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가속주의'
가속(Acceleration)
데이비드 로자스(David Rojas)
현재 우리는 가속하고 있다. 때문에 과학자들은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기가 마찬가지로 위대한 가속(the Great Acceleration)의 시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Steffen et al. 2004; Waters et al. 2016). 20세기 중반 이래, 그들은 인간이 주도한 생태적 파괴가 지구행성의 지리적 기록에 어떤 분명한 흔적을 남겨 왔다고 주장한다. 즉 산업적인 생산기반들이, 지구의 빈곤한 지역들을 포함하여, 행성을 가로질러 극적으로 확장되어 왔다는 것이다(McNeill and Engelke 2016).
인류세를 가속으로 규정하는 것은 예전의 관념들과도 이어져 있다. 상승하는 변화속도로서의 대량 생산 산업화가 그것이다. 예컨대 이탈리아 미래주의 예술 운동의 구성원들은 1909년의 유명한 선언에서, 산업이 “편재하는 속도”(omnipresent speed)를 창조해 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한 기술을 숭배했다(Marinetti 2006 [1909]: 14). 이와 비슷한 주장들이 소련의 요세프 스탈린(Joseph Stalin)과 브라질의 주셀리누 쿠비체크(Juscelino Kubitschek, 1956년 ~ 1961년 브라질 대통령-역자)와 같은 하이-모던(high-modern) 정치가들로부터 나왔다. 스탈린은 1931년에 “우리는 선진국들에 비해 50년 또는 100년 뒤떨어져 있다. 우리는 오는 10년 안에 이 거리를 따라잡아야 한다”라고 역설했다(Buck-Morss 2000: 38). 쿠비체크는 1955년에 “5년짜리 정부가 50년의 발전을 이룰 것이다”라고 약속했다(Holston 1989: 84). 폴 비릴리오(Paul Virilio, 2006)에 따르면, 그와 같은 요청들은 질주정치학(dromopolitics)의 대상이다. 질주정치학은 속도의 정치학이며, 이에 따라 도시들, 고속도로들, 그리고 공업단지들이 대중들의 운동을 채찍질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이들 대중은 동력학적 제국들을 앞으로 밀어붙일 것이다. 속도는 꿈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도구들이었다. 이 꿈의 세계는 유토피아적 미래로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산업적 파국들을 정당화한다(Buck-Morss 2000).
놀랍게도, 이와 같은 제안들의 신봉자들은 파괴와 죽음을 조장할때 조차도 불손하고, 희희낙락한 어투를 취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2007, 242)이 주장한 바에 의하면, 그러한 정치적 스타일은 단순한 수사(rhetoric) 이상으로서, 국가 지도자들과 정치 그룹들이 그들의 청중들에게 자기-파괴를 마치 “최상의 미학적[감각적] 쾌락”으로 경험하게 선동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과학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가속을 지구행성의 지리적 생성을 형성했던 산업화의 객관적 성취로 표현하면서, 그것이 어떤 환각도 아니라고 제안하지 않는가?
문제는, 가속의 관념이 여전히 현대의 정치적 대화에서 전면적으로 주어짐으로써, 특별하게 [성장을 위한] 압박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아마존 유역(이 지역은 세계적인 농공 산업 발전소가 되어가고 있다)의 남쪽 끝의 브라질 농공 산업단지에서 농부들, 과학자들과 나눈 토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농장일을 하는 동안, 나는 농부들이 새로운 농공기술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매진함으로써, 그들의 작업을 늘이고 산업적 농업 자체에 의해 발생하는 기후변화와 생산성과 연관된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다음으로 환경 과학자들은 정책이 고안된 후에는 그 농업사업의 흥성을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비약적 발전의 방향을 조절하기 위해 재빨리 그 정책을 발전시켰다.
아마존에서 내가 완고하게 보수적인 지주들에서부터 진보적인 환경 과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성장 감소나 감퇴의 가능성을 제기했을 때, 대부분의 대화 상대자들은 분명히 당황해 했다. 차분하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자주 회의적인 질문들로 과격해졌다. 브라질은 빠른 속도로 부유해지길 요구함으로써 오랫동안 국가의 경제적 자립을 침식해 왔던 세계 권력들과 환경 기구들에 저항하지 않을까? 또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다른 쪽 끝에서부터 자본주의의 파괴행위를 제압하고, 기아를 줄이며, 또는 기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공공정책들이 변화의 계기들을 증가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대체적으로 유사한 질문들이 오늘날 벤자민 노이스(Benjamin Noys, 2010, 2014)가 가속주의자(accelerationists)라고 부르는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노이스(2010, 5)에 따르면 가속주의자들은 “만약 자본주의가 그 자신이 해체의 힘을 발생시킨다면, 그때 자본주의 자체를 급진화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더 나쁘게 할수록 더 좋아진다”고 주장한다. 가속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자본주의에 대한 유일한 급진적인 응답은 저항도, 붕괴나 비판도 아니고, 그 자체의 모순들에 의해 소멸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라, 그것의 절멸과정, 소외과정, 탈코드화와 추상적 경향들을 가속하는 것이다” (McKay and Avanessian 2014, 4). 가속주의자들은 속도-애정자들(speed-lovers) 가운데에서 오래된 전통을 살아 남도록 유지한다. 그것은 어떤 불경스러움의 쓰임, 계획적인 자기-희생을 기술하는 희희낙락한 음조가 그것이다.
