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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파리 코뮌-마르크스, 마오, 내일>_알랭 바디우

by Nomadia 2021. 5. 26.

원문출처: Alain Badiou, ‘The Paris Commune: Marx, Mao, Tomorrow’, Monthly Review Vol. 73. no.1, May, 2021.

https://monthlyreview.org/2021/05/01/the-paris-commune-marx-mao-tomorrow/

 

파리 코뮌-마르크스, 마오, 내일

 

알랭 바디우

 

파리코뮌 일러스트레이션. 카셀(Cassell)의 『영국사』(1900)에서 인용.

1871, 칼 마르크스는 국가를 총체적으로 의문시한 파리코뮌에 대한 설명을 내 놓았다. 그에게 파리코뮌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전체 사회의 방향 또는 관리에 있어서 그 과도적인 역할을 맡은 첫 번째 역사적 사례가 된다. 코뮌의 주도적 행위들과 난관들로부터 그는 국가 기계가 취해지거나 점령당하는것이 아니라 파괴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분석의 주요한 결점이 18713월과 5월 사이, 당시에 널리 통용된 권력에 관한 의문이었다는 그 생각에 아마도 놓여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도록 하자. 따라서 흔해빠진 것이 되어버린 그러한 끈질긴 비판들이 있다. 즉 추측컨대 코뮌이 결여하고 있었던 것은 의사결정의 능력이었고, 만약 즉시 베르사이유로 진군했더라면, 만약 프랑스 은행(Bank of France)의 금을 손에 쥐었다면 등등. 내 생각에 이러한 만약들은 실재적인 내용을 결여하고 있다. 사실 코뮌은 그러한 것들을 적합하게 표명할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또한 십중팔구 그것들에 도달할 수단도 없었다.

 

마르크스의 설명은 사실 모호하다. 한편으로 그는 국가, 보다 정확히 말해 민족국가를 해소하도록 이끄는 것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을 상찬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다음을 주목한다. 즉 시민의 직접무장에 따른 코뮌의 직업군인 폐지, 선거와 공직자들의 탄핵가능성과 관련된 모든 조치들, 마침내 집행과 실행 능력에 따른 권력의 분할로 가는 것, 그리고 코뮌 국제주의(코뮌의 재정 대리인은 독일이었고, 군대의 지도자는 폴란드인이었다 등등).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무능력, 즉 실재로는 국가적인 무능력(incapacités ètatiques)을 비난한다. 즉 코뮌의 허약한 군사적 중앙집중화, 재정적인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있어서의 무능력, 그리고 민족문제와 관련한 흠결, 즉 다른 도시들에 대한 코뮌의 태도, 프로이센과의 전쟁, 그리고 지방의 인민들을 집결시키는 것에 대해 말했거나 말하지 않은 것들.

 

20년 후, 마르크스의 재간행된 새로운 텍스트 1891년 서문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동일한 방식으로 코뮌의 모순들을 공식화한다. 그는 사실상 1871년 운동의 두 가지 지배적인 정치권력, 즉 프루동주의자들과 블랑키주의자들이 그들의 뚜렷한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을 수행하는데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블랑키주의자들은 소수의 단호한 사람들이 권력을 획득하여 노동대중들의 이익을 위해 그 권위를 활용하고자 한 무장한 음모주의자들의 과도하게 중앙집중화된 집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그들은 어떤 자유로운 코뮌의 연합체와 국가관료제의 파괴를 주장하는데로 나아갔다. 프루동주의자들은 생산수단의 그 어떤 집단적 전유에도 공포를 느꼈으며 그래서 소규모, 자기-관리의 기획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에는 대규모 산업을 이끌기 위해 거대한 노동자 연합의 구성을 지지하게 되었다. 엥겔스는 이로부터 매우 논리적으로 코뮌의 허약함이 사실상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형식들이 국가적인 의사결정에 부적합했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양극의 대립이 매우 단순하게도 블랑키주의와 프루동주의에 있어서는 최종적인 것이었고, 이것은 하나의 단일한 마르크스주의로 가는 길을 닦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71, 그리고 훨씬 이후, 그러한 상황을 위해 표명했던 것이 현재에 적합한 것은 무엇인가? 그에 따라 코뮌에 부여되었다고 당연시되는 헤게모니에 특별한 수단들은 어떤 것인가?

