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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퀑탱 메이야수-진행 중인 철학』: 서문(그레이엄 하먼)

by Nomadia 2021. 9. 18.

원문서지: Graham Harman, Quentin Meillassoux: Philosophy in the Making,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1, 1-5

 

서문

 

이 책은 퀑탱 메이야수(‘may-yuh-sue’라고 발음한다)의 철학에 대해 다룬 최초의 단행본 분량의 저술이다. 메이야수는 이제 막 등장하여 가장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는 1967년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아프리카 연구자들[1] 사이에 정평이 나 있는 인류학자인 끌로드 메이야수(Claude Meillassoux, 1925-2005)의 아들이기도 하다. 젊은 메이야수는 울름 가(rue d’Ulm)에 소재한 명문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서 수학했으며, 2012년 소르본 대학에서 자리를 얻을 때까지, 10년 넘게 거기서 가르쳤다. 그의 최초 저술인 유한성 이후(Après la finitude)는 공식적으로는 2006년 초[2]에 출간되었지만, 그 이전 해에 이미 해적판들이 파리의 서점가에 유통되고 있었다. 메이야수의 책은 영어권 대륙 철학 그룹들 안에서 즉각적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최근의 프랑스 사유 전통에 대한 저명한 권위자인 피터 홀워드(Peter Hallward)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데리다의 「구조, 기호 그리고 유희」(1966) 이래 한 새로운 프랑스 철학자가 영어권에 그토록 즉각적인 충격을 만든 경우는 없었다. [...] 기존의 철학에 대한 숭배를 결여한다는 점을 그와 더불어 공유하던 독자들 사이에서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가 그토록 빠르게 숭배에 가까운 대우를 받은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3]

 

메이야수의 탁월한 스승인 알랭 바디우는 유한성 이후의 서문에서 그 책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 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퀑탱 메이야수가 철학사 안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 이 길은 칸트의 공식적인 구별, 독단주의’, ‘회의주의’, ‘비판이라는 구별과는 이질적인 새로운 길이다.”[4] 메이야수의 미출간된 더 많은 저술들에 기대어, 바디우는 유한성 이후가 일단의 어떤 독특하게 중요한 [...] 철학적 기획에서 나오는 단편이라고 부가한다.[5] 슬라보예 지젝은 유한성 이후를 쓴 퀑탱 메이야수야말로 [오늘날 유물론의 위상을] 가장 합당한 측면에서 표명하는 철학자이다라고 말한다. 바디우와 지젝이 메이야수의 입장과 몇몇 공유 지점이 있다는 면에서 그들의 중립성이 의심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메이야수가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가 주최한 살롱 모임에서 그의 책을 토론할 때, 그는 상이한 철학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조차 깊은 인상을 주었다. 라투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메이야수는 탁월했다. 그는 세 시간을 멈추지 않고 말했으며, 급기야 나는 그에게 그치라고 해야 했다. [...] 그는 자연스러웠으며,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쾌활하기도 했다. [...] 모든 사람들은 상당히 즐거워했으나,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7]

 

