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출처: Federico Chicchi and Emanuele Leonardi, (trans.) Yari Lanci, “Rethinking Basic Income”, Radical Philosophy, 2.09 (Winter 2021), https://www.radicalphilosophy.com/article/rethinking-basic-income
기본소득 다시 생각하기
페데리코 치치(Federico Chicchi)*, 에마누엘레 레오나르디(Emanuele Leonardi)**
이탈리아어 영역: 야리 란치(Yari Lanci)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지난 몇 년동안, 만약 공정한 분배에 맞춰 작동하고, 합리적으로 설계되었다면 과거보다 눈에 띄게 더 적게 일함으로써 우리의 필요를 더 쉽게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 체제에서 살아왔다. 그렇다면 오늘날 노동이 더 이상 사회통합과 불평등의 제거를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점점 더 삶의 시간을 생산 시간으로 변형하도록 강제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본 소득에 대한 우리의 제안이 의미 있게 되고 그것의 실천가능성이 획득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질문과 관련해서다.[1]
기본소득은 세금을 통해 재정이 조달되는 제한 없는 돈이다. 이것은 기존의 정치 공동체에 속한 모든 거주민들에게 분배되며, 수령자들은 그것을 그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자율적이고 존엄한 삶을 살기 위해 충분한 양의 돈을 사람들에게 보장하는 것을 겨냥한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여전히 충분히 정의되지 못한 상태다. 기본소득은 그것이 정착되는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즉 그것은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본주의 사회의 탈상품화 과정 안에서 수용될 경우에만 바람직하다. 이런 의미에서 첫째, 기본소득은 빈곤과 싸우기 위한 다른 공공 정책들과 혼동되거나 중첩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화된 ‘열성’(industriousness)[2]의 착취라는 새로운 형식에 대항하는 투쟁의 수단이 된다. 여기서 ‘열성’은 노동계약 상 공식적으로 조정되고 필수적으로 보상결정되는 것과는 상관 없이 수행되는 협업적 그리고/또는 생산적 실행 전체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만약 적절하게 디자인된다면, 기본소득은 노동자들의 존엄성을 방어하는데 있어서 노동조합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하나의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동시에 이미 니 우나 메노스(Ni Una Menos, 한 명의 여성도 잃을 수 없다)와 같은 페미니즘 운동이 주장했듯이, 주체적인 자기-결정권과 선택의 자유를 증진시킬 수도 있다. 게다가 이것은 매일매일 그리고 모든 곳에서, 국지적으로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반-자본주의 투쟁들을 함께 엮어 낼 가능성이라는 어떤 공통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에, 노동과 그 주체들의 고조된 파편화에 의해 규정되는 한 시대에 통합을 위한 비상하고 본래적인 사명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말해, 기본 소득에 있어서 관건적인 것은 어떤 특수한 공동체에서 빈곤과 부 사이의 양적인 관계에 영향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피착취자와 착취자들 간의 역관계(rapport di forza)를 질적으로 변형하기 위한 기회와 관련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주요 목표는 생산자들의 자율성과 생산의 질적 구성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어떤 영향력, 다시 말해 어떻게, 무엇을, 어디서 그리고 누구를 위해 생산할 것인지에 대한 영향력을 이끌어낼 재량을 가지기 위한 인민의 능력을 촉진하는 것이다. 아래에서 우리는 계보학적으로 그와 같은 기획이 갖추어야 하는 영역을 드러내고자 할 것이다.
