boundary-making) 실천들로서 물질과 의미되기에 있어서 구성적이다. (3) 장치는 세계의 물질적 배치들/역동적 재베치이다. (4) 장치는 그 자체로 (세계의 계속되는 간-행성의 부분으로 구성되고 역동적으로 재구축되는) 현상들이다. (5) 장치는 그 어떤 내면적 경계들이 아니라 개방적인 실천들이다. 그리고 (6) 장치는 세계 안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의 전통적 개념)이면서도, 또한 공간성과 시간성을 재(배)치(re[con]figure)하는 세계의 물질적인 배치들이거나 재배치이다(즉 장치는 정적 구조들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단지 시공간 안에서 펼쳐지거나 진화하는 것도 아니다).
물질되기: 물질-담론적 실천에 관한 포스트휴먼적인 수행적 해명
담론이란 언어와 동의어가 아니다.[24] 담론은 언어적 또는 의미적 체계, 문법, 화행 또는 대화를 지칭하지 않는다. 담론을 단순히 기술적 진술들을 구성하는 말해진 또는 쓰여진 단어들로 생각하는 것은 표상주의적 사유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담론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해질 수 있는 것을 가동하고 제한하는 것이다. 담론적 실천은 의미 있는 진술들로 고려되는 것을 규정한다. 진술들은 어떤 통일적인 주체의 기원적인 의식에 속하는 단순한 발화가 아니라, 오히려 진술들과 주체들이 가능성의 장으로부터 출현하는 것이다. 이 가능성의 장은 정적이거나 특유한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우발적인 다양체(multiplicity[다양성])이다.
푸코에 따르면 담론적 실천은 국지적인 사회역사적인 물질적 조건들로서 말하기, 쓰기, 사유하기, 계산하기, 측정하기, 걸러내기 그리고 집중하기와 같은 훈육적인 지식 실행을 가능하게 하고 제한한다. 담론적 실천은 단순히 기술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 실천들의 주체들과 객체들을 생산한다. 푸코의 사유에서 이러한 조건들은 초월적이고 현상학적이라기보다는 내재적이고 역사적이다. 즉 그것들은 경험의 가능성들(칸트)을 규정하는 비역사적, 보편적, 추상적 법칙들이 아니라, 현행적으로 역사적이고 문화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조건들이라는 의미이다.
담론적 실천에 관한 푸코의 사유는 보어의 장치에 관한 사유와 그것들이 물체들과 의미되기의 물질적 생산에서 하는 역할과 몇몇 도발적인 공명을 가진다. 보어에게 장치는 다른 것들에 대해 배타적인 어떤 개념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정한 물리적 배치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개념화나 측정하기와 같은 지식 실천들을 가능하게하고 제한하는 국지적인 물리적 조건들이다. 또한 그것들은 생산된 현상들의 (부분이자) 생산물이다. 그들은 생산된 특정 현상들 내부에서 특정 지식 실천의 ‘객체들’을 생산하는 어떤 국지적인 절단을 가동한다. (현행적인 물리적 배치들인) ‘개념들’와 ‘사물들’이 경계들을 획정하지 않는다는 그의 근본적인 사유에 기반해서, 보어는 주-객, 아는 자-앎의 대상, 자연-문화 그리고 단어-세계와 같은 이원론을 의문에 부치는 어떤 새로운 인식론적 틀을 제공한다.
개념이 이념형(ideational)이아니라 현행적인 물리적 배치라는 보어의 통찰은 명확하게도 통상적으로 쓰기와 말하기가 물질적 실천이라는 종종 들리는 현대적인 의미의 한계를 넘어 가는 의미 제작적인 물질성에 대한 주장이다. 보어는 단순히 푸코가 그랬던 것처럼 담론이 물질적 실천에 의해 ‘지지’되거나 ‘존속’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몇몇 실존론적-실용주의 철학자들이 지지하는 바, 비담론적(배경적) 실천들이 담론적 실천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25] 오히려 보어가 중시하는 것은 개념들과 물질성, 물질과 의미되기 간에 훨씬 더 밀접한 관계이다.
언어적 개념들에서 담론적 실천으로의 이동은 인간적 개념들과 운동 중에 있는 장치의 정적 본성에 대한 그것의 의존성으로부터 보어의 설명을 자유롭게 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지만 동시에 담론적 실천들에 대한 생각은 그것들의 내적으로 물질적인 본성(과 보어의 통찰이 여기서 도움이 된다는 것)에 관한 설명을 적합하게 재개념화함에 틀림없다. 기본적인 생각은 인간적 개념들이 장치 안에 체현되는 경우 뿐아니라 장치가 담론적 실천으로 존재하는 경우이다. 여기서 후자는 ‘객체들’과 ‘주체들’이 생산되는 어떤 특수한 물질적 재배치들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나는 이어서 그와 같은 노력을 제시할 것이다. 이러한 이동은 담론적 실천들과 인간이 역할에 대한 어떤 제안된 포스트휴먼적 이해를 포함할 것이다.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은 필수적인 노고를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보어의 사유에 관한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연구작업에서, 장치는 물질되기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물질적 조건들이다. 그리고 장치는 물질되기로부터 배제되는 것과 물질화하는 것을 규정한다. 장치는 규정적 경계들과 현상들 내부의 ‘개별실체들’의 속성들을 생산하는 행위적 절단이다. 여기서 ‘현상들’이란 행위적으로 간-행하는 구성요소들의 존재론적인 불가분성이다. 다시 말해 행위적 절단이란 존재적이면서 동시에 의미론적이다. 현상들의 ‘구성요소들’에 속하는 경계들과 속성들이 규정되는 것과 특정한 절합들이 의미있어지는 것은 오직 이러한 특수한 행위적 간-행을 통해서다. 특수한 행위적 간-행들이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존재적-의미론적 경계들은 미규정적이다. 요컨대 장치는 존재적인 것 뿐 아니라, 의미론적인 미규정성의 어떤 해를 촉진하는 행위적 절단을 드러낸다. 따라서 장치는 경계-제작적 실천이다.
이제 보어와 푸코가 의심할 여지 없이 일치하기 때문에, 의미되기는 개별적인 단어들이나 단어 그룹의 속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의미되기는 간언어적으로(intralinguistically)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언어외적으로 참조되는 것도 아니다. 의미되기는 특정한 물질적 실천들을 통해 가능해진다. 의미론적 충만성(contentfulness)은 개별적인 행위자들(agents)의 사유나 수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담론적 실천들을 통해 성취된다. 하지만 담론적 실천과 의미화가 특유하게 인간적 현상이라는 통상적 믿음은 사실이 아니다. 만약 담론적 실천들이 어떤 존재적(이고 또한 의미론적인) 의미에서 경계-제작적 실천들이라면 그때 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에서 상이하게 구성되는 그 실천들은 인간에 대한 선행 관념들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담론적 실천의 관념에 기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요구되는 것은 담론적 실천의 포스트휴먼적 이해다.
행위적 실재론의 사유에서 담론적 실천은 세계의 특수한 물질적 (재)배치를 통해 경계들, 속성들 그리고 의미되기에 관한 규정이 상이하게 시행되는 것이다.[26] 즉, 담론적 실천이란 세계의 계속적인 행위적 간-행을 통해 (보충적인 미규정과 더불어) 특수한 규정들이 생산된 현상들 내부에서 가동되는 것이다. 중요하게도 담론적 실천은 인과적 간-행들이며, 그것들은 인과적 구조를 통해 현상의 몇몇 구성요소들(‘결과들’)이 그것들의 미분적 표현들 안에서 다른 구성요소들(‘원인’)에 의해 뚜렷해지는 것이다. 의미되기[의미화]는 개별적 단어들 또는 단어의 집합의 속성이 아니라, 이해가능한 것과 이해불가능한 것의 그러한 미분적(differential[차이나는]) 춤 안에 있는 어떤 지속적인 수행성이다. 그 인과적 간-행에 있어서, 세계의 부분은 생생하게 물질화하는 것들, 가능성들 그리고 불가능성들이 재배치되는 반면, 세계의 다른 부분에 있어서 이해가능성이 출현하는 중에 규정적으로 경계지워지고 속성을 가지게 된다. 담론적 실천들은 행위적 간-행의 지속적인 역동성 가운데 그 어떤 목적성도 없는 경계-제작적 실천들이다.
전통적인 휴머니즘적 사유에서, 이해가능성(intelligibility)은 어떤 지성적 행위자(지성적인 무언가를 가진)를 요청하며 지적인 작용은 어떤 특수하게 인간적인 능력에 제한된다. 하지만 내가 주장하는 행위적 실재론의 사유에서 이해가능성은 그 지속적인 표명 안에 있는 세계의 존재론적 수행성이다. 이것은 인간-의존적 특성이 아니라, 그 미분적인 생성 안에 있는 세계의 어떤 모양새(feature)다. 세계는 자기 자신을 차이나게 표명한다.
더 나아가 안다는 것 또한 인간적 의미에서의 지적 작용을 요청하지 않는다. 오히려 앎이란 물질이 되는 것에 대한 미분적인 감응성(responsiveness)의 문제(수행적으로 표명되고 사유가능한 것)다. 엄밀히 말해 행위적 실재론은 어떤 인공보철적으로 증강된 인간으로서의 아는 자와 관련된 최근의 성찰들 뿐 아니라 지식의 주체에 대한 인간주의적이고 반인간주의적인 사유 둘 모두 너머로 나아간다. 앎이란 위에서부터 또는 바깥으로부터 또는 심지아 인공보철적으로 증강된 인간 신체로부터 보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앎은 특수한 실천을 통해 세계가 미분적으로 표명되고 사유된다는 것을 이끌어낸다. 몇몇 예들에서 ‘비인간’(심지어 뇌를 가지지 않은 존재까지)은 앎의 실천에 있어서 세계의 능동적 개입에 참여하는 것으로 등장한다.[27] 앎은 수행적 네트워크의 부분으로서 미분적 감응성과 사유가능성(accountability)을 수반한다. 앎은 제한되거나 닫힌 실천이 아니고, 세계에 속한 어떤 지속적인 수행이다.
담론적 실천은 몇몇 물질적 실행의 불특정한 관계를 담지하므로, 화행(speech acts), 언어적 재현, 또는 심지어 언어적 수행도 아니다. 담론적 실천들은 개별주체들, 문화 또는 언어의 투사된 행위소를 위한 의인화된 가주어(anthropomorphic placeholders)가 아니다. 사실상, 그것은 인간-기반 실천이 아니다. 반대로 담론적 실천에 관한 행위 실재론의 포스트휴먼적 사유는 분석이 근거를 떠나기 이전에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고정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의 물질-담론적 출현에 관한 계보학적 분석의 가능성을 허용한다. 인간 신체와 인간적 주체는 그 자체로 선행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들은 단순한 최종 생산물도 아니다. 인간은 순수 원인도 순수 결과도 아니지만, 그것의 제약 없는(open-ended) 생성에 있어서 세계의 부분이다.
적합한 재현적 계기을 위해 그토록 많은 지원자들이 기다리는 결정적인 의미화를 갖춘 단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결정적 경계들과 속성들을 갖추고 무목적적으로 허공을 배회하는 사물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행위소의 박탈, 역사성 또는 의미화는 바깥으로부터만 주어진다. 인류적인 행위소가 단어-사물 짝을 만들면서 특수한 존재들에 붙인 이름을 발음할 때처럼 말이다. ‘사물’은 선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행위적으로 설립되며 결정적으로 현상 안에서 경계지워지고 속성을 부여받는다. 특정한 행위적 간-행들의 바깥에서 ‘단어들’과 ‘사물들’은 불확정적(indeterminate)이다. 그러므로 물질은 사물의 속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담론적 실천처럼, 간-행적 측면에서 보다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항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질화하는 신체』(Bodies That Matter)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페미니즘 이론에서 회자되는 신체에 관한 사회 구성주의적 해명의 실패에 관한 총체적인 이해를 제공하면서 물질 개념으로 회귀하도록 페미니스트들에게 도발한다. 하지만 이 ‘회귀’로써 그녀는 물질을 담론에 선행하는 것으로 위치 지을 실천적 관점을 주장하는데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러한 전-담론적 실체 안에서 성적 차이에 대한 페미니즘적 주장들을 근거짓고자 하는 어떤 시도가 바로 그 해변에 스스로를 끌어올리도록 운명 짓는다고 논한다. 즉 그녀는 물질이 언제나 “성과 섹슈얼리티라에 관한 담론에 충분히 침전되어 있으며, 그러한 단어들이 놓일 수 있는 활용형들을 예시하고 제약한다” (Butler 1993, 29)고 설명한다. 그보다도 버틀러는 우리가 물질을 “경계 효과, 즉 고정성과 우리가 물질이라 부르는 표면을 생산하는 시간을 안정화하는 물질화의 과정”(9)으로 이해한다고 제안한다.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언제나 물질화되는 물질은 [...] 생산적인 것과 관련하여, 그리고 사실상 푸코적인 의미에서 규율적 실천의 효과를 물질화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9-10)[28]
물질화의 과정으로서의 물질이라는 버틀러의 물질에 관한 재개념화는 그것의 역사성 안에서 물질을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직접적으로 수동적인 것 그리고 문화의 능동적 기입을 기다리는 빈서판(blank slate)으로서의 물질에 관한 재현주의적 해석에 도전한다. 재현주의적 해석은 물질성과 담론 간의 관계를 절대적 외재성 중 하나인 것처럼 그린다. 버틀러의 해명은 아래와 같은 중요한 점을 강조한다. 물질은 의미화와 같이 개별적으로 표현되거나 정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작은 조각 또는 빈서판, 표면 또는 수동적으로 의미를 기다리는 자리가 아니다. 또한 그것은 과학적, 페미니즘적 또는 경제적 이론들을 위한 논쟁의 여지가 없는 근거도 아니다. 물질은 불변적이고 수동적이지 않다. 또한 그것은 어떤 고정된 지지대, 위치, 참조점 또는 담론을 위한 지속가능성의 원천도 아니다. 그것은 완결되기 위해 문화나 역사와 같은 외적 힘의 각인을 요청하지 않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버틀러의 이론은 궁극적으로 물질을 물질화의 바로 그 과정에 참여하는 능동적 행위소라기 보다 담론적 실천의 수동적 생산물로 재기입한다.[29] 이러한 결함은 물질화의 인과적 요소들에 관한 불완전한 평가와 그 생산성 안에서 담론적 실천들(그리고 물질적 현상들)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인과성’에 관한 불완전한 재작업의 징후다. 더 나아가 버틀러의 물질성 이론은 인간신체의 물질화에 관한 해명에, 또는 더 정확히 말해 인간 신체의 윤곽을 구성하는 것에 제한된다. 더 나아가 푸코적인 규율적 실천과 관련하여 물질성에 관한 그녀의 독해는 그녀에게 물질인 과정이란 오직 인간적인 사회적 실천일 뿐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만든다(이에 따라 그녀가 논쟁하기를 원하는 바로 그 자연-문화 이분법을 재기입한다). 행위 실재론은 버틀러의 이론의 인간중심주의적 한계 너머로 가는 물질화에 대한 이해를 제공한다. 의미심장하게도 그것은 물질의 역동성을 파악한다.
