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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시간의 노이즈>(존 페체)_발췌번역

by Nomadia 2021. 10. 3.

*원문서지: John Paetsch, ‘The Noise of Time’, Deleuze and Guattari Studies, 15.3,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21: 343–362

 

시간의 노이즈

존 페체(John Paetsch)

번역: 박준영(노마씨)

 

 

<초록>

시간에 의해 균열된 -만약 들뢰즈가 칸트 체계 안에 있는 표면적으로 숨겨진 이 요소로 반복적으로 되돌아 간다면, 이는 단순히 차이’(여기서는 어떤 선험적인 강조와 더불어)의 주제를 새롭게 하는 것으로 들리진 않는다. 그것이 아니라, 들뢰즈는, 칸트가 유고(Opus Postumum)에서 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이 내적 드라마로 돌아 간다. 즉 그것은 내부’(자아)로부터 외부’(자연)로의 가장 직접적인 경로를 드러낸다. 그러나 초월적 장에 관한 칸트의 후기의 혼란은 그의 가장 유명한 많은 주제들을 침식한다. 특히 범주표의 고정성, 직관의 형식들(시간과 공간)의 동질성, 그리고 논리적 규정성의 권리가 그러하다. 이것은 들뢰즈가 칸트의 비판을 시간의 노선을 따라 급진화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균열 지점과 씨름하면서, 들뢰즈는 다름 아니라 어떤 진정으로 발생적인 자연 철학을 개시한다. 이 자연철학은 자연 에서라기 보다 자연과 더불어 사유하는 것이다. 오로지 이 미로의 흐름 안에서 우리는 근원적인 변형[변신]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다.

 

키워드: 베르그송, 연속성, 지속, 일반 경제학, 칸트, 자연 철학


 

 

[344]들뢰즈는 보다 평범한 지점, ’(I)자기’(self) 사이의 균열에서 시작한다. (...) [345]이 균열과 씨름하면서, 들뢰즈는 다름 아니라 정말 발생적 자연철학(philosophy of Nature)에 관한 서문을 공들여 만든다. 이는 자연에 관해(of) 생각하는 것이라기보다 자연과 함께(with) 사유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후기 자연철학과 균열된 사이의 관계는 이런 경우 잘 개괄되지 않는다.

 

[345]어떤 식으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외부로 되돌아 가게 하는 미끄러짐, 틈 또는 물러남은 칸트, 후설 그리고 하이데거가 간과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들뢰즈로 하여금 변덕스러운 시간성에 근거하는어떤 형식적 담론에 함축되어 있는 미규정적 노이즈’(noise)를 증폭시킨다. 들뢰즈의 내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생기적 차원 또는 물질적 접합(seam)은 언제나 이러한 상상적으로 희귀한 [시간의] 내면성 안에 그 자신을 얽혀들게 한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논리적 규정인 듯 가장하는 모든 것을 기각하는 것! 그러나 이러한 접합들을 발굴하고 노이즈를 증폭시키는 것은 어떤 미묘한 과정이다. 모든 미로 안에서, 진입로는 출구만큼이나 장애물이 가득하다.

 

[347](유고에서) 비판 체계 안에 있는 간극을 교정하는 다른 방법에 대해 탐색하면서, 칸트는 자기-정립(self-positing)의 교설을 발견한다. 간단히 말해, 이 교설은 경험은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한 첫 번째 정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고, 여기서 정립(또한) 더 전진적인 규정을 위한 입장정립(positioning for further determining)이다. 자기-정립은 모든 가능한 경험의 조건이다. 그것의 운명이 어찌 되었든, 하나의 경험이란 첫 번째 나의 경험이다. 칸트는 범주들 자연에 관한 비판철학을 시작하기 위한 조건 - 의 객관적 타당성에 관한 증명을 자기-정립의 교설에 따라 완성하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우리는 정당하게도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과연 그것은 물질개념의 구축을 어떻게 대체할 수 있는가? 그토록 많은 것이 그토록 미소한 것으로부터 유래할 수 있나? 만약 우리가 ‘~없이와 관련되면, ‘~안에를 왜 보는 건가?” “길고 소진되지 않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은 이곳이다”(Deleuze 1994: 86).