 

문제가 되는 사실은 마르크스의 해명의 모호성이 사회-민주주의적 성향과 그것의 레닌주의적 급진화 둘 모두에 의해, 즉 한 세기 동안 정당의 필수적인 주제 안에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상 사회-민주주의, ‘노동계급의 당 또는 프롤레타리아의 당 그리고 마찬가로 공산주의정당은 동시에 국가와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지고 권력행사는 필연적이 된다. 주체적인 지지 이데올로기적 균열(rupture) - 의 의해 구성되는 그리고 그 자체 국가에 외부적인 것은 바로 순수 정치조직이다. 지배의 측면에서 그것은 자유롭다. 그것은 혁명 또는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그러나 정당은 중앙집중적, 훈육적 능력을 가진 조직기구이며, 이는 전반적으로 국가권력을 획득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정당은 새로운 국가체제라는 주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국가를 포괄한다.

 

따라서 당은 마르크스의 코뮌에 대한 해명의 모호성을, 그것에 신체를 부여함으로써 실현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 그것은 비국가, 심지어 반국가, 해방적 정치의 특성과 정치의 승리와 지속에 관한 국가주의적 특성 간의 근본적인 긴장의 정치적 자리가 된다. 게다가 이것은 그 승리가 반란적이든 선거에 따른 것이든 상관 없는 경우이다. 그것의 정신적인 도식은 동일하다.

 

이것이 정당-국가의 형상이 발생하게 되는 (특히 조세프 스탈린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이유이다. 정당-국가는 코뮌이 미해결로 남겨 놓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획 능력을 부여받는다. 경찰력과 국방력의 중앙집중화, 부르주아적인 경제적 결정의 완전한 파괴, 노동자 헤게모니로의 농민들의 귀속과 복종, 강력한 인터네셔널의 창조 등등.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레닌이 볼셰비키가 권력을 획득한 날 눈이 내리는 날 춤을 추었다는 것과, 파리 코뮌의 운명이 72일을 경과하여 마감된 그 전체 운명적 사건들은 괜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정당-국가가 코뮌이 해결할 수 없었던 국가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공할지라도, 그런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코뮌이 판별할 수 없었던 여러 정치적 문제들을 극복했는지 못했는지에 대해 묻는 것이 남는다.

 

어떤 경우에 충격적인 것은 회고적으로 정당-국가를 통해 사유되는 바, 코뮌이 두 가지 매개로 환원 가능하다는 것이다. 첫째, 그것의 사회적 결정(노동자들)으로, 그리고 둘째 권력의 영웅적이지만 불완전한 행사로. 결과적으로 코뮌은 모든 적절하게 정치적인 내용들을 결여하게 된다. 그것은 확실히 기념되고, 환영받으며 주장되지만 국가권력의 사회적 본성의 표현을 위한 어떤 순수한 지점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코뮌이 구성하는 것 전체라면, 그때 코뮌은 정치적으로 퇴행적이다. 실바인 라자루스(Sylvain Lazarus)가 스탈린주의 정치 양식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던 것에 따라 논하자면, 정치학의 특유한 장소가 정당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기념(commemoration)이라는 것이 코뮌의 재생을 폐지하는 일을 일으키는 이유이다.

 

