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désir, desire)
‘욕망’은 들뢰즈 철학 어휘록의 중심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가타리와 함께 쓴 그의 저서에서 들뢰즈는 욕망의 정의를 실증적(positive)이고 생산적인(productive) 것으로 발전시킨다. 이때 욕망은 어떤 물질적 흐름으로서 삶/생명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욕망이라는 개념을 정의하곤 했던 특성들 각각에서는 ‘결여’에 근거하거나 ‘법’에 의해 규제되는 욕망에 대한 대체 개념이 맞서고 있다. 오이디푸스 법칙에 의해 규제된 욕망에 관한 정신분석적 개념은 어떤 만족할 줄 모르는 결핍으로서, 들뢰즈가 교정하 려고 했던 아주 부정확한 주요 개념들 중 하나였다. ‘결여’와 구성적 관계를 가지면서 억압과 관련되어 외 부적으로 조직화되는 욕망 대신에 들뢰즈는 욕망이란 내재성의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의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생산적인 것으로서의 이러한 욕망 개념에 더해서, 그는 그것에 실증적인 의미를 덧붙인다. 정신 분석 이론에서 욕망은 하나의 무능력한 힘으로 개인 안에 있는 것인 반면, 들뢰즈가 묘사한 실증적이고, 생산적인 차원의 욕망은 사회적 역능이 된다. 이렇게 재해석됨으로써, 욕망은 실험적이고, 생산적인 역능 일 뿐 아니라 신체들의 권력이 그들의 연결접속 안에서 확장되고, 또 다른 연결들을 형성하는 어떤 역능이 된다. 이러한 두 가지 특성들[실증적이고 생산적인 특성들]은 어떤 자연주의적인 변형태로서의 욕망으로부 터 욕망의 실험적 특성을 구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는 욕망을 가타리와의 연구작업에 따라 배치된 또는 기계화된 것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욕망 개념은 가타리와의 공동 작업에서 여러 주제들을 관통한다. 생산적이고 실증적인 욕망은 그들의 저작들에서 하나의 실행적(operative) 어휘로 작동한다. 이를 통해 그 들은 정치적인 파시즘을 욕망의 억압을 지향하는 욕망으로 설명하며, ‘분열분석’이라는 새로운 윤리학으로 나아가는데, 이 윤리학의 과제는 능동적인(active, 적극적) 것과 반응적인(reactive) 것 사이에 차이를 두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수면이나 걷기 또는 쓰기와 같은 단순한 활동들도 욕망으로 설명한다.
욕망은 또한 들뢰즈의 철학적 이원론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어떤 관건적인 요소이다. 칸트의 것이든 정 신분석의 그것이든 간에 그와 같은 이원론은 욕망을 규제와 억압의 재판정에 복속시키는데, 이는 정확히 명령하는 원리들과 관련하여 그것을 정돈하는 이원론의 초월적 가치들로부터 실존의 영역을 구별하기 때 문이다. 정신분석의 경우 이러한 초월적 규제의 실행은 주체의 섹슈얼리티의 장 안에 욕망을 가두는 잘못 을 범하며, 그것을 어떤 해석의 문제로 만들어 버린다. 정신분석에 반하여 들뢰즈는 욕망을 탈-성화 (de-sexualise)하고 탈-개인화(de-individualis)한다. 섹슈얼리티는 배치 안에서 다른 것들과 통접하는 하 나의 흐름이다. 이것은 욕망하는 배치들 안에 있는 특권화된 하부구조도 아니고, 변형될 수 있는 에너지 또는 다른 흐름으로 승화되는 에너지도 아니다(D 1993b: 140).