행위 실재론적 사유에서, 물질은 어떤 고정된 실제를 지칭하지 않는다. 그보다 물질이란 그것의 간-행적 생성 안에서 실체다. 즉 사물(thing)이 아니라 함(doing), 행위소의 응결이다. 물질은 반복적인 간-행의 안정화하고 탈안정화하는 과정이다. 현상들 – 가장 작은 물질적 단위들(관계적인 ‘원자들’) - 은 이러한 진행하는 간-행 과정을 통해 물질이 된다. ‘물질’은 객체들과 독립적으로, 고유한, 고정된 추상적 속성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물질’은 그것들의 진행중인 물질화 안의 현상들을 지칭한다.
물질은 단순히 ‘일종의 인용성(citationality)’(Butler 1993, 15), 인간 신체의 표면효과 또는 언어적 또는 담론적 행위들의 마지막 생산물이 아니다. 물질은 어떤 언어적 구성물이 아니라 담론적 실천들이 그 자체로 세계의 물질적 (재)배치인 포스트휴먼적 의미에서의 담론적 생산물이며, 이를 통해 경계들, 속성들 그리고 의미들의 결정들이 상이하게 설립된다. 즉 경계-제작적 실천으로서의 담론적 실천은 간-행의 역동성 안에 충분히 함축되어 있으며, 이 역동성을 통해 현상들은 물질이 된다. 간-행의 동력학은 그 진행중인 물질화 안에서 물질을 능동적인 ‘행위소’로 요구한다. 아니 오히려 물질은 그 반복적 생성 안에 함축되거나 접혀진 역동적인 간-행적 생성이다. 물질(화)는 세계의 역동적 표현/배치(articulation/configuration)이다. 달리 말해, 물질성은 담론적 실천이 언제나 이미 물질적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담론적이다(즉 물질적 형상들은 신체적 생산의 장치와 분리불가능하다. 그리고 물질은 밖으로 출현하며, 그 존재의 부분으로서 진전하는 경계들의 재배치를 포함한다. 즉 담론적 실천은 세계의 전진하는 물질적 [재]배치이다). 담론적 실천들과 물질적 현상들은 서로 간에 외재적 관계를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물질적인 것과 담론적인 것은 간-행적 역동성 안에서 상호적으로 함축된다. 물질적인 것과 담론적인 것은 상호 한정적으로 서로 간에 속한다. 담론적 실천도 물질적 현상도 존재론적으로 또는 인식론적으로 앞서지 않는다. 둘 중 하나가 다른 것의 측면에서 설명될 수도 없다.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또한 다른 것을 결정하는 위치에서 특권을 가지지도 않는다. 다른 것이 없으면 표현되거나 표현할 수도 없다. 물질과 의미화는 상호적으로 표명된다.
물질적 제한과 배제, 그리고 물질의 역사성와 행위소(예컨대 규율적 실천들이 물질적 차원을 포함하여)는 물질화 과정의 중요한 요소이다.[30] 물질적 조건들은 그것들이 신체적 구성에서 현행적인 생성 요인들인 특정 담론들을 ‘지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물질이 그것의 생성 안에서 세계의 반복적인 간행을 통해 물질이 되기 때문에 물질이다. 핵심은 단순히 담론적인 어떤 것들에 부가된 중요한 물질적 요인들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주제가 제한들, 조건들 그리고 실천들의 결합된 물질-담론적 본성이라는 것이다. 물질적이고 담론적인 제한들과 배제들이 뒤얽혀 있다는 사실은 물질적 또는 담론적 요인들의 개별적 효과들을 결정하려고 하는 분석들의 제한된 타당성을 가리킨다.[31]
물질성에 대한 행위 실재론의 개념화는 물질적 제한들과 조건들을, 세계의 투명한 또는 즉각적인 주어짐과 관련된 전통적인 경험론적 가정들을 재도입하지 않고, 그리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매개된 접근에 대한 인식을 단순히 요청하는 분석적인 교착상태에 빠짐이 없이 다시 한 번 사유할 수 있게 하며 그렇게 종결된다. 경험 또는 물질적 세계가 ‘매개되어’ 있다는 도처의 주장들은 그 매개의 진행 방식에 대해 거의 제시하지 않는다. 매개 관념은 너무 오랫동안 경험 세계에 대한 보다 철저한 해명 방법으로 간주되어 왔다. 여기서 제안된 물질성의 재개념화는 경험 세계가 신중하게 다시 한 번 취해지도록 해주지만, 이번에는 객체적인 참조점이 현상들이라는 이해가 수반되는 것이지, 객체 세계의 ‘즉각적인 주어-짐(given-ness)’을 보는 것이 아니다.[32]
‘인간’ 신체들 만이 아니라 모든 신체들은 세계의 반복적 간-행, 즉 그것의 수행성을 통해 물질이 된다. 이것은 이것은 신체의 표면이나 윤곽에 관한 것일 뿐 아니라, 그 존재의 ‘원자들’을 포함하여 그것의 충만한 물리성(physicality) 안에 있는 신체에 속한 것이기도 하다. 신체들은 고유한 경계들와 속성들을 가진 대상들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물질-담론적 현상들도 아니다. ‘인간’ 신체는 ‘비인간’ 신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인간(그리고 비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어떤 고정된 또는 선험적인(pregiven) 관념도 아니고, 막연한 이상성(ideality)도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몇몇 불분명한 과정들에 의해 인간-기반 언어 실천(몇몇 불특정한 방식으로 물질적으로 지지되는)이 주체적 신체들 또는 신체적인 실체들을 간신히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물질성 안에서 간-행의 역동성이다. 물질적 장치는 특정 인과적 간-행들을 통해 물질적 형상들을 생산해 내는데, 거기서 ‘물질적 재료’(material)는 언제나 이미 물질-담론적이다. 이것이 바로 물질이 된다는 것의 의미다. 인간 신체들의 물질화에 예외적으로 집중하는 이론들은 그것에 의해 인간과 비인간의 미분적 경계들이 이끌어져 나오는 바로 그 실천들이 언제나 이미 특정한 물질화 안에 함축되어 있다는 중차대한 논점을 놓친다. 인간(비인간)의 미분적 구성은 언제나 특정한 배제들에 따라 수반되며 언제나 쟁론에 열려 있다. 이것은 행위적 간-행의 불확정적인 인과적 본성, 즉 내가 이후로 행위소와 인과성에 대한 장에서 다룰 관건적인 논점의 한 결론이다.
신체적 경계들
"윤곽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확실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믿든 말든 간에 모든 객체들이 그 둘레에 어떤 선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선도 없다."
- 파인만 외, 『파인만 물리학 강의』
"만약 우리가 신체 그 자체에 대해 실재로 생각한다면, 신체 그 자체의 가능한 윤곽은 존재하지 않는다".
- 가야트리 스피박, 「한 단어 안에서」
신체의 경계에 대한 물음은 보어의 사유에 빈번히 등장한다. 보어가 장치의 바깥 경계의 소여(giveness)을 당연한 듯이 보는 반면, 그의 아는 자(knower[인식자])에 관한 개념은 안정화된 것을 동요시키는 해결되지 않은 모호성으로 가득하다. 한편으로 보어는 외부 관찰자로서 실험을 생각하는데, 이때 관찰자는 자유로운 인문주의적인 주체로서 가능한 장치 가운데 자유롭게 선택하며, 그리고서 뒤로 물러나 물체들 위에 흔적을 남기는 결과들에 주목한다. 이것은 확실히 장치에 있어서 특정한 인간 개념의 특수한 체현의 결과로서, 동료 과학자들과 소통가능하다. 이러한 아는 주체에 관한 개념은 보어의 객관성의 상호주체적 개념의 기초이다. 그리고 인간 주체는 무한퇴행의 위협을 억제하는 유한한 한계이다. 한편으로 보어는 데카르트적 전제, 즉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즉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사이에 그 어떤 고유한 경계가 존재한다는 그 전제에 반대하는 논증을 펼친다. 그러한 경계는 장치와 다른 것들을 배제하는 특정 개념들의 상응하는 체현의 특수한 배치에 따라 드러난다. 다시 말해 객체와 관찰의 행위소들은 특정한 인간적 개념들의 특수한 체현에 의존하는 절단의 수립을 통해 공-구성된다(co-constituted). 인간 주체는 어떤 상황에 있는 것인가? 현상 내부에? 관찰의 바깥에? 주체는 특수한 간-행들을 통해 출현하는 관찰의 행위소들의 한 부분인가, 또는 주체는 장치를 선택하는 외부적인 관찰자인가? 인간적 개념들은 명확히 체현되지만, 인간적 주체들은 불운하게도 그리고 역설적으로 체현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모호함이 해결불가능하는 것은 명백하다. 결국에 보어의 사유에 늘 따라붙는 자유로운 휴머니즘적 주체는 데카르트적 주체인가?
이 절에서 나는 신체들의 개체적 개념과 당연시되는 신체적 경계들의에 대한 다양한 문제제기들의 어떤 작은 샘플링을 제안할 것이다.이 논의는 내개 제기했던 행위 실제론적 개입의 본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 그 배경을 제공하고자 한다. 다음 절에서 나는 보어의 인간주의와 장치가 목표하는 지점과 관련된 질문에 의해 드러나는 궁지로 되돌아간다.
흥미롭게도 보어는 주체와 객체 간의 경계에 관한 질문을 보통의 청중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보다 덜 기술적인 예들 중 하나를 들어 직접적으로 제기한다. 그는 막대기 또는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을 간-행하는 어두운 방에 두 개의 상호적으로 배제된 방식으로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상보성(complementarity)을 설명한다. 하나의 가능성은 그 사람이 막대기를 사용해서 손에 막대기를 단단히 쥐고서 방을 돌아다니며 길을 탐색하는 것이다. 여기서 막대기는 ‘주체’의 부분으로 적합하게 이해된다. 또는 대신에 그는 막대기를 느슨하게 쥐고서 방의 형태를 감각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 막대기는 관찰의 ‘대상’이다.
여기서 우리는 심리학자들이 자주 지적하듯이, 오직 감각을 기억하기만 하면 되는데, 모든 사람들은 막대기를 쥐고서 어두운 방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향할 때, 이를 경험했을 것이다. 막대기가 느슨하게 쥐어질 때는, 다른 객체를 건드리는 감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그것이 꽉 쥐어질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낯선 신체라는 감각이 풀어지고, 건드리는 것의 인상은 탐색의 와중에 즉각 막대기가 물체를 건드리고 있는 그 지점에 국지화된다 (Bohr 1963a [1929 essay], 99).
이 두 가지 상이한 실천들의 상호배제성은 명백하다.[33] 막대기는, 만약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는 것에 집중한다면, 관찰의 도구로서 유용할 수 없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선은 고정적이지 않지만, 일단 절단(cut)이 행해지면(즉 어떤 특정 실천이 설립되어지고 있으면), 정체성은 임의적이지 않지만, 사실상 물질적으로 특정되고 어떤 주어진 실천을 위해 결정된다. 보어가 신체적 경계들의 고유한 애매성과 특정한 보충적인 절단들/실천들을 통한 그 경계들의 해소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의식적인 주체적 경험의 본성에 대해, 즉 현상학자들의 감각에서의 현상들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34]
이제 그것은 어떤 사람의 바깥 경계(막대기는 물론이고)가 사실상 결정된다는 것과 주체가 막대기를 포함하는가 아닌가라는 것은 실재로는 단지 현학적인 몽상이며 중요한 주제가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즉 기껏해야 그것은 인간 경험에 대한 하나의 예이지, ‘외부’ 실재의 본성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예의 핵심을 이해할 다른 방법이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개별적 인간 주체의 의식적인 주체적 경험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물체들과 경계들의 차이나는 물질적 배치의 측면에서 미분적인 물질적 체현(그리고 단지 인간들에 속하는 것만이 아닌)이다. 여기서 신체들의 현행적 물질이 문제가 되며 관건적이다. 체현의 본성에 속하는 개별적이고 기계론적인 개념에 대해 몇몇 주목할 만한 문제제기를 명확하게 고려해 보자.
얼핏 보면 어떤 신체의 외부 경계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명백해 보인다. 머그컵은 마치 사람들이 그들의 피부에서 끝나는 것처럼 그것의 바깥 표면에서 끝이 난다. 겉보기에는 시각적 단서들에 의존하는 것은 어떤 견고한 경험적 접근을 구축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정말로 표면과 입방체가 그것들이 보이는 바 그것인가? 사실상 어떤 상이한 분야, 고려 그리고 경험들의영역으로부터 나온 풍부한 경험적 증거는 시각적 단서가 잘못 이끌 것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몇몇에게 명백해 보일 만한 것은 단순히 사물들이 봄(seeing)이라는 특정 실천과 세계에 대한 또 다른 신체적 참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방법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그 표면적으로 시각적인 자명성을 포함하여, 신체적 경계들의 겉보기에 자명한 본성이란 특정한(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신체적 수행의 반복의 결과라는 것이 점점 명확해졌다. 사실 20세기는 이러한 겉보기에 자명한 관점에 대한 심각한 과학적, 철학적, 인류학적, 그리고 경험적 쟁론들이 목격된다. 신경생리학자들, 현상학자들, 인류학자들, 물리학자들,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 퀴어, 과학 그리고 장애 연구 학자들, 또한 정신분석 이론가들은 체현의 기계론적 개념과신체적 경계들, 특히 인간의 그것에 대한 아마도 고유한 본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다. 사이보그 이론가들은 그것이 심각하게 역설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서 멈춘다.[3]
예를 들어 시각의 본성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눈이 보는 것보다 더욱 더 많은 의문이 신체가 어디서 끝나는가에 대한 질문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시각에 관한 물리적 메커니즘을 생각하면서,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신체적 경계들에 관한 진위가 의심스러운 본질적이고 자명한 본성을 의문에 부친다.