포디즘에서의 임금-제도
자본주의는 생산양식으로서, 그 최종 목적은 잉여가치, 다시 말해 자본 생산 과정을 가동하기 위해 진행되어 왔던 것보다 더 높은 화폐량의 경제적 순환이라는 목표의 실현이다. 잉여가치에 대한 발작적 사냥은 사실상 생산의 조직화가 상품의 사용가치(예컨대 사람들이 만족할만한 필수욕구)의 희생에 기반하여 자본 축적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더욱이 - ‘모든 것들이 가격을 가진다’는 것, 따라서 구매된다는 것에 따르는 – 가치의 양적 논리는 – 상이한 공동체들이 자율적으로 그리고 모든 특수한 경우들에서 추구하고자 결정한 잘-삶(well-being)의 다종다양한 경험들에 기반하는 - 실재적인 부에 속하는 질적 논리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다. 달리 말해, 자본가가 무엇에 돈을 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그 결정을 이끄는 기초적인 기준은 생산물의 쓰임새가 아니라 그것의 이윤율이다. ‘무기가 좋은 사업거리를 가져다 주는가? 사림들이 죽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가치론에 대한 연구는 부분적으로 부의 논리의 증식과 겹쳐졌다. 이는 그것이 선형적 과정이었다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이른바 신세계의 식민화와 대량학살을 이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필연적으로 모든 부의 두 원천 즉 자연과 인간 노동력[3]의 고갈을 초래한다는 것은 더욱 더 명백하다. 다른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생산양식과 관련하여 자본주의가 막대하게 넓은 지역과 지구행성을 가로지르는 폭넓은 인구층의 삶의 조건들을 괄목할만하게 증진시켰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발전의 이러한 이중적 측면은 확실히 포디즘 시기 – 서유럽에서, 마샬 플랜으로부터 1970년대의 오일쇼크에 이르는 시기 - 에 출현하며, 사회적 협약은 생산적 자본과 임금 노동을 구별했다(복종을 안정성과 교환함으로써, 봉급 증가는 결정권의 자율성을 갖다 바치는 것으로 상쇄되었다. 따라서 상대적인 번영은 훈육과 교환되었다). 이 과정은 임금-제도화로 정의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사회적 권리의 형성과 대량 소비에 이르는 과정 안에서의 통합은 노동 계급(working-class)이 이제 ‘임금-노동자’(wage-labourer)라는 위상에 의해 보증되었기 때문이다.[4] 그러나 (대개 여성인) 가사 노동, 노예 노동 그리고 환경 관련 문제는 포드주의적인 협약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것이 또한 주목되어야만 한다.[5] 실재로 지구행성에 가해지는 억압은 성장 패러다임과 더불어 극적으로 증가했으며, 이는 GDP를 증가시키는 방식과 관련되는 기술-경영(technico-managerial)의 쟁점들로 소득 분배에 관한 정치적 갈등들을 변형시켰다.[6] 이윤 증가에 손실을 가져오는 임금 인상에 대해 투쟁하는 대신, 이런 방식으로 노동자 운동은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양적 성장 – 즉 생물학적 영역은 제외하고서 - 의 원인을 스스로 승인하는 것의 기초를 잡는다.[7] 임금 노동의 중심성에 기반하고 있는 그와 같은 사회적 협정은 어떤 생산주의 증상(productivist syndrome)라고 이름붙여질 수 있는 것으로, 사회적 재분배와 가치-지향적 경제 발전 간의 연결에 의존한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는 결코 완벽하게 이 모델과 호응하지 않는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포디즘 시기는 임금 제도의 지속성에 대한 심각한 공격의 시기였다. 예를 들어 1960년대 밀라노(Millan)의 전자기기 부문 노동자들의 전설적인 투쟁은 갈등의 순환에 불을 붙였으며 – 이른 바 붉은 10년 – 이는 1977년 볼로냐의 탁월하게 활력있는 저항으로 마무리되었다.[9] 페미니즘 운동은 자본에 의해 여성들에게 부과되는 사회적 ‘재생산’ 기능의 거부와 더불어 그러한 활력에 기본적인 것이 되었다. 보다 특수하게,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이라는 국제적인 캠페인이 기폭제였는데, 이것은 포드주의적 협약에 참여하려는 표면적인 요청 뒤에 재상산의 영역에 관한 폭력적인 예속화라는 보이지 않는 기초를 폭로했다. 돌봄 노동으로 ‘보상 받는다’는 식으로, 집 안의 천사는 어떤 자율성도 거부당했다.