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philosopher in NOMADIA
  • philosopher in NOMADIA
  • philosopher in NOMADIA
오다가다 번역

<허구-운반가방론>(어슐러 K. 르귄)

by Nomadia 2019. 2. 7.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어슐러 K. 르귄( Ursula Kroeber Le Guin)/ 번역: nomadia




어슐러 K. 르귄(1929-2018)어슐러 K. 르귄(1929-2018)




온대와 열대 지역 어딘가에서 영장류는 인간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그 종의 주식은 채소였다. 구석기와 신석기 그리고 선사시대에 그러한 지역에서 인간이 먹었던 것의 70~80%는 채집되었다. 맘모스 사냥꾼들이 동굴벽과 생각을 엄청나게 지배하고 있지만, 실제로 살아남아 살찌기 위해 했던 것은 씨와 뿌리, 작고 어린 싹, 이파리, 견과, 딸기, 열매와 곡식을 모으는 것이었다. 거기다 벌레, 연체동물, 그물과 덫에 걸린 새, 물고기, , 이가 없는 작은 치어는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일을 그리 많이 하지도 않았다. 하물며 농업이 발명된 후 남의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것과 같은 신세도 아니었고, 문명이 발명된 이래 그랬던 것처럼 임금노동자 같이 뼈빠지게 노동한 것도 아니다. 평균적인 선사시대 인간은 한 주에 15시간 정도 일하며 쾌적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생존하기 위한 15시간은 다른 것들을 위한 많은 시간을 남겨 준다. 좀 더 신나게 살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고, 아기를 갖지 않았던 인간들은 그 많은 시간을 요리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아주 흥미로운 사유를 만들어 내는 재능을 개발하는데 사용했다. 이를테면 조용히 다가가서 맘모스를 사냥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래서 재능있는 사냥꾼은 한 짐의 고기, 많은 상아,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돌아오곤 한 것이다. 기분전환을 하게 했던 것은 그런 고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이야기였다.

 

내가 야생귀리 껍질을 벗겨 씨앗을 애써 얻고, 또 다른 것들, 또 다른 것들, 또 다른 것들, , 또 다른 것들을 어떻게 쥐어짰는지에 대해 정말로 재미난 이야기를 하기란 힘들고, 그래서 나는 각다귀에 물린 곳을 긁고, (Ool)이 뭔가 재미있는 것을 말했고, 우리는 개울가로 가서 물을 마시고, 잠시 도롱뇽을 관찰하고, 그리고서 다른 귀리 서식터를 발견했고 아냐, 그건 비교가 안돼. 내가 어떻게 그 거대한 털투성이의 옆구리를 창으로 깊숙히 찌를 수 있었는지, 그건 비교불가능하지. (Oob)은 그놈이 휘두르는 커다란 상아에 찔려 꼼짝도 못했어. 소리를 꽥꽥 지르고 바닥을 버르적거리면서, 온 개울에다가 피를 쏟아 냈어. 그리고 붑(Boob)은 완전히 짓이겨져 젤리가 되어 버렸지. 그 맘모스놈이 붑 위에 쓰러져 버렸거든. 내가 활을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쏘아서 그놈의 눈부터 골속 깊숙히까지 꿰뚫어 버렸던 거야.

 

그 이야기는 그냥 행동(Action)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영웅(Hero)에 대한 것이다. 영웅들은 막강하다. 당신이 그것을 알기 이전에, 야생귀리 서식터에 있는 그 남자와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과 만드는 사람들의 기술과 생각이 많은 사람의 사유와 가수들의 노래는 그것의 모든 부분인데, 이것들이 모두 영웅 이야기 안에 눌려져 제공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에 속해 있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3기니를 마지막으로 책을 계획했을 때, 그녀는 노트 앞머리에 다음과 같이이 적었다. “용어집”(Glossary). 그녀는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계획에 다라 영어를 재발명하려고 생각했다. 이 용어집 초반부에 있는 한 단어는 영웅주의’(heroism). 이 단어는 보툴리즘 식중독”(botulism)이라고 정의되었다. 그리고 영웅은 울프의 사전에서는 ”(bottle)이다. 그릇으로서의 영웅, 설득력 있는 재평가. 그래서 나는 병을 영웅으로 하자고 제안한다.