[인간을 포함한 특정 동물들의 시각체계의 작동에서] 윤곽의 증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알려져 있던 것이다. 사실 그것은 심리학자들이 여러 번에 걸쳐 언급해 왔던 명백한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끌어내기 위해, 우리는 그것의 윤곽을 그려야만 한다. 윤곽만을 가진 사진을 보는 것에 우리는 얼마나 익숙한가! 윤곽은 빛과 어둠 또는 한 색깔과 다른 색깔 사이의 가장자리일 뿐이다. 그것은 명확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믿거나 말거나 모든 객체가 그것을 둘러싼 하나의 선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런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 선이 있다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의 심리적 구성 안에서만이다.(Feynman 1964, 1: 36-11, 강조는 필자)
파인만은 인간 심리학의 인공물로 존재하는 물체적 경계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즉 물리학은 우리에게 가장자리나 경계들이 존재론적으로도 또는 시각적으로도 한정되지 않는다. 머그컵과 손 사이의 ‘접촉면’이 생겨날 때, 거기에 손에 속하는 x개의 원자들과 머그컵에 속하는 y개의 원자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가 볼 때, 거기에는 실제적으로 시각적으로 정확히 가장자리인 것도 없다. 만약 우리가 ‘가장자리’를 가까이서 본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일련의 빛과 어둠 사이의 날카로운 경계가 아니라, 일련의 빛과 어둠의 띠들, 즉 회절 패턴(diffraction pattern)을 본다는 것은 잘 알려진 물리광학의 사실이다.[35]
봄(seeing)이 세계와의 특정한 신체적 참여로부터 나오는 결과이며 단순히 시각 장치의 불가피한 통합의 결과(눈에 대한 광학, 뇌 안의 특정한 신경학적 자리 그리고 그것들 간의 연결들을 포함하여)는 아니라는 주장의 증거는 인간과 비인간 시각에 관한 다양한 탐구들로부터 나온다. 예컨대 태생적으로 시각장애이거나 이른 나이에 시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나중에 회복수술을 받는 경우들에 대한 문서기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들은 시각장치가 정비된 이후에도 바로 시력을 회복하지 않는다. 1932년 폰 센덴(von Senden, 1960)의해 수행된 공간과 형태 지각에 관한 문학작품에 관한 신중한 탐색은 이미 이러한 현상을 주목하고 있다. ‘Richard Gregory and Jean G. Wallace (1963)’과 ‘Oliver Sacks(1993, 리처드 그레고리와 함께 연구)’도 또한 시각회복을 연구했다. 이러한 연구들ㅇ느 모두 객체들, 얼굴, 공간, 크기, 거리 그리고 깊이에 관한 지각이 이전에 결코 보지 못했던 사람에게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확실히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눈만으로 보지 않는다. 세계와의 상호작용(또는 오히려 세계의 부분으로서 그것‘과의’ 간-행)은 봄의 일부이다. 객체들은 이미 거기 있지 않으며, 특정 입자들을 통해 출현한다.[37]
신체적 경계들의 본질적인 미결정성에 대한 보다 생생한 예들 중 몇몇은 장애를 가진 신체들의 인공기관적인 증강과 관련된다. 이러한 분석들은 자주 인공기관적인 체현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정상’ 체현이라고 당연시하는 형상들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있어서도 유용하다.
푸코의 스승인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매일매일의 신체적인 과제의 성공적인 수행은 신체 안으로 과제를 수행해 들어가는데 사용되는 도구들과 도구 속으로 우리의 ‘세계-내-존재’의 팽창의 상호 혼합에 의존한다고 논한다. 흥미롭게도 메를로-퐁티는 실질적으로 보어가 사용한 것과 동일한 예, 즉 막대기를 사용하여 그의 국지적인 환경의 모양새를 탐색하는 사람의 예를 취한다.[38] 메를로-퐁티는 그와 같은 사례에서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한다.
시각장애인의 막대기는 그에게 하나의 객체이기를 멈추었으며, 더 이상 그 자체로 지각되지 않는다. 그것의 끝은 접촉의 영역과 현행적 반경을 확장하고, 시각과 유사한 것을 제공함으로써 감각의 한 영역이 되었다. 사물을 탐색하면서 막대기의 길이는 표현적으로 매개항으로 진입하지 않는다 (...) 모자, 차 또는 막대기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들 안에 이식되는 것, 또는 반대로 우리 자신의 신체 대부분 안으로 그것들이 통합되는 것이다. 습관은 우리의 확장적인 세계-내-존재의 힘 또는 우리 실존을 신선한 도구들에 적응시킴으로써 변화시키는 힘을 표현한다(Merleau-Ponty 1962, 143).
유사한 논점들이 몇몇 장애인들에 의해 그리고 장애인 권리에 대한 찬성에 의해 제시되었다. 낸시 마어스(Nancy Mairs)의 『허리 높이 까지의 세계』(Waist-High in the World)에 대한 해설에서 리사 디드리히(Lisa Diedrich)는 마이어스가 ‘사용하는’ 휠체어, ‘퀵키 피100(Quickie P100) 소형 전동 모델’을 설명한다.
그것은 메를로-퐁티가 시각장애인들의 지팡이라고 부른 것처럼 그녀 신체 또는 ‘신체적 보조물’의 확장만이 아니고, 그녀 신체의 일부로 만들어져, 즉 통합되어 있다. 그런 만큼 퀵키 P100이 망가지면, 그것은 단지 신체에 도입된 어떤 도구의 파손이 아니라, 마어스 바로 자신의 신체의 파손이 된다. 마어스에 따르면, “내가 경함한 휠체어는 관찰하는 내 ‘바깥 어디’에 있지 않으며, 내 신체의 지지대와 같다. 나는 그 알루미늄과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프레임에 등을 구부린 나 자신의 모양에 늘 충격을 받는다.” 그녀의 퀵키 P100 안에서, 마어스는 언제나 세계안에 위치해 있으며 자리 잡고 있다(Diedrich 2oo1, 218-19).
디드리히는 마어스에게 퀴키 P100이란 단순히 신체적인 보조물이 아니라 마이어 신체의 통합된 부분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나는 여기에 존재론적이고 윤리적인 논점이 얽혀 만들어지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제안하고자 한다. 이것은 개별적인 주체적 인간의 경험에서의 본성에 관한 질문을 넘어 간다. 디드리히는 이러한 질문들의 중요성이 장애를 인지해 온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비장애’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강조한다. 후자의 범주에 속한 사람들(그들의 삶에서 적어도 이 점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자주 이러한 주제에 대해 무반성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세계와 교호작용하는 신체의 당연한 본성이라는 타성은 정신 안에 ‘정상’적 체현이라는 이미지와 더불어 특별하게 구축되는데, 이것은 장애차별의 특권성에 의해 가동된다. 그와 같은 추정이 표면화되는 것은 신체가 작동하지 않을 때, 즉 신체가 ‘망가질’ 때이다. 장치가 처음 관찰되는 것은 자주 사물들이 작동을 멈출 때 뿐이다. 그와 같은 (비)계기들((in)opportunities)이 발생할 때, 현상들의 얽힌 본성과 행위적 절단 그리고 그것들의 당연한 구성적 배제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비장애성’이란 존재의 어떤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 ‘장애’로부터 ‘비-장애’를 구별하는 경계-제작적 실행들을 통해 공-구성된 체현의 특수한 형태이다. 개별적 객체들/주체들이 아니라 현상들로서 비장애의 물질적 본성에 집중하는 것은 비-장애가 된다가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만든다. 즉 비-장애로 있음의 바로 그 본성은 절단과 그것이 배제하는 것을 포함하는 현상들의 일부로서 그것과 함께/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며, 따라서 배제되는 것은 결코 실재적으로 다르지 않고, 어떤 절대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중요한 의미에서 비-장애로 존재함이란 ‘장애’와 더불어 인공보조물적 관계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비장애’가 바로 그들 자신의 실존으로 ‘장애’에 의존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그러한 책임성[responsibility, 응답가능성]을 떠맡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일단 우리의 바로 그 체현이 통합적으로 타자와 얽혀 있다는 인식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타자에 대한 책임성을 거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39]
우리가 보았다시피, 체현의 본성에 대한 질문은 새로운 기술들의 단순 인공물이 아니라 손에 잡힐듯한 사례들로부터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더 새로운 기술들은 보다 더 큰 위안거리 쪽으로 관심을 일으키는 방식을 가진다. 예컨대 샌디 스톤이 산타 크루즈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열린 강의에서 스티븐 호킹과의 만남을 기술한 바를 생각해 보자.[40]
호킹은 그의 물리학에 대한 놀라운 공헌에서 뿐 아니라, 그가 평생동안 ALS(루 게릭 병)과의 사투를 하면서도 놀랍도록 생산적인 물리학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살아 생전에 전설이 되었다. 심신을 쇠약하게 하는 질병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음에도, 호킹은 보트락스(Votrax)라고 불리워지는 인공언어장치를 통해 소통한다. 스톤은, 호킹이 강의하던 강연장은 빈틈 없이 가득 찼고, 증폭 스피커는 강당 바깥 잔디밭에도 설치되어 있었으며,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그곳에 강의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그 사건을 썼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바깥에 앉아 장내 방송 설비로 듣고 싶지 않았고, 그래거 그녀는 강연장으로 기어들어가 “실재로 호킹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녀는 안쪽으로 파고들어가 가까스로 앞 좌석에 앉게 된다. 스톤은 그녀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리고 거기 호킹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휠체어에 앉아 랩탑 컴퓨터의 조이스틱 위에 얹힌 손가락을 제외하고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말이죠. 그리고 플로어 위 그의 옆에는, 장내빙송설비 마이크가 놓여 있었는데, 그는 거기 붙어 있는 보트락스의 작은 확성기에 밀착해 있죠.
그리고 어떤 일이 내 머리 속에서 발생합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합니다. 호킹이 정확히 어디 있는 거지? 내가 바깥에 있을 때보다 이렇게 더 가까이 왔는데? 무대 위에서 말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누구지? 중요한 의미에서, 호킹은 그의 신체의 가장자리에서 호킹이기를 멈춥니다. 분명 신체적 호킹은 어떤 인격을 하나의 사람으로서 보라고 가르치면서, 우리 사회의 조건화 방식에 의해 생생하게 윤곽 잡혀 존재합니다. 하지만 호킹의 중요한 부분은 그의 무릎의 박스 안으로 확장되지요. 박스가 없으면 말도 없습니다. 그러면 호킹의 지성은 아무도 그것을 들으려고 모이지 않는 숲 속으로 쓰러지는 나무가 될 겁니다. 그가 어디서 멈출까요? 그의 가장자리는 어디일까요?
“왜 우리의 신체는 피부에서 끝나야 하거나, 기껏해야 피부에 의해 감싸여진 다른 존재들을 포함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사이보그 선언」의 저자[도나 해러웨이-역자]는 묻는다. 성찰을 더 깊게 진행하는 동안 현상학자들에 방향하면서, 해러웨이는 피부에서 끝나는 분명한 신체적 경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세계 안에 신체의 특수한 상황성(situatedness)을 인식하는데 실패한다고 논한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상황은 결코 자명하지 않고, 단순히 ‘구체적’이지 않으며, 언제나 문제적이다”, “어떻게 ‘젠더’, ‘인종’, 또는 어떤 구조화된 불평등이 서로 맞물린 특수한 사례들에서 어떤 종류의 확고한 입장이 세계 안으로 건립될 것인지, 즉 ‘젠더’나 ‘인종’을 속성들 또는 술어들로서가 아니라 세계들과 객체들을 무엇보다도 몇몇 방식으로 건설하는 하나의 실천으로 ‘급진화된 젠더’로 건설되는지, 객체들이나 실천들 속으로 건설되지,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입장으로 건립되는지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만들어지는 중의 신체이지, 만들어진 신체가 아니다.”[41] 해러웨이에 따르면 “체현은 중요한 인공보철물에 대한 것이다”(1991, 195). 즉 만들어지는 중의 신체들은 결코 신체적인 그들의 생산 장치와 분리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나는 보어의 자유 인문주의적인 인간 신체와 주체 개념이 사실상 옹호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신체적 경게들의 생산에 대한 그의 중대한 성찰을 활용하면서, 그 대신에 ‘인간’에 관한 포스트휴먼적 이해를 제안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나는 신체적 경계들의 생산이 가진 본성이 단순히 경험적이지도 않고, 단순히 인식론적이지도 않으며 존재론적이라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 현재 중요한 것은 실재성의 본성에 대한 문제이지, 단순히 세계에 관한 인간 경험이나 인간적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신체가 어떻게 세계 안에 위치하고 자리 잡는지에 대한 주제를 넘어서는 것은 어떻게 신체들이 세계를 따라, 또는 세계의 ‘부분’으로서 구성되는지에 대한 문제로 나아가야 한다(즉 ‘세계에-속한of-존재’이지 ‘세계-내in-존재’가 아니다). 다시 말해 내 의도의 중심 주제는 신체적 물질성의 본성과 관련된다. 나는 물질 자체가 얽힘(entanglement)을 초래한다고, 즉 그것이 바로 그것의 본성이라고 논증할 것이다. ‘얽힘’으로 나는 어떤 오래된 의미에서 복잡한 상황 안에서의 연결, 상호교직 또는 그물화(enmeshment)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이 용어에 관한 나의 용법은 내가 인과성, 물질성, 행위성, 역동성 그리고 위상학적 재배치들의 그 모든 재형상화와 더불어 제안하는 바, 행위 실재론적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이는 얽힘에 관한 중요한 기술적 논의에 따른다. 7장을 보라.) 게다가 나는 윤리학이 단순히 세계에 관한 인간적 경험들과 연관되는 책임있는 행동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얽힘에 관한 문제이고 각각의 간-행이 어떻게 이러한 얽힘의 재베치 안에서 물질이 되는가의 문제라고 논한다. 즉 그것은 세계의 바로 세계(상)화(worlding) 안에서 체현되는 윤리적 부름(ethical call)의 문제이다. 이러한 관련에 내재하는 것은 인간 뿐 아니라 비인간들의 경계들에 관한 질문이며, ‘인간’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상황들을 포함하여, 이러한 미분적 경계들이 어떻게 공-구성되는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윤리적 함축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8장을 보라.) 이 절과 다음 절에 나머지에서 나는 나의 관심을 다시 장치의 경계에 관한 질문으로 돌릴 것이다.
보어는 장치의 본래적인 바깥 경계를 추정하면서 의문스러운 근거 위에 있다. 왜냐하면 사실상 그 자신의 논증이 그와 같은 추정을 침식하기 때문이다. 보어의 설명에서, 우리는 어떤 대상이 보다 큰 물질적 배치들을 통해 그것의 특수화가 없는 상태에서 제한된 경계들과 속성들을 가진다고 추정할 권리가 없다. ‘객체’의 경계들과 속성들은 어떤 특정 현상의 부분으로서 그리고 그 안에서만 결정된다. 그러므로 보어 자신의 분석의 논리에 다르면, 장치의 경계들과 속성들은 보다 큰 현상 내부에 그 제한의 바깥을 잘 정의하지 않는다.