[10] 더 심오한 영향력은 1972년 로마 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 출간 이후 불가피한 것이 되어 버린 기후위기에 관한 담론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이는 노동자 운동에 종종 속해 있는 환경주의 그룹들에 의해 공적으로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예컨대 건강과 환경에 대한 중공업의 유해한 영향들에 반대하는 중차대한 투쟁 시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11] 마지막으로, 정치적으로 그 힘을 행사하는 노동자 계급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봉급과 관련된 협상들은 노동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에 반대하는 자유와 노동과 업무에 관해 보다 적은 비인간화 과정을 위한 주장과 함께 가기 때문이다. 훨씬 근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와 다른 투쟁들은 해방적인 노동이라는 단일한 대상에 만족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본을 위한 가치 생산에 대한 저항과 자율적인 행동의 새로운 형식 그리고 부의 협동적 생산이라는 실험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노동의 거부에 찬성한다.[12]
서로 간에 매우 다르다 할지라도, 이러한 투쟁들은 반-자본주의라는 영감과 임금-제도의 전복을 공유했다. 그들은 힘의 관계를 변형시키는데 성공했는가? 확실히 그러지 못했다. 그것은 여전히 살아남아 노동력을 임금화하면서 다그치고, 서구에서 노동의 힘은 축소되며 분쇄되었다. 이러한 투쟁은 전지구적으로 수적으로도 감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어떤 특유한, 애매한 패배다. 한편으로 그것은 가치의 추출을 위한 사회적 실천들의 근본적인 재구성을 포함했는데, 이는 공장에서 그들의 결정적인 모델을 발견하려 했던 바로 그러한 과정들의 재구성이었다.[13] 이것은 공장이 축출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고용과 시민성 간의 연결의 위기가 공장 게이트를 넘어 도시 공간, 나아가 인터넷 디지털의 세계 내부로 변형됨으로써 확산된다는 것이다.
가치와 부의 분리
1980년대에 공장의 사회화 – 새로운 사회 공간과 시간 안으로 그 생산논리의 확장 – 는 자본주의가 광범위해지고, 동시에 가치를 추출하기 위한 그 기초를, 후기-임금 그리고 신-임금 개념을 빌어 싸게 재형성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달리 말하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교섭을 중재했던 사회적 매개다. 이런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생산과 재생산 간의 경계들을 축소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두 가지 사회적 영역들 – 우리가 일과 삶이라고 말하는 그 영역들 – 은 즉각적으로 새로운 가치화의 동력학 안에 들어간다. 이것은 정확히 노동의 불안정화와 여성화를 가리키는 지점, 즉 사회적 재생산의 생산화이다. 자본주의 수탈은 좋건 나쁘건 간에 임금 관계에 의해 유지되는 한계들 너머로 돌진하며, 주체성의 가장 내밀한 측면들조차 침범한다.[14] 이런 관점에서 기본 소득은 쉽게 재생산 소득으로 불리워질 수 있다.[15]
산업사회는 상품을 생산했고 그것을 사회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포스트-포디즘적인 자본주의는 상품형태로 단번에 사회를 생산한다. 우리는 소위 빅데이타가 사람들을 공짜인데가 지속적인 정보의 제공자로 변화시키는 어떤 거대한 상업적 기획으로 변형시켰다는 식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24/7).[16] 하지만 보다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인적 자본과 같은 표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증상적인지를 생각해 보자. 감응들, 관계들, 기술들 그리고 재능들이 오직 사회가 그것들로부터 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경우들에만 인지되고 지지된다는 사실에 우리가 어떻게 적응할 수 있는가?[17] 경제적인 성취에 의해 정당화되는 맹목적인 성공이라는 구속복을 입고서, 여성들과 남성들이 실제적으로 차선책도 없이 연대와 열정의 감각을 상실한채 불구의 주체가 된다. 그들은 브레히트가 말했던 바, 온화함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현행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마주하고 있다. 가치의 논리에 따라 추동되면서, 경제성장은 더 이상 사회적인 잘-살아감(well-being)의 증진을 수반하지 않는 것이다. 사적 이익과 집단적 부는 가차없이 다른 경로들을 취한다.