들뢰즈는 특히 욕망-쾌락-결여 사이의 동맹에 대해 비판적이다. 여기서 욕망은 만족할 줄 모르는 내적 결여 또는 그 목표가 쾌락 속으로 해소되어버리는 어떤 과정으로 잘못 이해된다. 욕망이 결여의 법칙에 연 관되든 또는 쾌락이 규범에 연관되든 그것은 결여나 방출에 의해 규제되는 것으로 오해된다. 이러한 동맹 에 반대하면서, 들뢰즈는 욕망을 욕망이 지속되는 내재성의 평면의 구축으로 기술한다. 욕망을 쾌락이나 결여로 규제하고, 내재성의 평면으로부터 뽑아내는 대신, 욕망은 어떤 것이 허용될 수 있는 과정으로 여겨 진다. 따라서 욕망은 ‘욕망의 적분과정에 이르러 부서지는’ 것과 구분된다(D 1993b: 140). 이 적분과정은『천의 고원』에서 배치의 구축 과정으로 기술된다. 『앙띠외디푸스』에 나오는 ‘욕망하는 기계’에 관한 주체 주의적 오해에 응답하면서 발전된 이 개념은 욕망이 실험적이며 외부성과 연관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 다. 들뢰즈의 사유에서 욕망에 부여된 사회적 차원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이 외부성과의 관계이다. 욕망 을 배치로 이해하면서 들뢰즈의 용어법에서 욕망은 자연/인위 또는 즉흥성/법칙 간의 구분으로 단순화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들뢰즈가 결여 또는 쾌락의 외부요소를 욕망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교란하는 이원론에 대항하는 논변을 전개할 때, 그는 마찬가지로 욕망의 배치를 구축하는 과정을 위한 중요한 조건을 제어하게 된다.
- Alisson Ross, ‘Desire’,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63-65
║욕망+사회적 생산
분열분석은 ‘욕망하는-생산’(desiring-production)이라는 중추적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사회적-생 산’(social-production)이라는 개념과 함께 고려된다. 이것은 프로이트와 맑스를 연결한다. 즉 이 개념은 생산 일반의 상이한 사례로서 리비도와 노동력을 연결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이 경제적 가치의 본질이 대상들 안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의 형식 안에 주체적 활동성에 따라 그것들 안에 투자 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처럼, 부르주아 심리학도 성적 가치의 본질이 대상들 안에 담겨 있지 않고, 리비도 카덱시스의 형식 안에 주체적 활동성에 따라 그것들 안에 투자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분열분석은 여기에 다음과 같은 발견을 부가한다. 즉 노동력과 리비도는 본질적으로 같은 대상의 양면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 것들이 핵가족 안에서 생산의 사유화를 거쳐 더 크게는 생산으로부터 재생산의 그 역사적인 특유한 선분 성 안에서 자본주의에 의해 나누어진다 할지라도 그러하다.
욕망하는 생산이라는 개념은 욕망이 ‘결여’라는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을 막는다(이것은 플라톤에서부터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서구 형이상학 안에 이어지고 있었다.) 욕망하는 생산은 실재로 우리가 실재성으로 취급하는 것을 생산하는데, 이것은 (어떤 법률가가 증거를 생산하듯이) 심리적 에너지의 투자를 통해, 마치 사회적 생산이 우리가 신체적 에너지(노동력)의 투자를 통해 실재하는 것을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 게 한다. 따라서 욕망은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에 대한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첫째로 그리고 우선은 우 리가 원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생산물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에 대한 특정한 조 건 하에서, 결과적으로 (타자들 가운데) 착취하는 보스의 억압적 형상이나 거세하는 아버지의 억압적 형상 에 의해 탈취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 사이의 연결을 보전함으로써, 분열분석 은 정신분석으로부터 억압에 대한 정당화와 허용을 박탈하게 된다. 다시 말해 심리적 억압은 사회적 억압 으로부터 다소 자율적이며, 그래서 사회적 조건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분열분석은 반대로 ‘사회적 생산이 규정적 조건 아래에서 순수하고 단순하게 욕망하는 생산 그 자체이다’(D&G 1983:29)라고 주장한 다. 그러므로 심리적 억압은 사회적 압박으로부터 나오며, 그러한 사회적 조건들을 변형시키기도 한다. 그 리고 당신은 심리적 억압의 형태와 수준 또한 변형한다.