보다 가까이 이 점을 들여다 보자. 보어는 “적합한 양자 현상에 대한 애매하지 않은(즉 객관적인) 해명은 원리적으로 실험적 배치의 모든 관련 특성들에 관한 기술을 포함한다”(Bohr 1963c [1958 essay] , 4)고 주장한다. 그러면 그 모든 관련 특성들을 결정하기 위해, 전반적인 실험 장치(또는 적어도 관련되는 모든 특성들)을 보다 큰 현상 안에 포함함으로써 규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즉 규정되어야(즉 측정되어야) 하는 장치는 보조 장치와의 간-행을 포함하는 보다 큰 몇몇 현상 안에서 ‘관찰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필연적인데, 이에 따라 보다 큰 현상 내부의 ‘객체적 장치’는 더 큰 현상의 다른 ‘부분’(보조 장치를 포함하는)에 그 흔적을 남긴다. 다시 말해 (더 큰 현상의 부분으로서) 그것의 특성을 측정하기 위해, 의문스러운 원래 장치는 보조 장치와의 간-행 안에서 탐구의 ‘객체’가 되어야 할 것이고, 이에 따라 어떤 보다 큰 현상 안에 그것을 포함한다. 장치가 동시적으로 측정된 객체이자 측정하는 도구 둘 모두로 존재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므로, 장치는 동시적으로 그 (‘원래의’) 목적에 따라 완전히 규정되거나 기능할 수 없다.[42] 또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원래’ 장치의 특성들을 측정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그것에 의해 탐구의 객체로 정립되는 보다 큰 현상 내부에 그것이 포함되는 것을 요청할 것이다. 이에 따라 관찰의 행위주체로서 그것의 역할은 배제된다. 장치의 측정은 원래의 것과 상이한 현상을 초래하며, 두 가지 다른 현상들의 결합은 세 번째 현상, 즉 이미 그러한 것들을 초래하는 보다 큰 현상을 요청할 것이다. 따라서 ‘외부’ 경계는 ‘내부’ 경계와 마찬가로 어떤 보다 큰 현상에의 그것의 포함이 없이 결정되지 않는다. 달리 말해 고유한(intrinsic) 경계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심지어 ‘내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은 고유하게 미결정적이다. 보어 자신의 논증의 논리는 장치 개념을 어떤 정적이고 한계지워진 실험실 장비로, 인간을 자연의 수행을 위한 기획자, 해석자 그리고 대표자로 절단해 버린다.
장치의 경계들 또는 “이것은 시가가 아니다”
“공간 양자화(space quantization) 실험은 192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오토 슈테른(Otto Stern)과 발터 게를라흐(Walther Gerlach)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이는 양자물리학의 영웅적인 시대를 이끌었던 그 수많은 전설적인 실험들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아마도 그 어떤 실험들도 그토록 자주 인용되지 않을 것인데, 이는 그것의 우아하고 개념적인 단순성 때문이다. 이로부터 새로운 지적인 전망들과 양자과학에 관한 다수의 유용한 응용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원자 물리학자들 가운데에서조차, 오늘날 극소수만이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와 그것이 항구적인 가르침을 드높이는 역사적인 특유성을 깨닫고 있다. 특유한 것들 중엔 따뜻한 침대도 있지만 나쁜 시가(cigar)도 있다(Among the particulars are a warm bed [and] a bad cigar)”
- 브레티슬라프 프리드리히(Bretislav Friedrich)와 더들리 허슈바흐 (Dudley R. Herschbach), 「슈테른과 게를라흐」[43]
오토 슈테른이 어떤 장황한 실험을 수행하기 위해 발터 게를라흐를 설득했던 것은 ‘구 양자 이론’의 때 – 이 시기는 20세기 초엽, 과학적인 불확실성의 시대로서 물리학자들이 최신 양자 이론으로 권위있고, 합당하며 안정적인 고전 물리학을 갈아 치우는 모든 종류의 혼종적 사유들을 시도하던 때였다 - 로 알려진 물리학 역사의 한 시기였다. 슈테른은 “만약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양자이론적 관점과 고전적 관점 간에 명백한 결정이 이루어질 것”[44]이라고 믿었다. 이 시기는 보어가 원자모델로 노벨 상을 수상한 때다. 물질에 대한 보어의 새로운 양자 개념의 독창적인 적용은 그가 원자의 안정성과 수소의 원자 스펙트럼 둘 모두를 위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게 한다. 보어의 모델에서 원자는 분리된 동심원을 가진 전자 ‘궤도들’에 의해 둘러싸인 중심핵을 가진 ‘아주 작은 태양계’이다. 관찰된 수소 스펙트럼은 하나의 이산 궤도(즉 에너지 준위)에서 다른 궤도로의 모든 가능한 전자 ‘비약’ - 즉, ‘양자 도약’ - 을 해명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45] 보어 모델과 조머펠트(Sommerfeld)와 디바이(Debeye)에 의한 그것의 확장의 성공,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 해명(이로써 광자photon 또는 광양자 개념이 물리학에 도입되었다)에 따른 노벨 상 수상을 포함하여 구양자이론의 또 다른 승리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들은 고전물리학을 그토록 빨리 포기해버리는 것을 당연히 주저했다. 고전물리학은 원자 영역에 대한 특정한 설명들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천체에서부터 평범하고 좀 더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물리적 현상의 많은 나머지 부분들을 위한 엄청나게 성공적인 설명틀임이 증명되었었다.[46] 이 혼종적이고 급격하게 발전하는 세계관 안에서 원자에 관한 보어-조머펠트-디바이 모델은 중요한 논쟁을 유발했던 특유한 퍼즐을 제시했다. 즉 전자 궤도 평면의 정위(orientation)가 이산값들(discrete values)에 제한된다는 사실, 즉 오직 특정한 공간적 정위만을 허용한다는 것에 대해 어떤 설명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공간 양자화’(space quantization)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현상이 실재 현상인지 아닌지, 또는 그것이 어떤 다른 현상을 상징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들은 아직 골머리를 썩히는 물리학자들에게 이해되지 않았다.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은 (다수 견해의 방향에 반대하여) 공간 양자화를 실재 현상으로 보려는 과감한 시도였다. 슈테른은 만약 우리가 현상의 실재를 증명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이 근본적으로 공간 양자화로서 비고전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그때 고전 이론은 새로운 물리학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것이라고 느꼈다.[47]
실험에 대한 슈테른의 생각은 “너무 추워서 밖에 나가기엔 좋지 않은” 차가운 아침의 사색 동안 구체화되었다. 그의 상상력에 불을 붙인 이 생각의 핵심은 공간 양자화의 탐침으로 자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의 실험 기획은 아래와 같은 컴퓨터 모델에 기반한다. 즉 궤도를 그리는 전자는 아주 작은 자기장을 생산해야 하는데, 이것은 그에 따라 외부 자기장와 상호작용을 통해 원자가 작동하기 위한 어떤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것은 슈테른에게 자석들의 특정 배열을 활용하여 우리가 다른 지향들을 가진 전자들을 분리하기 위해 외부 장의 상이한 배열의 이점을 취함으로써 이론적으로 궤도를 도는 전자 평면의 이산적 지향을 전개할 수 있다. 그는 은원자 광선과 외부 장의 배치를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분리된 경로를 따르는 은원자들의 핵을 도는 전자들의 두 가지 가능한 지향이다. 자기장에 관련된 하나의 지향을 가진 전자들은 윗방향으로 굴절된 것이고, 반대 지향을 가진 전자들은 아래 방향으로 굴절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은원자 광선은 자석들로 인해 창조된 외부 장을 통과해 가면서, 유리판으로 된 탐지 스크린 위에 둘로 나누어진 흔적들을 남기고 갈라질 것이다(그림 14).
슈테른은 발터 게를라흐의 실험에 대한 재능을 잘 뽑아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보어의 이론물리학 연구실 옆 빌딩에서 원자 광선 실험을 수행하고 있었다. 슈테른은 거기서 작업했다. 편리하게도 게를라흐는 슈테른의 목적에 맞는 자기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슈테른의 생각은 충분히 간단명료했지만, 그 실천의 현실화는 복잡하고, 곤란하고 힘든 문제였다. 게를라흐의 학생들 중 한 명은 그의 교수가 극복해야 했던 시도들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을 남겼다.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는 은을 오븐에 가열하는 것이 얼마 만큼 어려운지 전혀 상상할 수 없다. (...) 충분히 가열될 수 없는 장치 내부에서(만약 그렇게 되면 덮개가 녹아 내릴 것이다)그리고 몇 시간 동안 진공이 (...) 산출되어야 하는 곳에서 (...) 펌프들은 유리로 만들어졌고 그것들은 끓는 수은의 미는 힘 또는 밀도 높은 수증기 물방울으로 인해 자주 부서졌다. 그런 경우에는 몇 날 몇 일이 펌프질에 애를 쓰면서, 오븐을 따뜻하게 하고 가열하는 것에 소진되었다. 또한 우리는 결코 오븐이 네 시간에서 여덟 시간의 노출을 거치는 동안 불타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펌프질과 오븐 가열을 아무런 예상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야만 했다. 이건 시지프스의 노동과 같았는데, 주된 짐과 책임은 대개 게를라흐 교수가 지게 되었다. (...) 그는 그 일을 한 무더기의 개정인쇄본과 책 작업과 더불어 밤 9시까지 했다. 그리고서 밤 시간 동안 그는 코코아나 차를 듬뿍 마시고 많은 담배를 피우면서 증명들과 논평들을 읽고, 논문들을 썼고, 강의를 준비했다. 내가 다음 날 연구소에 도착했을 때, 펌프가 가동하는 친숙한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고, 거기서 나는 게를라흐가 그때까지 연구실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좋은 신호였다. 즉 밤 새 아무 것도 부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W. Schutz, quoted in Friedrich and Herschbach 1998, 179)
실험의 성공은 게를라흐의 노동이 가진 끈기와 기술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요인들의 집중에도 의존했다. 즉 “특유한 것들 중엔 따뜻한 침대도 있지만 나쁜 시가(cigar)도 있다. 적시에 도착하는 우편엽서도 있는 반면, 철도 파업도 있으며, 자연의 기묘한 음모도 있는 것이다”(Friedrich and Herschbach 2003). 핵심적인 요인들 중 하나는 독일계 미국인인 헨리 골드만(Henry Goldman, ‘골드만 삭스’의 창립자이자, ‘울워스’ 체인점의 창설자 )의 외부 기금출연이었다. 골드만의 기부는 독일 경제의 재정적 혼란이 증가하는 가운데 게를라흐의 연구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48] 아인슈타인도 베를린에 있는 그의 연구소로부터 그들의 연구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자금을 대 주면서 유익한 역할을 했다.
운 나쁘게도, 공간 양자화의 흔적들은 게를라흐에게서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슈테른이 상세히 말한 바에 따르면, 그 연구에는 그에게 인상적인 흔적을 남길 만한 곤란한 과학적 모험과 관련되는 어떤 특정한 사건이 있었다.
진공상태를 풀어 방출한 뒤, 게를라흐는 탐지기 플랜지(flange)를 제거했다. 하지만 그는 은원자 광선의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고 플랜지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평판 가까이에서 자세하게 살릴 때, 게를라흐는 내 어깨 너머에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우리는 광선의 흔적이 서서히 나타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 마침내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 나는 그때 조교수 대우였다. 내 봉급은 좋은 시가를 사기에는 너무 적었고, 그래서 나는 나쁜 시가를 피웠다. 그것들은 많은 양의 황을 담고 있었고, 그래서 평판에 닿은 내 숨결은 은을 황화은(silver sulfide)으로 바꾸었는데 그것은 짙은 검정색이어서 쉽게 눈에 띄었다. 그것은 사진 필름 인화과정과 같았다.(Friedrich and Herschbach 1998, 178-79)
게를라흐가 이룬 결과는 끝났지만, 시가는 없었다! 그 흔적들은 슈테른이 그의 손에 평판들을 쥐고 슈테른의 황화 숨결 담배 연기가 스며들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거리를 두고 그것들을 연구할 때 나타났다. 그것은 어렴풋하다가, 이윽고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며, 은 흔적들이 짙은 검정색의 황화 흔적을 남겼다.[49] 이 역사적인 실험의 마술과 같은 성공은 흔하고 값싼 (시가) 비결에 달려 있었다(그림 15). 만약 슈테른의 흡연 습관이 그의 상대적인 빈곤과 짝을 이루지 않았다면, 이 두 사람은 공간 양자화의 어떤 흔적을 발견하리라는 희망을 접었을 것이다. 즉 그러한 실험은 시가의 황 연기로부터 끄집어 낸 작은 도움이 없으므로 그 자체로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50]
오토 슈테른의 값싼 시가의 사례가 매우 신랄한 것처럼, 몇몇 ‘명백한’(가시적인) 경계에서 장치의 끝점들의 바깥 경계 또는 우리가 실험 안에서 ‘장비’라는 이름으로 목록화하도록 배운 일련의 아이템들이 과학 수업들에서 실행하는 것인데, 이것들은 우리의 고전적인 직관을 믿도록 하면서, 온전히 ‘장치’를 즉각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우리의 훈련, 매일매일의 실험이 ‘명백한 것’ 그리고 ‘가시적인 것’을 포함하여 선입관을 형성하는 환영에 걸리기 쉽도록 만들고, 이에 따라 연기와 거울들(또는 적어도 연기, 유리 그리고 은 원자들)에 의해 실행되는 역할의 실재성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하는 바, 거기서 ‘연막 스크린’ 자체는 장치의 중대한 부분이다.[51]
중요하게도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은 사실상 기대되는 결과를 야기하지 않았으며, 슈테른이 원했던 만큼 결정적이지도 않았다. 비록 슈테른이 그들의 실험의 성공이 “명백하게 양자 이론적인 것과 고전적인 관점들 중 하나를 결정”할 것이라는 점이 명백하다 해도, 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것은 슈테른과 게를라흐에 의해 작성된 예비 보고서는 광선 분할의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최초의 결과는 슈테른이 이해한 바, 그러한 양자적 세계관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결과는 어떤 부정적 결과에 속하는 결정적인 것으로 취해지진 않았다.