예컨대 이러한 상황은 과학적이고 문화적인 협력의 분야에서 명확하다. 지식정보는 극히 적은 비용으로 자유롭게 순환하는데, 부분적으로 그것은 P2P 네트워크와 지적 재산권에 힘입은 바 크다. 게다가 정보란 비경합 상품 – 그 공유가 질적 가치를 떨어트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증가시킨다고 알려진 상품 – 이기 때문에, 지식정보는 자동적으로 경쟁적인 것이라기 보다 협력적 실행들을 고무할 것이다. 그것은 사회체를 파괴하기 보다는 공유의 새로운 형식들을 손쉽게 창조할 수 있다.[18] 오로지 거대한 편집 그룹들에 의해 가동되는 지적 재산권과 여타 재산권 기제에 대한 강제 과세만이 이러한 생산물들의 수익성을 보증한다. 자본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두려움을 창조해 낸다. 그럼에도 이러한 경향은 최근에 보다 많은 효과와 더 좋은 질에 관한 전도유망한 상품의 확장에 속하는 것으로서 상품들에 있어서 대상들의 변형에 고유한 것이며 종종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그러므로 가치의 논리는 부분적으로라도 부의 논리와 중첩되지 않는다. 이 둘의 분리에 관한 확증은 [현재로서는] 확실하다.[19]
이는 고르즈(Gorz)가 낙관적으로 믿었던 것처럼, 자본주의가 심연의 가장자리에 있다거나, 우리가 이미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현재로서는 아무 것도 가치론이 풍성해지는 것을 막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그와 같은 논리의 힘이 추진하는 것이 약화되고 있고, 그 내부에서 어떤 새로운 사회적 협약을 위한 잠재적인 공간이 점점 더 작아 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 그런가? 그것은 임금 노동이 그 외의 모든 다른 사회화된 산업의 형태가 기대고 있었던 모델로서 제도적 차원에서 드러나기 위해 그것을 수립하는 구심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지구적인 경제 위기는 이러한 디플레이션을 가속했다. 사실상 몇몇 국가들에서 공식화된 성장이란 그리스나 이탈리아에서처럼 보다 허약한 경제체제에 이식된 긴축 정책들 덕분에 획득된 것인데, 이는 고용률을 뚜렷하게 부양하지도 못했을뿐더러, 오히려 불평등의 보다 다양한 형태들로 연명할 뿐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기본소득이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아닌지 질문함으로써만 그것을 논의하는 것은 이상해 보인다. 물론 정확한 계산을 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에 속한다. 즉 지성의 실험이 실패할 위험성들을 정교하게 계산하면서 따지고, 만약 필요하다면, 그러한 위험을 다루기 위해 계획을 변경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들은, 만약 우리가 그것을 따로 분리해 놓는다면 말도 안되는 것이 될 것이다. 예컨대 여러 미국 은행들이 받아 먹은 공적 구제자금 이 2008년과 2016년 사이에 달러로 세든 유로로 환산하든 간에 수 천억의 ‘투자’에 관한 납세자의 지불을 대가로 했다는 스캔들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노동과 소득: 아주 빠르게 변형되는 관계
따라서 기본소득은 최근 가치가 생산되는 방식과 동일한, 그러므로 노동의 변형에 적합한 정치적 기제이다. 후자는 점점 더 많이 파편화되고 공격 당하지만 – 빈곤 노동자의 특성을 규범화한다는 점에서 – 마찬가지로 디지털 세계와 관련하여 그리고 전지구화된 가치사슬 안에서 점점 더 상호연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단의 적절성 자체는, 그와 같은 수단이 어느정도로 바람직한지는 확실하지 않다. 예를 들어 완전고용은 임금-제도의 황금기에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은 단지 그 부분적인 실현의 효과가 투쟁을 통해 아래로부터 솟아오르게 된 곳에서만 긍정적인 결과들을 산출했다. 이에 대한 예로 우리는 이탈리아의 1970년 노동법 투쟁(the Statute of Workers)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20] 반대로 위로부터 아래로 나아간 예들에서, 완전고용은 순응주의와 사회적 수동성을 만들어냈다. 기본소득이 정치적인 계급 갈등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것에 근거하여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법령들과 같이, 기본 소득도 투쟁을 통해 쟁취될 때 잘 이루어질 것이며, 만약 그것이 자본이 수여하는 식이라면 나빠질 것이다.[21]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기본소득의 잠정적인 도입을 위한 세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다고 논할 것이다.
