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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다 번역

<알랭 뱅송에게>(질 들뢰즈)

by Nomadia 2019. 2. 15.

À Alain Vinson[각주:1]


질 들뢰즈/ 번역: nomadia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64411[각주:2]

사랑하는 친구,

 

나는 자네 소식을 접하고 행복했다네. [...] 칸트에 관한 자네의 질문은 나를 매우 흥미롭게 만들었지. 그런데 그 분석은 매우 힘이 있어서, 그 질문들에 대해 어떤 다른 대답이 있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이네. 그것은 자네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이었지.

 

1) 물자체(chose en soi)에 대한 이론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것이 분명하다네. 즉 하나는 현상들의 기체(substrat)이고, 다른 하나는 의지의 근원이라는 것이지. 이것은 우리의 외부에 있으며, 우리 안에도 있지.

 

2) 의지의 근원으로서, 물 자체는 하나의 ''도 아니며, '그 자체'도 아니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에릭 베이유(Eric Weil)의 최근의 책, [칸트주의의 문제] - 또는 [칸트의 문제]였던가, 나는 이런 사소한 것은 신경쓰고 싶지 않다네 - 에 있는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분석을 신뢰한다네.[각주:3]

 

3) 나는 이성적으로 자유로운 물 자체가 기체적인 물자체의 어떤 특별하고[각주:4], 특유한 경우라고 생각한다네. 그 점에서 나는 자네가 현상의 드러남(apparition)의 원천으로 도덕적 세계로 기우는 경향에는 미치지 못한다네. 요컨대 도덕적 세계는 나에게 기껏해야 그러한 지성의 원천와 유사한 것이지.

 

사실상 자네가 제기하는 문제는 칸트주의 내에서는 확실히 드러나지만, 칸트 자신에 의해서는 해결되지 않은 것이지. 그것은 한편으로는 피히테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쇼펜하우어가 제기한 문제이기도 하다네.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네가 지적한 지점과 상당히 근접한다네. 또는 피히테[의 책]에서는 어떤 흥미로운 장(chapitre)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뷔이멩(Vuillemin)칸트의 유산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L’Héritage kantien et révolution copernicienne)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각주:5]

 

4) 자네는 능력들의 일치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고 말했지. 즉 어떤 초감각적(supra-sensible) 통일성 말이야. 난 자네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한다네. 그러나 오직 그 일치만이 인지될 수 있고, 통일성은 끝까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되지. 그것은 다른 곳에서 정확히 말해질 수 있는 것이네. 왜냐하면 만약 기체적 물자체가 물질도 사유하는 것(être pensant)도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 그러한 사유함의 방식으로 아니기 때문이네. 반대로 만약 의지적 물자체가 사유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셈이지.

 

5) 자네가 내 보잘 것 없는 책[각주:6] 에 대해 당연히 나무랄 수 있는 바는, 그것이 물 자체의 양면성이라는 문제라는 점에서 완전히 충족될 수 없는 잔여를 남긴다는 것이지. 나는 그 문제가 그토록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지. 하지만 만약 내가 그렇게 한다면, 개인적으로 나는 자네가 도달한 지점 딱 그만큼만 할 것이네.

 

그럼 이만 총총

질 들뢰즈.      



<끝>




  1. [역주: 이 글의 출처는, Lettres et autre textes, Minuit, 2015. pp. 17-18이다.] [본문으로]
  2. 칸트의 물 자체에 관해 알랭 뱅송에게 보내는 편지는 『철학적 서간』, 1994, 7호에 실렸다. 거기에는 알랭 뱅송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것이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강하게 제기한다.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언급했던(하지만 알 수는 없는) 초감각적인 것의 통일성이란 무엇인가? 보다 정확히 말해서, 나는 현상들의 외양의 원천이 존재하는 방법에 대해 묻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나의 의지의 근원, 나의 예지적인 것의 근원과 관련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보여주는데, (하지만 그 현실성이나 가능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자연 자체(la Nature)와, 즉 현상적 양태와 모순을 이루게 된다. 현상의 기체와 나의 의지의 원천 간에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예지계의 내부에 있는 것에 대한 차이들은 그 영역의 복수성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만약 그러한 복수성이 긍정될 수 있다면, (...) 그러면, 초감각적인 것들의 통일성이란 그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 - 단순히 부정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신인동형적으로 - 은 우리에게 인식될 수 없는 것인가? [본문으로]
  3. Eric Weil, Problémes kantiens, Vrin, 1963 [본문으로]
  4. 어떤 특유하고 실천적인 명확함. [본문으로]
  5. Jules Vuillemin, L’Héritage kantien et révolution copernicienne, PUF, 1954(서문과 '4장 피히테의 원리에 비추어본 칸트 원리 시론', II부, 실천 이성의 의미, pp. 98-129) [본문으로]
  6. Gilles Deleuze, La Philosophie critique de Kant, PUF, 196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