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서지: Karen Barad,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7, 95-131.
_ ‘< >’ 안의 숫자는 원문의 페이지 숫자임
_ '[ ]'의 숫자는 주석의 숫자임.
_ 주석은 일부만 번역되었음
번역: 박준영(노마씨, 수유너머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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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간-행들이 물질/문제 되다.
<97>
3장 닐스 보어의 철학-물리학: 양자 물리학 그리고 지식과 실재의 본성
재현주의와 뉴턴 물리학은 17세기에 뿌리 박고 있다. 실재의 동질적인 상을 앎을 형성하는 정신에 이전시키는 언어가 투명한 매개체라는 가정은 발견의 친절한 촉진자로 관찰을 취급하는 과학 이론에서 그 유사물을 발견한다. 즉 투명한 렌즈가 수동적으로 세계를 주시한다는 것이다. 단어들이 선재하는 실재의 기술이나 재현물을 제공하듯이, 관찰은 어떤 관찰-의존적인 실재의 기술이나 재현물을 제공한다. 20세기에 언어의 재현적이거나 모방적 위상, 그리고 관찰 과정의 비결정성(inconsequentiality)이 의문에 붙여져 왔다.
닐스 보어는 양자 물리학이 혁명적인 물리학일 뿐만 아니라 서구 인식론의 바로 그 기초를 뒤흔든다는 점을 탁월하게, 열정적으로 그리고 끈질기게 논했다. 사실상 보어의 철학-물리학(이 둘은 그에게 분리불가능하다)은 뉴턴 물리학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적 인식론 그리고 말(words), 아는 자, 사물의 재현적 삼중 구조에 대한 급진적인 도전을 노정한다.
빛과 물질의 본성에 대하여
다름 아니라 빛의 진정한 존재론적 본성이 관건적이었다. 몇몇 권위자들은 빛이 파동이라고 논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입자라는 점을 논증했다. 토마스 영(Thomas Young)의 이중-슬릿 실험은 빛의 본성과 관련된 수 세기 동안의 긴 논쟁에서 비범한 결정적인 국면이었다.[1] 뉴턴의 빛 ‘입자’(corpuscular)설은 19세기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권위자들의 권력 – 아이작 뉴턴 경조차 – 은 반대되는 실험적 증거 앞에서 무너졌으며, 영의 실험은 빛이 파동이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입자이론(the corpuscular or particle theory)에 결정타를 날렸다. 어둡고 밝은 띠들의 분명한 교체 현상 – 어떤 패턴은 쉽게 간섭의 원리를 사용하여 해명되며, 확실히 입자로 존재하는 빛이라는 생각을 도입하는 그 어떤 방식에 의해 납득될 수 없다 – 은 오래된 논쟁에서 마지막 재판관이었다(그림 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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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이것은 그래서 물리학 교과서들을 채우는 휘그적인 역사적 해명 안에서 설명된다. 비록 그것이 하나의 훌륭한 교육적 이야기라 할지라도,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다. 과학사가인 제드 부흐발트(Jed Buchwald)가 『빛의 파동론의 발생: 19세기 초의 광학 이론과 실험』(The Rise of the Wave Theory of Light: Optical Theory and Experiment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파동론에 의한 (입자) 이론의 대체는 [...] 몇몇 새로운 실험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그것의 혹독한 실패라기 보다 어떤 이론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에 속한 정전들의 변화라는 기능이 더 많았다”(1989, xiii). 부흐발트는 영의 간섭 법칙의 출현과 그의 생각을 수용하는 십 년 이상의 상간에, 실험 관행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고 논한다. 그것은 실험 결과와 이론 사이의 보다 일관성 있는 비교를 돕는 수학적 장치들, 조사 보고장치(표준의 결여에서 표준의 수용으로. 이것은 분석, 결과의 도표화 그리고 공식이 예상하는 것의 작은 범역보다 더 많은 것에 기반한 비교들을 요청한다) 그리고 기술적 장치(정확성을 고려하는 것의 결여에서 오류들을 제거하고 전선화하기 위한 표준으로)에서의 괄목할만한 변화(기하학적 수단에서 대수적 수단으로)를 포함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개념 장치들(광선에서 파동으로)에서 중요하고 커다란 변화가 있었으며, 이는 기하학적 모델로부터 물리광학 <99>이론의 보다 더 엄격한 요청으로의 이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실상 역사적 증거는 영이 스스로를 전략적으로 빛의 파동론에 관한 명백한 옹호로부터 거리를 두었다는 보여준다. 뉴턴이 『광학』의 출간 이후 금세기의 과학 공동체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던 그 권위에 민감했기 때문에, 영은 일부러 빛의 본성에 관한 불가지론자로 남았으며(빛의 ‘광선’이라는 개념으로 연구함으로써), 왕립협회 앞으로 1802년 7월 1일에 경험법칙으로서 그의 간섭의 법칙을 제출했다. 사실상 이중-슬릿 실험은 논문에서 언급된 것이 아니라, 그의 1807년 『강의들』에서 기술된 것이다. 사실상, 영이 실제로 그의 이름을 걸고 이른바 이중-슬릿 실험에 따른 간섭 패턴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는지 어떤지 조차 다소 논란거리다. 몇몇 과학사가들은 영이 이중-슬릿 실험을 결코 수행하지 않았거나, 너무 멀리 떨어진 슬릿들을 사용함으로써 두 슬릿 효과에 의해 생산되는 간섭 무늬들이라기 보다 단일 슬릿으로부터 나오는 회절 무늬에 관한 그의 관찰들에 집중했다고 주장한다(Kipnis 1991). 과학사가들은 영의 간섭에 관한 생각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즉각적인 부정적 반응의 원인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사례에서는 그의 생각이 1816년 이전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입자 대 파동에 관한 열띤 논쟁이 1830년대 중반 까지 이어졌다(Buchwald rg8g, xiii).
누가 봐도 분명한 빛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것이 하나의 특유하게 결정적인 실험의 결과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19세기 말에 상이한 요인들의 합류를 통해 물리학자들이 빛이 파동이라는 것에 대한 의심을 거두도록 설득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핵심적인 실험적 발견들(예컨대 회절과 간섭 효과)과 명백하고 근원적인 이론적 성취 둘 모두에 의해 잘 지지되었다. 1860년대에, 물리학자 제임스 클러크 멕스웰(James Clerk Maxwell)은 빛의 파동적 본성을 실제적으로 도출하는 것(단순히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이 가능하다는 것을 통해, 전기와 자기 현상에 관한 통일장 이론을 제안했다.[2] 마침내 빛의 본성에 관한 수 세기 동안의 논쟁 이후, 그 문제는 최종적으로 정립되는 것으로 보였다. 즉 빛은 파동이다.
이 견고하게 자리잡은 관점에 대한 신뢰는, 20세기 초에 원자 물리학의 막 생겨나는 연구 영역에서부터 반대되는 증거가 나타났다는 표면 아래에서 애초의 완만한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3] 그것은 단순히 빛의 본성에 관한 새로운 경험적 증거가 이미 수립된 관점에 모순되어 보였다는 것만이 아니라, 20세기 초반 동안 빛의 본성에 관한 어떤 일관된 이해가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이해가 점점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그것은 매우 기묘한 지경이었다. 새로운 실험들은 빛이 어떤 실험적 <100>조건에서는 입자같은 특성을 보이고, 다른 조건들에서는 파동같은 특성을 보였다. 만약 이것이 충분히 혼란스럽지 않다면, 물질이 이 동일한 ‘파동-입자’ 이중성을 즉각 잇달아 전개한 증거도 있다. 즉 물질이 (고전적으로 예상되는) 입자적 행위(보완적 환경에서) 뿐만 아니라 파동적 행위도 전개할 수 있었다. 파동-입자 이원성은 빛과 물질 양자의 특성으로 보였다. 전자기 이론의 거대하고 심오한 성공(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완벽하게 일치하여 증명된) 앞에서조차 이러한 결과들은 너무나 심원했다. 이 지하의 흔들림들은 빛과 물질의 작은 양을 활용하는 새로운 실험들 바깥으로 나와, 마침내 표면 위로 올라왔으며 뉴턴 물리학의 기초 자체를 흔들었다.[4]
이 발견들은 세계의 본성 자체가 아니라, 과학적 지식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다름 아닌 지진같은 이동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20세기 초반 이전, 모든 것은 파동과 입자의 구분되는 범주들 안에 깔끔하게 정렬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각각의 자연의 ‘조각’은 그것을 하나의 열 또는 다른 열에 놓아 두는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졌다. 결국 파동과 입자는 상호적으로 배제적인 특성을 가진 현상으로 구분된다. 입자는 각 시간적 계기에 주어진 위치를 점유하는 국지화된 객체다. 파동은 완전히 다른 본성을 지닌다. 그것들은 어떤 온전한 개별실체가 아니라, 어떤 매개 또는 장에서의 동요에 해당된다. [5]파동들은 공간 안에서 어떤 시간적 순간에 하나의 위치보다 많이 점유하면서 연장(extension)을 가진다. 마치 해변을 따라 펼쳐지면서 움직이는 파도처럼 말이다. 또한 게다가 파동은 입자와는 달리 서로 간에 중첩될 수 있으며(즉, 간섭한다), 어떤 시간적 순간에 같은 위치를 점한다. 빛과 물질의 이중적 본성은 첫 번째 질서 즉 객체는 국지화되거나 연장되거나 둘 중 하나이지, 둘이 한꺼번에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의 곤경을 드러냈다.[6]
근본적인 물리학에 관한 더 깊은 이해를 획득하려는 노고에서, 물리학자들은 가끔 사유 실험들로 돌아간다. 사유 실험은 교육적인 장치이다. 그것은 핵심적인 개념적 주제들을 분리하여 취급하기 위한 도구들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고 실험이 현실적인 실험실 실험으로 구현되리라는 기대는 없다.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물리학의 본질적 요소들에 닿고자 노력하는 중에 사고 실험의 사용을 확장하고 널리 알렸다. 사실상 사고실험은 양자 물리학의 대조되는 이해들을 위한 검사의 기초가 되었다.[7]
다시 한 번 문제가 되는 빛(물질)의 파동-대-입자 본성에 있어서, 물리학자들이 토마스 영과 관련된 이중-슬릿 실험으로 돌아 갔다는 것은 아마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2장에서 논한 바에 따르면, 이중-슬릿 실험은 의문스러운 현상이 <101>파동인지 입자인지를 검사하는데 활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파동과 입자는 스크린 위에 구별되는 흔적들의 패턴을 남기기 때문이다.
8. 그림 4와 5는 보어의 『원자 물리학』과 『인간의 지식』(Human Knowledge)의 한 페이지에 나온다. 그의 두 그림은 유명한 이중-슬릿 사고 실험과 관련된다. 보어의 도식들[슬릿들의 모양-역자]에서 세부적인 특성에 주목하자. 보어는 세부사항들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애써 사고 실험 도식의 초안을 작성했다.(예컨대, 받침대에 도식을 고정하는 볼트들). 보어에게 장치의 정확한 세부사항들은 그것이 곧 명백해질 것[현실화할 것-역자]이기 때문에 물질/문제가 되었다. Niels Bohr, Atomic Physics and Human Knowledge, vol. 2 (1963),48. Reprinted with permission of Ox Bow Press, Woodbridge, Connecticut.
보어와 아인슈타인은 이중-슬릿 사고 실험을 창의적으로 활용했으며, 여러 양자적 난제를 탐구하기 위해 적합하게 변형했다. 보어의 논문은 문제가 되는 장치의 많은 상세한 그림들을 담고 있다. 그림 8은 아인슈타인과 토론했던 이중-슬릿 실험의 특수한 판본에 관한 보어의 해석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들에서 아주 많은 세부사항들에 주목하라. 이것은 처음에는 이상해 보일 것인데, 이것들이 사고 실험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된 기구들의 그림들이지, 실험실에서 구현되는 실재 실험들이 아닌 것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게될 것처럼, 장치는 이 논의에서 아주 중요한 점에 속한다.