슈테른과 게를라흐에 의해 보고된 예비적인 결론은 요소들 안으로의 광선의 분할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넓게 퍼진 광선 자국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공간 양자화를 증명하지 않았다해도, “은 원자가 어떤 자기적 모멘트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제공했다고 결론지었다.(A. Franklin 2002)
즉, 그들은 공간 양자화가 결국에 (그리고 매우 결정적으로) 실재 효과가 아니라고 결론 내리지 않았다. 그 대신에 “슈테른과 게를라흐는 장치를 개량했는데, 특히 둥근 광선 슬릿을 훨씬 강력해진 사각형 모양으로 바꾸었다”(Ibid.) 그리고 이 아이디어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즉 이 상대적으로 드문 장치 재배치는 두 가지 요소들로 넓게 퍼진 광선 자국을 분해했고, 그들의 결론을 전반적으로 개정하도록 했다.[52] 하지만 이러한 장-결정적 실험과 관련된 역설은 이것이 다가 아니다. 비록 잠재적으로 모든 양자 물리학 교과서가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을 확정적이고 간단한 결과(버튼을 누르고 일어난 일을 작성하는)로서 소개하지만, 그 결과가 그들의 최근의 해석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그 후 수 년이 흐른 뒤였다. 슈테른과 게를라흐는 공간 양자화가 아니라 전자의 스핀(각 운동량angular momentum)의 실존에 대한 증거를 산출했다.
실제적으로 최근 모든 교과서들은, 그 대담한 실험은 그들이 발견했던 스핀에 대해 아무런 아이디어도 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빼먹은 채, 슈테른-게르라흐 분열을 전자 스핀을 증명하는 것으로 기술한다. (...) 슈테른-게를라흐 분열와 옛 이론과의 만족스러운 일치는 운 좋은 일치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 따라서 자연은 기묘한 방식으로 이중적이었다.(Friedrich and Herschbach 2003; rearranged, 강조는 필자)[53]
최근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새로운 실험물리학 센터는 슈테른과 게를라흐의 이름을 따서 설립되었다. 그 센터의 기념판은 슈테른과 게를라흐가 서로 반대편에서 분열 광선을 보여주는 상상도를 사용하는데, 이는 히틀러의 득세 시기에 두 물리학자들이 서로 대립한 것을 상징한다.[54] 보어와 하이젠베르그의 관계에서 초래된 긴장과는 달리, 슈테른과 게를라흐의 관계는 전쟁 기간 동안 그들의 상이한 입장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 보어와 같이 슈테른은 유대인이었고 이주를 강요받았다. 게를라흐는 하이젠바르그와 같이 전쟁 기간 독일에 남았다. 그리고 하이젠베르그와 같이 게를라흐는 전잰 동안 독일을 위해 핵폭탄을 개발하는데 주요 역할을 맡았다. 사실 게를라흐의 명성은 유명한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에 대한 그의 연구에 의해 대단히 높아졌고, (하이젠베르그와 함께) 라이히(Reich)의 핵 연구 프로그램에 수장을 맡고, 전후 연합군에 의해 팜힐(Farm HIll)에서 상세히 언급된 지도적인 열 명의 독일 과학자들 중 한 사람이 되게 했다.[55]
장치들은 정적인 실험실 장비들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재배치되는 역동적인 일련의 열린 실천들이다. 슈테른-게를라흐 장치의 개정된 다이아그램에 따르면, 시가는 실험의 작동과 성공에 연관되는 중요한 물질에 속한다(그림 15를 보라). 그 어떤 시가도 아니다. 사실상 시가는 어떤 ‘응축’(condensation), 즉 그 자체로 ‘교점’(nodal point)이다. 이것은 계급, 민족주의, 경제학 그리고 젠더를 포함해서 이 슈테른-게를라흐 장치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모든 다른 장치들의 활동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렇다고 모든 관련 요인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또는 동일한 무게로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배치의 정확한 본성(즉 특정 실천들)은 물질화한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요인들이 과학적 탐구의 결과를 결정한다고 제안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다이아그램 내에서 시가의 현존을 실험자의 내면적 정체성(예컨대 그의 젠더와 계급)이 실험의 결과에서 어떤 결정하는 요인이라는 사실의 기호로 이해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이러한 곧해는 여러 중요한 방식으로 실수를 하는 것일 테다. 즉 그것은 젠더, 계급, 개인, 실천, 물질성, 행위소 그리고 인과성의 본성을 오해한다. (그리고 물론 같은 종류의 담배를 같은 시간동안 피우고, 똑같은 평판에 황화 숨을 쉬는 어떤 여성이 같은 결과를 획득했을 수 있다. 이것은 어떤 페미니스트가 다른 것을 제안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여성들이 시가를, 그것도 싼 시가를 피울 가능성이 적다는 것은 논점이 아니다.) 오히려 논점은 이런 경우 젠더화된 개인들의 생산에 기여했던 물질적 실천들이 마찬가지로 이 특정한 과학적 결과의 물질화에 기여했다는 것이다(‘진행-중의-젠더-와-과학’). ‘객체들’과 ‘주체들’은 특수한 종류의 물질-담론적 실천들을 통해 협동 생산된다. 남성성과 관련해서 슈테른의 젠더화되고 계급화된 수행(이를테면 그의 시가 흡연을 통해)은 물질화되었다. (이것은 싼 시가를 흡연하는 것이 그 평판에 현상이 전개되는 것에 우연히도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식의 단순하게 우발성이 가능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요인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이러한 결과의 발견에 있어서 하나의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논점은 체계안에서 사회적 가치들이, 과학자가 자연과 문화의 영역을 가르는 영역 사이에 단단한 진공 가림막을 유지하려는 최고의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으로 스며 들어가 누출된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결과의 성질이 이러한 장애물의 투과성에 비례해서 파괴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런 종류의 사유는 그릇되게도 문화와 자연, 그리고 젠더와 과학을 분리된 범주들로 설명한다. 하지만 사실은 세계는 자연스럽게 사회적이고 과학적인 영역으로 각각 나눠져 쪼개지지 않는다. 과학을 만드는 하나의 물질적 실천의 계열이 있지는 않으며, 사회적 관계들을 만드는 또 다른 이접적인 계열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적으로 하나의 물질이 있고, 외적으로 다른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공-구성된다(co-constituted). 그것들은 함께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냥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계속해서, 개방되고, 얽혀 있는 물질적 실천들이다. 그러므로 목표는 어떤 특수한 물질적 실천들이 물질화하며 어떻게 그것들이 물질화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특정 사례에서 발견하는 것은, 자연의 수행성을 포함하여 여타 중요한 요인들 가운데 젠더 수행성이 이 과학적 결과 안에서 어떤 물질적 요인이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56]
이 예는 과학적 실천들의 역동적 본성과 장치에 있어서 어떤 한정적인 바깥 경계의 결여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그것들이 참여하는 물질-담론적 실천들을 통해 간-행적으로 공-구성되는 주체들로서가 아니라,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기존의 주체로 들어선다는 것을 명백하게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다음 절에서 이 제안을 보다 심도 깊게 탐구할 것이다.
장치의 본성 및 ‘인간’을 위한 포스트휴먼적 역할
물리학자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휴머니즘에 관한 각각의 거부에 있어서 매우 상이한 이유들을 제시한다. 물리학자들이 관련된 한에서 인간은 자연의 작용을 설명한다고 내세우는 어떤 훌륭한 물리학 이론에서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다. 사실상 그것은 보어의 양자역학적 해석에 반하는 불평을 위한 기초를 구성하는 가장 통상적인 양자물리학의 기초 안에 있는 바, 개념적 틀들과 측정 도구들 – 실험실 실행들의 인위적인 고안 - 의 형태 안에서 인간적 개입의 불유쾌한 중심성이다.[57] 다른 한편으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주체를 그것의 사회적 실천에의 참여 이전에 충분히 구성되는 것으로 정립하는 자유주의 인문주의의 편견에 반대한다. 여기서 결함은 바로 그러한 ‘주체’의 구성 안에 권력의 역할의 탈락에 놓인다.[58] 양 사례에서, 인간주의적 요소들을 공격하는 것은 어떻게 경계-제작적 실천들이 물질화되는지에 관한 검토를 포함하여, 그러한 실천들을 통해 경계들이 생산된다는 것을 해명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와 연결된다.
의미심장하게도, 세 가지 비판적 관점 각각은 그 각자의 인간중심주의 안에서 얽혀 있다. 푸코의 계보학적 분석이 인간 신체의 생산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가 당연히 여기는 비인간 신체의 구성은 배제하는 것에 반해, 보어는 비인간 현상들의 생산을 예의주시하면서도, 인간 관찰자의 사전 실존을 당연시한다. 역설적으로 후자의 가설은 인간 관찰자를 물리적 우주 전부로부터 비워내는 보어의 비판의 많은 부분에서 난점은 아니다. 그는 여기서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으로서 몇몇 외부적인 자리에 자리잡으며, 따라서 역설적으로 물리 체계 가운데 어떤 특유한 입장을 취하는 인간을 따른다.[59] 이 공식들 각각은 인간-비인간, 자연-문화 그리고 사회적인 것-과학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을 가정한다. 이 각각은 그들의 상호 구성 안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 우주 안의 존재자들로서가 아니라 - 우주의 통합적 부분으로 이해하는데 실패한다.
우리가 보았던 바와 같이, 장치들은 기입 기구(inscription device)즉, 행위가 일어나기 전에 놓여 있는 과학 도구들 또는 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 실험실 행위자들 사이의 저항과 조절의 변증법을 매개하는 기계들이 아니다. 장치들은 그것들을 실험실 공간이나 실험적 실천들에 제한하는 고유한 외부 경계들을 가지지 않는다.[60] 사실상, 어떤 주어진 장치는 ‘과학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어떤 실천들에 특수하게 붙박혀 있을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정치적인 이론들과 사회적 실천에 의해 제안되는 의미에서 (자연적인 것과 대조적으로) 사회적인 것의 기술(technologies)로서 순수하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예컨대 매우 상이한 의미에서 알튀세르와 푸코를 따르는 것). 이 학자들이 그들의 ‘사회적’ 실천들에 관한 사유에서 ‘과학적’ 실천들을 배제하는 것을 따르거나, 또는 유사하게 ‘과학적’ 실천들에 대해 쓰는 많은 학자들이 관련된 사회적 차원들을 배제하는 것을 따르는 것(관건적인 사회적 변수들과 인종, 젠더 그리고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사항들과 같은 권력 관계들을 무시하는 자칭 사회 구성주의자들과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가들을 포함하여)은 가치 없는 일이다.[61] 장치들은 몇몇 특정 결과들을 결정론적으로 부과하는 자연 세계나 사회 구조들에 관한 중립적인 탐사도구가 아니다. 중요하게도, 행위 실재론적 사유에서, 장치에 관한 생각은 사회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화 간의 고유한 분할들을 전제하지 않는다. 장치들은 이러한 분할들이 구성되는 실천들을 통과해 존재한다. 이 공식은 이러한 중요한 구분들이 생산되는 물질-담론적 실천들에 관한 어떤 계보학적 해명을 수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행위실재론적 해명에서, 장치들은 특수한 물질적 배치들 또는 오히려, 신체들이 세계의 역동적인 (재)배치들을 통해 간-행적으로 물질화되는 그것이다. 즉 장치들은 이해가능성(intelligibility)과 물질성이 물질화의 실천들을 통과해 (물질이 아닌 것의 영역을 배제함과 아울러) 구성되는 것이다. 또는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장치들은 그것들의 미분적 생성에서 물질적 현상들을 생산하는 물질적 (재)배체들 또는 담론적 실천들이다. 현상들은 신체적 생산에 관한 다양한 장치들을 포함하는 특정 인과적 간-행들을 통과해 생산된다. 간-행은 생성과정-안-물질이 인과적(하지만 비결정론적) 설립을 통과해서 더 진전된 물질화 안에서 침전되고 주름 접히는 것이다.[62] 즉 장치들은, 행위소인 간-행의 지속적인 역동성 안에 가능성들과 불가능성들의 물질-담론적 장을 재배치하면서, 물질-담론적 실천, 즉 물질이 반복적으로 그리고 미분적으로 절합되어 나아가는 인과적 간-행들이다. 세계의 재배치는 끝없이 이어진다. 물질의 역동성은 소진되지 않으며, 활력에 넘치며, 풍요롭다.
행위 실재론의 물질성 재개념화에서, 물질은 행위적이고 간-행적이다. 물질은 멈춘 채 놓여 있지 않는 역동적인 간-행의 생성이다. 즉 그것은 결과가 원인을 꼬리를 물고 뒤따르는, 그리고 전체가 국지적인 것의 직접적인 외연 확장인 어떤 선형적 동력학의 개념을 초과하는 지속적인 재배치이다. 물질의 역동성은, 단순히 새로운 사물들을 세계 안으로 들여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세계의 지속적인 재배치 안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생성적이다. 물체들은 세계 안에 단순히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특정 환경 안에 단순히 세워져 있거나,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경’과 ‘신체들’은 간-행적으로 공-구성된다. 신체들(‘인간’, ‘환경’ 또는 그 밖의 것들)은 통합적인 존재하는 바의 ‘부분들’ 또는 역동적 재배치과정이다.[63]
중요하게도, 장치들은 그 자체로 현상들이다. 과학적 사례를 특별히 취하기 위해, 장치들은 수행되지 않으며, 어떤 실험가가 확정할 때, 특정한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 선반 위에 놓여 기다리는 변경불가능한 객체들도 아니다. 장치들은 항구적으로 재조정들, 재절합들, 그리고 다른 재작업들에 열린 특정 실천들을 통해 구성된다. 이것은 창의성의 부분이자 과학적 실행의 난점이기도 하다. 즉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해 특정 방식으로 작업하기 위한 도구를 취하는 것이 그것이다(이것은 언제나 상이한 통찰들이 얻어지는 실험 동안 바뀌지 않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더 나아가 어떤 특정 장치는 언제나 다른 장치들과 간-행의 과정 안에 있으며, (상대적으로) 안정화된 현상들(이것들은 오로지 상이하게 물질화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기 위해 실험실들, 문화들 또는 지리정치학적 공간들을 가로질러 운반될 것이다)의 주름운동 과정 안에 있다. 이 현상들은 특정 실천들의 이어지는 반복들로 들어가 문제가 되는 특정 장치 안에 중요한 전환을 구성하고, 따라서 새로운 현상들 등등의 생산에 초래되는 간행의 본성 안에 전환을 초래한다. 경계들은 가만히 멈추어 있지 않는 것이다.