첫째로 디지털-자본주의 시나리오가 있는데, 이는 최근 실리콘벨리의 거물들에 의해 제기되었고 그 논지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논해질 수 있을 것이다. 즉 만약 제조업 노동이 자동화의 광풍에 의해 사라져 버린다면, 집단적인 온라인 행동이 데이터를 생산할 것인데, 이는 웹 독재자들과 디지털 플랫폼들이 천문학적인 이익을 끌어 내고 있는 것으로부터 그렇게 할 것이다. 따라서 한 줌의 독재자들이 실재적인 생산자들을 먹여살리는 것을 끝장내는 것만이 공정하다. 이러한 주장은 어떤 특정한 주장에 기초해야만 하고, 또는 심지어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대신에 디지털 자본주의라는 기생 모델을 확증한다. 이는 삶과 노동의 사회적 양식들에 기반한 결정적인 힘을 포기하는 대가로 엄청나게 부유한 기업가들로부터 빈곤한 급여를 받아들이는 경우일 것이다.
두 번째 선택지는 사회-민주주의 2.0이라고 불리워진다.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여파로부터 회복되면, 국가는 되돌아와 자신의 일을 할 것인데, 그것은 축적의 체제를 안정화하기 위해(이런 경우 금융에 의해 추동된다) 착취율을 줄이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사회안정과 복종의 교환, 편재하는 생산성의 새로운 형식의 비준, 언제나 표면적으로는 개인화돠지만, 언제나 더 많이 개인 자신들과 동일시되는 소비패턴에 의한 통합, 생산의 질적 조성을 넘어서는 반자율적이고 부적절한 권력이 나타난다. 이는 후기-임금 매개체제에 기반한 어떤 새로운 사회적 협약을 이끌어 낼 것이며, 이 체제는 아마도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후기-대의 민주주의에 의해 운용된다. 우리는 고도의 개량주의에 대해 논하고 있는 바, 이것은 우리가 운 좋게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지만, 그 실현이 어려울 것이라고 믿는 것이기도 하다. 가치의 논리와 부의 논리 간의 분리는 본질적으로 전략적인 여지를 축소한다. 지구행성은 얼마나 많은 경제성장을 여전히 견딜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하게도 사회체에 가해질 수 있는 상품화는 여전히 얼마나 많은가?
우리에게 생산자들의 민주주의와 자율성은 다른 곳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며, 또한 세 번째 종류의 기본소득에 기반해서 건설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어떤 갈등적인 것이다. 어떤 경우에 그와 같은 기본소득은 전통적인 복지국가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될 수 없다. 후자의 경우 임금 노동력에 의해 생산된 가치의 한 부분을 재분배하는 것인 반면, 전자는 편재된 사회적 열성(industriousness[노고들,근면성])에 의해 생산된 가치의 부분을 직접 분배한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 없이 생산적인 사회적 노동의 활동으로부터 유래하는 가치이지만, 임금 노동 협약에 갇여 있지 않으며, 오늘날 네트워크 자본주의와 플랫폼 독점기업들의 예외적 특권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본소득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논의에 따르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해도, 최근까지 여전히 쓸모 있는 사회적 보호기제를 기본소득이 파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커다란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예컨대 갈등적 기본소득(conflictual basic income)의 재원조달은 오늘날 여전히 사회적 권리를 보증하는 자원들의 이전을 포함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새로운 착취 행위를 제한하기 위해, 그리고 사회적 평등에 긴요한 목표를 발견하기 위해, 제한없는 디지털 수익의 군주들(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등)에 대한 세금 부과의 문제일 것이다.[22]
지난 40년 간 비용의 사회화와 수익의 사유화가 이루어졌으며, 이제 이러한 경향이 뒤집어질 시간이다. 이것은 어렵지만 필수적인 도전이다. 복지와 기본소득을 절합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실패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 그 둘의 관계는 보충적인 것으로 수립되어야 하며, 결코 대체되는 것으로 수립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본소득은 처음부터, 우선적인 소득의 형태 안에서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은폐된 사회적 생산성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어떤 장치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 모든 이유들로 인해 기본소득에 대한 고전적 반론 - ‘누구도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고, 무임승차자들이 여전히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와 투쟁에 빌붙어 살아갈 것이다’ - 은 위태롭게 제자리를 도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사치품에 열중하는 부유한 자의 애처로운 도덕주의(moralism)일 뿐만 아니라, 하루벌어 먹고 사는 삶에서조차 거부당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게으르고 부주의하다는 낙인을 찍는 짓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반론은 대개 현대적인 축적이 언제나 더욱 더 지속적으로 비-임금 활동 그리고 비-보상 활동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없는 무능력 때문에 제기된다.[23] 이것만이 다는 아니다. 기본소득은 비참한 노동 – 즉 아무런 봉급을 받지 않느니 모욕적인 봉급을 수용하도록 하는 의무행위 - 의 갈취행위를 약화시킴으로써 사회이동을 위한 관건적인 공간을 열어놓을 것이다. 이 공간은 신자유주의적 노동복지에 의해 추동되는 판본을 징벌적이고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급진적으로 낯설게 만들 것이다. 이는 고용에 대한 현실적이고 능동적인 탐구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현저한 영향을 준다.[24] 집단적 참여에 있어서 이러한 삶과 행위의 방식은 함께 살아 가는 방식들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권리, 게다가 모든 사람들이 욕구를 즐기면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생산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그 자체로 요구하는 것이다.