고전 역학의 관점에 따르면, 이중-슬릿 실험은 입자적 행위와 파동적 행위 사이의 완고한 구별을 증명한다. 입자들이 이중 슬릿으로 이루어진 칸막이에 겨냥될 때, 우리는 대부분의 입자들이 칸막이에 있는 각각의 두 입구와 직접 마주서 있는 검사 스크린 위에 도착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때 적은 수의 입자들은 다른 쪽에 산란된다. 맨 오른쪽의 이원 패턴은 이 결과의 그래프적인 표현이다. 즉 그것은 <102>스크린을 따라 각각의 위치에서 수집되는 다수의 입자들을 가리키며, 입자들 대부분이 직접적으로 슬릿들 바로 맞은편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 파동은 매우 다른 패턴을 전개한다(그림 9, 아래 도식). 파동이 두 개의 입구를 가진 장애물에 부딪히면, 각각의 슬릿으로부터 나오면서 산란된다. 나타나는 파동은 서로 간에 간섭한다(우리가 두 개의 돌을 연못에 동시에 던져 넣을 때 보는 패턴처럼). 간섭하는 파동들이 스크린에 닿으면, 가장 큰 강도는 두 입구들 사이 가운데줄에 있게 되며(2장에서 논해진 것처럼). 하나가 측면으로 움직여 갈 때, 초래되는 파동 진폭은 보강 간섭(높은 강도, 예컨대 밝은 선들)의 영역에서부터 갈마든다. 파동에 의해 전개되는 이 전반적인 패턴은 간섭 또는 회절 패턴이라고 불린다.
이제 질문은 만약 우리가 이러한 실험을 전자를 사용하여 수행한다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이다. 놀라운 – 정말 깜짝 놀랄만한 – 결과는 미소한 물질 입자인 전자가 회절 패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그림 10)!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가? 왜 우리는 입자적 특성을 지닌 패턴을 얻지 않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 놀라운 결과를 이해할 수 있는가?
전자가 서로 간에 다소간 ‘간섭’하는 것인가? 우리는 사실상 이 가능성을 각각의 전자를 차례로 하나씩 보냄으로써 제거할 수 있다(심지어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즉 우리는 하나의 전자를 하나씩 이중 슬릿에 쏘아 보내며, 다음 전자를 보내기 전에 그것이 검사 스크린을 때리기까지 기다린다. 이렇게 하면 전자 하나가 ‘간섭’하게 함으로써, 전자들이 다른 전저와 상호작용할 어떤 기회도 없게 된다. 첫 번째 입자를 통과시킨 후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우리는 전작 스크린에 도달할 때, 전자의 위치를 지정하는 검사 스크린 위에 단 하나의 흔적을 발견한다. 지금까지는 이러한 현상은 전자가 작은 입자들이라는 우리의 고전-물리학적 직관을 따른다. 이것은 수집된 각각의 모든 전자에 발생한다. 그러나 여기에 곤란함이 있다. 즉 우리는 각각의 사건에 대한 자료를 모으며, 많은 수의 전자가 슬릿을 지나간 후 전체 패턴을 본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간섭 패턴이다! 전자들이 파동적 행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한 번에 두 슬릿을 통과한 물의 파동과는 달리 전자는 한번에 하나씩 통과시켰다. 각각의 전자가 스스로 ‘간섭’한 것인가? 과연 하나의 단일한 전자가 두 슬릿을 한 번에 통과 한 것인가? 각각의 전자는 하나의 슬릿 또는 다른 슬릿을 통과하지 않는가?[8]
우리가 각 전자가 스크린으로 가는 길에 통과하는 슬릿이 어느 것인지 탐지할 수 있는 장치로 교체한다고 생각해 보자.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103>‘어느-슬릿’인지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어느-경로’인지 탐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여러 가능한 장치들에 대해 토론했다. 그림 11은 보어의 이중-슬릿 장치를 보여주는데, 여기에는 ‘선택-슬릿’의 값을 결정할 수 있는 어떤 변형을 포함한다.[9]
이 교묘한 변형 뒤에 있는 생각은 만약 전자가 위쪽 슬릿을 통과해 간다면, 그것이 스프링들 위의 차단막을 이동시킬 것이라는 것이며(전자가 슬릿을 통과할 때, 차단막에 가해지는 전자의 운동량 이전으로부터 초래되는 움직임), 이 이동은 측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104>차단막의 이동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주어진 전자가 위쪽 슬릿을 통과해 갔는지 아래쪽 슬릿을 통과해 갔는지 결정할 수 있다. 그럴만 하다면 어떤 입자도 탐지 스크린으로 가는 길에 이 슬릿이나 다른 슬릿을 통과해 간다. 그래서 이러한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입자와 파동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전자를 파악하는 것이 확실히 가능하다. 사실상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예견했던 바이며, 그가 양자 이론의 고유한 부적합성을 드러내기 위한 그의 노력 중 일부로 이 실험을 제안했던 이유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벨상 수상작은 빛이 입자처럼 움직일 수 있다고 추측하며, 아인슈타인은 양자 혁명에 반대하는 극소수의 반항자 중 하나였다. 그는 양자 역학을 충분히 수용하지 않은 채 죽었다.)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는가? 보어는 만약 우리가 선택-경로 장치(각각의 전자가 탐지 스크린으로 가는 경로에서 어느 슬릿을 지나가는지 결정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장치)로 이중-슬릿 실험을 한다면, 우리는 간섭 패턴이 파괴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즉 만약 측정이, 우리가 선택-경로 장치를 사용하는 경우, 전자가 입자로 규정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면, 원래의 변형되지 않는 이중-슬릿 장치가 사용될 때 나온 파동 패턴이 아니라, 결과는 입자 패턴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결과는 이전 보다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전자는 입자인가 파동인가? 우리는 어떻게 다른 실험 장치들을 사용하여 다른 결과들을 얻을 수 있는가?
이 <105>‘실험 결과’가 자주 교육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인 관심사로 단순한 사실의 문제로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라는 것이 어떤 현실적인 실험이 아니라, 우리가 이야기해왔던 사고 실험이라는 사실에서 잠시 멈추어 보자.
그러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알려지는 바는 실재 자료가 아니라 이론적 논증에 기반한 예견이다. 알려진 결과는 만약 우리가 실험을 수행한다면(수행할 수 있다면) 무엇이 발생할 것인지에 대한 보어의 예견이다.
1990년대 중반에 이 사고 실험이 실험실에서 실제로 수행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굉장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7장을 보라).[10] 즉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죽음 훨씬 후에, 즉 이 사고 실험의 결과에 관한 논쟁이 있은지 수 년 후, 우리는 이제 우리가 그 사고 실험을 실험실에서 행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안다.(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면 7장을 확인하라!) 이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주제와 그 함축을,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알아내려고 하기 전에 보다 주도면밀하게 되돌아가 음미하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보어는 그와 같은 결론에 어떻게 다가갔을까? 보어는 오직 파동-입자 이중성의 역설과 오랫동안 그리고 힘들여 씨름한 후에야 이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이 모든 혼란 가운데에서 논리적으로 일관된 설명을 발견하려고 애쓰는데 집중했다. 보어가 이러한 복잡한 결론들에 수반되는 현기증나는 의미를 안정시키기 위해 사용한 고정점은 물질과 빛의 ‘이중적’ 본성을 전개하는 (현실적인) 실험이 둘 다 일관되고 재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어떤 주어진 장치가 사용되는 매 회에, 동일한 행위 – 입자든 파동이든 둘 중 하나(둘 다가 아니라) - 가 초래되었다. 하나의 장치가 일관되게 한 종류의 행위를 표현했으며, 상호 배제적인 <106>장치가 일관되게 다른 결과를 전개했다. 보어는 만약 우리가 ‘파동’과 ‘입자’ 개념에 따라 의미하는 바에 대해 명확하다면, 전자가 동시에 입자와 파동처럼 행위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논했다. 사실상 보어는 만약 선택-경로 정보를 보유하고 파동 (간섭) 패턴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려면, 물리학은 바로 앞에 실제적인 위기를 가지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논리적으로 일관성 이론의 가능성을 의문에 붙이기 때문이다. 보어에게서, 관건적인 점은 파동과 입자 행위가 상보적 – 즉 상호 배제적 – 환경들 아래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보어에 따르면 우리는 선택-경로 장치를 통해 전자가 통과하는 것이 어느 슬릿인지 발견할 수 있으며, 이 경우에 나오는 패턴은 입자를 특성화할 것이며, 또는 우리는 (원래의 변형되지 않은 이중-슬릿 장치를 사용할 때) 전자가 어느 슬릿을 통과하는지에 대한 지식을 보류할 수 있고, 파동 패턴을 보존할 수 있다-우리는 동시에 두 경로를 부여할 수 없다.
몇몇 중요한 방식에서, 이 모든 것은 매우 기능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 함축은 혁명이나 다름 없다. 이러한 결과의 상보적 본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라. 즉 관찰된 현상의 본성은 장치들에 상응하는 변화와 더불어 변한다. 그러나 이는 고전 물리학에서 가정된 존재론, 즉 각각의 개별실체(예컨대 전자)가 파동 또는 입자 중 하나이며, 그것이 실험환경에 독립적이라는 것, 그리고 실험이 측정되고 있는 개별실체의 선재하는 결정된 본성을 드러낸다는 인식론적 가정 둘 모두에 대립한다. 우리가 볼 것처럼, 보어의 결론은 고전 인식론과 그것이 기반하는 존재론적 가정을 따르는 고전 물리학이 기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측정 물질들: 보어의 인식론적 틀
뉴턴 물리학을 떠받치기 위해 수립된 것으로서 고전 인식론과 존재론의 가정은 우리의 실험조사에 독립적인 결정된 속성들을 가진 개별실체의 실존을 포함한다. 이것은 측정 과정이 투명하고 뉴턴의 과학적 담론에 외재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그것은 객체와 관찰자가 물리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 분리된 위치를 점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객체들은 개별적으로 결정된 속성들을 소유한다고 추정되며, 그것은 부드럽게 개입하는 측정 과정을 통해 관찰자-독립적인 변항들에 조응하는 값들을 획득함으로써 그것들의 고유한 특성들을 명확하게 분별하는 과학자의 작업이라고 본다. <107>통제된 실험 방법론 아래에서 측정된 값들의 재생산은 획득된 것이 관찰-독립적인 실재의 객체를 규정하는 내적 속성들의 재현이라고 주장한다.[11] 뉴턴 물리학에서 측정 과정의 투명성은 객관주의라는 계몽주의 문화에서 가치 있는, 그리고 그 안에서 특권화된 어떤 굳건한 근거이다.
보어는 뉴턴 물리학에서 특정의 투명성이라는 관념을 지지하는 두 가지 기초 가정을 의문에 붙인다. (1) 세계는 개별적으로 결정된 경계들과 그것의 잘 정의된 값들이 실험 실천의 특유성에 독립적인 규정된 의미를 가진 추상적인 보편 개념에 의해 재현될 수 있는 속성들로 구성된다는 것. (2) 측정은 획득된 속성들의 값들이 전측정적인 것(premeasurement)으로 적절하게 할당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연속되는 규정가능한 상호작용을 포함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이 가정들은 재현주의에 관한 믿음(단어들과 사물들의 독립적으로 결정된 실존), 개체주의 형이상학(세계가 개별적으로 결정된 경계들과 속성들로 이루어진다는 믿음) 그리고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의 내적 분할가능성(측정이 측정 행위소들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객체들의 속성에 속하는 선재하는 값을 드러낸다는 것)을 도출한다. 이러한 가정들의 역할들을 상세히 음미하고 이것에 대한 보어의 특유한 문제제기가 가지는 역할을 음미해 보자.
