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에 관한 들뢰즈의 독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들뢰즈가 지속적으로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흄과 베르그송에 관한 연구들(그리고 이러한 모든 철학자들에 대해 쓰여진 책들과 그것들이 활용되는 것)을 참조한다 해도, 철학적 전통에 대한 그의 접근은 근본적으로 어떤 긍정의 철학이라는 니체적인 목표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것이다. 들뢰즈가 어떤 철학자를 읽을 때, 그는 니체에 비추어 그들의 연구작업의 능력치와 그들이 창조한 개념들, 그들이 던지는 질문의 실증적인 효과를 가늠하며, 또한 그들의 철학이 삶에 어떻게 응답하는가를 음미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에서 어떤 실천철학의 이념을 정립하기 위해 신중하게 접근하는 동안, 몇몇 스피노자의 이념들에 속한 니체의 사유 양상이 근대적 사유의 전통에 대한 급진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니체의 연구가 들뢰즈에게 중심적인 것을 형성해 가는 그 과정은 스피노자의 표현주의에 관한 그의 생각을 니체적으로 재작업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표현주의는 우리가 더 이상 어떤 사건을 아프리오리한 실체에 부착된 속성으로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만든다. 여기에는 어떤 질료나 일괴암적인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형상이나 질을 부과하거나 생성하는 실체도 없다. 반대로 표현주의는 특정하고 특유한 질적인 것들의 생성 외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들 또는 사건들은 이러저러한 중립적인 근거나 실체들로 되돌아가 관계 맺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니체야말로 이러한 ‘전인격적 특이성들’로 구성된 세계를 실재적으로 고려한 첫 번째 철학자라고 주장한다. 니체가 논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행위를 주체나 ‘행위자’(doer)로 귀속시킬 필요도, 사건들을 효과들 또는 어떤 선재하는 원인을 가지는 것으로 볼 필요도 없다. 이러한 생각은 들뢰즈에게 내재성의 철학을 발전시킬 계기를 제공했으며, 존재를 일의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만약 실체라는 것이 없고, 그래서 생성만이 있거나 질적 특성들을 부과하는 실체들도 없다면, 존재와 생성 또는 동일성과 차이를 가르는 이분법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앞선 근거도, 통일성도 또는 스스로를 차이화하고 생성하는 실체도 존재할 필요가 없다. 대신에 오직 하나의 일의적 존재만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원초적이며 구성적인 역능으로서의 차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원초적인 통일성이나 존재나 생성의 위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건들의 다양체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원초적인 생성이 있게 된다. 내재적이고 일의적인 존재의 파악은 우리가 실존적인 사건들을 어떤 초월적인 조건(이를테면 신, 주체 또는 존재)을 정립하지 않고 실존 그 자체로부터 고려하기를 요청한다. 들뢰즈가 철학자로서 니체를 강조하는 바는 니체의 탁월성이 영미 전통의 지배적인 니체 해석에서처럼 논증과 원리를 회피하는 문학 작가가 아니라 일의성의 전통 안에 놓으려는 것에서 있다.
