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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우주의 중간에서 만나기>(카렌 바라드) 서언~1장

by Nomadia 2022. 6. 18.

 

원문서지: Karen Barad,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7, ix-70

_ ‘< >’ 안의 숫자는 원문의 페이지 수임

 

번역: 박준영(노마씨, 수유너머 104)

 

<ix>

서언과 감사의 말

 

이 책은 얽힘들(entanglements)에 관한 책이다. 얽혀 있다는 것은, 분리된 개별체들의 결합에 따라, 서로 간에 단순히 꼬여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독립성, 자기-충족적 존재를 상실한 채 있다는 것이다. 존재는 어떤 개별적 사태가 아니다. 개체들은 그것들의 상호작용들에 선재하지 않는다. 그보다 개체들은 그들의 얽힌 상-관하기(inter-relating)의 일부로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출현한다. 출현(emergence[창발])이 시공간의 어떤 외재적 규준에 따라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또는 과정으로서 단 한 번만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시간과 공간은 물질과 의미처럼 존재하게 되는바, 각각의 간-(intra-action)을 통해 구체적으로 재배치된다. 이에 따라 창조와 재생, 시작과 회귀, 연속성과 불연속성, 여기와 저기, 과거와 미래를 어떤 절대적 의미에서 구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감사의 말을 쓴다는 것, 무언가가 발생하도록 도운 은인들과 은혜들을 감사히 여긴다거나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감사의 말을 쓴다는 것은 저자의 마음에 쓰여지거나 간직된 기억들에 있는 책을 통해 여러 장면들로부터 인정되거나 선택된 주요 순간들과 중요한 개인들을 종이에 쓰는 단순한 행위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기억은 개별적인 뇌 주름들 안에 남아 있지 않는다. 그보다, 기억은 우주에 기입된 시간-공간-물질의 접힘들(enfoldings)이다. 또는 더 잘 말해 보자면, 그것은 우주의 물질화 과정의 접혀진 표명들(articulations[절합들])이다. 기억은 완전히 또는 간단하게 지워지고, 덧쓰여지거나 재생되는(즉 마치 소유될 수 있는 사물인 것처럼 누군가의 소유로 주어지거나 빼앗아지는) 고정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리고 상기(remembering)는 연달아 일어나는 순간들의 재연이 아니라, 어떠한 개별적인 것보다 더 큰 과거와 미래의 활성화이고 재배치이다. 상기와 재-(re-cognizing)은 염려하거나, 만족하거나, 어떤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책임(responsibilities[응답가능성])을 축소하지 않는다. 그 보다 모든 간-행들처럼, 그것은 우리가 그 부분인 바, 얽힘들과 책임을 확장한다. 과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짐짝이나 스크랩북 또는 어떤 감사의 말처럼 하나로 엮여질 수 없다. 우리는 결코 그것을 남기고 떠나지 않으며, 또한 그것도 결코 우리를 뒤에 남겨놓을 수 없다.

 

그래서 이 감사의 말은 저자가 책을 쓰는 긴 과정에 대해 회상하고 그 과정을 가능하게 해 준 그 길을 따라 지지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그리고 따르지 않는 것도 따르지 않는다). 이 책의 시작을 표시하는 때맞춘 특이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총괄적으로 기획을 이해했던 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어떤 개체적인 내 것’(I’s)[내가 속한] 그룹이 보증할 수 있다고 주장할 만한 어떤 과정을 쓰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내가 이 책을 썼다기보다, <x>책이 나를 썼다고 해야 한다. 또는 나아가, ‘우리-행적으로’(intra-actively) 서로서로를 썼다(‘상호작용적으로라기 보다 -행적으로라고 쓴 이유는, 쓰기가 창조성의 일방향적인 실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쓰기는 저자로부터 책 페이지 위로 흐르지 않으며, 그보다 쓰기의 실행은 저자의 되먹임 반복이며 상호적으로 구성적인 작업이면서 개정작업이다). 이것은 나 자신의 행위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테면) 행위소의 본성과 개체들(인간이든 비인간이든)의 범위 안에 있는 그것의 추정된 국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얽힘은 예컨대 저자-책이라는 짝이 드러내는 고립된 이항적 공동생산이 아니다. 친구들, 동료들, 학생들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 다양한 대학 기구들, 학제들과 전공분야들, 숲과 시냇물과 동부와 서부 해변, 이른 아침 시간의 기막힌 평화와 해맑음, 그리고 그 외의 더 많은 것들이 이 과 그 저자둘 모두가 구성되는 것을 도운 것 중 일부다.

 

나는 내 어머니가 이것을 읽고 내가 또 사태를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상만 해도 미소가 나온다. 그녀는 내가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요점만 말하면서, 과정에 도움을 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감사를 표한다고 말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녀는 물론 옳다. 알아 먹을 수 없는 감사를 표하는 것에 무슨 좋은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내가 말해질 필요가 있는 것(마치 그것이 어떤 당연히 주어진 것인양)을 단순하게 말할 수 없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내 존재의 핵심에 함입되어 있는 정의(Justice)에 대한 희구 때문이다. 정의는 감사의 말, 인정 그리고 애정어린 관심을 야기하는 것으로서, 단숨에 획득될 수 있는 어떤 상태가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해(solution)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각각의 마주침, 각각의 간-행을 위한 개방적이고 생생한 존재의 계속되는 실행만이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깨어 있기 위해, 즉 정의롭게 살아 가는 동안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들에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응답의 능력을 사용하고, 우리의 책임성(responsibility[응답가능성])을 활용한다. 세계와 그것의 생성 가능성들은 각각의 만남(meeting) 안에서 재형성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질로 되는 사태와 주체가 구성되는 동안 우리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무엇이 죽음 위에서 번창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 안에서 정의가 살아남을 가능성을 유지할 만남의 실행을 초래하는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죽은 것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들을 포함하여, 각 존재의 고난에 어떻게 민감해질 것인가? 과거를 끝난 것으로, 그리고 미래를 우리의 것이 아닌 것 또는 오직 우리의 것으로 이해하는 사고방식들을 어떻게 교란할 것인가? 물질화의 문제, 즉 물질, 공간 그리고 시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과 관심들은 비전(祕傳)의 사색으로 이루어진 사치물이 아니다. 정의를 위한 물질화(Mattering)와 그것의 가능성과 <xi>불가능성은 그것의 생성 안에서 우주의 통합적 부분들이다. 그리고 정의롭게 살기 위한 유인은 존재라는 그 물질 안으로 기입되어진다. 이러한 유인에 반응하는 법은 물질의 본성에 대한 것만큼이나 많은 응답(response)과 응답가능성(responsibility[책임])의 본성에 대한 질문으로 존재한다. 정의를 열망한다는 것, 어떤 개체나 개체의 집합보다 더 광범위하게 열망한다는 것은 이 연구를 뒤에서 추동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연결들과 타인에 대한 책임에 대한 것, 즉 얽힘들에 관한 것이다.

 

나는 많은 탁월한 존재자들과 얽혀지는 것에서 셀 수 없을 만한 행운을 누렸다. 그들은 나를 지지했고 풍성하게 만든 존재자들이고, 우정, 친절, 온정, 유머, 사랑, 용기, 영감, 인내, 지적 연대, 매우 소중한 평가, 활달한 도전, 세부적인 주의, 그리고 사유에 대한 사랑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나의 감사의 마음은 몇 장의 종이 위에 나열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존재자들로 확장된다. 그런 목록들은 얽힘들에 단적으로 정의(justice)를 부여할 수 없다. 나는 이 감사의 말에서 그녀나 그의 이름을 찾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함으로써 실망할 누군가(과거나 미래의, 내가 알고 있거나 아마도 그렇지 않을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나 그가 분명 누군가가 손에 들 수 있는 그런 단순한 객체가 아닌, 마땅히 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살아 있고, 변화하는 현상 안에 기입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우선, 나는 바나드 대학(Barnard College), 포모나 대학(Pomona College), 러트거스 대학(Rutgers University), 마운트 홀리요크 대학(Mount Holyoke College) 그리고 산타 크루즈의 캘리포니아 대학(the University of California at Santa Cruz)에 있는 내 학생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나는 당신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웠고, 당신들은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새롭게 그려진 영역들로의 그러한 갑작스러운 진출에 나와 동반해 준 엘리자베스 (제이) 프리드만(Elisabeth (Jay) Friedman)과 테마 카플란(Temma Kaplan)에게 빚을 지고 있다. 누가 알았겠는가? 바나드 대학에서 물리학 연구팀의 특별한 역사를 창조하면서, 물리학자 사무엘 데본스(Samuel Devons, 그는 에르네스트 루터포드Ernest Rutherford의 제자였다)가 예기치 않게도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 연구팀에서 가르치고, 실험들을 준비하고 커다랗고 오래된 실험 도구들과 씨름하면서, 나는 도구들의 신체성(physicality)과 그것들이 체현하는 관념들에 관한 어떤 식별능력을 발전시켜 나갔다. 닐스 보어(Niels Bohr)의 철학-물리학(philosophy-physics)에 관한 나의 전진적으로 독립적이고 자발적인 연구들이 이러한 특별한 보어주의적 성찰로 나를 이끄는 준비과정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분명지만, (이론) 물리학에서 나의 정규 교육과정의 어떤 부분도 나에게 그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 우리가 가장 커다랗게 신세 진 사람들은 여러 상이한 시간들과 공간들(적어도 절대적 차이에 관한 이와 같은 외적 규준들이 존재하는 전반적으로 부적합한 개념들에 따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결코 직접 만나지는 않았을지라도, 만약 내가 수 년간 가장 뛰어난 대화상대자였던 닐스 보어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는다면, 나는 심각하게 태만한 짓을 저지르는 셈이다.

 

<xii>나는 이 과정에서 친구들과 동료들로부터 격려와 지적이면서 영적인 자양분이라는 선물을 받는 특별한 행운을 누렸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앨리스 아담스(Alice Adams), 베티나 압테커(Bettina Aptheker), 마리오 비아지올리(Mario Biagioli),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로레인 코드(Lorraine Code), 지오바나 디 치로(Giovana Di Chiro), 카킬밀리아 펑크 엘레하브(Camiila Funck Ellehave), 릴라 페르난데스(Leela Fernandes), 낸시 플람(Nancy Flam), 마이클 플라워(Michael Flower), 알리시아 가스파르 데 알바(Alicia Gaspar de Alba), 루쓰 윌슨 길모아(Ruth Wilson Gilmore), 비제이 골드버그(BJ Goldberg), 디나 곤잘레즈(Deena Gonzalez), 앨리스 풀톤(Alice Fulton), 자콥 헤일(Jacob Hale), 산드라 하딩(Sandra Harding), 에밀리 호닉(Emily Honig), 수 후친스(Sue Houchins), 데이비드 호이(David Hoy), 조슬린 호이(Jocelyn Hoy), 마릴린 아이비(Marilyn Ivy), 에블린 폭스 켈러(Evelyn Fox Keller), 로리 클라인(Lori Klein), 마틴 크리거(Martin Krieger), 제이 라딘(Jay Ladin), 마크 란스(Mark Lance), 린 르로즈(Lynn LeRose), 자나 레빈(Janna Levin), 라우라 리우(Laura Liu), 니나 뤼케(Nina Lykke), 파울라 마르쿠스(Paula Marcus), 린다 마르탱-알코프(Linda Martín-Alcoff), 린 한킨슨 넬슨(Lynn Hankinson Nelson), 루팔 오자(Rupal Oza), 프란체스 폴(Frances Pohl), 엘리자베스 포터(Elizabeth Potter), 라비 라잔(Ravi Rajan), 제니 리어돈(Jenny Reardon), 이렌느 레티(Irene Reti), 잔 로젠(Jeanne Rosen), 수 로서(Sue Rosser), 폴 로쓰(Paul Roth), 제니퍼 뤼센가(Jennifer Rycenga), 조안 사퍼스탄(Joan Saperstan), 빅터 실버맨(Victor Silverman), 카리다드 수자(Caridad Souza), 바누 수브라마니암(Banu Subramaniam), 루시 수크만(Lucy Suchman), 차리스 톰슨(Charis Thompson), 샤론 트라위크(Sharon Traweek), 쉐일라 와인버그(Sheila Weinberg), 바바라 위튼(Barbara Whitten), 엘리자베스 윌슨(Elizabeth Wilson) 그리고 앨리슨 와일리(Alison Wylie).

 

나는 특히 여러 장들의 초고를 너그럽게도 읽어 주고 그에 대한 논평을 해 준 동료들과 친구들에게도 빚을 지고 있다. 프레데릭 아펠-마글린(Fnédérique Apffel-Marglin), 허브 번스타인(Herb Bernstein), 에이미 버그(Amy Bug), 존 클레이튼(John Clayton),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조셉 루즈(Joseph Rouse) 그리고 아서 자욘스(Arthur Zajonc)가 그들이다. 조셉 루즈는 특별히 전체 초고에 대한 매우 가치 있는 논평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주었다. 스카우트 칼버트(Scout Calvert), 크레시다 리몬(Cressida Limon), 자콥 멧칼프(Jacob Metcalf), 아스트리드 쉬라더(Astrid Schrader), 히더 안느 스완슨(Heather Anne Swanson), 그리고 메리 위버(Mary Weaver)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이들은 페미니즘적 과학 연구에 관한 대학원 세미나에 참여한 학생들로서, 책의 수고(manuscript)에 대한 영감에 넘치고 유쾌한 토론들 했으며, 특히 내가 산타 크루즈에 도착했을 때 따뜻하게 환대해 주었다.

 

나는 조셉 루즈와 도나 해러웨이가 그들의 관련 저작들로 영감을 준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여긴다. 그들은 상호 관계하는 물질들에 대한 간-행의 특별한 기쁨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정, 관대한 지원, 격려 그리고 몇 년 간에 걸쳐 마련된 각각의 글들에 대한 빈틈없고 유용한 조언을 해 주었다. 이 소중한 친구들은 내 사유와 집필의 요소들 중 불가결한 부분이 되었다. 그들의 기여는 셀 수 없을 지경이다. 나는 또한 내 친구인 비키 커비(Vicki Kirby)와의 짜릿한 대화들에서 막대한 은혜를 입었다. 내 저작에 대한 프레데릭 아펠-마글린의 확고한 열의와 그녀의 열정적인 믿음은 내가 글쓰기에 관한 난해하게 얽힌 분야들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나를 지탱해 주었다. 나는 우리의 대화들 동안 확실히 출현한 것으로 보이는 놀랄만한 회절 패턴들(diffraction patterns)에 대해 아직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내 반려견인 로비(Robbie)에게도 매우 감사하다. 내가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쓸 때, 그는 <xiii>매 해 밤낮으로 내 곁에 머물면서, 따뜻함과 사람을 듬뿍 주었고, 나를 꼬드겨서 [건강을 유지하는데-역자] 매우 필수적인 산책을 하도록 했다. 그의 복슬복슬한 몸이 이 책 전체와 함께 했다.

 

나의 부모님인 해롤드(Harold)와 에디트 바라드(Edith Barad)에게도 헤아릴 수 없이 감사드린다. 그들은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믿어주신다. 만인의 선함에 대한 내 어머님의 확고한 믿음과 각각의 사람들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보려는 그녀의 신조는 세상에 드문 것이며, 고무적인 것이기도 하다. 나의 아버지에게도 진심을 담아 감사드린다. 그는 내가 이웃집의 어떤 남자아이보다 더 훌륭하게 야구공을 던지고 농구공을 골대에 집어 넣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함께 공놀이를 하면서 보낸 날들은 내 삶 안에서 페미니즘적인 순간들의 기초에 놓여져 있다. 그러한 놀이는 내가 나를 잘 다루는데 있어서 탁월하게 유용한 교훈들과 기술들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정말로 노동계급의 가치들에 따라 양육되었다는 것에서 매우 운이 좋았음을 느낀다. 그러한 가치들은 내가 사람의 가치나 훌륭함을 그들의 직업, 성과, 교육, 부 또는 세속적 경험에 따라 평가하는 것을 거부하게 했다.

 

로안 윌슨(Roanne Wilson)은 이 책을 통틀어 아낌없이 그녀를 투신했다. 따뜻한 식사, 동료애, 사랑, 공동육아를 함에 있어서 유연성, 풍부한 지원, 그리고 아주 시의적절할 때 타주는 핫초콜릿까지. 어떤 고맙다는 말로도 그녀가 나에게 준 유무형의 모든 것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나의 딸 미카엘라(Mikaela)는 여러 면에서 나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이다. 그녀가 열려 있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세상과 만나는 매일매일의 방식은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의 만족할 줄 모르는 호기심, 배움의 과정에서 순수한 즐거움을 경험하는 줄어들지 않는 능력, 다른 존재들을 돌보는 넓게 열려진 감각,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스러운 관심(가장 작은 세부사항들과 세계의 짜임새를 흡수하면서, 그녀는 시, 드로잉, 그림, 조각, 이야기, 춤 그리고 노래를 통해 그것을 재창조한다)은 미래를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핵심 요소이다. 이 책은 그녀에게 헌정된다.

RADKVV

 

<3>

1. 얽힌 시작

 

서문: 물질화의 과학과 윤리

 

물질과 의미(meaning)는 분리된 요소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뒤얽혀 서로 융합되어 있으며, 아무리 강력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떼어놓을 수 없다. 심지어 원자들은, 그 이름 그대로, 아토모스(ἄτομος, atomos), 불가분의’(indivisible) 또는 절단불가능한’(uncuttable)이란 의미를 가지지만, 서로 분리될 수 있다. 하지만 물질과 의미는 화학적 과정, 원심분리기 또는 핵폭발에 의해서도 분리될 수 없다. 물질의 가장 작은 부분들이 아주 견고한 아이디어들과 커다란 도시들을 날려버릴 수 있을 때처럼, 물질의 본성이 문제가 될 때 가장 명백해지는 물질화는 실체(substance)와 의미 둘 모두의 문제다. 아마 이것이 현대 물리학이 존재, , 그리고 행위, 그리고 각각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윤리학, 사실과 가치에 속한 문제들의 불가피한 얽힘을 그처럼 생생하고, 통렬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상황설정

19419, 나치 제국 건설이 그 정점에 도달했을 때, 독일 물리학자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는 나치가 점령한 덴마크에 있던 그의 스승인 닐스 보어를 방문했다. 유대계 혈통인 보어는 그의 이름을 딴, 코펜하겐의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이었다. 보어의 제자이자 그 자신도 지도적인 물리학자였던 하이젠베르크는 그 당시 원폭을 생산하려는 독일의 노력을 대표했다. 조국에 대한 국가주의적 자부심으로 충만한 하이젠베르크는 해외로부터의 제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나치가 아니었고, 나치에 동조하지도 않았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의 양자 혁명에 있어서 두 명의 탁월한 지도자였다. 상보성(complimentarity)과 불확실성(uncertainty)이라는 양자물리학에 대한 그들 각각의 해석은 양자역학에서 소위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을 구성한다. 이 두 사람의 노벨상 수상자는 마치 아버지(보어)와 아들(하이젠베르크)의 관계처럼 여겨지는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관계는 이 불길한 방문으로 인해 깨졌다. 1941년 가을에 그들 간에 오고간 운명적 대화에서 세부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지만, 독일의 원자폭탄에 관한 전망을 비롯하여, 가장 심각한 결론을 초래할 문제가 논의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1]

 

왜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으로 온 것일까? 그는 <4>보어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일까?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 하이젠베르크는 연합군의 원자폭탄 계획에 대해 보어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알아내고자 한 것일까? 그는 보어에게 독일의 프로젝트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그가 자신의 힘이 닿는 한에서 그것을 멈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안심시키려고 했을까? 만약 양 진영이 원자폭탄을 만들려는 각각의 프로젝트를 포기하도록 설득시키기 위해 원자 물리학에서 그들이 공히 차지하고 있던 권위를 활용하자고 보어를 납득시킬 수 있는지 그는 알려고 했을까? 그는 물리학 또는 윤리학, 아니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그의 스승으로부터 중요한 통찰력을 얻으려고 했을까?

 

하이젠베르크는 왜 1941년에 보어를 보러 갔을까라는 이 질문은, 이 운명적인 만남을 둘러싼 논쟁을 다룬 최근 토니상을 수상한 연극의 핵심 주제이다. 이 연극은 논쟁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연극 자체는 바로 그 이야기의 노선을 충실히 따른다. 마이클 프레인(Michael Frayn)의 연극 코펜하겐(Copenhagen)에서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보어의 아내 마가레트의 유령은 예전 보어의 거처에서 만나 그 운명적인 가을날의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마치 원자 물리학에서 문제의 세부사항들을 해결하는 것처럼, 일어났을 법한 세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를 고찰하기 위해 실행하고 때때로 멈추면서 보어,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마가레트는 하이젠베르크의 의도를 추정하기 위해 세 가지 시도를 한다. 불확실성을 해결하기 위한 각각의 시도는 좌절된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히 프레인이 원했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와의 유비를 이끌어내면서, 프레인은 하이젠베르크가 1941년에 코펜하겐에 왔던 이유에 대한 질문이 새롭게 발견된 증거나 몇몇 새로운 확실한 통찰로 곧장 나아갈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이 미비한 실제적 이유때문에 해결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이 인간 사고의 고유한 특성이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알려지고 완수되면, 아무도 심지어 하이젠베르크조차 그가 왜 코펜하겐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론상] 결코 인간의 생각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고 하는 프레인의 불확정성 원리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의 실제 결론이 아니라, 극작가의 발명품이자 순수하게 유비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프레인은 원자나 전자들과 같은 물리적 대상들의 행동에 대한 우리 지식의 한계와 관련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인간 행위를 아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문제에 적용하고 있지 않다. 그는 단순히 어떤 평행성을 도출할 뿐이다. 이 유비를 사용하여, 프레인은 인식론(지식의 본성에 대한 질문)의 영역으로부터 도덕성의 영역 (가치에 대한 질문), 즉 지향성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도덕적 이슈들의 비결정성(undecidability)으로 빠르게 나아간다. 그 자신의 불확정성 원리에 기반하여, 그는 우리는 누군가가 자신이 하는 바의 이유를 정말로 <5>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이 그 기초를 잃어버린다고 추론, 또는 도덕적으로 설명하려는 것 같다. 우리는 결코 하이젠베르크가 독일을 위해 실제로 원자폭탄을 만들려고 했는지 아닌지, 또는 그가 히틀러가 새로운 대량 파괴무기를 손에 넣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함으로써 좌절시켰는지 아닌지 알지 못할 것이다. 인류의 운명이 걸려 있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심오한 도덕적 의미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되고, 불확실성은 책임을 부여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좌절시킨다. 이 불확실성은 역사의 판단으로부터 하이젠베르크의 고뇌에 찬 영혼을 구해준다. 이 연극은 따라서 그것이 잠재우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유령을 깨우는 것이다.

 

코펜하겐은 매력적이고, 영리하며 훌륭하게 쓴 희곡이다. 그것은 적절한 논쟁을 가미하면서, 과학과 정치학의 명백한 친근성을 대담하게 드러내는 한없이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그것은 또한 비판의 여지도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연극에 빈번히 등장하는 중대한 역사적 부정확성을 제기하지만, 내 관심은 양자물리학과 그것의 철학적 함의에 관한 프레인의 묘사인데, 이 묘사는 난점으로 가득차 있다고 나는 주장할 것이다.

 

프레인의 연극은 내가 이 책에서 성취하길 바라는 것에 대한 유용한 대위법의 역할을 한다. 표면상으로 주제는 유사한 것으로 드러난다. 과학, 정치학, 윤리학 그리고 인식론에 대한 질문이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핵심 관심사에 속한다. 실제로, 양자 물리학과 그것의 철학적 함의,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접근법의 차이들도 역시 다루어진다. 그러나 유사점은 이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목적, 접근법, 방법론, 장르, 스타일, 관객, 배경, 관심, 가치, 경험적 사실에 대한 설명가능성의 수준, 엄격함의 표준, 분석의 형식, 논증의 양태 그리고 결론에서 갈라선다. 결정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철학적인 출발점과 물리학과 그 철학적 이슈에 대한 우리 각각의 관여의 정도에서 분명하게 갈라선다.

 

어떤 중요한 점에서 프레인의 관점은 내가 여기서 밝히고자 하는 관점보다 앎과 존재의 본성에 대한 상식적 관념들과 더 친근하고 더 수월하게 부합한다. 프레인은 그의 관객들에게 일련의 이항대립, 즉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 인간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 의식의 내적 상태와 존재의 외적 상태, 의도성과 역사, 윤리학과 인식론, 담론과 물질성과, 두 항을 접근시키는 그의 접근 방법이 간격을 가로지르는 유비들을 끌어낸다는 점을 제시한다. 그는 또한 미시척도와 거시척도 모두에 대한 개체주의적 형이상학을 전제한다. 즉 인간은 원자와 같이 (지능, 체온, 그리고 마음의 의도적 상태와 같은) 내적인 특성을 갖는 별개의 개체들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는 마치 그것들이 화학 조합에서 상호교환가능한 동위원소인 양, 존재와 앎, 존재론과 인식론이라는 이슈들을 때때로 <6>자유롭게 뒤섞는다.

 

그렇다면 양자물리학은 우리에게 과학적 실천의 본성과 그것의 윤리학과의 관계에 대해 무엇을 알려줄 것인가? 이 질문에 접근하기 전에, 두 가지 선행 주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우선 질문이 잘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양자물리학에서 해석적 주제(, 이론이 의미하는 바와 세계와 그것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와 관련된 문제)는 해결이 요원하다. 양자 물리학의 철학적 함의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때, 특정 해석이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떤 결정적인 대답을 얻을 수 없다. 나아가 그 주제에 대한 대중적인 열광은 접근성, 흥미, 그리고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가 선호하는 관점을 기술하기 위해 과학의 권위를 끌어모을 기회를 추구하기 위해 엄밀함을 희생해 버린 인기영합적 설명의 남발과 맞아 떨어졌다.[2] 결과적으로 대중은 양자 이론에 대한 진실을 말함에 있어서 어떤 오래된 반직관적인 주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함께 모임으로써, 그 대답은 고사하고, 이 잠재적으로 중요한 질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심각한 난점을 드러내게 된다. 명백하게도 이 질문에 대한 어떤 진지한 고려는 공상으로부터 타당한 논점을 분명히 구분하고 해석적 쟁점과 관련해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양자물리학에 대한 대중의 매혹은 그것이 근대적 세계관에 드러내는 반직관적 도전들, 이론을 발전시켰고 이의를 제기했던 지도적인 인물들(아인슈타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의 명성, 그리고 양자물리학이 야기한 근원적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자폭탄의 발명에 의해 대중적 상상 안에서, 공정하거나 불공정한 방식으로 자주 상징화되는) 응용 등 여러 가지 상이한 요인들에 아마도 대부분 기인할 것이다. 하지만 부정확과 오도 등 부적절한 많은 생각들의 범람을 설명하는 것이 양자물리학에 대해 알고자 하는 대중의 갈급함이라는 그러한 요인 밖에는 없는가? 무엇이 양자물리학의 주요 문제인가? 그것이 제기될 만한 바른 질문들에 영감을 주고, 앞서서 핵심 쟁점을 가져오며, 개방적 정신과 궁금함을 증진하는, 그러면서도 우리가 그 지혜를 필연적으로 과녁을 비껴가는 것처럼 보이는 반응을 얻기 위해 주위를 배회하는 양자 물리학의 주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적절성과 이해 사이의 필연적인 절충을 나타내는 어떤 불확실한 관계를 가정하는 것에 마음이 끌리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관련 쟁점들을 너무 자주 불만족스럽게 이해하게 하는 일종의 유비적 사고다.

 

우리는 과학과 <7>윤리학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양자 물리학의 함의라는 이 중요한 질문이 단순한 유비에 근거해서 공정하게 다루어질 것이라고 바랄 수 없다. 이것은 실패한 무수한 시도들로부터 우리가 깨달아야 할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다. 프레인의 코펜하겐은 적절한 하나의 예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연극은 어떤 중요한 교보재로 사용될 수 있다. 뒤에서 나는 몇몇 중요한 대조들을 이끌어 내고, 이 책의 주요 주제들 중 몇 가지를 도입하는 상황을 설정하는데 연극을 세부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간주곡은 관련된 역사적 배경, 주요 인물들 그리고 핵심 아이디어를 연극적으로 도입하게 하고, 나의 접근법이 비근한 유비적 접근법과 다른 중요한 방식들이라는 것을 강조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물리학자로서 우리는 원자에너지의 실천적 이용을 연구할 도덕적 권리를 가지는가?”[3] 보어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집요한 질문은 코펜하겐전체를 통틀어 유지되는 분위기로 작동한다. 하지만 극작가인 마이클 프레인의 경우, 이러한 도덕적 질문은 부차적인 이슈다. 그에게 흥미로운 것은 메타윤리적인 질문, 즉 도덕적 판단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라는 것이다. 프레인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주장한다. “도덕적 이슈는 언제나 결국엔 인식론적인 것, 즉 다른 사람들의 동기에 대한 판단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동기들에 대한 어떤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들의 행위에 대한 객관적인 도덕적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4] 그러나 이러한 딜레마가 어떻게 발생하는가?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동기와 의도에 대해 어떤 지식도 가질 수 없는가? 프레인에 따르면, 딜레마의 뿌리는 그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로부터 끌어내고자 한 유비로부터 도출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우리가 특정한 물리적 양들의 짝 이를테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아는 데는 필연적인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입자의 운동량은 그것의 속도와 관련되는데, 특히 운동량은 질량 곱하기 속도이다.) 프레인은 유비를 통해서 우리가 정신적 상태(이를테면 사고, 의도 그리고 동기들)를 아는 데는 필연적인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목적이, 하이젠베르크가 입자에 대해 제안한 유명한 원리, 즉 불확정성 원리를 유비적으로 인간에 적용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그런 방식으로 신중하게 행한다면, 그때 우리는 사람들의 동기들에 관한 어떤 지식도 가질 수 없다라는 말을 따르지 않는다.