 

[348]자기-반성(Self-reflection)와 규정가능한 자기(self) 사이의 틈을 드러낸다(Kant 1997: 456, B 429). 분명히 해 보자. 자기-정립은 자기사이의 이러한 균열을 발생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드러낸다. 자기-정립은 한 번 더 초월적 장의 구조 속으로 들어 가는 실마리’, 즉 이러한 장에 대해 본질적인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판단의 행위보다 더 낫게 입장정립되는 하나의 실마리이다. 칸트가 초월적 장 안에 있는 이러한 교정불가능한 균열을 비판 체계 안에서 간극을 교정할 바로 수단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348]만약 이러한 자기가 외부 감각의 형식을 포함한다면, 그때 초월적 장은 이미 외부성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 초월적 장은 스스로를 내부와 외부 사이의 구별을 거부하는 어떤 미로로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는, 그 각각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층이 시간을 불규칙하게 결합함으로써, 힘들의 복잡한 바다만이 존재할 것이다. 존재의 근거들을 초월하는것은 범주들만이 아니다. 만약 유고가 맞다면, 자연의 역동적 패턴들은 이미 스스로를 자기의 여러 측면들에 새겨놓은 것이다.

 

[349]자기-정립의 교설로의 칸트의 전회는, 수리 물리학의 객관성을 보호하고 논리적 규정을 보존하는 수단으로서 그의 최초의 비판에 관한 이미지를 위태롭게 만든다. 칸트의 비판적 전회가 그 자체로 이러한 이미지를 거의 침식함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그것들의 인력이 불순물들을 새롭게 허용하는 것을 결코 거부하지 않으면서, 과감히 그것을 시도한다. (...) 만약 차이와 반복물질개념을 구성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러한 구성에 있어서 그 자신의 시도에 대한 칸트의 판결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판적 자연철학을 개시할 방법이 아니다.

 

[349]칸트와 들뢰즈에게 물질적 감응(material affection)은 자기-감응과 분리불가능하다. [350]‘내적감응과 외적감응이 서로간에 상호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은 그 둘 간의 구별을 지워버린다. 거기에는 더 이상 내부외부가 없으며, 오로지 서로간에 환원불가능한 측면들의 상호적 변조(modulation)만이 있을 뿐이다.

 

[350]이러한 감응의 측면들(, 내적이고 외적인)이 서로를 상호적으로 형성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들 사이의 실재 차이를 삭제함이 없이 그것들 간의 이동을 허용하도록 한다. 자기-감응으로부터 물질적 감응으로의 이동은 폐쇄된 내면으로부터 개방된 바깥으로의 이동이 아니다. 거기에는 외부성이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다양하게 변형되는 것만이 있다. 또한 거기에는 상호적으로 변조하는 구성요소들에 의해 형성되는 외부만이 있다.

 

[350]들뢰즈가 자연철학을 향해 떠나면서, 시작해야 하는 지점이 이곳인데, 그것은 이러한 환원불가능하게 복잡한 감각적 존재. ‘물질개념의 구성을 대신하여 수립됨에도, ‘감각적 존재에 대한 들뢰즈의 탐구는 범주표의 완전성’(completeness)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어떻게 범주를 통해 스며나오면서 - ‘신체들 속으로들어가는가를 드러낸다(Deleuze 1989: 197).