행위적 간-행들은 ‘인간’을 포함하거나 포함하지 않는 특수한 인과적인 물질적 설립들(enactments)이다. 여기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포함’이 초래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나는 인간 주체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몇몇 보다 유용한 접근들에 의해 드러나는 몇몇 난점들을 간명하게 살펴보겠다. 그리고서 나는 인간의 포스트휴먼적 역할의 본성을 설명할 것이다. 장치들이 현상들에 있어서 생산적이라는 주장은 인간주의적이고 반인간주의적인 해명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몇몇 불편함의 원천일 것이다. 인간주의적 해명은 이러한 생산성을 인간 행위들, 선택, 지향, 수행, 생각, 가치, 개념, 믿음, 전제들, 목표 그리고 선호의 직접적인 결과로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나는 결정론적으로 제한되고 속성화된 인간 주체들은 그들의 자연문화적 실천들에의 ‘포함’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증할 것이다. 또한 문제적인 것은 인간 신체와 주체성이 인간-기반적 담론 실천들의 결과라는 잘못된 믿음을 고무하거나 충분히 각하하지 않는 반인간주의적 관점이다. 그들의 인간주의적인 적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생각들은 자연-문화, 인간-빈인간, 생명-비생명이라는 이항성과 또 다른 계몽주의적 가치들을 새겨 놓으며, 반인간주의가 탈안정화하고자 사안들을 재기입한다.
행위 실재론의 관점에서, 인간 주체들은 장치들의 바깥 관찰자도 아니고, 장치의 작동에 개입하는 독립적인 주체들도 아니며 그것들을 생산하는 사회적 기술들의 생산물도 아니다. 또한 논점은 단순히 인간과 비인간 둘 모두가 신체적 생산의 장치들 속으로 체현된다는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개념들, 실험실 조작, 관찰적인 개입들 그리고 여타 인간적 실천들이 작용에서 역할을 하는 한, 그것은 세계의 보다 큰 물질적 배치의 부분으로 있다는 것이다. 즉 생산된 현상들은 인간 의지나 지향성의 결과 또는 문화, 언어 또는 권력의 작동 효과가 아니다. 인간들은 단순히 특정한 인식 프로젝트를 만족시키기 위해 상이한 장치들을 모으지 않으며, 그들 자신이 지속적인 세계 재배치의 부분이다. 어떤 장치가 취하는 특정한 배치는 ‘우리의’ 선택에 속하는 임의적인 구성이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적 실천들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그러한 역할의 본성에 대해 분명해져야 한다.[64] 장치들은 인간들과 비인간들의 회집체(assemblages)가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과 비인간의 특수한 간-행을 포함하는 제약없는 실천이다. 거기서 인간과 비인간의 미분적 구성들은 장치들의 재배치에서 그것들의 주름접힙과 재구성을 포함하여 그 자체로 간-행의 역동성 안에 함축된 특정 현상들을 가리킨다.[65] 인간 신체들은 다른 모든 신체들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경계들과 속성들을 가진 개별실체가 아니고, 간-행의 제한 없는 역동성을 통과하여 특수한 경계들과 속성들을 획득한 현상들이다. 인간은 그 역동적 구조화에서 세계-신체 공간의 부분이다.
이것은 인간이 특수한 실천들의 산출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만약 관찰의 행위소들로부터 객체를 제한하는 하나의 절단을 시행하는 어떤 특정 장치를 선택하는 주체에 관한 자유주의적인 인문주의 개념이 부족한 것으로 판명된다면, 인간 주체가 단순히 삶의 게임에서 볼모, 즉 탐구되고 있는 현상들을 생산하는 동일한 실천들의 희생자에 불과하다는 의미인가? 우리는 원점으로, 즉 초연한 관찰자, 계획적으로 또는 몇몇 큰 계획에 맞추어 욕구에 따라 개입하는 겸손한 증인이라는 계몽주의적 생각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리고 단순히 뒤로 돌아서거나 시간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끝내거나 모든 것이 말해지는 것은 언제인가? 이러한 질문들 각각에 대한 대답은 확실히 부정적이다. 대조적으로 응답가능성[책임성]이 그 행위들의 결과를 거두어 들이도록 결정되어진 계획적인 주체로 시작하고 끝맺는다는 생각을 고무하는 것은 행위 실재론적 개념이 아니라, 주체에 관한 자유주의적 인문주의 개념이다. 행위소는 인간들과 심지어 비인간들이 다양한 수준에서 가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리고 행위소는 켜지거나 꺼지는 어떤 이원적 명제요소도 아니다. 게다가 응답가능성[책임성]이란 예외적인 옮음, 의무 또는 인간적 영역도 아니다(이 장 안의 다음 절과 8장을 보라). 반복하건데, 인간 주체들은 작동하기 위한 어떤 역할, 사실상 어떤 구성적 역할을 정말로 가지지만, 우리는 그러한 역할의 본성에 대해 명확해져야 한다.
행위소 개념을 이해하는 행위 실재론자는 전통적 개념에 관한 주목할만한 재작업을 이끈다. 나는 이것을 이후에 상세히 논할 것이고, 여기서 표명된 응답가능성과 관련한 문제들에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처음 표명하길 원한 것과 연관된 어떤 질문이 생겨난다. 즉 만약 인간이 시작부터 가정될 수 없다면, 그리고 더 이상 이론의 기초로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때 객체에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가? 즉 주체의 인간주의적 개념에 관한 우리의 기각에서 우리가 과학의 객관성을 구출하기 위한 보어의 노고의 모든 것을, 그가 객관성의 상호주체적 묘사의 중심에 인간을 놓기 때문에, 무화하지 않았나?
객관성과 행위적 분리가능성
보어는 – 최우선적인 도전은 아니라 해도 - 새로운 양자 이론의 주요 도전 중 하나를 구성하는 객관성에 관한 질문을 알고 있었다. 보어에게 논점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즉 만약 양자 물리학이 우리에게 측정은 필연적으로 (장치들 안에 그것들이 체현되는 방식으로 물리적 고찰에 진입하는) 주체적 요소들을 초래한다면, 그때 과학적 객관성의 바로 그 가능성의 성패가 결정된다. 뒤따르는 내용에서, 나는 보어가 어떻게 이 도전을 만족시키는지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를 전개하고, 보어의 현상 개념에 관한 나의 존재론적 설명이 객관성에 관한 어떤 더강한 존재론적 이해를 위한 기초라고 논증한다. 이것은 사실상 보어의 인식론적인 인간-기반 설명과 대조적인 포스트휴먼적 개념이다.
보어와 아인슈타인 간의 지속적이고 열정적인 토론은,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그리고 로젠 (EPR)이 양자이론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점증하는 신뢰를 흔들어 놓기 위해 한 논문을 간행한 1935년에 절정에 이르렀다.[66] EPR은 실재의 본성과 양자 역학이 그것에 대해 말해주는 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물리학자들과 물리 철학자들은 EPR의 논문이, 양자역학이 서로 소통하기 위해 공간적으로 분리된 상태(예컨대 정보 교환)를 허용하는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그것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위반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아인슈타인의 불만을 표현한다는 것에 주목했다. 과학철학자인 돈 하워드(Don Howard)는 아인슈타인의 우선적인 관심사가 어떤 보다 심오하고, 보다 근본적인 주제를 실제적으로 건드리는 것이라고 논한다. 그것은 공간 분리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규약의 위반이다. 아인슈타인에게 공간 분리성은 다름 아닌 객관성[객체성]의 조건이다. 하워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전의 수 많은 실재론자들처럼,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이 실재 ‘외부’ 세계로 기술하고자 겨냥하는 실재 세계에 대해 말하는데, 실재적인 것의 독립성 – 그것이 관찰자로서의 우리 자신들에 어떤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 – 이 이 ‘외부성’에 기반한다는 식으로 그렇게 한다. 대개의 다른 실재론자들에게, ‘외부성’(externality)에 관한 이러한 언급은 기껏해야 암시적인 은유일 뿐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에게 그것은 은유가 아니다. ‘외부성’은 공간 분리와의 어떤 관련성이며, 분리가능성 원리, “공간적으로 먼 사물들의 상호적으로 독립적인 실존”의 원리이며, 심지어 무한소적인 공간 간격에 의해 나누어진 어떤 두 체계가 언제나 분리 상태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일단 우리가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이 그 자체 직전에 상호작용한 물리 체계들일 뿐임을 깨달으면, 우리는 그것들의 독립성이 모든 다른 물리체계들의 독립성과 아울러 분리가능성 원리에 기초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Howard 1985, 192-93)
다시 말해, 절대적 외부성은 아인슈타인에게 객관성의 조건이다. 공간 분리는 존재론적 분리가능성을 보증한다. 그리고 심지어 무한소적 공간 간격에 의해 공간적으로 분리된 어떠한 두 체계는 언제나 각각 한정적인 상태를 가진다.[67]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적인 사유 방식에서,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공간적 분할은 그것들의 존재론적 분할가능성을 보장하고 결과적으로 객관성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을 확고히 한다. 그러나 만약 객관성의 조건 – 공간적으로 분리된 체계들의 구별적 상태들의 실존에 따른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외부성의 필수적 관계 – 이 의문스러운 것이라면, 그때 객관성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68]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의견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보어는 동일한 형이상학적 믿음을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어에게, 이른바 공간적으로 분리된 체계들 간의 동시 소통은 이러한 소위 분리된 상태들이 실재로 전혀 분리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의 현상의 ‘부분들’이라는 사실에 의해 설명된다.[69] 게다가 보어에게 객관성은 공간 분리성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우선 보어의 설명에서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의 필수적인 조건 바깥에서 그것의 기술들(descriptions)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 게다가 개체화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험 장비에 의해 수립된 특정한 절단들의 결과이다. 보어는 객관성을 위한 어떤 상이한 일련의 기준을 제안한다. 보어의 해명에서, 객관성은 재생가능한 실험들의 결과들에서의 분명한 소통의 문제이다.[70]
즉 보어의 객관성이란 우리가 연구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존재의 문제, 즉 고전 물리학의 개체론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조건이 아니라 재생가능한 실험 결과들의 분명한 소통에 관한 물음인 것이다. 재생산성과 분명한 소통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은 장치에 의해 수행되는 보어적인 절단이다.[71] 중요한 점은 실험이 수행되고, “신체들에 남겨진 (...) 영구적인 흔적들”의 결정적인 가치들이 인간 관찰자에 의해 독해될 때, 현상에 관한 명백한 기록은, 장치가 산출하는 현상과 고유한 의미론적 미결정성 안에서 객체와 관찰의 행위주체들 사이의 고유한 미결정성의 해법 둘 모두를 제공한다는 사실에 의해 가능해진다. 이에 따라 객관적으로 결과를 기술하기에 적합할 수 있는 잘-정의된 개념들이 존재하게 된다. 즉 현상과 그것들을 기술하는데 사용되는 체현된 개념들 둘 모두는 (본래적인 애매성을 해결하는) 동일한 장치에 의해 조건화된다.[72]
보어의 틀에 관한 존재론적 차원을 묘사하는 것은, 단순한 상호주관성이라기보다 더 강력한 개념을 제시하면서, 객관성 개념의 확장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것은 인간 관찰자에 기대지 않는다는 이점 또한 가져다 주었다. 중요하게도 내가 제안하는 대안은 보어의 설명에서 문제가 되는 인간주의적 요소들을 제거할 가능성과 객관성을 희생하지 않고 보어의 철학-물리학에 관한 몇몇 가장 논쟁적인 요소를 피할 가능성을 준다.[73] 나의 행위 실재론적 탐구에서 (아인슈타인이 선호하는) 공간 분리성을 객관성의 존재론적 조건으로 대체하는 것은 행위적 분리가능성, 즉 현상 내부에 행위적으로 수립되는 존재론적 분리가능성이다.[74] 객관성은 형이상학적 개체론의 몰락으로 희생당하지 않는다. (개체화되는 분리 상태에 관한 형이상학에 기초하는) 관찰자와 관찰대상 간의 절대적 외부성에 관한 그 어떤 고전적인 존재론적 조건도 요구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점은 장치가 현상 내부에 어떤 행위적 절단 – 존재론적 미결정성의 해결 –을 수립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위적 분리가능성 – 현상-내-외부성의 행위적으로 수립된 물질적 조건 – 은 객관적 가능성을 위한 조건을 부여한다. 이 행위적 절단은 또한 측정되는 객체(원인)에 의해 측정하는 도구(결과)의 새김 안에 어떤 국지적 인과 구조를 가동한다. 여기서 ‘국지적’이란 현상 내부를 의미한다. 만약 장치가 변화한다면, 행위적 절단 안에서, 따라서 관찰의 행위소들과 절단으로부터 가동되는 인과 구조(그러므로 ‘체계의 미래 작용’를 위한 가능성들)로부터의 객체의 묘사 안에서 그와 조응하는 변화가 있다. 상이한 행위적 절단들은 상이한 현상들을 생산한다. 그래서 주요하게도 장치는, 지성과 물질에 관한 데카르트적 분리에 관한 중대한 조정을 겨냥하면서, 인과적으로 중요하고(어떤 인과 구조를 가동하기 위한 조건들을 제공하며), 마찬가지로 물질적 현상들의 객관적 기술의 가능성을 위한 것인 바, 그 조건 그리고 그 후 잇따르는 모든 것이다.
이렇게 제기된 객관성을 위한 조건들의 이해에 있어서 함축된 바는 실질적이며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나는 이 함축들을 뒤따르는 행위의 행위 실재론적 이해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논할 것이다.
생산의 본성과 자연의 생산: 행위소와 인과성
이러한 해명에 따르는 인과성의 본성은 무엇인가? 행위소를 위해, 즉 세계 생성 안과 부분으로서 간-행을 위해 존재하는 가능성들은 무엇인가? 응답가능성과 사유가능성의 주제들이 진입해 들어가는 지점은 어디인가?
인과성은 구별되는 개별체들 간의 관계로서 가장 자주 형상화된다. 예컨대 구별되는 개별체들 간의 상호작용 안에서 다른 개별체를 변형하는(예를 들어 흔적을 위에 남기는) 것은 다른 것들 위에 남겨지는 효과의 원인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행위 실재론에 따르면, 각각 결정된 개별체들은 그것들의 간-행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사유에서 인과성에 대해 사유해야 하는가?