뉴턴 물리학의 보증서는 그것의 엄격한 결정론에 있다. ‘내적 조건들’(즉 어떤 시간상의 한 순간에 위치와 운동량)과 입자에 가해지는 일련의 전체 힘들이 주어지면, 입자의 전체 궤도(즉 그것의 전체 과거와 현재)가 결정된다. 뉴턴의 방정식(즉 고전 역학 법칙)은 모든 시간에 걸쳐 어떤 체계의 물리적 상태를 예상하고 추론하는 능력으로 인해 찬사를 받는다. 뉴턴 역학에 따르면, 최초조건들은 여러 상이한 측정 과정 중 하나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
최초조건을 결정하는 하나의 기술은 소위 비행시간 측정법(time-of-flight measurement)이다. 이 기술에 따르면, 어떤 객체의 위치와 운동량의 동시성은 전자기 복사(또는 빛)을 되튀김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탐지기로 탐지함으로써 결정할 수 있다.(이것은 레이저 속도측정기의 기본 원리로서, 보통 자동차와 테니스 공의 속도를 측정는데 쓰인다.) 빛이 운동량과 에너지를 가지기 때문에, 측정은 필연적으로 객체를 방해한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12] 사물들은 우리가 그것을 측정할 때 방해받는다는 사실은 <108>양자 물리학의 놀랄만한 새로운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고전 물리학으로부터 이미 도출된다. 하지만 비행시간 측정법이 일상적인 객체들에 사용될 때, 이 사실은 자주 무시된다. 이것은 빛이 상대적으로 커다란 객체로부터 되튀겨 나올 때, 거기 전해지는 방해는 측정의 정확성에 비추어 무시될 만하기 때문이다. 즉 그와 같은 어떤 방해가 너무 작아서 관찰되지 않는 경우는 흔하다.(예를 들어 비록 정확한 사례는 아니지만, 우리가 어두운 방에 불을 켤 때, [빛으로 인해] 방 안에 재배치되고 있는 가구을 관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방해가 관찰가능한 상항이 있다(예컨대 측정의 정확성이 어떤 한계너머로 증가하며, 또는 객체가 충분할 정도로 작을 때). 그러나 뉴턴 물리학은 물론 이 시나리로에 의해 곤란을 겪지는 않는다. 방해가 무시할 정도일 때, 뉴턴 물리학은 어쨌든 객체의 위치와 운동량에 있어서 측정-독립적인 값이 발견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방해가 언제나 결정될 수 있으며 제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닐스 보어에 따르면, 측정 과정에 관한 이러한 해명은 그릇된 가설로 남아 있다.
측정 투명성에 대한 보어의 비판은 두 가지 중요한 논점에 기반한다. 즉 측정 상호작용의 불연속성과 미결정성이 그것이다. 보어에 따르면 20세기 초, 측정 상호작용이 연속적이라는 고전적 가설을 논박하는 중요한 경험적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 ‘본질적인 불연속성’ - 또는 ‘양자 비약’ - 은 양자 물리학을 규정한다. 어떤 커다란 (불연속적) 변화를 표시하는 그것의 통상적인 어법에도 불구하고, 양자 비약은 결코 크지 않다. 사실 ‘양자’라는 개념은 존재하는 가장 작은 양 또는 이산적(discrete) 양을 의미한다.[13] 실제로 이 본질적인 불연속성은 다른 식으로는 플랑크 상수(그 발견자의 이름을 따름)로 물리학에 알려져 있으며, h로 기호화는데, 그것은 정말로 극단적으로 작은 양이다.[14] 이 본질적 불연속적 또는 이산적 자연이라는 생각은 막스 플랑크(Max Planck)에 의해 흑채복사에 관한 몇몇 자료를 산정하기 위한 그의 시도에서 1900년에 최초로 도입되었는데, 이는 고전 물리학의 분석을 따르지 않는다. 특히 그는 에너지가 이산적 양으로 ‘양자화’하고 교환된다고 주장했다. h≠0 (플랑크 상수의 값이 0이 아니라는 것)은 자연의 근본적인 불연속성의 존재를 표시하는 것이다. [15]이 불연속성을 적절하게 산정하려는 뉴턴 물리학의 실패는 그것이 몰락의 전조가 된다.
연속성의 결여는 측정 상호작용에 의해 야기되는 방해가 얼마나 작을 수 있는지에 대한 하한값을 정한다. (예컨대 빛은 하나의 ‘포톤’ - 빛의 한 입자 – 보다 더 낮은 강도로 축소될 수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측정이 불가능해 진다.) 특히, 이것은 뉴턴 물리학이 측정 상호작용을 무시하는데 있어서 한계에 부닥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109> 뉴턴 물리학은 입자들이 언제나 그것들이 무시될 만한 점으로 축소될 수 있음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객체의 추정된 측정-독립적인 속성들을 결정하는 것이 목표라면, 유일하게 남은 가능성은 측정 상호작용의 효과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보어의 공헌에 속하는 핵심으로 데려간다. 보어는 측정 상호작용의 효과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기획되었던 목표(아마도 몇몇 특정 양을 측정하려는)에 영향을 주고, 따라서 측정 투명성에 관한 가정은 실패한다. 그러나 왜 이 결정이 방해받는건가?
보어의 측정 상호작용의 미결정적 본성을 위한 논증은 개념들은 그것들의 측정을 위해 요청되는 환경에 의해 정의된다는 그의 통찰에 기반한다.[16] 즉 이론적 개념들은 특성에 있어서 관념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특유한 물리적 배치이다.[17] 보어에게 측정과 기술(물질적이면서 담론적인 것)은 서로를 이끌어 간다(이것은 조작주의라는 약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상호 인식론적 함축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18] 보어는 ‘위치’와 ‘운동량’과 같은 개념이 예컨대 특유하게 체현되기 때문에, 상호배제적인 실험적 배치들은 측정 상호작용에 속하는 그 모든 요청된 특성들을 결정하기 위해 동시적으로 도입(정의에 따르면 불가능한)될 필요가 있다고 논증한다. 이것은 예시를 통해 가장 잘 설명된다.
어떤 입자의 위치를 측정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기본적 예시는 핵심주제를 전면화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그것은 측정 과정의 몇몇 관건적인 특성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를 도울 것이다. 측정 상호작용의 본질에 관해 우리가 얻을 통찰은 다른 여타 변항에 맞서 있는 것으로서 우리가 측정하는 위치 자체라는, 또는 우리가 선택한 객체가 입자라는 사실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19] 어떠한 훌륭한 사고 실험에서처럼, 이 선택사항들은 중요한 특성들에 집중하도록 우리를 도울 것이다. 위치의 측정이라는 선택지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이익이다. 무엇보다 위치는 물리학에서 핵심 변수 중 하나이다. 사실상 그것은 두 변수들 중 하나인데(다른 변수는 운동량), 뉴턴 역학에서는 최초 조건들의 특정화를 요청한다. 게다가 위치는 어떤 직관적인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며(예컨대 운동량과는 대립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측정하는데 있어서 직접적이며 직관적인 접근을 요청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어떤 야구공과 같이 입자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인 객체의 측정에 대해 생각하는 중에 간과할 어떤 세부사항들에 보다 많이 주의를 기울인다는 사실과 관련된다.[20]
어떤 (일반 대중 뿐 아니라 몇몇 물리학자도 공유하는) 통상적인 그릇된 개념화가 있는데, 양자적 사유가 단지 미시세계에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110> 어떤 사람들은 h가 매우 작다는 사실이 세계가 뉴턴이 거시세계적 범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실천적 고려를 보다 기본적인 원리적 주제와 혼동하는 것이다. 아무도 원자가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가끔은 그것들의 존재를 용케 무시한다 해도) 그것의 존재와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과 그것의 관계를 거부할 것이라고 추론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실체는 작을 것이지만, 그것의 결과는 매우 근원적일 것이다. 이는 사실상 기초적 불연속성의 실존에 관한 진리이다. 우리가 이어지는 분석에서 볼 것처럼, 핵심은 바로 본질적인 불연속성의 존재이지 그것의 크기가 아니다. 우리의 지식이 미치는 한, h는 우주적[보편적] 상수이다. 특히 우리가 아는 한, 그것은 어디에서도 또는 어떤 환경 아래에서도 0이 아니다. (예컨대 h가 엄격하게 0와 같아지는 그 어떤 한계 지점도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논점이다. 보어의 분석은 h의 크기에 의존하지 않으며, 오직 그것이 0이 아니라는(nonzero) 사실에만 의존한다.
그토록 자주 오해받는 이 논점은 계속 언급된다. h(플랑크 상수)가 커다란 객체들의 질량과 상대적으로 작다는 사실은 보어의 통찰이 오로지 미시세계 객체들에만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 불연속성의 효과가 상대적으로 큰 객체들에게서 더 적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들이 0은 아니다. 다른 식으로 말해, 그 어떤 증거도 물리적 세계가 각각의 물리 법칙을 가진 두 개의 분리된 영역, 즉 양자 물리학 법칙의 지배를 받는 미시 영역과 뉴턴 물리학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거시 영역으로 나누어진다는 믿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양자 역학은, 가장 작은 물질적 입자에서부터 커다란 범위의 객체들에 이르기까지 25가지 양적 질서 영역 이상의 현상들을 고려하기 때문에, 물리학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정확한 이론이다.[21] 양자 물리학은 단순히 뉴턴 물리학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는다.[22] 핵심 논점은 이것이다. 측정 상호작용과 그의 분석에 관한 인식론적 함축의 본성에 관한 보어의 분석은 (우리가 아는 한) 완전히 일반적이다. 특히 그 분석들은 미시세계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사고 실험을 진행해 보자. 우리가 입자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지 암실 삼각대 위에 놓인 플래시 카메라이다. 다음 차례로 실험 장치의 구성요소들 각각을 살펴 보자. 우리는 어두운 실험실이 필요한데, 빛은 그것이 부딪히는 객체들에게 운동량을 전달하고, 우리는 그 입자가 가능한한 적게 방해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객체의 위치를 기록하기 위한 카메라 또는 사진 건판 또는 필름이 필요하다. 우리는 <111>위치 측정시에 객체를 비출(즉 그 사진이 찍히도록 하는) 플래시 또는 몇몇 광원도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기록장치(예를 들어 사진 건판)를 안정되게 하고 사진이 흐려지지 않게 하기 위한 삼각대 또는 어떤 견고한 지지대가 필요하다. 더 많은 세부사항들이 나온다. 이 사고실험의 목표가 뉴턴적 가설이 실패하는 지점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므로, 우리가 무슨 대체 이론이 가능해 보일지(가능한 것으로 들릴지) 보다 충분히 이해할 때까지, 나는 고전 역학의 언어(이를테면, 객체들이 측정 행위에 앞서 개별적으로 속성들이 결정된다고, 그리고 측정 상호작용이 앞선 값들을 방해한다고 가정할 것이다)를 사용할 것이다.
여기에는 고려할 위치 측정의 여러 중요한 특성들이 있다. 첫째로 보어에 따르면, (모든 개념들과 같이) 위치 개념은 당연하게 여겨질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그것의 측정을 위해 요청되는 환경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우리가 현재 고려하는 이런 경우에 환경은 사진 건판이 실험실 기준 프레임과 관련하여 고정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경우에만, 즉 삼각대를 쓸 수 있는 장소일 경우에만, 위치가 의미있게 정의된다(의미론적으로 결정적으로 된다). 이것은 필수적인데,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측정 동안 건판을 옮기도록 허용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입자의 위치를 정의하는 실행 가능한 방식을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것은 비결정적일 것이다.(만약 우리가 카메라 셔터를 열어둔 채 사진을 찍는 동안 그것을 이리저리 움직인다면, 사진은 확실히 희미해질 것이고 그것은 객체의 위치에 관한 어떤 의미있는 표식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23] 이와 대조적으로 운동량의 개념은, 오로지 환경이 장치가 가동적인(movable) 부분들로 구성되는 것과 같은 경우에만 잘 정의된다.[24]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예에서, 이것은 사진 건판이나 카메라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동적인 지지대 위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필수적인데, 왜냐하면 운동량 이전이 흡수되는 동안 그 지지대가 얼마나 많이 뒤로 움직이는지는 측정해야 하기 때문이다(만약 운동량이 크다면, 지지대의 이전은 클 것이고, 운동량이 작다면, 지지대의 움직임을 작을 것이다). 이로써 객체의 운동량의 어떤 의미있는 표식이 규명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지지대가 고정되어 있다면, 운동량은 흡수될 것이고, 그 값은 미결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리고 오로지 가동적인 지지대가 사진 건판이나 카메라를 지지하는 경우에만, 지지대의 이전의 측정은 ‘운동량’의 정확한 데이터값을 주기 위해 조정될 수 있으며, 그런 경우에 운동량의 값이 결정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하게도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결정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상호배제적인 실험 환경을 요구하기 때문이다(각각 고정 지지대와 가동적인 지지대. 그림 12를 보라). 그림 12는 우리의 사고 실험의 도식이다. 이 다이어그램이 입자에 부딪히는 단 하나의 포톤을 가리킨다는 점에 주목하라.