내재성과 일의적 존재라는 개념의 전개와 더불어, 니체는 또한 특유하고도 적대적인 힘들 간의 갈등으로서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드러낸다. 니체를 독해하는 와중에 드러나는 들뢰즈에게서 ‘삶’(생명)이라는 개념의 용법은 생물학적인 것도 아니고, 인간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삶은 생물학주의에서의 질료도 아니며, 인간주의나 물활론에서처럼 적합한 형상이나 질료의 목표도 아니다. 삶은 특이화(sigularisation)의 역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차이를 창조하는 힘이다. 니체에게 현상, 유기체, 사회 그리고 국가는 이러한 힘들의 특유한 형상화의 표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삶의 이해에 관한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여들 중 하나는 의식과 도덕적 사유를 적극적(active) 힘과 반응적(reactive) 힘 간의 원초적 구분의 효과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특히 한편으로 원한, 나쁜 의식 그리고 금욕적 이상과 같은 반응적 형식들과 다른 한편으로 주체성의 양태들과 삶의 형식들 간의 연결에 대한 진단은 들뢰즈의 정치적 사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와 비슷하게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에 관한 사상은 들뢰즈의 내재적 사유 그리고 반인간주의 철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와 같은 내재적 원리, 즉 삶 이외에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는 원리의 요청은 삶의 상이한 형식들 간의 분리에 관한 합법성과 그것의 생산에 집중하는 사유를 가능하게 했다. 니체의 관점에서 삶이란 공통되고 고갈되지 않는 역능을 위한 투쟁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며, 인간의 삶(그 규제적인 규범들 도덕적 판단들 그리고 사회적 진리들)은 단지 지나간 삶을 통해 이루어진 어떤 형식일 뿐이다. 이런 니체주의적 철학은 서로 간에 촉발되는 힘을 주고받는 어떤 복수성과 상호촉발되는 존재자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역능의 양은 힘들 간의 미분적 요소들로 구성되며, 이는 삶에 관한 들뢰즈 자신의 철학에 끝까지 중차대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니체를 따라가면서, 들뢰즈는 초월적인 인간 탐구 너머로 이동해 가고자 했다. 삶을 넘어선 이념들에서 기인하는 것은 삶의 가치와 목표를 결정한다. 니체의 작업은 우리 삶의 이념이 구성되는 생성의 보다 폭넓은 운동들에 참여하고자 하는 시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것은 니체로 하여금 여러 차이나는 차이의 형식들, 이를테면 언어, 유전적 발전과정들과 돌연변이들, 사회적 형식들, 역사적 사건들 등등에 집중하도록 이끌었는데, 이는 인간에 대한 이미지의 초점 이동을 야기했다. 들뢰즈도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그러한 것들을 이끌면서, 마찬가지로 니체의 계보학적 재해석을 전개한다. 니체가 잔혹함과 힘의 권능에 의한 감응(affect)의 다양성에서 도덕의 기원을 드러내는 곳에서, 들뢰즈는 이데올로기와 정치의 의미와 기능을 재사유하는 감응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사회적 코드의 이데올로기적 결정에 의해 특권을 부여하는 ‘정치적인 것’의 전망에 반대하여 연구하면서, 들뢰즈는 전주체적 또는 ‘비인간적’ 스타일과 강도들의 계열을 통해 정치학과 이데올로기론의 결과물들을 탐색했다. 들뢰즈는 어떤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결정이 있기 전에, 삶 자체의 도덕적 기초로 이후에 재파악되는 바, 삶의 이미지와 도덕의 스타일에 있어서 어떤 무의식적이고 감응적인 투여가 애초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 Lee Spinks, ‘Nietzsche, Friedrich(1844-1900)’,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178-80.
니체의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급진적 비판과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는 개념은 들뢰즈 자신이 주장한 ‘재현의 요청 없는 차이의 사유’ 그 자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니체는 또한 철학을 드라마화하기 위해 단편적이고 아포리즘적인 표현방식을 사용했다는 이유 뿐 아니라, 삶과 윤리학에 대한 접근방식으로 인해 들뢰즈에게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니체의 연구는 가치에 대한 전제를 결여하기 때문에,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창조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창조성은 파괴와 자기파괴와 긴밀하게 엮여 있다. 들뢰즈의 개념으로 그것은 부정의 결과로서의 긍정(‘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예’라고 말하기 위해서이다)이며, 그 반대는 아니다. 다른 말로, 오직 긍정하기 위해서 부정할 때, 긍정은 바로 들뢰즈와 니체가 경멸하는 반응적 허무주의의 유형을 숨긴다. 그보다 니체의 니힐리즘은 ‘적극적’인 것인데, 파괴의 목적이 언제나 창조에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저 너머의 다른 세계를 지지하면서 삶을 회피하는 어떤 종교나 가치 체계 또는 추상의 몇몇 다른 양상은 니체에 의해 강력하게 거부된다. 