행위 실재론적 사유에 있어서, 인과 관계는 고립된 객체들 간의 특수 관계들로서 사유될 수 없다. 오히려 인과관계는 필연적으로 현상 내부에 결정론적으로 제한되고 속성화된 개별체들 사이의 행위적 절단을 가동하는 물질적 장치의 특수화를 수반한다. 더 큰 장치(예컨대 장애물들, 슬릿들, 입자원천들 그리고 스크린)는 인과적으로 두드러진다. 그것은 선재하는 개별체가 개별적으로 결정된 개별체로부터 어떤 흔적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흔적 부여나 특정 물질화의 ‘결과’가 현상 내부에서 그것의 ‘원인’(객체)으로부터 행위적으로 분리가능한 관찰 행위소[행위자]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관찰 행위소들에 남겨진 흔적들(결과)은 객체(원인)의 특수한 특성들에 관한 어떤 측정을 구성한다고 알려진다. 과학적 맥락에서, 이 과정은 측정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측정의 관념은 하나의 인과적 간-행에 지나지 않는다)[75] 그것이 하나의 측정으로서 사유에 속하든, 또는 그것의 지속적인 차이화의 이해가능성(intelligibility)과 물질화에서 다른 부분에 대해 그 자체로 이해가능한 보편적인 제작의 부분으로서든 간에, 선호의 문제이다.[76] 어느 쪽이든, 인과적 간-행에 대해 중요한 것은 “흔적들은 신체 위에 남겨진다”는 것이다. 즉 신체들은 특수한 절단들의 결과와 가동되는 재배치과정으로서 세계의 특정 패턴들로서 미분적으로 물질화한다. 원인과 결과는 간-행들을 통과해 등장한다. 행위적 간-행들은 인과적인 수립이다.
이러한 인과 구조는 중요한 측면에서 절대적 외부성과 절대적 내부성에 관한, 그리고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관한 일반적 선택과 다르다.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구성주의의 몇몇 형태들은 절대적 외부성의 기하학에 기대고 있다. 예컨대 구성주의의 기존 모델에서, 문화는 수동적인자연에 작용하는 외재적인 힘으로 형상화된다. 이 모델은 모호한데, 그것은 자연이 문화에 의한 그것의 흔적남기기(marking) 이전에 어떤 전담론적 형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다. 만약 그와 같이 어떤 앞서는 개별체가 존재한다면, 그러면 그것의 바로 그 실존이 구성주의의 고유한 한계를 표시한다(이런 경우, 수사학은 문화의 힘이 자연을 ‘형성하’거나 그것에 ‘각인’되지만, 그것을 물질적으로 ‘생산’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다 정교하게 반영하기 위해 쓸모있게 유연해질 것이다). 다른 한편, 만약 선재하는 그 어떤 자연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때 그와 같은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문화가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물질적으로 이른바 존재론적인 구별, 즉 자연을 생산할 수 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생산의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다른 유용한 대안은 물론 매력적이지 않다. 즉 절대적 내부성의 기하학은 그것의 원인으로 결과의 환원과 마찬가지다. 또는 이 경우에는 그것은 문화로 자연의 환원 또는 언어로 물질의 환원인데, 이는 관념론의 이런저런 형식과 같은 것이다.
행위적 분리가능성은 이러한 불만족스러운 선택지들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드러난다.[77] 이것은 절대적 외부성 또는 절대적 내부성의 기하학들을 거부하며, 역동적이고 영원히 변화하는 위상학으로 보다 적합하게 사유되는 훨씬 더 큰 공간을 열어 놓는다.[78] 보다 특수하게, 행위적 분리가능성은 현상들 내부에서 외부성의 문제이다. 현상들이 물질-담론적이기 때문에, 그 어떤 우선성도 물질성 또는 담론성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라. ‘인과적 장치’와 ‘영향받는 신체’ 사이에 그 어떤 절대적 외부성 또는 둘 사이의 관념적인 충돌도 없으며, 오히려 지속적인 위상학적 동력학에 의해 시공간 물질의 다양체가 그 자체 안으로 주름접힌다. 이 위상학적 동력학/역동적 위상학은 내가 설명할 바, 물질의 역동성의 결과이다. 이 점에서 현상들 자체인 신체적 생산에 속한 장치들이 (또한) 그들이 생산하는 현상들의 부분이라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현상들은 영원히 다시 주름접히고 재구성된다.
결정적으로 물질은 그것의 반복적인 물질화 안에서 행위적 역할을 한다. 이것은 행위소의 공간이 많은 다른 비판 사회학 이론들 안에서 내세워지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어떤 중요한 근거이지만, 유일한 근거는 아니다. 또 다른 결정적 요인은 행위적 실재론의 인과성 개념이 결정론과 자유의지 간의 전통적 논쟁들 편을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 공간성 그리고 가능성에 관한 사유의 전반적으로 상이한 방식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간-행들은 언제나 특정한 배제들을 초래하고 배제는 열린 미래의 조건을 제공하면서 결정론의 가능성을 제외한다.[79] 그러나 그 무엇도 어떤 주어진 순간에 전혀 가능하지 않다. 사실상 간-행은 반복적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재배치한다. 가능성들은 가만히 멈춰 있지 않는다. 이를 표시하는 한 방법은 간-행이 제한은 하지만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논의는 ‘제한’이나 가능성의 동력학의 본성에 합당하지 않다. 가능성들은 그것의 현실화 안에 협소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들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다른 것들이 비로소 배제될 때 열린다. 다시 말해 가능성들은 재배치되고 재배치하고 있는 중이다.[80] 간-행의 활력에는 생명력이 있는데, 그것은 생기론의 새로운 형식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살아있음의 새로운 의미라는 측면에서 그러하다.[81] 세계의 활기, 즉 그것의 넘치는 창조성은 결코 억제되거나 연기될 수 없다. 행위소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소진되지’ 않는다. 간-행 개념은 실재적인 것과 가능한 것 양자의 지속되는 재배치 안에서 전통적인 인과성과 행위소 개념들을 재구성한다.
행위 실재론의 해명에서, 행위소는 그것의 전통적인 인간주의 궤도로부터 풀려난다. 행위소는 인간적인 지향성이나 주체성과 같이 가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재의미화도, 어떤 반인간주의의 사회 기하학 내부에 다른 특수한 종류의 움직임들을 초래하는 것도 아니다. 행위소의 공간은 예컨대 버틀러의 수행적 사유에서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더 클뿐만 아니라, 아마도 보다 놀랍게도, 자유주의 휴머니즘이 제안하는 것보다 더 클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물질은 그것의 반복적 물질화 안에서 어떤 행위적 요인이다. 더 나아가 미래는 모든 방향에서 근원적으로 개방되며, 이러한 미래성의 개방이라는 의미는 문화적 요구들의 충돌이나 불일치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간-행의 본성 안에 본질적이다. 심지어 장치들이 일차적으로 그것을 강화할 때조차, 행위소는 배제되지 않는다. 게다가 행위소의 공간은 인간 행위를 위한 가능성들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행위소가 인간 뿐 아니라 비인간에도 당연시되어야 한다는 경우도 아니며, 그 행위소가 비인간과 인간 형식에 분배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인간, 비인간, 사이보그 그리고 그와 같은 다른 형식들의 반복적인 재배치를 위한 가능성들이다. ‘인간’(‘비인간’) 범주를 고정시키는 것(또는 적어도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전진적으로 가능성들의 전반적인 영역을 배제하며, 행위소의 중요한 작동 차원들을 누락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행위소는 간-행의 문제이며, 하나의 수립(enactment)이지 누군가 또는 어떤 것이 가지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나 객체의 어떤 속성으로 명명될 수 없다(그것들이 그 자체로 선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어쨌든지 간에 어떤 속성이 아니다. 행위소는 그것의 간-행 안에서 ‘함’(doing) 또는 ‘있음’(being)이다. 그것은 간-행의 역동성을 통과하는 특정 실천에 있어서 반복적 변화들의 수립 – 시공간의 물질적 관계들에 있어서 위상학적 다양체들의 반복적인 재배치들 - 이다. 행위소는 그러한 실천들에 의해 인과 구조의 수립 안에 흔적이 남겨지는 경계 절합들과 배제들을 포함하여, 재배치 과정 중인 신체 생산적인 물질-담론적 장치들에 수반되는 변화의 변화 가능성들에 대한 것이다. (간-)행의 특정 가능성은 모든 순간에 존재하며, 이러한 변화하는 가능성들은 세계의 생성에서 간-행에 대한 책임성 있는 어떤 윤리적 의무를 이끌어 내고, 무엇이 물질화되고 무엇이 물질화로부터 배제되는 것인지에 대해 논쟁하고 재작업하도록 한다.
상이한 행위적 절단은 상이한 현상들 – 신체 위의 상이한 흔적들 –을 물질화하므로, 우리의 간-행은 단순히 우리가 아는 것, 따라서 앎의 윤리를 요구하는 것을 초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간-행은 세계에 관한 미분적 물질화에 기여한다. 객관성이란 신체들 위의 흔적들 즉 미분적 물질화에서 특수한 물질화들에 대한 사유가능성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을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또한 ‘우리’가 다른 것들에 의해 ‘선택되기’ 떄문에 응답가능성[책임성]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라), 우리가 우주의 물질적 생성의 행위적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수립하도록 하는 절단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 절단들은 행위적으로 의지적인 개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한 ‘부분’인 보다 큰 물질적 배열에 의해 수립된다. 우리가 참여하는 절단들은 물질을 수립한다. 사실상 윤리학은 마치 타자가 자기성(the self)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타자에 대해 책임지는 것에 관한 것일 수 없다. 윤리학은 기하학적 계산이 아니다. ‘타자’는 결코 ‘우리’로부터 그토록 멀리 있지 않다. ‘그들’과 ‘우리’는 ‘우리’가 수립하도록 하는 바로 그 절단을 통과해 공-구성되며 얽혀든다. 절단은 함께 그리고 떨어져서 ‘사물/사태들’을 절단한다. 절단은 바깥으로부터 수립되지 않으며, 결코 단번에 수립되지도 않는다.
재(공)배치하는 공간, 시간 그리고 물질
동력학은 변화에 관한 것이다. 체계의 동력학을 명확히 하거나 연구한다는 것은 변화의 본성과 가능성들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는 변화를 초래하는 인과관계의 본성, 즉 원인들의 본성, 변화할 수 있는 것과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가능성들, 가능한 변화들의 본성과 범역 그리고 변화를 생산하는 조건들을 명시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자연 과학 내부에서 일반적으로 개념화되는 바, 동력학의 연구는 특정한 변수의 값들이 외부의 힘의 작용의 결과 시간을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시간은 어떤 외부 매개변수와 더불어 어디서 가늠될 것인지와 관련된다. 행위 실재론은 단순히 어떤 다른 동력학을 드러내는 것(일련의 법칙들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동력학에 관한 완전히 상이한 이해를 도입한다. 그것은 단순히 인과관계들의 형식이 변화했다는 것이 아니라, 행위소, 공간, 시간 그리고 물질 뿐 아니라 인과성 그 자체의 개념이 모조리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사실상 변화이 바로 그 본성과 변화를 위한 가능성들은 세계의 간-행적 역동성의 부분으로서 지속적인 경향 안에서 변화한다.
간-행은 비임의적, 비결정론적 인과 수립과정으로서, 이를 통해 생성-과정-중-물질이 반복적으로 그 계속적인 미분적 물질화 안으로 접혀들어 간다. 이와 같은 동력학은 소위 외부 시간 매개변수에 의해 표시되지도 않으며, 공간이라는 저장고 안에서 발생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복적 간-행은 시간성과 공간성이 그것을 통해 현상들과 물질-담론적 경계들, 그것들의 구성적 배제들의 (재)흔적남기기 안에서 반복적으로 생산되고 재배치되는 동력학이다. 배제는 결정성과 비결정성의 역동적 상호작용(간-작용intra-play)의 구성적 요소들이다. 미결정성은 결코 단번에 해결되지 않는다. 배제는 행위소의 열린 공간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변화하는 가능성들의 가능성에 관한 변화하는 조건들이다(the changing conditions of possibility of changing possibilities). 변화하는 지점은 존재했던 것의 지속적인 변천이나 존재할 것의 드러남 또는 시간 안에서 또는 그것을 통한 지속적인 변형과 같은 것이 아니라, 시공간물질되기의 반복적인 차이화(differentiatings[미분화])이다. 아래에서 나는 이러한 주장들에 관해 탐구한다.
시간은 평탄하게 공간화된 개별적 순간들의 어떤 연속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실체나 척도 즉, 변화와 정지가 그것에 대해 측정될 수 있는 참조지점 또는 존재론적 원초성으로서 모든 존재들에 획일적으로 활용가능한 배경으로 거기 있지 않다. 나의 행위 실재론적 설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시간과 공간이 (아인슈타인을 따라)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간-행 자체가 시간과 공간의 제작하기/표시하기에 대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간성과 시간성도 간-행의 동력학 측면에서 해명되어야 한다.[82]
이전 절에서 논의된 바, 물질화는 최종결과 또는 단순히 순수하게 담론적인 실천들의 매개 효과들의 연속체가 아니다. 물질성 자체는 물질화에서 하나의 요인이다. 물질되기의 동력학은 비선형적이다. 즉 그것은 신체적 생산에 속하는 장치들의 물질적 배치의 특수한 본성이며, 이는 그 자체로 물질되기의 과정 안에서 현상들인 바, 그것들이 하나의 부분인 특정 현상들의 물질화에 관한 문제고, 그것의 간-행적 생성 안에 있는 세계의 계속되는 물질화에 대한 문제이며, 이어지는 물질화 패턴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등등이다. 다시 말해 물질은 그 계속되는 물질화 안에서 그 자체 안으로 접혀들어간다. 물질화의 실행 안으로 특수한 물질되기의 현상들에 관한 반복적인 주름운동은 그것이 생산하는 물질화의 특수성에 있어서 중요하다.[83] 요컨대 물질의 반복적 주름운동은 물질이 된다. 물질은 실천들/행위소들의 침전적인 역사성이며 세계의 미분적 생성에서 어떤 행위적 힘이다. 생성은 시간 안에서의 펼침이 아니라, 물질되기의 주름운동의 소진되지 않는 역동성이다.
시간성은 세계의 반복적 간-행을 통해 구성된다. 물질의 역동성은 그것의 생산 안에 함축된다. 시간성은 물질되기의 미분적 패턴들의 침전적 역사성을 표시하는 현상들의 반복적 주름운동을 통해 생산된다.[84] 나무의 고리들[나이테]은 세계 내부에서 그리고 그 부분으로서 그것의 간-행에 관한 침전된 역사이기 때문에, 물질은 그 자신 내부에 그것을 통해 지속적인 생성의 부분으로 생산되는 실천들의 침전된 역사성을 자체 내부로 이동시킨다. 그것은 생성 안에 뿌리를 내리고 풍성해진다.[85] 시간은 역사를 가진다. 그러므로 시간을 평탄한 공간적 순간들 또는 몇몇 선재하는 공간 안의 물질적 운동을 표시하는 외적 규준으로 해석하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간-행은 시간 안에서 변하는 특정 속성들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시간의 바로 그 만듦/흔적남김 안에서 속성들이 물질이 된다는 의미에서 시간적이다.