이런 점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전후에 브레히트는 분별있게도 사회주의독일로 돌아오는데, 거기에는 소련 군대가 진주해 통치하고 있다. 그는 1948년 동안 스위스에 있으면서 해외로부터 상황에 대한 소식을 듣고 출발하게 된다. 체류기간 동안 그는 애인인 루트 베를라우(Ruth Berlau)의 도움으로 당대의 역사적인 연극인 코뮌의 나날(The Days of the Commune)을 쓴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유명한 영웅들과 긴밀하게 엮여 있는 견고한 문서기록적인 작업이다. 이 작품은 서사적이라기보다 서정적이고 희극적인 연극이다. 내 생각에 이 연극은 아주 드물게 공연됨에도 불구하고 훌륭하다. 이제 독일에 도착한 이래, 브레히트는 당국에 코뮌의 나날을 무대에 올리자고 제안하게 된다. 그런데 1949, 당국은 그와 같은 연극공연이 시의적절치 않다고 의문스러운 주장을 한다! 사회주의가 동독에서 승리를 구가하며 수립되고 있을 때, 코뮌와 같은 프롤레타리아적 의식에 관한 난해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로 되돌아갈 어떤 이유가 있을리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브레히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스탈린이 레닌주의를 당에 대한 숭배로 환원하면서 - “승리한 혁명의 시기에 관한 마르크스주의로 규정했기 때문에, 실패한 혁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긴 해도 브레히트의 코뮌에 대한 해석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 코뮤나르드들의 결단이라는 제목이 붙은 마지막 세 개의 구절들을 읽어 보자.

 

생존 임금을 우리에게 지불하라고
당신을 설득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우리는 당신에게서 공장들을 빼앗을 것을 결심한다
당신의 손실이 우리의 이득임을 알기에

우리의 통치자가 약속한 그 모든 것에
우리가 의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우리는 우리를 위해 좋은 삶을 자유롭게 시작할 것을 결심한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감독 하에 건설되어야 한다

대포의 울부짖음은
우리가 당신에게 말해 줄 유일한 단어들임을 깨닫고
우리는 당신에게 우리가 우리의 교훈을 배웠다는 것을 증명한다
미래에 우리는 당신에게 총부리를 겨눌 것이다.

 

명백하게도, 여기서 일반적인 틀은 고전적인 해석의 그것이다. 코뮌은 사회적인 것과 권력의 결합으로, 물질적 만족과 대포들의 결합으로 등장한다.

 

중국에서의 재생

문화혁명 시기에 그리고 특히 1966년과 1972년 사이에 파리 코뮌은 중국의 마오주의자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면서 재생되었다. 마치 정당-국가의 강력한 위계에 사로집힌 것처럼 그들은 1017일 혁명과 공식적인 레닌주의 바깥에서 새로운 참조지점을 찾았다. 따라서 마오 자신에 의해 아마도 대부분 쓰여졌을 19668월의 문화혁명 16에는 파리 코뮌으로부터 영감을 얻으라는 권유가 담겼다. 특히 대중운동에서 출현한 새로운 조직의 지도자들에 대한 선거와 소환과 관련해서 그러했다. 19671, 혁명적 노동자들과 학생들에 의한 상하이 지방정부의 전복 이후, 새로운 권력 질서가 상하이 코뮌이라는 바로 그 이름으로 구성된다. 이 이름은 몇몇 마오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당의 스탈린주의적 형식에 의해 규격화되었던 것이 아닌 어떤 양식 안의 권력과 국가에 관한 질문과 연결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불안하다. 이것은 권력이 획득되고 그것이 그러한 지방 자치 권력의 새로운 조직을 설립하려는 명령을 발할 때, 코뮌이라는 이름이 즉시 폐기되고, 혁명 위원회(Revolutionary Committee)라는 불명확한 이름으로 대체될 때 목격될 수 있다. 이는 또한 1971년 중국에서 코뮌 백주년 기념식에서도 목격될 수 있다. 여기서 그 기념식은 그저 기념하는 것 이상을 포함했는데, 그것은 여전히 어떤 재생(reactivation)의 요소를 품고 있었으며,그것은 대규모 시위에서 증명된다. 수 만명의 인민들이 중국 전역에서 행진한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혁명의 막간극은 막을 내린다. 이는 당시의 공식적으로 출판된 문건 안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 문건은 우리들 중 몇몇이 그때 읽었고 그보다 더 적은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으며, 다시 읽을 수 있다(아마도 중국에서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문제의 그 문건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승리여 영원하라! 파리코뮌 100주년을 기념하며였다.

 

그 문건은 완연히 양가적이다.