 

하이젠베르크의 원리가 전하는 바를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에 대한 어떤 지식도 가질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는 두 측정량을 한꺼번에 잘 알 수 있는 방법들 사이에 어떤 절충도 구체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우리가 입자의 위치에 대해 더 잘 알수록, 우리는 그것의 운동량에 대해 더 적게 알게 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5] 따라서 프레인이 제안하듯이, 그가 주체의 행위들과 그 행위 배후에 놓인 주체의 동기를 사이에 있는 어떤 절충을 구체화하는 유비적 원리를 사람들을 위해 구성하는데 흥미가 있다면, 유사한 어떤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야만 할 것이다. <8> 즉 우리는 사람들의 동기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 없으며, 그들의 동기를 실행하는 행위들에 대한 어떤 것을 안다. 즉 우리는 어떤 사람의 행위와 그 행위의 동기가 되는 것 둘 모두에 대해 충분하게 확실성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그러한 원리를 옹호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순히 프레인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유비를 좀 정돈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동기에 관한 지식이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한된다는 그 사실은 도덕적 판단의 질문에 대한 사고를 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결과를 갖는다. 프레인은 원리상 우리 지식의 한계를 정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이에 따라 우리가 영원히 누군가의 동기에 대한 어떤 지식도 가지지 못하게 막혀있기 때문에, 어떤 객관적인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가 방금 살펴보았던 것처럼, 유비적인 것을 끌어내는데 있어서 보다 더 신중한 방식은 사실상 어떤 주체의 행위 배후의 동기화에 관한 지식에 기반하는 도덕적 이슈들에 대한 고려가 충분하고 완벽한 지식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부분적 이해에 기반할 수 있는 한 그 모든 고려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이제 프레인은 그가 이끌어낸 유비가 정확하게 평행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받아들이지만, 그의 인정은 우리가 막 논의했던 그의 유비적 추론의 중대한 실수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보다는 프레인의 이러한 용인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즉 그는 스스로가 양자 물리학에 기반한 도덕적 판단의 한계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선뜻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그의 연극을 (사고, 동기 그리고 의도와 같은) 정신적 상태들의 내용을 판별하기 위한 어떤 평행적인 인식적 한계를 탐색할 수단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원리화된 한계에 대한 그의 과장은 연극의 핵심적인 이슈로 향해 가는 근본적 난점을 드러낸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기보다, 프레인의 유비적 방법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지속하는 것이 유익하다. 우리가 프레인이 어떻게 연극에서 이러한 평행성을 이용하는지를 음미하기 전에, 그가 그 이슈들을 틀짓는 방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다른 유령이 이 연극에 출몰하고 있다. 즉 극작가의 동기라는 질문 말이다.)

 

논점은 이런 것이다. 나치가 코펜하겐을 점령한 1941년에 보어를 방문한 하이젠베르그의 의도 문제에 대한 논쟁은 결코 해결되지 않았다. 사실상 왜 하이젠베르그가 전쟁 중에 보어를 방문했는가라는 문제는 역사가 ()((re)solve)하고자 원하는 더 큰 퍼즐 안에 있는 어떤 중추적인 실마리이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하이젠베르그는 지도적인 독일 과학자이자 나치 원자폭탄 프로젝트의 핵심 인사로서 무슨 역할을 한 것이었을까? 전쟁 후 그가 주장했던 것처럼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폭탄 프로젝트를 무산시키는데 최선을 다했던 것일까? 또는 그 독일 프로젝트를 훼손했던 실제적인 장애물은 하이젠베르크가 물리학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데 실패했다는 그 사실, 즉 물리학 공동체의 다수에 의해 제기되는 결론이었는가? 프레인은 명확하게 하이젠베르그의 전후 표현에 공간한다. 그리고 프레인은 마찬가지로 정신의 심리적 상태들에 있어서 그의 불확정성 원리가 <9>하이젠베르그에 반하는 가혹한 판결들을 내리는 것으로부터 뒤로 물러서는 역사를 가지려는 시도의 수단들이라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는다. “나는 전체주의 사회들에서 사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안다라고 프레인은 말한다. “당신은 영웅적으로 행동했던 사람을 숭배할 수 있지만, 당신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6]

 

이 연극 자체가 특히 미국에서의 초연에 뒤이어 주목할 만한 여러 논쟁들을 야기했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런던에서의 열광적인 호응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과학자들과 과학사가들은 그것의 심각한 역사적 부정확성과 하이젠베르그에 관한 너무 심한 호의적 묘사 때문에 연극을 비판했다. 프레인은 퓰리처 상을 받은 토마스 파워스(Thomas Powers)의 책인 하이젠베르그의 전쟁-독일 핵폭탄의 숨겨진 역사(Heisenberg's War: The Secrrt History of the German Bomb, I993)가 그의 연극에 영감을 주었다고 고백했다. 영감이 중요하긴 하지만, 신뢰받지 못할 생각이 대체적인 얼개와 중요한 역사적 만남에 관한 극화의 세부사항들을 그리는데 있어서 일차적인 기초자료를 형성할 때, 예술가는 역사에 대해 어떤 의무를 가지지 않는가? 예술가의 도덕적 의무들과 책임은 무엇인가? 이러한 자질에 관한 질문이 프레인에게 제기되었다. 하지만 프레인의 [역사] 재구성 앞에 나온 새로운 역사적 증거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호하게 변경을 거부했다. 그의 비판가들에 대한 응답에서, 그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책임질 그 어떤 의무감도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가 역사에 대한 그 어떤 책임으로부터 하이젠베르그를 면제할 원칙적인 논증을 제공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는 놀랄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아마도 하이젠베르그는 실제로 면책받을 만할지도 모르지만, 프레인의 논증은 우리가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릴 어떤 근거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저널리스트인 토마스 파워스의 해석은 스위스계 독일인인 저널리스트 로버트 정크(Robert Jungk)의 신빙성 없는 논지에 기반한다. 정크의 천 개의 태양보다 더 밝은(Brighter than a Thousand Suns, 독일어판, I956; 영어판, I958)이 처음 독일에서 출판되었을 때, 그것은 독일 과학자들이 전쟁 부역에 참여했다는 혐의를 벗겨주었으며, 하이젠베르그는 그들 중 가장 주요한 인물이었다. 정크는 그들이 비밀리에 히틀러에 대항하여 저항하는 데 참여하였다고 주장한다. 파워스의 책에서 우리는 이러한 영웅적인 저항의 신화를 발견하는데, 이것은 독일 핵폭탄 프로젝트의 숨겨진 역사라는 식으로 심하게 윤색되어 유포되었다. 주목할 만하게도 로버트 정크는 공식적으로 그 자신의 논지를 거부했다. 한편으로 정크는 이와 관련된 인물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정크는 하이젠베르크가 전쟁 후에 보어와의 유명한 1941년 만남에 대한 기억을 자세하게 써 보낸 편지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정크는 그의 책에 그 편지의 사본을 넣는다. 그는 만약 우리가 [보어와 하이젠베르그 간의] 대화 내용을 심리적 용어로 해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실 아주 미묘한 뉘앙스에 의존할 것이다”[7]라고 쓴다.

 

프레인은 확실히 <10>“아주 미묘한 뉘앙스를 살펴볼 가능성에 감동을 받았지만, 보어는 그렇지 않았다. 보어는 그 이야기에 대한 하이젠베르그의 개작에 분노했다. 정크의 책에서 그 편지를 보고, 보어는 정크의 그릇된 해설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하이젠베르그에게 보내는 편지의 초안을 잡았다. 그러나 보어는 그 편지를 아예 보내지 않았다. 1962년 그의 죽음 이후, 보어의 가족은 편지의 여러 가지 초안들을 발견했으며 그것을 보어의 죽음 50년 후인 2012년까지 발표하지 말라는 조언과 더불어 코펜하겐에 있는 닐스 보어 문서고로 보냈다. 역사가들은 그 만남에 대한 보어의 판본에 대해서 생각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2002년에 보어의 가족은 하이젠베르그에게 보내지 않은 보어의 편지들의 다른 판본들을 포함해서 1941년 방문과 관련된 모든 문서들을 일찍 해제하는데 동의했다.[8] 이 이른 해제는 프레인의 코펜하겐(Copenhagen)에 의해 만들어진 논쟁에 관한 공적 관심에 따라 촉발된 것이었다.

 

그 문서들이 드러낸 것은 무엇인가? 하이젠베르그에 대한 답신에서 보어는 하이젠베르그가 1941년 코펜하겐에서 독일은 핵무기 보유에서 수위에 오르기 위한 경쟁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고 말한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으며 당황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보어는 하이젠베르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은 (...) 독일이 이길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가 전쟁의 다른 출구에 관한 희망을 유지하고 모든 독일인들이 협력하는 것과 관련하여 침묵하는 것이 매우 바보같은 짓이라는 당신의 확고한 신념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또한 연구실의 내 방에서 이루어졌던 우리의 대화를 아주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거기서 애매한 말들로 당신은 내게 확실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지요. 그러니까 당신의 지도 하에 핵폭탄 개발을 위해 독일에서 모든 것들이 이루어졌다고, 그리고 당신은 그 사안에 대해서는 상세한 것들은 말할 필요는 없었다고 말이지요. 왜냐하면 당신이 그러한 세부사항들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고, 과거 2년 간 그러한 준비들을 위해 거의 독점적으로 일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당신의 말을 아무런 대꾸 없이 들었지요. 왜냐하면 인류를 위한 중차대한 문제가 주제였기 때문이었지요. 우리의 사적인 친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운명적인 전투의 두 편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닐스 보어 문서고).

 

그리고 보어가 죽은 해인, 1962년에 쓰여진 초안에서 보어는 하이젠베르그에게 당신이 독일 물리학자들은 그와 같은 원자 과학의 적용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나에게 귀뜸했던 것을 생각해야 한다 했던 것은 나에게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이젠베르그가 정크에게 말한 이야기와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으로서, 후에 파워스에 의해 윤색된다.

 

이러한 폭로에 대해 프레인은 어떻게 반응한걸까? 그는 이 결정적인 역사적 기록의 부가에 직면하여 완고한 태도를 취한다. 프레인은 이러한 중요한 역사적 문헌들의 출현이 관련 주제들에 대한 그의 생각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과 그 연극의 앞으로의 판본들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암시했다. 그는 단지 하나의 부정확한 사실만 받아들인다. 즉 그가 <11>하이젠베르그를 너무도 쉽게 용서하는 식으로 보어를 그렸다는 것이다. [9]역사를 경시하는 이러한 태도는 연극을 전체를 완전히 관통하는 바, 역사적(“외적”) 사실 위에 심리적(‘내적’) 상태들이 있다는 프레인의 특권적 사유를 구성한다. 우리가 보다시피, 그러한 지점은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프레인에게는 그 어떤 역사적 사실도 심리적인 불확실성을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원리적으로 역사에 대해 해명할 수 없다.

 

이러한 배경하에, 연극으로 돌아가 프레인이 어떻게 그가 드러낸 메타윤리적인 딜레마를 조정하는지 이해해 보자. 여러 초고들을 씀으로서 물리학 문제들을 통해 작업하는 보어의 성향을 파고들면서, 프레인은 그의 관객에게 1941년 하이젠베르그가 보어를 방문한 계기에 보어와 하이젠베르그 사이의 대화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한 세 가지 시나리오 여러 다른 관점들을 탐색하는 세 가지 보충적인 초고들’ - 를 제시한다. 첫 번째 초고는 정크와 파워스의 윤색된 경의로 가득차 있는 것으로, 하이젠베르그의 관점을 폭넓게 소개한다. 보어의 아내 마그리트는 두 번째 초고의 주요인물이다. 그녀는 물리학 공동체의 다수 관점에 응답하면서 이에 대해 알고 있는 다수 공중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녀는 이 공동체가 독일 핵폭탄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의식적인 작업을 했다는 하이젠베르그의 주장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들은 대체로 폭탄을 만드는데 필요한 상대적으로 소량의 핵분열 물질을 식별하는 데 대한 하이젠베르그의 실패라는 운 좋은 결과 때문에 그 프로젝트가 실패했다고 이해한다. 세 번째 초고는 연극에 대한 프레인의 철학적 관심이 드러나는 지점에 놓인다.

 

세 번째 초고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은 연극의 막바지를 이끈다. 즉 하나는 클라이막스에 물리적 상태들과 심리적 상태들의 인지불가능성 사이의 유비를 제시한다. 이 마지막 초고는 프레인의 논점, 즉 우리가 원칙적으로 우리 자신의 사유, 동기 그리고 지향들을 방해받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언뜻 알아 볼 유일한 가능성은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다.

 

하이젠베르그: 그렇다 해도 훨씬 더 힘든 것은 우리의 눈 뒤에 있는 것을 최소한으로 알아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우주의 중심에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게 속해 있지 않는 두 가지 미소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어: 난 마그리트를 힐끗 보고는 한 순간 난 그녀가 이해하고 있는 것,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이 그럴 수 없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말하는 불쌍한 하이젠베르그와 같이 내 얼굴에서 사라진 미소를 봅니다.
하이젠베르그: 난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을 살핍니다. 그리고 순간 나는 방 안에 내가 그들을 보는 것과 같이 명확하게 세 번째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 챕니다. 이들의 절박한 손님, 옆 방에서 아둔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생각에 잠긴 채 머뭇거리는 그 사람 말이지요.
<12>보어: 난 나를 바라보는 그를 봅니다. 그는 근심어린 모습으로, 간청하듯이, 나를 오래된 날들로 데려가지요. 나는 그가 이해하는 것을 보고 있어요. 그리고 맞아요- 이제 때가 되었어요, 이제 그렇게 될 겁니다 그 방에서 실종된 누군가가 있어요. 그는 나를 보아요. 그는 마그리트를 봅니다. 그는 그 자신을 보지 않아요.
하이젠베르그: 전 세계 2억명의 사람들과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 사람은 언제나 숨어 있는 단 한 사람이에요.

 

앞선 장면에서 마그리트가 설명했던 것처럼, 자기 스스로 하이젠베르그는 왜 그가 코펜하겐에 왔는지 정말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의 마음의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마음은 그가 볼 수 없는 우주의 한 조각이다. 이 장면의 바로 뒤에 하이젠베르그와 보어는 산책을 위해 밖으로 나간다. 거기서 그들은 게슈타포의 도청을 피해 중요한 대화를 할 기회를 가진다.

 

보어: 그는 조심스럽게 그가 준비했던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하이젠베르그: 물리학자로서 어떤 사람은 핵 에너지의 실천적인 개발에 착수하기 위한 운명적인 권리를 가지나요?
마그리트: 그것은 엄청난 논쟁지점이네요.
보어: 나는 멈춘다. 그도 멈춘다 ...
마그리트: 이런 것이 그들의 방식이야.
하이젠베르그: 그가 나를 주시한다. 무섭다.
마그리트: 이제 마침내 그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이제 됐다. 앎의 순간, 즉 하이젠베르그는 그 자신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지만, 오로지 공포를 통해서 그렇게 한다. 이 공포는 보어의 얼굴에 드러나는 것이며, 그는 하이젠베르그를 주시한다. 이러한 앎의 상호작용이 일어나자마자, 보어는 어둠 소에서 그의 분노의 힘을 활용한다. 하지만 그는 잠시 멈춘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 주제에 도달하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그는 어떤 사고실험을 제안한다.

 

보어: 잠시 내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그 대신에 내가 생각하는 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기억한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만약 내가 멈춰서서, 분노를 갈앉히고 그에게 돌아선다면. 그리고 그에게 왜냐고 묻는다면.
하이젠베르그: 왜요?
보어: 왜 당신은 우라늄 235 동위원소로 핵폭탄을 만드는 것이 그토록 확실히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자신하시나요?
하이젠베르그: 계산과정 때문에?
보어: 235의 확산도 계산. 아니요 왜냐하면 당신이 그것을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계산하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당신은 의식적으로 계산이 가능해지리라는 것을 깨닫지 않았던 겁니다.
<13>하이젠베르그: 물론 난 지금 알게 되었지요. 사실상 그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말이지요. 자 보자... 잠깐만요...
보어: 그리고 갑자기 매우 다르고 매우 골치 아픈 새로운 세계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런 연후 (내가 보았던 그 [무기] 제작과정에서) 대지를 뒤흔드는 지독한 폭탄폭발음이 극장을 가득 채운다. 폭발이 진정될 때, 다시 한번 그 주제에 대한 설명이 마그리트로부터 나온다.

 

마그리트: 그것이 하이젠베르그가 당신에 대한 그의 우정을 지킨 마지막이자 가장 커다란 요청이었어요. 그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을 때 이해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당신이 그 보답으로 행동했다는 것은 하이젠베르그에게 마지막이자 가장 큰 우정의 행위였지요. 그를 오해한 채 남겨두는 것 말이에요.

 

우리 모두와 같이 하이젠베르그가 마음 속 깊은 모든 어둠이 드러나는 것으로부터 방어되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더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하이젠베르그의 의식적인 마음이 그 모든 무의식적인 사고들로 접근했더라면, 히틀러는 핵폭탄을 손에 넣었을 것이고, 폐허가 생겨난 후 세계는 광대하게 다른 지리정치적 형상에 직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한계를 가지는 것은 좋은 것이다. 우리의 낡은 영혼들을 구하는 것은 사물들의 핵심에 놓인 불확실성이다.

 

보어: 우리가 어떤 것에 손을 댈 수 있기 전에, 우리의 삶은 끝날 겁니다.
하이젠베르그: 우리가 누군지, 또는 무엇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우리는 먼지 속으로 사라질 겁니다.
보어: 우리가 불러일으킬 모든 먼지들 가운데 놓일 때
마그리트: 그리고 조만간 우리 모두의 아이들, 또한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이 먼지로 누울 때가 올 겁니다.
보어: 크든 작든 더 이상 아무런 결정도 없을 때, 모든 것이 다시 이루어질 겁니다. 아무런 불확실성도 존재하지 않을 때 말이지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의 지식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그리트: 그리고 우리 모두의 눈이 닫힐 때, 우리의 유령들이 떠나버릴 때, 우리의 사랑스러운 세계에 남겨질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파괴되고 굴욕당하고 사랑스런 세계 말입니다.
하이젠베르그: 하지만 잠시만, 이 가장 소중한 순간에 그것이 있어요. 파엘드 파크(Faelled Park)에 있는 나무들. 가메팅엔(Gammertingen)과 비베라흐(Biberach) 그리고 민델하임(Mindelheim). 우리의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 이제 비로소 코펜하겐에서의 이 짧은 한 순간이 간직됩니다. 확실히 일어나거나 정의될 수 없을 몇몇 사건들에 의해. 사물의 핵심에 있는 불확실성이라는 궁극적인 핵심에 의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아 남은 것은 우리의 인간성 우리의 한계들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진정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이다.

 

<14>이런 식으로 연극은 끝난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듯이, 이 결론은 도덕적 판단과 의무에 관한 질문과 관련하여 우리를 어디에 남겨 놓는가? 프레인은 아마도 이 핵심적인 질문을 더 해명할 수 있는 마지막 초고에서 또 다른 중요한 조치를 취한다. 마지막 초고에서 프레인은 그가 의도한 핵심으로 치고 들어간다(결국 그는 마치 그가 그 자신의 의도들을 아는 것처럼 연극에 대해 말한다). 즉 우리는 하이젠베르그의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프레인은 그 자신의 보어에 대한 판단들을 연극 안에 계속 심어 놓는다. 프레인이 그의 관객들에게 말하는 것은 보어이지 하이젠베르그가 아니다. 그는 수천수만의 죄 없는 사람들의 죽음을 초래할 핵폭탄 프로젝트에 착수하는 것으로 연극을 마무리한다(보어가 나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한 1943년 이래 로스 알라모스에 있는 미국 핵폭탄 프로젝트에 기여한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10] 핵분열 이론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준 것은 바로 보어다. 보어는 [...] 캡권총으로 엉뚱한 물리학자를 쏜 사람이다(우리가 그 무기의 진정한 본성을 배우는 것은 그 장면에 더 잘 적응할 때이며 동료 간의 활발한 상호대화의 모든 부분에 그 사실이 있다. 만약 보어가 실제로 하이젠베르그가 히틀러를 위해 폭탄을 개발하느라 분주했다고 생각했다면 1941년 보어가 자신을 죽일 수 있었다고 하이젠베르그가 주장하는 연극 말미에 캡권총은 다시 등장한다. 그가 직접 권총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면,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이유로 그들의 만남의 세부사항이 게슈타포에게 밀고되어 반역죄로 하이젠베르그는 살해되었을 것이다.) 한 번 이상 프레인은 우리에게 보어가 그의 삶에서 말 못할 끔찍한 순간을 되새기는 것을 보여준다. 즉 보어는 항해하는 배에 서서 그의 큰 아들이 익사하는 것을 바라본다. 이 일련의 되풀이되는 연극의 장면은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일까?

 

하이젠베르그: 키 손잡이가 다시 또 다시 때린다. 다시 또 다시...
마그리트: 닐스가 고개를 돌린다 ...
보어: 크리스티안이 구명부표에 가 닿는다. ...
하이젠베르그: 하지만 중요한 것에 대해 그들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보어: 우리가 유일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조차.
마그리트: 왜냐하면 말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으므로.

 

우리는 저자가 이 심대하게 고통스러운 인물의 비극을 모든 ()상상적인 종류의 삶--죽음에 관한 책임으로 보어를 뒤덮을 목적으로 휘두른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진저리친다. 그러나 이 사유불가능한 가설들은 프레인이 하이젠베르그로부터 보어로 책임을 옮기려고 시도하는 교묘한 손놀림으로 너무 깔끔하게 맞춰진다. 그렇다. 우리는 보어가 크리스티안을 따라 점프해 따라 가는 것을 망설였다고 알지만, 우리는 기억을 좇아 다니는 보어의 유령을 볼 때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말해졌다는 그 혼란스런 <15>주장이 소문으로 떠돈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의 반복에서 그 말해질 수 없는 것이 알려진다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는 [...] 그런 것이 가능할 것인가? 또한 물론 너무 허약하지는 않은, 그의 책임을 강조하기 충분한 마그리트에 의한 보어의 흔쾌한 책임 회피가 있다.

 

하이젠베르그: 그[오펜하이머]는 당신이 큰 기여를 했다고 말했어요.
보어: 가능한 한 정신적으로. 실제로는 아니지요.
하이젠베르그: 페르미는 나가사키 핵폭탄의 방아쇠를 당기는 방법을 알아낸 사람이 당신이라고 말합니다.
보어: 나는 아이디어를 주었습니다.
마그리트: 당신은 닐스가 설명이나 방어를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는 보진 않지요.
하이젠베르그: 아무도 그가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방어해야 한다고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그는 완전히 훌륭한 사람이에요.

 

이 모든 임계점 미만의 단편들, 연극 곳곳에 심어진 보어의 유죄에 대한 이러한 주장들은, 연극의 말미 프레인이 우리가 직면한 도덕적 딜레마를 위한 그것의 함축을 제안하면서 낯설고 새로운 양자 윤리학에 관한 생각을 풀어 놓을 때 거의 절정에 이른다.

 

하이젠베르그: 당신이 스웨덴에서 로스 알라모스로 가고 있었을 그 동안.
보어: 수 만명의 죽음에 대해 작지만 도움이 되는 부분을 행한 겁니다.
마그리트: 닐스, 당신은 잘못이 없어요!
보어: 그런가요?
하이젠베르그: 물론이요.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사람이었고 아무도 다른 식으로 말할 수 없었을 거요. 반면 난 ...
보어: 반면 당신은, 나의 존경하는 하이젠베르그, 당신의 전 인생에서 단 한 사람의 고독한 인물의 죽음에도 기여하고자 한 바가 전혀 없지요.

 

이 강렬한 장면은 많은 관객들의 마음에 각인되어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놀라운 것은 아니다. 마침내 어떤 해결점 어떤 도덕적 근거가 설립되는 - 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유령과 불확실한 것들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터잡기 위해 정의되고 구체화되는 어떤 것이다. 또한 프레인이 이러한 결과를 인정치 않고자 시도한다 해도 관객들은 만약 누군가가 도덕적 위반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이 보어가 아니라 하이젠베르그라는 인상을 그 연극에서 받지 않을지 궁금하지 않을까?

 

관객들이 그 연극이 핵폭탄을 만들기 위한 독일의 노고에 초점을 맞춘 반면, 미국은 네바다주 사막에서 고도로 조직화되고 기금이 풍부한 전쟁기간 동안 핵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16> 로스 알라모스에서 두 가지 다른 종류의 폭탄 팻맨(fat man)(플로티늄 기반 장치)과 씬맨(thin man)(우라늄235의 분열에 기반한 폭탄) - 을 생산했다는 점을 상기하게 하는 것이 프레인으로서는 옳은 일이다. 그리고 각각의 폭탄이 일본의 두 도시에 떨어졌으며, 수 만명의 죄없는 사람들을 살해했다(하이젠베르그의 의도의 본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전쟁 업무가 끝나기 전 일본에 대항해 핵무기 사용을 초래할 때, 그의 1941년 보어를 방문한 것이 미국의 핵폭탄 프로젝트를 가속화하는 것을 도왔을 가능성은 무엇인가?[11] 일은 정말로 미리 준비된대로 된다. 핵폭탄이 일본의 도시에 떨어진다는 것은 하이젠베르그에게 무죄를 선언하는 반면 보어에게 혐의를 두는 것인가?). 그러나 프레인은 이러한 정당한 역사적 사실과 그것들이 제기하는 도덕적 관심을 마주하도록 우리를 돕는 주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그는 그것을 오로지 테이블에 올려 놓고 우리가 우리의 도덕적인 분노를 하이젠베르그에게 직접 향하지 않도록 사용한다.

 

프레인은 이러한 결론을 곧바로 용인하지 않는다(적어도 연극에서는).[12] 사실상 그는 명백하게 역설적일 경우 이러한 위조된결론을 신중하게 취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인상을 가진 관객들을 고발한다. 프레인이 이 역설적인 왜곡을 성취하는 (말하는)방식을 눈여겨 보자. 즉각적으로 전술한 대화를 따라(보어가 십 만명의 사람들을 죽게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되는 곳, 그리고 하이젠베르그가 죄없다고 판단되는 그곳), 프레인은 역설적인 구절에서 하이젠베르그가 가시적인 양으로 엄격하게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낯설고 새로운 양자 윤리학을 구성할 것이라고 설명하도록 한다. 이제 관객들은 새로운 양자-정보 윤리학(quantum-informed ethics)에 내내 참여하고 있었고 그 구절 자체가 양자 물리학에 관한 보다 미묘한 논점을 포함하므로(이것이 갑자기 가시적인 양들을 생각하는데 있어서 제한을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 역설이 많은 점에서 관객들 또는 몇몇 평론가들을 길 잃게 만든다는 것은 놀랍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프레인이 굶주린 관객들이 예감으로 가득 차도록 미끼를 던져 놓은 결론(하이젠베르그 대신 보어를 만지작거리는 그 결론)으로부터 거리를 취하게 하는 움직임이 이것이다. 역설을 사용하면서 프레인은 도덕적 판단의 조건에 대해 그의 불확정성 원리(설명되는 것도 아니고 연극의 다른 곳에서 제기되지도 않는다)의 보다 미묘한 측면의 적용에 의문을 던지도록 한다. 여기 결정적인 대화가 있다.

 

보어: 하이젠베르그, 난 말해야겠어요. 만약 사람들이 가시적인 양의 측면에서 측정되어야 한다면 ...
하이젠베르그: 그러면 우리는 어떤 낯설고 새로운 양자 윤리학을 요구해야 합니다.

 

보어가 말하기 시작하는 물리학의 논점은 역사적 인물인 하이젠베르그가 주장했던 것(실증주의의 교설을 따라)으로서 우리가 <17>측정될 수 없는 양에 대해서 어떤 것도 가정하지 말하야 한다는 것, 즉 우리가 가시적인 양에 대한 모든 사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레인이 이 논점을 행사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즉 만약 우리가 불확정성 원리를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가 의도들에 대해 어떤 것도 추측해서는 안되며(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어떤 것도 알 수 없으므로), 따라서 우리가 도덕적 판단의 기초로 해야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행위들이다. 이것이 프레인이 낯설고 새로운 양자 윤리학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걸어가야할 결론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데, 그 방법에 대한 하이젠베르그의 장황한 설교가 그것이다. 만약 우리가 행위에 근거해서만 판단을 한다면, 그가 전쟁의 막바지에 기회를 잡았을 때, 그를 쏘지 않았던 ss맨은 천국에 갈 것이다(물론 이런 식으로 가정하는 것은 긴 전쟁기간 동안 특별한 히틀러 광신도가 마주쳤던 유일한 도덕적 결정이었다). 바로 그것이다. 아마도 너무 빠르게 앞서간 것인가? 만약 프레인이 이 핵심적인 논점을 보다 직접적으로 말했다면, 그는 이런 방식으로 그것을 할 것이다. 즉 우리는 가시적인 것들다시 말해 도덕적 판단을 하기 위해 모든 의도들을 내팽개치는 단순한 행위들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분명히 당신은 프레인이 우리로 하여금 사태들을 분류하게 되는 것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에 엄밀하게 의존하도록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들의 의도들 또는 그들의 행위들 중 하나에 따라 사람들을 판단할 수 없다. 우리가 연극이 끝날 때 유지할 수 있는 어떤 것 그리고 극장을 떠날 때 우리가 품은 바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프레인은 불확실성이 우리의 파멸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도록 추정함으로써 연극을 끝낸다. 즉 우리의 지친 영혼을 구원하는 의도들에 관한 바로 그 불가지성은 서로 간에 진정하게 판단하는 것에 있어서 우리의 원리적인 무능력이라는 것이다. 이 마지막 결론 - ‘실재 결론’ - 은 보어가 돌아서서 하이젠베르그가 그의 무의식적인 의도들을 깨닫도록 하는 이전 장면에 귀를 기울이도록 한다. 그것은 하이젠베르그가 계산을 수행하고 히틀러가 핵 폭탄을 움켜쥐게 되는 파국적 결과를 조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거주하는 도덕적 질문들과 불확실성의 격렬함 후에, 그리고 그것이 등장인물들과 관객들을 따라다닌 후에, 우리는 우주의 고유한 불확실성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보다 날렵하고 가벼운 제안과 더불어 남겨진다. 우리 모두의 도덕적 탐색은 아마게돈 이전의 순간에 얼어붙은 채 갑작스럽게 멈추며, 우리 자신의 영혼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는 벽 위에 굳은 어떤 단순한 그 자신의 그림자로 남겨진다. 우리는 그 어떤 표시도, 나침반도 없이, 양자이론이 어쨌든 우리가 살아 남도록 그리고 우리로부터 삶의 의미를 빼앗아가는 잔혹한 농담을 유지하도록 하는 신비의 표현이라는 텅 빈 느낌을 가지고서, 불모의 풍경을 통해 무목적적으로 배회하도록 남겨진다. 전세계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최근의 재생과정을 보면, 도덕적 또는 윤리적 근거의 부재가 불가피하거나 가능하지조차 않다는 주장은 <18>연극의 마지막이 호응을 얻지 못함으로써 적어도 파국적인 전조를 앞서 예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적인 확실성의 내파에 의해 드러난 도덕적인 황무지라는 절망에 빠져들었던 그 이유를 따를 필요가 있는가? 양자 물리학이 천국을 위아래로 무럭무럭 자라나게 하고 지구 전체를 확장시키는 상대주의적 공상이라는 구름 안에 감싸여 있으면서, 우리에게 그 어떤 치료제도, 의지처도, 이정표도, 출구도 남겨 놓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인가?

 

이와 대조적으로 나는 양자이론이,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두 가지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곤궁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낼 것이라고 논증한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할 방법은 프레인이 한 방식이 아니라, 물리학과 그것의 철학적 함축에 관한 훨씬 더 섬세하고 신중한 독해를 요구한다. 나는 주요 난점들에 대한 몇몇 개괄을 한 다음 대안을 끌어내겠다.