 

그냥 진이나 와인 병이 아니라, 보다 오래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저장용기, 뭔가 다른 것을 수용하는 어떤 것


만약 당신이 그 안에 어떤 것을 담지 않는다면, 음식은 당신으로부터 달아날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귀리처럼 투지도 없고, 지략도 갖추지 못한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당신은 그러한 음식들이 손에 잡힐 때면, 가능한 한 많이 당신의 위장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위장은 최초의 저장용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일 아침에 깨어나서는 어쩔 셈인가? 날씨가 춥고 비오고, 손아귀에 씹어 먹을, 그리고 어린 움(Oom)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줄 귀리가 조금밖에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위장을 가득 채우거나, 한 줌 정도 쥐고 오는 것 외에, 어떻게 그 이상을 집으로 가져올 것인가? 일어나서 빌어먹을 젖은 귀리라도 얻으려고 빗속을 뚫고 귀리 밭으로 갈 것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당신이 아기 우 우(Baby Oo Oo)에게 줄 뭔가가 필요하다면, 당신은 양손에다가 귀리를 쥐고 와야 하는가? 나뭇잎 표주박 조개껍질 그물 가방 포대 주머니 병 냄비 박스 저장용기. 받침대. 수용기(A recipient).


 

최초의 문화적 장치는 아마도 어떤 수용기였을 것이다. ... 많은 이론가들은 가장 이른 문화적 발명품들은 생산물들을 모아 담기 위한 저장용기, 이를테면 포대자루나 그물 캐리어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느낀다.

 


엘리자베스 피셔(Elizabeth Fisher)여성의 창조물(Women’s Creation, McGraw-Hill, 1975)에서 이렇게 말하는데, 이는 좀 가능하지 않다. 뼈 같은 것 말고 어디에 그렇게 훌륭하고, 크고, 길고 튼튼한 물건이 있겠는가? 나는 믿는다. 유인원들이 처음에 영화에서 본 것처럼 누군가를 때려눕히고, 흥분에 그르렁거리면서 살육이라는 속성을 획득하고, 그 시체를 거칠게 하늘로 던져 버렸다고. 그리고 그곳을 빙빙 돌면서, 어떤 우주선이 되었고, 그 우주선은 우주를 살찌우기 위해 그 속을 침투해 들어간 것이라고. 그리고 결국 영화 말미에는 사랑스러운 태아, 물론 남자아이인 그 태아가 (이건 정말 충분히 이상한데) 어떤 자궁도 없이, 어떤 매트릭스도 없이 은하수를 둥둥 떠다닌다는 것. 그런데 이런게 어디 있는가? 난 잘 모르겠다. 뭐 어찌 되어도 상관 없다. 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진 않다. 우리는 들었고, 우리는 모두 그 막대기들, 창들, 그리고 칼들, 베고 찌르고 때리는 그 물건들, 길고 딱딱한 물건에 대해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뭔가를 안에 넣는 물건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다. 담겨질 물건을 위한 저장용기. 그래서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다. 그것은 뉴스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된 것이다. 당신이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확실히 아주 오래전에, 무기 이전에, 어떤 뒤늦고, 화려하고, 남아도는 그 도구 이전에, 쓸만한 칼과 도끼보다 아주 오래 전에, 후려치고, 갈고, 파는 필수적인 도구들 이전에, 만약 당신이 많은 감자들을 쓸어담을 어떤 것도 없고, 집에서 그것들을 먹을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에너지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그러한 도구들과 더불어, 그리고 그 이전에 우리는 에너지를 집으로 가지고 올 도구를 만들었다. 이건 납득할 만한 이야기다. 나는 피셔가 인간 진화의 운반가방론이라 부르는 것을 열렬히 찬성하는 바다.

 

이 이론은 이론적으로 모호하고 불합리한 어떤 넓은 지대(호랑이, 여우 그리고 영토적 성향이 높은 어떤 다른 포유류들이 넓게 서식하는)를 설명할뿐 아니라, 나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전에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방식으로 비인간 문화(inhuman culture)를 뒷받침한다. 아주 오랫동안 문화는 찌르고, 베고, 죽이는 길고, 딱딱한 물체로부터 고안되고 그로부터 유래되었던 것처럼 설명되었는데, 나로 말하자면 이런 설명 안에서 어떤 공유할만한 것을 가진 적도, 원한 적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릴리안 스미스Lillian Smith프로이트가 문명의 결핍에서 놓친 것은 문명에 대한 여성의 충성심loyalty의 결핍이다라고 보았다.) 그 이론가들, 그들은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이 사회, 이 문명은 분명 그들의 것이었다고. 그들은 그것을 소유했고, 그것이 좋았고, 그들은 인간, 아주 충분히 인간이었는데, 이 인간은 배고, 박아넣고, 찌르고, 죽이는 인간이었다. 인간이 바로 그러한 것이기를 원한다면, 나는 했던대로 그 증거들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무기를 만들고, 그것으로 죽이는 것에 대해 돌아오는 것이 있다면, 분명하게도 나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철저하게 결함이 있거나, 인간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 맞는 말이다. 당신의 본모습은 여성이다. 가능하게도 전혀 인간이 아닐 수 있으며, 분명 결함이 있다. 자 이제 입을 다물고 영웅 남자의 발전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자.

