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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도 아니고 서평도 아닌 것이

사변적 실재론의 ‘검은 수정’

by Nomadia 2020. 3. 5.

그레이엄 하먼 지음, 주대중 옮김, 쿼드러플 오브젝트, 현실문화, 2019*

 

한국어판 표지

 

1. 칸트의 전복, 후설-하이데거의 재전유.

2006년 퀭텡 메이야수(Qentin Meillassoux)유한성 이후(Après la finitude)를 출간한 이래 철학은 상관주의’(corrélationisme)라는 구속복을 제 손으로 걸쳐 입는 기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더 나은 해방감을 위해 현재 사유에 부러 금욕을 강요하는 야릇한 마조히즘이랄까? 어쨌든 상관주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상관주의는 단순한 만큼 강력한 한 가지 논변에 의존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다. X의 소여 없이는 어떠한 X도 없고, X의 가정 없이는 X에 관한 어떤 이론도 없다. 당신이 무언가에 대해 말한다면,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지고 당신이 상정한 무언가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1].

 

사실 철학적 구속복은 그 철학이 제대로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고, 그저 초재적인 자세로 다른 이론들을 굽어보거나 대상들을 종속시키는 태도는 결국 그 체계에 오점(‘자기 자신이라는 예외)을 남겨 놓기 때문이다. 상관주의 또는 상관주의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매우 강력한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를 입은 셈이다. 때문에 하먼을 비롯한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무언가에 관해 말하면서 그 무언가로서의 객체(object)를 상관주의로부터 해방시킬 임무를 가지게 된다. 물론 지금까지의 모든 철학을 이 무구로써 해체해 가는 작업도 병행된다.

 

하먼은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에 대한 기이한 해석임을 인정한다(168 참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개별적 실체이고 사변적 실재론은 이 개별적 실체가 가진 실재성, 다시 말해 실재론’(realism)을 더 멀리까지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서 이후의 모든 철학은 메이야수적 의미에서 상관주의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상관주의를 벗어나 진정한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객체는 자기만의 진공 속에서 베일로 덮인 검은 수정이기 때문에 거기 도달하려면 사유의 상당한 노고가 필연적으로 요청되기 때문이다(91, 강조는 인용자).

 

이를 위해 칸트의 물자체(Ding an sich)가 새롭게 이해되고, 궁극적으로 파괴되어야 한다. 즉 물자체는 화이트헤드적 의미에서 실재적이며 우리의 지식이 될 수 있다(241). 하지만 이것은 독일 관념론자들이 행했던 유아론적 또는 변증법적 방식이 아니라,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방식으로 획득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의 방법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하먼에게 칸트와 후설, 하이데거는 모두 상관주의의 그물에 여지없이 걸린다. 이들은 주체-객체 관계에서만 실재를 바라보거나(전자의 두 사람), 또는 객체의 이원론으로 함몰해 가기(후자) 때문이다(112). 결과적으로 칸트는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반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통해 관념론으로 흘렀고, 후설은 실재의 문턱에서 의식으로 전향함으로써 객체지향적 관념론자가 되었으며, 하이데거는 탁월한 도구-분석에도 불구하고, ‘현존과 부재의 교대라는 반복적인 이원론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3장 참조).[2]

 

이렇게 되면 남은 것은 어떤 실재의 사막’, 아무도 걸어 가지 않은 미답의 공간인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이 전인미답의 사막에 대한 지도를 그리려면, 단지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 용기만 있으면 된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무언가를 포기하고, 다른 것을 취할 때 흔히 발생하는 사유의 모험인 것이다.

 

Graham Harman(1968 ~   )

2. 4중 구조와 10개의 순열 조합

들뢰즈(더 거슬러 베르그송) 이후 언제나 그렇듯이 현대철학은 존재론의 갱신이 문제다. 그리고 하먼이 갱신하는 존재론은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이다. 눈치 챘겠지만, 이 어휘에는 단순히 주체를 배제하고 객체을 지향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는 않다. 오히려 주체를 객체로 당겨 온다는 것이 더 수월하고, 정확한 이해일 듯하다. 하먼은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절대로 모든 객체가 동등하게 실재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 그것[모든 객체]이 동등하게 객체라는 것이다.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 모두를 설명하는 더욱 포괄적 이론에서만 픽시, 님프, 유토피아를 돛단배, 원자와 동일한 언어로 다룰 수 있다. (...) 나는 (...) 목화와 불의 상호작용이 목화와 불에 대한 인간의 상호작용과 동일한 발판 위에 귀속한다고 주장한다(23-25).

