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from 들뢰즈 사전들)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플라톤이 범주적 구분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자격 있는 것과 자격 없는 것,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하는 것, 다시 말해 ‘선별’(selection)에 관심이 많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방법이 다소 역설적이라고 언급하는데, 왜냐하면 물질적 세계 안에서 이데아의 진정한 모델에 맞아 떨어질 만한 것이 이런 방법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도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나오는 결론은 그저 그럭저럭 자격있는 것이 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니체의 영감을 따른다면, 플라톤주의를 ‘뒤집거나 전복하는’ 요소가 된다. 들뢰즈는 우선 선별과 구별(distinction)이 철학의 일차적 과제를 생각하게 만든다고 보며, 또한 플라톤적인 이데아들은 선별 과정을 통해 초월적인 것 자체가 아니라 대상들 자체의 어떤 부분이 됨으로써, 그것들이 ‘기호들’(signs)로 파악될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다(DR 76, 63). 그래서 들뢰즈에게서 플라톤주의의 전복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함축한다. 다시 말해 이렇게 기호화된 이데아들은 추상적이고, 고정적이며,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의 모델이 아니고, ‘묻기’(questioning)와 ‘문제제기하기’(problematizing)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구조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물질적 세계에 놓여 있는 현상의 위상은 한층 높아진다. 즉 현상들은 정확히 ‘묻기’를 허용하거나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정립되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세계 안의 사물 또는 사태는 모델이나 이데아들과 ‘유사’하지 않고, 그것들의 역동적 관계들의 범위 안에 은폐된 어떤 차이를 표현하는 한에서 다른 것들과 겉보기로만 유사하다. 아마도 이것이 들뢰즈가 ‘플라톤주의 안에서 으르렁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라고 언급했던 지점일 것이다(DR 71, 59). 만약 되기나 ‘변화’가 예측불가능한 것으로서, 세계의 유일한 ‘진리’라면, 그때 ‘선별된’ 체계는 현상 등등과 같은 ‘물질적’ 세계에 속한 것들을 긍정하는 바일 것이다. 이 체계는 특히 그것들이 서로 ‘유사’하고 스스로 유사함인 한에서 차이와 되기(생성, becoming)의 표현일 것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니체에 대해 기술하면서 영원회귀의 검사(test)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 Eugene B. Young, Gary Genosko, Janell Watson, The Deleuze & Guattari Dictionary, Bloomsbury, 2013, 242-243.
플라톤의 철학은 근대 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임마누엘 칸트가 말한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어떤 뒤집어진 플라톤주의로 기획되었다. 즉 칸트에게서는 관념들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감각적 형식들에 대한 어떤 궁극적인 의식성에 의존하는데, 이는 가지적인 것(the intelligible)과 감각적인 것(the sensible) 사이의 플라톤적인 위계를 역전시킨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칸트의 비판철학이 그와 같은 역전을 이행하는 중에 도덕적 관념의 우선성을 내세웠다는 저에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니체는 미래의 철학의 임무가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고 정의내렸다.
이때 전복은 실재적인 것(the real)과 현상적인 세게들의 구별이 파괴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니체를 따라 이러한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는 과제를 이행할 뿐 아니라, ‘추상적인’ 니체의 공식을 플라톤주의의 동기를 캐물음으로써 정련시킨다. 이러한 동기에 대한 분석에서 그는 니체의 ‘외재적’ 비판과는 달리 플라톤주의 전복을 위한 조건을 플라톤 안에서 발견한다. 이러한 이유로 들뢰즈의 플라톤주의 전복은 또한 칸트의 사상 안에서 계승되고 있는 플라톤주의의 이원론적 존재론에 대한 비판에도 더 적합하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동기는 적통(lineages)을 선별하고 선택하며 지원자를 가려내려는 의지에서 찾아내야 한다(D 1990(1): 253-4). 플라톤에게서 이데아를 모델들과 사본들로부터 구별하는 위계는 인식의 하강과정을 기술하는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감각적 세계는 이데아의 권역에 대한 ‘사본’으로서 형태를 갖추고, 그로부터 도출되어지는 것이다. ‘사본들’, 즉 감각적 세계를 구성하는 이것은 이데아로부터 단순한 감각적인 ‘현상’ 세계로의 어떤 등급 하락을 표시한다. 예술에서 이러한 사본들의 사본 만들기는 존재론과 인식론에 있어서 어떤 더 심각한 전락을 드러내는 것이다. 『국가-정체』에서 예술의 모방 메커니즘은 ‘사본의 사본’으로서의 예술과 그러한 자신의 위상을 감추는 비극 예술들에 대한 플라톤의 공포를 야기하는 것이다. ‘침대’의 이데아는 감각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 어떤 모델이며 어떠한 침대(사람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구조로서의 침대)를 위한 필수적 조건들인 그러한 특성들만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이데아의 감각적인 ‘사본’은 필연적으로 그것을 어떤 높이와 색깔로 만듦으로써 형상 위에 특정한 한계를 부여한다. 하지만 이 침대의 사본을 그리는 화가는 그것의 쓰임새(개별적인 놓임새에서의 개별적 색깔, 개별적 높이)에서 비본질적인 그러한 침대에 대한 모든 것들을 복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의 기능(사람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구조)과 관련되는 침대의 그러한 특성들 중 어떤 것들은 복사하지 못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대상의 단순한 외양의 복사에 불과한 회화의 한계는 예술가가 대상들, 즉 그것의 내적 메커니즘 중 어떤 것은 베제되는 그러한 사물들을 생산한다는 점이다. 대상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이러한 실재(use)와 지식의 전락은 예술을 헛되지만 해롭지 않는 활동으로 만든다. 하지만 비극 시가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시을 조장할 수 있는 광경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비극 시가의 관객은 정치가나 철학자의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가 그러한 역할로 ‘존재하는’ 공연의 세계 안으로 끌려들어가 버린다. 플라톤은 하나의 사본으로서 그와 같은 비극 시가의 위장술은 국가에 합당한 질서를 위험에 빠트린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이 시민들의 영혼 안에 참된 사본과 거짓된 사본의 구별에 대한 무시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해롭지 않는 사본과 해악을 끼치는 사본 간의 구별은 그 자체로 어떤 모델이 되지만 들뢰즈에게는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는 기획의 핵심이 된다.
(1)Deleuze, Gilles(1990),The Logic of Sense, trans. Mark Lester with Charles Stivale, ed. Constantin V. Bounda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 Jonathan Roffe, ‘PLATO’, ed., Adrian Parr, Deleuze Dictionar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3, 208-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