 

[350]들뢰즈에 따르면, 자기-정립과정에 대한 탐구는 주어진 것이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대한 탐구,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연속성을 포함하는지에 대한 탐구로 넘어 간다. 이러한 누락 칸트 자신의 후기 작업에 의해 예시되는 바 은 논리학, 수학 그리고 [351]수리물리학을 초월적 장 안에 기초지으려는 칸트의 시도에 예기치 않은 결과들을 초래한다. 자기-정립 행위에 활력을 주는 계기들’ - 다시 말해 통각의 초월적 통일성, 지성에 속하는 ’, 그리고 자기’ - 은 모두 스스로를 이러한 장 안으로 짜 넣는다. 연속적인(continuous) 감응과 시간적인 연속체(continuum) 둘 모두는 이러한 계기들을 구성하며, 이러한 기초지음의 행위가 연속체의 구성에 관한 미로와 얽힌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른 측면에서 베르그송의 이의 제기가 있을 수 있다. 즉 칸트는 지속으로서의 연속성이라는 특성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지속과 시간성은 평온한, 동일한 연속체가 아니라, 광포하고 이질적인 것이다(Bergson 2001: 104).

 

[351]자기-정립의 이론은 초월적 장의 다질적(porous) 특성을 드러냈다. 비록 겉으로는 닫혀있는 듯 보이더라도, ‘통각의 초월적 통일성으로서의 요소는 외부 요소들을 함축한다[안주름짓는다](implicates). 즉 그것의 감응적 차원은 두 가지 상호적으로 형성하는 측면들을 가지는데, 하나는 자기-감응에 다른 하나는 물질적 감응에 관계한다(살아 있다는 것은 연속적으로 감응된다는 것이다).

 

[352]이미 첫 번째 비판에서 칸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자기-정립을 표명했다. 즉 미규정성은 초월적 복합체 안에 거주하고 있으며 삭제될 수 없다. 그것은 칸트의 비판적 전회를 시작부터 쫓아 다닌다. (...) 첫째로 칸트에게 인식은 미규정적인 잡다(manifold)를 규정한다. 모든 인식 행위는 어떤 직관과 관련된다. 즉 인식 안에 어떤 부분적으로 미규정적인 잡다가 언제나 이미 주어져 있으며, 주어진 어떤 것이든 시간의 형식에 의해 [이미] 조건화되어 있다(아무것도 즉각적으로 또는 단순히 주어지지 않는다). (...) 모든 직관은 시간의 내적 감각에 의해 조건화된다. 심지어 순수한 시간적 잡다의 순수 현전조차도 경험적인 어떤 것도 회피하는 어떤 형식적 직관’ - 이미 직관의 시간적 형식에 따라 조건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현전( 시간에 주체에 주어진 것)일 수 없을 것이다.

 

[353]‘시간의 형식은 나의 자기성에 관한 직관을 수반하는 표식만이 아니다. 즉 거기에는 또한 이러한 직관을 나의 것으로 그리고 하나의 통일성으로 잡다를 종합하는 능동적인 를 표시하는 나는 생각한다를 수반하는 것이 있다. 자기는 결코 홀로 주어지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계기들을 사유 안에서 분리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경험 안에서 분리불가능하다. 그와 같은 것이 경험적 흐름의 복잡성이다. [그것은] 비환원적으로 상이한 요소들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히 넓고, 펼쳐지지 않은 흐름 안에 그것들이 포함될 만큼 충분히 민활하다. 흐름의 연속성 또는 그러한 구별되는 계기들을 어떤 동질적인 덩어리로 융합하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위협적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러한 흐름이 여전히 연속적으로 남아 있는 동안 이질적인 요소들로 구체화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지속적 연속체의 구성에 있어서 미로의 핵심이다!

 