 

이렇게 해서 사변적 실재론은 모든 존재자의 평등성을 획득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들뢰즈식의 왕관을 쓴 아나키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이 모두 객체에 귀속되면서 일정한 4중 구조를 이룬다고 이후에 말하기 때문이다. 4중 구조는 하이데거에게서 이끌어낸 4중 구조(사방Geviert’)”(24).[3] 그러므로 이 구조에서 비인간 객체 사이의 인과관계그것에 대한 인간의 지각과 다르지않다(Ibid.). 이렇게 해서 하먼은 자신의 사변적 실재론을 존재학’(ontography)라는 이름에 걸맞는 지반 위에 올려 놓는다(218).[4]

 

이제부터 하먼은 이 4중 구조를 세부적으로 사유하는 모험을 떠난다. 4중이라는 모델은 객체 모두를 비추면서 존재학의 중추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네 가지 긴장, 세 가지 방사, 세 가지 접합을 건설하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우주에 대한 강력한 지도를 제공해줄 것이다”(250).

 

우선 하먼은 우주에 존재하는 무한한 객체들이 두 종류에만 해당된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모든 경험으로부터 물러나는 실재 객체와, 경험 속에서만 존재하는 감각 객체가 그것이다”(94). 이것은 우주의 첫 번째 분극화(polarization)으로서 다시 네 가지 극점으로 분열된다. “‘실재 객체’RO ‘실재 성질’RQ ‘감각 객체’SO ‘감각 성질’SQ이라고 약칭되는 바가 그것이다(한국어판 서문, 12). 그리고 네 가지 짝이 도출되는데, “감각 객체/감각 성질, 실재 객체/감각 성질, 실재 객체/실재 성질, 감각 객체/실재 성질이다(94). 이들은 각각 시간’ ‘공간’ ‘본질’ ‘형상이라고 정의내려 진다(178-79).[5] 그리고 이 각각은 긴장’(tension)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는 뒤에 나올 10가지 순열 중 4 가지에 속한다. 즉 하먼은 이를 두 종류의 객체들[실재객체와 감각객체]과 두 종류의 성질[실재성질과 감각성질]에 대한 열 가지 가능한 순열의 지도 작성법이라고 일컫는다(143). 4가지 순열 외에 방사’(radiations)접합’(junctions)에 속하는 3가지 순열이 있다. 전자에는 발산’(emanation), ‘축소’(contraction[응축]), ‘이중성’(duplicity), 후자에는 인접’(contiguity), ‘물러남’(withdrawal), ‘진정성’(sincerity[성실성]이 속한다.[6]

 

아래는 하먼이 제시한 도식에 각각의 순열 항목들을 정리한 것이다(142, 226, 231, 234 참조).[7]

하먼에 따르면 우선 시간과 형상을 산출하는 두 짝은 우리 일상적 경험과 밀접하다. 하지만 본질과 공간의 두 짝은 일상적인 경험이 아니라 단속적인 경험이다. 왜냐하면 공간이 우리가 부단히 경험하는 것이 아니, “본질도 잠깐 사이에 단 한 번만 산출되기때문이다(226-27).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수 있지만, 시간과 형상이 감각객체와 관련되고, 본질과 공간이 실재객체와 관련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난해하지는 않다. 어쨌든 하먼은 이 네 가지 긴장 상태가 분리된 힘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에 한꺼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183 참조). 이것은 감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이 존재하는 모든 객체의 두 종류라고 선언하는 하이데거적인 전제가 하먼 존재론에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객체들이 특정한 영역을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 즉 여기서 시간이나 공간은 일종의 신체적인(corporeal)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단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재 객체든 감각 객체든 이런 비-영역적 특성을 가진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감각적인 것은 지각하는 자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하고, 실재적인 것은 그것과의 관계에서 물러난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197). 특히 실재 객체는 그 성질과의 관계에서 외부적이고 비본질적이다. 즉 실재 객체가 그것의 실재 성질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은 오로지 비실재적이고 (...) 비본질적인 것을 경유해서만이라는 것이다(190). 실재 객체와 실재 성질의 관계가 본질이라고 일컬어진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과적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그것도 외부에서만 생산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Heidegger & Husserl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긴장들이 두 극점, 즉 객채와 성질이라는 두 극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드라마라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감각객체와 함께하는 긴장과 실재객체와 함께 하는 긴장이 매우 다른 특성을 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감각객체는 감각성질과 잘 융합되지만, 실재성질과는 잘 융합되지 않는데, 실재성질은 사실상 분화되지 않은 것으로서 감각객체를 규정하기에는 다소 헐겁다. 이렇게 되면 실재성질은 감각객체와 감각성질과 융합되면서도 분열된다. 이것이 긴장’(시간과 형상)의 본모습이다. 그러나 실재객체의 경우 이러한 분열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먼은 주장한다. 실재객체는 실재성질 그리고 감각성질을 충분히 감싸 안기 때문이다(192-93 참조). 다른 한편으로 실재성질과 감각성질은 매우 다르다. 이를테면 우리는 나무가 가지고 있는 감각 성질을 셈할 수 있지만, 나머지 실재 성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미지의 것으로 남는다. 이것을 하먼은 이중성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각각의 객체와 성질이 자신들 안에서 다른 객체와 성질들과 가지는 관계인데, 실재성질들 끼리는 축소’[응축], 감각성질들 끼리는 발산’, 실재객체들 끼리는 물러남’, 감각객체들 끼리는 인접이 그것이다(220 참조). 이에 대해서는 하먼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감각 성질은 동일한 감각 객체에서 함께 발산되는emanate 한에서 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실재 성질이 감각 객체와의 연결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을 보았다. 그러나 이는 발산으로 기술될 수 없다. 이 성질이 더는 시야를 향해 내뿜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 객체와 연결되어 있는 실재 성질에 대한 보다 저 적절한 용어는 니콜라우스 쿠사누스가 제안한 것으로 유명한 축소contraction[응축]일 것이다(222-23).