따라서 잘 알려진 오해의 여지가 있는 구절 ‘신은 죽었다’는 단순하게 ‘무신론’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모든 항구적인 인간의 가치 체계들에 대한 불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들뢰즈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니체와 더불어 순진한 신앙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언젠가 인간과 신의 조화가 칭송받을 것이며, 다른 측면에서 그것은 인간이 신을 대체하는 것이 될 것이다(N 148, 156). 다른 말로 신은 더 이상 또는 인간 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보다 니체는 모든 가치체계의 지속적인 파괴와 재창조를 옹호하면서, ‘가치전환’에 초점을 맞춘다. 삶과 가치는 생성의 과정에 있는 것이지, 존재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초월적 신이나 그와 같은 상태를 정당화하는 추상적인 사유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들뢰즈는 니체가 허무주의자라는 전형적인 주장 뿐 아니라, ‘신은 죽었다’라는 진부한 구절로부터도 니체를 분리시킨다. 들뢰즈도 마찬가지로 자주 니체를 따라 영원회귀를 어떤 순환, 평등 또는 동일성의 양상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차이가 재현 없이 차이 자신과 관계되는 지점에서 하나의 예로 영원회귀를 내세운다. 『차이와 반복』에서 영원회귀는 ‘시간의 마지막 종합’으로 불리워지는데, 이는 습관의 수동적 종합(반복)과 기억의 수동적 종합(차이)를 결합한다. 따라서 그는 니체적인 비유를 차이와 반복 간의 상호활동을 이해하기 위한 본질적인 것으로 가치화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들뢰즈 사유에 대한 니체의 근원적인 영향을 증명하는 것이다. - E. B. Y.
- Eugene B. Young, Gary Genosko, Janell Watson, The Deleuze & Guattari Dictionary, Bloomsbury, 2013, 217-18
<분문주석문헌>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1988. [Nietzsche and Philosophy.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New York & London. 2006.]
유목적 분배(nomadic distribution)와 ‘왕관을 쓴 아나키’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차이와 반복』과 『의미의 논리』에서부터다. 여기서 이 개념은 언어학자인 라로쉐(Emmanuel Laroche)를 참조하면서, 유비에 반하는 차이의 분배를 기술하기 위해 도입된다. ‘노마디즘’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활용된 것은 가타리에 의해서이다. 그는 이 개념을 토인비(Arnold Toynbee)와 이런 저런 사람들을 참조하면서 상당한 범위로 확장했다. 여기서 가타리는 역사 자체에서 실재하는 유목민을 묘사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주체성의 형식이 어떻게 매끄러운 공간(smooth space)에 거주하기 위해 발생하는지 묘사하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전쟁을 위한 어떤 잠재적 배치(dormant disposition)를 설명하기 위해서도 이 개념을 사용한다. 이 배치는 전쟁을 억제하려고 하는 그때에 하나의 전쟁기계로서 작동되는 것이다.
1.특별한 결합어로서의 ‘유목적 분배’라는 말이 있고, ‘왕관을 쓴 아나키’(Crowned Anarchy) 라는 개념도 있다. 라로쉐에 대한 들뢰즈의 독해는, 위계적이고, 수목적(arborescent)이거나, 홈 파인(이 말들은 합법적인, 법률적인 이란 뜻을 가지며 ‘로고스’logos가 바로 그것이다) 제한된 공간의 분할들과 분배들에 저항하는 방향을 가진다. 들뢰즈는 독점적으로 폐쇄되기보다 창조된 공간 그 자체 안에서 다양한 위치들과 분할을 가진 무제한적인 공간으로의 분배를 말하고자 한다. 차이의 일의적 분배(univocal distribution)가 그러한 것이다. [LS, DR, TP]
라로슈는 νομος-νέμω 안에 있는 분배의 관념은 배당의 관념과 단순한 관계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 νομος는 일단 점유의 장소를 지칭하지만 거기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예를 들면, 마을 주변의 평야). ‘노마드’ 곧 ‘유목민’이라는 테마도 역시 여기서부터 성립한다. [DR 85, 309]
유목적이라 불러야 하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분배가 있다. (...) 여기에는 더 이상 분배된 몫에 속하는 것은 없다. 그보다는 열린 공간 안에서 스스로를 분배하는 자들의 사이의 몫이 있을 뿐이다.[DR 46, 36]
일의적인 것 안에서 유목적 분배 또는 왕관을 쓴 무정부 상태들은 유비의 정주적 분배들과 대립한다.[DR 378, 304]
2.a. 토인비에 따르면 이 개념은 문명의 지체에 조응하는 삶의 방식을 기술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문명은 성장하지도 퇴행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종종 건조지역과 같은 환경에서의 변화들에 대한 어떤 응전(response)이며, 정주적인 삶의 방식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목민은 (...) 다루기 힘든 요소들에 (...) 맞서기 위해 대담함을 가져야 했다. 사실 풀과 자갈로 뒤덮인 초원 지대는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가래와 괭이로 경작할 수 있는 대지보다도 ‘수확되지 않은 바다’와 닮은 점이 더 많았다. 초원지대의 표면과 바다의 표면은 모두 방랑자나 일시적인 체류자로서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거기엔 섬과 오아시스를 제외하고는 그 광대한 표면 어느 곳에도 인간이 머물러 정착 생활을 할 만한 장소가 없다[Toynbee, 1946, p. 166].