욕망하는 기계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유형이 존재한다. 분열증적 유형, 이것은 자본주의에 의해 냉담하 게 고취되고 분열분석에 의해 전적으로 고취되는 욕망의 자유로운 형태이다. 다른 하나는 편집증적 유형으 로서, 이것은 사회적으로 권위가 부여된 믿음(신, 아버지, 사장, 선생, 지도자 등등)에 종속된 욕망의 고정 된 유형이다. 사회적 생산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그 각각은 특정한 방식으로 욕망하는 생산을 억압/압 제한다. 셋 중 하나는 자본주의가 가장 고취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적어도 양면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현행적으로 욕망하는 생산의 유형 둘 모두를 조성하는데, 반면 그것 이전의 것은 언제나 다른 것[타자] 덕분에 하나를 극단으로 밀어부쳐 파괴한다. 자본주의는 욕망하는 생산을 코드와 재현에 의해 포 획하고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해방한다. 반면 동시에 그것은 대개의 시간적 코드들과 재현들로 욕망하는 생 산을 억압하고 재포획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국가가 뒷받침하는 민족주의, 즉 오이디푸스 복합체 와 핵가족의 형태를 보다 견딜만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분열분석이 사회적 생산이란 언제나 확정적인 조건들을 제공하고, 그 아래에서 욕망하는 생산이모양을 갖춰가며, 이렇게 해서 그러한 모양에 합당하게도 사회적 생산의 양상을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 기 때문이다. 즉 분열분석은 사회적 생산의 양태를 그것이 가능한 욕망하는 생산의 형식에 따라 평가한다 는 것이다. 사회적 생산 양태로서 자본주의의 가치는 맑스에 의해 찬양된 바, 그 특출난 물질적 생산성만 이 아니라, 욕망하는 생산의 급진적으로 자유로운 형식으로서의 분열증을 발생시키기 위해 그것이 경향성 을 보다 많이 만들어내는 데 있다. 그리고 혁명적 정신의학으로서 분열분석에 조응하는 도전은 자유로운 욕망을 재포획하고 그것을 편집증과 믿음에 종속시키려는 길항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힘들은 핵가족과 오이디푸스적인 정신분석으로부터 사적 기업의 관료주의, 국가를 포함한 모든 방면에 뻗어 있는 기구들 안 에서 작동한다.
- Eugene Holland, ‘DESIRE + SOCIAL-PRODUCTION’,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65-66
║탈영토화/재영토화(Deterritorialisation/Reterritorialisation, déterritorialisation/reterritorialisation)
들뢰즈와 가타리는 탈영토화 과정에 대해 여러가지 방식으로 묘사했다. 『앙띠외디푸스』 에서 그들은 ‘도 래하는 미수행’(a coming undone, D&G l983: 322)으로서의 탈영토화에 대해 말한다. 『천의 고원』에서 탈영토화는 어떤 배치의 잘려나간 모서리를 구성한다(D&G 1987: 88). 카프카에 관한 그들의 책에서, 그들 은 카프카의 문학적 탈영토화, 즉 돌연변이 내용, 언표행위를 강제하기, 그리고 ‘탈구’된 표현들을 묘사한 다(D&G 1986: 86). 그들의 마지막 공저인 『철학이란 무엇인가?』 에서는 탈영토화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또는 심적일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 매우 광범위해 보이는 기술들에는 두 가지 의문이 주어진다. 첫 째 탈영토호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둘째로, 탈영토화는 재영토화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아마도 탈영토화 는 변화를 생산하는 어떤 운동으로 이해되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 그것이 탈주선으로 작동하는 한에서, 탈영토화는 배치의 창조적 잠재력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탈영토화한다는 것은 고정된 관계들을 자유 롭게 하는 것이며, 어떤 신체가 모든 방면에서 새로운 조직화를 노정한다는 의미이다.