우리 시대의 가장 저명한 사상가들 중 몇몇의 강력한 지지가 메이야수의 첫번째 책에 쏟아졌다. 게다가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그의 위대한 충격은 확실히 존재했다. 하나의 책이 영미 대륙 사유의 최신 사조에서 동조자들과 비판자들 모두에게 중심적인 기념비로 취급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파리로부터 들어온 이 책이었다. 프랑스어 판본이 나온 해에, 유한성 이후는 철학에서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의 구성을 촉진시켰으며, 그 책에 대한 수많은 블로그 글들을 양산했다. 한 삶의 작가이자 동료로서 친근함을 가진 그의 분명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메이야수는 빠르게 어떤 신비로운 지식인과 같은 인물이 되어갔다. 이러한 현상은 바디우가 신성한 비실존(L’Inexistence divine)이라고 소개했던 상당 분량의 미간행된 철학 체계에 관련된 루머로 인한 측면이 크다. 그러나 그의 논쟁적인 핵심 개념을 둘러싼 모든 것에 신비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의 개념들은 이미 철학적 어휘 목록에 기재되었으며, 아마도 영원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상관주의’(correlationism)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메이야수가 지난 세기 대륙 철학의 지배적인 존재론적 전제에 붙인 이름이다. 대륙철학의 전통 안에서 작업하는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실재론(‘실재는 우리 정신 바깥에 존재한다’)과 관념론(‘실재는 오직 우리 정신 안에만 존재한다’) 사이의 전통적인 논쟁 너머에 서 있다고 표명해 왔다. 상관주의적 대안은, 그 신봉자들에게서조차 말해지지 않고 남아 있을 정도로 지배적인데, 그들은 우리가 세계 없는 인간도 인간 없는 세계도 생각할 수 없다고 가정할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관계 또는 원초적 상관성 또한 가정한다. 인간과 세계의 상관성 바깥에서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의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상관주의는 어떤 관념적 입장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결국 인간이 언제나 이미 세계나 그 비슷한 것 안에 침잠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초-인간적 실재(extra-human reality)가 관념적 경향 안에서 거부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상관주의의 뿌리는 칸트(비록 메이야수가 현재는 흄이 첫 번째 상관주의자라고 말하고 있지만)의 비판 철학 안에 놓이기가 가장 쉽다. 그것은 1780년대와 1790년대 동안 대중화된 것이지만, 2010년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철학의 지평을 형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칸트의 입장은 두 가지의 간단하지만 중요한 함축을 가진다. 첫 번째는 인간 지식의 기본적 한계이며, 이는 메이야수의 책 제목인 유한성 이후가 공공연히 기각하는 바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물자체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없으며, 세계에 대한 우리의 파악의 초월론적 조건들에 대한 반성에 제한된다. 공간, 시간 그리고 지성의 12가지 범주들이 그것이다. 반대로 메이야수는 절대적 지식이 칸트와 그의 상관주의의 탁월한 계승자들인 후설과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바에도 불구하고 인식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메이야수가 충실히 수용하는 칸트의 입장에 관한 두 번째 함축이 있다. 대부분의 포스트-칸트주의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메이야수는 교조적형이상학, 즉 세계에 대한 우리의 능력을 아프리오리한 측면에서 비판함이 없이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진술들을 만들어내려는 그러한 형이상학을 칸트가 비판했다는 점을 높이 산다.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상관주의 논증의 형태는, 칸트 자신보다 더더욱 멀리 나아가는데, 다음과 같이 거칠게나마 말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사유 너머의 어떤 것을 생각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에 따라 그것을 사유 안으로 들여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증이 애초부터 논파불가능할 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발견한 철학자는 본래의 사변적 실재론자들 가운데 메이야수가 유일하다. 그의 관점에서 세계와 인간의 상관주의적 순환은 어떤 사소한 실수거나 언어 게임이 아니라, 모든 엄격한 철학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사유 바깥을 교조적으로 기술했던 칸트 이전으로 도약할 수 없다. 대신에 세계와 사유의 상관성은 그 안에서 급진화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철학의 다음 단계는 일종의 내부 사건’(inside job)인 것이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간적 관계는, 메이야수가 사유에 독립적인 사물/사태가 존재함에 틀림없다는 증명을 시도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생명 없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 너머에 철학적 우선성으로 남아 있다. 지식을 가진 인간 주체는 세계 안에서 특별한 존재이며, 라이프니츠, 화이트헤드, 그리고 들뢰즈와 같이 인간과 비인간의 경험 간에 단지 정도의 차이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럼에도 메이야수는 인간-세계의 상관성이 권리상 절대적인 어떤 것이라는 식의 하이데거적 노선으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대신에 그는 칸트와 헤겔 사이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으려고 한다. 즉 그는 강한 상관주의라고 지칭되는 입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절대적 관념론과 어떻게 다른지 기술한다. 메이야수는 그렇게 함으로써 강한 상관주의를 그 자신의 새로운 입장, 즉 사변적 유물론으로 급진화하려고 시도한다.

 

역순으로 요약하자. 칸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견지한다.

a. 인간-세계 관계는 철학의 중심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사유함이 없이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b. 모든 인식은 유한하며, 그 자체의 실재를 파악할 수 없다.