b. 들뢰즈와 가타리의 토인비 독해에서는 이주민이나 방랑자가 아니라 표면적으로는 황량한 공간들에 거주하는 주체들이 있다. 그리고 언제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공간들을 방황하거나 움직여 나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실재로 절대적인(측정불가능한) 속도로 움직이며, 어떤 규정된 시작이나 끝도 없는 선과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 [AO, TP, N, D]
우리는 토인비의 제안에 따라 유목민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떠나기를 거부하는 매끄러운 공간을 고수하면서 움직이지 않고, 그곳을 이주하지 않은 덕분에, 다시 말해 그들은 정복하고 죽기 위해서만 떠나기 때문에, 유목민인 것이다. 제자리에서 여행을 떠나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강도(intensité)들의 이름이다. 비록 그들이 외연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TP 532, 482]
3.a. ‘노마드’(nomad)라는 말은 거주하고, 영토화하며,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어떤 행위주체에 적합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특수화된 점들 그리고 지역화되고, 지층화된 지역으로부터 독립된 일관성을 가지고 매끈한 공간을 구축한다.
유목민은 (...) 매끈한 공간을 형성하는 곳이면 어디든 있다. (...) 그들은 그들 안에 머물며,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양육하는데, 이는 유목민들이 사막에 의해 만들어진 것 만큼, 유목민들이 사막을 만든다는 사실을 확립해 왔기 때문이다.[TP 471, 382]
유목민(Le nomade)은 (...) 점들(샘점point d'eau, 거주점, 소집점point d'assemblée 등등)을 무시하지 않는다. (...) 샘점은 오직 뒤에 남겨 놓고 떠나기 위해서만 거기 도달한다. (...) 중간(entre-deux)은 모든 일관성을 취하며, 자율성과 스스로의 소유에 속한 어떤 방향, 둘 모두를 즐긴다. (...) 유목민은 이주민과는 전혀 같지 않다. 왜냐하면 이주민은 하나의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원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TP 419, 380]
b.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철학에서, 이 개념의 주체성의 탈인격화와 관련된다. 이와 같은 주체는 매끈한 공간의 다양체와 같은 것으로, 그들은 횡단하거나 거주하며, 국가와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공간을 구축한다. 또한 부차적인 상태들, 특히 통제되거나 상대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상태들과 더불어 전쟁-기계를 가동시키는 홈파인 공간을 거부한다. 합당하게도 이들은 통제되지 않으며, 절대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속도를 지향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것은 외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다양하다기보다, 강도와 감응(affect, 촉발)에 의해 내적으로 다양화된다.