들뢰즈 뿐 아니라 가타리가 서구 철학을 뒷받침하는 이원론 프레임(존재/비존재, 원본/카피 등등)을 넘 어서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탈영토화가 재영토화와 가지는 관계는 부정적 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영토성이 다시 한 번 수립될 때)ㅍ영토화 또는 재영토화라는 양극적 대립이 아니다. 사실상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 개념을 기술하는 방식에는 탈영토화가 영토적인 것 안에서 그것이 변형의 벡터로서 내재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이것은 주어진 영토에 내재한 변화의 가능성 바로 그것으로 결속되어 있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거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탈영토화 운동이 있다. 절대적 탈영토화와 상대적 탈 영토화가 그것이다. 철학은 절대적 탈영토화의 사례이며, 자본은 상대적 탈영토화의 사례이다. 절대적 탈 영토화는 탈영토화 운동이 빠른지 느린지와는 상관 없이 그 자체의 운동 방식이다. 이와 같은 운동은 내재 적이며, 차이화되고 존재론적으로 상대적 탈영토화 운동에 앞선다. 상대적 탈영토화는 고정성을 향하며, 그 자체로 분자적인 것 위에 있지 않고 몰(molar)적 평면 위에 하나의 현행적 운동으로 발생한다. 간결하 게 말하자면, 절대적 탈영토화 운동은 잠재적이며, 현행화하는 상대적 탈영토화 운동을 통과하는 운동이 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의와 거기서 탈영토화를 사용하는 이론적 맥락은 많은 상이한 지점을 가진다. 이것 들은 예술, 음악, 문학, 철학 그리고 정치를 포함한다. 예컨대 서양 시각예술에서 얼굴과 풍경은 탈영토화 된다. 반면 철학에서, 사유는 사유의 외부에 있는 모든 것에 의해 탈영토화된다. 이런 점에서 탈영토화는 하나의 문제(problem)인 것이지 물음(question)이 아니다. 왜냐하면 물음은 어떤 대답을 찾는 것인 반면, 문제는 지각불가능한 또는 인식불가능한 모든 것을 정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음악에서 탈영토화 되는 것이 인간의 음성과 리토르넬로라고 주장한다. 적절한 예시는 작곡가 올리비에르 메시앙(Olivier Messiaen)을 든다. 그는 1955년 경에 작곡에 새소리를 활용했다. 이 작업에서 그는 새의 노래들을 모방하 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소리를 악기(피아노)의 영토로 변형하는 방식으로 피아노와 관계 짓는다.(1) 여기에 나오는 새노래들의 특이한 톤, 음색 그리고 템포들은 근본적으로 음악적 조직화와 이 요소들이 연결되는 그 순간 바뀐다. 이와 유사하게 메시앙의 작곡 스타일은 새소리와이 관계 안으로 진입할 때 마찬가지로 바 뀌는데, 이를 통해 이 작곡과정은 어떤 새-되기라는 말로 기술될 수 있게 된다.