 

메이야수는 (a)를 긍정하는 반면, (b)를 거부한다. 하지만 내 책의 독자들은 칸트에 대한 나의 반응이 정확히 그 반대라는 것, (a)를 거부하고 (b)를 긍정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철학적 관점에서 인간-세계 관계는 중심에 놓이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생명 없는 대상들조차 그 자체 존재하는 바, 서로 간에 파악되지 않는다. 즉 유한성은 인간 주체에 붙어 다니는 단지 국부적인 유령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들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관계들의 구조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본서는 메이야수의 철학에 대한 해설이 주된 내용이며, 그의 입장과 내 자신의 입장 간의 비판적 대결은 대체로 4장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지 않은 곳에서, 나는 이 탁월한 새로운 사상가, 즉 이미 숭배적인 지지자들과 중상모략가들 모두를 발생시킨 이 사상가를 변호하는 것에 동조할 것이다.

 

이제 퀑탱 메이야수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많은 독자들이 그를 오늘날 가장 독창적인 작업을 해내고 있는 철학자 중 하나로 간주하는지 명확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순차적으로 이 책의 부제인 진행 중인 철학에 대해 한 마디가 있어야 한다. 현재 이래 십 년이나 오십 년 안에 메이야수가 어떤 다른 책들을 등장시킬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지난 날들의 죽은 고전적 사상가들이나 살아 있는 노년의 사상가들에 대해 쓰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메이야수에 대해 쓰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어떤 완성된 철학과 달리 메이야수의 철학은 문자 그대로 진행 중인 철학이다. 이 개념을 나는 라투르의 저작으로부터 빌어 왔다.[8] 과학과 행동(Science and Action)[9]에서 라투르는 기성 과학’(ready-made science)진행 중인 과학’(science in the making)을 구분한다. 전자는 기존의 과학적 사실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이전에 존재했던 무지의 밤과 비교하여 그들의 합리성을 찬양한다. 그와 같은 기존의 사실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며 결코 열리지 않는 블랙 박스가 된다. 이에 따라 어떤 뒤얽힌 역사와 내적인 조직화를 은폐한다. 라투르가 논한 바에 따르면, “블랙박스를 열려는 불가능한 과제가 누군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바삐 작업한 논쟁적인 주제를 발견할 때까지 시공간 안에서 움직임으로써 (쉽지는 않지만) 해결 가능할 듯한 것이 된다.”[10] 현재의 경우에 이 책이 출간된 타이밍은, 메이야수의 블랙박스는 지금껏 결코 닫힌 적이 없었으므로, 이미 열린 것이라는 점을 보증한다. 43살의 퀑탱 메이야수의 철학 전집과 같은 것은 있을 리가 없다. 이 책을 쓰는 지금(201010)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앞으로 출간될 다른 저작들과 더불어, 출간된 유한성 이후와 미출간된 신성한 비실존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최근의 연구에서 흥분되는 부분은 내가 창발의 한 가운데에 놓인 젊은 철학자의 바로 그 심오한 사유를 알아 본 것이다. 여기에는 확실히 곤혹스럽거나 경고하는 것 둘 모두의 가능성이 있다. 가장 고독한 시간 속에 있는 니체에게 용기를 주거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보다 허약한 논증들에 논평을 가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또한 그들이 무덤을 넘어와 오늘날의 비판에 대해 응답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메이야수는 다른 어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고 논쟁할 수 있을 것이다.

 

[1] 아버지 메이야수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마히르 사울(Mahir Saul)이 쓴 끌로드 메이야수(1925-2005)”에 나와 있다. 이것은 미국 인류학(American Anthropologist) vol. 107, no. 4, December 2005, pp. 753-7에 실려 있다.

[2] Quentin Meillassoux, Après la finitude. Translated into English by Ray Brassier as After Finitude.

[3] Peter Hallward, 미출간 수고. 홀워드의 승인 하에 인용.

[4] Alain Badiou, ‘Preface’, in Meillassoux, After Finitude, p. vii.

[5] Ibid.

[6] Slavoj Žižek, ‘An Answer to Two Questions’, in Adrian Johnston, Badiou, Žižek, and Political Transformations: The Subject of Change, p. 214.

[7] Bruno Latour, 개인적 담화 중, 21 February 2007.

[8] 라투르 자신은 이 구절을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제목, 진행중인 종교(Religion in the Making)에서부터 따왔다. 이 책에서 나는 그것을 완전히 라투르적 의미에서 이해한다.

[9] Bruno Latour, Science in Action

[10] Ibid., p.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