 

우리가 보았다시피, 프레인 자신의 승인에 따라, 물리학과 심리학적 불확실성 사이에 그가 그려 놓은 평행성은 제한되고 형편없이 특수화된다. 단순한 유비에 기반하여 양자역학의 함축을 분별하는 그와 같은 많은 시도들에서처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에 대한 그리고 다른 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필연적으로 제한되고, 궁극적으로 양자물리학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어떤 심오한 방식에 기대지 않는다. 분명히 그와 같은 인간 인식의 한계에 대한 추측을 제기하는 이 이론의 복잡다단함을 불러일으킬 그 어떤 이유도 없다. (이를테면 프로이트는 그의 무의식 이론을 위해 양자물리학에 기대지 않는다.) 예컨대 만약 의도나 인과성의 본성에 관한 어떤 보다 섬세하거나 개정된 이해를 우리가 제공했더라면 그것은 한 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와 같은 방법들(의도적으로 또는 다른 방식으로)은 누군가가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길 원했던, 그리고 양자 물리학에 관한 그 어떤 이해도 없이 전진할 수 있었던 몇몇 이론이나 명제를 위해 과학의 권위를 그러모으는 것 바깥에 있는 것처럼 비친다. (물론 논점은 하이젠베르그의 구제로 나아갈 때, 불확실성의 원리에 대한 영리한 활용이 아마도 너무 많은 저항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내가 아직 논하지 않은 다른 관건적인 지점은 프레인이 계속해서 인식론적인 주제와 존재론적인 주제 인식의 본성과 존재의 본성에 관련된 주제 - 를 혼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내가 설명할 것인바, 양자 물리학의 올바른 해석과 관련하여, 보어와 하이젠베르그 간의 뜨거운 논쟁에서 중심적인 요소다. 나 자신의 (비유비적인) 접근법의 본모습을 제시하기 앞서, 난 이 주제를 좀더 밀고 나아가길 원한다. 왜냐하면 양자 물리학의 보다 넓은 함축들을 이해하하고자 하는 것이 프로젝트에서 관건적인 핵심 논점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즉 양자역학의 다양하게 경합하는 해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특별히 코펜하겐<19>(그리고 나의 프로젝트를 위해) 타당한 하나의 논점은 보어와 하이젠베르그의 해석들 사이에 중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프레인은 연극에서 이 지점을 제기하지만, 그들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혼동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정말 예기치 않게도, 프레인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지만 중차대한 역사적 사실, 즉 하이젠베르그가 결국 보어의 관점을 묵인했고 그의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에 관한 논문의 발문에 그의 용인을 명확히 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기묘하게도 프레인은 하이젠베르그의 (자기-인정적인) 그릇된 해석을 따라 간다. 이것이 이 두 거대한 물리학 체계 사이의 긴장의 보다 많은 원천이라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그보다 논점은 그들의 해석들과 그 이론들 각각의 철학적 함축 사이의 차이에 있는데, 이것이 더 중요하고 사실상 더 심오하다. 상보성(complementarity)(불확실성이 아니라)은 이 연극을 따라 다니는 유령이다. 프레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를 논의하지 않고 파묻어 버린다.[13]

 

몇몇 핵심적인 주제들을 간명하게 살펴 보도록 하자.

연극의 중요 장면에서 관객들은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와 관련하여 보어와 하이젠베르그 사이의 강렬한 불일치에 대해 배운다. [14]그들 관점의 차이의 본성은 확실히 연극 안에 놓여 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요약될 수 있다. 보어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둘 다를 동시에 수 없다는 것(하이젠베르그가 처음으로 논증한 것)아니라, 오히려 그 입자가 위치와 운동량의 결정된 값을 동시에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그의 논점 입자의 특성에 속하는 어떤 것을 측정함에 있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전 측정값을 방해하며, 따라서 우리가 입자의 위치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우리는 그것의 운동량에 대해 더 적게 알게 될 것이다(그 역도 마찬가지) - 은 적어도 믿을 만하지만, 보어의 논점은 완전히 반직관적이고 낯설다. 본질적으로 보어는 단순히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아니라, 실재의 본성에 대한 관점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가 수행하고 있는 것은 서구 형이상학 역사의 전체 전통, 즉 세계는 일련의 독립적인 결정 속성들로 이루어진 개별적 사물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문제 삼는다. 보어가 양자물리학으로부터 취한 교훈은 매우 심오하고 근원적이다. 즉 뉴턴 물리학이 가정하는 바(예컨대 위치와 운동량), 완전한 일련의 속성들을 소유한 채 허공 속을 무목적적으로 배회하는 작은 사물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 특정 도구들이 주어지면, 다른 것들은 특수하게 배제되는 반면, 어떤 속성들은 결정되는, 그런 측정의 상호작용의 본성이라는 근본적인 어떤 것이 있다. 어떤 속성들이 결정되는가 하는 것은 실험의 욕망이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실험 장치들의 특이성에 의해 결정된다.[15] <20>따라서 여기에는 여전히 실험이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요하게도 상이한 양들은 상이한 장치들을 사용함으로써 결정되며 모든 양들은 단번에 결정값을 가질 것이지만, 몇몇은 언제나 배제된다. 이것은 변량들의 두 가지 상보적집합을 만든다. 즉 결정하는 것으로서 어떤 주어진 장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상보적이라고 알려지며, 그 역도 가능하다. 상보적 변량들은 정의(definition)를 위해 상이한 상호적으로 배제적인 - 장치들을 요청하며(예컨대 하나는 고정 부분들이고 다른 하나는 유동 부분들인), 그러므로 이러한 변량들은 상호적으로 결정가능하다(하나가 잘 정의되면, 다른 하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이 주제를 3장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중요하게도 프레인이 논의한 바에 따르면, 하이젠베르그는 보어의 해석을 수용한다. 즉 문제가 되는 것은 불확정성이 아니라 상보성인 것이다.

 

이 중요한 차이점을 명심하면, 새로운 활동을 성찰하는 것에 대한 매혹, 즉 분석의 기반으로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보다 보어의 상보성 원리를 사용하면서 프레인의 코펜하겐을 재기술하는 것에 저항하기는 힘들다. 나는 내가 프레인 연극의 어려운 점들이 단순히 하나의 원리를 다른 원리로 대체함으로써 그리고 도덕적이고 인식론적인 주제들을 가까이 놓고 고려하는 실험을 하는 동일한 종류의 유비적 사유를 수행함으로써 교정할 수 있다고 제안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전환을 행함으로써 중요한 주제들의 엄격한 분석을 단순히 상세하게 제공하는 것에 관해 그 어떤 기대도 없다는 점을 알고 있으므로, 어떤 제한된 경향 안에서 이 실행을 간명하게 만족시키기를 원한다. 이 실행의 논점은 양자 물리학과 그것의 함의에 관한 보다 신중한 사유가 표면에 드러나리라는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비록 이러한 방법이 그 주제들이 어떻게 해결되며 적절한 개념들이 어떻게 재개념화되는지 이해하는 것을 도울 수 없을지라도, 만약 우리가 양자물리학을 신중하게 취한다면, 적어도 무슨 철학적 주제들이 제기되는지, 그리고 무슨 개념들이 재사유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몇몇 느낌들을 획득할 수 있다.

 

하이젠베르그가 1941년 가을에 보어를 방문한 의도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자. 충분히 흥미롭게도 만약 우리가 보어의 상보성 원리를 우리 분석의 기반으로 취하길 원한다면 어떻게 진행될지를 제안하는 바가 이미 코펜하겐에 중요한 실마리로 존재한다. 우리는 마그리트가 단순히보어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보어의 통합적인 부분으로 고려되는 명확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16]

 

마그리트: 다시 상보성. 맞나요?
보어: , 네 그렇지요.
<21>마그리트: 만약 당신이 집중해야 하는 어떤 것을 한다면, 당신 또한 그것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없을 거에요.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것을 행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것이라면, 그러면 당신은 실제적으로 그것을 행할 수 없을 겁니다. 맞나요?

 

역설적으로, 프레인은 (마그리트를 따라) 상보성에 관한 이 진술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냈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바, 하이젠베르그가 왜 1941년에 코펜하겐에 갔는지를 모른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또는 실제로 논점에 관한 적절한 탐구)은 매우 다르고 훨씬 더 심오하며 근본적인 함축이다. 프레인은 여기서 완전히 비약을 행하며, 우리는 보다 더 천천히 잘 해 나갈 것이다. 당신이 참여하는 활동이 정말로 발생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그것은 (마그리트의 상보성에 관한 진술에 따라) 당신이 행위하는 것을 방해 받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에 대해 사유하는 것과 그것에 대해 사유하는 것에 대해 사유하는 것 둘 모두인 것이다. 즉 당신은 무언가에 대해 사유하면서 동시에 물질[문제]에 대한 당신 자신의 사유를 반성할 수 없다. 이것은 당신이 두 가지 상보적인 상황들, 즉 무언가가 당신 사유의 객체일 경우 당신이 무언가에 대해 사유하는 것, 또는 당신의 사유하는 것(어떤 것에 대한 사유)에 대한 당신의 사유인 경우,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해 사유하는 과정을 음미하는 것, 즉 어떤 것 자체가 아니라, 당신 사유의 객체인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17]

 

이제 당신이 (당신의 사유를 관찰하고자 시도함으로써) 분별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 중 하나가 당신이 그것에 대해 사유하고 있는 것과 관련된 당신의 의도들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사유하는 것과 당신이 의도들(물질과 관련된 의도들)을 아는 것 사이의 상호적인 또는 상보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연역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밝혀낸 이러한 상호 관계는 프레인이 주장한 바처럼, 우리가 그것들을 동시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우리가 무언가에 규정적 사유를 가질 수도 없고, 동시적으로 그 사물과 연관된 규정적 의도들을 가질 수도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다시 말해 논점은 우리의 사유와 우리 사유의 객체와 관련된 우리의 의도들 둘 모두에 대한 물질적인 것에 관한 규정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것은 의도라는 바로 그 개념이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충분히 영리하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측정(이를테면 어떤 두뇌 스캔 같은 것을 사용하여)을 행할 수 있는, 즉 사람들의 두뇌 안 어떤 곳에 존재하는 정신의 규정적인 의도의 상태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 존재하는 의도들(몇몇 규정적인 어떤 것)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보어에 따르면, 우리는 고전 물리학의 형이상학적 전제들(보어는 이것이 실재에 대한 우리의 공통-감각적인 지각에 있어서 기초라고 주장한다)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우리가 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측정할 수 있게 하고, 정신의 의도 상태라는 생각을 이해하도록 하는 현실적인 실험적 조건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22>그와 같은 조건들의 부재에서, “정신적 의도의 상태라는 생각은 의미없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물질의 규정적 사실에 조응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중요한 논점은 의도적 상태라는 것이 고유하게 불가지적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의도의 바로 그 본성이 재사유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프레인의 전체 연극은 하이젠베르그의 의도를 결정하고자 하는 시도 주위에서 구조화된다. 마치 항상 그것들에 대한 물질의 규정적 사실들이 존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보어의 논점은 정신의 의도적 상태라는 그 생각이, 모든 다른 고전적 속성들과 같이, 수용할 만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신의 의도적 상태에 대해 의미있는 방식을 말하자면, 우리는 우선 물질적 조건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의미과정이며 존재에 몇몇 일정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조건들을 특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를 들어 적절한 일련의 물질적 조건들, 이를테면 하이젠베르그가 그 자신 안에서 발견할 복잡한 정치적, 심리적, 사회적, 과학적, 기술적 그리고 경제적 조건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디서 인종, 종교, 국적, 민족, 섹슈얼리티, 정치적 신념 그리고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의학상의 문제가 나치의 생각에 있어서 물질적인 것이 되는가? 그리고 확실히 이것이 다는 아니다. 또한 물질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 나아가 그와 같은 작동중인 복잡한 장치들과 함께, 우리가 정신의 의도적 상태에 관한 논의를 마치 그것이 어떤 개체의 속성인 것처럼 이해하는지 아닌지 묻게 된다. 분명히 하기 위해 연극으로 되돌아 가 보자. 하이젠베르그가 독일에서의 핵물리학 프로그램을 통제하기 위해 절망적으로 노력했으며, 핵폭탄 개발 진행을 늦추었다는 그의 논점을 견지하려고 분투한 반면, 보어는 그가 프로그램을 통제하지 않았던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그 프로그램이 그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때는 아무 것도 누군가의 통제 하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오히려 반대로 프로그램이 하이젠베르그를 통제하고 있다면, 그의 의도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에게 속한 것인가? 개인주의는 의무를 형성하기 위해 필수적인가? 의도와 의무(accountability[사유가능성])라는 개념들이 도출되는가? 우리의 핵심적인 개념들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인 도전들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보어에 따르면, 객관성과 의무는 폐기될 필요가 없다.(객관성과 의무에 관한 보어의 관점의 심오한 논의를 위해서는 특별히 3장과 4장을 보라.)

 

요컨대, 하이젠베르그의 해석으로부터 보어의 해석으로의 이동은 연극의 전제 자체를 침식한다. 프레인은 도덕적 판단들이 개인의 의도에 관한 질문들에 묶인다는 가정 주위로 연극을 짜맞춘다. 하지만 보어의 사유에서 의도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일 수 없다. 즉 의도들은 개별적인 인간의 정신적 상태들을 선재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23>어떤 복잡한 논증이 여기서 주어질 필요가 있지만, 보다 엄격한 분석이 드러나는 것에 관한 이러한 실행은 어떤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즉 복잡한 물질적 조건들을 처리하는 것은 우리가 의도들(1) 정신의 선재적 상태들이라고 가정하지 못하도록 막으며, (2) 적합하게 개체들에 귀속되는 것을 방해한다. 아마도 의도는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의 복잡한 네트워크에 기인되는 것으로 더 잘 이해될 것이다. 여기에는 개체에 관한 전통적 관념을 초과하는 역사적으로 일련의 특수한 물질적 조건들이 포함된다. 또는 행위자들의 배치가 있다는 것이 아마도 행위소들의 얽힌 상태가 있다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주제는 유비적으로 추론함으로써 해결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종류의 분석을 요구한다.

 

이러한 사고 실험[연극-역자]은 또한 도덕적 판단이 행위나 의도 중 하나에만 기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보다 내적인상태와 외적인상태 사이의 바로 그 이원성이 재사유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내적요인과 외적 요인’ - 의도와 역사 - 둘 모두는 물질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행만으로 그것들이 어떻게 물질화하고 어떻게 서로 간에 관계를 맺는지 드러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보어의 해석이 가진 함축을 살피면서 어떤 주제가 생겨나는지 배우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실제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보다 더 신중하고, 섬세하고 엄격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예컨대 인과성의 문제는 확실히 이러한 중요한 주제들과 관련하여 드러나지만, 보어의 생각에 관한 더 깊은 탐색은 인과성 개념 자체가 재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 전통적 개념 자유의지와 결정론이라는 이항적 선택지만이 여기서 드러난다 이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인과성이 개정된다면, 힘은 재사유될 필요가 있다. (힘의 관계는 결정하는 것 또는 단순히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제한하는 울타리 내에 제한들의 부재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없다). 행위소는 재사유될 필요가 있다. 윤리학도 재사유되어야 한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보어의 해석이 가져오는 것은 과학과 윤리학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바로 그 개념들에 관한 개정작업을 심각하게 요청한다. 이 외에도 그것은 개체주의 형이상학을 침식하며 인식과 존재의 바로 그 본성에 관한 재사유를 요청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관한 모든 관점들이 변화된다는 것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요컨대 이 사고실험은 우리에게 보어의 양자물리학 해석이 초래하는 우리 세계관의 결정적 변화들에 관한 간명한 개요만을 제공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재사유될 필요가 있는지에 관한 몇몇 지침을 주지만, 타당한 주제를 어떻게 재사유할 것인지에 관한 이해의 기초를 주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비에 의한 추론은 쉽사리 우리를 길 잃게 만들 수 있다. 또한 더 나아가 이것은 목록들의 분리된 범주들을 정립하고, 하나의 집합을 <24>다른 집합과 관련하여 분석하며, 그리고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그것 자체의 과정들에 의한, 그것들 간의 관계의 본성에 관한 탐색을 배제한다. 사실상 보어 조차 양자 물리학의 가르침들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데 있어서 물리학과 생물학 또는 물리학과 인간학 간의 유비를 끌어냄으로써 잘못을 저질렀다. 궁극적으로 보어는 이러한 구성요소들 간의 일대일 대응을 상술하는 것이 아니라, 특유한 개념들의 쓰임새의 조건들에 우리 주의를 집중하면서, 우리가 만족감에 빠지지 않고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주 길을 잃었고 그가 의미하고자 했던 함축들이 그의 연구작업에서 암시되도록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보어의 양자물리학 해석이 가진 함축들에 관한 엄격하고 강력한 이해를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것은 그의 전반적인 철학에 관한 훨씬 더 신중하고, 섬세하며, 총체적인 분석이다.

 

이 책에서 나는 보어의 철학-물리학이 가진 의미에 관한 어떤 엄격한 시험과 노고를 제공한다(물리학과 철학은 그에게 하나였지 둘이 아니었다). 나는 유비적인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을 피한다. 대신에 나는 철학적 주제들을 신중하게, 규정하고, 실험하며, 설명하고, 탐색한다.[18] 나는 입자들과 사람들,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 과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자연과 문화 간의 유비를 끌어내는 것에 흥미가 없다. 그보다 나는 양자물리학이 우리에게 맞서도록 강제하는 주제들, 이를테면 객관성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들, 측정의 본성, 자연의 본성과 의미 만들기, 또한 담론적 실천과 물질적 세계 간의 관계와 같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제들에 흥미가 있다.

 

나는 또한 과학과 윤리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미있는 질문들이 오로지 물리학의 세계에 대해 논의되는 것으로부터만 이끌어내어질 수 있다고 추정하지 않는다. 물리학은 사회적 세계에 관한 충분한 이해를 단독으로 가져다줄 수 없다. 사람들이 원자의 유비물이고 사회체들이 개별체들(각각의 작은 원자들처럼)의 거대한 앙상블의 집합적 행동의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식, 또는 사회학이 생물학으로 환원되거나, 화학으로 환원가능하며, 그래서 물리학으로도 환원될 수 있다는 식의 단순한 부수현상설을 소박하게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양자 물리학은 어떤 세계관적이거나 보편적인 설명틀로서의 환원론을 제거한다. 환원론은 매우 제한된 과정이다.

 

필요한 것은 물리 세계에 대한 오래된 생각들에 명쾌하게 또는 함축적으로 기대는 물리적이고 형이상학적 관념들의 재평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최근에 보유하게 된 가장 훌륭한 물리 이론의 측면에서 그러한 관념들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우리가 사회 현상들을 이해하는 방식을 재평가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견뎌낼 가장 훌륭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론들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 <25>‘사회적이고 자연적인 것의 범주들 속으로 세계를 집어 넣는 바, 물질적 실천들을 포함한다. [19]필요한 것은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둘 모두를 이론화할 수 있도록 하는 분석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것들 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방식으로 이 둘을 통과하는 사회적이고 자연적인 현상들을 최대한 이해하는 것이다. 물질과 의미화를 분리된 범주들로 적어 넣는 것, 그리고 복잡한 현상들을 분열되고 고립된 지역이나 여타의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고의로 어떤 관건적인 측면들을 삭제하는 짓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을 함께 고려한다는 것은 그것들 사이의 중대한 차이들을 파괴하는 것, 또는 그것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취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것들에 대해 쓰지 않음으로써) 출현하는 어떤 통합적 관점들을 허용한다는 의미이다.

 

이 책의 개괄

이 책은 우리가 과학적인 그리고 여타의 실천들에서 인간과 비인간, 물질과 담론, 그리고 자연과 문화적 요인들의 역할들을 통합적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와 그 방법을 증명한다. 나는 우리의 몇몇 가장 뛰어난 과학이론과 사회이론들의 통찰들에 도움을 청할 것이다. 여기에는 양자물리학, 과학학, 물리학의 철학, 페미니즘 이론, 비판적 인종이론, 포스트식민주의론, (포스트-)맑스주의, 그리고 후기구조주의 이론이 포함된다. ‘회절적방법론의 접근에 기반하여, 나는 이런 서로 상이한 연구 영역들로부터 통찰들을 읽어낼 것이다. 이른바 회절적 방법론(2)을 전개하는 나의 목표는 분과적 경계들을 가로지르는(그리고 그것을 재작업하는) 구성적인 참여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어떤 주어진 장 내부에서 특수화된 논증들의 중요한 세부사항들을 경청하는 것으로 엄격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접근은 물질적이고 담론적인 것, 자연과 문화 둘 모두를 넘어 과학학, 페미니즘 연구 그리고 여타 (상호)학제적 연구들에서의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요청된다. 이러한 영역들의 요인들은 이러한 요인들이 어떻게 함께 작동하는지, 그리고 물질성, 사회적 실천, 자연 그리고 담론과 같은 개념들이 어떻게 그 상호 함축을 축적하기 위해 변화해야 하는지 탐구함으로써 지식 생산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 나는 또한 이러한 방법이 과학과 여타 연구 영역들 사이의 의미있는 대화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과학적 탐구에 기여하기 위해, 어떻게 충분히 강력한지 보여줄 것이다.

 

이 책은 과학적 실천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포함하여, 새로운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윤리학의 정초에 기여한다. 사실상 나는 과학적 실천의 경험적으로 정확한 이해, 즉 최근의 과학 연구와 공명하는 그것이 <26>인식론적, 존재론적 그리고 윤리적 사유의 근본적인 분리불가능성을 제안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특히 나는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을 제안하는데, 이것은 인식-존재-윤리적 틀거리로서 인간 비인간, 물질 담론 그리고 자연 문화적 요인들의 역할에 관한 이해를 제공한다. 그와 같은 논의들을 이행함으로써 나는 잘 알려진 논쟁, 즉 구조주의 대 실재론, 행위소 대 구조, 그리고 관념론 대 유물론 간의 다툼 너머로 갈 것이다. 사실상 내가 제안하는 새로운 철학적 틀은 물질, 담론, 인과, 행위소, , 동일성, 체현, 객관성, 공간과 시간을 포함하여, 그와 같은 이항대립적 사유를 지지하는 기초 개념들에 관한 재사유를 초래한다.

 

이러한 분과횡단적 참여를 위한 출발점은 물리학자 닐스 보어에 의해 제안된 철학적으로 풍부한 인식론적 틀이다. 나는 과학학, 과학 철학, 물리학 그리고 비판사회학 이론’(이를테면 페미니즘 이론, 비판적 인종이론, 퀴어 이론,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포스트-)맑시즘, 그리고 후기구조주의 이론)이라고 집합적으로 불리워지는 다양한 상호분과적 접근들과의 비판적 대화 안에서 그의 철학적 관점을 확장하고 부분적으로 개정한다. 보어의 철학-물리학은 특히 자연과 사회적 세계를 함께 사유하고 그것들 간의 관계의 본성을 이론화하는 법에 관해 몇몇 중요한 실마리를 찾기 위한 출발점으로 적합하다. 왜냐하면 그의 양자물리학적 탐구는 자연의 본성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과학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들의 본성에 대해서도 질문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리의 과학이론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를 따라 자연의 본성과 과학의 본성 둘 모두를 이해하는 보어의 자연주의적 실행은 그를 양자물리학 가르침의 핵심으로 데려간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고자 애쓰는 자연의 일부다. 보어는 그러므로 과학적 실천이 자연의 구성 부분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이해 능력은 우리가 우리 지식형성의 실천이 사회적-물질적 수립(enactment)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논증한다. 이 수립은 우리가 기술하는 현상들에 기여하면서, 그것[현상들-역자]의 부분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보어의 인식론과 그의 포스트휴먼적 통찰의 심오한 함축은 그의 음미되지 않은 휴머니즘적 실행에 의해 가로막혀 버렸다. 즉 그의 반-코페르니쿠스주의, 다시 말해 우주의 중심으로 인간을 되돌리는 것이 그것이다. 특히 보어는 인간 개념과 인식자(knowers)를 인식작용(knowing)의 존재론적 관계들의 기초로 결합한다. 이것은 양자 물리학에 관한 어떤 명석한 해석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또한 마찬가지로 보다 큰 함축들을 음미하는데 있어서 난점을 생산한다. 내가 <27>7장에서 설명할 것처럼 물리학자들 다수는 보어와 여타 코펜하겐 학파 구성원들의 기여에 광범위하게 기반한 소위 양자 물리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충성을 내세우는 반면, 양자 물리학의 기초들에 대한 주제들에 관심을 가지는 물리학자들과 물리 철학자들은 보어의 휴머니즘적 잔존물에 불편함을 토로했다. 이론의 기초에 놓인 인간적 개념과 인간적 지식이라는 껄끄러운존재는 주요한 장애물이 되어 왔다.

 

나는 과학학에서 후기구조주의 이론가들과 학자들이 보어의 철학-물리학에서 합류할 많은 것들을 발견할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그들이 또한 그들 자신만의 (매우 다른) 이유로 보어의 휴머니즘 앞에서 망설일 것이라고 믿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예컨대 두 그룹의 학자들 모두 인식적인 실천에 있어서 주체도 객체도 기꺼이 받아들일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객체들과 주체들을 구성하도록 하는 장치들의 물질적 특수성을 탐구해야 한다는 보어의 입장이 충분히 공감할만 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사실상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인간 주체의 차이 나는 구성을 이해하는데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 관한 휴머니즘의 본질주의적 개념에 쉽게 안착하지 않게 한다고 재빨리 지적할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휴머니즘은 탐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많은 것들을 당연시할 것이다. 과학학의 학자들은 매우 다른 관심사들을 가지고 있다. 휴머니즘에 대한 그들의 경시는 인간과 그것의 타자들(예컨대 기계들과 비인간 동물들을 포함하는) 개념화되고, 생산되며, 그리고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실천들을 통틀어 재연구되는 방식들에 대한 흥미에 기반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그들의 휴머니즘에 대한 거부를 위한 정당화를 심도 깊게 파내려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날마다 과학과 기술이 능동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개조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소식들이 날아들기 때문이다. 사실상 생물공학, 정보 기술학들 그리고 나노기술은 너무나 빨리 인간과 그 타자들을 재구성하므로 인간적 상상의 순환들을 이미 초과한다.

 

동시에 나는 보어의 통찰이 이 상이한 연구 영역들에서 드러나고 설명되는 난점들에, 그리고 개정작업이나 더 심도 깊은 탐구작업을 위한 가능한 구제책과 방향을 드러내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논할 것이다. 특히 몇몇 중요한 후기구조주의자, 과학학, 그리고 물리학의 통찰들은 마찬가지로 그것들 자신의 잔존하는 인간중심주의적이고 재현주의적인 가설들에 의해 방해 받는다. 이러한 통찰들을 하나씩 독해하는 것은 이러한 원치않은 잔존물들을 몰아내는데 도움을 줄 것이고, 이에 따라 다수의 상이한 (상호)분과적 관심사들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보다 정련된 도구들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28>1장은 이 책의 주요 문제틀을 제시한다. 즉 담론적 실천과 물질 세계 간의 관계를 적합하게 이론화하하는 기획과 필요성이 그것이다. 나는 재현주의에 관한 논의로 시작한다. 이것은 재현되기를 목표로 하는 재현물과 객체(주체, 사건 또는 사태)가 서로 간에 독립적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재현주의의 몇몇 문제들, 난점들 그리고 한계들을 논한다. 그리고서 나는 수행적이라는 것으로 집합적으로 기획될 수 있는 재현주의 대한 어떤 대안적 접근법을 상정할 것이다. 수행적 접근들은 재현주의의 기본 전제를 의문에 부치면서 재현하기에 관한 실천들 또는 수행들뿐만 아니라 그러한 실천들과 그 유효성을 위한 조건들의 생산적 결과들에 대한 탐구에 집중한다.

 

최근 몇 년간, 과학학 연구자들과 비판 사회학 이론가들 둘 모두 사회구성주의적 접근들(이것은 그 과학적 실재론의 동료들과 매우 흡사하게, 재현주의적 신념들에 기반한다), 재현주의에 대한 수행적 대안들을 향한 움직임은 기술(description)과 실재 간의 상호조응의 문제들(예컨대 자연 또는 문화는 서로를 비추는가?)로부터 실천들 또는 수행들 또는 행위들에 관한 문제들로 초점을 옮긴다. 대체로 수행적 사유는 한편으로는 과학학 연구자들에 의해 제공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이론가들과 정치이론가들에 의해 제공되는데, 이것은 그들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교류가 없기 때문에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나는 이러한 여러 상이한 수행적 접근들의 몇몇 강력함과 허약함을 짚고 그것들이 일련의 도구들을 서로 간에 벼리는 대화를 진행하거나 또는 둘 모두의 통찰을 신중하게 취하여 수행적 사유를 발전시킬 것이다.

 

2장은 겉보기에 두 가지로 나누어진 목적을 제시한다. 하나는 회절에 관해 중요한 물리적 현상을 도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방법론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다. 나는 이 주제들이 곧장 서로 간에 관련을 맺는다는 것을 설명할 것이지만, 우선 나는 회절의 물리적 현상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회절은 파동 작용에 특유한 현상이다. 물 파동은 소리 파동이 그러는 것과 같이, 또한 빛 파동과 마찬가지로 회절 패턴을 전개한다. 회절은 파동들이 중첩될 때 결합하는 방식과 관련되며 또한 파동들이 장애물을 만날 때 파동들 바깥으로 뚜렷하게 굴절하고 퍼지는 방식과도 관련된다. 회절적 현상들은 매일매일의 경험에서 나타난다. 친숙한 예는 파도가 방파제 안의 열려진 곳을 통해 밀려들 때, 또는 돌들이 연못에 떨어질 때 그리고 잔물결들이 겹칠 때 물 파동이 만들어내는 회절 또는 간섭 패턴이다. (몇몇 물리학자들이 회절과 간섭 현상들 간의 순수하게 역사적인 구분을 계속 따르는데 반해 나는 회절<29>‘간섭을 상호교환 가능한 개념으로 사용한다. 즉 나는 두 가지 현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파동중첩 물리학이라는 것에 기반하여 이러한 구분을 기각하는 물리학자인 리차드 파인만(Richard Feynman)과 여타 사람들에 동의한다.)[20]

 

2장에서 내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회절은 이 책을 적절하게 관통하는 장치이다. 회절은 양자 물리학에서 몇몇 핵심적인 주제를 정렬하는 관건적인 역할을 한다.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양자 물리학의 딜레마 중 하나는 파동-입자 이원성 역설이다. 20세기 초반에 실험적 증거는 겉보기에 모순적인 현상을 내 놓았는데, 한편으로 빛이 파동과 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실험 조건들 아래에서 빛은 입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들에 직면하여, 우리가 빛의 본성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그것은 입자인가 파동인가? 놀랍게도, 유사한 결과가 물질에서도 발견된다. 어떤 조건 아래에서 전자들은 입자처럼 행동하고 다른 조건에서 그것들은 마치 파동처럼 행동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자연의 바로 그 본성이다. 책이 진행되면서 나는 보다 깊게 이러한 근본적인 주제들에 대해 성찰하면서 회절 현상이 자연의 본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주요한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더 나아가 내가 2장에서 설명할 것처럼, 회절은 내가 사용하고 전개하는 방법론적 접근법을 위한 적절한 (물리적이고 상징적인) 형상이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지식에 대해 말하고 이론화하기 위한 시각적이고 광학적인 은유을 사용하는 오래된 역사가 있다. 반영(reflection)이라는 물리적 현상은 사유를 위한 어떤 공통된 은유다. 어떤 사소한 반사작용은 이러한 예를 보여준다. 도나 해러웨이는 회절을 반영이라는 안락한 은유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안한다. 해러웨이가 제안한 것처럼, 회절은 반영에 대한 유용한 대응물로 기능할 수 있다. 둘 모두 광학 현상이지만, 반영이 되비춤과 동일성에 대한 것이라면, 회절은 차이의 패턴들에 주목한다. 그녀의 관심사 중 하나는 반영성(reflexivity[반성성])이 그 자체로 하나의 방법론으로 작용하는 방식인데, 특히 그것이 과학학에서 주류 학자들에 의해 취해지거나 논의될 때 그러했다는 점이다. 해러웨이는 “[반영성 또는 반영은] 본질적이고 고정된 입장에 관한 환상을 도입하지만, [회절은] 우리가 보다 미묘한 전망을 훈련하도록 한다”(1992)고 말한다. 회절은 작지만 중요한 차이의 진행과정이며 차이의 진행과정은 (...) /생명의 길들에 대한 것이다”(ibid.). 이 책에서 나는 이러한 생각들을 회절 현상에 대한 양자적 이해와 최근 실험들의 결과들을 개괄함으로써 좀 더 발전시키고 다듬는다. 궁극적으로 나는 회절적 방법론이 반영적 방법들이 하지 않는 방식에서 관념들과 다른 물질적인 것들의 얽힘을 따른다는 것을 논증한다. 특히 필요로 하는 것은 <30>생산 장치들의 얽힘에 부합하는 방법이다. 여기서는 이미 잘 알려진 일련의 이항대립들을 가정하기 보다 경계들이 어떻게 생산되는지에 관한 계보학적 분석이 가동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정교한 작업을 2장에서 시작하지만, 이 주목할 만한 물리 현상에 관한 모든 격식, 풍부함 그리고 생기와 더불어 그것의 복잡한 패턴들과 반향들의 완연한 전개는 오로지 이러한 통찰이 책의 전체 장들을 관통하며 울리는 회절 안에서 표명된다.