수는 매끈한 공간을 점유할 때마다 어떤 원리가 되며, 그 안에서 주체로서 전개된다. (...) 수적 조직화의 종별화는 실존의 유목적 양태와 전쟁기계의 기능에 놓여 있다.[TP 430, 389]
국가에 반하는 어떤 활동, 예컨대 반항, 폭동, 게릴라전 또는 혁명적 행동과 같은 것들이 있을 때마다, 전쟁기계가 재개되었으며, 새로운 유목적 잠재력이 등장해 왔고, 그것은 매끈한 공간의 재구축 또는 마치 매끈한 공간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존재방식을 동반했다.[TP 426, 386]
속도는 매우 느리거나 또는 심지어 전혀 움직임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속도임은 한결같다. 운동은 외연적이다. 그리고 속도는 강도적이다. (...) 오직 유목적인 것만이 절댖거인 운동, 다른 말로 속도를 가지고 있다.[TP 421, 381]
c. ‘유목적’이라는 말은 들뢰즈-가타리의 욕망 분석에서도 사용된다. 즉 사회적 (재)생산 또는 ‘흐름’의 다성적인 사슬을 형성하는 연언적 종합(conjunctive synthesis)이라는 의미가 그것이다. 주체의 형식은 제약, 다시 말해 차별의 조건들에 의해 스스로를 격리하지는 않지만,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어떤 하등한 외부자와 동일시하며, 이에 따라 스스로 격리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연접적 종합의 유목적 다의적 용법은 분리된, 양의적인(bi-univoque) 용법과 대립된다. 망상(Le délire, 환각)은 두 개의 극과 같은 어떤 것을 가지는데, 그것은 인종주주와 인종적 극, 편집증적-분리와 분열유목적인 극이다.[AO 115–16, 105]
- Eugene B. Young, Gary Genosko, Janell Watson, The Deleuze & Guattari Dictionary, Bloomsbury, 2013, 220-22
(본문주석 문헌)
Différence et répétition.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1989. [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slated by Paul Patton.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4; Kor.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Toynbee, Arnold. A Study of History, Vol. 1: Abridgement of Volumes I–V.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and New York. 1946.[홍사중 옮김, 『역사의 연구』 동서문화사, 1978; 2007]
Mille plateaux. Éditions de Minuit: Paris. 1989.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lated by Brian Massumi.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New York & London. 2004.; Kor. 이진경, 권혜원 외 옮김, 『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제2권, 연구공간 ‘너머’, 2000]
이것은 어떤 방황하는 그리고 심지어 ‘망상적’(délire) 분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사물/사태들은 일의적이고 분할되지 않은 존재의 전체 외연을 가로질러 전개된다. 존재가 재현의 요구들에 따라 분배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사태들이 단순한 현전(일자-전체)의 일의성으로 존재하는 것들 안에서 분리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DR 36-7).
닫힌 공간을 분배하는 것과 열린 공간 안에서 사물/사태들을 분리하는 것, 어떤 공간을 사람들 사이에 부분으로 분리하여 분배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은 공간 안에서 사람들을 분배하는 것의 차이는 우선 어떤 목가적인 의미이다(법이라는 의미로 되기 전에, 그리스어 단어 노모스nomos는 처음에 방목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DR 36과 ATP 557 주석). 들뢰즈는 이 단어를 사유의 두 상태들, 즉 창조적 사유와 재현적 사유들의 차이에 적용하면서 은유를 사용한 것인가? 분명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노모스의 두 가지 사회역사적 가치들 각각의 부분(존재의 유목적인 양태 대 정주적 양태)이 이러한 차이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유가 그 자체로 공간과 가장 밀접한 방식으로 촉발되며, 추상적 공간들, 즉 때로는 ‘매끈한’ 그리고 때로는 ‘홈 파인’ 그 공간들에 일치해서, 또는 두 공간들의 여러 혼합에 근거해서 스스로를 정련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것은 공간spatium과 연장extensio이라는 라이프니츠적 구분의 재발견이기도 한데, 두 공간에 관한 첫 번째 거친 개요는 “기관 없는 신체” 개념으로 확장되어진다(DR 228-44; ATP 153). 이 경우에 어떤 열린 목록이 구체적인 ‘모델들’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즉 그것은 기술적, 음악적, 수학적 등등의 모델들이다(ATP 14번째 고원).
철학은 왜 최초로 또한 무엇보다 이 개념과 연관되어지는가?