[353]“나는 나 자신을 내가 존재한다로 인지하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에게 내가 나타난다로 인지한다”(Kant 1997: 260 B 158). 자기-정립은 오직 수동적 자기 언제나 이미 시간의 형식에 의해 조건화된, 미규정적 실존’ - 가 규정하는 에게 시간 안에서 주어질 경우에만 가능하다(Kant 1993: 180). (...) [이때] ‘자기(부분적으로) 사유불가능하게 된다. (...) 자기-정립은 따라서 알 수 없는 자기를 포함한다. 이 기묘한 자기는 초월적 장 내부로 경도된다. (...) 미규정성이 자리를 잡게 되고, 그 누구도 그것을 몰아낼 힘을 가지지 않는다(늘 그렇듯이, 나는 불법점유자를 옆에 끼고 있다). (...) 이 시간적 색조는 이 기묘한 자기와 초월적 장의 다른 모든 구성요소들과 흡사하게 물든다. 하나의 유령이 이 복합체를 쫓아 다닌다. (...) 논리적 규정성, 동일성의 형식, 그리고 지향적인 가동성을 향한 지속(durée)의 적대감은, 칸트가 모든 곳에서 유지하려고 하는 논리적 규정성으로부터 그것을 멀리 떨어트려 놓을 때, [오히려] [칸트]의 건축물 전체를 위협한다. 자기-반성에 관한 칸트의 보다 복잡한 분석, 즉 논리적 규정성에 가장 강력하게 반하는 그것은 지속적 연속성(durative continuity)의 특유한 성격에 집중한다.

 

[354]자기-정립의 교설에 관한 그 저작의 노고는 시간이 직관에 제한될 수 없다는 것, 즉 그것이 단순히 내적 지각의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한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내부가 더 이상 외부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칸트가 시간을 신체로부터 그리고 주체성의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면, 그것은 몇몇 내세적으로초월적인 평면 안에 시간을 잡아 놓지 않을 것이다.

 

[354]베르그송은 칸트의 해방 프로그램을 완성하는데, 시간을 모든 과도한 종속과 교조적인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칸트는 시간의 노이즈를 교조적으로 삭제한 것일까? 이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이념들이 이성을 경험의 한계 너머로 몰아 가면서, 그것을 무근거의 테제들을 전진시키는 쪽으로 유혹하기 때문에, 그래서 논리의 이미지연속성의 이미지는 칸트를 무화된 시간으로 끌고 간다. 이 무화된 시간은 그가 비판 프로그램에서 기각한 것이기도 하다.

 

[354]만약 그것이 위상학적으로 사소해 보인다, 그것은 칸트가 시간의 형식이 공간의 형식과 동형적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즉 시간은 모든 곳에서 일관되고, 단순하게 연결된다. 베르그송과 더불어 들뢰즈는 이러한 가정을 거부하며, 따라서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시간은 [355]오로지 지성이 그것을 공간화할 경우에만 동형적으로 드러난다(Bergson 2001: 98). 만약 우리가 지성의 공간화하는 경향을 괄호친다면, 시간은 이질적인 것으로 우리와 마주칠 것이다. 그것은 매 순간마다 스스로를 불규칙적으로 갱신한다.

 

[355]미규정성(indeterminacy)은 편재하며 끈질기다. (...) 사실상 엄밀히 말해 논리적 규정성은 지속의 논리와 양립불가능하다. (...) 지속은 모든 곳에 미규정성을 주입하면서 초월적 장 전체를 형성한다.

 

[355]고전적 논리학의 작동요소들은 이산적이며 우리는 명제(또는 이 일련의 명제들)에 기반하여 논리적으로 활동 한다 오직 이산적 요소들만을 포함한다. 즉 우리는 전체에 접촉함이 없이 어떤 부분에 따라 활동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산성’(discretion)은 지속의 영역에 속하는 논리를 위반한다. 지속의 영역에서는 그 어떤 부분도 전체로부터 말끔하게 분리될 수 없고, 전체는 잠재적으로 각 부분 안에 현전하며, 어떤 하나의 부분에 대한 변화는 즉각 전체의 변화를 이끈다. 고전적 논리학은 어떤 지속의 영역을 쥐어 잡지못한다. 그것은 시간성에 기반하는 그러한 형식적 영역들도 아니고 시간-침윤적인 초월적 장에 의해 모든 것에서 형성되는 물리적 영역들도 아니다.