 

거두절미. 난 야생 귀리를 향해 터벅거리며 간다. 우 우(Oo Oo)를 포대에 담고, 어린 움(Oom)은 바구니를 가지고 간다. 당신은 여전히 말할 것이다. 어떻게 맘모스가 붑(Boob) 위에 쓰러졌는지, 어떻게 카인이 아벨을 쓰러트렸는지, 어떻게 폭탄이 나가사키 상공에 떨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불타는 낙진이 마을을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미사일이 악의 제국에 떨어질 것인지, 그리고 다른 모든 인류남성의 발전과정에 대해.

 

만약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을 담기 위한 것이 인간의 것이라면, 그 이유는 그것이 유용하고, 먹을 수 있거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당신은 가방이나 바구니에 그것들을 넣는다. 그것은 둘둘 만 나무껍질이나 이파리 한 조각, 또는 당신 자신의 털로 만든 그물 또는 당신이 갖고 있는 것으로 만든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들고 온다. 집이든 다른 곳이든 간에, 그것은 사람들을 위한 저장용기, 보다 큰 종류의 파우치나 가방이며, 이후에 당신은 그것을 가지고 나가고, 먹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거나 겨울을 위해 보다 단단한 저장소 안에 저장할 것이다. 또는 당신은 그것을 약초더미나 사당이나 박물관, 성스러운 장소, 그러니까 뭔가 신성한 것을 보관하는 영역에 놓아둘 것이고, 아마 다음날도 당신은 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나는 결국에 어떤 인간인 것이다. 충분히, 자유롭게, 기꺼이, 최초로 말이다.

 

아니, 한 번 이야기하도록 내버려 둬, 비공격적이거나 비전투적인 인간. 난 나이들고, 화가 많은 여성이거든. 난 내 핸드백으로 불량배와 맞짱뜨는 그런 무지막지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렇게 행동한다고 해서 나 자신을 영웅이라든지 다른 어떤 사람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이 야생 귀리를 계속 얻고, 이야기를 할 수 있기 위해 해야만 하는 그러한 빌어먹을 것들중 하나일 뿐이다.

 

이건 뭔가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이것은 나로부터 내 인간성을 숨기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 그 맘모스 사냥꾼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이 이야기는 베고, 찌르고, 강간하고, 죽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 바로 영웅에 관한 이야기다. 보툴리즘 식중독 같은 대단하고, 독성 강한 이야기, 살육자 이야기(The killer story).

 

간혹 이 이야기는 끝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적어도 거기에 대해 뭔가 이야기할 거리가 남아 있지 않고, 여기 바깥에 있는 우리 중 몇몇은 야생 귀리, 외래 옥수수에 둘러싸인 채로 생각한다. 우리는 다른 것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기 좋은 편에 속하고, 아마도 사람들은 오래된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곤란함은 우리 모두가 살육자 이야기의 일부가 되도록 우리 모두를 이끌었고, 그래서 우리가 그것과 더불어 끝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강제의 느낌을 동반하는데, 다시 말해 나는 그 다른 이야기의 단어, 말해지지 않는 것, 삶의 이야기, 자연, 주체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편하며, 쉬운 것이 아니다. 살육자 이야기가 은연중에 온 몸에 베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해지지 않은 것"은 좀 과장된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별의별 말과 방식으로 평생동안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창조신화와 변신이야기, 사기꾼 이야기, 민담, 농담, 소설 등등.

 

소설은 근본적으로 비영웅적인 종류의 이야기다. 물론 영웅이 종종 소설을 넘겨 받기도 하는데, 그의 황제적 본성과 통제불가능한 충동이 거기에 나타나며 그것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하지만 비영웅적인 것을 죽이려는 그의 통제불가능한 충동을 제어하기 위한 엄격한 명령과 법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영웅은 첫째로 그의 대변인을 통해 입법자임을 선언하는 것이고, 화살이나 창의 형태로된 적절한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여기'서 시작하여, 곧장 저기로 이어지며 떠들어지게 된다. 적중한다. (혼을 쏙 빼놓으면서) 두번째로 소설을 포한한 이야기의 중심적인 관심은 갈등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셋째로 그가 그 이야기 안에 없다면,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난 이 모든 것들과 다르다. 나는 되도록 자연스러운 것, 제대로 된 것을 말할 것이다. 그것은 소설의 적합한 형태가 어떤 자루, 어떤 가방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책은 단어들을 담고 있다. 단어는 사물들을 담는다. 그것들은 의미를 품고 있다. 소설은 약상자이며, 특유한 것들을 가지며, 서로 간에 그리고 우리에게는 강력한 관계성이다.