<112>
<113>이것은 양자 불연속성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좋은 사례 시나리오이다. 즉 우리는 적어도 측정을 수행할 하나의 포톤이 필요하며,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입자의 위치를 방해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입자의 (추정적인) 측정-독립적인 위치값을 결정하기 위한 유일한 가능성은 측정 상호작용의 효과를 규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제 우리가 탐구하길 원하는 조건을 마주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는 측정 상호작용의 효과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미 포톤의 최초 운동량을 알고 있다고 해 보자(그것은 카메라 플래시를 남긴다). 만약 우리가 포톤이 객체에 부딪힌 후 그것의 마지막 운동량을 측정할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포톤의 운동량 변화를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입자의 운동량 변화가 명확히 측정 상호작용의 직접적 결과이며 따라서 포톤의 운동량 변화와 관련됨에 틀림없기 때문에 엄청나게 유용할 것이다. 사실상 운동량 보존의 법칙은 우리에게 이러한 운동량의 ‘이전’에 관한 양적 진술을 제공한다. 즉 입자의 운동량 변화(벡터)는 포톤의 운동량 변화(벡터)와 같다(그리고 대립적이다). 따라서 운동량 보존의 법칙을 사용하여, 우리는 포톤의 운동량 변화를 알기만 하면 입자의 운동량 변화를 계산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포톤이 객체에 부딪힌 후 포톤의 운동량을 측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보았더 바대로, 포톤의 운동량 측정은 가동적 지지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는 위치(이것은 사진 건판 위의 포톤의 위치인데, 이는 방 안에 있는 입자의 위치를 남긴다.)의 측정에 대한 요청에 의해 배제된다. 즉 우리가 보았던 바, 위치는 필연적으로 고정된 지지대에 의해서 정의된다. 그러므로 입자에 대한 포톤의 효과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는 우리가 포톤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결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고, 그것들 각각의 결정을 위해 위치와 운동량의 측정이 상호배제적인 장치들이 주어지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어의 결론에 도달한다. 즉 관찰은 오로지 측정의 효과가 미결정적(indeterminable)이라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이제 측정 상호작용이 미결정적이라는 사실이 관건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측정의 효과를 제외할 수 없으며, 따라서 (기존에 추정된) 입자가 측정 이전에 가진 속성들을 연역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 사실상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우리는 단지 고정된 부분들을 가진 장치를 사용할 뿐이다). 이것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몇몇 측정-독립적인 객체(즉 측정 이전에 추정되었던 객체)의 추상적 개념을 따라 위치를 획득한 값을 상정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값에 상응하는 것은 무엇인가? <114>객관적 지시물은 무엇인가? 우리는 측정 상호작용이 우리가 획득했던 값을 생산한다고 결론맺을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측정’으로서 이러한 상호작용에 관해 말하는 것조차 상당히 곤란하지 않을까? 다시 위협적인 현기증이 생긴다. 보어로 돌아가자.
보어는 측정 상호작용의 미결정성이 중차대한 결론에 속한다고 논한다. 즉 관찰이 결정불가능한 불연속적 상호작용을 포함하기 때문에, 원리상으로 ‘객체’와 ‘관찰 행위소들’[관찰자와 장치들-역자]을 구별지을 확실한 방법은 없다. 그 어떤 고유한/데카르트적 주체-객체 구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보어 해석의 이러한 측면은, 만약 우리가 다시 한 번 우리의 사고실험으로 주의를 돌리면, 증명될 수 있다. 이전에 주목했던 바, 흩뿌려진 포톤이 사진 건판으로 접근할 때, 그것은 두 가지 가능한 상호배제적인 배치 중 하나를 만날 것이다. 즉 만약 사진 건판이 고정된 지지대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면, 어떤 결정된 값은 그것의 위치로서 얻게 되며, 만약 그 지지대가 가동적이라면, 결정된 값은 그것의 운동량으로서 얻게 된다.[25] 첫 번째 경우는 본질적으로 플래시 카메라로 입자 사진을 찍는 과정을 기술한다. 그런 경우 빛(포톤)은 관찰 행위소[관찰자와 장치들-역자]의 일부이다. 후자의 경우 빛의(포톤의) 운동량은 측정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문제가 되는 객체의 부분이다. 그래서 무엇이 측정 객체를 구성하는가라는 질문은 확정되지 않는다. 보어는 그 어떤 고유하게 결정되는 데카르트적 절단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관찰 객체’와 ‘관찰 행위소’[관찰 주체] 간에 경계는 장치들의 명시적인 물리적 배치의 부재로 인해 미결정적이다. 관찰 객체를 구성하는 것과 관찰 행위소를 구성하는 것은 오로지 측정 장치가 구체화된다는 조건에서만 결정될 수 있다. 그 장치는 관찰 행위소로부터 객체를 윤곽 짓는 어떤 절단을 수립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았다시피, 확실히 관찰은 관찰-독립적인 객체들의 속성을 지정하지 않는다(왜냐하면 관찰은 그 자체로 선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어의 주장 중 다른 하나를 확증하는 방식을 따르는 바, 다음 사항을 주목하라. 즉 측정장치가 측정 장치로서의 그 목적을 거스르기 때문에, 측정 상호작용은 오로지 측정 장치가 그 자체로 어떤 객체로 취급되는 경우에만 해명될 수 있다. 이는 위치의 측정(고정된 지지대로 이루어진 장치를 사용할 때)이 관찰의 행위소의 일부로 포톤을 구성하는 반면, 운동량의 측정(가동적 지지대로 이루어진 장치를 사용할 때)은 포톤을 관찰의 객체로 구성한다는 사실로부터 따라 나온다. 만약 포톤이 관찰 행위소의 일부로서 그것의 의도된 임무를 수행한다면, 객체로 기여할 수 없다.
만약 객체와 관찰 행위소 간의 구분이 고유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관찰이라는 개념에 귀속시키는 의미는 무엇인가? <115> 보어는 “실험에 의해 우리는 단순히 우리가 현상들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진술하는 확실한 방법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건에 대해 이해한다”고 주장한다(Folse 1985, 124에서 인용).[26] 양자적 현상은 행위적으로 수립되며, 물질적으로 조건화되고 체현된 바, 어떤 객체와 관찰 행위소 사이에 구성된 우발적인 보어적 절단(Bohrian cut)의 도입과 같다.[27] 다시 말해 그 어떤 고유한 구별도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모든 측정은 장치의 특수한 선택을 포함한다. 이때 측정은 다른 본질적인 변항들을 배제하면서, 어떤 일련의 특정한 변항들에 의미를 부여하는데 필수적인 조건들을 제공하며, 이에 따라 관찰 행위소로부터 객체를 윤곽지우는 특정적인 체현된 절단을 정립한다. 그래서 모든 주어진 장치에 따라, 객체와 관찰 행위소 간의 구별에 있어서 명백한 해법이 있다. 이러한 많은 사항들은, 장치와 개념과 같은 인간적인 인공물이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생산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몇몇 객체성에 대한 생각을 아주 잘 유지할 것이라는 점을 예견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방향으로 진행하기 전에, 우리는 이러한 역할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측정된 속성들에 참조점을 지정하기 위한 우리의 탐구작업에서 우리를 도울 것이다.
이 탐구작업의 부분으로, 측정과정과 그것의 함축의 본성에 관한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그의 관점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를 살펴 보는 것은 유익하다. 이 문제로 우리의 주의를 돌리는 것은 이 주제에 대한 몇몇 보어의 가장 기본적인 사유를 정련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미결정성 대 불확정성
이전 절에서 논의된 비행-시간의 예시는 ‘하이젠베르그 현미경’ 실험과 마찬가지로 몇몇 본질적인 특성을 가진다. 하이젠베르그는 이 후자의 사고실험을 그의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를 소개하는 그의 논문에서 숙고한다. 내가 서문에서 논의했다시피, 보어는, 하이젠베르그가 불확정성 원리를 내놓는 것과 동시에 대안적인 인식론적 틀인 상보성을 발전시켰다. 비록 자주 상보성과 불확정성이 코펜하겐 해석의 초석으로 알려져 있다 해도, 사실상 이 각각의 공헌은 틀림없이 완전히 다른 양립불가능한 해석적 입장들을 구성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하이젠베르그가 그의 불확정성 논문을 보어에게 보여주었을 때, 보어는 그 논문이 어떤 근본적인 오류를 담고 있다고 불평했다. 하이젠베르그는 그것을 수용했으며, 그의 논문 후기에 다음과 같은 추론 상의 흠결을 안다고 부가했다. “보어는 <116>내가 이 논문의 여러 논의 과정에서 본질적인 점들을 간과했다고 내게 주의를 주었다.”[28] 불확정성 원리의 엄청난 유명세가 물리학에서부터 대중 문화로 흘러넘치는 동안 아무도 이 후기나 그것이 담고 있던 바의 존재를 알아채지도 못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물리학 공동체도 그것을 잊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와 유사하게 의미 있고 덜 인정받은 사실은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와 유용하게 대조될 수 있는 그의 보다 큰 상보성 틀의 부분으로 ‘미결정성 원리’를 도입했다는 것이다(7장을 보라).[29] 이 절에서 나는 보어와 하이젠베르그의 대조적인 분석과 해석을 음미할 것이다.[30]
불확정성 관계에 관한 하이젠베르그의 유명한 1927년 논문에서 그는 γ-광선(즉 감마-광선 또는 고에너지 포톤) 현미경을 사용하는 전자의 위치 측정을 숙고한다. 이 사고 실험은 포톤에 의한 전자의 탐지를 생각한다. 우리가 고려했던 실험과 이 실험의 유사성은 보어와 하이젠베르그의 해석을 비교할 탁월한 기회를 제공한다. 하이젠베르그에 따르면, 여기서 중요한 주제는 다음과 같다.