몇몇 사람들은 거기서 영원한 문제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미 주어진 개념들, 우리가 단순히 해야만 하고 그것들을 되찾아야 하는 공허한 조건에 놓인 그런 개념들을 상상한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고정되거나 정주적인 분배를 따라 추론하는 것이다. 또는 이와 다르게, 우리는 사유란 전진하는 비행경로를 따라 진행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플라톤 이래의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이 진리의 재판소 앞에서 경합한다고 상상한다. 마치 모든 특유한 분배 바깥에 어떤 객관적 분배가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이와 같은 믿음은 초월적인 어떤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 다른 방면에서 보자면, 관념들은 어떤 영역에 속하는 것, 즉 그것의 ‘문자적’ 용법과 ‘형상적’ 용법을 가리키는 대상에 대한 의미들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마치 ‘질병’이나 ‘죄수’라는 단어의 의미가 지칭되는 대상의 물리적 상태를 참조함으로써 모두 소진되어버리는 듯이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내재적으로 의미의 유목적인 특성을 인식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어떤 문자적 이동의 권한을 관념들에게 거부하게 되며, 그것을 폐쇄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파악의 행동들은 전반적으로 어떤 함축적인 규칙 리스트에 의해 망라되어, 기껏해야 철학에 대해 의미론적 이동들을 약하게 판단할 정도가 될 뿐이다. 그것들은 어떤 필연성과 완고한 종별화를 그것에 부여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과학적 관념들의 비과학적 사용들이 그것이다. 마치 발명의 계기 안에 놓인 과학이 그와 같은 비과학적 수입목록을 열심히 그리고 합법적으로 실행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우연을 단호하게 긍정하는 사유는 전적으로 차이의 사유다. 그것은 제멋대로의 환상에 권리를 부여하는 필연성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아무도 들뢰즈보다 더 필연성의 주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그 개념을 모든 전승된 방식 너머로 밀어붙였다. PS 16-17, 95; DR 138-9 참조.) 반대로 이러한 긍정은 사유를 필연성의 환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시험이기도 하다. 여기서 필연성은 어떤 원본과 초월적 분배, 즉 사유가 오직 요청할 수 있기만 한 근거에 관한 정주적 환영과 관련되어 타진된다(LS 10, 12계열). 유목적 분배와 관련하여 주사위 놀이에서의 나누어지지 않은 공간은 들뢰즈에 따라 일자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 놀이는 분배의 다양체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지 않으면서, 그것은 각각이 스스로를 유폐되고 고립된 그리고 나누어진 일자의 신기루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다. 즉 이것이 탈주선 또는 탈영토화의 선인 바, 이는 모든 존재자의 양상 또는 특유한 존재를 직접적으로 촉발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는 다양체 너머에 일자의 우선성 따위를 주장할 만한 어떤 기반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매끈한 공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라기보다 마치 이주민들처럼 그 배치들에 의해 유목은 정의된다(사막이나 스텝 지역-ATP 381). 궁극적으로 매끈한 공간은 존재의 일의성 또는 내재성의 평면이 된다(WP 36).
- François Zourabichvili, Le vocabulaire de Deleuze, Ellipses, 2003, 31-33
(본문주석 문헌)
L’anti-OEdipe. Éditions de Minuit: Paris. 1973.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lated by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R. Lan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MN. 1983; Kor. 김재인 옮김, 『안티오이디푸스』, 민음사, 1997; 2014
Proust and Signs, The Complete Text, trans. R. Howard (Minneapolis: Minnesota University Press, 2000)
Logic of Sense, trans. M. Lester with C. Stivale, ed. C. V. Boundas (London: Athlone Press, 1990)
영원회귀는 생성으로서의 운동이다. 이것은 니체-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되돌아 오는 것, 그리고 영원회귀로서 존재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이 생성이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개념에 영원회귀로서 존재의 모든 부분을 가로지르는 비시간적인 운동을 추가하였다. 영원회귀는 존재에 대한 생성들의 운동인데, 이것은 놀이처럼 조직되어 드러난다. 존재는 이러한 생성에 의해서만 긍정된다. 그러므로 영원회귀의 ‘회귀’는 존재로서의 생성이 아니라 생성으로서의 존재라고 해야 한다(NP., 28). 니체에 따르면 생성들은 긍정하는 운동, 창조하는 운동이다. 생성들은 존재로 불리워지는 바, 영원하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진리에 반대한다. 이것은 창조하고 생성하는 ‘놀이’ 자체이다.