 

그리고 물러남과 인접은 다음과 같다.

 

두 감각 객체가 인접된 것보다 더 나은 것이 결코 될 수 없다면, 실재 객체는 상호 관계가 전혀 없는 물러남withdrawal의 방식으로 공존한다(224).

 

3. 그렇다면 실재객체는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다시 문제는 실재객체가 어떻게 되는가이다. 즉 감각객체를 통해 실재객체를 어떻게 경험하는가가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객체가 아니라 감각객체와 늘 접촉하기 때문에,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은 감각객체와 직접적으로 [성실성을 통해] 접촉하는 실재객체다”(137).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하먼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직접적 접촉의 유일한 형태는 세계를 경험하는 실재 객체와, 그것과 마주하는 다양한 감각 객체들 사이에 있다. 거기서 그것들은 내 앞에 있다. 즉 나는 감각 객체들의 실재에 사로잡힌다. 여기에는 어떤 다리도 필요하지 않다(140-41,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는 실재객체이기도 하고 감각객체이기도 하지만, 감각객체로서 실재객체와 직접 접촉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하먼에 따르면, 이 비대칭성은 실재객체의 우선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들린다. 유일하게 가능한 종류의 직접적 접촉은 실재 객체가 경험하는 감각 객체를 실재 객체가 접촉함에 따라발생한다는 것이다(139). 다시 말해 실재객체가 감각객체에 접촉하지 않으면 실재객체에 대한 경험은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각 객체는 둘 모두[감각객체와 실재객체]를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실재 객체를 통해 서로에게 인접해 있을 뿐이다. 하먼의 말에 따르면 사변적 실재론의 관건이 되는 실재객체는 감각객체를 늘 초과하는 어떤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8] 이 초과분은 언제나 감각적 장에 존재하지 않는다”(185).

 

요컨대 하먼은 감각객체이자 실재객체로서의 는 두 객체의 직접적 경험을 갖고 있지만, 실재객체에 대한 지각은 언제나 미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우리는 이것이 두 객체를 연결하는 진정성[성실성]’의 모습인지 물어볼 수 있다. 하먼은 진정성이 어떤 실존적 필연성인 것처럼 진술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진정성sincerity[성실성]은 분열에 종속될 수 없다. 진정성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것을 끝내는 것 뿐이다. 즉 잠 혹은 완전한 죽음처럼 새로운 진정성으로 대체하거나 어느 것으로부터 대체할 수 없거나 둘 중 하나다. 진정성이 중단될 때, 어떠한 매개자도 이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 현존하지는 않으며, 그래서 진정성은 그저 우주에서 사라진다. 진정성에 대한 두 번째 목격자는 없다(233).

 

실재객체와 감각객체를 이어주는 진정성이란 자기 자신이 유일한 목격자일 뿐인가? 뚱단지 같지만 여기서 요상스런 이교의 신비주의가 도래한다면 신성의 직접체험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먼은 합리주의자답게 그런 탈출구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다소 애매하지만 하먼에게 실재객체라는 선물을 선사할 선구자는 예술계에 존재하는 것 같다.