 

중요하게도 그것은 코뮌의 시기에 마르크스에 의해 쓰여진 한 공식을 에피그라프(epigraph)로 쓰고 있는데, 그것은 코뮌이 파괴될지라도, 투쟁은 단지 연기될 뿐이다. 코뮌의 원칙들은 영원하며 파괴불가능하다. 그것들은 노동계급이 해방될 때까지 매번 나타날 것이다이다.

 

이 에피그라프의 선택은 1971년에조차 중국인들이 코뮌이란 단순히 어떤 영광스러운 (그러나 낡은) 노동자 반란들의 역사적 에피소드가 아니라 재개되어야하는 원칙들의 역사적 제시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언급에 반향하는 어떤 말, 아마도 마오의 것일 다음을 들어 보라. “문화혁명이 실패한다해도, 그것의 원칙들은 여전히 나날의 일정으로 남을 것이다.” 이것은 문화혁명이 그 영향력을 확장하여 191710월보다 코뮌에 더 많이 연결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가리킨다.

 

코뮌의 정당성은 마찬가지로 그것의 기념의 내용에 의해 명백해졌다. 여기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지도자들에게 반대한다. 예를 들어,

 

세계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적 인민들이 파리 코뮌의 위대한 백주년을 만들어 가는 그 시간에, 소련 수정주의 배신자 도당은 “코뮌 원칙에 대한 충성” 운운하면서 가식을 떨고, 스스로를 파리 코뮌의 계승자로 만들려 한다. 이것은 부끄러운 짓일 뿐이다. 소련 수정주의 도당들이 파리 코뮌에 대해 말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그 문건이 코뮌과의 연속성 안에 마오의 기여, 그리고 특히 문화혁명 자체, 이 두 가지 모두를 위치 짓는 것은 바로 창조적이고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반동적인 국가주의 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라는 바로 그러한 틀 안에서이다.

 

마오 주석 자신이 시작했고 이끈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문화 혁명의 일제사격은 변절자이자 배신자이며 옴벌레인 류사오치(Liu Shao-chi)가 주도한 부르주아 본부를 박살냈으며, 제국주의자들과 근대 수정주의자들이 중국에서 보존하기를 꿈꾸던 것들을 폭파시켰다.

 

마오 주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사적 경험이 가진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들을 폭넓게 종합하면서,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마르크스-레닌의 이론을 방어했으며, 발전시켰고,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 강화와 자본주의의 회복을 금지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해결했다.

 

자본 공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파리 코뮌을 내세우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단순한 국가주의적 공식이 될 수 없고 대중의 혁명적 움직임에 기대어 공산주의의 필연성을 향한 전진을 추동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역사상 처음으로 일을 수행한 1871318일의 파리 노동자들처럼, 그것은 지속 혁명의 경험 안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새로운 형식들을 발명하기 위한 필연성으로 이해된다. 일찍이 보다 많은 마오주의자들이 이미 문화혁명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관해 최종적으로 발견된 형식임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국가를 절합하는 일반 개념은 바뀌지 않은 채 남았다. 기존에 시도된 파리 코뮌의 혁명적 재생은 앞선 설명에 기술되었다. 그리고 특히 그것은 당의 후견인적인 형태에 의해 여전히 지배된다. 이것은 앞에서 보여진 바, 명백히 코뮌의 흠결이다.

 

파리 코뮌의 근본적인 실패 원인은 역사적 조건에 기인하는 바, 마르크스주의가 그때까지 아직 노동자 운동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지도적 이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혁명 정당이 아직 존재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 역사적 경험은 대중들의 부분에서 매우 선호할만한 혁명적 상황과 혁명적인 열광이 존재하는 지점을 보여주며, 그것은 여전히 프롤레타리아트 지도력의 강력한 핵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그것은 “혁명 정당으로서 (...)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 이론에 기반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 스타일에 따라 건설된다.”

 

당에 관한 이 마지막 인용이 마오에 따른 것이라 해도, 이것은 쉽사리 스탈린의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이는 그 행동주의와 투쟁성에도 불구하고 코뮌에 대한 마오주의적 해석이 궁극적으로 정당-국가 프레임, 내가 첫 번째 해명’(first account)이라고 불렀던 것에 긴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전적 해석의 개괄의 끝에서, 그리고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중에, 우리는 오늘날 파리 코뮌의 정치적 가시성(visibility)이 전혀 명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적어도 만약 우리가 오늘날로 의미하는 바가 우리가 국가에의 종속 바깥에서, 그리고 정당들 또는 당의 틀 바깥에서 정치학을 사유하려는 도전을 취해야 할 그 순간이라면 말이다.