(1)[역주] https://www.youtube.com/watch?v=JE4vSviuoSw 참조
그런데 새가 자신의 노래를 지저귈 때, 그것은 단순히 영토적인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그 새의 리토르 넬로가 어떤 방식에서 영토적 기호인지 우리는 고려할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영토성’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를 사용한다. 그러한 연구는 20세기 초중반 동안 새 연구에서 논의되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연구를 다른 방향으로 틀어 놓는다. 베르나르드 알툼(Bernard Altum), 헨리 엘리엇 하워드(Henry Eliot Howard) 그리고 콘라드 로렌츠(Konrad Lorenz)는 모두 수컷 새가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조직화하 는 방식으로 어떤 특정한 영토[영역]를 공격적을 지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새 행동 연구들은 새의 노래 를 종의 보존을 위한 생물학적 충동이라는 영토성으로 이해했다. 이와 달리 들뢰즈와 가타리는 짝짓기, 사 냥, 먹기 등등의 생물학적 기능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라는 위상으로부터 영토성을 이끌어내지 않고, 영토 성이 실질적으로 그러한 기능들을 조직화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그들이 로렌츠로부터 이끌어낸 문제는 그가 ‘영토성에 기초한 공격성’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D&G 1987: 315). 들뢰즈와 가타리는 짝짓기와 같 은 기능들은 ‘그들이 영토화되기 때문에’ 조직화된다고 주장한다(D&G 1987: 316).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생태학자 윅스킬(Jakob von Uexküll)을 따라 영토성에 관한 이해를 보다 진전시켜 활용하는데, 이때 윅스 킬은 생명의 이해를 어떤 기계론적인 것으로부터 표현적인 것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돕는다.
윅스킬은 환경(Umwelt)의 바깥에는 아무런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안했다.(2) 그에게 ‘영토’는 환경 을 점유하고 창조하는 생명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특정한 환경을 가리킨다. 그래서 윅스킬에게 환경의 의미는 감응적(affective)이다. 이 점은 우리가 탈영토화와 탈코드화 사이에 가정된 어떤 지연(slippage)을 고려하게 될 때 중요해진다. 이것은 『천의 고원』 에서는 나오지 않고 『앙띠외디푸스』 에 등장한다. 탈코드화 한다는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의도한 바에 따르면, 의미를 번역(이동)하는 것에 반하는 응고된 의미들을 생산하는 자기동일적 코드들에서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의미를 생산하는 것을 탈안정화함으로써 탈영토화 를 이해하기 보다, 『천의 고원』 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것을 어떤 횡단적 과정, 즉 어떤 배치의 창조를 정의하는 그러한 과정으로 간주한다. 이 배치는 비선형적이며 비친족적(nonfiliative) 관계 체계이다.
(2)[역주] Uexküll, Jakob von & Kriszat, Georg, Streifzüge durch die Umwelten von Tieren und Menschen: Ein Bilderbuch unsichtbarer Welten. Bedeutungslehre, Hamburg: Rowohlt(1956), p. 27.
생물학과는 거리를 두면서, ‘탈영토화’라는 개념은 정신분석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1966년 초에 가타리 는 ‘탈영토화’를 정신분석적 개념으로 그의 책인 『정신분석과 횡단성』 에서 사용했다. 그것은 프랑스 정신 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이 사용한 개념이며, 그는 가타리에게 영향을 주었다. 라캉에게 ‘영토화’는 유아의 신 체가 성감대에 의해 결정되고 그 주위에서 조직화되는 방식을 지칭하며, 부분-대상을 형성하는 연결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조직화 과정은 리비도 투자들 중 하나다. 유아가 영토화 과정을 수행할 때, 유아의 구 멍들과 기관들은 상호배열된다. 정신분석적 의미에서, 탈영토화한다는 것은 리비도 투자로부터 욕망을 자 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 욕망의 해방은 욕망을 오이디푸스적 투자(결여-욕망)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라캉적인 ‘영토화’에 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재규정의 결론은 주체가 새로운 조직화에 노 출된다는 것이다. 그 내적 원리는 탈영토화가 주체를 흩어버린다는 것이다.