 

실재 객체는 감각적 장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재 객체와 감각 성질들은 융합될 때만 만나게 될 것이다. (...) 객체의 그 비가시성이 객체와 감각 성질을 따분한 일상에서 종종 겪는 것과 같은 맛없는 퓌레로 압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은 융합은 예컨대 모든 종류의 예술 작품에서 발생하는데, 나는 그 이상으로 하이데거의 망가진 도구’[실재객체]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예술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미학적 효과를 갖는다고 주장하고자 한다(185,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미학적 효과매혹’(allure)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전 인용문에서 '사로잡힌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매혹은 사물의 통일성[실재객체](특이한 성질의) 다수성[감각성질] 사이의 친밀한 결속이 다소 부분적으로 해체되는 특별하고 간헐적인 경험이다(186). 그런데 바로 앞에서 하먼은 물러나 있는 실재 객체와 접근 가능한 표면 성질[감각성질][9]과의 융합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로서 매혹allure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조화될 수 없을 것 같은 두 용어, ‘해체융합이 등장한다. ‘매혹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합리적인 철학용어가 아니라, 미학적 용어일 수밖에 없는 면모가 여기에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실재객체에 매혹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직 융합과 해체를 함께 경험함으로써이다. 덧붙이자면 이 접근또한 감각성질을 대면함으로써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이 대면은 앞서 말한 직접체험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실재객체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된다.

 

4. 다시 예술? 과학?

사변적 실재론의 이론적 명운이 걸린 것은 상관주의를 피하면서 실재객체에 접근할 수 있는 존재론적 구조이다. 이것은 성공적인가? 이에 대해 판단하기는 아직 이를 듯하다. 하지만 하먼의 이 책을 통해 보자면, 이 과업이 미완이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1) 실재객체로의 접근이 매혹이라는 미학적 경험을 통해서 가능하다면, 이제 미학적인 경로에서 실재객체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연구되어야 한다.

(2) 하먼이 상관주의에서 말하는 관계성을 회피했는지도 미지수다. 하먼에게 관계는 존재들의 분극화로 대체되어야 한다(129 참조). 하지만 이것을 위해서는 분극화가 이루어지는 실재객체의 모습이 그려져야 하는데, 이것은 다시 과학에 의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먼의 주장대로 철학이 이해의 학문이지 추론의 학문’(수학과 과학)이 아니라 해도, 그리고, 겸손이라는 미덕에 비추어 철학이 모든 학문의 시녀라 해도(118, 143 참조), 거기에는 이해의 학문이 해야 하는 역할(미학적 경로의 탐구)시녀로서의 역할’(과학적 영역의 탐구)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

 

*이 글에서는 책 제목을 빼고 페이지수만 괄호 안에 표기한다. 인용문에서 서평자의 보충은 대괄호(‘[ ]’)를 사용한다.

[1] Qentin Meillassoux, ‘Speculative Realism: Ray Brassier, Ian Hamilton Grant, Graham Harman, Quentin Meillassoux’ In Collapse vol. III., 409, 240-41에서 재인용. 이 문헌은 사변적 실재론이 공개적으로 나타난 최초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하먼도 이에 대해 언급한다. 239 참조.

[2] 그렇다고 하먼이 후설과 하이데거를 완전히 내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이 지지하는 4중 모델은 감각객체를 향할 때는 후설을 따르고 실재 객체를 따를 때는 젊은 하이데거를 따른다”(165).

[3] 하지만 하먼은 이러한 하이데거의 오마주에 단서를 단다 그러나 내가 객체’(하이데거는 부정적으로 사용한다)사물’(하이데거는 긍정적으로 사용한다)에 대한 하이데거의 구별을 채택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24).

[4] “존재학(ontography) (...) 객체의 우주의 기본적 주요 지형과 단층선이 담긴 지도를 그리[는 분야]”

[5] 본서 한국어판 서문, 12도 참조.

[6] 이 순열에 대해서는 ‘220-24’ 참조.

[7] 번역을 좀 수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주대중 선생은 ‘junction’‘conjunction’을 구분하지 않고 접합이라고 옮기는데(223쪽 참조), 그렇게 되면 혼란이 온다. 왜냐하면 접합의 범주 안에 다시 접합이 있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conjunction통접이라고 했다. 또한 괴리라고 옮긴 ‘disjunction’이접으로 옮겼다.

[8] 이 문제에 대해 하먼은 물질적인 것의 과잉이라고 지나가면서 논한다. 즉 초과 또는 과잉은 지각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범존재자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매 순간 변동하는 과잉의 물질적인 면면 (...) 이것이 지각의 진정한 본성이며 (...) 아무런 생각이 없는 존재자들의 가장 낮은 영역에서조차 원초적 지각이 발견된다 (...)”(184)

[9] “실재 객체는 그것의 감각 성질과 접촉하지 않으며, 매혹을 통해서만 감각 성질과 이어진다”(188).

[10] 만약 앞의 두 가지 과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마도 많은 신유물론자(New materialist)e들이 사변적 실재론자들을 '관념론'이라고 공격할 거리들을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