이러한 ‘놀이’로서의 영원회귀라는 개념은 말라르메의 ‘주사위 놀이’로부터 설명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생성의 놀이로서의 주사위 던지기는 승리하는 조합을 기다리거나 찾아내면서 우발적인 생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여기서는 생성되는 모든 조합들을 통해 생성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놓게 되면 존재, 즉 이기는 조합, 또는 ‘진리’보다 허위, 목표하지 않은 모든 조합들이 오히려 존재의 조건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연구한 것도, 이런 식으로 존재와 생성을 혼합하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생성은 더 이상 존재를 변형하거나 변신시키기 위해 존재를 가로지르는 운동이 아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 생성은 존재의 조건이 된다. 영원회귀는 이로써 차이나는 것들의 영원한 반복, 생성자체가 된다.
들뢰즈의 내재성의 철학은 영원회귀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영원회귀는 차이나는 것들의 반복이므로 언제나 극단적인 것, 과도한 것, 다른 것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우월한 형태를 이끌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의 주사위 놀이와 관련시켜 생각해 보면, 이제 중요한 것은 주사위 놀이의 모든 수의 조합‘들’이 아니라 주사위 던지기에서 “모든 주사위 던지기를 위한 유일한 던지기”(LS 1969, 211)가 된다. “그것은 가장 다양한 사물들에 이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유일한 사건으로서 (...) 도래한다”(Ibid., 210).
- Arnaud Villani, Robert Sasso ed. Le Vocabulaire de Gilles Deleuze, Vrin, 2003, 101-102, 249, 145 참고.(신지영 옮김, 『들뢰즈 개념어 사전』, 갈무리, 2012, 108-109, 180-81. 207, 번역 수정)
(본문주석 문헌)
Deleuze, Gilles,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aris, PUF., 1962.
Deleuze, Gilles, Logique du sens, Minuit, 1969.
‘영원회귀’ 개념은 들리즈가 프리드리히 니체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내재성과 일의성의 철학의 급진적 확장에 있어서 관건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그리고 니체를 일의적 존재를 긍정한 철학자들로 논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일의성에 관한 유쾌한 이념이 적합하게 사유될 만한 철학자는 니체가 유일하다. 왜냐하면 니체야말로 ‘전인격적 특이성’의 세계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세계에는 ‘누구’나 ‘무엇’이라는 것, 즉 여러 특성들을 갖춘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어떠어떠한 것이 ‘있다’고 할 만한 누군가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차이는 차이짓는 역능이며, 이것은 다른 어떤 것의 근거나 원인인 그러한 차이의 사건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의 긍정을 가로질러 감으로써, 그리고 어떠한 근거나 차이 이전 또는 그 너머의 존재를 포기함으로서, 니체와 들뢰즈는 둘 다 영원회귀의 이념에 도달한다. 만약 차이가 이런저런 고유한 목적을 위해 발생한다면, 즉 만약 거기에 삶에 대한 고유한 목표나 목적이 존재한다면, 그때 생성의 과정은 관념적인 결말을 가지게 될 것이다. 비록 이것이 그저 상상되거나 이념적일 뿐이라도 그러하다. 하지만 차이는 그 자체로 즐거운 사건이다. 그것은 이러한 존재에 관한 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한 그런 차이가 아니다. 각각의 차이나는 삶의 사건들은 변형된다. 그리고 삶은 그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삶은 차이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사물/사태’는 차이일 뿐이다. 각각의 차이의 반복은 이때 차이나는 존재이다. 오직 차이나는 것들만이 되돌아 오며, 그것은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이다. 시간은 차이를 뒤따라 오는 것, 시간은 차이이다. 따라서 차이는 시간 안에 위치할 수 없다. 영원회귀는 그러므로 궁극적인 이념이다.