 

내가 논의하는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회절이 객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행중인 주체가 무엇인지 고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집합이 지시체의 고정된 프레임으로 기능하는 곳에서 하나의 텍스트나 일련의 생각들을 독해하는 방법과는 달리, 회절은 그것들이 출현하는 차이들을 설명하는 것을 돕는 방식에서 하나씩 통찰들을 독해하는 것을 함축한다. 즉 차이나는 차이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무엇이 배제되는지 그리고 그러한 배제들이 어떻게 물질화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예컨대 내가 앞에서 주장했던 바와 같이, 만약 목표가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함께 생각하는 것, 두 가지 요인들이 어떻게 물질화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라면(단순히 그것들이 둘 모두 물질로 작동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우리는 자연적인 것사회적인 것을 하나를 다른 하나에 대립시키면서 정의하거나 자연 또는 문화를 다른 것을 이해하기 위한 고정된 참조물로 유지하는 것 없이 함께 그 관계를 이론화할 방법이 요청된다. 필요한 것은 이러한 얽힘들을 연구하기 위한 회절장치들이다. 요구되는 장치를 만드는 한 가지 시작길은 다음과 같은 접근법을 활용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가장 훌륭한 과학 이론들에 기반하여 자연의 본성에 대해 재사유하는 것, 그러면서 자연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최고의 이해와 우리의 최고의 사회 이론들과 관련하여 과학적 실천의 본성에 대해 재사유하는 것, 그러면서도 자연의 본성과 과학이론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최고의 이해와 관련하여 우리의 가장 좋은 사회이론들을 재사유하는 것 말이다. 회절적 방법론은 중요한 통찰들을 읽어내는 데 있어서 얽힘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과 그것들 서로를 관통하는 접근법들을 제공한다.

 

3장에서 나는 보어의 철학-물리학에 관한 특유한 해석을 제안한다. 보어의 인식론적 틀에 관한 해석은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왔다. 보어는 여러 주류 역사가들과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어떤 실증주의자, 관념론자, 도구주의자, (거시)현상학자, 조절주의자, 실용주이자, ()칸트주의자이자 과학적 실재론자로 간주되어 왔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는 보어의 철학이 이러한 범주에 깔끔하게 맞아들어가지 않는다고 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러한 철학적 사상학파들이 기반하는 많은 이원론들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양자 물리학에 대한 보어의 이해는 그를 과학자들이 -자체’, 다시 말해 그것들이 인간적 개념틀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탐색되는 객체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거부하도록 한다. <31>그는 칸트적인 예지계-현상계 구분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보어의 물리학적 실천이 그의 주제적인 물질을 향한 어떤 실재론적 태도를 고수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도, 그는 전통적 의미의 실재론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탐구 대상들과 그가 관찰의 행위소들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의 상호작용이 결정가능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이 세계의 재현물을 남겨 놓기 위해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빼내어질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주목할 만하게도 보어의 인식론적 틀은 20세기 초의 원자론 영역에서 경험적 발견에 기반하는데, 이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사이의 관계, 측정의 역할, 의미만들기와 개념적 활용에 대한 질문, 객관적 기술의 가능성의 조건들, 측정된 속성들을 위한 객체적 지시체의 구체적 동일화, 인과성의 본성 그리고 실재의 본성과 같은 근본적인 철학적 주제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한다. 보어의 철학-물리학은 중요하고 심오한 존재론적 함축을 담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인식론적 주제에 단일하게 초점을 맞춘 채 있었으며, 이러한 그의 기여를 그의 실재의 본성에 관한 관점으로 내어 밝히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양자 물리학이 세계가 확실히 뉴턴 물리학의 존재론을 따라 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그의 관점에서 분명 언급하고 있다. 이 장의 목적들 중 하나는 그 함축적인 존재론적 내용들을 이끌어내고, 보어의 일관된 존재론을 설명하는 것이다. 인식론 만큼이나 존재론은 보어의 철학-물리학에 관한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탐색에서 관건적인 역할을 담당한다(4장을 보라).

 

3장에서 나는 보어의 틀이 물체들과 의미의 생산에 관한 생각을 포함하여, 과학적 실천의 원-수행적(proto-performative) 사유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주장을 4장에서 더 심화시키고 보어의 사상에서 수행적 사유를 더 진작시킨다. 어떤 의미에서 보어의 사유가 -수행적인가? 우선 보어의 측정에 대한 주의 깊은 분석은 그가 재현주의를 거부하도록 이끈다. 주목할 만하게도 보어는 세계와 사물에 관한 재현주의의 무비판적 태도를 의문에 부친다. 즉 실천의 담론적인 또는 물질적인 본성 둘 중 하나를 강조하면서 충실하게 설명하는 (몇몇) 후기구조주의자와 과학연구의 탐구와는 달리, 보어는 두 차원을 동시에 유지한다. 물리학자가 사물의 본성에 관련된 기존의 관념들을 의문시하는 것은 (분명히 뜻밖의 것이라 해도) 이해 못 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보어는 의미의 본성, 의미만들기를 위한 실천, 지성의 가능성의 조건 그리고 배제된 영역, 즉 비지성적인 것의 공-구성(co-constitution)에 대한 질문을 제기함과 아울러, 또한 그 자신을 단어들의 본성과 관련시킨다. <32>그리고 이것은 물리학자에게 매우 통상적이지 않은 질문의 노선이다. 하지만 보다 놀랍게도, 보어는 이 주제들 단어와 세계와 관련하여 을 불가분하게 연결시켜야 한다고 이해한다. 보어에 따르면, 물리적 세계에 대한 우리 이해 능력은 우리의 지식-형성 실천이 과학적 개념들을 사용하고 검사하는 것을 포함하여, 그것의 부분으로서 우리가 기술하는 현상들에 기여하는 물질적인 수립활동(enactments)이다.

 

뉴턴 물리학에 착근되고 그 인식론에 조응하는 재현적 교설에 관한 보어의 섬세한 문제제기의 세부사항들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거기 포함된 물리학적 주제들의 세부사항들에 대해 인색하지 않을 것이지만, 또한 독자들이 물리학에 어떤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물리학에 대해 아무런 지식을 가지지 않은 독자들에게조차 접근할 수 있도록 이 생각들을 다듬도록 최선을 다했다. 보어는 스스로 이와 똑같은 표준들을 설정한다. 그는 일상적인 개념들(의 확장)을 사용하여 사태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확고하게 믿었다. 이것은 보어의 경우에 방법론적인 그리고 인식론적인 실행에서와 마찬가지로 접근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즉 너무 많은 중요한 질문들이 수학 안에 숨겨져 있고 그것은 단순하게 계산될 수는 없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단지 물리학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보어의 철학-물리학의 세부사항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또한 중요한데, 왜냐하면 7장에서 나는 물리학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양자물리학을 계속해서 괴롭히는 몇몇 근본적인 주제들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명확함으로 자연이 말하는 바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엄격한 세부사항들에 유의함으로써만 가능하다(아인슈타인이 말했던 것처럼, “신은 세부사항에 있다”).

 

4장은 이 책의 핵심적인 장이다. 여기서 나는 나의 중심적인 이론적 틀인 행위적 실재론을 전개한다. 행위적 실재론은 인식론적, 존재론적 윤리적 틀로서, 이러한 분야들의 통합적 본성을 분명히 한다. 이 틀은 기술과학적이고 다른 자연문화적인 실천들의 포스트휴먼적인 수행적 사유를 제공한다. ‘포스트휴먼적이라는 말로 내가 의미하는 바는 비인간이 자연문화 실천들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중요한 인식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21]여기에는 일상적인 사회적 실천들, 과학적 실천들 그리고 인간을 포함하지 않는 실천들이 포함된다.[22] 하지만 또한 이를 넘어 나의 포스트휴머니즘용어 사용은 인간비인간사이의 당연시되는 구별을 취하기를 거부하고 이러한 아마도 고정되고 고유한 범주들의 수립을 거부한다는 표지이다. 계보적인 추적은 인간비인간을 관통하는 실천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차단하는 어떤 내부장치들을 개괄하고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수립한다. 포스트휴먼 수행적 사유에서 필수적인 것은 자연-문화 이원론이 기초로 굳어지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이러한 중요한 구별들이 물질적으로 그리고 담론적으로 어떻게 생산되는지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이 이루어질 수 있다.

 

<33>이 장들의 핵심적인 절은 내가 제안한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을 설명한다. 전에 내가 언급했듯이, 보어는 그의 논점을 통틀어 인식론적 주제들에 계속 집중했으며, 불행하게도 그의 존재론적 실행들이나 그의 사유의 존재론적인 차원들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내가 3장에서 제안하는 보어의 존재론과 마찬가지로 7장에서 논의되는 새로운 실험적 증거들 그리고 여타 사유들에 기반하여 나는 4장에서 행위적 실재론의 탐색을 제기한다.

 

3장에서 내가 논증한대로, 일차적인 존재론적 단위는 독립적으로 규정된 경계들과 속성들을 가진 독립적 객체들이 아니라 보어가 현상들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탐구에서 현상들은 단순히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또는 측정 결과의 인식론적 분리불가능성을 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상들은 행위적으로 간-행하는 구성요소들의 존재론적 분리불가능성이다(-행 개념은 중심적으로 여기서 형상화된다. 뒤따르는 언급들을 보라). 중요하게도 현상들은 단순한 실험실의 창조물이 아니라 실재의 기초 단위들이다. 사물의 형이상학으로부터 현상으로의 이동은 과학과 존재론적, 인식론적 그리고 윤리적 주제들의 본성을 보다 일반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막대한 차이를 만든다.

 

-행이라는 개념은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틀의 핵심 요소이다. ‘-이라는 신조어는 얽힌 행위소들의 상호구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바, 앞선 개별 행위소들의 분리를 가정하는 상호작용’(interaction)과는 대조적으로 간-행 개념은 구별되는 행위소들이 앞서지 않으며, 오히려 간-행을 통해 그것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구별된’(distimct) 행위소들은 관계적인 것 안에서 구별될 뿐, 어떤 절대적인 구별은 아니다. 다시 말해 행위소들은 오직 그것들의 상호 얽힘과 관련하여 구별되며, 개별적인 요소들로 존재하지 않는다.[23]

 

중요하게도 내가 4장에서 설명하듯이, -행 개념은 인과성이라는 전통적 개념에 관한 근원적인 개정작업을 구성한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생기 넘치는 새로운 존재론이 등장한다. 세계의 근원적인 생존이 합리성과 생명(생기성, 역동성, 행위소) 둘 모두의 본성을 개정하는 어떤 전체적으로 비전통적인 방식을 조명하게 된다. 이러한 존재론적 전환은 여타 핵심적인 철학 개념들, 예컨대 공간, 시간, 물질, 동력학, 행위소, 구조, 주체성, 객체성, , 의도성[지향성], 담론성, 수행성, 얽힘 그리고 윤리적 참여와 같은 개념들의 재개념화를 이끌어낸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론가들이 제공했던 수행적 사유는 사회적 실천과 인간 신체들의 생산적 본성에 대한 집중을 가져다 주었다. 반대로 행위적 실재론은 신체들의 물질화에서 작동중인 힘들이 단지 사회적인 것만도 아니고, 생산된 신체들이 <34>인간인 것만도 아니라고 간주한다. 결정적으로 나는 행위적 실재론이 담론적 실천들과 물질적 현상들 간에 인과 관계의 본성을 명확히 한다고 논증한다. 즉 나는 담론적 실천이 물질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안하는 것이다. 이것은 변화를 위한 정치적 가능성, 과학의 책임있는 실천, 그리고 과학자들의 책임 교육, 여러 다른 중요한 변화를 파악하고 처리하기 위한 더 심오한 결론들을 야기한다.

 

이렇게 제안된 재구성들은 구체적인 예시들을 고려함으로써 탐색된다. 책의 3부인 얽힘과 재()4장에서 도입된 핵심적인 행위적 실재론이라는 사유에 관한 탐구를 계속하면서 여러 상이한 사례 연구들을 통해 작업한다. 여기서 나는 내가 종사했던 몇몇 영역들, 즉 페미니즘 이론, 후기구조주의 이론, 물리학 그리고 과학기술학과 같은 영역들에서 협상의 난점에 있어서 행위적 실재론의 접근의 유용성을 증명한다. 나는 또한 행위적 실재론이 이전에 탐구되지 않았던 이러한 다양한 영역들 간의 상이한 연결들의 범위들을 가시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5장에서 나는 행위적 실재론이 페미니즘 이론, 행동주의 그리고 정치학에서 중심적이었던 특수한 주제들에 대한 사유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방법들 중 하나를 고려한다. 새로운 시각 기술들을 포함하여 새로운 재생산 기술들의 발전은 신체에 관한 페미니즘 이론들뿐만 아니라 공적 담론에서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계속하게 된다. 새로운 재생산 기술들의 사례를 활용하여, 나는 다른 수행적 사유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이 무시한 바, 예컨대 물질적 행위소, 물질적 제한 그리고 물질적 배제와 같이 결정적인 물질적 차원들을 고려하는 그것의 능력을 확실히 생각함으로써 신체들의 물질화에 관한 나의 포스트휴먼적인 수행적 이해의 의의를 탐구할 것이다. 특히 나는 4장을 시작하면서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에 관해 동조적이지만 비판적인 독해가 가진 함축을 더 깊게 음미한다. 주디스 버틀러의 도전적인 수행성 이론은 성화된(sexed) 신체들의 물질화에 젠더 수행성을 연결하는 것으로서, 학계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는데, 특히 페미니스트들과 퀴어 이론 학자들 사이에서 그러하다. 나는 버틀러의 물질성 개념이 물질성과 담론성 불가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그녀의 노력에 반하여, 작동 중인 인간 신체와 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그것의 특수한 집중으로 인해 제한된다고 논한다. 나는 물질의 본성과 담론적 실천에 관한 행위적 실재론의 재개념화가 어떻게 인간 신체 뿐 아니라 비인간의 특징적인 물질화에서 문화적 힘과 더불어 자연의 생산적 본성에 관해 생각할 수단들을 제공하는지 드러낸다. 이에 따라 그것은 물질적 관심사에 대한 담론의 특권과 <35>버틀러의 사유가 무심코 수립한 자연-문화 이분법의 재기입을 회피한다. 중요하게도 이러한 시도는 누가 또는 무엇이 물질이 되는가에 대해 행위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가능성들에 관한 버틀러의 과소평가를 교정하며, 변화를 위한 가능성들의 훨씬 더 넓은 공간을 명확하게 만든다.(5장은 이전에 출판한 작업에 관한 어떤 개정된 버전이다. 이것의 원래 구조는 유지되었기 때문에 자율적인 텍스트 형태로 사용가능하며, 강의용 또는 여타 논의를 위한 포럼에서도 계속 사용될 수 있다.)

 

6장에서 나는 어떻게 행위적 실재론이 신체들, 정체성 그리고 주체성의 생산에 있어서 힘과 그것의 효과들에 관한 신유물론적 이해에 기여할 수 있는지 살펴 본다. 이 장은 특별히 캘커타에 있는 황마농장에서의 생산 관계들에 관한 릴라 페르난데스(Leela Fernandes)의 민족지 연구에 개입한다. 여기서 정치 경제학과 문화적 정체성의 대한 질문은 둘 다 작업장에서 작동한다. 나의 분석에서 중심적인 것은 사물의 속성으로서라기보다 역동적이고 이동하는 관계의 얽힘으로서 물질에 관한 행위적 실재론의 이해이다. 정치이론, 문화 지리학, 정치경제학, 비판적 인종이론,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그리고 페미니즘 이론의 특징들을 개괄하면서, 나는 공간, 시간 그리고 신체들의 역동적이고 우발적인 물질화, (계급 뿐만 아니라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 종교 그리고 민족성, 마찬가지로 기술과학적이고 자연적인 요인들을 포함하여) 물질-담론적 구체화와 생산관계의 반복적인 ()물질화 그리고 세계의 물질-사회적인 관계들을 재구성하기 위한 행위 가능성과 책임성[응답 가능성]을 사유한다.

 

행위적 실재론의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틀을 전개한 후에, 나는 7장에서 물리학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나는 이 장을 근 70여년 전에 수립된 이래 양자역학을 괴롭혀 왔던 몇몇 미해결의 해석적 난점에 관한 재검토로 시작한다. 과거 10년 동안 실험과학에서의 기술적인 진보는 완전히 새로운 실험 환경, 실험 형이상학의 세계를 열어 놓았다. 즉 이전에 철학적 논쟁을 위한 문제로만 사유되었던 질문들이 경험적 탐구의 궤도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발전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과학자들로 하여금 실험실 안에서 형이상학적 주제들(‘형이상학이라는 범주가 아니라)을 탐구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에서 양자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함축들을 가진 핵심적인 실험적 발견들에 관한 어떤 평가를 담는다. 나는 또한 새로운 해석을 위한 기초로서 행위적 실재론의 가능성을 고려한다. 여기서 나는 그 분야에서 오랫동안 문제가 된 특정한 역설들을 해결하기 위한 그것의 잠재력을 음미하고, 최근 제기된 더 새로운 해석들 중 몇몇과 그것을 비교한다.

 

<36>중요하게도 나의 프로젝트는 주류 페미니즘 과학학에서 시작하는데, 여기서 그것은 단순히 과학적 실천들의 본성에 대한 통찰들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연구되고 있는 과학 영역에의 구성적인 기여를 만들어낸다. 즉 나의 프로젝트는 단순히 과학에 관한 어떤 반성이 아니라 이러한 과학적 실천들과 자연(보어의 해석에서 두 가지 핵심적인 요소)에 대한 통찰들을 취함과 동시에 그것들을 과학 자체로 되돌려 회절함으로써 어떤 실제적인 과학 연구 영역(특히 양자 물리학의 기초)에 대한 특정한 과학적 기여를 행한다. 특히 나는 나의 회절적 방법론으로부터 끌어낸 개념적 전환이 과학과 다른 물질 담론적 실천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재구성할 뿐 아니라 양자 물리학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위한 기초를 실제적으로 형성하기에 충분히 의미있고 강력하다고 논증한다.

 

중요하게도 새로운 실험들이 내세우는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물리학 영역 너머의 폭넓은 함축들을 가진다. 그 함축들은 확실히 철학자들의 관심사 중 하나이며, 특히 자연주의 경향을 가진 철학자들이 그러하다. 형이상학에 대한 커져가는 혐오에도 불구하고, 후기구조주의자와 다른 여타 비판적 이론가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동일성, 시간 그리고 물질의 본성에 관한 질문을 직접 제기하는 실험들에 대한 논의에서 사유를 위한 많은 자양분을 발견할 것이다. 앞서와 같이 나는 이 장을 물리학에 대한 어떤 배경지식도 없는 독자들에게 접근가능하도록 쓰려고 노력했다. 물리학자들도 물론 이 장에서 숙고할 많은 것들을 발견할 것이며, 여기에는 핵심적인 해석적 주제들의 체계적 평가와 철학적 해설을 포함한다.

 

결론에 해당하는 8장은 이 책의 주요 주제들을 함께 다루며 몇몇 핵심 쟁점들을 설명한다. 나노기술, 정보기술론 그리고 생명기술의 구체적 사례들은 이러한 생각들을 구체화하고 얽힘을 연구하는데 사용하는 현대 물리학에서 전승된 중요한 장치 요소들 중 몇몇을 분석하기 위한 계기들을 제공한다. 이러한 기술들은 그러한 주제들이 조명될 때 불가분하게 뒤얽혀 있게 된다.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윤리학의 얽힘은 이 장에서 강조된다. 책이 펼쳐질 때, 회절 현상의 복잡함과 풍부함은 점점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이 장에서 나는 기존의 총체적인 패턴에 집중하게 되고 어떻게 그 패턴 자체가 얽힘에 속한 물질인지에 관해 설명한다. 사실상 나는 회절이 단순히 차이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어떤 절대적 의미에서 차이들이 확실히 아니라, 물질화하는 차이들의 얽힌 본성에 대한 것이라고 논증한다. 중요하게도 내가 이 장의 마지막 절에서 설명하는 바, 차이는 책임에 묶여 있다.

 

<37>이 마지막 장에서 나는 행위적 실재론의 윤리학적 이해의 기초 요소들을 전개한다. 나는 윤리적 관심이 단순히 과학적 실천에 보완적이지 않으며, 그것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를 넘어 나는 가치들이 어떻게 앎과 존재의 본성에 필수적인지 보일 것이다. 객체성은 동시에 인식론적, 존재론적 그리고 가치론적 주제이며 책임과 의무의 문제는 과학 실천의 핵심에 놓여 있다. 이론화하고 실험하는 과학적 실천의 객관적 지시체와의 올바른 일치는 윤리적(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일 뿐 아니라) 관심들에 관한 사려를 요청한다. 과학이 우리에게 세계에 관해 이야기해 주는 바는 윤리적 관심들과 올바른 분별로부터 스스로를 유리시킨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실재론은 독립적 실재의 재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 결과들, 개입들, 창조적 가능성들, 그리고 세계 안에서 그리고 그것의 부분으로서 간-행의 책임에 관한 것이다.[24] (바로 이런 경우에 우리가 프레인의 제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아마도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다. 매우 신중한 유비적 추론조차 우리를 과학과 윤리학의 관계의 본성에 대한 이러한 결론으로 이끌었으리라고 볼 것 같지 않다.)

 

이 책이 오늘날 널리 읽히는 다른 책보다 더 길기 때문에, 나는 낯선 독자들을 위해 책을 통과하는 가능한 다른 경로들에 대한 몇몇 제안을 할 것이다. 이전에 주의할 것이 있다. 즉 내가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은 중요한 물질적 차이들, 관계성 그리고 물질화의 생생한 춤 안의 얽힘을 설명하면서, 어떤 회절 격자처럼 작동하는데, 만약 책의 중요한 구절들이 그저 지나쳐 진다면 생산된 패턴의 복잡함을 음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긴 해도, 흥미로운 패턴들은 상이한 장들을 추출해 내면서 등장한다. 그리고 여러 독자들은 특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여러 추출들을 발견할 것이다. 물리학자들과 과학 철학자들은 아마도 3, 4 그리고 7장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 장들은 보어의 철학-물리학에 관한 상세한 검토로 구성되며 지난 10년 동안의 몇몇 중요한 실험 결과들에 관한 접근가능하고 체계적인 소개와 해석적 주제들의 분명한 재구성을 제시한다. 5장은 원래 저널 논문으로 출판되었으며 나는 그 원래 구조를 유지했고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독립적인 부분으로 유용하게 계속해서 읽힐 수 있다. 반대로 그것은 생각건대 (확실히 몇몇 중요한 통찰들을 위험에 빠트리면서) 논증의 연속성을 잃어버림이 없이 그냥 지나쳐도 될 것이다. 4장은 핵심적인 장이다. 그리고 많은 측면에서 7장도 그러하다.(‘얽힘에 대한 생각이 중요한 뉘앙스, 구조 그리고 중대한 비일상적 의미를 가지는 곳이 여기이다.) 다소 덜 과학적으로 경도된 독자들 또는 스스로를 <38>양자 물리학의 철학적 주제들에 관한 세부사항에 그다지 많은 흥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7장을 그저 지나치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나는 인과성의 본성, 정체성 그리고 자연에 관한 가치 있는 통찰을 위해서만이라도, 적어도 이 장을 호기심을 가지고 읽기를 권유하고 싶다. 확고한 독자들이라면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 안에서 스스로가 이끌어 낸 것을 발견할 것이다. 특히 난해하고 밀도 있는 이론적 지대를 통과해 이론을 만들어 가는데 익숙한 후기구조주의 학자들은 그들의 어휘목록에서 몇몇 핵심 개념들에 관한 주목할 만하고 급진적인 개정작업을 그냥 지나치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양자도약은 불가피하다. 당신의 얽힌 교전(entangled engagement)의 본성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당신이 이 책이 즐길 만하며 사유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하길 희망한다.

 

1부 얽힌 시작

1장 우주의 중간에서 만나기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 진실은

마치 암컷으로만 구성된 13종의 채찍꼬리 도마뱀이

그와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것을 거슬러 있는 바람에

발견되지 않은 채 있을 때처럼

스스로를 느끼는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의 중간에서 만나야만 한다.

우리가 무()와 같이 우리를 바라보는 것을 향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우리에게 펼쳐지지 않을 것이다.

높고 견고한 하늘은 단지

태양이 그 아래를 지나갈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죽음이 자아를 빼앗아 간다면

그것은 자연 안에서 유일한 사건

정확히 보이는 그대로의 그러한 사건이다.

 

- 앨리스 풀턴, ‘캐스케이드 실험’(Cascade Experiment)

 

과학적 지식의 구성적 본성에 대한 초청강의를 마친 후 아침에, 나는 STM(주사터널현미경scanning tunneling microscope) 기계를 가지고 흑연 샘플을 들여다 볼 특별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수천 나노미터 ... 수백 나노미터... 수십 나노미터 크기로 접근하여 나노미터 단위의 구조들 아래로 접근해 들어갈 때 개별적인 탄소 원자들이 우리의 바로 눈 앞에서 드러났다. 그 경험은 너무나 놀라워서 나의 신체를 으스스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론물리학자인 나는 거기 서서,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과 비슷하게, 실험 동료들이 이라고 부르는 물리학의 건축물들의 기초 안으로 매우 드문 모험을 했고, 이것이 역사의 비정질 혼효물이 단 한 순간에 결정화되는 것으로 보일 그러한 삶의 순간들 중 하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많이 나는 나의 학생들에게 원자들의 존재 증거를 되풀이해 이야기했을까? 그리고 그것들은 이론에 의해 예고된 것과 같이 딱 알맞은 크기와 상호원자적인 공간들로 된 육각형 구조로 집합화되어 있었다. “만약 아인슈타인, 러더포드, 보어 그리고 특히 마흐가 이것을 보았다면!”이라고 난 외쳤다. 그리고 학부생들이 실험도구들을 작동시킬 때(<40>그들은 우리가 나노미터로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진동 간섭의 원인들을 조심스럽게 제거함으로써 그저께 작업한 것에 막 도달했었다) 샘플들을 보유한 관들을 분해해서, 나는 스스로 흑연 표면에 탐침의 미세한 위치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스카치테이프 조각으로 정교하게 붙어 있었는데, 나는 원자를 본다는 것이 학생들에게 빨리 덤덤한 것이 될 것이고(가시광선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고, 다음으로 분자들의 구조를 전자 현미경으로 보면서 그러한 것이 이전 세대들에게 일상적인 것이 되었듯이), 나는 과학의 세기에 예기치 않게 양육되었다는 것에 감사하다고 큰소리로 중얼거렸다.[1]

 

내 이야기의 이 지점에서, 나는 이것이 당신의 해설자에게 지적인 당황스러움의 순간을 드러내는지 아닌지를 궁금해할 과학 동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는 전날 밤에 과학 지식의 구성적 본성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사실상 비록 내가 근본적으로 목격했던 사건에 의해 감동을 받았을지라도, 과학적인 기획의 효과의 제단 앞에 서 있으면서, 나는 완고했던 것이다. 구성주의자들이 분명하게 하려 했기 때문에, 경험적 적합성은 구성주의의 부담을 침묵시킬 만한 어떤 논증이 아니다. 과학적 지식이 구성된다는 사실은 과학이 작동하지않는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으며, 또한 과학이 작동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자연에 관한 인간-독립적인 사실들을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경험적 적합성이 실재론의 증명이 아니라는 사실은 종료점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그와 같은 구성작용을 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구성주의자들에게는 시작점이다. 과학의 사회적 실천이 개념적으로, 방법론적으로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권력의 특정 축을 따라간다는 점점 더 증가하는 강력한 증거 앞에서 무엇보다 긴급하게 보이는 것은 하나의 의무이다.[2]

 

다른 한편으로 나는 과학학자들이 지식의 문화적이고 자연적인 원인들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상기하길 원하는 나의 과학 동료들에 공감한다. 대부분의 구성주의자들이 그들이 인간-독립적인 세계 또는 자연적, 물질적 또는 비인간적 요인들의 존재를 거부하는 두려움을 추방하고자 시도하는 길에서 나오는 반면, 많은 관심이 사회적이거나 인간적인 요인들에 놓여 있게 되었다. 공정하게 말해, 이것이 증명의 부담이 생겨났던 지점이다. 즉 구성주의자들은 과학을 자연의 거울로 취급하는 세계관의 오류를 증명하는 도전에 응답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성주의적 논증들의 영역과 복잡함 둘 모두가 성장했기 때문에, 그들이 동등하게 극단적 입장 과학이 문화를 반영한다는 - 을 수용한다는 책임을 지는 것은 커져 가는 활기와 더불어 그들에 대항하여 부과된 것이다. 구성주의자들이 실제로는 그와 같은 극단적 입장을 거의 취하지는 않지만, 과학학자들은 <41>구성주의의 규제 아래에 들어가는 다양하고 복잡한 입장들에 관한 과잉단순화와 오해 때문에 이러한 임무를 단순히 염두에 두지 않으면서 태만해질 것이다. 추방되었다는 것을 인정함에도, 표명되고 있는 바, 그 염려는 구성주의적인 저술 안에 있는 존재론적인 것을 넘어서는 인식론적 주제들의 특권화에 관련된 합법성을 건드린다. 존재론적인 주제는 완전히 무시되지 않았지만, 그것들은 충분한 주목을 받지 않았다.