생물생태학과 정신분석학의 선행자들이 사용하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 개념에 덧붙여,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 개념들을 정치적 활용에가지 넓힌다. 맑스로부터 배운 대로, 그들은 노동력이 생산수단으로부터 자 유로워지는 순간 탈영토화된다고 주장한다. 그 자기동일적 노동력은, 그것이 다른 생산수단과 연결될때, 재영토화되는 것으로 기술할 수 있다. 유젠 홀란드(Eugene Holland)는, 영국의 엔클로저 운동이 양떼들을 먹이기 위해 공유지를 분할할 때, 농부들은 그들의 노동력이 다른 생산 수단으로 재영토화 되도록하기 위 해 생산의 한 수단들로부터 파괴된다(또는 ‘자유로워진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그들이 직물공장의 노동 자가 되었을 때가 그러하다(H 1999: 19-20). 산업화 초기 과정 동안, 자본주의가 정말로 괄목할 만한 기 념비가 되었을 때, 탈영토화의 체계는 전반적으로 흘러간다. 시장들은 확장하고, 사회적 행동들은 급진적 변화들을 추동하며, 인구는 교외에서 도회지 환경으로 이동했다. 어떤 의미에서 도시 노동력은 탈영토화되 었다(농부와 토지소유자). 하지만 다른 의미로 그것은 재영토화된 것이다(공장 노동자와 산업자본가). 자본 주의에 대해 논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코드의 탈영토화된 흐름들은 자본주의의 공리계 속으로 재영토 화되며, 자본주의적 사회 기계를 구성하는 두 가지 과정들 사이에 이러한 연결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 Adrian Parr, ‘Deterritorialisation/Reterritorialisation’, ed., Adrian Parr, Deleuze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66-69
║자본주의
그의 죽음 직전 시기에, 들뢰즈는 어떤 인터뷰에서 『맑스의 위대함』 이라고 부를 어떤 저작을 쓰고 싶다 고 밝혔다. 이 사실은 칼 맑스의 철학에 대한 들뢰즈의 긍정적 태도를 명확하게 가리킨다. 맑스 사상의 많 은 요소들을 변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그러한 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분명 이러한 요소들 중 가 장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에 관한 것이다. 들뢰즈의 맑시즘은 그의 주장, 즉 모든 정치적 사유는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자본주의적 맥락으로부터 그것의 내용물들을 취해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주장으로부터 나 오는 것이다. 여러 맥락에서 그가 자본주의에 대해 언급하지만, 이 주제에 대한 가장 일관되고 급진적인 주장을 담은 책은 두 권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어떤 주어진 사회구성체가 운동이나 흐름들을 제한하거나 구조화한다고 주장한다. 그 들은 이러한 흐름들이 단순히 돈이나 상품과 같은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며, 여러 다양한 수준에서 보여진 다고 본다. 민중의 운동 그리고 한 도시의 교통의 흐름, 하나의 언어 안에 결속된 단어들의 흐름, 식물들 의 세대들 간에 이루어지는 유전코드의 흐름, 그리고 심지어 물질 그 자체의 흐름(대양의 운동, 금속 안에 서 움직이는 전자들 등등)이 그것들이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적 사유는 다음과 같은 전제에 기 반한다. 즉 자연 그 자체, 실존 전체는 동시적인 물질의 흐름이며, 어떤 사회체는 존속하기 위해 이러한 흐름들을 구조화해야만 한다. 모든 국가와 전국가 사회체들(이 모든 것들은 맑스에 따르면 전자본주의적인 것인데)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견해에 의하면, 그와 같은 흐름들의 제한과 구속을 그들의 기초 원리로 가진 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헌 제한 또는 구조화의 과정을 ‘코드화’(coding)라고 부른다. 그들은 제한적이면 서도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사회체들은 코드화의 체제로서, 다른 보다 유연한 방식을 피하면서 어떤 고정된 존재 방식(살기와 말하기, 일하기, 관계 맺기에 있어서)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몇몇 구조 없이, 이를테면 우리 자신의 고착된 개체성과 행위주체 없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각각의 사회구성체와 언제나 억압적인 체제를 특성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주어진 코드화된 체제에 도전 하고 그것을 바꾸기를 시도하는 어떤 기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앙띠외디푸스』 와 『천의 고원』 둘 모 두는 다른 종류의 사회체에 대한 긴 분석을 포함하고 있으며, 코드를 흐르게 하는 방법도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사회의 본성에 대한 기초적이고 중심적인 이해를 근원적으로 배제한다. 