하지만 많은 유사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가속에 대한 생각들(농공 지역 아마존 유역에 있는 몇몇 사람들의 논증에서 보이는 그러한 함의들을 포함하여)은 속도에 관한 하이-모던한 정치와 다르다. 최근의 가속에 관한 아젠다들은 충만한 꿈의 세상을 야기할 것이라는 어떤 희생제의로서 산업적인 파괴들을 특성화하지 않는다. 데보라 다노프스키와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Deborah Danowski and Eduardo Viveiros de Castro, 2017, 55)가 제안한 바에 의하면, 오늘날 가속의 주제는 더 이상 “생산적 힘들의 가속을 해방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자본주의 시스템과 지구 시스템 사이의 물리적 상호작용에 의해 풀려난 파괴력들의 성장하는 계기들에 속하지 않는 가속을 해방하는 것”이다. ‘좋은’ 미래를 가동하기 위해 산업적 파괴를 (과잉)가치화하기 보다, 가속주의자들은 파국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틀짓는다.
가속주의자들의 전망에서, 우리는 가속이 좋은 것도 악한 것도 아니라는 가치 판단을 앞서 가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앖다. 그들에게 그것은 단순히 우리 삶의 산업 양태들을 지탱하는 뒤얽힌 전선들, 길들 그리고 파이프라인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현실이다(Shaviro 2015). 아마존 유역에서, 유사한 생각들은, 그 유역의 생태적 동력 안으로 농공산업의 확산을 강화하는 정책에 각인된다. 즉 농업 산업이 확산되는 것을 피하는 것은 선택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환경주의 정치학은 이런 맥락에서 좋은 미래를 건설하려는 유토피아적 대상화를 회피하고, 대신에 절박한 위기들의 특정 측면들에 제한하여 집중하여야 한다(Rojas 2015, 2016을 보라).
아마도 가속에 관한 이런 보다 암울한 현대적 관념들은 어떤 새로운 정치적 실체의 탄생을 암시할 것이다. 즉 위대한 가속이 아니라 가속의 거대함[가속왕](not the Great Acceleration but Acceleration the Great). 어떤 매혹적으로 파괴적인, 발산적 존재로서 가속의 거대함[가속왕]은 엔진들, 서버들 그리고 전산망에 기초한 사회생태적 체계의 붕괴를 약속한다. 그리고 생명의 새로운 형태들이 자본주의의 폐허로부터 출현하리라고 희망한다.
이 존재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는 아마존 유역의 농부에게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내가 그에게 농공복합체가 그의 마을에서 가동되어 확장되는 것에 대해 물었을 때, 웃으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사람들은 어째서 그토로 많은 문제들을 바라는 거지요? 언제나 더 많이, 더 많이, 더 많이인 겁니까?” 그 자신의 가난에 대해 깊이 사려하고, 그의 생계가 산업적 체계에 막대하게 의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산업적 화장에 자기-희생적 행동을 하기를 거부했다. 좋은 삶이 정치적 목표인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Villalba 2013), 그는 이웃들과 손님들, 식물들, 동물들 그리고 그의 땅에 있는 흙을 돌보면서 관대한 삶의 자세를 일궈나갔다. 이 삶의 긍정, 즐거움, 속도 감소로의 전환은 점점 더 대량 산업의 동력학, 즉 가속왕의 살고 피를 침식할 힘을 가질 것이다.
<참고문헌>
Benjamin, Walter. 2007.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In Illuminations, edited by Hannah Arendt, 217–51. New York: Schocken. Originally published in 1939.
Buck-Morss, Susan. 2000. Dreamworld and Catastrophe: The Passing of Mass Utopia in East and West. Cambridge: MIT Press.
Danowski, Déborah, and Eduardo Viveiros de Castro. 2017. The Ends of the World. Cambridge: Polity Press.
Holston, James. 1989. The Modernist City: An Anthropological Critique of Brasília.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Mackay, Robin, and Armen Avanessian. 2014. “Introduction.” In #Accelerate: The Accelerationist Reader, edited by Robin Mackway and Armen Avanaessian, 1–47. Falmouth: Urbanomic.