 

그렇다 해도 코뮌은 정치적인 장면, 정확히 말해 그 자신을 그와 같은 종속이나 틀거리 내에 위치시키지 않았던 장면이다.

 

따라서 고전적 해석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정치적 사실들, 코뮌의 결정들과 씨름하면서 완전히 상이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좌파란 무엇인가?

우선 코뮌 이전에 변증법적으로 국가권력에 관해 질문했던 프랑스에서 꽤 알려진 거의 무장한 노동자 운동들이 다수 있었다는 것에 주목하자. 우리는 권력에 관한 질문이 드러나지 않고서 사유된 18486월의 끔찍한 날들을 지나칠 수 있다. 궁지에 몰리고 파리로부터 노역장으로 쫓겨난 노동자들은 지도부 없이, 전망도 없이 조용히 싸웠다. 절망, 분노, 학살들. 하지만 18307월의 영광스러운 3(Trois Glorieuses)과 찰스 5세의 몰락도 있었다. 18482월과 루이 필립의 몰락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87094일과 나폴레옹 3세의 몰락이 있었다. 40년 간의 기간동안 젊은 공화주의자들과 무장한 노동자들은 두 명의 군주와 한 제국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대작인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 프랑스 내전에서 썼던 바, 프랑스가 고전적인 계급투쟁의 땅으로 생각되는 이유이다,

 

1830, 1848, 그리고 1870년과 관련하여, 우리는 그러한 연대들이 어떤 근본적인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사적이면서 더더욱 근본적인 것이다. 대중 정치 운동은 상당부분 프롤레타리아적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운동의 마지막 결과가 공화주의자 도당들이나 오를레앙파 정치가들의 권력의 도래를 포함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수용이 있다. 정치학과 국가 간의 간격은 여기서 분명해진다. 정치 운동의 의회적 투사(projection)는 사실상 국가에 관한 정치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러한 무능력이 중기적으로 운동 자체의 실패로서 경험되는 것이지, 국가와 정치적 발명 간의 구조적 간격의 대가로서 경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주목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 테제는 주체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운동 내부에 면면히 흐른다. 즉 거기에는 정치적 대중 운동과 그것의 국가주의적인 기조 간의 연속성이 있거나 또는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되풀이되는 배신의 주제(즉 권력을 가진 정치가들은 정치적 운동을 배신한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다른 의도, 사실상 다른 어떤 기능을 과연 가졌던 것인가?) 그리고 매번 이 가망없는 배신의 모티브가 자주 오랜 기간동안 정치 운동의 청산을 이끈다.

 

이것이 가장 흥미로운 것 중 하나이다. 19685월의 대중 운동과 그것의 좌파적경과는 1981년 이전에 이미 프랑수아 미테랑의 목표를 따라 가는 것으로 전락했다. 더 오랫동안 여전히, 늙은 정당들이 드골의 보호 아래에 권력으로 복귀했을 때, 1940년과 1945년 간의 근본적인 새로움과 저항운동의 정치적 기대치는 해방 이후 거의 남지 않았다. 오늘날 주변부 운동주의’(movementism) - 연금법 개정에 저항하는 노조의 운동, 노동법 개정에 대한 누이 드부 운동(nuit debout movement)으로부터 노란조끼 운동에 이르기까지 는 오로지 우리 시대의 프랑수아 올랑드(François Hollandes),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s) 또는 장-뤽 멜렝콩(Jean-Luc Mélenchons)만을 탄생시켰다. 이 모든 창조물들은 코뮌의 암살자들로서의 일을 계속하며, 쥘 파브르(Jules Favres), 쥘 시몽(Jules Simons), 쥘 페리(Jules Ferrys)(앙리 길맹은 쥘의 공화국이라고 부른다)를 공화국의 창립자로 계속 기념했다. 그 다음으로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와 에른스트 피카르드(Ernest Picards)가 기다린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좌파의 재건을 촉구한다.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코뮌은 예외적인 것으로 나선다. 코민은 외회와 대중운동과 노동자들의 정치운동의 민주적운명과 더불어, 처음으로, 유일하게, 프랑스에서 오늘날까지 실패한 것이다.