들뢰즈와 가 타리에 따르면 자본주의에 관해 네 가지 이러한 예외적인 형상이 존재한다. 첫째 흐름을 코드화함으로써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는 탈코드화의 체제이다. 둘째로 이와 관련하여, 재코드화는 비자본주의적 사회체들을 재포획하기 위해 흐름을 탈코드화할 것이고, 이는 공리계의 과정에 의해 대체된다. 예를 들면 결혼을 통한 성적 관계들의 코드화, 교회, 도덕 그리고 팝 뮤직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상이한 사회체들 안에서 특정한 맥락에서 성의 실행을 위치지우며, 결혼, 매춘 또는 젊은이들의 문화를 결정한다. 이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체들 안에서 탈코드화되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좋은 것, 새로운 종류의 관계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코드화하는 체제에 의해 배제된 것을 의문에 부치는 과정이다. 하지 만 자본주의에서는 상호관계적 공리화는 성을 하나의 생산물(맑스와 가 ‘상품’이라고 불렀던 것)로 저렴하 게 만들어 버린다. 요컨대 공리들은 작동한다. 그것은 코드화된 맥락 안에 특정한 의미의 흐름을 비워냄으 로써(결혼행위로서의 성, 가족 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식사 등등) 그리고 어떤 일반적이고 균등한 법칙을 금 전적 가치의 형태 안에 부여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러한 흐름들은 그것들이 경제의 유동적 부분들로 존 재하는 한에서 탈코드화되어 남겨진다. 상품으로서 이것들은 가치를 가지는 어떤 일의 상태(state of affairs, 사태)에 묶여 있을 수 없다. 어떤 생산물로서의 음식은 가족이나 종족 이외의 맥락에서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들뢰즈과 가타리가 맑스에 기대어 묘사한 자본주의의 세 번째 중요성은 이러한 탈코드화/공리화의 과정이 실재적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모든 한계들이 코드화되어 주어질 때, 이 운동은 효 과적으로 그리고 게걸스럽게 그와 같은 모든 한계들을 제거한다.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혁신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은 중요하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코드화된 흐름들은 지속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상품으 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금전적 균형의 영역을 확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과정은 결코 총체화될 수 없다. 따라서 네 번째로, 자본주의 사회가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사회구성체의 코드화된 요소들은 전반적으로 부재한다는 것을 의 미한다. 이것이 바로 국가 사회의 특정한 선분들이 자본주의에 봉사하면서 일을 진행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다. 분명하게도 정부와 가족과 같은 구조들은 여전히 자본주의 안에 실존한다. 그들이 지적한 바에 따르 면, 완전히 탈코드화된 사회란 하나의 모순어법으로서, 그런 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 정부들과 군주들은 남는다. 그들의 실재적인 사법 권력이 본질적으로 축소된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이것은 탈코드화/공리화의 성장을 균형 잡는 규제적 메커니즘 때문이다. 핵가족은 특히 코드화된 실체로서, 우리가 상상하기를, 이것 은 자본주의의 탈코드화/공리화 운동에 의해 해체된다고 본다.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국가 사회의 어떤 놀라운 축소판이며, 여기서 아버지는 독재자 그리고 모든 것을 주관하는 감독관의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점들 중 어떤 것도, 자본주의의 해방적 효과에 기여하지 못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 본주의에 의해 가동되는 금전적 균등화의 세계에서 획득불가능한 진정한 자유를 고려하는 한, 맑시스트로 남는다. 흐름들을 해방할 수 있고 새로운 존재 방식들을 가능하게 할 탈코드화를 흉내내는 동안,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차이, 보다 은밀하게, 어떤 종류의 부자유만을 생산하게 된다.
- Jonathan Roffe, ‘CAPITALISM’,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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