McNeill, J.R., and Peter Engelke. 2016. The Great Acceleration: An Environmental History of the Anthropocene since 1945.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Marinetti, Filippo Tommaso. 2006. Critical Writings: New Edition.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Noys, Benjamin. 2010. The Persistence of the Negative: A Critique of Contemporary Continental Theory.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 2014. Malign Velocities: Accelerationism and Capitalism. Alresford: Zero Books.
Rojas, David. 2015. “Environmental Management and OpenAirExperiments in Brazilian Amazonia.” Geoforum 66: 136–45. https://doi.org/10.1016/j.geoforum.2014.12.012.
———. 2016. “Climate Politics in the Anthropocene and Environmentalism Beyond Nature and Culture in Brazilian Amazonia.” PoLAR 39, no. 1: 16–32. https://doi.org/10.1111/plar.12128.
- Anthropocene Unseen: a lexicon, (Eds.) Cymene Howe & Anand Pandian(punctum books, 2020), pp. 25-9.
가속주의(Acceleratinism)
가속주의는 정치적 이단이다. 가속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해 가능한 유일하고 근본적인 정치적 응답이다. 그러한 응답은 자체 모순을 품고 있는 자본주의의 손아귀 안에서 저항하거나, 그것을 방해하거나, 또는 비평하지 않으며, 그것의 종말을 넋 놓고 기다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속주의는 자본주의의 전복, 소외, 탈코드화, 추상적 경향성을 가속하려고 한다. 이 개념은 정치 이론 안에 어떤 특정한 허무주의적 동맹을 도입한다. 그것은 철학적 사유와 자본주의 문화 혹은 반문화의 과잉 상태와의 동맹이다. 또한 이 개념은 이러한 자본주의에서의 소외 과정의 내재성을 추구하는 글쓰기 안에 구체화된다. 가속주의는 체제에 대한 전복과 묵인 사이, 현실주의적 분석과 시적 격정 사이에서 요동치는 불안정한 지위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위가 가속주의를 치열하고도 경쟁적인 이론적 상태로 만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가속주의적 사유의 기초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놓여 있다. 즉 범죄, 모순, 그리고 자본주의의 부조리함은 그것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진보적인 태도와는 대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속주의는 관료주의의 사슬을 깨고 끊임없이 분기하는 실천적 가능성들의 범위 안에서 현대성의 특성들을 선도하는 해방의 동력학의 편에서 길을 모색한다. 대개 가속주의적 사유가 집중하는 것은 이러한 변형의 역능들과 오늘날 지구행성의 사회를 틀지우는 교환가치의 공리, 자본 축적 사이의 있을 법한 내적 연결의 탐색이다.
- #Accelerate#-the Accelerationist Reader, (eds.)Robin Mackay, Armen Avanessian(URBANOMIC MEDIA LTD, 2014), p. 4.
가속주의자들은 잠재적인 생산력들을 해방하기를 바란다. 이 해방의 기획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물질적 플랫폼은 파괴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공동 목적으로 재정향 되어야 한다. 현존하는 하부구조는 분쇄되어야 할 자본주의 무대가 아니라, 탈자본주의를 향해 도약할 지지대다.
(...)
우리는 기술적 진화의 과정을 가속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지하는 것은 기술유토피아주의가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데 기술이 충분할 것이라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그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 정치적 행동이 없다면 결코 충분하지 않다. 기술과 사회적인 것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둘 중 한쪽의 변화는 다른 쪽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거나 강화한다. 기술유토피아주의자들은 가속화가 자동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극복할 것이라는 점에 근거를 두고 가속화를 지지하는 논변을 펼치는 반면, 우리 입장은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적 갈등을 쟁취하기 위해 기술이 필요해지기 때문에 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좌파는 이념과 물질적 플랫폼의 영역 둘 다에서 사회기술적 헤게모니를 발전시켜야 한다. 플랫폼들은 전 지구적 사회의 하부구조다. 그것들은 행동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가능한 것들의 기본적인 매개변수들을 확립한다. 이런 의미에서, 플랫폼들은 사회체에서 물질적으로 선험적인 것들을 구현한 것이다. 그것들은 특수한 행위, 관계, 그리고 권력들의 집합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현재 전 지구적 플랫폼의 대부분이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향해 편향되어 있지만, 이것은 불가피한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물질적인 생산, 금융, 수송, 그리고 소비의 플랫폼들은 탈자본주의적 목적을 지향하도록 재계획되고 재구성될 수 있고 그렇게 될 것이다.
- #Accelerate#-the Accelerationist Reader, (eds.)Robin Mackay, Armen Avanessian (URBANOMIC MEDIA LTD, 2014, pp. 347-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