요컨대 갈등적 기본소득은 두 가지를 행한다. 갈등적 기본소득은, 노동시장이 우리에게 불안정을 떠넘길 때 우리들 중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죄의식[불안정성에 대한 자기귀책-역자]을 해소하는 것은 물론, 임금-노동자(또는 ‘그녀 자신의 경영자’)로서의 참여라는 것으로부터 존엄한 삶에 대한 권리를 해방시킨다. 이것은 우리가, 대개 묘사되는 것처럼 무능한 개인이 아니라 집합적인 생산자라는 것, 우리 삶의 조건들을 증진시키는 자들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 전반적인 영향은 어떤 새롭고 활기찬 자유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어떤 전략적 중심성을 견지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들 때문만은 아니다. 예컨대 노동의 가치절하를 피하기 위해 따라서 효과적으로 그리고 능률적으로 노동자들의 기회들을 기업의 수탈로 되돌리기 위해 상이한 경제 부문들에 대해 통용되는 최저 임금을 도입하는 것은 단지 딱 그만큼만 유용할 뿐이다. 종합하자면 기본소득 더하기 복지는 이윤의 최대치를 넘는 사회적 생산과 동등하다. 더욱이 이 두 제도[기본소득과 복지]는 서로 간에 강화된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부수적인 이슈가 아니라,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이 노동의 불안정 조건과 보조적 소득의 대립 사이에 대한 ‘통합된 접근’의 필요성을 주장할 때 강조하는 그 지점과 동일한 것으로 드러난다.[25] 빈곤 노동에 대한 갈취가 더 강력하게 가해질 때, 산업예비군들의 탈영은 증가할 것이고, 노동조합 협의체는 그들의 협상에서 보다 효과적이 될 수 있으며, 포스트-산업 도시 경제의 새로운 시나리오에 직면할 때 조직화된 창의성을 획득할 것이다(‘생산을 멈추자!’는 그것이 노동의 공동화(emptied)가 증가하는 공장에서, 점점 더 많은 상품들로 채워지는 물류창고에서, 또는 병원, 대학 그리고 쇼핑몰 어느 곳에서 외쳐지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기본소득은 장기적이고 가혹한 파업의 경우 연대 기금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노동자들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저항능력을 강화하는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자원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26] 그 밖에 보다 정당한 노동 시장이 이 기본소득을 사용할 가능성을 확장할 것이다. 이는 또한 임금 노동과 사회화된 열성 노동(industriousness labour) 사이의 실천가능한 다양한 공-현존의 형태들로 바뀌어 간다. 이러한 형태들은 여러 다양한 개인들이 속한 집합적 그룹들 내부에서 자유롭게 실험될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자면, 기본소득은 중요하지만, 착취와 맞서 싸우려는 어떤 미성숙한 프로그램 안에서 자기-충족적 요소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최저임금제 외에도, 그와 같은 [실험]계획은 터무니없이 높은 봉급에 대한 상한제[27]와 노동시간의 과감한 축소를 실행해야만 한다. 이것은 생산자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방향, 따라서 어떻게, 무엇을, 언제, 어디서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생산하는지에 대한 결정의 권리에 관한 민주적 실행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여기에 기본소득의 더 나아간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기본소득이 타자와의 연결에서 활용되는 어떤 중요한 사회적 주장과 반-자본주의적인 여러 전략들을 위한 기폭제 둘 모두를 만들어나가는데 기여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가치의 논리로부터 시간을 잡아 쥐는 기본소득의 능력, 따라서 앞서 말한 생산주의 증상, 즉 우리를 생태적이고 사회적인 붕괴로 이끄는 그 증상의 치유를 표현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니 우나 메노스의 페미니즘 운동이 ‘자기-결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적 갈등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왜곡된 자본주의적 축적 메커니즘에 강제 편입되는 것을 교란할 수 있는 열쇠꾸러미라는 의미다. 여기서부터 서로 대화하고, 서로를 알아 보며, 함께 싸우고 그리고 부의 생산과 재생산에 있어서 약탈적이지 않은 형태들을 고안하는 것이 더 쉬워진다. 여기서 우리의 분석은 멈추어야 하며, 연후 갈등적인 실천들이 되돌아올 것이다.