 

[355]근거 짓는다는 것은 고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356]‘변형[변신]한다’(to metamorphose)는 의미이다(Deleuze 1994: 154). (...) 들뢰즈는 단지 초월적 장이 변형할 수 있다는 만을 논증하고 있지 않으며(그 변형[변신, metamorphosis]은 새로운 생명의 형식들과 집합적 형성물들을 생성시키기 위한 조건이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를 지시하고 있다. 진정하게 근본적인 변형은 우리가 시간과 장소를 취하는 방식에서의 변형, 즉 경험을 형성하는 직관의 형식들(시간과 공간)의 변형 외에 다른 것을 요청하지 않는다(“경험은 언제나 우리에게 공간과 지속의 합성체를 가져다 준다.” Deleuze 1988: 37)

 

[356]칸트는 단지 근본적인 변형의 바로 그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적으로 차단해 버렸다. 즉 범주표와 같이 직관의 형식들도 영원히 고정된다(그것들의 동질성 안에). 그러나 직관의 형식이 연속성을 포함한다는 것은 그것들의 추정된 고정성을 기각시킨다. 경험을 조건짓는 어떤 연속적인 다양체를 허용하는 것은 논리적 규정의 어떠한 확증에 반하여 작용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일반 경제학적 지향을 제안하는 것이기도 한 미규정적 요소를 주입한다. (...) 헛된 유입을 흩어버리고자하는 허망한 희망 안에서, 경험의 원천에 미로의 삼각주들(labyrinthine deltas)을 새겨넣는 것. 마침내 초월적 장으로부터 출현하는 형식적 담론들을 형성하면서, (가 나 자신을 정립할 때) 자기-반성의 행위를 채색하는 미규정적인 색조는 그 너머로 멀리 뻗어 나아간다.

 

[357]만약 수학적 연속체가 온갖 종류의 증상적 구성물들을 인가한다면 이에 따라 수학을 어떤 얼룩덜룩한 비상응체로 만든다면 그래서 지속의 연속체가 더욱 더 많이 초월적인 아나키 상태를 향해 철학을 밀고 나가간다면, 거기서는 오로지 규칙들이 구성 자체에 대해 내재적인 것이다. 우리가 (순수한 시간적 다양체로부터) 어떤 수학적 연속체나 생명의 형식을 구성하든 아니든 간에 그러하다(Wittgenstein 1983: 182).

 

[357]들뢰즈의 경로는 단지 지속적 연속성의 불가능한 풍요로움으로 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은 그 자체 바깥에서 스스로를 시간화할 때, 초월적 장이 어떻게 생생한 경험과 살아 있는 자연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유일한 지도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칸트의 자기-정립에 관한 불가해한 교설에 집중한 것은 옳았다. 그는 결국 생기적이고 물질적인 접합이 초월적 장으로 스스로를 잇닿게 한다는 것을 폭로했다. 그리고 이러한 장의 미로와 같은 특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칸트 체계의 내재적 비판을 열어 젖힌다. 초월적 장의 이러한 상호적으로 변조하는 감응적 측면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따라나오는 것은 그래서 이는 내부외부의 상호얽힘인데, 이것들 간의 문턱은 식별 불가능하게 된다 논리적 규정성을 옹호하는 학파(칸트가 그들 중 하나인)에게 이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나쁘게도, 후자는 아마도 정착되고, 겉으로 윤곽지어진, 암시적으로 잔잔한 형식적 영역으로 쏟아지는 미규정성의 소용돌이와 다투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논리적으로 그리고 수학적으로 어떤 암시적인 차원이 존속하는 것처럼, 우리는 정묘하게 되길 원하는 미규정적 색조들에 의해 채색된다. 그것들은 규정가능하지만 결코 궁극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것들은 지식적으로(epistemically) 미규정적이지만, 본질적으로 미규정적이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또는 누군가는, 양화되어지는 것에 열려 있는 바,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으므로 형식적 영역들을 언제나 사유 안에 받아들여져음미할 수 있는 정적인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27] 그러나 연속성은 이러한 규정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은밀한 차원을 유지하며, 초월적 장에 포함된 비인격적인 생명처럼, 모든 연결망들을 미끄러져 다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