위치 측정에서 획득 가능한 가장 높은 정확성은 빛의 파장에 의해 지배된다. 하지만 말하자면 원리적으로 우리는 γ-광선 현미경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원하는 만큼 정확한 위치를 결정할 것이다. 이 측정에서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콤프톤 효과[즉 전자로부터 나오는 포톤의 산란]가 그것이다. [...] 위치가 결정되는 순간에 – 그러므로 포톤이 전자에 의해 흩어지는 순간에 – 전자는 운동량에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겪는다. 이 변화가 클수록, 더 작은 빛의 파장, 즉 더 정확한 위치 결정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전자의 위치가 알려지는 순간, 그것의 운동량은 불연속적 변화에 상응하는 양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보다 정확히 위치가 결정될수록, 이와 반대로 더 작은 정확도로 운동량이 알려지는 것이다.(Wheeler and Zurek 1983, 64에서 인용)
다시 말해, 하이젠베르그의 분석에 따르면, 핵심적인 주제는 전자의 운동량에서 불연속적인 변화, 다시 말해 전자의 위치를 규정하기 위한 시도에서 포톤에 의해 방해받는다는 사실이다. 방해(disturbance)라는 생각에 기반한 이러한 분석은 하이젠베르그를 불확정성 관계가 인식론적 원리라는 결론으로 이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다시 말해 전자의 운동량의 결정값은 측정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측정에 의해 야기되는 불가피한 방해로 인해, 그 값에 대해 불확정적으로 남는다. <117>하이젠베르그의 분석이 보어가 막 시작하는 그 지점에서 멈춘다는 것에 주목해 보라. 즉 방해의 존재가 중요한 논점이다. 하지만 이 사실이 단지 입자의 (추정된) 선재하는 속성들을 결정하기 위한 가능성들을 소진시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측정 상호작용의 효과를 결정하는 것과 그 효과를 빼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후자의 논점은 보어의 분석에서 핵심이며 하이젠베르그의 추론에 대한 그의 반론의 기반이 된다. 하이젠베르그의 유일한 논점이 측정 상호작용에서 도출되는 불연속성에 대한 것인 반면, 보어는 주장컨대 보다 근본적인 두 번째 주제를 도입한다. 즉 그것은 측정 상호작용의 효과를 결정하기 위한 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한 것이다. 보어에 의하면 이러한 조건들의 분석은 개념들이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장치들의 물리적 배치 안에 체현되어 있으므로 의미있다는, 즉 의미론적으로 결정된다는 핵심적인 통찰에 놓인다. 보어는 이 논점이 하이젠베르그의 인식론적 해석을 의문에 붙인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불확정성] 관계에서 우리는 고전 물리학의 상들을 기술하기에 적합한 말들로는 명백한 표현을 기술하기 힘든 수식체계[형식주의]의 함축을 여기서 다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자적 객체의 운동량과 위치 둘 모두를 알 수 없다”와 같은 문장은 객체의 두 가지 술어들[속성들]의 물리적 실재에 대한 동시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시공간의 확실한 활용을 위한 조건, 다른 한편으로는 동력학적인 보존 법칙을 지시함으로써만 대답될 수 있다. 사건들의 인과적 연쇄에 관한 단일한 상에 속한 이 개념들의 조합은 고전 역학의 핵심이지만, 그와 같은 기술(description)의 파악 너머의 규칙들을 위한 여지는 상보적 현상들의 연구가 상호 배제적인 실험적 배치들을 요청하는 환경들에 의해 가능해질 뿐이다. (Bohr 1963b [1949 essay] , 40-41; 강조는 필자)
다시 말해 보어는 우리가 어떤 독립적인 물리적 실재성을 이러한 속성들에, 또는 그 문제에 있어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의 관념에 귀속시킬 권리가 없다고 논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젠베르그의 분석은 어떻게 그러한 절단이 이루어지고, 미결정성이 해결되는지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놓친다. 내가 언급했듯이, 보어는 하이젠베르그의 추론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현했으며, 하이젠베르그는 보어의 관점을 수용했고, 그의 불확정성에 관한 논문의 후기에 보어가 언급한 바를 부가했다.[31]
이 일에 관해 보어는 내가 이 논문의 여러 논의 과정에서 본질적인 논점들을 간과했다고 주의를 주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관찰에서 불확정성은 <118>불연속성의 발생으로부터 배제적으로 일어나지 않지만, 우리가 동등한 타당성을, 한편으로는 입자설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파동설에서 나타나는 매우 다른 실험에 부여한다는 요청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즉 우리는 상보성, 다시 말해 상호배제적 실험 조건들을 고려할 필요성을 깨닫는다].(Wheeler and Zurek 1983, 83에서 인용)
하이젠베르그 논문의 이 중요한 후기가 (대부분) 잊혀졌으며 그것의 함축이 유실되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불확정성 원리에 관한 일반 대중의 개념은 (기껏해야) 하이젠베르그 자신이 철회한 인식론적 판본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확실히 보다 불행한 것은 많은 물리학 교재, 물리학 학생들, 그리고 전문적인 물리학자들이 이러한 그릇된 개념을 공유한다는 사실이다.[33]
보어에게 실제적인 주제는 미결정성이지 불확정성이 아니다(7장의 상세한 논의를 보라). 그는 의미론적이고 존재적인(ontic) 용어로, 그리고 추론적인 인식론적 용어로 위치와 운동량 간의 상호관계를 이해한다(즉 우리는 알기 위해 정의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어떤 것에 대해 정의할 무언가를 알 수는 없다). 보어의 미결정성 원리는 다음과 같이 진술될 수 있다. 상보적 변수들의 값(위치와 운동량 같은)은 동시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34] 이 주제는 인식불가능성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알려질 수 있는 것에 관한 질문이다.
현상들
우리가 보았던 바와 같이 측정과 관련하여 보어에게 중심 주제는 방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미결정성을 해결하는 것이다.[35] 달리 말해 보어의 생각에, 핵심 논점은 “양자 전체성”(quantum wholeness) 또는 ‘객체’와 ‘관찰 행위소들’ 간의 본래적/데카르트적 구별의 결함이다. 주어진 장치들이 없다면 객체와 관찰 행위소들을 차이화하는 명백한 경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어떤 장치는 애매성을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도입되어야 하지만, 그 장치는 기술되고 있는 것의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술적으로(Descriptively), 어떤 단일한 상황, 다른 기술들과 부딪히게 되지 않으면서 추상화될 수 없는 부분인 그런 상황(이른바 상보적 상황)이 있다. 객체는 ‘통상적인 물리학적 의미에서 독립적인 실재’로 귀속될 수 없다”(Hooker 1972, 156).
이것이 보어의 철학-물리학에서 중심 생각이며, 그는 <119>‘현상’이라는 개념을 전체성의 특정한 사례들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다.[36] “따라서 고전 물리학의 범역에서 객체와 장치 간의 상호작용은 필요하다면, 무시되거나 상쇄될 수 있는 반면, 양자 물리학에서 이 상호작용은 현상의 분리불가능한 부분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적합한 양자 현상들에 관한 확실한 해명은 원리적으로 실험적 배치의 모든 관련 특성들의 기술을 포함한다”(Bohr 1963c [1958 essay] , 4, 강조는 필자) 보어적 절단은 전체성의 특정 사례의 부분들을 구분하여 표시한다. “적절한 양자 현상의 본질적인 전체성은 그것의 잘 정의된 세부구분에서의 어떤 시도가 현상 자체의 출현과 양립불가능한 실험적 배치에서의 어떤 변화를 요청하는 환경에서 논리적인 표현을 발견한다”(Bohr 1963b [1954 essay] , 72). 보어는 이와 관련하여 그가 “물리학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는 바, ‘관찰에 의한 현상의 방해’ 또는 ‘만들어진 물리적 술어들[속성들]이 측정에 따른 원자적 객체들에 귀속한다’와 같은 구절들에 대해 특별히” 경고했다. “그와 같은 구절들은 [...] 동시에 인과적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 보다 적합한 표현방식으로 나는 전체 실험적 배치에 설명을 포함하여, 특정 환경 아래에서 획득된 관찰들을 예외적으로 지칭하는 현상이라는 단어의 적용에 찬성했다”(Bohr 1963b [1949 essay], 63-64).
보어는 양자 역학적 측정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37] 그 또한 현상들의 본질적인 전체성을 강조하므로, 보어는 아마도 측정이 독립적 객체들의 ‘객관적’ 속성(즉 측정 이전의)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보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자 현상을 세부구분할 가능성을 상기하고 통상적인 물리적 속성들을 원자 객체들에 부여하는 것의 애매성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종류의 논증들[즉 우리가 고려해 왔던 종류의 것]이다”(Bohr 1963b [1949 essay], 51). 그보다 보어의 ‘객관성’ 개념의 사용은 “그 어떤 명백한 지칭도 어떤 개별적 관찰자에 대한 것이 아니다”(Murdoch 1987, 99에서 인용). ‘객관적’이라는 의미는 재생가능하고 명백하게 소통 가능한 것으로서, “항구적인 흔적들이 [...] 실험 조건을 정의하는 물체들에 남겨진다”는 것이다. 보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므로 소위 경험 철학과 비판 철학의 학파에 공통되는 어떤 태도는 객관적 지식과 주관적 믿음 간의 다소 모호한 구별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 세기의 물리과학의 발전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자연의 관찰자로서 우리 입장과 관련된 교설에 따르면, 새로운 배경은 객체성과 주체성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기 위해서만 만들어졌다. 논리적 관점으로부터 <120>우리는 객관적 기술을 통해 그와 같은 소통들의 지각과 관련하여 그 어떤 애매함도 받아들이지 않는 경험의 소통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Folse 1985, 15에서 인용)
분명히 보어의 객관성 개념은 객체와 관찰 행위소들 간의 고유한 또는 데카르트적 구별을 단언하지 않으며, 관찰-독립성을 의미하는 뉴턴적 의미의 그 어떤 객체와도 완전히 대조된다.[38]
나의 보어 독해에서, 보어의 분석에서 중추적인 논점이란 물리적 장치들이 여타의 것들을 배제하는 특유한 개념을 체현하는 것으로서, 주체-객체 구별을 표시한다는 점이다. 즉 물리적이고 개념적인 장치들이 주체-객체 경계를 표시하는 비이원론적 전체를 형성한다. 다시 말해 개념은 어떤 특정한 물리적 장치들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획득하고, 이는 객체와 관찰 행위소들 간의 보어적 절단의 배치를 표시한다는 것이다. 이 의미론적-존재적 미결정성의 해법은 객체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을 제공한다. 보어의 설명에서, 객체성은 “실험 조건들을 정의하는 물체들에 남겨진 항구적인 표시들 – 전자의 충돌로 인해 생긴 사진 건판 위의 얼룩들과 같은 –”에 대한 사유가능성(accountability[의무])을 요청한다(Bohr 1963c [I958 essay], 3). 그러므로 “실험 조건들을 정의하는 물체들”은 의미있고 객관적인 과학적 실천을 위한 시작점이자 마침점 둘 모두로 기여한다.
남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측정된 속성의 결정값을 위한 객관적 지시물은 무엇인가? 객체와 도구 간의 그 어떤 고유한 구별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측정된 속성은 추상적 객체 또는 추상적인 측정 도구 둘 중 하나에 의미있게 귀속될 수 없다. 즉 측정값은 관찰-독립적인 객체에 귀속될 수도 없으며, 측정 행위에 의해 창조된 속성에도 귀속될 수 없다(이것은 ‘측정’이라는 단어의 그 어떤 감각적 의미에 대해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독해는 현상들의 중요한 식별 특성이 “실험적 배치의 모든 관계적 특성”을 포함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측정된 속성이 현상들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보다 현대적인 맥락에 이 논점을 놓기 위해서는, 보어의 일반 인식론적 틀에 따라, 지시성(referentiality)이 재개념화되어야 한다. 지시대상은 관찰-독립적인 객체가 아니라 현상이다. 이러한 지시성에서의 이동은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다. 즉 객관적 지식을 위한 조건은 지시대상이 현상이라는 점이다(관찰-독립적인 객체가 아니다).[39]
마침내 보어는 다음과 같이 파동-입자 이중성 역설을 해결한다. ‘파동’와 ‘입자’는 <121>독립적인 물리적 객체들이 아니라, (차이나고, 실제로 상호배제적인 장치들과) 차이나고, 상호배제적인 현상들을 지시하는 고전적 개념들이다. 그는 이것이 비일관성으로부터 이론을 구출했다고 강조했는데, 왜냐하면 상호배제적인 실험 배치물들이 요청되므로 입자 행위와 파동 행위를 동시에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어의 인식론적 틀은 뉴턴 물리학 연결된 틀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실상 보어의 철학-물리학은 과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새로운 인식론을 비롯하여 어떤 새로운 논리적 틀을 구축하게 함으로써, 다수의 계몽적 관념들을 침식한다. 이 새로운 해석틀, 즉 ‘상보성’의 틀은 독특하고 중차대한 경향에 있어서 과학적 실천의 본성에 관한 전통적 이해로부터 벗어난다. 측정 실행은 획득된 결과들의 제거 불가능한 부분이다. 이러한 실행들이 세계 안에서 관건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과학적 이론화 작업의 부분임에 틀림 없다. 즉 보어는 이론 안에 실천을 정립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도구, 측정, 기술(description), 해석, 인식론 그리고 존재론은 분리가능한 고려사항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연결들을 이어지는 방법론적 개입에서 탐색할 것이다.