결론
오늘날, 사회통합과 기본 수요의 충족은 더 이상 임금-제도를 통해, 즉 노동에 따라 제공된소득에 대한 접근권을 통해 배타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없다. 이 영역[임금노동의 영역]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노동에 관한 대안적 형식들이 각각의 개인들과 그들의 집합체가 잘-살아감을 경험하는 방식들의 다양성을 허용하는 어떤 새로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공간과 함께 가야 한다.
이것이 하나의 가능성이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광범위한 사회적 갈등이 필수적으로 재-활성화되어야 하며, 이때 사회적 갈등은 불평등한 것들이 번져나가는 그 경향들을 전복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것이다. ‘갈등’이라는 단어는 제한 없는 기본소득의 이념과 함께 가는 것으로서, 이것이 마치 디지털-자본주의 시나리오가 우리에게 믿게끔 하고자 하는 것처럼, 모두를 위해 ‘납득할 만한’ 선택지는 아니라는 것을 재우쳐 말하고자 한다. 사실상 이것은 한편으로 휘황찬란한 소비 세계 쪽으로의 최소한의 접근에 동의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노동과 사회보장을 훔쳐내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여기 우리의 기고문에서 이해되고 제시되는 기본소득은 신사적으로 요청되지 않고, 집단적으로 강탈당하는 사회의 어떤 한 부분 – 이들은 사회화된 열성[근면성]을 착취당하는 사람들이다 - 에게만 ‘납득할 만’ 하다. 금융엘리트들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화된 대중들로의 강도 높은 재분배과정은 기본소득이 자본주의적인 이윤의 명법에 대항하여 사회적 부의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기어코 성취해야할 필수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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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페데리코 치치는 볼로냐 대학 사회 및 경영법학과 부교수이다. 그는 『칼 맑스』(Karl Marx, 2019)를 썼고, (안나 시모네Anna Simone와 더불어) 『성과사회』(La società della prestazione, 2017)를 저술했다.
**에마누엘레 레오나르디는 코임브라 대학 사회연구소 연구원이자 파르마 대학 사회학과 연구원이기도 하다. 그는 『자연의 가치 노동-맑스주의와 쇠퇴. 앙드레 고즈』(Lavoro Natura Valore. André Gorz tra marxismo e decrescita, 2017)를 썼다.
[1] 이 글은 마르타 파나(Marta Fana)와 시모네 파나(Simone Fana)가 서문을 붙인, 치치 페데리코와 레오나르디 에마누엘레의 『기본소득 선언』(Manifesto per il reddito di base, RomaBari: Laterza, 2018)의 개정판이다. 여기서 이를 번역하도록 허락해 준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2] Federico Chicchi, Emanuele Leonardi and Stefano Lucarelli, Más allá del salario. Lógicas de la explotación (Montevideo: Azafran Editorial, 2019).
[3] Karl Marx, Capital, Volume I (London: Penguin Classics, 1990; reprint of Pelican Books edition, 1976).
[4] Robert Castel, From Manual Workers to Wage Labourers (London: Transactions, 2003).