소설의 구성요소들 중 하나의 관계성은 갈등일 것이다. 하지만 갈등으로 서사를 환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나는 어떤 글쓰기 메뉴얼을 읽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나의 이야기는 어떤 전투와 같이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전략, 공격, 승리 등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갈등, 경쟁, 억압, 투쟁 등등은 서사 안에서 운반가방/(belly)/상자//약꾸러미와 같은 것으로서, 전체의 필수적인 요소로 보인다. 하지만 그 자체로는 갈등으로 또는 조화로도 특성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의 목적이 해결도 아니고, 현상유지도 아닌, 과정을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웅이란 이 가방에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무대, 최고의 자리, 또는 받침대가 필요하다. 당신이 그를 가방 안에 넣으면 그는 토끼 혹은 감자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이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다. 영웅 대신에 소설은 그 안에 민중을 넣는다.

그래서 내가 SF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엄청나게 무거운 짐짝을 옮겼었다. 내 운반가방은 멍청이들과 약골들, 겨자씨보다 더 작은 곡류들로 가득 찼고, 애써 매듭이 보이지 않도록 복잡하게 짠 그물은 하나의 작은 조약돌, 다른 세상의 시간을 알리며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크로노미터, 그리고 쥐의 해골바가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끝 없는 시작들, 최초의 것들, 잃어버린 것들, 변신과 번역들을 담고 있으며, 갈등보다는 속임수들, 덫과 망상들보다 더 적은 승리이다. 오도 가도 못하는 우주선, 실패한 임무, 그리고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야생 귀리 껍질을 까려고 우리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에 대하 말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어느 누가 소설 쓰는 것이 쉽다고 말할 것인가?

 

만약 SF가 현대 기술의 신화라면, 그 신화는 분명 비극일 것이다. ‘기술혹은 현대 과학’ (사람들이 늘 쓰는 방식대로 그 단어를 사용하면, 그것은 검증되지 않은 속기록처럼, ‘어려운과학들과 고도의 기술이란 경제 성장을 계속 뒷받침하는 것일 뿐이다.)은 하나의 영웅적인 수행과정이다. 헤라클레스적이고,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으로서 이것은 승리로 인정되지만, 그래서 궁극적으로 비극이다. 이러한 신화에 구현된 허구소설(fiction)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의기양양할 것이다. (인간은 대지, 공간, 외계, 죽음, 미래 등등을 정복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극일 것이다. (묵시록, 홀로코스트, 그때나 지금이나)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선형적이고, 진보적이며, 기술-영웅주의의 살육의 시간화살을 피하고, 과학과 기술을 지배의 무기가 아니라 원초적인 문화 운반가방으로 재정의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즐거운 부수효과를 볼 수 있다. 즉 이때 SF, 프로메테우스나 묵시록과 같은 것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고 완고하고, 편협한 시각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실상 어떤 사실적인 것보다 덜 신화적인 장르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이상한 사실주의이지만 어떤 이상한 사실성이기도 하다.

SF는 다른 모든 심각한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그와 달리 좀 재미있는 것으로 합당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다음과 같은 방법, 즉 사실상 무엇이 진행되며, 민중이 실재로 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민중을 이 엄청난 자루, 이 우주의 위장(belly), 사물들이 존재하는 이 자궁과 사물들이 존재했던 이 무덤 안에 있는 모든 것과 연관시킬 것인지에 대해 묘사하려고 함으로써 말이다. 이것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다. 여기서는, 즉 모든 허구 안에서는 인류남자(Man)조차 허용할 만큼 충분한 여유가 있으며, 거기서 그는 사물의 도식에 마련된 그의 장소에 속한다. 거기서는 야생 귀리를 충분히 모을 수 있는 시간이 있고, 바느질할 시간도 물론 있다. 그리고 어린 움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울의 농담을 들어주며, 도롱뇽을 살필 수도 있고, 그렇게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여전히 거기엔 채집해야할 씨들이 있으며, 별의 가방은 넉넉히 비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