방법론적 개입: 보어 독해 그리고 보어의 인식론적 틀의 미결정성
보어의 저작들을 읽고자 한 많은 철학자들, 역사가들, 그리고 몇몇 물리학자들은 그 과제의 어려움에 대해 논평해 왔다. 예컨대 아브라함 페이스(Abraham Pais)는 “아인슈타인은 언젠가 보어에 대해 ‘그는 그의 의견을 하나의 항구적인 모색처럼 말하고 결코 확실한 진리을 소유한다고 믿지 않는 듯한 의견을 말한다’라고 언급했다”고 썼다(Pais 1982, 417). 보어의 스타일은 대개의 과학 저술에는 흔치 않은 것이다. 그의 저술은 그 자신의 기술 과정에 관한 자기-의식을 반영하며, 이는 과학 지식 생산에 있어서 기술의 역할에 관한 전반적인 탐구와 일치한다. 또한 이는 양자 물리학의 이해에 대한 그의 접근법에서도 근본적이다. 이와 유사하게 나는 나의 보어 독해에서도 나 자신의 기술적이고 해석적인 과정에 주의를 두려고 노력해 왔다. 결과적으로 나는 여기서 나 자신의 해석 장치들과 별개로, 보어가 실제로 사유하거나 의도한 것을 발견했다고 전혀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애매함을 해결하는 다양한 길에 관한 숙고함으로써, 어떤 일관된 읽기를 제공하고자 애쓴다. (보어에게 기술이란 실재 물질적 현상들이지 몇몇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라.)
<122>보어의 포스트-뉴턴적인 그리고 인식론과 조응하는 틀에서의 주요한 특성들에 관한 나의 제안은 보어의 저작들에 관한 20년간의 강도 높은 연구에서 나온 것이다. 양자 이론에 관한 해석적 질문들은 이론 입자 물리학 대학원 생이었던 나를 매료시켰다.(물리학과 대학원이 그와 같은 질문을 수용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비과학자들에게는 희한한 일일 것이다.)[41] 내가 물리학 조교수였을 때까지 나의 주요 관심사는 보어의 포스트-뉴턴적 틀 안에서 보다 넓은 철학적 주제들로 확장되었다. 종신재직권은 보다 깊은 숙고를 위한 기회를 제공했다.
지금까지 내가 제시했던 생각들은 파이어아벤트(Feyerabend 1962), 후커(Hooker 1972), 본(Bohm 1985), 폴스(Folse 1985), 페터슨(Petersen 1985), 하너(Hanner 1987), 무르도크(Murdoch 1987), 그리고 하워드(Howard 1994)를 포함하여 보어의 물리학적 철학에 대한 많은 표준적인 2차 문헌의 개별적인 저자들과 고려할 만한 의견일치를 이룬다. 이러한 학자들이 관점이 많은 중요한 점들에서 폭넓게 분기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 비록 내가 이론 입자물리학자의 관점에서 여러번 주요 문헌들을 읽고, 이 저작들의 여러 측면들이 내가 나 자신의 보어의 철학-물리학에 관한 관점을 공식화하는 동안 나에게 도움을 주었고 지금도 계속 도움을 주었다 할지라도, 나는 이 여타 학자들의 생각에서 드러난 관점들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보어 학자들 간의 의견 불일치를 고려할 때, 보어의 해석틀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고려해야 한다. 대부분의 보어 학자들(그리고 보어를 연구하지 않았던 많은 다른 이들)은 어떤 반실재론적 형식을 보어에게 부여하는데, 이들은 보어를 실증주의자, 관념론자, 도구주의자, (거시)현상주의자, 상대주의자, 실용주의자 그리고 (신)칸트주의자로 불러왔다. 철학자 헨리 폴스(Henry Folse)와 나는 보어를 실재론자로 보는 소수 관점의 강한 옹호자였다. 비록 우리가 보어의 실재론의 본성에 관해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존 호너의 독해 또한 실재론적 요소를 가진다.
보어의 입장의 애매함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난점 중 하나는 그가 그의 저작들에서 인식론적 주제들에 집중하며 결코 존재론적 언질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이론과 실재 사이에서 유지하려할 만한 어떤 일치의 본성을 분별하는 것은 어렵다. 일관된 보어적 존재론에 관한 명확한 제시 없이, 보어의 철학-물리학에서 지속되는 것이 무슨 종류의 실재론적 또는 반실재론적 입장인지 결정하는 과제는 처음부터 불운해 보인다. 다음 절에서 나는 내가 보어의 관점에 일관된다고 믿는 어떤 존재론을 제안할 것이며, 상관관계적 해석 태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123>보어의 입장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보다 심대한 난점은 그의 철학-물리학이 재현주의를 침식시킨다는 점이라는 것을 논하고, 그것이 여러 전통적인 실재론과 반실재론 형식의 기반이 된다고 논할 것이다. 보어는 과학-의-철학 논쟁과 관련하여 평범한 입구 앞에 자리한 분석의 무대에 들어선다. 보어는 그의 분석을 우리가 어떻게 기술적 개념들의 본성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과 함께 시작한다. 그것들의 쓰임새의 특수한 조건이 있는가? 관찰 용어들을 위한 올바른 지시대상은 무엇인가? 객관적 기술의 조건은 무엇인가? 이러한 앞서 질문들에 대한 보어의 대답이 재현주의를 침식한다손 치더라도, 나는 보어가 진정 실재론자이고 그 개념을 재개념화함으로써 유지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논할 것이다. 다음 장에서 나는 내가 ‘행위적 실재론’이라고 부르는 이 재개념화된 실재론적 관점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을 제공할 것이다.
시작할 때부터 내가 언급했듯이, 나의 목표는 보어의 철학-물리학에 관한 믿을만한 표현을 제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중요한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제에 대한 사유를 위해 어떤 일관된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답하면서, 나의 보어 철학-물리학에 대한 사유가 내 공식화의 모든 곳에 드러난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 만큼이나, 이러한 틀의 완전한 전개를 보어에게 부여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보어의 실재론적 실천
보어의 철학적 태도과 관련하여 아마도 가장 널리 퍼진 관점은 그가 실증주의자(positivist)라는 것이다. 하지만 비록 문헌 안에 이 특정한 명칭을 대신하여 다양한 암시와 언급들이 있었다할지라도, 이 규정은 심각하게 문제적이다.[42] 이런 식의 보어 해석은 그의 철학적 전망과 공명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또한 보어가 정확히 과학을 실천했던 방식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나는 이어지는 곳에서 전자의 내용을 설명할 것이다. 이 절에서는 후자에 초점을 맞춘다.
보어의 실천이 가진 실재론적 본성은 예전 양자 이론을 매혹시켰던 파동-입자 이중성의 역설을 해결하는 그의 접근법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보어의 가까운 동료였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비록하여 몇몇 반실재론자들은 핵심적인 요인이 견실한 개념적 기초가 아니라, 어떤 작동중인 수학적 구조라는 그들의 해법에 만족스럽게 머물면서 빛과 물질이 파동과 입자 둘 모두를 전개한다는 혼란스러운 사실에 대해 도구주의적 태도를 채택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역사적 증거는 보어가 개념적 난점들의 만족스러운 해법을 발견하는데 강력하게 집중했으며, 위태로운 단계를 거쳐 이 확고한 노력의 과정에서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려고 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보어는 <124>파동-입자 이중성에 관한 일관된 이해를 발견하는 것에 대해 너무 깊이 사려한 나머지 만약 이 파우스트적 계약 안에서 그가 겉보기에 모순적인 발견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그의 방법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어떤 점에서 모든 물리적 원리들 – 에너지와 운동량 보존 - 중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해 단념할 가능성을 생각했다. 1924년에 보어는 크레이머스와 슬레이터와 함께 에너지와 운동량 보존이 개별적인 원자적 사건들의 수준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급진적인 추론을 제안하는 논문을 썼다. 도구주의자들 또는 몇몇 완고한 반실재론자들은 상호배제적인 진술의 적용가능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와 같은 극단적인 시도들을 날려 버렸을 것이다. 세 사람은 반대되는 실험적 증거가 개별적 원자 사건을 위해 보존 법칙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명이 밝혀졌을 때, 재빨리 그 제안을 철회했지만, 슬레이터는 보어가 그와 같은 급진적인 제안을 따르도록 그를 설득한 것 때문에 보어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보어가 얻은 교훈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결과로부터 우리는 양자 이론의 일반적 문제 안에서 평범한 물리적 개념들의 측면에서 기술가능한 역학적이고 전기역학적인 이론들의 변형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현상의 기술이 지금까지 기반했던 시간과 공간의 상들의 본질적인 실패에 마주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으로 본다.(Bohr 1963a [1925 essay], 34-35)
상당히 흥미롭게도 보어는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란 양자 이론이 재현주의의 본질적인 실패를 드러낸다는 점이라고 결론짓는다.[43] 사실상 그를 궁극적으로 자연과 기술적 개념들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반재현주의적 접근법을 채택하도록 이끈 것은 그의 과학적 실천에서의 실재론적 수행이었다. 이것은 그가 ‘상보성’이라고 불렀던 그의 인식론적 틀, 궁극적으로 소위 양자 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44] 즉 다수의 의미있는 학자들이 상보성의 틀을 공공연히 반실재론적 철학으로 읽는다 해도, 역사적 증거는 바로 그 틀의 전개과정이 보어의 과학적 실천 안의 그의 입장에서 특정 실재론적 수행에 달려 있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몇몇 동시대 도구주의자들처럼 그도 수학적 수식체계가 ‘대표로 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에 만족했을 것이고(즉 계산이 실험 데이터와 일치하는 수식체계에 기반한다는 사실에 만족했을 것이고), 빛과 물질의 이중 본성의 문제를 위한 실행가능한 화해방법을 발견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했을 것이다. 보어는 과학이 “우리가 그 한 부분인 자연”에 대해 우리에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전념했다. 이것은 철학적 태도가 과학 이론들의 구성 안에 물질화하는 방식에 관한 날카로운 예시이다.
보어의 존재론: 현상들과 간-행들
"보어는 자주 심각하게 오해되었는데, 나는 이것이 그의 독자들이 [...] 그의 언급들을 [...] 원자적 세계로부터 실험적 탐구가 독립적으로 기술가능한 그 세계가 자동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 고전적인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 추정에 우겨넣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보어에겐 그런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가 그것을 ‘절대적으로 그 자체’로 있다는 식으로 알수 있을 만한 물리적 세계에 대한 가능한 신적인 접근법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개념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그러한 상황들, 그 결과에 관한 명확한 소통이 가능한 상황들에 연루될 수 있는 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 이는 세계가 고전 이론이 말하는 방식에 따라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고전적인 실재론적 형이상학과 인식론에 완전히 대조되는 것이다."
- 클리포드 후커(Clifford Hooker),
「양자 역학적 실재의 본성」(The Nature of Quantum Mechanical Reality)
실재론-반실재론 구별은 자주 주체-객체, 문화-자연, 단어-세계 이원론에 뿌리박힌 진리 대응설의 믿음에 대한 질문의 기초로 묘사된다. 존재론으로부터 인식론의 분리는 이러한 이원론의 반향이다. 보어의 철학은 명백하게 고전적 인식론과 존재론의 바로 그 기초를 침식하는 방식으로, 데카르트적인(본래적인, 고정된, 확실한) 주체-객체 구분과 논쟁한다. 오게 페테르센(Aage Petersen)은 「닐스 보어의 철학」(The Philosophy of Niels Bohr)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전통적인 철학은 우리가 언어를 무언가 이차적인 것으로, 그리고 실재를 일차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보어는 언어와 실재의 관계를 향한 이러한 태도가 부적합하다고 간주했다. 우리가 그에게 기초적인 것은 언어일 수 없지만, 소위 언어 아래에 놓인 실재가 그런 것이라고, 언어는 하나의 그림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 위에 있고 무엇이 아래에 있는지를 말할 수 없는 그런 식으로 언어에 메달려 있다. ‘실재’라는 단어는 마찬가지로 단어이며, 우리가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배워야만하는 단어이다”라고 응답할 것이다.(Petersen 1985 , 302)
불행하게도 보어는 우리가 ‘실재’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가 생각하는 바에 대해 분명하지 않다.