이 난해하고 수수께끼같은 이념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대개 구체적으로 전개되는데, 이로써 일반적으로 실존주의적 또는 비인간주의적 실존의 전망 중 하나로 이것을 해석했던 학계에 논란을 낳았다. 실존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영원회귀의 사유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제대로 살 것인가를 숙고하게 만든다. 이러한 생각은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즉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국면, 즉 고통과 쾌락 둘 모두가 어떤 잠재적으로 무한한 반복의 가면을 쓰고 되돌아오게 되는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갑작스럽게 깨닫게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서 심지어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사건들의 회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가? 반대로 비인간주의적이고 우주론적인 독해에 따르면 니체의 명제는 역능의 철학에 관한 기초 공리로 이해된다. 이런 경우 영원회귀는 적극적 역능이 스스로를 반응적 힘으로부터 분리하고 대체하도록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생성의 작동 원리로 스스로를 정립하는 것이다.
전후 니체에 관한 철학적 갱신 작업에 있어서 들뢰즈의 눈에 띄는 기여는 이러한 영원회귀에 관한 두 번째 독해를 수립했고, 권력에 관한 현대 이론들의 핵심부에 힘의 선별이라는 내용을 새겨 넣었다는 것에 있다. 그는 특히 니체에 관한 순진한 독해를 기각했다. 이전의 이 독해에서 영원회귀는 말 그대로 영원히 동일한 순서대로 모든 역사적 순간들이 무한한 회귀를 한다는 교조적인 주장에 물들어 있었다. 이러한 순진한 독해의 해악은, 들뢰즈에 따르면, 단순한 동일성의 원리로 차이의 역능들의 끊임없는 생성이라는 니체의 전망을 뒤집어 버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영원회귀를 동일한 것들의 끊임없는 되돌아옴이라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을 이해하는데 실패할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영원회귀를 존재의 바로 그 중심에 있는 생성과 차이에 새겨넣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회귀에서 되돌아 오는 것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회귀의 원리는 오직 다기성(diversity)과 다양체(multiplicity)를 공유하는 한 가지로 구성되는 것이다. 관건이 되는 것은 보편적인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나는 모든 것들을 생산하는 운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회귀는 생성의 종합, 생성 안에서 긍정되는 존재(자)로 이해되어야 합당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힘에의 의지’라는 이름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바로 역능의 차이와 반복이라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원리로 드러나게 된다.
영원회귀를 생각한다는 것은 역능들의 적극적 되기(becoming-active)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회귀는 그 역능들이 표현하는 힘에의 의지의 역량에 따라 힘들을 선별한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과정을 의지의 긍정과 힘의 적극성에 따라 ‘이중적 선별’이라고 규정한다. 이 원리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가 의지하는 그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영원회귀는 존재의 생성으로부터 오는 반응적 상태를 제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첫번째 선별은 가장 강력한 반응적 힘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제거하게 되는데, 이 힘들은 이제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로 적극적인 것을 밀어붙이면서, 허무주의적 충동과 무(nothingness)에의 의지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강한 반응적 힘들은 궁극적으로 부정성의 극복와 적극적 역능으로의 반응적 힘들의 전환이라는 결과를 위해 영원회귀 안으로 육화(incorporated, 구체화, 각인)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적 힘들의 가치재평가는, 영원회귀가 완성을 향한 허무주의적 의지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발생한다. 절대적인 부정성의 영혼은 반응적 힘 자신의 부정도 함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의 부정이라는 것 안에서 반응적 힘들은 역설적인 긍정성이라는 이름 하에 스스로를 억압하고 거부하게 된다. 반응적인 것들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동안, 가장 강력한 영혼이 반응적 힘들의 적극적 힘-되기에 있어서 신체를 가지게 된다. 이 긍정성의 운동은 두 번재 또는 이중화된 선별을 구성하는 바, 이를 통해 영원회귀가 수행되는 것이다. 즉 반응적 힘들의 가치전환은 부정적인 것 자체의 긍정성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번째 선별은 사유의 선별에서 존재의 선별로 이행한다. 다시 말해 어떤 새로운 것이 이제 힘들의 재평가에 따라 등장하면서 존재 안으로 도입되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이러한 가치전환이다. 이중적 선별에 따라 부정적인 것이 존재로부터 축출되는 동안, 오직 행위와 긍정이 돌아온다. 회귀는 이에 저항하는 모든 반응적 힘들을 제거하며, 그러는 동안 생성의 존재와 역능의 적극적-되기 둘 모두를 긍정하는 것이다.
- Lee Spinks, ‘Eternal Return’,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8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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