 

세계에 관한 존재론은 전통적인 실재론에 있어서 발견의 문제이다. 추정된 바, 과학 이론들과 실재 간의 일대일 대응은 과학적 개별체들이 발견자들에 의해 제거된다는 그 이상의 가정을 떠받치곤 한다. 다시 말해 자연은 아직은 독립적인, 즉 이론적이고 실험적인 실천들에 의해 밝혀져야 한다고 말해진다. 다시 말해 자연은 투명하게 주어진다. 카트라이트(Cartwright, 1983)는 철학적 분석의 중요성과 과학적 실재론을 두 가지 독립적인 입장들 이론에 대한 실재론과 개별체들에 대한 실재론 로 결정적으로 분리하는데, 해킹(Hacking, 1982)은 카트라이트와 마찬가지로 개별실체들의 실재론에 찬성한다. 해킹은 과학학에서 논점을 전통적인 이론적 구성이라는 강조점으로부터 실험적 실천으로 옮기면서, 그의 입장을 실험실에서의 개별실체들을 다양화하는 실험자의 능력에 두게 된다. 존재하는 그것은 우리가 세계 내부에서 다른 무언가를 감응하기 위한 개입에 사용할 수 있는 그것이다. 전자는 실재로 취급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효과적인 실험 도구들이기 때문이지, ‘발견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갈리슨(Galison, 1987)도 또한 그의 역사적 분석에서 20세기 물리학 실험의 세 가지 다른 영역들을 비교하면서 실험적 실천을 중심에 놓는다. 거기서 그는 안정성과 직접성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개별적 실재를 위한 해킹의 기준을 일반화한다.[3] 다른 사람들은 자연의 직접적인 거기있음(thereness)을 따져 묻는 것으로 더 나아간다. 라투르(Latour, 1993) 또한 안정성을 우선시하는데, 그는 그것의 다른 축이 자연과 사회의 축과 연결되는 2-차원 기하학에 속한 하나의 변수로서 그것을 정립한다. 따라서 본질은, 유사-객체에 관한 여러 존재론들을 특성화한다고 여겨지는 이 기하학 안에서 안정화의 궤도가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해러웨이(Haraway, 1988)는 불안정성을 강조한다. 즉 문화의 바깥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연 개념 뿐만 아니라 존재론과 분리된 인식론에 대한 그녀의 분명한 도전에서, 쟁점인 객체들을 정의하는 것은 경계들의 불안정성이다. 경계들의 불안정성과 인식 객체들이란 지식 생산에서 행위항들(agents)이라는 해러웨이의 주장은 그녀의 사이보그 개념(1985)과 물질-기호론적 행위자들(material-semiotic actors, 1988)이라는 개념을 규정한다. 이것은 라투르의 하이브리드와 유사-객체(1993)와 불협하면서 조화로운 공명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42>전통적인 실재론적 입장의 대립극을 고려하는 것으로 움직이는 것은 기호론적이고 탈구축적인 입장들이다. 과학학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에게, 기호론과 탈구축 이론들은 기호나 재현의 내적 독단을 주장하면서 기표와 기의의 추정된 일치를 의문에 부치는데, 이는 언어적 나르시시즘에서 궁극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재현의 극장에 이미 언제나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해일즈(Hayles, 1993)는 언어가 무근거의 활동이라고 주장하는 극단적 전망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고 그녀s,s 우리에게 실제적인 것에의 접근을 허용하면서, 지시성을 재개념화함으로써 실재와 접촉하는 언어를 수립하고자 시도한다. 해일즈의 제한적인 구성주의 이론은 그것의 실증성에서 보여질 수 없는 실재에 따라 제공된 제한들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 일관성(일치에 관한 실재론적 생각에 반대하며)과 기호 개념에 기댄다. 즉 그녀가 논하길, “우리가 알 수 있는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경계가 존재한다.”(40).

 

우리 세계의 존재론에 대한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한 이러한 시도들은 과학학 문헌들의 규칙이라기 보다 예외들이다.[4] 요청되는 것은 과학적 실천의 존재론적 차원에 관한 보다 깊은 이해이다. 우리가 자연과 문화가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기술에 의해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연은 국지적인 담론들과 양립가능한 방식으로 문화에 의해 채워지는 주형(template)을 제공하는가? 또는 특수한 담론들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자연에 따른 문화의 층화를 바라볼 렌즈들을 제공하는가? 자연의 완연한 짜임은 끝까지 관철되는가, 또는 그것은 부분적으로 과정 중에 사라지거나 왜곡되는가? 실재란 인간 담론들과 상호작용들에 의해 구조화되는 비정질 덩어리인가? 혹은 그것은 상호 맞물리는 퍼즐 조각들의 조립 조각들처럼 국지적 영역들에서 맞아떨어지는 다양화되는 틀들에 의해 상이하게 추출되는 몇몇 복잡하고, 불규칙한 모양들인가? 또는 기하학은 프랙탈이어서 실재가 심지어 국지적으로도 맞아 떨어지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인가? 적어도 그렇다면, 어떤 세부적인 수준에서 그와 같은 질문이 대답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이 질문들 중 어느 것도 20세기 초의 대학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은 있는가? 이것은 실증주의 문화의 여러 붕괴 상태 동안 훈련된 우리 중 몇몇에게 형이상학처럼 여전히 지나치게 건전하지 않은가?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 질문들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 될 것인가? 도나 해러웨이가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것처럼, “객체들로 간주되는 것은 정확히 세계사가 그것에 대해 드러나는 것이다”(1988, 588). 나는 과학적 실천과 다른 사회적 실천 안에서 자연의 본성과 물질적인 것과 담론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한 몇몇 방법들을 탐색한다. 결과적으로 <43>내가 존재론과 인식론이 구별되는 관심사라는 서구 철학의 전통적 신념을 의심한 좋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인식론적인 주제들 또한 무시할 것이라 해도, 나는 과학학에서 통상적인 것보다 존재론적 이슈에 상당히 더 많은 강조점을 둘 것이다.

 

어떤 새로운 존재인식론적틀을 표명한 후에, 나는 그것의 실재론적 취지를 충분히 말 할 것이다.]5] 1980년대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관심의 부활 이후, 그것의 인기는 다시 한 번 약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것이 실재론을 위한 논증의 메타이론적 실패에 관한 파인(Fine, 1984)의 영리한 사유에 의해 울려 퍼진 조종소리 때문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것은 구성주의자들의 경우에 과학적 실재론이 소박하고, 비반성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반적 경향 때문이며, 정치적으로 그것의 현존에 있어서 어떤 비정치적인 태도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반실재론의 몇몇 형식과 구성주의의 협력은 거의 자명한 것이 된다. 즉 만약 우리가 과학 지식의 구성의 문화적 특수성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독립적인 실재의 진정한 재현인 이론들을 구축할 희망을 제거해 버려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예컨대 미결정성 논제라는 구체적 사례를 제공하면서, 쿠싱(Cushing, 1994)은 각각의 이론들이 동일한 경험적 증거들을 해명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재론자들이 우리 세계의 실제적 존재론에 이론적인 접근을 위한 어떤 논증을 만드는데 있어서 곤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6] 대개의 경우, 구성주의자들은 실재론에 대해 철저한 경멸, 또는 적어도 의심을 표현했으며 명백하게 반실재론적 입장들을 채택했거나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이러한 대립에 의해 제한된다고 느끼거나 다른 주제들에 집중하는 것이 더 이득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후자의 입장에 특별히 공감한다고 고백해야 하지만, 실재론이 너무 빨리 멀어져 버렸다고도 생각한다. 실재론은 억압적이고도 해방적인 입장과 프로젝트 둘 모두를 지원하는데 적용되었으며, 나의 희망은 이러한 역사적 연결에서 실재론의 무게 신중한 사업이자 진정한 탐구에 포함되는 관련 책임성 는 그 과정에서 완고한 실증주의적인 과학과 너무 손쉽게 이론과 놀이를 뒤섞어 버리는 포스트모던 문화에 저항하는 어떤 가능한 바닥짐을 제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7]

 

실재론이 암시하는 의미의 다양성을 깨달을 때, 이러한 연결에서 나는 내가 어떻게 첫 번째로 실재론을 택한 것인지 분명히 하고 싶다. 출발점으로 나는 쿠싱의 다음 말을 따른다.

 

나는 아마 불합리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과학적 실재론자가 세계의 존재론에 대한 믿을만 하고 이해가능한 접근법을 제공할 수 있는 성공적인 과학 이론임을 믿는다고 가정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요청을 여지없이 너무 많이 약화시킨다면, <44>우리가 우리의 이론에 따라 전혀 접근하지 못하는 그리고 그것의 재현물인 객관적 실재의 실존에 대한 믿음을 제외하는 것은 의미있는 파악을 넘어서는 애매함일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실재론자이거나 아니라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가치 있는가?(Cushing 1994, 270n26)

 

내가 궁극적으로 이러한 정의에 대해 실질적인 자격을 부여할 것이라 해도, 나는 내가 쿠싱의 요청으로부터 핵심을 취한 것을 약화시키고자 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출발지점을 실재론 대 상대주의 또는 실재론 대 언어적 일원론 또는 실재론 대 주체주의의 대립이라는 논의들을 포함하여 과학학 저술에서의 여타 다른 보다 일반적인 쓰임으로부터 분리하여 내가 참여하는 실재론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선택했다. 나의 첫 번째 관심사는 이러한 의미들에서의 실재론과 관련이 없다. 즉 나는 상대주의적이지 않은, 언어 영역 밖의 실재의 실존을 거부하지 않는, 그리고 다양한 객체 개념들과 양립가능한 반실재론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쿠싱의 의문의 정신에 따라, 나는 나의 최초 목적들을 위한 실재론의 의미의 탄력성을 제한하고자 한다. 과학학자들은 객체주의적, 주체주의적, 절대주의적 그리고 상대주의적 태도의 극단들을 거부하는 완화된 구성주의적 입장들을 오랫동안 연구했고 표명하고자 애썼지만, 아마도 그것은 그와 같은 기반만으로는 이러한 이름들을 붙이기에는 부적합하다. 즉 나는 과학자들이 가장 많이 쫓기는 몇몇을 포함하여, 환영적인 것들의 일족들 전부를 도드라지게 하는 실재론을 수립함으로써, 이러한 성취들을 도외시하길 원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특히 페미니즘 과학학자들이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굳건히 대립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아마도 중요하다. 이들은 비록 실재론적 입장들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지만, 과학자들과 공유하는 열성을 가지고 있다.(과학자들과 여타의 사람들이 페미니즘 문헌들을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것이다) [8]객관주의의 일란성 쌍둥이로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보면서, 그리고 둘 모두를 인식의 체현이라는 주장을 거부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보면서, 해러웨이의 상황적 지식 이론(1988), 하딩의 강한 객관주의(1991), 켈러의 역동적 객체성(1985) 그리고 롱기노의 맥락적 경험론(1990)을 포함하여, 페미니즘 과학 이론은 비상대주의적인 반실재론적 입장들을 표명한다. 결론적으로 나의 실재론에 관한 논의가 우리 세계에 직접적인 존재론의 참여가 가능하다는 의미와 관련된다 해도, 나는 마찬가지로 이미 내가 제안한 실재론의 새로운 형식이 이러한 여타 극단적 대립들을 거부하는 방식을 특성화함으로써 세워지는 고도의 표준을 만족시키려고 할 것이다.[9]

 

나는 내가 제안한 존재인식론적 틀을 행위적 실재론으로 부른다.[10](‘행위소를 형용사적 형태로 확장하여 사용하려는 나의 의도는 이후에 명확해질 것이다.) 중요하게도 행위적 실재론은 단어와 사물 간의 대응 관계라는 생각을 거부하며, 그 대신 <45>담론적 실천들이 물질적 현상들과 어떻게 관련되는가에 관한 설명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행위적 실재론은 실재론과 사회구성주의의 전통적 형식 사이의 부적절한 논쟁을 따르는 경향을 떠남으로써, 논점을 (과학적인 그리고 이런저런) 재현의 본성으로부터 담론적 실천들(기술과학적인 것을 포함하여)의 본성으로 이동시킨다. 이러한 이론적 틀에서 관건적인 것은 실천의 물질적 본성과 그것이 물질이 되는 방식을 사유하고자 하는 강력한 시도이다.

 

자연의 본성과 변화를 위한 가능성들

과학과 과학학은 자연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과 연관된 (상호)학제적 실천의 유일한 짝은 아니다. 자연의 본성은 여러 세기 동안 정치 이론가들의 중심적인 관심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들과 노예들이 이른바 그들의 선천적인 열등성 때문에 사회적 위치들에 굴종하도록 지정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긍정한 것은 물론이고, 어떤 자연적 실체로서 국가 내적으로 정치적인 신체 - 의 개념 자체를 정립한다. 다수의 오래되고 새롭게 파악된 생물학적 결정론의 사유에 반해 논하면서, 유명한 페미니스트 철학자인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의 열등한 사회적 위치가 본성에 일치한다는 그릇된 믿음을 몰아내려고 노력하는 중에 성과 젠더에 관한 관념들을 해체한다. 보부아르에 따르면 여성은 그들의 생성과정에서 인간 종의 한 구성원으로서, 제한된 사회적 존재로, 초월적인 인간 주체로 이해되어야 하지, 그들의 본성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그들은 생물학에 종속된 비인간 피조물들이 아니다).[11]

 

다른 실존주의 정치 철학과 같이 보부아르의 주체 이론은 그것의 휴머니즘적인 결점들 특히 그것의 인간에 관한, 그리고 남성과 여성에 관한 본질주의적 개념 때문에 강하게 비판을 받았다. 페미니스트들 그리고 다른 비판적 사회이론으로부터의 비판은 (그것의 사회적 상황성에 관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여성범주의 본성과 관련된 음미되지 않은 전제들과 권력의 작동이라는 중요한 구조적 측면에 대한 고려의 실패라는 이유 안에 보부아르 이론의 탄핵을 포함한다. 자기-결정성과 그것 자체의 의식성에 대한 투명한 접근을 통해 구성되는 휴머니즘적 주체 개념에 도전하면서, 구조주의자들은 주체가 구조의 생산물 그것이 친족이든, 언어든, 무의식, 정신의 인지적 구조, 또는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사회의 정치적 구조이든 간에 - 이며 따라서 어떤 원인이라기보다 하나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논증한다. 주체의 결정성에 관한 구조주의적 사상들은 <46>후기구조주의적인 접근들에 의해 도전받아 왔는데, 이들은 주체 외부에 있으면서 그것을 결정는 단일한 구조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곤란하게 여긴다. [12]주체가 내적으로 생성된다거나 외부적으로 부과된다는 양 극단을 거부하면서 후기구조주의자들은 행위소 대 구조 그리고 자유의지 대 결정론에 관한 논쟁 자체 뿐만 아니라, 주체성의 기하학적 개념, 즉 그 논쟁에서 중요한 개념들인 내부성외부성을 정당화하는 것도 피한다.[13]

 

이 간략한 개괄에서 암시되는 이유들만으로도, 페미니스트, 후기구조주의자 그리고 여타 비판 이론가들이 자연의 본성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14] 체현, 주체성, 행위소 그리고 미래성의 본성을 의문에 부치는 작업들은 아직 미결 상태에 있다.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변화를 위한 가능성이다.

 

재현주의로부터 수행성으로

 

우리가 사물과 말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우리가 보는 바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바를 본다는 것, 그리고 그 둘이 이어져 있다고 믿을 수 있다.”

- 질 들뢰즈, 푸코

 

말과 사물은 문제에 관해 전반적으로 신중한 제목이다.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자유주의 사회이론과 정치이론 그리고 과학지식에 관한 이론들은 유사하게도 세계가 재현을 기다리거나 그것을 도입하는 개체들 법 앞에 존재한다고, 또는 법의 발견물 앞에 존재한다고 추정되는 - 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다. 존재자가 재현에 앞서는 고유한 속성들을 가지고 개체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재현주의의 정치적, 언어적 그리고 인식론적 형태들에 관한 믿음 아래에 놓인 형이상학적 전제다. 혹은 논점을 반대로 놓으면, 재현주의는 재현들 간의 존재론적 구별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들이 재현하려 하는 그것이다. 특히 재현되는 것은 재현하는 그 모든 실천들의 독립성을 열어 놓는다. 즉 개별실체들의 두 가지 구별되고 독립적인 종류들로 추정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재현물들과 재현되는 개별실체들이다. 재현 체계는 가끔 삼자 협정의 측면에서 뚜렷하게 이론화된다. 예컨대 한편으로는 지식(즉 재현물들)에 더해, 다른 한편으로는 알려지는 것(즉 의도적으로 재현되는 것), 마지막으로 아는 자의 존재(즉 재현하는 누군가)<47>간혹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발생할 때, 재현물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실체들 간에 매개 기능을 수행한다고 추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 당연시되는 존재론적 간격은 재현물들의 정확성에 관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예컨대 과학적 지식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를 정확히 재현하는가? 언어는 그것의 지시체를 정확히 재현하는가? 어떤 주어진 정치적 재현, 법호인단 또는 법안은 인민의 관심사들을 대변한다고 알려진 바를 정확히 재현하는가?

 

재현주의는 페미니니스트들, 후기구조주의자들 그리고 퀴어 이론가들의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미셸 푸코와 주디스 버틀러라는 이름들은 그러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회집된다. 버틀러는 아래와 같이 정치적 재현주의의 문제를 요약한다.

 

푸코는 권력의 사법체계가 계속해서 재현됨으로써 주체를 생산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권력의 사법적 개념은 순수하게 부정적 의미로 정치적 삶을 규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그와 같은 구조들에 의해 규제되는 주체는 그러한 구조들의 요청에 조응하여 그것들에 종속됨으로써, 형성되고, 정의되고 또한 재생산된다. 만약 이러한 분석이 맞다면, 여성들을 페미니즘의 ‘주체’로 재현하는 언어와 정치의 사법적 구성은 그 자체 담론적 구성이며 재현적 정치의 어떤 소여된 판본의 효과이다. 그리고 페미니즘 주체는 그러한 주체의 해방을 촉진한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러한 정치 체계에 의해 담론적으로 구성된다.(Butler 1990, 2)

 

이러한 난점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에서, 비판적 사회 이론가들은 재현주의의 틀 너머로 가는 정치적 발명의 가능성들에 관한 합의를 구성하기 위해 분투한다.

 

재현주의가 과학학의 영역에서 의심스러워졌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요하게 여겨진다. 재현주의에 관한 비판적 평가는 과학에 관한 연구가 자연과 과학 지식의 생산에서 과학의 현행적 실천의 상세한 역동성에 관한 연구로 초점을 이동하면서 비로소 등장했다. 이 중요한 이동은 과학의 분리된 분과 학문들(예컨대 과학사, 과학철학, 과학 사회학)과 과학학 사이에 강조된 차이를 거칠게 규정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모든 과학학적 접근들이 재현주의의 비판인 것은 아니다. 과학적 재현의 본성(과학자들이 어떻게 그것을 생산하고, 해석하며, 아니면 해석하지 않고, 그것들을 활용하는지를 포함하는)에 관한 그와 같은 많은 연구분야들은 이러한 논점, <48>재현주의로 가는 길의 저변에 깔린 철학적 관점을 당연시했다.[15] 다른 한편으로 몇몇 과학학 연구자들은 재현주의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 일치된 노력을 경주했다.

 

이안 해킹의 재현하기와 발명하기(1983)는 과학의 본성에 대한 재현주의적 사유의 한계에 대해 최전선에서 의문을 제기했다. 과학철학과 과학학에서 재현주의에 관한 가장 끈질기고 철저한 비판은 과학철학자인 조셉 루즈(Joseph Rouse)로부터 온다. 루즈는 재현주의적 사유가 과학적 실천의 본성을 이론화하는데 놓는 제한들을 선도적으로 캐물었다.[16] 예컨대 루즈(Rouse, 1996)는 과학적 실재론과 사회구성주의 간의 진부한 논쟁이 마찰 없이 과학철학으로부터 과학학으로 이동했지만, 이러한 적대적 입장들은 그들의 옹호자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사실상 그들은 그와 같은 끊임없는 논쟁들을 유발하는 재현주의적 가설들을 공유한다. 즉 과학적 실재론자들과 사회구성주의자들은 과학적 지식(이론적 개념들, 그래프들, 입자 궤적들 그리고 사진 이미지들과 같은 그것의 다양한 재현적 형식들에 있는)이 물질세계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매개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이 차이 나는 곳은 지시체에 관한 질문, 즉 과학 지식이 세계 안의 사물들, 또는 사회적 활동들의 생산물인 객체들을 실재하는 바(즉 자연)대로 재현하는지 아닌지이긴 하지만, 두 그룹은 재현주의에는 동의한다.

 

재현주의는 어떤 상식적인 호소력을 가지고서 서구 문화 안에 너무나 깊게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완전히 자연스럽지는 않더라도,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현주의는 (‘자연 자체와 같이 단순히 그것에 관한 우리의 재현이 아니라) 역사를 가진다. 해킹은 재현에 관한 철학적 문제를 원자와 허공에 관한 데모크리토스의 꿈에 이르기까지 추적한다. 해킹의 인류학적 철학에 따르면, 재현은 데모크리토스 이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아다. “‘실재라는 단어는 처음에 단지 무제한적인 유사성을 의미했다”(1983, 142).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재현과 재현되는 것 사이의 간격의 가능성을 출현시킨다. ‘외양은 그것의 첫 번째 모습을 형성한다. 테이블은 나무나 허공을 움직이는 낱낱의 개별실체들의 더미로 만들어진 단단한 물질인가? 원자론은 어떤 재현이 실재인지에 대한 질문을 노정한다. 철학에서 실재론의 문제는 원자론적 세계관으로부터 나온다.

 

루즈는 데카르트적 부산물로서 재현주의를 지목한다. 이것은 특히 아는 주체의 노선을 따라 이루어지는 내부적인 것외부적인 것사이의 데카르트적 분할의 비가시적인 결과이다. 루즈는 데카르트적 의심의 본성 아래에 놓여 있는 세계를 포괄하는 언어에 대한 비대칭적인 믿음을 드러낸다.

 

<49>나는 재현(즉 의미화나 내용)이 그것들이 재현한다고 추정하는 사물들보다 더 접근가능하다는 가설에 대해 의심을 북돋우고자 한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통해 직접적으로 그 지시물들에 오류 없이 가 닿을 수 있는 마법같은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술적으로 우리를 직접 그 의미나 재현적 내용에 도달토록 할 수 있는 언어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가 의미하는 바, 또는 우리의 언어적 수행이 말하는 바를, 우리가 그러한 말들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손쉽게 알 수 있다는 가정은 데카르트적 전통이다. 이는 데카르트 주장의 언어적 변형으로서, 우리가 ‘외부’ 세계에 관해 결여한 우리의 사유 내용으로의 어떤 직접적이고 특권적인 접근을 가진다는 것이다(Rouse 1996, 209).

 

다시 말해 사물에 덧씌운 재현에 대한 우리의 접근 안에 정립한 비대칭적 믿음은 서구 철학 전통의 부분으로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우연적인 믿음인 것이지 어떤 논리적 필연성은 아니다. 즉 이는 단순히 정신의 데카르트적 습관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대안적인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데카르트적 의심을 향한 건강한 회의주의라고 할 수 있다.[17]

 

재현주의의 기초 전제들을 회피하는 확고한 철학적 입장들을 발전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자연문화적 실천들에 관한 수행적 이해는 하나의 대안이다. 수행적 접근들은 한편으로 재현물과 재현되기를 기다리는 존재론적으로 분리된 개별실체들이 있다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현하기의 실천들 또는 수행들에 관한 탐구 뿐 아니라 그러한 실천들과 그 효과를 위한 조건들의 생산적 결과들에 초점을 맞추라는 재현주의적 주장을 의문에 붙인다. 예컨대 과학적 실천의 수행적 이해는 앎이 거리를 두고 재현하는 것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며, 세계와의 어떤 직접적인 물질적 연루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사유한다.[18] 중요하게도 문제가 되는 것은 정확히 이러한 수립행위(enactments)의 본성이다. 행위함이나 수행에 관한 어떤 임의적인 개념도 수행적인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수행적 수립(이것은 연극적인 수행과 같은 것이 아니다)에 연루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적 사유는 재현주의로부터의 어떤 갑작스러운 단절을 만들면서, 다소간의 예를 들자면 존재, 동일성, 물질, 담론, 인과성, 역동성 그리고 행위소와 같은 다수의 기초적인 관념들의 본성에 관한 재사유를 요청한다. 이어지는 논의에서 나는 과학학자들과 사회정치 이론가들에 의해 제공된 제각각의 사유들을 넘어가면서 서로 간에 통찰들이 갈마드는 수행성에 관한 이해를 표명할 것이다. 이 영역에서 수행적 사고는 놀랍게도 그것들 간 상호교환이 전혀 없는 평행한 활동들을 이끌었으며, 이에 따라 개념을 강화했다. 여기서 <50>과학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관심사들이 분리된 각각의 학자군들은 즉각 거부된다. 나는 이 제각기 순환하는 담론들 각각에 몇몇 배경들을 설명하면서 시작하고, 뒤따르는 장들에서 나의 생각을 더 심화 발전시킬 것이다.

 

재현주의 없는 실재론

우리는 실재를 우리가 다른 무언가를 감응하기 위해 세계 안에 개입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것, 또는 세계가 우리를 감응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과학적 반실재론에 대한 나의 공격은 맑스가 그의 당대에 관념론을 맹공했던 것과 비슷하다. 둘 모두 논점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 이안 해킹, 재현하기와 개입하기

 

19세기 말 즈음, 물리학자들은 원자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대개 반실재론자들이었다. 원자는 재현적 허구로 생각되었지, 물질의 조각들이 아니었다. [19]오늘날 상황은 매우 다르다. 개별 원자들은 주사터널현미경(scanning tunneling microscopes, STM)을 사용하여 보면 규칙적으로 이미지화된다. 게다가 이 기술은 단지 개개 원자들을 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집어서 동시에(!) 옮기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20]

 

철학자 이안 해킹은 무엇이 실제적인지에 대한 규준으로 조작가능성(manipulability) - 즉 효과적으로 개입할 능력 을 사용한다. 해킹은 과학 이론이 세계의 진실한 설명인지 아니면 단순히 생각하는 데 유용한 모델인지에 대해 개인 실험 물리학자들이 어떻게 믿든지 간에 그들이 도구로 사용하는 실체에 대해 현실주의자가 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개별실체를 실험하는 것이 그것이 존재한다고 당신이 믿는 바를 분명히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개별실체를 조작하는 것은 다른 무언가를 실험하기 위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예컨대] 전자는 더 이상 사유에 의해 구성되거나 관찰되었던 현상들을 구제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제 자연의 몇몇 다른 영역에서 현상들을 창조하는 방식들이다. 전자는 도구이다”(Hacking 1983, 263). 따라서 해킹은 다음과 같이 그의 규준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무언가를 감응하기 위해 세계 안에 개입할 수 있는 것 또는 세계가 우리를 감응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실재라고 간주할 것이다.”(146)

 

반성은 불충분하다. 개입이 핵심이다. “응시하지 말고, 간섭하라”(189) 해킹에 따르면, 우리의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능력은 실재론을 위한 가장 강력한 예를 제공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두 종류의 실재론을 구분한다. 개별체를 향하는 실재론, 존재론적 실재론이라 불리워지는 것과 이론들을 향하는 실재론 또는 인식론적 실재론이 그것이다.[21] <51>해킹은 전자에 동의하지 후자에는 그러지 않는다. 즉 그의 생각에 재현하기(이론화하기)보다 개입하기(즉 실험하기)가 실재론의 토대인 것이다.

 

해킹의 개입은 특히 그것의 전통적인 재현주의적 공식으로부터 해방된 실재론을 시도하므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해킹은 이런저런 과학에 있어서 실험이 완전이 무시되거나 이론의 부속물로 이해되는 이론들과 재현들을 사고하는 오래된 철학적 전통을 문제 삼는다(이러한 닫힌 사유에서 바로 그 렌즈를 통해 실험이 기획되거나 해석되는 전통들). 반대로 그는 실험이 본질적으로 어떤 복잡한 실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논증한다.

 

현미경 관찰법의 예를 취해보자. 이안 해킹의 사유에서 현미경의 도움으로 원자 또는 다른 개별실체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살펴본다는 문제 관찰자로서 어떤 것에 수동적으로 착목하는 것 - 가 아니라 목적달성을 위해 일군의 복잡한 실천들을 요청하는 성취의 문제이다. ‘보기위해, 우리는 실제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당신은 행위함으로써 현미경을 통해 보기 위해 배우는 것이지, 그저 들여다 보지 않는다.”(189) 우선 모든 인공물들에서 자유로운 믿을만한 이미지를 획득하는 것은 실험적인 노하우, 직관, 창의력(이 세 가지 모두는 실천을 통해 획득된다), 여러 가지 임기응변, 실험도구의 특수성에 조응하는 촉각적 기술들의 연마(그러한 도구들의 어떤 특유성도 포함하여), 예기치 않은 노이즈와 의도된 신호 간, 사실과 인위적인 것 사이를 분별하는 능력, 그리고 모든 종류의 여타 비-이론-기반의 조작술들을 배우는 것을 수반한다.[22] 또한 본다는 것은 부분적으로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해 납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해킹은 만약 우리가 다른 물리 원리들(예컨대 다른 종류의 현미경)에 기반하여 같은 사물을 보는 다른 실천을 활용한다면, 그때 우리는 관계되지 않는 물리적 과정들에 관한 어떤 종류의 공모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이러한 일치를 설명하도록 압박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도구들과 일군의 활용기술들에 부가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과학의 다른 영역으로부터 유래한 통찰들에 맞추어질 때, 우리의 신뢰는 깊어진다. “우리는 [이미지화 된 개별체에 대한] 어떤 높은 힘을 가진 연역적 이론에 의해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현미경 안에서 우리가 현상들을 통제하고 창조할 수 있는 다수의 상호결합하는 낮은 수준의 일반화 때문에 설득되는 것이다”(209).