보어는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과 같은 중요한 인식론적 질문에 집중하지만, 그의 사유의 존재론적 차원들에 관한 상세한 표현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보어가 존재론의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제기하지 않는 것은 불행이다. <126>이것이 양자 물리학에서 기초적 주체를 정립하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막대한 도움을 주었다고 믿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최소한 그것은 보어와 과거에 서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던 아인슈타인 간의 어떤 향상된 대화를 위한 조건들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어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침묵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것 중 몇몇을 논평해 보자.
내가 보어의 미결정성 원리를 논했던 절에서 언급했다시피, 보어는 하이젠베르그의 인식적 해석을 문제 삼는데, 왜냐하면 그가 측정을 위해 고유한 속성을 가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가 있다는 생각을 임의로 취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보어는 ‘자연에 관한 역학적 개념’이 양자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측정도구와 탐구과정 중에 있는 물리체계 간의 상호작용이 자연에 관한 역학 개념의 생각지도 못한 한계를 구성한다는 인식은 경험의 질서 안에서 물리 체계에 대한 분절된 속성들의 배분에 의해 특성화되지만, 관찰의 조건들에 합당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Bohr 1963b [1954 essay), 74). 그리고 그는 또한 분명히 측정 상호작용의 미결정적 본성은 “인과성의 고전적 관념의 궁극적인 폐기와 물리적 실재의 문제를 향한 우리 태도의 급진적인 개정의 필요성”을 이끌어 낸다고 진술한다(Bohr 1963b [1949 essay], 60. 강조는 필자).
보어는 아인슈타인에 대한 중요한 응답에서 실재의 본성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실증적 태도를 취한다. 1935년에 아인슈타인고 두 명의 동료, 보리스 포돌스키(Boris Podolsky)와 나탄 로젠(Nathan Rosen)은 양자 역학이 어떻게 실재의 본성에 관해 이해하도록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 논문을 출판했다. ‘실재’라는 말에 대한 일관된 보어의 의미를 규정하려는 나의 노력에서, 나는 잘 알려진 ‘EPR 논문’에 대한 보어의 응답의 관건적인 구절로 돌아 간다. 여기서 보어는 명백하게 EPR의 ‘물리적 실재’에 관한 정의를 거부한다.[45]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보어가 표명한 논증이 아인슈타인과 그의 동료들의 분석을 불신하고, EPR 역설을 최종적으로 해결하려는 그의 시도에 있어서 중추적이라고 지적해 왔다. 나는 이 둘 모두가 내가 보어의 저작들로부터 몇몇 모호하거나 부수적인 구절은 아니지만, 보어가 실재의 관념에 대한 그의 생각들의 제안을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한 것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말하며, 또한 보어에 관해 내가 읽어 본 학자들 중 누구도 이 구절의 의문의 여지 없는 특성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놀라움을 표한다. 보어는 마지막 문장에서 물리적 실재에 관한 그 자신의 정의를 제공한다.[46]
우리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제 위에 언급된 바,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그리고 로젠에 의해 제안된 물리적 실재의 기준이라는 말이 ‘체계를 방해하는 어떤 방식이 아니라’라는 표현의 의미와 관련하여 어떤 애매함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안다. 물론 [이것은] <127>측정 과정의 마지막 임계 단계 동안 탐구 상의 체계의 역학적 방해에 관한 아무런 질문도 고려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경우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본질적으로 체계의 미래 행위와 관련하여 가능한 예상들을 정의하는 바로 그 조건들에 대한 영향력에 관한 질문이 존재한다. 이러한 조건들이 ‘물리적 실재’라는 말이 적합하게 부가될 수 있는 어떤 현상의 기술에 속하는 고유한 요소를 구성하므로, 우리는 언급된 저자들의 논증이, 양자-역학적 기술이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그들의 결론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이해한다.(Bohr 1935, 700)
처음에 보어가 ‘현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논의 중에, 나는 “예상의 가능한 유형들을 정의하는 조건”이 어떤 현상의 기술에 관한 본래적인 요소를 구성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므로 마지막 문장의 첫 번째 구절은 보어의 ‘현상’이라는 어휘의 용법과 일치한다.[47] 따라서 마지막 문장은 ‘물리적 실재’라는 말이 현상들에 정당하게 따라 붙을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보어의 현상이라는 생각의 다른 면모를 살펴 보자. 첫째로, 보어의 측정 상호작용에 관한 분석이란 미결정적 불연속성이 어떤 고유한 주체-객체 구별에 대한 고전적 믿음을 침식한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사실상 그는 객체들이 장치에 의해 규정된 결정가능성의 조건들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인 실존을 가진다는 바로 그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상보성에 관한 보어의 저작들은 본래적인 의미론적 미결정성과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사이의 고유한 분리의 결여에 관한 근본적인 인식론적 함축에 집중하지만, 나는 이것이 의미론적임과 동시에 존재적인(단순히 인식론적이지만은 않은) 미결정성을 이해하는데까지 뻗어나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비록 보어가 (특히 하이젠베르그에 의해 수용된 바, 객체가 측정과정에 의해 방해 받는 선재하는 속성들을 가진다는 형이상학적 전제의 거부를 포함하여) 그와 같은 분명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그의 관점에 관한 나의 설명에서 진술했기에, 그렇게 하는 정당화할 만한 이유가 있다. 이러한 미결정성의 존재론적 본성을 분명하게 하는 것은 결정된 속성들과 더불어 객체들이 결정되어 있으며, 결정된 의미에 상응하는 결정된 개념이 본래적인 미결정성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필수적 조건들로부터 독립적이라는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가정의 거부를 수반한다. 본래적인 존재적-의미론적 미결정성을 해결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특수한 측정 장치의 실존이다. 달리 말해 측정 장치는 문제가 되는 개념의 규정적 의미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이며,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묶여 있고 속성화된 (하부)체계들의 실존을 위한 가능성의 조건이기 한데, 이것들 중 하나가 문제가 되는 속성의 측정에서 다른 것을 표시한다. 특히 장치들은 <128>현상들 내부에서 ‘객체들’의 경계들과 속성들을 결정할 가능성을 위한 조건들을 제공한다. 여기서 ‘현상들’이란 객체와 장치의 존재론적 분리불가능성이다.[48]
개별적으로 결정된 실체들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측정은 분리된 개별실체들 간에 어떤 상호작용을 초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정된 개별실체들은 그것들의 간-행으로부터 출현한다. 나는 이 ‘간-행’이라는 개념을 형이상학적인 개체주의(특히 분리되어 결정된 개별실체들의 앞선 실존)에 기대어 통상 사용되는 ‘상호작용’과 대조해서 개별실체들의 존재론적 분리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도입한다. 현상은 ‘객체’와 ‘측정하는 행위소들’의 특수한 간-행이다. 객체와 측정하는 행위소들은 선행한다기보다 그것들을 생산하는 간-행으로부터 나온다.[49] 중요하게도 우리는 따라서 현상을 객체-그-자체로서, 즉 (칸트적인 또는 현상학적인 의미에서) 지각된 객체가 아니라 특수한 간-행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존재론의 기초는 근본적인 분리불가능성이기 때문에, 어떤 칸트적인 예지적인 것-현상들 간의 구별을 횡단한다. 즉 현상의 ‘뒤에’ 또는 현상의 원인으로 존재하는 결정적으로 제한되거나 속성화된 개별실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50] 현상에 관한 이러한 존재론적 이해는 보어의 통찰과 일치한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것은 양자 물리학에서 최근의 실험적이고 이론적인 발전들과도 일치한다(7장을 보라).
보어의 실재론
보어의 사유가 드러내는 바, 재현주의에 대한 활발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보어의 사유가 ‘실재론적’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아인슈타인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보어의 응답으로부터 나오는 이전 절의 인용구절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반대로, 이 기술(description)은 이전의 논의로부터 나오는 바, 측정에 관한 명확한 해석의 모든 가능성들의 합리적 활용으로 규정될 것이며, 객체들과 양자 이론의 장에서 측정하는 도구들 간의 한정적이고 통제불가능한 상호작용과 양립가능하다. 사실상 어떤 두 가지 실험 과정들의 상호 배제만이 있는데, 이것은 상보적인 물리적 양에 관한 명확한 정의를 받아들이며, 새로운 물리 법칙을 위한 여지를 제공하는데, 이는 처음에는 기본적인 과학 원리와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공-현존(co-existence)이다. 상보성 개념이 규정하고자 겨냥하는 바는 바로 물리적 현상들의 기술과 관련하여 이런 전반적으로 새로운 상황이다.(Bohr 1935, 700)
<129>우리는 이 마지막 문장에서 과학 이론이 물리적 현상들을 기술한다고 들었다. 보어의 존재론의 비고전적 본성을 강조할 때, 관찰-독립적인 객체로부터 물리적 현상들로의 중차대한 존재론적 이전이 없다면, 보어의 진술은 진리에 관한 고전적인 대응설을 지지하는 확고한 실재론자의 선언과 같이 건전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적인 ‘대응’은 이론과 현상 사이이지, 관찰-독립적인 실재의 그것이 아니다.
중요하게도 ‘대응’은 이 개념의 평범한 의미보다 철학적으로 보다 풍부하고 섬세한 어떤 것을 상징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내가 이 장의 초반부에 언급했다시피, 보어는 진리 대응설이 전제하는 재현주의의 실패를 지목하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기술’(descrption)도 그것이 재현주의적 이론에서 가지고 있던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보어의 사유에서 이론적 개념들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기술되고 있는 그 현상을 생산하는 장치에 체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보어의 틀은 물체들의 생산에 관한 어떤 원-수행적 해명을 제공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나는 다음 장에서 보어의 사유에 있어서 수행적 차원의 더 진전된 탐구를 제시할 것이다. 이 중요한 권고사항을 부여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응관계를 규정하는 문장이 가리키는 바, 중요한 실재론적인 어떤 것이 보어의 공식화에 대해 존재한다. 게다가 현상의 생산에서 인간적 개념들과 같은 ‘주체적 요소들’의 중요한 역할을 마주하는 객체성을 유지하는 방법을 발견하려는 보어의 실행은 관념론과 상대주의에 대한 그의 반대의 저변에 깔려 있다. 장치들은 칸트적인 개념적 틀이 아니다. 그것들은 물리적 배치이다. 그리고 현상은 단순히 인간 정신의 지각에 대한 참조물이 아니다. 오히려 현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사물들을 분리하여 윤곽 짓지만) 실재 물리적 개별실체들 또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보어의 틀이 실재론의 특유한 생각과 일치한다고 결론 지으며, 주체-객체, 문화-자연 그리고 단어-세계 구분에 기생하지 않는다.