[5] Emanuele Leonardi, ‘Bringing Class Analysis Back In: Assessing the Transformation of the Value-Nature Nexus to Strengthen the Connection between Degrowth and Environmental Justice’, Ecological Economics 156 (2019), 83–90.
[6] Mathias Schmelzer, The Hegemony of Growth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
[7] Andrè Gorz, Ecology as Politics (Boston: South End Press, 1980).
[8] Claus Offe, ‘A Non-Productivist Design for Social Policies’, in Arguing for Basic Income, Ethical Foundations for a Radical Reform, ed P. Van Parijs (London: Verso, 1992), 61–78.
[9] Franco ‘Bifo’ Berardi, Futurability: The Age of Impotence and the Horizon of Possibility (London: Verso, 2017).
[10] Silvia Federici, ‘Social reproduction theory’, Radical Philosophy 2.04 (Spring 2019), 55–57.
[11] Lorenzo Feltrin, Book review of Quando il potere è operaio:
autonomia e soggettività politica a Porto Marghera (1960-1980), Toxic News (2019),
https://toxicnews.org/2019/05/28/bookreview-quando-il-potere-e-operaio-autonmia-e-soggettivitapolitica-a-porto-marghera-1960-1980-edited-by-devisacchetto-an-gianni-sbrogio-2009-roma-manifestolibri/
[12] Kathi Weeks, The Problem with Work: Feminism, Marxism, Antiwork Politics, and Postwork Imaginaries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1).
[13] Andrea Fumagalli and Cristina Morini, ‘Life put to work: towards a life theory of value’, Ephemera 10:3-4 (2011), 234–252.
[14] Melinda Cooper and Catherine Waldby, Clinical Labour: Tissue Donors and Research Subjects in the Global Bioeconomy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4).
[15] Giacomo D’Alisa, ‘Towards a Reproductive Income’, presentation at the conference Ambientalismo operaio e giustizia climatica, Centro Studi Movimenti, Parma, June 14th 2019.
[16] Burkhardt Wolf, ‘Big data, small freedom? Informational surveillance and the political’, Radical Philosophy 191 (May/June 2015), 13–20.
[17] Pierre Dardot and Christian Laval, The New Way of the World: On Neoliberal Society (London: Verso, 2016).
[18] Andrea Fumagalli, Alfonso Giuliani, Stefano Lucarelli and Carlo Vercellone, Cognitive Capitalism, Welfare and Labour: The Commonfare Hypothesis (London: Routledge, 2019).
[19] André Gorz, Ecologica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0).
[20] 1970년 이탈리아 법률은 1969년 ‘뜨거운 가을’ 시기 동안 노동운동에 의해 제기된 급진적인 요청을 부분적으로, 특히 임금 인상을 받아들였다. 얼마 후, 대부분의 수당의 규모는 임금 수익자와 봉급 소득자들을 위해 폭등했다. 직무는 공식 경제 안에서 잠재적으로 보장되었고 노동조합은 기업 기획 부서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많은 부문에서 노동자 해고는 어려워졌다.
[21] 이런 이유로 기본소득은, 가이 스탠딩이 이 책[Radical Philosophy]의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또한 필수적으로 제한없는 것이어야 한다.
[22] Antonio Casilli, En attendant les robot : Enquête sur le travail du clic (Paris: Seuil, 2019).
[23] Basic Income Network, Big Data, WebFare e reddito per tutti. Siamo in rete, produciamo valore, vogliamo reddito, Quaderni per il reddito 9 (2019), https://www.bin-italia.org/quaderni-reddito-n9-big-data-webfare-reddito-tutti/.
[24] Ursula Huws, Labour in Contemporary Capitalism: What next? (London: Palgrave McMillan, 2019).
[25]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다른 곳에 나오는 가이 스탠딩의 인터뷰 첫 부분을 참조하라.
[26] Erik Olin Wright, ‘Basic Income as a Socialist Project’,
https://www.ssc.wisc.edu/~wright/Basic%20Income%20as%20a%20Socialist%20Project.pdf
[27] Hubert Buch-Hansen and Max Koch, ‘Degrowth through Income and Wealth Caps?’, Ecological Economics 160 (2019), 264–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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