 

STM은 특히 이런 측면에서 흥미로운 사례이다. 그것이 광학 현미경과는 다른 일련의 물리적 원리들을 바탕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이미지가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보는 바의 단순한 확대경을 재현한다는 어떤 환상을 침식한다. 사실상 해킹이 올바르게 본 것처럼, 광학 현미경은 물론 확대경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눈의 광학과 확대경은 기하 <52>광학의 원리(예컨대 굴절 법칙)를 활용하여 설명될 수 있다. 현미경 작업에 관한 에른스트 아베(Ernst Abbe)의 섬세한 탐구는 회절 현상이 광학 현미경의 작업에서 핵심이라는 점을 밝힌다. 기하 광학은 현미경의 작동을 위한 사유에 충분치 않다. 그래서 물리 광학 법칙이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STM의 사례는 상당히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만약 우리가 주사형 터널 현미경을 가지고 어떤 이미지를 구성하는 실천에 대해 들여다 본다면, 그것이 컴팩트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의 이미지 구성과 유사한 사실의 왜곡이 일어난다고 명확히 알게 된다.[23]재현은 단순히 멀리 떨어져서 눈을 뜨고 보거나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돈 아이글러(Don Eigler)와 같은 STM 전문가들은 주사형 터널 현미경을 사용한 이미지 구성은 시각이라기 보다 촉각과 관련되는 어떤 만남과 더 많이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즉 그가 말하길, STM맹인이 대상에 대한 느낌으로 대상의 정신적 이미지를 구성할 수 있는 식과 유사한 방법으로 이미지를 구성한다”(Eigler 1999, 427). [24]맹인이 지팡이를 사용하여 어떤 환경의 지형을 훑는 것처럼, STM 작동 체계는 이미지화되는 시료의 표면을 가로질러 현미경 팁을 조작한다(현미경 팁은 아주 날카롭게 세공된 텅스텐 선으로서 하나의 단일한 원자를 짚어낸다). 그러나 거리의 튀어나온 부분이나 요철들을 훑기 위해 지팡이를 거리의 표면에 물리적으로 접촉시키는 것이라기 보다, STM은 터널 전류를 사용하여 표면을 훑음으로써, 그 표면을 느끼기위해 작동한다.[25]

 

주사는 특유하게 양자 역학적인 현상으로서 입자들이, 최소한 고전적인 뉴턴 물리학의 법칙에 따르면 가로지르기 불가능해야만 하는 에너지 장벽들을 횡단할 수 있도록 한다.[26] 이 경우에 문제가 되는 입자들은 전자다. 장벽을 넘나드는 전자의 (양자 역학적인) 능력은 현미경 팁과 측정되는 샘플 원자표면 간의 거리에 의존한다. 팁이 샘플 표면에 충분히 가까워질 때, 전자는 작은 전자 흐름을 형성하면서, 장벽을 가로질러 넘친다. 따라서 팁과 표면 사이에 형성되는 그 흐름은 표면의 세부 구조의 측량을 제공한다.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이러하다. 작은 전압이 현미경 팁에 흘러든다. 만약 팁이 그때 충분히 시료의 표면에 접근하면(일반적으로 나노메터 수준), 적은 수의 전자들이 시료의 표면에 묶이고(전자기력에 의해), 간격을 가로질러 터널을 만들 것이고, 이에 따라 시료와 팁에 있는 표면 원자들의 전자 구름사이에 아주 작은 흐름[전류]이 형성된다. 흐르는 일정한 전류는 에너지 장벽의 특성들과 관련되는데, 이는 직접적으로 <53>표면의 원자들의 특정 배열에 연관된다. 시료의 표면 위에 나노메터 크기의 마이크로 팁을 섬세하게 위치시키기 위해 압전결정체(piezoelectric crystal)를 사용하면, 아주 밀접한 거리에서 팁이 그것을 가로질러 스캔하는 것이 가능하다. 측정된 터널 전류 데이터는 컴퓨터 스크린 위에 이미지로 사상될(mapped) 수 있다. 다시 말해 STM은 시료의 표면 원자들의 전자 구름안에 있는 주름(corrugation)을 감지함으로써 표면의 원자 배열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다.[27]

 

따라서 터널 주사 현미경을 사용하여 본다는 것은 시각적 장면(visual sight)과는 매우 다른 물리 원칙들에 따라 작동한다. 더 나아가 해킹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재빨리 일깨운다. 본다는 것은 실천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STM 조작자는 단순히 어떤 시료를 삽입하고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고, 봄을 제기하는 것(voila), 어떤 이미지가 출현하는 것이다. 시료는 준비되고 신중하게 스캔 앞 쪽에 놓여져야 한다. 그리고 새 팁이 각각의 시료를 위해 절단되어야 한다. 팁은 또한 신중하게 시료의 표면 위에 놓여져야 하며, 시료의 기울기는 딱 맞게 조절되어야 한다. 이 체계는 스캔하는 동안 직접 광선, 진동, 공기 흐름 그리고 온도변화로부터 격리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미지는 위태로워질 것이다. 스캔 범위는 선별되어야 하고, 조작자는 생산된 이미지가 좋은 이미지를 구성하는지 아닌지 결정해야 한다. 인공적인 것으로부터 사실의 분리는 이러한 단계들 각각의 적절한 실행에 의존하며 경험을 통해 획득된 기술과 노하우를 요청한다.

 

이와 같은 예시들은 재현주의가 실천의 중요성을 괄호치는 활동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한다. 즉 재현주의는 재현물들이 생산되는 그러한 실천들에 대한 사유를 실패로 이끄는 것이다. 이미지 또는 재현은 우리를 기다리는 것의 스냅샷이나 묘사가 아니라 다양한 배치의 실천들의 응축들 또는 흔적들이다. STM 이미지는 그 자체로 원자의 실재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만들거나 부순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증거로 취하는 것을 생산하는 증거와 실천의 망 안에서 더 많은 증거 중의 한 조각 확실히 볼거리인 - 일 뿐이다.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에 대한 해킹의 개입은 실험이 (쿤적인 의미에서) 이론-적재적(theory-laden) 실천이 아니라, 그것 자체의 정당성에 있어서 일련의 복잡한 실천들이라는 주장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실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재현주의의 덫에 걸린채, 이론을 도외시하는 것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실험하기 대 이론화하기에 관한 그의 개념화에서 이러한 비대칭성은 그의 비대칭적인 실재론의 태도에 각인되어 있다. 즉 개별실체들을 향한 실재론이지 이론들을 향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해킹의 이론화에 관한 사유는 얼마나 실재론적인가?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54> 재현하기로서의 이론화라는 개념을 문제 삼는다. 보어의 원-수행적 사고(나는 이를 3장에서 상세히 논의할 것이다)에서, 이론화는 선실존적인 사물들에 대한 언어적 재현들을 대응시키는 관찰자의 스포츠라기 보다 체현된 실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28] 보어의 사고에서 개념이란 단지 관념들이 아니라 특수한 물리적 배치들이다. 이 중요한 논점에 대한 당연한 고려의 부재에 있어서, 보어는 과학자들이 단지 추상적인 것에 대해 관찰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들이 연구하고 있는 현상에 관한 객관적 사고를 제공하는데 실패한다고 경고한다. (사실상, 객관적 지시체를 정당하게 지정하는데 있어서의 실패는 양자 이론의 많은 역설적 특성을 해명한다.)

 

해킹이 실험적 실천과 연합하는 개입하기와 이론 생산과 함께 하는 재현하기를 구별하는 반면, 나는 보어의 원-수행적 사고가 모든 측면에서, 즉 이 복잡한 실천망의 차원들이라는 측면에서 과학적 실천이 재현하기라기보다 개입하기의 문제로 더 적합하게 이해될 것이라고 논증한다. 또는 아마도 개입하기는 우리가 볼 바와 같이 어떤 경우에도 현재 문제가 되는 활동을 묘사하기 위한 적당한 동사는 아닐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해킹은 그가 몇몇 철학자들이 그들의 복잡한 실험적 실천에 대한 고려에 있어서 환원적이라고 지적하는 방식으로 많은 부분에서 이론화에 관한 개괄을 해내는 것을 고발할 수 있었다. 해킹의 과학 이론적 사고에 대한 특히 흥미로운 대항논점은 과학사가인 피터 갤리슨(Peter Galison)에 의해 아인슈타인이 어떻게 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연구에서 제시된 과학 이론화에 관한 실천-기반 사상이다. 갤리슨은 특수상대성이론이 넘치는 추상적인 아이디어들에 지배된 고독한 정신의 결과, 아인슈타인의 머리에서 완연히 발전하여 나오지 않았다고 논증한다. 오히려 집단적 협력이라는 중심 생각이 1900년대 초반에 유럽에서 탁월한 실천적 의미에 관한 중요한 문제였으며, 특허 사무실에서의 아인슈타인의 자리는 그에게 문제에 관한 새로운 기술적 해결책에 있어서 다양한 제안들의 직접적 관점들을 제공했다.

 

아인슈타인이 1902년 베른의 특허 사무실에 왔을 때 그는 기계적인 것에 대한 전기적인 것의 승리가 이미 근대성의 꿈들에 상징적으로 얽혀있는 어떤 세계 안으로 진입한 것이다. 그는 시계장치의 조화가 실천적 문제(기차들, 군대들 그리고 전신)인 세계를 발견했는데, 이 세계는 작동가능하고, 특허설정이 가능한 해법들을 요청했으며, 이런 것들은 정확히 그의 가장 거대한 관심사와 전문적인 직업의 영역, 즉 전기기계 도구들 안에 있는 것이었다. 특허사무실은 심해의 등대선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 그 사무실은 <55>현대 기술의 거대한 행진을 위한 1등좌석이었다. 그리고 조화로운 시계들은 그렇게 작동되었으며 그것들은 홀로 여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전기 협조망은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기술적 통일성을 동시에 의미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새롭고도 동시에 전통적인 기계에 대해 파악했고, 그것을 그의 새로운 물리학의 원리적인 시작점으로 장착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19세기의 거대한 시간 일치 프로젝트를 완성했지만, 그것은 주인 시계를 제거하고, 전통적으로 정립된 시간을 물리 원칙으로 맞춤으로써 그렇게 했다. 그는 특유하게 현대적인 20세기 상대성 물리학을 시작했다.(Galison 2000, 388-89)

 

식민지 정복, 민주주의, 세계시민, 반무정부주의, 기차, 전신, 시계들 그리고 여타 전기기계적 기기들의 얽힌 장치들을 포함하는 사회적, 기술론적 그리고 과학적 실천들은 특수상대성이론의 생산에서 그 모든 역할을 하는 전선들과 톱니바퀴들로 구성되었다. 갤리슨에 따르면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실천적이고 보다 더 실천적인 것, 동시에 물질-경제적 필연성 문화적 상상력이었다(367). 시간은 아인슈타인에게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가 시계로 재는 것이다. 보어가 논한 바와 갤리슨의 예가 아름답게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세계에 차이를 만들어내는 생각은 그 물질적 계기들의 하중으로부터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론화하는 것은 물질 세계를 뒤에 남겨 두고, 정신의 드높은 공간이 객관적 반성을 가능하게 하는 곳에 있는 순수 이데아들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다. 이론화하기는 실험하기와 마찬가지로 어떤 물질적 실천이다.

 

사실상 일단 이론과 실험이 더 이상 그것들의 구체화된 형태들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세계와의 물질적 참여의 역동적 실천으로 보이게 되면, 우리는 이런 일련의 실천들이 과학에 관한 재현주의적 전망들이 생략되는 식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론가들실험가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훈련받거나, 동일한 일련의 실천들에 참여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론가와 실험가들 둘 모두 이론화하기와 실험하기의 상호간 엮인 실천들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인정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재현주의적 믿음을 떨쳐 내고자 하는 해킹의 가장 훌륭한 의도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별실체 실재론, 즉 세계가 분리되어 규정된 속성들로 이루어진 개별적 실체들로 구성된다는 관점은 재현주의의 기초적 형이상학의 가정들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실제로 실재론의 대부분 형태들은 개별적 실체들의 실존을 당연시하는, 그 비관계적 속성들을 내용으로 하는 형이상학을 전제한다.[29] 그 자체로 실재론은 자주 본질주의를 짊어진다. <56>그러나 실재론은 어떤 개체론적 형이상학이나 여타 재현주의적 교설에 동의할 필요가 없다(사실 나는 핵심적인 가치가 있는 어떠한 실재론도 그와 같은 관념론적 또는 마술적 믿음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논할 것이다). ‘실재성’(Realness)사물성’(thingness)을 필연적으로 포함하지는 않는다. 즉 실제적인 것이란 어떤 본질, 개별실체 또는 고유한 속성을 지닌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가 아니어도 된다. 사물성에 관한 가설은 해킹의 개별실체 실재론의 기초에 놓인 것이다. 즉 그에게 단어와 사물은 여전히 견고한 질서인 것이다.

 

해킹과 마찬가지로 나는 실천의 물질적 본성을 신중하게 취급하는 과학적 실천들에 관한 비재현주의적인 실재론적 사고에 흥미를 가진다. 해킹의 실재론은 개별실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들과 앎과 생성의 얽힌 물질적 실천들을 향한다. 현상들은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사유에 따르면, 개별적 실체들도 아니고 정신적 인상들도 아니며, 얽힌 물질적 행위소들이다(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풍부하게 논의된다).[30] 내가 제안하는 행위적 실재론의 이해는 [단어]’사물의 존재를 당연시하지 않는 존재론, 그리고 적합한 대응에 기초하는 진리 관념에 종속되지 않는 인식론에 기반한다. 행위적 실재론은 해킹의 재현주의 비판에 관한 노고들을 제공한다. 즉 그것은 실험하기와 이론화하기가 객체들과 주체들 그리고 물질과 의미화의 생산에 있어서 구성적 역할을 하는 역동적 실천이라는 것이다.[31] 내가 설명할 것인 바, 이론화하기와 실험하기는 (바깥으로부터) 끼어들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그리고 부분적으로 현상들이 생산되는 -에 관한 것이다.[32] 행위적 실재론은 4장과 이어지는 장들에서 설명된다. 지금은 나는 형이상학의 문제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중요하게도 재현주의와 수행주의 간의 문턱을 가로지르면서 생기는 어떤 마주침들은 정확히 이와 동일한 논점으로서, 개체주의 형이상학이다. 이것은 많은 여타 과학학 접근법들이 휘청거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비록 그것들이 걸려 넘어지는 주제가 자주 매우 다르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해킹과 같이 대부분의 과학학자들은 과학적 실천의 대상들을 당연시하며 다루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과 함께 그것들을 생산하는 실험실 실천들의 세부사항들을 탐구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해킹과는 다르게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가들은 다른 이들 가운데 과학자들이 실천을 통해 명확히 하는 것이 개개의 객체들의 실존이라는 믿음을 해체해 왔다. 이러한 믿음과 대조적으로 그들은 과학적 탐구의 효과가 인간과 비인간의 네트워크나 배치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특수한 과정들에 의존한다고 강조해왔다. 사물들’(전통적 의미에서)은 확실히 일반적인 질서가 아니다. [33]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주류 과학학의 접근들 그리고 <57>심지어 몇몇 페미니스트 과학학의 접근들조차 젠더, 인종, 민족성, 계급 그리고 섹슈얼리티같은 사회적 변항을 개별적 인격들의 속성들이라는 어떤 주어진 것으로 취급하며, 그 결과 개체주의 형이상학이 재도입된다. 당연시되는 자연-객체는 추방되지만, 담론적 실천 특히 푸코가 담론-권력-지식의 결합체라는 어려운 문제에서 고려한 것, 예컨대 주체의 담론적 구성 - 에 대한 질문은 무시된다. 이 중요한 논점이 특유한 역설적 경향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주체 생산이 모조리 언어에 대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사실상 푸코의 논점은 정확히 언어적 재현이라는 문제로부터 떠나, 그 대신에 그것들의 물질성에 있어서 담론적 실천의 구성적 측면에 집중하는 것이다.

 

재현주의에 대한 푸코의 비판을 확립해 가면서, 주디스 버틀러의 유명한 젠더 수행성 이론은 주체의 젠더화된 구성을 이론화한다. 버틀러가 강조하는 바, 젠더는 개인의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젠더는 어떤 행위인데, 이는 거기 자신의 젠더를 수행하는 이미 젠더화된 인격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젠더화(gendering)로 이해되는 것으로서, “특히 (...) 주체가 그것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차이화하는 관계들이며 모든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을 통해 첫 번째로 가능해지는 매트릭스이다”(1993, 7). 버틀러는 젠더화가 규범들의 반복을 통해 작동하는 시간적 과정이라고 논한다.[34] 다시 말해 버틀러는 젠더가 개체들의 고유한 특성, 즉 행위, 제스처, 그리고 수립과정을 통해 여러 가지로 표현되는 어떤 핵심 본질이 아니라, 주체가 그것을 통해 존재하게 되는 반복된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말해 우리가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가들과 여타 학자들이 객체들이란 과학적 실천이 특별히 다룸으로써 출현하는 방식을 찾는 것이라고 의견이 일치한다고 생각한다는 그런 종류의 논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페미니즘 후기구조주의 이론과 과학학 사이에는 전혀 교류가 없었다.[35] 심지어 페미니즘 과학학 문헌에서도 우리는 버틀러의 수행성에 관한 연구와의 여타 직접적 교류를 찾는데 애를 먹는다.

 

이러한 통찰들을 고려하는데 실패하는 과학학 접근법들은 이후 분석에 손쉽게 첨가할 수 있는 한 두 가지를 단순히 미루어 놓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그들이 거부하는 재현주의적 접근들과 동일한 실수를 범한다. 그들은 실천의 구성적 본성에 대해 사유하는데 실패하는 것이다. 사실상 버틀러와 보어가 강조하듯이, 지식-담론-권력적 실천의 수립에서 배제되는 것은 현상들의 생산에 있어서 어떤 구성적 역할을 한다. 즉 이러한 실천은 물질이 되는 신체들과 물질화로부터 배제되는 것 둘 모두에 있어서 물질을 배제한다. <58>관건적으로 여기에 인식론적, 존재론적 그리고 윤리적 주제들의 성패가 달려 있다. 이것은 관찰되고 있는 실천들(예컨대 실험실 실천)과 과학학 문헌들에 기여하는 지식-형성적 실천들 둘 모두에 적용된다. 그러나 과학학자들이 그들 자신의 일련의 실천들에 연루된 행위자들(actors)이라는 사실에 관한 단순한 깨달음은 충분히 검토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비추어 보는 것으로 돌아서는 것은 문제가 아니며, 반영성(reflexivity)은 여기서 어떤 교정물로 기여할 수 없다. 오히려 논점은 이러한 얽힌 실천들이 생산적이라는 것이며, 이러한 얽힌 실천들을 통해 배제되는 누구 그리고 무엇이 문제다. 즉 상이한 간-행들이 상이한 현상들을 생산한다.[36] 물론 이에 대해 논할 것이지만, 여기서는 슬쩍 살펴볼 것이다. 논점은 이것이다. 우리는 책임을 지고 이러한 배제들의 구성적 결과들에 의무를 지지 않으면서 특정한 주제들을 단순히 괄호칠(또는 무시할) 수 없다. 과학학은 (적어도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젠더와 여타 중요한 사회적 변수들에 관해 고려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개체주의 형이상학이나 다른 재현주의적 잔여물들이 그 이론, 방법 그리고 그것의 결과 안으로 재진입하는 것을 피하길 원한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에, 적어도 올바른 출발지점으로 보이는 것으로 방향을 튼다.

 

나는 되도록 강력한 말로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하고 싶다. 즉 주요 논점이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 그리고 여타 사회적 변항들이 우리의 분석에 포함되는지 아닌지 단순히 묻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라는 점이다. 주요 논점은 권력과 연관된다. [권력]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은 어떻게 이론화되는가? 몇몇 과학학 연구자들은 인간 뿐만 아니라 비인간도 포함하는 새로운 의회 정부의 구조에 대한 브루노 라투르의 제안을 수용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제안은 페미니즘적, 퀴어적, 포스트식민주의적, (포스트-)맑스주의적, 그리고 비판 인종이론가들과 행동주의자들이 의제화했던 일련의 관심사들을 표명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37] 비인간들이 포함되지만, 이러한 다종다양한 이론가들과 행동주의자들의 관심사들은 드물게 알려지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저 내버려진 채 있는 것이다. 사실상 그들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권력의 마당으로 들어서는 당연시되는 입구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그들/우리가 아니다.

 

자연의 정치학(Politics of Nature)이라는 그의 책에서 브루노 라투르는 현대 정체(政體)의 부정의한 이원적 의회들 사물들을 그 자체로 재현한다고 주장하는 과학 의회와 인간의 관심사들을 재현[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정치 의회 과 그들이 촉발하는 그릇된 재현[대표]의 관념들을 솜씨 좋게 폭로한다. 나는 통치 의회들을 분리된 권력으로 쪼개놓는 구()이원제가 한편으로는 자연과 그리고 다른 편으로는 사회적인 것과 더불어 파산했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어떤 새로운 이원제 통치의 새로운 재현주의 형태 - 를 만듦으로써 고쳐질 수 없다. <59>정치의 장은 의사당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고 재현[대표]주의적 통치는 다른 땅들을 습격하고 탈취함으로써 그들 자신의경계들을 강화해 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로지 두 종류의 시민들과 그들의 후예들 완전한 인간(이미 시민권을 부여 받은 자들)과 완전한 비인간, 그리고 그들의 하이브리드 - 만을 감안하는 어떤 새로운 재현주의적 민주주의가 내세워질 때, 어떤 권력 개념, 어떤 시민권적 모델, 어떤 이주민 정책이 수립되고 있는가? 해러웨이(Haraway, 1985)는 오래 전에 이것이 충분치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이보그 정치학은 단순히 인간과 기계 간의 교차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차이나는 인간과 그들의 잡종적 친족들의 기술생명정치에 관한 것이다.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인간 주체들이 구성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치 않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구성은 어떤 차등적인 인간, 비인간, 인간적으로 사유불가능한 것을 생산하는 미분적 작동이기 때문이다”(1993, 8). 새로운 정치적 집합을 위한 어떠한 제안이든지 단순히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구별들을 생산하는 실천들 만이 아니라, 미분적 구성이 생산되는 실천들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실격한 (과학 의회의) 인식론적 재현주의에 대한 모든 노력들은, 만약 정치적인 장과 사회적인 장이 (다시 한 번) 재현주의의 정치적 형태와 언어적 형태들이라는 측면에서 이론화된다면, 뿌리가 잘려나갈 것이다. 재현주의(그것의 개체주의 형이상학과 더불어)는 단순히 완고한 질서로 재장착될 것이다. 이것이 과학학이 우리의 가장 탁월한 정치 이론가들과 사회 이론가들이 분명히 제시하는 통찰들을 무시할 형편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38]

 

후기구조주의는 재현주의에 대한 주목할 만한 대안을 제시한다. 후기구조주의는 인문학자들이 즐기기 위해 사용하는 어떤 하이테크 장난감이 아니다. 후기구조주의적 접근들은 권력과 주체 구성에 관한 대안적 이해를 제공함으로써(재현주의적 문제들의 근대적 남용을 탈구시키면서), 더 나아가 배제된 것들의 구성적 효과에 관한 평가를 포함함으로써, ‘다종다양한 집단들’(motley crew)의 관심사들을 신중하게 취하고자 한다.

 

수행성과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행위소

 

자연 또한 역사를 가지며, 사회적인 것만이 역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 주디스 버틀러, 물질이 되는 신체들(Bodies That Matter)

 

사회구성주의의 대안을 위한 탐구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현상들에 관한 연구의 수행적 접근을 촉발시켰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이론은 <60>주체와 정체성을 생산하는 실천에 관한 여러 탐구들의 영역을 열어 젖히면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39] 인종 문제, 경제와 민족횡단적 정치학에 대한 수행적 접근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수행성은 문학 연구들, 극이론, 그리고 공연(performance) 연구의 맹아적 상관-간학제적 영역에도 널리 퍼져 나갔다. 수행적 접근을 채택하는 이론가들은 자주 수행성이 공연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 공연이 필연적으로 어떤 접근을 수행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간단하게 간과해 버린다.

 

그녀의 획기적이고 영향력 있는 책인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젠더를 자연적으로 성화된 신체에 대한 어떤 문화적 기입으로 형상화하는 사회구성주의 모델을 문제시한다. 신체가 침묵하는 실체, 역사나 문화가 젠더의 표식을 그 위에 만드는 어떤 수동적인 서판이라는 가설은 그 자체의 역사적 물질성을 박탈하는 것이며, 행위소의 가능성들을 제한하는 것이고, 문제적인 자연-문화 이분법, 바로 이 구별에 관련해서 단순히 성-젠더 구별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버틀러는 의 바로 그 본성을 성가시게 하는 섹슈얼리티의 역사에 관한 푸코의 맹아적 연구를 개괄했다. “어쨌든 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것은 자연적, 해부학적, 염색체적인 또는 호르몬적인 것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그러한 사실들을 수립하고자 하는 과학적 담론들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은 어떤 것인가?”(Butler 1990, 6-7) [40]푸코의 성의 계보학은 성 범주가 사회 규범과 섹슈얼리티의 통제에 종사하는 다른 불연속적인 일련의 요소들과 기능들을 통합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며, 이것은 이러한 구성의 은폐와 신체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성의 드러남을 통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성이라는 의심스러운 범주 아래에 속성들을 모으는 것 뿐만 아니라 ‘특성들’ 자체에 대한 바로 그 식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페니스, 질, 가슴 등등은 성적 부분들로 이름붙여진 것으로서 그러한 부분들을 성적 신체로 제한하고 동시에 전체적인 신체의 파편화로 제한한다. 성 범주로 신체에 부과되는 ‘통일성’은 사실상 ‘비통일성’, 즉 어떤 파편화와 구획화이며, 성충동으로의 환원이다(Butler 1990, 1114) .

 

이질적 특성들과 기능들의 이러한 인위적 봉합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성의 진실에 대한 결정론적인 과학적 검사를 제공하려는 시도가, 그렇지 않았다면 단순한 그 실패의 폭로가 제안되는 듯 보이게 될 것보다 성의 미결정적 본성과 이러한 이질적 통일성에 내재하는 미결정성을 진압하고자 하는 실천의 본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폭로한다는 것은 아마도 놀라운 것이 아닐 것이다. 버틀러는 분자생물학자들 그룹의 연구를 검토한다. 이들은 <61> “모든 성적으로 동종이형적인 특성들을 정하는 이항 스위치”[41]TDF(정소결정인자testis-determining factor)를 판정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연구에 의하면, 연구자들은 xx-남자 그리고 xy-여자를 포함하여 해부학이고 재생산적 구성에서 명백하지 않은개인을 선택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결정요소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한 질문이 제기되는데, 쟁점이 되는 것은 정확히 이 질문이다. 이 결정성을 외부 성기에 의존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성의 본성을 탐구하기 위한 연구의 기초에 속한 섹슈얼리티에 관한 특정 관념들에 뿌리 박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연구자들은 또한 이러한 융합을 가능하게 하는 일련의 젠더화된 작업 가설을 드러내면서, 성 결정성이라는 생각을 정소결정 중 하나인 남성 결정성 중 하나로 환원한다. 이런 저런 생각에 기반하여,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젠더의 이항 관계성의 상대적 위상에 관련된 문화적 가정들은 성-결정에 대한 연구를 틀짓고 그것에 주목한다. 성을 젠더와 구별하는 과제는 우리가 젠더화된 의미가 ‘성’을 그것이 요구하는 문화적 의미에 앞서는 것으로 우리에 대해 수립하고자 하는 가정과 그러한 생명의학적 요청들의 추론을 틀짓는 순간, 다른 무엇보다 더 난해하게 된다.(1990, 100)

 

하지만 만약 성화된 본성또는 자연적 성에 관한 바로 그 관념이 문화가 활동하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표면으로서 전담론적으로 생산되고 수립된것으로 드러난다면, 즉 그것이 문화에 앞서는 것으로 드러나도록 만들어진다면, 그때 젠더는 성에 관한 문화적 분석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생산의 장치이며, 이에 따라 성들 자체가 수립된다”(1990, 7). 그러나 이것이 젠더의 모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문화가 자연을 대체한다? 만약 그렇다면 신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물질에 관한 질문은 어디에 관련되는가? 버틀러에 따르면 이러한 성찰들은 그 물질적인 것이 신체를 거부하는 기반으로 기여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것들은 사회구성주의의 기입 모델의 부적합성을 드러낸다.

 

사실상 버틀러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신체의 물질성을 거부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가 뒤에 볼 것처럼 그녀는 물질에 관한 생각으로 돌아가기를 제안한다. 이러한 물질로 되돌아감은 이미 거기 있는 것으로서 물질이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으로의 단순한 후퇴가 아니다. 하지만 버틀러의 기획에서 관건적인 것은 쟁점이 바로 그 변화의 본성이라는 점이다. 버틀러의 개입은 페미니즘 이론과 젠더 분석의 원만한 판본에 기초가 되었던 성-젠더 이분법 뿐만 아니라, 구성적인 기입 모델로 도출되는 행위소의 본성도 의문에 붙인다. 페미니즘 이론가들이 젠더가 성의 문화적 해석이라거나 젠더가 문화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할 때, 이러한 구성의 <62>방법 또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만약 젠더가 구성된다면, 그것이 차이나게 구성될 수 있는가, 또는 그것의 구성성이 몇몇 사회 결정론의 형식을 포함하는 것인가?”(1990, 7) 버틀러가 주목한 바에 따르면, “구성의 의미에 대한 논쟁은 자유의지와 결정론 간의 전통적인 철학적 양극성(polarity)에 기반하여 설립되는 것처럼 보인다”(8). 그녀는 신속하게 두 선택지들, 즉 인과성에 관한 그러한 사실상의 이분법적 개념을 거부하고, 요구되는 것은 정체성의 본성에 관한 어떤 급진적인 재사유라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우리가 정체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어떤 본질로서가 아니라 행위로서 그렇게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녀는 젠더가 어떤 속성이나 주체의 본질적인 특성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생성이나 활동성 [...] 어떤 종류의 부단하게 반복적인 행위”(Butler 1990, 112)라고 말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주장 젠더가 수행된다는 주장 이 젠더를 선택하려는 어떤 의도적인 주체에 의해 행위되는 일종의 연극적 수행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그와 같은 오독은 역설적이게도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적 주체를 장면에 재도입함으로써, 주체의 추정된 소여성을 거부하고 그 생산성에 주목하는 후기구조주의의 반휴머니즘을 약화시키게 된다. 중요하게도 수행성은 이미 수립된 주체에 의해 활용되는 단일한 행위가 아니고, 주체들이 사회적 존재로 요청되는 강력하고 교묘한 방식들 중 하나가 사회 집단들을 확산시키는 것, 다시 말해 주체가 요구에 따라 여러 가지 확산적이고 강력한 사회성 안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Butler 1997a, 160). 버틀러가 설명하길, “‘는 이러한 젠더화의 과정을 앞서지도 않으며 뒤따르지도 않으며, 오직 젠더 관계들 자체로서, 그리고 그 내부에서 출현한다”(1993, 7). 즉 젠더 수행성은 젠더화된 주체를 구성한다(그러나 충분히 결정하지는 않는다). 버틀러의 행위자 대 구조의 이항대립 개념에 대한 수용 거부는 여기서 분명하다. 수많은 상이한 접근들로 주체 구성에 체현된 행위자와 권력이라는 문제적 개념을 회피하려고 하면서, 버틀러는 주체의 젠더화된 구성을 이해하기 위해 푸코의 규율권력과 담론적 실천에 관한 후기구조주의적 묘사를 끌어들인다.