 

군대가 물러나 그들이 대포를 손에 쥘 수 없었던, 1871318일 노동자 지구에서의 저항의 저녁에 질서로의 복귀, 정부와의 협상이라는 호소, 기회주의자들의 새로운 도당이 뭉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이 시간은 가당치도 않은 때일 것이다.

 

모든 것은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에 의해 제기된 것 안으로 집중되었다. 그것은 319일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는데,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들, 통치 계급들의 실패와 반역의 한 가운데, 그들은 그 시간이 공적인 일들의 방향을 그들 스스로의 손으로 조절함으로써 상황을 구제하는 일을 해냈다.”

 

이번에, 이 특유한 시간에, 운명은 유능한 정치가들의 손에 되돌아 가지 않았다. 이번에, 이 특유한 시간에, 배신은 하나의 피할 만한 사태로서 야기되었고, 불행한 선택의 단순한 결과로서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번, 이 특유한 시간에 제안은 프롤레타리아적 원천을 기반으로 상황을 다루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실재적인 정치적 선언이 놓여 있다. 이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과제다.

 

그러나 첫째로 어떤 구조적인 정의가 본질적이다. 좌파’, 즉 일련의 의회적인 정치적 인격을, 어떤 특이한 정치 운동의 일반적 결과들을 담지하기 위해 가동되는 유일한 것이라는 주장이라고 부르자. 또는 보다 현대적인 용어로, 그들이 정치적 전망을 가진 사회운동들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부르자.

 

따라서 우리는 1871319일의 선언을 정확히 좌파와의 단절의 선언이라고 기술할 수 있다.

 

코뮤나르드들이 그들 자신의 피를 대가로 치루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적어도 1830년이래, ‘좌파는 대헌장 운동 동안 기존 질서의 유일한 의지처였기 때문이다. 다시, 19685월에 조르주 퐁피두(Georges Pompidou)는 오직 프랑스 공산당만이 공장에 질서를 재수립할 수 있다는 것을 재빨리 이해했다. 코뮌은 이와 같은 경우에 좌파와의 단절에 대한 특유한 예이다. 이것은 지나치면서, 1965년과 68년 간의 중국 혁명가들을 위한, 그리고 1966년과 76년 간의 프랑스 마오주의자들을 위한 패러다임적인 기여로서 1017일보다 훨씬 큰 - 예외적인 덕목에 빛을 비추었다. 이 시기에 임무는 정확히 공산당들이 그들이 권력을 쥐었든 또는 그것에 반대하든 간에(하지만 어떤 근본적인 방식으로 위대한공산당은 언제나 권력을 가진다 - 그리로 돌아갔던 바, 정확히 좌파라는 기초적인 상징에 대한 모든 종속과 단절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코뮌의] 붕괴 이후, 좌파의 기억은 코뮌을 흡수했다. 그러한 역설적인 혼입의 매개는 추방되거나 여전히 감옥에 있는 코뮤나르드들을 위한 특사파견을 위해 의회 전투의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전투를 통해 좌파는 선거 권력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협력에 희망을 가졌다. 그 이후 내가 한 단어로 말했던 바 기념비의 시대가 왔다.

 

오늘날 코뮌의 정치적 가시성은 해체의 과정에 의해 보존되어야 한다. 좌파와 단절되어 나타나 그토록 오랫동안 좌파를 압도했던 좌파 해석학을 축출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동안 우리는 구성적으로 조악한 좌파라는 것이 이제 내가 자본-의회 질서라고 부르는 것을 유지하는데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낮은 곳으로 몰락했다는 사실을 잘 활용하도록 하자. 파리 코뮌에 대한 충실성(Faithfulness)은 상기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사유와 미래의 정치적 발명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