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변하는 현대철학 용어사전

사변적 실재론 / 상관주의

Nomadia 2020. 1. 28. 08:12

1. 사변적 실재론/ 2. 상관주의

1. #사변적_실재론(#Speculative_Realism)
“사변적 실재론자는 #상관주의(#correlationalism) 너머로 가기를 또는 그것을 끝내기를 바란다.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다기화하는 이성을 위해, 그들은 인간이 경험하는 것과 독립적으로 실재를 이론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실재론’이란 (적어도) 인간적 경험 세계 너머의 실재의 존재에 대한 어떤 투여를 의미한다. 형용사인 ‘사변적’이라는 말은 사유로서의(qua thought) 사유가 이러한 실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암시적 의미이다.

 

사변적 실재론자는 물론 자연과학이나 수학이 우리에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재에 접근하게 한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 [사유에서] 이념적인 것은 과학적 또는 수학적 자료에 기초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사유 그 자체에 기반한다. (...)

 

이러한 [메이야수, 브래시어, 하만]입장들은 매우 상이한 의견을 가지며, 그래서 누가(그리고 무엇이) 사변적 실재론에 속하는지(또는 속하지 않는지) 결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몇몇 부가적인 요인들이 있게 된다. 예컨대 브래시어는 스스로 그 명칭을 떼어낼려고 애를 써왔다. 메이야수는 실재로 그의 입장을 ‘사변적 유물론’(speculative materialism)이라고 언급하면서, 이 입장도 마찬가지로 상관주의적 순환을 돌파하려고 하는 두 번째 사상가들에 속한다고 본다.

 

메이야수에 더해, 이 신유물론자들(new materialists)에는 마누엘 데란다 그리고 카렌 바라드와 같은 사상가들이 포함된다. 나아가 지난 10여 년간 여러 다른 사상가들이 이 둘 모두나 하나의 그룹에 포함되어 왔다(여러가지 이유로, 여러 번, 어떤 경우에 몇몇은 아마도 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등등), 한계를 두지 않고 말해 본다면, 레비 브리안트(Levy Bryant), 트리스탕 가르시아, 브루노 라투르, 마르쿠스 가브리엘, 마우리찌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제인 베네트(Jane Bennett)와 엘리자베스 그로스까지 포함된다. (...)

 

이들 각각은 사유가 직접적 경험을 넘어 존재하는 실재에 대해 의미 있는 진술들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수용한다는 그러한 최소한의(minimal) 의미에서 사변적 실재론자들이다. 이들은 아주 오랜 상관주의의 밤을 지나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포함하는 몇몇 방식과 새로운 형태의 형이상학을 건설하는 중에 있다. (...) 들뢰즈는 이들 사변적 실재론자들 사이에 자리매김할 수 있다. (...) 그의 기계 존재론은 실체들이 ‘우리를 위해’가 아니라, 그 자신의 자격으로(qua themselves) 기계라는 의미에서 명백하게 실재론이다.

 

또한 들뢰즈는 이러한 기계들의 존재론적 구조가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외재성 테제로부터 전진적으로 연역된다는 의미에서 사변적이다. (...) 사변적 실재론자들을 범주화하는 흥미로운 방법은 그들의 철학이 ‘객체-지향적’인지 아닌지 묻는 것이다. 이 경우는 개별 실체들이 가장 기초적인 실재의 구성물이라는 것에 대한 수용여부이다.

 

이를테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역자]의 철학은 분명 객체-지향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개별 실체들이 보다 기초적인 생산적이고 역동적인 힘의 표현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만의 존재론은, 그가 객체들 너머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므로, 객체-지향적 존재론의 모범적인 사례이다.

 

게다가 [하만에게] 실체들이 다른 실체들과 조우하는 방식 너머에 놓여 있는 ‘보다 심오한’ 실재란 단순히 객체들 자신들의 어떤 형상일 뿐이다. (...) [여기에는] 브루노 라투르, 마우리찌오 페라리스, 트리스탕 가르시아, 마르쿠스 가브리엘, 마누엘 데란다 그리고 레비 브리안트가 속한다.”

- Arjen Kleinherenbrink, Against Continuity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9), pp. 9~12

 

2. #상관주의(#correlationalism): “나는 상관주의를 일반적으로 반절대주의 이론으로 정의합니다. 어떤 이는 상관적 ‘주체-객체’(넓게 정의하여)라는 말을 우리가 그 자체의 어떤 양태에 접근할 만한 것을 강화하기 위한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의 기제로 사용합니다. 그 대신에 상관주의에 대해 우리는 그 자체적인 어떤 형상을 부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에-대한-관계에 있어서 비가역적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지요. 여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실재성이 그 자체로 주어진 실재성에 상응하는지 아닌지를 증명할 어떤 수단도 존재하지 않지요. 그것에 연결된 우리 주체성은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나는 거기에 두 가지 상관주의의 주요 형태가 있다고 봅니다. 약한 것과 강한 것이 그것이지요(이 차이에 대한 언급이 실린 2장, 42쪽[1]과 그것을 설명하는 48쪽 이하[2]를 보십시오).

 

약한 상관주의는 칸트의 초월론 철학과 일치합니다. 즉 그것은 여전히 사유의 사변적 주장(예컨대 절대적인 것)을 너무 많이 차용합니다. 사실상 칸트는 우리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사유가능하다고(비-모순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강한’ 상관주의는 심지어 우리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사유될 수 있다는 것도 수용하지 않지요.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 사유에 근본적인 제한을 가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그 자체의 것을 알 가능성이 없으며, 심지어 그것의 정립 단계와 논리성조차 파악할 수 없지요.”
- ‘Interview with Quentin Meillassoux’, in: Rick Dolphijn & Iris van der Tuin,New Materialism: Interviews & Cartographies, Open Humanities Press, 2012, p. 72

 

[1] “사실상 사람들이 채택한 상관주의 모델을 따르는 (적어도) 두 가지 가능한 논박이 존재한다. 실제로 우리는 상관주의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약한’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칸트의 모델과 명확한 방식으로 항상 주제화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오늘날 우세한 것처럼 보이는 ‘강한’ 모델이 그것이다”- 퀭텡 메이아수 지음, 정지은 옮김, 『유한성 이후』, 비, 2010, 47.

 

[2] “우리는 칸트의 초월철학이 ‘약한’ 상관주의와 일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째서 그런가? 사유가 절대자와 맺는 모든 관계를 비판철학이 금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그와 반대로 상관주의의 강한 모델을 우리가 즉자적인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이 비합법적이 아니라 어쨌든 그것을 사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동등하게 비합법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Ibid., 55-56)