 

구조주의와 현상학(그리고 그 현상학적 영향권에 있는 해석학)에 속하는 철학의 경쟁적 패러다임에 대항해 글을 쓰면서, 푸코는 주체가 거대한 사회체계 안의 이해가능한 외적 구조들의 단순한 효과라는 생각과 실재가 인간 의식의 내적 생산물이라는 관념, 둘 모두를 거부한다. , 푸코는 담론-권력-지식적 실천 앞에 서 있는 자율적 주체의 실존을 가정하는 인간주의적 가설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푸코는 어떤 종류의 주체성을 불러일으키는 역사적 조건들을 분석하는데 흥미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는 또한 <63> 권력, 언어 또는 문화라는 외적 체계의 부과를 경유하는 주체 생산에 관한 구조주의적 해명을 거부한다. 특히 푸코는 이데올로기에 관한 맑스주의적 논법을 피하면서 인간주의적 설명들은 물론이고 그릇된 의식성도 피하는데, 이러한 의식성은 통일된 주체의 의도를 참조하는 것으로서, 그 관심이 자명하다고 간주되는 어떤 주체의 의식성 내부에서 내적 장소에 권력을 부여한다. 사실상 푸코는 현상학과 구조주의 사이의 충돌에 따라 열리는 장소에 수립되는 행위자-구조 이원론을 가로질러 간다. 푸코의 사유에서, 권력은 선재하는 주체에 작동하는 외적 힘이라는 친숙한 개념이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는(하지만 충분히 결정하지는 않는) 일련의 내재적 힘 관계들이다.[42]

 

푸코의 권력 분석은 신체의 물질성에 담론적 실천을 연결한다. 감시와 처벌(Discipline and Punish)에서 푸코는 신체의 물질성이 그것이 수행하는 운동들을 따라 규율된다고 논한다. 특히 그것은 신체들이 재작동되고 권력이 신체를 움켜 쥐는 특수한 신체적 행동들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푸코는 감옥의 특수한 물질적 재배치(예컨대 판옵티콘 형식)가 처벌에 관한 특수한 담론적 실천을 지원하고 수립한다고 주장한다. 푸코의 생각에, 담론적 실천들은 화행(speech act)이나 언어적 진술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담론적 실천들은 의미있는 진술로 간주되는 것을 정의하는 물질적 조건들이다. 하지만 푸코는 담론적 실천의 물질적 본성에 대해서는 명확히 하지 않는다. 사실 푸코의 권력 분석과 그의 담론 이론에 관한 비판은 자주 담론적 실천과 비담론적 실천들 간의 관계를 이론화하는데 실패한다. 푸코가 담론적 실천과 비담론적 실천 간의 이러한 중요한 관계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때는 그가 통상 장치(apparatus)로 번역되는 배치(dispositif) 개념을 통할 때이다. 푸코는 배치란 담론, 제도, 건축 형식들, 규율적 결정들, 법률, 행정처분, 과학적 진술, 철학적, 도덕적 그리고 자선적 명제들, 요컨대 말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말해지지 않은 것을 구성하는 총괄적으로 이질적인 앙상블이라고 설명한다(Foucault 1980, 194). 하지만 이 리스트는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사이의 관계에 대한 긍정적 진술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버틀러는 성화된 신체들의 물질화와 젠더 수행성에 관한 그녀의 생각을 연결하기 위해 규율적 실천의 반복이 어떤 특수한 물질화를 생산한다는 푸코의 제안을 끌어온다. 특히 버틀러는 이러한 반복과 관련하여 수행성의 반복적 인용성을 읽어내며, 이에 따라 신체의 물질성과 정체성의 문제를 연결하지만, 그것은 문화적 기입 모델이 그것을 보유하기 때문이 아니다. 의미심장하게도 <64> 버틀러는 페미니즘 이론과 다른 곳에서 유통되는 구성이라는 흠결투성이의 개념들의 자리에 물질 개념의 귀환을 제안하는바, 이는 자리나 표면으로서가 아니라(기입 모델에서처럼), “경계, 고정성 그리고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표면을 생산하기 위해 시간을 안정화하는 어떤 물질화의 과정으로서이다(1993, 9). 당연하게도 이 역동적 물질 개념에서 중차대한 것은 자연에 있어서 추정된 고정성의 불안정성이며 따라서 변화를 위한 가능성들의 개방이다. 버틀러는 더 나아가 규율적 실천을 수립하는 구성적 배제들에 조회함으로써 푸코의 주체구성과 신체에 관한 분석을 확장한다. 서로간에 통과하는 담론과 물질성에 관한 생각들을 연구하기 위한 푸코의 노고는 그가 기술하는 담론적 이해가능성의 경제로부터 배제된 것만이 아니라, 자립적 체계들로 기능하는 그러한 경제들을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것 또한 해명하는데 실패한다.” (Butler 1993, 35; 볼드체는 인용자). 구성적인 것 바깥은 담론에 있어서 한계들을 표시한다. 버틀러는 따라서 구성적 바깥의 실존이 사회구성주의로부터 그녀의 이론의 이탈을 표시한다고 강조한다. 즉 사실상 담론에는 바깥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어떤 절대적 바깥은 아니다. (그녀는 따라서 지긋지긋한 사회구성주의 대 본질주의의 논쟁들을 피해 간다.) 구성적 바깥은 버틀러의 행위자 개념의 공식화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적인 노고에도 불구하고, 버틀러가 담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인접한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것인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푸코의 이론에 남은 간격은 담론이 그것이 이름붙이는 효과들을 생산하는 바, 재반복적이며 인용적인 실천이 어떻게 이루어지를 말하는 버틀러의 능력은 성화된 신체들의 물질성을 해명할 수 있다는 것에 의문점을 남기는 것으로 보인다(1993, 2). 담론의 물질적 본성에 대한 질문들은 사라지지 않는 체셔캣의 미소처럼 허공에 메달려 있는 것 같다.

 

만약 담론적 실천이 어떤 생산적인 사회적 또는 문화적 장을 구성한다면, 인간과 비인간 둘 모두에서 얼마나 많은 바로 그런 신체적 물질이 해명될 수 있을 것인가? 사물의 물질성은 본성적으로 완전히 사회적인가? 우리는 물질을 어떤 순수하게 문화적 현상으로, 인간적 능동성의 마지막 결과물로 이해해야 하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이것은 문화에 의해 자연을 가로지르는 여전히 또 다른 수립행위가 아닌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연을 이러한 문화적 장과 관련하여 설명할 수 있는가? 물질이 물질화의 바로 그 과정을 따라 물질이 되는 의미있는 방법은 존재하는가? 다시 말해, 버틀러가 물질의 역사성에 관한 재인식을 합당하게도 요청하는 반면,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다시 한번) 언어나 문화의 행위자로부터 도출된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물질의 역동론을 인식하는데 실패한 것이다.[43]

 

이것이 내가 좀 더 멀리 생각하고자 하는 중요한 논점이다. 만약 <65> 맑스를 퀴어링하면서, 푸코가 신체를 생산적 힘들의 자리로서 위치지운다면, 굉장히 큰 권력의 조직화가 국지적 실천들과 연결되는 자리가 된다면, 그때 그것은 신체들의 물질화에 관한 강력한 이론이 필연적으로 신체의 물질성(예컨대 그것의 해부학과 심리학을 포함하여)과 다른 물질적 힘들 또한 능동적으로 물질화의 과정에서 물질화하는 방식을 고려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푸코가 성의 역사 1(The History of Sexuality, Volume l)의 마지막 장에서 분명하게 했듯이, 그는 물리적 신체의 적절성을 거부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목표로 한다.

 

[나는] 권력의 배치가 어떻게 직접적으로 신체 – 신체들, 기능들, 생리적 과정들, 감각 그리고 쾌락 - 에 연결되는지 보여줄 것이다. 소거되어야하는 신체로부터 떨어져, 요청되는 것은 그것을 생물학적이고 역사적인 것이 서로 간에 연이어지지 않는다는 분석을 통해 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 그러나 그것들은 점증하는 복잡한 경향 안에서 생명을 그것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현대적인 권력 기술의 발전과 조응하며 서로 묶여 있다. 그러므로 나는 신체들을 오로지 그것들이 지각했고 의미나 가치를 부여받는 식을 통해서만 신체를 사고하는 ‘멘탈리티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지만, ‘신체들의 역사’와 그것들 안에 가장 물질적이고 가장 생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주어지는 방식을 사유한다(Foucault 1978, 151-52).

 

다시 말해, 푸코는 하나가 다른 것에 잇따르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생물학적이고 역사적인 것이 함께 묶이는것이 어떤 식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생물학과 역사의 뒤얽힌 힘들의 수립에 대해 그것을 허용하게 하는 신체의 물질성이란 무엇에 대한 것인가? 신체들의 물질성이 그 자신의 역사성을 가지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인가? 사회적 힘들은 변화에 민감한 것이기만 한가? 만약 생물학적 힘들이 어떤 의미에서 언제나 이미 역사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역사적 힘들이 이미 언제나 생물학적이라는 중요한 의미일 수 있는가?(그와 같은 질문이 21세기 초에 특정한 상호규율적 써클들에서 강력한 사회구성주의적 저변을 형성한다면 대체 무슨 의미인가?) 규율 권력의 정치적 해부학에 관한 푸코의 강조 전체에 있어서, 그는 그것의 물질성이 권력의 작동과정에서 능동적 역할을 하는 신체의 역사성에 관한 해명을 제공하는데 실패한다. 이러한 물질 수동성의 암시적인 재기입은 그의 광범위하게 탈재현주의적 사고를 좇는 데 있어서 재현주의적 잔존 요소들의 흔적이다.[44] 해러웨이(1997)가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푸코의 생명정치 장에 관한 생각은 심각하게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인간비인간간 경계들을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새로운 기술과학적 실천들을 사고하는데 무능력하다.

 

<66>권력의 작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물질성의 충만함에 놓인 권력의 본성에 대한 이해다. 예를 들어 사회적인 것의 제한된 영역에 권력의 생산성을 한정하거나 더 진전된 물질화에서 능동적 요인으로서라기보다 최종 생산물로서 물질을 단순히 형상화하는 것은 그 충만한 능력을 빼앗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인간의 신체적 윤곽들이 심리적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지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신체를 구성하는 원자들이 물질로 되는지,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물질이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게 하는지 어떤 식으로 이해할 것인가? 심리적이고 사회역사적 힘들이 물질의 생산을 해명할 수 있는지 상상하는 것은 힘들다. 확실히 단순히 사회적이지 않은 물질이 되는 자연적인 힘들이 존재한다. 사실상 특정 물질화의 (얽힌) 과정들에 중요할 만한 - ‘사회적’, ‘문화적그리고 지리적인 것을 포함하여 - 다수의 물질-담론적 힘들이 있다.[45]

 

요구되는 것은 모든 물질적 힘들(‘사회적이고 자연적인 것 둘 모두)의 행위적 기여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비인간’ - 신체들의 물질화에 관한 강력한 근거다. 이것은 담론적 실천과 물질적 현상들 간 관계의 본성에 관한 이해, 행위소의 인간적 형식들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 형식들에 관한 이해, 그리고 진행중인 역사성에서 물질의 함축이 가진 충만함을 고려하는 생산적 실천의 정확한 인과적 본성에 대한 이해를 요청할 것이다.[46](‘인과적해명은 단일 원인들이나 선형적 관계를 도출할 필요가 없다는 것 또는 그 결과들로부터 분리가능한 원인들을 전제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에 주목하라). 그와 같은 강력한 이해의 발전에 대해 내가 제안한 기여들은 물질의 역동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인과성의 본성 그리고 행위소의 공간과 더불어 수행성 개념에 관한 포스트휴먼적 사고를 포함한다. 나의 포스트휴먼적 사유는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상이한 범주들의 소여성이 가진 상이한 범주들이 안정화하고 탈안정화하는 실천들을 평가하면서, 그것을 문제시한다.[47] 이와 관련하여 행위적 실재론은 단순히 문화적 힘과 자연적 힘에 관한 어떤 통일된 이론을 제공하지 않고, 그것들이 미분화되는(differentiated) 바로 그 실천을 탐구한다.

 

행위적 실재론과 양자물리학

행위적 실재론의 중요한 통찰은 닐스 보어의 철학-물리학에 관한 나의 독해로부터 나온다.(나는 <67> 현대 물리학에서 중요한 날카로운 학제적 경계구분과 반대로, 어떤 [다른] 의미에서 이런 특유한 관심분야들을 생각하려는 보어의 반대를 강조하기 위해 통상적인 물리 철학’philosophy of physics 대신에, 이 하이픈으로 연결된 구문을 사용한다[Barad 1995].) 보어의 철학-물리학은 자연세계와 사회적 세계를 함께 사유하고 그것들 간의 관계맺음의 본성을 이론화하는 방법에 대한 어떤 특유하게 적합한 출발지점이다. 왜냐하면 보어의 양자물리학에 관한 탐구는 자연의 본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그리고 다른 여타의 사회적 실천의 본성에 대한 질문들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가장 훌륭한 과학이론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을 따라 자연의 본성과 과학의 본성 둘 모두를 이해하기 위한 보어의 자연주의적 실행은 그가 양자물리학적 교훈의 핵심을 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다.

 

보어는 측정 과정에 관한 어떤 비판적 평가로 시작한다. 측정은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만남이다. 이것은 과학적 지식의 구축에서 어떤 강렬한 계기이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물질과 의미화가 만나는 순간이다. 이것은 왜 과학학자들이 탐침들(detectors)의 역할을 연구하는데 관심을 가졌는지(고에너지 물리학)에 대한 하나의 이유이다. 그것들은 의미화가 만들어지는 자리이다(Traweek 1988; Galison 1987; Pickering 1984). 중요하게도 뉴턴 물리학에서 측정이 행하는 대수롭지 않는 역할과는 반대로, 보어는 양자 물리학은 지식의 구축에 있어서 측정과정의 구성적 역할을 이해하는 새로운 논리적 틀을 요청한다고 논한다. 나는 이전에 물질과 의미화 사이의 관계와 핵심적으로 관련된다고 언급된 후기구조주의 이론들과 아주 흡사하게 보어의 새로운 틀이 재현주의 너머로 나아가며 그 대신에 어떤 풍부하고 복잡한 원-수행적 사유를 제시한다고 논한다.

 

이제 나는 양자이론이 도처에서 채택되는 것이 오늘날 위험물질을 다루듯이 만들어진다는 것과 나의 관심 목록에 페미니즘 이론을 부가하는 것이 논쟁적인 혼합을 폭발시키기에 매우 충분한 것으로 비춰지며, 그래서 몇몇 예비적인 주의를 요하는 단어들이 순서대로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다. 어떤 의미에서 나의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 나는 지나친 옹호자들과 무반성적인 실천가들 둘 모두의 문제적인 담론들로부터 양자 이론을 구출할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문헌들에서, 양자 물리학은 자주 서양을 동양 신비주의의 형이상학적 에덴 동산으로 이끌어가는 과학적 경로로 위치지워진다. 이러한 대중적인 해석들과 함께, 어떤 사람들은 양자 물리학이 고유하게 인간중심적이지 않고, 유럽중심적이지도 않으며, 보다 페미니즘적이고, 보다 포스트모던하다는 것, 그리고 일반적으로 뉴턴 물리학에서 발견되는 남성중심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경향들보다 덜 공격적이라는 것을 문헌들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 물리학을 소박하게 우리의 지긋지긋한 서양 정신을 구출할 것이라는 몇몇 비의적인 타자로 수용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빨리 양자물리학이 원자탄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68> 입자 물리학(양자 이론에 기반하는)은 과학적 환원론을 향하는 경향에 관한 궁극적인 선언이며, 양자 이론은 그 모든 적용들에서 우선적으로 서양식 훈련을 받은 남성이라는 소수의 그룹의 이해 범위를 유지한다. 양자 이론의 낭만화나 신비화에 기여하는 것이 나의 의도는 아니다. 반대로 나는 물리학자로서 양자 물리학에 대한 특수한 담론들과 그것들이 함축하는 바에 대한 엄격한 대화에 참여하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그러므로 독자는 여기서 닐스 보어가 어떤 환영받지 못하거나 꽉 막힌 페미니스트라거나 그의 이론이 본래적으로 페미니즘적이라는 식의 주장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목적은 젠더에 관한 몇몇 고정된 관념들로 물리학을 긴박함으로써 물리학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내가 여기서 제안하는 분석은 그와 같은 비판에 의해 가정되는 정체성, 행위소 그리고 인과성에 관한 생각을 의문에 부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나는 철학적 관심사가 물리학의 실제적인 주요한 문제에 대해 표면적이라고 믿는 신실증주의적 경향을 가진 나의 물리학 동료들과 헤어진다. 그보다 나는 물리학에는 철학이 필수적이라는 보어의 관점에 공감한다. 사실상 아인슈타인도 많은 부분에서 그와 동일한 방 식으로 느꼈으며, 다음과 같이 농담을 하곤 했다. “물론 모든 이론이 진리이지요. 당신이 그 기호들을 관찰된 양적 대상들과 적합하게 연결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다시 말해 철학 없는 물리학은 기호들과 사물들을 조작하는 의미 없는 연습과정일 수밖에 없으며, 마찬가지로 물리적 세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철학은 세계 안에 그 어떤 기반도 없는 기호들과 사물들에 대해 의미를 만드는 연습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그들의 모든 열정을 다해 양자 이론의 의미화에 대해 교전했던 이유이다. 그 주제에 관한 그들의 오랜 동안의 논쟁은 전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물리학계는 보다 실리적인물질로 시선을 돌렸다.

 

닐스 보어의 철학적저작들은 거의 40년간 이어졌다. 보어는 소위 양자 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서 주된 저자(들 중 하나)로 간주된다. [48]비록 대안적 해석들이 1925년 양자이론의 공식화 이래 발전해 왔다 할지라도, 1920년대 후반부터 계속적으로 물리학계는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해왔다.[49] 사실은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은 그 해석 주제를, 마치 그것이 단순하게 철학적이라는 식으로 취급한다. 이때 이들은 양자 형식주의가 계산을 위해 제공하는 강력한 도구들에 주목한다. ‘물리학이 구성하는 것 대 철학이구성하는 것이라는 이 특수한 제한은 물리학 공동체에게 막대한 비용을 요구한다. 즉 이 기초 물리학 이론에 관한 기본적 주제들은 그것이 수립된지 수 십년 후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으며, 물리학의 문화적 조건은 <69>비반성적(‘실증적또는 반철학적이라고 읽는다) 태도와 접근법이 상찬받는 것이 된다. 우주론, 양자 중력 그리고 양자장 이론의 영역에서 지속적인 난점이 이러한 미해결의 주제들로부터 파생된다는 믿음에 대한 훌륭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50] 보어의 관점에 있어서 중심성과 주변성의 동시적 병존은 또한 특별히 흥미롭다. 한편으로 그는 물리학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영웅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는 물리학에 대한 그의 접근법에 있어서 너무나 철학적이다.[51]

 

보어는 자주 양자 이론의 인식론적 가르침을 참조하며, 물리학 너머의 일반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으로 양자 물리학을 위해 제공되는 틀거리를 본다(Folse 1985). 거기에는 보어의 철학-물리학의 보다 넓은 철학적 함축들에 대한 상당한 양의 관심이 있었다. 그와 같은 많은 탐구들이 양자 이론의 기초 안에서 해석적 주제 외곽에 남겨진다. 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보다 넓은 철학적 함축들에만 있지 않다. 나의 접근법은 어떤 지속적인 보어적인 틀에 속하는 특수한 것들을 이끌어 내어야 할 것이고, 그것은 그의 사유에 있는 은밀한 존재론적 차원들을 드러낼 것이다. 일단 이러한 탐색이 손에 잡히면, 나는 양자 이론의 기초에 있는 해석적 질문들로 되돌아올 것이다.[52]

 

첫 번째 과제는 필수적인데, 왜냐하면 보어를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2차 문헌에 많은 의견 불일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보어는 실증주의자, 관념론자, 도구주의자, (거시)현상론자, 조작주의자, 실용주의자, ()칸트주의자 그리고 여러 저자들에 의해 실재론자로 불리워져 왔다. 보어의 해석틀에 전통적인 이름표를 할당하는 것의 난점 중 하나는 보어가 그의 존재론적 실행에 대해 구체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중대한 간극을 메우기 위해, 비록 내가 이것이 그가 필연적으로 그의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해도, 내가 보어의 관점과 일관된다고 믿는 어떤 존재론을 제안한다. 즉 나의 주요 목표는 통일성 있는 틀을 전개하는 것이다. 나는 보어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의 기초에 놓인 존재론적 주제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지만, 어떤 통일된 해명을 위해 이해하는 것 보다, 보어가 현실적으로생각하는 것을 알아 내려는 것에는 그리 흥미가 없다. 그러므로 나의 접근법은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사유를 드러내는 보어의 저작들을 활용해야 하지만, 그것들을 곧이 곧대로 취하지는 않는다.[53] 통찰력에 따라 보어의 철학-물리학에 대한 이 분석을 사용할 때, 나는 인식론적이면서 동시에 존재론적인 주제들에 연관되는 틀거리로 행위적 실재론을 도입한다.

 

이때 나는 행위적 실재론의 적용에 관한 몇몇 사례들을 제시할 것이다. 나는 비판 사회학 이론, <70> 사회철학과 정치철학, 페미니즘 이론, 퀴어 이론, 정치경제학, 물리학, 물리철학, 윤리학, 인식론, 과학학 등등의 영역에서 연구자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몇몇 특수한 주제들을 고려한다. 나는 여기서 전략적으로 보어와 갈라서지만,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그렇지 않다.보어의 방법론적 접근법은 본질적으로 타당한 상보적 변항들이 각자의 활동 무대에 있을 것이라는 점을 추정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지식의 다른 영역들을 위한 양자 이론의 인식론적 교훈들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이 유비적 전략은 자주 실패했는데, 이는 그가 상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변하는 일련의 변항들을 제시했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그것의 함축적 내용이 인식론적 교훈들의 복잡성과 풍부함으로 전락하는 기초 위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54]반대로 나의 접근법은 직접적으로 일련의 상이한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수행들을 취함으로써 특수한 함축들을 음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즉 나는 상보성 개념을 어떤 발판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나는 특정 관심사들 아래에 놓인 특수한 철학적 배경으로서의 가정들을 직접적으로 캐묻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나의 접근법과 물리학자들(양자물리학자들을 포함하여)이 바라는 것보다 더 문헌적으로 일반화된 양자 이론에 관한 다수의 (잘못된) 유비적 적용 간의 구별을 강조하고 명확히 하고자 한다. 나는 미시세계에 관한 양자 이론이 거시 세계 정치적, 영적, 심리적, 또는 과학학에서 만나게 되는 그러한 것조차 에서 우리를 흥미롭게하는 상황들에 유비적이라는 결과에 대해 어떤 논증도 내세우지 않을 작정이다. 나의 논점은 특정 영역들에서 암시적으로 배경으로 작용하는 가정들에 관한 엄격한 평가에 의해 유용하게 탐구될 수 있는 광범위하게 적용가능한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제들의 전개에 놓여 있다. 논증들을 적용하는 것이 특수하게도 미시적 개별실체들을 거시 세계로 만드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은 이 경우에 유비적인 접근이라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제들은 플랑크 상수 정도의 크기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55] 즉 나는 단순한 유비에 대해서가 아니라 객관성을 위한 조건과 같은 광범위하게 적용가능한 철학적 주제들에 관심이 있다. 이는 경험적 속성들, 기술과학적이고 여타 사회적 실천들 안의 문화적 요인들 뿐 아니라 자연적 요인들의 역할, 신체들과 정체성들의 본성, 그리고 과학의 효능에 대한 적절한 참조다.

 


<주석>

1부 얽힌 시작

서문: 물질화의 과학과 윤리

 

1] 물리학 서클들 바깥에서, 우리는 하이젠베르크의 이름이 유명하지만 보어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는 덴마크 물리학자이자 아인슈타인과 동시대인이다. 그는 양자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양자적 원자 모델로 1922년 노벨 상을 수상했다. 보어는 양자 물리학의 소위 코펜하겐 해석을 기초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1년 그는 코펜하겐에 그의 이름이 붙은 연구소를 설립했다. 새로운 양자 이론에 대한 수많은 근본적인 연구 기여가 이 연구소에서 탄생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76)1932년 닐스 보어 연구소에서 행했던 연구에서 양자 역학의 창출을 이루어낸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2] 이것은 양자물리학에 관한 모든 대중적 생각들이 다른 가치들와 관심들에 대한 엄밀함을 희생시킨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그와 같은 텍스트들에 있어서 그 어떤 결함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는 것이다.

3] 하이젠베르크의 실재 진술에서 나온 이 질문은 연극에서 그의 배역에 의해 더 철저해진다. W. Heisenberg, affidavit on the Copenhagen visit, manuscript and typescript, c. 1948, Heisenberg Archive, Max Planck Institute for Physics, Munich (cited by David Cassidy in Physics Today, July 2002).

4] 마이클 프레인으로부터의 이 인용은 Niels Bohr Historical Archive's History of Science Seminar, November 19, 1999에서 취했다.

5] 위치와 운동량은 뉴턴이 우리에게 알려준 양적 지표로서, 입자의 전체 궤도- 미래와 과거 - 를 예상하는데 필요하다.

6] 프레인. 저스틴 데이비스 덴마크에서 무언가 부패했나?(‘코펜하겐, 리뷰Newsday, April 7· 2000, 16)에서 인용.

7] 정크는 인상적인 인물들에 매료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가장 중요한 독일 물리학자들의 무저항이라는 이야기의 유포에 내가 기여했던 바는 무엇보다 그것이 부적절하다고 깨달은 이래, 그 인상적인 인물들에 대한 나의 평가에 기인합니다”(하이젠베르크에 보내는 데이비드 카시디의 편지에서 재인용. F.A.S. Public Interest Report, Journal of the 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 47, no. 6 [November-December 1994])

8] 문서들은 닐스 보어 웹사이트로 출판되었다. 1957년과 그가 죽은 1962년 간에 쓰여진 보어의 편지에는 12개의 초안이 남아 있다. 이것은 또한 보어가 물리학 문제에 대해 쓰고, 접근했던 방식의 전형이다. 그는 사태를 바라볼 때, 동일한 근거를 다른 시각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접근하곤 한다. 초안들은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다.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진실에 대한 완벽한 접근들을 제공한다. 공동 저자인 레온 로젠펠트(Leon Rosenfeld)에 따르면, 그와 보어는 하나의 논문을 10년 이상 작업했으며 그것에 대해 100개 이상의 초안을 작성했다.

9] James Glanz, “Frayn Takes Stock of Bohr Revelations,” New York Times, February 9, 2002. 프레인은 이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부정확성으로 간주하는 듯 보이지만, 틀림없이 이 오류 하나만으로도 프레인의 보어에 관한 묘사의 심각한 재고를 정당화하며, 그 연극의 근본적인 개정작업을 요청할 만한 것이다.

10] 프레인은 로스 알라모스에서의 중차대한 공학 프로젝트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도, 보어가 처칠과 루즈벨트를 방문하여, 무기 경쟁을 피하기 위한 단계들을 포함하여, 그들이 어떤 새로운 원자력 세대에 의해 야기될 변화에 대해 미리 생각하도록 이끌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게다가 전후 보어는 원자력과 핵 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을 위해 로비를 했다. 그는 그의 노력 때문에 원자력 평화 이용상(Atoms for Peace award)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11] 이 논점에 대해 나는 프레데릭 아펠-마글린(Frederique Apffel-Marglin)에게 신세를 졌다.

12] 이러한 결론을 띄워 놓은 후, 프레인은 그것으로부터 미묘하게 거리를 유지한다. 하지만 보어가 하이젠베르그에게 보내지 않은 편지의 이른 공개에 뒤이어 마이클 프레인과의 인터뷰에서 보도된 바에 따르면, 뉴욕타임즈에서 출판된 한 기사(‘프레인 보어의 폭로를 찬찬히 살펴보다’ 200229)에서 제임스 글랜츠(James Glanz)는 프레인이 정말 그의 이상하고 새로운 양자 윤리학에 동의할 것이라고 말한다. “관객이 속한 실재 세계에서 진짜로 일어나는 일은, 많은 연극 애호가들, 특히 전쟁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고 너무 어려서 전쟁통을 겪지 않았던 사람들은 하이젠베르그와 보어의 상상적인 논쟁에서 하이젠베르그가 보어를 이겼다는 인상을 가지고 그 연극공연을 떠난다는 점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이 그의 연극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다는 단서를 달고서, 프레인씨는 감동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로부터 흘러 나온다고 말했다. ‘실제로 하이젠베르그는 원자폭탄 또는 그 어떤 무기로도 어느 누구를 죽이지 않았다라고 프레인씨는 말했다. ‘그리고 보어는 맞든 틀리든 간에 실제로 연합군 원자 폭탄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실제로 기여했다’”(강조는 필자). 확실히 프레인이 이러한 결론을 연극에 직접적으로 포함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결국 그가 정크의 역설적인 왜곡 이것은 그의 독일 동료들이 영웅으로 변하는 반면, 연합국을 위한 원자폭탄 프로젝트를 연구했던 과학자들에게 도덕적 부담을 지우는 것이다 - 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다소 너무 뻔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리고 정크가 그의 주장 - “무력을 과시하던 독재 아래에 살던 독일 핵물리학자들은 양심의 목소리를 따랐으며, 원자폭탄 제조를 방해하려고 한다. 반면 민주주의 국가에 있던 그들의 전문가 동료들은 극소수만 제외하고 그 어떤 두려움도 없이 그 신무기 개발에 그들에 에너지를 투여했다.” - 을 철회했다는 사실로부터, 그 어떤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것도 말하지 않는 것, 즉 간단하게 이 주장을 재생한다는 것은 다소 너무 극단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13] 아이러니하게도, 아마도 불확정성 원리를 활용하여 하이젠베르그의 명성을 방어하기 위한 그의 열성으로 인해, 프레인은 보어(하이젠베르그가 아니라)가 양자 이론의 보다 폭넓은 함축을 가진 생각을 가져 오기 위해 수 십년간 분투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게다가 보어는 프레인의 관심을 끌만한 바로 그 질문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즉 양자 물리학은 인간의 사유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특히 보어는 인간의 사유 과정을 알려고 노력하는 중에 그 한계를 성찰하기 위해 그의 상보성 개념을 활용한다.

14] 특히 Frayn 2000, 69를 보라. 이 장면의 비디오 클립은 PBS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핵심 장면목록): http://www.pbs.org/hollywoodpresents/copenhagen/scene/index.html 이 책 3장과 7장의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해석 사이의 차이에 관한 나의 논의도 보라.

15] 내가 3장에서 논의할 것처럼.

16] Frayn 2000, 72.

17] 사실상 이것이 정확히 보어가 자주 상보성을 (비물리학적 맥락에서) 예화하곤 했던 예시이다. 그것은 폴 마틴 묄러(Paul Martin MΦller)덴마크 학생의 모험이라는 그의 작은 책에서 논했던 어떤 교훈이다. 보어는 상보성에 관한 그 예화적 이야기에 너무 감동받아, 닐스 보어 연구소의 모든 손님들에게 복사본을 나누어주곤 했다.

18] 나의 방법론적 접근에 관한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2장을 보라.