인과성
보어가 주목한 바에 따르면, 장치로부터 객체의 분리불가능성은 “인과성에 관한 고전적 관념의 폐기와 물리적 실재의 문제를 대하는 우리 태도의 급진적인 개정의 필요성을 [...] 초래한다”(Bohr 1963b [1949 essay), 59-60). 그의 분석이 인과성에 관한 고전적 관념, 즉 완고한 결정론의 궁극적인 폐기를 주제화하도록 강제한다고 주장하면서, 보어는 이것이 무질서, 임의성 또는 원인-결과 관계의 철저한 거부를 야기한다고 추정하지는 않는다. <130>오히려 그는 원인-결과 관계의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지의 느낌과 인과성에 대한 요청은 똑같이 인식의 문제에서 핵심을 형성하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 불가결한 요소들이다”(Bohr 1963a [1929 essay], II7). 요컨대 그는 인과성에 대한 통상적인 이원론적 사유의 양 극단, 즉 절대적 자유와 완고한 결정론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솔베이 회의(Solvay meeting)에서 상이한 측들로부터 교육적으로 언급되었다. [...] 그 회의 도중에 현상들의 출현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지에 대해 흥미로운 논의들이 제기되기도 했다. [...] 질문은 개별적 효과들의 발생에 있어서 우리가 디렉(Direc)에 의해 제안된 전문용어를 채택해야 하는지 아닌지 였다. 그리고 우리는 하이젠베르그에 의해 제기되었던, ‘자연’의 부분에 있어서 어떤 선택에 관심을 두었는데, 이는 우리가 측정 도구들을 구성하고 그것들이 기록되는 바를 읽는 ‘관찰자’의 부분에 있어서의 어떤 선택과도 연관된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용어와 같은 어떤 것은 미심쩍어 보인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평범한 의미에서 자연에 의지를 부여하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은 반면, 다른 한편으로 관찰자가, 그(또는 그녀)가 배치했던 조건들 아래에서 나타나는 사건들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이러한 경험의 영역에서 우리가 개별적 현상들을 취급하고 측정 도구들을 조절할 우리의 가능성들이, 우리가 오로지 우리가 연구하길 원하는 현상들의 상이한 상보적 유형들 간의 선택을 허용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Bohr 1963b [1949 essay], 223)[52]
즉 본래적인 또는 데카르트적인 주체-객체 구별을 넘어서는 행위소의 본성을 인식하는 방법이 반드시 존재한다. 비록 이러한 이해가 그의 저작들에서는 전개되지 않는다 해도, 사실상 보어의 용어 ‘관찰 행위소’(agencies of observation)는 과학적 실천에서 자연과 행위소의 역할에 관한 그의 새로운 이해를 촉발한다. 다음 장들에서 내가 그와 같은 이론적 전개를 구해낼 것이지만, 여기서 나는 인과성의 새로운 의미에 관한 몇몇 중요한 특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인과성에 관한 이 새로운 의미가 다음과 같은 고전적 선택지들의 단순한 조합에 기반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즉 한편으로 우리의 장치 선택에 있어서 절대적 자유, 다른 한편으로 완고한 결정론적 인과 관계, 이에 따라 객체들이, 일단 장치가 선택되면, 단순히 ‘자신의 일을 할 뿐’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조합은 보어가 생각했다고, 또는 생각했었다고 내가 믿는 바에 비해 풍부하지도 섬세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 요소들 각각은 대립적이며 본래적인, 또는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 중 <131>어떤 것도 인간이 앞으로 나아가고, 몇 개의 다이알을 돌리고, 관찰하기 위해 뒤로 물러섬으로써 결과를 결정하거나 ‘개입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주장들은 마찬가지로 동일한 대립적 이원론에 의해 조건지워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인과성은 너무 자주 이항적 사태로 개념화된다는 점이다. 즉 완고한 결정론이 적용되는 상황(즉 인과적 결정)이거나 또는 자유의 상태(즉 아무런 인과적 결정이 없는 상태)가 있거나다. 히지만 결정론과 자유의지(보어가 특별히 언급한 것) 간의 평범한 선택지보다 인과 관계에 대해 생각할 더 많은 길이 있다. 인과성의 전통적 공식화가 독립적으로 규정적인 개별실체들이 몇몇 인과적 상호작용을 진행한다고 추정하므로, 우리는 명백하게 이미 매우 새로운 기반 위에 있는 셈이다. 세 번째로 과학적 결과들이 재생가능하다는 사실은 간-행이 몇몇 종류의 인과적 구조 – 즉 원인으로 존재하는 무언가와 결과로 존재하는 무언가 - 를 초래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실험의 재생산성을 위한 해명이 불가능해질 것(적어도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요구한다(또는 적어도 요청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인간에게만 행위소의 관념을 적용하는 것이 과연 이해할만 한지 아닌지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특유한 개념은 이미 우리가 고려하고 있었던 분석에 의해 종료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주제는 단순히 누가 또는 심지어 무엇이 행위소를 가지게 되는지, 또는 어찌 되었든지간에, 문화나 자연이 어떤 특정 결과를 결정하는지 아닌지 뿐만 아니라 간-행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우리가 ‘자연’과 ‘문화’, ‘인간’와 ‘비인간’, 그리고 ‘과학’과 ‘사회’ 간의 구별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무엇이 그러한 생산을 이끌어 내고,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행위소의 본성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해 해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와 같은 인과성의 본성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주석]
3장
1] 이중-슬릿 회절 격자를 통과하는 파동이 어떻게 회절 또는 간섭 패턴을 산출할 수 있는지에 관한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2장을 보라. 이어지는 논의는 그 장에서 만들어진 논점 위에 구축되며 왜 그리고 어떻게 이중-슬릿 실험이 파동과 입자 행위의 구분에 유용한지 설명한다.
2] 이 사실을 너무 가볍게 지나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 성취의 심오함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맥스웰은 두 가지 겉보기에 분명히 관련되어 있지 않은 다른 현상들 – 전기(예컨대 전구를 밝게 빛나게 하는 전자의 흐름)와 자기(예컨대 자석과 접촉하는 철의 인력) - 이 사실은 하나의 현상의 다른 표현들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빛이 전자기파라는 것을 통합된 관점의 맥락에서 보여 줄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1905)에 기초를 제공했다. 역설적으로 같은 해(1905년)에 아인슈타인은 그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가져다 준 빛의 입자적 본성을 제시하는 논문을 썼다(그가 상대성 이론으로 상을 받았다는 널리 알려진 잘못된 생각과는 반대로).
3] 파동-입장 이원성의 역설을 이끌어 가는 경험적 증거에 대한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예컨대 Kuhn 1978을 보라.
4] 겉으로 보기에 실험적 결과가 일관성(consistency)과 재생가능성(reproducibility) 둘 모두를 보여주는 반대되는 결과들 – 때로는 입자, 때로는 파동 - 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혼란의 한가운데에 어떤 깊은 질서의 감각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유사-입자적 행위를 전개하는 주어진 어떤 특정 실험적 배치가 주어지면, 이러한 구성이 언제나 유사-입자적 행위를 산출하지, 결코 파동과 같은 행위를 산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어떤 적합한 대안적 실험 장치들이 주어지면, 파동같은 행위의 전개에서도 일관성과 재생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빛의 ‘이중’ 본성이 매우 신중하게 취해졌다는 것은 이러한 기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보어에게 실험 결과의 일관성과 재생가능성은 아마 그 결과들이 놀라운 것이라서, 어떤 일관된 틀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그에게 주었다. 사실상 이러한 요인들은 그의 상보성 원리의 발전에서 근본적이었다.
5] 예를 들어 파도의 경우, 파동은 물의 특수한 요동이지, 물에 있는 어떤 분리된 실체가 아니다. 사실상 이것은 19세기에 에테르의 실재성에 관한 논의 뒤에 있던 동기였다. 즉 전자기파를 ‘떠받치는’ 매개체는 무엇인가? 실제로 ‘꿈틀거림’(wiggling)을 행했던 실체는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받아들이면서, 에테르라는 생각은 현대 물리학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전자기파의 경우 ‘꿈틀거림’을 행하는 것은 전자기장이다.
6] 한심스러운 용어인 ‘웨이비클’(wavicle [파동wave과 입자particle를 합친 조어-역자])은 한때 파동-입자 이중성 역설에 대한 양자적 해결의 승리한 상징처럼 남용되었다. 예컨대 만약 존재론적 질문이 빛 또는 물질이 실제로 파동인지 입자인지에 관해 제기되면, 우리는 가끔 확신에 찬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그 대답은 모든 의문을 잠재우면서, 마치 이 새로운 용어가 존재론적 모순을 손쉽게 해결한다는 듯이 사람들은 웨이비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빛의 이중 본성을 요약하는 어떤 순환적 정의 바깥에서) ‘웨이비클’의 규정적인 특성에 관한 어떤 한정도 없이, 이 용어는 빛과 물질의 이중성에 의해 제기된 도전을 취급하는 것에 대한 단순한 거부 이상을 지칭하지 않는다.
7] “다소간의 실천적 배치들과 그것들의 약간의 허구적 활용과 같은 것에 관한 성찰은 문제들의 본질적 특성들에 주의를 직접적으로 기울이는데 있어서 가장 교훈적이다”(Bohr 1963b [1949 essay], 50).
8] 이와 유사하게, 우리가 전자 대신에 광원을 사용하는 같은 유형의 실험을 수행한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우리가 상대적으로 높은 강도의 광원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파동들의 보통의 간섭 패턴을 관찰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매우 약한 강도의 광원을 사용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경우 우리는 전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한 번에 하나씩 나타나는 각각의 빛의 점들을 볼 수 있다. (주: 빛이 입자처럼 행동할 때, 그것은 보다 적합한 유사-입자적 성격에 ‘포톤’이라는 이름이 부여된다.) 원리적으로 전술한 발견들과 분석들은 포톤 또는 전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9] 그림 II는, 비록 그것이 그의 그림 4와 5의 결합에 함축되어 있다 해도, 여기 그림 8에서 재생된 보어가 실제로 그렸던 다이아그램이 아니다. 이 특정 버전은 Bertet et al. 2001에 나온다. 이것은 보어에 의해 제안된 선택-경로 실험에 대한 변형으로서, 여기서는 여기 있는 단일 슬릿 대신에, 두 슬릿 모두 스프링에 메달려 있다.
10] 이 의미심장한 실험은 불확정성(또는 비결정성-이 논점은 이 장 뒷부분에서 다루어진다)의 본질에 대한 보어의 관점과 하이젠베르크의 관점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탐구할 부가적인 이익을 가져다 준다. 사실상 이런 종류의 실험들은 우리가 중요한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한 경험적 대답들을 제공할 수 있게 한다. 상세한 것은 7장을 보라.
11] 우리가 뉴턴 물리학에 실재론적 해석과 반실재론적 해석 중 하나를 부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해도, ‘고전적 실재론’의 그것은 우리의 계몽적 직관(Enlightenment intuitions)에 특히나 유혹적이며, 나는 이 고전적 실재론의 교설에 관한 변형들이 시간을 절약하게 하고, [그래서] 물리학과 학부생들에게도 매력있는 것이라고 들었다. 물론 뉴턴의 자주 인용되는 말처럼 그 어떤 가설적 제안도 가장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실재론적 태도가 오늘날의 표준에 이르기가지 실증주의라는 명칭을 달아 왔던 자연철학자에 귀속된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많은 학생들이 이것을 알아차리고 있진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물리학 과정에는 일반적으로 과학에 있어서 상이한 해석적 태도들에 대한 어떤 논의도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메타이론적 주제들에 대한 이런 널리 유표된 도외시의 교육학적 함축에 대해서는 Barad (1995, 2000)를 보라.
12] 빛이 운동량과 에너지를 가진다는 사실은 태양광을 사용해 가동되는 우주선을 만드는 방법에서 최근의 연구 프로젝트를 위한 기반이 된다. 그와 같은 우주선은 엔진이 필요 없다. 엔진은 바람을 사용하는 범선과 매우 유사하게 태양으로 우주선을 가동하고 조종하기 위해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사용함으로써 공간 안을 항해할 것이다.
13] 보다 정확히 말해, 양자는 “존재할 수 있는, 그리고 양이 발생하는 동안 변화하는 배수 단위의 물리량 최소단위”(OED)를 의미한다.
14] 플랑크 상수는 아주 작은 수이다. 즉 h = 6.626 × 10-34 j-s이다. 몇몇 다른 자연 상수를 사용하면, 플랑크 상수를 길이, 즉 플랑크 길이로 변환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길이는 너무 작아서 당신이 플랑크 길이로 원자 지름을 측정하고자 하면서 초당 1 플랑크 길이를 잰다면, 우주 현재 나이의 100억 배가 걸릴 것이다.
15] 실제로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플랑크 상수는 자연에 관해 보다 근본적인 어떤 것을 표시한다. 가끔 양자가 자연의 입자성(graininess)의 측정이라고 말해지지만, 문제는 실제로 자연의 특정 속성이 아니라, 자연의 본성 자체다. 이 불연속성이 ‘본질적’이라는 의미는 자연이 어떤 고정된 본질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본질의 본성적 결여가 자연이 존재하는 바에 있어서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즉 내가 논할 것이지만, 자연은 간-행적 생성이다(‘간-행’intra-action은 ‘상호작용’interaction이라는 고전적으로 익숙한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고유한 특성들을 가진 각각의 객체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개체주의 형이상학에 관한 확실한 붕괴를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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