이와 유사하게 공간은 고정된 기하학, 즉 저장고 안에 그 자체 거기 거주하는 물질을 위해 수립된 선재하는 점들의 집합이 아니다. 물질은 세계안에 정립되지 않는다. 물질은 그것의 물질성 안에서 세계(상)화(worlding)한다. 물질화하는 것은 물질이 되는 것에서 배제되는 것과 구분되지만, 단번에 그런 것은 아니다. 간-행은 내부와 외부 영역을 표시하면서, 이해불가능한 것으로부터 이해가능한 것, 불확실한것에서 확실한 것을 구별지으면서, 특정한 경계들을 수립한다.[86] 구성적 배제는 경계들의 행위적 배치를 위해 공간을 열어 놓는다. 경계들이 재배치될 때, ‘내부’와 ‘외부’는 재작동된다. 즉 현상들의 주름운동을 통해, 반복적 간-행의 동력학의 부분으로서, ‘내부’와 ‘외부’의 영역들은 그것들의 이전 지칭들을 상실한다. 수립되는 경계들은 추상적인 윤곽이 아니라 특정한 물질적 구획이며, 이는 공간 안에서가 아니라 공간의 구획이다. 공간성은 간-행적으로 생산된다. 그것은 경계들의 물질적 (재)배치의 계속되는 과정, 즉 공간적 관계들의 반복적인 (재)구조화이다. 따라서 공간성은 경계들의 측면에서 뿐 아니라 배제의 측면에서도 정의된다.
공간, 시간 그리고 물질은 서로 간에 반복적 간-행의 동력학을 통해 구성된다. 시공간 다양체는 물질-담론적 실천들이 물질이 되는 방식과 관련하여 반복적으로 (재)배치된다. 주름운동의 동력학은, 제한된 영역의 형태나 크기에서의 변화(기하학적 변환)라기 보다, 시공물질(spacetimematter) 다양체 자체(변화하는 위상체)의 연결성의 재배치를 포함한다. 다양체 자체나 다양체에 대한 변화 중 하나는 지속적이라고 가정되어서는 안 된다. 불연속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변화는 주어진 사전 상태나 기원으로부터 연속적 경향을 따르지도 않으며, 어떤 목적론적 궤도도 따르지 않는다. 여기에는 그 어떤 궤도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변화의 본성에 대한 물음은 우리를 나이테라는 은유 근방으로 데려간다. 이 은유는 생성의 침전 과정을 환기시키는 의미가 있다. 특히 논점은 시간의 만듦/흔적남김이 주름운동의 어떤 생생한 물질적 과정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은유는 또한 여러 중요한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어떤 경우 그것은 문자 그대로 재현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 그것과 함께 환기되는 것, 촉발되는 것을 제공한다). 우선 중요한 점은 시간이, 변화의 외적 힘들의 결과들을 드러내는 침전의 흔적을 남기면서, 그 자체로 그 흔적을 남기고 지나간다는 것이 아니다. 침전이란 미분적 물질화의 계속되는 과정이다. 과거는 물질화하며 마찬가지로 미래도 물질화하지만, 과거는 결코 뒤에 남겨지지 않으며, 한 번에 끝나지도 않으며, 미래는 현재 순간의 주름운동 안에 다가 올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와 미래는 물질의 반복적 생성 안에 주름접혀진 참여자이다(특히 7장에서 양자지우개 실험에 대한 논의를 보라).
또 다른 중요한 제한은 이러한 은유는 변화가 시간을 통해 또는 그 안에서의 지속적인 과정이라는 완고한 가정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양자 불연속성’(사실상 아주 미세한 것)의 형식에서 연속성의 붕괴는 고전 물리학의 많은 기초 개념의 붕괴의 원천이다. 사실 그것은 공간, 시간, 물질, 인과성 그리고 행위소에 관한 당연시되는 생각들과 마찬가지로 인식론, 존재론, 윤리학에서 받아들여져 왔던 기존의 생각들을 부숴버린다(이런 불연속성에 관한 이중의 또는 역설적인 명명은 당혹스러운 아포리아를 제안한다. - 불연속적 불연속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이러한 불연속성이 그 자신의 붕괴/파멸의 흔적을 담고 있다고 이해해야 하는가? 어떤 의미에서 이 골치아픈 명명은 매우 알맞은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연속성에 관한 우리의 가정을 위험하게 하는 불연속성은 연속적인 것의 반대일 수 없고, 또한 그것과 연속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양자 도약은 공간과 시간을 통과하는 (크거나 작은) 도약이 아니다.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도약’하는 전자는 여기-지금에서 저기-그때로 가는 어떤 연속적인 궤적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사실상 전자는 단 한 번도 두 궤도들 사이의 어떤 공간적 지점을 점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사건을 실재로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 도약을 여타 것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어디서 그리고 언제 그것들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 어떤 결정적인 대답도 없다는 것이다. 논점은 그것이 세계의 미분적 시공물질화(spacetimematter)를 구성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 확실성과 불확실성,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상간-작용(intra-play)라는 것이다. 또는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만약 존재의 본질적인 불확정적 본성이 안정성과 불안정성, 결정성과 비결정성,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턱에서 비틀댄다면, 그때 연속성과 불연속성 간의 역동적인 관계는 결정론 만큼이나 비인과성(acausality)에도 저항하는 세계의 제약 없는 생성에 결정적이다.
앞서 논의된 바와 같이, 행위소는 배제된 것들에 수반되는 불확정적인 것들에 의해 열려진 가능성의 공간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행위소는 일반적으로 고려되는 것보다 훨씬 넓은 가능성의 공간이다. 배제에 재작용은 세계의 생성에 관한 위상학에서 변화를 위한 가능성들을 수반한다. 그러나 모든 순간에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내부와 외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반복적으로 주름지어지고 재작업되지만, 결코 삭제되지 않는다(그리고 결코 고정되지도 않는다). 간-행들은 변화의 가능성들을 재배치한다. 사실 간-행은 시공물질을 재배치할 뿐 아니라 가능한 것들도 재배치한다. 윤리성(Ethicality)은 세계 직조(fabric)의 부분이다. 그리고 응답(respond[책임])을 요구하는 것과 응답가능한 것은 존재하는 것의 일부다. 물질이 되는 것에 관한 윤리성으로부터 배제되는 시-공간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응답가능성과 사유가능성은 그 자체로 모든 가능성과 더불어 드러난다. 각각의 계기는 세계 생성을 위한 여러 상이한 가능성들로, 그리고 여전히 가능한 것의 상이한 재배치들로 흘러넘친다.[87]
결론들
페미니듬 연구, 과학 연구, 문화 연구 그리고 비판사회학 이론에서 학자들은 세계의 ‘중량’(weightiness)이라는 말로 출현하는 난점들과 분투하는 여러 사람들이다. 한편으로 물질을 인식하고 표명하고자 표현된 욕망이 있고, 그것과 잘 통하는 정신들(예컨대 신체와 잘 통하는)은 문화, 정신 그리고 역사라는 친숙하고 편안한 영역들로부터 축출(또는 그것에 의해 삼켜져)된다. 이는 단순히 하위집단(subaltern)을 대신해 이타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유한성에 대해 해명하는 방식을 발견하길 희망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근거가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그것의 생산성 안에서 담론-지식에 관한 제한과 한계를 확증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것의 실체적 내용에도 불구하고, 결국 구원(salvation)에 대한 현대의 많은 시도들에 따르면,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들의 날뜀 안에서 비틀거리는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문제시되는 유한성의 바로 그 실존이다. 다시 한번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것은 초월성의 얼굴이거나 우리 자신의 이미지다. 그것은 마치 물질을 개념화하는 어떤 대안적 방법도 없는 것과 같이 보인다. 유일한 선택지는 경험론의 소박성이거나 오래된 허튼 옛날 이야기로 보인다.
나는 어떤 주어진 또는 단순한 인간 행위소의 효과로서의 물질성의 위치에 도전하는 수행성에 관한 포스트휴먼적 설명을 제안했다. 행위 실재론적 해명에서, 물질성은 물질화의 과정에서 어떤 능동적 요인이다. 자연은 문화의 표식을 기다리는 수동적 표면도 아니고, 문화적 수행들의 최종생산물도 아니다. 자연이 말이 없고 불변한다는 믿음, 그리고 의미화와 변화를 위한 모든 전망란 것이 문화 안에 놓여 있다는 믿음은 페미니스트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해 온 단순한 자연-문화 이원론을 재기입할 뿐이다. 이와 유사하게 인간-비인간 구별은 그것의 충만한 역사성 안에서 물질을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이론과 직결될 수 없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기존의 구별을 내세우는 것은,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계보학을 폐기하고, 페미니즘 이론의 기초들에 자연-문화 이원론을 굳히는 것이자 재유통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제대로 된 수행적 사유는 그것의 기초에 그와 같은 인간중심적 가치들을 구체화하라는 충고를 꺼린다.
내가 제안했던 수행적 사유의 결정적인 부분은 담론적 실천들과 물질적 현상들,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에 관한 사념을 재사유하는 것이다. 행위 실재론적 사유에서, 담론적 실천들은 인간-기초적인 활동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경계들, 속성들, 의미들이 미분적으로(differentially[차이나게]) 수립되는 세계의 특정한 물질적 (재)배치들이다. 그리고 물질은 어떤 고정된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물질은 그것의 간-행적 생성 안의 물체(substance)로서, 어떤 사물이 아니고 하나의 함(doing), 행위소의 응결(congealing)이다. 장치들은 그 생성 안에서 물질적 현상들을 생산하는(그리고 그 부분인) 물질적 (재)배치 또는 담론적 실천들이다. 담론적 실천들과 물질적 현상들은 서로 간에 외재성의 관계를 대리하지 않는다. 물질적인 것과 담론적인 것은 상호간에 간-행의 동력학 안에서 함축된다. 행위 실재론적 사유에서, 수행성은 반복적 인용성(iterative citationality, 버틀러)으로서가 아니라 반복적 간-행으로 이해된다. 간-행은 행위적이며, 신체적 생산장치 안에서 인식론적일 뿐 아니라 존재론적인 문제이자 윤리적 이유들이다. 즉 상이한 물질-담론적 실천들은 상이한 물질적 세계 배치들, 상이한 차이/회절 패턴들을 생산한다. 객체성과 행위소는 응답가능성과 사유가능성이라는 논점에 묶여 있다. 사유가능성은 물질되기로부터 물질이 되는 것과 배제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기술과학적 실천들에 대한 행위 실재론적 사유에서, 아는 자(knower)는 자연 세계에 대한 절대적 외재성의 관계에 서 있지 않는다 – 그 어떤 외부적인 관찰 지점도 존재하지 않는다.[88] 그러므로 객관성을 위한 가능성의 조건은 절대적 외재성이 아니라 행위적 분리가능성 – 현상 내부 외재성 – 이다.[89] 우리는 세계의 바깥 관찰자가 아니다. 우리는 단순히 세계 안의 특정 장소들에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계속되는 간-행 안에서 세계의 부분이다. 이것이 닐스 보어가 우리의 인식론이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그러한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서 도달하려고 했던 점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보어는 이러한 관점의 중요한 포스트휴먼적 함축을 그의 궁극적으로 인간주의적인 ‘우리’에대한 이해 안에서 간과했다. 비키 커비(Vicki Kirby)는 이 중대한 포스트휴면적 논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나는 인간 정체성의 국지성을 여기 지금, 폐쇄되고 최종적인 생산물로, 자연에 대한 어떤 인과적 힘으로 복잡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또는 심지어 (...) 자연 내부의 어떤 것으로 (...). 나는, 마치 자연이 하나의 저장고인 것 마냥, 자연 안에 존재하는 인간을 원하지 않는다. 정체성은 본래적으로 불안정하고, 차이지어지며, 흩어지고, 여전히 이상하게 엉겨붙어 있다. 만약 내가, 보통 규범적인 본질주의를 나타내면서 그것을 회피할 이유인 어떤 표현으로 ‘이것은 자연 자체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실제로 이 ‘자체’를 살려내고, 심지어 ‘사유하기’가 자연의 타자가 아니라고 제안하는 것이다.”[90]
장치가 취하는 특정한 배치는 우리 선택의 어떤 부수적인 구축물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인과적으로 결정론적인 권력구조의 결과도 아니다. 인간은 특정한 지식의 기획을 만족시키기 위해 단순히 상이한 장치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세계의 계속되는 재배치의 특수한 부분들이다. 실험실 조작, 관찰자적 개입, 개념들 그리고 다른 인간적 실천들이 제 역할을 하는 수준에서, 그것은 그 간-행적 생성 안에서 세계의 물질적 배치의 부분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그 역동적 구조화 안에서 세계-신체 공간의 부분이다.
여기에 앎의 실천이 인간적 실천들로서는 충분히 내세워질 수 없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이는 단순히 우리가 우리의 실천에서 비인간 요소를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앎이 스스로를 다른 부분에 대해 그 자체 이해가능하게 만드는 세계의 부분적 물질이기 때문이다. 앎의 실천과 존재는 고립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상호적으로 함축된다. 우리는 세계 바깥에 섬으로써 지식을 획득하지 않는다. 우리근 우리가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안다. 우리는 그것의 미분적 생성 안에서 세계의 부분이다. 존재론과 인식론의 분리는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 정신과 신체, 물질과 담론 간의 고유한 차이를 가정하는 형이상학의 반향이다. 존재-인식-론(Onto-epistem-ology) - 존재 안에서 앎의 실천에 관한 연구 – 은 아마도 우리가 특수한 간-행이 물질이 되는 방식에 관한 개념들을 배우길 요구하는 그와 같은 지식들에 대해 사유하는 보다 나은 방식이다. 또는 그 물질에 대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윤리-존재-인식-론(ethico-onto-epistem-ology) - 윤리학, 지식 그리고 존재의 상호 엮임에 관한 이해 - 과 같은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간-행은 물질화하기 때문이며, 세계가 존재와 세계로 이루어지기 전, 각각의 순간 앞에 멈춰서 세계가 생성될 것인 그 가능성이 다시 재구성되기 때문이며, 세계의 생성은 심오하게 윤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석]
[1] 이러한 불만은 1980년대의 저술들에서 표면화된다. Donna Haraway’s “Gender for a Marxist Dictionary: The Sexual Politics of a Word” (originally published 1987)와 “Situated Knowledges: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 and the Privilege of Partial Perspective” (originally published 1988)을 보라. 이 둘은 모두 Haraway 1991에 재수록되었다. 또한 Butler 1989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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