19] 불가피하게도 몇몇 독자들은 이런 저런 (사실은 누군가의) 이론의 정리자로서 최고라는 말을 내가 사용하는 것에 대해 망설일 것이다. 그러나 규범적인 관심이 어떤 규범적인 토대주의나 지식과 역사에 관한 진보적 개념들을 수반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보다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규범성과 자연주의에 관한 Rouse의 저작(2002, 2004)을 보라. 반대로 더 나아가 과학적 실천에 관한 나의 설명은 세계를 말하기 위해 과학에다가 의문의 여지 없는 권위를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루스는 적절하게 개정된 자연주의 개념이 우리의 최상의 과학 이론들이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즉 그것의 언급된 바 자연주의적 실행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것의 실천들을 과학이 해명할 수 있게 해주는 것과 동시에,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를 신중하게 취한다고 논증한다. 사실상 과학의 의심할 바 없는 권위는 여기서 자유 통행권이 아니다. 반대로 논점은 루스적 의미에서 자연주의의 강한 실행이 그 나름대로 그것의 추정된 권위를 의문에 부치도록 요청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20] 회절과 간섭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그것들은 물리적으로 구분된다고 생각되었으며 다른 용어들로 규정되었다. 회절은 파동들의 굴절에 관련되며, ‘간섭은 그것들의 중첩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몇몇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구별을 유지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 노벨상 수상자인 리차드 파인만은 그의 유명한 강의(1964)에서 문제가 되는 기초 현상이 오로지 하나이므로 이 구별을 그만두자고 제안했다. 즉 물리적으로 말해서, 회절과 간섭은 하나이고 같다는 것이다. 그 둘 모두 파동이 중첩될 때 그 진폭이 결합되는 사실과 관련된다.

21] 기술과학과 자연문화는 이제 과학학 문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도나 해러웨이(1997)는 다음과 같이 이를 설명한다. “기술과학은 자연과 사회, 주체와 객체 사이 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 사이, 그리고 근대라고 불리우는 상상적인 시간을 구조화했던 자연과 인공의 구별을 엄청나게 초과한다. [...] 키메라적인 모든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신세계 질서 회사(the New World Order, Inc.)의 초공간 안에서 하이픈의-이익-없이 얼기설기 꿰맞춰지는 축약된 단어를 형성한다. 기술사회라는 단어는 어떤 종류의 시각적 의성어에 의해 그 영역들의 난삽하게 혼합되고 횡단유전적인 성질을 전달한다”(3-4).

22] 나는 실천이 의도적 행위들을 요청한다고, 또는 더 나아가, 의도성이 의지나 주체성에 수반되는 어떤 예외적인 인간적 활동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으며, 인간이 의도적 상호작용의 장소라고 보지도 않는다. 반대로 의도성[지향성]을 어떤 물질적 간-행으로 재개념화한다(4장과 8장을 보라).

23] ‘-이라는 개념은 존재의 본성에 대해 말하는 일반적 용어다. 특히 이 개념은 미시적 영역에 제한되는 개념이 아니다. 즉 양자 물리학이 (상호작용이 아니라) -행하는 행위소들의 존재를 위한 분명한 경험적 증거를 제공한다 해도, 존재론적 개념은 완전히 일반적이며, 특수하게 미시적 객체들에 대한 그것의 적용가능성 안에 제한되지 않는다(물론 상이한 길이 척도에서 상이한 존재론들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경험적 질문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실제로 그러하다는 증거가 존재하지 않으며, 현대 물리학은 그와 같은 믿음을 구체화하지 않는다. 결깨짐decoherence에 관한 질문을 논의하는 7장을 보라.)

24] 여기서 개입결과와 같은 용어들은 적절하게 재정의된다.

 

 

1장 우주의 중간에서 만나기

 

1] 이 절이 쓰여진 원래 텍스트(Barad 1996b)에서 나는 사회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이 구절에서 자기-의식적으로 수립하는 긴장들로서) 실재론--구성주의 논쟁을 탈안정화하는데 있어서 어떤 전반적인 전략적 목적의 일부로서 수사적 목적을 위해 전개했다. 분명히 하건대, 나는 사회구성주의자가 아니다. 이는 내가 제안한 바로 그 대안적인 명칭인 행위적 실재론으로부터 이해되어져야 하는 논점이다. 이러한 역사적 시점에 내가 바라는 개입은, 1990년 중반의 열띤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용어 둘 모두에서 그 논쟁을 의미 없게 만드는 충분한 작용이 있었다는 것을 짚어내는 것이었다. 사실상 나는 불확실한 용어들 중심을 도는 논쟁의 무용함을 직접 지칭하기 위해 모순 없는 실재론과 사회구성주의라는 부제를 골랐다. ‘실재론과 사회구성주의 너머라는 다른 부제는 몇몇 방식들에서 보다 직접적이었을테지만, ‘너머는 그릇된 길로 이끄는 초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순간에는 이러한 지루한 논쟁의 의미없음에 대한 보다 통렬한 표식이 외쳐져야하는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나는 본래 애매함들, 불연속성, 양자적 주체 그리고 페미니즘과 물리학에서 다양한 입장짓기라는 매우 다른 부제를 골랐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바꾸었다. 왜냐하면 그 논쟁이 그러한 분리를 가로지르는 생산적인 상호작용이라곤 전혀 없는 결론과 더불어 흉폭하게 커져 갔기 때문이다. 그 논문과 이 책에서 내세우는 행위적 실재론의 관점은 실재론과 사회구성주의 간의 전통적인 구분을 가로지른다. 즉 그것은 논쟁이라는 바로 그 용어에 도전하는 것이다(특히 이 책의 제목에서 중간’halfway은 제안된 바, 사회구성주의와 과학적 실재론 사이의 어떤 중간지대’middle ground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로 행위적 실재론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완전히 그릇된 것이다.) 논점은 행위적 실재론이 실재론과 사회구성주의의 둘 모두의 전통적 형식을 떠받치는 재현주의, 개체주의, 그리고 여타 토대주의적 가설들을 의문에 부친다는 것이다.

2] 라우단(Laudan, 1981)과 파인(Fine 1984)이 논한 것처럼, 과학 이론들의 성공이 실재론자들에게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점은 덜 분명한 논점이다.

3] 갈리슨에 따르면, 안정성은 (보다 협소한 다양성 범주와는 달리) 변화하는 실험 조건들 아래에서 결과들의 불변성을 뜻하며, 단순함(directness)은 필연적으로 논리적인 추론은 아닌, 인식론적인 물질[문제]이다.

4] 존재론은 내가 이러한 관찰들을 제시한 이래(Barad 1996) 과학학에서 점점 보다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예컨대 Cussins (1998); Haraway (2003); Latour (1999); Law and Singleton (2000); Mol (2003) 그리고 Stengers (1997)을 보라. 이 리스트가 다가 아니고, 존재론에 관한 문헌이 괄목할만하게 성장해 왔다는 것이 고무적이긴 해도, 나의 본래 논점은 과학에서 한 무더기의 관심이 존재의 본성 보다는 앎의 본성에 대한 관심에 계속 투여되어 왔다 - 여전히 유지된다.

5] ‘존재인식론’(앎과 존재의 상호엮임에 관한 연구)에 관한 진전된 논의를 위해서는 4장을 보라.

6] 쿠싱은 실재론은 이중 위험에 빠져 있다고 주장한다. 이 언급에서 그가 의미하는 바는 닐스 보어(이른바 코펜하겐 해석)와 데이비드 봄에 의해 제시된 양자 물리학의 경합하는 해석들을 중심으로 도는 그의 예시들과 관련하여 가장 잘 설명된다. 우선 쿠싱은 실재론이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반실재론적인코펜하겐 해석에 의해 의문스러워진다고 논증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실재론이란 경험적으로 구별불가능한 경합하는 이론들이 있다는 그 사실로 인해 도전받는다. 내가 여기서 (쿠싱의 반실재론적 보어 독해에 반대하여) 보어의 입장에서 실재론적 태도를 위해 논증할 것이지만, 이러한 의견의 상이함이 그 자체로 또한 저절로 쿠싱의 논증이 가진 미결정이라는 측면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쿠싱의 논증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중요한 미해결 쟁점들이 몇몇 존재한다는 것에 주목하라. 하나는 이러한 이론들의 경험적 등가성이 코펜하겐 해석에서 측정 문제의 해결에 의존한다는 것이다[7장을 보라]. 그리고 봄의 이론과 코펜하겐 이론이 모든 측면에서 일치하는지를 살피는 문제가 남아 있다. 어떤 경우에 미결정된 것은 진리 대응설에 대한 문제를 드러낼 것이지만, 그것은 내가 제안하는 실재론에 따른 실재론적 입장들을 차단하지 않는다(앞으로 전개될 논의를 보라.).

7] 과학 문화에서 놀이’play에 관한 보다 진전된 논의를 위해서는 Barad 1995를 보라.

8] 이러한 사실은 그 영역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간주되는 많은 학자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페미니즘 과학학자들이 과학자거나 적어도 의미있는 과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9] 불경스럽게도, 행위적 실재론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접근이, 그것이 의식이든, 경험이든, 언어든 또는 여타 추정된 매개체든 간에, 매개되어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이후와 4장에서의 논의를 보라. 오히려 행위적 실재론은 특수상대성이론과 마찬가지로, 어떤 매개체 어떤 에테르’ - 가 필요하다는 가설을 의문에 부친다.

10] 신조어인 존재인식론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분리불가능성을 표시한다. 나는 또한 윤리-존재-인식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는 존재론, 인식록 그리고 윤리학의 분리불가능성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분석철학 전통은 이러한 영역을 전반적으로 분리하여 취하지만, 이 가설은 존재, 앎 그리고 가치의 본성을 형상화하는 특수한 방식에 의존하는 것이다. 보다 진전된 논의는 4장과 8장을 보라.

11] 특히 2의 성에서 생물학적 자료장을 보라. 신체를 재사유하려는 몇몇 최근의 페미니즘적 시도와는 달리, 보부아르는 중요한 생물학적 체현의 차원들과 연루되는 당당한 의도를 전개한다. 물론 그녀의 의도는 현재의 역사적 시점에서 너무나 소박한 것처럼 보일 것이지만, 신체의 생물학과의 직접적인 연관 가능성을 재사유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현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유용하게 숙고될 법한 이 장의 몇몇 구절들을 읽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12] 후기구조주의를 포스트모더니즘과 섞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두 용어는 복잡한 담론들의 집합을 가리키지만, 그것들 사이의 차이에 관한 간략한 설명은 이후에 이어지는 방식들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이해를 도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비판과 관련된다. 후기구조주의는 스스로를 개체주의 존재론들, 특히 자유주의 인간 주체의 관념에 정초히는 존재론의 급진적 비판과 관련시킨다. 후기구조주의는 사회적 실천의 생산적 본성과 주체의 담론적 구성에 집중한다. 미셸 푸코와 주디스 버틀러의 후기구조주의적 사유는 이 책 후반부에서 다룬다.

13] ‘내부적외부적사유 둘 모두의 한계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그로스(Grosz)Volatile Bodies (1994)를 보라

14] 이러한 쟁점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페미니즘 이론과 후기구조주의 이론에 관한 입문적 텍스트들 중 어떤 것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를 원할 것이다.

15] 재현주의가 재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저항하는 어떤 방해물도 아니고, 또한 재현물이라는 생각이 의미없는 것으로 취해지지도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라. 지금 쟁점은 재현이 행하는 역할은 무엇이고, 지시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파악되는지이다.

16] 루즈는 재현주의에 대한 그의 캐물음을 지식과 권력(Knowledge and Power, 1987)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지식에 관한 재현주의적 이해가 어떻게 권력과 지식 사이의 관계의 본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획득되는지 검토한다. 그는 그의 재현주의 비판을 계속하면서 과학적 실천의 대안적 이해를 과학에 연루되기(Engaging Science, 1996)에서 전개한다. 루즈는 우리가 과학 실천을 상황적인 활동성의 계속되는 패턴들로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가 과학적 실천이 물질화하는 방법(How Scientijic Practices Matter, 2002)에서 더 진전시킨 생각이다.

17] 재현주의의 매력은 아마도 그것이 다른 대안들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이후에 수행적 대안들에 대해 논할 것이지만, 대안은 이것들만이 아니다. 예컨대 푸코는 16세기 유럽에서 언어가 매개물로 생각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단순히 세계의 상들 중 하나”(1970, 56)였다는 점을 짚어낸다. 이것은 내가 제시하는 포스트휴먼 수행적 사유에서 변화된 형식으로 반향한다.

18] 앤드류 피커링(Andrew Pickering)이 이러한 관점을 가지려는 극소수의 과학학자들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확실히 도나 해러웨이, 브루노 라투르 그리고 조셉 루즈 또한 과학적 실천의 본성에 관해 수행적 이해를 제안하는 과학학 이론가들이다. 피커링은 실천의 엉킴(The Mangle of Practice)에서 수행적 언어에 기대어 재현주의적 언어를 우회한다. 하지만 후기구조주의와 더불어 재현주의에 대한 치유책으로 수행성을 함께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리고 휴머니즘에 대한 거부를 공유한다 해도, 수행성에 관한 피커링의 생각이 후기구조주의처럼 잘 알려질 수 있지는 않았다. 중요하게도 피커링은 그러한 생각을 가짐에 있어서 그것의 잠재적으로 중요한 틀림없이 퀴어에 고유한 - 계보를 깨닫진 않으며(Sedgwick 1993을 보라), 왜 그것이 현대 비판 이론가들, 특히 페미니즘과 퀴어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에게 중요하게 전승되어왔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사실상 그는 그것의 결정적인 통찰들 중 많은 것에 수반되는 그 이론의 중요한 정치적 역사를 제거한다. 아마도 이것은 피커링이 수행성에 관한 후기구조주의적 혁신과 기술과학적 실천에 대한 페미니즘적 사유의 중심인 의미화, 인식가능성, 의미, 정체성 구성 그리고 권력을 포함하여 과학적 실천들의 중요한 담론적 차원들을 무시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놀랄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행위소의 인간주의적 개념을 어떤 개별적 실체들(인간 뿐만 아니라 기후체계, 가리비 조개, 그리고 스테레오 시스템 까지)속성으로 당연시하는데, 이는 후기구조주의가 문제시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후기 구조주의적 접근은 과학적 실천에 있어서 피커링과 여타 수행적 사유의 핵심인 비인간 행위소를 고려하는 것에서 실패한다.

19] 과학사가인 데이비드 카시디(David Cassidy, 1999)가 기술한 바에 따르면, 이 역사적 고비에 에너지적이고 전자기적인 관점에 의해 기계적 세계관이 몰아내 졌으며, 아인슈타인은 자연에 관한 통일된 기계적 사유에 계속해서 희망을 거는 점점 줄어드는 소수집단의 구성원이었다. 사실상 원자가 분리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이미 J.J. 토마스의 1897년 전자의 발견에 즈음해서 공중분해 되어 버렸다 해도, 아인슈타인의 1905년 브라운 운동에 관한 설명에 이르러서야, 물리학자들은 원자가 물질적 입자이지 단순히 이론적 실체가 아니라는 점을 납득했다. 완고한 실증주의자인 에른스트 마흐는 끝내 타협을 거부했다.

20] 8장을 보라.

21] 낸시 카트라이트(Nancy Cartwright) 또한 이렇게 구분한다. 해킹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개별실체를 향한 실재론자이지 이론을 향하지 않는다. 해킹이 실험적 실천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카트라이트는 이론화와 모델 구축의 복잡함에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22] 예컨대 해킹 1983’에서 현미경장을 보라.

23] 물론 사용법이 간단한 카메라들을 사용하는 것을 포함하여 - 어떤 이미지 구성의 실천에서 줌 인은 이미지가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을 간단하게 캡처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24] 발레리 한손(Valerie Hanson, 2004)STM 이미지 구성에 대한 촉시각’(haptic vision) 실천이라는 생각을 사용하기를 제안한다.

25] 물리적인 접촉 그리고 현미경 팁과 시료 사이의 상호작용 간의 구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크지는 않다. 우리가 아는 접촉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어떤 전자기적인 상호작용으로서, 전자구름들 간의 척력인데, 이는 서로 간의 전자 구름들을 감각하는 물리적 만남을 통해 각기 다른 경계들을 마주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많은 접촉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STM 팁과 원자의 표면 사이의 간격은 극미한 나노메터 단위의 분리를 포함하는바, 그래서 이것이 실제로 접촉하고 있는지 아닌지라는 질문은 물리적 근사성의 측면에서 현실적이지 않다.

26] 즉 고전적인 뉴턴 물리학의 원리에 따르면, 입자들은 장벽을 가로질러갈 수 없어야 하지만, 그것들은 양자 역학적인 물질의 파동 본성 때문에 그렇게 한다. 물질의 이중적본성(파동-입자)3장에서 상세하게 논의된다.

27] IBM 취리히 연구실의 게르트 비니히(Gerd Binning)와 하인리히 로러(Heinrich Rohrer)1981년에 STM을 개발했다. 그들은 이 공로로 198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28] 보어는 재현주의를 우회하여 수행적 사유로 움직여 가는데, 여기서 과학적 실천은 멀리 떨어진 반성[반영]이 아니라 세계와의 직접적인 물질적 연루를 이끈다. 그럼에도 해킹과는 달리 보어는 실천의 동역학에 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예컨대 실험의 부분적 난점은 장치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실험의 준비는 단순히 바로 앞에 과제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4장을 보라.

29] 폴 텔러(Paul Teller, 1989)는 이것을 개별주의’(particularism)이라 부른다.(7장을 보라)

30] 몇몇 독자들에게 현상이란는 용어는 의심할 바 없이 나의 목적이 불필요한 현상학적 함축을 지닌다는 것을 암시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현상에 관한 행위적 실재론의 사유는 철학적 현상학자들의 그것이 아니다. 특히 현상은 나타나는 사물--자체라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즉 쟁점은 예지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현상이라는 칸트의 생각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후의 장들에서 설명될 것인 바, 나의 현상 개념은 보어의 현상 개념의 정련체이다. 나는 그 용어를 단순히 보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행위적 실재론의 현상 이해가 앙자 역학에서 기초적인 또는 해석적인 주제를 재사유하면서 가동되는 바, 중대한 전환을 강조하기 위해 유지한다.(7장을 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현상이라는 개념을 그것의 일반적 쓰임 때문에, 특히 과학적 영역에서, 우리가 실재한다고 보는 바, 관찰되는 것을 지시하기 위해 보유한다. 이것은 그 용어가 환기될 때, 어떤 기회가 객관적 지시체를 올바르게 정위할 가능성을 그 자체로 드러내기 때문에 유용하다. 즉 완연한 복잡성을 가지는 그 용어가 연합하는 것은 행위적 실재론의 의미에서 현상이다.(특히 4장을 보라.)

31] 루즈 또한 실험하기와 이론화하기에 대한 이 논점을 구성한다. 특히 Rouse 2002를 보라.

32] ‘-은 나의 행위적 실재론의 사유에서 핵심 개념이다. 나는 이것을 다음 장들에서 상세히 논한다. (특히 3장과 4장을 보라)

33] 그렇지 않다면, 물론 당신은 사물을 집합체로 취할 것이다. 이것은 라투르가 그의 최근 저작에서 옹호하는 전략이다. 사물이라는 용어를 (그것의 어원론적 뿌리를 재개정함으로써) 회집된 인간-비인간 집합체를 대표하도록 재정의하는 것이다. 특히 Latour 2004사물들을 공적으로 만들기’-민주주의의 분위기, http://www.ensmp.fr/latour/articles/article/96-DINGPOLITIK2.html - 에 나오는 목록에 대한 서문을 보라. 하지만 단어’- 즉 담론적 실천들(의미있는 표현을 위한 물질적 조건들)과 관련된 질문들 -를 몰아내는데 그토록 많이 애를 쓸 필요는 없다(재현주의의 무대인 단어와 사물안에서). 이것은 특히 푸코가 담론-권력-지식 결합체, 즉 주체의 담론적 구성의 핵심으로 고려하는 주제와 관련된다. 이것은 정확히 주의를 요하는 논점이다.

34] 결정적으로 이 진술은 훈육 권력이 주체에 작용하는 외적 힘이 아니라는 푸코적 관점에 기반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나아가 여기에는 반복적 행위, 즉 그 저항과 불안정성에 속하는 권력이 있다(Butler 1993, 9).

35] 극소수의 페미니즘 과학학자들은 후기구조주의적 통찰들을 신중하게 채택한다(즉 그것들을 어떤 체계적 경향 안에서 고려한다.) 해러웨이와 루즈는 중요한 예외들이다.

36] 4장을 보라. 측정 행위소(원래 체계의 그것, 예컨대 실험실 실천들)(이 새로운 배치 안에서) 탐구과정에서 체계의 부분으로 취하는 보조장치의 활용에 대한 7장의 논의들도 참조하라. 내가 앞으로 설명할 것인데, 중요하게도 보조 장치의 부가는 새로운 현상의 구성을 초래한다.

37] 이 구절에 있는 통치적 정치학(governmental politics)의 은유는 라투르(2004)의 것이지만, 내가 강조하고 있는 난점들은 그의 것만은 아니다.

38] 서문, 주석 19를 보라.

39] 이 다종다양한 대부분의 연결은 영국 철학자인 J.L 오스틴(J. L. Austin)의 화행(speech act)에 대한 관심사에서 비롯되는 수행성이 계보로 이어진다. 오스틴은 특히 말하기와 행하기 그리고 그 생산물 간의 관계가 단순히 특정 화행의 기술적 효과 이상이라고 여겼다. 데리다는 이 개념에 인용이라는 중요한 후기구조주의적인 변경을 가한다. 데리다에게 화행의 효과는 오스틴이 제안한 바처럼 주체의 본래적인 의지에 기인하지 않으며, 그 인용이 발생하는 상황적 맥락에 기인한다. 버틀러는 데리다의 수행성 개념을 수행적인 정체성의 본성을 이론화하면서 푸코의 규율 권력의 생산적 효과에 관한 이해를 통해 심화한다. 버틀러는 그녀의 개념인 젠더 수행성을 젠더 트러블에서 도입한다. 물질이 되는 신체에서 버틀러는 젠더 수행성과 성화된 신체의 물질화 간에 연결을 논한다. 이 복잡한 계보에 관한 나의 개괄은 여기서 이 주제를 정당하게 다루기에는 너무 성기고 단순화되어 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Eve Kosofsky Sedgwick (1993)을 보라.

40] 특히 Foucault 1978을 보라. 버틀러는 의 젠더화된 구성에 관한 페미니즘 과학학 문헌들로부터 다양한 자료들을 인용한다.

41] Butler 1990, 106에서 인용.

42] 푸코는 다음과 같이 쓴다. “권력은 획득되거나, 움겨쥐어지거나, 공유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유지하고 또는 미끄러져 나가는버리는 것을 허용하는 어떤 것이다. [...] 권력은 제도도 아니고, 어떤 구조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부여 받은 특정한 힘도 아니다. [...] 권력의 가능한 조건, 또는 어떤 경우 우리가 그것의 실행을 이해하도록 허용하는 관점, 심지어 보다 주변적인효과들 안의 관점, 그리고 사회적 질서의 인식가능성의 격자틀로서 그 메커니즘을 활용할 가능성을 만드는 관점들은 핵심적 논점의 우선적인 존재 안에서, 부차적이고 퇴락한 형식들이 방출하는 주권의 특유한 원천 안에서 찾아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움직이는 힘 관계의 지층으로서, 그것들의 불평등, 항구적으로 발생하는 권력의 상태들이지만, 후자의 경우 언제나 국지적이며 불안정하다. 권력은 [...] 모든 지점에서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또는 더 나아가 하나의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모든 관계 안에서 생산된다.”(Foucault 1978, 92-94)

43] 이 점에 대해서는 Kirby 1997Cheah 1996을 보라.

44] Butler 1989도 참조하라.

45] 행위적 실재론의 용어인 물질-담론적-은 이후에 정의된다. 아마도 앞으로 이루어질 논의와 관련하여 물질-담론적안의 하이픈이 단순히 분리된 용어들을 다른 방식으로 연결하는 편리한 방법만이 아니라 둘의 이론화된 결합을 함축한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4장을 보라.

46] 엄밀하게 말해서 행위소는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또는 사이보그든 간에 개별실체의 속성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비인간의 상이한 구성은 내가 4장에서 논의할 것처럼 행위적으로 수립된다.

47] 도나 해러웨이의 이런 의미에서(비록 그녀가 그러한 이름표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연구는 명확하게 그리고 끈덕지게 포스트휴먼적이다. 사실상 해러웨이의 학술 저작 영장류로부터 사이보그와 반려종에 이르는 인간과 그것의 타자들이 수립되는 여러 차이화의 기술과학적 실천들에 과한 어떤 복잡한 이해를 발전시킨다. 현저하게도 이 포스트휴머니즘 개념은 앤드류 피커링의 다음과 같은 기묘한 언급과 다르다. “인간 행위자가 여전히 거기에 있지만, 이제는 비인간과 불가분하게 얽혀 있는 공간으로서 포스트휴먼적 공간은 더 이상 결정권을 쥔 행위자 중심에 있지는 않다”(1995, 26). 피커링이 이에 따라 인간을 그의 과학적 실천에 관한 해명으로부터 탈중심화하는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을 취해, 그것을 비인간과 당연하다는 듯이 구별한다.(피커링의 얽힘개념은 분명 인식론적이지 존재론적이지 않다는 것에 주목하라.) 그의 포스트휴먼적해설을 이중화하는 중에 그에게 주제가 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 행위항들의 상호적 적응 또는 민감성에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피커링(1995)실천의 엮임에 관한 그의 해명을 특수하게 포스트휴먼적이고 수행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동안, 이 핵심적인 용어 둘 모두의 사용은 나의 것과 매우 다르다. 역설적이게도 과학적 실천의 맥락에서 선택사항들을 만드는 자유주의 휴머니즘의 행위자는 그의 이론 어디에서나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한 나의 특수한 시도를 포스트휴먼이 인간의 종말을 따르는 어떤 세대를 함축한다는 식의 다른 것들과 확실히 구별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말의 나의 활용은 또한 ()휴머니즘과 그것에 수반하는 인간중심주의와도 대조된다. 게다가 나는 몇몇 포스트휴먼 실체와 그것의 인간적 선행요소 사이의 대조를 이끌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휴머니즘적 가설들의 동요 안에서, 나는 인간을 다른 것들로부터 획정하는 경계-형성적 실천들에 집중하고자 한다. 더 진전된 논의는 4장을 보라.

48] 물리학자들, 철학자들, 역사가들 그리고 여타 사람들이 코펜하겐 해석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실제로는 많은 코펜하겐 해석들이 존재한다. 또는 달리 말해, 여기에는 어떤 결정적인 또는 잘-정의된, 일관되고 완전한 코펜하겐 해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코펜하겐 해석에 기여한 물리학자들은 그들의 특수한 기여 안에서 의미있는 철학적이고 해석적인 차이들을 전개했으며, 따라서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취해지는 것은 실제로 어떤 여러 다양한 관점들의 중첩이다. 여기에는 보어(상보성), 하이젠베르그(불확실성), (개연성) 그리고 폰 노이만(투사 공리)라는 일부 핵심 인물들이 포함된다. 벨러(1990) 또한 코펜하겐 해석이 어떤 일관된 틀이 아니라 오히려 핵심 인물들 사이에 획득된 합의라고 논한다.

49] 양자 역학에서 코펜하겐 해석의 헤게모니에 대해서는 Cushing 1994를 보라.

50] 1990년대 중반에 양자 이론에서 양자 정보이론의 발전과 관련되어 근본적인 주제가 (다시 한번) 넓은 범위에서 물리학적 대화의 꽤 가치 있는 주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양자 암호작성, 양자 텔리포테이션 그리고 양자 컴퓨터에의 적용이 포함된다.(7장과 8장을 보라)

51] 점점 더 양자 교과서는 이 분야에서의 보어의 기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양자 물리학의 충분한 이론을 예고하는 원자에 관한 그의 모델에 대한 참조를 제외하고). 특히 그의 상응 원리와 그것이 양자 이론의 발전에서 행하는 역할, 또는 상보성과 양자이론의 이해에서 그것의 중요성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이에 대한 암시적인 정당화는 그러한 것들이 그 어떤 실천적이거나 계산적인 결과를 가져 오지 않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 그 어떤 실제적 의미도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음이 드러난다. (7장을 보라)

52] 7장을 보라.

53] 3장의 방법론적 간주곡을 보라. 보어가 스스로 이러한 접근에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 즉 이것은 단순히 그의 권위를 존경하는 것과 반대로 세계의 부분으로서 그리고 그것과 우리의 특수한 연루에 관심을 기울이고 해명하고자 시도한다. 그의 세계에 대한 태도에서 지적인 염결성이 권위를 이긴다는 점은 분명하다.

54] 보어에게 상보적(다음 절에서 상세히 설명될 바) 필연적이고 동시에 상호배제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접근의 예에 대해서는 Bohr 1963b, vol. 2를 보라. 보어의 유비적 방법론의 실패에 관한 자주 언급되는 사례는 생물학에서 생기론-기계론을 해결하려는 그의 시도다. 그의 접근법은 제한된 기술적 전망으로 인해, 그가 생명 과정의 기초적인 역학을 검토하기 위한 조건들과 탐구 중인 표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들이 상호배제적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생명이 어ᄄᅠᇂ게 정의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아마도 보어의 비판들 가운데 어떤 것이 일깨우는 것보다 복잡할 것이다.(Barad, “Living in a Posthumanist Material World: Lessons from Schrodinger's Cat”을 보라.

55] 뉴턴 물리학이 거시적 영역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이 뉴턴 물리학이 거시 영역(또는 다른 어떤 것)에서 엄격하게 진리인 이론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 또는 측정의 투명성이라는 가정(즉 뉴턴 물리학을 떠받치는 형이상학적인 배경 가설)이 그러한 영역에서 유지된다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뉴턴 물리학이 양자 이론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러한 것과 근사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은 이 영역에서 입자의 질량에 관한 플랑크 상수의 비율이 일반적으로 문제가 되는 거시적 상황에 관해 정확히 요청되는 것보다 더 작다는 사실 하지만 이것은 0아니다. 그리고 이 비율이 엄격하게 0이 아니라는 사실이 핵심이다. - 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거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양자 역학적 해들에 올바른 근사치를 제공하는 뉴턴 물리학은 사실상 양자 이론의 기초를 위한 훨씬 진전된 새로운 실험에 의해 뒷받침되는 바, 보어의 해명에 관한 나의 탐구에 의해 제기되는 새로운 인식론 또는 새로운 존재론에 반하는 증거가 아니다. 실제로 두 개의 분리된 세계들’, 즉 뉴턴 방정식이 적용되는 뉴턴적인 (거시) 세계와 슈레딩거의 방정식이 적용되는 양자적인 (미시) 세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위한 어떤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상 보어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 반대가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일단 양자 이론에 의해 제안된 인식론적 (그리고 존재론적) 전환이 성립되면, 우리는 어째서 옛 가설들이 쉽사리 의문스러워지지 않았으며 수 세기 동안 숨겨진 채 놓여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더 진전된 논의는 3장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